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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책방 아저씨, 풀벌레 일꾼 은종복 회원 면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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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책방 아저씨, 풀벌레 일꾼 은종복 회원 면담기

익명 (미확인) | 월, 2018/05/28- 11:38

[인터뷰]

동네책방 아저씨, 풀벌레 일꾼, 은종복 회원 면담기

김진영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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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일 책방 ‘풀무질’ 대표 은종복 회원을 만났다. 처음에는 연구소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전날 밤 은회원의 새 책(????책방풀무질:동네서점아저씨은종복의25년 분투기????,한티재,2018)을읽고약속장소를서점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약속 장소를 조정하기 위해 전화했더니 반갑게 맞아주었다. 시간을 조정하다 결국 서점에서 만나 은회원의 어머님께서 싸주신 저녁 도시락을 함께 먹기로 했다.
은회원은 서울 명륜동에서 25년째 ‘인문사회과학 책방-풀무질’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풀무질 책놀이터 협동조합’이라는 마을공동체 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 “동네책방이 살아야 마을이 살 맛 나는 곳이 되고 마을이 살아야 마을사람들도 서로 웃고 떠드는 정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서점에 갔을 때도 달님, 토끼님과 주민 한분이 계셔, 서점 한 쪽에서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공동체 사람들은 ‘덧이름’을 쓴다). 책에 둘러싸여 처음 만난 사람들과 도시락을 먹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면담은 책방 계단 아래에 움푹 들어간 작은 공간에 마주앉아서 진행했다.
은회원이 책방을 지킨 긴 세월만큼 이야깃거리가 많았지만 우선 어린 시절 모습이 궁금했다. 부모님에 대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은종복 회원은 1965년 서울 휘경동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경북 군위군 출신이다. 두 분은 1958년 무작정 서울로 오셨는데 “서울에 가면 머슴처럼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에 왔다고 해서 쉽게 삶이 달라졌을까, 당시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많은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은 도시 빈민의 삶을 시작했다. 부모님이 처음 정착한 곳이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이었다. 중랑천 뚝방길 판잣집에 살며 두 분 모두 평생 쉼 없는 노동으로 삶을 꾸려오셨다.

 

문 : 선생님 책을 읽어보면 심성이 곱다고 할까요.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 바깥에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 배려가 느껴집니다.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고 봐야 할까요?

답 : 사실 어머니는 저를 딸처럼 키우셨어요. 저희가 아들 사형제인데 셋째는 딸이기를 바라셨거든요. 막내가 몸이 안 좋아서 제가 어머니와 대청마루 앉아 타래실을 감기도 하고 감자 껍질을 벗기기도 했어요. 집안일은 제가 맡아서 했습니다. 감자껍질을 깎는 게 아니라 벗기는 거라 손이 빨개졌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저는 아침잠이 많지 않은데 새벽부터 일어나 중랑천 가에 키우던 호박을 따오기도 하고 닭장서 달걀을 꺼내오기도 했습니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혼자 움직이며 생명을 대하던 경험이 “풀잎 하나, 벌레 하나 살아있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한 것 같다”고 한다. 다만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끊이질 않았는데 그 질문이 “세상을 밝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고, 자연히 어릴 때부터 그런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은회원이 처음 서점 일을 시작한 것이 1993년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날짜가 만우절이기도 했지만 평소 술과 투쟁, 글쓰기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책방 일을 한다니 주변 사람 중에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남을 괴롭게 하는 일이 아니라면 어떤 일이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세상을 맑고 밝게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풀무질이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아니고 그냥 책을 팔고 이윤을 남기는 곳이었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거예요. 시작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했겠죠. 이 책방이 그런 가치가 있는 곳이었고 하면 할수록 ‘내가 이걸 지켜야겠다’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책방에서는 정부에 반대하는 유인물도 구할 수 있었고, 교보, 영풍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인문사회과학 서적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회와 공동체의 성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25년 동안 대학가 책방을 운영하면서 은회원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판매’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고, 책방은 몇 차례 폐점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현재 책방 ‘풀무질’의 이름으로 달마다 돈을 내는 곳은 서른 군데, 50만 원이 넘는다.

