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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 일제의 기념물이 그득했던 수난의 공간 – 효창원은 어떻게 효창공원으로 전락하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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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 일제의 기념물이 그득했던 수난의 공간 – 효창원은 어떻게 효창공원으로 전락하게 되었나?

익명 (미확인) | 월, 2018/05/28- 13:45

[식민지 비망록 36]

효창원, 일제의 기념물이 그득했던 수난의 공간
효창원은 어떻게 효창공원으로 전락하게 되었나?

이순우 책임연구원

 

내가 열 살이 될락 말락 할 때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사오 년 전 일이다. 지금은 그곳을 청엽정(靑葉町, 아오바쵸)이라 부르지만은 그때는 연화봉(蓮花峯)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남대문에서 바로 내다보면은 오정포가 놓여 있는 산등성이가 있으니 그 산등성이 이쪽이 연화봉이오, 그 사이에 있는 동리가 역시 연화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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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1927년 11월 23일에 수록된 효창원 봉분과 정자각 주변의 전경사진

 

이것은 ????여명(黎明)????창간호(1925년7월)에수록된나도향(羅稻香,1902~1926)의「벙어리삼룡이」 첫 머리 부분이다. 여기에는 오포대(午砲臺)가 놓인 산등성이 일대를 연화봉이라 일컫는 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매일신보????1936년4월18일자기사에따르면오포대자리는‘청파동1가 97번지 지점’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니까 연화봉은 일견 청파동 뒷산에 해당하는 동네 이름으로 이해되지만, 실상은 만리재를 경계로 삼아 그 이남으로 효창원 구역에 걸쳐 솟아있는 봉우리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효창원은 조선시대 정조의 장자인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가 묻힌 곳으로, 당시의 지명으로는 고양(高陽) 율목동(栗木洞)에 속했다. 이곳에 묘역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용산의 큰길이 묏자리에서 너무 가깝고 작은 산기슭에 막히기는 했으나 자연히 서로 보이는 흠이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사세(事勢)의 편하고 가까운 곳을 구하자면 율목동보다 더 나은 곳은 없다”는 취지로 지금의 자리가 최종 결정되었다. 말하자면 효창원 터가 정해진 것은 정조 임금이 아들의 묘소를 자주 둘러보기에 가장 좋은 지점을 고른 결과물인 셈이다.
문효세자가 세상을 뜬 직후 생모인 의빈성씨(宜嬪成氏, 1753~1786)마저 숨지자 넉 달 후 의빈묘가 효창원 왼쪽 언덕에 조성되었고, 그 이후에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淑儀朴氏, ?~1854)와 그 소생인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1829)의 묘도 모두 이곳에 자리를 잡기에 이른다. 이곳은 처음에 효창묘(孝昌墓)라 하였다가 고종 7년(1870년)에 원(園)으로 승격하여 이를 ‘효창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원’이라는 것은 원래 능(陵)과 상통하는 말이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차츰 국왕의 사친(私親, 친어머니), 대원군,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 원손 등의 묘소를 일컫는 것으로 정착된 표현이다.

 

효창원 구역 내 원묘 설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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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효창원 구역의 최대 영역이 어디까지 뻗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1907년 3월 당시 궁내부대신이 통감부에 보낸 회신내용에 따르면, 그 경계선은 다음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동쪽으로 주교대로(舟橋大路, 청파배다리 큰길)에 이르고,

서쪽으로 공덕리 신촌(孔德里 新村)에 이르고,

남쪽으로 율곡정(栗谷亭) 삼성현(三星峴)에 이르고,

북쪽으로 봉학정(鳳鶴亭)에 이른다. (<경성부사>제1권,1934,987쪽)

 

