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고문조작사건 피해자들과 사법농단 피해자들에 대해 완전한 명예회복과 정의로운 배상을 즉각 시행하라.”
고문조작 국가범죄 피해자들을 비롯한 인권단체들은 25일 김근태기념치유센터와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 주최로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유엔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 고문피해자 결의대회’ 결의문을 통해 “대한민국은 이미 인혁당과 같은, 많은 고문조작사건 피해자들에게 죽음보다 깊은 상처를 가한 바 있다”며 이렇게 요구했다.
이들은 또 “정부는 고문가해자의 훈포상을 즉각 취소하고, 양승태 전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농단의 주범들을 적극 수사하고 처벌하라”며 “국회가 중단된 과거사의 진실규명을 위해 ‘진화위법’을 즉각 개정하고 고문 방지와 고문피해자 지원법안을 즉시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함세웅 신부(김근태기념치유센터 공동대표)는 여는 말에서 “매년 6월26일은 유엔이 정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로 이 땅의 수많은 고문피해자들을 기억하고 이들의 희생에 존경을 표하는 날”이라며 “그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함 신부는 “촛불혁명 이후 우리 사회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며 “이제는 독재와 분단으로 인한 고문과 같은 가혹한 폭력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인권 평화 국가를 만들어가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한 첫걸음으로 국가는 고문피해자들의 삶의 회복을 위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재근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 대표의원은 인사말에서 “적폐를 청산하고 상식이 통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촛불혁명에서 정권교체, 이번 지방선거까지 이어지는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라며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는 그날까지 국가와 사회, 우리 모두가 노력하는 것, 폭력의 역사를 뼈아프게 기억하고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힘을 모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의이자 적폐의 청산”이라고 밝혔다.
인 의원은 또 “고문의 끝을 꿈꾼다”며 “진정한 ‘고문의 끝’은 ‘고문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문의 상처가 없는 세상’이다. 고문의 상처가 모두 치유되는 그날을 위해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전영순 인혁당사건 피해자 가족은 고문피해자 증언에서 “지금도 눈물이 마르지 않고 고통은 끝나지 않고 있다”며 “인혁당재건위사건 국가배상 판결을 담당했던 대법관 4인 신영철 차한성 안대희 박시환을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부역한 불의한 재판관으로 고발한다”고 말했다.
증언자는 “인혁당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은 1심 판결 결과로 35년치의 피해배상금을 전액이 아닌 65퍼센트를 가지급받았다”며 “그러나 이 사건을 맡았던 대법관 4인은 하급심으로 파기환송하지 않고 피해기간 30년을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기산점을 변경해 판결하며 주었던 배상금을 다시 빼앗아 갔다”고 규탄했다.
증언자는 또 “사법 판례에 유례없는 오점을 남긴 판결이 아닐 수 없다. 빨갱이 자식으로 35년을 고통받았는데 30년 고통을 이유 없이 피해기간에서 빼버린 것”이라며 “동일사건 사형수 피해자 8명에 대해서는 피해발생시점을 기산일로 100퍼센트 전액 배상한 것과 달리 장기 수감수 가족에게만 기산일을 변경해 형평성 없이 판결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양기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는 대법원의 적폐와 관련해 “국가배상금의 이자 산정 기산일의 경우, 다른 일반 사건에는 피해가 일어난 시점을 적용하고 있지만 과거사 재심 사건에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자 차별”이라며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 침해”라고 밝혔다.
증언자는 “대법원은 2011년 1월 박시환 신영철 안대희 차한성 대법관들이 판결한 사건들을 재심의하여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며 “어떠한 연유로 느닷없이 형식과 절차를 무시한 채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판결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결의대회에 참가한 5공아람회사건반국가단체고문조작국가범죄청산연대는 자료집에 수록된 ‘아람회사건 국가범죄 청산을 짓밟은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법농단’ 제하의 글에서 “아람회사건은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을 탄압한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법농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며 “박근혜 정권은 2015년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 김지하 사건은 서울고법 국가배상 판결을 확정 처리하고 문재인 대통령 후보 지지선언을 한 아람회사건 피해자들의 서울고법 국가배상 판결은 대법원에서 짓밟았다”고 밝혔다.
