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조선일보’가 보도한 ‘주중 한국대사관 광복절 행사에… 6.25때 중공군 정율성 딸도 초청’ 기사. ⓒ조선일보 PDF
지난 15일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이 주최한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독립투사 정율성의 딸인 정소제(75)씨가 초청된 것을 두고 <조선일보>가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냈다. 경축식에는 임시정부 비서였던 김동진의 딸과,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본명 장지락)의 아들도 초청됐다.
16일자 <조선일보>는 베이징 특파원 명의의 기사에서 정소제씨 초청 대목에만 문제를 제기했다. <조선일보>는 “주중 한국대사관 광복절 행사에… ‘6·25 때 중공군’ 정율성 딸도 초청”이란 제목 아래 정율성이 중국공산당원으로 가입했고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해 김일성에게 바쳤”으며 “6·25 때는 중공군으로 참전해 서울까지 내려왔”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주중대사관이 대단히 불순한 인물의 딸을 초청한 듯한 인상을 풍긴 것이다.
정율성은 나라 잃은 지 4년 뒤인 1914년 전라도 광주에서 출생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오늘날 광주광역시에 정율성로라는 도로명이 있다. 또 해마다 10월에 사흘간 ‘정율성 국제음악제도 광주에서 열린다. 이 행사는 광주광역시가 주최하고 광주정율성국제음악제추진위원회가 주관한다.
광주 남구에 있는 정율성로
▲ 광주 남구 양림동 휴먼시아 아파트 입구 정율성로(路)에 광주 출신의 중국 혁명 음악가 정율성 선생의 흉상이 조성됐다. 2009년 7월 15일, 흉상 조성을 축하하는 제막식이 열렸다. ⓒ연합뉴스
단순히 광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광주 사람들이 정율성을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기념해도 부족함 없는 인물이지만, 국가가 하지 않으므로 고향 사람들이라도 나서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여는 취지와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 홈페이지의 문화광장 코너는 이렇게 설명한다.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이면서도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과 탁월한 음악적 업적으로 중국 3대 음악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정율성의 삶과 음악성을 재조명해 업적을 기리고…(하략)”
항일투쟁과 음악적 성과로 중국 3대 음악인으로 추앙받는 점이 정율성 국제음악제 개최의 결정적 원동력이 됐다는 설명이다. 대표작 <연안송>이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오늘날 그의 중국 내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중앙대 국악대학장 및 한국음악학회장 등을 역임한 고 노동은 교수가 정리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한 <항일음악 330곡집>은 이렇게 설명한다.
“<연안송>은 중국의 마오쩌둥(모택동)과 저우언라이(주은래)·주더(주덕) 등이 이끌었던 항일혁명의 성지 옌안을 찬양하는 노래다. 이 노래는 중국인들에게 대표적인 항일가이자 서정적인 가곡으로 깊이 각인되어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
<연안송> 외에 <중국인민해방군가>도 정율성이 작곡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조선인민군 행진곡>도 그의 작품이다. 이렇게 바로 옆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인 작곡가가 정작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국제적 음악가라는 사실은 물론 열혈 독립투사였다는 사실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운전자가 바로 옆에 있는 차량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딴 데 정신이 팔려 시야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에 대한 우리의 시야 역시 그렇게 좁아져 있기 때문에 정율성을 잘 모르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정율성의 기본 이력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탓에 <조선일보> 같은 보수언론이 그를 ‘6·25 때 중공군’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소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6·25 때 중공군’이라는 프로필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알 수 있다.
▲ <항일음악 300곡>에 수록된 <연안송> 악보. ⓒ김종성
율성(律成): 오선지로 독립운동을 하다
정율성은 1914년 전라도 광주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정부은이다. 율성(律成)은 ‘음율이 성취되다’라는 어의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에 지은 이름이다. 개명에 얽힌 이야기가 역사학자 이이화가 쓴 <천재 음악가 정율성>에 소개돼 있다.
