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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조작 피해 정당한 배상 즉각 시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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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조작 피해 정당한 배상 즉각 시행하라”

익명 (미확인) | 금, 2018/06/29- 19:35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유엔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고문피해자 결의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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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태기념치유센터와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가 25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유엔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 박해전

“정부는 고문조작사건 피해자들과 사법농단 피해자들에 대해 완전한 명예회복과 정의로운 배상을 즉각 시행하라.”

고문조작 국가범죄 피해자들을 비롯한 인권단체들은 25일 김근태기념치유센터와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 주최로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유엔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 고문피해자 결의대회’ 결의문을 통해 “대한민국은 이미 인혁당과 같은, 많은 고문조작사건 피해자들에게 죽음보다 깊은 상처를 가한 바 있다”며 이렇게 요구했다.

이들은 또 “정부는 고문가해자의 훈포상을 즉각 취소하고, 양승태 전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농단의 주범들을 적극 수사하고 처벌하라”며 “국회가 중단된 과거사의 진실규명을 위해 ‘진화위법’을 즉각 개정하고 고문 방지와 고문피해자 지원법안을 즉시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함세웅 신부(김근태기념치유센터 공동대표)는 여는 말에서 “매년 6월26일은 유엔이 정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로 이 땅의 수많은 고문피해자들을 기억하고 이들의 희생에 존경을 표하는 날”이라며 “그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함 신부는 “촛불혁명 이후 우리 사회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며 “이제는 독재와 분단으로 인한 고문과 같은 가혹한 폭력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인권 평화 국가를 만들어가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한 첫걸음으로 국가는 고문피해자들의 삶의 회복을 위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재근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 대표의원은 인사말에서 “적폐를 청산하고 상식이 통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촛불혁명에서 정권교체, 이번 지방선거까지 이어지는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라며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는 그날까지 국가와 사회, 우리 모두가 노력하는 것, 폭력의 역사를 뼈아프게 기억하고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힘을 모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의이자 적폐의 청산”이라고 밝혔다.

인 의원은 또 “고문의 끝을 꿈꾼다”며 “진정한 ‘고문의 끝’은 ‘고문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문의 상처가 없는 세상’이다. 고문의 상처가 모두 치유되는 그날을 위해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전영순 인혁당사건 피해자 가족은 고문피해자 증언에서 “지금도 눈물이 마르지 않고 고통은 끝나지 않고 있다”며 “인혁당재건위사건 국가배상 판결을 담당했던 대법관 4인 신영철 차한성 안대희 박시환을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부역한 불의한 재판관으로 고발한다”고 말했다.

증언자는 “인혁당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은 1심 판결 결과로 35년치의 피해배상금을 전액이 아닌 65퍼센트를 가지급받았다”며 “그러나 이 사건을 맡았던 대법관 4인은 하급심으로 파기환송하지 않고 피해기간 30년을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기산점을 변경해 판결하며 주었던 배상금을 다시 빼앗아 갔다”고 규탄했다.

증언자는 또 “사법 판례에 유례없는 오점을 남긴 판결이 아닐 수 없다. 빨갱이 자식으로 35년을 고통받았는데 30년 고통을 이유 없이 피해기간에서 빼버린 것”이라며 “동일사건 사형수 피해자 8명에 대해서는 피해발생시점을 기산일로 100퍼센트 전액 배상한 것과 달리 장기 수감수 가족에게만 기산일을 변경해 형평성 없이 판결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양기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는 대법원의 적폐와 관련해 “국가배상금의 이자 산정 기산일의 경우, 다른 일반 사건에는 피해가 일어난 시점을 적용하고 있지만 과거사 재심 사건에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자 차별”이라며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 침해”라고 밝혔다.

