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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정세현 특별대담] Q1. ‘4.27 판문점 선언’, 그날의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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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정세현 특별대담] Q1. ‘4.27 판문점 선언’, 그날의 소회

익명 (미확인) | 화, 2018/06/05- 15:12

[강만길,정세현 특별대담] “4.27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Q.1 – ‘4.27 판문점 선언’, 그날의 소회
주최 :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때 : 2018년 5월 18일 오후 2시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곳 :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
대담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사회 :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 편집장)

※ 팟빵에서 오디오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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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대종교를 중광해 독립운동가들의 스승으로 불렸던 홍암 나철의 일대기인 <나철평전>을 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조현 기자

청산리전투의 김좌진, 봉오동전투의 홍범도,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역사가 신채호,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과 국무령 이상룡, 작사가 이은상, 최초 비행사 안창남, 마라토너 손기정, 이동휘, 정인보, 안희제, 지청천, 이범석, 지석영, 이동녕, 김규식, 신익희…. 독립운동사의 주역인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대종교인으로, 대종교를 부활시킨 스승 홍암 나철(1863~1916)의 대의를 따랐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종교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나철의 삶을 조명한 <나철평전>(꽃자리 펴냄)을 낸 김삼웅(78) 전 독립기념관장을 지난 4일 만났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꼽은 친일부역자 5천명 가운데 종교인이 200여명인데, 대종교인은 한 명도 없었다”며 “그런데도 나철과 2대 교주 김교헌, 청산리전투를 이끈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종사 등 대종교 지도자 3인의 묘소가 아직도 간도 들판에 방치돼 있으니 한민족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통탄했다.

대종교 부활시킨 스승 ‘나철평전’ 펴내
김좌진·홍범도·이회영·신채호 등등
수많은 항일지사들 대부분 ‘대종교인’
“친일부역자 종교인 중엔 한명도 없어”

박정희때 고문 후유증으로 집필 힘들어
“알수록 ‘놀라운 인물’ 전율 느끼며 써”

대종교를 중광한 독립운동 지도자 홍암 나철. <한겨레> 자료사진

“2·8독립선언과 3·1혁명을 촉발한 대한(무오)독립선언은 대종교가 주도했다. 또 3·1혁명 이후 중국 상하이에 세운 임시정부의 의정원 35인 중 28인이 대종교인이다.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 항일투쟁의 주력도 대종교인들이었고, 국학·역사·한글운동도 대종교가 주도했다. 그 뿌리가 나철 대종사다. 독립운동사에서 기억해야 할 첫번째 인물로 꼽힐 만한 나철의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

김 전 관장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온몸을 민족의 재단에 바쳐 신자 10여만명이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고 종단 자체가 산산이 부서져 버린 대종교와 나철을 언급할 때마다 그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지금까지 최제우, 황현, 전봉준, 김개남, 손병희, 안창호, 김성숙, 한용운, 안중근, 김창숙, 여운형, 함석헌, 장준하, 장일순, 송건호, 김대중, 노무현, 신영복 등 줄잡아 40여명의 평전을 썼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타자를 칠 줄 모른다. 오직 손글씨로만 써왔다. 근래 들어서는 손이 많이 떨려 원고 작업이 더욱 어렵다. 박정희 독재 시절 <민주전선>을 발간하면서 끌려가 고문 당한 후유증 때문이다. 떨린 것은 손만이 아니었다. <나철평전>에는 ‘한 놀라운 인간’에 대한 필자의 전율이 스며있다.

나철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 석학 왕석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9살에 과거 급제해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을 맡았다. 33살 때 징세국장에 임명됐으나 사양하고 낙향했다고 한다. 이후 10년간 민족의 뿌리인 단군사상을 기초로 입산수도한 나철은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비밀결사 ‘자신회’를 조직해 을사오적 처단을 주도했다가 1907년 10년 유배형을 받았다. 외딴섬인 전남 신안 지도로 유배를 갔다가 민심을 두려워한 고종의 특사로 석방됐다.

