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제2형사부 이수영 판사는 25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정미홍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이 판결로 지난 2017년 8월 31일에 형사소송 1심 재판부가 내린 ‘벌금 30만원에 처한다’는 원심이 유지되게 되었다. 이수영 판사는 피고 정미홍씨가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않아서 재판부의 결정으로 항소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정미홍씨는 2013년,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기사 조작’이라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로 인용하며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조작했다는 허위사실을 퍼뜨렸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는 정미홍씨에 대해 민·형사 소송을 제기하였고 민사소송은 2017년 1월에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었다. 민사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민족문제연구소에 300만원을 배상한 정미홍씨는 이번 형사소송으로 벌금 30만원을 또 물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조작했다는 정미홍씨 주장의 핵심근거는 ‘말바꾸기’였다. 박정희 혈서기사가 게재된 신문의 이름을 갑자기 바꾼 것이 조작의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수년동안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기사가 실렸다고 주장하던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에 갑자기 ‘만주일보가’가 아니라 ‘만주신문’이라고 말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미홍씨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재판부는 정미홍씨에게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출하라고 요구했으나 정미홍씨는 끝내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오히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나왔다. 공식 출판된 책 ‘만화 박정희’(시대의 창, 2005)의 내용을 근거로 민족문제연구소가 2005년부터 ‘만주신문’을 언급한 사실이 증명되었다. 재판부는 이러한 증거를 받아들였고 정미홍씨의 주장이 근거 없는 허위사실이며 민족문제연구소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하였다.
정미홍씨가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법무담당 임선화 기록정보팀장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조작했다는 어떠한 객관적 증거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소이유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이번 판결로 박정희 혈서기사가 역사적 사실임이 다시금 확인된 만큼 더 이상 박정희 혈서에 대한 허위사실이 유포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전남대학교가 제정한 후광학술상 제13대 수상자로 고(故) 이이화 전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이 선정됐다고 대학측이 7일 밝혔다. (사진=전남대 제공) 2020.06.07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임종명 기자 = ‘동학농민혁명은 3·1혁명, 4·19혁명, 반독재·반군부 민주항쟁, 촛불혁명의 근원이다. 오늘날 시대정신에 맞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분단 구조 등 민족 모순을 청산하는 동력이 되고, 진정한 평등과 자주를 실현하는 과제를 안고 인권을 보장하는 학습장 또는 토론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래 조국의 통일을 위해 그 정신을 올곧게 계승해야 할 것이다.’
‘분단시대의 인문주의자’, ‘사학계의 녹두장군’으로 불리는 고(故) 이이화 선생이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내린 정의다.
이이화 선생은 생전 50여년 간, 평생을 걸쳐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매진했다. 이 연구의 결실이 담긴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시리즈가 오는 6일 출간된다. 이이화 선생의 유작인 셈이다.
저자는 동학농민혁명을 한국 근대사를 밝히는 상징으로 여겼다. 19세기 민란의 시대라 부를 만큼 끊임없이 이어진 민중 봉기는 인간 평등을 추구하고 자주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초들의 저항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3·1혁명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촛불혁명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책은 동학농민혁명의 민족사적 의의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뒀다.
단순히 사료에만 치중하지 않는다. 동학농민군이 치열하게 싸웠던 현장을 직접 답사하고 그 후손들과 현지인들의 증언도 수집해 고증한다. 조선 관료들의 기록과 일본의 기록물까지 샅샅이 훑었다.
책은 총 3권이다. 민란이 일어난 배경, 동학의 전파, 농민과의 결합, 일본이 농민군 섬멸작전에 나선 과정, 전봉준 등 혁명 지도자들이 처형 과정, 그들의 죽음과 항일의병이나 3·1혁명 가담과정 등이 고루 담겼다. 부록으로 동학농민군이 직접 작성해 발표하고 전달한 문서도 포함했다.
이화 선생은 1937년 한학자이자 ‘주역’의 대가인 야산 이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5년부터 한문 공부를 했고 부산, 여수, 광주 등지에서 학교를 다녔다. 문학에 관심을 갖고 서울로 대학에 진학했으나 중퇴하고 한국학 및 한국사 탐구에 열중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한국 고전을 번역, 편찬했고 역사문제연구소장, 계간 ‘역사비평’ 편집인, 서원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원광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타계한 뒤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는 ▲허균의 생각 ▲위대한 봄을 만났다 ▲이이화의 한 권으로 읽는 한국사 ▲한국의 파벌 ▲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한국사 이야기 ▲역사 속의 한국불교 ▲인물로 읽는 한국사 ▲전봉준, 혁명의 기록 등이 있다.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피부색이나 외모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라는 가르침은 거의 격언이 되었고 이를 따르는 다양한 캠페인들이 우리 저변에 축적되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언론은 피부색에 따른 차별을 엄히 비판하고 있으며, 정치인들도 틈만 나면 차별의 철폐를 외치고 있다.
그런데도 인종차별 문제는 여전히 우리 곁에 상존한다. 지난 5월 25일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과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차별 반대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 추세에 있는 현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일까? 가해자는 ‘백인’, 피해자는 ‘흑인’이라는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 현상들일까?
▲ 지난 6월 30일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강좌에서 발언하고 있는 염운옥 고려대 교수 ⓒ 식민지역사박물관
고려대 염운옥 교수는 인종주의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핵심 논리”라고 지적한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나아가 그는 사건의 본질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뿌리 깊은 백인우월주의의 역사, 16세기 이래 400여 년에 걸쳐 이루어진 대서양 노예제,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역사 등이 총체적으로 분석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렇듯 총체적인 역사들은 대체 어떤 도식으로 2020년의 인종차별 문제와 연결되는 것일까? 지난 6월 30일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염 교수의 강연 “제국주의의 인종차별, 낙인과 폭력의 역사”에서는 인종주의와 차별에 대해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 심도 있게 다루어졌다.
문제는 시선
그날 강연이 진행된 식민지역사박물관에는 여타 박물관에서 쉬이 볼 수 없는 조금 특별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바로 ‘니시키에(錦絵)’라 불리는 에도 시대의 판화다. 니시키에는 정한론이 대두하기 시작한 에도막부 말기부터 잇따라 제작돼 일본의 침략과 전쟁을 선전하는 수단으로도 악용되었다. 특히 일본군에 대한 미화와 함께 상대방(조선인, 중국인)에 대한 경멸, 악의적 시선이 잘 드러나 있는 역사 자료다.
▲ 니시키에 <조선전보실기>(1894). 청일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을 묘사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식민지역사박물관▲ 위 그림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을 확대해 나란히 붙인 그림 ⓒ 식민지역사박물관
위 그림에서 일본군은 큰 덩치와 분명한 동작, 단정하고 세련된 군복과 장비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반면 상대방(조선인)은 어떠한가? 아마 이 그림을 본 수많은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작고 왜소하며 봉두난발을 한, 전근대적인 민족으로 ‘시각화’했을 것이다.
인종주의의 시작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염 교수는 외모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을 상상하고 평가하는 것으로부터 인종주의가 출발한다고 지적한다.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고 어떤 행위를 하고 이런 판단이 아니라, 눈으로 딱 봤을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속성으로 그 사람을 분류하는 거죠. 굉장히 시각에 의존하는 이데올로기거든요. 이런 시각에 의존하는 이데올로기는 미적인 감각, 무엇이 아름다운가, 무엇이 추한가 라는 가치와 연결되기 쉬워요.”
*염운옥 교수 강연 <제국주의의 인종차별, 낙인과 폭력의 역사>(‘20.6.30), 식민지역사박물관
백인우월주의 역시 이렇게 ‘시각에 의존하는 이데올로기’가 극대화된 것이다. 흰색에 순수함, 순혈, 아름다움의 의미를 담으면서 백인 신체에 대한 미적 가치를 상승시켜 온 것. 여기서 염 교수는 ‘흰색(白色)’에 아름다움의 가치를 부여한 18세기 독일의 미술사학자 ‘요한 요하임 빙켈만’의 미학을 주목했다.
빙켈만은 서구 문명의 고향이자 원류인 고대 그리스를 동경해 왔는데, 특히 그들이 남겨놓은 ‘하얀 조각상’에 미적 가치를 부여했다. 즉, 흰색으로 갈수록 형태가 뚜렷해지고 아름다움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이 같은 빙켈만의 미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흰색을 중심으로 하는 미적 기준을 형성한다.