증언자는 “대법원은 2011년 1월 박시환 신영철 안대희 차한성 대법관들이 판결한 사건들을 재심의하여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며 “어떠한 연유로 느닷없이 형식과 절차를 무시한 채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판결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결의대회에 참가한 5공아람회사건반국가단체고문조작국가범죄청산연대는 자료집에 수록된 ‘아람회사건 국가범죄 청산을 짓밟은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법농단’ 제하의 글에서 “아람회사건은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을 탄압한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법농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며 “박근혜 정권은 2015년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 김지하 사건은 서울고법 국가배상 판결을 확정 처리하고 문재인 대통령 후보 지지선언을 한 아람회사건 피해자들의 서울고법 국가배상 판결은 대법원에서 짓밟았다”고 밝혔다.

이들은 “서울고법이 인정한 아람회사건 일실수입 국가배상을 김지하 사건과는 딴판으로 모두 무효화한 박근혜 정권의 대법원 사법농단은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를 부정하며 과거사 청산을 짓밟은 또 하나의 국가범죄로서 원천무효”라며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와 대법원은 ‘주요 재판사건 처리시 비공식적인 대화 채널을 적극 가동하는 기조를 유지했다’고 특별조사단 3차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특검을 통하여 아람회사건 피해자들을 짓밟은 박근혜 정권과 대법원의 정치공작의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또 “‘국가는 아람회사건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를 문재인 정부가 하루빨리 이행하기를 바란다”며 “문재인 대통령과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적폐 청산과 피해자 원상회복을 위한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이 사회를 맡아 ‘고문피해자의 삶의 회복을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주제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민가협 유가협 민청학련계승사업회 민청련동지회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인권재단들꼿이 공동주관하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광주트라우마센터가 후원했다.

<2018-06-26> 신문고 뉴스

☞기사원문: “고문조작 피해 정당한 배상 즉각 시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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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전주]

[앵커]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기획보도, 세 번째 순서입니다.

친일인사의 부끄러운 행적을 사실대로 밝히고 반성의 기회로 삼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인데요.

여전히 그들을 미화하거나 역사를 왜곡한 사례가 적지 않아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안승길 기자입니다.

[리포트]

일등비행사로 이름을 떨치고, 조선 최초 항공사와 해방 후 첫 민간항공사를 세운 신용욱.

일본군에 비행기를 납품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두 차례나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고향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지고, 고창군 블로그에는 찬양 일색의 글이 실렸는데, 이번 친일잔재 보고서에 역사 왜곡 사례로 지적되자 해당 글은 삭제됐습니다.

명실을 다 같이 추호도 다름이 없는 ‘닛본징’이 되어야 한다.

일제의 기세가 치솟던 1942년, 채만식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은 글입니다.

해방 후 소설 ‘민족의 죄인’을 통한 참회에도 씻을 수 없는 친일 행적.

보고서는 지난해 군산시가 블로그에 실은 채만식 관련 글은 역사 왜곡과 축소 사례로 지적했고, 그의 이름을 딴 문학관과 도서관, 또 다른 친일 작가인 서정주의 호를 딴 고창의 미당시문학관 등의 이름을 바꿀 것을 제안했습니다.

[군산시 관계자/음성변조 : “이 자료를 받은지 얼마 안 되서요. 구체적 논의는 아직 안 된 상태인데. 포럼이나 워크샵을 통해 여론을 수렴하려 노력하고 있었고요.”]

보고서에 미처 실리지 않은 친일인사도 적지 않습니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로 제헌의회 국회의원까지 지낸 배헌 선생.

윤치호의 주도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친일단체 배영동지회 이리 부회장을 맡았고, 전쟁 협력 조직인 조선임전보국단에서 활동했으며, 일제의 식민통치 하부 조직으로 운영된 이리 읍회의원을 10년 넘게 지낸 사실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김재호/민족문제연구소 : “있는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 해방 이후 친일과 독재로 점철되며 그들이 한국 사회의 기득권을 장악했잖아요.”]

왜곡과 미화를 걷어내고 부끄러운 역사의 민낯을 마주하는 건 역사 바로 세우기의 첫걸음입니다.

