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7월의 어느 저녁, 약속시간을 살짝 넘겨 법무법인 해마루에 도착했다. 본격적으로 야근에 파묻힐 시간에 흔쾌히 일정을 잡아준 임재성 변호사에게 죄송하고, 감사하다.
너무 궁금한 사람이었다. 연예인을 보는 기분으로 사심 가득 이것저것 많이도 물어보았다. 임재성 변호사는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거의 무지한 인터뷰어에게 해준 개인 과외는 덤.
먼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임재성 변호사입니다. 4회 변호사 시험으로 변호사가 됐고 지금은 법무법인 해마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변호사가 되기 전에는 사회학 대학원에서 평화연구를 하였구요, 평화단체에서도 활동하였습니다. 사회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로스쿨에 진학한 것인데, 변호사라는 자격이 이후 활동과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지도교수도 제 학부가 법대이고 당시 박사학위 논문을 ‘병역법’을 소재로 한국사회의 군사주의를 다루는 것으로 준비하고 있었기에 법사회학을 잘 해보라며 적극 추천해주셨습니다. 변호사가 되고 난 지금은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연구나 활동보다는 일반 송무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요.
로스쿨 전까지 궤적이 통상의 사람들과는 좀 달랐네요?
통상적이지 않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저 같은 사람들이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제도가 로스쿨 이 아닐까 합니다. 로스쿨에 다니면서는 로스쿨 설립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학생이 ‘나’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어요. 변호사시험 합격이 부담이긴 하였지만 문 닫고 합격해도 된다 생각에 학점이나 변호사시험 걱정에 매이기보다는 법철학, 헌법이론 등 비수험 수업을 많이 듣고, 틈틈이 논문을 쓰거나 외부 투고를 하면서 로스쿨 시절을 보냈습니다. 졸업한 이후 전형적인 변호사 업무보다는 연구나 활동을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좀 다르게 먹었던 거지요.
로스쿨은 직업학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변호사님과 같은 이유로 진학을 결정한다는 게 좀 낯설어요.
현실은 그렇게 운영되지만 제도는 활용하기 나름 아닐까요. 물론 합격률 하락으로 현재 로스쿨의 모습은 암담한 상황이긴 합니다. 처음엔 졸업 후 바로 대학원에 돌아가서 박사 논문을 쓸 생각도 있었지만, 법학공부를 하면 할수록 송무 경험에 욕심이 났어요. 다행히 졸업 즈음에 송무를 하면서 활동을 병행할 수 있는 지금의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요. 그리고 결국 올해 박사학위 논문을 법사회학 전공으로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게 병행이 되셨어요?
사무실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세상에! 사무실 자랑도 같이 해서 설명을 좀 해 주셔요.
2016년 10월쯤 제 욕심과 마음을 사무실에 말씀드렸는데, 논의를 하신 후 2017년 1년간 신건 배당에서 제외해주셨어요. 글을 쓰려면 ‘덩어리’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을 얻을 수 있었지요. 사무실에서 받은 1년을 좀 넘겨서 이번 1학기까지 논문을 썼고, 이번 7월에 겨우 통과가 되었네요.
사무실 이야기를 좀 하면, 법무법인 해마루는 흔히 ‘민변 계열 펌’이라고 설명되곤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그 이유로 입사하신 분들도 꽤 되구요. 해마루에는 민변 회원이 아니신 분들도 있으시지만, 민변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공유는 있습니다. 민변 회원 여부를 떠나 그러한 지향성을 사무실이 지켜나가야 할 가치라고 구성원들이 인식하고 또 그렇게 노력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고용 변호사가 민변 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매일매일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상당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하는데, 해마루는 ‘지원’까지는 아니라도 ‘응원’해주신다고. 민변 활동을 응원하고 여러 배려도 해주시지만, 주어진 일은 어떻게든 해놓아야 하는. 회사에 고용된 변호사로서 당연한 것이지만, 민변 회의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와 앉아있는 새벽에 살짝 힘들 때도 있지요. 아, 민변 회비를 사무실에서 내주시니 ‘지원’은 분명히 있네요. 정정하겠습니다.
적지 않은 변호사님들이 특히 고용 변호사님들이 사무실에서는 기계적으로 주어진 일을 하고, 민변에 와서야 비로소 가치 지향적인 일을 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고, 견디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요. 해마루도 회사이고, 회사의 유지를 위해서는 이익을 내야하니 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고용 변호사의 이런 심리적 고충도 사무실 내부에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나은 조건인 것은 사실이지요.
변호사님께 제일 먼저 여쭈어볼 건 역시 병역거부죠.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사유로 병역거부를 하는 것은 흔하지는 않지요?
거의 없죠.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90명 정도가 비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자입니다. 2002년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최초의 병역거부 선언자 오태양 이후 17년 동안의 통계이니, 일 년에 5명 정도의 병역거부자가 나왔다고 볼 수 있겠네요.
농담처럼, ‘불효자 피가 있다’라고 하는데, 변호사님은 병역거부를 어떻게 마음먹고 실행하셨는지 그 과정이 정말 궁금합니다.