그런데 청일전쟁 당시 서울 지역에 들어온 일본군대의 사령부가 바로 효창원 구역에 속한 만리창(萬里倉, 효창동 199번지 지점) 일대에 포진하였는데, 이로 인해 효창원 일대의 훼손이 본격화하였다. 그 후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되면서 일본인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자 자연히 그들의 전승지였던 효창원 구역은 일종의 성지(聖地)로까지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청일전쟁 당시 효창원 구내 일본군 주둔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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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다 러일전쟁 직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 병영지가 조성되고 그 배후지역에 일본인 밀집거주지역이 형성되면서 효창원 구역을 자기네 휴양지로 삼으려는 시도도 잇따랐다. 예를 들어, ????황성신문????1908년2월28일자에수록된“[산림청차(山林請借)]용산거주하는일본인공원지를건축하기 위하여 만리창 효창원 대산림(帶山林)을 차여(借與)하라고 일본민단장 후치카미(淵上) 씨가 궁내부 재정정리국(財政整理局)에 청원(請願)하였다더라”는 기사를 통해 이러한 움직임이 진즉부터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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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29년 1월 10일자에는 눈 내린효창원에서 스키 첫 시험주행이 실시되는 광경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효창원에 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은 1921년 12월에 와서 사직단공원 및 훈련원공원의 개설문제와 더불어 본격 거론되었으나 예산관계로 일시 보류되었다가 1924년 8월에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1925년 이후에는 청파동 쪽에서 효창원공원에 이르는 간선도로를 비롯한 부대시설공사가 진행된 바 있다. 공원조성면적은 처음에 이왕직(李王職)으로부터 무상 임대한 25,246평으로 시작되었으나, ????조선총독부관보????1940년3월 12일자에 수록된 총독부 고시 제208호 ‘경성시가지계획공원 결정’에는 효창공원의 전체 면적이 317,000평방미터(약 96,000평)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추가적인 무상임야 대하(貸下)신청이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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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8년 2월 19일자에 수록된 ‘효창공원설계약도’. 여기에는 효창원 구역 내에 아동유원, 야외극장, 경기장, 식물견본원, 풍치연못, 수금(水禽: 물새)사양장, 아동문고, 박물관, 야유회장, 소동물사양장 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매일신보> 1938년 2월 19일자에 수록된 「30만 원 공비 들여 효창원을 대개수(大改修)」 제하의 기사를 보면, 한때 아동 본위의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약 6만 평의 부지에 아동유원지, 야외극장, 야유회장, 경기장에다 분수대와 스케이트장을 겸할 수 있는 풍치지(風致池, 연못) 등을 배치하려 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계획이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 당시에 제시된 설계도면 하나만으로도 일본인들에게 효창원의 위상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에 앞서 효창원에는 느닷없이 ‘골프장’이 들어선 시절도 있었다. ‘효창원 골프코스’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운영하던 조선호텔의 부속골프장 건설계획에 따라 1919년 5월에 착공하여 1921년 6월 1일 57,000평 크기에 9홀 규모(7홀 사용)로 개장되었는데, 이것이 서울지역 최초의 골프장 건립 사례였다. 이곳 효창원 골프장은 효창원공원 건립을 위한 부지 편입문제와 맞물려 1924년 12월 2일에 서울 교외 석관동의 의릉에 ‘청량리 골프코스’가 새로 개장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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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에서 열린 제17회 총독부 주최 기념식수행사(1927년 4월 3일)에서 참석자들이 벚나무(사쿠라)를 심는 광경이 수록된 사진엽서자료.

 

이 시기에 효창원 일대가 곧잘 기념식수행사장으로 사용된 흔적도 두드러진다. 일제가 이른바 ‘한일병합의 대업’을 영구히 기리기 위해 신무천황제(神武天皇祭, 4월 3일)마다 식목행사를 벌인 것이 기념식수일의 유래이다. 총독부가 주관하고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등이 직접 참여하는 식수행사장으로 효창원이 선정된 사례는 1926년, 1927년, 그리고 1929년 이렇게 세 차례나 되었다. 이밖에 경성부에서 주최하는 식목행사도 1930년대 이후 이곳에서 다섯 차례 이상이나 거행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925년 을축대홍수(乙丑大洪水) 때는 한강변 이촌동에 사는 이재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다섯 채의 ‘바라크(임시막사)’ 건물을 효창원 숲속에 건설했던 일도 특기할 만하다. 이와는 별도로 효창원 구역의 수난사와 관련하여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일제가 이 구역을 자신들만의 기념물을 건립하는 공간으로 애용했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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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 1929년 10월에 촬영한 ‘오시마혼성여단 막영지적 기념비’의 모습. 저 멀리 보이는 산자락은 남산이다. (<경성휘보> 제239호,1941년 10월)
아래쪽) 1939년 4월에 촬영한 ‘합리적 비행기 발상지 기념비’의 모습. 오른쪽 뒤로 효창공립보통학교의 건물이 살짝 드러나 있다.

