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 싱가포르 1차 조미정상회담의 결과를 정리한 센토사 합의를 두고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완승”이라고 규정하는 시각이 있는 반면, “만남 자체로 큰 성과이며 70년간의 적대관계를 종식하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핵폐기의 방식과 시한 등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있지 않다는 점에서 얼핏 전자의 주장에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CVID에 집착하여 공동성명을 ‘나쁜 합의’로 단정하는 것은 이번 회담의 역사적 함의와 과거 사례와의 차별성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북·미간의 극한 대립은 냉전구도와 한국전쟁의 후유증에서 비롯한 바 크지만 기본적으로는 미국의 일관된 대북 적대시 정책의 산물이다. 그것은 남한이 1990년 소련과, 1992년 중국과 수교한 반면, 미·일과 북한의 관계 수립은 이제 걸음마 단계인데서도 쉽게 드러난다. 한·미·일 대 북·중·러,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대결이라는 전통적 관점으로는 명쾌한 해석이 불가능한 지점이어서 미국 군산복합체의 배후설까지 거론되고 있다. 센토사 합의에는 이러한 비대칭적 구도를 해소하고 정상적인 관계로 전환한다는 중대한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합의문만을 보더라도 미국이 일방적으로 양보했다는 비판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북한은 핵이라는 유형의 자산을 포기하겠다는 것이고 미국은 체제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데 그치고 있다. 북한은 이미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기하고 억류 미국인들을 석방하였으며 동창리 미사일 엔진 시험장 폐쇄도 약속했다. 미국은 전면전을 가정한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중단으로 이에 화답한 모양새다. 사실상 단계별 동시적 행동원칙에 입각한 이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북한의 조치가 구체적이고 종국적인 데 비해 미국은 비전만 제시하고 언제든 원상복구가 가능한 대응만 하고 있는 형국으로 읽힌다. 평화협정 체결과 경제제재 해제 그리고 국교 정상화 등 정작 북한이 원하는 것은 모두 전제가 있는 후순위의 과제일 뿐이라는 점에서 결코 기울어진 협상은 아니었다고 봐야 옳다.
미국과 일본의 국민 여론은 다수가 북한과의 대화를 찬성하면서도 북한이 비핵화를 이행할 것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적이다. 여기에는 지난날의 시행착오와 오랜 불신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과거와 달리 낙관적인 요소들도 여럿 눈에 띈다. 우선 북·미 정상의 강력한 해결 의지와 상호간의 신뢰가 있으며, 남·북·미 간 다양한 대화 채널이 열려 있고, 협상과정에서 신속하고 선제적인 조치가 뒤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 체제상 최고지도자가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한 정책을 철회하기도 쉽지 않다. 김정은 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핵보유와 경제발전의 양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불가피한 선택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완전한 비핵화’는 이미 ‘불가역적’이라고 희망 섞인 전망을 해본다.
한국 사회 일각에서는 한미 군사훈련 중단과 주한미군의 감축 또는 철수 가능성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간 북미 간 교섭의 가장 큰 걸림돌은 신뢰의 부족이었다. 평화를 목표로 협상을 하면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표현대로 ‘도발적인’ 군사훈련을 지속한다는 것은 국제외교의 행동규범에도 어긋난다. 이율배반적이며 명분도 서지 않는 일이다. 주한미군의 존재는 한국의 필요보다는 미국의 아시아정책에 좌우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더군다나 주한미군은 북미 간에 진행되고 있는 어떤 협상 테이블에도 오른 적이 없는 주제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대외정책은 철저히 미국 우선주의와 실용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여기에는 동맹도 우방도 예외가 없다. 그래서 보수적 분석가들의 ‘가치동맹’이라든지 ‘혈맹’을 무시한다는 따위의 고식적 표현이 더욱 공허하게 다가온다.