대학 입학하고 학생운동을 꽤 열심히 했어요. 귀가 얇은 편인데, 선배들의 진지함에 혹 했지요.
대단한 공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일련의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데모에 나가고, 그 과정에서 경찰이나 용역깡패들의 폭력을 보면서 국가 공권력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감이 켜졌죠. 특히 집회에서 경찰의 진압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랐어요. 경찰방패와 곤봉으로 시위대를 치고 들어와 엄청난 구타를 가하기 일쑤였죠. 철거촌에서 경찰 비호아래 이루어지는 용역깡패의 폭력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고요.
현역입영 대상자였기에 군인이 되어야했지만, 앞선 경험으로 국가공권력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에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그 적대감이 ‘거부’라는 선택항을 바로 연결되지는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처럼 그냥 “때워야지”생각했고, 학생운동 늦게까지 하면서 최대한 미루다가 갔다 와야지 정도의 계획이었습니다.
2002년 병역거부가 한국사회에서 공론화되고, 언어와 선택항이 생겼지요. 병역의 뒤에 ‘거부’가 붙는 언어, 병역을 ‘거부’할 수 있다는 선택. 그 때 참 놀랐어요.
다른 길을 발견하신 거네요.
제가 속했던 학생운동 조직이 2011년 9·11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이 이어지는 국면에서 적극적으로 평화운동에 결합했어요. 공권력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평화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대적 경험을 할 수 있었지요.
질문이 왜 병역거부를 하였냐? 인데, 짧게 정리하면 운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대 문제로 고민했던 그 시기에 병역거부라는 운동이 등장했고 제가 했던 학생운동 조직이 평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제 선택항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비종교적인 병역거부는 대부분 전쟁의 시기에 급격하게 증가합니다. 베트남전쟁 때 미국의 병역거부가 대표적이에요. 전쟁의 시기에 자신이 입는 군복이, 자신이 드는 총의 의미가 분명해지니까요. 저 역시 이라크로 파병되는 한국군인들을 보면서, 그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권력자들을 보면서 평화라는 것이 신념이 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다고요?
양심이나 신념은 형성되는 과정이 필요하죠. 물론 그 과정이 꼭 긴 시간일 필요는 없지만요. 저 역시 어느 순간, ‘병역거부’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제가 했던 활동들 속에서, 당시의 사회환경들 자연스럽게 ‘살인훈련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살겠다’라는 마음을 키워나갔던 것 같아요. 그런 시대적 경험을 제가 대학생 시절을 갖을 수 있었던 것에는 운이 분명 있지요.
또 하나는, 현실적인 부분에서의 운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이 선택을 했을 때 부모님이 쓰러지셨거나 그랬으면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당시 집안 분위기가 어머니가 자해를 시도하셨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분위기거든요. 저희 집 대장이 아직도 할아버지이신데 할아버지는 아직도 제가 중국에 병역 특례를 다녀왔는지 알고 있으세요. 제가 마음을 꺾지 않자 온 가족이 함께 거짓말을 하였던 것이죠. 만약 할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쓰러지셔서 병원에 가셨다, 그랬다면 제 결정을 지키는 것이 참 힘들었을 거 같아요. 병역거부자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로 포기하는데, 저는 그런 측면에서 운이 좋았어요.
다시 그 시기로 되돌아간다면, 같은 결정을 하셨을까요?
모르죠. 조건이 바뀌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내 신념이라 하더라도. 그때로 돌아가도 절대로 총을 잡지 않고 감옥에 갈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건 너무 자신에 대한 확신인 것 같고.
(이 분 매력있다. 겸손하다. 다시 같은 선택을 하겠다, 라고 말해도 누구나 고개 끄덕일 텐데.)
질문을 좀 바꿔서 후회하지 않느라고 물어보면,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답할 수는 있어요. 병역거부라는 선택과 감옥에서의 시간이 이후의 삶에서 하나의 준거점처럼 저한테 많은 의미를 가지는데 그런 무거운 추가 하나 있으니 어떤 결정이나 판단에 있어서 든든하게 기댈 곳이 있는 느낌이랄까요?
불이익을 말씀을 하시기도 하는데, 물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은 심각한 인권침해지요. 말해 무엇 할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제가 병역거부 전에도 후에도 많은 것을 누렸다고 생각해요. 출소 이후 제가 진학하였던 사회학과 대학원도 그 결정을 높게 평가해주는 분위기였고, 병역거부로 석사논문까지 썼죠. 로스쿨에서 그랬구요. 해마루 입사에도 ‘전과자 가산점’을 제가 누린 것은 아닐까 추측도 해봅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해요, 수많은 이들의 오랜 고통을, 정작 나는 상징자본처럼 누리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마음에요.
구속 생활은 어떠셨나요.
노회찬 의원이 얼마 전에 안타깝게 돌아가셨는데, 제가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서울구치소에 접견을 오신 적이 있어요. 노회찬 의원이 17대 국회에서 대체복무 법안을 발의하였는데, 이후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병역거부자들을 만나러 오신거죠. 그렇게 한 번 국회의원이 접견을 온 수감자들은 구치소에서 함부로 못해요. 방에서도 특별한 사람이 되죠. 쟤는 국회의원이 접견 오는 사람. 노회찬 의원 덕에 얼마나 잘난 척을 하고 살았게요.
