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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귀순 관련자료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내부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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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귀순 관련자료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내부기록」

익명 (미확인) | 월, 2018/05/2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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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전투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1937.6.5. 호외

 

 

동북항일연군은 1935년 8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동북항일연군 통일군대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建制宣言)에 따라 1936년 3월 만주지방에서 항일무장운동을 통합해 기존의 동북인민혁명군을 확대하여 만든 항일무장단체이다. 초기에는 공산당계열, 국민당계열, 토비(土匪), 한국민족주의계열 등의 연합이었지만 중일전쟁 이후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군만 남게 된다.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 3월부터 1937년 10월까지 제1군부터 제11군까지 편재되었고 제1·2군은 남만주에서, 제4·5·7·8·10군은 동만주에서, 제3·6·9·11군은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에서 1938년까지 만주 각지에서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중 김일성, 김책, 최현, 최용건 등 다수의 한인들이 참여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특히 김일성은 왕청유격대 정위를 거쳐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 사장, 1938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6월 김일성 부대를 중심으로 국내 진공을 감행한 보천보 전투는 동아일보가 호외로 대서특필할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이른바 ‘동남부치안숙정공작(東南部治安肅正工作-길림・간도·통화 3성연합 치안숙정공작)’을 개시하여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연길현에 토벌대사령부를 설치하고 관동군 제2수비대(길림 소재)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을 토벌대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이 토벌작전에 일본군 6,500명, 만주국군 25,000명, 길림・간도·통화성 경찰토벌대 35,000명 등 총 6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또한 비행기까지 출동시켜 정찰, 기총소사, 폭격을 가하고 투항 권유 유인물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각급 지방행정기관과 협화회를 동원, 현지 주민들에 대한 사상공작을 펼치고 항일연군들에 대한 귀순공작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특히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도자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는데 양정우·조아범·김일성·진한장·최현에게 1만원, 박득범·방진성에게 5천원, 위증민·전광(오성륜)에게 3천원의 현상금이 각각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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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노조에 토벌대가 동북항일연군으로부터 노획한 사진들. 출처는 일본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

 

이러한 소탕작전으로 인해 1940년 1월 이금명 사살, 2월 1로군 총사령 양정우 사살, 1로군 참모장 방진성 체포, 1940년 12월 제5사장 진한장 사살, 1941년 1월 1로군 정치위원 전광 귀순, 1941년 3월 제2로군 군장 위증민 사살 등으로 동북항일연군은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렀다. 노조에 토벌대사령부는 1941년 3월 19일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을 성공리에 마치고 해산했다. 노조에 토벌작전이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는 귀순한 동북항일연군을 토벌대와 귀순공작대로 활용하고 그들의 정보를 이용해 동북항일연군의 근거지 곧 밀영·피복창·지하창고까지 모조리 파괴했기 때문이다.
노조에 대토벌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김일성과 최현이 각각 이끄는 제2방면군과 제3방면군 제13여단은 1940년 하반기에 소만국경의 소련 영내로 철수했다. 이후 소규모 유격대를 편성해 소만국경을 넘어 관동군과 간헐적인 전투를 벌이기는 했으나 대규모 무장투쟁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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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에 토벌사령부가 1941년 2월 제작한 길림·통화·간도 3성 지역 요도(要圖). 출처는 일본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연길 노조에 토벌대사령부(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가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한창 진행중이던 1940년 10월 19일에 선전용으로 발간한 소책자 「박득범(朴得範) 김재범(金在範) 김백산(金白山) 내부기록(來部記錄)」(일본방위성 방위연구소 소장)이다. 총 9쪽으로 된 이 소책자는 귀순자 3인과 노조에 사령관의 면담, 노조에 사령관의 훈시, 박득범·김재범·김백산의 ‘결심을 말하다’, 기념사진, 박득범 체포시 압수한 총기 일람표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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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 1940.10.19)의 표지와 기념사진. 기념사진에서 앞줄 왼쪽부터 다나카 경비과장, 노조에 사령관, 유홍순 간도성 차장. 가운데줄 왼쪽부터 김재범, 박득범, 김백산.

