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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조작 피해 정당한 배상 즉각 시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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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조작 피해 정당한 배상 즉각 시행하라”

익명 (미확인) | 금, 2018/06/29- 19:35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유엔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고문피해자 결의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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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태기념치유센터와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가 25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유엔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 박해전

“정부는 고문조작사건 피해자들과 사법농단 피해자들에 대해 완전한 명예회복과 정의로운 배상을 즉각 시행하라.”

고문조작 국가범죄 피해자들을 비롯한 인권단체들은 25일 김근태기념치유센터와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 주최로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유엔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 고문피해자 결의대회’ 결의문을 통해 “대한민국은 이미 인혁당과 같은, 많은 고문조작사건 피해자들에게 죽음보다 깊은 상처를 가한 바 있다”며 이렇게 요구했다.

이들은 또 “정부는 고문가해자의 훈포상을 즉각 취소하고, 양승태 전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농단의 주범들을 적극 수사하고 처벌하라”며 “국회가 중단된 과거사의 진실규명을 위해 ‘진화위법’을 즉각 개정하고 고문 방지와 고문피해자 지원법안을 즉시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함세웅 신부(김근태기념치유센터 공동대표)는 여는 말에서 “매년 6월26일은 유엔이 정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로 이 땅의 수많은 고문피해자들을 기억하고 이들의 희생에 존경을 표하는 날”이라며 “그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함 신부는 “촛불혁명 이후 우리 사회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며 “이제는 독재와 분단으로 인한 고문과 같은 가혹한 폭력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인권 평화 국가를 만들어가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한 첫걸음으로 국가는 고문피해자들의 삶의 회복을 위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재근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 대표의원은 인사말에서 “적폐를 청산하고 상식이 통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촛불혁명에서 정권교체, 이번 지방선거까지 이어지는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라며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는 그날까지 국가와 사회, 우리 모두가 노력하는 것, 폭력의 역사를 뼈아프게 기억하고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힘을 모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의이자 적폐의 청산”이라고 밝혔다.

인 의원은 또 “고문의 끝을 꿈꾼다”며 “진정한 ‘고문의 끝’은 ‘고문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문의 상처가 없는 세상’이다. 고문의 상처가 모두 치유되는 그날을 위해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전영순 인혁당사건 피해자 가족은 고문피해자 증언에서 “지금도 눈물이 마르지 않고 고통은 끝나지 않고 있다”며 “인혁당재건위사건 국가배상 판결을 담당했던 대법관 4인 신영철 차한성 안대희 박시환을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부역한 불의한 재판관으로 고발한다”고 말했다.

증언자는 “인혁당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은 1심 판결 결과로 35년치의 피해배상금을 전액이 아닌 65퍼센트를 가지급받았다”며 “그러나 이 사건을 맡았던 대법관 4인은 하급심으로 파기환송하지 않고 피해기간 30년을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기산점을 변경해 판결하며 주었던 배상금을 다시 빼앗아 갔다”고 규탄했다.

증언자는 또 “사법 판례에 유례없는 오점을 남긴 판결이 아닐 수 없다. 빨갱이 자식으로 35년을 고통받았는데 30년 고통을 이유 없이 피해기간에서 빼버린 것”이라며 “동일사건 사형수 피해자 8명에 대해서는 피해발생시점을 기산일로 100퍼센트 전액 배상한 것과 달리 장기 수감수 가족에게만 기산일을 변경해 형평성 없이 판결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양기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는 대법원의 적폐와 관련해 “국가배상금의 이자 산정 기산일의 경우, 다른 일반 사건에는 피해가 일어난 시점을 적용하고 있지만 과거사 재심 사건에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자 차별”이라며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 침해”라고 밝혔다.

증언자는 “대법원은 2011년 1월 박시환 신영철 안대희 차한성 대법관들이 판결한 사건들을 재심의하여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며 “어떠한 연유로 느닷없이 형식과 절차를 무시한 채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판결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결의대회에 참가한 5공아람회사건반국가단체고문조작국가범죄청산연대는 자료집에 수록된 ‘아람회사건 국가범죄 청산을 짓밟은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법농단’ 제하의 글에서 “아람회사건은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을 탄압한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법농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며 “박근혜 정권은 2015년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 김지하 사건은 서울고법 국가배상 판결을 확정 처리하고 문재인 대통령 후보 지지선언을 한 아람회사건 피해자들의 서울고법 국가배상 판결은 대법원에서 짓밟았다”고 밝혔다.

