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제2형사부 이수영 판사는 25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정미홍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이 판결로 지난 2017년 8월 31일에 형사소송 1심 재판부가 내린 ‘벌금 30만원에 처한다’는 원심이 유지되게 되었다. 이수영 판사는 피고 정미홍씨가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않아서 재판부의 결정으로 항소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정미홍씨는 2013년,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기사 조작’이라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로 인용하며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조작했다는 허위사실을 퍼뜨렸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는 정미홍씨에 대해 민·형사 소송을 제기하였고 민사소송은 2017년 1월에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었다. 민사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민족문제연구소에 300만원을 배상한 정미홍씨는 이번 형사소송으로 벌금 30만원을 또 물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조작했다는 정미홍씨 주장의 핵심근거는 ‘말바꾸기’였다. 박정희 혈서기사가 게재된 신문의 이름을 갑자기 바꾼 것이 조작의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수년동안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기사가 실렸다고 주장하던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에 갑자기 ‘만주일보가’가 아니라 ‘만주신문’이라고 말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미홍씨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재판부는 정미홍씨에게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출하라고 요구했으나 정미홍씨는 끝내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오히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나왔다. 공식 출판된 책 ‘만화 박정희’(시대의 창, 2005)의 내용을 근거로 민족문제연구소가 2005년부터 ‘만주신문’을 언급한 사실이 증명되었다. 재판부는 이러한 증거를 받아들였고 정미홍씨의 주장이 근거 없는 허위사실이며 민족문제연구소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하였다.
정미홍씨가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법무담당 임선화 기록정보팀장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조작했다는 어떠한 객관적 증거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소이유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이번 판결로 박정희 혈서기사가 역사적 사실임이 다시금 확인된 만큼 더 이상 박정희 혈서에 대한 허위사실이 유포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 [현충원 안장 친일파] 백낙준 묘지 민족을 붙들고 살리기 위해 ‘친일’ 을 택했다는 사람, 백낙준 친일파 백낙준의 묘는 국가유공자1묘역에 자리해 있다. 유공자1묘역은 이승만 대통령 묘소 바로 뒤쪽으로 친일파 김백일과 신응균이 잠든 장군1묘역으로 가는 길목이다. ⓒ 김종훈
국립현충원에 잠든 11명의 ‘국가공인 친일파’ 중 군인이 아닌 인물이 하나 있다. 연희전문학교 초대 총장이자 문교부 장관, 초대 참의원 의장을 지낸 백낙준이다.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자리한 그의 묘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는 전쟁을 앞뒤에 두고 나고 자라고 일하는 동안 민족을 붙들고 살리는 방도가 교육에 있음을 알고 일생 사업으로 교육에 종사하여 왔다.”
▲ 국가공인 친일파 백낙준 ⓒ 한국학중앙연구소
일제강점기 백낙준의 삶은 묘비에 새겨진 말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백낙준은 일제강점기부터 교육자이자 언론인, 종교인으로 활동하며 설교, 사설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특히 <기독교신문>의 편집위원과 이사로 활동하며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했다. 1942년 5월 20일 백낙준이 직접 작성해 <기독교신문>에 실은 설교문 ‘내 아버지의 집’ 중 일부다.
“우리 제국의 궐기는 대동아 공존공영과 세계평화를 위한 정의의 옹호다. 이러한 성전에 몸과 정성을 받들 수 있는 것은 황국에 생을 향유하고 있는 우리 신민된 자에게 무한한 영광이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자기 나라가 이 세상 나라였다면 그 신하가 싸울 것이라 했다.”
백낙준이 직접 편집과 설교, 사설을 써가며 자신의 친일 행각을 알린 <기독교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조선기독교협회에 의해 창간됐다. 4월 29일은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로, <기독교신문> 창간 10년 전인 1932년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한 날이기도 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백낙준은 1942년 ‘종교보국’을 사명으로 창간된 기독교 신교 각파의 합동기관지 <기독교신문> 이사와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면서 황민화 정책과 전쟁협력을 강조하는 지면을 편집하고 직접 설교와 사설을 썼다. ‘미영타도’ 좌담회에 참석하고 전쟁협력을 역설하는 기고문을 반복적으로 발표하는 등 사회단체를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적극 협력했다.”
▲ 1943년 1월 당시 매일신보에 실린 일본 항공기 관련 기사 ⓒ 공훈전자사료관▲ 1941년 12월 2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애국기헌납운동’ 관련 기사. 백낙준은 지대한 활동을 보였다. ⓒ 공훈전자사료관
백낙준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헌신적으로 부역하기 위해 ‘조선예수교 장로교도 애국기헌납기성회’라는 단체의 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42년 9월 23일 <기독교신문>에는 이 단체에서 구입해 일제에 헌납한 해군전투기 ‘조선장로호’ 명명식 장면이 기사로 실렸다. 이 자리에는 목사 백낙준도 참석했다.
“남으로 북으로 종횡무진의 활약을 하고 있는 우리 육해공군의 분투와 노고에 보답해, 총후 37만 장로교도 일동은 우리 무적해군에 해군기 1대와 병기 2정을 헌납한 사실을 누차 보도했다. 이 보국호(조선장로호)의 명명식은 ‘대공의 제전’에 전개된 항공일의 의도 깊은 9월 12일 오후 1시부터 경성 함태영 목사, 백낙준 목수 외 80여 명 장로회 대표들이 열석하고, 군관민 내빈 5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경성운동장에서 엄숙히 거행됐다.”
독립운동가 서훈 심사위원이 된 친일파
▲ 1951. 부산, 한 초등학교 어린이 대표가 교과서 용지를 원조해준 미국의 원조기관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하고 있다(오른쪽 끝은 당시 백낙준 문교부장관) ⓒ NARA
해방 후 한 달 뒤인 1945년 9월 백낙준은 큰 어려움 없이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돼 김성수, 김활란 등과 함께 활동한다. 이어 10월부터는 경성대학(서울대학 전신) 법문학부 부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부터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1946년 8월 연희전문학교가 연희대학교로 승격되자 초대 총장이 됐다.
1950년 5월부터 문교부 장관을 맡아 1952년 10월까지 재임했다. 이후 국민사상지도원 원장과 연희대학교 이사장을 맡았다. 1953년에 다시 연희대학교 총장으로 복귀, 1957년 1월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대가 통합해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자 초대총장으로 취임했다. 1985년 1월 8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연세대학교 명예총장을 지냈다.
1968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가 열리자 박정희 정권은 백낙준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기준으로 조선사편수회 출신 신석호, 이병도,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회부장 출신 홍종인 등도 백낙준과 함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박정희 정권 때 활동했다.
24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친일행적
▲ 1943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백낙준 관련 기사 ⓒ 매일신보 캡처본 재촬영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담긴 백낙준의 친일행적은 A4용지 24장에 이른다.
1940년대 교육과 문화, 언론, 종교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부역한 백낙준의 친일 족적이 그만큼 방대했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백낙준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라고 평가했다.
“백낙준은 평남 신성학교와 중국 천진신학서원을 거쳐 미국 파크대학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신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예일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연희전문교수로 재직하며 문과과장을 지냈다. 194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예수교 장로회 포교자로 허가를 받은 뒤 각종 사회단체를 통해 일제에 협력하는 활동을 했다.”
백낙준은 ‘국가사회 유공자’라는 이유로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혔다. 2009년 정부가 ‘친일파’로 결정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누워있다. 현행 상훈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강제로 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명시됐다.
▲ 백낙준 (1896~1985) –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이 된 친일파, 연세대 총장 “제국의 궐기는 대동아 공존공영과 세계평화를 위한 정의의 옹호다. 이러한 성전에 몸과 정성을 받들 수 있는 것은 황국에 생을 향유하고 있는 우리 신민된 자에게 무한한 영광이다.” 연희전문학교 초대 총장이자 문교부 장관, 초대 참의원 의장을 지낸 백낙준이 직접 창간한 <기독교신문>에 실은 글이다. <기독교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창간했다. 10년 전,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성공시킨 날이기도 하다. 해방 후엔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돼 김성수, 김활란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57년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자 초대총장으로 취임했다. 1968년엔 친일파 홍종인 등과 함께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국립현충원 11명의 국가공인 친일파 중 유일하게 군인이 아닌 인물이다. 그의 친일행적 기록은 A4용지 24쪽에 달한다. ⓒ 오마이뉴스
25 지금 우리는? 미국의 이익을 재구성하자 / 정욱식 개성공단, 이제는 열자! / 김진향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교훈과 과제 / 이정윤
67 인물로 보는 역사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쯔지(布施辰治)와 조선 / 이규수 자유와 평화를 꿈꾼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 / 변은진 일본의 한국사학자 가지무라 히데끼(梶村秀樹)의 ‘따뜻한 역사학’/ 이홍락 [반독재민주화열전] 김병곤, 겨울공화국의 전설 / 김현서 [코민테른인명사전] 이탈리아어판 『코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들 (3) 조동호, 김시현, 여운형, 홍범도 / 임경석
143 사실 체크 ‘만주(滿洲)’라는 이름의 유래와 뜻의 전환 / 이명종
155 내일을 여는 책 식민지 조선 역사학의 방향 전환,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 / 조형열
225역사와 공간 화성 융릉과 건릉 일대에서 수원의 옛 흔적을 찾다 / 정요근 문화와 서사의 힘 – 「춘향전」의 모태, 조선 전기 남원도호부를 찾아서 / 김창회
275 북한의 이해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 / 강호제 북한 인권 현황과 대응 :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 장은하
<여는 글>
신종 신종 감염병을 극복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
감염병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병증 자체도 문제지만 빠른 전파력으로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가로막고 있어 더욱 심각한 위기를 낳고 있다. 이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이 치명타를 입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저성장의 늪에 빠져서 곡예 하듯 아슬아슬하게 연명해 온 자본주의 체제가 국가간 대륙간 교역이 단절되면서 대공황의 파국을 맞을 수 있다는 경고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세계에서 무역의존도가 가장 높은 우리나라 경제 역시 파국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양상을 보여주었다. 국가가 신속하게 대응 조치를 마련하여 실천에 옮겼고, 국민들은 여기에 적극 호응하면서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 헌신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조차도 경이롭게 여기고 주목할 정도이다.