이들은 “서울고법이 인정한 아람회사건 일실수입 국가배상을 김지하 사건과는 딴판으로 모두 무효화한 박근혜 정권의 대법원 사법농단은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를 부정하며 과거사 청산을 짓밟은 또 하나의 국가범죄로서 원천무효”라며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와 대법원은 ‘주요 재판사건 처리시 비공식적인 대화 채널을 적극 가동하는 기조를 유지했다’고 특별조사단 3차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특검을 통하여 아람회사건 피해자들을 짓밟은 박근혜 정권과 대법원의 정치공작의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또 “‘국가는 아람회사건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를 문재인 정부가 하루빨리 이행하기를 바란다”며 “문재인 대통령과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적폐 청산과 피해자 원상회복을 위한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이 사회를 맡아 ‘고문피해자의 삶의 회복을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주제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민가협 유가협 민청학련계승사업회 민청련동지회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인권재단들꼿이 공동주관하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광주트라우마센터가 후원했다.
오늘(1일)은 3.1운동 102주년이다. 1919년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은 그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이듬해인 1920년 간도 지역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전으로 이어졌다.
일제는 곧바로 보복에 나섰다. 간도 지역 독립군을 말살한다는 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잔인하게 학살했다. 1920년 10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벌어진 ‘간도참변’이다.KBS는 오늘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재간도 일본총영사가 결재한 일본 외무성 문서를 단독 발굴했다. 오늘 밤 9시 뉴스에서 집중 보도할 예정이다.
여기에는 간도참변에 참가했던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일제에게는 유능한 친일 한국인 경찰, 우리에게는 동족학살에 가담한 민족의 반역자들이다.
■ KBS, 간도참변 참가 한국인 경찰관 48명 공적서 최초 발굴
KBS는 일본 외교사료관 ‘서훈 및 행상’ 분류 자료 가운데 1921년 작성된 ‘간도 사건 공적조서 보고’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명세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가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에게 상훈을 주기 위해 작성한 600쪽 분량의 문서다.
이들은 주로 첩보 수집 및 보고, 길 안내, 통역, 독립운동가에게 변절을 강요하는 귀순 업무 등을 맡았는데 독립운동가 체포와 민간인 마을 ‘초토화’에도 직접 가담했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의 구체적인 반민족 행위가 밝혀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 한국인 경찰관, 독립운동가 체포·민간인 학살에 가담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훗날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강(金剛) 선생. 선생은 1920년 11월 간도참변 당시 일본 경찰에 피살됐다.
KBS가 찾은 공적서에는 한국인 순사 김학원이 “김강 체포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민간인 부락에 침입해 학살에 가담한 정황도 확인된다. 순사 백원장은 한인 마을 5곳을 급습하는 데 가담했고, 독립운동가 체포에도 앞장섰다.
이번에 발굴한 공적서를 보면, 간도참변의 많은 사건 가운데 가장 끔찍한 학살로 기록되는 ‘장암동 학살 사건’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도 확인된다. 당시 일본군과 경찰은 4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고, 시신을 모아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순사 박원식에 대한 공적서를 보면, 일본군이 장암촌 부근에서 소탕하는 동안 “한국인 조사와 가택 수색에 용감히 행동한 공적이 뛰어나다”고 적혀 있다. 장암동 사건의 가담자들이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 한국인 경찰관, 독립운동가 체포·민간인 학살에 가담
한국인 경찰관은 독립군이 숨겨놓은 무기를 수색해 압수하는 역할도 맡았다.
