“정부는 고문조작사건 피해자들과 사법농단 피해자들에 대해 완전한 명예회복과 정의로운 배상을 즉각 시행하라.”
고문조작 국가범죄 피해자들을 비롯한 인권단체들은 25일 김근태기념치유센터와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 주최로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유엔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 고문피해자 결의대회’ 결의문을 통해 “대한민국은 이미 인혁당과 같은, 많은 고문조작사건 피해자들에게 죽음보다 깊은 상처를 가한 바 있다”며 이렇게 요구했다.
이들은 또 “정부는 고문가해자의 훈포상을 즉각 취소하고, 양승태 전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농단의 주범들을 적극 수사하고 처벌하라”며 “국회가 중단된 과거사의 진실규명을 위해 ‘진화위법’을 즉각 개정하고 고문 방지와 고문피해자 지원법안을 즉시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함세웅 신부(김근태기념치유센터 공동대표)는 여는 말에서 “매년 6월26일은 유엔이 정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로 이 땅의 수많은 고문피해자들을 기억하고 이들의 희생에 존경을 표하는 날”이라며 “그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함 신부는 “촛불혁명 이후 우리 사회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며 “이제는 독재와 분단으로 인한 고문과 같은 가혹한 폭력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인권 평화 국가를 만들어가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한 첫걸음으로 국가는 고문피해자들의 삶의 회복을 위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재근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 대표의원은 인사말에서 “적폐를 청산하고 상식이 통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촛불혁명에서 정권교체, 이번 지방선거까지 이어지는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라며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는 그날까지 국가와 사회, 우리 모두가 노력하는 것, 폭력의 역사를 뼈아프게 기억하고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힘을 모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의이자 적폐의 청산”이라고 밝혔다.
인 의원은 또 “고문의 끝을 꿈꾼다”며 “진정한 ‘고문의 끝’은 ‘고문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문의 상처가 없는 세상’이다. 고문의 상처가 모두 치유되는 그날을 위해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전영순 인혁당사건 피해자 가족은 고문피해자 증언에서 “지금도 눈물이 마르지 않고 고통은 끝나지 않고 있다”며 “인혁당재건위사건 국가배상 판결을 담당했던 대법관 4인 신영철 차한성 안대희 박시환을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부역한 불의한 재판관으로 고발한다”고 말했다.
증언자는 “인혁당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은 1심 판결 결과로 35년치의 피해배상금을 전액이 아닌 65퍼센트를 가지급받았다”며 “그러나 이 사건을 맡았던 대법관 4인은 하급심으로 파기환송하지 않고 피해기간 30년을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기산점을 변경해 판결하며 주었던 배상금을 다시 빼앗아 갔다”고 규탄했다.
증언자는 또 “사법 판례에 유례없는 오점을 남긴 판결이 아닐 수 없다. 빨갱이 자식으로 35년을 고통받았는데 30년 고통을 이유 없이 피해기간에서 빼버린 것”이라며 “동일사건 사형수 피해자 8명에 대해서는 피해발생시점을 기산일로 100퍼센트 전액 배상한 것과 달리 장기 수감수 가족에게만 기산일을 변경해 형평성 없이 판결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양기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는 대법원의 적폐와 관련해 “국가배상금의 이자 산정 기산일의 경우, 다른 일반 사건에는 피해가 일어난 시점을 적용하고 있지만 과거사 재심 사건에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자 차별”이라며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 침해”라고 밝혔다.
증언자는 “대법원은 2011년 1월 박시환 신영철 안대희 차한성 대법관들이 판결한 사건들을 재심의하여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며 “어떠한 연유로 느닷없이 형식과 절차를 무시한 채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판결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결의대회에 참가한 5공아람회사건반국가단체고문조작국가범죄청산연대는 자료집에 수록된 ‘아람회사건 국가범죄 청산을 짓밟은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법농단’ 제하의 글에서 “아람회사건은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을 탄압한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법농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며 “박근혜 정권은 2015년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 김지하 사건은 서울고법 국가배상 판결을 확정 처리하고 문재인 대통령 후보 지지선언을 한 아람회사건 피해자들의 서울고법 국가배상 판결은 대법원에서 짓밟았다”고 밝혔다.
이들은 “서울고법이 인정한 아람회사건 일실수입 국가배상을 김지하 사건과는 딴판으로 모두 무효화한 박근혜 정권의 대법원 사법농단은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를 부정하며 과거사 청산을 짓밟은 또 하나의 국가범죄로서 원천무효”라며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와 대법원은 ‘주요 재판사건 처리시 비공식적인 대화 채널을 적극 가동하는 기조를 유지했다’고 특별조사단 3차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특검을 통하여 아람회사건 피해자들을 짓밟은 박근혜 정권과 대법원의 정치공작의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또 “‘국가는 아람회사건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를 문재인 정부가 하루빨리 이행하기를 바란다”며 “문재인 대통령과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적폐 청산과 피해자 원상회복을 위한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이 사회를 맡아 ‘고문피해자의 삶의 회복을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주제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민가협 유가협 민청학련계승사업회 민청련동지회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인권재단들꼿이 공동주관하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광주트라우마센터가 후원했다.
[현장] 충남천안 ‘독립운동’ 주도하다 죽은 김구응 열사, 그의 모 최정철 열사 ‘추모비 제막식’
▲ 최정철·김구응 모자(母子) 상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 안에 있는 만세운동 동상 속의 최정철·김구응 모자(母子) 상, 아우내장터 만세 시위 중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그 자리에서 숨진 아들을 끓어 안고 일본 순사를 호통치다 어머니도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 이윤옥
지난 1일 찾은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의 모자(母子) 무덤에서는 102년 전, 아우내장터의 만세 함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천안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 주동자인 최정철·김구응 열사 무덤이었다. 뜻깊은 날을 기려, 무덤 주변에서는 과거 천안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최정철(1995, 애국장), 김구응(1991, 애국장) 열사 모자의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흔히 아우내 만세운동이라고 하면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지만, 102년 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제 순사의 총검에 의해 현장에서 순국의 길을 걸은 모자(母子)가 있다. 바로 어머니(최정철, 당시 66세)와 아들(김구응, 당시 32세)이 그분들이다.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은 모자는 가전리 산 8-6번지에 묻힌 채, 지난 100여 년간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과거 어떤 일 벌어졌나 보니… ‘독립선언’ 하려 모인 6400명, 일본군과 맞서다
“천안군 병천시장에서 의사(義士) 김구응이 남녀 6400명을 소집하여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헌병(일경)이 조선인의 기수(旗手, 행사 때 대열의 앞에 서서 기를 드는 일을 맡은 사람, 곧 조선인들)를 해치고자 했다. 조선인들은 맨손으로 이를 막느라 피가 낭자했다.
그러자 일본 헌병은 이들의 복부를 칼로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라, 김구응이 일본 헌병의 잔인무도함을 꾸짖자 돌연 총구를 김구응에게 돌려 그 자리에서 즉사케 했다. 김구응은 머리를 맞아 순국했으나 일본 헌병은 사지(四肢)를 칼로 난도질했다. 이때 김구응의 노모(최정철 지사)가 일본 헌병을 향해 크게 질책하자 노모마저 찔러 죽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김병조 지음, 1920.6, 국한문혼용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번역함, 76쪽.)
이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이 일어난 바로 이듬해에 김병조 선생이 상해에서 펴낸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병조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상해에서 임시정부에 관여하면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 6월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을 지었다.
