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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 일제의 기념물이 그득했던 수난의 공간 – 효창원은 어떻게 효창공원으로 전락하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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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 일제의 기념물이 그득했던 수난의 공간 – 효창원은 어떻게 효창공원으로 전락하게 되었나?

익명 (미확인) | 월, 2018/05/28- 13:45

[식민지 비망록 36]

효창원, 일제의 기념물이 그득했던 수난의 공간
효창원은 어떻게 효창공원으로 전락하게 되었나?

이순우 책임연구원

 

내가 열 살이 될락 말락 할 때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사오 년 전 일이다. 지금은 그곳을 청엽정(靑葉町, 아오바쵸)이라 부르지만은 그때는 연화봉(蓮花峯)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남대문에서 바로 내다보면은 오정포가 놓여 있는 산등성이가 있으니 그 산등성이 이쪽이 연화봉이오, 그 사이에 있는 동리가 역시 연화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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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1927년 11월 23일에 수록된 효창원 봉분과 정자각 주변의 전경사진

 

이것은 ????여명(黎明)????창간호(1925년7월)에수록된나도향(羅稻香,1902~1926)의「벙어리삼룡이」 첫 머리 부분이다. 여기에는 오포대(午砲臺)가 놓인 산등성이 일대를 연화봉이라 일컫는 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매일신보????1936년4월18일자기사에따르면오포대자리는‘청파동1가 97번지 지점’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니까 연화봉은 일견 청파동 뒷산에 해당하는 동네 이름으로 이해되지만, 실상은 만리재를 경계로 삼아 그 이남으로 효창원 구역에 걸쳐 솟아있는 봉우리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효창원은 조선시대 정조의 장자인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가 묻힌 곳으로, 당시의 지명으로는 고양(高陽) 율목동(栗木洞)에 속했다. 이곳에 묘역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용산의 큰길이 묏자리에서 너무 가깝고 작은 산기슭에 막히기는 했으나 자연히 서로 보이는 흠이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사세(事勢)의 편하고 가까운 곳을 구하자면 율목동보다 더 나은 곳은 없다”는 취지로 지금의 자리가 최종 결정되었다. 말하자면 효창원 터가 정해진 것은 정조 임금이 아들의 묘소를 자주 둘러보기에 가장 좋은 지점을 고른 결과물인 셈이다.
문효세자가 세상을 뜬 직후 생모인 의빈성씨(宜嬪成氏, 1753~1786)마저 숨지자 넉 달 후 의빈묘가 효창원 왼쪽 언덕에 조성되었고, 그 이후에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淑儀朴氏, ?~1854)와 그 소생인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1829)의 묘도 모두 이곳에 자리를 잡기에 이른다. 이곳은 처음에 효창묘(孝昌墓)라 하였다가 고종 7년(1870년)에 원(園)으로 승격하여 이를 ‘효창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원’이라는 것은 원래 능(陵)과 상통하는 말이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차츰 국왕의 사친(私親, 친어머니), 대원군,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 원손 등의 묘소를 일컫는 것으로 정착된 표현이다.

 

효창원 구역 내 원묘 설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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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효창원 구역의 최대 영역이 어디까지 뻗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1907년 3월 당시 궁내부대신이 통감부에 보낸 회신내용에 따르면, 그 경계선은 다음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동쪽으로 주교대로(舟橋大路, 청파배다리 큰길)에 이르고,

서쪽으로 공덕리 신촌(孔德里 新村)에 이르고,

남쪽으로 율곡정(栗谷亭) 삼성현(三星峴)에 이르고,

북쪽으로 봉학정(鳳鶴亭)에 이른다. (<경성부사>제1권,1934,987쪽)

 

그런데 청일전쟁 당시 서울 지역에 들어온 일본군대의 사령부가 바로 효창원 구역에 속한 만리창(萬里倉, 효창동 199번지 지점) 일대에 포진하였는데, 이로 인해 효창원 일대의 훼손이 본격화하였다. 그 후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되면서 일본인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자 자연히 그들의 전승지였던 효창원 구역은 일종의 성지(聖地)로까지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청일전쟁 당시 효창원 구내 일본군 주둔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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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다 러일전쟁 직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 병영지가 조성되고 그 배후지역에 일본인 밀집거주지역이 형성되면서 효창원 구역을 자기네 휴양지로 삼으려는 시도도 잇따랐다. 예를 들어, ????황성신문????1908년2월28일자에수록된“[산림청차(山林請借)]용산거주하는일본인공원지를건축하기 위하여 만리창 효창원 대산림(帶山林)을 차여(借與)하라고 일본민단장 후치카미(淵上) 씨가 궁내부 재정정리국(財政整理局)에 청원(請願)하였다더라”는 기사를 통해 이러한 움직임이 진즉부터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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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29년 1월 10일자에는 눈 내린효창원에서 스키 첫 시험주행이 실시되는 광경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효창원에 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은 1921년 12월에 와서 사직단공원 및 훈련원공원의 개설문제와 더불어 본격 거론되었으나 예산관계로 일시 보류되었다가 1924년 8월에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1925년 이후에는 청파동 쪽에서 효창원공원에 이르는 간선도로를 비롯한 부대시설공사가 진행된 바 있다. 공원조성면적은 처음에 이왕직(李王職)으로부터 무상 임대한 25,246평으로 시작되었으나, ????조선총독부관보????1940년3월 12일자에 수록된 총독부 고시 제208호 ‘경성시가지계획공원 결정’에는 효창공원의 전체 면적이 317,000평방미터(약 96,000평)로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추가적인 무상임야 대하(貸下)신청이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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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8년 2월 19일자에 수록된 ‘효창공원설계약도’. 여기에는 효창원 구역 내에 아동유원, 야외극장, 경기장, 식물견본원, 풍치연못, 수금(水禽: 물새)사양장, 아동문고, 박물관, 야유회장, 소동물사양장 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매일신보> 1938년 2월 19일자에 수록된 「30만 원 공비 들여 효창원을 대개수(大改修)」 제하의 기사를 보면, 한때 아동 본위의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약 6만 평의 부지에 아동유원지, 야외극장, 야유회장, 경기장에다 분수대와 스케이트장을 겸할 수 있는 풍치지(風致池, 연못) 등을 배치하려 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계획이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 당시에 제시된 설계도면 하나만으로도 일본인들에게 효창원의 위상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에 앞서 효창원에는 느닷없이 ‘골프장’이 들어선 시절도 있었다. ‘효창원 골프코스’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운영하던 조선호텔의 부속골프장 건설계획에 따라 1919년 5월에 착공하여 1921년 6월 1일 57,000평 크기에 9홀 규모(7홀 사용)로 개장되었는데, 이것이 서울지역 최초의 골프장 건립 사례였다. 이곳 효창원 골프장은 효창원공원 건립을 위한 부지 편입문제와 맞물려 1924년 12월 2일에 서울 교외 석관동의 의릉에 ‘청량리 골프코스’가 새로 개장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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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에서 열린 제17회 총독부 주최 기념식수행사(1927년 4월 3일)에서 참석자들이 벚나무(사쿠라)를 심는 광경이 수록된 사진엽서자료.