“엄청나게 쌓인 눈을 치우고, 보병총 35자루를 압수한 공로”가 인정받는가 하면, “왕복 8리(3km)를 달려 독립운동에 사용된 말을 노획”해 오기도 했다.
김광만 KBS 객원연구원은 “현장에 있었던 부대장들이 간도 토벌에 참여했던 한국인 경찰들에 대한 업적을 공적서로 써주고, 간도총영사관이 공적서를 취합한 다음에 외무성에 보고했다”며 “우리나라 동포를 학살하는 데 앞장섰던 학살자들의 고백록이자 죄상 기록”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종로경찰서, 용산경찰서, 청주경찰서 등 전국 각지에서 파견된 친일 한국인 경찰관들이었다.
만주 지역 항일운동 연구의 전문가인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간도대학살 때 조선인 경찰이 참여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며, “일제가 조선인 경찰을 간도 현지에 있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최초의 발굴 자료”라고 강조한다.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증보판>에 등재 예정
올해 설립 30주년을 맞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증보판’ 발간을 계획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증보판에 KBS가 발굴한 친일 경찰관들의 이름을 올리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독립운동가 체포, 탄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도 확인되고, 일제로부터 종군기장을 실제로 수여한 사람들도 확인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수가 친일인명사전 개정 증보판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또 다른 과제도 남아있다. 공적서에는 간도참변 당시 체포된 것으로 기록된 한국인 17명의 실명이 등장한다. KBS 취재진이 확인한 결과, 이 가운데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사람은 4명에 불과하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했을지도 모르는 이들에 대한 보훈처의 공적 발굴 노력이 필요하다.
KBS 사회부는 정확히 100년 전 오늘(1921년 3월 1일) 작성된 600쪽 가량의 일본 외무성 문서를 단독 발굴했다. 일제가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을 일제 입장에서 적은 문서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곧바로 간도참변이라는 끔찍한 보복에 나선다. 독립신문에 기술된 간도참변 희생자 규모는 3천여 명. 일제는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했다.
일제가 작성한 공적서에 이름을 올린 경찰들은 일제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이들이지만, 우리에게는 같은 민족을 붙잡고 살해하는 데 가담한 반민족 행위자들이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들의 구체적 행위가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번 발굴 문서를 보면 이들이 ‘동족학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소상히 기록돼 있다.
KBS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공동 취재로, 이번에 발굴한 공적서에 기재된 해당 경찰관들의 소속과 계급, 주요 공적 내용을 토대로 이들의 행적을 추적해봤다.
■ 일제로부터 상훈 받은 9명…연금 받고 진급까지
간도참변에 참가한 한국인 경찰 48명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상훈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으로만 9명이다. 단서는 1928년 8월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관보의 부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인 경찰관 9명이 1920년 12월 25일 ‘종군기장’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종군기장은 일본이 대외침략을 기념하며 전쟁에 참전한 이들에게 수여하던 일종의 상훈이다. 러일전쟁, 중일전쟁 등 각각의 전쟁마다 종군기장의 종류도 달랐는데, 간도참변에 가담했던 이들 역시 종군기장을 받았다.
충북 청주경찰서 순사 백창돈(白昌敦)은 1920년 5월 17일 간도 지역에 파견됐다. 그의 주요 공적은 (1) 1920년 10월 2일 훈춘사건 당시 적을 경계하고 재류민을 보호한 것(2) 토벌대에 배속돼 귀순자 처리 및 선전 업무 종사 등이다. 물론 이때의 ‘적’은 우리에겐 독립운동가를 뜻한다.
간도참변 이후 그의 행적을 따라가봤다. 조선총독부 연금자료에서 추가 행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간도참변 이듬해인 1921년 본래 소속돼 있던 충북 청주경찰서로 귀환한다. 이후 1930년 제천경찰서로 근무지를 옮긴 뒤 퇴직했다.
재간도일본총영사관에서 근무한 경부보 최태욱(崔泰郁). 간도참변 당시 일제로부터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된 인물이다.