▲ 추모비 제막식에 앞선 고유제 천안, 가전리 최정철 열사 무덤에서 유족들이 추모비 제막식에 앞서 고유제를 지내는 모습 ⓒ 이윤옥
한편, 이 책과 같은 해에 나온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 상해)에서도 천안 아우내장터의 주모자(主謀者)를 김구응(金九應) 의사로 기록하고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따끈따끈한 기록이 이 두 역사책이다.
천안역사문화연구회에서는 ‘최정철·김구응 열사’를 조명하고자 지난해에 이어 올해 제2회째로 아우내 문화제를 열었다. 지난 1일 열린 ‘최정철·김구응 추모비 제막식’은, 이런 ‘제2회 아우내 41문화제’의 한 고리로 추진된 것이다.
‘제2회 아우내 41문화제’는 천안역사문화연구회,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 성공회병천교회, 최정철·김구응 열사 유족회 주최로 열린 행사로 오전 10시에 시작된 아우내 4.1혁명의길 걷기를 시작으로 오후 2시에는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최정철·김구응 열사 별세 성찬 추모 미사가 열렸다
▲ 성공회 병천교회 “최정철·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 별세 성찬례” 천안 아우내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열린 “최정철·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 별세 성찬례” 미사 모습 ⓒ 이윤옥
성공회 병천교회는 당시 진명여학교를 만들어 민족교육을 실시하던 곳으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한 교회다. 이 학교 교사였던 김구응(32세) 열사는 4월 1일, 교인들과 지역유지, 젊은 청년, 학생들을 이끌고 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어머니 최정철(66세) 열사 역시 성공회 병천교회 신자로서 여성들이 대거 만세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끈 인물이다.
“사실 성공회 병천교회에 부임하기 전까지는 이곳이 천안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와서 보니 이 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여학교가 아우내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김구응 열사께서 활약하신 무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최정철·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 별세 성찬례를 통해 일제 만행을 기억하며 선조들의 독립정신이 큰나무 가지가 되어 뻗어 나가길 빕니다.”
이는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병천교회 관할 사제 장동윤(미카엘) 신부의 설교의 한 대목이다. 추모 미사를 마치고 오후 4시부터는 병천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최정철·김구응 무덤에서 추모비 제막식 행사가 있었다.
오후 4시, 가전리 산 8-6번지, 최정철·김구응 열사 무덤에는 추모비 개막식을 알리는 주홍빛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어머니 최정철 열사의 무덤은 윗자리에, 아드님 김구응 열사의 무덤은 아랫자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번에 조성한 추모비는 김구응 열사 무덤 옆에 세웠다.
“오늘 이렇게 증조할머님(최정철 열사), 할아버님(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을 맞아 시비 제막식에 찾아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 말씀 올립니다. 두 분께서 목숨 바쳐 순국으로 지켜오신 나라를 위해 앞으로도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다.”
김운식(73세, 최정철·김운식 열사의 유족대표) 선생은 목이 멘 듯 말했다.
“부끄럽게도 아우내에 오래 살고 있었지만 이 두 분의 존재를 잘 몰랐기에 더욱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앞으로 자랑스러운 아우내의 독립운동가 최정철·김구응 열사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해 손자들에게 들려주겠습니다. 아우내 시내에 내걸린 펼침막을 보고 추모 미사에 참석하였고, 무덤까지 와 보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번 추모비에 새겨진 시는 기자가 쓴 것이다. 기자는 오래전부터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추적하여 헌시(獻詩)를 쓰고 그 일생을 기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 사람으로서 몇 해 전, 여성독립운동가 최정철 열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취재 과정에서 이들이 아우내장터의 주동자였다는 사실과 이 지역에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바친 수많은 선열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면서 안타깝게 느낀 것은 바로 최정철·김구응 열사 같은 분들처럼 역사의 조명에서 비껴간 인물들이다. 일제 침략기에 목숨까지 던지면서 순국의 길을 걸었지만 그 이름 석 자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것은 슬프고 쓸쓸하고 비극적인 일이다.
하지만 어제(4월 1일), 무덤가에서 기자는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이곳에 모였던 사람들 역시 그랬으리라. 참석자들은 추모비 제막을 마치고, 최정철·김구응 열사의 이름을 부르며 만세를 불렀다. 102년 만에 가전리 무덤가에서 울려 퍼진 만세 함성에 아마 최정철·김구응 열사께서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 최정철·김구응 열사를 위한 만세 추모비 제막식을 마치고 참석자들이 아우내만세운동 주동자 최정철·김구응 열사를 위해 만세를 불렀다 ⓒ 이윤옥
유난히 붉어 보였던, 활짝 핀 진달래 꽃잎 속에 어머님(최정철)과 아드님(김구응) 열사의 화사한 미소가 겹쳐 보였다. 기쁜 날이었다.
“한인사회당은 그 뒤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개명되나 이동휘가 이 당을 만든 것은 단순히 한국 독립 후원자를 얻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럴 것이 이동휘란 사람은 원래 구한국군의 정령(正領) 출신으로 열렬한 반일민족운동자이지, 사회주의 이념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만큼 초기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짐짓 공산당 조직에 몸담은 사람이 많았는데 볼셰비키 집단이 이들을 항일운동에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동휘는 도량이 넓고 활동력이 큰 독립운동가였다.”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
▲ 성재 이동휘 한인사회당은 1918년 4월 28일 하바롭스크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이자 사회주의 정당이다. 이동휘는 항일 독립운동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볼셰비키의 원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인사회당은 연해주와 아무르주에 8개 지부를 설치했다. 한인사회당 최초 중앙위원에는 위원장 이동휘, 부위원장 오와실리, 군사부장 유동열, 선전부장 김립, 김알렉산드라가 뽑혔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한인사회당은 조선인 최초 사회주의 정당일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사회주의 정당이다. 1918년 출범한 한인사회당은 1921년과 1922년 각각 창설된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보다 더 빨리 탄생했다.
성재 이동휘는 한인사회당을 기반으로 연해주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를 만들고, 군사학교를 세웠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한인적위대(韓人赤衛隊)도 구성했다. 한인적위대가 참여한 우수리 전투는 러시아 한인이 참여한 첫 무장투쟁이었다. 한때 개신교도였던 이동휘는 왜 사회주의자가 되었을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사회주의자는 그리스도인이 틀림없다.”(A true Christian must be a socialist and a real socialist must be a Christian)
칼 바르트(Karl Barth)의 말처럼, ‘개신교도’였던 그는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종교이자 이념이었던 ‘독립’
▲ 윤석남이 그린 김알렉산드라 1885년 김알렉산드라(본명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은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했다. 191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그녀는 조선인 최초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이동휘를 구명 활동으로 석방한 그녀는 한인사회당 창당 5개월 만에 백군에게 체포됐다. 1918년 9월 16일에 처형당했다.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전시회에서 촬영. ⓒ 백창민
‘무인’이었던 이동휘가 ‘혁명가’의 길을 걸은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지 모른다. 여운형은 “이동휘는 공산주의의 ABC조차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했지만, 성재는 종교와 이념도 독립을 위한 ‘도구’로 여겼다. 이동휘에게 ‘독립’은 종교이자 이념이었다. 실제로 1919년 12월 25일 <혁신공보>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一人)이 필사(畢死)하기까지 최후의 일인(一人)의 혈점(血點)이 필적(畢滴)하기까지 독립을 필성(必成)코야 말 줄로 확신하노라.”