 

이 시기에 효창원 일대가 곧잘 기념식수행사장으로 사용된 흔적도 두드러진다. 일제가 이른바 ‘한일병합의 대업’을 영구히 기리기 위해 신무천황제(神武天皇祭, 4월 3일)마다 식목행사를 벌인 것이 기념식수일의 유래이다. 총독부가 주관하고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등이 직접 참여하는 식수행사장으로 효창원이 선정된 사례는 1926년, 1927년, 그리고 1929년 이렇게 세 차례나 되었다. 이밖에 경성부에서 주최하는 식목행사도 1930년대 이후 이곳에서 다섯 차례 이상이나 거행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925년 을축대홍수(乙丑大洪水) 때는 한강변 이촌동에 사는 이재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다섯 채의 ‘바라크(임시막사)’ 건물을 효창원 숲속에 건설했던 일도 특기할 만하다. 이와는 별도로 효창원 구역의 수난사와 관련하여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일제가 이 구역을 자신들만의 기념물을 건립하는 공간으로 애용했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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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 1929년 10월에 촬영한 ‘오시마혼성여단 막영지적 기념비’의 모습. 저 멀리 보이는 산자락은 남산이다. (<경성휘보> 제239호,1941년 10월)
아래쪽) 1939년 4월에 촬영한 ‘합리적 비행기 발상지 기념비’의 모습. 오른쪽 뒤로 효창공립보통학교의 건물이 살짝 드러나 있다.

 

1929년 6월에 건립된 ‘오시마혼성여단(大島混成旅團) 막영지적(幕營之跡) 기념비’와 1931년 6월에 건립된 ‘합리비행기 발상지지(合理飛行機發祥之地) 기념비’가 이 사례에 속한다. 앞의 것은 청일전쟁 당시 효창원 만리창 일대에 포진했던 일본군대의 주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효창공원 서쪽 고지에 세웠으며, 뒤의 것은 오시마여단이 주둔하던 때에 제1야전병원부 육군일등조제수(陸軍一等調劑手)이던 니노미야 츄하치(二宮忠八, 1866~1936)가 이곳에서 비행기의 설계를 떠올려 발표했음을 기리기 위해 효창공립보통학교(청파동 3가 115번지 구역)의 경계면에 접한 동쪽 고지에 세웠던 것으로 드러난다.
한편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곳에는 대일본충령현창회(大日本忠靈顯彰會) 경기도지부가 주도하여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가한 일본군 전사자의 유골과 유품을 봉안하기 위한 충령탑(忠靈塔) 건설이 시도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44년 6월 5일에는 효창원 구역 내에서 성대한 지진제(地鎭祭)가 열렸는데, 이 탑의 완공여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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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4년 6월 6일자에는 효창원안에서 거행된 경기도 충령탑지진제 광경이 수록되어 있다.

 

15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의당 한 자리를 지킨 효창원 묘역군이 서삼릉으로 옮겨진 것은 일제 패망을 불과 열 달 가량 앞둔 1944년 10월 9일의 일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달라는 격으로 ‘불경스럽게도’ 효창원 구내의 봉분들을 천장(遷葬)하라는 요구는 일찍이 1920년대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막바지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일본인들에게 효창원 구역 전체를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 시점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껍데기만 남은 효창원 구역, 그리고 그 안에 그득했던 일제의 기념물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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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개막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이 9월 25일 개막하였다. 올해는 역사적인 사월혁명이 일어난 지 60주년 되는 해이다. 이번 전시는 예기치 않았던 코로나-19 상황으로 근현대사기념관이 장기적으로 휴관하여 오랜기간 미루어졌지만 민주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1960년 4월을 기억하기 위하여 가을의 시작과 함께 전시를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특별전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4월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 4월혁명의 진행과정, 5·16군사쿠데타로 인한 혁명의 좌절, 그리고 문화예술인들이 민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4월혁명을 어떠한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켰는지 보여주고 있다.
제1부 〈우상의 시대-‘국부’가 된 독재자〉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여 1948년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이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어떻게 이승만을 ‘국부’로 우상화 하였는지 보여준다. 당시 이승만 우상화의 도구가 된 〈대한뉴스〉 영상들과 다양한 사료들은 독재정권을 노골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제2부 〈구호로 보는 사월혁명〉은 “학원에 자유를 달라”고 외치던 2·28대구학생의거와 “3·15선거는 불법이다”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라”고 외치던 1차 마산의거를 지나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 등의 정권타도 구호와 함께 4월혁명의 반독재투쟁을 보여준다. 그리고 4월혁명 이후 “한미경제협정 결사반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등 사회변혁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연표의 시대순에 따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4월혁명 당시의 현장감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함께 만나 볼 수 있다.
제3부 〈사월 그날, 이후〉에서는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 26일 이승만의 하야로 ‘승리의 화요일’로 바뀐 이후 민중들의 혁명정신을 되살리려 한 변혁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7·29총선으로 집권한 민주당이 4월혁명의 이념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자 대두한 혁명세력의 저항과 변혁운동 등이 5·16군사쿠데타 세력의 철저한 탄압으로 ‘미완의 혁명’이 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유물로는 4월혁명 이후 만들어진 많은 단체들이 어떠한 목소리를 내려하였는지 보여주는 격문이 실물자료로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제4부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에서는 4월혁명이 문학과 예술에 어떠한 역사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는지 볼 수 있는 공간이다. 4월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혁명정신이 퇴색하는 상황에서 자기반성과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조지훈, 김수영, 신동엽 등 시인의 노래를 통해 함께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영화와 대중가요에서 4월혁명 전후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당시의 음반과 출판물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북한에서 남한의 4월혁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북한자료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번 특별전시는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11월 15일까지 사전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으며 VR전시로도 제작 중이어서 10월 말부터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특별전을 통해 60년 전 앞선 세대가 피흘리며 쟁취하고자 했던 자유, 민주, 평등의 가치가 무엇인지 마음속에 새겨보는 뜻깊은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수, 2020/11/1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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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62]

도로원표는 왜 칭경기념비전 앞에 놓여 있을까?
일제강점기에 모든 길은 ‘황토현광장’으로 통했다

이순우 책임연구원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사라진 옛 문화유적지를 알리기 위해 서울시가 처음 10개의 표석(標石)을 설치한 것이 지난 1985년 10월 30일의 일이었다. 이 숫자는 세월이 흐르면서 꾸준히 증가하여 지금은 시내 곳곳에 대략 300여 개가 넘는 표석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근대시기 신문사 터와 관련한 것도 다섯 개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독립신문사 터’ 표석은 최초에 설치된 10개의 표석군에 포함되어 정동 배재학당 구내에 자리하였고, 그 후에 황성신문(2005년), 조선일보(2005년), 동아일보(2006년), 대한 매일신보(2007년)의 표석도 차례대로 추가되었다. 다만, 독립신문사의 경우 2014년에 이르러 원위치 재고증 문제가 불거지면서 옛 독일영사관 자리에 해당하는 서울시립미술관 앞뜰에 새로운 표석으로 교체되어 설치된 상태이다.

 