그의 주요 공적은 (1) 밀정 사용 및 은닉 총기의 소재지에 관해 내사, 독립운동가 행동 조사에 관한 사무에 복무해 그 공적이 현저(2) 1920년 10월 5일~7일 출동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총영사관 경찰관과 재향군인으로 경비대를 조직해 임무를 완수 등이다. 공적서는 그가 1920년 10월부터 시작된 간도참변 당시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가리킨다.
그의 추가 행적은 1926년 1월 16이 경성일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가 간도총영사관 소속 다른 경찰관들과 함께 승급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그의 계급은 경부보가 아닌 경부로 기재돼 있다. 간도참변 가담 당시 경부보였던 최태욱이 참변 이후 불과 5년 사이 경부로 진급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경찰 계급 체계는 위로부터 경무총장-경무부장-경무관-경시-경부-경부보-순사 순으로 정비돼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인 출신 경찰들은 순사 계급에 머물렀고,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경시나 경부급 인사가 되기는 어려웠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경부보 최태욱의 공적서. 일제는 그를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했다.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당시 조선인이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하는 경우는 특수한 경우”라며 ” 1920년대 당시 조선인 경부는 각 도에 한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최태욱이 어떤 연유로 경부로 승급했는지는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그가 간도참변에 가담함으로써 얻은 공적이 직간접적으로 진급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KBS는 간도참변에 차출된 한국인 경찰관 48명 가운데 종로경찰서, 용산경찰서, 청주경찰서, 공주경찰서 등 소속 경찰서가 기재된 이들의 추가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청에 공식 질의했다. 경찰은 ” 인사관리시스템에서 연관성이 있는 인물이 검색되지 않는다”며 “인사기록이 소실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도 경찰이 확보하지 못한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정경찰서(현재:서울 중부경찰서) 소속으로 1920년 간도참변에 가담한 순사 장국환(張國煥). 취재진은 해방 후인 1952년 정부가 발간한 대한민국 직원록에서 경기도 경찰국 간부로 재직한 장국환을 찾을 수 있었다. 한자까지 일치하고 계급 승급 가능성이 있어 동일인 여부를 확인해야만 했다.
간도참변에 가담했다가 일제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은 순사 장국환(위)과 해방 후인 1952년 경기도 경찰국 소속 간부로 재직한 장국환(아래). 경찰은 두 인물 모두 인사기록이 없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경찰은 두 인물의 연관성을 확인해줄 수가 없었다. 장국환에 대한 인사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1952년 경기도 경찰국에 재직한 장국환은 정부 기록물에 등장하는 인물임에도 정작 경찰청이 보유한 인사기록에는 빠져 있었다. 경찰은 인사기록을 기준으로 인사관리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에 일부 누락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구 동상 세운 경찰, 친일 잔재 청산은 사실상 ‘전무’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의 흉상이 2019년 경찰청에 들어섰다.
경찰은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이었던 김구 선생의 동상을 경찰청 본청 청사 안에 세웠다.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밝히는 차원이었다. 경무국장은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이다.
2년여가 지난 지금, 친일 잔재 청산은 얼마나 이뤄졌을지 따져봤다. KBS는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조사했다. 이 가운데 70여 명(중복 포함)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었는데, 각 경찰청·경찰서 홈페이지에는 이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었다.
충북 영동경찰서 8대 서장 김상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지만, 영동경찰서 대회의실에 별도의 친일 이력 표기 없이 이름이 걸려 있다.
심지어 일부 경찰서 건물 안엔 여전히 친일 경찰의 사진이나 이름이 내걸려 있다. 충북 영동경찰서 8대 서장이었던 김상규도 대표적인 친일 인사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고등 형사로 근무하며 사상범과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일에 앞장섰다.