몸은 갇혀 있지만 마음을 갇히지 말자, 생각했지만 좁은 방을 여러 명이 같이 쓰다 보니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신문 칼럼 필사를 좀 했어요. 무언가를 쓰면 확실히 집중이 되니까요. 그 때 습관이 지금도 배어서 여전히 신문은 종이신문을 구독해서 보고, 또 스크랩도 하고 있어요.
병역거부 운동이 ‘남성’만의 운동이라고 쉽게 상상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관한 의견이 어떠신가요.
모든 사회운동에는 당사자도 참여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도 참여하죠. 근데 병역거부는 특히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예를 들어 우리가 치매 노인들이나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치매 노인이 아닌데, 장애인이 아닌데 왜 그 운동을 하냐고 묻지 않잖아요.
저는 안보영역의 특수성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병역 문제에 대해서는 여성들만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제되지요. ‘신성한 병역의 의무‘라고 흔히 이야기하는데 ’신성‘이라는 것은 세속의 모독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합리적 비판이나 문제제기가 모욕과 등치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자격을 따져 묻게 되는 구조가 바로 병역의 신성화입니다. 지금 육군 사병 기준으로 군복무 기간을 18개월로 줄인다고 하는데, 꼭 18개월 해야 돼? 12개월 하면 안 돼? 이런 말을 못하는 거지요. 이런 말을 하면 바로 너 군대 갔다 왔어? 니가 뭘 알아? 이런 이야기가 등장하는 구조. 병역의 신성화라는 건 결국 정보와 해석의 폐쇄성이에요. 우리가 알아서 할게, 너희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
세상의 생각과는 다르게 병역거부 운동에 있어서 많은 여성활동가들이 참여하였고, 그녀들의 역할도 지대하였습니다. 병역거부운동을 넘어서 한국 평화운동이나 평화연구에 있어서도 여성활동가, 연구가들의 역할이 그러하였구요. 왜일까 생각을 해보면, 생물학적 성이라는 기준만으로 일반화하기 조심스럽지만, 군대 경험이 없고 그 이유로 발언권마저 배제 당해온 여성들이 당연시되는 군사주의에 보다 민감했던 것 아닐까, 자신이 불편하게 느끼는 군사주의를 바꾸기 위한 운동에 참여했던 것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병역거부운동은, 군대와 관련된 운동은 남성들만의 것이라고 보는 시선이 바로 신성화의 논리, 배제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 아닐까요?
(질문 하고 혼나는 기분, 오늘 여러 번 느꼈다)
최근 헌법재판소 결정이 특별히 의미가 있으실 것 같아요. 소회를 여쭙겠습니다.
한편으로는 감격스럽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워요. 드디어 되었구나 싶지만, 이렇게 오랜 고통 끝에서야 되었구나 싶기도 하구요.
제가 2005년에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최후 진술을 했어요. 피고인으로서. 2018년에는 변호인으로서 최후변론을 하였지요. 같은 법원에서 저와 똑같은 병역법 88조 위반으로 기소가 된 병역거부자의 변호인으로서 말이에요. 피고인도 안 우는데 변호인이 최후 변론하면서 울었어요. 방청하던 활동가 친구가 판사가 보면 니가 감옥 가는 줄 알겠더라 하더라구요. 당사자는 담담하게 얘기를 했지만, 저는 변론을 하면서 좀 서럽더라구요. 13년 전에 했던 “무죄를 선고해주십시오”를 지금까지 이렇게 간절히 말해야 하다니.
헌재 결정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 예상을 하셨습니까? 물론 기대야 당연히 하셨겠지만.
2015년 이후 하급심의 계속된 무죄판결을 보면서 사법부가 이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병역거부 하급심 무죄판결은 한국 사법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현상이었어요. 상급법원의 판단이 없는 상황에서 하급심이 엇갈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015년부터 무죄 판결이 나오자 2016년 대법원 소부에서 유죄를 선고하였는데, 보름도 안돼서 하급심에서 다시 무죄판결을 내렸죠.
2015년, 16년, 17년 3년 동안 80여건의 하급심 무죄판결이 나왔는데, 판사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이 사람들 감옥에 보낼 수 없다 선언을 한 것이에요.
헌법재판소의 중요 결정들에 대한 사례분석을 해보면 대부분 시대를 앞서나가는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변화된 시대를 추인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저는 이번 결정 역시 변화된 시대를 추인하는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문재인 정부도 대체복무 도입입장을 수차례 입장을 밝힌 바 있구요.
지난 총회에서 모범회원 상을 수상하셨어요. 플랜카드에 ‘유흥도 열심’ 이렇게 적혀있던데요.
유흥이라면 좀 포괄적인데, 술을 즐겨 해서 그런 거 아닐까 싶네요. 술을 좋아하고, 인생의 낙으로 삼고 있고 그러네요. 또 지금 민변 베트남전 티에프에도 술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뒷풀이를 참 성실하게 합니다. 베트남 현지 조사 가서도 일과 시간이 끝나면 불타는 밤들을 보냈는데. 그런 연유로 그런 플랑을 만들어주신 것이 아닐까 해요.