1919년 3.1 운동 전후 조선에는 한성정부가, 중국에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러시아에는 대한국민의회가 탄생했다. 각각 활동하던 세 정부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1919년 11월 3일 이동휘는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초창기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끈 지도자는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였다. 세 사람이 주도했기 때문에 ‘삼각정부’ 또는 ‘삼각내각’이라 불렸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끈 세 지도자의 독립운동 노선은 달랐다. 우남 이승만은 ‘친미외교론’을, 도산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을, 성재 이동휘는 ‘무장투쟁론’을 펼쳤다. 성재는 오직 무기와 피로써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철혈주의'(鐵血主義)를 표방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이동휘와 그의 동지 1919년 8월 이동휘는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이동휘는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한인사회당 소속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특사로 보냈다. 모스크바로부터 지원받은 거액의 자금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 자금을 유용했다는 이유로 백범 김구는 내각 비서장 김립을 암살했다. 일제는 “반일 조선인 가운데 재주와 학식이 제일류의 인물”로 김립을 꼽았다. 그런 독립운동가를 독립운동가가 죽인 사건이 터진 것이다. 사진 앞줄 오른쪽 끝이 김립이다. 김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진순, 이동휘, 이극로, 김철수, 계봉우, 신원미상이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1920년 여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며 조선인 무장투쟁이 큰 성과를 거뒀다. 그 보복으로 일제는 만주 간도에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만주의 조선인 동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자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었다. 독립운동 노선에 대한 논쟁도 터져 나왔다. 이동휘는 급진론에 근거해 임시정부의 전면 개혁을 요구했지만, 그의 개혁은 좌절되었다.
여기에 레닌의 독립운동 자금 유용 시비가 맞물려 일어났다. 성재가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있을 때 한인사회당은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독립운동자금 제공을 약속받은 바 있다. 임시정부 개혁이 실패하자 성재는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상하이 임정을 탈퇴했다.
총리 사임 후 성재는 북만주와 연해주를 무대로 활동을 이어갔다. 1921년 5월 20일 이동휘는 ‘고려공산당’ 대표자 회의에서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이동휘는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11월 고려공산당 대표로 레닌과 회담을 했다.
이 무렵 러시아 극동에서 한인 공산주의자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대립했다. 여기에 ‘자유시 참변’까지 터지면서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1923년부터 이동휘는 새롭게 출범한 코민테른 꼬르뷰로(Korbureau 고려국) 위원으로 활동했다.
해외 독립운동 무대가 된 ‘도서관’
▲ 대한간호협회 광고 2019년 대한간호협회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캠페인을 벌였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34인의 간호사와 간호 학생을 기억하자는 내용이었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윤익선, 이범승, 이긍종, 이묘묵 같은 ‘친일 도서관인’ 외에 ‘독립운동을 벌인 도서관인’은 없었을까? ⓒ 대한간호협회
1924년 2월 꼬르뷰로가 해산하자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고려도서관’에서 관장으로 일했다. 신한촌은 ‘노바 카레이스카야 슬라바’, 말 그대로 한인이 꾸린 새로운 마을이었다. 고려도서관 관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조선 땅에서 해외 동포 위문을 목적으로 보내온 백과사전과 책을 바탕으로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다.
교육구국운동을 펼친 성재가 도서관을 통해 그 행보를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연해주 신한촌에서는 1910년대부터 ‘도서관’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대동공보>가 발행금지를 당하자 한글 신문 <대양보> 발간을 준비했다. 신개척리에 <대양보> 발행소를 새로 지으려 한 최재형은 건물 일부를 ‘도서관’으로 계획했다.
러시아 연해주뿐 아니라 해외 독립운동가가 도서관에 몸담은 사례가 있다. 송재 서재필과 성엄 김의한, 김영숙(난영)은 해외 도서관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 초까지 일제는 조선에 도서관을 짓지 않는 ‘무도서관'(無圖書館) 정책을 펼쳤다. 이동휘가 신한촌에서 도서관을 운영할 무렵, 조선 땅에 도서관은 흔치 않았다.
타국을 정처 없이 떠돈 독립운동가가 도서관에 몸담은 흔적이라 이동휘의 사례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그를 ‘도서관인’으로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학교와 도서관을 기반으로 펼친 성재의 구국운동은 ‘해외 독립운동사’ 뿐 아니라 조선인의 ‘해외 도서관 운동사’ 차원에서 새롭게 평가할 대목이다.
‘도서관인’으로 스스로 인식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던 그들에게 정규 도서관 교육을 받았는지, 도서관인으로 자각했는지 묻는 것은 사치스러운 질문 아닐까? 도서관인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도서관은 그들에게 독립운동의 ‘무대’요, 또 다른 ‘무기’였다.
조선인이 많이 거주한 간도와 연해주 지역 학교는 제법 알려졌지만 도서관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국 문헌정보학은 우리 땅에 명멸한 도서관 위주로 관심을 가져왔지만, 해외에서 한국인이 운영한 도서관 역사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속지주의'(屬地主義)에서 ‘속인주의'(屬人主義)로 관점을 확장하는 것은 한국 도서관사 연구의 과제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대한간호협회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간호인 34인을 기념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대한간호협회는 ‘간호사, 독립운동 전선에서 빛나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연 데 이어 신문광고를 했다. ‘독립운동가 간호사들을 만나다’라는 특별전시회도 개최했다.
그러면 독립운동에 참여한 ‘도서관인’은 없었을까? ‘도서관을 무대로 펼쳐진 독립운동’은 없었을까? 이동휘 사례처럼 도서관에 자랑스러운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닐까.
시베리아 벌판을 말 달리던 마지막 조선 무장
▲ 국제혁명자후원회(모플) 시절 이동휘 이동휘는 원동변강 국제혁명자후원회(모플 MOPR) 위원으로 활동했다. 모플은 혁명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고 고통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해 모금과 선전 활동을 펼쳤다. 원동변강 모플위원회는 이동휘의 열성적인 활동과 공적을 인정하여, 1932년 10월 12일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모플 열성자대회에서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사진 둘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동휘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고려도서관을 운영하던 성재는 1928년 12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을 추진했다. 1929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에서 코민테른과 연락을 담당하는 총지휘자가 되었다. 1930년부터 1935년까지는 변강 국제혁명자후원회(MOPR)에서 활동했다.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던 이동휘는 1935년 1월 31일 심한 독감에 걸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숨졌다. 작가 김성동이 “시베리아 벌판을 말 달리던 마지막 조선 무장”이라 칭했던 이동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혁명가로 분투했으나 그는 조국의 해방과 혁명을 보지 못했다.
62세로 숨진 이동휘는 오랫동안 ‘사회주의 운동가’라는 이유로 외면받았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성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성재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 조국이 해방된 지 50년 만이었다. 권업회 사무실 바로 옆에 있었다는 이동휘의 신한촌 집도 이젠 사라졌다. 그 자리엔 아파트와 상점이 들어섰다. 성재가 관장으로 일한 도서관은 이제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이동휘 집안은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성재의 부친 이승교는 3.1 운동에 가담했다. 큰딸 이인순은 길동여학교 교사로, 둘째 딸 이의순은 명동여학교와 삼일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두 딸뿐 아니라 성재의 사위들 역시 애국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성재의 아버지 이승교는 독립장을, 이동휘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그의 큰딸과 둘째 딸은 애족장을 받았다. 첫째 사위 정창빈은 대통령표창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장으로 활동한 둘째 사위 오영선은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그 중심에 이동휘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독립운동의 한복판에 늘 성재가 있었음에도 우리는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를 기념하는 동상도 기념관도 없다.