우리들로서는 생존을 위해 각자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세계의 주목을 받으니 좀 얼떨떨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국가 또는 공동체에 대해 우리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집단 무의식이 발현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은 어제 오늘 사이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단련되어 나온 것이었다.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생존을 향한 집단 무의식은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전쟁을 거치면서 왜곡되고 부정되기도 하였지만 면면하게 이어져왔다. 『내일을 여는 역사』는 창간 이래 그러한 역사 전통에 주목하고, 그것이 긍정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작업에 매진해왔는데, 그것은 이번호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지금 우리는?’에서는 우선 미국에 주목하였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뒤 남북간, 북미간 정상회담이 여러 차례 열렸지만 평화협정은 요원하고, 남북 분단으로 인한 냉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간의 과정을 통해서 남북간 교류와 협력을 미국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정욱식은 이러한 현실을 우리가 능동적으로 타개하기 위해 ‘미국의 이익을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사실 남한과 북한이 경제적으로 교류 협력하게 되면 그 경제적 시너지 효과가 엄청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누누이 지적해 온 일이다. 남북교류는 당연히 만주와 시베리아로까지 확장되어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차원의 경제 협력을 활성화시켜서 침체 일로에 있는 세계 자본주의가 다시 불타오를 수 있는 폭발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세계 자본주의가 다시 활성화되어 발전하면 미국도 경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어 장기적으로 큰 이익이 될 것이다. 워싱턴 정가를 지배하고 있는 네오콘 등 군산복합체 세력이 이러한 새로운 정세 변화에는 눈을 감고 북한에 대한 근거 없는 적대감에 사로잡혀서 남북 교류를 가로막고 나서는 것은 미국 자신의 국익에도 맞지 않는다고 이 글은 설파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김진향은 개성공단을 즉시 열자고 주장한다. 개성공단이야말로 평화경제의 상징인데 역시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으로 인해 다시 열리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개성공단을 재가동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경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돌파구가 될 것이므로 한국 정부가 나서서 미국과 국제사회를 적극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첫 단계로서 정부가 개성공단 재개를 선언하라고 요구하면서, 이것은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대북 제재를 위반한 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또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후유증도 심각해 보인다. 사고 발생 이후 8년이 지났지만 일본 정부는 그 후유증을 투명하고 분명하게 수습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결국 아베 정권은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겠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비용 때문이다. 만약 방사능 오염수가 방류된다면 한국과 중국은 물론 태평양 연안 국가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이정윤은 오염수 저장 비용이 한국과 중국의 협력을 통해서 해외 원조로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동북 아시아 지역에 원전이 밀집되어 있어서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동북 아시아 3국에 미국 등 태평양 연안국가가 추가된 ‘동북아시아 원자력 안전 감시기구’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에는 세계 각국이 긴밀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어서 우리만 열심히 한다고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했던 19세기 말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럴 때일수록 공동체를 신뢰하고 그것에 헌신하는 자세로 국가의 보다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대응을 앞장서서 유도해내야 할 것인데, 국제 원자력 안전 감시기구의 창설은 그러한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대응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북한에 대한 관심 역시 이번호에서도 이어진다. 강호제는 북한의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를 정리하였고, 장은하는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북한의 인권 현황을 점검하였다. 분단으로 인한 정보 부족으로 북한에 대한 냉전적 편견을 고집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 방향과 일치되지 않으므로 북한의 현실을 사실에 입각하여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현실 인식의 산물이다.
‘인물로 보는 역사’는 우리 잡지의 간판 코너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특히 일본인 가운데 우리에게 헌신했던 인물들을 발굴하여 소개한다. 일본인이면서도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일본 국가와 민족이 한반도 분단에 결정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한일 노동 연대의 선구자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 그리고 평생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 역사 연구에 헌신한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등이 그들이다.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한일 관계 속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일본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보다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탈리어판 『코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에 대한 소개도 계속되어, 이번호에서는 조동호, 김시현, 여운형, 홍범도 등을 다룬다. 공동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이들에 대해 공산주의자라는 굴레를 씌워서 매도하는 냉전적 사고를 극복하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믿는다. ‘반독재민주화열전’에서는 1970년대 이후 유신체제와 그에 이은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다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버린 김병곤의 불꽃같은 삶을 만날 수 있다.
역사 인식과 관련해서는 이형식이 1910년대 일본 제국주의 통치 방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모색하였고, 이명종은 우리가 흔히 만주(滿洲)라고 부르는 지명의 유래와 의미를 천착하였다. 우리가 가진 통설적 이해의 허점을 교정해보려는 시도이다.
‘내일을 여는 책’으로서 조형렬은 백남운의 일련의 저술을 소개하였다. 필자는 백남운이 일제시대에 보편사의 의미를 강조하며 민족주의 역사학을 비판하였지만 ‘민족’에 대한 애정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 역사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길을 모색한 내재적 발전론의 선구자로 이해하였다.
‘사료의 재발견’에서 김용흠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시기 법전 편찬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이를 통해서 우리 역사가 국가의 연속적 발전이라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법전 편찬이 지배층의 계급적 착취를 위한 도구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직접 생산자인 민의 성장을 반영한 측면도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려 하였다.
‘예인열전’에서 최열은 이번호로 겸재 정선에 대한 소개를 마친다. 필자는 정선이 조선 회화사에 혁명을 일으켜서 동방 산수의 화종(華宗)이 되었으며, 정선양식을 스스로 끝낸 화가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바탕으로 정선의 생애에 맞추어 제시한 그림에 대한 해설을 통해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과 함께 조선화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직접 답사하여 소개하는 ‘역사와 공간’에서는 이번에 수원과 남원 주변을 다녀왔다. 정요근이 수원 주변을 답사한 이유는 그 지역이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어 공사를 앞두고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화성의 융릉과 건릉의 옛터를 더듬어보고 독산성과 세람교 등 수원 옛 읍치 주변도 살폈다. 현대의 택지 개발이 불가피하더라도 유적지의 복원과 보존도 고려할 줄 아는 것이 김구 선생이 말한 문화민족이 되는 길일 것이다.
김창회는 원래 대구를 답사하려 했는데, 신종 감염병 때문에 포기하고 남원으로 갔다. 먼저 오수에 들러서 의견(義犬) 설화의 흔적을 찾아보고 남원읍성과 그 주변 및 광한루를 돌아보았으며 율림과 용담의 흔적도 추적해 보았다. 또한 남원역의 불합리한 위치와 부서진 황산대첩비를 통해서 일제 식민지 통치의 악랄함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이번호도 원래 기획한 내용을 다 채우지 못했지만,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헌신을 다져보려는 애초의 의도에 비추어 나름 체면치레는 한 것 같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그렇지만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것이 10년이 넘어가니 다들 좀 지쳐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편집위원들로 거듭나려 한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편집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새로운 편집위원들이 보다 알차고 재미있는 『내일을 여는 역사』를 만들어 주시리라고 기대해 본다.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 해병대 초대 사령관 신현준. 정부는 2009년 신현준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결정해 발표했다. ⓒ 해병대 전우회 중앙회 홈페이지 캡처
“무적 해병의 아버지! 평생 조국과 겨레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신 님이여, 영원히 우리를 지켜주소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최상단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 신현준의 묘비에 적힌 말이다. 신현준은 경북 김천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만주로 올라갔다. 이로 인해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를 자연스레 구사했다. 신현준 스스로도 자신의 책 <노 해병의 회고록>에 “어릴 때부터 중국어를 배워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면서 “이를 무기로 일본군에 종군하면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1932년 2월,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였던 나는 학교 공부를 중단하고 일본군에 종군할 것을 결심했다. 당시 하얼빈시 남강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에 찾아가 구두시험을 치른 다음 그 자리에서 합격통지를 받았다.”
이날부터 신현준은 1936년 4월까지 4년여 동안 일본 만주파견군과 만주국군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당시 신현준이 모셨던 일본군 참모 중에는 만주군 제5군관구 수석고문으로 열하성 일대에서 활동한 세키하라 대좌(대령)가 있었다. 신현준은 회고록에 “장차 만주군 장교가 되고 싶다는 나의 희망을 알고 격려해 주었다”면서 세키하라 대좌와의 인연을 자세히 언급했다.
“세키 대좌는 35년 3월부터 나를 현지 실무부대(34사단)에 배속시켜 근무 경험을 갖도록 배려해주었다. 단장(연대장) 전속 통역으로 근무한 지 만 1년째 되던 36년 4월, 나는 마침내 소망하던 대로 만주군 장교가 되기 위해 봉천군관학교에 입교하게 됐다.”
신현준은 1937년 9월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5기로 졸업했다. 이후 1937년 10월부터 보병 35연대 박격포련(박격포중대)에서 견습군관으로 복무한 뒤 그해 12월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938년 12월 1일부터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우다카와 요시히토로 창씨개명한 신현준은 1941년 3월 중위로 진급한 뒤 1943년 12월부터 열하방면으로 출동해 팔로군 및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했다. 1944년 3월 만주국군 상위(대위)로 진급한 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간도특설대 주요 간부 및 만주국군 보병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광복군으로 신분 바꿔 귀국한 만주군 장교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45년 8월 10일 만주국군 8단 소속의 신현준은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집결지인 중국 싱룽으로 향한다. 8월 17일 싱룽에 도착한 신현준을 기다린 것은 일본의 패망 소식. 중국군은 신현준을 직위에서 해임하고 무장을 해제했다.
총검을 잃은 신현준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베이징행을 택한다. 당시 ‘(세력 확장을 위해) 일본군 출신 조선인을 광복군에 적극 편입한다’라는 한국독립당의 방침을 접했기 때문이다. 베이징 인근에는 광복군 3지대가 주둔 중이었다.
