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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합의’ 반발한 피해 할머니들 패소…법원 “국가, 손해배상 책임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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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합의’ 반발한 피해 할머니들 패소…법원 “국가, 손해배상 책임없어”

익명 (미확인) | 금, 2018/06/15- 15:10

▲ 3ㆍ8 세계여성의날을 기념해 9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평화나비네트워크 소속 회원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이용수할머니 사진손피켓을 들고 있다. 이들은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과 한일 합의를 파기할 것을 촉구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박근혜 정부 시절 ‘한‧일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부장판사 문혜정)는 강일출 할머니 등 12명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1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선고기일에서 기각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위안부 합의에 대한 법적 책임 인정이나 10억엔의 성격이 불분명한 점 등 부족한 게 많은 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러나 그런 합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내용, 합의로 인해 원고들 개인의 일본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어 “외교적 행위는 국가 간 관계에서 폭넓은 재량권이 허용되는 영역인 점을 고려해 피고가 원고들 주장처럼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고 볼 수 없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라고 덧붙였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12월28일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서 한일 외교장관회담을 열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타결한 바 있다.

당시 정부는 일본 측의 피해자 지원금 10억엔(한화 약 111억원) 출연을 골자로 하는 합의에 대해 “이 문제(위안부)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고 밝혀 논란이 된 바 있다.

강 할머니 등은 2016년 8월 “일본 정부가 법적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국가가 피해자들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위안부 합의를 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당했다”며 국가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일본과 더 이상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해 합의해 배상청구권 및 재산권도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2018-06-15>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위안부 합의’ 반발한 피해 할머니들 패소…법원 “국가, 손해배상 책임없어”


피해 할머니 12명, 정부 상대 12억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
“정부가 불법 행위 저질렀다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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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외무장관 회담을 하루 앞둔 2015년 12월 27일 오후 경기 광주 퇴촌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 ‘나눔의 집’에서 강일출(맨 오른쪽) 할머니가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광주/김태형 기자 [email protected]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2015년 한일 합의를 체결한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지만 법원에서 기각됐다.

15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0부(재판장 문혜정)는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한다. 소송 비용은 원고쪽이 부담한다”고 선고했다. 재판부는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법적 책임’ 인정 부분, 일본 정부가 건넨 10억엔의 성격 등 불분명하고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사건 합의에 이르기까지 과정과 내용을 살펴봤을 때 원고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한다고 볼 수 없다. 외교적 행위는 국가 간 폭넓은 재량이 허용되는 영역인 점을 고려했을 때도 정부가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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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박근혜 정부 시절 ‘한일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기각된 15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이상희 변호사(가운데)가 법정에서 나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email protected]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일본과 ‘한일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한일합의)’를 맺으면서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는 문구를 합의에 포함시켰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일출 할머니를 포함해 12명의 피해 할머니들은 2016년 8월 “정부가 피해자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더는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취지로 합의를 맺어 일본에 대한 피해자 개인의 배상청구권을 무력화시켰다”며 정부를 상대로 1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피해 할머니들은 2015년 한일합의는 “정부는 일본에 의해 자행된 불법행위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훼손당한 국민이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실현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2011년 헌법재판소 판단에도 반한다고 밝혔다.

이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건강상의 이유로 재판에 참석하지 못했다. 2016년 당시 소송에 참여했던 12명의 피해 할머니 중 3명은 세상을 떠났다. 피해 할머니를 대리하는 이상희 변호사는 선고가 끝난 뒤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변호사는 취재진에 “법원 판단은 2015년 한일합의의 적법성을 결국 인정한 것 아닌가” 반문하며 “한일합의에 대해 위법성이 인정돼야만 한국정부가 이를 전제로 계속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 할 텐데 이 판결이 외교부에 어떤 메시지를 줄지 우려된다”고 밝혔다. 이어 이 변호사는 “이번 판결이 할머니들에게는 한국 정부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 표명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결과가 나와 할머니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고한솔 기자 [email protected]

<2018-06-15> 한겨레
☞기사원문: 법원 “한일 위안부 합의, 국가에 손해배상 책임 없다”

※관련기사

☞뉴시스: 법원 “한·일 위안부 합의, 국가에 손해배상 책임 없다”

☞뉴스1: ‘헌재결정 이행 않은’ 국가상대 손배소 위안부 할머니 패소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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種原論讀後

 

誰云人被造(수운인피조)

聖經失其光(성경실기광)

進化今連續(진화금연속)

崇神莫作羊(숭신막작양)

 

‘種의 起源’을 읽고 나서

 

사람은 지어진 거라 뉘 말하는가

聖經이 그 빛을 잃고야 말았도다

進化 지금도 죽 이어지고 있으나

귀신 섬기는 羊은 되지 말지니라.

 

<時調로 改譯>

 

사람 被造物 아니니 聖經이 빛 잃었도다

차츰차츰 변하는 일 지금도 죽 이어지나

귀신을 숭배하는 羊이 되어선 안 될지라.

 

*種原論: 종(種)의 기원(起源). 영국의 生物學者 다윈이 생물의 진화(進化)를 밝힌

책. 자연 선택(自然選擇) 진화(進化)의 주요 원인으로 보았으며, 생물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859년 간행하였다 *進化: 일이나 사물 따위가 점점 발

달하여 감. 생물(生物) 생명의 기원(起源) 이후부터 점진적으로 변해 가는 현상

*連續: 끊이지 아니하고 이어지거나 지속 *崇神: 신(神)을 높여 소중히 여김.

 

<2018.7.9, 이우식 지음>

월, 2018/07/0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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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泠浦(청령포)

 

木石懷悲意(목석회비의)

悠悠一曲江(유유일곡강)

君王何處去(군왕하처거)

蒼昊鷺飛雙(창호로비쌍)

 

청령포에서

 

나무도 돌도 슬픈 뜻을 품은 듯

유유히 흐르는 한 줄기 굽은 江

임금님께서는 어디로 가셨는가

푸른 하늘 날으는 한 쌍의 白鷺.

 

<時調로 改譯>

 

목석도 품은 悲意 유유히 흐르는 曲江

朝鮮의 六代 임금 그 어디로 가셨는가

蒼天을 훨훨 날으는 한 쌍의 해오라기.