아명이 ‘독립'(獨立)이었던 성재는 이름처럼 ‘독립’에 몸 바친 삶을 살았다. ‘다른 나라에 의지하는 외교가 아닌, 오직 무장투쟁과 최후 혈전을 통해서만 영원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라고 주창한 그는 독립운동의 제단에 자신의 피를 뿌렸다.
이동휘가 활약한 신한촌에는 3개의 기둥으로 만든 기념비가 서 있다. 3개의 기둥은 각각 조선에 있던 한성정부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러시아에 있던 대한국민의회를 상징하는 동시에, 남한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해외동포를 의미한다.
그의 독립은 아직 오지 않았다
▲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은 조선인이 집단 거주했던 곳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서북방, 개척리의 정북방에 있다. 신한촌에는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한인신보사, 일세당, 대한국민의회, 노인동맹단 같은 독립운동 단체가 활동했다. 연해주 신한촌은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한 중추 기지였다. 1999년 사단법인 국외 한민족연구소는 3.1 독립운동 80주년을 맞이하여 신한촌 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카야 26A에 있다. ⓒ flickr
해방된 조국은 결국 갈라졌고, 해외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남도 북도 아닌 러시아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오랫동안 살아야 했다.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그들이 바라던 해방 조국이 ‘분열’된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1913년 권업회에서 이동휘는 이렇게 연설했다.
“나누면 멸망을 받을지니 과연 오늘날은 살부살형(殺父殺兄)의 원수라도 우리의 광복을 희망하여 서로 나누지 말자.”
남북이 둘로 나뉘어 민족상잔의 전쟁을 치를 것을 성재는 알았던 걸까? 살부살형의 원수라도 진정한 해방을 위해 서로 나뉘지 말자고 역설했던 그의 말은 민족의 미래를 향한 예언자적 일갈이었다. 성재가 강화도에 처음 세운 근대학교 이름도 ‘합일학교'(合一學敎)다.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나누면 망하고 합하면 흥한다’라며 ‘단합’도 아닌 ‘영원단합’을 강조한 성재는 죽어서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노바 카레이스카야 슬라바에 세운 세 기둥이 하나 되는 날은 오지 않았다. 성재의 ‘혁명’과 그의 진정한 ‘독립’은 아직 오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위안부를 ‘자발적 계약 매춘부’라 규정한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국제학술지 논문이 국내외에서 파문을 일으킨 지 두 달여가 지났다.
많은 연구자들이 램지어 교수의 심각한 연구윤리 위반과 왜곡된 역사인식을 비판하며 논문 철회를 요구했지만, 출판사 측은 논문 출간 방침을 아직 거둬들이지 않고 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은 학문적 진실성 측면에서뿐 아니라 위안부 강제동원 부정 등 기존 역사부정주의자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KBS는 국내외 일본군 위안부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일본과 한국의 역사부정주의자들의 논법과 주장이 어떻게 하버드대와 국제학술지의 형식으로 출현할 수 있었는지 집중 추적하는 기사를 4월 12일부터사흘에 걸쳐 연재한다.
이를 통해 램지어 교수 뒤에 숨어 있는 한미일 역사부정·혐오 네트워크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 램지어의 역사부정주의적 시각, 어디서 왔나?
‘태평양 전쟁에서 성을 위한 계약’. 지난해 12월 1일 ‘국제 법경제학 리뷰’ 온라인판에 실린 램지어 교수의 논문 제목이다.
논문의 2개 키워드인 ‘매춘’ ‘노역 계약’이 분명히 가리키듯 램지어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가 노역 계약을 맺은 매춘부였다는 주장에 논의를 집중한다. 자발적 계약에 따라 성매매 여성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강제 동원은 없었고 성노예도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KBS는 이 같은 주장이 어디서 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램지어 교수 논문을 일본과 한국의 대표적 우파 학자의 저서와 비교해 보았다. 비교 대상은 일본 역사부정주의 대부라 불리는 하타 이쿠히코 전 니혼대학 교수의 1999년 학술서 ‘위안부와 전장의 성’, 그리고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2019년 저서 ‘반일 종족주의’이다.
특히 하타 교수의 저서는 우파 위안부론의 대표적인 참고문헌으로, 한일 우파 논객들이 즐겨 읽고 중요하게 인용하고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군 위안부제는 공창제의 연장”
램지어 교수는 위안소를 “해외 군사용 성매매 업소”로 설명한다. 이 점에 대해선 하타 교수가 이미 “종군 위안부 시스템은 전쟁 전 일본 공창제의 전쟁지역 버전”이라고 규정했고, 이영훈 교수도 “민간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편성된 것”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있다.
세 사람 모두 “군 위안부제는 공창제의 연장이었다, 당시 공창제는 합법이었다, 따라서 위안부제 또한 합법이었다”라는 억지 삼단논법을 사용한다.
2. “자유의사에 따른 합법적 계약”
“‘신뢰가능한 약속’에 따라 여성과 성매매 업소가 노역 계약을 체결했다”는 램지어 교수 논문의 핵심 주장은 “고용주와 위안부 사이의 계약”이라는 하타 교수, “주선업자들이 취업승낙서를 받아 딸을 데려갔다”는 이영훈 교수 주장과 맞닿아 있다.
3. “민간업자가 모집…일본군 책임 없어”
위안부 모집에 대해 램지어 교수는 “한국이나 일본 정부가 강제로 성매매시키지 않았다”면서 “모집업자들이 거짓말을 했을 수 있다”는 말로 책임을 민간업자에게 돌린다.
하타 교수의 “업자의 악덕함이 심했다”는 주장, 이영훈 교수의 “(주선업자에 의해) 좋은 곳에 취직시킨다는 감언이설의 속임수가 동원”되었다는 표현과 겹친다.
세 사람 모두 일본군의 역할은 업주의 착취와 성병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이른바 ‘좋은 관여’였다고 강조한다.
4. “위안부는 고수익 업종”
“전시에 위안부가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도 3국 학자의 공통된 주장이다.
5. “자유 폐업·귀향 가능”
세 교수는 성매매는 자유 계약이었기에 여성들이 선불금을 갚으면 자유롭게 폐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도 주장한다.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의 저자인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역사부정주의자들이 계약을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
“계약을 강조하면, 문제가 생기더라도 실제 계약 당사자인 업자와 군 위안부로 동원되는 여성의 호주 사이의 책임으로 전가시킬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렇게 되면 위안부를 모집하라고 지시하고 심지어 돈까지 댄 일본군의 책임은 온데간데없고 업자의 착취를 막기 위해 관여한 좋은 일본군으로 남게 되는 효과까지 생긴다”라고 설명한다.
사실 램지어 교수는 이미 1991년 논문 ‘제국 일본의 계약 매춘: 상업적 성 산업에서 신뢰가능한 책임’에서 20세기 초 매춘을 자율 계약으로 파악했다. 전쟁 전 성매매 여성의 자율 계약 개념을 전시 위안부와 연결시킨 건 하타 이쿠히코였고, 램지어 교수가 다시 이를 받아 위안부는 공창제의 연장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한미일 역사부정 네트워크를 분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램지어 교수가 논문마다 감사를 표하는 인물, 제이슨 모건 레이타쿠 대학 교수다.