이와 별개로 우리나라는 근대 외세의 개입으로 결국 망국에 이르는 쓰라린 경험을 한 바 있다. 좋은 전쟁이 있을 수 없듯이 항상 이득이 되는 선량한 외국군도 있을 수 없다. 한반도의 비핵화가 이루어지고 평화체제가 굳건해진다면 외국군이 굳이 주둔해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때 가서는 한반도가 동북아 평화를 위한 완충지대 나아가 중립지대로 기능해야하기 때문이다.
▲ ⓒAP=연합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북한과 미국은 물론 한반도와 밀접한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들의 대응도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변수가 전혀 없지는 않겠으나 패러다임 전환의 계기는 마련되었으며 전례 없는 속도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 또 해리스 주한 미 대사 내정자의 “한반도의 전반적인 풍경이 달라졌다”는 말이 수사에 그치는 표현만이 아님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이제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 미국이 퇴행하지 않도록 운전자 조정자에서 한 걸음 더해 설계자 또는 촉진자의 역할을 적극적이고 선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70년 만에 얻은 절호의 기회를 전력을 다해 살려나가야 한다. 앞장서서 청사진을 제시하고 북한과 미국을 견인해야 한다. CVID든 CVIG(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체제보장)든 결국은 CVIP(완전하고 가시적이며 되돌릴 수 없는 평화·번영)를 위한 것일 게다. 이를 관철하기 위한 핵심 관건은 군사와 경제 그리고 정치외교적 측면에서 다자안전보장체제를 구축하는 일일 것이며 일차적 목표는 동북아경제공동체의 창설이 될 것이다.
더불어 정치권에도 주문하고 싶다. 7회 지방선거의 결과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보수 야권은 이제라도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세 변화에 조응해야 한다. 국회의 판문점 선언 비준과 싱가포르 북·미 공동선언 지지결의안 채택은 그 첫걸음이다. 그렇게 해야 미국 의회에도 무어라 주문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육군사관학교가 “독립군·광복군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취지로 특별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관련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군의 기원을 독립군·광복군에서 찾는 내용의 세미나 등을 개최했으나, 육사가 직접 이 같은 토론의 장을 마련한 것은 처음이다.
육사가 그간 독립군·광복군 역사 계승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기까지 하다.
육사는 11일 서울 노원구 학교에서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주제로 특별 학술대회를 연다고 7일 밝혔다. 김완태 육사 교장(중장)은 학술대회를 알리는 포스터에 게재된 초대 말씀에서 “현재 군이 일제강점기에 독립군과 광복군이 수행한 독립전쟁을 국군의 역사와 연계 및 편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육사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독립군과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하려 한다”고 말했다. 육군의 뿌리를 독립군·광복군에서 찾는 움직임을 이번 학술대회 개최를 계기로 공론화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신흥무관학교와 무장독립투쟁’ ‘독립군·광복군과 육군의 기원’ ‘육사의 효시에 대한 연구’ 등 3가지 소주제에 대한 발표와 토론 형식으로 진행된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한시준 단국대 교수, 독립기념관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등 다수의 독립운동 관련 전문가들이 토론과 발제에 참여한다.
신민회 창립을 주도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축사를 할 예정이다.
육사의 이런 움직임은 과거와 뚜렷이 대조된다. 육사는 이명박 정권 시절이던 2011년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100주년 기념식을 육사에서 열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를 거절하는 등 독립군 역사 계승에 소극적이었다. 육사 홈페이지에 나오는 주요 연혁을 봐도 육사는 1946년 5월 개교한 국방경비대사관학교를 모체로 삼고 있다.
육사의 이런 태도 변화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방향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지난 8월 문재인 대통령은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 전통도 육사 교과 과정에 포함하고 광복군을 군 역사에 편입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김 교장은 지난 9월26일 단행된 군 인사를 통해 임명됐다.
