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는 지난 10일 설립 107년을 맞았다. 올 기념식은 예년과 달랐다.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것이다. 지난 8일 서울 태릉 육사 화랑연병장에서 생도 1100여 명이 107돌을 기념하기 위한 분열 의식을 했다.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 참석자들을 향해 충성 구호도 외쳤다. 육사 강당에선 항일 음악 발표회도 있었다.
1911년 6월 10일 만주 서간도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까지 2천여 명의 항일 투사를 길러냈다. 이 학교 출신들은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의 중심이었다. 지청천 이범석 김경천 장군은 교관을 지냈다. 우당 이회영과 석주 이상룡 일가의 가산이 학교 설립에 쓰인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예로 잘 알려져 있다. 2011년 꾸려진 사업회를 이끄는 윤경로 대표를 18일 서울 소공동 한 식당에서 만났다.
▲ 지난 8일 육사에서 열린 기념식 뒤 사업회 쪽 참석자와 생도 대표 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업회를 만들고 가장 먼저 추진한 게 육사의 뿌리 찾기였죠. 육사 연혁을 보면 미군정이 만든 군사영어학교가 전신입니다. 친일파가 많은 학교였어요.” 사업회는 애초 신흥무관학교 100돌 기념사업을 치르기 위해 만들었다. “2011년 육사에 공문을 보내 숱한 독립군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가 육사의 뿌리란 걸 조명하는 세미나를 열고 기념식도 육사에서 하자고 제안했죠. 답이 없더군요.”
6년이 흐른 뒤 기류가 바뀌었다. “지난해 8·15 행사 뒤 육사 쪽에서 만나자고 했죠. 김완태 당시 육사 교장과 두 번 만났어요. (정진경 현 교장은 지난 5월 부임) 김 교장이 그래요. ‘난 육사 교장을 끝으로 군복을 벗는다. 소신껏 하겠다’고요.” 김 전 교장은 사업회 제안을 받아들여 지난해 12월 육사에서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 학술대회를 열었다. 올 3월 1일엔 학교 안에 홍범도 지청천 김좌진 이범석 장군과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세웠다. 생도들이 군사훈련 때 쓴 탄피를 녹여 만들었다. 그리고 기념식이 육사 교정에서 열렸다.
윤 대표는 작년 8월 14일 애국지사·유족들과 함께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점심을 먹었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초청 행사였다. “문 대통령이 사업회 활동에 관심을 보이더군요. 그래서 제가 세 가지를 이야기했어요. 육사 모체를 친일파가 우글거렸던 군사영어학교로 하는 건 잘못이다, 자존심의 문제라고요. 국군의 날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은 10월 1일이 아니라 광복군 설립일인 4월 27일이어야 한다고도 했죠. 탑골공원 정화사업의 필요성도 말했죠.” 대통령은 2주 뒤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 전통도 육사 교과과정에 포함하고 광복군을 군 역사에 편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화답했다.
지난 8일 육사서 107돌 기념식
작년엔 신흥 조명 학술대회도
육사 새정부 들어 사업회안 수용
“친일파 학교가 육사 전신은 잘못 신흥무관학교가 육사 뿌리 돼야 독립운동 전공자 교수 채용을”
한성대 총장을 지낸 윤 대표는 경실련 창립 멤버이다. 2003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도 맡고 있다. 고려대에서 강만길 교수 지도로 ‘105인 사건’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땄다. 2012년 한성대에서 정년 퇴임했다.
“사업회 설립 때 우당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군 장성 중심으로 하자고 했죠. 하지만 내부 토론을 거쳐 유족과 학계 중심으로 하는 게 맞다고 의견을 모았어요. 첫해 중국 답사 때는 예비역 장성 13명이 참가했어요.”
그는 신흥무관학교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데는 ‘분단 현실에 갇힌 독립운동 연구’ 탓이 크다고 했다. “(신흥 출신) 변영태는 남한 초대 외무장관을 했지만 김원봉 등은 북으로 갔어요. 이런 사정으로 연구가 제대로 안 되었죠. (분단의 제약으로) 남에서 한국 독립운동 연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위주로만 했어요. 극복이 필요합니다.” 학교 터에 표지석을 세우려 했지만 중국 당국의 허락을 받지 못했단다. “터를 가보니 다 옥수수밭이고 유적지를 찾기 어려웠어요.”
그는 “사업회의 문제 제기가 이제 공론화된 것”이라며 앞으로 학교를 한국군의 뿌리로 정립하려는 노력을 차근차근해나가겠다고 했다. “육사에 연혁 수정을 요구해야죠. 제 생각으로는 대한제국의 장교 양성기관인 군사무관학교에서 출발해 신흥무관학교와 독립군·광복군 양성 학교로 내려오는 게 바람직합니다. 공사와 해사도 함께해야죠.” 덧붙였다. “육사 교수진에 한국독립운동사 전공 교수가 없어요. 독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면 전임 교수가 필요하죠.”
육사 생도들 반응? “학술대회 때 생도들과 함께 식사했어요. 대부분 신흥무관학교가 있는 줄 몰랐다고 해요. 100년 전 나라가 어려울 때 선배들이 이런 일을 했다는 게 감동적이다, 자긍심이 생긴다고 했죠.” 그는 학교를 알리는데 영화나 연극 같은 문화 콘텐츠를 적극 활용하겠단 얘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주인공인 영화 <암살>로 학교가 많이 알려졌어요. 배우 조진웅씨는 사업회 홍보 대사이죠. 우당기념사업회에서 뮤지컬도 만들어 몇 번 공연했어요.”
