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가 짓밟던 김백일에
임정 요인·독립운동가 묘역은 근린공원·북한산 등에 뿔뿔이 현충원 선열들 친일파 ‘발 밑’에 “친일파 국립묘지 안장 막고 효창공원 성역화 서둘러야”
▲ 국립서울현충원에 마련된 김백일의 묘./김경욱 기자
무더운 날이었다. 묘역 사이로 난 아스팔트 길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고, 잔디가 깔린 묘소 위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지난 1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는 6월의 뙤약볕이 가득 내려앉았다.
‘육군 중장 김백일’(본명 김찬규)은 그 정돈된 땅에 묻혀 있었다. 그가 묻힌 ‘장군 제1묘역’은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 다음으로 서울현충원에서 높은 곳이다. 김백일의 묘비에는 “6·25 사변이 돌발하자 제1군단을 지휘하고 북진의 선봉이 되어 그 용맹을 국내외에 과시하였다. 함흥 지구에서는 십만의 피난민을 보살펴 남하케 하는 등 실로 지, 인, 용을 겸비한 장군이었다”고 쓰여 있었다.
묘비에는 ‘전쟁 영웅’으로 적혀 있지만, 김백일은 대한민국과 한민족을 배반한 자다. 2005년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09년 공식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그가 포함돼 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라 있다.
친일인명사전을 보면, 김백일은 1938년부터 7년 동안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간특대에서의 활동 공로로 1943년 일제로부터 만주국 훈장인 훈5위 경운장까지 받았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간도특설대는 1930년대 후반 간도협조회, 신선대 등과 함께 가장 악랄하게 조선인 항일 운동가들을 탄압한 3대 악질 조직 중의 하나”라며 “김백일은 최후까지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간도특설대의 해산 업무까지 맡았다”고 말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김백일이 국립묘지에 묻힌 것은 해방된 조국에서 장성으로 복무했기 때문이다. 그는 해방 뒤 1946년 오늘날 국군의 모태가 된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했고, 제3사단장 등을 지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제1군단장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195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뒤에는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고,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까지 받았다.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 등을 규정하고 있는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는 ‘장성급 장교로 전역·퇴역한 뒤 사망한 이와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을 갖는다’고 돼 있다.
김백일처럼 국립묘지인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파는 모두 63명에 이른다. <한겨레>가 국가보훈처에 요청해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국립묘지 안장자 현황’을 보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가운데 63명이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다. 이 가운데 김백일, 김홍준,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 김석범, 백홍석, 송석하, 신현준 등 11명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결정한 친일파다.
이들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간부로 복무하면서 항일 운동가들을 탄압하거나 일본 제국주의에 헌신한 인물들이다. 김홍준과 김석범, 송석하, 신현준은 김백일처럼 항일세력을 탄압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고, 해방 뒤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종찬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소좌 출신이다. 특히 이종찬은 일제로부터 무공훈장인 금치훈장을 받았는데,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가운데 금치훈장을 받은 이는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그가 유일하다. 해방 조국에서 국방부장관을 지낸 신태영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중좌로 복무했고, 그의 아들 신응균도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일본군 소좌로 활동한 친일 인사다. 백홍석과 이응준은 각각 일본군 중좌와 대좌로 복무했다. 이들 10명의 친일인사들은 대체로 광복 뒤, 장성급 장교로 대한민국 육군 또는 해병에서 근무한 공로로 국립묘지에 묻혔다. 연세대 초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도 일제의 대동아 구상을 찬양하고 교회 신도들을 대상으로 전쟁에 쓰일 전투기인 ‘애국기 헌납 운동’을 벌인 대표적 친일 일사지만, 제2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는 등 국가사회공헌을 인정받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 국립서울현충원의 이종찬 묘.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가운데 금치훈장을 받은 이는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이종찬이 유일하다./김경욱 기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대표적 인물인 김창룡도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다. 그는 일본 관동군 헌병 오장(하사)으로 항일 운동 조직을 색출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악랄하게 고문했다. 김창룡은 항일 운동 지도자인 백범 김구를 암살한 배후 인물로도 지목됐다. 백범을 암살한 안두희는 범행 43년 만인 1992년 4월 “(이승만 정부의) 특무대장 김창룡의 지시로 백범을 암살했다”고 고백했다. 김창룡은 2005년 여야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박정희와 함께 ‘적극적이고 악질적으로 우리 민족을 괴롭힌 현저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빠졌다.