▲일본군 위안부 자료 보는 참석자들 (서울=연합뉴스) 박동주 기자 = 11일 오후 서울시청 신청사에서 열린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관리사업 성과보고회’에서 참석자들이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email protected]
서울시, 서울대인권센터와 승선명부·신문 기사 등 비교·검토 대구 거주 ‘하토가와 후쿠준’, 故 이복순 할머니로 판명
▲ 트럭 섬의 한국인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 함대 기지가 있던 남태평양 ‘트럭섬'(Chuuk Islands)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의 명부와 사진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서울시는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과 함께 미군 전투일지, 호위함 ‘이키노’호의 승선명부, 사진 자료, 1946년 3월 뉴욕타임스 기사 등의 자료를 비교·검토한 끝에 이들 위안부 26명의 존재를 밝혀냈다고 11일 밝혔다.
시는 “그동안 증언으로만 있었던 트럭섬의 조선인 위안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한 것”이라고 이번 연구의 의의를 설명했다.
트럭섬, 공식 명칭 ‘축(Chuuk) 제도’는 미크로네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4개 주(州) 가운데 하나인 섬으로 태평양 남서쪽에 있다. 일본식 발음인 ‘토라크’를 접한 한국인들은 이곳을 ‘트럭섬’이라고 불러 왔다고 한다.
이번 연구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자료를 발굴해 조사·분석해 이뤄졌다.
미군 전투일지에 따르면 당시 트럭섬에서 귀환한 1만4천298명 가운데 조선인은 3천483명이었다. 이 중 군인이 190명, 해군 노무자가 3천49명, 민간인이 244명으로 나타났다.
▲ 트럭섬 점령군 전투일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 트럭섬 점령군 전투일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조선인들은 트럭섬 환초 ‘드블론’이라는 곳에서 1946년 1월 17일 호위함 ‘이키노’호를 타고 일본을 거쳐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이 배에는 조선인 위안부 26명과 아이 3명이 타고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1946년 3월 2일 자 ‘트럭의 일본인들은 포로가 아니다’라는 제하의 뉴욕타임스 기사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기사는 “트럭섬 사령관인 해병 준장 로버트 블레이크에 의해 조선인과 27명의 조선인 위안부(Comfort Girls)들이 보내졌다”며 “블레이크 장군에 따르면 이 여성들은 남아서 미국인을 위해 일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다른 조선인들이 일본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바다에 빠뜨릴 것이라고 두려워했는데, 하지만 블레이크 장군은 그러한 일을 듣지 못했다”고 묘사했다.
연구팀은 이 기사가 위안부를 27명이라고 적은 것은 아이 3명 가운데 1명을 위안부로 분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키노호 승선명부를 보면 승객 368명 가운데 조선인 249명, 여성과 아이 29명이 확인된다. 여성 26명과 아이 3명의 이름·직업·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여성은 ‘노동자’, 아이는 ‘무직’으로 돼 있다.
시는 “다른 문서와 비교를 통해 이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 위안부 피해자 이복순 할머니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 ‘하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이름이 적힌 이키노호 승선 명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 [그래픽] ‘트럭섬’으로 끌려간 위안부 이복순 할머니 이동 경로
이 위안부 피해자 26명은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으로 적혀 있어서 신원을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연구팀은 이 가운데 ‘하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인물이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돼 있는 고(故) 이복순 할머니라는 점을 판명해냈다.
이복순 할머니는 생전 구술자료를 남기지 않고, 1993년 12월 정부에 피해를 신고했을 때에도 간략한 피해 내용만 남겨 삶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연구팀이 생전 이복순 할머니와 가깝게 지낸 대구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이인순 관장에게 트럭섬 위안부 사진을 보여주자, 할머니를 단번에 알아봤다고 한다. 며칠 뒤 할머니의 아들도 이 사진이 자신의 어머니가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한발 더 나아가 서울, 경북 안동, 대구의 공무원들이 자료를 뒤진 결과 하토가와 후쿠준이 할머니의 창씨명이 맞고, 주소지도 예전에 그가 살던 곳과 일치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시는 “할머니의 남편 호적이 있는 경북 안동시 길안면사무소 계장은 한자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온종일 제적등본을 뒤져 해당 자료를 찾아줬다”고 관계자의 노고를 전했다.