반면 화려한 색채를 가진 문명은 부족하고 낮은 수준으로 위치 지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서구문화가 가진 ‘색채공포증(chromophobia)’과 연결된다고 염 교수는 분석한다.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으로 인종을 나눈 것 또한 서구 문명이다. 18세기 스웨덴의 식물학자인 카를 폰 린네는 생물학적 인간(호모 사피엔스) 아래 피부색이 다른 4개의 인종을 하위 분류로서 이름 붙였다. ‘유럽인 백색(Europaeus albescens), 아메리카인 홍색(Americanus rubescens), 아시아인 갈색(Asiaticus fuscus), 아프리카인 흑색(Africanus niger)’이라는 분류 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피부색에 따른 차별이 시작되는 지점이라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종은 그 실체가 없다. 앞서 말한 빙켈만이나 린네의 분류는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와서 그 근거를 상실했다. 염 교수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는 생물학적 차이가 인종과 인종 간의 생물학적 차이에 비해 크다는 과학적 연구결과를 제시한다. 다시 말해 피부색에 따른 인종 분류 따위로는 인간이라는 종을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너지는 동상들
이처럼 인종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확증편향’들을 이해했다면 다음은 인종주의로 인해 발생한 역사적 비극들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유럽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상 철거’ 운동과도 밀접히 연결되는 부분이다. 최근에는 서구에서 일어나는 ‘역사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 영국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의 17세기 노예 무역상 에드워드 콜스턴 동상 철거를 보도하는 BBC 뉴스 갈무리 ⓒ 오마이뉴스
한 예로 지난 6월 7일, 영국 브리스틀 시에서 시민들에 의해 끌어내려진 ‘에드워드 콜스톤’의 동상을 들 수 있다. 에드워드 콜스톤은 17세기, 8만 명에 달하는 흑인 남녀와 아동들을 ‘노예’로 끌어다 팔았던 노예 상인으로, 자메이카에서 대규모 플랜테이션(노예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1895년 세워진 콜스턴의 동상은 무려 125년 만에 권좌에서 내려와 브리스틀 시가의 밑바닥을 나뒹굴었고 밧줄에 꽁꽁 묶여 에이본 강 밑바닥에 수장됐다.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수백 개가 넘는 동상에 대한 철거 움직임, 요구가 있다고 한다. 이에 혹자는 운동과 시위의 과격성에 우려를 표하면서 법의 잣대로 이를 비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동상의 주인공들이 노예무역을 했다고는 하지만 도시를 위해 좋은 일을 했고 활발한 자선사업을 벌인 경우도 있다며, ‘공(功)’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견 수용할 부분도 있는 우려일 것이다. 하지만 염 교수는 그 같은 판단에 앞서 동상 철거, 파괴의 본질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당부한다.
앞서 언급한 에드워드 콜스톤도 그러했지만 철거의 대상이 되는 동상의 주인공들은 영국,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국가와 미국에서 노예제를 이용하고 지지, 주장했던 인물들이다. 또 동상 철거 요구가 나오는 도시들은 상당수가 과거 노예무역으로 번성했던 도시들이다. 따라서 그 도시의 역사는 노예들의 삶과 역경, 수난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 도시에 정착한 노예들의 후손들에게는 노예 제도와 노예무역을 비판할 수 있는 타당한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염 교수는 동상의 주인공들이 ‘도시를 위해 좋은 일을 하지 않았느냐’는 논리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단적으로 “노예무역과 노예 농장의 역사가 없었다면 동상이 그곳에 세워질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도시의 엘리트, 유지로서 올라서고 품위를 가질 수 있는 기반에 있는 노예무역의 존재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노예무역은 얼마만큼의 폐해를 역사에 새겼을까? 염운옥 교수는 16~19세기 약 400년에 걸쳐 이루어진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이 1200만 명의 피해자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역사상 가장 대규모로 이루어진 강제 이주이기도하다.
그 시기 노예선이 대륙과 대륙의 사이를 오간 건수는 약 3만 6000건이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부족과 지역은 물론 아프리카라는 터전 자체를 떠나야만 했다. 지금도 노예제로 피해를 본 국가들의 배상 요구가 이어지고 있지만 노예제는 그 어떤 국가에서도 “한 번도 반성해본 적 없고 청산된 적도 없고 배상해본 적도 없”는 역사다. 여기에 바로 ‘역사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이 존재한다.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도 물론 규명해야 하고 반성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지만, 이 대서양 노예무역은 한 번도 반성해본 적도 없고 청산된 적도 없고 배상해 본 적도 없어요.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런 문제제기들을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이런 이야기들이 오늘날의 BLM 운동과 동상에 대한 훼손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배상의 형태로 갈 것인지 아닌지는 따져봐야 할 일이지만, 왜 동상이 훼손되는가? 왜 노예 소유주의 동상을 훼손하는가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염 교수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흑인이라서 노예가 된 것이 아니다. 노예가 됐기 때문에 흑인의 검은 피부가 열등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만약 백인이 노예가 됐다면 백색 피부가 열등의 표지가 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흑인이 대서양 노예제의 피해자가 되었다.”
우리 안의 인종주의
흑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은 “인종은 없다. 인종주의가 있을 뿐”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짧은 일갈에는 우리가 가진 인종주의의 오류가 명확히 지적되고 있다. 인종이란 그 실체가 없으며, 사람 스스로 만들어낸 개념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인종주의는 ‘차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다.
한국인으로 표상되는 우리는 어떤 인종주의를 가지고 있을까? 사실 한국도 심각한 인종 차별이 존재하는 나라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에 인종 차별이 존재한다는 말에 대부분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다문화가정이 확산되고 이주노동자들도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흔히 조선족이라고 표현되는 재중동포들도 우리 주위에 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혹시 130여 년 전 일제가 그랬던 것처럼 경멸적 시선을 투사하여 그들을 바라보고 있진 않은가. 스스로가 인종주의자인지 아닌지를 자기 검열하고 판단하는 것은 어쩌면 제법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 1911년 1월 1일, 일출신문이 새해를 맞이하여 발행한 놀이판 <일출신문조선쌍육>. 이 놀이판은 조선인을 게으르고 나태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오른쪽 그림은 술에서 막 깨어난 조선인을 묘사한 것이다. 조선인을 변발을 한 중국 복색으로 등장시켜 중국과 조선의 민족성을 한꺼번에 비하하려는 저의가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물론 스스로를 자책하고 검열하라는 말은 아니다. 염운옥 교수는 “내가 타인을 차별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면서, 반대로 “내가 차별받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의식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듣는 귀를 열고 말하는 입을 갖는 것”으로 귀결된다.
*염운옥 고려대 교수는 인종주의 역사, 영국 이민사, 서양 여성사 등에 대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남겨온 전문가다. 대표 저서로는『낙인찍힌 몸: 흑인부터 난민까지 인종화된 몸의 역사』 (돌베개, 2019.7), 『생명에도 계급이 있는가-유전자 정치와 영국의 우생학-』 (책세상, 2009.12) 등이 있으며 영국 노예제와 식민지 폭력 피해 배상 등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남겼다. (현) 여성 사학회 학술이사 직위도 겸하고 있다.
*해당 염운옥 교수의 강연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 온라인 강연신청을 통해 들어볼 수 있다.
“고층 건물이 한라산을 가리고 녹지가 사라지고 있다. 그런 제주에 찾아올 이유가 있나?” “입법, 사법, 행정이라는 권력과 재벌, 언론을 감시하고 견제해라. 그렇지 않으면 국민으로서 직무유기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50년 가까이 소설을 통해 한국사회의 치부를 여과 없이 드러내온 소설가 조정래(78) 선생이 제주도민 앞에 섰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창간 16주년을 맞아 열린 초청 강연이 7일 오후 7시 김봉현 편집국장 사회로 제주상공회의소 5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강연은 애초 2월 8일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연기된 후 5개월 만에 다시 마련됐다. 강연회 현장은 사전 신청한 청중들로 제한했고, 제주의소리 소리TV와 페이스북 페이지로도 동시에 생중계 됐다.
[제주의소리] 창간 16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된 조정래 선생 초청 강연. 2020.7.7. 소설가 조정래는 ‘제주의 미래를 말하다’ 주제로 열린 이날 강연에서 권력과 재벌, 언론을 감시하고 견제하라고 도민들에게 당부했다. ⓒ제주의소리
‘제주의 미래를 말하다’를 주제로 열린 이날 강연에서 선생은 평생의 작품 활동을 통해 자신이 알리고 싶었던 진실, 더불어 대한민국과 제주가 발전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시민 개개인의 ‘의무’를 강조했다.
