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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귀순 관련자료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내부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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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귀순 관련자료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내부기록」

익명 (미확인) | 월, 2018/05/28-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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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전투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1937.6.5. 호외

 

 

동북항일연군은 1935년 8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동북항일연군 통일군대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建制宣言)에 따라 1936년 3월 만주지방에서 항일무장운동을 통합해 기존의 동북인민혁명군을 확대하여 만든 항일무장단체이다. 초기에는 공산당계열, 국민당계열, 토비(土匪), 한국민족주의계열 등의 연합이었지만 중일전쟁 이후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군만 남게 된다.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 3월부터 1937년 10월까지 제1군부터 제11군까지 편재되었고 제1·2군은 남만주에서, 제4·5·7·8·10군은 동만주에서, 제3·6·9·11군은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에서 1938년까지 만주 각지에서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중 김일성, 김책, 최현, 최용건 등 다수의 한인들이 참여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특히 김일성은 왕청유격대 정위를 거쳐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 사장, 1938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6월 김일성 부대를 중심으로 국내 진공을 감행한 보천보 전투는 동아일보가 호외로 대서특필할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이른바 ‘동남부치안숙정공작(東南部治安肅正工作-길림・간도·통화 3성연합 치안숙정공작)’을 개시하여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연길현에 토벌대사령부를 설치하고 관동군 제2수비대(길림 소재)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을 토벌대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이 토벌작전에 일본군 6,500명, 만주국군 25,000명, 길림・간도·통화성 경찰토벌대 35,000명 등 총 6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또한 비행기까지 출동시켜 정찰, 기총소사, 폭격을 가하고 투항 권유 유인물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각급 지방행정기관과 협화회를 동원, 현지 주민들에 대한 사상공작을 펼치고 항일연군들에 대한 귀순공작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특히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도자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는데 양정우·조아범·김일성·진한장·최현에게 1만원, 박득범·방진성에게 5천원, 위증민·전광(오성륜)에게 3천원의 현상금이 각각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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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노조에 토벌대가 동북항일연군으로부터 노획한 사진들. 출처는 일본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

 

이러한 소탕작전으로 인해 1940년 1월 이금명 사살, 2월 1로군 총사령 양정우 사살, 1로군 참모장 방진성 체포, 1940년 12월 제5사장 진한장 사살, 1941년 1월 1로군 정치위원 전광 귀순, 1941년 3월 제2로군 군장 위증민 사살 등으로 동북항일연군은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렀다. 노조에 토벌대사령부는 1941년 3월 19일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을 성공리에 마치고 해산했다. 노조에 토벌작전이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는 귀순한 동북항일연군을 토벌대와 귀순공작대로 활용하고 그들의 정보를 이용해 동북항일연군의 근거지 곧 밀영·피복창·지하창고까지 모조리 파괴했기 때문이다.
노조에 대토벌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김일성과 최현이 각각 이끄는 제2방면군과 제3방면군 제13여단은 1940년 하반기에 소만국경의 소련 영내로 철수했다. 이후 소규모 유격대를 편성해 소만국경을 넘어 관동군과 간헐적인 전투를 벌이기는 했으나 대규모 무장투쟁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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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에 토벌사령부가 1941년 2월 제작한 길림·통화·간도 3성 지역 요도(要圖). 출처는 일본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연길 노조에 토벌대사령부(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가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한창 진행중이던 1940년 10월 19일에 선전용으로 발간한 소책자 「박득범(朴得範) 김재범(金在範) 김백산(金白山) 내부기록(來部記錄)」(일본방위성 방위연구소 소장)이다. 총 9쪽으로 된 이 소책자는 귀순자 3인과 노조에 사령관의 면담, 노조에 사령관의 훈시, 박득범·김재범·김백산의 ‘결심을 말하다’, 기념사진, 박득범 체포시 압수한 총기 일람표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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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 1940.10.19)의 표지와 기념사진. 기념사진에서 앞줄 왼쪽부터 다나카 경비과장, 노조에 사령관, 유홍순 간도성 차장. 가운데줄 왼쪽부터 김재범, 박득범, 김백산.