아껴쓰고, 나눠쓰며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정말 우리 어머니,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하지만 자기가 만족한 후에 누군가에게 베푼다는 것은 베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고… 연구소도 그렇죠? 저야 잘 모르지만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씩 후원하는 힘으로 운영하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문 : 살다보면 골목이나 놀이터 같은 생활환경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누구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은회원은 대학가의 변화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답 : 돌이켜 보면 제가 학교를 다닐 때 학생들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하는 학생, 세상을 바꾸려는 ‘척’ 했던 학생, 신념을 갖고 투쟁에 전념하는 학생. 그 중에 저는 두 번째 부류에 가까웠습니다. 학교는 빠지지 않았지만 매일 데모하고 글을 쓰느라 수업을 제대로 듣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다고 투쟁에 전념하고 앞에 나서는 유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기본적으로 많은 학생들이 사회 변혁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어요. 예를 들어 4·3, 4·19, 5·18이 되면 미리 말하지 않아도 학생들은 일단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왔습니다. 여학생들도요. 예비역들은 군복을 입고 왔구요. 이런 날은 보통 재학생 중 반 가까운 학생들이 모여서 도로로 나가기 시작했으니까요. 지금과는 시대의 분위기가 많이 달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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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 오른쪽 첫 번째가 은종복 회원

 

지금은 사회가 다변화되고 ‘문화식민지’가 되면서 전선이 혼재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제국주의’와 ‘다국적기업’이라는 극복해야 할 분명한 상대가 있었다고 한다. 싸움의 대상도, 명분도 뚜렷했다는 점이 지금과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것이다.

 

문 : 지금 학생들은 어떻게 다른지 물었다.

답 : 10여 년 전에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상업영화로는 처음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것이었습니다. 대학로 CGV가 바로 옆이니까 학생들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추천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온 학생 중에 그 영화가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영화는 1980년 광주의 모습 중 일부를 압축한 것인데도 학생들은 군인이 시민들을 학살하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워했어요. 지금 학생들은 1980년 이후에 태어났습니다. 학교에서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대학에 와서야 광주이야기를 처음 들어보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만큼 학생들도 스스로 관심을 갖고 찾아보지 않으면 불과 얼마 전의 민주화운동을 모르는 시대가 된 것이죠.
또 한 가지, 지금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1학년 때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제대로 취직하기가 어려워요. 이름난 회사에 들어가려면 자기 소개서를 100번은 써야 해요. 참담하죠. 우리 때는 데모도 하고 술도 마시고 연애도 했지만 취직하는 게 크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주어진 환경이 달라요. 큰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아이들은 맺고 끊는 게 확실해요. 자기 책임이라고 할까요. 자신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만이 확실하기 때문에 더욱 현실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아이들의 좋은 점인지 나쁜 점인지 단정하기 어렵지만 예전처럼 책을 외상으로 사거나 돈을 빌리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문 : 최근 급격히 한반도 정세가 변화하고 있는 데 대한 소감을 물었다.