그는 “현재 한국의 1인당 GDP(국내 총생산)가 3만2000달러 수준이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온 국민이 가난에 허덕일 때만 해도 GDP는 80달러에 불과했다. 몇 배나 늘어났지만 여러분들, 그리고 국민들은 과연 그만큼 행복한가”라고 물으며 “한국의 경제 발전은 박정희 덕분이 아니라 피 흘리며 노동에 매진한 국민들 덕분이다. 이런 사실을 알리고자 소설 <한강>을 썼는데 아직도 국민 절반은 이를 모르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선생은 “3만2000달러 GDP를 자랑해도 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 청소년 자살률, 이혼율, 경제 불평등은 선두권을 차지하고, 출산율은 최하위를 달린다. 전체 노동시장의 48%를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 주소”라며 “제주도는 어떤가. 제주의 생명은 자연이고, 그 자연을 대표하는 게 바다다. 백화 현상에 해초가 사라지고 전복마저 씨가 마르고 있다.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미래도 암담하다”고 작심한듯 진심 어린 우려들을 토해냈다.
[제주의소리] 창간 16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된 조정래 선생 초청 강연. 제주를 100여번 다녀갔다는 조정래 선생은 제주가 점점 파괴되고 있지만 아직 희망이 있는 곳이라며 도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권하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이동건 기자 ⓒ제주의소리[제주의소리] 창간 16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된 조정래 선생 초청 강연. ⓒ제주의소리 이동건 기자
선생은 한국을 망가뜨린 주범으로 ‘입법, 사법, 행정, 재벌, 언론’까지 다섯 개의 권력 집단을 꼽았다. “그들의 타락이 한국을 망쳤다”고 직설했다.
그러면서 “소시민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기에 그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고, 30년 군사 독재의 협박 정치 때문에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있다”면서 “정치하는 자들이 제일 무시하는 존재가 무엇인지 아느냐. 바로 흩어지고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이다. 반대로 가장 무서워하는 건 뭉치고 저항하며 외치는 국민들”이라고 피력했다.
특히 재벌과 언론의 폐해를 힘주어 강조했다. 선생은 “대한민국의 제일 큰 기업들이 언론사의 광고를 끊으면 직원 월급을 못주는 게 한국 언론계의 현실이다. 불의를 저질러도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건 광고 때문이다.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흡사 마피아 집단 같은 행태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고 통찰했다.
선생은 국민들이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으로 ‘시민단체’를 우선 꼽았다. 시민단체를 적극 후원·지원하면서 권력을 감시하자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부러워하는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시민단체들이 활발하게 권력을 감시한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까지 400년에 달하는 시간이 걸렸다”며 “한국은 1980년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단체가 1만개까지 만들어졌지만 전부 자멸하고 소멸했다. 국민들이 지원 해주지 않아서다.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민족문제연구소, 경실련 등 제대로 활동하는 단체는 손에꼽을 만큼 소수에 불과하다”고 꼽았다.
선생은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행복은 남이 만드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한국 사회가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권력을 만든 당신들이 주인 행세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공무원만 직무 유기가 있는게 아니다. 국민도 직무유기하면 자업자득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것이 좋은 대안”이라고 권했다. 조정래 선생은 참여연대 창립때부터 함께 하면서 현재 이사로 활동 중이다. 소설 <천년의 질문>을 통해 시민단체 활동을 알리는 등 꾸준히 힘을 보태고 있다.
[제주의소리] 창간 16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된 조정래 선생 초청 강연. 이날 강연은 김봉현 편집국장(왼쪽)의 사회로 청중들과 함께 제주의 미래, 제주의 가치, 시민들의 정치참여 등 다양한 주제의 즉문즉답도 이어졌다. ⓒ제주의소리조정래 선생이 청중들 질문에 귀 기울여 집중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이동건 기자
그는 평생 100번 넘게 방문하며 마지막 생의 종착지로도 생각했던 제주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보냈다. 그러나 동시에 자연 환경 파괴로 인한 실망감도 숨기지 않았다.
선생은 “제주의 생명은 단언컨대 자연 풍광이다. 머리에 물을 품은 한라산 풍광은 바다와 어우러져 대한민국 최고다. 내 손자는 뱃속에서부터 서귀포 앞바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과거 나는 제주에서 뼈를 묻겠다고 아내의 동의를 얻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제주와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고층 건물이 한라산을 가리기 시작했다. 녹지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싱싱한 자리돔을 먹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제주를 방문할 이유가 있느냐. 흉을 보는 게 아니다. 제주도의 문제점을 제대로 직시하고 더불어 고민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문제를 직시해서 푸는 것만이 제주에 밝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
선생은 제주의 미래는 물론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 “암담하다”고 직설했다. 권력과 재벌, 언론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도 거듭 진단했다. 그리고 바로 “여러분, 왜 가만히 있느냐”고 반문했다. 문제도 답도 명쾌했다.
강연 후 청중들과의 대화에서는 ▲조정래 작가의 청년시절 삶을 토대로 오늘날 청년세대들에 대한 조언 ▲세대간 세분화되는 갈등 문제 ▲가짜뉴스 문제 ▲적극적인 정치참여와 정당 활동 의견 ▲지역 언론의 역할 등에 대한 다양한 질문이 던져졌다.
선생은 청년에 대한 조언으로 “청년들의 미래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내가 살았던 시절은 청년이란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만큼 사회 전체가 가난했다. 타 국가로부터 돈을 빌리기 위해 광부, 간호사를 담보 잡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이어 “오늘날 청년 문제가 대두되는 것만으로 우리사회가 발전한 것이다. 성급하게 여기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며 “과거를 알아야 현재 자리를 알고, 현재를 알아야 미래가 보인다. 대학을 나왔으니 빨리 취직하고 빨리 정규직 되겠다고 다급해 하기 보단 성숙한 기다림이 필요한게 인생이다. 비정규직 없애고 정규직 늘리는 일에 청년들이 반대하는 오류를 범하진 말자”고 조언했다.
20대 대학생이 던진 ‘세분화되고 있는 세대 갈등 문제’ 질문에는 “50대 이상 세대들의 희생과 투쟁에 의해 오늘 날 민주화가 이뤄졌다는 점은 젊은이들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의견의 차이를 서로 대화로 토론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상대의 입장이 무엇인가 배려하고 살필 때 화합이 이뤄진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젊은 세대들의 정치 참여도 강조했다. 선생은 “정치에 큰 관심이 없고 정책 결정이 별 의미가 없다는 기회주의적 냉소주의는 위험하다. 선거 날, 투표하는데 필요한 불과 몇 시간의 인내를 기피 하면서 국가가 나에게, 자기 세대에게 무엇을 해주길 바라나. 이것은 시민으로서 직무유기”라고 일갈했다.
[제주의소리] 창간16주년 특별기획 조정래 선생 초청강연에 참석한 청중들 ⓒ제주의소리이날 강연 청중들 중에는 조정래 선생의 소설 작품을 들고와 강연이 끝난 후 기념 사인(sign)을 받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선생은 “자기 권한을 주장하려면 투표해라. 내가 선택한 정치인들이 내가 속한 공동체에게 필요한 법을 만들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왜 우리를 배려하지 않냐’는 주장은 파렴치한 일”이라고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몇 년 전에 저에 대해서도 제가 하지 않은 발언을 한 것 처럼 인터넷에 올라온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나서서 바로 잡을까 하다가, 너무 황당무계해서 아무도 내가 한 발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주변 조언을 듣고 그냥 넘어갔다”면서 “남북 문제도 남북이 서로 갈등을 해소하면서 평화롭게 공생하는 방향으로 큰 기류는 잡혀 있다. 반공주의를 이용해 자기 이익을 취하는 수구보수세력과 가짜뉴스는 조금만 기다리면 자연 도태될 것”이라고 직격했다.
정당 활동을 해야하는지 고민이라는 질문에는 “우리의 모든 행위는 정치다. 정당 가입 활동을 해도 좋다. 다만, 진보적인 정당에 가입하라. 보수는 나쁘다기 보다는 전진이 더디다. 진보는 문제를 개혁하고 혁신해서 나아가겠다는 성향”이라고 조언했다.
