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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박정희 혈서 조작’ 주장 정미홍 2심도 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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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박정희 혈서 조작’ 주장 정미홍 2심도 패소

익명 (미확인) | 금, 2018/05/25- 17:24

서울중앙지법 제2형사부 이수영 판사는 25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정미홍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이 판결로 지난 2017년 8월 31일에 형사소송 1심 재판부가 내린 ‘벌금 30만원에 처한다’는 원심이 유지되게 되었다. 이수영 판사는 피고 정미홍씨가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않아서 재판부의 결정으로 항소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정미홍씨는 2013년,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기사 조작’이라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로 인용하며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조작했다는 허위사실을 퍼뜨렸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는 정미홍씨에 대해 민·형사 소송을 제기하였고 민사소송은 2017년 1월에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었다. 민사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민족문제연구소에 300만원을 배상한 정미홍씨는 이번 형사소송으로 벌금 30만원을 또 물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조작했다는 정미홍씨 주장의 핵심근거는 ‘말바꾸기’였다. 박정희 혈서기사가 게재된 신문의 이름을 갑자기 바꾼 것이 조작의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수년동안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기사가 실렸다고 주장하던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에 갑자기 ‘만주일보가’가 아니라 ‘만주신문’이라고 말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미홍씨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재판부는 정미홍씨에게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출하라고 요구했으나 정미홍씨는 끝내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오히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나왔다. 공식 출판된 책 ‘만화 박정희’(시대의 창, 2005)의 내용을 근거로 민족문제연구소가 2005년부터 ‘만주신문’을 언급한 사실이 증명되었다. 재판부는 이러한 증거를 받아들였고 정미홍씨의 주장이 근거 없는 허위사실이며 민족문제연구소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하였다.

 

정미홍씨가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법무담당 임선화 기록정보팀장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조작했다는 어떠한 객관적 증거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소이유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이번 판결로 박정희 혈서기사가 역사적 사실임이 다시금 확인된 만큼 더 이상 박정희 혈서에 대한 허위사실이 유포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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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8/24-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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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레븐달

월례회

어시장

수정횟집

그여패

해안희집도 이슴

ㅇㅗ마이고 경상횡재들에게 고함

오마이고경상

모교일

ㅁㅓㅁ춰버린 한반도의 진도

백두에서한라까지   오마이고경상도 함꾸메

화, 2018/11/13-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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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칠도보통먹치리아이고

교수님

고대하로가야대는지

연대로 하로가야대는지

칠칠이머꼬

ㅂㅐ성들은간대엄꼬

ㅈㅣ새끼는 리ㅗㄹ스로이스고,

이하중생략

 

월, 2018/03/26-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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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전경도, 77.6 X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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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신사는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신사로 병합 이전에 이미 ‘관폐대사’로 승격운동이 일어날 만큼 일본인들 사이에서 큰 의미를 지녔던 신사다. 1936년 8월 1일 ‘국폐사’로 격상되었다. ‘국폐사’란 조선총독부가 관리 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신사를 말한다.

 

“1678년 3월 왜관을 부산항에 설치할 때, 대마도 영주가 용두산에 평방 4척(尺)의 석조 소사(小祠)를 세워 한일 상선(商船)의 안전을 기리기 위해 금도비라(金刀比羅) 대신을 봉사한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 금도비라 신사로 칭하다 1894년 거류지신사로 개칭했고, 1899년 그 규모를 확장해 사전의 면목을 일신하자 용두산신사로 개칭했다. 이 신사는 부산을 대표하고 경남을 압도하는 조선 최고의 신사이자 대륙진출의 수호신으로 그 신위를 온 나라에 혁혁히 떨치고 있다.”
<대륙신사대관>,1941

 

서울 남산공원, 부산 용두산공원, 대구 달성공원, 전주 다가공원, 진해 제황산공원.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공원으로 모두 일제의 침략신사가 자리했다. 신사神社란 일본 신도神道 신앙의 종교시설로, 왕실의 조상이나 민간 고유의 신앙 대상을 모신 건축물이다. 우리나라의 사당은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신 집을 뜻하지만, 일본의 신사는 다양한 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 그 수가 무려 800만에 달한다. 일본을 ‘신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1876년 부산 원산 인천 등이 개항된 후 조성된 일본인 거류지에는 서양식 공원이나 호텔, 교회 등과 같은 서구식 건물들이 들어섰다. 강제병합 이전 공원이나 묘지 등은 세금이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곳곳에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이 만들어졌고, 신사 설립도 적극 추진되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자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며 ‘천황’의 은혜로 선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천황’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시설로 ‘신사’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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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공원 내 황조요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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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다가공원 내 전주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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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제황산공원 내 진해신사

 

일본에서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고 다이쇼 ‘천황’ 즉위 대례를 맞아 신사 관계 법규를 정비한 뒤인 1915년 8월 조선에서도 조선총독부령 「신사사원규칙」이 제정되었다. 신사와 사원은 희망자 30명 이상의 연서를 통해 설립을 허가받는 것으로 정해졌지만 사실상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신사가 공인되었다. 또 1917년 3월에는 「신사에 관한 건」으로 작은 규모의 신사, 즉 신사神祠도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그 관리를 규정하여 보호, 육성하였다.
산 입구부터 계단을 쌓아 신사로 올라가는 참배로를 만들고, 산 중턱에는 도리이鳥居를 세워 도시 어느 곳에서도 우러러 볼 수 있는 곳에 신사를 지었다. 신사가 조성된 공원 주변에는 관공서와 금융기관, 경찰서 등 일제 핵심 통치기구들이 밀집했다. 이렇게 신사는 도시 중심부에 ‘식민통치의 성지聖地’로 자리 잡았다.
일제 침략신사의 목적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신사는 ‘조선신궁’이다. 1912년부터 추진해 1920년 기공식을 가진 후, 1925년에 완공했다. 조선신궁이 들어선 남산은 조선시대 도성 사산四山의 하나이자, 금산禁山으로 엄격히 관리되었으며 국사당國師堂이 자리잡고 있는 등 한양의 수호산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일제는 조선신궁을 건립하기 위해 산 정상의 국사당을 이전하고 현재 남산식물원 일대의 서쪽 산허리를 완전히 깎아냈다. 조선 초기부터 신성시하여 오던 남산은 침략신사인 조선신궁이 자리 잡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성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강동민 자료팀장

월, 2018/03/2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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