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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 일제의 기념물이 그득했던 수난의 공간 – 효창원은 어떻게 효창공원으로 전락하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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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 일제의 기념물이 그득했던 수난의 공간 – 효창원은 어떻게 효창공원으로 전락하게 되었나?

익명 (미확인) | 월, 2018/05/28- 13:45

[식민지 비망록 36]

효창원, 일제의 기념물이 그득했던 수난의 공간
효창원은 어떻게 효창공원으로 전락하게 되었나?

이순우 책임연구원

 

내가 열 살이 될락 말락 할 때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사오 년 전 일이다. 지금은 그곳을 청엽정(靑葉町, 아오바쵸)이라 부르지만은 그때는 연화봉(蓮花峯)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남대문에서 바로 내다보면은 오정포가 놓여 있는 산등성이가 있으니 그 산등성이 이쪽이 연화봉이오, 그 사이에 있는 동리가 역시 연화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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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1927년 11월 23일에 수록된 효창원 봉분과 정자각 주변의 전경사진

 

이것은 ????여명(黎明)????창간호(1925년7월)에수록된나도향(羅稻香,1902~1926)의「벙어리삼룡이」 첫 머리 부분이다. 여기에는 오포대(午砲臺)가 놓인 산등성이 일대를 연화봉이라 일컫는 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매일신보????1936년4월18일자기사에따르면오포대자리는‘청파동1가 97번지 지점’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니까 연화봉은 일견 청파동 뒷산에 해당하는 동네 이름으로 이해되지만, 실상은 만리재를 경계로 삼아 그 이남으로 효창원 구역에 걸쳐 솟아있는 봉우리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효창원은 조선시대 정조의 장자인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가 묻힌 곳으로, 당시의 지명으로는 고양(高陽) 율목동(栗木洞)에 속했다. 이곳에 묘역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용산의 큰길이 묏자리에서 너무 가깝고 작은 산기슭에 막히기는 했으나 자연히 서로 보이는 흠이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사세(事勢)의 편하고 가까운 곳을 구하자면 율목동보다 더 나은 곳은 없다”는 취지로 지금의 자리가 최종 결정되었다. 말하자면 효창원 터가 정해진 것은 정조 임금이 아들의 묘소를 자주 둘러보기에 가장 좋은 지점을 고른 결과물인 셈이다.
문효세자가 세상을 뜬 직후 생모인 의빈성씨(宜嬪成氏, 1753~1786)마저 숨지자 넉 달 후 의빈묘가 효창원 왼쪽 언덕에 조성되었고, 그 이후에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淑儀朴氏, ?~1854)와 그 소생인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1829)의 묘도 모두 이곳에 자리를 잡기에 이른다. 이곳은 처음에 효창묘(孝昌墓)라 하였다가 고종 7년(1870년)에 원(園)으로 승격하여 이를 ‘효창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원’이라는 것은 원래 능(陵)과 상통하는 말이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차츰 국왕의 사친(私親, 친어머니), 대원군,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 원손 등의 묘소를 일컫는 것으로 정착된 표현이다.

 

효창원 구역 내 원묘 설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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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효창원 구역의 최대 영역이 어디까지 뻗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1907년 3월 당시 궁내부대신이 통감부에 보낸 회신내용에 따르면, 그 경계선은 다음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동쪽으로 주교대로(舟橋大路, 청파배다리 큰길)에 이르고,

서쪽으로 공덕리 신촌(孔德里 新村)에 이르고,

남쪽으로 율곡정(栗谷亭) 삼성현(三星峴)에 이르고,

북쪽으로 봉학정(鳳鶴亭)에 이른다. (<경성부사>제1권,1934,987쪽)

 