이들은 “서울고법이 인정한 아람회사건 일실수입 국가배상을 김지하 사건과는 딴판으로 모두 무효화한 박근혜 정권의 대법원 사법농단은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를 부정하며 과거사 청산을 짓밟은 또 하나의 국가범죄로서 원천무효”라며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와 대법원은 ‘주요 재판사건 처리시 비공식적인 대화 채널을 적극 가동하는 기조를 유지했다’고 특별조사단 3차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특검을 통하여 아람회사건 피해자들을 짓밟은 박근혜 정권과 대법원의 정치공작의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또 “‘국가는 아람회사건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를 문재인 정부가 하루빨리 이행하기를 바란다”며 “문재인 대통령과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적폐 청산과 피해자 원상회복을 위한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이 사회를 맡아 ‘고문피해자의 삶의 회복을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주제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민가협 유가협 민청학련계승사업회 민청련동지회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인권재단들꼿이 공동주관하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광주트라우마센터가 후원했다.

<2018-06-26> 신문고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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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출범30년을 돌아본다

상임이사 조세열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의 유지와 반민특위의 정신을 이어받은 민족문제연구소가 2월 27일(일제침략이 시작된 강화도조약 체결일)로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그간 연구소는 숱한 고난과 역경을 뚫고 역동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짧지 않은 세월인 만큼 괄목할만한 성과도 거두었지만 역량이 따라주지 않아 미처 주목하지 못한 아쉬운 부분도 적지 않았다.
  
자화자찬이 될까 조심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지난 30년간 연구소가 이루어낸 주요성과들을 정리해본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업적은 물론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다. 연구소 창립부터 치면 18년, 편찬위원회가 발족한 뒤로도 8년의 시간과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전3권 2,882쪽 4,389명의 친일파를 수록한 대사전이 빛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성원과 헌신이 있었다. 대학교수 1만2천여 명의 편찬 지지선언, 단 11일만에 5억의 성금을 모아주고 후원회원으로 가입한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시민들, 진보언론의 대대적인 보도, 아무런 대가 없이 작업에 참여한 편찬위원들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정을 바친 상근자들. 그야말로 전 국민적 여망과 시대정신이 만들어 낸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기적의 산물이었다. 오랜 기간 소송과 협박에 시달렸으나 『친일인명사전』은 이제 정부기관과 사법부까지 잣대로 삼는 역사의 이정표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많은 어려움을 딛고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 그해 11월8일 국민보고대회를 열었다. 강윤중 기자 @ 경향신문 2020.11.24

2008년 집권한 이명박 정권은 실용주의를 택할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과 달리 철저하게 퇴행의 길을 걸으며 극우세력과 손을 잡았다. 정권인수위원회의 일성이 과거사청산 중단이었던 데서 드러나듯,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고스란히 수용해 정책에 반영하였다. 뉴라이트가 활개치고 공영방송까지 나팔수가 되어 역사왜곡을 본격화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학계와 교육계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를 조직하고 사무국을 맡아 이에 대응하였다. ‘근현대사 진실 찾기’ 역사다큐 시리즈 제작도 관제언론의 이승만 박정희 미화 등 역사변조에 대한 대응이었다. 700만 여명이 관람한 〈백년전쟁〉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를 둘러싸고 최근까지도 소송이 진행되었으나 모두 연구소의 승소로 끝이 났다. 뒤이은 박근혜 정권 아래서는 아예 역사말살이 벌어졌다. 수준이하의 교학사 판 한국사 교과서 검정 통과와 국정제 기도가 그것이다. 연구소는 역사정의실천연대를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로 확대 개편하고 다시 사무국을 맡아 ‘역사쿠데타’를 저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으며 완승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연구소의 지부들은 지역의 저지운동에서 선봉 역할을 기꺼이 떠맡았다. 박근혜의 아버지에 대한 빗나간 ‘효도’는 결국 촛불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의 종말을 앞당기는 단서의 하나가 되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이어 연구소가 역점사업으로 추진한 과제는 시민역사관 건립이었다. 사전만으로는 올바른 역사인식을 널리 확산시킬 수 없다는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연구소는 오랜 기간 축적된 10만 여점의 문헌과 실물 등 희귀자료를 소장하고 있었다. 구입한 것도 많지만 다수는 강제동원피해자들과 연구소 회원들이 흔쾌히 기증해 준 소중한 자료들이었다. 2011년 건립위원회가 발족하였고 8년의 노력 끝에 2018년 8월 29일 국치기념일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라는 명칭으로 개관을 보게 되었다.