답 : 제 첫 번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돈에 눈먼 세상을 없애야 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탐욕에 젖어서 세상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세상을 바랍니다. 저도 남북의 정상들이 만나 평화정착을 위해 애쓰는 것을 보고 크게 감격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경제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같아 걱정되는 면도 있습니다. 차츰 다른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확대되겠지만, 경제이야기만 하다보면 한반도 북녘을 또 다른 식민지로 만들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긴 시간 많은 노력이 필요할 텐데, 남쪽도 북쪽도 민의가 반영된 정당성 있는 국가권력이 힘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앞으로 일어날 급격한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화가 진전되고 평화체제가 자리 잡게 된다면 국가보안법 문제나 주한미군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남북문제가 미국의 입김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은 참 아픈 부분입니다. 역사적인 맥락이 있는 것이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서로 의지하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북쪽이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것을 반대하고, 남쪽이든 북쪽이든 군대가 없는 꿈같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입니다만 한 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겁박하지 않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면서, 평등한 입장에서 논의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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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책을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그나마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세상에서 동네 작은 책방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답 : 지금 상태라면 풀무질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는 작은 책방들은 모두 버텨내기 힘들다고 봅니다. 저는 한국에서 작은 책방이 살아나려면 일등주의, 학력중심주의, 경제지상주의 이 세 가지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상은 기회균등이라고 하며 힘이 있건, 돈이 많건, 약하건, 장애가 있건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경쟁하게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각자 다른 것을 갖고 태어나죠. 그래서 사람은 신 앞에서 그 자체로 소중하고 모두가 평등합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모조리 일등주의에 매몰되어 사람을 하나의 기준으로 줄 세우고, 서로 경쟁하며 미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일등주의 때문에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영어학원을 등록하고 순번을 기다리고 있어요. 아이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남보다 이름난 학교에 들어가게 하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교육받은 아이들이 정말 ‘좋은 교육’을 받는 것일까. 우리 아이들이 병들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이 두 가지는 사람 욕심을 부추기는 경제지상주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고 권정생 선생님은 “사람들이 밥하나 국 하나 반찬 두, 세 개면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는데 어느 날부터 더 맛있게, 더 많이 먹으려 하다 보니 다른 나라 아이들의 목숨 줄을 조이게 되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맛있고, 더 좋은 게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고르게 가난하게 살려고 하면 다 함께 웃음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이제는 조금 생각을 다르게 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요, 경제성장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회원은 “자본주의 체제가 지구를 망가트리고 결국 인류가 생존할 수 없는 곳으로 만들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다르게 살아야 하고 경제성장은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날 때부터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온 나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다시 질문했다.

 

문 :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로 한다면 저는 따라서 살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답 : 그래서 마을책방의 역할, 지역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지금 자본주의 시스템은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기본으로 합니다. 그렇게 최근 몇 백년간 인류는 전례 없는 엄청난 양의 자원을 소비하며 지구를 망가트리고 있어요. 그 전까지 수십만 년 동안 인류는 필요한 만큼만 생산해서 소비하며 살았습니다. 오래전부터 서로 돌보고 필요한 것을 나누며 함께 사는 방식으로 산 것이죠.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절박하게 받아들이고 다시 공동체적인 생활방식을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책방 풀무질이 단순히 책을 사는 곳이 아니라 일등주의, 학력주의, 경제지상주의를 극복하고 지역주민과 학생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돌보며 살아가는 터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책방 풀무질에서 책읽기 모임, 밥상공동체, 돈 없이 사는 세상, ‘풀무질 책놀이터 협동조합’을 꾸려가고 있고 이런 활동이 결국은 우리 공동체와 책방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현실적으로 수익이 있어야 책방을 운영할 수 있을 텐데 실제 어떤 상황인지 궁금했다. 은회원은 손전화로 통장 잔액을 보여주며, “내일은 풀무질 문을 닫을지도 몰라요. 하하하하~” 크게 웃었다. 전화기에는 조금 전까지 얼마 남아 있던 통장 잔액이 ‘0’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실 함께 밥을 먹고 조합을 운영하고 활동하는 것은 책방 매출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아요. 여기 오는 사람들이 도와주고 책을 많이 구입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 책방의 주 매출은 성균관대학교 학생들과 수험생들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들 중 열에 아홉은 가까운 곳에서 싸고 빠르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이 책방에 오지, 풀무질의 생각에 공감해서 오는 것은 아니에요. 최근에 거대 기업들이 인터넷 서점을 운영하면서 재정상황이 훨씬 더 어려졌구요.
따지고 보면 제가 책방 풀무질을 25년이나 한 것은 기적에 가까워요. 지금도 빚이 많고 한 달 이자도 많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책방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의 힘이 큽니다. 공동체 사람들은 서점에 들어서면서 ‘풀벌레 아저씨 오늘 할 일 없어요?’라고 먼저 묻고 함께 일을 합니다. 서로 돌봐주는 이런 마음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죠. 이런 마음이 이 책방을 유지하고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장이나 대표라고 하지 않고 ‘일꾼’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내가 풀무질의 소중한 정신을 망가트리지 않고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고민해요. 언젠가 우리사회에 큰 변화가 필요할 때 ‘이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회원이 1993년 처음 책방을 시작하고 3, 4년 정도는 한 달에 50만원씩 적금을 넣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4월에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면서 700~800만원의 빚을 졌다. 그 후에는 점점 인터넷 책방이 들어서면서 제대로 수익이 난 적이 없었다. 최근 4~5년 동안은 ‘하루 살았네’라고 하면서 산다고 한다. 하루씩 살아가니 오히려 더 얼굴이 환해지고 삶에 힘을 느낀다고 한다.
하루살이 이야기를 하며 함께 웃었다. 은회원이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도 책방 풀무질을 계속하는 것은 ‘세상을 맑고 밝게 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책 읽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세대가 태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알고 싶은 것을 검색해서 바로바로 확인하고 정보는 빛의 속도로 사람들 사이를 오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종이책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은회원은 니체의 말을 인용해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살던 대로 살고, 남들이 사는 것을 따라 살아요. 타고난 자신의 모양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게 되면 약자, 소수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회는 병들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와 사람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것은 사람이 상상하고, 자신을 찾는 좋은 방법입니다. 사실 이런 면에서 보면 현대인들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보다 많이 걸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하늘과 바람과 땅, 풀과 들에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볼 수 있도록 더 많이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회원들과 청춘들에게 2권씩 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100권을 고르라면 쉬울 텐데 두 권만 고르라니 더 어렵다’고 하면서도 바로 네 권을 추천했다. 우리 회원들에게는 권정생의 산문집 ????우리들의하느님????(녹색평론사)과존 로크의????통치론????(까치글방)을,청춘들에게는 리영희, 임헌영의 ????대화-한지식인의삶과사상????(한길사)과님 웨일스,김산의????아리랑????(동녘)을 추천했다.
책을 읽는 것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세상을 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책방을 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헌책방에 자주 드나들었지만 일하는 사람과 살가운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숨길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거꾸로였다. 은종복 회원과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하며 생각을 나누면 좋은 사람이었다.
새로 사람을 사귀면 그만큼 마음을 내어주어야 한다. 제 혼자 살기도 바쁜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편하고 싶어 점점 사람들을 사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해지고 있는가? 은회원은 원래 사람들은 서로 사귀고 돌봐주며 살아야 행복하다고 한다.
내가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책방 문을 나서면서 행복을 위해 끝까지 간직해야 할 다짐들이 다시 떠올랐다.

