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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팔려던 매국노에 부정축재자 김종필 훈장 취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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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팔려던 매국노에 부정축재자 김종필 훈장 취소하라

익명 (미확인) | 수, 2018/06/27- 15:35

몇일전 정치공작의 달인이며  박정희 독재정권때부터 쭉 2인자로 중앙정보부 만들어 고문등 국민탄압하고

일본뇌물과 우리세금과 자민련후보 공천값등등 불법정치자금을 어마어마하게 도둑질한 김종필이 죽었고

매국노 김종필에게 무궁화 대훈장을 수여할것같다는 국가보훈처 소식을 접한뒤

벌은 못줄망정 상을주면 누가 나라위해 애국을 할것인지 한심하여 훈장수여 반대로 이글을 올린다
요사이 일본이 고등학교 책까지 독도를 자기네땅이라 올리는 역사왜곡에 우리정부서 강력항의했다는데
조선시대부터 우리땅이던 독도를 일본이 이렇게 역사왜곡하며 우기게 된것은

1965년 일본뇌물받은 매국적이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있어
서울시에 친일매국노며 살인독재하며 부정축재자인 박정희 기념도서관 앞에

우리세금으로 동상을 세우자는 바보같은 의견과 매국노 동상은 절대 않된다는 의견이 대립

찬반회의를 열기로 했다는데 이는 친일매국노가 불법쿠테타로 대통령까지 해먹은것도 국가망신 치욕으로
일정때 자신의 출세위해 일왕에게 진충보국 견마지로 라고 일본의 개나 말이되어 일본에 충성하겠다고 혈서쓰고

일본장교 입대후 만주서 우리 독립군 토벌때는 제일먼저 앞장서서 독립군 죽였다던 악질매국노 다까끼 마사오
불법쿠테타 성공후 조선시대부터 우리땅이던 독도앞바다를 일본이 요구한대로

1965년 친일매국노인 일본면장 아들인 김종필시켜 한일협정서에

독도부근 바다를 동해나 영해에서 고의로 공해로 표기해 현재 독도분쟁 만든 조카사위 김종필과 박정희였고

박정희는 대신 일본서 6600만불을 뇌물로 받은것이 미국CIA 보고서에 기록되어있으며

역시 김종필도 일본정부 뇌물전달자로 박정희의 만주일본군 장교 군대동료인 세지마 류조와 접촉을 자주하였고
당시 한일간 독도분쟁으로 우리국민감정이 들끓자 김종필이 일본외상 오히라에게 독도를 폭파하자 먼저 제안했고

그후 박정희는 미국무장관 러스크에게 독도를 폭파해 없애달라고 부탁하였으며

그래서 미국이 독도를 공군폭격연습장으로 이용 암반덩어리인 독도에 엄청난 큰 금이 가게 만든것으로

일본은 만약 한국땅이라면 한국정부가 왜 미국에 독도를 폭파해달라고 부탁했겠냐고 분쟁빌미를 제공한것이었으며

굴욕적 한일협정 반대 데모가 거세지자 김종필에 모든 책임씌우고 미국으로 도피시키곤 데모하는 한국인 탄압하였으며
1999년 제2한일어업협정도 DJP연합정부때 실세총리인 자민련 김종필이

제2한일어업협정을 일본에 손해보게는 협정하지말라는 평민당 김대중대통령의 만류와

굴욕적인 한일협정 당사자라고 어업인들이 김종필을 제2한일어업협정 책임자로 나서는걸 반대한다는데도

김종필이 고집부리며 자민련소속 김선길을 해수부장관 앉힌뒤

어업선은 고기잡는선이지 국경선이 아니라고 김대중과 국민을 속이고
일본의 독도침략 주장에 유리하게 독도까지 일본어업선을 그은 제2 한일어업협정 맺은 친일매국노 집안으로

매국노와 맺은 어업협정을 무효화시키고 박정희에게 뇌물준 한일협정도 뇌물공여 불법이므로 무효인것이며
박정희는 일본침략배상도 다른나라에 비해 말도않돼는 싸구려로 하곤 그돈마저도 횡령해 정치자금으로 사용

이백만명 정도 끌려가 수십만명 학살당한 강제징용과 이십만명 끌려가 성범죄 숨기려고 다 학살하고

삼백여명만 운좋게 살아돌아온 위안부할머님과 전국서 쌀과 금괴등 엄청난 재물을 약탈당하고도

피해자들 피해배상 한푼도 못받았고 위안부할머님들 눈물나게 만든 더러운 매국노 박정희부녀와 가족들이며
쿠테타 집권후 1963년 만주일본군 총통으로 박정희 직속상관이던 기시를 찾아가 일본을 위해 충성하겠다 경례하며

기시의 명령대로 미군과 일본군 또 박정희가 장악한 한국군이 북한을 침략 점령후

남북 한반도를 일본식민지로 넘긴다는 비밀협정에 박정희도 서명했으니

음흉한 미국도 참여해 미국무부 비밀문서에 미쓰야[63]협정으로 기록해 현재까지 기밀보관중이며

 