▲ 이복순 할머니 이동 경로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이 같은 자료를 종합해보면 이복순 할머니는 1943년 트럭섬에 끌려가 위안부가 됐다. 일본 패전 후 그를 포함한 위안부 피해자 26명은 1946년 1월 17일 호위함 이키노호를 타고 일본 가나가와 현 요코스카시 우라가 항으로 갔다.
이 할머니는 이후 도쿄로 갔다가 규슈 후쿠오카 현 하카타 항에서 부산행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드러난 일본군 위안부 26명 가운데 이복순 할머니를 뺀 나머지 25명의 구체적인 신원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시 관계자는 “나머지 할머니들의 신원도 추후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는 이 같은 연구 결과를 이날 오후 1시 30분 서울시청 신청사 3층 소회의실에서 열리는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관리사업 성과보고회’에서 발표한다.
또 지난해부터 2년간 발굴·축적한 일본군 위안부 사료를 바탕으로 내년 1월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1·2권을 출간한다. 내년 2월에는 ‘일본군 위안부 자료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한국·중국·일본의 전문가와 단체를 초청해 성과를 공유할 계획이다.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게 하시마는 쇠창살 없는 감옥이자 공포의 노동 현장이었다.”
일본 정부가 재작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킨 나가사키(長崎)현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등 메이지 산업시설의 강제동원 역사 은폐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일본 시민단체가 진상 알리기에 발벗고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 등재시 약속한 강제동원 실상을 알리는 정보센터를 하시마에서 1천㎞를 훌쩍 뛰어넘는 도쿄에 설치하기로 하는 등 각종 꼼수를 동원해 은폐에 급급한 상태다.
이런 일본 정부에 맞서는 일본 시민단체는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다.
이 단체는 최근 우리나라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동원’이라는 책자를 내고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2차대전 당시 일본의 만행을 속속들이 고발했다.
한국과 일본의 양심있는 사람들이 함께 참가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책을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 한일 시민단체가 공동발간한 강제동원실상 소개 책자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한국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출간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 책자. 양측은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으로서 이 책자를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로 각각 만들었다. 2017.12.12 [email protected]
우선 하시마에 대해 가이드북은 “군함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도로 불린다”며 “하시마 전체가 탄광으로, 바다 곳곳으로 갱도가 펼쳐져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1939년부터 하시마와 바로 옆 섬에 있는 다카시마탄광에는 4천명 정도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게 하시마는 쇠창살 없는 감옥이자 공포의 노동 현장이었다”며 “탈출은 어려웠고 끌려간 이들에게 그곳은 지옥섬이었다”고 가혹했던 실태를 전했다.
네트워크의 조사에 따르면 군함도에는 1939년부터 1945년에 걸쳐 1천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장(火葬) 관련 문서로 확인된 사망자는 50명 가량이다. 사망자 가운데 절반 이상은 사고로 변을 당했다. 탄광 매몰에 의한 질식사, 압사, 외상에 따른 사망, 여기에 탈출 과정에서 숨진 것으로 보이는 익사도 있었다.
책자에는 “너무 힘들어 섬을 나가려고 신체 절단까지 생각했다”는 생존자의 증언도 수록됐다.
군함도 강제동원 실상 담긴 책자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한국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출간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 책자에서 군함도의 실상을 설명한 부분. 양측은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으로서 이 책자를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로 각각 만들었다. 2017.12.12 [email protected]
실제 1943년 전북 김제군에서 군함도로 끌려온 윤춘기 할아버지는 “임금의 3분의 1은 강제 저금되었고, 3분의 1은 고향에 송금한다고 했지만, 귀국해 보니 송금이 전혀 안됐다”고 일본측을 고발했다.