그는 15년째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2009년 사전이 나온 뒤 사자 명예 훼손 등을 이유로 8번 소송이 있었지만 다 우리가 이겼어요. 있는 사실 만을 썼기 때문이죠. 서훈 심사 때 사전을 참고한다고 해요.” 개정 작업? “보완이 필요해요. 빠진 사람이 있는지 면밀히 보고 있어요. 지방이나 해외 친일파는 책 출간 때 충분히 조사하지 않았거든요.” 편찬위원장 자리에 자긍심 못지 않게 책임감도 크단다. “공인 아닌 공인이죠. 이런저런 공직 제안도 있었지만 가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친일 청산’ 김원웅 광복회장 기념사… 조중동 등 비판 사설·칼럼 잇달아 실어 조선, 동아…일제 때 뚜렷한 ‘친일’ 행적 김이택 “부끄런 과거 이제라도 사죄해야”
왜 아베 편을 들었나 ‘조선일보’ 친일 해부. 한겨레TV
해방 후 75년이 흘러도 친일 청산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친일에 앞장선 과거를 사죄하기는커녕 감추고 미화해온 이들이 많은데요. 대표적으로 올해 창사 100주년을 맞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있습니다. 이들이 광복절 75주년 행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요구한 김원웅 광복회장을 집중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김 회장의 광복절 기념사 이후 미래통합당과 <조선일보> 등은 “국민 편가르기”라고 비난하고, ‘친일 장사’로 깎아내리는 칼럼을 싣기도 했습니다.
광복절 75주년 행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밝힌 김원웅 광복회장을 두고 ‘편가르기’ 프레임을 쓰며 비판에 나선 조선일보. 한겨레TV
이에 대해 김이택 <한겨레> 대기자는 ‘김이택의 저널어택’ 네 번째 시간에 “친일 행적이 지면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데도 국민과 독자 앞에 한번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광복회장을 비난할 자격이 있느냐”며 “적반하장”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어 “국민 편가르기라는 주장은 친일파들이 오랫동안 써먹어온 프레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밝힌 친일파 청산을 반대하는 10가지 궤변들. 한겨레TV
<조선일보>는 일본 강점기인 1937년부터, <동아일보>는 이듬해부터 폐간(1940년) 때까지 매해 1월1일 일왕 부부의 대형 사진을 1면에 실었고 <조선일보>는 제호 위에 칼라로 일장기를 새겨넣기도 했습니다.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발기인이 돼 젊은이들에게 일제의 총알받이가 돼라며 징병과 학병을 독려하고 다녔고, 대법원은 이들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라고 판결문에 분명하게 못박았습니다.
<조선일보>가 일제 강점기 시절 제호 위에 일장기를 인쇄한 사실을 밝혀낸 <한겨레>의 2001년03월29일치 기사. 한겨레TV
지난 2018년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에 나서자 <조선일보> 등은 무역보복을 먼저 시작한 아베 정부보다 우리 정부를 더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힘이 부족하면 굴욕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라도 있어야 한다’며 일본에 무릎 꿇으라는 식의 기사와 사설·칼럼도 잇달아 내보냈습니다.
김 대기자는 문제적 보도들을 일일이 제시하며 “뿌리 깊은 친일 디엔에이(DNA)가 있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니냐”고 질타했습니다.
일본 아베 총리를 배우라는 <조선일보>의 칼럼. 한겨레TV
독립군을 토벌하는 간도 특설대에 복무한 백선엽 전 대장이 지난 7월11일 세상을 뜨자, <조선일보> 등은 그의 친일 행적은 덮고 6·25 전공만 집중 부각하는 영웅담을 집중 보도했습니다. <조선일보>는 백씨의 독립군 토벌 사실을 부인하며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을 약력에서 아예 빼놓기도 했습니다. 김 대기자는 “자신이 독립군을 토벌한 사실은 백씨가 일본에서 발간한 책 <대 게릴라전>에만 슬쩍 적어놓았다”고 밝히고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가 <간도특설대>란 책을 내면서 이 사실을 폭로한 바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백선엽 전 대장이 일본어로 쓰인 책 <대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에서 간도토벌대에 복무하며 조선인 게릴라를 쫓아다녔다고 증언한 내용. 한겨레TV
친일 청산 요구가 나오기만 하면 ‘국민 편가르기’ 운운하며 여러 프레임을 들이대 초점을 흐리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친일을 진정으로 사죄하지 않는 이들은 그동안 어떤 보도를 내보냈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보며 확인해 보시죠.
양상훈 칼럼, 이승만 일본보다 더많이 친일파처벌? 방학진 민문연 실장 “반민특위법 폐지 처벌 무효…조선 동아 존재, 친일청산 못한 증거” 정운현 “역사의 무지”
조선일보 주필이 생전에 친일파를 한 명도 보지 못했으며 이승만 정부가 일본보다 더 친일파를 많이 처벌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규명해온 이들은 “역사의 무지에서 오는 궤변” “조선일보의 존재가 친일청산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라며 반발했다.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은 지난 10일자 ‘양상훈칼럼’ ‘친일파 장사 아직도 재미 좀 보십니까’에서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친일파’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며 “일본 정권의 대한(對韓)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친북파·친중파는 심심찮게 보았지만 친일파만은 볼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침략 전쟁에도 일리가 있다는 아베 같은 사람에게 찬성하는 한국민이 누가 있나”라며 “한국처럼 ‘친일 청산’이 확실하게 이뤄진 나라도 없을 것”이라고 썼다.
최근에 독립운동가 후손인 광복회장 등이 제기하고 있는 친일 청산 필요성을 두고 양 주필은 “이들이 지목하는 친일파는 대부분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이라며 “송장에게 칼질을 하는 형벌이 있었던 조선 시대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송장과의 싸움이 더 자주 벌어진다”고 조롱했다. 양 주필은 특히 ‘친일파 씨가 마른 나라’에서 친일파 공격을 하니 엉터리 주장에 대부분 거짓이라며 그 사례로 “반일(反日) 세계 챔피언과 같은 이승만을 친일파라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승만 정부가 친일청산법을 제정하고 559명을 체포했으며, 221명을 기소해 38명을 재판으로 처벌했다고 주장했다. 양 주필은 돌연 전범국가인 독일과 일본의 경우와 이승만 정부를 비교했다. 그는 독일이 2차 대전을 일으켜 수천만 명을 죽였는데 그 전범을 처벌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된 사람은 22명이었고, 일본 전범을 처벌한 도쿄 재판에서도 기소된 사람은 25명이라며 이승만 정부 친일 청산의 10분의 1이라고 했다. 이승만 정부의 친일파처벌이 일본보다 많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역사의 왜곡이다. 이승만은 반민특위처벌법 제정을 반대했고, 법 공포후 끊임없이 특위 활동을 방해하고 법을 바꾸려 했다. 국회프락치사건을 만들어 반민특위 위원과 특경을 체포해 와해시키도록 지시한게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정부는 1949년 9월5일 반민특위를 폐지하고 업무를 대검과 대법원으로 이송했다. 그 뿐 아니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1년 2월 법이 완전히 폐지됐다. 폐지법률(176호) 부칙은 “폐지된 법률에 의해 공소 계속중의 사건은 본법 시행일에 공소취소된 것으로 보고, 이 법에 의한 판결은 법 시행일로부터 그 언도(판결)의 효력을 상실한다”고 기록돼 있다. 결국 반민특위처벌법에 의해 처벌된 자는 법적으로 한 명도 없다. 양 주필은 이런 사실을 누락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20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나치에 협력했던 라-꼴라보레시옹(나치협력자)을 처벌한 규모가 프랑스의 경우 인구 10만명 당 징역형이 94명, 덴마크 374명, 네덜란드 419명, 벨기에 596명, 노르웨이 633명이었다”고 제시했다. 프랑스가 나치협력자를 징역에 처한 건수는 3만9900건, 벨기에 5만5000건, 네덜란드 5만건 이상이었다(조성오, ‘우리역사이야기’ 1993, 돌베개). 방 실장은 “더구나 일본과 독일과 같은 전범국가와 비교한 것은 우리나라 식민지였는데, 유럽의 방대한 독일부역자 처벌 사례를 누락한 채 전범국가의 처벌을 같은 잣대로 비교하는 것은 잘못된 비교”라고 반박했다.