그런데 청일전쟁 당시 서울 지역에 들어온 일본군대의 사령부가 바로 효창원 구역에 속한 만리창(萬里倉, 효창동 199번지 지점) 일대에 포진하였는데, 이로 인해 효창원 일대의 훼손이 본격화하였다. 그 후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되면서 일본인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자 자연히 그들의 전승지였던 효창원 구역은 일종의 성지(聖地)로까지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청일전쟁 당시 효창원 구내 일본군 주둔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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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다 러일전쟁 직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 병영지가 조성되고 그 배후지역에 일본인 밀집거주지역이 형성되면서 효창원 구역을 자기네 휴양지로 삼으려는 시도도 잇따랐다. 예를 들어, ????황성신문????1908년2월28일자에수록된“[산림청차(山林請借)]용산거주하는일본인공원지를건축하기 위하여 만리창 효창원 대산림(帶山林)을 차여(借與)하라고 일본민단장 후치카미(淵上) 씨가 궁내부 재정정리국(財政整理局)에 청원(請願)하였다더라”는 기사를 통해 이러한 움직임이 진즉부터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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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29년 1월 10일자에는 눈 내린효창원에서 스키 첫 시험주행이 실시되는 광경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효창원에 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은 1921년 12월에 와서 사직단공원 및 훈련원공원의 개설문제와 더불어 본격 거론되었으나 예산관계로 일시 보류되었다가 1924년 8월에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1925년 이후에는 청파동 쪽에서 효창원공원에 이르는 간선도로를 비롯한 부대시설공사가 진행된 바 있다. 공원조성면적은 처음에 이왕직(李王職)으로부터 무상 임대한 25,246평으로 시작되었으나, ????조선총독부관보????1940년3월 12일자에 수록된 총독부 고시 제208호 ‘경성시가지계획공원 결정’에는 효창공원의 전체 면적이 317,000평방미터(약 96,000평)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추가적인 무상임야 대하(貸下)신청이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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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8년 2월 19일자에 수록된 ‘효창공원설계약도’. 여기에는 효창원 구역 내에 아동유원, 야외극장, 경기장, 식물견본원, 풍치연못, 수금(水禽: 물새)사양장, 아동문고, 박물관, 야유회장, 소동물사양장 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매일신보> 1938년 2월 19일자에 수록된 「30만 원 공비 들여 효창원을 대개수(大改修)」 제하의 기사를 보면, 한때 아동 본위의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약 6만 평의 부지에 아동유원지, 야외극장, 야유회장, 경기장에다 분수대와 스케이트장을 겸할 수 있는 풍치지(風致池, 연못) 등을 배치하려 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계획이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 당시에 제시된 설계도면 하나만으로도 일본인들에게 효창원의 위상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에 앞서 효창원에는 느닷없이 ‘골프장’이 들어선 시절도 있었다. ‘효창원 골프코스’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운영하던 조선호텔의 부속골프장 건설계획에 따라 1919년 5월에 착공하여 1921년 6월 1일 57,000평 크기에 9홀 규모(7홀 사용)로 개장되었는데, 이것이 서울지역 최초의 골프장 건립 사례였다. 이곳 효창원 골프장은 효창원공원 건립을 위한 부지 편입문제와 맞물려 1924년 12월 2일에 서울 교외 석관동의 의릉에 ‘청량리 골프코스’가 새로 개장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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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에서 열린 제17회 총독부 주최 기념식수행사(1927년 4월 3일)에서 참석자들이 벚나무(사쿠라)를 심는 광경이 수록된 사진엽서자료.

 

이 시기에 효창원 일대가 곧잘 기념식수행사장으로 사용된 흔적도 두드러진다. 일제가 이른바 ‘한일병합의 대업’을 영구히 기리기 위해 신무천황제(神武天皇祭, 4월 3일)마다 식목행사를 벌인 것이 기념식수일의 유래이다. 총독부가 주관하고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등이 직접 참여하는 식수행사장으로 효창원이 선정된 사례는 1926년, 1927년, 그리고 1929년 이렇게 세 차례나 되었다. 이밖에 경성부에서 주최하는 식목행사도 1930년대 이후 이곳에서 다섯 차례 이상이나 거행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925년 을축대홍수(乙丑大洪水) 때는 한강변 이촌동에 사는 이재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다섯 채의 ‘바라크(임시막사)’ 건물을 효창원 숲속에 건설했던 일도 특기할 만하다. 이와는 별도로 효창원 구역의 수난사와 관련하여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일제가 이 구역을 자신들만의 기념물을 건립하는 공간으로 애용했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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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 1929년 10월에 촬영한 ‘오시마혼성여단 막영지적 기념비’의 모습. 저 멀리 보이는 산자락은 남산이다. (<경성휘보> 제239호,1941년 10월)
아래쪽) 1939년 4월에 촬영한 ‘합리적 비행기 발상지 기념비’의 모습. 오른쪽 뒤로 효창공립보통학교의 건물이 살짝 드러나 있다.