지역 언론의 역할에 대해선 “무엇보다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지역사회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것에 대해선 끝없이 물고 늘어져야 한다.”며 “분명 괴롭고 어려운 길이지만 진실에 목마른 사람들이 후원자로 나설 것이다. 언론인은 가시밭길을 걷겠다는 각오를 했기에 괴로워도 참고 견뎌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저도 올해로 등단 50년을 맞았다. 그간 소설을 써왔다. 인생을 담아왔다. 인생은 거센 물살이 흘러가는 냇가에 놓인 징검다리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고통스럽다. 자기 스스로를 말 삼아 채찍질을 가하는 것이다. 지역언론도 자기 스스로 채찍질을 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향후 활동에 대해서는 “<태백산맥> 이후로 20년 동안 세워둔 계획 대로 집필하고 있다. 앞으로 20년 더 살면서 다양한 소설을 쓰겠다. 아무리 스마트폰 시대라지만 책도 열심히 읽어달라”는 답으로 강연을 마쳤다.
이번 [제주의소리] 창간 16주년 특별기획 조정래 선생 초청 강연은 소리TV의 VOD서비스를 통해 다시 볼 수 있다.
대마불사(大馬不死)란 말이 있다. 재벌들이 숱한 폐해를 끼치고도 재벌개혁을 번번이 비껴가며 불사의 신화를 이어가는 것은 그들의 덩치가 이미 대마를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말은 경제뿐 아니라 예술에도 적용될 수 있다. 친일의 죄악이 지대한데도, 예술계에서 이미 큰 몫을 차지하고 있어서인지 여전히 고도의 영예를 누리는 인물이 있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1906~1965년)가 대표적이다.
그가 일생의 역작으로 자부했던 작품이 있다.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가 그것이다. <환상곡 에텐라쿠>로 약칭되는 이 노래는 일왕(천황)을 찬미하는 노래였다.
<친일인명사전>은 “원래 <에텐라쿠>는 일본 천황 즉위식 때 축하 작품으로 연주된 것”이라면서 “안익태가 역작으로 자부한 <에텐라쿠>는 1938년에 발표된 이후 로마방송 오케스트라 연주회(1939.4.30.), 불가리아 소피아 연주회(1940.10.19.), 독·일협회 빈 지부 주최의 빈 심포니 연주회(1942.3.12.), 함부르크 연주회(1943.4.22.) 등에서 자신의 지휘로 계속 연주되었다”고 설명한다.
일왕을 찬미하는 노래였으므로 해방 뒤에는 이 작품을 멀리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이 작품을 포기하지 않았다. 해방 뒤에 그는 이 작품을 살리고자 이른바 ‘작품 세탁’을 감행했다. 1959년에 <강천성악>이란 이름으로 개작해서 다시 내놓은 것이다. 그가 일왕 찬양가에 얼마나 큰 애착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지은 노래가 <애국가>이니, 이 노래가 정말로 한국의 <애국가>가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안익태의 친일행적은 <환상곡 에텐라쿠> 작곡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일왕과 사쿠라와 후지산, 사무라이와 ‘일본해’를 찬미하는 <대관현악을 위한 일본 황기 2600년에 붙인 축전곡>의 연주를 1942년 3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지휘했다. 또 일본의 만주 지배를 찬미하고자 <큰 관현악단과 혼성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를 만주국 건국 10주년인 1942년에 작곡했다. 이 노래는 <만주국 경축 음악> 혹은 <만주 환상곡>으로도 불린다.
안익태 향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관심
▲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안익태. 1977년 7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 동아일보
이랬던 그가 사후 12년 뒤인 1977년 7월, 한국 언론으로부터 대대적인 조명을 받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묻혀 있던 그의 유해가 그해 7월 6일 귀환하고 이틀 뒤인 7월 8일 국립묘지에 묻혔기 때문이다.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거행된 안장식에 관해 7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 ‘그리던 모국 품에 포근히’는 이렇게 보도했다.
“고 안익태 선생 유해 안장식이 8일 오전 11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제2묘소에서 미망인 로리타 여사와 안나 세시리아, 레오노루 등 두 딸과 심흥선 총무처장관, 아구아도 스페인 대사와 음악계 인사 등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박 대통령과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 등 각계에서 보낸 조화 속에, 현충사에서 가진 영결식에 이어 시작된 안장식은 비까지 내려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에 묻히는 고인의 뜻을 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날 안장식 때 조화만 보냈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열흘 뒤인 18일, 그는 안익태 유족들을 청와대로 불렀다. 그가 안익태에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 안익태 유족들을 접견하는 박정희. 1977년 7월 18일자 <경향신문> 기사다. ⓒ 경향신문
박정희가 안익태에게 마음을 베푼 이유가 있다. 1961년 5·16 쿠데타 뒤에 안익태가 자신의 국제적 명성을 앞세워 박정희에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다. 1962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 ‘세 번째 찾아온 조국, 세계적 명지휘자 안익태 씨’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세 번째로 고국을 방문한 세계적인 심포니 지휘자이며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 씨는 13일 하오 반도호텔 816호실에서 기자와 만나 ‘세계 각국은 지금 우리나라를 주시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두 번째로 고국에 돌아온 것은 3·15 선거 당시였는데 당시의 인상은 슬프고 어지러웠으나, 지금은 국민들에게 희망이 보이고 활기에 꽉 차 있어 보인다’고 혁명 조국에 머무는 동안의 감상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이승만 정권 때 벌어진 3·15 부정선거는 1960년 일이다. 안익태의 세 번째 귀국으로부터 조금 전의 일이었다. 두 시기의 간격이 길지 않을 뿐 아니라 두 시기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도, 안익태는 ‘당시의 인상은 슬프고 어지러웠으나, 지금은 희망이 보이고 활기에 차 있다’며 박정희 쿠데타를 찬미했다.
이뿐 아니었다. 인터뷰에서 안익태는 박정희를 ‘위대한 지도자’로 치켜세웠다. 박정희를 ‘교향악단의 위대한 지휘자’인 듯이 묘사했다.
“안씨는 국내의 음악단체 등이 통합되고 국내 질서가 호전되어 가는 것을 가리키면서 ‘한 나라는 마치 한 교향악단과 같은 것으로 지휘자 여하에 달렸는데,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장군 밑에서 국민 각자가 자기 부서를 잘 지켜나가면 나라가 잘될 것이라’고 열을 띠고 말했다.”
안익태를 인터뷰한 기자는 그가 박정희를 칭송할 때 ‘열을 띠고 말했다’고 묘사했다. 박정희에 대한 이 같은 열정은 4개월 뒤의 5·16 쿠데타 1주년 기념식 때도 이어졌다.
1962년 5월 16일 전국 각지에서는 이른바 ‘혁명 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됐다. 서울에서는 3만여 명이 서울운동장을 가득 채운 가운데 행사가 진행됐다. 이 행사에도 안익태는 열정을 다해 ‘혁명 1주년’을 찬미했다.
안익태는 이날 오전과 오후 행사에서 마치 주인공처럼 활약했다. 5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 ‘5월 만세’는 “하늘을 뒤덮을 듯 거대한 태극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막을 연 이날 식전은 먼저 안익태씨가 지휘하는 각군 군악대의 우렁찬 주악(국기에 대한 경례 및 애국가)에 이어 박 의장을 비롯한 각계 요인의 축사가 진행”됐다고 오전 풍경을 묘사한다.
▲ 1962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5·16 쿠데타 1주년 기념식. ⓒ 동아일보
같은 신문의 5월 18일자 기사 ‘선율에 매혹’은 “2백 5십여 명의 시향·KBS교향악단·3군 및 해병 군악대와 5백여 명의 연합합창단이 본부 스탠드에 자리 잡은 가운데, 안익태씨 지휘로 먼저 베토벤 작곡 교향곡 9번 제4악장이 연주되고 이어 지휘자 안씨 작곡인 <코리아 환상곡>이 연주되어 웅장한 코러스가 5월의 밤하늘에 울려 퍼져 3만여 명의 청중들의 열광적인 박수갈채 속에 9시 반 음악의 향연은 그 막을 내렸다”며 오후 풍경을 묘사했다.
이처럼 안익태는 음악적 명성과 재능을 활용해 일본제국주의뿐 아니라 박정희 쿠데타까지 미화했다. 1977년 7월에 박정희가 안익태 유족들에게 보여준 호의는 1962년 일에 대한 답례의 성격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 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친일파 안익태의 안장 실태. ⓒ 국립서울현충원.
‘친일’이 자발적었음 짐작케 하는 노래
안익태는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음악인이 아니다. 그가 친일에 상당히 자발적이었다는 점은 <코리아 환상곡>과 <만주 환상곡>의 주요 부분이 일치한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한국을 찬미하겠다며 만든 노래와 일본의 만주 지배를 찬미하겠다며 만든 노래의 주요 부분이 똑같았던 것이다.