▲ 민족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배우 인물로 지목된 김창룡의 묘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자리해 있다. 김창룡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있다./ 이종근 기자 [email protected]
이렇게 친일파들이 국립현충원에 묻힌 것은 물구나무선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을 잘 보여준다. 김창룡이 암살을 지시한 백범 김구를 비롯해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이동녕·조성환·차리석 선생 등은 근린(동네)공원으로 관리되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묻혀 있다.(<한겨레> 5월31일치 1·4·5면) 이준 열사와 손병희, 신익희, 김창숙, 이시영, 여운형 선생 등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의 묘소도 강북구 북한산 자락에 흩어져 있다.(6월8일치 2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국립묘지에 누워 있고,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은 근린공원 등에 방치된 것이다.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들의 상황도 나을 게 없다. 박은식, 양기탁, 이상룡 등이 안장된 서울현충원의 ‘임정 묘역’과 권동진, 권병덕을 비롯해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의 모델이었던 남자현 등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애국지사 묘역’은 이응준, 신태영 등 친일파가 묻힌 ‘장군 제2묘역’ 아래에 조성돼 있다. 항일 운동가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발아래 잠든 것이다.
국립현충원에 조성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묘를 강제로 이장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현행법상 이미 국립묘지에 안장된 사람을 재심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6·25전쟁 등에 기여했기 때문에 이들의 안장 자격이 취소되지 않는 한 강제로 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친일파라고 해도 장성급 장교로 이미 안장자격을 얻어 묻혔다면 이장이 어렵다는 설명이다. 박성행, 이동락, 김응순, 박영희, 유재기, 윤익선, 이종욱, 임용길, 김홍량 등 군 장성 출신이 아닌 친일파 9명이 2014~2015년 국립묘지 밖으로 이장된 사례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경우, 독립유공자 서훈이 국무회의에서 취소됐기 때문에 이장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현재 국회에는 더불어민주당의 권칠승, 김해영 의원 등이 각각 대표 발의한 국립묘지법 개정안이 제출돼 있다. 친일파의 국립묘지 안장을 막고, 이미 안장된 자의 묘를 강제로 이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국가보훈처장 또는 국방부 장관에게 ‘이장 요구’ 등의 권한을 주는 내용이다. 권칠승 의원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일제에 협력해 민족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들로 국립묘지에서 배제하는 것이 당연한데, 현행법에 근거 규정이 없다”고 개정 이유를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군인묘지 성격이 강한 국립현충원과 별도로, 역사가 외면해 온 독립운동가의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백범 등 대한민국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들이 묻힌 효창공원을 국가 차원의 민족·독립 공원으로 격상시키는 일에도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홍소연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사업회 전문위원(전 백범김구기념관 자료실장)은 “국립서울현충원은 6·25전쟁 뒤 국군 묘지로 만든 곳이다. 효창공원이야말로 오로지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마련한 대한민국의 첫 국립묘지다. 하루 빨리 효창공원을 성역화하는 것이 애국자들의 영예를 높이는 길”이라고 말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0년이 넘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에 대한 유해들은 전국 곳곳에 아직까지 방치되어 있다. 이에 한국전쟁유족회, 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 포럼진실과정의 등 시민단체들은 지난 2014년 2월 18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 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을 출범시켰다.
공동조사단은 지난 2014년 2월 24일부터 3월 4일까지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진주지역 보도연맹사건 관련 민간인 학살 희생자”에 대한 1차 유해발굴조사를 통해 최소 39명의 유해와 탄두와 탄피, 버클 등 다수의 유품을 발굴한 바 있으며, 2015년 2월 23일부터 3월 2일까지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대전형무소사건 관련 민간인 학살 희생자”에 대한 2차 유해발굴조사를 통해 최소 20구의 유해와 탄두, 탄피, 의안 등 다수의 유품을 발굴한 바 있다. 또한 2015년 11월 15일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산 92번지에 대한 시굴조사를 통해 다수의 유해와 탄두를 발견함에 따라 2016년 2월 25일부터 29일, 3월 4일에서 8일에 걸쳐 3차 유해발굴조사를 벌여 최소 21명의 유해와 라이터 등 다수의 유품을 발굴하였다. 이어 2017년 2월 24일부터 3월 2일 간에는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제2학살지에 대한 4차 유해발굴조사를 통해 최소 38명의 유해와 안경, 탄두, 버클 등 30여 점의 유품을 발굴하였다. 지난 2018년에는 지방자치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아산시가 유해발굴사업을 지방보조사업으로 선정함에 따라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 일대에 대한 5차 유해발굴 조사를 벌였다. 5차 발굴지는 아산지역 부역혐의사건의 희생지로서 희생자의 상당수가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었으며, 최소 208명의 유해를 비롯해 M1과 카빈의 탄두와 탄피, 비녀, 귀이개 등 다수의 유품을 발굴하였다.