▲102살의 애국지사 임우철 광복회 원로회의 의장(왼쪽 네번째), 김원웅 광복회장, 반민특위 유족들이 지난 6월4일 오전 국회에서 친일경찰이 1949년 6월6일 반민특위를 습격했다며 경찰청장의 공개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신이 친일파를 본 적이 없다는 양 주필의 주장을 두고 방 실장은 “여야합의로 만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에 따라 위원회가 지정한 국가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가 1006명이며, 양 주필이 봤거나 알만한 생존자는 백선엽(최근 별세) 정도”라며 “우리가 말하는 친일파는 현재 일본과 친한 사람이 아니라 전범국인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자를 말하는 것인데, 본인이 그런 사람을 못봤다고 친일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말이 안되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처럼 친일파청산이 이뤄진 나라가 없다는 양 주필의 주장에 방 실장은 “나치에 협력한 유럽 신문들은 많이 폐간됐다”며 “현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존재 자체가 친일파 청산이 안됐다는 좋은 본보기”라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조선동아일보 100년 부역언론의 민낯이라는 전시회 자료에서 “드골의 프랑스 임시정부가 민족반역자 처벌을 위해 부역자재판소를 설치해 재판에 회부된 538개 언론사 중 115개사가 유죄선고를 받아 폐쇄됐다”며 “그 가운데 64개사는 전 재산을 51개사는 일부 재산을 몰수당했다”고 썼다. 연구소는 “반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친일 원죄에 대한 한마디 반성도 없이 분단과 냉전에 편승해 주류언론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고 지적했다.
정운현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도 20일 미디어오늘과 SNS메신저를 통해 양 주필 칼럼을 두고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궤변”이라며 “‘신판 친일파’의 발호를 지켜보면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은 아직 이에 관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미디어오늘은 양상훈 주필에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21일 오후 5시 현재까지 연결이 되지 않았고, 문자메시지와 SNS메신저, 이메일을 통해 방학진 실장과 정운현 전 처장의 견해에 관해 질의했으나 답변이 오지 않았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에도 질의했으나 아직 답변을 얻지 못했다.
8월 26일은 경북 칠곡의 선비 유병헌(劉秉憲, 1842~1918)의 순국 102주기다. 1918년 이날, 그는 보안법과 주세령 위반으로 복역하던 대구 감옥에서 8일간의 단식 끝에 자신의 목숨을 거두었다. 향년 77세.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오적(五賊)을 성토하면서 시작된 그의 항일 투쟁은 일제 치하의 납세뿐 아니라, 토지조사 사업까지 거부하기에 이르렀고 세 차례의 투옥 끝에 마침내 옥중 순국한 것이다.
유병헌은 1842년 경상도 인동도호부(현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강진마을)에서 유익원의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 호는 만송(晩松). 그는 진주 민란(1862)과 제너럴셔먼호 사건·신미양요(1871), 운요호사건(1875)과 강화도 조약(1876) 등을 겪으면서 청년기를 보냈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 칩거해 학문에 전념할 수밖에 없던 어지러운 시대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국권을 침탈하였을 때 그는 예순셋 노인이었지만, 이 강골의 선비는 서책을 덮고 조약의 무효화와 왜적 격퇴를 주장하는 상소로 여론을 환기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아 결국, 경술국치(1910)에 이르자, 죽기를 각오하고 대궐을 바라보며 통곡한 뒤 곡기를 끊기도 했지만, 그는 일제에 맞서 싸우는 길을 택했다.
유병헌은 ‘오적 성토문(聲討文)’을 큰길 가에 게시하여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오적(五賊)과 송병준·조중응 등 정미칠적(七賊), 이용구 등 일진회의 매국 행위를 매섭게 꾸짖었다. 또, 경상·전라·충청 등 삼남의 시골 선비들에게 서찰을 보내 일제에 항거하기를 촉구했다.
“한 나라에 해가 둘일 수 없다. 조선의 해는 고종황제뿐이다. 일왕(日王)은 인정할 수 없으니, 첫째, 망국의 한일합병을 혁파하라. 둘째, 경술국치를 투쟁으로 회복하라. 셋째, 국치 오적을 주살하라. 넷째, 일왕의 모든 법령과 그 행위는 부정하라. 다섯째, 일왕이 내린 어떤 조세나 부역도 응하지 말라.”
“어떤 조세나 부역도 응하지 말라”, 납세거부 주도한 유병헌
그는 총독과 일본 내각은 물론, 청나라와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각국 공관에 서신을 보내 병탄의 불의함을 항의하면서 세계여론에 호소했다. 1911년 친일 주구(走狗)들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의 송덕비를 충청도 청산(충북 옥천)에 세우려 하자, 바로 청산향교에 이를 엄중히 항의하는 통문을 보내기도 했다.