이번에도 시민과 회원들이 17억 원의 성금으로 역사정의 실현의 길에 힘을 보탰다. 일본의 시민사회와 진보 학계는 ‘일본과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잇는 모임’을 결성하고 1억여 원의 성금과 방대한 자료를 기증하였으며, 개관 이후에도 연대와 후원을 지속하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차별성 있는 상설전시와 참신한 기획전시, 알찬 시민강좌로 단기간에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으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2015년부터는 서울시 강북구의 위탁으로 독립정신과 민주주의의 성지 수유리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근현대사기념관도 개관 운영 중이다. 동학농민혁명에서 3·1혁명, 사월혁명으로 이어지는 100년간에 걸친 연면한 투쟁의 역사를 담은 기념관은 이제 강북구를 넘어 전국적인 명소로 성가를 드높이고 있다.

친일문제, 일제하강제동원,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 등 과거사진상규명이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데는 연구소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진상규명이 학문적 전문적 영역이었다면 이에 기초한 입법과 청산 운동은 실천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박정희기념관반대운동, 친일문인기념문학상 등 친일파 기념사업 철폐운동, 강제동원 소송지원, 야스쿠니신사 조선인 합사 철폐운동, 전범기업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반대운동, 민간인학살희생자 유해발굴 등 지속적인 시민운동의 전개는 전 국민적 관심과 여론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일부 분야의 특별법 제정이라는 최종의 성과로 이어졌다.

민간과 별개로 국가의 과거청산은 당연한 책무의 이행이라는 점에서 ‘나라다운 나라’의 선결 과제임에 틀림없다. 너무도 늦은 감이 있고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여러 과거사 관련 특별법의 제정과 정부 위원회의 발족은 거대한 역사의 진전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최근에는 과거사 청산이 전문분야와 지방자치단체, 교육현장 등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어 미래세대를 생각하면 더더욱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독립운동의 위상 복원에도 앞장섰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최대의 독립군 양성 기지로 그 교관과 생도들이 봉오동·청산리 전투 등 초기 독립전쟁의 주력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의열단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를 배출한 무장항일투쟁의 금자탑이었다. 그럼에도 사실상 잊혀진 독립운동이었던 신흥무관학교의 활약을 되살리기 위해 설립 100주년을 맞은 2011년 기념사업회 발족을 주도하였으며 사무국을 맡아 신흥무관학교가 남긴 불멸의 공적을 알리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3·1운동은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역사적 함의는 훨씬 크다. 우리 민족사에 비로소 민주공화정을 대세로 확립시켰으며, 여성과 천민들이 대거 변혁운동의 주역으로 현실참여에 나섰다. 나아가 전면적인 항일무장투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지역과 종교, 신분과 계급, 좌우의 이념을 뛰어넘어 민족협동전선의 시원을 이루었다. 연구소는 3·1운동 95주년이던 2014년 3·1혁명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사무국을 맡았으며 〈제국에서 민국으로〉 심포지엄을 시작으로 정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학술연구와 실천운동을 병행하는 특유의 도전을 계속해 왔다. 민주화운동 시기 많은 연구단체들이 같은 지향을 가지고 활동했지만 오늘날 성공적으로 이를 체화시킨 단체는 드문 형편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사회참여에 못지않게 학술부문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전시 교육 등 무수한 일상적인 사업부문은 논외로 하더라도, 『일제하전시체제기정책자료총서』 전 98권과 『일제협력단체사전』 『식민통치기구사전』 『재일조선인단체사전(근간)』 등 사전류, 『친일파 99인』 『청산하지 못한 역사』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거리에서 국정교과서를 묻다』 등 대중서 발간 등 의미 있는 결실들을 거둬왔다. 논문집 등 연구서 발간이 저조하지만 이는 남들이 회피하는 ‘공장’을 돌리고 있는 연구소의 불가피한 현실에서 기인하는 바, 실정을 헤아려 주길 바랄 뿐이다.