공동조사단은 지난 다섯 차례의 유해발굴조사에 이어 오는 3월 8일부터 3월 16일까지 충북 보은군 아곡리 15-1번지 등에서 제6차 유해발굴조사를 벌인다. 특히 이번 발굴조사는 충청북도의 지방보조금 지원사업이며, 충청북도가 광역자치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유해발굴조사를 지원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공동조사단이 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의 유해를 발굴하기 시작한 2014년경부터 많은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에서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들의 위령사업 등을 지원하기 위한 조례가 제정되어 왔다. 이번 6차 발굴조사 예정지인 충청북도는 2016년에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였다.
청주․청원지역 국민보도연맹원 및 예비검속자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에 걸쳐 청주경찰서와 청주형무소에 구금되었거나 청원군의 각 면에 소집되었다가 충북 청원군 분터골, 쌍수리 야산, 보은군 아곡리 등지에서 희생되었다. 청주․청원지역의 보도연맹원 희생자는 1,500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특히 이번 6차 발굴조사지역인 충북 보은군 아곡리 15-1번지 등에서는 150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임을 당한 뒤, 지하 광산이나 이름 모를 산속에 수 십 년 동안 버려진 채 방치되어 왔다. 그나마 진실화해위원회가 일부 유해와 유품을 수습해 충북대학교에 임시 안치하였다가 2016년 세종시 추모의집으로 옮겨 모셨으나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된 후에는 국가 차원의 아무런 후속조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가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마땅히 가져야 할 법적․정치적 책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조차 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사회통합을 이뤄내 인권국가로 발돋음하기 위해서는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분들의 진상규명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번 유해발굴 공동조사는 노무현 정부 이후 중단된 과거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해를 인도적 차원에서 발굴 · 안치하는데 있다. 또한 실질적인 과거청산에 필요한 법과 제도가 구비될 수 있도록 국민적 관심을 모아내는 한편, 이후 민간 차원에서 과거청산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 추진하는 것이다. 현재 20대 국회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개정안” 등이 의원입법으로 발의되어 행정안전위원회에서 법안심사 중에 있으나 법안 심사만 2년이 넘고 있다. 국회는 국민의 대의기관으로서 조속히 개정안을 처리해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향후 공동조사단은 지속적인 유해 발굴을 통하여 민간인학살 사건의 실상을 기록하고, 하루속히 국가가 나설 수 있도록 강력하게 촉구하고 요구할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들 또한 힘과 지혜를 모아줄 것을 기대한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부산지역 시민사회와 시교육청이 각 학교에 남아 있는 친일 잔재 청산운동에 나선다.
부산지역 교육단체 등으로 꾸려진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이하 교육희망넷)는 4일 “교육, 시민사회와 함께 학교에 남아있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교육희망넷은 “100년 전 일제에 항거해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하냐”며 “일본은 여전히 군국주의 야욕을 불태우고, 우리 안의 친일 잔재는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배움터인 학교에서 친일 잔재 청산은 무엇보다 시급한 역사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3·1운동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일제 강점기 친일 작곡가의 노래를 아직도 부르게 하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쓰게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지적이다.
김선양 부산교육희망넷 집행위원장은 “어떤 고등학교에선 친일 작곡가의 교가가 계속 불리고, 심지어 일본인 교장을 사진을 전시놓고 있는 초등학교까지 있다”면서 “이 외에 학교 현장에서 일제식 용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이 일상생활 속 친일 잔재에 노출되어 있는 현실은 그대로 둔 채, 몇 가지 이벤트 행사로 항일의 역사적 의미를 바로 세우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다”고 꼬집었다.