“그의 아버지는 단순한 농부가 아닌 지식인이었다. 음악에 열중하는 어린 아들을 보고, 예전에는 외적을 물리칠 적에 북과 나팔로 사기를 돋우었던 일을 상기하며 우리에게 군가가 없다는 한탄을 들려주었다. 이에 그는 깊이 느낀 바가 있었고 또 그런 음악을 작곡하는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때 ‘음악을 이룬다’는 뜻을 지닌 율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 제92권에 실린 글 중에서
정율성은 외적을 물리칠 때 북과 나팔로 아군의 사기를 돋우는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 항일 음악가가 돼 나라를 독립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음악을 통한 항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성가대가 교회 예배나 전도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오선지로 하는 독립운동도 총으로 하는 독립운동 못지 않게 중요했다. 정율성은 오선지로 하는 독립운동만 한 게 아니라 총으로 하는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다만 오선지에 좀 더 비중을 뒀을 뿐이다.
▲ <항일음악 300곡>에 수록된 정율성 사진. ⓒ김종성
정율성은 19세 때인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첫째형 정남근, 둘째형 정인제, 셋째형 정의근처럼 독립투사가 될 목적이었다. 열혈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운동단체 사무를 보면서 음악공부를 병행했다. 그 뒤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도 활동하고 뤼신예술학원에서 음악도 가르쳤다.
1941년부터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 등에 소속돼 항일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해방 뒤에는 북한에 가서 음악을 가르치며 인민군협주단을 만들었다. 한국전쟁 때는 중국 국적을 취득해 중국인민지원군이 된 뒤 전선 위문활동을 펼쳤다. 1951년 4월 중국으로 돌아간 뒤 작곡 활동에 전념하다가 1976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렇게 독립투사 출신의 음악가로 일생을 마감했다.
<조선일보> 논리의 문제점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주중대사관이 정율성의 딸을 초청한 것과 관련해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을 제기했다. 하나는 그가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독립투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김동진 지사와 김산은 정부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으나, 정율성은 아니다.” – <조선일보> 기사 중
이제껏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를 제대로 예우하지 않기로 유명한 나라였다. 제대로 대우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누가 독립운동을 했는지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서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서훈을 받았든 안 받았든,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정율성이 정부의 서훈을 받지 못했다면, 이번 기회에 서훈을 추진하면 되는 것이다. “정율성은 아니다”라는 <조선일보> 기사의 표현을 “정율성에게도 서훈을 줘야 한다”는 긍정적 의미로 독자들이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제기한 두 번째 문제점은 그가 북한 정권에 협력했다는 점이다. 해방 후 6년간 북한에 머물며 정치적 음악 활동에 종사했다는 점을 거론했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간과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독립운동이 사상보다 상위에 있다는 엄중한 사실이다.
독립운동에는 사회주의자도 가담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가담했다. 이런 분들이 상호 경쟁하면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민족의 독립을 최상위의 가치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독립 쟁취가 우리 민족의 공통 관심사였다는 점은, 서로 다른 세계관과 우주관을 가진 불교·기독교·천도교·유교 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다 함께 동참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또 해방 뒤에 남으로 갔든 북으로 갔든,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부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절반 밖에 지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든 한민족 구성원과 모든 독립투사가 대한민국 정부의 관할을 받을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의 관할을 받고 싶어도 대한민국에 올 수 없었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당신은 왜 대한민국 영역에 들어오지 못했냐?”고 물을 게 아니라, 대한민국정부 스스로 “왜 그분들을 모시지 못했나?”라고 자문하는 게 먼저다.