지난 30년간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일을 해왔다. 그래서 어떤 분은 ‘모든 문제 연구소’라고 애정 어린 지적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연구소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다른 단체에서 주목하지 않은 일들을 주로 감당하는 편이었다. 앞으로도 역사와 현실이 우리를 불러내면 기꺼이 궂은일도 떠맡을 작정이다.

1991년 2월 27일, 소장 사무국장 연구원 둘 총원 네명으로 11평 좁은 방에서 첫발을 내디뎠던 민족문제연구소가 이제 상근자만 40명(근현대사기념관 파견 6명 포함)인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갖가지 탄압과 협박, 각종의 음해와 비방에 시달려 온 것도 사실이다. 이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고 오늘에 이른 데에는 무엇보다 회원들(현재 1만2천여 명)의 한결같은 지지가 큰 힘이 되었다. 학계와 시민사회에도 갚을 수 없는 많은 빚을 졌다. 성심을 담아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역사와 사회 정의 실현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이에 보답하고자 한다.

* 향후의 과제와 전망에 대해서는 하반기 학술회의를 거쳐 별도의 글을 싣도록 하겠습니다.


화, 2021/02/23-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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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1/02/25-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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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원시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 운동지를 항일독립운동지로 알리는 안내판. 경기도 제공

경기도가 3·1운동 102돌을 맞아 ‘친일기념물’ 161건에 친일 행적 안내판 설치에 나섰으나, 친일 인물의 후손 등은 “후손이 무슨 책임이 있냐”며 반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는 “2019년부터 지난해 4월까지 경기도 친일문화 잔재 조사 연구에서 친일기념물로 확인된 161건의 기념비와 송덕비에 친일 행적을 기록한 안내판을 설치하기로 했다”고 25일 밝혔다. 도는 이들 기념비 외에 친일 인물과 관련된 동상 등이 75건, 건축물 46건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덧붙였다. 경기도의 한 절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친일 문학가로 확인된 이광수의 추모비가 있고, 도내 한 대학에는 친일 작곡가로 분류된 홍난파의 흉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경기도는 우선 친일 인물의 기념비와 송덕비에 친일 행적 안내판을 세우기로 하고 해당 시·군에 설치 가능 여부를 문의했으나, 후손들의 반발 우려 등을 이유로 ‘설치 가능하다’고 한 곳은 16곳에 불과했다. 실제로 안내판 설치 추진이 알려지자, 친일 인물의 후손들은 ‘그분들 때문에 왜 후손이 고통을 받냐’, ‘후손들이 무슨 책임이 있느냐’는 등의 항의를 경기도에 쏟아냈다.

김도형 경기도 문화정책팀장은 “안내판 설치는 교육적으로 후세들에게 역사적 공과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며 “올해 10개를 시범 설치하고 추가로 나머지 친일기념물로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경기도는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120곳에는 항일독립유적지 안내판을 세우기로 했다. 앞서 경기도는 친일 작곡가 이흥렬이 작곡한 <경기도가>를 폐지하고, 도민 참여로 새 경기도 노래를 만들어 지난 1월부터 쓰고 있다.

