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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귀순 관련자료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내부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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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귀순 관련자료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내부기록」

익명 (미확인) | 월, 2018/05/2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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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전투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1937.6.5. 호외

 

 

동북항일연군은 1935년 8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동북항일연군 통일군대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建制宣言)에 따라 1936년 3월 만주지방에서 항일무장운동을 통합해 기존의 동북인민혁명군을 확대하여 만든 항일무장단체이다. 초기에는 공산당계열, 국민당계열, 토비(土匪), 한국민족주의계열 등의 연합이었지만 중일전쟁 이후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군만 남게 된다.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 3월부터 1937년 10월까지 제1군부터 제11군까지 편재되었고 제1·2군은 남만주에서, 제4·5·7·8·10군은 동만주에서, 제3·6·9·11군은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에서 1938년까지 만주 각지에서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중 김일성, 김책, 최현, 최용건 등 다수의 한인들이 참여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특히 김일성은 왕청유격대 정위를 거쳐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 사장, 1938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6월 김일성 부대를 중심으로 국내 진공을 감행한 보천보 전투는 동아일보가 호외로 대서특필할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이른바 ‘동남부치안숙정공작(東南部治安肅正工作-길림・간도·통화 3성연합 치안숙정공작)’을 개시하여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연길현에 토벌대사령부를 설치하고 관동군 제2수비대(길림 소재)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을 토벌대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이 토벌작전에 일본군 6,500명, 만주국군 25,000명, 길림・간도·통화성 경찰토벌대 35,000명 등 총 6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또한 비행기까지 출동시켜 정찰, 기총소사, 폭격을 가하고 투항 권유 유인물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각급 지방행정기관과 협화회를 동원, 현지 주민들에 대한 사상공작을 펼치고 항일연군들에 대한 귀순공작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특히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도자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는데 양정우·조아범·김일성·진한장·최현에게 1만원, 박득범·방진성에게 5천원, 위증민·전광(오성륜)에게 3천원의 현상금이 각각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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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노조에 토벌대가 동북항일연군으로부터 노획한 사진들. 출처는 일본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

 

이러한 소탕작전으로 인해 1940년 1월 이금명 사살, 2월 1로군 총사령 양정우 사살, 1로군 참모장 방진성 체포, 1940년 12월 제5사장 진한장 사살, 1941년 1월 1로군 정치위원 전광 귀순, 1941년 3월 제2로군 군장 위증민 사살 등으로 동북항일연군은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렀다. 노조에 토벌대사령부는 1941년 3월 19일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을 성공리에 마치고 해산했다. 노조에 토벌작전이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는 귀순한 동북항일연군을 토벌대와 귀순공작대로 활용하고 그들의 정보를 이용해 동북항일연군의 근거지 곧 밀영·피복창·지하창고까지 모조리 파괴했기 때문이다.
노조에 대토벌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김일성과 최현이 각각 이끄는 제2방면군과 제3방면군 제13여단은 1940년 하반기에 소만국경의 소련 영내로 철수했다. 이후 소규모 유격대를 편성해 소만국경을 넘어 관동군과 간헐적인 전투를 벌이기는 했으나 대규모 무장투쟁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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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에 토벌사령부가 1941년 2월 제작한 길림·통화·간도 3성 지역 요도(要圖). 출처는 일본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연길 노조에 토벌대사령부(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가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한창 진행중이던 1940년 10월 19일에 선전용으로 발간한 소책자 「박득범(朴得範) 김재범(金在範) 김백산(金白山) 내부기록(來部記錄)」(일본방위성 방위연구소 소장)이다. 총 9쪽으로 된 이 소책자는 귀순자 3인과 노조에 사령관의 면담, 노조에 사령관의 훈시, 박득범·김재범·김백산의 ‘결심을 말하다’, 기념사진, 박득범 체포시 압수한 총기 일람표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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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 1940.10.19)의 표지와 기념사진. 기념사진에서 앞줄 왼쪽부터 다나카 경비과장, 노조에 사령관, 유홍순 간도성 차장. 가운데줄 왼쪽부터 김재범, 박득범, 김백산.