미국인인 그는 일본 우파 싱크탱크인 일본전략연구포럼의 지원을 받아 2018년 하타 이쿠히코의 ‘위안부와 전장의 성’을 영어로 번역했다. 역사인식문제연구회 부회장이기도 한 모건 교수는 수시로 램지어 교수와 교류하며, 경제법학자인 램지어가 역사와 위안부 관련 논문을 쓰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日 역사부정 실체’ 기획 보도 협업 참여진 –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본군위안부연구회장 – 김창록: 경북대 로스쿨 교수, 전 일본군위안부연구회장 –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 –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일본군위안부연구회 학술이사 –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김창호: 일본 변호사 –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일본에선 역사전쟁에서 승리했다. 이제는 주 전쟁터 미국, 그리고 한국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지난 30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발언이다.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지금 일본에선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을 처음 언급한 고노 담화, 종전 50주년을 즈음해 일어났던 성찰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현 스가 요시히데 내각 역시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밝히고는 있지만,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일본-미국-한국의 역사수정주의 단체는 어떻게 협력할까?
■ 日-韓 ‘역사 교과서 흔들기’
고노 담화(1993년), 무라야마 담화(1995년)에도 꿈틀거리지 않던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반격을 시작한 것은 1997년이다. 위안부 강제성을 인정한 역사 교과서가 발단됐다.
1997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출범한다. 의회에도 ‘일본의 전도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이 설립됐다. 그 중심에 아베 신조가 있었다. <새역모>가 만든 교과서는 일제 식민지시기를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일제의 아시아 침략전쟁을 ‘아시아 해방전쟁’ 또는 ‘자위전쟁’으로 미화하거나 왜곡한다.
일본 고등학생이 배우게 될 역사교과서 12종 중 ‘위안부 강제성’을 언급한 책은 단 1종뿐이다.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자신감이 헛된 과장이 아니다.
‘교과서 흔들기’는 8년 뒤 한국에서도 일어난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 이영훈 교수 등이 2005년 1월 참여한 ‘교과서 포럼’을 잇는 뉴라이트 학자들이 2013년에 집필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교학사)>가 국사편찬위원회(유영익 위원장) 검정을 통과하며 절정에 달한다.
성공회대 강성현 교수는 “한국과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공통으로 삼은 목표는 반일”이라고 평가했다. 이영훈은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으로 ‘종북’에 더해 ‘반일’, 그것도 ‘우리 안의 반일’을 종족주의라고 비난한다.
강 교수는 “사실의 진위와 상관없이 신념이나 감정으로 여론을 만드는, 무기화된 그들의 거짓말은 탈진실(post truth)”이라고 평가했다.
■ 日-美-韓 역사수정주의 단체 ‘밀어주고, 끌어주고’
일본을 평정한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몰려간 곳은 주 전쟁터 미국이다. 소녀상 철거 운동을 본격화했고, UN 등 국제무대로 전쟁터를 확장했다.
<위안부의 진실 국민운동(2013년)>, 미국에서 출범한 <역사의 진실을 묻는 세계연합회(GAHT, 2014년)> <재일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재특회)> 부회장 야마모토 유미코가 주도한 <나데시코 액션(2011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단체는 미국에서 소녀상 철거 소송을 벌이고, UN에서 반대 집회를 여는 등 세력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 미국 유력인사들에게 영어 번역판 역사수정주의 책을 발송하는 것도 주요 활동이다.
2019년 <반일 종족주의>가 출판되면서 한국 단체들과 협력도 활발하다.
<반일 종족주의> 공동저자 낙성대 경제연구소 이우연 연구원은 2019년 7월 2일 UN 인권이사회에서 ‘일제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발언을 한다. 이 자리를 주선하고 금전적으로 지원한 인물이 역사 부정론자 미국인 유튜버 ‘텍사스 대디’의 <일본 사무국> 국장 후지키 슌이치다.
<반일 종족주의>는 일본에서 출판돼 40만 권 넘게 팔렸다. 마찬가지로 일본 역사수정주의 책도 한국에서 출판됐다.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판결’을 비판한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니시오카 쓰토무, 2020)>라는 책이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이 다름 아닌 이우연이다. 그리고 책을 낸 출판사는 우파 미디어를 표방하는 ‘미디어 워치’ 계열 ‘미디어 실크’다. 이 책 광고는 지금도 ‘미디어 워치’ 홈페이지에 실려 있다. 이 책도 한국의 연구자, 기자 등에게 사유 없이 대량 발송됐다고 한다.
■ 日-韓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램지어’ 구하기
램지어 논문이 알려지자 일본에서 첫 지지 성명을 낸 사람이 이 책 저자인 니시오카 쓰토무다. 논문 출간에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니시오카 성명이 나오고 사흘 뒤인 2월 9일, 이영훈, 류석춘, 이우연 등 한국 측 인사들도 공동 성명을 낸다. 램지어 논문이 독창성을 인정받았다는 주장이었다. 국제학계, 특히 일본사 연구자들의 비판이 쏟아지자 한국의 역사수정주의 단체는 본격적인 램지어 구하기에 나선다.
이우연은 일본 산케이 신문사 계열 <재팬 포워드>에 램지어 논문 옹호 글을 기고한다.
<이승만 TV>의 주익종은 유튜브에 ‘고명하신 미국 교수님들의 램지어 비판을 살펴보니’ 등의 강의 영상을 올린다. 공교롭게도 이 유튜브 영상은 일본어 자막을 단 것이 한국어 영상보다 최고 4배 정도 조회 수가 많다. 아시다시피 조회 수는 유튜버 수익과 비례한다.
■ 역사수정주의 이념적 동일성…. 반일(反日)은 곧 ‘좌파, 종북, 친중’
‘자학사관’은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단체 <새역모>가 중학교 역사교과서 7종 모두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술한 것을 비난하면서 만든 개념이다. 아베는 근현대 교육에서 일본인은 자자손손 사죄하는 것이 운명이 된 죄인처럼 다루어진다고 비판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정통한 일본 전문가인 일본계 호주인 테사 모리스 스즈키 교수는 저서 <바다를 건너간 위안부>에서 일본의 젊은 세대는 윗세대가 행해온 여러 악행에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답하면서도 “그 악행을 은폐하고, 풍화시키고, 날조하는 과정에 관여하거나 혹은 그 과정을 묵인한다면 거기에 책임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모리스 스즈키 교수는 이것을 ‘연루(連累, implic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일본 극우가 쓰는 용어인 ‘자학사관’은 한국에서도 등장한다.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 박정희를 부국의 아버지’라고 칭송하는 한국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2004년 당시 노무현 정부의 ‘자학사관’과 전쟁을 선포한다며 실체를 드러냈다.
강성현 교수는 “韓日 역사수정주의자들은 각각 근현대사에서 극우/파시즘/독재정치로 인한 잘못을 반성하는 역사인식을 ‘자학사관’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연속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또 “반일(反日)은 곧 ‘좌파’ ‘종북’ ‘친중’이라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면서, 역사수정주의자들에게는 혐한, 혐북, 혐중 감정이 공통으로 깊이 배어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역사수정주의 핵심 단체 <역사인식문제연구회> 부회장인 미국인 제이슨 모건 교수(레이타쿠 대학)는 미국 학계가 좌파에 장악돼 있다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공산주의자”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정의의 편이었다”고 주장한다.