 

*淸泠浦: 朝鮮의  六代  임금  端宗이  魯山君으로 格下되어 유배되었던 *悲意:

슬픈  뜻.  또는  슬퍼하는    *悠悠: 움직임이  한가하고  여유가  있으며  느림.

아득히 멀거나 오래됨 *君王: 임금 *何處: 어디 *蒼昊: 창천(蒼天). 푸른 하늘.

 

<2018.7.9, 이우식 지음>

월, 2018/07/0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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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獄某人士

 

避火先奔逸(피화선분일)

何爲入沸湯(하위입비탕)

輕猫逢大虎(경묘봉대호)

晝夜獨多忙(주야독다망)

 

감옥에 들어간 어떤 人士

 

뜨거운 불 피해 먼저 달아나더니

어찌하여 끓는 물 가운데 들었소

고양이 깔보다가 큰 범 만났으니

밤이건 낮이건 홀로 썩 바쁘겠소.

 

<時調로 改譯>

 

불 피해 달아나더니 어찌 沸湯에 들었소

고양이를 깔보다가 큰 범 만나게 됐으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홀로 매우 바쁘겠소.

 

*入獄: 감옥에 들어감. 감옥에 갇힘. 입뢰(入牢) *奔逸: 뛰어서 도망감. 빨리 달림.

멋대로 행동함 *沸湯: 끓는 물 *大虎: 큰 호랑이 *晝夜: 밤낮 *多忙: 매우 바쁨.

 

<2018.7.10, 이우식 지음>

화, 2018/07/10-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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勸隣叟(권인수)

 

孩童嘲國法(해동조국법)

已久紀綱崩(이구기강붕)

出外持藜杖(출외지려장)

安身遂可能(안신수가능)

 

이웃 노인에게 권하다

 

저 어린애도 나라의 法 조롱하니

紀綱 무너진 지 이미 오래입니다

외출 땐 명아줏대 지팡일 지녀야

몸을 편히 함 마침내 가능합니다.

 

<時調로 改譯>

 

어린애도 法 조롱, 紀綱 붕괴 이미 오래

바깥으로 나갈 때는 靑藜杖을 지니셔야

육신을 편안히 함이 마침내 가능합니다.

 

*孩童: 어린아이. 국자(鞠子). 동치(童穉). 동해(童孩). 유아(幼兒). 幼者 *已久:

이미 오래됨 *紀綱: 규율과 법도를 아울러 이르는 *出外: 외출(外出) *藜杖:

청려(靑藜).  청려장(靑藜杖).  명아줏대로  만든 지팡이 *安身: 몸을 편안히 함.

 

<2018.7.10, 이우식 지음>

화, 2018/07/10-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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某名假僧(모명가승)

 

寤寐貪錢貨(오매탐전화)

非人似夜叉(비인사야차)

僧官懸一命(승관현일명)

怨佛衆嘆嗟(원불중탄차)

 

어떤 이름난 땡추중

 

자나 깨나 돈을 탐내니

사람 아닌 夜叉와 같네

중 벼슬에도 목숨 거니

佛 탓하며 뭇사람 탄식.

 

<時調로 改譯>

 

자나 깨나 돈 탐내니 사람이 아닌 夜叉

저 중 벼슬 따위에도 저의 한목숨 거니

부처를 원망하면서 뭇사람 탄식한다네.

 

*假僧: 가짜  . 땡추중  *寤寐: 자나 깨나 늘 *錢貨: 돈  *非人: 사람답지  못한 사람

*夜叉: 두억시니.  八部의 하나.  사람을  괴롭히거나  해친다는  사나운  신.  염마

졸(閻魔卒) *僧官: 직(僧職). 법령, 수계(授戒), 관정(灌頂) 따위 儀式 寺院

운영을 맡아보는 僧侶의 직무 *一命: 하나의 목숨 *嘆嗟: 차탄(嗟嘆). 탄식함.

 

<2018.7.10, 이우식 지음>

화, 2018/07/10-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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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었지만, 지난 623일 충남 아산에서 운영위원회/워크샵이 열렸다 한다. 정기 운영위원회를 겸해서 워크샵을 연다하고, 워크샵 안건 중에 운영위원회 발전방안이 있다 하길래 이미 지난 324일의 정관개정으로 인해 집행부의 들러리 지원기구로 (스스로) 전락한 운영위원회가 발전방안을 논의한다니 우스꽝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운영위원들이 모여서 논의를 한다니 약간의 기대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발전방안에 대한 논의는 커녕,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전 운영위원 한명을 내가 발표한 정관개정 반대 성명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여러 명이 회의장에서 망신을 주며 퇴장시키는 횡포를 저지르는가 하면, 충북지부에 대해서는 정관 내규 어디에도 없는 사고지부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충북지부/ 회원들에게 모욕을 줬다는 것이니

     이게 민족문제연구소의 참 모습인가? 연구소가 정치권 닮아 가는 모양이다. 회원 상대로 공작해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특정 회원과 지부를 비토하고, 저네들 의견과 다르면 연구소를 와해시키려는 음해세력이나 적으로 낙인찍어 쫓아내기나 하고

     연구소에 정치에 야망이 있는상근자가 하나 있다더니 미리 정치권 입성 대비 연습을 하는건가? “민족문제연구소는 절대 정치와는 상관 없습니다라고 임헌영 소장님은 총회때고 어디서고 누누이 강조를 해 오셨는데

     아무튼, 그곳에 모인 운영위원(지부장)들과 집행부 상근자들은 도대체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 지식은 있는 건지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고 배척하고, 끼리끼리, 저희들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만 모여 뭘 논의하겠다는 건지이게 파쇼아닌가?

     민족문제연구소가 날이 갈수록 합리성을 상실한 파쇼집단화 하는 것 같다.