 

1929년 6월에 건립된 ‘오시마혼성여단(大島混成旅團) 막영지적(幕營之跡) 기념비’와 1931년 6월에 건립된 ‘합리비행기 발상지지(合理飛行機發祥之地) 기념비’가 이 사례에 속한다. 앞의 것은 청일전쟁 당시 효창원 만리창 일대에 포진했던 일본군대의 주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효창공원 서쪽 고지에 세웠으며, 뒤의 것은 오시마여단이 주둔하던 때에 제1야전병원부 육군일등조제수(陸軍一等調劑手)이던 니노미야 츄하치(二宮忠八, 1866~1936)가 이곳에서 비행기의 설계를 떠올려 발표했음을 기리기 위해 효창공립보통학교(청파동 3가 115번지 구역)의 경계면에 접한 동쪽 고지에 세웠던 것으로 드러난다.
한편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곳에는 대일본충령현창회(大日本忠靈顯彰會) 경기도지부가 주도하여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가한 일본군 전사자의 유골과 유품을 봉안하기 위한 충령탑(忠靈塔) 건설이 시도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44년 6월 5일에는 효창원 구역 내에서 성대한 지진제(地鎭祭)가 열렸는데, 이 탑의 완공여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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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4년 6월 6일자에는 효창원안에서 거행된 경기도 충령탑지진제 광경이 수록되어 있다.

 

15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의당 한 자리를 지킨 효창원 묘역군이 서삼릉으로 옮겨진 것은 일제 패망을 불과 열 달 가량 앞둔 1944년 10월 9일의 일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달라는 격으로 ‘불경스럽게도’ 효창원 구내의 봉분들을 천장(遷葬)하라는 요구는 일찍이 1920년대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막바지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일본인들에게 효창원 구역 전체를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 시점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껍데기만 남은 효창원 구역, 그리고 그 안에 그득했던 일제의 기념물들뿐이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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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보자!

도노히라 유코(殿平有子) 일러스트 작가

 

도노히라 유코(殿平有子)

작년 12월, 3년 만에 서울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짧은 방문이었지만 친구이자 가족처럼 지내는 김영환 씨가 활동하고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서울 시내에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시간이 별로 없어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스마트폰 지도를 보여주며 향했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에는 꽤 가파른 비탈길이 있습니다. 상쾌한 날씨여서 다음번엔 지하철로 천천히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가고싶은 곳에 있었습니다.
박물관 입구에는 한글과 영어로 박물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영어로는 ‘Museum of Japanese Colonial History in Korea.
’ 왠지 꾸밈없는 이 이름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일본인들은 이 역사에 대해 정부의 방침에 휘둘리듯 에둘러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역사임에도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고 피해왔습니다. 동시에 100여 년 이상 전에 시작된 이 고통의 역사가 내가 살고 있는시대에 이렇게 교류와 배움의 공간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현관문을 열자 1층 공간에는 학생들로 보이는 단체가 특별전시에 관한 해설을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2층의 상설전시장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도 한국 학생들이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이 전시를 접하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전시 설명은 대부분 한글로 쓰여 있지만, 일본어 가이드북이 있어 참조하면서 순서대로 전시를 둘러볼 수 있습니다.