▲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로 만주군관학교로 간 박정희. ⓒ 자료사진
신현준은 만주국군 후배인 이주일, 박정희 등 조선인 장교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향했다. 일본군 고위장교였던 신현준은 광복군 3지대 핑진(平津) 대대의 대대장이 됐다. 함께 이동했던 이주일은 1중대장, 박정희는 2중대장에 임명됐다.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하던 만주국군 장교가 해방 후 대한민국 광복군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친일파 전문가인 정운현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2018년 10월 22일 <경남도민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해방 직후 북경에는 광복군 출신, 학도병 출신 등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집결했다”면서 “그 숫자가 대략 400여 명에 달했는데 만주군 중위 출신의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중 한 명이었다,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경력을 인정받아 3지대 1대대 2중대장을 맡았다, 이들은 모두 ‘해방 후 광복군'”이라고 지적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10일, 신현준은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에 상륙한다. 이후 봉천군관학교 동기인 정일권의 권유로 간도특설대 출신 김대식(해병대 3대 사령관)을 만나 조선해안경비대 입대절차를 밟고 1946년 12월 중위로 임관한다.
이듬해 해병 소령으로 특진한 신현준은 1948년 5월 해군 진해통제부 참모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중령으로 진급한다. 이 해 10월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해군함정 4척을 이끌고 여수항 일대를 점령한 뒤 해상에서 작전을 전개해 저항세력을 진압했다.
▲ [현충원 안장 친일파] 신현준 묘지 무적 해병’의 아버지 신현준, 만주군 장교가 되고 싶었다 친일파 신현준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신현준은 장군제1묘역 최상단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김종훈
신현준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상륙작전을 전담하는 부대가 필요하다’면서 해병대 창설을 국군에 제안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5월 5일 대통령령으로 해병대 창설을 정식 공포한다. 신현준은 해병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신현준은 1949년 제주4.3사건이 발생하자 해병대 전 병력을 제주에 배치해 토벌 작전을 전개한다. 한국전쟁 후 신현준은 해병대 사령관 자리를 간도특설대 출신 김석범에게 인계한다. 이후 1958년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유학한 뒤 1960년 6월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고 1961년 4월 국방차관보에 임명된다.
5.16군사쿠데타 후 군에서 물러난 신현준은 초대 모로코 대사와 초대 바티칸 대사를 지냈다. 제5대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도 역임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노년을 보낸 신현준은 2007년 10월 15일 만 9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닷새 뒤인 10월 20일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공식보고서에 “신현준은 만주국군 장교로서 1938년 창설된 간도특설대의 창설기간 장교로 발탁돼 1944년에 이르기까지 만주지역 항일세력 무력탄압에 적극 협력했다”면서 “이러한 행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3년 9월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6위 경운장을 받았다”라고 기록했다.
이어 “신현준의 이러한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 19호에서 규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고 공식보고서에 명시했다.
“장성급 장교”라는 이유로 2007년 10월 현충원에 안장된 신현준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최상단에 잠들어 있다.
상훈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강제로 이장할 수 없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돼있다.
▲ 신현준 (1916~2007) – 간도특설대에서 광복군으로 신분세탁 1932년, 일본군에 종군할 것을 결심하고 일본 만주군 통역이 됐다.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거쳐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했다. 열하방면으로 출동해 팔로군 및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했다. 일본이름은 우다카와 요시히토.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군 출신 조선인을 광복군에 적극 편입한다’는 한국독립당의 방침을 접하고 만주국군 후배인 박정희 등과 함께 베이징 광복군 부대로 향한다. 당시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하던 만주국군 장교가 해방 후 대한민국 광복군이 된 예는 적지 않다. 친일파 전문가인 정운현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이들을 ‘해방 후 광복군’으로 구별해 부른다. 1946년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에 상륙, 대한민국 해병이 된다. 여순사건 때 저항세력 진압에 앞장 선 뒤 해병대 창설을 국군에 제안, 해병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4.3사건이 발생하자 해병대 전 병력을 제주에 배치해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 오마이뉴스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조상에 대한 신의로 창씨개명 아니한 오직 그 이름 김석범으로 이곳까지 왔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최상단 바로 아랫줄에 잠든 친일파 김석범의 묘비 내용 중 일부다.
▲ 해병대 2대 사령관 김석범. ⓒ 해병대 전우회 중앙회 홈페이지 캡처
김석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 공식보고서에 “만주국군 장교로서, 특히 ‘간도특설대’의 주요 간부로 항일운동을 탄압하고 침략전쟁에 협력했다”라고 기록된 인물이다.
1915년 11월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난 김석범은 1934년 중국 신징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36년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한다. 견습사관을 거쳐 1937년 12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김석범은 1939년 4월 졸업성적 우수자로 발탁돼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만주국 신징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 대통령과 유사한 경우다.
1940년 9월 일본 육사를 졸업한 김석범은 12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해 간도특설대 정보반 주임(책임자)으로 활동했다.
위원회는 김석범이 책임자로 활동한 간도특설대 정보반에 대해 “1944년 열하성 유수림자에서 정식 성립했다”면서 “정보반의 목적은 팔로군, 지하공작원, 민병의 활동과 군중의 사상동태를 정찰해 (간도)특설대가 소탕활동과 항일군민을 체포하고 살해하는 것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보반은 각 연(중대)에서 13명의 골간분자를 뽑아 조직하였으며 변절분자 중에서 약간 명을 흡수해 정보활동을 진행했다. 주요 임무는 정보를 수집하고, 반공선전을 전개하며 체포된 항일연군과 혁명군중을 직접 심문하고 기타 정보활동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기록으로 남은 간도특설대 정보반의 악행
▲ [현충원 안장 친일파] 김석범 묘지 우리가 잘 몰랐던 해병대 사령관 김석범의 비밀 친일파 김석범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석범은 장군제1묘역 최상단 바로 아래줄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김종훈
김석범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는 재중사학자 차상훈씨가 남긴 기록도 첨부됐다.
“1944년 5월 열하성 유수림자에 주둔하고 있던 특설부대는 40세 좌우의 백성을 붙잡아다 사격 과녁으로 삼았다. 정보반 반장놈은 신병 매 사람에게 탄알 세 발씩 쏘게 했다. 30발을 쏘았으나 명중하지 못하자 노병사에게 사격하라 했고 단방에 그 백성을 명중했다. 1944년 5월 아키바 중대장 놈이 부대를 거느리고 사가장자 마을을 습격했다. 놈들은 여자는 만나는 족족 강간하고 좋은 물건은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악명 높은 간도특설부대> 중, 민족출판사, 1991.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간도특설대가 중국 허베이성 석갑진 일대에서 활동할 때, 정보반의 활동에 힘입어 ‘토벌’한 횟수는 34건이나 되었다”면서 “토벌로 팔로군 군정 인원과 주민 39명이 학살됐고, 체포된 자는 62명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됐다.
김석범은 1943년 9월 15일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듬해엔 만주국군 상위(대위)로 진급했다. 1945년 무렵 만주국군 제6관구 보병 7단으로 전출돼 연장(중대장)을 맡았다. 당시 만주국군 7단은 후방진지 구축과 군용도로 건설을 맡은 부대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석범은 1945년 6월경 보병 제30단과 합동으로 경박호 서측지구 진지를 구축하다 8월 12일 명령에 따라 원대복귀 하던 중 소련군을 만나 무장해제를 당했다”면서 “일제가 패망한 후 신징으로 가 조선인 출신 만주국군 장교들이 주축이 돼 만든 신징보안사령부에 참가해 봉천군관학교 동기생인 정일권에 이어 사령관을 맡았다”라고 <친일인명사전>에 밝혔다.
김효순 기자가 쓴 <간도특설대>라는 책에 따르면 “일본의 패전 이후 중국인의 약탈과 보복행위로부터 한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군과 관동군 복무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단체가 신징보안사령부”다. 해방 후 신징보안사령부 사령관이 된 김석범은 1946년 4월 신징보안사령부 소속 전원을 인솔해 인천으로 귀국했다. 당시 신징보안사령부에 참여한 인물에는 훗날 전두환의 장인이 되는 만주국군 경리관 출신 이규동도 있었다.
해방 후 해병대 2대 사령관이 되다
▲ [현충원 안장 친일파] 김석범 묘지 우리가 잘 몰랐던 해병대 사령관 김석범의 비밀 친일파 김석범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석범은 장군제1묘역 최상단 바로 아래줄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김종훈
해방 후인 1946년 김석범은 대한민국 해군으로 보직을 바꿨다. 이후 해군통제부 참모장과 방위사령관 등을 지내다 한국전쟁 중 해병대로 전과했다. 1953년부터 친일파 신현준에 이어 해병대 2대 사령관으로 4년 동안 재임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김석범이 해병대로 전과하는 데는 봉천군관학교 동기이자 간도특설대 전우인 신현준의 추천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해병대 사령관을 마친 김석범은 국방대학원과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을 거쳐 1960년 해병대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재향군인회 부회장과 국군 장성들의 예비역 모임인 성우회 부회장을 지냈다.
1998년 2월에 사망한 김석범은 국립대전현충원 제1장군묘역 최상단 바로 아랫줄에 안장됐다. 그의 무덤 옆에는 만주 관동군 헌병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세력을 소탕하던 김창룡이 잠들어 있다. 1949년 6월 김창룡이 방첩대장을 할 때 그의 직속 수하인 안두희가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공식보고서에 “김석범은 만주국군 장교로 임관한 이래 일본의 패전 때까지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로 복무했다”면서 “특히 간도특설대 주요 간부로 만주와 중국 관내에서 항일무장부대 공격에 참여했고, 정보반 주임을 맡아 무고한 민중을 탄압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고 기록했다.
“김석범의 이러한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 19호에서 규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장성급 장교”라는 이유로 1998년 2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김석범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돼있다.