     지난번 3월 정기총회 때도 내가 정관개정에 반대 발언을 시작하자 어떤 운영위원은 바로 내 앞자리에 서서 삿대질하고, 소리 지르며 발언을 방해하는가 하면, 의장은 연단에서 마이크에 대고 빨리 끝내라”, “3분 이내로 끝내라며 재촉하고

     어떤 다른 반대의견을 내려 하는 사람한테는 발언 시작한지 15초 정도만에 의장이 나서서 회비 냈어요?” 하며 발언을 제지하고, 발언자가 회비 냈다며 저항하자 곳곳에서 마치 미리 때를 기다린 듯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리고소동이 일자 의장이 발언자의 마이크를 빼앗고 퇴장시키라 지시하고

     정말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속속 벌어지고 있으니, 이것이 꿈인가 현실인가

     민족문제연구소 정기총회에서 정관개정 같은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 반대발언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매도당하고 쫓겨나야 하는지, 지금이 3, 5, 통일주체국민회의 시절인지, 운영위원회에 지부의 고문, 지부장, 운영위원 등 간부, 일반회원, 심지어 배우자까지 다 참석 가능해도 특정 성명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전직 운영위원은 쫓아내야 하는지

     이민우 운영위원장과 그 자리에 참석한 운영위원들은 그게 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말 언제부터 이렇게 타락했습니까?” (의장 말씀 인용)

   

2018. 7. 10

회원 여인철

(, 9대 운영위원장)

 

 

 

 

수, 2018/07/11-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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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稱有識者

 

巧言藏淺識(교언장천식)

刊布露虛名(간포로허명)

問汝知千字(문여지천자)

危亡筆舌耕(위망필설경)

 

自稱 똑똑한 사람

 

교묘한 말로 얕은 지식은 감추고

책 찍어 퍼뜨려 虛名은 드러내네

그대에게 묻노니 저 千字 아는가

필설의 生業이 망할 듯 위태롭다.

 

<時調로 改譯>

 

교묘한 말씀으로 얕은 지식은 감추고

책을 찍어 퍼뜨려서 虛名은 드러내네

묻노니 千字 아는가 筆舌耕 위태롭다.

 

*巧言: 교묘하게 꾸며 댐. 또는 그 말. 巧語 *淺識: 얕은 지식이나 좁은 식견 *刊布:

발간하여 세상에 널리 퍼뜨림 *虛名: 실속 없는 헛된 명성. 부명(浮名). 허문(虛聞).

虛聲 *千字: 천자문(千字文) *危亡: 몹시 위태로워 망할 것 같음 *筆舌: 붓과 혀란

뜻으로, 글과 말을 이른다 *筆耕: 붓으로 농사를 대신한다는 뜻으로, 직업으로

이나 글씨를 씀 *舌耕: 강연이나 변호 따위와 같이 말을 하는 것을 生業으로 삼음.

 

<2018.7.11, 이우식 지음>

수, 2018/07/11-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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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人(기인)

 

老病持金骨(노병지금골)

巖居樂赤貧(암거락적빈)

吟詩山鬼和(음시산귀화)

訪問不逢人(방문불봉인)

 

기이한 사람

 

늙고 또 병들었지만 고상한 풍채

바위 굴에서 살며 가난함 즐기네

詩를 읊으면 山 귀신이 화답하며

찾아오는 이 있어도 만나지 않네.

 

<時調로 改譯>

 

老病이지만 金骨 숨어 살며 安貧樂道

문득 詩를 읊으면 山鬼神이 화답하며

방문객 있다 하여도 만나지 않는다네.

 

*老病: 늙고 쇠약해지면서 생기는 병. 노질(老疾) *金骨: 속세를 벗어난 고상한

풍채와 골격 *巖居: 속세를 떠나 山野에 숨어 삶. 암서(巖棲)* 赤貧: 썩 가난함.

 

<2018.7.11, 이우식 지음>

수, 2018/07/11-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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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牧者與僧

 

牧者僧云罰(목자승운벌)

同威不信人(동위불신인)

耶蘇逢佛氏(야소봉불씨)

共泣淚盈巾(공읍루영건)

 

목사와 중에게 답하다

 

목사와 중이 罰을 가함 운운하며

믿지 않는 사람을 더불어 으르니

기독교 예수가 佛家의 부처 만나

함께 울어 눈물이 수건 가득하다.

 

<時調로 改譯>

 

罰을 가함 운운하며 불신자를 으르니

기독교의 예수가 佛家의 부처를 만나

둘이서 흘린 눈물이 수건에 가득하다.

 

*不信: 믿지 않음. 믿지 못함 *耶蘇: ‘예수’의 音譯語 *佛氏: 석씨(釋氏). 석가모니.

 

<2018.7.12, 이우식 지음>

목, 2018/07/12-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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某事件再審判決

 

昨非今是事(작비금시사)

惡政抑衆民(악정억중민)

有罪爲無罪(유죄위무죄)

其間送幾春(기간송기춘)

 

어떤 사건의 再審 판결

 

과거의 그름이 지금엔 옳은 일

악한 정치가 뭇 백성 억눌렀네

罪 있음이 罪 없음이 되기까지

그사이에 몇 번의 봄을 보냈나.

 

<時調로 改譯>

 

과거 썩 그릇된 일이 지금에는 올바른 일

당시의 저 악한 정치 많은 백성 억눌렀네

有罪가 無罪 되기까지 몇 번의 봄 보냈나.

 

*再審: 재심사(再審査). <법률> 확정  판결로 사건이 종결됐으나 중대한 잘못이

발견되어 소송 당사자가 다시 청구해 재판을 함. 또는 그 재판. 형사 소송법에

  피고인(被告人)  이익을  위해서만  허용됨  *昨非今是: 전날엔  그르다고

여기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옳다고 여기게 됨 *惡政: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되게  하는  정치.  비정(秕政).  예정(穢政)  *衆民: 많은  백성 *其間: 그사이.

 

<2018.7.12, 이우식 지음>

목, 2018/07/12-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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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수리왕’ 후지이 간타로와 불이농장
일본인이 장악한 군산·김제, 식민지 농업수탈의 실상

김승은 자료실장

후지이 간타로가 1920년부터 3년간 조선 농민들을 동원해 간척한 군산 ‘불이농촌(不二農村)’은 현재 새만금 간척사업지의 절반가량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바닷가 척박한 토지를 600만 평의 드넓은 농지로 일구고, 100만 평 규모의 옥구저수지를 만들어 놓았으니 총독부가 식민지 농업 발전의 대표적인 성과로 요란하게 선전할 만한 사례였다.