만약 중국과 쏘련이 참여 북한을 정복못하게 불리하면 남북한에 핵을 쏟아부어 생명체가 못살게 파괴하려한것으로

미국은 일본이 약탈한 엄청난 금괴등 뇌물받은후 독일처럼 갈라야할 전범일본대신 조선을 강제분단시키고

6.25같은 전쟁을 또 일으킨뒤 불리하면 핵까지 쏟아부으려던 한국인 생명을 완전 무시한 더러운 미국이였고

한국인 멸종 계획한 기시와 박정희로 그래서 일본 양심학자들이 기시와 박정희를 태어나선 안될 귀태라한것이며

[브루스 커밍스교수가 미국무부 비밀문서에서 열람후 발표한 사실]

 

일본사회당등 반대로 무산된 협정인데 얼마전 기시 손자인 아베가 할얘비 뜻에따라 매국노딸 박근혜와

한국인들 반대에도 한일군사협정 맺어

한국전쟁나면 독도침략처럼 한반도 재침략 발판을 마련한것으로 위안부 굴욕협정처럼 박근혜의 매국행위이며
태생이 기회주의자인 박정희는 해방후 친일매국노를 처벌하자 집에 못오고 신분숨긴채 떠돌다

이승만이 전범일본대신 조선을 강제분단하는 미국을 편들자 독립군과 애국지사 애국국민이 조국분단 반대하니

처벌하려던 친일매국노를 구출 정부요직과 군경찰 간부로 기용하고 친일파가 만든 서북청년단 동원해
조국분단 반대하던 김구 김규식 여운형등 애국지사와 독립군과 4.3사태 제주도민등 애국국민을 암살과 학살할때
박정희도 군입대후엔 공산당 간부인 친형 박상희지시로 비밀리에 경상북도 공산당 군사부장맏아 간첩질도 하였고

여순반란사건 공산당 책임자로 검거되자 만주일본장교 출신으로 같이 독립군 죽이던 조사관 백선엽과 김창룡에게

자기형 친구와 군대내 공산조직 다불고 목숨구걸하여 같은 일본장교라 봐주고 국군에 복직까지 시켜줘
나중에 조카사위 김종필 동기들시켜 쿠테타 벌일때도 실패하면 튀려고

용산국군본부옆 술집서 사복입고 술먹다 성공소식듯고 군복갈아입고 합류한 기회주의자였고

쿠테타 성공후에 백선엽을 특별대우하여 백선엽이 인천서 인천대통령이란 별칭으로 불법으로 권력휘둘렀고

남의 땅까지 헐값주고 강제로 빼앗아 선인학원 재단차려 학사비리로 부정축재하였으며
또 박정희 재임기간은 저개발 동양이 선진국 서양문물 받아들일때라 동양 모두 발전할때인데도

기업과 짜고 최저임금 최고노동시간으로 근로자 착취하게하고 월급 올려달래도 빨-갱이로 몰아 감옥가두며

정경유착 근로자 착취한후 나라경제 살려야할 이익금중 세금낼돈을 국가정보원장 이후락등시켜 기업서 모금하여

경제살려야할 세금낼돈 60억불을 스위스은행에 숨겨논 박정희로

그래서 경제못살려 당시 아시아 동양서 최저수준 경제못살리곤 많이살렷다고 국민속인것으로
기회주의 박정희는 경제개발계획도 장면정부가 세운 계회표보고 따라했지만

경제살려야할 세금을 도둑질로 경제못살리자 마침 북한이 한국보다 훨씬잘살자

북한의 천리마운동을 본따서 새마을운동도 만들어 노력하는척한 기회주의자로

[박정희 죽은뒤 미프레이져 청문회서 이후락 아들 증언과 박정희집권 당시 세계 경제발전도표 아시아순위 참조]
무소불위 권력휘둘러 윤정희등 연애인들 다부르고 김삼화란 유부녀 강간에

안양예고 고등학생까지 반강제로 데려와 겁탈하고 우리세금으로 입막음하다가

22살 여대생끼고 놀던날 부하총에 즉결 처형된 매국노 박정희였고
또 월남참전용사들 목숨값과 독일파견 광부와 간호사월급도 미리 받아써서 한국도 못나오게하고 일부 횡령한돈과

기업서 정경유착 근로자 착취한돈으로 청와대 금고서 나온 금은보화와 외화 채권등 트럭 몇차 분량과

육영재단 MBC주식 영남대학과 별도로 최태민과 최순실과 박근혜가 도둑질한것중

독일에 은닉한 부정축재금중 독일검찰이 발견한것만도 십조원 이상으로 보인다하고
뽕쟁이 박지만회사도 은행서 15조원 불법대출후 돈빼돌리고

베트남으로 도망가 호화생활하는 대우그룹 김우중이 차려준 뇌물로 박지만 회사도 환수해야하고

그외 친인척들 부정축재까지 합치면 천문학적으로 금액이 엄청나지만

 