▲ 금오산 선봉사로 가는 길가 바위에 새긴 만송의 글씨. “덧없이 변하는 세태에 울면서 / 이 산에 들어오게 되었노라.” 이 바위는 세 차례나 부근을 찾은 끝에 간신히 발견했다. ⓒ 장호철
일제는 유병헌을 회유하고자 작위 수여와 은사금(恩賜金)을 제안했다. 강제합병에 협조한 대가로 일왕이 친일파 귀족들에게 준 은사금과 작위는 ‘은혜로운 돈’이 아니라, 매국의 상급(賞給)이었다. 그가 이를 단호히 거부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1911년 5월 논설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 은혜와 원수를 분별하여 부숨)’을 써서 은사금 받기를 거부하면서 일제를 규탄하고 국민의 각성을 촉구했다.
“대저 은혜와 원수는 마치 백과 흑 같아서 변별할 필요 없이 일목요연한 것이다. 아! 섬나라 오랑캐가 세력을 얻어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임금을 쫓아내고 우리 생민을 도탄에 빠트리니 이는 나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저들은 도리어 재물로 우리 늙은이들을 유혹하여 은사금이라고 하니, 이 어찌 흑을 가리켜 백이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간교한 꾀로 함정을 삼고 재물과 이익으로 미끼를 삼는 데 불과하니, 조선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고 말 것이다.
(……) 차라리 원수의 칼에 죽을지언정 원수의 돈을 받지 않고 스스로 죽을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무릇 우리 조선인은 이를 보고 경계하고 삼갈지어다.”
1911년에 인동군이 관내 면서기의 급료를 충당하려 면마다 부담금을 할당하자, 북삼면장도 각호당 21전 8리의 부담금을 매겨 이를 징수하려고 했다. 유병헌은 이를 비판하면서 네 차례에 걸쳐 이 명령에 불응하라는 내용의, ‘광고’·’민폐 혁파의 건’·’각 마을 모든 이에게 게시한다’·’널리 천하에 고(告)하는 문(文)’ 등의 격문을 썼다. 그는 세 차례는 이를 약목면 헌병파견소 게시판에 게재하였고, 마지막 1부는 지니고 있다가 일본 헌병에게 압수당했다.
바위에 새긴 회한과 우국충정
이 일로 유병헌은 1911년 12월, ‘불온 언론 유포’라는,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개월 형을 선고받아 첫 번째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 2월 초하루, 그는 숭오리의 금오산 아래 선봉사(僊鳳寺) 대각국사비로 가는 길가 바위에 “덧없이 변하는 세태에 울면서[읍창상(泣滄桑)] / 이 산에 들어오게 되었노라.[입차산(入此山)]”라는 글씨를 새겼다.
▲ 생가 근처에 있는 ‘통곡 바위’에 만송이 새긴 두 줄의 글귀.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니 / 우리 임금을 잊지 못하노라.” ⓒ 장호철
첫 옥고를 치른 뒤에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현실에 대한 회한을 가누지 못했던가. 그는 같은 해 7월 25일에도 생가 근처에 있는 강릉 유씨 중시조 유창(劉敞)의 영정각 있던 자리 뒤의 ‘통곡 바위’에 두 줄의 글귀를 새겼다. 그가 바위에 글을 새긴 것은 그 자신의 진정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북망통곡(北望痛哭)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니 / 오왕불망(吾王不忘) 우리 임금을 잊지 못하노라.”
유병헌은 1912년,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세원 확보와 토지 수탈 목적과 식민지적 토지제도를 확립하고자 시행한 토지조사 사업(1910~1918)에 따른 측량을 원천 거부했다. 그는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논밭마다 꽂아둔 측량 푯말을 죄다 뽑아버린 것이다.
그는 창덕궁에 세금을 내겠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는데, 이는 일제에 납세를 거부함으로써 일제의 통치를 전면 부정한 것이었다. 유병헌은 약목과 김천의 헌병대, 김천경찰서 등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대구 감옥에 갇혔다. 그해 12월 유병헌은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과 토지조사법 위반, 토지측량 총규칙 위반 혐의로 금고 5개월 형을 선고받고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1914년에 총독의 명령으로 문안드리려 한다며 총독부 수석 서기 야마카게(山陰)가 찾아왔다. 야마카게는 그를 회유하고자 “봄바람 봄비(춘풍춘우 春風春雨)가 꽃을 잘 피우게 하지만, 잘 떨어지게도 한다, 어제 친구가 오늘 원수가 되니 인간 만사가 다 꽃과 같다”라는 내용의 시를 쓰자, 유병헌도 시로 응답했다.
“하죽하송수세태(夏竹夏松隨世態) 여름 대나무 여름 소나무 세태를 따르는 듯하나 / 동송동죽유수여(冬松冬竹有誰如) 겨울 대나무 겨울 소나무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 청천지유조선일(靑天只有朝鮮日) 푸른 하늘에 오직 조선 태양만이 있을 뿐이니 / 창해추성필부지(滄海椎聲必不遲) 창해 역사의 철퇴 소리 머지않아 있으리.”
1915년에는 그의 명성을 듣고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 <기려수필(騎驢隨筆)>의 저자 송상도, 만해 한용운 등 숱한 지사들이 그를 찾아와 시국을 논했다. 일제는 독립운동 단체와 무관하게 홀로 저항을 이어온 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1918년 2월, 칠곡군청에서는 유병헌이 양조 면허 없이 밀주를 빚은 사실을 알아내고 가택을 수색하여 막걸리 4되를 압수하였다. 이에 분개한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칠곡군수와 약목면 헌병대 등에 자신의 의지와 일본 패망을 예언하는 글을 보냈다.
“우리 조선에서 태어나서 우리 황제를 배반하고 일본을 따른 군수와 같은 자는 개와 말만도 못한 자이다. 세금은 우리 황제에게 내야 한다. 죽어도 적국에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보다 일본의 법률을 따를 것이 아니다. ” – 칠곡 군수에게 부치는 첫 번째 글(1918.2.7.)
“우리 국가를 망하게 한 놈은 왜놈이고 이 보복의 생각은 한시라도 잊은 적 없다. 그리고 나 스스로 술을 만들고 나 스스로 마시는데 감히 일본이 간섭할 필요가 없다.” – 칠곡 군수에게 부치는 두 번째 글(1918.2.7.)