일본에서 시작된 위안부 역사부정은 한국, 미국으로 확산했다. 그들의 주장은 마치 복사해 붙인 것처럼 똑같다. “위안부는 성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었다” “위안소는 공창제라는 매춘 역사의 일부다” “위안부는 높은 수익을 올렸다.”
역사부정주의자들은 위안부 증언을 “구름 잡는 이야기”라며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논리를 풀어갈 때는 증언을 ‘대목, 대목’ 잘라 인용한다. 증언의 전체 맥락을 왜곡하는 절취다.
일본, 한국, 미국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왜곡하는 대표적 증언이 고 문옥주 할머니 이야기다. 일본 하타 이쿠히코 <위안부와 전장의 성, 1999년>을 시작으로, 한국 이영훈 전 교수 <반일 종족주의, 2019년>, 미국 램지어의 이번 논문 <태평양 전쟁 중 성을 위한 계약, 2021년>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할머니 증언을 어떻게 왜곡했을까? 그리고 문옥주가 실제 전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 “문옥주는 자유인이었다”
위안부 피해자 문옥주는 192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본인 작가 모리카와 마치코는 문옥주와 3년간의 인터뷰를 토대로 <문옥주, 버마전선 방패사단의 위안부였던 나>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발간됐다. 16살이던 1940년, 문옥주는 귀가 중 헌병대에게 붙잡혀 위안부로 끌려간다. 중국과 미얀마에서 성 노예 생활을 하던 그녀는 전쟁이 끝난 1946년 귀환했다. 그녀의 귀환을 두고 하타 이쿠히코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얀마의 문옥주도 동료와 귀향하기 위해 사이공까지 갔다가, 항해가 위험한 것 같다고 판단, 중지하고 돌아갔다는 것에서 전쟁 중에 일을 그만두고 고국에 돌아간 위안부는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위안부와 전장의 성, 395쪽, 1999년)
이영훈은 여기에 더해 문옥주가 성 노예는 커녕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무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문옥주와 위안부 일동은 “우리도 일본인이다. 창녀가 아니다. 일본군을 위안하는 신성한 책무를 부여받은 제국의 위안부다”라는 의식을 가졌습니다.”(반일 종족주의 326쪽, 2019)
두 사람은 문옥주가 증언한 미얀마 탈출기, 그리고 군사 법정 진술을 가져와 마치 위안부가 언제든 귀환할 수 있었던 자유인, 또 위안부를 신성한 책무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문옥주는 돈을 많이 벌었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빼놓지 않는 주장 중의 하나가 위안부는 ‘돈을 많이 벌었던 자발적 매춘부’라는 주장이다.
하타 이쿠히코는 위안부가 일본 공창 수입의 5배 이상, 평양 유곽 여성보다 10배 이상 많은 돈을 벌었다며 그 사례로 문옥주 증언을 든다.
“문옥주의 경우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는 것만으로 3년이 안 되어 2만 5천 엔을 저금하고, 그 가운데 5천 엔을 가족에게 송금했다. 지금이라면 1억 엔 전후의 큰돈이다.” (위안부와 전장의 성, 392쪽)
램지어도 “계좌를 둔 한국인 위안부들 가운데, 가장 대담하게 잘했던 이는 문옥주 이었던 듯하다.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문옥주 원본 증언집이 아닌 역사수정주의적 글만 게재하는 익명의 일베 같은 블로그에서 선별적으로 짜깁기되고 왜곡된 문옥주 증언을 든다.
“어머니에게 안락한 삶을 살게 해드릴 수 있을 거 같다. 나는 매우 행복하고 뿌듯했다. 저금통장은 나의 보물이 되었다.”(태평양 전쟁 중 성을 위한 계약, 6쪽, 2021년)
일본군 위안부 故 문옥주 할머니
■ 문옥주가 실제 전한 말은?
먼저 문옥주가 미얀마 위안소를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손님으로 오는 군의관에게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였다. “귀국하기 위한 증명서가 필요한데요. 손에 넣을 수 없을까요?”라고, 그러자 그 군의관은 “내가 폐병이 났다는 진단서를 써주겠다. 건강해 보이면 거짓 진단서가 들통 나서 내 목이 날아가니 꼭 병자처럼 행동해요.”라고 당부했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중에서
폐병에 걸려 군인들에게 병이나 옮기는 쓸모없는 몸을 만들지 않고서는 문옥주는 위안부 생활을 끝낼 수 없었다. 이것이 문옥주가 전하는 진심 아닐까?
그럼 문옥주는 “우리도 일본인이다. 창녀가 아니다” 이런 말은 군사 법정에서 또 왜 했을까? 문옥주는 위안소에서 칼을 빼 들고 행패를 부린 군인과 승강이를 벌이다 살해한다.
“조선인인 내가 일본 군인을 죽였으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되지 ~~~~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재판관은 고개를 끄덕였고, 순간적으로 얼굴색이 싹 변했다. 뭔가 좋은 느낌이 들었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중에서
문옥주가 ‘일본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우리는 일본인이다.”라고 발언했다고 읽히지 않는다. 그런데 역사수정주의자들은 그렇게 믿는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은 또 위안부 수입을 ‘오늘날의 가치’ 운운하면서 ‘거액’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역시 위안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재론의 여지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평가된다. KBS와 공동연구를 진행한 성공회대 강성현 교수는 당시 일본군 점령지에서 급격하게 치솟은 전시 초인플레를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문옥주의 군사우편저금 원부 조서
강 교수는 “1944년 4월과 5월 문옥주 저금액 20,560엔을 당시 도쿄의 엔화 가치로 환산해 보면 도쿄 물가지수는 152, 양곤은 30,629이어서, 문옥주 저금액이 도쿄에서는 102엔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오늘날의 가치’라는 분석 자체가 의미 없는 숫자 놀음이라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옥주는 이 돈마저 돌려받지 못했다.
“역사부정주의자들이야말로 1944-45년에 업자들이 아닌 일본군 ‘위안부’가 한 강제저축을 돌려받거나 집(조선)으로 송금했던 돈을 본가에서 인출한 사례를, 그것도 오늘날의 가치 운운할 만큼 ‘거액’의 사례를 근거로 들어 입증해야 한다.”고 강 교수는 반론했다.
■ 위안부 증언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일상이 전장이었으니 전쟁 또한 삶이었다. 살아남았으니 살고자 했다.”는 말은 일본군 ‘위안부’ 증언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문옥주 할머니 회고록 작가 모리카와는 1982년 8월 문옥주가 코를 골며 자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하였다고 했다. 모리카와는 “”당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은 당신 개인의 수치도, 당신 집안의 수치도, 동네의 수치도 아닙니다. 그것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였습니다.”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썼다.