KBS 뉴스 안승길입니다.

촬영기자:신재복

<2021-03-10> KBS 

☞기사원문: [친일잔재 청산 기획]③ 왜곡과 미화로…숨겨진 부역의 조각들 

※관련기사 

KBS: [친일잔재 청산 기획]② 청산 언제쯤?…일상 곳곳에 ‘일제 흔적’  

KBS: [친일잔재 청산 기획]① 전북 첫 친일잔재 전수조사..친일파 118명의 ‘굴레’

목, 2021/03/11-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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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자문으로 YTN 라디오와 경기도가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올해 10편을 시작으로 내년까지 꾸준히 제작, 방송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우원식 국회의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심산 김창숙 손녀 김 주)

☞ 10편 : 광복군아리랑(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장병화)

☞ 9편 : 앞으로행진곡(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정남기)

☞ 5편 : 격검가(동암 차리석 아들 차영조)

☞ 4편 : 압록강행진곡(광복군 김영관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석주 이상룡 증손자 이항증)

☞ 2편 : 안중근옥중가(함세웅신부)

☞ 1편 : 국치추념가(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목, 2021/03/11-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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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1주기를 맞아

고 이이화 선생. <한겨레> 자료사진

오는 18일 이이화 선생 1주기를 맞아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가 추모글을 보내왔다.

경황 중에 선생을 떠나보낸 지 어느덧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코로나 19 감염증이 번지고 있던 어수선한 형편에 제대로 추모의 뜻을 모을 겨를도 없이 놓아드려야만 했다. 고인을 따르던 역사학계와 시민사회의 많은 후진이 안타깝게 여겼지만, 격식을 싫어했던 생전의 선생을 떠올리면 간소하면서도 진정이 담긴 장례가 오히려 어울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선생은 시대의 반항아이자 학계의 이단아였다. 한국사 전 분야에 두루 해박했으나 그가 집중했던 관심사는 동학농민혁명, 일제의 전쟁범죄와 친일문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등 민중의 역사, 약자의 역사였다. 남들이 쉬이 발 담그지 않는 분야를 기꺼이 전문으로 삼았다. 그의 풍모는 그냥 학자라기보다는 세상을 바꾸고자 한 투사에 가까웠다. ‘역사학계의 녹두장군’이란 헌사에 결코 모자람이 없는 삶이었다.

다방면에 걸쳐 방대한 성과를 남긴 만큼 선생의 업적을 일일이 열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1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는 그의 깊고도 넓은 학문세계를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전 22권에 달하는 한국통사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는 학술서적으로서는 전무후무한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를 기록함으로써, ‘강단의 역사’에서 ‘대중의 역사’로 역사학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는 신기원을 열었다.

전 22권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대중의 역사로 역사학 지평 넓혀
동학혁명 농민군 위상 자리매김도
‘만화 한국사’ 내고 아이들 스타로
선생의 길 따라가야 할 책무 남아

동학농민혁명과 농민군의 위상을 제대로 자리매김한 일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30권을 간행하여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는 한편, ‘전국 순회강연’으로 그 역사적 의의를 재정립하는 데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또한 특별법 제정에 진력하여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를 통한 진실규명과 유족의 명예회복에 커다란 진전을 이뤄냈으며 이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종로의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과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은 수십 년간에 걸친 선생의 노고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응답이기도 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설립, <친일인명사전> 편찬,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한일 과거사 청산,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와 촛불혁명 등 당대 역사문화운동의 맨 앞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엄동설한의 거리에서 사자후를 터뜨리며 역사를 변조하려는 무리를 꾸짖던 선생의 기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학술연구와 현실참여를 온몸으로 일치시킨 시대의 참스승이었다.

살아생전 선생께서 가장 좋아했던 별호는 ‘역사 할아버지’였다. <만화 한국사 이야기>가 나온 뒤 선생은 어린이들 사이에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어디에서든 만나면 “역사 할아버지다!”라고 환호했다. 청소년들이 우리 역사에 이렇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의 쉬운 글쓰기와 신선한 시각이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이화의 최대 업적은 역사학의 대중화와 사회화”라고 입을 모은다.