 

1940년 10월 19일 오전 11시 30분 박득범은 김재범, 김백산과 함께 연길 노조에 토벌대사령부에 방문했다. 사령관실에서 노조에 사령관을 접견했는데 이 자리에 간도성 차장 유홍순(창씨명 中原鴻洵)과 다나카(田中) 경비과장, 사령관 부관 하세가와(長谷川) 소좌가 함께 배석했다. 유홍순 차장,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순으로 노조에 사령관과 인사를 나누고, 노조에 사령관이 귀순자 3명에게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해 매진해달라”는 취지의 훈시를 하였다.
그러자 박득범이 “우리는 일본 신민의 일원으로서 만주국 구성분자가 되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동아신질서 건설, 아울러 만주국 치안 숙정에 철저히 매진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맹세합니다.”라고 귀순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김재범과 김백산도 동일한 취지의 결심을 이야기하였다. 노조에 사령관의 선창하에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은 “대일본 천황폐하의 충량한 신민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만주국 황제폐하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충성 서약을 하였다. 끝으로 노조에 토벌사령부 인근에 위치한 충혼비(忠魂碑) 앞에서 기념 촬영하였다.

 


 

결심을 말하다

박득범

박득범오늘까지 걸어온 길이 오로지 암흑이었음을 이번에 처음으로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의 죄는 실로 엄청 나서 중형에 처해짐이 너무도 마땅하지만 산에서 내려온 후 각 기관 특히 군부당국이 너무도 친절하고 관대히 대우하고 지도해 주신 것에 대해 무슨 말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 좋을지 모를 따름입니다.지금 각하의 훈시를 경청하니 우리가 밟아온 길을 확실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일본 신민의 일원으로서 만주국 구성분자가 되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동아신질서 건설, 아울러 만주국 치안 숙정에 철저히 매진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맹세합니다. 아무쪼록 선도, 지도 편달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마지막으로 특별히 심경을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그동안 만주국 특히 조선인 동포에게 또한 경제와 산업, 문화 기타의 건설에 있어서 파괴적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 이제와 생각하니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만주국) 부흥에 대해 미력이나마 한층 더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이제 「내부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자. 박득범은 1908년 연길현 부암동에서 태어났다. 1932년 부암동 농민협회에 참가하고 그해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적위대 중대장이 되었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1사 제1단 정치위원이 되었다. 1939년 8월 항일연군 제1로군 제3방면군 참모장이 되었고, 1940년 3월 제1로군 사령부 직할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이 되었다. 1939년 8월 박득범은 간도성 돈화현 한원봉 부근에서 관동군 독립보병 28대대와 전투를 벌여 일본군 32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린 것을 비롯해 1940년 9월 체포되기 전까지 일만 군경과 3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수백 명의 군경을 전사시켰다. 9월 말 왕청현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연길로 압송된 후 변절하여 간도성 치안공작반 제2공작반에서 귀순공작을 벌였다. 일제 패망 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소련 하바로프스끄현 세레뜨낀에서 노역하다가 1950년 석방되어 북한으로 갔다.
김재범은 1937년부터 1938년 11월까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 제7단에서 정치위원으로 있었다. 이후 김일성 부대(제1로군 제2방면군) 정치주임으로서 연길현 동불사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40년 6월 김백산의 밀고에 따라 안도현 대마녹진에서 일만군과 공작반원들에게 체포됐다. 9월 25일 위증민의 문건 등 주요 정보를 일만군에 제공해 토벌작전에 유용하게 쓰이도록 하였다. 노조에 토벌대사령부 방문 직후에 동포 여성과 결혼해 연길가에 신혼살림을 차렸다(『만선일보』 1940.10.23). 한편 김백산에 대해서는 제1로군 경위려의 제3단 단장을 맡고 있었고, 1940년 3월 체포되어 투항한 후 김재범, 박득범 체포·귀순에 적극 나섰다고만 알려져 있다.
당시 간도성 차장이었던 유홍순은 전북 내무부 산업과장으로 있다가 1934년 11월 만주국 간도성 민정청 실업과장으로 영전하였고 이후 간도성 실업청장, 민생청장을 지냈다. 1940년 5월부터 간도성 차장에 임명되었고 ‘동남부치안숙정공작’ 시기에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조직을 주도, 고문에 선임되어 간도성 귀순공작반을 지휘하였다. 1943년 12월 간도성 차장을 그만두고 귀국하여 강원도지사에 올라 해방 때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949년 3월 반민특위 강원도조사부에 체포되어 그해 7월 공민권정지 3년형에 처해졌다.
토벌대 사령관인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22기로 1939년 8월 관동군 제2독립수비대(길림 소재) 사령관에 임명되어 그해 10월부터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을 진두지휘하였다. 1941년 3월 사령부가 해산되자 천진 소재 독립혼성 7여단장으로 부임했고 독립혼성 제30여단장(상해), 마에바시(前橋)육군예비사관학교장, 제63사단장을 역임하다가 1945년 4월 예편했다.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내부기록」은 만주지역 치안숙정시기에 일제가 집요하게 펼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사상, 귀순공작의 실상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일제가 치안숙정 관련 문서를 통해 선무·귀순공작에 대한 실시방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데 비해 구체적인 실천사례가 책자로 제작된 것은 드물어 그 사료적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박광종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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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보자!