“나철은 일제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조 단군을 구심점으로 삼아야 한다며 단군교를 ‘중광’했다. 중광이란 우리 민족이 믿었던 옛 종교를 되살린다는 것이다. 그러자 기라성 같은 지식인과 우국지사들이 몰려들었다. 일제는 국권침탈 뒤 제일 먼저 단군 관련 책 20여만권을 압수해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밀반출하며 1918년까지 민족말살책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나철은 이런 일제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고 1914년 망명해 백두산 인근 청파호로 본부를 옮겼다. 대종교 신자가 수십만명으로 늘자 일제총독부는 기독교, 불교, 유교만 공인 종교로 인정하고 대종교는 ‘유사종교단체’로 분리해 악명 높은 경무국에서 감시하게 했다. 더 이상 포교가 어렵게 되자 나철은 1916년 일왕과 총독, 신자들에게 글을 남기고 구월산 단군사당에서 순명을 택했다. 그의 죽음 뒤 대종교인들의 항일투쟁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김 전 관장은 “일제 때 수많은 사이비 교주들과 달리 나철은 종교적 위세를 보이지 않았고 대단히 검소하고 서민적이었다. 주검도 상여가 아닌 지게로 옮겨 화장하고, 부고도 돌리지 말고, 제사에도 밥 한그릇 찬 하나만 놓으라고 유언했다”며 “박은식은 추도사에서 그를 ‘민족사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이란 뜻으로 ‘만세의 종사’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최근 여당 국회의원들이 교육이념에서 단군사상의 핵심인 ‘홍익인간’을 빼려는 시도를 했던 것에 대해 “역사 공부를 안한 것인지, 역사의식이 없는 것인지”라며 혀를 찼다. 그는 “목사인 규암 김약연의 용정 명동학교는 기독교학교임에도 교가에 ‘한배검 단군의 자손의 긍지’를 담았고, 교실 뒤엔 예수 사진과 함께 단군 영정을 걸었다. 기독교인 도산 안창호는 평생 단군상을 몸에 지니고,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대규모 단군 집회를 개최했다. 이승만도 1921년 <독립신문>에 ‘한배검은 인류의 스승이셨다’고 썼고, 기독교인 백범 김구도 조선인 치고 대종교인 아닌 사람이 없다고 했다”며 “해방 후 미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홍인인간을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봉사’로 번역해 교육기본이념으로 삼게 한 것도 기독교인 백낙준 박사였다”고 설명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mail protected]

<2021-06-08> 한겨레

☞기사원문: “독립운동 정신적 지주 ‘대종교의 혼’ 아직도 간도 떠도니 통탄스럽죠”

화, 2021/06/15-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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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격전지에서 미군기지 건설용 매립재 채취 추진
일본 정부 “채취 장소 미정…유골 안 들어가도록 눈으로 확인”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소재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 일본 정부는 이 비행장을 대체할 군사 시설을 건설하겠다며 오키나와 헤노코(邊野古) 연안을 매립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제 강점기 희생된 조선인 유골이 섞인 토사가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미군 기지 공사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유해 수습 운동을 벌여 온 일본 시민단체는 한국·미국 유족과 힘을 모아 공사 중단을 촉구할 계획이다.

오키나와 본섬 남부에 있는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같은 섬 중부 헤노코(邊野古) 연안으로 옮기는 사업이 진행 중인데 일본 정부가 공사 계획을 일부 변경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인근 바다에서 매립 공사 등이 진행 중이다. 일본 정부는 후텐마 비행장을 대신할 새로운 기지를 이곳에 건설 중이다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전쟁 희생자 유해가 다량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채취한 토사 등을 매립재로 사용할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일본 방위성은 오키나와의 미군 해병대 기지인 ‘캠프 슈와브’ 앞바다를 매립해 후텐마 기지를 대체할 새 비행장을 만들고 있는데 연약한 지반을 개량하기 위해 매립재 종류 등을 바꾸겠다며 작년 4월 21일 오키나와현에 공사 계획 변경 승인을 신청했다.

7일 연합뉴스가 계획서의 세부 내용을 확인해보니 2차 대전 말기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 현장인 오키나와 본섬 남부 이토만(絲滿)시와 야에세초(八重瀨町)가 매립용 토사 등을 채취할 장소로 기재돼 있었다.