 

1929년 6월에 건립된 ‘오시마혼성여단(大島混成旅團) 막영지적(幕營之跡) 기념비’와 1931년 6월에 건립된 ‘합리비행기 발상지지(合理飛行機發祥之地) 기념비’가 이 사례에 속한다. 앞의 것은 청일전쟁 당시 효창원 만리창 일대에 포진했던 일본군대의 주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효창공원 서쪽 고지에 세웠으며, 뒤의 것은 오시마여단이 주둔하던 때에 제1야전병원부 육군일등조제수(陸軍一等調劑手)이던 니노미야 츄하치(二宮忠八, 1866~1936)가 이곳에서 비행기의 설계를 떠올려 발표했음을 기리기 위해 효창공립보통학교(청파동 3가 115번지 구역)의 경계면에 접한 동쪽 고지에 세웠던 것으로 드러난다.
한편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곳에는 대일본충령현창회(大日本忠靈顯彰會) 경기도지부가 주도하여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가한 일본군 전사자의 유골과 유품을 봉안하기 위한 충령탑(忠靈塔) 건설이 시도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44년 6월 5일에는 효창원 구역 내에서 성대한 지진제(地鎭祭)가 열렸는데, 이 탑의 완공여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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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4년 6월 6일자에는 효창원안에서 거행된 경기도 충령탑지진제 광경이 수록되어 있다.

 

15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의당 한 자리를 지킨 효창원 묘역군이 서삼릉으로 옮겨진 것은 일제 패망을 불과 열 달 가량 앞둔 1944년 10월 9일의 일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달라는 격으로 ‘불경스럽게도’ 효창원 구내의 봉분들을 천장(遷葬)하라는 요구는 일찍이 1920년대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막바지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일본인들에게 효창원 구역 전체를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 시점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껍데기만 남은 효창원 구역, 그리고 그 안에 그득했던 일제의 기념물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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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7/12/2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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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시집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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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시집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사계절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이건 진담이라고//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가기로 결심했다구/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주장하는 일이라고//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그야 하는 수 없지/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사는 거지”

문익환 목사가 1989년 새해를 맞아 쓴 ‘잠꼬대 아닌 잠꼬대’는 많은 이의 가슴을 울렸다. 평양에 가겠다는 문 목사의 포부는 많은 이들에게 분단의 선을 넘는 꿈을 꾸게 했다. 하지만 이 시를 본 어떤 이들도 문 목사가 이런 포부와 다짐을 실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문 목사는 1989년 3월 북한을 방문해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분단의 장벽을 맨몸으로 깼다. 당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문 목사는 “나는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가슴과 눈으로 하는 대화를 하러 왔습니다. 한편이 이기고 한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 왔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문 목사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뜨겁게 포옹을 하며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그것은 민족의 치욕”이라며 절절한 음성으로 호소했다. ‘방북’이라는 말보다는 ‘밀입북’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던 그 시절 분단의 장벽을 넘은 문 목사의 발걸음은 시대를 뛰어넘는 도전이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이후 커지고 커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으로 이어졌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어두웠던 남북 관계를 넘어 지난 4월 판문점 선언을 비롯한 최근의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엔 문 목사의 용기 있는 첫걸음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오랜 어둠을 이기고 한반도에 평화가 다시 찾아온 올해는 문 목사 탄생 100주년(6월1일)을 맞이하는 해이다. 문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잠꼬대 아닌 잠꼬대’ 등 문 목사가 쓴 시들을 모아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란 제목의 시집이 출간됐다. 이 시집엔 문 목사가 생전에 펴낸 ‘새삼스런 하루’(1973), ‘꿈을 비는 마음’(1978),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 ‘두 하늘 한 하늘’(1989), ‘옥중일기’(1991), 다섯 권의 시집과 신문에 발표한 시들 가운데서 고른 70편의 시가 실려 있다.