“일제는 왜 조선을 침략했는가?” 전시공간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 표제. 그 아래설명은 구미를 필두로 세계적인 식민지화와 노예제도 등의 움직임 속에서 일제에 의한 침략이라는 문맥으로 짧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침략의 역사를 일본과 조선이라는 두 나라 사이의만의 문제로 생각하여 그 역사를 접한 우리들 개인까지가 피해와 가해라는 범주로 이분화되어버리는 일이 많은데, 이 설명에서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나누지 않고, 책임의 근본에 있는 구조적인 권력의 시스템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시공간에 빼곡히 전시되어 있는 자료와 유물은 내용으로도 양적으로도 충실합니다. 특히 조선 전역에 수없이 있었던 경찰서에 관한 사진과 문헌이 상세히 전시되어 있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신사(神社)의 설치도 그렇습니다. 일본이 서양을 본받아 폭주한 아시아 침략과정에서 조선에서는 창씨개명과 천황숭배 등 식민지 지배의 기초 작업을 위해 비참하고 비인도적인 방법이 이용되었습니다. 최근에 주변 친구들과 함께 하고 있는 공부 모임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인종차별, 토지약탈, 성차별 등의 폭력을 이용한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관한 문헌을 다소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배운 것을 떠올려보면, 일제의 지배로 인한 인간의 비극은 단지 우연처럼 ‘일어났다’가 아니라 필요한 폭력으로 자본의 발전을 위해 사용되고 지배하는 측과 착취당하는 측의 분단을 명확히 확립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저항을 표현한 사람들은 경찰의 과도한 단속을 받은 것이 자본과 국가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지배의 구조는 지금 사회에도 줄곧 이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자본의 힘이 약해지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자국이 내건 경제대책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져 내셔널리즘적인 사상이 고양되고 외국인과 소수자가 된 사람들에게 책임이 전가됩니다. 전시 후반에는 식민지시대에 목숨을 걸고 일본에 저항한 사람들과 최근의 다양한 운동에 관한 소책자와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저항사(抵抗史)를 접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기억을 전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 내용을 조금 쓰고 싶습니다. 전시 가운데에 ‘한 평으로 체험하는 식민지: 학교・감옥’이란 작은 코너가 있습니다. 낡은 목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벽에는 심문관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어 감옥의 심문실을 재현한 듯합니다. 몇 개의 단추를 누르면 심문내용을 재현하여 녹음한 음성이 흘러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은 3·1운동 당시 잡혀온 사람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어 번역문이 비치되어있어 귀중한 체험을 들을 수 있었는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역시 사람들의 저항의 역사에 가장 마음이 끌리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한국에서 운동사를 연구하고 있는 학생과 박물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박물관 자체는 평가하지만 심문 장면의 그 전시는 약간 지나치지(표현의 지나친 극화) 않은가 말했습니다.

저는 한국어로 흘러나오는 음성을 이해할 수 없어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고, 그 전시가 실제로 무엇이 문제인지 확실히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분명히 사람들의 체험을 제3자가 전하고자 할 때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조금 과장해서 극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심문 장면은 실제로 식민지 시대의 정부기관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연극의 퍼포먼스와 달리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현장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본래 그것이 박물관의 역할이라 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공감이 일어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어떤 표현이 가장 좋은것일까요. 역사로부터 배운 것을 오늘의 운동에 살리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밖에 느낄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박물관에는 이러한 개인의 체험을 접할 수 있는 자료와 구조적 폭력을 분석한 자료가 함께 있어 귀중한 공간이라 생각합니다.
박물관 개관과 운영에 관계한 많은 사람들에게 연대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꼭 다시 가고 싶습니다.


※ 도노히라 유코(殿平有子) 씨는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출신. 1997년 홋카이도 슈마리나이(朱鞠內)에서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을 발굴한 한일공동워크샵(현재 동아시아워크샵)에 참가했고 200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현재는 뉴욕에서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하면서 이민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화, 2020/01/21-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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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강원 영동지역에서는 정말 독립운동을 안 했을까?