 

1940년 10월 19일 오전 11시 30분 박득범은 김재범, 김백산과 함께 연길 노조에 토벌대사령부에 방문했다. 사령관실에서 노조에 사령관을 접견했는데 이 자리에 간도성 차장 유홍순(창씨명 中原鴻洵)과 다나카(田中) 경비과장, 사령관 부관 하세가와(長谷川) 소좌가 함께 배석했다. 유홍순 차장,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순으로 노조에 사령관과 인사를 나누고, 노조에 사령관이 귀순자 3명에게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해 매진해달라”는 취지의 훈시를 하였다.
그러자 박득범이 “우리는 일본 신민의 일원으로서 만주국 구성분자가 되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동아신질서 건설, 아울러 만주국 치안 숙정에 철저히 매진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맹세합니다.”라고 귀순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김재범과 김백산도 동일한 취지의 결심을 이야기하였다. 노조에 사령관의 선창하에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은 “대일본 천황폐하의 충량한 신민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만주국 황제폐하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충성 서약을 하였다. 끝으로 노조에 토벌사령부 인근에 위치한 충혼비(忠魂碑) 앞에서 기념 촬영하였다.

 


 

결심을 말하다

박득범

박득범오늘까지 걸어온 길이 오로지 암흑이었음을 이번에 처음으로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의 죄는 실로 엄청 나서 중형에 처해짐이 너무도 마땅하지만 산에서 내려온 후 각 기관 특히 군부당국이 너무도 친절하고 관대히 대우하고 지도해 주신 것에 대해 무슨 말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 좋을지 모를 따름입니다.지금 각하의 훈시를 경청하니 우리가 밟아온 길을 확실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일본 신민의 일원으로서 만주국 구성분자가 되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동아신질서 건설, 아울러 만주국 치안 숙정에 철저히 매진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맹세합니다. 아무쪼록 선도, 지도 편달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마지막으로 특별히 심경을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그동안 만주국 특히 조선인 동포에게 또한 경제와 산업, 문화 기타의 건설에 있어서 파괴적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 이제와 생각하니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만주국) 부흥에 대해 미력이나마 한층 더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이제 「내부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자. 박득범은 1908년 연길현 부암동에서 태어났다. 1932년 부암동 농민협회에 참가하고 그해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적위대 중대장이 되었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1사 제1단 정치위원이 되었다. 1939년 8월 항일연군 제1로군 제3방면군 참모장이 되었고, 1940년 3월 제1로군 사령부 직할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이 되었다. 1939년 8월 박득범은 간도성 돈화현 한원봉 부근에서 관동군 독립보병 28대대와 전투를 벌여 일본군 32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린 것을 비롯해 1940년 9월 체포되기 전까지 일만 군경과 3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수백 명의 군경을 전사시켰다. 9월 말 왕청현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연길로 압송된 후 변절하여 간도성 치안공작반 제2공작반에서 귀순공작을 벌였다. 일제 패망 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소련 하바로프스끄현 세레뜨낀에서 노역하다가 1950년 석방되어 북한으로 갔다.
김재범은 1937년부터 1938년 11월까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 제7단에서 정치위원으로 있었다. 이후 김일성 부대(제1로군 제2방면군) 정치주임으로서 연길현 동불사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40년 6월 김백산의 밀고에 따라 안도현 대마녹진에서 일만군과 공작반원들에게 체포됐다. 9월 25일 위증민의 문건 등 주요 정보를 일만군에 제공해 토벌작전에 유용하게 쓰이도록 하였다. 노조에 토벌대사령부 방문 직후에 동포 여성과 결혼해 연길가에 신혼살림을 차렸다(『만선일보』 1940.10.23). 한편 김백산에 대해서는 제1로군 경위려의 제3단 단장을 맡고 있었고, 1940년 3월 체포되어 투항한 후 김재범, 박득범 체포·귀순에 적극 나섰다고만 알려져 있다.
당시 간도성 차장이었던 유홍순은 전북 내무부 산업과장으로 있다가 1934년 11월 만주국 간도성 민정청 실업과장으로 영전하였고 이후 간도성 실업청장, 민생청장을 지냈다. 1940년 5월부터 간도성 차장에 임명되었고 ‘동남부치안숙정공작’ 시기에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조직을 주도, 고문에 선임되어 간도성 귀순공작반을 지휘하였다. 1943년 12월 간도성 차장을 그만두고 귀국하여 강원도지사에 올라 해방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949년 3월 반민특위 강원도조사부에 체포되어 그해 7월 공민권정지 3년형에 처해졌다.
토벌대 사령관인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22기로 1939년 8월 관동군 제2독립수비대(길림 소재) 사령관에 임명되어 그해 10월부터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을 진두지휘하였다. 1941년 3월 사령부가 해산되자 천진 소재 독립혼성 7여단장으로 부임했고 독립혼성 제30여단장(상해), 마에바시(前橋)육군예비사관학교장, 제63사단장을 역임하다가 1945년 4월 예편했다.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내부기록」은 만주지역 치안숙정시기에 일제가 집요하게 펼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사상, 귀순공작의 실상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일제가 치안숙정 관련 문서를 통해 선무·귀순공작에 대한 실시방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데 비해 구체적인 실천사례가 책자로 제작된 것은 드물어 그 사료적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박광종 선임연구원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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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연구소,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 사업 종료