[그래픽]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 공사 매립재 채취 장소 (서울=연합뉴스) 장예진 기자 = [email protected]

오키나와에서는 1945년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격렬한 지상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주민, 일본군, 미군 등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오키나와현 집계)된다. 희생자 중에는 한반도에서 동원된 조선인도 포함된다.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이다. 변경된 공사 계획이 승인되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유해를 수습해 유족에게 돌려주는 운동을 하는 현지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 등은 일본 정부의 공사 계획 변경에 반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토사 등을 어디서 조달할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계획서가 “적정한 조사를 거쳐 채취 장소 등을 결정한다”며 여지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 계획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토만과 야에세가 변경된 계획서에 파쇄된 암석을 채취할 후보지로 명시된 것을 보면 결국 이 지역에서 채취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9년 2월 15일 일본 오키나와(沖繩) 기노자손(宜野座村)의 미군의 옛 민간인 포로수용소 주변 유골 발굴 현장에서 오키나와의 시민단체 ‘가마후야’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 대표가 유골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계획서는 이토만과 야에세에서 파쇄된 암석 3천160만㎥를 채취하는 방안이 기재돼 있다. 이는 오키나와현 내부에서 조달할 파쇄석(4천476만㎥)의 약 70% 해당한다.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가마후야 대표가 올해 3월 단식 투쟁까지 하며 반대에 나서자 기시 노부오(岸信夫) 방위상은 “개발 전에 유골이 없는지 육안으로 사전 조사를 하고 유골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호(壕·구덩이)가 있는 장소는 개발하지 않는 등 유골을 배려하며 사업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맨눈으로 유골 유무를 파악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오랜 기간 방치된 뼈는 전문가가 아니면 식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채취할 토사 등의 양에 비춰보면 유해가 포함됐는지 철저히 확인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을 모집하고 이들과 힘을 합해 일본 정부에 매립 계획 취소를 요구할 계획이다.

한국인 희생자 이름 (오키나와=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오키나와(沖繩)현 이토만(絲滿)시 소재 ‘평화기념(祈念:이뤄지기를 비는 것)공원’에 한국인 전쟁 희생자 이름을 새긴 비석인 각명비(刻銘碑)가 설치돼 있다.(위) 각명비에는 히코산마루 피격 사건으로 희생된 명장모(왼쪽 하단) 씨와 김만두(오른쪽 하단) 씨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이들은 미국 유족 참가자도 모집한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이 현대사 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 씨가 발간한 명부 자료와 자체 조사를 토대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오키나와 전투에 조선인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군무원에 해당)으로 동원됐고 이 가운데 701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이들을 포함하면 실제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이보다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email protected]

<2021-06-07> 연합뉴스

☞기사원문: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관련기사 

☞ 연합뉴스: “피가 스며든 흙으로 軍기지 만드는 건 인도적으로 용납 불가”

화, 2021/06/1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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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임재성ㅣ변호사·사회학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익히 잘 알고 있다.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다 끝난 일인데 피해자들이 왜 소송으로 뒷북을 치냐는 입장. 억지 소송을 대법원이 덜컥 받아주어 한-일 관계가 지금 이 모양으로 파탄 났다는 입장. 동의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하나의 의견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을 넘었다. 지난 10일치 <조선일보>에 실린 주필 칼럼 얘기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한 2012년 대법원 “판결 때문에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현 정권은 여기에 ‘사법농단’이라는 모자를 씌웠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 진보든 보수든, 강제동원 문제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든 범죄를 옹호할 수는 없다. 삼권분립과 재판의 공정성이라는 법치주의의 핵심 가치를 똥물에 빠뜨린 범죄를 찬양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는 그걸 했다.

먼저, 사법농단이라 명명되는 사건이 외교부와 대법원 간의 정상적이고 적법한 소통이었나? 박근혜 정부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싶어 했다.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등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을 위해 청와대 비위를 맞추고자 했지만, 이미 존재하는 대법원 판결을 뒤집기란 쉽지 않았다. 범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법원행정처는 사인 간 분쟁을 해결하는 민사소송임에도 정부 부처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를 신설하고, 그 제도를 이용해 외교부가 강제동원 사건에 의견서를 내면, 이를 계기로 판결을 뒤집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해당 재판부가 아닌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이런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직권남용죄이다. 그리고 해당 소송 일방 당사자인 일본 기업 대리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에게 위 계획, 즉 재판 기밀사항을 누설한다. 명백한 공무상 비밀누설죄이다.