근대 시기 신문사 창간사옥 터 관련 표지석 설치 현황

그런데 이들 신문사는 사옥의 위치를 여러 군데 옮겨 다닌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그 가운데 어느 장소에 표석을 설치하는지가 간혹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논란을 피하고자 대개는 창간사옥(創刊社屋)을 기준으로 하는 방식을 따르는 것이 보통이며, 실제로 표석 표면에는 ‘무슨무슨 신문 창간사옥 터’라는 표제가 즐겨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황성신문의 경우는 예외였다.
현재 ‘황성신문(皇城新聞) 터’ 표석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5번 출구의 계단 바로 옆 도로를 등진 자리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이 신문사의 사옥이 있었다고 하는 ‘종로 백목전 후곡전 면주전도가(鍾路 白木廛 後谷 前 綿紬廛都家)’ 터와 인접한 지점이다. 서울시에서 이 표석을 세운 때가 2005년 12월이라 하였으니, 필시 ‘을사조약 100년’을 되새기는 뜻에서 만들어진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창간사옥도 아닌 장소에 구태여 표석이 설치된 까닭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의 산실이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과 직접 관련이 있다. 그런데 신문사 사옥 자체의 이동 연혁을 살펴보면, 황성신문사는 창간 이후 무려 4차례나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고 더구나 현재 표석이 설치된 자리는 4번째이자 마지막 사옥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황성신문> 1898년 9월 5일자 ‘창간호’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이 신문사가 처음 자리한 곳은 ‘중서 징청방 황토현 제27통 7호 전 우순청(中署 澄淸坊 黃土峴 第二十七統 七戶 前 右巡廳)’이었다.
‘황토현(황토마루)’은 지금의 광화문네거리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며, ‘우순청’은 한성부 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구역의 순라(巡邏)를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여기에서 보듯이 황성신문사는 옛 우순청 건물을 빌려 사용하였으나 그 이후 3년이 지나 이곳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황성신문> 1902년 9월 10일자에 게재된 ‘사고(社告)’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왼쪽) <황성신문< 1902년 9월 10일자에는 조야송축소에서 추진하는 칭경기념비의 건립장소로 황성신문사 자리(옛 우순청터)가 선정되어 다른 곳으로 신문사 사무소를 옮긴다는 내용의 사고가 수록되어 있다. (오른쪽) 황성신문사가 창간사옥으로 빌려 사용하고 있던 옛 우순청 건물을 헐어내고 1903년 9월 2일에 완성된 칭경기념비와 기념비전의 모습이다. 앞쪽에 보이는 돌문이 ‘만세문’이다.

 

본사(本社)를 조야송축소(朝野頌祝所)에서 기념비(紀念碑)를 수립차(竪立次) 훼철(毁撤)하기로 본사 임시사무소(臨時事務所)를 송교 동대로 남일가(松橋 東大路 南一家)로 이정(移定)하고 본 신문은 내(來) 11일부터 부득이 정간(停刊)하였다가 본사를 하처(何處)든지 확정한 후에 계속 발간하겠사오니 제군자(諸君子)는 조량(照亮).

 

여기에 나오는 ‘기념비’는 1902년에 해당하는 고종황제의 등극 40년과 보령(寶齡) 망육순(望六旬, 51세)을 기리는 칭경예식(稱慶禮式)과 관련하여 중흥송덕(中興頌德)의 내용을 담아 1903년 9월 2일에 완공된 비석이다. 이때 현직 고위관리가 중심이 된 관주도 성격의 조야송축소(朝野頌祝所)에 의해 기념비의 건립장소로 황토현에 있는 기로소(耆老所, 세종로 149번지)의 남쪽 옛 우순청(右巡廳, 세종로 142번지) 자리가 선택되었으므로 당시 이 건물을 빌려 사용하던 황성신문사는 이곳에서 퇴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비석의 전자(篆字)는 황태자(순종)의 글씨이며, 비문은 의정부 의정 윤용선(尹容善)이 짓고 원수부 회계국총장 민병석(閔丙奭)이 썼다. 비각의 전면에는 ‘기념비전(紀念碑殿)’이라는 편액이 걸렸는데, 이 글씨 역시 예필(睿筆)이라고 하여 황태자가 1902년 9월에 쓴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로쪽 전면에 조성된 돌문에는 영왕(英王, 영친왕)이 6세에 썼다는 ‘만세문(萬歲門)’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고, 이곳과 이어진 벽돌담장에는 ‘성수만세(聖壽萬歲)’라는 글자문양이 만들어져 있었다.

(왼쪽)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11일자에 실린 시가지원표 위치 및 1, 2등 도로표 가운데 ‘경성부’ 관련 내용이다. 여길 보면 최초 시가지원표의 위치가 ‘광화문통 황토현광장’으로 설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자리는 종로와 광화문통이 교차하는 지점을 가리킨다. (오른쪽)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월 21일자에는 정무총감이 각도장관에게 ‘이정원표’를 제작 설치할 것을 알리는 ‘관통첩’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 원표는 3미터 정도의 소나무 사각기둥에 페인트를 칠하여 거리를 표시하는 것으로 제작양식이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광화문네거리의 북동쪽 모서리에 자리한 칭경기념비전(稱慶紀念碑殿)의 건립내력이다. 그런데 이 자리는 이 비석 말고도 일제강점기에 추가된 또 다른 공간적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이곳이 바로 ‘시가지원표(市街地元標)’ 또는 ‘도로원표(道路元標)’의 설치장소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11일자에 수록된 ‘조선총독부 고시 제135호’를 통해 전국 각지 10개 도시에 대해 시가지원표의 위치와 일등 및 이등도로의 구간이 처음으로 지정되었는데, 이때 경성지역에는 “광화문통 황토현광장(光化門通 黃土峴廣場)”이 원표 위치로 선정되었다. 이에 따라 부산, 목포, 인천, 의주, 원산, 양양 등 사방팔방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는 이곳 시발점인 ‘황토현광장’으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총독부 고시 제135호(1914.4.11)에 의한 주요 도시 시가지원표 위치지정내역

 

이와 아울러 해를 바꿔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월 21일자에 수록된 ‘관통첩(官通牒) 제18호’에는 정무총감이 각도장관에게 시가지 원표로 지정된 자리에다 ‘이정원표(里程元標)’를 세울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1. 원표에는 경성, 관할도청 소재지 및 부근의 주요한 시읍(市邑) 또는 항진(港津)에 이르는 이정(里程)을 기재할 것.
2. 이정(里程)은 원표간의 거리에 따를 것. 단, 원표의 건설이 없는 시읍과의 거리는 그 시읍의 중앙부분에 있어서 적당한 지점을 선정하여 그 지점과의 거리에 따를 것.
3. 표주(標柱)는 지방청(地方廳), 잡급급잡비(雜給及雜費) 중에 ‘잡비’로써 건설할 것.
4. 표주(標柱)의 촌법(寸法)은 1척각(尺角, 사방 1자), 지상(地上) 약 10척(尺, 3.03미터)으로 십분 건조(十分 乾燥)한 송재(松材)를 사용하고 뼁키칠(ペンキ塗)을 할 것. 단, 현재 원표 위치에 건설된 표주로서 이에 맞지 않는 것은 건체(建替)할 때에 개정(改正)할 것.
5. 원표서식(元標書式)은 좌(左)의 예(例)에 따를 것.

 

이 내용에 따르면 최초로 설치된 ‘이정원표’는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소나무 기둥으로 만들어 여기에 페인트칠을 하여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설치된 ‘이정원표’의 실물이 궁금하여 여러 사진자료를 뒤져보았으나 당최 그 흔적이 눈에 띄질 않더니, 어찌어찌 간신히 하나 찾아낸 것이 광화문 칭경기념비전 일대의 거리 풍경을 담은 사진엽서이다.