김인성 후원회원(MBC강원영동 기자)

 

지난해는 3·1 만세운동 100주년이었습니다. 연초부터 연말까지 그야말로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새로운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며 우리 정부와 나라 곳곳에서 크고 작은 이슈들이 쏟아졌습니다. 언론에서도 의미 있는 보도와 프로그램을 연이어 쏟아냈죠. 저도 라디오 다큐멘터리 ‘기미년 3월 1일 강원영동’을 방송했었고, 11월부터 12월까지 두 달 동안 영동지역의 항일운동에 관한 뉴스를 보도했습니다. 우리나라엔 몇 명의 독립운동가가 있을까요? 아니 몇 명의 독립운동가가 정부로부터 인정받고 있을까요?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2020년 1월 현재 15,825명의 독립운동가가 서훈을 받은, 그러니까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공식 독립운동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구, 김좌진, 안중근, 윤봉길 등 30명이 1962년 가장 높은 훈격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것을 비롯해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까지 7종류의 훈장을 15,825명이 받은 겁니다. 만세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백성이 없었을 텐데 고작 15,000여명만 인정하는 정부의 서훈 정책이 옳은 거냐고 묻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있습니다.(MBC강원영동 ‘뉴스데스크 강원’ 2019년 12월 31일. ‘내년을 영동지역 독립운동사 재정립 원년으로’ 참고) 이렇게 서훈을 받으려면 본인 또는 직계가족이 독립운동 행적을 문서로 입증해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면 소요죄, 보안법, 치안유지법, 출판법 등 특정한 죄목을 적용받았습니다. 따라서 이때 ‘문서’란 바로 체포된 죄목과 어떤 활동으로 체포됐는지를 알 수 있는 일제 검경으로부터 수사를 받은 기록, 기소로 이어져 재판을 받은 뒤 나온 판결문, 그 판결에 따라 형무소에 갇혔던 수형기록,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입증되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공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강원 영동지역은 이렇게 문서로 증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증명해야 할 문서를 생산했을 기관이 함흥과 원산, 그러니까 지금의 북한지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원과 검찰은 함흥지방법원에, 형무소는 함흥과 원산에 있었는데 그렇다보니 현재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독립운동가임을 증명할 문서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동지역에서 가장 거센 항일운동이 펼쳐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양양을 제외하곤 3·1 만세운동 관련 독립운동가가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1990년대 중반에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강릉의 만세운동 기록이 발굴되며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나마 다른 지역의 경우는 지금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양양도 오로지 3·1 만세운동만 알려져 있고, 다른 항일운동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또, 3·1 만세운동도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가 당시 함흥지방법원에 근무하던 일본인 검사 이시카와 노부나가의 수사기록을 10년쯤 전 우연히 일본에서 발굴해 지난해 10월 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발표했습니다. 당시 국내 각종 기관과 일본의 도서관 네트워크 등을 통해 ‘함흥’이란 키워드를 나름의 방식으로 추적하고 있던 저는 ‘3·1 만세운동 100주년, 도쿄에서 함흥까지’란 제목의 이 세미나 개최 소식을 듣고 개인휴가를 내고 찾아가 들었습니다. 그리곤 그 자료에서 양양군 기사문리 만세운동 주동자에 대한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함흥이란 지역이 일제강점기 내내 강력한 항일운동이 이어졌던 곳이어서 발견된 자료에도 대부분 함흥지역의 체포자들에 대한 기록이었지만 딱 한 건, 양양의 기록이 나온 겁니다.