도노히라 유코(殿平有子) 일러스트 작가

 

도노히라 유코(殿平有子)

작년 12월, 3년 만에 서울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짧은 방문이었지만 친구이자 가족처럼 지내는 김영환 씨가 활동하고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서울 시내에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시간이 별로 없어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스마트폰 지도를 보여주며 향했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주변에는 꽤 가파른 비탈길이 있습니다. 상쾌한 날씨여서 다음번엔 지하철로 천천히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가고싶은 곳에 있었습니다.
박물관 입구에는 한글과 영어로 박물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영어로는 ‘Museum of Japanese Colonial History in Korea.
’ 왠지 꾸밈없는 이 이름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일본인들은 이 역사에 대해 정부의 방침에 휘둘리듯 에둘러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역사임에도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고 피해왔습니다. 동시에 100여 년 이상 전에 시작된 이 고통의 역사가 내가 살고 있는시대에 이렇게 교류와 배움의 공간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현관문을 열자 1층 공간에는 학생들로 보이는 단체가 특별전시에 관한 해설을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2층의 상설전시장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도 한국 학생들이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이 전시를 접하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전시 설명은 대부분 한글로 쓰여 있지만, 일본어 가이드북이 있어 참조하면서 순서대로 전시를 둘러볼 수 있습니다.

“일제는 왜 조선을 침략했는가?” 전시공간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 표제. 그 아래설명은 구미를 필두로 세계적인 식민지화와 노예제도 등의 움직임 속에서 일제에 의한 침략이라는 문맥으로 짧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침략의 역사를 일본과 조선이라는 두 나라 사이의만의 문제로 생각하여 그 역사를 접한 우리들 개인까지가 피해와 가해라는 범주로 이분화되어버리는 일이 많은데, 이 설명에서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나누지 않고, 책임의 근본에 있는 구조적인 권력의 시스템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시공간에 빼곡히 전시되어 있는 자료와 유물은 내용으로도 양적으로도 충실합니다. 특히 조선 전역에 수없이 있었던 경찰서에 관한 사진과 문헌이 상세히 전시되어 있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신사(神社)의 설치도 그렇습니다. 일본이 서양을 본받아 폭주한 아시아 침략과정에서 조선에서는 창씨개명과 천황숭배 등 식민지 지배의 기초 작업을 위해 비참하고 비인도적인 방법이 이용되었습니다. 최근에 주변 친구들과 함께 하고 있는 공부 모임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인종차별, 토지약탈, 성차별 등의 폭력을 이용한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관한 문헌을 다소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배운 것을 떠올려보면, 일제의 지배로 인한 인간의 비극은 단지 우연처럼 ‘일어났다’가 아니라 필요한 폭력으로 자본의 발전을 위해 사용되고 지배하는 측과 착취당하는 측의 분단을 명확히 확립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저항을 표현한 사람들은 경찰의 과도한 단속을 받은 것이 자본과 국가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지배의 구조는 지금 사회에도 줄곧 이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자본의 힘이 약해지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자국이 내건 경제대책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져 내셔널리즘적인 사상이 고양되고 외국인과 소수자가 된 사람들에게 책임이 전가됩니다. 전시 후반에는 식민지시대에 목숨을 걸고 일본에 저항한 사람들과 최근의 다양한 운동에 관한 소책자와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저항사(抵抗史)를 접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기억을 전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 내용을 조금 쓰고 싶습니다. 전시 가운데에 ‘한 평으로 체험하는 식민지: 학교・감옥’이란 작은 코너가 있습니다. 낡은 목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벽에는 심문관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어 감옥의 심문실을 재현한 듯합니다. 몇 개의 단추를 누르면 심문내용을 재현하여 녹음한 음성이 흘러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은 3·1운동 당시 잡혀온 사람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어 번역문이 비치되어있어 귀중한 체험을 들을 수 있었는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역시 사람들의 저항의 역사에 가장 마음이 끌리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한국에서 운동사를 연구하고 있는 학생과 박물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박물관 자체는 평가하지만 심문 장면의 그 전시는 약간 지나치지(표현의 지나친 극화) 않은가 말했습니다.