음악학자 송병욱은 2007년에 <내일을 여는 역사> 제27호에 기고한 ‘다시 보는 안익태 – 애국가의 작곡가는 애국자였나’에서 “<만주국 경축 음악>과 <한국 환상곡>은 주요 합창 선율 두 개를 공유하고 있다”면서 “전자에서는 그 선율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대동아공영과 신질서를 찬미하는 가사를 위해, 후자에서는 해방된 조국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사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만약 안익태가 일본의 강압 때문에 억지로 친일을 했다면, <코리아 환상곡>에 쓰는 선율과 <만주 환상곡>에 쓰는 선율을 어떻게든 구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의식 속에서 한국과 일본제국주의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친일이 상당부분은 자율적이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그런 안익태의 유해를 박정희 정권은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1977년에 박 정권이 만들어놓은 이 부조리함은 2020년 지금까지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 일본제국주의와 박정희 쿠데타를 찬미했던 음악인이 국립서울현충원 내에서 ‘불사’의 존재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가 만든 노래가 <애국가>로 울려퍼지고,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서울 올림픽공원 내에 세워져 있는 것은 대한민국에 아직 친일파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욱식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MD본색》, 《말과 칼》, 《사드의 모든 것》, 《핵과 인간》, 《비핵화의 최후》 등이 있다.
“정욱식은 한국의 대표적 평화분석가이자 운동가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한반도 비핵화에 이르는 최선의 길은 ‘한반도 비핵지대’라고 설파하고 있다. 기존의 타부(taboo)를 깨는 창의적이고도 상상력 넘치는 책이다” –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 · 연세대학교 특임명예교수)
▲ 향년 100세, 백선엽 장군 별세 (서울=연합뉴스) 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 4분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사진은 휴전회담 한국대표를 역임한 백 장군이 육군에 기증한 군 역사 관련 기록물 중 1951년 7월 10일 유엔 대표들이 휴전회담을 위해 개성으로 가기에 앞서 기념촬영 하고 있는 모습. 휴전협정 당시 계급으로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기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조이 해군 중장,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호디스 육군 소장. 2020.7.11 [연합뉴스 자료사진] ⓒ 연합뉴스
지난 5, 6월 서울현충원 안장 논란의 당사자였던 백선엽 전 만주국 중위 겸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대장이 7월 10일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육군은 육군장 영결식이 15일 오전 7시 30분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다고 예고했다. 안장식은 같은 날 11시 30분 대전현충원에서 열릴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한 백선엽은 20세 때인 1940년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하고 1943년 4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한 뒤, 항일군 잡는 특수부대로 명성을 날린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활약했다.
해방 뒤 잠시 고향에 체류한 그는 남쪽으로 넘어온 뒤 육군 정보국장이 되고,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외친 세력을 좌익으로 몰아 제거하는 숙군 작업을 전개했다. 그런 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7월부터 육군참모총장 및 계엄사령관을 지냈고 1953년 1월 국군 최초로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1959년 2월, 39세 나이로 연합참모본부(지금의 합동참모본부) 총장이 된 그는 이듬해인 1960년에 뜻하지 않게 군복을 벗었다.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의 격동 속에서 군대를 떠났고, 그해 7월 주중화민국대사를 시작으로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됐다.
1961년 박정희 쿠데타 뒤로도 프랑스·캐나다에서 대사 직을 수행했던 그는 1969년 교통부장관이 됐고 1971년(51세) 장관직을 퇴임했다. 1973년 4월부터 1980년 3월까지는 정부투자기관인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에서 사장을 지냈다.
군대를 떠난 나이(40세)와 공직을 떠난 나이(51세)가 좀 이르기는 하지만, 외형상으로 보면 화려한 공직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가시’들이 감춰져 있다. 한국 사회의 핵심 독소들이 그 가시들에 잔뜩 묻어 있다.
백선엽의 인생
▲ 백선엽 장군 빈소 조문 11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장군 빈소에서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백선엽은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인이었다. 그가 근무한 간도특설대는 친일 군인 중에서도 특별한 친일 군인들만 가는 곳이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존속한 이 부대의 주력은 식민지 한국인들이었다. <친일인명사전>은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고 설명한다. 식민지인을 이용해 식민지인을 탄압하는 일본제국주의의 방식을 실천하는 특수부대였던 것이다.
이 부대가 쏜 총탄에 쓰러진 항일투사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고 위 사전은 말한다.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장교로서 이 부대에서 활약한 백선엽은 누구도 부인 못할 친일파였다.
그가 친일에 깊이 물들었다는 점은, 위험을 무릅쓰고 ‘남로당 박정희’를 구해준 데서도 드러난다.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외치는 민족주의 장병들이 일으킨 여순항쟁(여순사건) 당시, 박정희는 이들과 연관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1948년 11월 11일 체포된 박정희가 1개월도 안 된 12월 10일 석방된 것은 숙군 작업을 주도하던 백선엽 육군 정보국장이 신원보증서에 도장을 찍어줬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은 “최소한 과거 만주군이나 일본군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았을 때, 박정희는 자신들과 비슷한 배경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훌륭하고 유능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처럼 파격적인 구명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박정희 구명은 백선엽이 친일파가 아니었다면 시도하기 힘든 일이었다.
또 백선엽은 국민 학살, 민간인 학살의 주범이었다. 이것은 친일 못지않은, 어쩌면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중한 범죄다. 전쟁 상황 속의 민간인을 거치적거리는 존재로 치부하는 일부 그릇된 군인들의 눈에는 이것이 범죄로 비쳐지지 않을 수도 있다. 군사행동을 하다 보면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사고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의 소유자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민간인을 죽이는 군인은 더 이상 군인이 아니라 한낱 범죄자에 불과하다. 그 시절 한국에서는 그런 게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범죄자가 범죄로 인식하지 못했다 하여 범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범죄를, 백선엽은 육군 정보국장 시절에 저질렀다. 그는 이북 출신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창설된 호림부대를 수하에 두고 민간인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다. 이 부대는 빨치산 토벌을 명분으로 강원도 인제, 경북 영천·청도·경산, 경남 거창 등지에서 민간인들을 약탈하고 여성들에게 죄악을 저질렀다.
이런 일을 두고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사고였다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군인은 국민의 명을 받은 몸이고 국민을 지켜야 하는 몸이다. 그런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민간인인지 빨치산인지 구분도 하지 않고 마구 살상했다는 것은 애당초 국민의 신성함에 대한 인식이 없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백선엽의 동종 범죄는 한국전쟁 때도 있었다. 그는 이끄는 백야사라는 특수부대는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 하에 특히 지리산 일대에서 국민 학살을 감행했다. 백선엽의 부하들이 일반 국민과 빨치산을 가리지 않고 총을 쐈다는 점은 1951년 12월 2일부터 14일까지의 상황만으로도 명백히 증명된다. 이 12일간 이들은 4천 명의 빨치산을 잡겠다는 목표로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사살된 사람은 총 6600명이었다. 아무나 마구 죽였던 것이다.
백선엽은 6·25 전쟁 영웅으로 불린다. 육군 홈페이지의 ‘육군 소개’ 코너에 실린 다음과 같은 ‘백선엽의 전공’과 위와 같은 ‘백선엽의 국민 학살’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무겁겠는지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중에는 보병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 평양탈환작전, 2군단장으로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1군단장으로 설악산 부근 전투 등 다수의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움.”
그가 세운 전공이 그가 범한 국민 학살보다 더 중하다는 판단이 든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백선엽을 전쟁영웅으로 섣불리 치켜세워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전쟁영웅이라면 그가 죽인 국민들은 대체 무엇이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적군이 아닌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백선엽의 일생에서 하나의 ‘패턴’처럼 자주 나타났다. 해방 이후뿐 아니라 이전에도 그는 동종 범죄를 저질렀다.
그가 속한 간도특설대는 항일투사뿐 아니라 민간인들한테도 학살을 자행했다. 2008년에 <한일관계사연구> 제31집에 실린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의 논문 ‘만주지역 간도특설대의 설립과 활동’은 이 부대가 “항일단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을 전체를 소각하거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간도특설대의 여타 구성원들을 포함해 백선엽이라는 인물의 머릿속에서 국가만 중요하고 인간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백선엽의 행적은 해방공간의 남한 땅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사회발전을 저해한 이북 출신 청년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해방 뒤 북쪽에 체류하다가 월남한 그는 극우 청년단체가 아닌 군대로 가기는 했지만, 극우 청년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행보를 걸었다.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한 호림부대를 수하에 두고 그는 국민 살상을 자행했다.