1918년 3월, 유병헌은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과 주세령 위반 혐의로 징역 1년과 벌금 20원을 선고받았고 공소(항소)했다. 당시 법정에서 그는 “지세(地稅)도 안 내는데 주세(酒稅)를 내겠느냐. 너희 일왕(천황)의 머리를 베어 그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지 못한 게 한이다”라고 일갈하여 파란을 일으켰다.
“지세도 안 내는데 주세를 내겠느냐”
4월에 대구 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에 대해 원심판결이 취소되어 금고 6개월로 감형되었으나, 그의 결기는 여전했다. 감옥에서도 항거를 멈추지 않아,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다 감옥에 갇혔으니 ‘조선독립 만세’라도 크게 부르자고 제의하여 조선독립 만세 소리가 매일 철창을 뚫고 복도에 울려 퍼지게 했다. 유병헌의 옥중 충절은 경상도는 물론 충청도까지 퍼져나가 인동, 영덕, 경주, 울산, 청산 등지에 그의 행적을 기리는 목비(木碑)가 세워졌다고 한다.
숭오리 산 34번지의 만송 묘소. 길라잡이 없이 한 시간 넘게 산등성이를 헤맨 끝에 찾았다. 기일이 가까워지는데, 봉분엔 아까시가 자라고 군데군데 꺼졌다. ⓒ 장호철
어느 날, 그는 아들 홍열(洪烈)을 불러 “7월 20일(음력) 아침에 옥문 앞에 와서 시신을 거두어 가라”라고 일렀다. 을사늑약 이후, 한결같은 결기로 일제에 저항해 온 십몇 년의 투쟁을 돌아본 뒤, 절명시에서 밝혔듯 “나라 운수 끝내 회복되기 어려우니 / 감옥에서 죽는 것 달갑기만 하다”라며 그는 마침내 자진할 것을 결심한 것이었다.
세 번째 투옥되어 복역한 지 일곱 달,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곡기를 끊은 지 여드레 만에 만송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마감했다. 가족들이 시신을 받아 여관에서 염습할 때, 옷에서 나온 ‘절명시’에서도 “차라리 끓는 물 속 괭이처럼 죽을지언정 / 개 염소 같은 왜놈 신하 될 수는 없다”라는 결기의 서슬이 푸르렀다.
대구 감옥에서 북삼까지 백여 리를 운구하는데, 삼남의 유림과 선비들이 길게 줄을 지어 애도하였고, 마을 들판에 조문객이 구름처럼 하얗게 모여들어 일경이 민란을 염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만송 유병헌은, 비록 포의의 선비였으나 망국을 부끄러워하며 경술년에 자진한 매천 황현(1855~1910)을 뒤따랐으니 그의 나이 일흔일곱이었다.
을사늑약 전후부터 경술국치, 삼일운동에 이르기까지 자정(自靖) 순국한 지사는 모두 61분에 이른다. 그중 경상도 출신은 18분인데, 칠곡 인근에서는 유병헌 외에 성주의 장기석(1990 애국장), 군위의 박능일(1990 애족장) 두 분이 있다.
장기석(1860~1911)은 일왕의 천장절(일왕 생일) 경축식 참석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해 구인하려 하자 일경을 목침으로 때려 중상을 입히고 대구 감옥에 갇혔다가 옥중 단식으로 순국했다. 박능일(1859~1917)은 경술국치 이후 민적법에 따른 신분등록을 거부하고 예안과 풍기 등지를 전전하다가 “원수를 섬기고 사는 것은 바다에 빠져 죽는 이만 못하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영일 앞바다에 투신 순국했다.
유병헌의 생가에서 7Km 거리인 북삼면 오태동(현재는 구미시 오태동)에 악덕 친일 부호로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낸, 제3대 국무총리 장택상의 부친 장승원(1852~1917)이 살았다. 1904년 왕산 허위(1962 대한민국장)의 추천으로 경상북도 관찰사로 나아간 장승원은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1907)에 군자금을 대기로 허위에게 약속하였으나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 악덕 친일 부호로 광복회원에게 처단된 장승원의 생가. 아들인 국무총리 장택상의 의 호를 따 ‘창랑고택’이라 불리나, 주인이 바뀌면서 원형을 거의 잃었다. ⓒ 장호철
1912년 왕산의 형 허겸(1991 애국장)이 거듭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장승원이 오히려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허겸은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1908년 처형된 스승 허위의 시신을 수습한바 있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1963 독립장)이 다시 군자금을 요구하자, 장승원은 이조차 거부하고 일제에 밀고하려고 했다. 이에 결국 장승원은 1917년 11월 광복회원 채기중(1963 독립장)과 강필순에게 처단되었다.
그가 간 ‘순국’의 길, 장승원의 ‘매국’의 길
장기석, 박능일 선생은 모두 17, 8년 연하인데도 오히려 만송에 앞서 순국의 길을 갔다. 비록 교유에 이르진 못하였을지라도 선생은 이들 행적을 전해 듣고 있었으리라. 벼슬이 경상북도 관찰사에 이어 궁내부 특진관에 이르렀던 영남의 만석꾼 장승원도 만송보다 10년 아래다. 넘치는 부와 영화를 누렸지만, 그보다 한 해 앞서 비명에 갔고, 반민족행위자로 부끄러운 이름을 <친일인명사전>에 올렸다. 자진에 앞서 선생은 이들의 엇갈린 운명을 돌아보진 않았을까.
1990년에 정부는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를 기리고자 후손들이 1963년 숭오리 옛 집터에 재실 ‘숭의재(崇義齋)’를 세웠다. 같은 해 약목면 복성리 선암봉 아래 세운 ‘만송 유 선생 순국기념비’는 2015년 칠곡군 왜관읍 애국 동산으로 옮겨졌다.