저는 한국어로 흘러나오는 음성을 이해할 수 없어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고, 그 전시가 실제로 무엇이 문제인지 확실히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분명히 사람들의 체험을 제3자가 전하고자 할 때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조금 과장해서 극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심문 장면은 실제로 식민지 시대의 정부기관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연극의 퍼포먼스와 달리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현장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본래 그것이 박물관의 역할이라 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공감이 일어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어떤 표현이 가장 좋은것일까요. 역사로부터 배운 것을 오늘의 운동에 살리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밖에 느낄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박물관에는 이러한 개인의 체험을 접할 수 있는 자료와 구조적 폭력을 분석한 자료가 함께 있어 귀중한 공간이라 생각합니다.
박물관 개관과 운영에 관계한 많은 사람들에게 연대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꼭 다시 가고 싶습니다.


※ 도노히라 유코(殿平有子) 씨는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출신. 1997년 홋카이도 슈마리나이(朱鞠內)에서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을 발굴한 한일공동워크샵(현재 동아시아워크샵)에 참가했고 200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현재는 뉴욕에서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하면서 이민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화, 2020/01/21-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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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강원 영동지역에서는 정말 독립운동을 안 했을까?

김인성 후원회원(MBC강원영동 기자)

 

지난해는 3·1 만세운동 100주년이었습니다. 연초부터 연말까지 그야말로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새로운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며 우리 정부와 나라 곳곳에서 크고 작은 이슈들이 쏟아졌습니다. 언론에서도 의미 있는 보도와 프로그램을 연이어 쏟아냈죠. 저도 라디오 다큐멘터리 ‘기미년 3월 1일 강원영동’을 방송했었고, 11월부터 12월까지 두 달 동안 영동지역의 항일운동에 관한 뉴스를 보도했습니다. 우리나라엔 몇 명의 독립운동가가 있을까요? 아니 몇 명의 독립운동가가 정부로부터 인정받고 있을까요?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2020년 1월 현재 15,825명의 독립운동가가 서훈을 받은, 그러니까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공식 독립운동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구, 김좌진, 안중근, 윤봉길 등 30명이 1962년 가장 높은 훈격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것을 비롯해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까지 7종류의 훈장을 15,825명이 받은 겁니다. 만세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백성이 없었을 텐데 고작 15,000여명만 인정하는 정부의 서훈 정책이 옳은 거냐고 묻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있습니다.(MBC강원영동 ‘뉴스데스크 강원’ 2019년 12월 31일. ‘내년을 영동지역 독립운동사 재정립 원년으로’ 참고) 이렇게 서훈을 받으려면 본인 또는 직계가족이 독립운동 행적을 문서로 입증해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면 소요죄, 보안법, 치안유지법, 출판법 등 특정한 죄목을 적용받았습니다. 따라서 이때 ‘문서’란 바로 체포된 죄목과 어떤 활동으로 체포됐는지를 알 수 있는 일제 검경으로부터 수사를 받은 기록, 기소로 이어져 재판을 받은 뒤 나온 판결문, 그 판결에 따라 형무소에 갇혔던 수형기록,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입증되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공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강원 영동지역은 이렇게 문서로 증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증명해야 할 문서를 생산했을 기관이 함흥과 원산, 그러니까 지금의 북한지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원과 검찰은 함흥지방법원에, 형무소는 함흥과 원산에 있었는데 그렇다보니 현재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독립운동가임을 증명할 문서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동지역에서 가장 거센 항일운동이 펼쳐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양양을 제외하곤 3·1 만세운동 관련 독립운동가가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1990년대 중반에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강릉의 만세운동 기록이 발굴되며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나마 다른 지역의 경우는 지금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양양도 오로지 3·1 만세운동만 알려져 있고, 다른 항일운동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또, 3·1 만세운동도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가 당시 함흥지방법원에 근무하던 일본인 검사 이시카와 노부나가의 수사기록을 10년쯤 전 우연히 일본에서 발굴해 지난해 10월 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발표했습니다. 당시 국내 각종 기관과 일본의 도서관 네트워크 등을 통해 ‘함흥’이란 키워드를 나름의 방식으로 추적하고 있던 저는 ‘3·1 만세운동 100주년, 도쿄에서 함흥까지’란 제목의 이 세미나 개최 소식을 듣고 개인휴가를 내고 찾아가 들었습니다. 그리곤 그 자료에서 양양군 기사문리 만세운동 주동자에 대한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함흥이란 지역이 일제강점기 내내 강력한 항일운동이 이어졌던 곳이어서 발견된 자료에도 대부분 함흥지역의 체포자들에 대한 기록이었지만 딱 한 건, 양양의 기록이 나온 겁니다.