선생은 역사학계의 거목이었다. 그러나 많은 후학에게는 인자한 어른이자 다정한 벗이었다. 그는 문벌 학벌 직위 연배 등 이른바 족벌과 서열문화를 배격했다. ‘꼰대’스러움을 철저히 혐오했다. 그래서 항상 젊은이들과 소통하면서 술잔을 나누며 격의 없는 토론을 즐겼다. 그 분과 함께 했던 나날들, 유쾌했던 그 자리가 무척이나 그립다.

선생의 후광이 빛나는 만큼 남긴 자취 또한 선연하다. 그의 부재가 던져주는 상실감도 실감 있게 다가온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뚜렷한 ‘역사의 이정표’를 남겨 놓았다. 우리에게는 그 길을 벗어나지 않고 따라가야 할 책무만 남아있을 뿐이다.

<2021-03-16> 한겨레

☞기사원문: “아이들에겐 ‘역사 할아버지’ 후학에겐 ‘인자한 벗’이셨죠”

수, 2021/03/17-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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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가득한 전장의 참상 낱낱이 기록하다

<태평양실기집>을 남긴 고 장윤만씨.
만화사우곡’ 마지막 부분.

◇ 오키나와 전투, 전범 일본군의 ‘자살과 전멸’

오키나와 전투(1945년 4월1일~6월23일)는 태평양 전쟁 말기 전범인 일본군의 ‘자살과 전멸’이 유도된 대표적인 전투다. 미군은 전투보고서에서 “오키나와에서 인간신경이 무너지는 원인은 광적인 적과의 끝없는 근접전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광적인 근접전이란 “덴노 헤이카 반자이” 라며 달려드는 자살돌격을 의미했다.

당시 일본 군부는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도록 온 국민을 세뇌시켰다. 일본인들은 ‘천황=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사후엔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다고 믿게 됐다. 이렇게 평범한 일본인들은 살인마로 둔갑됐다. 이미 수년전, 일본군은 1937년 난징 대학살에서 ‘100인 참수경쟁’을 벌였고, 이 사실을 신문에까지 냈다. 일본군은 1945년 패망 직전에도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하며, 할복자살·자살돌격의 광란을 이어갔다.

1945년 미군은 전투보고서에서 “일본군 사상자는 6월 상반기 동안 하루 평균 1,000명 이었다. 하반기엔 6월19일 2,000명, 20일 3,000명, 6월21일 4,000명 이상이었다”며 6월19일 이후엔 대부분 자살한 일본군 사상자수를 보고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의 원주민들에게도 ‘미군이 강간하고 잔인하게 죽일 것’이란 거짓말로 겁을 줘, 적어도 9만5000여명의 집단자살을 유도했다. 미군측 추산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77,166명이었다. 미군 14,009명이 전사했고 영국군도 82명이 전사했다.

1945년 4월 게라마 제도에서 미 제77사단에 나포된 자살공격보트. 섬 전체에 잘 흩어져 위장된 은신처에서 350척 이상이 발견됐다. /사진제공=USA-P-Okinawa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해병대와 동굴 등에서 나온 오키나와의 주민과 어린이. /사진제공=미국국립문서보관소

◇ 오키나와 게라마 제도에서 미군포로가 된 장윤만씨

미군은 오키나와 본섬의 전투를 앞두고 3월 26일 오키나와 24㎞ 서쪽 섬인 게라마 제도의 자마미도, 아카도에 우선 상륙했다. 미군은 이 섬들에 있던 350척의 자살특공보트(신요)를 제거했다. 게라마의 주요진지는 5일 만에 미군이 점령했다. 게라마 도카시키도의 산 속에 숨은 일본군 사령관과 패잔병 등 300명은 미군의 식량지원을 받으며 종전(9월) 까지 3개월간 무혈대치만 했다.