 

1940년 10월 19일 오전 11시 30분 박득범은 김재범, 김백산과 함께 연길 노조에 토벌대사령부에 방문했다. 사령관실에서 노조에 사령관을 접견했는데 이 자리에 간도성 차장 유홍순(창씨명 中原鴻洵)과 다나카(田中) 경비과장, 사령관 부관 하세가와(長谷川) 소좌가 함께 배석했다. 유홍순 차장,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순으로 노조에 사령관과 인사를 나누고, 노조에 사령관이 귀순자 3명에게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해 매진해달라”는 취지의 훈시를 하였다.
그러자 박득범이 “우리는 일본 신민의 일원으로서 만주국 구성분자가 되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동아신질서 건설, 아울러 만주국 치안 숙정에 철저히 매진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맹세합니다.”라고 귀순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김재범과 김백산도 동일한 취지의 결심을 이야기하였다. 노조에 사령관의 선창하에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은 “대일본 천황폐하의 충량한 신민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만주국 황제폐하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충성 서약을 하였다. 끝으로 노조에 토벌사령부 인근에 위치한 충혼비(忠魂碑) 앞에서 기념 촬영하였다.

 


 

결심을 말하다

박득범

박득범오늘까지 걸어온 길이 오로지 암흑이었음을 이번에 처음으로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의 죄는 실로 엄청 나서 중형에 처해짐이 너무도 마땅하지만 산에서 내려온 후 각 기관 특히 군부당국이 너무도 친절하고 관대히 대우하고 지도해 주신 것에 대해 무슨 말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 좋을지 모를 따름입니다.지금 각하의 훈시를 경청하니 우리가 밟아온 길을 확실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일본 신민의 일원으로서 만주국 구성분자가 되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동아신질서 건설, 아울러 만주국 치안 숙정에 철저히 매진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맹세합니다. 아무쪼록 선도, 지도 편달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마지막으로 특별히 심경을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그동안 만주국 특히 조선인 동포에게 또한 경제와 산업, 문화 기타의 건설에 있어서 파괴적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 이제와 생각하니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만주국) 부흥에 대해 미력이나마 한층 더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이제 「내부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자. 박득범은 1908년 연길현 부암동에서 태어났다. 1932년 부암동 농민협회에 참가하고 그해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적위대 중대장이 되었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1사 제1단 정치위원이 되었다. 1939년 8월 항일연군 제1로군 제3방면군 참모장이 되었고, 1940년 3월 제1로군 사령부 직할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이 되었다. 1939년 8월 박득범은 간도성 돈화현 한원봉 부근에서 관동군 독립보병 28대대와 전투를 벌여 일본군 32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린 것을 비롯해 1940년 9월 체포되기 전까지 일만 군경과 3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수백 명의 군경을 전사시켰다. 9월 말 왕청현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연길로 압송된 후 변절하여 간도성 치안공작반 제2공작반에서 귀순공작을 벌였다. 일제 패망 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소련 하바로프스끄현 세레뜨낀에서 노역하다가 1950년 석방되어 북한으로 갔다.
김재범은 1937년부터 1938년 11월까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 제7단에서 정치위원으로 있었다. 이후 김일성 부대(제1로군 제2방면군) 정치주임으로서 연길현 동불사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40년 6월 김백산의 밀고에 따라 안도현 대마녹진에서 일만군과 공작반원들에게 체포됐다. 9월 25일 위증민의 문건 등 주요 정보를 일만군에 제공해 토벌작전에 유용하게 쓰이도록 하였다. 노조에 토벌대사령부 방문 직후에 동포 여성과 결혼해 연길가에 신혼살림을 차렸다(『만선일보』 1940.10.23). 한편 김백산에 대해서는 제1로군 경위려의 제3단 단장을 맡고 있었고, 1940년 3월 체포되어 투항한 후 김재범, 박득범 체포·귀순에 적극 나섰다고만 알려져 있다.
당시 간도성 차장이었던 유홍순은 전북 내무부 산업과장으로 있다가 1934년 11월 만주국 간도성 민정청 실업과장으로 영전하였고 이후 간도성 실업청장, 민생청장을 지냈다. 1940년 5월부터 간도성 차장에 임명되었고 ‘동남부치안숙정공작’ 시기에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조직을 주도, 고문에 선임되어 간도성 귀순공작반을 지휘하였다. 1943년 12월 간도성 차장을 그만두고 귀국하여 강원도지사에 올라 해방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949년 3월 반민특위 강원도조사부에 체포되어 그해 7월 공민권정지 3년형에 처해졌다.
토벌대 사령관인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22기로 1939년 8월 관동군 제2독립수비대(길림 소재) 사령관에 임명되어 그해 10월부터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을 진두지휘하였다. 1941년 3월 사령부가 해산되자 천진 소재 독립혼성 7여단장으로 부임했고 독립혼성 제30여단장(상해), 마에바시(前橋)육군예비사관학교장, 제63사단장을 역임하다가 1945년 4월 예편했다.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내부기록」은 만주지역 치안숙정시기에 일제가 집요하게 펼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사상, 귀순공작의 실상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일제가 치안숙정 관련 문서를 통해 선무·귀순공작에 대한 실시방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데 비해 구체적인 실천사례가 책자로 제작된 것은 드물어 그 사료적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박광종 선임연구원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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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제를 연구하던 임종국 선생의 아버지가 선생에게 한 말이다.
선생은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친일문학론에 실었고,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임문호”를 실었다.
 