그중 대표적인 조카사위 김종필은 전두환이 집권후 부정축재자로 조사할때도 엄청난 부정축재 들통났었고

한보그룹에 부정대출해주도록 은행에 압력넣고 뇌물받은 김종필로 부정대출금을 우리세금으로 메꾸었으며

또 그외 친인척들까지 백조원이넘게 한국서 세금도둑질한 패륜적인 매국노 집안으로
은행돈 빼돌리고 외국으로 도망간 한보그룹 백억대 뇌물을 김종필 계좌서 발견한 함승희 검사와 김종필이 빅딜해

얼마전까지 친박단체인 함승희가 부정입사등 국영기업 정선카-지노 사장보며 띵가 띵가하던 진짜 도둑들이며

진짜 최고의 악질매국노로 국립묘지에 안장도 반대하며 경상북도 공산당 군사부장인 매국노 박정희묘도 국립묘지서 파내야하며

현재도 일본서 간첩처럼 돈받고 일본위해 역사왜곡과 일본침략 미화하는 뉴라이트를 일본간첩으로 처벌해야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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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S 피해자 입니다.

사건 이 후 왜 이리도 이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결론 중 하나는 친일파 적폐와 김성훈의 사기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공통점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말과 글로써 백성을 기만했다.
2. 국가와 백성을 상대로 사기를 저질렀다.
3.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아직도 잘먹고 잘산다.
4. 지식층 권력층과 규합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 받고 있다.

반면, 그때나 지금이나 백성들은(사기 피해자들은)매일같이 피빨리고,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간다.

현 정부의 적폐 청산 의지는 확고 합니다. 그것이 친일파 적폐이든 사회 전반의 적폐이든…
다만, 피해자 구제는 요원합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IDS홀딩스 김성훈의 파산 변호를 맡으신 변호사님…
변호는 자유입니다.
다만, 이 사회가 아직 정의롭지 못하다는 증거일 뿐이니까요.
또한, 이번 변호를 통해 얻은 금전도 자유입니다.
다만, 친일파의 더러운 돈과 김상훈의 돈이 다르지 않음을 피해자들은 아니까요.

부디, 파산을 통해 1/n 구제가 합리적이라는 논리에 현옥되지 마시고, 또한 적폐의 우두 머리인 김성훈에게 자유의 날개를 달아주지 마시길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다시한번 생각하시고, 백성들과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변호를 해주시길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수, 2017/12/06-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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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病僧(증병승)
 
僧乎錢是佛(승호전시불)
病甚勸休祈(병심권휴기)
急遽尋醫者(급거심의자)
黃泉去不歸(황천거불귀)
 
병든 스님에게 지어 주다
 
스님이시여! 돈이 곧 부처님일세
病이 심하다고 권컨대 빌지 마오
급히 서둘러 醫員님 찾아가 보길
저승에 가시면 돌아올 수 없다오.
 
<時調로 改譯>
 
돈이 곧 부처일세 病 심하다 빌지 마오
급속히 서두르시어 醫員님 찾아가시길
어쩌랴! 저승에 가면 돌아올 수 없다오.
 
*急遽: 몹시  서둘러  급작스러운  모양  *醫者: 의원(醫員)  *黃泉: 저승
*不歸: 돌아오지 않음. 돌아가지 않음. 사람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름.
 
<2017.5.8, 이우식 지음>

화, 2017/05/09-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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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차 맞은 대전수요문화제


“굴욕적 한일합의 당장 무효화하라!”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반대한다!”
“한미일 군사동맹 반대한다!”
“역사적폐 끝까지 청산하자!”

7월 12일, 20차를 맞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한반도 평화 실현! 대전수요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외친 구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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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2일 저녁 7시, 대전평화의 소녀상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한반도 평화 실현! 대전수요문화제”가 20차를 맞았다.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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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폐청산, 민족통일’ 구호를 함께 외치자며 선창을 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박해룡 지부장. ⓒ 임재근

첫 번째 발언에 나선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박해룡 지부장은 “사람이 살면서 3가지 만남이 필요하다”며, 이 3가지 만남을 ‘자기 자신과 냉철한 만남’, ‘국민의 자존심과 국가의 권위도 살릴 수 있는 역사와의 만남’, 그리고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아니라 공동체를 생각하는 사회와의 만남’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런 만남을 위해 여기 오신 분들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더불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적폐청산이고, 더불어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통일이라며 ‘적폐청산, 민족통일’ 구호를 함께 외치자며 선창하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카이스트 내에 작은 소녀상 건립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힌 카이스트 소셜메이커의 정지윤 학생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저지른 문제에 대해서도 사과할 줄 알이야 한다”며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성노예 범죄 해결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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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연리지 장애가족협동조합 회원과 조합원들도 발언에 나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 임재근

대전장애인차별철폐연대 ‘피플큐브’의 최준호, 김관영 회원과 연리지 장애가족협동조합 백장현, 김요진 조합원도 함께 무대 앞으로 나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최준호씨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참상이 SNS를 타고 퍼지는데도 일본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며,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돈 몇 푼이 아니라, 진정한 사과”라며 “일본은 고개를 숙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백장현씨는 “위안부 범죄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가혹한 일”이라며,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라”고 외쳤다.