백선엽은 왜 마흔에 군대를 떠났나
▲ 백선엽 장군 별세, 향년 100세 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 4분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1920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한 백 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군문에 들어온 뒤 6·25전쟁 때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주중한국대사,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사진은 2013년 8월 경기도 파주 뉴멕시코 사격장에서 열린 백선엽 장군 미8군 명예사령관 임명식에서 미군 야전상의를 입은 뒤 경례하는 백 장군. ⓒ 연합뉴스
그런데 그는 친일과 반공의 길만 걸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인생 궤적은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에 나오는 이인국 박사를 연상케 할 만하다. 평양에서 친일파 의사로 살던 이인국은 해방 뒤 소련군이 진주하자 친소련파로 변신했다가 한국전쟁 중에 남하해 친미파로 둔갑했다.
만주국 중위 백선엽은 일본이 패망한 다음달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건국준비위원회 지부인 평안남도인민위원회에서 치안대장으로 활동했다. 친일파들이 빨갱이로 부르던 조직에 몸을 담았던 것이다.
그 시기에 백선엽은 민족주의자인 조만식의 비서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조만식이 김일성에게 밀리자 38선을 넘어 친미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꺼삐딴 리 스타일의 인생행로를 아주 전형적으로 걸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백선엽에 대해 파고들 것이 많이 있다. 그중 하나는 그가 왜 나이 마흔에 군대를 떠나 주중화민국대사가 됐는가 하는 점이다. 국방장관 승진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가 전역을 결심한 배경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연합참모본부 총장 백선엽의 전역은 1960년 5월 31일에 있었다. 4·19혁명에 직면한 이승만 대통령이 사법처리를 피하고자 하와이로 망명한 지 이틀 뒤였다.
그해 6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 ‘(연참본부총장) 백선엽 대장 사표 수리’에 따르면, 백선엽은 사퇴 성명서에서 “민주혁명의 정신에 호응하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군대의 민주적 개혁의 터전을 선임자로서 닦아주려는 뜻에서 사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으니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자 사퇴하게 됐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그가 사퇴를 결심하게 되는 과정이 유광종 <중앙일보> 기자가 정리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백선엽 회고록에 나온다. 사퇴하기 얼마 전에 그는 이종찬 국방부장관의 호출을 받았다. 이 장면이 회고록에 소개돼 있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선 나를 보더니 ‘이제 다 때가 되지 않았느냐. 나도 옷을 벗었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물러나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였다. 나는 그의 말뜻을 빨리 알아차렸다. 그는 분명히 내게 군에서 은퇴하라는 의사를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하야를 지켜보면서 언뜻 품었던 생각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장관에게 ‘알았다. 잘됐다’고 말했다.”
이종찬은 현역군인 신분을 갖고 국방부장관 직을 수행했다. 그는 1960년 5월에 전역했다. 이 대화 시점의 그는 국방장관 직만 갖고 있는 상태였다.
사퇴 성명이나 회고록만 놓고 보면, 백선엽의 전역이 이승만 퇴진에 따른 의례적인 일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고위 공직을 지낸 사람이 4·19 혁명 뒤에도 계속 공직에 머물 수 없기 때문에 퇴임한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에는 군부 수뇌부도 개입했다. 이 점은 1960년 5월 13일에 이종찬 국방부장관이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했던 증언에서도 증명된다. 1960년 5월 14일자 <경향신문> 기사 ‘군의 부정선거 개입 부인 못해’는 “이종찬 국방부장관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군대가 부정선거에 전혀 가담치 않았다고 부인하지는 못하겠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바로 이 부정선거 책임이 백선엽 전역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 하야 뒤에 과도정부(과정)를 이끌며 국정을 책임졌던 허정 대통령권한대행의 기고문을 담은 1962년 4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 ‘허정 씨가 공개하는 과정 3개월 (5)’에 이 점이 설명돼 있다.
기고문에서 허정은 군부 수뇌부의 부정선거 가담을 규탄하는 젊은 장교들의 압력이 거셌다는 점을 설명한 뒤, 자신이 소장급 이상 장군들에게 “당신들은 자기 스스로가 잘 판단해서 좋은 구실과 계기를 만들어 자진 사퇴를 해주시오”라며 “그러면 나도 여러분의 인격과 위신에 맞도록 해외 대·공사직을 마련하여 내보내도록 노력하겠소”라고 권유했노라고 회고했다. 그런 뒤 허정은 기고문 끝에 이런 글을 달아놓았다.
“나의 이 방법은 후에 충분한 효과를 나타내어 자진 사퇴하는 이가 많이 나왔고, 또 몇몇 분들에게는 약속대로 해외 공관의 공사 또는 대사로 임명해서 현지에 보내준 일도 있다(주: 백선엽·유재흥 장군 등의 주중국·주태국 대사직이 이때부터 마련되었음).”
이 일화는 백선엽이 친일행위와 국민학살에 더해 3·15 부정선거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적폐청산 작업이 군부에 대해서도 철저히 이뤄졌다면, 백선엽의 죄악은 좀더 명확히 세상에 드러났을 것이다. 전쟁영웅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이면의 백선엽은 독 묻은 가시처럼 온갖 부조리를 묻힌 인물이었다.
이처럼 죄악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백선엽은 자기 인생에 자부심을 품었다. 그는 자기가 선엽(善燁)이란 이름의 善처럼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했다. 위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내 이름에는 착할 선(善)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다. 내 회고록을 집필한 <중앙일보> 유광종 기자가 1948년 박정희 대통령을 숙군 작업에서 살려준 동기가 무엇이냐고 집요하게 묻길래, 그때에도 ‘내 이름에 착할 선이 들어 있잖아’라며 넘어간 적이 있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는 데 만족한다. 가능하면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돕고,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리고, 남을 해치려는 자는 힘을 기울여 막으면 좋은 것이다. 그런 마음이 정말 더 많은 사람을 돕고 살렸으면 그만이다. 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얻으려 고심할까.”
자신이 선하게 살았노라고 자부했다. 살릴 사람은 살리면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살릴 사람’이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살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항일투사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고한 민간인들이 ‘살릴 사람’과 ‘살릴 필요가 없는 사람’ 중에 후자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3·1운동에 있다고 선언한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당시의 헌법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3·1운동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나라에서, 3·1운동을 부정하는 친일행위에 가담하고 그것도 모자라 국민들을 마구 학살한 중범죄자를 대전현충원에 모신다면, 국민들은 현충원이 어떤 사람들을 모시는 곳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간도특설대, 일제 이이제이 전략에 따라 설립 악랄한 활동 탓 일반 사병까지 친일사전 등재 간도특설대 군가 중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 간도특설대 출신 창군 원로 5명 현충원 안장
[서울=뉴시스]박진희 기자 = 6·25전쟁 영웅이자 창군 원로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10일 오후 11시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사진은 미1군 단장에게 평양 탈환 상황을 보고하는 백선엽. (사진=육군 제공) [email protected](*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고 백선엽 장군이 일제강점기 당시 간도특설대에 가담해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는 이유로 친일 행적 논란이 일고 있다.
보수진영에서는 백 장군이 부임한 시기에는 간도에 있던 독립군이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뒤라며 실제로 백 장군이 독립군을 토벌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진보진영은 백 장군이 간도특설대의 독립군 토벌 이력과 부대 성격을 알고도 가담한 것은 더 큰 잘못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간도특설대는 일제강점기 간도(間島)에서 조선 독립군과 중국인이 연계한 반일-반만주국 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만주국과 일본 당국이 설립한 부대다. “조선인 독립군은 조선인으로 잡아야 한다”는 일제의 이이제이 전략에 따라 설립됐다.
이 부대는 1938년 일본 관동군 간도특무기관장 오코시 노부오 육군중좌에 의해 창설됐다. 부대장은 일본인이었지만 그 외 장교들은 조선인들이 많았고 병사들 역시 전원 친일 조선인으로 구성됐다. 1기생 모집인원은 228명이었다. 지원조건은 만 18세 이상 20세 미만 간도성 내 거주 조선인 남성 중 보통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과 일본어가 통하는 자였다. 복무연한은 3년이었다.