조선총독부 ‘시정기념’ 엽서를 장식한 불이농장과 수리조합019

좌) 조선총독부 시정6주년 기념엽서. 1909년 후지이가 설립을 주도한 최초의 수리조합, 임익수리조합

우) 조선총독부 시정8주년 기념엽서. 평북 용천군 서선농장과 대정수리조합

오사카 상인이었던 후지이 간타로는 미곡무역으로 자본을 축적해 1901년 후지모토합자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대한제국)에 건너와 일본 면포와 생활필수품을 한국으로 들여오고, 쌀과 쇠가죽 등을 일본으로 반출하여 막대한 상업 이익을 올렸다. 한국으로 온 직후 후지이는 일본 간사이(關西)지방에 비해 땅값이 1/10에 불과한 조선토지에 눈을 돌렸다. 대규모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농장을 경영하면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투자대상을 토지로 바꾸었다. 1906년 전라북도 옥구‧익산 일대에 전북농장을 설립하면서부터 후지이는 본격적으로 농업경영에 착수했다. 1914년 불이흥업주식회사를 설립한 이후 전국 각지에 이른바 불이농장(不二農場)으로 불리는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다. 후지이는 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서선농장, 옥구농장, 철원농장 등을 연이어 설립하여 대규모 농업수탈의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불이농장의 사업>(불이흥업주식회사,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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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평북 용천군 서선농장 간척사업 경과와 성과를 소개한 책자.

중,우)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흙을 파서 나르고 돌을 쌓아 만든 제방

그의 농장개발은 저렴한 황무지를 구입하거나 총독부로부터 토지를 불하받은 후 이주농민을 동원해 간척‧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농사개량을 통해 소작인들로부터 소작미를 징수하는 방식을 통해 확장되었다. 기간지를 경영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달리, 후지이는 저수량지나 황무지와 같은 미간지를 개척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수원확보가 관건이었다. 그가 농업경영 초기부터 대규모 수리사업을 입안하고 수리조합사업을 적극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가 소유한 전북농장에는 임익수리조합, 서선농장에는 대정수리조합, 옥구농장에는 익옥수리조합, 철원농장에는 중앙수리조합, 어운수리조합이 설치되었다.

<농업 및 토지개량사업 성적>(불이흥업주식회사,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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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1928년 대정수리조합에서 수확한 쌀을 도쿄로 이출하기 위해 쌓고 있는 모습
우) 중앙수리조합에서 수확한 쌀을 오사카로 이출하기 위해 검사하는 모습

또한 대규모 미간지를 간척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는데 대부분 일본인에게 농지를 빼앗긴 농민이거나,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소작인들이었다. ‘영구 소작권 보장, 소작료 3년 면제, 간척 공사 임금 지급’이라는 불이흥업주식회사의 모집 광고에 현혹되어 호남과 충남에서 몰려든 농민들이 3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의 영세농민들은 약속과 달리 고율의 소작료와 각종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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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및 토지개량사업 성적>(불이흥업주식회사, 1929) 서선농장 간척사업에 동원된 농민들

이 때문에 각 지역의 불이농장에서는 크고 작은 소작쟁의가 빈번했다. 그 가운데 평북 용천군 서선농장에서는 1920년 중반부터 약 6년에 걸쳐 소작쟁의가 치열하게 일어났는데, 일제강점기 최대의 소작쟁의로 꼽힐만큼 조선 농민의 저항이 거셌다.
옥구농장에는 불이흥업주식회사가 ‘이상적 일본촌’ 건설을 목표로 일본인 이민사업을 직접 추진해 많은 일본인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이주해 온 일본인들이 출신지별로 마을을 이루어다 보니 불이농촌 안에 히로시마촌, 미나미사가촌, 나라촌 등 일본 지명의 마을이 생겨났고, 불이주택이라는 신식주택도 들어섰다. 
일본인 농업 이주자들의 자녀 교육을 위하여 불이공립심상소학교(1925)와 불이심상고등소학교(1929)도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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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후지이 간타로와 불이농촌 고치현(高知縣) 출신 일본인 마을 전경(<塭叺十万枚を顧みて-卒業生指導の足跡>, 불이공립심상고등학교)
우) 불이공립심상고등소학교 발행 교재들

<고시추의)신농가일기>(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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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심상소학교 사환으로 근무했던 조선인 고시추(高時秋)의 일기. 면화재배를 하면서 불이학
교에서 일하던 그의 일기를 통해 불이농촌과 불이학교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불이농장은 단순히 일본인 대지주나 농업회사가 경영한 대규모 농장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일제는 조선을 안정적인 식량공급지로 확보하고 일본인 농업 이민자를 수용하는 한편, 식민지 농업경영을 안정화함으로써 조선 농촌을 장악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식민지 농정을 앞장서 실천한 것이 후지이 간타로의 불이농장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수리왕’의 역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20년대 말부터 농업대공황이 일어나면서 불이흥업주식회사는 경영난에 부딪혀 1934년 조선식산은행으로 넘어갔다.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총독부는 불이농장 등 도처의 자리잡은 일본인 농장들의 웅대한 모습과 주로 일본인 농장주들에게 혜택이 돌아간 수리조합 건설 등을 농업 개발의 치적으로 내세웠다. 그 속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가야 했던 소작농이나 조선인 농가의 몰락을 철저하게 외면한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관과 이를 이어받은 ‘뉴라이트’ 세력은 이러한 일본인 농장의 성장과 수리조합과 같은 외형적 성장을 ‘식민지 근대화’의 상징으로 내세우지만, 실상 김제‧군산 일대는 근대화1번지가 아니라 수탈 1번지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목, 2018/07/12-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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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인천항 부두에 세운 대륙침략의 ‘거룩한 자취’ 기념비
경성보도연맹 기관지에 수록된 ‘성적기념지주(聖蹟記念之柱)’의 건립과정

 

한국전쟁의 와중에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에 관한 얘기를 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1949년에 이른바 ‘반공검사(反共檢事)’ 오제도(吳制道)와 선우종원(鮮于宗源) 등이 주도해 결성한 ‘사상전향자’ 포섭기관이다. ‘보도’라는 말은 좌익사상에 물든 이들에 대해 전향과 자수를 통해 반공정신이 깃들도록 보호하고 이끌어낸다는 뜻을 담은 표현이다.
그런데 보도연맹의 발상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것이 고스란히 재현한 결과물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패망기에 존재했던 대화숙(大和孰)과 같은 전향자 사상교화단체도 그러하고, 세월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33년 7월에 결성한 — 그 이름까지도 그대로 닮은 — 경성보도연맹(京城保導聯盟)과 같은 존재를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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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제94호(1941년 7월호)에 수록된 ‘성적기념비(聖蹟記念碑)’의 모습