그는 “식사는 외국 쌀로 지은 밥과 국뿐이었다”며 “밥에 주먹 정도 크기의 감자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밥은 겨우 세 숟가락 분량밖에 되지 않았다”고 당시 열악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최장섭 할아버지의 경우 14세이던 1943년 전북 익산에서 군함도로 강제동원됐다.
책자에는 “도주해서 잡히면 고무 튜브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맞고 고문을 당했다.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1945년) 원폭 투하 후 8월 18일쯤에 청소를 하러 나가사키 시내에 갔을 때 ‘인간 지옥이 여기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그의 증언도 소개됐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관계자는 12일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설명 속에, 불편하지만 외면해서는 안되는 강제노동 등 어두운 역사도 담겨야 한다”며 “이는 2차대전이 끝난 지 70여년이 지났어도 아직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드디어 12월 18일 민족문제연구소 역사전문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_‘역적’시즌 2 >가 시작됩니다.
지난 5월~9월까지 방송한 ‘내일을여는역사’ 시즌1 ‘역적’은 애플에서 2017년 새로 출시된 팟캐스트 중 최다 다운로드 15위(한국지역 순위)에 오를 만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18일부터 시작되는 시즌 2는 연구소가 국민TV와 손잡고 오디오뿐 아니라 영상으로도 함께 방영합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미국이 건국일은 1776년 7월 4일이다. 정조 임금이 즉위한 그해 4월 27일(음력 3월 10일)로부터 68일 뒤다. 그날 미국인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식민지배를 거부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선출되고 정부가 구성된 해는 1789년이다. 4월 30일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 정부가 모습을 갖췄다. 건국된 날, 그러니까 독립을 선언한 날로부터 23년 만이었다. 미국 헌법 제7조는 1789년이 아니라 1776년을 독립 원년, 미국 1년으로 계산한다. 미국 땅을 실효적으로 지배할 정부가 갖춰지지 않았어도 독립을 선언한 해에 미국이 건국됐다고 보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서문)에서도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3·1운동이 있은 1919년을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미국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제가 되는 것은, 보수세력이 1919년이 아닌 1948년을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헌법 전문을 무시하고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보고 있다.
보수세력이 그렇게 하는 데는 숨은 동기가 있다. 지난 7일 서울특별시와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이 태화복지재단 강당에서 주최한 ‘민주공화정 100년 심포지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보수세력이 1919년을 외면하고 기피하는 동기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태화복지재단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이 있었던 곳이다. 위 심포지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3·1운동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됐는지 규명하고자 열린 학술대회다.
왜 보수세력은 ‘1948년 8월 15일 건국절’을 미는 걸까
▲ 심포지엄 패널들 ⓒ 인디엔피 제공
심포지엄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것은 헌법 제1조 제1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부분이다. 제1조 제1항은 1948년에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의 머리에서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었다. 3·1운동으로 표출된 민족적 의지를 집대성한 임시정부 헌법을 계승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이란 명의의 임시헌법 제1조 제1항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선언했다.
이를 두고, 기조발언을 맡은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헌법 문서에서 ‘민주공화국’을 명기한 것은 임시헌장이 세계 최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면서 “서구에서도 우리보다 늦은 1920년에야 비로소 체코와 오스트리아가 민주공화국을 헌법에 명기했다”라고 설명했다.
임시헌장 속의 ‘민주공화제’는 단순히 국민이 주인 되는 체체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민주’뿐 아니라 공화(共和)에도 방점이 찍혀 있었다. 공화는 공존과 상생을 전제로 한다. 그 속에는 임시헌장을 기초한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담겨 있었다.