이어 “이제라도 학부모와 교사, 교육청이 힘을 모아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면서 시 교육청에 ▲친일 잔재 청산 TF 구성 ▲각 학교별 전수조사 ▲4월 임시정부 수립일 등에 계기교육 등을 제안했다. 교육희망넷은 이날 이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교육청에 전달하고, 간담회를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시 교육청도 이에 호응하는 계획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부산시 교육청은 3일 “학교에 남아있는 유·무형의 일제강점기 잔재를 청산하는 등 새로운 미래 100년을 위한 학교문화 바로세우기 운동을 펼친다”고 밝혔다.
우선 시 교육청은 전문가로 구성한 ‘학교 속 일제 잔재 청산지원팀’을 꾸리는 등 행정적 지원을 본격화 한다. 또 학생, 교사, 학부모, 시민들이 학교 속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자료수집과 공론화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에 ‘학교 속 일제잔재 청산 참여마당’ 코너를 설치, 운영한다. 이밖에 올바른 역사관을 위한 친일인명사전 각 학교 보급, 임시정부수립일·경술국치일·부산항일학생의날 등 계기교육자료 개발·지원 등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유·초·중·고등학교별 교사로 꾸려진 ‘일제 잔재 청산 교사연구회’도 운영한다. 연구회는 일제 잔재 조사와 고증을 거쳐 청산작업 활동을 지원한다.
경기지역 일부 기초자치단체들이 시를 대표하는 ‘시가(巿歌)’ 사용 중단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들 시가는 친일인명부에 등록된 김동진씨가 모두 작곡한 것으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의미에서 추진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 안산시는 시가인 ‘안산시민의 노래’를 사용중단하기로 했다고 7일 밝혔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들의 정신을 이어받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다.
‘안산시민의 노래’ 작곡자는 김동진씨로 1930~40년대 만주작곡연구회 회원으로 가입·활동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일본의 대동아공영 건설을 찬양하는 ‘건국 10주년 경축고’ 등을 작곡한 바 있다. 이같은 사실이 확인돼 민족문제연구소가 1989년 개정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공식 등재됐다.
이 노래는 1989년 10월 안산시가 시(巿)로 승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곡으로 당시 김씨가 직접 작곡했다고 한다. 시는 작사가는 친일행적이 없는 만큼 가사는 그대로 곡만 바꿀지, 가사와 곡 모두 바꿀지 등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 친일파 작곡가인 김동진씨가 작곡한 ‘안산시민의 노래’ 악보. 안신시 홈페이지 캡처
앞서 지난달 28일 여주시와 포천시가 시가인 ‘여주의 노래’, ‘포천시민의 노래’ 사용을 각각 중단한 바 있다. 이들 곡 역시 김씨가 작곡한 것이다.
경기도내에서는 이들 3곳 외에 △의정부(의정부시 시가) △동두천(동두천시민의 노래) △고양(고양시의 노래) △오산(시민의 노래) △안양(안양시민의 노래) 등 5곳이 더 있다.
윤화섭 안산시장은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뜿깊은 해”라며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시가 사용을 중단하고 우리 시의 자랑과 비전을 담은 새로운 노래를 제정해 친일잔재 청산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제주4·3 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4·3 희생자유족회는 오는 3월 19일 제주 KAL호텔에서 ‘국제 인권기준에서 본 한국의 과거사 청산’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 ⓒ일간제주
특히, 이번 행사에는 파비앙 살비올리(Fabian Salvioli) 유엔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 특별보고관이 참석해 과거사 해결에 대한 국제 기준 및 전환기적 정의 조치에 대한 통합적 접근의 중요성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다.
또한, 안병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이 한국의 민주화와 과거사 정리에 대해 발표를 진행해 나가게 된다.