이제부터는 정말 가관이다.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은 김앤장 변호사에게 ‘빨리 프로세스를 시작해야 하니 조속히 의견서를 제출해달라’며 외교부 의견서 제출을 촉구하는 취지의 서면을 제출하라 지시한다. 김앤장 변호사는 그 지시에 따라 서면을 작성했고, 임종헌에게 사전검사도 받았다. 임종헌은 제목과 내용을 친절히 수정해서 돌려보내고, 그 서면은 피고 대리인 김앤장 변호사 명의로 재판에 제출되었다. 이후 외교부에서 제출한 의견서 역시 판사들에 의해 사전에 검토·수정된 것이었다. 판사들이 소송의 일방 당사자와 노골적으로 결탁한 희대의 범죄다.

사법농단 관련 판결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할까? 위 사실은 대부분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객관적 증거로 확인된 내용이고 널리 보도되었다. 특히 공무상 비밀누설죄 부분이 그러하다. <조선일보> 칼럼이 외교부와 대법원이 ‘소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주요 사실관계들을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생략, 즉 사실 왜곡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칼럼의 진짜 문제는 이 범죄를 찬양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외교가 걸린 판결에선 이런 과정이 흔히 있다.” 부디 부탁드린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고위 법관들이 소송 일방 당사자를 비밀리에 만나 ‘이런 서면 내라’, ‘이렇게 써라’ 코치하는지 알려달라. “흔히 있다”고 하셨으니 다수의 사례를 꼭 알려주시라. 그래서 조선일보의 입장은 무엇인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청와대, 외교부, 법원이 결탁한 범죄라도 가능하다는 것인가?

강제동원과 관련된 사법농단 행위는 ‘한-일 간 외교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명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 행위 주체들의 셈법은 꽤 천박했다. 법원행정처는 외교부 입장 반영의 대가로 외교부에 ‘법관 재외공관 파견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법관쯤이나 되어서,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으려는 큰일을 꾸미면서도, 본인들 외국 나갈 자리를 만드는 것에 집착했다. 사법농단의 맨얼굴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부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할 절차를 사유화한 것에 대한 책임이 고초라면, 왜 이렇게 판결이 늦게 나오냐며 ‘공정한 재판’만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신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이 당한 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2021-06-16> 한겨레

☞기사원문: 범죄를 옹호하는 조선일보

금, 2021/06/1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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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1/06/24-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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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우 작가는 인도 델리를 여행하다 그곳에서 한국광복군이 영국군과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있었다. 그곳의 사람과 터를 찍었다.

멕시코에서 고국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김익주 선생의 후손 다빗 킴 씨. ⓒ김동우 제공

대부분 사람들은 ‘국외 독립운동’이란 말에서 만주 벌판을 연상한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이나 김원봉의 의열단이 떠오를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한반도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예컨대 인도나 멕시코 같은 곳에 우리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김동우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기자 출신인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17년 사진 작업을 위해 장기 여행을 계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을 주제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인도 델리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레드포트(Red Fort)에 방문하게 된 그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견한 한국광복군이 이곳에서 영국군과 함께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구한말 한반도와 아무 연관도 없다고 여겼던 장소에서 들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김 작가는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흩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 독립운동사가 미국·멕시코·쿠바 등지에 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 외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다고 할 정도였다.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현지에 정착하게 된 이주자들은 후손을 남겼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사람과 터를 찍었다. 5월18일부터 8월18일까지 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리는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에 전시된 사진들이 그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의 직접적 계기는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다. 1921년 3월 한인 300여 명이 쿠바로 향했다. 이들이 출발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멕시코다. 김동우 작가는 그래서 “쿠바 이민을 이야기하려면 멕시코 이민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1905년 4월 제물포에서 영국 상선을 타고 멕시코로 간 1033명이 북중미 이민의 시초 격이다. 이역만리로 향한 이들 전부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기근을 피하고 돈을 벌려는 목적이 강했다. 1905년 〈황성신문〉에는 이런 이민 광고가 실렸다.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이민자 대부분은 에네켄(Henequen·용설란의 일종, 일명 애니깽) 농장으로 분산배치돼 노예와 같은 노동조건으로 혹사당했다. 멕시코 이민자 일부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기 위해 향한 곳이 쿠바이다.