▲ 광주광역시에 있는 ‘음악가 정율성 선생 탄생지’ 비석. ⓒ 위키백과
그리고 북으로 간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라고 한다면, 남으로 온 독립운동가 역시 북한 입장에서는 독립운동가가 아닌 게 된다. 백범 김구가 남으로 온 독립운동가라 하여, 또 <백범일지>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다 하여, 북한 정부가 김구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우습고 모순된 일인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북에서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남한 사람들은 부당하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으로 갔다 해서 독립운동가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북한 사람들 입장에서도 똑같은 부당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남으로 왔든 북으로 갔든,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다. 그런 사유를 갖고 독립운동가를 차별해서는 안된다. 사상과 종교는 물론이고 거주지를 갖고도 독립운동가를 차별해서는 안된다. 모든 유형의 독립운동가들을 다 받들고 존경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합과 탕평을 이루는 출발점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남이냐 북이냐 하는 거주지를 갖고 독립운동가를 차별하게 되면, 지금 진행중인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운동에도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평화와 통일을 이루려면 그런 일로 분란을 조성하지 말아야 한다. 남에서 존경하는 분들을 북에서도 존경해주고, 북에서 존경하는 분들을 남에서도 존경해줘야 남과 북이 하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독립운동은 사상보다 위에 있다
독립운동이 사상·종교·거주지보다 상위 개념이라는 점은 헌법 조문만 봐도 알 수 있다. 헌법 전문(서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했다. 3·1운동으로 상징되는 독립운동이 대한민국 정통성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좌파든 우파든 모든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 정신의 실천자들이다. 헌법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3·1운동에 두고 있으므로, 이 이념에 입각해 독립운동을 한 정율성 같은 분들을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예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분들을 차별할 권리가 대한민국 정부한테는 없다. 주중대사관도 마찬가지다. 주중대사관에게는 정율성의 딸을 초청자 명단에서 뺄 권리가 없다.
▲ 만세 부르는 애국지사 후손들 제73주년 광복절을 맞아 15일 중국 베이징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애국지사 김산의 아들 고영광 선생(오른쪽에서 두번째)과 정율성 선생의 딸 정소제(왼쪽 두번째) 여사가 만세를 부르고 있다. ⓒ 연합뉴스
독립운동을 사상의 상위에 놓지 않고, 거꾸로 사상을 독립운동의 상위에 놓은 사람들이 이제껏 저질러온 잘못들을 열거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친일청산을 훼방하고 지연시킨 점이다.
해방 직후에 반민특위의 친일청산이 무산된 것은 이승만 정권이 친일청산을 공산주의로 매도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입장에서는 독립운동보다 사상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런 잘못을 앞으로도 답습한다면,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과 친일청산의 가치가 빛을 발하기는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국민들의 시대정신이 그것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다. 촛불혁명 때 우리 국민들은 사상을 독립운동의 상위에 놓는 구세력 핵심부를 청와대에서 끌어내 감옥으로 보냈다. 박근혜로 대표되는 구세력은 독립운동이나 친일청산보다는 자신들의 낡은 이념을 최상위로 평가했다. 그들은 우리 국민들이 넓은 시야로 역사와 세상을 보는 것을 방해했다. 우리 국민들이 넓은 시야로 ‘운전’하는 것을 훼방했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그들을 쫓아냈다. 그 겨울의 별빛 아래서, 마치 악귀를 쫓듯 촛불을 들고 그들을 쫓아냈다. 그런 마당에 <조선일보>가 ‘악귀들’의 행태를 답습하며 그들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기사를 계속 내보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정율성은 헌법으로 봐도 문제없고, 촛불 정신으로 봐도 문제없는, 명실상부한 독립투사다. 북한뿐 아니라 남한의 법제도로 봐도 이 분은 틀림없는 열혈 독립투사다. 그분의 딸을 공식 행사에 초청하는 것은 그래서 문제없는 일이다.