이번 국제 심포지엄은 국제 인권 기준에 비추어 한국의 과거사 청산의 한계와 성과를 짚어 보고 향후 한국의 과거사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이에 행사 관계자는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일본군 성노예제, 일제 식민지기 강제동원, 제주 4·3을 비롯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군부독재 정권의 국가폭력, 형제복지원과 같은 국가 권력에 의한 강제수용 문제가 다뤄질 예정”이라며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이계성 한국전쟁유족회 대전형무소 재소자 유족, 강종건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실종자, 유가족 모임 대표 등이 참석해 피해자 증언을 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어 “특히, 무엇보다도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유엔 진실, 정의, 배상, 재발방지 특별보고관에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한국의 과거사 문제를 소개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이를 환기시키고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나갈 계획”아라고 덧붙여 피력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4·9평화통일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민주열사 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제주다크투어, (재)진실의 힘, 형제복지원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공동 주관한다.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임정 100주년 특집]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1편 “만세운동을 막은 자, 자제단장 박중양”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3월 7일 (목요일)
■ 대담 :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가만있으라” 만세운동을 막은 자, 자제단장 박중양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준비한 특집 코너입니다.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오늘부터 매주 한 번씩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 역사를 되짚어 볼 건데요. 첫 시간에 해볼 얘기는 만세운동을 막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친일파 박중양과 ‘자제단’에 대해서 도움 말씀 주실 분, 민족문제연구소 권시용 연구원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하 권시용)> 네, 안녕하세요. 권시용입니다.◇ 이동형> 3.1절 특집을 시작하면서 예민할 수 있는 친일 문제를 먼저 꺼낸 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청산하지 못한 현재의 역사이기 때문이죠. 우리 흔히 그럽니다. 우리 민족은 민족반역자를 한 번도 처단해 본 역사가 없다. 동의하십니까?
◆ 권시용> 네, 불행하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제일 큰 이유는 반민특위의 실패겠죠?
◆ 권시용> 그렇죠. 첫 번째 기회였는데.
◇ 이동형>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아니었을까요?
◆ 권시용> 그래도 최근에 또 역사적인 처벌, 이런 것들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죠.
◇ 이동형> 물리적 처벌을 불가능할 거고요.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물리적 처벌이었으면 그때가 딱 한 번의 기회였는데, 그 기회가 좌절된 것도 역시 친일파들, 민족 반역자들의 방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 권시용> 일차적으로는 미군정이 그들을 다시 등용했던 것이 큰 문제였던 거죠. 그리고 거기에 부합해서 친일 반역자, 친일 협력자들이 자기 살길을 찾기 위해서 또 노력을 많이 했던 것이죠.
◇ 이동형> 미군정이 그렇게 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우리의 독립 역사를 잘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 권시용> 무지의 소치일 수도 있고요. 한반도를 통치한다는 차원에서,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일본에 충성하고,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서도 협력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죠. 효율성을 따졌던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우리 친일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디서는 친일파라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 민족반역자라고 해야 한다,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고유 명사는 친일파로 굳어졌으니까요.
◆ 권시용> 그 용어가 오랫동안 사용되었고요. 그 속에는 매국노, 매국적, 반역자, 일제 협력자, 반민족 행위자 등의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오랫동안 사용됐기 때문에 나름의 역사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 이동형> 해방 이후에 친일파 처벌을 위해서 반민특위를 만들었고요. 2005년 노무현 시기에 만들어진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 위원회, 또 민간단체에서 만든 친일 인명사전. 이 모든 게 친일파 처벌, 혹은 역사적 처벌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처벌할 것이냐.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어디까지를 우리가 친일이라고 할 것이냐, 이런 논쟁은 끊임없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권시용> 그런데 이 시점에 와서 굳이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이런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할 때 거물급 친일파, 대표적인 친일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우리가 이들을 대한민국 법정에 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역사적 평가만이 남아있다.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래서 어떤 행적이 친일 반민족 행위인가,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 거기에 대한 합의, 이런 게 남겨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처음부터 끝까지 친일한 사람이 있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해서 넘어간 사람도 있고, 다양합니다. 오늘 이야기할 사람은 박중양인데, 박중양이 어떤 사람인지 짧게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 권시용> 박중양은 일찍 일본 유학을 갔던 사람이에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기 전에 러일 전쟁에 참전해서 일본군을 위해서 복무했던 경력도 있고요. 그러고 나서 1906년 무렵부터 강제 병합되기까지 대구 군수를 지냈고, 평안북도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이런 직책을 수행했던 것이죠. 그 기간 동안에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들 탄압하는 데도 앞장섰던 행적이 있는 인물이죠. 그리고 강제 병합되고 나서 그다음에는 도지사, 중추원 찬의, 중추원 부의장, 그리고 마지막에는 일본 제국 의회 귀족원 의원까지 탄탄대로 출셋길을 달렸던 인물입니다.