1부는 시인으로서 면모가 돋보이는 시들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비롯해, 가족에 대한 애틋함, 존재론적 상념 등 개인적 삶의 편린을 담았다. 2부는 ‘전태일’,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 ‘동주야’ 등을 비롯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인물들과 역사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을 모았다. 3부는 남북 분단에 대한 안타까움과 통일에 대한 열망을 바라는 시들로 가득하다. 3대에 걸쳐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헌신한 문 목사네 가족사는 곧 우리나라 근대사이자 현대사이고, 민족운동의 축소판이다. 4부는 종교인으로서 시대와 사회에 대해 느끼는 고뇌를 담은 시들로 민중과 민족의 아픔을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내고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은 문 문사에 대해 “일흔여섯 생애 중 여섯 차례에 걸쳐 11년 2개월을 옥중에서 보냈던 우리 민족의 겸허한 심부름꾼”이고, “우리 시대의 어른이자, 한반도라는 광야를 떠돈 예언자며, 어둡고 거친 파도 넘실대는 동서남 3해의 민족사의 등대이고, 설움 많은 민중의 동무이자, 반민족 반민주 반통일에 맞서는 전선의 척후병”이었다고 말했다. 이 시집엔 이렇게 온몸으로 역사를 살아온 문 목사의 생애와 신앙이 알알이 박혀있다.

시인의 말을 대신해 수록한 첫 시집 후기를 보면 문익환이 시인으로서 길을 걷게 된 경위가 자세히 나와 있다. 1968년부터 신구교 공동 구약 번역책임위원으로 있으면서 성서를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에 힘쓰던 그는 시가 거의 40%인 구약성서를 30여 년 연구하면서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중한 소득은 나 자신의 모습을 밝히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일이오. 구리거울에 비춰 보던 흐릿한 나의 모습을 바람 한 점 없는 숲 속 호수에서 쨋쨋이 보는 느낌이랄까. 이렇게 나 자신의 모습을 찾고 보니, 갈증 같은 것이 생기더군. 나의 모습을 나보다 훨씬 민감한 이 땅의 시인들의 거울에 다시 비춰 보고 싶어지더란 말이오.”

이 시집을 통해 우리는 한국 현대사와 분단의 아픔, 통일의 열망을 문익환 시인의 육성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불과 30여 년 전엔 ‘잠꼬대 아닌 잠꼬대’였던 통일과 평화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오늘 다시 꺼내 읽는 문 목사의 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한한 힘이 되고 있다.

<2018-06-18>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새책]“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통일 시대에 다시 읽는 늦봄 문익환

월, 2018/06/1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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蟻穴前(의혈전)

 

忽入槐安國(홀입괴안국)

宮中謁見王(궁중알현왕)

蒙恩爲駙馬(몽은위부마)

意氣亦揚揚(의기역양양)

 

개미굴 앞에서

 

문득 저 槐安國에 들어가

宮中의 임금 삼가 뵈옵고

은덕을 입어 駙馬가 되니

意氣 또한 썩 揚揚하도다.

 

<時調로 改譯>

 

槐安國에 들어가 宮中의 임금 뵈옵고

크나큰 은덕을 입어 駙馬都尉가 되니

마침내 나의 意氣도 또한 揚揚하도다.

 

*蟻穴: 개미굴 *槐安國: 개미의 서울. 남가일몽(南柯一夢) 참조 *南柯一夢: 꿈과 같이

헛된 한때의 부귀영화를 이르는 말. 중국 唐나라의 순우분(淳于棼)이 술에 취하여

홰나무  남쪽으로  뻗은  가지  밑에서  잠이  들었는데  괴안국(槐安國)의 駙馬가 되어

남가군(南柯郡)을  다스리며  20년 간  榮華를  누리는 꿈을 꾸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괴몽(槐夢). 槐安夢. 南柯夢. 南柯之夢  *謁見: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을 찾아가 뵘.

상알(上謁). 현알(見謁) *蒙恩: 은덕을 입음 *駙馬: 부마도위(駙馬都尉). 임금 사위

에게  주던  칭호  *意氣揚揚: 뜻한  바를  이루어  만족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난 모양.

 

<2018.7.8, 이우식 지음>

일, 2018/07/08-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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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일 연구소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여는역사_역적’시즌 2 방영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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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2월 18일 민족문제연구소 역사전문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_‘역적’시즌 2 >가 시작됩니다.
지난 5월~9월까지 방송한 ‘내일을여는역사’ 시즌1 ‘역적’은 애플에서 2017년 새로 출시된 팟캐스트 중 최다 다운로드 15위(한국지역 순위)에 오를 만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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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18일부터 시작되는 시즌 2는 연구소가 국민TV와 손잡고 오디오뿐 아니라 영상으로도 함께 방영합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 출연진 : 박한용, 노기환, 방학진, 김광진 등

목, 2017/12/1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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