2심 재판인 복심 재판 기록이 경성지방법원에서 나오거나, 서대문형무소에서 수형기록이 나오거나,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확인한 게 아닌 영동지역의 만세운동 주동자에 대한 검거 직후의 수사기록이 발견된 것은 광복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이후 한 달간 여러 가지 데이터 분석과 독립운동가 단체와 후손들에 대한 취재를 이어간 뒤 11월 4일 ‘뉴스데스크 강원’ 시간을 통해 첫 번째 보도를 했고, 이후 다행히도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러시아 연수 과정에 선발돼 러시아 취재를 다녀오게 됐습니다. 그 결과 11월 4일부터 12월 31일 보도까지 모두 16건 보도했습니다. 보도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일본인 검사의 3·1 운동 수사기록 최초 발견 – 2019. 11. 04
2. 일제 검사 수사 자료에 독립운동가 후손 관심 – 2019. 11. 05
3. 영동지역에 독립운동 자료 적은 이유 – 2019. 11. 07
4. 영동지역의 독립유공자 수는 정말 적다! – 2019. 11. 12
5. 독립운동 행적 찾아도 서훈 받기 어려워 – 2019. 11. 14
6. 서대문형무소에서 실마리 찾을 수 있다! – 2019. 11. 21
7. 서대문형무소 수감자의 13.7%만 서훈 – 2019. 11. 22
8. 일제강점기 범죄인명부 전수조사 – 2019. 11. 29
9. 향토사연구소가 지역 독립운동가 발굴 노력 – 2019. 12. 06
10. 해외에서 활약한 강원도 의병 찾아야 – 2019. 12. 13
11. 러시아 연해주의 고려인들 – 2019. 12. 18
12. 러시아의 독립운동가 이범진 흔적 찾기 – 2019. 12. 19
13. 러시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 – 2019. 12. 20
14. 강원도가 고향인 고려인들 – 2019. 12. 26
15. 영동지역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 2019. 12. 27
16. 내년을 영동지역 독립운동史 재정립 원년으로 – 2019. 12. 31

강원 영동지역에서 독립운동가를 새로 찾아내기 위해선 실제로 실행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이 선행돼야 합니다. 정부가 특별히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북한과 일본, 러시아, 중국 등과 이 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합니다. 또, 지역사회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번에 발표된 이시카와 검사의 수사기록을 통해 저는 영동지역의 만세운동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지만 이는 그대로 북한의 입장에선 함흥지역의 항
일운동을 재조명할 수 있는 소중한 사료가 될 것이기 때문에 남북이 협력하면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남북이 힘을 모아 일본과 러시아, 중국의 자료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북한이 이를 원해야 하고, 남북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좋은 환경이어야 한다는 등의 또 다른 전제들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러시아를 통한 독립운동가 발굴을 적극 추진해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원산과 블라디보스토크가 뱃길로 연결돼 있었고, 1860년대부터 이주가 시작돼 연해주에는 많은 우리 국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무장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했습니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가 벌어져 우리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조국과 고향, 우리말과 글을 잊은 채 살게 됐습니다. 광복 이후 서둘러 이 사람들을 찾아나섰어야 했지만 냉전을 거치면서 러시아는 적성국가였기 때문에 당시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한 채 오랜 세
월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도 살고 있지만 국내에도 고려인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그들을 통한 독립운동 역사 발굴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마침 올해는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맺은 지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따라서 양국이 좀 더 적극 나서면 좋겠습니다.
영동지역에선 정말로 독립운동이 없었던 것일까요? 정부와 지역사회, 한국과 주변국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우리 동포들과 국내에 사는 고려인들이 모두 힘을 모으고 머리를 맞대면 좋겠습니다. 백수십 년의 세월을 초월해 힘과 지혜를 모아 그때 그 우리의 처절했던 역사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수, 2020/01/22-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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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조문기 선생 12주기 추모식 거행

 

대전지부(지부장 박해룡)는 2월 5일 독립운동가 조문기(연구소 2대 이사장) 선생의 12주기 추모식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에서 진행했다. 이날 박해룡 대전지부장, 이순옥 부위원장과 대전지부 후원회원 그리고 방학실 기획실장을 비롯한 본부 상근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조문기 선생은 유만수, 강윤국과 더불어 1945년 7월 24일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이다. 이 의거는 경성부 부민관에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이 주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에 사제 시한폭탄 두 개를 설치해 폭발시켜 대회를 무산시킨 사건이다. 조문기 선생은 2001년 이돈명 변호사에 이어 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에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으나 사전 발간 1년 전인 2008년 타계하고 말았다. 정부는 2008년 고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2014년에는 모교인 화성매송초등학교 교정에 회원과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동상(제작 : 김서경 김운성)을 세우기도 했다. 동상과 묘비에는 평소 선생의 어록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 편집부