간도특설대는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됐다. 전투 상대인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등 항일조직이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뉴시스]박진희 기자 = 6·25전쟁 영웅이자 창군 원로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10일 오후 11시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사진은 미1군 단장에게 평양 탈환 상황을 보고하는 백선엽. (사진=육군 제공) [email protected](*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창설 목적에 맞게 간도특설대는 항일, 항만주국 세력에 대한 토벌을 수행했다.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이 주 타격대상이었다. 열하성, 하북성 등지까지 활동반경이 넓어지면서 팔로군(일본군과 싸운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과의 교전도 이뤄졌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다. 간도에 있던 많은 조선인이 체포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 식민지배에 맞선 독립운동을 대거 탄압한 탓에 간도특설대 소속 인물들의 대부분은 친일파로 인식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일본군 소좌 이상만 등재해놓고 있지만, 간도특설대의 경우 그 활동이 특히 악랄해 대위 이하 장교는 물론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징병이나 학병 등 상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일제를 위해 싸우게 된 다른 부대의 조선인들과 달리 간도특설대는 사병, 장교 가릴 것 없이 이 부대에 소속됐다는 것 자체가 명백한 자발적 친일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1939년 12월부터 1945년에 해산될 때까지 부대가로 불렀던 노래는 간도특설대의 정신을 보여준다.
가사는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을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대화혼(大和魂)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다.
광복이후 한국에서 반민특위 등 친일청산작업이 실패한 가운데 구 일본군과 만주군 소속 군인들이 국군 지도부로 편입됐다. 특히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제주 4·3사건 등에서 토벌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했다. 백야전사령부를 창설해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하고 육군참모총장이 된 백선엽이 대표적이다.
간도특설대 복무자 중 가장 유명한 백선엽은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돼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라고 회고했다.
[서울=뉴시스]홍효식 기자 = 6·25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불리는 백선엽 장군이 지난 10일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1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백선엽 장군 빈소에 영정사진이 보이고 있다. 2020.07.12. [email protected]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은 “그때 나는 만주국 내에 특별히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창설하려는 데는 어떤 특별한 정치적인 목적이 있지 않은가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단지 하급 간부 요원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한 처지라 내게 부여되는 임무를 완수하는 데만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고 되돌아봤다.
그간 국군 창군 원로 자격으로 현충원에 묻힌 간도특설대 출신은 5명이다. 이들은 모두 2009년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자다. 창군 원로이자 친일 반민족행위자인 백선엽이 현충원에 안장되면 6명으로 늘어난다.
[서울=뉴시스] 박민석 기자 = 한 시민이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장군 국민장 시민 분향소에서 영정 앞에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2020.07.12. [email protected]
신현준은 일본이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세운 장교 양성 기관인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우리 항일조직을 소탕하는 부대인 간도특설대 장교로 활동했다. 해방 후 귀국해 해병대 창설을 주도해 초대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김석범은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조직을 탄압했다. 광복 후 국군 해군 중위로 임관해 해군통제부 참모장과 방위사령관 등을 지냈다. 제2대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재향군인회 부회장과 성우회 부회장을 지냈다.
김백일은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진압했다. 광복 후 국방경비사관학교 교장, 육군보병학교 교장, 제1군단장 등을 역임했다.
송석하는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만주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와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이 됐다. 5·16 쿠데타 후 한국국방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김홍준은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조직 토벌에 나섰고 광복 후 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에서 근무했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를 왜곡했다는 지적을 받는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이하 정보센터)에 대해 “강제 노동을 부정하는 전시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성명을 공동으로 발표했습니다.
한일 시민단체들은 오늘(14일)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에서 “아베 정권이 총리관저 주도로 추진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일본 메이지(明治) 시대의 산업 근대화만을 찬미해 과거의 침략전쟁과 그 아래에서의 강제노동 역사를 배제하는 것”이라면서 “이는 유네스코 헌장 정신에 어긋나고 강제징용 피해자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강제노동 피해자의 존엄성을 다시 훼손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면서 “역사 청산 없이는 동아시아의 우호와 평화도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성명은 특히 “일본 정부와 함께 유네스코 등록을 추진한 산업유산국민회의는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함도가 지옥도가 아니라는 선전을 주도한 단체”라면서 “이를 추진한 인물이 현재의 가토 고코(加藤康子) 산업유산정보센터 센터장”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산업유산국민회의 전무이사인 가토 고코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에서 농림수산상 등을 지낸 가토 무쓰키(加藤六月·1926∼2006)의 딸이며, 아베 총리 측근인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후생노동상의 처형입니다.
그는 군함도 등이 세계 유산에 등재되는 과정을 지원했고, 2015년 7월∼2019년 7월 내각관방참여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시민단체들은 성명에서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 실태와 증언을 전시해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국제사회와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서 “또 강제징용 피해자 단체와 전문가 등과 대화해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동아시아 공동의 기억센터로 만들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습니다.
산업유산정보센터는 일본 정부가 2015년 7월 하시마 탄광 등 메이지 시대의 산업유산 시설 23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일제 징용 등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한 것을 토대로 지난달 15일 도쿄 신주쿠(新宿)구 소재 총무성 제2청사 별관에 개관한 전시시설입니다.
그러나 실제 전시는 메이지 시대 산업화 성과를 자랑하는 내용 위주이고, 징용 피해자 실태 등 당시의 어두웠던 역사를 외면하거나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성명에는 일본의 ‘강제노동 진상규명 네트워크’ 등 49개, 한국의 ‘민족문제연구소’ 등 15개 등 양국에서 모두 64개 시민단체가 참여했으며, 단체들은 성명서를 산업유산정보센터 등 관련 기관에 보냈습니다.
2018년 국방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생일파티 도중 생각에 잠긴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연합뉴스
‘전쟁영웅’과 ‘친일파’라는 상반된 평가 속에 백수를 넘기고 숨진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이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일제강점기 독립군 토벌 전문부대였던 간도특설대 출신이라는 비판에 보수세력들은 ‘전쟁영웅인 백씨가 평생 군인으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백씨 삶의 다른 면모들도 있다. 그는 서울 강남역 앞에 2천억원대의 건물을 가족 명의로 소유했던 자산가였지만, 수년에 걸쳐 가족 사이 송사가 벌어지기도 했던 게 대표적이다. <한겨레> 취재 결과, 현재 백씨 장남은 서울 강남역 5번 출구 바로 앞에 위치한 덕흥빌딩 소유주다. 지하 5층 지상 16층 규모의 대형 빌딩으로 대지가 853㎡(258평), 건평만 1만1381㎡(3443평)에 이른다. 빌딩 전문 부동산업체 관계자는 “삼성타운이 들어오면서 여긴 부르는 게 값인데 해당 건물은 초역세권이라 평당 5억원은 될 것”이라며 “땅값(2020년 공시지가 683억원) 말고도 건물은 시가로 최소한 2천억~3천억원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등기부등본을 보면, 백씨는 장남 명의로 돼 있던 땅에 건물을 올려 1994년 12월 역시 장남 명의로 소유권보존등기를 마쳤다. 당시 장남 나이는 41살이었다. 백씨의 재산 형성 과정을 추적한 전필건 전 교육부 사학혁신위원은 “40대 초반 나이에 강남 한복판에 대형 건물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며 “명의신탁에 의한 차명소유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차명 소유는 백씨 가족이 2007~2010년 사이 벌인 재산다툼을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2007년 4월 백씨 장녀, 둘째 딸, 둘째 아들 3남매는 장남을 상대로 부동산처분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 인용 결정을 받았다. 장남이 자신 명의의 건물의 매매, 증여, 전세권, 저당권 등의 권리 행사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3남매는 이어 ‘진정명의회복을 원인으로 한 소유권이전등기 청구’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 등기부상 주인은 실제 주인이 아니니, 실제 주인 명의로 소유권을 이전해달라는 주장이었다. 2008년 8월 서울중앙지법이 3남매의 손을 들어주자 장남은 서울고법에 항소했고, 2010년 1월 다시 3남매가 일부 승소했다. 대법원까지 간 재산다툼 결과, 해당 건물은 장남과 백씨 부인이 절반씩 소유하게 됐다가, 2012년 백씨 부인이 지분을 350억원에 장남에게 매각하면서 지금은 온전히 장남 소유가 됐다. 재산을 장남 명의로 해놓았던 게 사달이 난 셈이다. 장남을 뺀 3남매는 미국 시민권자로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소송과정에서 장남과 척을 진 백선엽은 말년에 아내 노씨와 둘이서 지냈다고 한다.