김관영씨도 “일본이 용서를 구하고, 국가에서 사과문을 전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요진씨는 ‘난 알아요’ 곡으로 노래공연을 펼쳐 큰 박수를 받았다.

대전청년회 김원진 대표도 발언에 나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강제징용 문제도 해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원진 대표는 군함도로 대표되는 강제 징용의 사례를 들며, “일본을 제외한 나라들에서는 강제징용과 관련한 사실과 끔찍했던 광경들을 알고 있는데, 당사자인 일본만 피하려고 한다”며 일본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대전청년회에서는 군함도 강제징용의 참혹했던 피해 상을 고발하는 전시물을 직접 만들어 문화제 주변에 전시했고, 올해 11월에는 군함도를 직접 다녀와 강제징용 여론을 확산시킬 계획이라고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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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함도 강제징용 관련 전시물을 보고 있는 참가자들과 시민들. ⓒ 임재근

보릿고개에 입 하나 덜자고 나선 길이었다.
떨어져 살아도 고향 쪽 하늘 바라보면
엄마도 이쪽을 바라보겠지
그렇게 떠난 길이었다.
한 줌 빛줄기 들지 않는 열차 속에서
겁먹은 표정의 앳된 얼굴의 마주 앉은 낯선 아이의 손을
꼬옥 쥐어주며
이제 공장 가면 돈 많이 벌어
고향 집에 흰 눈처럼 소복한 솜옷 보내자 말했을 때
그 아이는
자기는 이불 보내고 싶어요
수줍게 웃었지…

양보규 대전지역 희망노동조합 위원장은 ‘이 땅 위에’란 제목의 자작시를 지어 낭송하기도 했고, 대전청년회 노래모임 ‘놀’에서는 독립영화 ‘우리 학교’ 삽입곡인 ‘우리’와 통일 노래인 ‘경의선 타고’를 부르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의 해결과 더불어 통일을 염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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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는 대전민중의힘 소속 단체 대표자들. 왼쪽부터 김원진 대전청년회 대표, 대전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정선 공동대표, 대전장애인부모연대 최명진 대표, 대전민중의힘 상임대표 민주노총대전본부 이대식 본부장, 대전민중의꿈 김창근 상임공동대표,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박해룡 지부장. ⓒ 임재근

수요문화제는 ‘평화나비대전행동’이 주최하는 데, ‘평화나비대전행동’ 소속 단체들이 돌아가며 주관을 해오고 있다. 이번 달 수요문화제는 대전민중의힘이 주관했고, 소속 단체 대표자들이 함께 나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부르며 마무리했다.

대전수요문화제는 매월 두 번째 수요일 저녁 7시에 대전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개최된다. 다음 수요문화제는 8월 9일에 개최된다.

임재근 기자

<2017-07-1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모두 가혹하고 끔찍.. 일본은 사과하라”

목, 2017/07/13-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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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자리에서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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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

19살 청년이 서대문감옥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다. 이 청년은 우리가 잘 아는 <상록수>의 저자 심훈(본명 심대섭 沈大燮, 1901~1936)이다.

1919년 3월 1일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심훈은 독립운동 소식에 학교를 뛰쳐나왔다.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문으로 옮겨가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날은 붙잡히지 않았다.

3월 5일 오전 9시, 심훈은 남대문역 앞에서 수만의 학생과 같이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대 시위운동에 청년의 피가 끓었다. 어머님보다 더 큰 어머님,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는 혈기가 넘쳤다. 그날 밤 안국동 별궁 앞에서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편지에서 보듯 만세시위에 나섰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사람은 몇 천, 몇 만이었다.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던 기간은 2개월 남짓이었다. 그해 겨울, 삼한 사온이 무색하게 나날이 춥기만 했다. 심훈은 감옥에 남은 동지들을 걱정했다. 걱정하는 한편으로 나라의 독립을 염원했다.

지금쯤 얼음 속 같은 옥중에 그저 남아 있는 사람들이야 과연 어떠할까? 살을 깎아내는 북풍은 철창에 불고 눈덩이 같은 밥을 먹고 허구한 날 우르르 떨기만 할 때에 그이들의 마음이야 과연 어떠할까.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그저 뜨거울 것이다. 서대문 감옥 높은 담 위에 태극기가 펄펄 날릴 때 굳센 팔다리로 옥문을 깨뜨리고 환호와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열광하여 뛰는 군중… 오- 상제여 그의 원한을 속히 이루어 주소서! (심훈일기, 1920.1.17)

31운동 1주기가 되었다.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온 시가를 꽁꽁 에워쌌다. 신문에는 나지 않았지만 평양에서 야단이 났다고 하고 배재학당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소문도 들었다. 심훈은 홀로 남산에 올랐다. 여러 가지 일로 답답한 가슴이 그를 이끌었다.