강정인 교수는 “조소앙은 삼균주의의 핵심이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한 생활’이라고 선언했다”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는 ‘정치 균등화, 경제 균등화, 교육 균등화’로 … 주장했다”라고 말한 뒤 “삼균주의가 공화주의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공화’는 한마디로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갑질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런 이념이 조소앙을 비롯해 1919년에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의식을 지배했으며 그 의식이 1948년 대한민국 헌법에 투영된 것이다. 삼균주의가 담긴 공화 이념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라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으로도 표현됐다.
‘민주공화정’의 역사, 유구하다
3·1운동 참가자들이 “대한독립 만세”나 “일본 물러가라”나 외쳤지, 사회적 균등까지 요구했다고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다. 2016~2017년 촛불집회에서도 참가자 대부분은 ‘박근혜 하야’나 ‘박근혜 탄핵’ 같은 단순한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그게 촛불집회의 이념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치의 근본적인 부조리를 배척하고 새로운 나라를 열자는 게 촛불집회를 지배한 이념이었다.
3·1운동 때도 마찬가지다. 외형상의 구호는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식민통치와 불공평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또 백성이 주인되고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란 규정이 임시헌장 제1조 제1항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민주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투쟁이 1919년부터 본격화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헌법이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1919년 당시, 우리 민족은 일본 왕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로부터 9년 전까지는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민주공화정과 상반된 환경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우리 민족이 민주공화정을 의식적으로 지향했다는 게 얼른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심포지엄 맨 마지막에 발언한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서해성 총감독은 “우리 민주공화정의 역사는 대체 언제 시작된 것일까?”라고 질문한 뒤 “여기서 또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건, 민주공화정이란 게 3·1운동이 일어나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일 수 없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민주공화정을 향한 투쟁이 예전부터 있었기에, 3·1운동 때 그것이 민족적 이념으로 표출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기조발언에 이어 첫 번째 발제를 맡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한국 민주공화제의 기원과 사력(史歷)’이란 발표에서 이런 말을 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역사학 교수 프리만은 ‘로마는 그 이전 역사의 모든 흐름이 유입되어 그곳에서 대문명을 이루었고, 그 이후 역사의 모든 흐름이 그곳을 발원하여 다시 흘러가는 거대한 호수다’라고 의미 있는 발언을 하였다. 이 말을 우리나라의 3·1혁명과 민주공화주의 발전 과정에 대입하면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다.”
▲ 김삼웅 전 관장 ⓒ 인디엔피 제공
민주공화정에 대한 꿈이 3·1운동 때 갑자기 표현된 게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표현됐다는 것이다. 김삼웅 전 관장은 민주공화정에 대한 대중의 자각이 1894년 동학혁명을 계기로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동학혁명이 민주공화정이란 정치체제를 지향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 중심의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동학 정신이 민주공화정의 취지와 연결된다는 의미다.
김 전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래에서 ‘시천주’는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신다’는 의미이고, ‘인시천’은 인내천과 동의어다.
“조선 후기 일반 백성들에게 근대적 주권의식을 일깨운 것은 최재우가 창도한 동학이었다. 동학은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인시천(人是天)의 교리를 내세우며 사람 중심, 만인평등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는 동학혁명을 계기로 촉발된 사람 중심 세상에 대한 열망이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같은 혁신운동을 통해 민주공화정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하고, 이것이 3·1운동과 임시정부로 응집된 뒤 1948년 헌법을 향해 흘러갔다고 강조했다.
수만 명이 18일간 시위, 무려 1898년 이야기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최형익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동학혁명 직후의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가 민주공화정 운동에 기여한 역할을 보다 높게 평가했다.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가 추구한 게 의회 설립 운동이었다면서 “수만의 서울 시민들이 (1898년) 12월 6일부터 23일까지 18일 동안 철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사실의 역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했다.