시민들의 의견

식민지역사박물관. 실수로 입금했습니다. 명단에서 삭제좀 부탁드립니다.

2013년 부정선거 주장때부터 주사파들에게 악용당하면서 피해를 많이 본 이석훈이라고 합니다.

실수로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하였습니다. 명단에서 삭제좀 부탁드립니다. 문자 메세지도 그만 주시길 바랍니다.

이석훈  010-4335-7501     [email protected]      790812-1######

월, 2018/09/1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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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news&write_id=2502

안녕하세요?
위의 사이트는 모 교회의 계시판입니다.
건국 100주년이 아니다.
이승만은 배드로다.
등등 참 힘든 역사관으로 교인들이 힘들어 합니다.

최근에는 김문수 전 경기지사까지 동원해서 몇개월간 계속 힘든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을 보시고 제발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합니다.

o 대한민국의 위기와 기독교의 역할_건국 70주년의 의미

2018년 9월 16일(일요일)에는 다시 김문수 전 지사를 초청하여 2시간에 걸쳐 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들으려고 합니다.

이 강연에서는 좌파와 우파의 차이, 좌파의 근본 문제점, 좌파 탈출 경험, 좌파 정책의 필연적 실패 등에 대해 김문수 전 지사가 체험하여 느끼고 본 대로 진술하려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사랑침례교회 서창동 캠퍼스로 오셔서 같이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시: 2018년 9월 16일 오후 3시
강사: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강연 제목: 나의 좌파 체험 및 탈출기

o 이병태 교수: 문재인 정부 1년_한국 경제는 왜 위기인가? 최저 임금 소득 주도 성장의 허구

o 이춘근 박사: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건국과 부국강병 2부_박정희 시대의 국제 정세

o 김철홍 교수: 나는 어떻게 좌파를 버렸나?_공산주의 주사파 이해, 좌파 탈출

o 전교조의 실체와 학교 교육의 문제 1부_전교조의 정체 및 사상

o 홍지수 작가: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 1부_정치적 금기어(PC)의 정의 및 계보, 마르크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전 세계 좌경화

일, 2018/09/1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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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읽던 도중 철도순직자조혼비에 대해 알게되어서 여기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철도순직자 조혼비에 관한 정보를 더 들을 수 있을까해서 글 남겨 봅니다.