“….1937년 4월 이후에는 청년당 당두로서 천도교중앙종리원 관정(觀正)에 선출되어…….일제 침략전쟁과 황민화 정책을 적극 후원하고 지원할 것을 독려했다…..”-친일인명사전에서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했던 아버지

아버지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낸 아들

진실을 밝힘에 있어 그 어떤 이해관계(비록 아버지일지라도..)도 철저히 배척하는 원칙주의자가 임종국 선생이다.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써 내려갔던 그 날
임종국 선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토, 2018/06/0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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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순 변호사님

저는 Ids홀딩스 피해자입니다

이번 사기사건으로 저는 건강에 문제가 생길정도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있습니다. 정말 김성훈이 피해자들을 기만하며 변제한다 떠들기만 할뿐 실제 1원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김성훈은 피해자들에게 파산을 하면 돈을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며 편지글을써서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게 정말 정의가 살아있나 싶을정도로 사기범이 자기 파산하니 찬성해달라하니.. 어느 사람이 이해하며 받아들일까요

 

정만순 변호사님께서 만일 제 입장이시라면 파산 좋으니 동참하세요 하실수 있으실까요? 민족문제연구를 이번에 처음알고 친일파를 바로 잡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좋은 일을 하는 곳이란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김성훈의 파산을 도와 1만가정의 결제를 파탄내는 일을 도우신다니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정만순 변호사님

1만명의 목소리와 피맺힘이 들리시는지요?

김성훈에게 파산이라니.. 이걸 채권자라는 20여명의 사람들이 돕고 있으니 정말 1만명의 피해자 대표도 아닌 그들이 나서서 김성훈을 돕는 것을 볼수가 없습니다

제발 !! 올바른 길이 무엇일까 생각해주십시요. 저는 김성훈의 파산을 절대 받아들일수가 없습니다. 부디 파산을 막아주십시요

목, 2017/12/07-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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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자료 보는 참석자들 (서울=연합뉴스) 박동주 기자 = 11일 오후 서울시청 신청사에서 열린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관리사업 성과보고회’에서 참석자들이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email protected]

서울시, 서울대인권센터와 승선명부·신문 기사 등 비교·검토
대구 거주 ‘하토가와 후쿠준’, 故 이복순 할머니로 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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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럭 섬의 한국인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 함대 기지가 있던 남태평양 ‘트럭섬'(Chuuk Islands)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의 명부와 사진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서울시는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과 함께 미군 전투일지, 호위함 ‘이키노’호의 승선명부, 사진 자료, 1946년 3월 뉴욕타임스 기사 등의 자료를 비교·검토한 끝에 이들 위안부 26명의 존재를 밝혀냈다고 11일 밝혔다.

시는 “그동안 증언으로만 있었던 트럭섬의 조선인 위안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한 것”이라고 이번 연구의 의의를 설명했다.

트럭섬, 공식 명칭 ‘축(Chuuk) 제도’는 미크로네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4개 주(州) 가운데 하나인 섬으로 태평양 남서쪽에 있다. 일본식 발음인 ‘토라크’를 접한 한국인들은 이곳을 ‘트럭섬’이라고 불러 왔다고 한다.

이번 연구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자료를 발굴해 조사·분석해 이뤄졌다.

미군 전투일지에 따르면 당시 트럭섬에서 귀환한 1만4천298명 가운데 조선인은 3천483명이었다. 이 중 군인이 190명, 해군 노무자가 3천49명, 민간인이 244명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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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럭섬 점령군 전투일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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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럭섬 점령군 전투일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조선인들은 트럭섬 환초 ‘드블론’이라는 곳에서 1946년 1월 17일 호위함 ‘이키노’호를 타고 일본을 거쳐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이 배에는 조선인 위안부 26명과 아이 3명이 타고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1946년 3월 2일 자 ‘트럭의 일본인들은 포로가 아니다’라는 제하의 뉴욕타임스 기사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기사는 “트럭섬 사령관인 해병 준장 로버트 블레이크에 의해 조선인과 27명의 조선인 위안부(Comfort Girls)들이 보내졌다”며 “블레이크 장군에 따르면 이 여성들은 남아서 미국인을 위해 일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다른 조선인들이 일본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바다에 빠뜨릴 것이라고 두려워했는데, 하지만 블레이크 장군은 그러한 일을 듣지 못했다”고 묘사했다.