정율성 같은 훌륭한 독립투사를 허무맹랑하게 색깔론을 덧씌워 소개하는 일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폄훼하는 일이다. 북과 나팔로 외적을 물리치고 ‘조선’을 살리고자 애쓰신 분을 ‘6·25 때 중공군’으로 소개한 <조선일보>는 팩트를 제대로 보지 못한 보도를 자행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에 나온 <관보> 1949년 3월 14일자의 광고란에는 다음과 같은 행려사망(行旅死亡)에 관한 내용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1. 본적: 미상 2. 주소: 미상 3. 성별: 여, 성명 나혜석, 연령 53세 4. 인상(人相): 신장 4척 5촌, 두발 장(長), 수족 정상, 입 코 눈 귀 정상, 체격 보통, 기타특징 무(無) 5. 착의(着衣): 고의(古衣) 6. 소지품: 무 7. 사인(死因): 병사 8. 사망장소: 시립자제원(市立慈濟院) 9. 사망년월일: 단기 4281년 12월 10일 하오 8시 30분 취급자 서울시 용산구청장 명완식(明玩植) 단기 4282년 1월 3일
나혜석의 행려사망 사실이 기록된 『관보』 1949년 3월 14일자의 해당 지면
관보의 말미에 겨우 수록된 행려 사망자의 내역까지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는 참으로 의문이지만, 여기에 언급된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 살아간 천재예술가라는 평가를 얻고 있는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이자 여성운동가였던 바로 그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
는 철저하게 여느 사람들의 망각 속에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나마 여기에 기재된 이름 석 자가 아니었더라면 그의 죽음에 관한 이토록 희미한 기록마저 영영 잊힐 뻔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숨진 곳은 ‘시립자제원’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일제시기 의료구호기관이던 경성불교자제원(京城佛敎慈濟院, 원효로 1가 12번지)이었고, 해방 이후에 ‘서울시립 자혜병원’ 시절을 거쳐 1960년 1월 1일에는 시립남부병원(市立南部病院)으로 전환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 병원이 서울중부병원과 합쳐 1977년 7월 2일에 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 이전된 뒤에는 도로확장공사 탓에 부지 일부를 상실한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 원효로 1가 25번지)가 이곳으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자리의 내력이 궁금하여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그 흔적이 저 멀리 1904년 러일전쟁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드러난다.
<용산시가도> (1929)에 나타난 ‘불교자제원’의 위치이다. 바로 인접한 곳에 선립상업학교와 일본인 사찰 서룡사 및 흥국사가 포진한 것이 눈에 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각사등록(各司謄錄)> ‘외부일기(外部日記)’ 1904년 2월 17일자에는 일본공사관의 조회(照會)를 통해 “우리 북진군(北進軍, 일본군)이 내일 18일에 약 2만 명 내외의 병력이 일시 경성에 도착하여 2, 3일 머문 후 발정할 예정이므로 이들이 머물 곳으로 경복궁 안의 사용 무방한 청사를 일시 빌려서 이들 병력의 숙소로 충당”하겠다는 내용이 전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아울러 “일본공사의 알현시 용산에 있는 별영창과 초자제조소(硝子製造所) 및 정미소(精米所) 3곳도 신속히 차용하기로 윤허를 받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서울 인근에 일본군 병력이 대거 밀려들게 되자 당연히 이들이 묵을 공간 확보 문제가 긴급 현안으로 대두되었는데, 이에 따라 한국군 주둔지와 다수의 관공서 또는 학교 터가 징발되어 그들의 숙소로 제공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경성부사(京城府史)> 제1권(1934), 731쪽에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 18일 이후의 입성병(入城兵)에 대해서는 일본인측 가옥으로는 가장 먼저 수용의 여지가 없어졌으므로 한국 측으로부터 용산 별영창(龍山別營倉, 현 원정 3정목 조선서적인쇄회사 내의 옛 건물), 초자제조소(硝子製造所, 경성 원정 1정목 경성불교자제원의 부지 내), 서대문밖 평양병병영(平壤兵兵營, 현 죽첨정 1정목 서대문경찰서 적십자병원 부지 내 일대의 지점), 서소문안 시위제일대대(侍衛第一大隊, 현 서소문정 120번지 총독부 관사 부지의 일부), 통내(統內) 친위제일대대(親衛第一大隊, 현 연지동 전매지국의 부지 내), 동궐 앞 친위 제이대대(親衛第二大隊, 현 운니동 99번지 이왕직분실), 저동 공병대(苧洞 工兵隊, 영락정 1정목 전매국 부지 내)의 각 병영 및 명동 장악원(明洞 掌樂院, 현 황금정 2정목 동척회사 부지의 서남 모서리), 필동 잠업과(筆洞 蠶業課, 현 앵정정 2정목 186번지의 지점) 등의 여
러 장소를 빌려 받아 숙영(宿營)했다.