경찰은 이에 대해 “재직 이력을 있는 그대로 표기했을 뿐 선양 의도는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친일 이력을 함께 또렷하게 적고 있다. 경기도는 지난해부터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은 약력에 친일 관련 기록을 표기하고 있다.
경기도 김홍국 대변인은 “친일 이력이 있는 인사의 재직 이력을 지우는 것도 사실 왜곡인 만큼, 기록 삭제 없이 친일 행적을 병기했다”라며 “친일 잔재 청산과 도민의 알 권리를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 ‘반민특위’ 습격한 경찰…사과 요구에도 여전히 묵묵부답
경찰은 2019년 이른바 ‘역사기록 전담팀’까지 꾸려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을 발굴하는 등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유독 친일의 역사에 대해선 뚜렷한 성과를 내지 않고 있다. 경찰은 2005년에도 과거 반민족 행위를 기록하는 새로운 경찰 역사서를 발간하고자 편찬위원회까지 꾸렸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고 지금까지 아무런 진척이 없다. ‘빛’만 드러내고 ‘그늘’은 외면하는 꼴이다.
해방 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도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반민특위는 제헌국회가 구성한 헌법기구였지만, 경찰은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위 위원과 직원, 특경대원 등 35명을 연행했다. 공권력이 공권력을 습격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반민특위 활동 기한은 본래 임기보다 10개월 축소됐고 같은 해 8월 31일 특위 활동은 종료됐다. 친일파 청산 과제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학계와 시민사회단체에서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6월 6일을 ‘국치일’로 보는 이유다.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역사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은 2005년부터 반민특위 습격 사건과 관련해 경찰에 사과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하지만 아직도 경찰의 공식 입장은 나온 바 없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기회가 될 때마다 경찰 지도부에게 과오를 과감하게 덜어내야 한다는 제안을 했지만, 반민특위 와해에 대한 진정한 사죄라든지 사건 피해자에 대한 배상 노력 등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KBS 사회부는 삼일절을 맞은 오늘밤 [9시 뉴스]에서 이번에 단독 발굴한 자료를 자세히 소개하는 한편, 취재진의 추적 경위도 생생한 영상으로 전할 예정이다.<
중국에서 확인된 위안소만 1000곳 넘어
대만까지 1200곳 이상…”추가 발견 계속”
중 전문가 “역사상 유례없는 부끄러운 사건”
일본군에 점령된 중국 상하이(上海) 거리의 전쟁 폐허 속에서 일본군 위안소를 가리키는 ‘황군위안소’ 안내 표지가 붙어 있다. 이 사진은 1937년 말에서 1938년 초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쑤즈량 상하이사범대 교수 제공=연합뉴스
중국 상하이(上海)시 훙커우(虹口)구 둥바오싱(東寶興)로에는 전면에 아치 모양 창문이 나란히 박힌 오랜 2층 서양식 벽돌 건물이 서 있다.
이 건물에는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세계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가 바로 이 건물에 있던 것이다.
일본군은 1931년 11월부터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 패전 때까지 이곳에서 일본군 장교를 위한 위안소인 ‘다이살롱'(大一沙龍)을 운영했다.
다이살롱은 세계 최초로 들어선 일본군 위안소였다. 또 가장 오래 운영된 일본군 위안소이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 ‘다이살롱’이 있던 건물. 지난달 28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구 둥바오싱(東寶興)로의 옛 ‘다이살롱’ 건물 앞을 한 행인이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존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동원성을 부정하는 취지의 논문을 써 거센 비판에 직면한 가운데 중국 지역에서만 다이살롱처럼 실제 존재한 것으로 확인된 일본군 위안소만 해도 1천 곳을 훌쩍 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는 28일 연합뉴스에 지금까지 중국에서 각종 사료를 통해 실재한 것으로 확인한 일본군 위안소가 최소 1천127곳에 달한다고 밝혔다.