▲ 1963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선암봉 아래 세웠다가 2015년 칠곡군 왜관읍 애국 동산으로 옮겨진 ‘만송 유 선생 순국기념비’. ⓒ 장호철▲ 만송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1963년 숭오리 옛 집터에 세운 재실 ‘숭의재(崇義齋)’. 집안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퇴락하여 보수가 필요해 보였다. ⓒ 장호철
일제에 맞서 싸우다가 광복 전에 피살, 옥사, 처형 등으로 목숨을 바친 분들을 ‘순국선열’이라 이른다. 지금 서대문독립공원 독립관 현충사에는 만송을 비롯하여 모두 이천팔백서른다섯(2835위)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들 위국 충정의 결과가 오늘날 조국이라는 수사는 진부할지언정 옷깃을 여미며 곱씹어야 할 역사적 진실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경술년으로부터 110년째 맞는 8월이다.
<사진=TBS> (왼쪽부터) 변상욱 전 CBS 대기자, 유선영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오늘(27일 목) 밤 10시 30분에 방송되는 TBS TV <정준희의 해시태그>에서는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친일’과 ‘사대주의’ 프레임에 갇혀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정치적으로 쟁점화하려는 언론에 대해 살핀다.
변상욱 전 CBS 대기자, 유선영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이 출연한다.
이번 방송에서는 제75주년 광복절 행사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의 ‘친일반민족세력을 청산해야 한다’는 광복절 기념사가 언론에 정치적으로 보도된 사례를 들어 이야기 나눈다.
전성원 편집장은 광복회가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고 편 가르기 한다고 보도된 것에 대해 언론이 주목했어야 할 부분은 ‘친일 청산’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춰 보도한 점에 주목한다. 또한, “전체적인 맥락이 아닌 필요한 부분만 편집하여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은 오히려 언론”이라며 비판한다.
유선영 교수는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반민족행위가 평범하게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며 “당시 지배층과 언론에 대한 반성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자신들의 이익으로만 활용하려는 언론에 대해 변상욱 대기자는 “언론의 자유는 ‘언론사’의 자유가 아닌 ‘시민’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라며 “언론이 그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하고, 공공선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몰락하는 것이 사회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며 일침을 가한다.
<취재를 취재하다>에서는 기억의 터(전 통감관저 터)를 찾아 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고 ‘청산되지 못한 언론의 과거’에 대해 한홍구 역사학자와 김만권 정치철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저널리즘 바로보기>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조선·동아100년, 일제 부역 언론의 민낯’ 기획전에서 진행된 정준희 교수의 강연 ‘민주화 이후 한국 언론, 다시 개혁을 말한다’와 멜로우 키친의 색소폰 연주가 이어진다.
TBS TV 정준희의 <해시태그>는 오늘(27일 목) 밤 10시 30분에 방송된다.
TBS TV는 IPTV(KT 214번, SK 167번, LG 245번), 케이블 TV(TBS 홈페이지 혹은 각 지역 케이블방송 문의)와 TBS 유튜브 계정, TBS 앱(스마트폰) 등에서 시청할 수 있다.
심정섭씨, 친일단체 ‘수양단’ 발행 단보 9호 공개 거물급 친일파 대거 포진…민족정신 말살 등 자행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심정섭씨(77)는 일제 및 천황에 대한 조선인의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는 글이 담긴 친일단체 수양단 광주지부의 ‘단보 9호’를 본보에 독점 공개했다. 최기남 기자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들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황국 신민화’를 주도해 태평양전쟁으로 내모는데 앞장선 친일단체 ‘수양단’의 만행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공개됐다.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심정섭씨(77)는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합방조약이 공포된 국치일(8월 29일)을 사흘 앞둔 27일 일제 및 천황에 대한 조선인의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는 글이 담긴 수양단 광주지부의 ‘단보 9호’를 본보에 독점 공개했다.
‘한애(汗愛)’라는 제목의 이 단보는 1924년 1월 조직된 수양단 광주지부가 매월 발행한 것으로 이번에 공개된 단보는 조직이 결성된 그해 9월 26일 인쇄됐다. 가로 18㎝·세로 26.2㎝ 크기이며, 4쪽 분량이다.
단보는 수양단의 2대 강령인 ‘유한단련’과 ‘동포상애’로 시작한다.
이는 ‘땀 흘려 단련하고, 동포를 사랑한다’라는 의미로, 여기서 동포는 일제와 조선인을 모두 아우른다. 이어 조선인이 ‘황국신민’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이라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글이 수록돼 있다.
수양단 광주지부는 1922년 8월 발족된 ‘수양단조선연합회본부’의 지역 기구격이다. 수양단조선연합회본부는 ‘유한단련’과 ‘동포상애’를 2대 기치로 내걸고 중견 청년 육성 및 사회 정화를 표방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황국 신민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고, 그 중심에는 거물급 친일파들이 다수 포진됐다.
실제 이 조직의 고문으로 조선총독과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등을 역임한 박영효가 이름을 올렸고, 경술국적 윤덕영,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민병석 등 친일파들이 임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일반주민을 비롯해 농고생, 사범생 등 학생들까지 끌어들여 신사를 참배하고 강습회를 개최해 천황에 대한 복종을 강요했다. 또 대규모 시가행진을 통한 황민화 운동을 전개했다.
수양단의 만행은 이뿐만이 아니다.
1938년 5월 29일 전북 이리에서 수양단 호남대회를 개최한 이후 1939년 3월 19일 서울에서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한 수양단 총동원대회를 열고 ‘대동아공영권’을 적극 선전했다.
‘대동아공영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내세운 정치 슬로건으로, 아시아 민족이 서양 세력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일본을 주축으로 힘을 모아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게 요지이다.
즉, 수양단은 조선인도 천황의 신민이라는 인식을 강요·주입시켜 민족정신을 말살한 뒤 태평양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역할을 주도했던 것이다.
심정섭씨는 “수양단의 단보에 실린 내용을 보면 일제가 주도면밀하게 황민화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며 “끊임없이 황국 신민화 정신을 주입시키고 시가행진 등을 통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결국 태평양 전쟁에 투입시키기 위한 고도의 술책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친일화가 작품 논란으로 교체를 추진했던 전북 남원 광한루원 춘향영정이 시의회의 결정으로 유보되자, 지역에서 교체를 요구하며 반발하고 있다.
남원정신연구회 등은 남원시의회가 지난 25일 열린 총회에서 의원들의 반대로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춘향영정의 교체를 취소했다고 31일 밝혔다. 오는 9월10~13일 개최할 예정인 제90회 춘향제는 친일작가 김은호 춘향영정으로 하고, 앞으로 여론조사를 통해 교체를 결정한다는 내용이다.