남산에 올라갔다. 왜놈들에게 짓밟힌 남산 눈앞에 깔린 서울 시가며 꿈같은 먼 산과 띠 같이 흐르는 한강수까지 다 우리 것이련마는. 아! 슬프고 답답한 마음을 억제키 어렵다. 잠두(蠶頭)에 홀로 걸터앉아 넓은 시가와 산과 들과 강을 향하고 목청을 빼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창가를 높이 불렀다. (심훈일기, 1920.3.27)

감옥에서 풀려난 심훈, 미래를 걱정하는 20살 청년이었다. 온 민족이 들고 일어나 독립만세를 부른지 1년이 지났지만 식민지라는 현실은 변한 게 하나 없다. 만세시위로 옥고를 치르느라 다니던 학교에서는 퇴학당했다. 문학에 뜻을 두었지만 길은 잘 보이지 않았다. 듣는 이 없는 산에 올라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불러보지만 슬프고 답답한 마음은 쉬이 풀릴 리 없다.

그런 그의 눈앞에 자리보전하고 누운 큰형이 보였다. 큰형은 필명 천풍(天風)으로 유명한 심우섭(沈友燮, 1890~1948)이다. 둘 사이엔 작은 형 심명섭과 누이 심원섭이 있다. 그래서 큰형과 막내는 11살 나이 차이가 난다. 어린 막내가 보기에 큰형 심우섭의 처신이 참으로 못마땅하다.

형님의 병환이 그저 낫지 못한데 어제는 오지도 않았다고 보지도 않고 공연한 걱정을 하신다. 아무 아는 것도 없이 혼자 달관을 하고 초관(超觀)을 하고 안하무인으로 자임하여 말만 함부로 하고 다니며 하다가 신문경영에도 대실패를 하고 울화병이 든 것이다. 그러고 주색(酒色)에 몸은 약하여 가지고 온갖 번민을 하며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는 것이라 아무리 친형제 간이라도 동정하는 마음이 생길 수는 없다. 형님의 일은 만사가 다 그 수법이니 누가 환영을 하랴. 이렇다가도 형제간에 마음이나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큰 걱정이다. (심훈 일기, 1920.1.21)

형의 병 수발은 본처가 아닌 첩이 들고 있다. 이미 심우섭은 평양 출신 기생 초월과의 연애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이 무렵에는 또 다른 이를 첩으로 들였던 모양이다. 심훈은 형님 병의 원인을 타락적 쾌활과 불규칙한 생활, 조금도 없는 극기심, 특히 주색을 제1의 악마라고 생각했다. 당시 심우섭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신문에 소설도 발표하고 매일신보 기자로 필명을 날리던 쾌활남아였다. 그런 심우섭이 신문사도 그만두고 자리보전하고 누워 병문안 오지 않는다고 동생 타박이나 하고 있다. 이제 그 형 이야기를 해 보자.

기자 심우섭, 데라우치를 찬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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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섭

1910년 3월 휘문의숙을 졸업한 심우섭이 맞닥뜨린 현실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이었다. 신학문을 배운 지식인으로서 심우섭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 관료가 될 생각도 한 모양이다.

이듬해에는 잠시 사립학교 교사 노릇도 했다. 하지만 5개월 남짓 만에 그만두었다. 심우섭의 선택은 문인이자 언론인의 길이었다. ‘천풍’이란 필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매일신보에 소설 <형제>(兄弟, 1914년 6~7월), <주>(酒, 1914년 9월), <산중화>(山中花, 1917년 4~9월)를 연재했다. 특히 1917년에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본인들의 호랑이사냥에 동행하고 ‘정호기(征虎記)’를 연재했다. 매일신보사에 입사한 것은 1916년이었고 1918년부터는 지방과장이란 직함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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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명을 날리던 20대의 심우섭. 왼쪽부터 진학문 심우섭 이광수 이상협

이광수가 1917년에 발표한 소설 <무정>의 첫 장면에는 신문기자 신우선이 등장한다. “미스터 리, 어디로 가는가” 주인공 이형식을 뒤에서 부르며 나타나는 이.대팻밥모자를 살짝 뒤로 젖혀 쓰고 활개 치며 내려오는 신문기자 신우선이다. 김장로 집 딸 김선형의 영어 과외를 하러 가는 이형식에게 던지는 신우선의 농지거리는 그의 유쾌함과 활달함을 잘 드러낸다. 그렇지만 이형식은 그의 지나친 방탕함을 허물이라 생각하고 있다.

소설 <무정> 속 신우선이 매일신보 기자 심우섭을 모델로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름도 그렇고 <무정>이 매일신보 1면에 연재될 때 심우섭의 <산중화>는 4면에 연재되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1918년, 매일신보 기자 시절에 찍은 이 사진 속 심우섭을 보면 생기 넘치는 젊음과 그에게 꼬리표처럼 항상 붙어 다니는 ‘해학’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게 하는 장난기가 엿보인다.