목, 2020/02/20-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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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소식]

 

오다 치요코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 이사, 박물관 후원금과 감상문 보내와

 

작년 3월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방문했던 평화자료관·쿠사노이에(草の家) 이사 오다 치요코(織田千代子) 님이 최근 사고로 동생을 잃었다. 동생에게 받은 유산 중 일부인 100만 원을 작년 12월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금으로 보내주셨다. 그리고 올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 소감을 바다 건너 편지로 보내오셨다. 그 전문을 아래 소개하고자 한다. •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정리


저는 2019년 2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쿠사노이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
로 회원 12명과 함께 ‘한국 평화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쿠사노이에에서 활동했던 김영환 씨가 있는 식민
지역사박물관을 김영환 씨의 안내로 둘러보았습니다.
이 박물관은 많은 사람들의 기부로 세워졌는데, 훌륭한 5층 건물의 모습에 놀랐습니다. 식민지역사박
물관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 지배했을 때의 자료를 수집, 전시, 소개하여,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실
현하기 위한 연구와 실천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전시되어있는 유물을 보고 놀라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과거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들뿐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한국병합’의
이름으로 침략하여 한국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친일파’라고 불린 사람들의 존재였습니다. 지금까지 ‘친일파’라는 말은 들어본 적
은 있었지만, 특별히 관심도 없었고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비로소 ‘친일파’에 대해 그들이 독립 후 한
국의 입법, 사법, 산업, 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물관을 견학한 감상은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여러 사실을 알았을 때, 일본인으로서 한국과 일
본의 올바른 과거의 역사에 대해 너무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자신
이 부끄러웠고, 가슴이 아파 우울해졌습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어 정
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일본인이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고 슬펐습니다. 앞으로 조금이라도 과거의 역사를 공부해서 알고 싶습니다.


 

금, 2020/02/21-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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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일본 정부에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봉환을 촉구하는 요청서 전달 및 협의 열려

 

1월 21일 일본국회의원회관에서는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보추협)가 일본 시민단체와 함께 일제의 침략전쟁에 군인, 군속으로 동원되어 희생된 한국인 전사자의 유골봉환을 하루 속히 실현하도록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하고 일본 정부 당국자와 유골문제에 관한 협의를 가졌다. 이날 협의에는 보추협의 이희자 대표와 유족 박남순 씨,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이 참가했다.
연구소와 보추협은 일본의 연대단체 ‘전몰자 유골을 가족의 품에 연락회’와 오키나와에서 전사자 유해발굴을 벌이고 있는 ‘가마후야’와 함께 2014년부터 매년 일본 정부에게 한국인 전사자의 조속한 유골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하고 협의를 벌여왔다.
30여 사가 넘는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가 취재경쟁을 벌였으며, 곤도 쇼이치(近藤昭一), 아카미네 세켄(赤嶺政賢) 등 7명의 국회의원도 이날 협의에 함께 참가하여 이 문제에 대한 뜨 거운 관심을 보여줬다.
요청서 전달 뒤에 이루어진 일본 정부(후생성, 외무성) 당국자와의 협의에서는 후생성 당국자로부터 오키나와에서 발굴된 전사자 700위의 유골에 대해 3월말까지 DNA 검사를 위한 검체의 채취가 이루어지고 4월부터 DNA 감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후생성 실무자가 DNA 검체를 채취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시민단체와 국회의원들은 DNA 감정의 성패가 달려있는 검체의 채취가 비전문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며 전문가의 참여를 요구했다. 오키나와에서 희생된 한국인 유족 163명은 한국 정부를 통해 DNA 검사를 요청했다.
또한 참가자들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유골조사에 대해 DNA 감정의 대상이 되는 유골이 너무 적은 상황을 지적하며, 현지에서 실시되고 있는 유골의 화장을 중지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후생성의 회의 자료에 ‘유족들이 화장을 원한다’는 내용이 현지에서의 화장을 하는 명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로부터 거짓으로 유족감정을 들먹인다는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목, 2020/02/20-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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