추가적으로 기사에서 조혼비 설명해주시던 이순우 소장님께 연락이 닿아서 몇가지 질문하고 싶은게 있는데 이메일을 알아갈 수 있을지 글 남겨봅니다.

일, 2018/09/1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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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勸人君國家朝餐祈禱會不參

 

衆嘲祈禱會(중조기도회)

忽欲使君知(홀욕사군지)

孰語耶蘇國(숙어야소국)

愚民起大疑(우민기대의)

 

삼가 나라님께 국가 朝餐 기도회 不參을 권하오

 

많은 이가 朝餐 기도회 조롱하니

문득 나라님이 알도록 하고 싶소

그 누가 예수의 나라라 말합니까

못난 백성은 큰 의심을 일으키오.

 

<時調로 改譯>

 

많은 이 조롱하니 나라님 아셔야겠소

예수의 나라라고 그 뉘라서 말합니까

마침내 못난 백성은 大疑를 일으키오.

 

*人君: 임금. 나라님 *朝餐: 손님을 초대하여 함께 먹는 아침 식사 *耶蘇: ‘예수’

音譯語 *愚民: 우맹(愚氓). 어리석은 백성 *大疑: 크게 의심함. 의심이나 의혹.

 

<2018.9.17, 이우식 지음>

월, 2018/09/1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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嘆世態(탄세태)

 

愚夫論國事(우부논국사)

雜漢說儒經(잡한설유경)

牧者錢蟲化(목자전충화)

山僧尙未醒(산승상미성)

 

세태를 탄식하며

 

어리석은 남자가 나라의 일 논하고

잡스런 놈이 儒家의 경전을 說하네

牧者는 그만 돈벌레 되고 말았으며

山僧은 아직도 술에서 못 깨어났네.

 

<時調로 改譯>

 

愚夫가 國事 논하고 잡놈이 儒經 설하네

예수 믿는 목사님은 錢蟲 되고 말았으며

산속의 저 스님 또한 아직도 未醒이라네.

 

*愚夫: 어리석은 남자 *國事: 나라에 관한 . 나라 정치에 관한 일. 나랏일 *雜漢:

잡놈 *儒經: 유서(儒書). 유가서(儒家書). 유가(儒家)에서 쓰는, 유학에 관한 책.

 

<2018.9.18, 이우식 지음>

화, 2018/09/18-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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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전진 도상에는 여전히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고, 역풍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과 남이 서로 손을 맞잡고 뜻과 힘을 합쳐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때 길은 열릴 것이며, 우리 스스로 주인이 되는 새로운 시대는 흔들림을 모르고 더욱 힘 있게 전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소중한 자산입니다

목, 2018/09/2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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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content/uploads/2018/09/201809.pdf

금, 2018/09/21-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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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보기] *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금, 2018/09/21-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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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金正恩國務委員長

 

孰測人民苦(숙측인민고)

村儒欲問君(촌유욕문군)

好機南北美(호기남북미)

此際拂喧紛(차제불훤분)

 

김정은 국무 위원장에게 띄우는 글

 

그 누가 人民의 괴로움 헤아리나

시골 선비는 그대에게 묻고 싶소

南과 北과 또 미국에게 好機이니

차제에 떠들썩함 탁 떨쳐 버리오.

 

<時調로 改譯>

 

人民의 苦 뉘 아나 시골 선비 묻고 싶소

南北과 미국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이니

차제에 떠들썩함을 화들짝 떨쳐 버리오.

 

*村儒: 시골에 사는 선비 *好機: 좋은 기회. 호기회(好機會) *喧紛: 매우 떠들썩함.