연구소는 경기도의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 사업을 2019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 진행하여 올 4월 17일에 종료하였다. 객원연구자로 참가한 조재곤 교수, 김도훈 교수와 소내 조세열 상임이사와 이순우 책임연구원 등 9명의 연구자가 참여하였다.
작년은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경기도에서 현재까지 향유되고 있는 무·유형의 문화 속 친일잔재를 체계적으로 수집, 기록, 관리하여 지속적인 연구 교육의 콘텐츠로 개발하려는 의도하에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간 조사연구용역 사업은 착수보고 후 중간보고회, 자문회의 등을 거쳐 2020년 4월 최종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문헌조사와 현장조사를 병행하며 일제잔재를 조사, 수집하였으며 기존의 잔재를 찾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원, 안성의 일제식 지명 존속이나 각급 학교 교표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를 찾아내는 등 새로운 성과도 일궈냈다.
1905년 러·일전쟁기부터 1945년 해방 전후기를 시간적 범위로 설정하고, 공간적 범위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경기도 한정하여 유·무형의 친일문화잔재를 조사 연구하였다.
연구 보고서는 친일문화잔재 이상의 카테고리로 “일제잔재”의 개념 정리, 친일 인물과 문화계에 남겨진 그들의 행적으로 시작된다. 다음으로는 기념비, 송덕비, 기념탑, 동상 등의 기념물 및 건축물을 다루고 있다. 그 뒤로 친일인물이 작사·작곡한 교가와 교표에 남겨진 일제 잔재 등을 알리고 있다. 또한 일본식으로 변경된 지명과 특히 “영동(榮洞: 일제지명 榮町)”이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도 그 잔재가 뚜렷하게 남아있는 수원과 안성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해외의 친일청산 사례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일제잔재의 청산 전망과 과제를 언급한다.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은 일상생활에까지 깊숙하게 뿌리박혀 있는 일제잔재를 찾아내어 청산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수조사의 필요성을 제시하였고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의 기초를 다졌으며, 더 나아가 시민의 역사의식을 제고할 수있는 의미있는 작업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화, 2020/05/26-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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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재일동포들, 조선통신사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다