▲ 김석범 (1915~1998) – 창씨개명만 하지 않은 잔인한 간도특설대원 1915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봉천군관학교를 거쳐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졸업성적 우수자로 발탁돼 일본 육사에 입학, 이후 간도특설대 정보반 책임자로 활동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정보반의 목적은 팔로군, 지하공작원, 민병의 활동과 군중의 사상동태를 정찰해 (간도)특설대가 소탕활동과 항일군민을 체포하고 살해하는 것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40세 좌우의 백성을 붙잡아다 사격 과녁으로 삼았다. 놈들은 여자는 만나는 족족 강간하고 좋은 물건은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해방 후엔 대한민국 해군으로 변신, 해병대 사령관,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을 거쳐 해병대 중장으로 예편했다. 1998년 사망 후 국립대전현충원 제1장군묘역에 안장됐다. 그의 무덤 옆에는 항일무장세력을 소탕하던 김창룡이 잠들어 있다. 묘비엔 “조상에 대한 신의로 창씨개명 아니한…”이라고 적혀있으나 ‘창씨개명만 하지 않은’ 친일파였다. ⓒ 오마이뉴스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서 1등으로 졸업한 송석하 ⓒ wiki commons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1월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송석하 편에는 “1937년 9월 봉천군관학교 5기를 수석으로 졸업한 송석하가 만주국 황제가 주는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받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만큼 일제가 인정한 ‘인재’였다는 뜻이다. 송석하 역시 만주군 시절 일제의 기대에 부응했다. 특히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할 목적으로 설립된 만주국 간도특설대에서 큰 역할을 했다.
송석하. 1916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나 1999년 사망했다. 청주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1934년 장춘외국어전문학원을 수료했다. 이후 1936년 6월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해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뒤 1937년 9월 5기로 졸업했다. 견습군관을 거쳐 그해 12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송석하는 보병 27단에 배속돼 활동했다. 간도특설대가 창설된 이후에는 특설대 기관총박격포중대에서 복무했다. 1941년 중위를 달고 1944년을 전후해 만주국군 상위(대위)로 진급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송석하의 공식보고서에 “1937년 11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이래 일본의 패전 때까지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인으로 복무했다”면서 “간도특설대의 주요 간부로 항일무장부대를 공격하고 무고한 민중을 탄압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고 기록했다.
조선인 이범익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특수부대
▲ 이케다 대좌의 간도 특설 부대가 용정으로 침입해 들어가는 모습. ⓒ 세계한민족문화대전 류은규
위원회는 송석하의 보고서에 1993년 길림인민출판사가 출간한 <위만군사>를 인용해 ‘특설부대성립의 역사적 배경과 조직연혁’이란 항목을 넣었다.
“7.7사변(37년 중일전쟁의 단초가 된 사건 – 기자 주) 후, 동북항일무장세력은 부단히 장대해져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일본의 큰 위협이 됐다. 당시 위만주국 간도성장 이범익이 일본의 환심을 얻기 위해 일본이 제기한 ‘치안숙정’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자발적으로 조선총독부에 조선청년들을 모집해 항일연군을 ‘토벌’하는 특설부대를 조직할 것에 대한 건의를 제기했다.”
여기서 위만주국이란 만주국이 가짜국가였다는 뜻에서 만주국에 위를 붙인 것으로 중국은 만주국과 관련된 모든 단어에 ‘가짜’ 또는 ‘유사’라는 뜻의 ‘위(僞)’자를 붙인다.
위원회는 “일본 측이 이범익의 건의를 접수하고 즉각 건립할 것을 결정했다”면서 “안도현치안대, 훈춘국경감시대, 봉천만군군관학교, 기타 만군학교에서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족 위관 9명, 조선족 사관 9명을 선발해 특설부대 설립을 준비했다”라고 덧붙였다.
▲ 1939년 5월 12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이범익 관련 기사. 가운데 사진이 이범익이다. ⓒ 김종훈
충북 단양 출신인 이범익은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시작해 만주 거주 조선인 친일파의 거두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초반 경북 금산군수, 달성군수, 예천군수, 칠곡군수 등을 지낸 뒤 1921년 3월부터 조선총독부 내무국 내무부장으로 근무했다. 1929년부터 강원도지사를 지냈고 1934년 4월 충남도지사로 전임했다. 1937년 11월 만주국 간도성 성장에 임명돼 간도특설대 창설을 제안했다. 해방 후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체포 됐지만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해방 후 승승장구한 장군 송석하
해방 후 송석하는 김백일, 김홍준, 신현준, 김석범, 백선엽, 정일권 등 여타의 만주국군 출신 장교들처럼 대한민국 국군으로 신분을 바꿨다.
송석하의 선택은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그는 단기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그의 육사 동기 중에는 신징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국에서 근무하다 신현준과 함께 광복군으로 신분을 바꿔 귀국한 박정희 대통령도 있었다.
▲ [현충원 안장 친일파] 송석하 묘지 송석하는 간도특설대 창설에 가장 큰 영향 끼친 인물 친일파 송석하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송석하는 장군제1묘역 상단 좌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김종훈
1948년 육사를 졸업한 지 2년도 안 된 시점에 송석하는 육군 소령으로 특진해 제2연대 부연대장이 됐다. 그해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1개 대대를 이끌고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1949년 8월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한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20사단장이 돼 참전했다. 1955년 1월 별 두 개인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6년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해 1955년 1월 육군 소장이 되기까지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1961년 육사 동기인 박정희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뒤, 송석하는 한국국방연구원 원장에 임명됐다. 1963년 송석하는 전역과 동시에 국가안전보장이사회 상임위원 겸 사무국장으로 임명됐다. 1965년 민방위개선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69년에는 한국수출산업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1972년에는 재향군인회 안보위원장도 맡았다. 1999년 1월 14일 만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틀 뒤인 1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상단에 안장됐다.
한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작성된 공식보고서에 “만주국군 출신 송석하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 19호에서 규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라고 평가했다.
특별법 2조 10호에는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가, 19호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해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가 각각 명시돼 있다.
“장성급 장교”라는 이유로 1999년 1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안장된 송석하는 정부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돼있다.
▲ 송석하 (1915~1999) – 만주국 황제에게 금시계 받은 조선인 1937년 봉천군관학교 5기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만주국 황제가 주는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뒤 보병으로 활동했다. 간도특설대 창설 후에는 기관총박격포중대에서 복무하면서 “간도특설대의 주요 간부로 항일무장부대를 공격하고 무고한 민중을 탄압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간도특설대는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시작해 만주 거주 조선인 친일파의 거두로 자리매김한 이범익이 일본 측에 제안해 만들어진 항일무장세력 탄압 특설부대다. 해방 후엔 김백일, 김홍준, 신현준, 김석범, 백선엽, 정일권 등 여타의 만주국군 출신 장교들처럼 대한민국 국군으로 신분을 바꿨다. 1955년엔 육군 소장까지 올랐다. 육사 동기인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이후엔 한국국방연구원장에 임명됐다. 이후에도 국가안전보장이사회 상임위원, 재향군인회 안보위원장 등 승승장구했다. ⓒ 오마이뉴스
총선 낙선자 발표회견 참석한 김삼열 회장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21대 총선, 친일 정치인 낙선대상자 명단 발표’ 기자회견에서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2020.4.9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장우리 기자 = 제21대 총선을 앞두고 시민사회단체가 친일 청산을 위한 입법활동에 의지가 없거나 역사 왜곡 발언을 한 후보자들이라며 명단을 공개하고 낙선운동에 돌입했다.
700여개 시민단체가 모인 ‘아베규탄 시민행동’은 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개질의서를 보내 친일 청산을 위한 입법활동을 할 의지가 있는지를 검증하고 후보자의 발언과 행적을 점검해 집중 낙선대상자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날 공개된 낙선 후보자는 총 8명으로 미래통합당에서 나경원·황교안·심재철·김진태·하태경·전희경 후보 등 6명의 이름이 올랐다. ‘세월호 막말’로 통합당에서 제명을 추진하는 차명진 후보와 무소속 윤상현 후보도 포함됐다.
시민행동은 이들이 ‘철없는 친일프레임 집착, 어린애 같은 정치'(나경원), ‘필요시 일본 자위대 입국 허용'(황교안), ”반일종족주의’를 읽고 무장한 전사가 되겠다'(심재철) 등 역사를 부정하고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발언을 했다며 “총선에서 이들을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전국 지역구 출마자 684명에게 이메일·팩스로 공개질의서를 보냈으나 148명의 후보만이 응답했다”며 “특히 미래통합당의 경우는 역사 문제와 관련해 많은 질타를 받아왔음에도 응답률이 3%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21대 총선, 친일 정치인 낙선대상자 명단 발표’ 기자회견에서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장(오른쪽 두번째)이 발언하고 있다. 2020.4.9 [email protected]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제21대 총선, 친일정치인 낙선’ 촉구 기자회견을 열였다. @ 민족문제연구소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제21대 총선, 친일정치인 낙선’ 촉구 기자회견을 열였다. @ 민족문제연구소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제21대 총선, 친일정치인 낙선’ 촉구 기자회견을 열였다. @ 민족문제연구소
『한국 첩보 현대사』는 미 국립문서기록청에서 새롭게 발굴한 한국 관련 사진들과 각종 문서자료들로 재구성한 한국 현대사 책이다. 미 국립문서기록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이하 NARA)은 미국이 생산한 역사 관련 기록들을 모아 두는 곳, 그 자체로 ’20세기의 세계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어지간한 주요 사건 관련 기록들이 모두 보관되어 있다.
우리가 알았던 듯 몰랐던 것들 – 김수임과 미군정보원 – 미군정 당시 테러와 방첩대의 역할
저자가 직접 나와 미군정기 방첩대 이야기를 재밌게 들려줍니다
저자 고지훈 2012년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 파견근무자로 일하면서 문서자료도 열심히 공부했고 사진자료들도 상당수 발굴했다. 사진자료와 문서 기록들은 당분간 계속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수집해서 공개할 것이다. 지금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헌정사 자료집 편찬을 위해 관련 자료를 모으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시즌5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 [현충원 안장 친일파] 백홍석 묘지 친일파 묘비에 적힌 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 친일파 백홍석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백홍석은 장군제1묘역 중턱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김종훈
“오직 나라에의 충절 외길만을 걸어오신 참군인이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1묘역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 백홍석의 묘비에 적힌 말이다. 이 문구 앞에는 “우러러 하늘에, 구불어 땅에, 그리고 사람에 대해 한 점 부끄럼이 없다”라고 새겨졌다.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간 참군인’이라는 백홍석.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는 백홍석의 공식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백홍석은 1915년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1940년 초까지 약 25년에 걸쳐 일본군 현역 장교로 복무했다. 중일전쟁 이후인 1939년 신의주지구 방공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신의주 일대 대민통제를 담당했다. 1944년 4월부터는 경성 육군병사부에서 조선인 병력동원을 담당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25년간 일본군 복무 후 병력동원 업무 맡아”
▲ 1915년 6월 19일 매일신보에 실린 백홍석의 모습. 우측 하단 끝에 있는 청년이다. ⓒ 공훈전자사료관
백홍석은 1890년 1월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했다. 1909년 7월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일본에 의해 폐쇄되자 두 달 뒤 육군사관학교를 목표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13년 12월 일본 육사에 입학해 1915년 5월 27기로 졸업했다. 일본군 소위로 임관 후 오카야마 제17사단 예하부대에서 근무했다. 1919년 4월 중위로 진급한 후 1929년 12월에야 대위가 됐다. 중위에서 대위로 진급하는 데 10년이나 걸린 셈이다. 백홍석은 이듬해 8월부터 10월까지 국세조사 육군조사원으로 종사해 ‘국세조사기념장’을 받기도 했다.