여기에서 용산 별영창의 위치를 ‘조선서적인쇄회사’라고 적어 놓은 부분은 잘못된 설명이다. 별영창은 원래 조선시대 훈련도감에 속한 군병들의 급료 지급을 맡았던 한강변 창고이며, 한강 조망이 빼어난 것으로 유명했던 읍청루(挹淸樓, 청암동 168번지)라는 누각도 이곳의 구역 내에 함께 있었다. 위의 글에서 ‘원정 3정목’에 있다고 잘못 적어 놓은 것의 정체는 군자감 강감(軍資監江監, 원효로 3가 1번지 일대) 터를 말하며, 이곳에는 용산 전원국(龍山 典圜局)과 총독부 인쇄국에 이어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朝鮮書籍印刷株式會社)를 거쳐 1936년 12월 이후에는 체신이원양성소(遞信吏員養成所)가 들어서게 된다.
앞의 내용에 등장하는 ‘초자제조소’는 대한제국황실에서 필요한 유리창을 조달하기 위해 만든 ‘ 유리제조공장’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조선신문> 1925년 5월 19일자에 게재된 경성불교자제회 실비진료부의 광고 문안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포함된 「한정(韓廷) 고용 외국인 해용(解傭) 처분에 관한 건(1904.5.30)」에 따르면, 유리제조기사로 초빙된 러시아인 화학교사 메이로(Meiro)와 내장원경 이용익(內藏院卿 李容翊)사이에 고용계약이 성립한 것은 1902년 1월 31일의 일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 당시 “대한정부
의 한성(漢城) 및 부근지에 건립될 황실유리창 공역에 투입된 기계검사와 제조 등의 사무”가 그에게 맡겨진 임무였다. 하지만 이 자리는 오래지 않아 러일전쟁의 개시와 더불어 러시아인 기사가 퇴각함에 따라 버려진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고, 이에 일본인 거류민단의 이시이 신(石井信)과 소가 츠도무(曾我勉)가 주축이 되어 한국정부로부터 이곳을 무상 양수하여 전염병자를 위한 한성병원 부속 청파피병원(靑坡避病院)을 설립하였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나중에 이곳에 들어선 것이 바로 ‘경성불교자제원’이었다.
옛 초자제조소 자리에 들어선 ‘경성불교자제회 부설 실비진료소’의 입구 모습이다. (<조선사회사업요람>, 1924)
<매일신보> 1941년 11월 13자에 수록된 행려병인구호기관 ‘불교자제원’에 대한 탐방기사이다.
이 단체는 원래 1908, 9년 무렵 ‘대곡파 본원사 경성별원’, 즉 동본원사(東本願寺, 남산동 3가 33번지)의 경내에 행려병인의 구호를 위해 설립한 것이 시초였으며, 차츰 수용자가 증가하자 1917년 4월 20일에는 경성각파불교사원연합회(京城各派佛敎寺院聯合會)의 성격을 지닌 경성불교자제회(京城佛敎慈濟會)가 성립되어 이곳의 새로운 경영 주체가 되었다. 또한 1921년 7월 1일 이후에는 행려병인의 수용 이외에 일반구료(一般救療)를 목적으로 하는 실비진료소(實費診療所)를 두는 한편 양로구조(養老救助)의 업무도 개설하기에 이른다.