연구팀은 이 기사가 위안부를 27명이라고 적은 것은 아이 3명 가운데 1명을 위안부로 분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키노호 승선명부를 보면 승객 368명 가운데 조선인 249명, 여성과 아이 29명이 확인된다. 여성 26명과 아이 3명의 이름·직업·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여성은 ‘노동자’, 아이는 ‘무직’으로 돼 있다.

시는 “다른 문서와 비교를 통해 이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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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 피해자 이복순 할머니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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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이름이 적힌 이키노호 승선 명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 [그래픽] ‘트럭섬’으로 끌려간 위안부 이복순 할머니 이동 경로

이 위안부 피해자 26명은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으로 적혀 있어서 신원을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연구팀은 이 가운데 ‘하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인물이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돼 있는 고(故) 이복순 할머니라는 점을 판명해냈다.

이복순 할머니는 생전 구술자료를 남기지 않고, 1993년 12월 정부에 피해를 신고했을 때에도 간략한 피해 내용만 남겨 삶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연구팀이 생전 이복순 할머니와 가깝게 지낸 대구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이인순 관장에게 트럭섬 위안부 사진을 보여주자, 할머니를 단번에 알아봤다고 한다. 며칠 뒤 할머니의 아들도 이 사진이 자신의 어머니가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한발 더 나아가 서울, 경북 안동, 대구의 공무원들이 자료를 뒤진 결과 하토가와 후쿠준이 할머니의 창씨명이 맞고, 주소지도 예전에 그가 살던 곳과 일치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시는 “할머니의 남편 호적이 있는 경북 안동시 길안면사무소 계장은 한자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온종일 제적등본을 뒤져 해당 자료를 찾아줬다”고 관계자의 노고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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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순 할머니 이동 경로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이 같은 자료를 종합해보면 이복순 할머니는 1943년 트럭섬에 끌려가 위안부가 됐다. 일본 패전 후 그를 포함한 위안부 피해자 26명은 1946년 1월 17일 호위함 이키노호를 타고 일본 가나가와 현 요코스카시 우라가 항으로 갔다.

이 할머니는 이후 도쿄로 갔다가 규슈 후쿠오카 현 하카타 항에서 부산행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드러난 일본군 위안부 26명 가운데 이복순 할머니를 뺀 나머지 25명의 구체적인 신원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시 관계자는 “나머지 할머니들의 신원도 추후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는 이 같은 연구 결과를 이날 오후 1시 30분 서울시청 신청사 3층 소회의실에서 열리는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관리사업 성과보고회’에서 발표한다.

또 지난해부터 2년간 발굴·축적한 일본군 위안부 사료를 바탕으로 내년 1월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1·2권을 출간한다. 내년 2월에는 ‘일본군 위안부 자료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한국·중국·일본의 전문가와 단체를 초청해 성과를 공유할 계획이다.

[email protected]

<2017-12-11> 연합뉴스

☞기사원문: 남태평양 ‘트럭섬’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 첫 확인

※관련기사

☞뉴스1: 일본군 위안부 남태평양 ‘트럭섬’까지 끌려갔다…서울시 첫 확인(종합)

☞민중의소리: 남태평양 트럭섬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 첫 확인

☞한국NGO신문: 남태평양 트럭섬 조선인 ‘위안부’ 26명 명부, 사진 … 서울시 첫 확인

☞KBS: 남태평양 ‘트럭섬’ 조선인 위안부 첫 확인

※뉴스영상

☞MBC: 남태평양 ‘트럭섬’ 조선인 위안부 26명 첫 확인


화, 2017/12/1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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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시집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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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시집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사계절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이건 진담이라고//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가기로 결심했다구/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주장하는 일이라고//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그야 하는 수 없지/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사는 거지”