조영숙 도쿄지회 총무

2019년 11월 10일 오오타(大田)민단 주최의 역사탐방 여행으로 시즈오카의 淸見寺를 찾았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 후지산도 멋지게 보였고, 마침 이날이 일본의 새 천황 즉위 퍼레이드가 있는 날이라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여행했다.
올해는 무오독립선, 2·8독립선언, 3·1혁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뜻깊은 해이다. 그야말로 선열님들의 해이다. 선열님들의 뜻을 이어받아 동북아 평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뜻깊은 올해에 불행하게도 한일관계는 최악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그 옛날, 양국은 원한과 불신의 상처를 딛고 조선통신사를 통해 평화와 교류의 역사를 200여 년간 이어왔다. 한일관계의 틈새에 끼어 살고있는 우리 재일동포들이 어찌 그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그리워하고 다시 새겨보고 싶지 않겠는가?(조선통신사와 관련한 여러 유물들이 한일 두 나라의 시민사회의 노력에 의해 2018년 유네스코의‘세계기억유산’에 등록되었다.)
淸見寺에 도착하여 안내 설명을 듣다가 우리 일행 모두가 깜짝 놀랐다. 2019년 7월 7일자 동경신문 기사의 복사본을 배부받았는데, 그 기사 내용에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가을에 일본을 방문하여 淸見寺에서 아베 수상을 만날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다.(2018년은 양국의 문화교류를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수상이 함께 발표한 ‘한일관계 파트너십 선언’ 20주년이 되던 해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이후 강제징용문제, 수출규제 강화문제, 지소미아문제 등으로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동경신문은 이 어려운 한일관계에 국민들의 대립감정을 진정시키고 대화를 통해 길을 찾기 바란다며 꿈으로 끝난 淸見寺에서의 한일 정상의 만남을 다시 꿈꾼다며 글을 맺고 있다.
두 정상의 만남을 가장 간절히 바라는 건 재일동포들이 아닐까? 한일 두 나라가 갈등하면 몇 배가 더 아프고 두 나라가 잘 지내면 평안하게 꽃피는 존재가 바로 재일동포들이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은 일제시대 살길을 찾아 건너온 동포들의 후손으로부터 뉴카마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선통신사가 머문 淸見寺를 찾아가는 날도 이런 다양한 재일동포들과 일본인도 함께 했다.
조선통신사는 처음엔 두 나라의 정치적인 목적이 우선이었다고 한다. 조선측에선 조선포로 귀환, 일본정세 파악 등이었고 일본측에선 도쿠카와 이에야스 막부의 새로운 외교방침, 국내정치적 목적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엔 문화교류로 확대 발전되어 조선의 선진문물이 일본에 많이 전해졌고 일본 문화도 조선에 전해지는 무지개 가교였다. 마침 그날 여행에서 출출할 때 먹으려고 고구마를 삶아 가져갔다. 고구마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작물로 많은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낸 구황작물이 되었다.
한편 조선의 선진문물 중에서 일본에 전해진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허준의 <동의보감> 속의 의술이 일본에 전해져 많은 일본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귀한 역할을 했다. 그 귀한 역할을 이 시대 재일동포에게 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사회를 일본인들과 함께 만들며 공생하는 재일동포들, 그러나 재일동포 문제가 한일협정 때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동포들은 일본사회에서 차별받고 한편 조국의 버림 속에서 살아왔다.
몇 겹의 고통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 동포들이 이제 노령을 맞아 몸의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동의보감’이 이 시대 재일동포들에게 빛과 힘이 되어주기를 희망해본다.(<동의보감>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으로 끝난 한일정상회담이 다시 열려야 한다. 그 정상회담이 열리는 장소는 작년 오오타민단에서 역사탐방을 간 ‘고마진자(高麗神社)’ 쯤이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그곳은 고대 양국간의 풍요로운 교류가 있었음을 증거하는 곳이다.
꽁꽁 묶인 한일관계가 부디 잘 풀리기를 기원하면서 내년의 역사탐방은 좀더 재일의 뿌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 떠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오오타민단 지부에 전한다.
• 이 감상문은 오오타민단 소식지 제85호(2020.3.27.)에 간략히 실렸다.