 

광화문 칭경기념비전 주변의 거리풍경이 담긴 사진엽서이며, 이것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확인된 ‘이정원표’의 모습이 담긴 사진자료로 평가된다. 이 엽서의 오른쪽 모서리 부분을 확대해 보면 경계부분에 간신히 ‘이정원표’의 실물이 포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왼쪽) <조선일보> 1935년 12월 5일자에 수록된 겨울 풍경 스케치 사진에 우연하게도 그때 막 제작 설치한 ‘도로원표’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이것 역시 일제강점기 당시에 도로원표의 모습이 담긴 유일한 사진자료이다. (오른쪽) 현재 칭경기념비전 앞쪽에 남아 있는 석재 도로원표의 모습이다. 제작시기를 알려주는 후면의 글씨는 깎여 나갔으나, 다행히도 이것과 똑같은 도로원표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하나 더 남아 있어서, 이를 통해 “소화 10년(1935년) 5월 건설”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 무렵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엽서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그렇게 찾으려고 했던 ‘표주’의 모습이 아슬아슬하게 경계지점 바로 안쪽에 포착되어 있는 것이 퍼뜩 눈에 띈다. 하얀색 나무기둥에 ‘이정원표(里程元標)’라는 글씨를 또렷이 새겨놓은 형태가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월 21일자에 그려놓은 서식과 그대로 닮아 있다. 어쨌거나 이 엽서에 담긴 광경은 이정원표의 설치지점이 처음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황토현광장의 중앙이 아니라 기념비전의 옆쪽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 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기념비전 앞쪽에 남아있는 돌로 만든 시가지원표는 언제 처음 등장한 것일까?
우선 현존하는 실물을 살펴보면 2단 높이로 쌓아 올린 표석의 전면에 ‘도로원표(道路元標)’라고 새긴 글자가 또렷하고, 양 측면에는 각각 북부지역 9개 도시 및 남부지역 9개 도시와의 거리가 천(粁, 킬로미터) 단위로 적혀 있는 것이 확인된다. 뒷면에는 원래 설치시기를 새겨놓은 부분이 있었으나 지금은 해당 구절이 완전히 깎여나간 상태이므로 아쉽게도 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리고 전면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진 것도 눈에 띈다.
元標眞位置 自本標中心 距離五五米 方向南六九 度一三分西 (원표의 진짜 위치는 이 표석의 중심으로부터 55미터의 거리이며, 방향은 남서쪽 69도 13분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위치는 종로와 세종로가 교차하는 지점이며, 황토현광장의 중심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관보에 고시된 원표의 지정위치는 교차로의 한 가운데이지만 교통의 편의상 도로원표는 옆으로 비껴난 기념비전의 앞에 따로 설치해둔 것이라는 얘기인 셈이다. 
그런데 비록 도로원표의 뒷면이 깎여나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내용을 파악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희한하게도 이것과 똑같은 또 하나의 도로원표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연유로 똑같은 모양과 내용의 도로원표가 둘씩이나 존재하는 것인지, 또 어떤 경위로 어디에서 수습되어 이곳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어쨌건 이곳에 남아 있는 쌍둥이 도로원표를 통해 이 원표 자체는 “소화10년(1935년) 5월 건설(建設)”된 사실은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어느 때인가 옛 신문을 뒤적이다가 <조선일보> 1935년 12월 5일자에 겨울 풍경을 스케치한 보도 사진에서 기념비전 앞에 만들어놓은 도로원표의 모습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채록된 유일한 도로원표의 사진자료가 아닌가 하는데, 이를 통해 나무기둥 이정원표를 대체하여 돌로 만든 도로원표가 새로 등장한 때가 최소한 1935년 이전이었다는 사실은 진즉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에 일제가 창안한 새로운 개념의 하나는 바로 국도(國道)였다. 1938년 4월 4일에 제정된 ‘제령(制令) 제15호 조선도로령(朝鮮道路令)’에 따르면, 도로는 국도, 지방도, 부도(府道), 읍면도(邑面道) 등의 4종류로 나뉘고 이 가운데 국도는 다음 각호의 하나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선총독이 이를 인정하는 노선으로 정해졌다.

1. 경성부에서 도청소재지, 사단사령부 소재지, 여단사령부 소재지, 요새사령부 소재지, 요항부(要港部) 소재지 또는 개항(開港)에 이르는 노선.
2. 도청소재지, 개항 또는 추요지(樞要地), 비행장 혹은 철도정거장 상호를 연락하는 노선.
3. 군사상 중요한 노선.
4. 경제상 중요한 노선.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국도라는 개념의 설정은 다분히 긴급한 군사적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38년 5월 7일자에 수록된 「일등도로(一等道路)는 국도(國道)로, 등외선(等外線)도 개수 승격, 비상시하(非常時下) 경기(京畿)의 각등도로망(各等道路網) 대경성중심(大京城中心)으로 확충」 제하의 기사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얼마 전 총독부로부터 공포된 조선도로령(朝鮮道路令)은 그 실시를 5월 1일부터 하기로 하였던 것을 연기하여 전조선적(全朝鮮的)으로 도로망의 조사를 급속히 하고 있는데 경기도에서도 이 도로령 실시를 앞두고 도내 전반에 긍(亘)한 도로조사를 급속히 하고 있다. …… 더욱이 국제도시 대경성을 중심으로 각군부(各郡府)에 방사선식(放射線式)으로 관통되어 있는 도로망을 차제에 더욱 한번 확충 강화하여 비상시하의 통운(通運)을 원활(圓滑)케 할 터이며 특히 비상시하의 자원개발(資源開發)에 도로가 가진 바 사명을 다하게 하도록 도로정책에 대한 적극책을 취하리라고 한다. (하략)

이러한 조치에 따라 <조선총독부관보> 1938년 12월 1일자에 게재된 ‘총독부 고시 제956호’를 통해 전국 각지에 거미줄처럼 얽힌 95개에 달하는 국도노선이 처음으로 인정 공포되었다. 이들 가운데 경성(京城, 도로원표)을 기점으로 하는 노선만을 간추려보면, 부산선(1호), 신의주선(2호), 목포선(3호), 웅기선(4호), 청주선(5호), 춘천선(6호), 해주선(7호), 진해선(8호), 인천선(9호), 군산선(10호), 여수선(11호), 송정리선(36호), 경성비행장선(37호), 강릉선(62호) 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런데 여길 보면 우리가 익히 아는 국도 1호선이라든가 국도 4호선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노선이 완전히 다른 것이 눈에 띈다. 알고 보니 해방 이후 1963년 2월 5일에 이르러 ‘각령 제1191호 1급국도와 2급국도의 노선지정의 건’이란 것이 있었고, 다시 1971년 8월 31일에 이르러 ‘대통령령 제5771호 일반국도노선지정령’이 공포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총독부관보> 1938년 12월 1일자에 실린 최초의 국도 노선 지정 내역이다. 이러한 국도노선 지정은 표면상으로 조선도로령의 제정에 따른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전시체제기라는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이에 대응하기 위한 도로망 구축이 진짜 목적이었다.

 

예를 들어, 목포에서 신의주를 종주하여 연결하는 ‘국도 제1호선’은 바로 이때 처음 나타난 개념이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의 국도 노선은 ‘경성’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는 것이 기본이라면, 1971년 이후에 설정된 국도 노선은 국토의 끝과 끝을 가로세로 방향으로 길게 연결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따라서 칭경기념비전 앞의 도로원표가 지녀왔던 국도의 기점(起點)이라는 위상은 바로 이 시점부터 종말을 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1997년 12월에는 광화문네거리의 남서쪽 방향에 새로운 도로원표와 상징물이 만들어지면서 칭경기념비전 앞의 도로원표는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사적 제171호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1969년 7월 18일 지정)인 국가문화재 구역 안에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저 도로원표가 한낱 ‘일제잔재’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이것조차도 품어야할 근대시기의 역사유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인지는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목, 2020/09/24-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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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김세형 매일경제 고문이 6월 9일자 매경닷컴에 게재한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라는 칼럼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술하여 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의 신뢰를 크게 손상시켰다. 즉 칼럼에서 “일개 시민단체가 정치권의 보수・진보의 합의도 없이 입맛대로 정하다보니” “만해 한용운, 춘원 이광수까지 모조리 친일 명단에 들어가고” “민주당 고위층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고위급 관료 출신이었는데도 빠졌다.” 등등 〈친일인명사전〉 발간 취지나 수록자 선정기준, 사전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 허위 사실을 기사화했던 것이다. 연구소는 이러한 허위 왜곡보도를 바로잡고자 6월 18일에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신청했다. 이어서 7월 2일과 15일 두 차례의 조정심리를 가졌는데 2차 심리기일에 처음 출석한 매경닷컴측은 연구소의 입장을 전면 수용하였다. 이에 언론중재위원회는 ‘반론보도’ 형식으로 김세형 칼럼 하단에 다음 문구를 영구적으로 게재하도록 결정했다.
연구소는 앞으로도 〈친일인명사전〉과 연구소를 허위 비방하거나 음해하는 세력과 언론매체
에 강력히 대응할 방침이다.