문익환 목사가 1989년 새해를 맞아 쓴 ‘잠꼬대 아닌 잠꼬대’는 많은 이의 가슴을 울렸다. 평양에 가겠다는 문 목사의 포부는 많은 이들에게 분단의 선을 넘는 꿈을 꾸게 했다. 하지만 이 시를 본 어떤 이들도 문 목사가 이런 포부와 다짐을 실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문 목사는 1989년 3월 북한을 방문해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분단의 장벽을 맨몸으로 깼다. 당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문 목사는 “나는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가슴과 눈으로 하는 대화를 하러 왔습니다. 한편이 이기고 한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 왔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문 목사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뜨겁게 포옹을 하며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그것은 민족의 치욕”이라며 절절한 음성으로 호소했다. ‘방북’이라는 말보다는 ‘밀입북’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던 그 시절 분단의 장벽을 넘은 문 목사의 발걸음은 시대를 뛰어넘는 도전이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이후 커지고 커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으로 이어졌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어두웠던 남북 관계를 넘어 지난 4월 판문점 선언을 비롯한 최근의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엔 문 목사의 용기 있는 첫걸음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오랜 어둠을 이기고 한반도에 평화가 다시 찾아온 올해는 문 목사 탄생 100주년(6월1일)을 맞이하는 해이다. 문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잠꼬대 아닌 잠꼬대’ 등 문 목사가 쓴 시들을 모아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란 제목의 시집이 출간됐다. 이 시집엔 문 목사가 생전에 펴낸 ‘새삼스런 하루’(1973), ‘꿈을 비는 마음’(1978),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 ‘두 하늘 한 하늘’(1989), ‘옥중일기’(1991), 다섯 권의 시집과 신문에 발표한 시들 가운데서 고른 70편의 시가 실려 있다.

1부는 시인으로서 면모가 돋보이는 시들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비롯해, 가족에 대한 애틋함, 존재론적 상념 등 개인적 삶의 편린을 담았다. 2부는 ‘전태일’,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 ‘동주야’ 등을 비롯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인물들과 역사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을 모았다. 3부는 남북 분단에 대한 안타까움과 통일에 대한 열망을 바라는 시들로 가득하다. 3대에 걸쳐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헌신한 문 목사네 가족사는 곧 우리나라 근대사이자 현대사이고, 민족운동의 축소판이다. 4부는 종교인으로서 시대와 사회에 대해 느끼는 고뇌를 담은 시들로 민중과 민족의 아픔을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내고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은 문 문사에 대해 “일흔여섯 생애 중 여섯 차례에 걸쳐 11년 2개월을 옥중에서 보냈던 우리 민족의 겸허한 심부름꾼”이고, “우리 시대의 어른이자, 한반도라는 광야를 떠돈 예언자며, 어둡고 거친 파도 넘실대는 동서남 3해의 민족사의 등대이고, 설움 많은 민중의 동무이자, 반민족 반민주 반통일에 맞서는 전선의 척후병”이었다고 말했다. 이 시집엔 이렇게 온몸으로 역사를 살아온 문 목사의 생애와 신앙이 알알이 박혀있다.

시인의 말을 대신해 수록한 첫 시집 후기를 보면 문익환이 시인으로서 길을 걷게 된 경위가 자세히 나와 있다. 1968년부터 신구교 공동 구약 번역책임위원으로 있으면서 성서를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에 힘쓰던 그는 시가 거의 40%인 구약성서를 30여 년 연구하면서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중한 소득은 나 자신의 모습을 밝히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일이오. 구리거울에 비춰 보던 흐릿한 나의 모습을 바람 한 점 없는 숲 속 호수에서 쨋쨋이 보는 느낌이랄까. 이렇게 나 자신의 모습을 찾고 보니, 갈증 같은 것이 생기더군. 나의 모습을 나보다 훨씬 민감한 이 땅의 시인들의 거울에 다시 비춰 보고 싶어지더란 말이오.”

이 시집을 통해 우리는 한국 현대사와 분단의 아픔, 통일의 열망을 문익환 시인의 육성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불과 30여 년 전엔 ‘잠꼬대 아닌 잠꼬대’였던 통일과 평화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오늘 다시 꺼내 읽는 문 목사의 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한한 힘이 되고 있다.

<2018-06-18>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새책]“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통일 시대에 다시 읽는 늦봄 문익환

월, 2018/06/1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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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일 연구소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여는역사_역적’시즌 2 방영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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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2월 18일 민족문제연구소 역사전문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_‘역적’시즌 2 >가 시작됩니다.
지난 5월~9월까지 방송한 ‘내일을여는역사’ 시즌1 ‘역적’은 애플에서 2017년 새로 출시된 팟캐스트 중 최다 다운로드 15위(한국지역 순위)에 오를 만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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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18일부터 시작되는 시즌 2는 연구소가 국민TV와 손잡고 오디오뿐 아니라 영상으로도 함께 방영합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 출연진 : 박한용, 노기환, 방학진, 김광진 등

목, 2017/12/1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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