수상 소감 한 번 더 부탁드리면 피곤하실까요.
페이스북에서도 썼는데, 평화운동 하던 사람, 변호사가 되어서도 평화운동 할 수 있게 해준 민변에 감사하지요. 민변 집행국과 공익변론센터에서 시민평화법정 준비에 정말 많은 인적, 물적 지원을 해주셨어요. 티에프가 크게 지른 사업 수습하게 해주신 거죠.
우리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티에프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고생일 거라는 예감은 들었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보니, 피해자 진술부터 하나하나 다시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제대로 된 베트남어 통역, 번역자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구요. 티에프 구성원 모두가 헌신적으로 준비했는데, 모범회원 상은 거기에 대한 공동체의 평가라고 생각해서 기분이 좋았어요.
시민평화법정이 뭔지 제가 몰라서, 준비하신 변호사님께 물어봤어요 이게 도대체 뭐냐, 대본은 누가 쓰고, 대본대로 가는거냐 아니면 돌발사항이 있냐. 결론은 정해져있냐, 이게 하나의 연극이냐, 이런 질문들이요.
연극이라는 평가도 있지요. 민간법정이기에 피할 수 없는 시선이라고 봅니다. 민간법정 자체가 강제력을 가진 판결을 얻기 위한 재판이 아닌 공론화를 위한 운동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형식이 아닌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민평화법정에서 다루어진 주장과 증거의 수준, 법정증언과 판결의 내용 등을 볼 때 저희는 실제 법정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손색이 없어야 한다는 기준을 잡고 준비하였어요. 비록 티에프 내부에서 역할을 나눴지만 원/피고 간의 공방도 사전 조율 없이 충분히 전개 하였구요. 방청 오셨던 참천군인분들도 판결에는 불만을 표시하셨지만, 재판 과정에서는 ‘나라에서 하는 것보다 잘하네’ 말씀을 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누군가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어차피 결론 뻔하게 내려놓고 한 거 아니야? 시민평화법정의 재판부로 모셨던 이석태 변호사님, 양현아 교수님, 김영란 대법관님 모두 그 부분을 인식하셨습니다. 그래도 더더욱 당위가 아닌 증거로써 주장을 입증해야 함을 강조하셨어요.
한국에서 진행된 어떤 민간법정에서도 이정도의 절차를 진행했을까 싶어요. 2일 간의 법정 전에 2주, 1주 전에 각 두 번의 변론 준비 기일을 진행하였어요. 원·피고 대리인 출석해서 공개된 장소에서 말이죠. 그 공개된 변론 준비 기일에 증거 신청과 증거 검토 그리고 재판부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항에 대한 석명들이 이루어졌습니다.
민간법정은 널리 활용되는 운동의 방식이기도 해요. 연극적 요소도 있지만, 법정이라는 형식이 주는 실체규명의 과정이 매력적이고, 판결문이라는 결론까지 도출되기 때문이지요. 2000년 동경에서 열렸던 일본군‘위안부’ 관련 국제여성전범법정이었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총9개 국가 64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일본의 시민사회가 초대를 했죠. 그것이 저희의 롤모델이었습니다. 가해국의 시민사회가 가해국의 수도에서 자신의 책임을 묻는 법정. 2000년에 일본 시민사회가 국제적인 연대로서 이루어냈다면, 2018년에 한국 시민사회가 해보자.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것, 여기서 좀 풀어 주세요.
시작은 소박했어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가 오랜 전부터 알려졌지만 구체적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국가배상소송 통해 파열구를 내보자 의견을 모았는데, 운동이 너무 소송에 갇혀서도 안 된다는 우려도 있었지요. 그래서 소송을 준비하는 품으로 여론을 환기하는 민간법정을 해보자 생각을 한 것이에요. 리서치 과정에서 2000년 동경 법정도 확인되면서 조금 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구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이 너무 커졌죠. 실제 소송이라면 한 쪽 당사자의 주장만 준비만 하면 되지만, 민간법정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직접 해야 하는 것이자나요. 법정을 세우고, 절차를 담은 헌장을 공포하고, 재판부를 모시고. 베트남이라는 언어적 지리적 거리가 있는 곳에서 조사를 하고, 원고들을 모시는 작업도 상당한 비용과 공력이 드는 과정이었어요. 베트남 정부가 이 문제에 있어서 여전히 폐쇄적인 입장이었기에 언제든 초정이 무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구요.