경성보도연맹은 원래 경기도 학무과에서 주도하여 결성한 교외감독기관(校外監督機關)이자 학생선도기관(學生善導機關)으로, 여기에는 경성시내의 모든 중등학교와 초등학교, 그리고 인천 지역의 중등학교들이 망라하여 가맹되어 있었다. 겉으로는 각 학교의 생도들이 ‘유약한 음탕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선도하고 교외의 교육환경을 정화 향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1930년대의 비상시국 하에서 학생들이 ‘불순한 사상’에 노출되거나 물들지 않도록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에 상당한 주안점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1933년 12월 이후 매달 <보도월보(保導月報)>라는 이름의 기관지(1939년 3월부터는 <보도(保導)>로 명칭변경)를펴내자신들의활동성과와 기타 선전내용을 확산하는 매체로 활용하였다. 우리 연구소가 소장한 <보도>가운데 제94호(1941년 7월호, 8쪽 분량)에 수록된 내용을 골라 이달의 전시자료로 소개한다. 먼저 경성보도연맹의 소재지가 ‘경기도 학무과 내’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연맹의 정체가 글자 그대로 ‘관변기구’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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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방한 당시 일본황태자 요시히토가 타고 온 군함 카토리(香取)

이 기관지의 제1면을 살펴보면, 제법 큼직한 규모의 낯선 기념탑 하나가 사진 속에 등장한다. 그 장소는 인천부두(仁川埠頭)라고 표기되어 있고, 일본황태자 요시히토(嘉仁)가 이곳에 발을 디딘 ‘거룩한 공간’ 인 탓에 설립된 것이라는 설명이 언뜻 보인다. 그가 우리나라를 찾은 때는 대한제국 시절 헤이그특사파견과 고종퇴위사건의 여파가 한창이던 1907년 가을의 일이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무려 30년도 훨씬 더 지난 시점에서 이러한 기념물이 느닷없이 만들어진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인천교육회(仁川敎育會) 측에서 이 탑을 세우는 취지를 적은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먼저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대정천황 성적기념(大正天皇 聖蹟記念)의 어주건설(御柱建設)의 사(辭)

명치(明治) 40년(1907년) 10월 16일 당시 황태자로 계시던 대정천황께서 황공하옵게도 이 땅에 어상륙(御上陸)하시었도다. 이 존귀한 황저(皇儲, 황태자)의 어신(御身)으로서 대륙(大陸)에 제일보(第一步)를 디뎌 주시니 실로 우리나라 개벽(開闢)이래 공전(空前)의 성의(盛儀:성대한 의식)일지어다. 또한 전(全) 반도서민(半島庶民) 절대의 광영으로 영원히 후곤(後昆, 후세사람)에게 전해야할 창경(昌慶 : 빛나는 경사)이도다.
이래(爾來) 33 성상(星霜), 바야흐로 안으로는 황화(皇化:천황의 교화)가 십삼도(十三道)에 골고루 미쳐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결실을 드디어 거두고, 밖으로는 황은(皇恩)이 멀리 만주(滿洲)에 이르렀으며, 더 나아가 동양평화확보(東洋平和確保)의 성전(聖戰)이 이에 4년, 팔굉일우(八紘一宇:전 세계가 하나의 집)의 황모(皇謨, 통치의 계책) 아래 대륙 몇 억(億)의 생민(生民)이 모두 황택(皇澤:천황의 은택)에 젖으리로다. 생각건대 여기에 이르면, 성덕(聖德)이 더욱 광대(廣大)해지고 어릉위(御稜威, 천황의 위세)가 두루 높아짐에 공구감격(恐懼感激:삼가 두려워하며 감격함)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다. 이에 인천부교육회원(仁川府敎育會員)은 상의(相議)하여 이 성적(聖蹟)에 기념의 어주(御柱, 기둥)를 세우고, 한없는 성덕을 영원히 우러러 받드노라. 때는 기원(紀元) 2600년 소화(昭和) 15년(1940년) 10월 16일이도다. 명(銘)하여 가로되,

황풍(皇風)이 육합(六合, 천지사방)에 끼치고,
만민(萬民)은 성택(聖澤)을 우러르네.
건덕(乾德:하늘의 덕 곧 천황의 덕)이 팔굉(八紘, 온 세상)을 엄호하니,
사해(四海)는 창평(昌平)을 노래하네.

 

요약하자면 1907년의 방한 때 황태자의 신분으로 요시히토(뒤의 대정 大正)가 몸소 인천항 부두에 발을 디딘 것은 일본제국이 아시아 대륙으로 세력을 뻗어가는 첫걸음이 되며, 이를 계기로 결국 조선과 만주는 물론이고 중국 땅에 이르는 수 억의 사람들이 천황의 치세에 들어 황은을 입게 되었으니, 그러한 성스러운 곳에 기념탑을 세운다는 얘기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 스스로가 벌인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컬어 ‘동양평화를 위한 성전’으로 묘사하는 대목은 참으로 적반하장식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보도> 제94호의 제3면에 수록된 인천항 부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이른바 ‘황군(皇軍, 일본군대)’이 상륙했던 유서 깊은 지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내용도 눈에 띈다.

 