화, 2020/05/26-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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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어떤 인연 –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에 부쳐

김경현 후원회원(행정안전부 전문위원)

 

2001년 8월부터 연구소를 후원하기 시작한 김경현 후원회원은 제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자이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3팀장을 지냈다. 현재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서 전문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 글은 2018년 타계한 ‘진주정신’의 표상으로 일컬으며 지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왔던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를 맞이해 고인과의 인연을 되돌아보고 쓴 회고담이자 추도사이다.- 엮은이

박노정 선생님의 생전 모습(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박노정(朴魯貞, 1950~2018) 선생님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분의 삶을 이야기해야 제가 맺은 인연에 대한 의미도 부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노정 선생님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경남 진주시 봉곡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주 교육장을 지낸 부친과 중등학교 교장을 지낸 형이 있는 교육자 집안이었습니다. 경상대학교 농과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학군장교(ROTC)로 임관해 전방에서 육군보병 소대장을 지냈으나 폭압적인 군대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군병원에 입원했다가 의가사로 제대했습니다.
이후 출가하고 입산해 팔공산 원효암 등지를 전전하며 승려생활을 하다가 속세에 나왔는데, 고향 진주에 돌아온 후 시인과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사회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습니다.
문인활동으로 ‘동기 이경순선생’ 전집간행위원회 상임위원, 진주문인협회장, ‘진주 가을문예’운영위원장, 진주민예총 회장, 이형기시인 기념사업회장, 경남시인협회장 등을 지냈습니다. 이경순(李敬純)은 일제 때 아나키스트로 활동했던 진주의 시인이고, 이형기(李炯基)도 시 「낙화(落花)」로 유명한 진주의 시인입니다.
특히 사회단체활동으로 남성당 김장하(金章河) 선생께서 설립한 진주 남성문화재단에서 이사로 활동했으며, 진주문화예술재단 이사를 비롯해 진주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진주정신지키기모임 대표, 진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6․15공동선언실현을 위한 진주시민운동’ 상임대표, 진주주민협의회 공동대표, 독도수호와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저지를 위한 시민운동본부 공동대표 겸 ‘친일잔재청산 시민운동 공동대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시민단체를 맡아 지역사회운동을 이끄는데 헌신했습니다.
박선생님의 지역사회활동 중 가장 두드러지고 애정을 쏟았던 활동은 지역언론운동이었습니다. 1990년 3월 시민주를 모아 <진주신문>이 창간될 때 발행인과 편집인을 맡았는데, 창간 호에 축하시를 발표했습니다. 이후 2002년까지 <진주신문> 대표이사를 지내며 지역언론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박선생님은 <진주신문> 발행인을 지낼 때 지역권력과 토호세력을 상대로 비리와 부정을 폭로하면서 여러 차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사건으로 피소되어 법정에 서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친일청산운동에 앞장서 친일화가였던 이당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논개영정(論介影幀)’을 논개의 사당인 진주성 의기사에서 뜯어내 폐출했다가 유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박선생님은 ‘진주정신’을 지키고 역사정의를 세운 행위가 죄가 된다면 벌을 달게받겠다고 벌금납부를 거부해 강제노역형에 처해짐으로써 진주교도소 노역장에 유치되었습니다. 이에 진주시민들이 앞장서 모금운동을 벌여 그 성금으로 벌금을 납부해 풀려났으며, 남은 금액은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를 창립하는데 의미있는 기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진주지역사회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실천적 삶의 모습을 보여준 박선생님이었습니다. 과연 저는 어떻게 박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의 끈을 맺게 되었을까요. 