티에프에서 2회 현지조사를 다녀왔는데 그 자료들을 번역하는 과정도 참 고달펐습니다. 김남주, 이선경, 배광열, 오민애 변호사님이 번역 때문에 고생 참 많이 하셨어요. 지금까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 인터뷰 자료들은 피해자 진술을 그대로 베트남어로 녹취한 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현지 인터뷰 과정에서의 통역자의 진술을 정리한 것이 피해자의 진술로 유통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소송자료로는 전혀 쓸 수 없는 자료였기에 인터뷰를 영상을 바탕으로 라인 바이 라인으로 녹취를 하고 이후 번역을 진행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을 제대로 처리해줄 수 있는 인력을 구하기 어렵더라구요. 피해지역이 베트남 중부라 사투리가 심하고 피해자들이 고령이기 때문에 만만치 않다라는 설명은 들었지만, 이 문제는 아직까지 티에프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또한 시민평화법정에서 정작 피해자들이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도 있었어요. 준비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베트남어를 하지 못하고, 피해자분들과의 지리적 거리도 먼 상황에서 준비의 대부분이 한국 법률가와 활동가들의 판단과 결정으로 이루어졌거든요. 물론 시민평화법정을 시작하기 전 피해자분들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원고를 해주실 수 있겠냐는 동의를 얻었고, 2차 현지조사를 통해서 다시 설명을 드렸지만 피해자들과 충분한 소통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이 원고로서 앉아 있으실 법정이 한국어로 진행되었으며, 이틀간 15시간에 달하는 과정이었죠. 절차에 익숙한 변호사들도 그 시간동안 앉아있는 게 쉽지 않잖아요. 위스퍼링 통역을 준비하였지만 60에 가까운, 태어나서 재판이라는 것은 처음 겪어보는 분들이 이 재판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정작 원고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재판을 우리가 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복잡했어요.
하지만 법정에서 원고들은 단 한순간도 법정을 떠나지 않았어요. 잠깐 쉬시다가도 밖에 무슨 소리만 나면 이분들이 뛰어 나가시는 거예요. 궁금하다고. 자기들의 재판이었어요. 피고 대한민국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 베트남에서 오신 원고였어요. 혹시 재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시는 것은 아니까 걱정되는 마음에 실제 재판이 아니다 말씀을 드리면, 안다고, 하지만 내가 죽기 전에 이런 재판을 언제 받아보겠냐고, 지금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해주시더라구요. 제가 얼마나 관념적이었는지, 마음속에서 이 분들을 운동의 주체가 아닌 증언의 도구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지요. 뻔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피해자에서 운동가가 되는 과정이 이 분들에게는 이번 법정이 아니었을까 싶었어요.
다들 가슴 속에 하고 싶은 말들이 있으셨구나.
대본 짰냐고 물어 봤잖아요. 베트남에서 오셨던 분들의 당사자신문과 최후진술은 전혀 사전준비가 없었어요. 사실 준비를 했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했어요. 재판부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최후진술. 무엇하나 읽지도 보지도 않고 마음으로 답변하셨어요.
그런데 세상에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 거예요. 최후진술을 하시는데, 여기까지 차오르는 얘기를 그 300명 400명 되는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하시더라고요.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왔고, 그 진실을 이야기했다. 기억해달라며. 제가 법정이 끝나고 매체에 투고한 글이 하나 있는데 그 제목이 “눈부셨던 응우옌티탄들”이었어요(원고 2명의 이름이 응우옌티탄으로 동명이인이었다), 정말 그랬어요. 눈부셨어요.
(대본이 있었냐는 질문에 화가 나서 말이 길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당시를 떠올리는 임재성 변호사의 표정에서 감격스러움이 묻어나온다.)
시사인에 고정칼럼을 쓰셨던데, 그 때 변호사님 설명이 ‘평화연구자’더라구요. 보통 변호사, 교수 이렇게 직함을 쓰지 않나요?
일본에서 잠깐 공부했던 시기가 있는데 그때 참 마음에 들었던 게 그런 거였어요. 우리는 보통 소속을 얘기하잖아요. 무슨 대학, 무슨 법무법인. 소속이 없으면 명함이 없는. 근데 일본에서는 ‘작가’, ‘연구자’ 이런 호칭이 많고, 자연스럽게 통용되요. 또 연구자 앞에는 그 사람이 관심 갖고 있는 주제가 붙는데, 어느 대학에 있다는 호칭보다 그 사람을 훨씬 더 많이 설명해주는 것 같더라고요. 평화연구자, 인권연구자, 이주연구자 등과 같이 말이죠.
조금 더 내심으로 들어가면, 변호사든, 박사든 그것은 자격이나 직업의 문제이고 제가 지향하는 것은 평화연구자에요.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임재성 변호사의 사무실 한편에 시민평화법정 기념사진이 걸려있다.