016<매일신보> 1930년 6월 12일자에 수록된 경성신사 구내 ‘황태자어주가지처’ 기념비 설계도

한편, <매일신보> 1941년 6월 17일자에 수록된 성적기념비(聖蹟記念碑) 제막식 관련기사를 보면, 이 탑을 세운 1940년이 바로 ‘황기(皇紀; 초대 천황이 즉위한 기원전 660년을 기점으로 계산) 2600년’이 되는 해 이므로 이를 기념하는 사업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결과 가로폭 106척(약 32.1미터)의 화강석 기단 위에 9척(약 5.9미터) 규모의 돌기둥을 포함하여 전체 높이 32척(약 9.7미터)에 달하는 기념탑이 그 자리에 들어섰으며, 공사 도중 땅 속에서 옛 부두의 잔교초석(棧橋礎石)이 발견되어 그것을 수습하여 기단 위에 보존토록 하였던 사실도 확인된다.
석주(石柱)의 전면에 보이는 ‘성적(聖蹟)’ 두 글자는 이른바 ‘창덕궁 이왕 은(昌德宮 李王垠)’이라는 신분으로 격하되어 있던 영친왕(英親王)의 글씨를 받아 새겼다고 알려진다. 요시히토의 방한 당시 한국 ‘황태자’로서 몸소 인천항 부두까지 나와 마중을 한 당사자였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이제는 격하된 망국의 보잘 것 없는 왕자(王者)로 글씨를 헌상한 꼴이다.
여기에 1907년 일본황태자의 방한과 관련해 한 가지를 덧붙이면, 서울 남산 기슭에 있던 경성신사(京城神社) 구내에도 또 다른 종류의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당시 통감관저(統監官邸, 지금의 서울 예장동 2-1번지 구역)에 숙소를 정한 일본황태자는 방한 3일째에 남산 왜성대공원에 있는 갑오기념비(甲午記念碑) 부근을 둘러보고 이곳에서 서울 시내의 전망을 감상한 일이 있었다.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조차 크게 기릴만한 행적이라고 하여 1930년 9월 그 자리에 ‘황태자전하어주가지처(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라고 새긴 기념비를 만들어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기념물들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천년만년 갈 거라는 그네들의 염원과 달리 곧 일제는 자멸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인천항 부두에 세운 ‘성적기념탑’은 불과 4년 남짓에 식민통치가 끝나다 보니 이러한 시설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는 이들이 거의 없을 만큼 졸지에 사라져 버렸다. 대륙을 향한 ‘거룩한 첫 자취’는 실상 그들 스스로 침략과 패망의 길을 걷게 되는 첫 걸음이었다고 고쳐야 옳을 것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7/1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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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첩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금강산 수난사
친일귀족 민영휘 일가의 만폭동 바위글씨

여러 해 전 제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 관한 자료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그의 전기에서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한 장의 사진을 마주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다소 거만한 포즈를 취한 총독과 총독 부인이 등의자(藤椅子)로 만든 순여(筍輿, 대나무가마)에 나눠 타고 금강산 탐방에 오른 모습이 나란히 포착되어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들의 비대한 몸집을 어깨와 팔뚝으로 지탱하며 서 있는 짚신 차림의 왜소한 조선인 가마꾼들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애처로운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권세를 지닌 누구에게는 신선놀음과 같은 별천지의 세상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야말로 숨이 턱턱 막히는 험난한 계곡과 비탈면이 끝없이 이어진 고생길을 뜻하는 곳, 금강산(金剛山)은 바로 그러한 공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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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광에 나선 사이토 총독과 총독 부인

예로부터 금강산은 무수한 금강예찬(金剛禮讚)을 쏟아내게 만들 정도로 계절마다 그 모습이 달라지는 절경으로 소문난 곳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관한 한 그 풍경에만 주목한다면 금강의 속살을 제대로 살펴보기가 그만큼 더 어렵게 되고 만다. 금강산을 세계적인 명산으로 떠들썩하게 부각시키고 이를 적극 홍보하려 했던 주체가 바로 조선총독부였다는 점은 새삼 강조하지 않더라도, 금강산의 수난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 또한 식민통치기와 고스란히 겹치니까 말이다.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신작로와 철도가 개설되고 탐승회(探勝會)라는 이름의 여행단이나 아니면 개인단위의 탐방객들로 대규모 인파들이 골짜기마다 밀려들게 되자 이곳에 생업의 기반을 마련한 일본인들이 적지 않았다. 주로 음식점, 숙박업, 찻집, 기념품점, 사진사들이었지만, 드물게는 석공(石工)이라는 직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금강산을 탐방한 기념으로 바위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새겨놓고 오는 것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일이지만, 새로이 일본인 관광객이 몰려오니 그 역할은 일본인 석공의 몫으로 귀착되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금강산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그저 구경만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흔적을 남겨두고 가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일본황족 나카마쓰노미야(高松宮, 쇼와‘천황’의 동생)은 1926년 9월에 외금강 상팔담(上八潭)에 오른 뒤에 이곳을 등반한 기념으로 큰 문자를 암면에 새겨놓기도 했다. 『동아일보』 1934년 10월 3일자에 수록된 만평가 최영수(崔永秀)의 「금강산 만화행각」이라는 연재물에는 금강산 계곡마다 그득한 이름새기기 현상에 대해 신랄하게 꼬집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 금강산 속엘 다녀나간, 말하자면 탐승객들 중에 ‘미친 놈’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볼품 있는 바위에 부질없이 성명 석자를 써놓고 간 자들을 하는 말이다. 그 좋은 경치, 그 아름다운 바위 위에 왜 그 더러운 이름들을 기록하였을까? 혹자는 금강산 족보(族譜)를 만들렴인지 삼대(三代)까지 이름을 써놓았고 혹자는 그것이 옥판선지(玉版宣紙)로 알았던지 휘호를 하고는 도장까지 찍어놓았고 혹자는 크게 혹자는 적게 또는 쓰기도 하고 새기기도 하고 — 그리하여 일견 그 속에도 빈부(貧富)의 계급적 의식이 표현되고 있다. 보라 — 이 부질없는 사람들이여! 그렇게도 그대들의 이름을 날리고 싶거든 명함(名啣)을 수억 장 백여 가지고 비행기를 세내 타고 상공에서 뿌리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것이 아니냐 말이다.

이러한 일본인 석공의 존재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흔적으로는 외금강 구룡폭포에 새겨진 ‘미륵불(彌勒佛)’ 바위글씨가 있다. 이것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썼으며, 세 글자를 합쳐 그 길이가 무려 64척(尺, 약 19.4미터)에 달할 만큼 굉장한 규모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연구소가 소장한 <반도의 취록(半島の翠綠)>(조선산림회, 1926년 발행)에 실린사진을 보면, 이 글자 옆에는 ‘세존강생 이천구백사십육년(世尊降生 二千九百四十六年; 서기 1919년에 해당)’, ‘해강 김규진 서(海岡 金圭鎭 書)’라는 낙관(落款)과 더불어 시주(施主), 화주(化主), 감독(監督)의 이름들이 죽 나열되어 있고, 그 말미에는 석공(石工) 스즈키 긴지로(鈴木銀次郞)라는 구절도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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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의 글씨 ‘미륵불’ (『반도의 취록(半島の翠綠)』, 1926)