백홍석의 소좌(소령) 진급은 중위에서 대위로의 진급보다 빨랐다. 대위 진급 후 5년 뒤인 1934년 일본군 보병 소좌로 진급한 백홍석은 이후 조선주둔일본군 20사단 77연대 소속으로 평양 등에서 근무했다.
백홍석은 1939년 4월에 신의주지구 방공사령관에 임명돼 그해 11월까지 역임했다. 이듬해 3월 평안북도 방공위원회 위원에 임명된 백홍석은 관할 지역 관헌들을 통솔하며 일제의 침략전쟁에 따른 방공통제와 훈련을 주도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제의 인정을 받아 백홍석의 이름 석자가 <지나사변(중일전쟁)공적서>에 올라갔다. 이를 계기로 백홍석은 고위 장교인 일본군 중좌에 진급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조선인 출신으로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우지 못한 백홍석은 1943년 예편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확대 되자 백홍석은 1944년 4월 예비역 보병 중좌 신분으로 재소집 돼 조선 청년들을 전선에 보내기 위해 만든 경성 육군병사부에서 과장으로 복무했다. 이곳에서 백홍석은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인 7월까지 조선 청년들을 전선에 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위원회 역시 백홍석의 경성 육군병사부 근무기록을 언급하며 “1940년대 초 징병제가 결정되자 가장 먼저 병사부의 확대 설치가 필요하게 됐다”라면서 “조선인에 대한 병력동원이 본격화되면서 병사부에는 조선인 장교들이 부임했고, 경성과 해주에 각각 백홍석과 신태영이 부임했다”라고 명시했다.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병력동원업무를 조선인 장교들에게 담당시켰다. 이것은 단순히 동원업무의 편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조선인에게 조선인의 동원을 맡기는 일제의 교묘한 식민지배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해방 후 고위직으로 영전
▲ [현충원 안장 친일파] 백홍석 묘지 친일파 묘비에 적힌 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 친일파 백홍석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백홍석은 장군제1묘역 중턱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김종훈
백홍석 역시 여타의 일본군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에서 활동한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통위부(현 국방부) 자문역에 역임된 백홍석은 1948년 대한민국 육군 특별부대사령관(대령급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당시 백홍석이 거친 특별훈련 과정은 1주일이었다. 예비군을 포함해 일본군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그가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신분을 바꾸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1949년 7월 백홍석은 정일권 준장, 신태영 준장 등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장교들과 함께 ‘공훈기장’을 받았다. 당시 백홍석과 함께 공훈기장을 받은 고위직 장교 중에는 채병덕도 있었는데, 그는 일본 육사 27기를 나와 일본군 중좌로 해방을 맞이한 인물이다. 백홍석의 사위였다.
해방 후 장인 백홍석이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을 때 스물다섯 살 어린 사위 채병덕은 이미 최고위급 장성인 대한민국 육군 소장이었다. 채병덕은 해방 후 미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를 1기로 마친 뒤 남조선국방경비대 창설중대장으로 대한민국 국군이 됐다. 이후 통위부 총참모총장 등을 거쳐 1948년 12월에 육군 준장에, 두 달 뒤인 1949년 2월에 육군 소장에 올랐다. 동시에 대한민국 육해공군총사령관에 임명되는 초고속 승진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초반 안이한 판단으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1950년 하동전투에서 전사했다.
▲ 친일파 백홍석, 정부는 2009년 백홍석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지정해 발표했다. ⓒ 재향군인회 홈페이지 캡처
백홍석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 서울지구 병사구사령관으로 재직했고, 1953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병무감을 거쳐 1954년 동부지구 경비사령관, 1955년 대한민국 육군 제33예비사단(현재의 제17보병사단) 단장을 역임했다.
백홍석은 현역 군인이던 1952년 2월, 재향군인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특이한 점은 제대 군인들의 친목과 권익을 위해 만들어진 재향군인회가 한국전쟁 중에는 백홍석과 백승훈(2대 회장) 등 현역 장성들이 회장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 종료 후인 53년 7월부터는 3대 회장인 신태영을 시작으로 예비역 장성출신들이 재향군인회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다.
백홍석은 1960년 10월 만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현충원 밖에 안장됐던 백홍석은 2003년 3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중턱에 위치한 176번 무덤으로 이장됐다. 보훈처에 따르면 국립묘지로의 이장은 이장시기가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다. 유족의 희망에 따라 원하는 시기에 이장 절차가 진행된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작성한 공식보고서에 “일본군 중좌 출신 백홍석은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면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에서 규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라고 기술했다.
“장성급 장교”라는 이유로 현충원에 안장된 백홍석은 정부에서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훈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강제로 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돼있다.
▲ 백홍석 (1890~1960) – ‘한 점 부끄럼이 없다’ 는 친일파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 에 이름까지 올렸으나 조선일 출신으로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우지는 못하고 1943년 예편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확대되자 예비역 신분으로 재소집돼 조선청년들을 전선에 보내는데 앞장섰다. 해방 후엔 대한민국 육군 특별부대사령관(대령급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예비군을 포함해 일본군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그가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신분을 바꾸기까지 걸린 시간은 1주일이었다. 사망 후 현충원 밖에 안장됐으나 2003년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으로 이장됐다. “오직 나라에의 충절 외길만을 걸어오신 참군인이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 백홍석의 묘비에 적힌 말이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는 다르게 말한다. “조선인 병력동원을 담당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 오마이뉴스
[광복회 설문조사] 민주당 84.1%, 통합당 46.6% 찬성… 황교안·나경원·홍준표는 무응답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지역구 후보자 1109명 중 절반 가량의 후보자가 현충원 내 친일파 묘의 이장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광복회가 이번 4.15총선을 맞아 전국 지역에 출마한 국회의원 후보자 1109명 모두를 대상으로 ‘친일 행위의 국립현충원 안장 불가 및 이장, 단죄비 설치를 위한 법률(국립묘지법, 상훈법) 개정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은 결과다.
지난 3월 31일부터 4월 7일까지 진행된 설문조사에 답한 후보자는 절반이 조금 넘는 568명(총 응답률 51.2%)으로, 이중 546명이 친일파 묘의 이장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반대는 9명, 모름은 13명이었다. 후보자 중 541명은 설문에 응답하지 않았다. 찬성률은 전체 후보자수 기준으로는 49.2%이지만, 응답 후보자수 기준으로는 96.1%에 달한다. 거대 양당의 경우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의 84.1%, 미래통합당 후보들은 46.6%가 찬성했다(전체 후보자수 기준).
광복회는 설문조사에서 “현행 ‘국립묘지법’은 사회를 위해 희생·공헌한 사람이 사망한 후 그를 안장하고 그 충의와 위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국가가 국립묘지를 설치하고, 이를 적절히 관리·운영하도록 정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 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결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11인(김백일·김석범·김홍준·백낙준·백홍석·송석하·신응균·신태영·신현준·이응준·이종찬)은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고 밝혔다.
이어 “현행 국립묘지법을 개정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국립묘지 안장을 금지하고 이미 국립묘지에 안장된 경우라도 이장을 강제할 수 있는 근거를 둠으로써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높일 것을 제안한다”라고 설문 취지를 설명했다.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에 대한 기록은 3월 30일부터 진행한 오마이뉴스 특별기획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추적’>에 자세히 나와 있다.
국회의원 후보자 절반 이상 설문에 응답… 응답자들 압도적 찬성 의견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지역 출마자 253명 중 214명이 응답(84.5%), 이중 213명이 찬성한다고 답했다. 모른다는 응답은 1명이었다. 설문에 답하지 않은 후보는 39명이다.
미래통합당은 전체 후보자 236명 중 118명만 설문에 답했다. 설문에 응한 118명 중 찬성 의견을 밝힌 후보자는 110명이다.(반대 3명, 모른다 5명). 그외 118명은 설문에 답하지 않았다.
민생당과 정의당, 민중당 후보들도 ‘국민묘지법 및 상훈법’ 개정에 압도적으로 찬성했다. 이중 민중당은 58명 지역출마자 전원이 설문에 참여해 100% 찬성 의견을 내놨다. 민생당은 58명 중 37명(63.7%), 정의당은 76명 중 53명(69.7%)만 설문에 응했으나, 참여한 후보들은 민생당 1명(모름 응답)을 제외하고는 모두 찬성한다고 답했다.
우리공화당의 경우, 전체 후보자 42명 중 7명만 설문에 답해 저조한 응답률을 보였다. 설문에 참여한 우리공화당 후보들은 모두 찬성의견을 내놨다.
현역 의원 중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여야 가리지 않고 찬성 의견을 내놨다. 민주당 설훈, 우원식, 허소, 전상헌 의원과 통합당 강민국, 이인선 의원, 민생당 박지원 의원, 무소속 김현기 의원이다.
대선급 후보들의 출마로 관심을 모은 서울 종로구의 경우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찬성 의견을 냈으나, 황교안 미래통합당 후보는 설문에 응답하지 않았다. 친일논란으로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올랐던 서울동작을 나경원 통합당 후보도 설문에 답하지 않았다.