 

본 신문(매경닷컴)은 지난 6월9일 게재한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김세형 칼럼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술했습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은 국민성금으로 학계를 망라한 180여명의 교수 연구자들이 8년간의 지난한 작업 끝에 이뤄낸 소중한 성과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의 객관성 공정성은 학계가 공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법부의 판결에서도 여러 차례 입증된 바 있습니다. 나아가 보수 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정부기관에서도 공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는 데서 그 엄밀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 칼럼에서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고 허위의 사실을 서술하고, ‘민주당 고위층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고위급 관료 출신이었는데도 빠졌다’는 등 근거 없는 내용을 기재하여 친일인명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신뢰도를 크게 손상하였습니다. 이에 본 칼럼에서 위 내용을 삭제하고, 친일인명사전의 선정기준을 수록합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 국세현 회원사업부팀장

월, 2020/07/27-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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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3)

부역언론의 ‘산파’, 두 사주(社主)의 민낯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1939년 12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하시 고이치로(三橋孝一郞)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를 자기 관사로 불렀다. 조선일보의 경영에 관한 내용을 청취하고 총독부의 ‘언문신문’ 관리 의향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최고의 실세 중 하나였던 미하시와 방응모의 만남을 「언문신문통제에 관한 건(諺文新聞統制ニ關スル件)」이라는 극비문서로 자세히 기록했다. 이 문서에 ‘협의(協議)’로 정의된 둘의 만남은 이날부터 무려 10차에 걸쳐 이어졌다. 
12월 22일 첫 번째 만남에서 방응모는 먼저 이렇게 고백했다.

“신문사업을 경영한 지 6년여에 그 실비(失費)가 많아서 곤란함에 빠져 오히려 교육 기타 사회사업 등의 문화 사업으로 전환하기를 희망한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자진’ 폐간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미하시는 반색했다. 2차대전 발발 등으로 어수선한 정국을 ‘언론통폐합’을 통해 다잡으려 했던 조선총독부의 모략을 언론사 사주(社主)가 스스로 나서 도와주는 셈이었다. 미하시는 실제로도 이 같은 방응모의 제안이 고마웠던지 통제방침에 잘 응하면, 방응모의 희망에 대해서도 “상당한 고려를 할 수 있다”며 선심을 썼다. 이에 방응모 또한 “그 뜻이 크게 움직”였다고 문서는 적고 있다.
12월 24일 두 번째 만남, 이틀 전의 면담을 통해 조선총독부가 협상에 응할 여지가 있음을 포착한 방응모는 이날부터 본격적인 사업상의 조건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기에 이른다. 당시 방응모가 총독부에 희망한 조건은 아래와 같다.

 


 

① 동아일보도 함께 처분될 것
② 본사 발행의 3종(조광·여성·소년) 출판물은 계속 간행될 수 있게 할 것
③ 폐간 당일까지 본 협의에 응하는 것에 대해서는 외부에 대해 극비에 부쳐질 것
④ 종업원의 취직·전직의 알선 및 수당 지급에 유감이 없게 할 것
⑤ 건물을 포괄 약 100만 원 정도로 양도하는 데 차질이 없게 할 것
⑥ 장래 교육 또는 사회사업 방면에 활동하고자 희망함에 대해 원조해 줄 것

 


 

정리하자면 경쟁 언론사를 제거하고, 조선일보의 바통을 이어받을 출판사업은 유지하며, 새 사업으로의 진출과, 총독부의 원조 보상금 등을 충분히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자기네들은 사업은 유지하면서 경쟁사는 제거해버리는, 치밀한 ‘이면공작’이다. 방응모는 총독부의 약속을 토대로 조선일보의 출판부를 따로 독립시켜 ‘주식회사 조광사’를 발족시킬 수 있었다(1940.4). 즉, 조선일보의 중요한 알맹이는 살아남은 것이다. 잡지 <조광>은 원색적 친일과 전쟁선동의 논조를 유지하며 한글 신문과 잡지가 폐간당한 상황에서도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살아남는다.
세 번째 만남인 12월 28일, 방응모는 마침내 자신의 요구사항이 대부분 반영된 각서를 조인한다. 폐간계 제출은 이 같은 협상이 일단락된 뒤 이뤄졌다. 조선일보의 폐간은 사실상 사주 방응모의 자발적 의지로 결정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와 방응모의 협상은 10차에 걸쳐 계속됐고 이어진 협상과정에서도 폐간에 저항 따윈 없었다. 그저 폐간의 형식을 만들고 각종 이권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확답을 받아내는데 진력했을 뿐이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조선일보와 중요한 협상안들을 마무리한지 한 달여 지난 시점에서야 동아일보와 첫 협상이 시작됐다. 「언문신문통제에 관한 건」에 따르면 동아일보가 “(폐간에) 응하는 기색이 없”었다는 총독부 당국의 평가와 경무국장이 사장 백관수, 고문 송진우를 불러 ‘권설(勸說)’했다는 내용 등이 적시되어 있다. 조선일보와의 ‘협상’ 기록에 비해서는 대조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폐간’이라는 총독부의 극단적 조치를 대하는 두 신문사의 태도는 다소 달랐다. 그러나 두 신문은 이미 총독부 기관지와 다름없는 논조의 기사와 일본 동맹통신사로부터 제공받은 전쟁 보도 기사들로 지면을 도배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선‧동아 두 언론사가 총독부의 언론통제 방침에 충실했음에도 1940년 언론통폐합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전황이 복잡해지고 장기화되는 국면에서 총독부는 <매일신보>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두 한글신문의 활용가치를 더 이상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돈, 돈, 돈 … 퇴직사원들은 절망으로

이런 경과를 통해 두 신문은 1940년 8월 11일자 석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20년의 사사(社史)를 잠시 마감한다. 조동 100년사에 남긴 두 언론의 공백, 즉 ‘폐간기’는 해방 전까지 약 5년정도 지속된다.(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1945년 11월 23일, 12월 1일에 복간을 선언했다)
물론 유력한 자본가였던 방응모와 김성수에게 ‘폐간’은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정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20년간 실질적으로 신문사를 떠받치며 저널리즘의 현장에서 고생한 사원, 배달부들로 이들은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조선, 동아일보는 사원들에게 <매일신보>한테 받은 영업권 보상금에다 회사 차원에서 자금을 더 증액하여 퇴직금을 지급했다. 동아일보는 2년간의 봉급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조선일보는 1년간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3년 이상 근무한 사원에게 법정퇴직금을 지급하기로 한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의 실상은 참담했다. 불만이 쌓인 사원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결국 조선총독부가 관련 사안을 진상조사하기에 이른다. 경기도경찰부가 경무국장 앞으로 작성한 보고서 「폐간 양언문지의 사원 퇴직금 지급상황에 관한 건(廢刊 兩諺文紙ノ社員退職金 支給狀況ニ關スル件)」에는 조선일보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 현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350명의 사원들에게 총 23만 2,891원을, 동아일보는 303명의 사원에게 37만 968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일단 총액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발생한다
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퇴직금 지급율이 가장 저조한 계층은 배달원으로 조선일보는 배달원에게 ‘평균 6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동아일보가 배달원에게 평균 734원의 퇴직금을 지급한 것에 비추어 보면 122배의 차이가 발생했다. 사원, 준사원, 공장종사원에게 지급한 평균액 또한 그 차이가 뚜렷하다. 1,473원의 동아일보 평균 지급액에 비해 조선일보의 평균 지급액은 801원에 불과해 여기서도 2배 가까운 차이가 발생한다. 다만, 퇴직금의 최고 지급액은 조선일보가 9,617원으로 동아일보 7,614원에 비해 높았는데 이 9,617원의 최고액을 가져간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사장인 방응모였다.