마지막으로 민변 회원들과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는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병역거부 운동과 민변이 할 일이 더 많아질 거라고 봐요. 사실 지금 민변에서는 병역거부 사건을 해보신 젊은 변호사님들이 없어요. 근래에는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병역거부자들이 변호인을 선임하여 재판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제 대체복무제가 도입이 되면 관련된 소송들이 증가할 거예요. 대체복무심의 위원회가 불인정 결정을 하면 이를 행정소송으로 다투는 소송이지요. 위원회가 어떻게 구성될지 아직 미지수이지만, 초기에 보수적인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지요. 종교적 사유 및 많은 입증자료가 있는 비폭력-평화주의 신념 정도의 범위에서 말이죠. 초기 불인정 결정에 대한 행정소송을 통해서 나오는 사법부의 판단들이 대체복무심의위원회 방향에 중요한 기준들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봐요. 그 과정에서 민변의 변호사들이 세밀한 연구를 통해서 대응해야 겠지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곧 만들어질 대체복무심의 위원회가 병역거부자 여부를 판정하게 될 텐데, 이는 우리 사회가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양심 심사 기구가 될 거에요. 그 위원회가 이 사람은 양심 인정. 저 사람은 양심은 불인정, 이렇게 판단을 하겠지요.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비폭력 평화주의 신념’은 인정하지만, ‘남성성이 지배하는 군사주의적 공간은 나의 성적정체성과 배치된다’는 마음은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이 아니라는 판단이 나올 수 있어요. 그런 결정이 나왔을 때 소송을 준비해야죠. 초기에 좋은 선례를 만드는 과정에 민변 변호사들이 함께 하였으면 합니다. 또한 위원회의 심사 단계에서부터 변호사의 조력이 필요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역시 준비할 필요가 있구요.
3시간의 긴 인터뷰를 이 지면에 다 담지 못해 아쉽다.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하거나, 견해에 전부 공감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이를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멋있는지는 확실히 느꼈다.
간담회가 이렇게 친근하고 부드러운 뜻을 가진 단어임을 오늘에서야 알게 됐다. 정책간담회, 기자간담회가 입에 착착 붙는 걸 보면, 간담회란 단어는 다소 공식적이고 엄숙한 느낌이지 않은가. “와인과 함께하는”, “신입회원”, “간담회”가 열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소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을 애써 조합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민변 신입회원 환영의 밤”, “민변, 나의 동료가 되라”, “하늘과 바람과 민변과 신입”, “젊은 민변, 잠 깨어오라”등 무난한 행사명이 가득한데 “신입회원 간담회”라니 으으… 와인을 붙이면 엄숙한 것이 부드러워질거라 생각한걸까.
오해였다.
와인은 부드러웠고, 간담회는 정다웠다.
20병을 쾌척하신 변호사님의 “와인 병을 따야한다”는 책임감 덕분에 주최 측의 의도와는 달리 미처 간담회 개회도 전에 병을 붉게 채우던 와인들은 사람들 면면으로 스민다. 와인은 과연 “신의 물방울”이다. 언제 어디서나 어색할 수밖에 없는 첫 만남의 공기를 부드럽게 덥혀준 건 달콤 쌉싸름한 와인이었다.
회장님의 환영사, 회원팀장님의 민변사를 지나 위원장님들의 신입회원들에 대한 위원회 가입 구애의 시간. 사법위가 신입회원들에게 참 좋은데,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아쉬웠던 것만 기억난다.
“신입회원” 간담회인만큼 제일 중요한 “신입회원”들의 자기소개 시간. 단이아빠님의 단호하고 유쾌한 진행이 자기소개 사이사이의 어색함을 웃음으로 녹인다.
권호현 변호사가 신입회원 간담회에서 세 단어로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노동법 덕후, 마라톤, 어디서 많이 본 얼굴, 대박, 경찰, 검찰”
키워드 세 개를 쓰게 하고 그 중 임의로 하나를 선정해 자기를 소개하게 하는 방식은 짧은 시간임에도 웃고 떠들며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처음 보는 40여명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지라, 단 세 시간만으로는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기는 어려웠을 테다. 다만, 그 자리에 있었던 신입회원들, 또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민변을 밀고 끄는 간사님들, 변호사님들은 한 가지는 분명히 느꼈을 테다.
“이번 신입들은 유쾌한 녀석들이네, 기대된다”
동기들만의 시간을 갖지 못한 아쉬움은 천천히 채울 수 있을 테다. 비슷한 생각을 나누고픈 갈망을 가진 유쾌한 녀석들이 모였으니.
국제통상위에서는 지난 2015. 6. 26. 한미FTA 서문 중 ‘대미 한국투자자가 한미FTA 효과를 누리는 것을 제약하는 조항을 추가하기 위하여 한미 양측이 교환한 문서’에 대해 정보공개청구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은 2016. 12. 29. 최종적으로 민변의 정보공개청구가 정당하고, 산업자원통상부의 비공개처분이 위법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사건번호 대법원 2016두51962】.
한미FTA 체결 과정
▲ 한미FTA 일지 (출처 : 한미FTA공식홈페이지)
한미FTA 체결과정을 보면, 2007. 4. 2. 한미FTA가 협상 시작 약 2년 2개월만에 타결되었고, 같은 해 5. 25. 타결된 협상문 원문이 공개되었으며, 2007. 6월 추가협의가 2차례 진행된 후 같은 해 6. 30. 양국 대표단이 한미FTA에 서명을 하였는데, <2007. 5. 25. 타결된 협상문>과 <2007. 6. 30. 서명된 협정문>이 상당부분 서로 다른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즉 단 1개월만에 협상의 결과가 바뀐 것이었습니다.
특히 협정문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추가되었습니다.