현행 성(省)·직할시별로 보면 후베이성이 295곳으로 가장 많았고 산둥성(208곳), 저장성(183곳), 상하이시(172곳), 장쑤성(70곳), 안후이성(70곳), 후난성(50곳), 광둥성(42곳), 윈난성(37곳) 등이다.
당시 한국처럼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에서도 최소 137곳의 위안소가 운영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센터 측은 설명했다.
대만까지 합쳤을 때 중국어권 지역에서 발견된 일본군 위안소는 ‘1천264곳 이상’이다.
센터 측은 1천여 곳에 달하는 일본군 위안소가 각종 사료를 통해 철저히 확인된 곳만 추려낸 것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동북3성, 베이징시, 톈진시, 허난성, 허베이성, 푸젠성, 하이난성 등 일본군 위안소가 다수 존재했던 다른 지역의 경우 일본군 위안소의 전체적 규모를 산정하는 작업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어 향후 존재가 확인된 일본군 위안소 규모가 수천 곳으로 급증할 것으로 센터 측은 전망했다.
나아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중국 외에도 동남아시아 각국 등 각지에서 다수의 위안소를 운영한 사실까지 고려하면 전체 일본군 위안소 운영 규모는 훨씬 클 수밖에 없다고 센터 측은 설명한다.
이번에 1차 규모가 드러난 중국 내 위안소는 한반도 출신 위안부들이 큰 고통을 받던 장소다.
센터 소장인 쑤즈량(蘇智良) 상하이사범대 교수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사실 한국 출신 위안부 여성들이 주로 피해를 본 곳이 중국”이라며 “일본이 중국에 주둔하면서 북쪽의 헤이룽장에서 남쪽의 하이난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든 한국 위안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에서 확인된 것만 해도 1천 곳이 넘는 방대한 규모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지적한다.
중국 위안부 문제 전문가 쑤즈량 교수. 연합뉴스
쑤 교수는 “많은 사료가 위안부가 자유를 잃고 일본군의 통제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하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위안소의 규모에 관한 것”이라며 “인류 문명사상 이런 시설이 이렇게 많이 설치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군이 상하이 한 도시에서만 해도 최소 172개의 위안소를 뒀는데 이는 매우 부끄러운 것”이라며 “우리는 중국의 10여개 성과 직할시에서 (위안소 분포를) 조사하고 있지만 계속 숫자는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쑤 교수는 연합뉴스에 과거 위안소가 운영되고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찍힌 사진을 제공했다.
1937년 말에서 1938년 초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에는 폐허가 된 상하이의 도시 한복판에 ‘황군위안소'(皇軍慰安所)라는 안내판이 걸린 모습이 나와 있다.
쑤 교수는 “이 사진은 일본군 점령 하의 상하이에서 촬영된 것으로서 주변이 대부분 폐허로 변한 전장 한복판에서도 일본군이 위안소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쑤 교수는 “과거 위안소가 있던 건물들이 도시 개발로 대량으로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전력을 다해 역사의 기록을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며 “우리 대에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젊은이들이 계속 이어 연구를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유족회 등이 지난 2일 경기도의회 소녀상 앞에서 램자이어 하버드 로스쿨 교수의 논문 폐기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홍용덕 기자 [email protected]정병호 | 교수
정병호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미국 하버드대의 램자이어가 “위안부는 계약 매춘부”라고 주장해서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 후원으로 석좌교수가 된 그의 노골적인 역사 왜곡 논문을 반박하느라 애쓰고 있는 해외 학자들이 있다. 군사독재 시대부터 촛불혁명까지 한국 민주화와 인권을 지원하며 국제사회의 병풍이 되어준 70~80대 원로 교수들도 참여했다.