민주당에서는 응답자 중 유일하게 안산시 단원구갑 고영인 후보가 ‘모름’이라고 답했다. 통합당에선 서울 중랑구을에 출마한 윤상일 후보와 강승규(마포구갑), 이중재(인천 계양구갑) 후보 3인이 반대 의견을 냈다. 서울 구로구을에 출마한 김용태 후보와 김척(부산 사하구갑), 권명호(울산광역시 동구), 임명배(경기도 화성시을), 한기호(춘천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을) 후보 등 5인은 질문에 ‘모름’이라고 답했다.
현역 국회의원 중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이정현, 김성식, 윤상현, 권성동, 정태옥, 홍준표, 곽대훈, 정용기, 이용호, 이용주, 김성환 후보 등은 설문에 응하지 않았다.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청산 없이 국민통합 못한다”
▲ 국가공인 친일파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등 7인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 이은영▲ 국가공인 친일파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4인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 이은영
김원웅 광복회장은 8일 저녁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 다수가 친일청산에 찬성 의견을 피력한 것은 친일청산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실현한 것과 같은 의미”라면서 “모든 후보자들이 약속한 만큼 여야가 공동으로 법안을 발의해 친일청산이 이뤄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친일청산 없이 국민통합을 말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내선일체’와 다르지 않다. 친일파를 상전에 두고 어떻게 통합을 이루나. 한국사회 모순의 본질은 친일미청산과 분단 상황이다. 친일청산 없이는 국민화합과 통합이 불가능하다. 첫걸음을 뗀 것이다.”
친일청산의 첫번째 시도로 평가받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를 반민족 행위로 규정하고 처벌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률이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제헌헌법 제101조에 의하여 국회에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가 구성된 뒤 같은 해 9월 법률 제3호로 제정됐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권과 미국의 견제 속에 국회프락치사건과 경찰의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을 겪고 반민특위는 와해됐다. 친일 인사 상당수는 민관 요직에 재등용됐다.
▲ 광복회가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국회의원 후보자 11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친일찬양 금지법 및 상훈법, 국립묘지법 개정안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 김종훈
김 회장은 “이번 설문조사를 위해 평균연령 79세에 이른 광복회 회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 “답변을 받기 위해 현장에도 수없이 가고 전화도 수차례 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정당에서 ‘무응답’이 매우 높게 나온 것은 답변 거부와 다르지 않다. 답변을 하지 않은 후보들을 지켜볼 것이다. 그들의 역사의식을 확인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광복회는 이번 설문에서 ‘독립유공자 및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등 모욕 행위 처벌 위한 ‘친일찬양금지법’ 제정 및 관련활동 동참에 대한 찬반 의견’도 함께 조사했다. 조사결과 1109명 중 568명이 설문에 응했으며, 이중 546명이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반대’는 6명, ‘모른다’는 16명에 불과했다.
진주성(사적 제118호) 촉석루 아래 암벽에 새겨져 있는 이지용(李址鎔, 1870~1928)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을사오적’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지회장 강호광)는 문화재청과 진주시 진주성관리사무소에 거듭해서 안내판 설치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문화재청은 “해당 지자체가 결정하면 된다”고, 진주성관리사무소는 “위험해서 안 된다”는 입장이다.
촉석루 아래 암벽에는 일제강점기까지 여러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여러 이름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되는 사람이 ‘이은용(李垠鎔)’, ‘이지용’이다.
‘이은용’과 ‘이지용’은 같은 사람이다. 이은용이 본래 이름인데, 세자 책봉된 ‘영친왕’의 이름인 ‘이은(李垠)’과 같은 이름을 쓸 수 없어 ‘이지용’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지용(이은용)은 구한말 경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대한제국시기에 그는 황해도관찰사, 의정부 찬정, 외부대신서리, 내부대신 등을 지냈고, 이완용과 같이 ‘을사오적’이다.
그는 1911년 일왕으로부터 은사공채 10만원을 받았고, 일제강점기에는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과 조선귀족회 이사 등을 지낸 대표적 친일파다.
촉석루 아래 암벽에 ‘이은용’과 ‘이지용’ 사이에 있는 글자는 윤명근(남해현령, 1886~1889)과 황재돈(경남도 관찰부주사, 1899~1901)이다.
이곳 암벽에 새겨져 있는 인물에 대해 그 내역을 모르는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으로 오해한다. 이에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지용(이은용)의 친일행적을 담은 안내판을 세워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진주에는 이곳 이외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암벽이 있다. 대표적으로 남강 옆에 있는 뒤벼리 절벽이다.
이곳에는 친일파 ‘이재각’, ‘이재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재각은 일제강점기 때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냈고, 이재현은 의병 학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다.
뒤벼리 암벽에 새겨진 두 사람의 이름은 넝쿨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그 이름 앞에 친일행적을 담은 안내판을 세웠다.
한때 안내판이 훼손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올해 3‧1절에 새로 만들어 세워 놓았다.
▲ 진주성 촉석루 아래 암벽에 새겨진 을사오적 이지용(이은용)(원안). ⓒ 강호광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동안 여러 차례 진주시에 ‘이지용’의 친일행적을 담은 안내판을 세울 것을 제안했다. 그러다가 민족문제연구소 강호광 지회장은 14일 현장에서 진주성관리사무소 관계자를 만나 안내판 설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진주시는 안내판 설치에 부정적이다. 진주성관리사무소 관계자는 “낭떠러지다 보니 위험하다. 안내보다는 안전이 우선이다”며 “안내판을 좀 멀리 떨어져 세울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안내판을 본 관광객들이 확인하기 위해 가서 보려고 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문화재청 보전정책과 관계자는 “사적지를 포함한 문화재에 대한 형상변경을 할 경우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나, 안내판 설치 같은 경미한 사안은 해당 지자체에 위임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문화재청에서 안내판을 세우라, 혹은 말라고 할 수 없다. 진주시는 이름이 새겨진 위치가 낭떠러지라 위험하기에 곤란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안다”며 “개인적 의견으로, 그렇다면 위험하지 않는 구역에 협의를 해서 설치할 수도 있다고 본다”고 했다.
강호광 지회장은 “안내판을 크게 세우자는 게 아니다. 작게라도 안내를 해서, 암벽에 새겨진 인물이 반민족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알리자는 것이고, 그래야 산 교육의 현장이 될 것이라 본다”고 했다.
그는 “진주시는 안내판을 세울 경우 위험하다고 하는데, 절벽 가까이에 세우자는 게 아니다. 남강 가운데 세울 수 없기에,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안내판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했다.
강호광 지회장은 “진주시의 주장을 들어보면 안전을 내세워 안내판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인데, 친일반민족행위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며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방법을 찾아볼 것이다. 뒤벼리에 시민단체가 안내판을 세웠듯이 같은 방법도 생각해 볼 것”이라고 했다.
서은애 진주시의원은 “당연히 안내판을 세워야 하고, 친일반민족행위를 제대로 알리는 게 중요하다. 위험하다면 멀리 떨어진 곳에 안내판을 세워도 된다”고 했다.
시즌5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압록강과 휴전선을 넘나드는 다양한 길 위에서의 끊임없는 남북 만남, 생생한 현장감이 넘치는 문화인류학적 시각으로 보면 남북 관계가 달리 보인다. 고정된 인식과 왜곡된 시선을 뛰어넘어 남북 교류의 새 해법을 찾는다!
2000년 이후 압록강과 두만강 현지를 수십 차례 드나들며 조사 연구한 저자는 이 책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를 통해 정부 의존적이고 휴전선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벗어날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중국과 북한의 국경 도시 단둥, 그리고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서 남한, 북한, 중국, 북한화교 들의 활발한 무역과 교류 활동을 기록하여 휴전선 안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휴전선 너머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소개한다.
저자_강주원 박사
서울대 인류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2012)를 받았다. 2000년부터 중국 단둥과 중·조 국경지역(두만강·압록강)을 찾아가고 있다. 그곳에 살고 있는 북한사람·북한화교·조선족·한국사람과 관계맺음을 하며 국경에 기대어 사는 이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북한과 한국 사회를 낯설게 보고 만나는 노력을 하고 한반도의 평화·공존에 대한 고민을 업으로 하는 인류학자의 길을 걸어가는 꿈을 키우고 있다.
2018년 5월 서울 지하철 종각역 사거리에 세워진 전봉준 장군 동상 앞에 선 이이화 선생. 이 선생은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으로 동상 제막을 주도했다. 이준헌 기자 [email protected]
출판인은 자기 민족의 역사를 담아내는 책을 기획해야 한다는 신념 같은 것이 나에게 있다. 나는 1976년 출판사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름 우리 국가사회가 당면하는 문제를 ‘역사’라는 문제의식으로 풀어내는 책을 만들어왔다. 1979년에 시작해 1989년 전 6권으로 끝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우리 현대사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의 일단이었다. 1986년에 시작해서 1994년 한꺼번에 펴내는 전 27권의 <한국사>는 한 출판인의 민족사에 대한 나름의 헌정이었다. 170여명의 연구자가 참여하는 한길사의 <한국사>는 근·현대사를 대폭 강화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가 펴낸 <한국사>에 ‘관찬’이 아닌 ‘민찬한국사’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사>는 학술적인 형식과 내용으로 서술됨으로써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나는 ‘국민독본’ 같은 한국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국사> 출간 직후부터 했다. 1980년대의 치열한 민족·민주운동이 세계화시대를 맞으면서 ‘한국사’가 더 필요할 터였다.
나는 그 무렵 대형기획 ‘한길그레이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동서고금, 인류의 위대한 지적·정신적 유산을 집대성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지금도 지속되는 한길그레이트북스를 통해 인류 보편의 지혜와 사상을 우리 사회가 새롭게 만나자는 것이었다. 나는 동시에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독자들의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키던 ‘로마인 이야기 현상’에 대응하는 ‘한국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가 이를 해낼 수 있을지 궁리했다.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교수나 연구자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논문’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늘 우리 삶에 살아 있는 역사의 육성을 들려주는 저술가라야 한다. 어디에 귀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역사가’라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 1994년 가을 ‘아치울의 결의’
연구자 170명 참여한 ‘한국사’ 학술적이라 일반 독자에 부적합 호평 받은 ‘로마인 이야기’처럼 ‘아름다운 한국사’ 필요성 느껴
이이화(李離和·1937~2020)! 1994년 가을, 나는 아차산록의 아치울 마을로 이이화 선생을 방문해 ‘대중이 감동하면서 읽는 한국통사’를 써보자고 제의했다. 10년 정도 걸리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정치사 중심이 아니라 사회사·생활사·문화사를 총합해야 한다. <로마인 이야기>를 뛰어넘는 장대하고 아름다운 한국사! 나와 이이화 선생은 두 손을 잡고 ‘아치울의 결의’를 하는 것이었다.