일찍이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같은 이는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를 통해 ‘미륵불’이라는 글자에 대해 “구역이 날 뿐더러 이토록 아까운 대자연의 경치가 파괴된 것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해강 김규진은 실로 금강산에 대하여 대죄(大罪)를 범한 자라 하겠다”고 혹평을 더한 바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 글자에 대해 평가를 달리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지만, 어쨌건 그 시절 신문지상에 수록된 금강산 탐방기에는 한결 같이 사람마다 손가락질하는 대단한 꼴불견의 하나라고 묘사되어 있다.
이 글자를 새긴 당사자가 하필이면 일본인 석공이었다는 점은 상당한 거부감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나오는 스즈키 긴지로라는 인물은 1939년 가을 대일본청년단대회(大日本靑年團大會)가 경성에서 개최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미나미총독(南總督)이 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휘호를 인왕산 병풍바위에 큰 글씨로 새길 때에 그 작업을 직접 수행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 글자 당 사방 12척(약 3.6미터) 크기에 달했던 바위글씨는 해방 이후 간신히 표면을 깎아내긴 하였으나, 지금도 여전히 인왕산의 이마라고 할 수 있는 곳에는 큰 상처처럼 일제 패망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그런데 해강 김규진이라고 하면 이 외금강 구룡연의 ‘미륵불’ 글씨만이 아니라 내금강 만폭동 쪽으로도 ‘법기보살(法起菩薩)’, ‘천하기절(天下奇絶)’,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 여러 점의 큰 바위글씨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법기보살이라는 글자는 모두 합쳐 72척(약 21.8미터)에 달하는 것이며, 원본글씨가 하도 이색적이라 서울 수송동 각황사 법당에서 임시전람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구경시킨 적도 있었다.

우리 연구소에 있는 <만이천봉 조선금강산>(1929) 사진첩에 이 ‘법기보살’ 바위글씨가 생생히 담긴 사진이 실려 있다. 여기에 ‘세존응화 이천구백사십칠년 사월(世尊應化 二千九百四十七年 四月)’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글자가 1920년에 새겨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아래쪽의 구절은 판독이 힘들 뿐더러 나머지 부분은 사진앵글에서 벗어나 있어 그 내역을 모두 확인할 수 없으나, 이 또한 일본인 석공 스즈키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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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기보살’ 아래 민영휘 일가의 이름 (『만이천봉 조선금강산』, 1929)

한편, 이 사진자료에서 크게 눈길을 끄는 대상은 오른쪽 아래에 함께 포착된 민영휘(閔泳徽, 1852~1935) 일가의 이름이 새겨진 부분이다. 민영휘는 강원도 지역 백성들이 ‘민철구(閔鐵鉤, 쇠갈고리)’라고 불렀다는 탐관오리 민두호(閔斗鎬, 1850~1902)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잘 알려진 대로 조선 제1의 갑부(甲富)이자 조선귀족회의 부회장을 지낸 대표적인 친일귀족의 하나이다.
이 바위글씨를 보면 민영휘를 필두로 김기현(金箕賢, 측실, 1926년에 사망), 민대식(閔大植, 둘째 아들), 민평식(閔平植, 둘째딸, 1923년에 사망), 민천식(閔天植, 셋째 아들, 1915년에 사망)의 이름이 차례로 새겨져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민영휘의 본처인 평산 신씨(平山 申氏, 1915년에 사망)는 물론이고 큰 아들이자 양자인 민형식(閔衡植), 맏딸 민윤식(閔潤植), 넷째 아들 민규식(閔奎植), 그리고 ‘해주마마’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던 또 다른 측실 안유풍(安遺豊)의 이름은 보이질 않는다.
<동아일보> 1924년 9월 20일자에 수록된 소일생(小日生)의 「금강유기(金剛遊記)」 연재물에는 “…… 그 외에도 염치 모르는 탐리배(貪吏輩)들이 첩(妾)의 이름이며 얼남녀(孼男女)의 이름을 마치 후인(後人)에게 자랑이나 할 듯이 새긴 것들이 무수하게 보였다”고 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글씨를 보고 일컫는 대목인 듯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민영휘 일가의 사람들이 직접 금강산을 탐방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름만 올려놓은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위의 연재물에 포함된 <동아일보> 1924년 9월 11일자 기사를 보면, ‘삼불암(三佛岩) 지척에 있는 수충영각(酬忠影閣)에 자작 민영휘(子爵 閔泳徽)의 대판사진(大版寫眞)이 역대 고승들의 화상(畵像) 가운데에 버젓이 함께 걸려 있음은 대망발(大妄發)’이라고 개탄하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이때 상당한 금액의 시주가 있었을 테고, 그러한 결과로 그들의 이름이 줄줄이 바위에 새겨지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아무튼 만폭동 계곡에 각자된 민영휘 일가의 이름은 그 자체로 가문의 영광은커녕 그들의 추한 행적을 천년만년 상기시켜주는 훌륭한 매개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금강산에 남쪽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도 벌써 7년이 되어간다. 언젠가 다시 금강산관광이 재개된다면 꼭 가서 두 눈으로 그 글자들의 내역을 모두 확인해 보고 싶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7/12-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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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대륙침략과 조선인 강제동원의 연결 창구,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현해의 여왕’ 금강환(金剛丸)과 흥안환(興安丸) 홍보엽서, 19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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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딱 11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1905년 1월 1일은 서울 영등포의 분기점에서 시작되어 저 멀리 부산 초량으로 이어지는 경부철도의 전 구간에 대한 운수영업이 개시된 날이다.
하필이면 러일전쟁의 와중에 일본군대에 의한 여순함락(旅順陷落)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이뤄진 경부선의 개통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지는 <대한매일신보> 1904년 12월 20일자에 수록된 「한국에 일본세력」이란 제하의 기사 한 토막을 통해 잘 엿볼 수 있다.

경부철도가 내년 1월 1일에 개회식을 행할 터인데 서울에서 부산에 가는 수레는 올라간다 하고 부산에서 서울에 오는 수레는 내려간다 한다는데 그것은 동경을 중심으로 삼는 연고라 하고 차세는 일본 돈으로 받게 하고 철로변에 지명은 다 일본말로 부르게한다 하며 일삭 전에 경인철로회사에서 일본시간을 쓰기로 작정하였으니 그 전보다 삼십 오 분이 잃게 되었는데 외국 사람들에게 이 말을 미리 통기하지 아니하여서 차 타러나아갔다가 낭패한 자도 있고 다른 불편한 일이 많이 있었다더라.