1980년대 중반 대학 재학 때 절친했던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선배를 통해 박선생님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는 경상대 터울시조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여태전(余泰田) 선배였습니다. 어느날 저는 여태전 선배의 손에 이끌려 박선생님이 본성동 옛 진주시청 앞에서 운영하는 찻집 ‘아란야(阿蘭若)’[불교용어로 ‘수행처’를 의미함]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박선생님이 가르치는 <금강경(金剛經)> 강의를 듣다가 따분해서 밥만 몇 차례 얻어먹고 도망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박선생님은 개의치 않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저를 불러 <진주신문>에 들어오라고 이끌어 1991년 8월 저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직업으로 팔자에도 없는 신문기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박선생님은 아란야를 방문한 양산 효암학원 채현국(蔡鉉國) 이사장에게 여태전 선배를 훌륭한 젊은이라고 소개해 여선배가 바라던 교직의 길을 걷게 해 주었습니다.
여선배는 양산 효암여상을 시작으로 진주 삼현여고 교사, 산청 간디학교 교감, 창원 태봉고교장을 거쳐 남해 상주중학교장을 지내며 대안교육에 힘쓴 훌륭한 교육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여선배도 박선생님이 추구했던 바와 같이 민족정신과 역사정의활동에 공감하여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지요.
한편 박선생님이 <진주신문>에 있을 때 가끔 직원회식을 가졌는데 드물었지만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술은 전혀 마시지 못했지만 노래는 꽤 잘 불렀습니다. 2차로 자리를 옮긴 노래방에서 반주에 맞추어 노래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르던 것을 잊지 못합니다. 이 노래는 음유시인으로 잘 알려진 백창우(白昌牛) 시인이 작사・작곡하고 가창력과 호소력이 있던 임희숙(任喜淑) 가수가 1984년에 불러 히트한 곡입니다. 노랫말과 음율이 마치 박선생님이 젊은 시절에 겪었던 고단하고 힘들었던 신산한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3년 저는 박선생님과 함께 검찰조사를 받고 법정에 서야만 했던 운명적인 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제가 당시 경남지역의 최대 현안사업이던 남강댐 보강공사에 따른 수몰지 보상과 관련한 측량비리 및 부정보상에 대한 문제를 심층 취재한 기사를 작성해 보도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그때 이 기사를 본 사천군의회 이원식(李源植) 의원이 자신의 땅에 측량비리와 부정보상이 있다는 취지로 보도한 <진주신문>의 기사에 대해 취재기자였던 저와 신문발행인이었던 박선생님을 창원지방검찰청 진주지청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했던 것입니다.
진주지청은 고소사건을 접수하자마자 경찰에 사건을 배당하지 않고 직접 수사에 착수해 신속하게 두 사람을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검찰에 구속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로 당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이의원은 당시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순회심판 조정위원을 맡고 있었던 지역유력자로서 검찰과 법원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원식 의원은 당시 사천군의원으로서 지역현안과 관련해 언론보도 및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회적 지위에 있었으므로 <진주신문>의 기사가 비방을 목적으로 작성된 사실무근한 허위사실로 보기 어려워 그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심 진주지원 재판에서 검사는 피고인들에게 징역 3년씩을 구형했고 판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습니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각 불복하고 항소했습니다. 그 결과 창원지방법원에서 열린 2심 합의부재판에서는 치열한 법정공방 끝에 사실관계가 입증되고 언론보도의 공익성이 인정되어 실형을 내린 원심판결을 파기했습니다. 