국내법에 따른 투자자 권리의 보호가 미합중국에 있어서와 같이 이 협정에
규정된 것과 같거나 이를 상회하는 경우, 외국 투자자는 국내법에 따른 국내
투자자보다 이로써 투자보호에 대한 더 큰 실질적인 권리를 부여받지 아니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서문에 추가된 위 조항은 미국에서의 한국 투자자 대우 조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정부는 이러한 조항이 삽입된 사실을 알리지도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해당 조항은 미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한국 기업에 미국법 이상의 FTA 보호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이 문구는 미국 무역법 조문을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이미 미국법이 충분히 미국에 투자한 외국 기업을 보호하고 있으므로 FTA를 통해 더 큰 실질적인 권리를 부여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국제통상위의 정보공개청구 과정
외교관계에서 협상이 일단락되었다가 다시 수정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또한 왜 이렇게 이상한 문장이 FTA에 들어갔는지, 그 효력이 어떻게 되는지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례적인 수정 과정에서 변변한 문서 하나 없이 한미 양측이 의견을 교환하고 타결된 협상문을 변경하지는 않으므로 국제통상위는 정부에 협상 과정에 관한 정보를 공개할 것을 청구하였습니다. 2007년 변경 당시에도 정보의 공개를 청구하였으나 정부는 한미 간의 비밀유지협정을 이유로 공개를 거부하였습니다. 이후 한미FTA 발효 후 3년간의 비밀유지협정을 고려하여, 비밀해제일(2015. 3. 15)에 맞추어 30개 분야의 협상 서류 공개를 청구하였으나 정부는 다시 공개를 거부하였고 위 소송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위 소송과정에서 1심 서울행정법원과 2심 서울고등법원은 해당 정보 비공개로 인하여 보호되는 국가의 이익이 ‘국민의 알권리 보장, 국정에 대한 국민의 참여와 국정운영의 투명성 확보’라는 정보공개로 국민이 누릴 수 있는 이익보다 크지 않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또한 산업통상자원부는 해당 정보가 공개될 경우 다른 나라와의 교섭 정보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으며 외교․통상 관계에 마찰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법원은 그 근거가 원론적이고 추상적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은 2016. 12. 29.「상고심절차에 관한 특례법」제4조에 해당하여 심리불속행으로 산업자원통상부의 상고를 기각하였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정보 비공개
그러나 산업통상자원부는 대법원의 판결 이후에도 즉각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측에 통보해야하며 내부적으로도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이는 정부 측에서 재판 과정에서 계속하여 주장하였던 내용에 불과합니다. 또한 대한민국은 엄연히 사법주권을 보유하였으므로 산업통상자원부는 미국과 별도의 협의 없이 대법원 판결을 조속히 이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금이라도 한미FTA 협상 과정에 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여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국제통상분야에서 당연시해왔던 밀실행정의 관행을 타개하기를 기대합니다.
민변전주전북지부 회원들이 2015년 3월부터 2016년 1월까지 활동한 내역을 간략하게 보고드리겠습니다.
1. 회원 역량강화 사업 및 꾸준한 회원의 증가
작년 3월 이후 신규 회원들이 꾸준히 증가하였습니다. 고종윤(변시4회), 김용빈(변시4회), 노혜성(변시2회), 박계성(변시4회), 박기봉(연수원43기), 우아롬(변시2회), 김원욱(변시4회) 회원이 새로 가입하였고, 박일지(변시2회), 전경령(변시4회), 최영호(변시1회) 회원이 본부에서 지부로 소속 변경을 하여, 종전 16명에서 26명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회원증가는 2014년도에 법학전문대학원생들과 지속적인 관계형성을 한 것에 비롯한 것이라고 보고, 작년 5월에는 원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과, 작년 10월에는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과 각 간담회를 하였습니다.
작년 여름에는 지부에서 우리 지부 회원들과 지역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인권감수성을 향상시키고자 1박 2일 동안 자체 워크샵을 진행하였습니다. 특히 강사진으로 통일운동가 한상렬 목사, 민주노총전북지부 이창석 사무처장, 전북환경운동연합 이정현 사무처장,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김영기 대표께서 영역별로 깊이 있는 말씀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낮에는 강의로 밤에는 밥과 술과 함께 못다한 이야기로 회원들과 학생들의 인권 감수성은 물론, 시민사회단체와도 허물없이 연대할 수 있는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
2. 연대사업
작년초부터 전주에서도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위한 시민 단체 연대사업이 진행되었고, 우리 지부도 동참하여 8월경에 위안부 할머니를 모시고 제막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전북교육청은 누리과정 예산 문제로 교육부와 갈등을 빗고 있고, 이에 전북지역에서도 교육재정운동본부를 출범하였으며, 우리 지부도 동참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북겨레하나가 전북지역에 통일교육센터를 건립하고자 하여 우리 지부도 건립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년 한 해 신규 회원들이 증가하여 지부에서 ‘1시민단체 1민변변호사’ 연계 사업을 진행하였고,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전북여성의 전화, 전북환경운동연합, 공무원노동조합 등에 5년차 미만 회원들을 연결하여 적극적인 연대활동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3. 변론활동
작년 6월에는 전주시내버스 회사들이 2012년도 위법한 직장폐쇄에 대한 임금청구 사건에서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하였습니다.
지엠대우 하청업체의 파견근로자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에 따른 원청 근로자 지위 확인의 소가 진행중에 있습니다.