여길 보면 땅만 한국 땅이었지 철도운영의 주체는 말할 것도 없고 기차의 운행시각도 일본의 표준시에 맞춰 제멋대로 변경하는 등 이미 시간에 대한 주권조차 빼앗긴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부산을 향하는 기차를 일컬어 공공연하게 자기들 식으로 ‘올라간다’고 표현했다는 대목 역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일상용어로 정착되는 ‘동상(東上, 동경으로 가는 것)’이니 ‘귀선(歸鮮,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이니 하는 따위의 표현들도 바로 이러한 일본중심의 관념에서 파생된 결과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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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경부철도의 개통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또 다른 교통수단의 확장과 맞물려 진행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1905년 9월에 운행이 개시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부관연락선)이라는 존재이다. 관부연락선은 글자 그대로 한국의 부산(釜山)과 일본의 하관(下關, 시모노세키) 사이에 가로놓인 240킬로미터에 달하는 바닷길을 연결하는 여객선을 말하며, 무엇보다도 양쪽의 철도운행시각에 때를 맞춰 왕복한다는 것이 일본우선(日本郵船)이나 조선우선(朝鮮郵船)과 같은 여느 정기여객항로와는 다른 점이다.
대한해협을 오가는 이러한 연락선의 등장으로 일본 쪽으로는 산양선(山陽線, 시모노세키~코베 구간)과 동해도선(東海道線, 코베~신바시 구간)을 거쳐 일본의 수도 동경(東京; 동경역은 1914년에 개설)까지 직통으로 연결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한국 쪽으로는 예전처럼 구태여 배편으로 인천항을 경유할 필요 없이 부산정거장에서 곧장 서울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1905년 11월에 경의철도(京義鐵道)마저 부설되자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여 단숨에 이동하는 것은 별스런 일이 아닌 세상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러한 교통망은 1911년 11월에 안봉선(安奉線, 안동~봉천 구간)과 압록강 철교의 개통으로 정점을 찍게 되는데, 이로써 남만주철도(南滿洲鐵道)와 동청철도(東淸鐵道)까지 포괄하여 동아시아 일대가 마치 거미줄처럼 얽혀 일본제국의 영향권 내로 편입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 길은 이른바 ‘우호선린’과 ‘동양평화’를 위한 통로가 아니라 ‘약육강식’과 ‘대륙침략’을 위한 기반시설로 고스란히 활용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실제로 식민지배와 대륙침략의 연결고리가 되었던 관부연락선의 명칭 하나하나를 통해서도 이러한 침략야욕의 변천사를 그대로 읽어낼 수 있다.
최초의 연락선이었던 일기환(壹岐丸, 1905년 9월 취항)과 대마환(對馬丸, 1905년 11월 취항)은 이른바 ‘현해탄(玄海灘)’의 섬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반면에 고려환(高麗丸, 1913년 1월 취항), 신라환(新羅丸, 1913년 4월 취항), 경복환(景福丸, 1922년 5월 취항), 덕수환(德壽丸, 1922년 11월 취항), 창경환(昌慶丸, 1923년 3월 취항) 등은 식민지 조선이 이미 자기네의 영역에 완전히 흡수되었음을 과시하는 상징적인 명칭으로 채택한 것이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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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이후에 등장하는 금강환(金剛丸, 1936년 11월 취항), 흥안환(興安丸, 1937년 1월 취항), 천산환(天山丸, 1942년 9월 취항), 곤륜환(崑崙丸, 1943년 4월 취항)은 조선과 만주 땅은 물론이고 저 멀리 중국 내륙의 깊숙한 곳까지 일본제국의 세력권으로 확장하겠다는 저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름인 셈이다. 이 와중에 한쪽에서는 신천지를 찾아 조선과 만주로 이주하려는 일본인들이 줄지어 탑승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 수탈의 대상이 되어 이른바 ‘내지(內地)’로 건너가려는 조선인들이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관연락선과 부산> (논형, 2007)에 정리된 자료에 따르면, 이들 관부연락선은 1945년에 이르기까지 연인원 3천만 명에 달하는 승객을 실어 나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야말로 관부연락선이 일제의 식민지배와 대륙침략을 위한 대동맥의 역할을 했음을 실감할 수있는 대목인 듯하다. 역설적이게도 일제의 패망 당시 80만 명에 달하는 조선 거주 일본인과 200만 명에 육박했던 재일조선인들이 귀환선(歸還船)으로 삼았던 것 역시 관부연락선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연구소에는 관부연락선이나 부산항 잔교(棧橋)의 모습을 담은 여러 장의 사진엽서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들 가운데 금강환과 흥안환의 홍보엽서(1937년 제작 추정)를 골라 이달의 전시자료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 홍보엽서에는 선박의 단면도를 통해 이 배의 세부적인 얼개가 소개되어 있는데, 기선의 연통에 그려진 표시는 관부연락선의 운영주체인 철도성(鐵道省)의 휘장 ‘에(工)’ 마크이다.
이들 배는 동일한 설계도에 따라 제작된 쌍둥이 선박이며, 총톤수 7,104톤에 승선인원은 1,746명이고, 화물용적도 2,700제곱미터에 달하는 대형 객화선(客貨船)의 용도로 건조된 것이었다. 이는 종래 총톤수 3,620톤에 승선인원이 945명에 불과했던 경복환, 덕수환, 창경환 등에 비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이들 배를 일컬어 ‘현해(玄海)의 여왕(女王)’이라고도 했던 것은 바로 화려한 외관과 더불어 이와 같은 대규모의 수송능력을 지닌 탓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어의 이면에는 무수한 조선인들이 두려움 속에 대한해협을 건넜을 강제동원의 역사도 고스란히 배여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관부연락선과 현해탄은 ‘사(死)의 찬미(讚美)’로 상징되는 윤심덕(尹心悳)의 애잔한 비애가 얽힌 공간으로 기억되기에 앞서, 그 자체가 무려 반세기 가까이 진행된 일제침탈사의 생생한 현장이자 길목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상기할 필요가 있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목, 2018/07/1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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