그런 해외 학자들에게 “외부인은 논할 자격이 없다”고 경고한 이른바 ‘친일’ 한국 학자들이 있다. 도대체 누가 ‘외부인’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나치의 강제노동 같은 인류에 대한 범죄는 시효도 국경도 없는 것이다. 인류 모두가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편과 가해자 편이 있을 뿐이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무시하고 가해권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정치다. 수많은 희생 위에 겨우 자리 잡은 학문의 자유에 대한 모독이다. “권력에 맞서서 싸워보지도 못한 것들이!” 돌아가신 리영희 교수의 추상같은 일갈이 그립다.
국적을 가지고 자격을 논하는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1910년 ‘한일합방’에 앞장서서 일제의 귀족 작위와 토지를 받은 ‘매국노’를 완곡하게 표현해서 ‘친일파’라고 했다. 1965년 ‘한일협정’도 대한민국 정부가 한 일이다. 일본군 출신 독재자가 시민들의 반대를 군사계엄령으로 누르고 조약을 체결하면서 받은 돈을 피해자들 모르게 돌려썼다.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도 그의 딸이 대통령이었던 대한민국 정부가 했다. 10만명 이상의 피해 여성의 피눈물을 단돈 백억원으로 갈음하고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친일’의 면면한 계보는 이어져왔다. 제국주의 권력과 그 조력자들이 맺은 사기성 농후한 협약도 국제간의 약속이라고 존중해야 하나?
‘친일’은 역사가 아니라 늘 현실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유린하며 시위를 하는 그들에게서 단식하는 세월호 유족 앞에서 피자를 먹으며 야유하던 모습과 비슷한 역겨운 가학성이 보인다. 미국과 일본으로 다니며 ‘위안부는 가짜다, 강제노동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그들. 왜 그렇게 집요하게 피해자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가?
최근 나는 해방 후 스스로 가해권력이 된 ‘친일파’ 역사의 한 단면을 되짚어볼 기회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오키나와 전투를 준비하면서 무기를 나르고 참호를 파는 인력으로 긴급하게 조선의 장정들을 끌고 갔다. 주로 경상북도 각 마을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동원됐다. 일본인 대신 조선인 순사와 면서기, 군청 직원, 지역 유지들이 이들을 잡아서 훈시하고 격려하면서 전장으로 보냈다. 도망치고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남은 가족들 때문에 억지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키나와로 끌려간 조선인 군부들은 마소처럼 부림을 당하며 전장에 내몰려 죽고 처형까지 당했다. 패전 후 일본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은 일본 군인의 이름을 마지막 한명까지 찾아 기리면서 희생된 조선인은 몇천, 몇만명인지 규모조차 밝히지 않았다. 어느 마을 누구까지 지목해서 끌고 갔던 일본은 조선인 강제연행 기록을 은폐하고 피해자들의 진술은 부정하고 있다.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해방된 지 1년이 지나서야 고향에 돌아왔다. 참혹한 전장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친일 경찰과 관리들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을 행동에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 편에 서서 새로운 권력이 된 그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강제연행 피해자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탄압했다.
일제의 반인도적 범죄 피해자들을 숨죽이고 살게 했던 대한민국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처세와 출세를 위해 ‘친일’했던 사람들은 해방 후 보신을 위해 ‘반공’에 앞장서며 가해 행위를 정당화했다. 냉전 대립과 전쟁을 겪으며 일본군 출신 장교들은 군사독재 권력이 됐다. 국가를 대표해서 식민피해 보상금을 협상하고 그 돈을 전용한 그들은 또다시 피해자들을 침묵시키는 가해자가 됐다.
일제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친일’은 냉전 이념의 그늘에 가려진 회복되지 않은 정의의 문제다. 수십년 전 역사상 저질러진 폭력에 직접 책임이 없다고 해도 그 행위의 결과로 얻은 이익을 누리는 경우 간접적으로 과거 범죄에 연루된 ‘사후종범’이다. 수많은 희생자들의 피와 눈물 위에서 누리고 있는 지위와 특권의 근원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가해 역사를 덮기 위해 지금도 가학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는 친일파는 현재진행형 가해자다. 죄과를 규명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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