홍용덕 기자 [email protected]

<2021-02-25> 한겨레

☞기사원문: 경기도 ‘친일 행적 안내판’ 설치에 후손들 “우리 책임이냐” 반발

금, 2021/02/26-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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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중 여성비율 3% 안 돼
“입증자료 부족” 공훈 심사 탈락 일쑤
남편 공적 인정 못 받으면 더 힘들어
옥바라지·경제활동·양육까지 병행
항일 투쟁서 여성 희생 재조명 필요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와 그가 남긴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 우당기념관 제공

“나날을 굶으며 지내는데, 생불이 아니고서야
어찌 부지할까. 고국에 다시 돌아가서 생활비라도
마련해볼까 하고 떠나서 왔다.”
이은숙, 서간도 시종기

56년.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삶이 곧 독립운동가의 삶이었단 사실을 확인받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지난 2018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인 ‘애족장’ 서훈을 받았다. 1962년 남편 이회영에게 ‘독립장’이 추서된 지 반세기 만의 일이었다. 당시 서훈에는 이은숙 여사가 1966년 완성했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가 큰 역할을 했다. 만주와 북경을 넘나들며 일가의 독립운동을 힘겹게 지탱했던 그의 삶이 회고록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2018년부터 보훈처의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작업이 본격화됐지만, 총 1만6,000여명의 전체 독립유공자 중 여성 비율은 여전히 3%를 밑돈다. 독립운동가 부인들의 공적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무시되기 일쑤다. 옥바라지와 경제 활동, 자녀 양육을 병행해야 했던 사정이 ‘형무소 수감’이나 ‘독립군 참여’ 등의 기준 앞에선 넉넉히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3·1절을 맞아 한국일보가 만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망명과 도피를 거듭해야 했던 항일 투쟁이 당시 부인들과 며느리들의 뼈를 깎는 희생 없이 가능했을까”라고 반문한다. 당시 독립 운동은 ‘가족 단위’로 이뤄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남편을 따라 중국과 만주 등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 부인들은 독립운동단체 연락책부터 시작해 임시정부 산하 학교 선생님 등으로 일하며 해방에 기여했다.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수입이 없어 홀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기도, 심지어 일제에 붙잡혀 투옥돼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다. 유족들이 “포상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의 노력을 없던 셈 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3년 옥바라지와 17년의 망명 생활

동암 차이석 선생의 외손주 유기방(66), 유기수(64) 형제가 25일 인천 서구 자택에서 외할머니 강리성 여사의 사진을 꺼내 보고 있다. 맨 왼쪽은 유기방씨의 부인 권기선(68)씨. 이정원 기자

임시정부 파수꾼이자 백범 김구 측근으로 알려진 동암 차이석 선생에겐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중국 충칭 망명 시절 만나 혼인한 홍매영 여사는 뒤늦게 서훈을 받았지만, 그 전까지 상하이 망명을 함께 했던 첫째 부인 강리성 여사는 남편의 삶을 다룬 평전에 이름 한 번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 존재가 가려져 있다. 차 선생의 외손주들이 지난 2019년 강 여사에 대한 공훈 심사를 요청했으나 보훈처가 내놓은 답은 ‘입증 자료 미흡’이었다.

차 선생은 1910년 ‘105인 사건’으로 처음 투옥됐다. 그 손주들에 따르면 이때부터 강리성 여사는 삯바느질로 감옥 안팎의 생계를 꾸려나가며 3년간 고된 옥바라지를 버텼다. 출소 후인 1919년 남편이 임시정부를 따라 상하이로 떠나자, 강 여사도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그 길을 따라 나섰다.

강리성 여사가 1951년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때의 모습. 유기방씨 제공

첫째 손자 유기방(66)씨는 당시 외할머니의 삶에 대해 “청사 인근에서 밥집을 하며 임시정부 인사들을 먹이고, 일본영사관 경찰들의 습격과 고문도 홀로 감당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1939년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겨가자 강 여사는 둘째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강 여사는 1961년 사망 후 후손들의 요청으로 남편이 묻힌 서울 효창원에 합장됐지만, 무덤 앞엔 아직까지 이를 표시한 비문조차 없다.

임정 교사 이모, 사망 전 “쓸쓸한 노인”

차영애 여사와 진장권 선생의 1935년 결혼식 사진. 가장 위쪽에 서 있는 두 명이 강리성 여사와 차이석 선생. 유기방씨 제공

차영애 여사는 지난 1987년 3·1절 기념식에 병든 몸을 이끌고 행사장을 찾았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자리에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지만, 사람들은 그를 문전박대했다. 같은 해 9월 그는 자신을 도와달라며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냈다. “해방날이나 3·1절에도 못 들어가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마음이 아팠다”는 탄원서에 답은 오지 않았다. 그는 사망 1년 전 한 지역구 소식지를 통해서야 “독립운동가 차이석의 딸이지만 평생을 홀로 살아온” 노인, “뜻있는 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한 문장으로 기록됐다.