옆에 선 이는 이광수와 진학문, 이상협이다. 비슷한 연배에 매일신보를 매개로 어울리던 시절이다. 이렇게 매일신보에 소설을 연재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고, 쾌활한 성격으로 음주가무를 즐기며 평양 출신의 유명한 기생과 연애도 하며 풍류남아 심우섭의 20대 청춘이 흘러갔다.

이 무렵 기자 심우섭의 기사 한 대목을 읽어보자. 꽤 긴 글인데, 일부를 발췌해도 역시나 길다.

백작이 조선을 혁신함이 의사가 난치병자에게 수술을 베품과 다를 바 없도다. 아니다.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한층 심한 것이 있다. 즉 의사가 다만 병자의 복부나 다리를 해부하기에 그치지만 백작의 수술방법은 매우 엄혹하고 奇絶하여 옛 머리를 자르고 새 머리를 붙이며 四肢百體에 그 예리한 해부도는 縱橫敏活하여 자르고 쪼개지 않은 곳이 없다. 오호라. 당시 병상에 누웠던 우리 조선인 즉 병자의 고통이야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겠으며, 백작에 대한 분노와 증오도 역시 극에 달하였으리로다. 백작이 전기한 공전절후의 대수술을 단행하고는 다시 환자의 회복에 힘을 다하여 恩威와 寬嚴이 오로지 병자로 하여금 加療靜食에 주의하게 하고 감히 分外의 事爲를 감행하지 못하게 한지 이제 만 6 개년여라. 시술 후 6년여 장기간에 周密한 좌우의 간호를 받으면서 병상에 누워 있다가 지금에 이르러는 크게 全快한지라. 다년 음용하던 미음은 쌀밥으로 변하고 그 착용하던 환자복도 새 옷으로 갈아입고 嚴切한 간호를 해탈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에 의사의 주의방침도 일변하여 완전한 인간으로 대우하며 원래 무병한 자와 같은 행복을 누리게 할 시기가 멀지 않았다. 비로소 천오백만의 조선인민은 滿心歡情으로 백작의 손을 꼭 잡아 백작의 시술의 노고에 감사하고, 백작은 다년 병상의 고통을 위안하여 일반의 의심이 사라지고 和氣가 가득하기에 이른 것은 기약도 기대할만 하거늘. 애석하도다 무정한 寺內백작은 일이 이에 이르기 전에 조선을 떠나갔도다. (<매일신보> 1916.10.15. 밑줄은 인용자)

이 기사에서 찬양해 마지않는 백작은 다름 아닌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이다. 1916년 10월 데라우치는 조선총독을 사임하고 일본에 돌아가 내각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심우섭 기자는 데라우치 백작을 전송하는 글(「寺內伯爵을 送함」, 天風生)을 매일신보에 실었다. 문예기자로서 주로 신소설을 연재하며 간혹 금강산 기행이나 호랑이 사냥 같은데 따라가 답사기를 쓰고, 혹은 문예면에 유쾌한 세태풍자기사를 주로 쓰던 심우섭이다 보니 이런 정치색 짙은 글은 참 의외다.

기자 심우섭이 데라우치의 조선통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자. 그는 조선과 조선인을 병상에 누운 환자에, 데라우치와 일본의 식민통치를 의사와 간호사에 비유했다. 의사의 수술방법은 매우 엄혹하고 기이하다. 옛 머리를 잘라내고 새 머리를 붙이는 것 같다. 병자의 온몸을 자르고 쪼개니, 그 고통이 이루 형용할 수조차 없다. 그 고통에 의사에 대한 병자의 분노와 증오는 극에 달했다. 그래도 의사는 대수술을 감행하더니 그 후 환자의 회복에 정성을 다했다. 6년여가 흘렀다. 이제 환자는 완전히 나았다. 환자복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쌀밥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환자는 의심을 거두고 의사의 노고에 감사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찬사를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니, 이런 글솜씨가 아무에게나 있겠는가. 이 기사는 심우섭의 생각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본이 난치병에 걸린 조선과 조선인을 치료해 주고 행복의 길로 이끌고 있으니, 즉 일본의 식민통치를 통해 조선이 근대화되고 있으니 그 은혜에 고마워해야 한다. 매일신보가 총독부 기관지이고, 기자는 신문사의 논조에 구속받을 수밖에 없다고 해도 이 정도의 정성과 글솜씨를 보면 근본 생각이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치운동 잠깐, 그리고 참정권 운동으로

만세시위 열풍이 한풀 꺾인 1919년 7월 심우섭은 일본 도쿄로 향했다. 매일신보 기자는 그만두었던 것 같다. 동생 심훈도 감옥에서 풀려나왔을 무렵이다. 심우섭을 비롯해 함께 도쿄에 건너간 고희준, 채기두, 박승빈, 이기찬, 고원훈, 박병철 등은 조선에 자치제 시행을 위한 운동을 하려 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동상(東上) 7인조’라 불렀다. 일본 정계의 주요 인물들을 만나 ①관리를 공평하게 임용할 것 ② 조선의회를 개설할 것 ③ 언론의 자유를 인정할 것 ④ 소요(3.1운동) 범인을 석방할 것, 4개항을 제시하며 대조선 정책에 채용할 것을 역설했다. 또 하라 다카시(原敬) 수상을 만나 총독정치에 대한 종래의 실정을 비판하고 “조선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거나 조선의회를 만들라”는 의사를 표명했다.