 

<2018.9.22, 이우식 지음>

토, 2018/09/22-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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迎戊戌秋夕思北韓同胞

 

獨裁三代續(독재삼대속)

民主悉虛言(민주실허언)

測度飢寒苦(측탁기한고)

方知孰犬豚(방지숙견돈)

 

戊戌年 추석을 맞아 북한 동포를 생각하며

 

독재 정치가 三代를 이었으니

민주주의란 모두 헛된 말이라

飢寒의 괴로움 따져 헤아리니

누가 개돼지인지 이제 알겠다.

 

<時調로 改譯>

 

三代 이은 독재이니 民主란 다 빈말이라

굶주림과 추위의 苦 따져서 헤아려 보니

그 누가 개돼지인지 바야흐로 알 만하다.

 

*獨裁: 독재 정치. 특정한 개인, 단체, 계급, 당파 따위가 어떤 분야에서 모든 권력

차지하여 모든 일을 독단으로 처리함 *虛言: 실속이 없는 빈말. 허어(虛語).

*測度: 따져서 헤아림 *飢寒: 굶주리고 헐벗어 배고프고 추움 *犬豚: 개돼지.

 

<2018.9.23, 이우식 지음>

일, 2018/09/2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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悖子奉父母祭祀

 

隣人嘲奉祀(인인조봉사)

悖子設膏粱(패자설고량)

問汝誰何食(문여수하식)

嗚呼孝失光(오호효실광)

 

패륜 자식의 부모 祭祀 받들어 모시기

 

이웃 사람 奉祭祀를 조롱하는데

패륜 자식 膏粱珍味 늘어놓았네

그대에게 묻겠노니 누가 먹는고

오호! 孝가 그만 빛 잃고 말았네.

 

<時調로 改譯>

 

이웃은 조롱하는데 膏粱珍味 늘어놨네

그대 향해 내 묻노니 누가 祭需 먹는고

오호라! 효도가 그만 빛을 잃고 말았네.

 

*悖子: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자식 *隣人: 이웃

사람 *奉祀: 봉제사(奉祭祀). 주사(主祀).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심 *膏粱: 고량

(膏粱珍味). 기름진 기와 좋은 곡식(穀食)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 *誰何: 누구.

 

<2018.9.25, 이우식 지음>

화, 2018/09/25-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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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39

이순우 책임연구원

 

4·19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당시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가 청와대(靑瓦臺, 1960년 12월 30일 변경)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워낙 독재정권의 아성(牙城)이라는 오명이 점철된 탓인지 아직도 경무대라고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경무대는 일찍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神武門) 너머에 있는 후원(後苑) 지역을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유서 깊은’ 명칭이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 이름이 그대로 통용된 탓에 운동회와 주일학교 집회와 기념연회와 같은 갖가지 행사나 모임 장소로 이곳이 거론된 자료를 흔히 접할 수 있고, 특히 1939년 8월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가 이 지역에 새집을 지어 옮겨왔을 때도 이곳은 ‘경무대 총독관저’로 호칭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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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순종 국장 당시 순화방 사재감계(順化坊 司宰監契) 계원들이 대여(大輿) 운반 예행연습을 위해 경무대 마당에 모여든 광경이다. 왼쪽 뒤로 월대 위에 보이는 건물이 융문당이다. (<순종국장기념사진첩>,1926)

 

근대시기에 포착된 옛 사진자료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연병장 같은 너른 마당이 있고 그곳의 북쪽과 동쪽 가장자리에 각각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월대(月臺) 위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과 같은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열무(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는 것), 연조(演操, 군사를 조련하는 일),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것) 등의 일이 벌어졌고, 특히 식년문무과전시(式年文武科殿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과거시험이 치러진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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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제10책(1930)에 수록되어있는 경복궁후원 융문당과 융무당의 원래 모습이다. 융문당은 남향(南向)이고, 융무당은 서향(西向)으로 배치된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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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시민위안 단오운동대회’ 안내광고에는 행사장소가 ‘경복궁 후원광장 경무대’라는 표시가 또렷이 적혀 있다.(<매일신보>1925년 6월 20일자)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이 사실상 빈 궁궐로 변하게 되는 한편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하면서 이곳 역시 그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해체되어 사라지는 운명에서 크게 비껴나지는 못하였다.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궁궐문화재 수난사에 대해서는 경기도 편찬 자료인 <경기지방의 명승사적>(1937)에 수록된 「경복궁의 정리」 항목에 잘 정리되어있다.