그러나 기사에 일부 비방의 목적이 있다고 여전히 판단함으로써 벌금형이 선택되어 각각 벌금 100만원이 선고되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벌금형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다시 상고했는데 대법원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원심파기환송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냈습니다. 1997년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비방의 목적이 있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함으로써 사건을 창원지방법원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지역유력자이며 공적인 존재로서 현직 군의원에 대한 비리의혹은 정당한 공적 관심의 대상이므로 언론보도로 인한 군의원 개인의 명예가 훼손된다고 하기보다 지역민의 알권리가 우선되어야 함으로 이를 취재해 보도하는 언론의 행위가 부당하다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판결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창원지방법원 형사부로 되돌아온 파기환송심 재판에서 피고인들에게 모두 무죄가 선고되면서 이 사건은 완전히 끝나 판결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5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끌어온 <진주신문>에 대한 남강댐 수몰지 보상과 관련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사건이 무죄로 판결되면서 진실이 승리하고 정의가 살아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저 자신의 개인적인 승리보다 올곧은 언론인의 자세로 초지일관한 박선생님의 승리였고, 또한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진주신문>의 승리였습니다. 이후 저는 <진주신문> 필화사건을 깨끗하게 마무리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신문사를 떠났습니다. 비록 IMF사태를 계기로 신문사를 그만 두고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와 논개제에서 잠시 문화운동을 하다가 2004년 역사운동을 위해 진주를 떠나 서울로 왔지만, 박선생님과 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주에서 친일청산운동을 하던 박선생님을 서울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는데, 2009년 <친일인명사전> 출간을 기념하는 국민대회가 열리던 자리였습니다. 원래 숙명여대 강당에서 열기로 예정되었으나 대학측의 거부로 효창공원의 백범 김구(金九) 선생 묘소로 옮겨져 열릴 때 그곳을 찾아온 박선생님을 발견하고 매우 놀라워하며 뜨겁게 해후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당시 저는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활동을 하면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편찬활동에도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박선생님은 2015년 형평문학선양사업회장 등을 지내며 만년에도 활발히 활동했으나 2018년 지병이 악화되어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00세시대라는 요즘의 장수추세에 비추어 보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너무 이른 야속한 죽음은 아니었는지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부인 황선옥(黃善玉) 여사께서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박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시에서 자신과 함께 했던 ‘낯선 사내’를 스스로 지우고 먼 길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박선생님이 지웠던 낯선 사내는 생애
의 전부를 자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청빈한 삶을 살았던 박선생님의 자화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 박선생님은 결코 낯선 사내가 아니었으며 그는 아직도 저의 ‘영원한 <진주신문> 발행인’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진주신문>도 박선생님도 없고 단지 이름만 같은 짝퉁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여전히 제 마음속에는 젊은 혈기가 넘치던 그때 그 시절의 <진주신문>과 박선생님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박선생님의 장례식 때 황여사께서 다음 생에는 부부가 아닌 좋은 친구로 만나자고 했던 말이 뇌리에 남습니다. 저 역시 다음 생에는 기자와 발행인이 아니더라도 어떤 인연이든지 끈이 이어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도 괘념치 않을 것입니다.
박선생님이 생전에 남긴 시집으로는 첫 시집 <바람도 한참은 바람난 바람이 되어>를 비롯해 <눈물공양>과 <운주사> 등이 있는데, 저는 첫 시집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아직도 귓전에는 박선생님이 신문사에서 저를 부르던 호칭이 이명처럼 들려옵니다. ‘김경현 기자’가 아닌 “경현 수좌”라고 부르곤 했던 다정한 목소리가 이제는 바람이 되어 다시 귓전을 스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또 다른 저의 사회학과 선배이던 양곡(暘谷) 시인의 시 「고 박노정 시인」을 인용합니다. 이 시를 음미하면서 박선생님의 영면을 빌며, 2주기(7월 4일)를 앞두고 그분의 삶과 인연을 소중하게 추억하고자 합니다.