3・1운동의 충격은 일본 식민통치자들로 하여금 조선 통치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했고, 동시에 조선인들의 정치운동 내지 정치적 요구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 흐름 중 하나가 자치론 내지 자치운동이었다. 주로 이광수를 비롯한 동아일보 계열과 최린을 위시한 천도교 신파 쪽에서 1920년대를 거치는 동안 자치운동에 열심이었다.

일제시기 조선정치행위의 논리를 크게 독립운동론, 참정권론, 자치론으로 구분한다. 참정권론과 자치론은 식민 통치에의 ‘참여’ 논리, 독립운동론은 이에 대한 ‘저항’의 논리이다. 기본적으로 ‘참여’란 기존체제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의 행위이다. 따라서 자치론은 본질적으로 독립운동의 유보 내지 포기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일부 논자들은 자치운동을 독립운동의 준비단계로 보기도 한다. 일제의 동화정책에 반대하며 정치적 결사를 통해 조선인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고 단결시켜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게 하자는 주장이 일견 그럴 듯 해 보이긴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조선의 자치운동은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일제에 협력한 운동이었다. 다른 식민지(인도나 아일랜드)의 자치운동은 저항세력이 전개했는데, 조선에서는 일제에 협력적인 세력이 주도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실제 자치운동은 일제 지배 하에서 일정한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심우섭을 비롯한 ‘동상 7인조’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조선에 자치를 허용해줄 것을 제안했다. 이 무렵 심우섭은 3・1운동의 여파로 나타난 일제의 통치방침의 변화란 물결을 타고 정치운동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가 자치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 1922년 7월 무렵이고,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이 발표된 것이 1924년 1월이니 심우섭 등의 자치운동은 아마도 그 시초가 아니었을까. 도쿄에서 돌아온 이들은 그해 11월 새로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이 청원서는 기존의 주장에서 상당히 후퇴하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는데 그치고, 조선의회 설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즉 일본 하라 수상의 내지연장주의에 따른 동화정책과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라는 구도 하에서 조선인의 정치활동을 위한 공간 허용만을 요청했다. 이들의 자치운동은 그 정도 선에서 끝났던 것이다.

심우섭은 매일신보사에 복귀해 논설부장으로 일하는 한편 계명구락부 기관지인 <계명>의 주간을 맡아 보았다. 그러다 1925년 동민회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자치운동과는 노선을 달리하던 참정권 운동에 투신한다. 일본의 동화주의를 적극 지지하는 참정권 운동 단체인 동민회는 ‘철저한 내선융화의 실현을 통한 아시아민족의 결합’을 내세운 단체였다. 당시 자치운동 측과 참정권 운동 측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맹렬히 비판하던 시기였다. 이른바 갈아타기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참정권론이든 자치론이든 기본적으로 일본에 협조하고 일본의 우위와 지배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다. 종국에는 이광수나 최린도 동화론자로 변절해 갔다는 사실을 볼때, 심우섭은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심우섭을 비롯한 동상 7인조가 도쿄에 건너갔을 때 유력 인사들과의 교섭을 부탁한 인물이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였다. 아베 미쓰이에는 정치기자로서 1915~1918년 경성일보 및 매일신보 사장을 지냈고, 1920년대에는 사이토 조선총독의 개인 정치고문 역할을 했다. 조선통치에 관련이 깊은 사람으로 연구자들 사이에선 ‘제국의 브로커’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이다. 심우섭이 자치운동을 위해 도쿄를 찾은 1919년 7월에 아베는 일본 국민신문 부사장을 맡고 있었다. 이때 그는 심우섭 일행에게 일본 정치인들을 비롯한 유력 인사들을 소개하고 자치운동을 위한 조언도 해 주었다.

일찍부터 조선인 ‘신지식층’에 관심이 많았던 아베는 1920년 5월 조선을 방문했다. 경성일보 사장을 그만두고 떠난 지 2년 만이었다. 새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비공식 정치고문 역할을 시작한 것이다. 아베는 사이토의 기밀비를 받고 조선인과 재일유학생의 동향이나 일본 정계의 상황을 사이토에게 보고했다. 아베에게는 정치기자 시절 구축한 정보망과 경성일보・매일신보 사장시절 맺었던 조선인 네트워크가 있었다.

약 2개월 동안 아베는 조선 각지를 돌며 실업가, 지식인, 청년지도자, 3・1운동 지도자 등 조선인 유력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가 경성에 도착하자 예전부터 알고 있던 조선인들이 매일 “천객만래(千客萬來)”해서 환영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차례로 성대한 환영회를 열어 아베를 맞이했다. 아베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며 깊은 교류를 나눴던 젊은 ‘신지식인층’이 ‘문화통치’의 기류 속에 조선어 신문을 창간하던 시기였다. 그들은 아베를 통해 총독부의 자금 원조와 언론통제 완화 등을 요청했다.