게라마 제도에는 ‘아리랑 비’가 세 군데나 있다. 도카시키도에는 故배봉기 할머니 등 조선인 위안부 7명이 끌려와 있었고, 오키나와 전체에는 60여개 위안소에 600여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끌려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조사·발표한 ‘오키나와 강제동원 조선인 희생자 피해실태'(책임연구원 김민영 군산대 교수)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은 아카도에서 도망가다 잡힌 조선인 12명을 총살했다. 총살 장면을 목격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총살되기 직전에 쌀밥 한 공기씩을 받아들자 정신없이 밥을 퍼먹고는 자신의 키 길이만큼의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구덩이 앞에 서면 일본군이 총을 쏘아 구덩이로 떨어졌다. 아직 죽지 않아 구덩이에 덮은 흙이 움직이면 일본도로 몇 차례나 찔러서 죽였다고 한다.

장윤만씨는 1945년 6월8일 자마미도의 산에서 미군에 체포 됐다. 오키나와 제1포로수용소를 거쳐 1946년 11월20일 그리운 경북 상주의 집으로 귀환 했다.

오키나와 포로수용소에 도착한 조선인 노동자(군속)들. /사진제공=민족문제연구소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며 2005년 5월 오키나와현 요미탄촌에 건립한 ‘부조’와 ‘한의 비석’. /사진제공=민족문제연구소

◇ 태평양실기집 징용거귀고생기 완성

귀환 후 장씨는 1948년 2월 ‘대동아전쟁 실기집’을 완성했다. 본문의 첫제목을 ‘왜정시대징용거귀고생기(倭政時代徵用去歸苦生記)’로 했다. ‘대동아전쟁실기집’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의해 세상에 빛을 보면서 ‘태평양전쟁실기집’으로 변경됐다.

이 실기집을 감수한 반병률 교수(한국외국어대 사학과)는 ▲세남매의 아버지인 장윤만님이 거주지인 공성면 사무소에 징발·집결한 이후 오키나와에서 포로가 되기 까지의 전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 희귀 자료다 ▲오키나와 현지로 수송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에서 한인·일본인 관리들과 군인들의 말과 행위, 노예선을 방불케 하는 수송선의 이송과정 등을 자세히 기록했다▲자살특공보트의 준비와 계획, 조선인에 대한 감금·만행· 학대·살육 등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만화사우곡>은 죽은 동료에게 쓴 글의 형식을 빌어, 고국산천과 동료를 그리워하는 자신의 심정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점에서 특별한 문학적 가치가 있다. 드라마·영화·그림 등 문화 예술의 소재로서 활용가치가 높다고 분석했다.

/글·정리 김신호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17> 인천일보

☞기사원문: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3

※관련기사 

인천일보: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1

인천일보: [일제 강제동원 피맺힌 증언] 오키나와, 그 지옥의 조선인 2

금, 2021/03/19-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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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회부는 지난 3월 1일 3.1운동 102주년을 맞아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명단과, 그들의 적나라한 반민족 행위를 담은 일본 외무성 문서를 최초 발굴해 보도했다.

간도참변은 1920~21년 일제가 봉오동·청산리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지역 한국인과 독립운동가를 다수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의 ‘공적’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학계를 포함해서도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입장에서 이들 48명은 충실한 하수인이지만, 우리에게는 동족 학살에 가담한 반역자다.

48명의 한국인 경찰관들의 역할은 다양했다. 첩보 수집, 길 안내, 통역, 독립운동가 회유 등만이 아니라 직접 민간인 학살에도 가담했다.


[연관기사]

[단독] “동족 학살·독립군 체포”…간도참변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발굴

■ 100년 전 민족학살 가담한 한국인 경찰, 어떻게 발굴했나?