 

덧붙여 이 서두에 기술하여 둘 일은 경복궁 터 약 13만 평의 땅이 현재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 대체적인 경위이다. 명치 43년(1910년)에 이르러 경회루, 근정전 등 거대한 건물과 기타 여러 개의 누전(樓殿)을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 약 4천 칸을 철거하여 그 중에 다수가 민간에 불하되면서 구태(舊態)는 크게 변하였다. …… 또한 한강통(漢江通, 한강로) 11번지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는 소화 4년(1929년) 5월 신무문 밖의 융무당(隆武堂, 용광사 본당)과 융문당(隆文堂, 이 절 동북쪽의 객전)을 이축(移築)했던 것이며, 동사헌정(東四軒町, 장충동 1가) 박문사(博文寺)의 고리(庫裡, 거실)는 소화 7년(1932년) 10월 건춘문의 서북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옮긴 것이다. (하략)

 

여길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이 용광사로 옮겨진 때는 1929년 5월이라고 적고 있으나,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해체 당시의 사진자료와 더불어 관련기사가 수록된 사실이 있으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록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용광사 본당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건물은 ‘융무당’이 아니라 ‘융문당’이라야 맞는 서술이 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광사라는 절은 원래 진언종 고야파(眞言宗 高野派)에 속하는 일본인 사찰이며, 1907년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에 처음 터를 잡았을 때의 이름은 ‘용산사(龍山寺)’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진언종 고야파 용광사(영정 8번지)’로 이름을 바꿔 조선총독부에 창립 신청을 제출하여 1917년 6월 8일에 허가를 받았으며, 그 후 1932년 5월 17일에 ‘한강통 11-131, 132, 133번지’로 주소지 이전 허가를 받은 내역이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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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융문당과 융무당 해체 이전 당시의 모습이다.이 기사에는“이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인 사찰에 무상대여가 이뤄졌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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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관련 기념엽서에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사라진 구역을 ‘경성협찬회의 여흥공간(식당, 매점, 흥행물)’이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절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숨진 이른바 ‘전몰장병(戰歿將兵)’의 유골을 봉안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던 사실이 눈에 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3일자에 수록된 「전몰장병추도제, 6일부민회장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억 국민이 감개 깊게 맞이하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제5주년에 당하여 군사원호회 경성부 분회에서는 일찍이 대동아건설의 초석으로 산화된 전몰황군장병의 위령과 추모를 겸하는 두 가지 행사를 하기로 되었다.
첫째는 사변기념일에 앞서 6일 아침 장병의 유골이 안치된 부내 약초정(若草町) 서본원사(西本願寺), 용산정(龍山町) 대념사(大念寺), 용광사(龍光寺) 이 세 절을 방문하고 생화(生花)를 공진하여 영령을 위로하고 이날 또한 부민회장(府民會場)에서 전몰장병추도회를 행하기로 되었다. (하략)

 

말하자면 경복궁에서 옮겨진 융문당과 융무당은 난데없는 일본인 사찰로 둔갑하여, 그것도 하필이면 죽은 일본군인들의 영혼을 달래고 그들이 남긴 유골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여기에 함께 나오는 ‘대념사’라는 절은 1927년 7월 14일에 사원창립허가를 받았으며,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가 대표 출원자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은 용산 지역에 근거를 둔 실업가로 창덕가정여학교(彰德家庭女學校, 한강로 1가 50번지)의 설립자인 동시에 경기도회 관선의원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의 창립신청(1943년 10월 20일 허가) 때도 대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을 아울러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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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고야산(龍山 高野山, 용광사)으로 옮겨진 이후에 일본인 사찰의 법당으로 변한 융문당의 모습이다. (<경성과 인천>,1929)

 