이이화 선생과 나는 1980년대부터 호흡을 맞추어 왔다. 1987년에는 한길역사강좌의 일환으로 ‘한국사상사’를 7회에 걸쳐 강의했다. 1988년에는 ‘근대민중운동사’를 역시 7회에 걸쳐 강의했다. 이이화 선생은 ‘재야연구자’로 1970년대부터 주목할 논문을 발표해왔다. ‘북벌론의 사상사적 검토’(1975),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1977) 등이 그것인데, 나는 선생의 논문집 <조선후기의 정치사상과 사회변동>을 1994년에 펴냈다. 이보다 앞서 1988년에는 전 5권의 <인물한국사>를 펴냈다.
역사가 이이화는 늘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다. 1980년대에 나는 이이화 선생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답사했다. 선생은 1985년부터 진행된 한길역사기행에 가장 많이 참여한 현장강사이자 역사가이드였다. “역사는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 숨쉽니다.”
1986년 5월, 2박3일의 지리산 역사기행을 통해 우리는 우리 국토, 우리 역사의 장엄을 새삼 확인했다. 나는 ‘지리산과 민족사’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구례 화엄사에서 피아골 계곡을 타고 노고단을 오르는 여정이었다.
이이화 선생은 ‘지리산의 정신사와 저항사’를 발제했다. 지리산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긴 글이었다. 광해군 때 남원부사를 지낸 유몽인(柳夢寅)이 그의 책 <어우집>(於于集)에서, 금강산은 뼈다귀가 많으면서 고기가 적고, 지리산은 고기가 많으면서 뼈다귀가 적다고 한 기행문을 소개하며 “금강산이 지자(知者)와 이지(理智)의 산이라면, 지리산은 인자(仁者)와 덕성(德性)의 산”이라고 했다.
“이번에 화엄사 골짜기와 노고단, 피아골의 깊은 계곡을 오르내리면서 나는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나를 포근히 감싸주고 나에게 자양분을 날라다 주시던 우리 어머니. 다육소골(多肉少骨), 이렇게 먹을 것이 많고, 몸을 감싸주기에 지리산은 인간과 너무나 친밀한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덕성 속에 비극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천년만년 우리 겨레와 함께 숨쉬면서 안식처가 되기는 했지만,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는 비극의 역사를 이 지리산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1987년 5월, 3박4일의 지리산 역사기행을 다시 기획했다. 산청에서 천왕봉을 올랐다. 백무동으로 갔다. 제수(祭需)를 준비했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혼령들을 위해 일행이 함께 참례하는 제사를 지내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이화 선생에게 제문(祭文)을 부탁했다. 200자 원고지 30장이 넘었다. 일행은 깊은 산속에서 구슬프게 읽어내리는 선생의 제문에 눈물을 글썽였다.
1986년 9월 이이화 선생과 함께 우리는 ‘동해안 의병의 근거지’를 찾았다. 임진왜란 때부터 구한말까지 의병 봉기의 고장이었던 영덕과 영해, 한말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생가를 답사했다. 일행은 마을회관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이 시대의 의병은 누구인가’를 주제로 토론했다.
1987년 3월, 갑오농민전쟁의 현장 호남평야를 다시 갔다.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동학농민군 총관령 김개남(金開男·1853~1895) 장군의 집터를 찾았다. 나는 가로세로 10㎝, 길이 2m의 말목 두 개를 준비했다. 흰 페인트를 칠하고 이이화 선생에게 붓으로 ‘김개남 장군 고택 입구’와 ‘김개남 장군 고택 구지’를 쓰게 했다. 역사기행 일행은 이제는 밭이 되어 있는 이곳에 두 말목을 세웠다.
1995년 <한국사 이야기>를 집필하던 이이화 선생.
■ 10년 작업 <한국사이야기>는 ‘국민독본’
역사의 육성 들려주는 저술가로
이이화 선생에 제의 10년간 작업
국민독본 ‘한국사 이야기’ 22권
방대한 연구 성과 담아 세상에
이이화 선생은 <한국사 이야기> 집필을 지금은 폐교된 전북 장수군 천천면 연화분교에서 시작했다.
분교 옆으로 금강 상류가 흘렀다. 한때 한길사는 그 폐교를 빌려서 역사기행·국토순례의 거점으로 사용했다. 선생은 이곳에 칩거하면서 2년 반 동안 고대사 집필을 끝냈다. 다시 김제 월명암으로 옮겨 고려사를 끝냈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살펴보아야 할 자료가 방대해서, 아치울 자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1998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한국사 이야기>는 드디어 2004년 봄 전 22권이 완간되었다. 참으로 놀랍고도 힘찬 저술작업이었다. 우리의 응원과 편집작업도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세기말에 시작되어 새 세기의 벽두에 간행되는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를 나는 ‘21세기 국민독본’이라고 이름붙였다. 개인의 통사작업으로는 가장 방대하고, 지금까지의 한국사 연구성과를 총체적으로 수렴하는 획기적인 성과였다.
이 장대한 작업을 해낸 이이화는 분명 ‘거인’이다. 오척이 될까 말까 한 그 체구가 뿜어내는 정신의 힘. 흔히 노작들에 대해 ‘주례사’ 같은 서평을 하지만, 이이화 선생의 <한국사 이야기>에 대해서는 수많은 인사들이 경외와 찬사를 보냈다. 1986년 이이화 선생과 손잡고 역사문제연구소를 창립하는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는 “사마천과 같은 철저한 역사인식과 치열한 열정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이화 선생에게 한때 한문을 배운 바 있는 박완서 선생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쓰고 싶은 글은 안 쓴다. 실로 보배로운 이 시대의 기인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 세계화시대에 더 필요한 ‘한국사 읽기’
역사를 가슴으로 느끼며 읽게 해
현실과 연결 생각하는 힘 길러줘
선생은 1991년 박완서 선생 등과 중국을 여행했다. 유람선이 신의주에 최대한 가까이 가서 강변의 북한 사람들과 지호지간이 됐을 때 그는 뱃전에 엎드려 흐느꼈다.
고향이 북한도 아닌 그의 깡마른 어깨가 북받치는 오열로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이름 없는 백성들이 산지사방으로 찢기는 분단의 고통을 그는 견딜 수 없어 했다. 역사 하는 그의 자세였을 것이다.
“역사란 특정인이나 특정한 계층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한 역사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되 오늘 우리의 현실과 더불어 생각하는 사관이 중요합니다. 21세기로 가고 있는 이 세계화시대에도 민족주의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만이 우수하고, 우리만이 역사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국수적 민족주의 또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됩니다.”
선생은 각 편의 집필이 끝나면 젊은 연구자들에게 읽게 하고 비평과 의견을 들었다. 재야학자이지만 수많은 젊은 연구자들이 그의 작업을 응원하고 돕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작업은 출판사로서는 하나의 사건이자 축제였다. 독자들의 역사 읽기에 편의를 도모하고자 용어와 인명을 뽑아 풀이했고 그림과 사진과 연표를 곁들였다. ‘완간기념기획’으로 <이이화와 함께 한국사를 횡단하다>를 기획했다.
“저술작업을 통해 시대정신을 구현해내는 저자, 그런 저자를 성원하는 깨어있는 수많은 독자들과 함께, 이 나라 출판문화에 우뚝 서게 될 이이화 선생의 작업을 즐거운 마음으로 일단락짓게 되는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우리 출판인들은 존재한다. 10년에 걸치는 이 장구하고도 장대한 작업을 해낸 저자 이이화 선생의 그 정신과 헌신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1986년 5월 지리산 역사기행 때 이이화 선생이 매천 황현의 사당을 방문한 참가자 일행에게 황현의 역사 정신을 설명하고 있다.
■ 잘못된 역사 바로잡는 역사가
이이화! 그는 역사를 연구하고 역사를 저술하는 역사학자였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역사운동의 최일선에서 헌신하는 역사가였다. 신군부의 독재에 맞서는 새로운 역사운동으로서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 앞장섰다.
젊은 역사연구자들과 함께 미답의 역사연구에 나서는 학술운동을 펼쳤다. 동학농민전쟁을 제대로 평가하는 연구·저술작업뿐 아니라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의 선봉장을 맡았다. 2004년 11월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이 출범하면서 이사장에 취임했다.
2000년 9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4년 1월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해 고구려역사문화재단을 발족시키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1991년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발족한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에 함께했다. 2004년 1월에 전개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국민모금운동은 민중들의 역사의식과 주체의식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모금 시작 열하루 만에 목표액 5억원을 넘어섰다.
“나는 장엄한 역사드라마를 보았다”고 선생은 회고록 <역사를 쓰다>(2011)에서 말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지도위원으로 나섰고, 2009년 8월 온갖 방해를 이겨내고 출간됐다.
2009년에 발족하는 ‘진실과 미래, 국치 100년 사업 공동추진위원회’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2010년에 결성되는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한국실행위원회’ 상임공동대표를 맡았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일제강점기 역사박물관’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역사는 세상과 소통하는 실천 학문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열어갈 수 없지요.”
나는 예술마을 헤이리를 건설하면서 이이화 선생께 말씀드렸다. 여기 와서 ‘역사사랑방’ 같은 걸 해보시자고. 마을엔 역사를 이야기해주는 할아버지가 있어야 한다. 선생은 2007년 아치울에서 헤이리로 입주했다. 그러나 선생을 필요로 하는 역사적 과제가 끊임없다보니 역사사랑방 개설은 계속 늦추어졌다.
선생은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선생이 남긴 역사정신은 우리 가슴에 살아 있다. 저 역사의 현장을 앞장서서 걷던 역사가 이이화. 우렁찬 목소리로 역사와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하던 이이화 선생.