▲ 최형익 교수 ⓒ 인디엔피 제공
1898년에 한양 시내에서 수만 명이 18일간 시위했다면, 2016~2017년 촛불집회를 연상시키는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런 집회에서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면, 민주공화국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열망이 그 당시에도 상당히 성숙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토양이 있었기에 1919년 임시헌장에 민주공화제가 규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3·1운동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19년 이래로 민주공화국을 열렬히 지항하면서 독립운동을 했기에 1948년 헌법에 그 이념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3·1운동과 임시정부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무책임과 좌우의 분열로 제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배태한 1919년 당시의 우리 민족은 민주공화국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 열망까지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열망이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진 것이건만, 보수세력은 1919년과 1948년의 연관성을 어떻게든 부정하려 하는 것이다.
앞에서, 보수세력이 3·1운동과 대한민국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숨은 동기를 심포지엄 학술 토론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고 했다. 심포지엄에서는 동학혁명 및 만민공동회에서 표출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3·1운동으로 집약되고 이것이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이어졌다는 발표들이 있었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열망 밟은 보수세력
동학혁명과 만민공동회의 본질은 촛불혁명과 다르지 않다. 동학혁명·만민공동회는 낡은 세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운동들은 보수파의 탄압으로 좌절됐다. 동학운동은 일본군뿐 아니라 보수파에 의해서도 진압됐다. 보수파는 민병대를 만들어 동학 진압에 기여했다. 만민공동회 역시 보수파에 의해 진압됐다.
동학과 만민공동회를 진압한 보수파는 1910년 국권 침탈 때도 살아남았다. 일본이 조선 백성들을 손쉽게 지배할 목적으로 그들과 손잡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1919년 3·1운동 때도 끄떡하지 않았다. 대중이 식민지배에 항거할 때 그들은 시위군중을 무지몽매한 자들로 폄하했다. 신문을 통해 경고문을 발표한 이완용의 글에서도 그런 인식이 드러났다. 이완용을 비롯한 보수파의 태도는, 촛불혁명에 맞서 태극기집회를 벌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수파의 후예들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할 때도 살아남았다. 한국 사정을 모르는 미군정이 그들을 파트너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 후예들은 1960년 4·19 혁명 때도 살아남았다. 이듬해 발생한 박정희 쿠데타가 미국의 승인을 받으면서 진보적 사회개혁이 차단된 덕분이었다. 그 후예들은 1987년 6월항쟁 때도 살아남았다. 이때 상당한 타격을 입긴 했지만, 아직 숨을 유지하고 있다. 2016~2017년 촛불혁명으로 한 방 더 맞았지만, 아직은 숨이 붙어 있다.
▲ 심포지엄 청중들 ⓒ 인디엔피 제공
1919년 건국,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동학혁명 때부터 3·1운동 때까지 그리고 1948년 정부수립 때까지도 물론이고, 그 후로도 한국 보수파는 계속 명맥을 유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동학혁명 이래의 이념을 집약한 3·1운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대한민국 출발점을 3·1운동에 두는 헌법 전문이 불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의 관계를 부정하는 태도는 미군정을 대한민국의 은인으로 보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물론 미군정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미군정 때문에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된 것은 아니다. 민주공화국이 된 것은 위에서 소개한 역사 덕분이다.
심포지엄에서 서해성 총감독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건 적어도 대한민국이 미군정 체제의 하사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최형익 교수도 유사한 말을 했다. “민주공화정으로서의 대한민국이 1945년 미군정에 의해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민중적 각성과 내적 발전의 결과였음을 (…) 드러내고자 한다.”
미국 정부는 1789년에 세워졌는데도 미국인들과 미국 헌법은 미국이 1776년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됐다고 하는 것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따라서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김삼웅 전 관장이 발표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의 말에서 ‘살피게 한다’를 문맥에 맞춰 ‘알 수 있다’로, ‘관학자들’을 ‘관변 학자들’로 대체했다.
“이명박·박근혜 중심의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인, 관변 학자들이 1948년 8·15 정부수립일을 광복절 대신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반헌법적인가를 알 수 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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