‘경제적 이유로 건너간 이민자’와 ‘국외 독립운동가’가 늘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둘 다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혹독한 농장 생활을 견딘 이들이 차츰 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쓴 것이다. 독립군 훈련을 위해 군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번 돈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부치는 이도 있었다.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해외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촬영한 김동우 작가. ⓒ시사IN 조남진

아흔 넘은 안창호 선생의 아들 랄프 안

이민자들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김동우 작가는 과거에 나온 언론 인터뷰나 학술자료를 바탕으로 현지 한인회 선교사 등과 접촉했다. 오래된 자료가 대부분이라 허탕 치기 일쑤였다. 국가보훈처에도 문의했으나 ‘개인정보’를 건네는 데에 난색을 표했다. 소재지를 찾아도 문제였다. 한국을 기억하는 이들은 고령이거나 세상을 떠났고, 살아 있는 후손들은 한국과 유대감이 옅었다. “이민 3세대 이후로는 외양이 변한다. 한식을 먹고 한인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보니 점점 현지인과 동화된다. ‘우리 조상이 코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먼 곳에서 왔다고 하니 취재에 반갑게 응하기는 하는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약하다.” 후손들을 촬영한 뒤 김 작가는 인물만 반투명 처리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존재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김 작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 랄프 안(안필영) 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안창호의 ‘아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부터 놀라웠다. 아흔을 넘긴 랄프 안 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김 작가를 만난 랄프 안 씨는 코리아타운에서 갈비탕을 사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안창호)가 독립운동에 앞장서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는 게 김동우 작가가 전한 랄프 안 씨의 말이다. 의병장 민긍호의 직계자손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났다. 이들의 존재가 알려진 건 한국과 옛 소련이 수교를 맺은 이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먼 친척들이 자손으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연금을 수령했다. 직계자손들은 훈장만이라도 받기 위해 한국 정부에 훈장 재교부를 신청했지만, 어렵게 재교부된 훈장은 전달식도 없이 비닐봉지에 담긴 채 전달됐다. 김동우 작가는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집집마다 울먹이며 이런 사정을 호소했다.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 사진은 눈길을 끄는 반면, 이번 전시의 풍경 사진은 상대적으로 맥이 빠진다. 거리나 건물을 찍은 사진은 주의 깊게 들여다보더라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앙상하게 골격만 남은 구조물, 나무와 풀뿐인 벌판도 마찬가지다. 관람객이 느끼는 헛헛함은 김동우 작가 스스로 느낀 것이며, 작업 과정에서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조상들이 토론하고 서성였던 자리, 건물이 있었던 곳에 막상 가보면 멸실된 게 많았다. 나무로 된 집이 다 헐려서 옥수수밭만 남았다면 옥수수밭을 찍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군사학교가 있던 곳에는 시장이 생겼고, 독립운동가들이 사형당한 곳은 소문에 의지해 추정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김 작가는 “수많은 현장을 찾아다니며 가장 많이 마주한 풍경은 공(空)이었다”라고 했다. 시간의 흐름 때문이지만 적극적으로 보존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새벽. 100년 전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김동우 제공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100년 전과 다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썩고 헐리는 인공물과 달리 자연 풍광은 그대로였다. 김 작가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새벽 5시에 맞춰 셔터를 눌렀다.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쿠바 이민자들이 도착한 마나티 항구의 저녁노을, 연해주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초원도 찍었다. 조상들이 본 광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김동우 작가는 당분간 국외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진 작업에 집중할 예정이다. ‘쿠바 이주 100주년’이라는 전시 주제에 맞지 않아 내놓지 못한 사진도 많다고 했다. 특히 중국 지역 독립운동이 그렇다. 김 작가는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동우 작가는 이 일이 “우연처럼 시작된 운명” 같다고 했다. 그는 씁쓸한 독립운동의 후일담을, 거의 냉정할 정도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작업을 당분간 이어갈 예정이다.

이상원 기자

<2021-06-18> 시사인 호수 717

☞기사원문: 미국·멕시코·쿠바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찍다

수, 2021/07/07-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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