1986년 효창원추모제에 참석한 차영애 여사와 1987년 작성한 탄원서 일부. 유기방씨 제공

강리성과 차이석의 첫째 딸인 차영애 여사 역시 해방 후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홀로 삶을 마무리했다. 차 여사는 1934년부터 임시정부 산하 인성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고 그 기록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2019년 후손들의 서훈 신청에 보훈처는 “적극적 활동 여부 불분명”이라는 답변을 내놨다. 반면 차 여사와 함께 인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남편 진장권 선생은 독립군 활동 등의 이력이 있어 1990년 애국장 서훈을 받았다.

차 여사는 생전 독립유공자 가족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지원조차 받지 못했다. 결혼 당시 찍은 사진도 남아 있었지만, 당시 시댁의 반대로 남편 진장권의 호적엔 올라가지 못했다. 아버지 차이석 선생의 남은 보훈 연금은 이복동생인 차영조씨 앞으로 돌아갔다. 유기방씨의 동생 기수(64)씨는 이모의 삶을 두고 “기록 외의 활동은 무시당했고, 결혼하고도 호적에 올라가지 못했으며, 아들을 우선시하는 과거 보훈 제도 탓에 가난한 생애를 보냈다”며 “가부장적 관습의 총체적 피해자가 우리 이모”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남편도 번번이 탈락하는데 부인은…”

박애신 여사(의열단원 김태규 선생 부인)의 손자 김명곤(64)씨와 그의 부인 김정숙(60)씨가 25일 서울 도봉구 자택에서 박애신 여사의 사진을 꺼내 보고 있다. 배우한 기자

별도의 회고록을 남기지 않은 이상, 독립운동가 부인의 공적서는 남편의 행적을 바탕으로 작성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남편의 공적이 인정 받지 못하면 부인의 서훈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의열단 김태규 선생의 손자 김명곤(59)씨는 “사망연도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세 차례 연속 할아버지 김태규의 서훈 신청을 거절당한 후, 할머니 박애신여사의 서훈까지 거절당했다.

김씨 부부에 따르면, 박애신 여사는 시아버지 김병농 목사와 남편 김태규의 옥바라지를 연이어 했다. 파리평화회의에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일에 관여하다가 체포된 김 목사가 1년 형기를 거의 다 채웠을 때쯤 무렵 아들 김태규의 1년형이 확정됐다. 감옥으로 사식과 솜옷을 들이면서 가정을 돌보는 일은 스무살을 갓 넘긴 박 여사의 몫이었다.

“서훈 기준 바뀌어야”

김희선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 25일 본보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래 놓인 자료들은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 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배화여고 학생들의 형무소 기록. 배우한 기자

김씨는 “증조부 김병농 목사는 서훈을 받았지만, 할아버지의 경우 마지막 행적이 확인되지 않았단 이유로 본인은 물론 할머니 박애신의 서훈도 반려됐다”며 “일반 시민인 후손들이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조상 자료를 다 찾아내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김씨는 건강이 악화돼 더 이상의 자료 수집과 독해가 어려운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독립운동가 부인에 대한 서훈 기준이 지금보다 확대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투쟁’ 전선에 뛰어든 기록을 중심으로 평가하다 보면 서훈을 받을 수 있는 여성들은 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다. ‘가정’을 지키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들 가운데 이은숙 여사처럼 일생을 회고록으로 남긴 경우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당대 부인들의 폭넓은 지원 활동 역시 사실상의 독립운동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단순히 피해자 보상 차원이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는 차원에서도 독립운동가 부인에 대한 연구와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독립운동가 부인들은 남편의 생애에 가려 역사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머물러왔다. 하지만 실제 치열했던 항일투쟁 뒤에는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의 희생이 있었다.