2심 재판인 복심 재판 기록이 경성지방법원에서 나오거나, 서대문형무소에서 수형기록이 나오거나,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확인한 게 아닌 영동지역의 만세운동 주동자에 대한 검거 직후의 수사기록이 발견된 것은 광복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이후 한 달간 여러 가지 데이터 분석과 독립운동가 단체와 후손들에 대한 취재를 이어간 뒤 11월 4일 ‘뉴스데스크 강원’ 시간을 통해 첫 번째 보도를 했고, 이후 다행히도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러시아 연수 과정에 선발돼 러시아 취재를 다녀오게 됐습니다. 그 결과 11월 4일부터 12월 31일 보도까지 모두 16건 보도했습니다. 보도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일본인 검사의 3·1 운동 수사기록 최초 발견 – 2019. 11. 04
2. 일제 검사 수사 자료에 독립운동가 후손 관심 – 2019. 11. 05
3. 영동지역에 독립운동 자료 적은 이유 – 2019. 11. 07
4. 영동지역의 독립유공자 수는 정말 적다! – 2019. 11. 12
5. 독립운동 행적 찾아도 서훈 받기 어려워 – 2019. 11. 14
6. 서대문형무소에서 실마리 찾을 수 있다! – 2019. 11. 21
7. 서대문형무소 수감자의 13.7%만 서훈 – 2019. 11. 22
8. 일제강점기 범죄인명부 전수조사 – 2019. 11. 29
9. 향토사연구소가 지역 독립운동가 발굴 노력 – 2019. 12. 06
10. 해외에서 활약한 강원도 의병 찾아야 – 2019. 12. 13
11. 러시아 연해주의 고려인들 – 2019. 12. 18
12. 러시아의 독립운동가 이범진 흔적 찾기 – 2019. 12. 19
13. 러시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 – 2019. 12. 20
14. 강원도가 고향인 고려인들 – 2019. 12. 26
15. 영동지역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 2019. 12. 27
16. 내년을 영동지역 독립운동史 재정립 원년으로 – 2019. 12. 31

강원 영동지역에서 독립운동가를 새로 찾아내기 위해선 실제로 실행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이 선행돼야 합니다. 정부가 특별히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북한과 일본, 러시아, 중국 등과 이 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합니다. 또, 지역사회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번에 발표된 이시카와 검사의 수사기록을 통해 저는 영동지역의 만세운동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지만 이는 그대로 북한의 입장에선 함흥지역의 항
일운동을 재조명할 수 있는 소중한 사료가 될 것이기 때문에 남북이 협력하면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남북이 힘을 모아 일본과 러시아, 중국의 자료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북한이 이를 원해야 하고, 남북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좋은 환경이어야 한다는 등의 또 다른 전제들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러시아를 통한 독립운동가 발굴을 적극 추진해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원산과 블라디보스토크가 뱃길로 연결돼 있었고, 1860년대부터 이주가 시작돼 연해주에는 많은 우리 국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무장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했습니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가 벌어져 우리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조국과 고향, 우리말과 글을 잊은 채 살게 됐습니다. 광복 이후 서둘러 이 사람들을 찾아나섰어야 했지만 냉전을 거치면서 러시아는 적성국가였기 때문에 당시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한 채 오랜 세
월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도 살고 있지만 국내에도 고려인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그들을 통한 독립운동 역사 발굴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마침 올해는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맺은 지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따라서 양국이 좀 더 적극 나서면 좋겠습니다.
영동지역에선 정말로 독립운동이 없었던 것일까요? 정부와 지역사회, 한국과 주변국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우리 동포들과 국내에 사는 고려인들이 모두 힘을 모으고 머리를 맞대면 좋겠습니다. 백수십 년의 세월을 초월해 힘과 지혜를 모아 그때 그 우리의 처절했던 역사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수, 2020/01/22-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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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조문기 선생 12주기 추모식 거행

 