◇ 이동형> 협력의 대가로 그런 것을 받았겠죠.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그런데 3.1운동도 비난하고, 탄압에 앞장섰던 인물이고, 그리고 4월 6일 자제단을 대구에서 처음 조직했다고 하는데, 이 자제단은 어떤 조직입니까?
◆ 권시용> 자제단은 말 그대로 당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던 3.1운동, 만세시위 열풍을 잠재우기 위해서 조선인들로 조선인들을 막자, 이런 차원에서 조선인들을 회유하고, 만세시위를 탄압할 목적으로 만든 단체였던 것이죠.
◇ 이동형> 3.1 운동이 일어나고 한 달 만에 그런 것을 만들었다는 거네요?
◆ 권시용> 네. 그때부터. 처음으로 대구에서 만들어졌고, 그것을 시작으로 해서 전국적으로 만들어진 거죠.
◇ 이동형> 박중양은 당연히도 반민특위가 결성되고 체포됐습니다. 그런데 체포당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고요?
◆ 권시용> 네,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체포당할 때, 조사받을 때 당시 조사를 담당했던 조사관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광수나 최남선 같은 다른 기회주의형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박중양은 몸은 한국인이지만,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해요. 기록도 있고요. 체포당할 때도 나는 당당하게 심판받겠다, 할 테면 해봐라, 이런 식으로 대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 이동형> 그러면 여기서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받았던 박중양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자신의 친일 활동에 대해서 박중양은 이렇게 강변했다고 합니다.
◆ 성우> 나는 시대의 변혁의 희생양으로 무능력한 조선 왕족보다야 문명국이었던 일본의 조선 통치가 훨씬 좋은 정치였어. 한일 병합을 주도하는 이완용을 매국노라 비난하는데, 그는 매국노가 아니라 국난을 당한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사람이요. 어차피 이완용이 없었다면,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을 책임졌을 뿐이오. 만국을 맞이하여 자살했던 순국자들의 의거는 사상계에는 자극을 줄 수 있었을망정, 부국제민의 방도로 보기에는 힘든 것 아니오?
◇ 이동형> 네, 순국자들의 의거까지 폄하하는 이런 일을 벌였는데, 이미 일본은 패망하고, 우리는 광복을 맞았고, 반민특위가 조직돼서 체포당하고, 조사받고, 재판받는데, 아직도 일제인 줄 알았을까요? 왜 이렇게 뻔뻔하죠?
◆ 권시용> 좋은 기억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 대한. 당시에 경험했던 메이지 유신을 거친 일본의 근대화. 그런 것에 대한 좋은 기억? 그래서 해방 후에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메이지 유신 시대에 인재를 배출하여 일본의 융성은 실로 불이 난 것 같았다. 드디어 삼대 강국의 일원으로 일본과 중국, 한국이 백인의 식민 지배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유일하게 일본 제국이 엄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 이동형> 그리고 본인 개인의 입장으로서는 그 시절이 가장 찬란했던 순간일 수도 있고요.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무능력한 조선보다 일본의 통치가 훨씬 좋은 정치고,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라 국난에서 백성을 구한 사람이다. 일종의 신념형 친일파, 이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 권시용> 저도 동의합니다.
◇ 이동형> 조금 더 설명해주시죠.
◆ 권시용>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일본에 유학하면서 일본이 이룩하고 있는 근대화에 압도당했고, 그래서 일본이 가는 길을 긍정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 연장선에서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받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이동형> 어쨌든 이 사람도 반민특위가 실패함으로 해서 당연히 풀려날 수 있었고요. 그리고 59년에 사망했는데, 이때가 86세였어요. 천수를 다 누렸다.
◆ 권시용> 다 누렸죠.
◇ 이동형>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은 19세 때, 20대에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그런데 이 사람은 천수를 누리면서, 그것도 86세 때도 40세 이상 차이나는 일본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고, 한 번도 이분은 심판이랄까요? 그런 것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네요?