 

 

조선일보의 퇴직금 문제를 조사한 경기도경찰부는 “조선일보사의 지급율은 전자(동아일보)에 대해 비교도 안될 만큼 소액”이며 “양사의 차이가 너무나도 심하여 조선일보사원의 불평은 무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어 조선일보 사원들이 “방응모에 면회를 구하여 하등의 구제책을 요구”했으나 방응모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야말로 사주의, 사주에 의한, 사주를 위한 퇴직금 행정이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양사의 사주, 전쟁의 나팔수로 변신하다

신문이 폐간되고 사원들이 퇴직금 문제로 허덕이는 사이 김성수와 방응모 두 사주들 또한 분주했다. 바로 전쟁부역의 ‘나팔수’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진작부터 다양한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전쟁협력 관변단체에 참여했으며 시국강좌, 기사, 방송 등을 통해 전쟁 선동의 일익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폐간 이후에도 이들의 활동들은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교육자를 자처했던 김성수의 학병지원강요 행적은 충격적이다. 김성수는 1943년 10월 조선에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자신이 맡고 있던 보성전문학교의 지원율을 높이기 위해 각종 활동에 나섰다. 그는 자신이 교장을 맡고 있는 보성전문학교의 학병 지원 실적이 신통치 않자 직접 조회에 나서 학생들을 설득하는가 하면 교내에 조선군 논객 ‘에가미(江上守彦)’ 중좌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학병지원병 독려를 위한 교장회의, 좌담회에 참여하고 지원을 호소하는 글도 여럿 기고했다. 그 결과 보성전문은 학병지원을 강요하는 집회를 가장 많이 개최한 학교가 되어버렸다.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석간 1면에 실린 김성수의 대표적인 친일논설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다른 학교 학생들에 비해 일제의 전시정책에 비협조적인 경향을 보인 보성전문 학생들에게 이 같은 ‘교장’ 김성수의 전쟁선동 행위는 상당한 혼돈을 주었다.
실제로 학병지원 마감시점인 11월 17일, 보성전문의 학병 지원율은 53.6%에 불과했다. 가장 많은 선전활동을 했음에도 학생들의 지원율이 저조하자 김성수는 “한명이라도 지원에서 빠지는 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징용”되어야 한다는 모진 발언으로 학생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희생과 죽음을 강요하면서 거부하는 학생들의 의지를 ‘문약(文弱)’이라며 폄훼하기도 했다.
한편, 방응모는 일본 육해군의 ‘응원단장’과 같은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1933년에 이미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제16호)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한 바 있다.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한 직후의 일이었다. 조선총독부와의 거래에 밝았던 방응모는 중일전쟁이 터지자 적극적인 전쟁부역 행위에 나섰다. 1937년부터 경성군사후원연맹, 경성부지원병후원회,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 이사 등으로 참여했으며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감사역을 맡기도 했다. 일제의 진주만 기습을 찬양하는가 하면, “일억국민의 총궐기”를 부르짖으며 침략전쟁에 감정적으로도 동화된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조선, 동아일보는 사라졌지만 사주들의 친일행각은 폐간 뒤에도 계속됐다. 아니, 신문을 통한 친일행위가 사라진 만큼 더욱 열심히 부역에 매진한 듯도 보인다. 특히 방응모는 조선일보의 후신인<조광>을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인 청년들에게 징병을 권유하는 논설과 문예물로 채워 완전한 친일잡지로 거듭났다.

 

민족을 배반한 한 세기. 반성 없인 영광도 없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양사의 사주 방응모와 김성수는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언론재벌이 된 그 후손들은 2010년 당당하게 국가를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취소’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럼에도 방응모는 2012년에, 김성수 2018년에 반민족행위자로 최종 확정되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부역행위에 대한 반성은커녕 민족의 수난기를 함께 한 역사를 부각하며 ‘민족지’로서의 미화를 창간 100년이 된 이 시점에도 거듭하고 있다.
이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역사퇴행적 행태들을 볼 때마다 나치 부역언론을 단죄했던 프랑스의 사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한 언론인 개개인에 대한 숙청뿐만 아니라 언론사 자체에 대한 단죄도 강력하게 진행했다. 나치에 협력한 주류 언론은 모두 폐간되었으며 그들이 사용한 모든 시설과 공간 등 재산도 몰수하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항을 지속해온 〈콩바〉, 〈데팡스 드 라 프랑스〉 등 지하언론이 사용하도록 조치됐다.
‘어쩔 수 없었다’ 식의 변명을 일삼던 언론인들도 가차 없이 심판을 받았다. 한 예로 나치독일을 미화한 일간지 〈르마텡〉의 편집국장 로잔은 (조선, 동아의 사주들처럼) “압력에 못 이겨”라는 변명으로 일관했지만 프랑스 재판부는 “독일 선전상 괴벨스의 품에 결국 안겼다”고 질타하면서 로잔에게 20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프랑스 나치청산에 대해 천착해온 주섭일은 “이 같은 (청산)과정들이 프랑스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자유와 사회정의, 인권이 참되게 존중받는 민주국가 건설에 이정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렇듯 엄정했던 프랑스의 청산사례들과 우리 역사의 청산과제들을 비교해 볼 때면 ‘한발 늦었다’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동아 100년을 맞은 지금 더욱 절실하게 언론개혁을 외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취지에서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마련했다. 3회에 걸친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의 연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은 오는 8월 11일 열리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번 기획전과 연계한 특강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도 함께 진행되니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 참고문헌
박용규,
「일제 말기(1937~1945)의 언론통제정책과 언론구조변동」, 한국언론학보, 2009
장신, 「일제말기 김성수의 친일 행적과 변호론 비판」,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009
주섭일,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연대, 2004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1~3, 민족문제연구소, 2009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보유편>, 2017

월, 2020/07/27-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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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60]

역대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이 잇달아 벽제관을 시찰한 까닭은?
사쿠라와 단풍나무 동산으로 구축한 그들만의 성지

이순우 책임연구원

 

<승정원일기> 고종 40년(1903년) 10월 3일(양력 11월 21일) 기사에는 평양이궁(平壤離宮)인 풍경궁(豐慶宮)에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현지로 떠나려던 의정 이근명(議政 李根命, 1840~1916)에게 고종황제가 하문하는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화 한 토막이 수록되어 있다.