김희선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당시 시대상에 비춰봤을 때, 남성 독립유공자가 1만6,000명이라면 그에 딸린 최소 1만명 이상의 부인들도 독립유공자여야 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남편 옥바라지에 자식들 교육,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경찰들까지 한꺼번에 감내하는 것이 당시 독립운동가 부인들의 삶이었다”며 “무장 투쟁이나 감옥살이와 비교해 이들의 삶을 ‘당연한 내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동등한 독립운동가로 대우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원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01> 한국일보 

☞기사원문: 가려진 독립운동가 부인들 “내조 아닌 동등한 투쟁”

월, 2021/03/0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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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친일 인물 관련 기념물 161건에 친일 행적 안내판 설치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억…더 강력한 역사 청산 방식”

[수원=뉴시스] 이병희 기자 = 경기 수원시 권선구 88올림픽공원에 있는 난파 홍영후 동상 안내판. 홍영후의 업적과 친일 행적이 같이 적혀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수원=뉴시스] 이병희 기자 = “봉숭아를 비롯한 많은 가곡과 동요 100곡을 남기신 작곡가 난파 홍영후 선생은 우리나라 맨 처음 바이올리니스트이시다…2009년 대통령 소속기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

경기 수원시 권선구 88올림픽공원에 있는 난파 홍영후(1898~1941) 동상 앞에는 ‘음악계의 선구자’라는 홍난파의 업적과 함께 그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된 사실이 적혀 있다.

안내판에 홍난파의 업적만 쓰여 있어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지적에 지난 2019년 9월 권선구가 친일 행적을 함께 적은 것이다.

친일 인물의 업적과 친일 행적, 즉 ‘공'(公)과 ‘과'(課)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가운데 88올림픽공원의 홍난파 동상처럼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알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친일 관련 행적을 없애버리는 ‘청산’ 작업을 넘어 공과를 같이 기억해 교훈 삼는 방식이 추진되는 것이다.

102주년 3·1절인 1일 경기도에 따르면 도는 지난해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 결과 확인된 도내 친일 인물 관련 기념물의 행적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할 계획이다.

도는 ㈔민족문제연구소에 의뢰해 진행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을 통해 일제강점기(1905년~1945년 8월)에 형성된 생활 문화 속 친일 잔재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그 결과 ▲친일인물 257명 ▲친일기념물 161개 ▲친일 인물이 만든 교가 89개 ▲일제를 상징하는 모양의 교표 12개 등의 도내 일제잔재를 확인했다.

이 가운데 친일 기념물 161건에 해당 기념물이 친일 행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하는 안내판을 설치한다.

지역별로는 안성 57건, 화성 18건, 평택 13건, 용인 10건, 양주 9건, 이천 9건, 광주 8건, 여주 7건, 시흥 4건, 포천 4건, 의정부 3건, 수원 3건, 구리 2건, 파주 2건, 양평 2건, 연천 2건, 남양주 2건, 안산 1건, 과천 1건, 안양 1건, 고양 1건, 하남 1건, 부천 1건 등이다.

친일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송덕비’, ‘거사비’, ‘시혜기념비’, ‘기념비’ 등이 도내 곳곳에 퍼져 있다.

도는 오는 4월 선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우선 선정된 10곳에 안내판을 설치할 계획이다. 역사적으로 잘못 알려진 부분은 바로잡고, 친일 행적 등 역사적 기록을 명확히 알린다는 취지다.

이와 함께 용역 결과 확인된 친일문화잔재를 디지털자료로 기록·보존·관리하는 아카이브 포털사이트를 이달 도민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시스템 개발을 비롯해 데이터베이스나 전시·홍보·교육·참여 관련 콘텐츠 구축을 마친 상태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과거에는 역사적 사실을 무작정 허물고 없애는 방식으로 친일 잔재 청산이 이뤄졌지만, 최근에는 아픈 역사든 잘못된 역사든 역사이기 때문에 공이 있으면 공대로, 과가 있으면 과대로 같이 기억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없애버린다고 역사적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록하는 것이 더 강력한 역사 청산의 방식”이라며 “있는 그대로 기록해 과거와 직접 대면해 교훈을 얻을 수 있어 더 의미가 있다”라고도 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2021-03-01> 뉴시스 

☞기사원문: “친일 기념물에 친일 행적 기록”…공과 함께 알린다

월, 2021/03/0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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