서울 강남역 5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덕흥빌딩. 시가로 2천억원이 넘는다. 카카오맵 거리뷰 갈무리
형제끼리의 재산다툼 외에도 백씨 일가에는 유독 돈과 관련해 입길에 오른 인물들이 여럿이다. 백씨의 동생인 백인엽(1923~2013) 전 예비역 중장과 사촌누이인 증권가 큰 손 백희엽씨다. 일본 육군 항공소위 출신인 백인엽은 1956년 6군단장 등을 지낼 때 군수비리를 저지른 혐의로 5·16쿠데타 당시 부정축재자 1호로 검거돼 무기형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사실 여기엔 백인엽의 비리와 함께 박정희와의 구원도 일정정도 작용했다. 6군단장 시절, 백인엽은 장병들을 완전 군장으로 연병장에 집합시킨 뒤 당시 부군단장이었던 박정희의 철모를 지휘봉으로 톡톡 치며 “빨갱이 XX”라는 등의 모욕을 준 일이 있었다. 백인엽으로부터의 수모를 참다못한 박정희가 백인엽의 군수비리를 문제제기했고, 이 일로 박정희는 이듬해인 1957년 9월 제7사단장으로 전보조치된다. 이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부패군인의 대명사였던 백인엽을 처단하고 싶었으나, 1948년 여순사건 뒤 숙군과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백인엽의 형 백선엽을 생각해 선처했다고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은 자신의 책(<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적었다. 숙군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이 남로당 활동으로 위기에 처한 박정희를 구해준 일화는 유명하다.
한편,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12연대 연대장으로 진압작전에 참가한 백인엽은 구례지역 부역자 색출과정에서 민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과정의 최고책임자였다. 2008년 진실화해위는 백인엽을 직접 조사해, 그가 구례지역 민간인학살사건의 가해책임이 있다고 진실규명한 바 있다.
선인학원 사학비리로 악명을 떨친 백선엽의 동생 백인엽의 육군 중장시절 사진(1956년). 한겨레 자료사진
죽다 살아난 백인엽은 교육자로 변신, 이후 인천지역에 선인학원이라는 학교법인을 설립한다. 형과 자신의 이름을 더해 만든 그 사학재단에서 백인엽이 벌인 비리는 상상을 초월했다. 약 5700명의 학생을 정원 외로 부정입학 또는 편입시키고, 졸업장을 팔아 61억원을 받아 챙겼다. 지금 20억원(31평)에 거래되는 서울 강남 은마아파트가 1847만5천원에 분양되던 시절이었다. 학교를 짓는다며 월남 피란민 판자촌을 철거해 원성을 샀고 확장을 이유로 중국인 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 외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교직원들을 무조건 해고하고, 교사들에게 예비군 군복을 입혀서 보초를 서게 하고 순찰을 돌게 했다.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총 14개, 학생 수만 3만6400여명에 이르던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사학에서 벌어진 비리는 동양 최대였다. 당시 신문은 백인엽을 두고 ‘인천의 무법자’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년 3월, 업무상 횡령, 배임수재, 건축법과 중기관리법 위반으로 또다시 백인엽이 구속된 이유다. 이후 선인학원에 관선이사로 내려온 이는 형 백선엽이었다. 동생이 단군 이래 최대 사학비리를 저지른 곳에 형이 이사로 온 것이다. 앞서 형 백선엽이 강남대로에 건물을 올린 1994년은 선인학원 소유의 인천대 등이 논란 끝에 국공립화되던 때였다. 두 형제가 관여한 천문학적인 사학비리의 뒷감당을 국가가 나서서 하고 있는 사이, 백선엽은 강남에 대형빌딩을 세운 셈이다.
백선엽의 사촌누이인 증권가의 큰손 백희엽씨도 돈으로 한국사회를 주름 잡았던 인물이다. 1975년 중동건설붐을 타고 건설주가 폭등하면서 증권가에 이름을 날리게 된 백씨는 동아건설을 비롯, 해외 건설주를 대량매집해 거액을 벌었다. 백씨가 한창 명성을 날릴 때에는 단순히 어떤 주식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만 나도 관련 주식이 폭등할 정도였다고 한다. 1995년 사망한 백씨는 40년대 후반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고 박용학씨의 부인이기도 했다.
천수를 누린 백선엽씨를 마지막으로 치부(致富)의 한 획을 그은 백씨 집안 내력도 한 대가 마무리됐다. 여전히 백씨가 청빈하다고 주장하는 보수세력들은, 미군도 그를 극진히 예우한다며 전쟁영웅으로 칭송한다. 그러나 백씨가 군인이었을 때, 미국의 평가는 정반대였던 것 같다. 5·16 쿠데타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의 필립 하비브 정치담당 참사관은 본국에 보낸 장문의 기밀문서에서 “(백선엽은) 혜택과 진급, 적절한 사면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파벌적 역량을 축적했다”며 “백 장군은 다른 참모총장들보다도 더욱 부패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기술한 바 있다.
정욱식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MD본색》, 《말과 칼》, 《사드의 모든 것》, 《핵과 인간》, 《비핵화의 최후》 등이 있다.
“정욱식은 한국의 대표적 평화분석가이자 운동가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한반도 비핵화에 이르는 최선의 길은 ‘한반도 비핵지대’라고 설파하고 있다. 기존의 타부(taboo)를 깨는 창의적이고도 상상력 넘치는 책이다” –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 · 연세대학교 특임명예교수)
참으로 희한한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똑같이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항거하다가 순국했는데, 을미의병 참여자(1895년의 양반 유생)는 서훈하고,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1894년의 평민, 전봉준 등)는 서훈을 하지 않고 있다. 믿기지 않을지 모르나, 이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독립유공자법)에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자는 순국선열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순국선열에 해당하는 자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된다. 그런데 독립유공 심사위원들은 이 법률에 의거하여 독립유공자를 심사하지 않고 있다.
1962년에 이병도와 신석호(둘 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됨)가 정한 독립유공 내규 즉 ‘독립운동의 기점은 을미의병이다’라는 내규에 의거하여 심사하고 있음이 최근 확인됐다. 최근 독립유공 심사위원이라고 밝힌 분이 필자에게 “1895년 을미의병부터라는 내규로 심사하고 있다. 전봉준이 서훈을 받으려면 내규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필자는 황당하였다.
이병도는 자신이 지은 <신수 국사대관>(1961)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란” “폭동”으로 서술했으며, 2차 동학농민혁명의 구호가 “척왜를 부르짖었지만, 그야말로 형식적인 구호에 불과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신석호도 자신이 지은 <중학교 국사>(1960) 교과서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당의 난”이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지금의 역사학자는 아무도 이병도와 신석호와 같이 동학농민혁명을 인식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에 만든 내규는 수명이 다했기에 이제는 고쳐야 한다.
독립유공자법 내용대로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항거하다가 순국한 자는 서훈한다. 서훈 시기는 갑오변란(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 이후 일제에 항거하는 때부터이다”로 바꾸면 된다. 왜냐하면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통일되어 집필된 8종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한국사 개설서, 독립운동사 분야의 최고 학자(조동걸, 신용하, 김상기 등등)의 저서와 논문에서 갑오변란을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첫번째 침략 사건으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한국 근현대사학계가 인정하는 정설과 통설을 바탕으로 기술된다. 학계의 의견이 통일되어 모아진 내용이 교과서에 기술된다. 2020년 현재 8종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전봉준을 항일 구국 투쟁을 전개한 총사령관으로, 최시형을 항일 구국 투쟁을 전개하도록 지시한 최고 지도자로 기술하고 있다.
모든 한국사 개설서에 2차 동학농민혁명을 반일 투쟁, 반외세 반침략 민족운동으로 서술하고 있다.
2차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운동의 공통점은 적극적인 국권 수호 운동, 항일무장투쟁, 일본의 침탈에 맞선 반침략·반외세 민족운동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차이점은 항일 투쟁의 주체가 농민이냐, 양반 유생이냐에서 갈렸다. 의병운동에 참여한 양반은 1962년부터 서훈이 되고, 2차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항일 농민은 지금도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불공평과 모순은 시정되어야 한다.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는 즉각 독립유공 서훈 내규 개정위원회를 만들어 내규를 개정해야 한다.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이후에 나온 수많은 한말 의병 연구와 동학농민혁명 연구 성과가 내규 개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한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애국선열의 명예를 진정으로 회복해드려야 하는 역사적 책무가 우리에게 부여되어 있다. 필자의 주장과 의견이 다른 분은 반론을 펴기를 바란다. 반론을 환영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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