의원들은 “지금까지 김은호 작품으로 지속했는 데 이제 와서 왜 바꾸느냐”, “아예 영정을 철수하고 안내문을 설치하자”, “지역작가들의 검증된 새 작품을 활용하자”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교체를 찬성하는 염봉섭 의원은 “친일은 역사적 사실이어서 재판과도 같은 성격이다. 여론조사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아직 영정 교체를 취소한 것은 아니고, 시간을 두고 결정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유보 결정이 나오자 남원지역 단체들의 성명이 잇따르고 있다. 남원정신연구회가 8월26일, 시민주권남원행동이 8월28일, 남원산성민요연구회가 8월29일 친일화가의 춘향영정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남원정신연구회는 “1931년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3·1운동 정신과 민족혼으로 춘향사당을 건립했다. 새롭게 내걸리게 될 민족화가 강주수는 조선춘향영정을 유관순같은 독립투사 모델로 해 옷을 태극의 색으로 했다. 비열한 친일작품인 일본춘향 ‘하루카’를 지금 당장 민족화가 춘향영정으로 교체하라”고 밝혔다. 강경식 춘향영정교체위원장은 “치욕스런 일본춘향 앞에서 제향을 지낸다니 참으로 원통하다. 부끄러운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춘향영정에 대한 비교표. 남원정신연구회 제공
앞서 남원시는 광한루원 안의 춘향사당에 걸려 있는 춘향영정을 8월 안으로 강주수 화백의 작품을 복제해 교체할 계획이었다. 이 영정의 교체는 영정을 그린 이당 김은호 화가의 친일행적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김 화가의 이력으로 그동안 시민사회단체 등은 지속적인 교체를 요구해왔다.
교체할 춘향영정은 크기가 가로 80㎝, 세로 160㎝로 전신을 그린 미인도 형태의 초상화다. 이 영정은 김 화가가 1961년에 그린 것을 복제한 것이다. 최초의 영정은 춘향사당이 세워졌던 1931년, 경남 진주 출신 강주수 화백이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중에 일부가 훼손됐다. 1961년 다시 김은호 그림이 기증돼 복제품이 걸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은호(1892~1979년)는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익혔고,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에 참가해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작품을 심사하는 등 태평양전쟁 기간 중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 간토학살피해자 제97주기추도식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열린 비대면 온라인 추도식 ⓒ 김종수▲ 간토학살피해자제97주기추도식배너 민중화가 신학철화백의 허락을 받아 디자인한 배너 ⓒ 김종수
1923한일재일시민연대와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평화가 공동주최한 간토학살피해자 제97주기 추도식이 한국 천안시 병천면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지난 1일 열렸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상황에서 간토학살사건 관련단체인,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기억과평화협동조합, 1923인문학연구소, 기장 1923진상규명위원회의 임원들과, 연대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 천안민족문화연구회 대표자,그리고 씨알재단에서도 참여하였다.
임광순 사협 기억과평화 이사의 사회로 오후 2시에 개회하여 헌화를 시작으로 제97회 메시지, 추도사, 연대사, 추도노래가 이어졌다.
이번 행사를 주최주관한 1923한일시민연대 김종수 상임대표는 간토학살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일본 내각과 군대, 경찰, 민간자경단을 향한 분노가 일었지만, 10년 넘게 진실규명과 추도활동을 해오면서 점점 분노의 대상이 한국 정부로 바뀌어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종수 대표는 한국 언론이 코이케유리코의 추도사를 내지 않는 것을 비난하면서도 한국 정부가 공식적인 추도사 한 번, 추도식 한 번 열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론에서조차 이를 지적하는 기사를 보지 못했다며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100년이 되는 2023년을 맞을 때에 간토피학살자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민관협력으로 준비해야 할 것을 제안했다.
– 100년을 맞기 전까지 남과 북이 함께 간토학살조사에 나서자. – 100년을 맞기 전까지 1923역사관의 학살지역별 전시를 위해 함께 협력하자 – 간토학살백서제작을 위한 남북한일재일 공동기구를 제안하자. – 간토학살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시민, 의원이 함께 협력해 가자.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김종수 상임대표 제97주기 추도식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김종수
일본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의 사무국장 다나카마사타카 교수(일본 센슈대)는, 코로나19로 인해 참가하지 못한 채 보내 온 추도사에서 “도쿄 도지사가 조선인 학살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판단할 일’이라며 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분들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기 때문에 개별 추도사를 내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조선인 학살은 역사학자들이 판단할 것도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모든 분들에 대한 애도의 뜻’ 속에 조선인 희생자가 들어있는 거라면 도대체 어느 부분에 적혀 있는 것입니까? 학살의 사실을 절대 말하지 않는 추도는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까? 왜 일본 사회는 희생자의 아픔을 스스로의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까?”하고 일본 정부와 우경화되어가는 일본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가 가해의 역사를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도록 촉구해 나갈 것과,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가해의 역사를 기억하며,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쓸 것을 희생자 여러분께 다짐한다”고 전해 왔다.
한편 1923인문학연구소를 이끌고 갈 김광열 교수는 100년이 되기 전에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진정한 사과를 위해서는 현재도 진행 중인 재일코리안에 대한 헤이트스피치와 혐한문화를 중단해야 하라고 촉구했다.
특별히 천안역사문화연구소의 이용길 대표는 오충공 감독의 인터뷰 속에서 강덕상교수의 ‘일본 제국의 학살의 근원과 뿌리가 동학농민혁명가들을 학살한 일에 두고 있으며, 그들이 다시 3.1만세혁명 시기의 일본 총독부의 학살로 이어졌고, 그 학살자들이 1923년 간토대지진 시에 조선인을 학살한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영상을 보고 전율이 흘렀다’고 말하며, 이제 97년을 맞는 우리들은 왜 일본 정부가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며, 일본의 국가책임을 물어야 할 때이다”하고 일갈하였다.