유발거사(有髮居士)였다/술은 마시지 못해 차를 즐기며/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언제나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시(詩)를 좋아했고/문화와 예술을 좋아했다/무엇보다도 올곧고 결 바른 시대의/민족정신을 좋아했다????에나 진주사람이었다/옳고 바른 일에는 늘 앞장서고자 했고/시들어져가거나 꺼져가는 목숨들에게는 슬그머니 다가가/빙그레 미소 지으며 새로운 생명과 가치를 불어넣어주곤 했다.

화, 2020/05/2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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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친일파 흉상 철거, 고등학생의 민원에 보훈처가 답하다

임승관 전남동부지부장

김정태 흉상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작년, 전국적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행사가 있었다. 전남교육청의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남청소년 역사탐구대회’를 진행해 왔으며 작년
으로 9회째를 맞이했다. 작년도 주제는 ‘임정 100주년·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 전라도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의 실상과 해결방안’ ‘전남지역 친일잔재의 실상과 해결방안’이었으며 도내 중·고교 70여 팀이 참가했다.
참가팀 중에는 고흥 녹동고등학교 팀도 있었는데 이 학생들은 대회 과정에서 자신들의 고장에 김정태의 흉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정태(1869~1935)는 강제합병 후, 전남 영광군수, 광주군수, 순천군수 등을 지냈으며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전남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했다. 1924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한국병합기념장(1912),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15),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28) 등을 받았다.
김정태의 아들 김상형(1897~?) 역시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며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전조선시국강연반 연사로 참여하였다. 중추원 의원 시절에는 내선일체 정신의 구현은 “반도민중의 일본화”에 달렸다고 주장하며 “천황폐하를 경모하여 받드는 정조(情操)를 고양”시키기 위해 “마을에서 학교에서 황거망배(皇居望拜)와 천양무궁(天壤無窮)을 기원하고 마음을 정화해 황국신민임을 맹세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 자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상형은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에 송치되었다.
이와 같은 김정태의 친일행적을 확인한 학생들은 2019년 8월 고흥군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광복 74년이 지났음에도 이런 역겨운 동상이 주민들의 휴식공간인 옥하공원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고흥 군민들을 내려다보며 분명히 비웃고 있을 것입니다. 동상이 철거된다면 주민들의 애국심과 지역 역사의식이 한층 더 함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친일파 동상이 버젓이 세워진 채로 우릴 내려다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학생의 민원 글 발췌

 

고흥군은 학생들의 민원을 국가보훈처에 이첩했다. 김정태 흉상이 자리했던 옥하공원 내 토지를 비롯해 약 56만㎡의 토지가 김정태 후손들의 소유였으나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에 의해서 국가로 귀속된 이후 현재까지 국가보훈처가 관리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민원 전까지 국가보훈처는 그 땅에 친일파의 흉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민원을 넘겨받은 국가보훈처는 김정태의 후손에게 흉상을 자진 철거할 것을 통보했다. 그러나 후손들이 흉상 철거를 미루자 국가보훈처는 행정대집행을 통보했고, 결국 후손들은 4월 28일 오전 흉상을 철거했다. 철거는 국가보훈처와 고흥군청 관계자들이 오기 전에 신속히 진행 되었지만 필자는 오전 일찍 현장에 가 있었기에 다행히 철거의 모든 과정을 영상에 담아 지역언론사 등에 제공할 수 있었다.
김정태 흉상 철거는 아마도 친일파 기념물 철거를 학생들이 요구하고 고흥군과 국가보훈처 등 공공기관이 응답한 첫 번째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흉상 철거를 담당한 국가보훈처 담당자는 배움을 실천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행동과 민원 내용에 진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민원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백방으로 철거 방법을 알아내어 결국 성과를 이룬 보훈처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증명해 준 녹동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화, 2020/05/2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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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창군 80주년 광복군 합동추모제전

 

한국광복군 창군 80주년을 맞아 한국광복군동지회 주최로 6월 1일 국립서울현충원 대한독립군 무명용사위령탑에서 ‘창군 80주년 광복군 합동추모제전’이 봉행됐다. 김영관(97)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이 추념사를 했는데 현재 생존 광복군은 15명으로 그나마 거동이 자유로운 분은 김영관 회장뿐이다.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로 불리고 있으나 회원들이 점점 나이 들어가며 동지회 사무실 운영조차 어렵게 꾸려가고 있어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특히 이날 추모제전에는 국방부 등 유관 기관의 참여와 후원이 눈에 띄지 않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 무색했다. 이날 추모제전에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참석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6/2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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