옛 청파피병원 터에 경성불교자제회가 옮겨온 시기에 관한 자료는 <매일신보> 1918년 2월 1일자에 실린 「수용소 준공기(收容所 竣工期)」 제하의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이 조직은 1936년 12월에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그 이름도 ‘경성불교자제원’으로 변경하는데, <조선총독부 관보> 1937년 4월 28일자에 게재된 ‘법인조합등기’ 항목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법인설립 명칭: 재단법인 경성불교자제원 사무소: 경성부 원정 1정목 12번지 목적: 불교의 정신에 기초한 자선구제의 사업을 행함 설립허가 연월일: 소화 11년(1936년) 12월 18일 자산총액: 금 59,792원(圓) 55전(錢) 출자의 방법: 일반 기부 및 기타의 수입 이사의 씨명 주소: 경성부 서사헌정 166번지 이사 카메야마 코오(龜山弘應), 경성부 서사헌정 산4번지의 5 이사 우에노 쐌에이(上野舜頴), 경성부 대화정 3정목 26번지 이사 타케오 라이쇼(嶽尾來尙), 경성부 장사동 182번지 이사 카잔 타이기(華山大義), 경성부 약초정 107번지 이사 고토 쵸신(後藤澄心), 경성부 본정 3정목 50번지 이사 쿠가 지코(久家慈光), 경성부 남산정 3정목 33번지 이사 우에노 코진(上野興仁), 경성부 원정 1정목 18번지 이사 후지 토넨(富士洞然), 경성부 한강통 11번지 이사 카토 칸센(加藤觀穿) 대표이사: 이사장 카메야마 코오(龜山弘應) 여기에 수록된 이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광운사(光雲寺, 고야산 경성별원), 박문사(博文寺), 조계사(曹谿寺), 묘심사(妙心寺), 약초관음당(若草觀音堂, 진종본파 본원사별원), 정토종 개교원(淨土宗 開敎院), 동본원사(東本願寺), 서룡사(瑞龍寺), 용광사(龍光寺) 등 경성 지역에 두루 포진한 일본인 불교사찰들의 주지 또는 포교관리자가 망라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일신보> 1941년 11월 13일자에 수록된 「총후사회사업시설(銃後社會事業施設)의 이모저모 (5) 행려병인 구호, 불교자제원 편」 제하의 탐방기사에는 설립 이래 이곳에서 수용구제를 받은 연인원(延人員)이 21만 740여 명이고, 사망자도 3,540여 명에 달한다고 적고 있다. 또한 이들은 대개 농촌을 떠나 직업을 찾아서 도회지로 나왔으나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거리를 전전하다가 병마로 쓰러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잘 걸리는 병으로는 폐결핵이 40퍼센트, 위장병이 30퍼센트의 순서이고 사망률도 15퍼센트에 달하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나혜석의 경우에도 일제패망기 이후 경성양로원(京城養老院, 청운동 산4-3번지; 청운양로원)과 경성보육원(京城保育院, 옥천동 126번지)의 안양농장, 그리고 공주 마곡사 등지를 떠돌아다닌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끝내 1948년 11월 무렵에 경성불교자제원의 후신(後身)인 ‘시립자제원’에 간신히 정착을 시도하였으나 불과 한 달여 만에 질병으로 인한 최후를 맞이 하였던 것이다.
<동아일보> 1956년 1월 31일자에 수록된 ‘김창룡 저격사건의 현장약도’. 여기에 묘사된 ‘자혜병원’ 바로 앞 사건현장은 도로구조가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지금도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경성불교자제원에 관한 흔적을 찾다보면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별스러운 기록 하나가 있다. 일본군 헌병오장 출신으로 자유당 시기 육군특무부대장으로 악명을 떨친 김창룡(金昌龍, 1916~1956)이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에 저격되어 죽은 곳이 바로 자혜병원(慈惠病院, 시립자제원) 앞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날 아침 ‘원효로 1가 17-5번지’ 자택에서 짚차를 타고 ‘원효로 1가 51번지’ 지점을 지나는 도중에 다른 짚차로 길을 막아선 저격자(옛 부하였던 육군대령 허태영의 지시를 받은 특무부대 출신자들)가 쏜 여러 발의 권총탄에 맞아 피살된 바 있다.
겉으로만 보면 행려병자의 구호기관이 오랜 세월 터를 잡았던 곳으로만 인식되기 십상이지만, 그 내면을 파고들면 이곳 역시 근현대사의 굴곡이 제법 진하게 농축되어 있는 공간임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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