대전지부(지부장 박해룡)는 2월 5일 독립운동가 조문기(연구소 2대 이사장) 선생의 12주기 추모식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에서 진행했다. 이날 박해룡 대전지부장, 이순옥 부위원장과 대전지부 후원회원 그리고 방학실 기획실장을 비롯한 본부 상근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조문기 선생은 유만수, 강윤국과 더불어 1945년 7월 24일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이다. 이 의거는 경성부 부민관에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이 주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에 사제 시한폭탄 두 개를 설치해 폭발시켜 대회를 무산시킨 사건이다. 조문기 선생은 2001년 이돈명 변호사에 이어 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에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으나 사전 발간 1년 전인 2008년 타계하고 말았다. 정부는 2008년 고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2014년에는 모교인 화성매송초등학교 교정에 회원과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동상(제작 : 김서경 김운성)을 세우기도 했다. 동상과 묘비에는 평소 선생의 어록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 편집부

목, 2020/02/20-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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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소식]

 

오다 치요코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 이사, 박물관 후원금과 감상문 보내와

 

작년 3월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방문했던 평화자료관·쿠사노이에(草の家) 이사 오다 치요코(織田千代子) 님이 최근 사고로 동생을 잃었다. 동생에게 받은 유산 중 일부인 100만 원을 작년 12월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금으로 보내주셨다. 그리고 올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 소감을 바다 건너 편지로 보내오셨다. 그 전문을 아래 소개하고자 한다. •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정리


저는 2019년 2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쿠사노이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
로 회원 12명과 함께 ‘한국 평화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쿠사노이에에서 활동했던 김영환 씨가 있는 식민
지역사박물관을 김영환 씨의 안내로 둘러보았습니다.
이 박물관은 많은 사람들의 기부로 세워졌는데, 훌륭한 5층 건물의 모습에 놀랐습니다. 식민지역사박
물관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 지배했을 때의 자료를 수집, 전시, 소개하여,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실
현하기 위한 연구와 실천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전시되어있는 유물을 보고 놀라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과거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들뿐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한국병합’의
이름으로 침략하여 한국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친일파’라고 불린 사람들의 존재였습니다. 지금까지 ‘친일파’라는 말은 들어본 적
은 있었지만, 특별히 관심도 없었고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비로소 ‘친일파’에 대해 그들이 독립 후 한
국의 입법, 사법, 산업, 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물관을 견학한 감상은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여러 사실을 알았을 때, 일본인으로서 한국과 일
본의 올바른 과거의 역사에 대해 너무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자신
이 부끄러웠고, 가슴이 아파 우울해졌습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어 정
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일본인이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고 슬펐습니다. 앞으로 조금이라도 과거의 역사를 공부해서 알고 싶습니다.


 

금, 2020/02/21-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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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일본 정부에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봉환을 촉구하는 요청서 전달 및 협의 열려

 

1월 21일 일본국회의원회관에서는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보추협)가 일본 시민단체와 함께 일제의 침략전쟁에 군인, 군속으로 동원되어 희생된 한국인 전사자의 유골봉환을 하루 속히 실현하도록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하고 일본 정부 당국자와 유골문제에 관한 협의를 가졌다. 이날 협의에는 보추협의 이희자 대표와 유족 박남순 씨,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이 참가했다.
연구소와 보추협은 일본의 연대단체 ‘전몰자 유골을 가족의 품에 연락회’와 오키나와에서 전사자 유해발굴을 벌이고 있는 ‘가마후야’와 함께 2014년부터 매년 일본 정부에게 한국인 전사자의 조속한 유골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하고 협의를 벌여왔다.
30여 사가 넘는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가 취재경쟁을 벌였으며, 곤도 쇼이치(近藤昭一), 아카미네 세켄(赤嶺政賢) 등 7명의 국회의원도 이날 협의에 함께 참가하여 이 문제에 대한 뜨 거운 관심을 보여줬다.
요청서 전달 뒤에 이루어진 일본 정부(후생성, 외무성) 당국자와의 협의에서는 후생성 당국자로부터 오키나와에서 발굴된 전사자 700위의 유골에 대해 3월말까지 DNA 검사를 위한 검체의 채취가 이루어지고 4월부터 DNA 감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후생성 실무자가 DNA 검체를 채취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시민단체와 국회의원들은 DNA 감정의 성패가 달려있는 검체의 채취가 비전문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며 전문가의 참여를 요구했다. 오키나와에서 희생된 한국인 유족 163명은 한국 정부를 통해 DNA 검사를 요청했다.
또한 참가자들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유골조사에 대해 DNA 감정의 대상이 되는 유골이 너무 적은 상황을 지적하며, 현지에서 실시되고 있는 유골의 화장을 중지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후생성의 회의 자료에 ‘유족들이 화장을 원한다’는 내용이 현지에서의 화장을 하는 명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로부터 거짓으로 유족감정을 들먹인다는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목, 2020/02/20-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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