 

…… 이어 전교하기를,
“어느 곳으로 길을 잡았는가?”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처음에는 수로(水路)로 가기로 계획하였습니다만, 감동당상 민영철(監董堂上 閔泳喆)이 전보한 바에 근일(近日) 수로에 풍랑이 잦아 육행(陸行)을 권하기에 육로로 가려고 하나이다.” 하였다.
…… 상(上)이 이르기를, “며칠간의 노정(路程)인가?”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550리인데, 하루에 7, 80리를 가면 7, 8일이면 가능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갑오년(1894년) 이전에 칙사(勅使)나 동지사(冬至使)가 지날 때는 도로가 광탄(廣坦)하고 점막(店幕)도 즐비했는데, 지금은 틀림없이 많이 황폐해졌을 것이니라. ”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그렇습니다.” 하였다

 

사진엽서에 남아 있는 벽제관의 옛 모습이다. 아래의 설명문에는 “임진왜란 때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명나라군대를 격파했던 곳”이라고 하여 이 공간의 의미를 전적으로 자신들의 전승지라는 점과 결부시켜놓고있다. 언덕 위에 보이는 것이 ‘괘갑수(掛甲樹)’라고 전해지는 느티나무이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왼쪽) 벽제관의 외대문에 달려 있는 ‘벽제관(碧蹄館)’ 편액의 모습이다. 이 사진의 아래에는 성종 때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 1430-1502)이 쓴 글씨라고 전한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 편액의 잔편은 현재 일산호수공원에 있는 ‘고양600년기념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벽제관>, 1938)
(오른쪽) 여러 차례에 걸친 ‘보존공사’로 인해 오히려 원형을 상실해가고 있는 벽제관의 모습이다. 이곳은 원래 온돌 구조의 방바닥과 벽면이 가리고 있는 형태였으나 느닷없이 마루 모양으로 변형되었고, 더구나 앞뜰과 주변 일대는 사쿠라와 단풍나무가 점령한 상태로 바뀌어 있다.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벽제관>, 1938)

 

이러한 대화는 1894년 청일전쟁과 더불어 전통적인 외교관계가 단절된 이후 불과 10여 년 사이에 두 나라의 사신들이 오가던 곳이 옛 모습을 크게 상실하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선박이나 철도와 같은 근대적인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인해 이러한 옛길의 이용빈도가 두드러지게 저하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흔히 사행로(使行路) 또는 연행로(燕行路)라고 불렀던 이 길은 서울에서 의주까지 1,050리(里), 다시 의주에서 북경까지 2,061리, 도합 3,111리에 왕복으로는 6,222리나 되는 머나먼 행로이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문집 <담헌서(湛軒書)> 「외집(外集)」 권10에 수록된 ‘연기(燕記)’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노정(路程)이 정리되어 있다.

 

한성(漢城) → 고양 벽제관(高陽 碧蹄館, 40리) → 파주 파평관(坡州 坡平館, 40리) → 장단 임단관(長湍 臨湍館, 30리) → 송도 태평관(松都 太平館, 45리) → 금천 금릉관(金川金陵館, 70리) → 평산 동양관(平山 東陽館, 30리) → 총수참 보산관(葱秀站 寶山館, 30리) → 서흥 용천관(瑞興 龍泉館, 50리) →검수참 봉양관(劒水站 鳳陽館, 40리) → 봉산동선관(鳳山 洞仙館, 30리) → 황주 제안관(黃州 齊安館, 40리) → 중화 생양관(中和 生陽館, 50리) → 평양 대동관(平壤 大同館, 50리) → 순안 안정관(順安 安定館, 50리) → 숙천 숙녕관(肅川 肅寧館, 60리) → 안주 안흥관(安州 安興館, 60리) → 가산 가평관(嘉山 嘉平館, 50리) → 납청정(納淸亭, 25리) → 정주 신안관(定州 新安館, 45리) → 곽산운흥관(郭山 雲興館, 30리) → 선천 임반관(宣川 林畔館, 40리) → 철산 차련관(鐵山 車 輦館, 40리) → 용천 양책관(龍川 良策館, 30리) → 소곶참 의순관(所串站 義順館, 40리) → 의주 용만관(義州 龍灣館, 35리) → [이하 중국 행로는 생략]

 

여기에서 보듯이 이 머나먼 행로 가운데 서울 도성에서 벗어난 첫 번째 기착지이자 되돌아오는 여정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숙소의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고양 벽제관(高陽 碧蹄館)이다.사신을 떠나보내고 맞이하는 공식행렬과는 별개로 수행원들의 친구나 친지들이 이들의 무사 귀환을 빌며 전송하고 작별하거나 귀로에 오른 이들을 다시 마중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곳을 소재로 한 무수한 시문(詩文)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이 땅의 주인행세를 했던 일본인들에게는 벽제관이라는 공간을 기억하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벽제관 일대가 임진왜란 당시 그들을 추격하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의 직속부대를 맞이하여 치명적인 반격을 가했던 일본군의 전승지(戰勝地)였으므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탓에 이곳이 남다른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곤 했다는 것은 식민통치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는 역대 총독과 정무총감이 잇달아 이곳을 시찰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흔적은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에 의한 벽제관 시찰이다.
<매일신보> 1912년 4월 30일자에는 「총독 벽제관행(總督 碧蹄館行)」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의 행로를 이렇게 간단히 정리하고 있다.

 

데라우치 총독(寺內 總督)은 재작(再昨) 28일(日) 오후(午後) 2시(時)부터 아카시 소장(明石 少將), 아라이 탁지부장관(荒井 度支部長官), 후지타 부관(藤田 副官)을 종(從)하여 자동차(自動車)를 승(乘)하고 고양군 벽제관(高陽郡 碧蹄館)에 부왕(赴往)하여 문록역(文祿役)의 전적(戰跡)을 시찰(視察)하고 오후(午後) 6시(時)에 귀저(歸邸)하였다더라.

 

데라우치 총독 자신이 남긴 일기(日記)에도 이날의 동선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그가 이날 벽제관 앞에 벚나무(櫻樹, 사쿠라)를 심어 기념으로 삼았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이때 그가 심은 벚나무 주위에는 나중에 돌기둥에 쇠사슬을 연결하여 보호난간을 둘러 정성껏 관리하는 모습이 연출된 것으로 알려진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한 벽제관 일대의 공간변형을 통틀어 가장 두드러진 풍경의 하나는 이곳 주변이 온통 벚꽃 동산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29년 4월 4일자에 수록된 「녹화운동(綠化運動)의 선구(先驅), 본사기념식수(本社紀念植樹), 작(昨) 3일(日) 기념일(紀念日)을 복(卜)하여, 벽제관(碧蹄館)에 앵풍 만주(櫻楓 萬株)」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본사(本社)에서는 기념식수일(紀念植樹日)에 순응(順應)하여 3일 벽제관에서 기념식수를 하였는데 수년 전 본사에서는 한강반(漢江畔) 급(及) 이번에 기념식수를 한 벽제관에 앵화(櫻花)의 식수를 행하여 지금에는 직경 척여(直徑 尺餘)의 대목(大木)이 되어 과거 본사공적(本社功績)을 영구히 전하게 되었다. 이에 감(鑑)하여 본사는 작추(昨秋)에 거행된 소화대제(昭和大帝)의 어대전(御大典)을 광고(曠古)에 전하려고 종종(種種) 기념사업을 연구한 결과 조선에 재(在)한 민간녹화운동(民間綠化運動)의 선구(先驅)로서 식수(植樹)는 가장 적당한 사업이므로 이번에 벽제관 뒤의 국유지(國有地) 수십정보(數十町步)에 앵목(櫻木) 5천 주(株), 풍(楓) 5천 주 합계(合計) 1만 주(株)를 식재하였다. 당일은 본사원(本社員)은 물론 경성부내(京城府內)에서 다수의 내빈을 초대하고, 벽제관 부근 주민도 봉사적(奉仕的)으로 참가하여 기념식수를 하였다.