일제가 패망한 뒤 1946년에 이 절은 귀속재산으로 처리되어 원불교 측에 넘겨져 서울교당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리고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각각 대각전(大覺殿, 법당)과 대각사(大覺舍, 생활관)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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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와 한강통 주변 약도에 표시된 ‘용광사’(오른쪽 중간)의 위치이다. 이곳은 중간 위쪽에 보이는 대념사(大念寺)와 더불어 침략전쟁 과정에서 생긴 이른바 ‘전몰장병의 유골안치사원’으로 활용된 공간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 京城龍山公立小學校同窓會, <龍山小學校史 龍會史>,1999)

 

이 와중에 지난 2006년 6월 10일자 <관보>를 통해 등록문화재 등록예고의 대상이되면서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다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문화재청 공고 제2006-163호에 수록된 ‘등록사유’를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그 존재가 확인된 몇 안 되는 건축물로 조선 후기 궁궐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통상 이러한 등록예고가 의례적인 통과절차 정도로 여겨지던 여느 등록문화재의 사례들과는 달리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은 최종적으로 문화재 지정고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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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6월 원불교 재단의 소관으로 바뀐 융문당과 융무당에 대한 등록문화재 등록예고가 있었으나 소유자 측의 반대로 최종 등록 고시는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민국관보> 2006년 6월19일자)

 

이 당시에는 이미 원불교 측에서 이 건물들을 이전하고 그 자리를 재개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 자리는 신축된 원불교 서울교당과 하이원빌리지가 서 있는 상태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에 해체되었다가 이듬해 9월에 전라남도 영광의 영산성지에 복원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지금은 이 건물들이 ‘원불교 창립관’과 ‘옥당박물관 문화체험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테면 경복궁에 그대로 남아 있었어야 할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에 의해 한 번 해체 이전된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수백 킬로 떨어진 낯선 땅으로 옮겨지는 이중의 수난을 겪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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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원불교 서울교당에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해체되어 전라남도 영광으로 이전되기 직전의 모습(왼쪽)과 그 자리에 새로 건립된 하이원빌리지(서울교당)의 전경(오른쪽)이다. 왼쪽에 보이는 전봇대와 건물 전면에 있던 보호수 은행나무 3그루만 그대로인 채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대목에서 하나 궁금해지는 것은 거의 ‘기적적으로’ 남아 있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질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그러한 일의 당위성이야 재론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다음의 한 가지 사항만큼은 꼭 상기시켜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원래 이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무상 대여한 것”이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소유권 관계를 따진다면 총독부 소유의 국유물인 상태에서 일본인 사찰인 용광사에 빌려준 것일 뿐이었으므로, 해방 이후 일반적인 귀속재산처리과정에 따라 원불교 측으로 소유권이 넘겨진 자체가 원천무효에 해당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자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유서(由緖)깊은 옛 과거(科擧)터, 융무 융문 양당(隆武 隆文 兩堂) 철훼(撤毁), 문무의 과거를 보던 융무당 융문당을 일본 절에 빌려주어 곡괭이에 헐려가, 진언종(眞言宗)에 무상대여(無償貸與)」 제하의 기사 내용을 여기에 덧붙여 두기로 한다.

 

…… 지난 11일부터 시내 입정정(笠井町)에 있는 일본 사람의 절 진언종 융흥사(隆興寺, ‘용광사’와 일본음 발음이 동일한 관계로 빚어진 착오)에서 다수의 인부를 데리고 와서 헐기에 착수하였다 한다. 내용은 전기 융흥사에서 총독부에 출원하여 동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심지어 주춧돌까지 전부 가져다가 용산 경성부출장소 옆에 있는 빈터에다가 새로 건축하고 불상을 안치하여 소위 선남선녀들이 출입하며 명복을 빌게 되리라는바 문무(文武) 과거를 보이던 곳이 갑자기 부처님 두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지 아니한 감개를 일으키게 하였다. (하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진 궁궐문화재 가운데 그 원형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례는 지극히 드문 형편임을 감안하면, 이들 건물의 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겠다. 그런 만큼 설령 그것이 전혀 별개의 공간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등록문화재로 등재하는 문제는 서둘러 재추진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어쨌거나 그러한 시도가 더 이상의 원형 훼손이나 건물 자체의 멸실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제도적 보호장치가 될 테니까 말이다.

목, 2018/09/2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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