■필자 김언호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책의 공화국에서>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등을 썼다.
해방 75년이 된 지금까지도 미완의 과제인 친일청산. 이를 한 편의 웃음거리로 만든 상징적 사건이 있었다. 친일청산 대상 1호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화신 재벌 박흥식이 1949년 4월 21일 풀려난 일이 그것이다.
고도의 상징성을 띠는 이 사건과 더불어 친일청산은 힘을 잃고 약해졌다. 그 뒤 도리어 공격을 받기까지 했다. ‘빨갱이’들의 음모로 매도되고 사회 퇴행의 원인인 양 치부됐다. 박흥식 석방은 친일청산이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를 예고하는 한 편의 그림이었다.
1903년 8월 6일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나 친일파 재벌로 성장한 박흥식이 얼마나 많은 반민족행위를 저질렀는지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지면을 할애했는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세로 길이가 26센티미터이고 글씨가 빽빽한 이 사전에서 웬만한 친일파들은 길어봤자 반 페이지, 유명한 친일파들은 두세 페이지 정도를 차지한다. 그에 비해, 박흥식은 4페이지 하고도 6분의 1 페이지를 차지한다. 사연이 무척 많은 친일파인 것이다.
‘친일청산 대상 1호’ 박흥식의 반민족행위
▲ 화신백화점 터. 서울지하철 1호선 종각역 출구 근처에 있다. 보신각 맞은편이다. ⓒ 김종성
진남포상업학교를 중퇴한 뒤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 16세 나이로 진남포에서 미곡상을 차린 박흥식은 재벌이란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사업을 대대적으로 확장시켰다. ‘박흥식’ 하면 떠오르는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외에도 다종다양한 회사들을 거느렸다.
박흥식은 직물업·제지업·인쇄업·유통업·부동산업과 비행기 제조업까지 경영했다. 거기다가 학교도 설립해 교육사업을 병행했다. 1, 2년마다 한 번씩은 회사를 신설하거나 합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업을 벌였다.
한국인의 기업 활동이 제약을 받던 시절이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한국인이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 밀려 숨도 쉬기 힘들 때였다. 그렇지만 그는 제약을 받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장치가 있었던 것이다.
사업 무대를 평안도에서 서울로 옮긴 1926년(23세) 무렵의 박흥식에 관해 <친일인명사전>은 “이 시기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다나카 다케오와의 친교를 배경으로 일본 제지회사들과 특약을 맺고 국내의 동아일보사·조선일보사 등과 신문용지 전속구매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상업적 성공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서술한다. 정경유착이 사업 성공의 발판이었던 것이다.
기업인의 친일은 대개 다 기금 헌납 정도에서 끝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박흥식은 그렇지 않았다. 사업에서처럼 이 분야에서도 그는 왕성하고 의욕적이었다. 위에 열거한 업종들에 더해 ‘친일업’까지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마치 사업을 하듯이 친일도 열렬히 했다.
박흥식은 총독부에 기금을 내는 것은 기본이고, 일본군에 비행기를 제공할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까지 직접 차렸다. 또 기업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글과 말로도 친일을 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에 글을 실어 “대동아경제권 건설을 위해 동아경제블럭을 형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미국과 영국의 격멸을 부르짖으며 학도병에 지원할 것을 종용했다.
또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 활동까지 겸했다. “촉탁보호사는 사상범들이 출옥 후 다시 항일운동에 나서지 못하게 사상적 과오를 청산하고 황도(皇道)정신을 자각하고 충량(忠良)한 황국신민이라는 본연의 자세로 복귀하도록 전향시키는 임무를 담당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그의 죄상을 죄다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제국주의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로도 일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에 가담해 인력과 물자를 전쟁에 동원하는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 때문에 표창장도 많이 받았다. 조선총독이 주는 공로상은 기본이고, 일본 교육진흥에 이바지했다는 이유로 일본 제국교육협회장한테서도 상을 받았다. 또 히로히로 일왕(천황)을 직접 만났다. 일본을 위해 웬만큼 공을 세우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943년 12월 17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배알 1주년 – 지성으로 봉공’에서 박흥식은 “나는 산업경제계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특히 반도 출신으로서는 오직 한 사람으로서 황공하옵게도 배알의 광영에 욕(浴)하였는데, 지척에서 용안을 봉배(奉拜)한 때의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습니다”라며 ‘배알 1주년’이라는 용어까지 써가며 감격을 표했다. ‘배알의 광영’을 마치 목욕하듯이 뒤집어쓴 것이 그토록 강렬한 감동이 됐던 것이다.
친일파 풀어준 재판부, 무죄 구형한 검사
▲ 반민특위 재판 풍경. ⓒ 위키백과
사업도 많이 하고 돈도 많아서 안 그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인물이 그처럼 글과 말로도 열렬히 친일을 했으니, 반민특위 체포 대상 1호로 선정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격멸을 부르짖었던 그는 체포를 피하고자 미국행 여권을 준비했지만, 1949년 1월 8일 체포돼 독립운동의 상징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언론보도도 ‘첫’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박흥식 체포에 의미를 부여했다. 3일 뒤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 ‘박흥식씨 수감’은 ‘반민법 첫 발동’이라는 부제목 하에 “특위는 10일 공보 제1호로 박 체포 경위를 공식으로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은 친일청산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해방 직후의 전 민족적인 친일청산 요구가 조만간 충족되리란 기대감을 일으켰다. 하지만 기대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과 친일보수 세력이 반민특위를 빨갱이로 매도하고 경찰까지 동원해 총격 테러를 가하는 상황에서, 반민특위가 ‘체포 1호’를 오래 붙들어두기도 힘들었다. 결국 박흥식은 보석(보증석방)으로 풀려나 감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수면 부족으로 신경이 쇠약하다는 게 보석 결정의 사유였다.
1949년 4월 22일자 <경향신문>은 보석에 반발하는 반민특위 검찰관(검사)들의 집단사퇴 표명을 보도하면서 ‘반민법 운영에 이변’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과 친일청산의 어두운 운명을 예고하는 ‘이변’으로 이 사건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수면 부족과 신경쇠약을 이유로 친일파를 풀어준 재판부는 욕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뇌물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있었다. 그러자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장이 직접 한마디를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김종인이라는 아홉 살짜리 손자를 둔 김병로 특별재판부장 겸 대법원장은 위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검찰관에게는 그러한 사실이 있는지는 모르나 재판관에게 있어서는 그런 사실은 전혀 없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고 답했다.
그 뒤 박흥식 사건은 세상의 분노를 자아내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담당 검사인 정광호 반민특위 검찰관은 그해 9월 26일 구형 때 황당한 모습을 보였다. 원래의 담당이었던 노일환 검찰관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뒤 사건을 새로 배정 받은 정광호는 유죄가 아닌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그해 9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 ‘박흥식씨에 무죄’에 따르면 정광호가 내세운 무죄 이유는 아래와 같다.
“본인으로서는 피고에 대하여 구형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본다. 원래 반민법의 입법 정신은 일제 잔재를 숙청하는 데 있었으나,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고 따라서 기소 사실은 편중적이었으며, 공소를 기각하려 하였으나 이미 기소된 것이니만큼 부득이 구형하지 않을 수 없는 괴로운 심정을 억제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이상과 같은 구형을 하는 바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농간으로 인해 반민특위가 박흥식을 편파적으로 대했다고 언급한 뒤, 이미 기소된 것이라 어쩔 수 없이 구형할 수밖에 없는 괴로운 심정을 고백한다면서 무죄 선고를 요청했던 것이다.
잠시 뒤의 재판부 선고 때도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재판부 역시 박흥식을 편들었다. 그해 9월 28일자 <경향신문> 기사 ‘반민 피고이던 박흥식씨’에 따르면, 박흥식이 일본을 위해 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질적 활약은 없었으며, 신문에 쓴 글도 타의에 의한 피동적인 것이었을 뿐이라는 무죄 선고 이유가 제시됐다. 세상이 다 아는 박흥식의 친일을 부정할 길이 없으므로 ‘실질적 활약은 없었다’, ‘시켜서 한 일이다’ 등의 논리를 꺼냈던 것이다.
그런데 판결 이유 중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안 도산 선생에게 많은 원조를 했다’는 부분이다. 박흥식이 도산 안창호와 친분을 유지하며 도움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덮기 힘든 박흥식의 죄상을 안창호와의 인연으로 가리고자 했던 것이다. 박흥식의 친일 혐의를 벗겨주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에게 독립운동가의 영예까지 씌워줄 뻔했던 것이다.
박흥식이 안창호의 수감 생활과 출소 이후를 도운 것은 1938년까지다. 그런데 1937년부터 박흥식은 촉탁보호사를 겸하면서, 출옥한 항일투사들을 회유했다. 박흥식의 안창호 후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대목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라 할 수 있다.
‘반민특위 체포 1호’ 박흥식의 석방은 친일청산의 운명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반민특위에 불들린 여타 친일파들도 박흥식처럼 풀려났고, 친일청산이 도리어 빨갱이들의 음모로 매도됐다. 그렇게 친일청산이 무산된 상태로 벌써 60년 넘게 세월이 흘러버렸다.
박흥식 사건은 친일이 아니라 ‘친일청산’이 청산된 부조리를 상징적으로 반영한다. 이 사건은 ‘친일청산은 쉽지 않다’는 이미지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친일청산을 지지하는 쪽에는 분노를 주고, 반대하는 쪽에는 희망과 요행을 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박흥식 석방이 상징하는 부조리가 청산될 가능성이 2020년 4월 15일부터 현저히 높아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친일청산의 성공 가능성이 21대 총선을 계기로 한층 더 제고된 것이다.
2016년 촛불혁명 이후로도 친일청산 및 과거사 청산을 계속해서 조롱하고 비웃고 훼방하던 보수세력 상당수가 이번 총선을 계기로 사실상 몰락했다. 저세상에 있을 박흥식과 그 동지들의 얼굴이 어두워질 만한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박흥식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다시 한번 불려나와 진짜 심판을 받게 될 날이 조만간 다가오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전조(前兆)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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