◆ 권시용> 40세 이상 차이나는 일본인과 결혼했다는 것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때 이 사람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신문 기사를 보면, 70이 다 된 일본인 아내가 찾아와서 우리 영감이 추운 데 떨고 있으니까 이불을 조금 넣어달라, 이런 부탁을 했다는 게 신문 기사에 실려 있거든요. 일본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건 맞는데,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 이동형> 네, 박중양은 일기와 해방 후에는 ‘술회’라는 회고록을 통해서 일제 강점기를 찬양하고, 그리워하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고 하는데요. 그중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 성우>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의 조선으로 개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 정치를 집행하는 외의 것이 아니었다. 일정 시대의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
◇ 이동형> 그런데 최근 들어서도 박중양의 이런 주장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일본 때문에 발전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 권시용> 요즘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쪽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죠.
◇ 이동형> 참 안타깝네요.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이. 그런데 우리가 자제단 살짝 이야기했는데요. 1919년 4월 6일에 대구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박중양이 앞장서서 만들었다. 그러면 이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이게 퍼졌겠네요?
◆ 권시용> 그렇죠. 전국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4월 6일에 대구 자제단이 만들어졌고, 그 뒤를 이어서 경북에서는 4월 10일에 안동, 11일에 성주, 16일에는 군위, 의성, 영일, 영천, 칠곡, 김천, 선산, 이렇게 곳곳에 자제단이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다른 도, 평안북도에서는 4월 8일, 함경남도에서는 4월 10일, 그다음에 전라남도에서는 4월 11일, 강원도에서는 4월 13일, 경기도에서도 4월 13일, 충북에서는 4월 15일부터 전라북도에서는 4월 20일부터 자제단, 자성단, 자위단 등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곳곳에서 만들어졌고요. 작년에 발표된 논문이 하나 있어요. 이양희 선생님의 논문인데요. 거기 보면, 전국에 138개 군이 넘는 지역에서 자제단이 조직되었다는 연구를 하셨고요. 면 단위에서도 그런 자제단이 만들어졌거든요. 그러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 이동형> 조선인을 통해서 조선인을 감시하겠다, 이런 거잖습니까? 서글픈 일이었는데, 이런 자제단을 박중양이 만들었다, 그리고 다그치고 설득했다는 건데요. 특히 경북 지역을 누비면서.
◆ 권시용> 네, 아까 쭉 경북 지역에 만들어진 자제단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을 만드는 데 박중양의 역할이 컸어요. 먼저 대구 자제단을 만들고 나서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각 지역을 누비면서 설득, 다그치는 역할, 이런 역할들을 했거든요. 그 결과 이렇게 곳곳에서 자제단이 만들어졌던 것이죠.
◇ 이동형> 만세운동도 하지 말고, 독립운동도 하지 마라.
◆ 권시용> 일본의 통치가 좋은 거다.
◇ 이동형> 방금 박중양이 경북 지역 곳곳을 누비면서 자제단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상황을 보여주는 편지가 있습니다.
◆ 성우> 백작 데라우치 원수 각하. 소생은 지난 15일, 대구를 출발하여 김천, 개령, 선산, 칠곡, 각 군을 순회하며 잘 타일러 이르고, 어제 21일 대구로 돌아와서 도청에서 순회 상황을 진술했습니다. 현재 각지가 모두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수많은 병사가 곳곳에 산재하여 총칼로 다스린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후에도 계속 불량자들을 청소하고 오해하는 자를 설득하여 양민을 보살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각지가 모두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불량자를 청소하고, 오해하는 자는 설득하겠다. 어떻게 보면 충성 편지처럼도 보이고요.
◆ 권시용> 충성 편지에요.
◇ 이동형> 자랑 편지인 것 같아요.
◆ 권시용> 네, 자기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때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일본에 있었어요. 거기에 편지를 보낸 거예요.
◇ 이동형> 데라우치는 초대 총독도 했잖아요?
◆ 권시용> 맞아요.
◇ 이동형> 내가 이만큼 일했으니까 알아봐 달라?
◆ 권시용> 그렇죠.
◇ 이동형> 그래요. 불량자를 청소한다는 표현이 굉장히 무서운데, 결국은 3.1운동,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분들, 그리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을 어떻게 하겠다, 이런 말이잖아요?
◆ 권시용>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 이동형> 자제단은 만세시위를 억압, 탄압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들을 했습니까?
◆ 권시용> 어떤 활동들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자제단 규칙이라는 게 남아 있어서 알 수 있습니다. 도 단위에서는 경기도, 전라북도, 함경북도, 황해도 것이 남아 있고요. 군 단위에서도 남아 있는데, 지금 얘기하고 있는 대구 자제단 규약도 남아 있어요. 이 규칙, 규약을 통해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죠.