문옥주 할머니는 1996년 10월 26일 생을 달리했다. 영면에 든 할머니는 본인의 증언이 ‘대목, 대목’ 잘려 찬탈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특집 : 역사하는 사람들의 생태보고서, 핏빛 혹은 장밋빛 이야기
○ (좌담) 지역연구자의 삶과 꼬뮨 만들기 / 권명아 정계향 김대성 강화정
○ 별일 아닌 것들로 별일이 됐던 어느 날들 / 작자미생
○ 굿바이 루카치 – 어느 연구자의 일상 / 허민
○ 2020년, 역사학과 여성사, 이 기울어진 세계의 이야기 / 한봉석
○ (대담) 해외에서 역사하며 살기 : 유럽의 한국사 연구와 교육 / 안종철 이동원
○ (대담) 해외에서 역사하며 살기 : 일본의 한국사 연구와 교육 / 니시무라 나오토 김영진
○ 역사교육, 역사를 매개로 읽고 쓰고 듣고 말하기를 통해 민주주의를 몸으로 익히기 / 우현주
○ (인터뷰) 푸른역사의 산증인 박혜숙 대표를 만나다 / 박혜숙 김헌주
○ (좌담) 피해자의 삶이 역사가 되었듯이 활동가의 삶이 역사가 되다-역사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대일과거사 활동가들의 이야기 / 강경란 김명준 김진영 김해슬 이하나 야지마 츠카사 정은주 최상구 김영환
기획 : 구술로 본 전쟁과 일상(2)
○ 난을 피하는 여러 가지 방법 : 한국전쟁기 피난 이야기 / 김수향
○ 오음리에서 사이공까지 : 구술을 통해 본 ‘파월전사’의 참전 과정과 현지 경험 / 류기현
연재 : 온라인으로 만나는 역사(2)
○ 한국전쟁 전후 북한 영화 관련 온라인 자료 소개 / 한상언
○ 8월 14일 기림의 날 개관한 아카이브814 – 일본군‘위안부’ 관련 자료 보기 / 강윤희
인물로 보는 역사
○ 이탈리아어판 『코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들 ④ 김단야 박헌영 김재봉 / 임경석
리뷰
○ 긴축 정책과 빈부 격차 그리고 차별 : 단지 영국 중학생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
– 브래디 미카코,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다다서재, 2020 / 백은진
<책소개>
역사하는 ‘우리’를 이야기하며 다시 내일을 꿈꾸다
언젠가는 역사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역사를 이렇게 봐야 한다’, ‘역사적 진실은 이런 것이다’ 등등 역사 이해의 결과물에 대해서 주목할 뿐, 그 말을 만들고 옮기고 말이 현실이 되게끔 노력해온 사람들의 삶과 의식세계를 소홀히 여겨온 것은 아닌가. 역사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들이 발 딛고 있는 환경에 눈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사람들이 하는 그 일에 대한 의미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나만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기획은 시작되었다.
역사가 하나의 서사 형태를 갖추게 되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파되며,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인류의 미래를 설계하게 되는 데 얼마나 많은 과정이 존재할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 개입할까. 사람마다 각각 자신의 경험이 다르고 역사와 대면하게 되는 계기도 다양하기 때문에, 역사의 생산과 전파 및 실천적 개입 등을 하나의 ‘타임테이블’에 올려놓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수많은 시간대들이 중첩되어 있는 실제 상황을 잠시 접어두고 이러한 국면에 참여하는 집단들을 생각나는 대로 짚어보면, 역사 연구자, 역사교사, 종이·음성·시각 매체를 통한 역사프로젝트 기획자, 피해자의 구제와 역사적 기억 형성에 관여하는 역사단체 활동가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물론 이들은 항상 동일한 목표와 균등한 영향력을 가진 주체들이 아니다. 근대 이후 정부는 통치권력으로 기능하며, 역사하는 사람들의 행로를 결정하는 ‘슈퍼 갑’이었다. 이와 같은 정부의 힘이 상수로 존재하는 가운데, 때로는 연구하고 쓰는 사람들이 가르쳐야 하는 사람들의 역할을 규정했다. 또한 역사대중화라고 포장한 채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대중의 역사의식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선동가’가 역사하는 사람들 전체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즉 역사하는 여러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얽혀있는 관계는 반드시 역사관으로만 설명할 수 없으며, 자신이 속한 위치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역사하는 행위에 대해서 성찰적으로 되짚어보려면, 이들 모든 영역들이 어우러져 문제의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역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협업적 관계 구축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자는 게 이 기획의 첫 번째 의도라면, 두 번째 목표는 각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2021년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지속가능한 생존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가, 점검해보는 데 있다. 말로는 평화 공영을 내세우며 누군가의 희생 덕에 연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국민적 소속감의 형성에 역사교육을 넘겨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역사의 전파자는 역사를 어떠한 가치가 있는 지식으로 다루고 있는가. 역사 활동가들은 역사의 정치화와 어떻게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그리 가볍지 않으며, 그 무게를 견뎌내기 위한 첫 걸음을 떼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내일을 여는 역사> 통권 80호 <특집> 제목을 ‘역사하는 사람들의 생태보고서, 핏빛 혹은 장밋빛 이야기’로 정했다. 지난 2020년 11월 무렵부터 편집위원회를 통해 아이디어를 공유하기 시작했는데, 업무보고서·연차보고서 한 편도 제대로 완성하기 힘든 마당에 생태보고서를 쓴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참신한 제안들을 성사시키지 못한 사례도 여럿이다. 본문에서 밝히듯이 여성사 연구자들의 좌담을 통해 한국근현대사학계의 연구환경과 연구경향을 말해보려 했지만 아쉽게도 기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교육연구소에서 펴낸 ‘역사의식조사’처럼 연구자들이 느끼는 현실을 데이터화 하는 설문 작업도 구체화시켜보고자 했으나 편집위원회가 단기간에 감당할 수 있는 계획은 아니었다.
결국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가급적 많은 말을 담기로 했다. 또한 말을 모으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2020년 12월 개편 호 발행 당시 원고 투고 방식에 한정되지 않은 열린 시도를 하자고 다짐했던 터라, 편집위원이 직접 발로 뛰는 노동집약적 기획이 가능했다. 좌담, 대담, 인터뷰, 기고 청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23명이 참여하여 역사하는 동네의 현상, 이면과 측면을 담은 생태보고서를 만들었다.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편집위원회에 제일 많다는 핑계로, 이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담았다. 일단 지역과 해외라는 공간으로 사람들을 찾아갔다. 지역 연구자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묵직했다. 강화정 편집위원이 중심을 잡고 이끌어간 좌담에 권명아, 정계향, 김대성 세 명의 부산경남지역 역사학/인문학 연구자들이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2021년 대입 입시에서 드러난 지방대학 ‘붕괴’에 대한 단상을 시작으로 지역에서 산다는 것이 자신의 연구에 미치는 영향, 지역이 단일한 공동체가 아니라 오히려 오래된 촘촘한 그물망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곳이라는 점, 수도권 집중화로 식어버린 대지일 수도 있겠으나 새로운 희망을 일구기 위해서 분투하는 사람들의 활동장이라는 점 등을 말한다. 한 참가자의 지적처럼 지역은 언제나 전체 기획의 맨 끝에서 구색 맞추기처럼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생태계의 불균등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맨 먼저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코로나 유행 상황이 발달시킨 비대면 화상회의 방법으로 두 명의 해외 연구자와 대담을 추진했다. 이동원 편집위원은 이탈리아에서 활동중인 안종철 교수와, 김영진 편집위원은 일본의 신진연구자인 니시무라 나오토 조수와 대담을 나눴다. 한국에서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연구환경과 연구주제를 상대화·객관화하기 위한 시도이자, 우리가 대화하고 소통해야 하는 역사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한국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고민에 따라 추진되었다.
이 대담을 통해 안종철은 유럽의 고등교육제도와 한국학의 궤적을 설명하면서 한국이 유럽과의 교류 범위를 넓혀갈 것을 제안한다. 특히 유럽에서 한국사/한국학은 여전히 인정투쟁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이 해외 연구자의 실존과 관련해서 짙게 여운을 남긴다. 한편 니시무라 나오토는 대학원 시절 한국에서의 생활, 한류로 인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 일본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는 제반 여건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풀어놓은 경험담은 ‘생각보다’ 특수하지 않았다. 일본이니까, 일본인이니까, 뭔가 자극적이고 특별한 얘기가 나올 거라고 기대한 내 편견이 컸던 탓이다. 그는 한국의 누구나 그렇듯이 역사에 관심 없는 대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 힘든, 보다 안정된 환경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연구자이다. 두 곳의 문화와 시스템의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생태계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야 하는 이유이다.