<조선> 1930년 9월호에 수록된 벽제관 후면 언덕의 ‘괘갑수(掛甲樹)’이다. 이곳이 정말 왜군의 갑주가 걸린 곳이었는지는 일본인들 스스로 의심하는 바였지만, 어쨌거나 사진에서 보듯이 돌난간과 표석을 세워 나름으로 소중한 기념물의 하나로 관리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념식수일’은 조선총독부가 한국병합(韓國倂合)의 대업(大業)을 영구히 기리는 동시에 애림사상(愛林思想)을 고취하고 식림(植林)을 장려한다는 명분으로 1911년 4월 3일 신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 공휴일)을 기하여 처음 기념수재일(記念樹裁日)로 정한 이래로 해마다 식목행사를 거행한 날이다. 위의 신문기사에 따르면,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주축이 되어 벽제관 주변에 벚나무와 단풍나무 1만 그루를 심었고, 이보다 앞서 ‘수년 전’에도 이미 이곳에서 식목행사를 거행한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 비단 이 시기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 시점부터 벽제관 일대에는 일본산 벚나무가 대량으로 식재되기 시작했다는 흔적도 발견된다. 가령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감독으로 장기간 서울에 체류했던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가 남긴 <연하승유기(烟霞勝遊記) 하권(下)>(1924), 325쪽에는 그 자신이 1916년 3월 17일에 벽제관을 탐방한 때의 감흥을 이렇게 적은 바 있다.

 

…… 관후(館後)의 소구(小丘)에는 당년(當年)의 괘갑수(掛甲樹)라고 칭(稱)하는 노규(老槻, 느티나무 고목)가 있다. 구상(丘上)에서 지점(指點)하면, 양군공전(兩軍攻戰)의 터가역력(歷歷)하게 보인다. 이 주변에는 천주(千株)의 길야앵(吉野櫻, 요시노 사쿠라), 천주(千株)의 풍(楓, 카에데)을 기념(記念) 삼아 심었지만, 거의 전벌(剪伐)되어져 가까스로 두어 그루를 남기고 있을 따름이다. 조선인(朝鮮人)의 수목(樹木)에 무돈(無頓)이 지나침은 참으로 가공(可恐)할 만 했다.

 

여기에 나오는 ‘괘갑수’는 벽제관전투 당시 싸움을 마치고 일본군 장졸(將卒)이 갑주(甲冑)를 벗어 이곳에 걸어놓고 휴식을 취했다거나 그 당시 선봉에 섰던 왜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가 자신의 투구를 걸었던 곳이라거나 하는 식의 전설이 있는 벽제관 뒷동산의 느티나무였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얘기는 일본인들 스스로가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글들이 곧잘 남아 있기는 한데, 어쨌거나 이곳 역시 그들이 늘 자랑스러운 곳으로 여기는 중요한 기념물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매일신보> 1928년 4월 3일자에 수록된 이케카미 정무총감의 벽제관 수리공사 현장시찰 관련 보도내용이다. 여기에는 이케카미 정무총감이 정의현(鄭儀鉉) 벽제면장과 더불어 기념식수를 하는 보도사진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건설(公園建設)을 계획, 면민(面民)은 관상목 식재(觀賞木 植栽)」 제하의 기사 등에도 벽제관 일대에 대규모로 벚나무를 식재한다는 소식을 잇달아 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처럼 벽제관 일대에 벚나무와 단풍나무를 적극적으로 심고 이를 관리하려고 했던 것은 이곳을 일본군의 전승지(戰勝地)라는 공간의 의미에 더하여 봄가을로 벚꽃구경과 단풍나들이의 명소와 같은 탐방지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제강점기 후반에 이르러 경승지(景勝地)로 자리매김한 벽제관 일대는 관람객들을 쉽사리 맞이할 수 있는 유원지(遊園地)의 형태로 적극 개발하기 위한 조치들이 거듭 시도된 바 있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6년 5월 22일자에 수록된 「벽제관 전등시설(碧蹄館 電燈施設)과 뻐스 연장요망(延長要望), 벽제면민(碧蹄面民)이 경전(京電)에 진정(陳情)」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이러한 변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벽제(碧蹄)] 고양군 벽제관은 대도회지 경성(大都會地 京城)을 거(距)하기 4, 50리의 지점에 있어 불결(不潔)한 공기와 풍진(風塵) 사이에서 피곤한 뇌를 잠시 수양(修養)할 만한 유일한 유원지로서 근일(近日)은 매일 수십 명의 관람객을 맞게 되는 바인데 조등기관(照燈機關)과 교통기관(交通機關)이 불완전함을 관민일동(官民一同)이 통감(痛感)한 바있어 거(去) 18일에 신면장(申面長), 카타카쿠 부장(片角部長), 후지노 교장(藤野校長), 이 본보 분국장(李 本報分局長), 기타 민간유지(其他 民間有志) 수십 명이 회동하여 전등가설(電燈架設)과 뻐스 총연장(總延長)을 경전회사(京電會社)에 실행토록 내(來) 22일에 진정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일반민간에서는 지방발전(地方發展)과 산업개발상(産業開發上) 필요하므로 실행을 기대중이며 교섭위원(交涉委員)으로 좌(左)의 제민(諸民)을 선정하였다. 신 면장(申面長), 이 이사(李理事), 카타카쿠 부장(片角部長), 임창운(林昌雲), 이본보 분국장(李 本報分局長), 코야마 협의원(小山協議員), 후지노 교장(藤野校長), 사에키 소장(佐伯所長), 안 기자(安記者).

 

여기에 나오는 ‘신 면장’은 일제강점기에 춘천군수, 원주군수, 홍천군수(1924년 12월 퇴직)를 역임하고 나중에 고양군 벽제면장(1932.1~1939.10)을 지낸 신규선(申圭善, 1882~1958)을 말하며, 지금도 벽제관 터 앞에는 1941년 1월에 건립한 ‘면장 신규선 치적비’가 남아 있다. 그리고 ‘사에키 소장’이라고 하는 이는 벽제우편소장(碧蹄郵便所長)이던 일본인 사에키 토루(佐伯融)를 가리킨다.
그는 벽제관고적보존회의 활동에 앞장서 참여하였고, 나중에 벽제관전적기념비(碧蹄館戰蹟記念碑, 1933년 9월 9일 제막)를 조성할 때도 주도적인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총독부의 고관 또는 내외귀빈(內外貴賓)을 포함하여 일반 탐방객이 벽제관을 찾을 때마다 벽제관 일대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옛 벽제면사무소가 자리했던 벽제관 터 앞쪽 비석군에는 ‘벽제면장 신규선(申圭善) 치적비(1941년 1
월 25일 제막)’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벽제우편소장 사에키 토루(佐伯融)의 경력과 활동상이 자세히 소개된 <매일신보> 1933년 10월 12일
자의 보도내용이다. 그는 벽제관 전적지의 보존과 기념비 건립에 주도적인 활동을 했고, 조선총독의 시찰 때거나 일반 탐방객의 방문 때건 간에 벽제관 일대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44년 10월 1일자에 수록된 「형석(螢石)의 채굴을 독려, 개성에서 고미술(古美術)도 감상한 총독」 제하의 기사를 통해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875~1953)가 부임 후 두 달 남짓에 이곳 벽제관을 시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이렇게 누누이 훈시를 한 다음 점심을 마치고 개풍군 중면(開豊郡 中面)에 있는 종양장(種羊場)을 시찰하고 대룡광산(大龍鑛山)을 찾아 경금속(輕金屬) 증산에 중요한 자재인 형석(螢石)의 채굴하는 현장을 독려하고 자동차로 귀로에 올랐다. 모색이 어리는 장단(長湍) 나루를 나룻배로 건너, 도중 벽제관(碧蹄館)에 들러 충혼비(忠魂碑)의 비명(碑銘)을 읽고 측근의 설명을 들어가며 한 동안 감개 깊은 듯 2백여 년 전의 옛일을 회고하고 일로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렇듯 일제는 자신들의 패망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사쿠라와 단풍나무의 천국으로 변한 자신들만의 성지(聖地)에서 얼토당토않게 그저 그 옛날과 같은 또 한번의 전승을 간절히 꿈꾸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화, 2020/07/28-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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