KBS는 외부 전문가들과 함께 사료 발굴을 기초로 한 탐사보도를 꾸준히 해왔고, 삼일절이나 광복절 등 시의성이 있을 때마다 단독 보도를 계속해 왔다. 이번 자료 역시 이런 꾸준한 추적 과정에서 발굴된 것이다.

KBS는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 일본 외무성(우리나라 외교부에 해당) 산하 자료실 ‘외교사료관’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과 관련된 고문서 다수를 복사해왔다.

이후 전문가들과 함께 해당 문서들에 대한 번역과 검토 작업이 꾸준히 이뤄졌고, 지난해 가을,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들에 대한 자료를 추려낼 수 있었다. 정확히 백 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일제가 이들의 공적을 결재한 문서였다.

KBS는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외부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추가 취재에 돌입했고, 본격적인 분석 작업을 통해 3.1절에 맞춰 보도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수록된 조선인 경찰관 9명. 순사 우경태, 구봉서, 김종섭, 백창돈, 김배인, 장국환, 김영후, 성빈, 서상순은 종군기장(일제가 전쟁에 참여한 군인, 경찰 등에 수여하는 상훈 중 하나)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 KBS 발굴 자료에 보훈처 “독립유공자 발굴에 활용”

보도 이후 남은 과제는 크게 2가지다. ▲문서에 등장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유공을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고위 경찰관들의 친일 이력을 병기할 것인가다.

먼저 한국인 경찰관들로부터 체포를 당한 독립운동가들의 유공을 심사하는 문제다. 이번에 발굴한 문서에는 간도참변 과정에서 체포된 한국인이 17명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유공을 인정받고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은 4명에 불과하다.

KBS 보도 이후 국가보훈처는 해당 자료를 제공해달라고 KBS에 요청했고 취재진은 이에 협조했다. 보훈처는 “자료를 분석해 그 결과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 독립유공자 발굴과 공적 검증에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독립유공자 강우범 선생(이명: 강구우)의 추가 독립운동 행적을 추정할 만한 내용이 자료에 등장한 것과 관련해서도, 보훈처는 “인적사항 및 활동내용 등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진행해 동일인이 확인될 경우 공훈록 내용을 보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경찰, 역대 기관장 친일 이력 전수조사…”왜 이리 소극적인지”

또 다른 과제는 친일 이력이 있는 고위 경찰관들의 이력 처리 문제다.

KBS는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 조사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실린 역대 청장과 서장 70여 명(중복 포함)을 확인해 보도한 바 있다. 이들은 모두 친일 이력에 대한 병기 또는 언급 없이 재직 사실만 기재돼 있었다.

KBS의 보도 이후 경찰은 ‘친일인명사전’ 및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과 역대 경찰 기관장 명단 간 대조 작업에 착수했다.

친일 이력을 병기하는 문제와 관련해 경찰은 “정부 부처 전체가 동일 기준에 따라 공통 적용할 사안”이라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기도는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이력이 있는 사람의 경우 그 사실을 병기하고 있다.

경찰은 또 1949년 6월 6일 경찰이 친일파 조사를 위한 헌법기구였던 반민특위를 습격한 사건과 관련해서도 “지난해 말 출범한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라 경찰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경찰의 입장에 대해 역사단체들은 대체로 아쉽다는 반응이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일제강점기 경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기구였고, 그 당시 조선인 친인 경찰은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다”며 “해방 후 대한민국 경찰이 친일 경찰을 청산하자는 데 왜 이렇게 소극적인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경찰은 2019년 임시정부 초대 경찰청장인 김구 선생의 동상을 경찰청 청사 안에 세우며 과거사 청산 의지를 다졌다.

이후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을 발굴하는 등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유독 친일의 역사, 다시 말해 자신들의 ‘그늘’에 대해선 뚜렷한 입장 표명을 미루고 있고 청산 작업의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송락규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20> KBS 

☞기사원문: [취재후] 동족학살 가담한 한국인 경찰, 어떻게 발굴했나?

일, 2021/03/21-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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