다음으로 편집위원회는 연구자의 신분과 지위에 주목했다. 역사학의 영역에서 아무리 짧게 잡아도 석박사 과정을 졸업하는 데 10년은 훌쩍 넘게 걸린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취득한다고 해도 안정된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대학원생노동조합, 비정규교수노동조합 등이 만들어지면서, 연구자로 완성되기 위한 수련의 과정으로만 오랫동안 간주되던 비인권적 처지에 대한 문제제기가 많아졌으나 아직도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 역사 연구하는 사람들의 생태계가 안정되려면, 약육강식·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 아닌 공생과 상호부조의 관점이 폭넓게 수용될 필요가 있다.
대학원생·신진연구자 단체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 소속 연구자들이 작자미생이라는 이름으로 2017년 역사학대회 때 발표했던 원고를 일부 수정하여 게재했다. 타교 출신 대학원생에 대한 차별, 학회와 연구소 업무의 전가, 지도교수의 일방적 관계 설정 등의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허민은 어느 비정규직 연구자의 일상을, 학술대회 발표문 마감일 1주일 전부터 학술대회 당일에 이르는 긴장을 바탕으로 촘촘하게 르포 형태로 풀어냈다. 이들의 글이 피해자성을 전시하고 사적 개인을 고발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실을 이해하는 이야기로서, 학문 연구의 영역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숙고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지금까지 지역, 해외, 대학원생, 비정규직 연구자처럼 공간과 지위에 따라서 연구 생태계를 살펴보았다면, 한봉석은 여성사에 대한 학계의 연구 지형, 출판 경향을 분석하면서 여성사 연구가 시대가 요청하는 바인 다양한 관계와 개인의 정동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희망을 담았다. 그는 페미니즘 전성시대에 역사학계가 함께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여성사 연구자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지 못한 환경과 칭찬의 부재로부터 찾는다. 그가 내심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재기 넘치고 열성적인 여성 연구자들을 불안과 위기로 내몬 우리 생태계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 연구자에 대한 지지를 에둘러 말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연구재단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역사학 전공자는 5,600명 정도이다. 그런데 교사모임 관계자의 전언을 통해 추정해볼 때, 역사교사도 대략 8,000명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역사교사 역시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하는 사람들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인원만이 아니라 실제 수행하는 역할에 있어서도 그렇다. 살아가는 동안 얻게 되는 많은 역사지식이 역사교사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최근에는 미디어의 역사 상품화로 학교 역사교육의 위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23년차 역사교사 우현주는 역사 공부의 기본 목적이 역사적 감수성을 키우는 데 있다고 말한다. 독서 수업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게끔 하고, 느리더라도 오래가는 공부를 강조한다. 또한 역사가 ‘지금 이 순간’의 과거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결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현재진행형의 관점에서 역사수업을 하고 있다는 점을 상세히 설명한다. 현장의 고민을 담은 역사교사의 생존기를, 다른 분야에서 역사하는 사람들도 많이 읽어주셨으면 한다.
역사대중화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지만, 여러 매체를 통한 역사프로젝트 역시 역사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목이다. 연구자와 교육자, 활동가 등이 모두 개입하는 분야이자 상업적 이윤 창출과 맞물려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역사 출판과 방송 출연 등은 연구자들의 사회적 기여의 한 방편으로 생각되었지만, ‘설민석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미디어는 전문연구자를 소외시키며 흥미 위주로 구미에 맞는 ‘국뽕’ 류의 단선적인 역사담론을 재창출하기도 한다.
역사 전문 출판사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는 20년 넘게 이 생태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체이자 목격자이다. 김헌주 편집위원이 진행한 인터뷰에서 박혜숙은 푸른역사의 역사대중화 시도, 전문 역사 연구와 역사 출판의 긴장, 역사 출판계를 둘러싼 최근 동향, 출판과 영상매체와의 관계 등 자신의 경험을 솔직담백하게 선보였다. 향후 역사가 어떻게 대중에게 다가설지, 특히 출판뿐만 아니라 다양한 역사프로젝트의 발굴을 위해서도 참고해야 할 자료가 될 것이다.
<특집>의 마지막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 할애했다. 김영환 편집위원이 주선해서 강경란·김명준·김진영·김해슬·이하나·야지마 츠카사·정은주·최상구 등 여덟 명의 대일과거사 활동가가 참가한 좌담은, 활동가들을 조직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출발점이 제각기 다른 ‘고민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만큼 우리는 활동가가 된 개인적 경험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들이 활동을 하게 된 동기에서 엿보이듯이 대일과거사는 집단의 이야기면서 수많은 개인의 삶이 켜켜이 쌓여있는 영역임을 확인할 수 있다. 좌담은 대일과거사 활동가들이기 때문에 겪는 공감대를 기초로 진행되었다. 식민지 경험에 따른 반일정서가 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지지기반이 된다는 점, 또한 일본사회의 변화로부터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경화가 날로 심해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새로운 운동을 준비할지 고민이라는 점 등은 대일과거사 활동의 현 상황을 보여준다. 주로 일본군‘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와 연대하면서 과거사청산운동을 전개한 활동가들이기 때문에, ‘네가 유족이냐’는 물음은 다반사로 경험했을 터. 현재 나눔의집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야지마 츠카사의 ‘나눔의집이 할머니의 역사를 팔아왔다’는 비판과, 나눔의집 정상화 이후 일본사회와 연대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싶다는 다짐이 큰 울림을 준다.
이상과 같이 이번 호 <특집>에는 전체 아홉 개의 기획을 담았다. 역사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분야를 망라해 이야기를 수집했으나, 돌이켜보면 각 분야 사이의 관계성을 점검하는 데, 그를 통해 역사가 순환되는 전체 생태계를 살펴보는 데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가 부족한 능력으로 제한된 시간에, 지면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다만 여기 흩뿌려놓은 단서들이 핏빛으로 변할지, 장밋빛으로 피어날지 그건 아직 미지수이다. 기왕 사람들에 주목했으니까,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전망도 역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성찰하고 바꿔나가는지 지켜보는 것으로 여운을 남기고자 한다.
한편 <특집> 외에도 여느 호와 마찬가지로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은 읽을거리를 준비했다. <기획>에서는 ‘구술로 본 전쟁과 일상’을 두 번째로 실었다. 김수향과 류기현이 한국전쟁기 피난과 파월전사에 각각 주목했다. <연재>도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온라인으로 만나는 역사’로 찾아왔다. 한상언은 북한 영화/문화 연구를 위한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온라인 자료 접근 방법을 소개했다. 강윤희는 일본군‘위안부’연구소의 아카이브를 상세히 해설했다. <인물로 보는 역사>에는 임경석의 ‘이탈리아판 코민테른 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에 대한 소개 마지막회를 실었다. 끝으로 <리뷰>에는 한국에서도 충분히 음미해볼 만한, 영국 중학생들의 교육환경을 다룬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에 대한 백은진의 서평을 담았다. 긴 호흡과 짧은 호흡이 함께 어우러진 글들을 <특집>과 함께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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