농협노조 지부장이 부당감사에 대해 규탄한 것에 대해 명예훼손죄로 기소된 사건에 대하여 지부에서 변론하여 무죄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얼마전 전주지방검찰청은 전북교육청 김승환 교육감에 대하여 교육부가 학교생활기록부에 학교폭력사실을 지시토록한 것에 대하여 감사거부 및 자료제출 거부를 지시하였다는 사실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로 기소하였고, 이에 지부 차원에서 공동 변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지부 회원님들께서 크고 작은 다양한 변론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4. 상담 지원 활동
지부 회원들이 민주노총전북본부, 전주여성의 전화, 소비자정보센터, 현대자동차노동조합, 공무원노동조합 등에 정기적으로 무료 법률상담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5. 한 해를 되돌아보며
작년 한 해 가장 큰 수확은 회원들이 2배 가까이 증가하였다는 점입니다. 특히 신입회원들과 워크샵도 하고 시민단체와 연결해 주기도하며 회원들의 역량강화에 많은 지원을 하였습니다.
아쉬운 점은 작년 총회 때 우리 지부도 군산 송전탑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지원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기존에 지원하시던 다른 변호사님들께서 수고해 주시고 계셔서 현재까지 특별한 도움을 드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작년 말에는 지부회원들이 모여 송년 모임을 하였습니다. 맛과 멋의 고장에서 흥이 빠질 수 없지요.
마지막으로 이번 달 25일에 신년 모임을 하였습니다. 작년 사업도 돌아보고 올 한 해 어떤 활동을 할 것인지 고민해 보는 자리였습니다.
우리 지부 회원들 뿐만 아니라 전국에 계신 모든 민변 회원분들 모두 작년 한 해 고생하셨습니다. 이상 전주전북지부 소식을 마칩니다.
올해 5월 민변 정기총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광주전남지부가 살아온 주요장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1. 5.18 역사왜곡 대응 (지만원 고소, 뉴스타운 발행 및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
8월 31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1987년 제작‧배포한 5‧18 사진자료집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을 북한과 내통해 만든 자료라고 주장한 지만원씨를 상대로, 당시 5‧18 사진자료집 제작과 배부에 참여한 신부님 5명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 등으로 고소하였습니다. 민변 광주전남지부 16명의 변호사님들이 고소대리에 참여하였습니다(총 33명 중). 이후 10월 20일, 지만원씨가 북한군인으로 지목한 당시 시민군 4명을 대리하여 2차 고소를 진행하였습니다.
한편, 민변 광주전남지부는 독자적으로 팀(임태호, 이소아, 김현무, 홍지은 변호사)을 구성하여 뉴스타운에서 발행‧배포한 호외 1~3(당시 시민군 사진과 북한 군인의 사진을 비교하면서 5‧18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주장이 실린 신문)에 대해서 9월 22일 발행‧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였고, 인용 결정을 받았습니다.
2. 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공동성명서
10월 14일, 광주전남 문화예술인, 전문가, 지식인 405명은 정부의 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에 대한 반대 공동성명서를 5‧18 민주광장에서 발표하였습니다. 이번 공동성명서 발표를 계기로 광주전남지역 변호사, 교수, 의사, 문화예술인 단체들은 앞으로 시국‧지역현안 등에 대해 공동대응활동을 펼치기로 하였습니다.
3. 민변 소개마당 & 변론경험 나누기
매년 10월, 신입 변호사분들을 초청하여, 민변을 소개하고 변론경험 노하우도 공유하는 ‘민변 소개마당 & 변론경험 나누기’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3회째를 맞고 있으며, 10월 21일 저녁에 광주지방변호사회관에서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20여명의 신입변호사 분들과 민변 회원 20여명 총 40여명이 참석하였고, 뒤풀이는 맥주와 함께 즐겁게 마무리하였습니다.
4. 야구경기 단체관람
7월 1일, 김정호 회원사업단장님 덕분에 민변 회원 20여명이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 스카이박스에서 야구경기 단체관람을 하였습니다. 이 날은 월례회의 및 신입회원 가입승인(장은백 변호사님)을 위한 임시총회의 자리이기도 해서, 모든 회의진행을 마치고 야구관람을 하였습니다. 이날 기아는 한화에 여유 있게 승리하였습니다.
5. 여름 야유회
7월, 상반기에 열심히 각자의 자리에서 활동하신 회원분들을 위해 담양 파라다이스라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가족 동반으로 총 35명이 참석하였고, 족구‧발야구‧신발 멀리던지기 등의 체육대회를 통해서 각 회원과 가족분들의 운동실력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6. 창립 16주년 기념
매년 9월 월례회의는 1999년 9월 3일 민변 광주전남지부 창립기념일이 있는 달인 만큼 조금은 특별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충장로 소고기 샤브샤브뷔페에서 25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김용채, 임선숙 변호사님의 말씀을 듣고, 홍지은‧문호세 변호사님에게 신입회원 선물증정, 그리고 민변 광주전남지부 4~5대 지부장을 엮임 하셨던 정채웅 변호사님에게는 공로패를 드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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