◇ 이동형> 결국은 이렇게 만들어서 서로서로 감시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그리고 만약에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빨리 신고를 해라. 그러면 거기에 대한 포상이 있을 테고요.
◆ 권시용> 네, 밀고해라.
◇ 이동형> 일제의 잔인함이 엿보이는 것인데요. 이런 활동의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제단 서명에 날인하지 말라는 내용의 조선 독립신문 제26호 실린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 성우> 세계는 인도와 정의로서 세계를 개조하고자 하고, 일본은 위력과 잔인함으로써 우리는 종속한다. 아! 우리가 적의 폭력 아래 노예의 치욕을 인내한 게 10년이라. 일본은 죄 없는 우리를 포살과 방화와 감금과 자치단 등 가지가기의 악계로서 해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소위 자제단이라 거짓으로 칭하여 강제적 위력적으로 협박 시행하여 날인을 받으나 날인이 우리 민족에게 독립자에게 가당키나 할 것이냐. 우리의 사랑하는 동포여, 백절불굴의 용감함으로 분발하여 적의 압박에 굴복하지 말라. 일시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날인하면, 수십의 구속자가 장래에 화를 면할 수 없다. 일시의 평화는 영구의 화인 것을 자각하여 면면촌촌의 단천을 배척하는 것은 독립자의 합당한 행위다. 낙심하지 말라. 우리의 공화국 정부를 세계가 용인하였다. 대사업이 빨리 성취하지 않는 것을 낙담하지 말라. 고통은 즐거움의 씨앗임을 기억하라.
◇ 이동형> 네, 가슴 뭉클한 그런 내용인데요. 조선 독립신문은 어떤 신문이었죠?
◆ 권시용> 조선 독립신문은 지하 신문이에요. 요즘으로 치면 유인물 같은 거예요. 만세시위 열기를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배포했던 것이죠.
◇ 이동형> 박중양을 처단해야 한다. 이런 의지를 가지고 모였던 사람들도 있다고요?
◆ 권시용> 혜성단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만세운동을 이어가고자 했던 그런 모임이었는데, 대구 지역 계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서 만든 조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혜성단에서 자제단 설립에 앞장섰던 박중양에게 경고장을 보냈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 이동형> 그때도 물론이고, 이렇게 일본에 협력하는 세력과 또 레지스탕스 간의 끊임없는 싸움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 힘으로 해방이 안 됐다, 이런 이야기도 많이 하지만, 어쨌든 일본은 패망했으니까요. 아쉬운 게 45년에 일본이 패망하고, 지금 시간이 굉장히 많이 흘렀고,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100년이나 지난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잔재들이 남았다는 것은 많이 안타깝네요.
◆ 권시용> 그렇죠. 해방된 공간에서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기회를 잃었죠. 미군정 시기에 친일 관련한 경찰과 군인들을 등용했고, 첫 번째 기회였던 반민특위에서 실패를 맛보았고요. 그리고 이후에 독재 정권, 군사 정권을 거치는 동안 친일 청산이라는 것은 말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던 것이죠.
◇ 이동형> 문재인 대통령도 100주년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뿌리 깊은 친일 청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권시용>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할 것은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구하고, 그래서 그 결과를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요. 현실적으로는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합당한 평가를 우리 사회에서 내릴 수 있도록 구속 조치들이 필요하다고 봐요. 이를테면 대한민국 정부에서 친일파가 서훈을 받는 일도 있었잖아요? 그리고 각종 친일파에 대한 기념사업도 진행되고 있고요.
◇ 이동형> 동상도 서 있죠?
◆ 권시용> 네, 그렇죠. 다행히 김정수와 같은 사례에서 보듯이 조금씩 역사적인 청산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죠.
◇ 이동형> 알겠습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준비한 특집 코너.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첫 시간인 오늘은 민족문제연구소 권시용 연구원과 함께 만세운동의 자제를 외친 친일단체, 자제단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저희가 자제단 이야기를 하면서 박중양 한 명만 얘기했는데, 인터넷 검색하면 나올 겁니다. 자제단에서 어떤 사람이 활동하면서 친일 활동을 했는지요. 그것은 우리 청취자분들이 한 번 검색해서 살펴보시기 바라고요. 오늘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첫 시간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민들의 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