아베를 만나려 줄을 선 이들 가운데 심우섭도 있었다. 그들의 인연은 아베가 경성일보・매일신보 사장이던 시절 심우섭이 매일신보 기자였다는 정도인데, 쾌활하고 주색을 즐기는 심우섭의 캐릭터를 고려하면 좀 더 개인적인 친밀함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심우섭은 병석에서 일어난 직후였는데도 동생 심훈을 데리고 아베를 찾아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문사도 그만두고 도쿄에 건너가 시도했던 자치운동이 별 신통찮은 결과를 보인데다가 큰 병을 앓고 난 직후인지라 꽤 침잠해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매일신보에 복귀하는 걸로 봐서 취직자리를 부탁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심우섭과 아베의 친분은 후에도 쭉 이어졌고, 1936년 아베가 사망하자 심우섭은 그의 흉상을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흥미있는 연구가 있다. 사이토가 조선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어떤 조선인을 몇 차례나 만났는지를 그 횟수를 일일이 밝혀놓은 것이다. 그 가운데 1924년부터 1926년 말까지 사이토가 만난 조선인 제1위는 선우순으로 39회였다. 2위는 이진호(37회), 3위는 민영기(33회)였다. 그리고 다음 자리를 차지한 것이 심우섭인데 도합 31회를 만났다. 당시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를 지낸 박중양(20회)이나 신석린(28회)보다, 재계의 거물 한상룡(27회)보다 사이토 총독을 많이 만났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심우섭이 조선총독을 자주 만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 그리고 동민회 활동과도 관련 있으리란 점은 짐작할 수 있다. 또 아베 미쓰이에가 사이토 총독의 정치고문으로 활약하던 시기였으니 아베와 친분이 있던 심우섭이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서로 엇갈린 형제의 길

심우섭이 적극적 친일파의 길로 한걸음씩 내딛는 동안 동생은 식민지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좌절하고 분노했다.

1920년 말 심훈은 중국으로 떠났다. 일본 유학 대신 선택한 길이었다. 북경, 남경, 상해, 항주로 이어진 여정 속에서 걸출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를 쌓았다. 항주에서는 지강대학(之江大學)에 진학했다. 1923년 중국에서 돌아온 심훈은 영화와 문학 창작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다. 급진적 문예조직이던 ‘염군사’,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입한 것으로 봐선 유학시절 사회주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1924년엔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지만 1926년 철필구락부사건으로 해직되었다. 심훈은 시를 쓰고 소설을 썼다. 그 속에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저항을 담았다. 당시 심훈의 격정이 표출된 시가 「박군의 얼굴」이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朴君,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중략)
오냐 朴君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
너와 같이 모든 X를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心臟의 鼓動이 끊길 때까지

심훈은 세 친구, 박열 박순병 박헌영을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 직접적 계기는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출감하는 박헌영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저항적 실천의 자세를 갖춰 나갔다. 심훈의 대표시 「그날이 오면」(1930)은 그의 정치사회적 태도와 문학적 지향을 잘 드러낸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前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鐘路의 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頭蓋骨은 깨어져 散散 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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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오면’ 총독부 검열본. 독립을 향한 염원이 담긴 시라 하여 검열당국에 의해 삭제 조치를 당했다.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침략했다. 심훈의 문학세계에는 일제의 검열이 들이닥쳤다. 시집 「그날이 오면」 출간이 가로막혔다. 우회로를 찾아야했다. 1932년 심훈은 부모님이 계신 충남 당진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소설 <상록수>를 썼다. ‘국가’를 ‘고향’으로 변형시킨 우회전략으로 검열을 넘어 당대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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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경성방송국 방송실에서. 뒷줄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이 심우섭 제2방송과장

 

1936년 심훈이 세상을 떠났다. 심우섭의 삶은, 동생이 죽은 뒤 10년여 더 지속되었다. 일제 군국주의의 총구가 전 세계를 향하던 시기였다. 그 역시 여느 친일 지식인들처럼 일제가 일으킨 전쟁의 광기에 휩쓸려 들어갔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심우섭은 주로 경성방송국과 매일신보에서 일하며 각종 전쟁선전과 동원에 협력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시국순회강연반에 참여해 강연활동에 나섰고, 조선유도연합회와 조선임전보국단에도 가담했다. 결국 동생은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열정을 표출한 문학가로 이름을 남긴 반면, 형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되고 말았다.

<참고자료>
박찬승, 「일제하의 자치운동과 그 성격」(1989)
이나미, 「일제시기 조선 자치운동의 논리-독립운동론, 참정권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2006)
이형식, 「제국의 브로커 아베 미쓰이에와 문화통치」(2017)
박진영 교수 블로그 www.bookgrma.pe.kr

목, 2018/02/2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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