또 한국에서 추도행사를 위해 천안으로 오는 동안 일본에서 진행되는 일본시민단체들의 추도식과 재일동포들이 진행한 추도식을 인터넷 중계를 보면서 내려 왔다고 하며 “지금 이 시각도 조선인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추도집회를 일본 우익들의 헤이트스피치와 동급으로 취급하며 서약서를 쓰도록 하는 등(물론 서약하지 않았고 추도식을 강행)의 각종 억압을 가하는 한 편, 현재 코로나 사태 속에서 일본정부가 각종 지원에서 재일코리안을 배제하는 일들이 일으너는 등 간토학살에서 나타난 폭력과 억압과 배제는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스스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민주사회 속에서 당연히 없어져야할 차별과 배제를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조차 일부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문제이지 않은가? 코로나바이러스는 ‘우한 폐렴’이라고 하거나, 대한의사협회 파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지역의료인들에 대해서는 ‘중국사람이’라고 말하거나, 코로나 마스크 배급에 외국인들을 배제하는 일 등 우리 안에도 배외의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100년을 3년 앞두고 있는데, 이제 이곳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위한 연대활동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음을 함께 기뻐하며, 강제동원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과 식민지역사박물도 여러분과 함께 평화인권 발걸음에 함께할 것을 약속 드린다”고 연대의 의지를 밝혔다.
▲ 코로나로 마스크를 쓴 채.. 기억과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 열린 추도행사참가자 ⓒ 김종수
고난의 현장에서 촛불과 피켓을 들고 예언자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최헌국 목사는 간토학살을 내용으로 한 추도시를 낭독하였고, 세월호 등 사회적 이슈를 내용으로 한 노래와 곡을 쓰고 노래해 온 윤광호 목사의 추모가가 이어졌다.
지난 5월부터 리모델링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올 해 이상기후로 인한 긴 장마로 인해 공사가 3주 이상 중단되어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의 개관식과 ‘1923인문학연구소’의 개소식, 그리고 학술토론회은 10월 12일(월) 오후 2시로 연기하기로 했다.
토론주제는 1923역사관에 대한 전시구성과 민간의 힘으로 세운 식민지박물관 건립의 사례를 주제로 박물관 학예사인 1923인문학연구소의 성주현교수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김승은 학예실장의 발표를 통해 2023년까지 1923역사관의 전시와 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를 펼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1923한일시민연대 상임대표입니다. 이 기사는 사회적협동조합의 내부 인터넷신문 미디어기평에도 실립니다.
지난 8월 경남도의회에서 ‘경상남도 대일항쟁기 일제 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 제정 토론회’가 열렸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이 발제를 맡았고, 화폐 이야기를 꺼냈다.
“신사임당이 5만 원권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조선시대 이 씨 남자들만 오직 화폐에 있었다. 노무현 정부 때 고액권 화폐 논의가 진행됐고 5만 원권 초상 인물은 신사임당, 10만 원권에는 김구 선생이 선정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이 바뀌고 정치권에서 김구 선생 초상에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자 10만 원권 발행은 무기한 연기됐다. 친일청산 반대 논리로 등장한 색깔론에 법적으로 처벌받은 친일파가 한 명도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해방 후 1950년대 발행된 우리나라 화폐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거북선, 무궁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물 등이 새겨졌다. 1972년 이후부터 지금 우리는 경제활동을 하며 퇴계 이황(1000원권), 율곡 이이(5000원권), 세종대왕(1만 원권), 신사임당(5만 원권)을 마주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2007년 5만 원·10만 원권을 발행하기 앞서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초상 인물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김구·김정희·신사임당·안창호·유관순·장보고·장영실·정약용·주시경·한용운'(이상 가나다순) 등 10명으로 압축됐다. 당시 보도자료에는 “2차 후보군 가운데는 독립운동가(김구·안창호·유관순·한용운)들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다 여성인물이 선정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 유관순 열사의 등장은 후보 간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달굴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러한 국민의 염원은 어디서부터 막혔던 걸까.
김영진 도의원은 지난 6월 도정질문을 통해 “도내 독립운동가 관련 시설물 49곳을 직접 돌아보니, 경남도는 도내 독립운동가를 알리는 표지판이나 안내판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김 의원은 국가보훈처에서 받은 경남 출신 독립유공자는 1039명인데, 경남도로부터 받은 서면 자료엔 486명밖에 안 되는 점도 지적했다. 왜 지금껏 우리나라 화폐에 독립운동가 한 명이 없는지 설명되는 대목이다.
방학진 실장은 지역사랑상품권에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새길 것을 제안했다. 방 실장은 “지자체마다 지역 화폐가 있고, 지역마다 독립운동가도 있지 않으냐. 자치단체장의 뜻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를 책으로 배울 게 아니라 일상에서도 배울 수 있는 환경 만들기, 지자체에서 조금만 신경 쓴다면 어려울 일도 아니다. 도내에는 경남·창원·남해·하동·합천 등 지자체마다 종이권으로 지역 화폐를 발행하고 있고, 전통적인 꽃문양이나 명소 사진이 새겨져 있다. 지역 특성과도 무관한 꽃문양 대신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지역 화폐에 새긴다면? 요샛말로 ‘개념 지자체’, ‘전국 최초’가 된다. 어느 지자체에서 먼저 나서 볼 텐가.
[한국타임즈 김혜경 기자]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지부장 김순흥)는 최근 광주고려인마을을 방문해 코로나19 재 확산 방지를 위한 이웃사랑 마스크 500장을 기탁했다.
고려인마을 방문에는 김순흥 지부장과 이지훈 국장, 김홍길 국장, 정영해 전 동신대 교수 등이 함께 했다.
김순흥 지부장은 “최근 잠잠했던 코로나19가 재 확산됨에 따라 또 다시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 다 함께 극복하자는 마음을 담아 마스크를 준비했다”며 “광주고려인마을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했다.
이어 “광주고려인마을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고려인선조들의 후손이기에 눈물어린 애정이 가슴에 남아있다”며 “앞으로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고려인선조들의 잊혀진 항일 역사를 복원, 고려인동포들이 한민족의 후손으로서 자랑스런 긍지를 갖고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는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마스크를 후원해 주셔서 감사를 드린다”며 “기탁하신 마스크는 마을거주 고려인동포를 대상으로 소중하게 쓰겠다”고 말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순천 회원이 운영하는 사회적기업(마마나스)이 광주이주 독립투사후손 고려인동포들의 안정된 정착과 민족적 자긍심 고취를 위해 면마스크를 기증했다고 전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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