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광화문광장에 뜨겁게 타올랐던 "촛불" 더 나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민의'가 정치를 통해 구현되지 못하고 광장에서 터졌습니다.
지난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사람이 주인인 세상!!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큰 물길을 만들어 온 것은 언제나 백성.국민.시민들이었습니다. 폭압에 굴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여서 외쳤던 함성은 미완의 혁명일지라도, 폭발적인 힘을 일으켜 시대정신이 되어 역사의 변화를 만들어왔습니다.
87년 6월항쟁 30주년을 맞이하여 "광장민주주의"의 역사를 돌아보고 더 나은 민주주의, 오늘의 시대정신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1) 모집 마감 : 5월 18일(목) 오후 6시 2) 모집 대상 : 근현대사에 관심있고, 배우고 싶은 회원, 시민, 대학생 누구나 3) 모집 인원 : 30명 4) 참가비 -전체 참가비 14만원 / 서울KYC 회원 20% 할인 112천원 -대학(원)생, 취준생, 열정페이 노동자 20% 할인 112천원
6) 신청 절차 및 완료 -신청을 해주신 후 아래 계좌로 참가비를 입금하시면 됩니다. 참가비 입금계좌 : 신한은행/ 100-024-876626/ 서울KYC -접수 후 24시간 이내(주말 제외) 사무국에서 접수 확인 문자를 드립니다. -서울KYC홈페이지(www.seoulkyc.or.kr)를 이용해 회원가입 후 신청서를 보내시면 ‘회원 할인’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단, 회비납부방법은 CMS자동이체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7) 개별 답사 신청 -개별 답사신청은 해당 강좌 시작 2주 전 홈페이지를 통해 적정인원을 선착순 접수합니다. -개별 답사 참가 시 *목포/정읍/천안/광주 참가비 35천원/ 서울 참가비 1만원 *실내강의 부분 참가 1만원 *회원의 소개로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우, 회원 참가비 적용이 가능합니다.
멀지 않은 과거사를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대한민국 정부수립 군부 독재, 직선제 개헌 그리고 민주정부 100여년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 평화, 인권,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 서울KYC 평화길라잡이 10기 교육에서 만나보실까요?
역사, 평화, 인권, 민주주의에 관심있는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1. 평화길라잡이 1) 평화와 인권의 관점으로, 근현대사 올바른 진실을 배우기 위한 강의와 답사에 참여합니다. 2) 매주 일요일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는 시민들에게 평화와 인권의 관점으로 해설하는 자원활동입니다. 3) 민주화운동 역사의 장소인 ‘남영동 대공분실’ 시민안내 활동을 준비하고, 정기 해설활동을 합니다.
2. 교육신청 안내 1) 모집기간 : 2017년 3월 23일(목) ~ 2017년 4월 24일(월) 2) 모집인원 : 30명 3) 모집대상 : 서울KYC 활동 목적에 동의하고 평화, 인권, 역사에 관심 있는 시민 누구나(만 19세 이상) 4) 접수방법 : 이메일 [email protected]
5) 등록절차 : 사무국에서 신청서 접수→확인 전화 또는 문자→참가비 입금→등록 완료 6) 교육비 : 13만원 [신한은행] 100-024-876626 예금주 : 서울KYC *교육시작 후에는 환불되지 않음. *교육을 수료한 경우 참가비 3만원 환불
3. 교육수료 및 평화길라잡이 수습활동 안내 1) 기본교육 과정 중 출석률이 80% 이상 되어야합니다. (실내강의와 현장답사 총16회 중, 4회 이상 결석시는 교육 수료 불가) 2) 기본 교육 수료 후, 평화길라잡이 안내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수습활동을 해야합니다. 3) 수습활동 과정 : 6월~11월 약 6개월 기본교육 과정 이수 후 6개월의 수습활동 기간 중 10회 이상 (매뉴얼작성, 시연, 시민안내 및 모니터링) 활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수습활동 기간 중 활동 횟수가 10회 이상 경우에만 평화길라잡이 신분증 수여) 4) 평화길라잡이 수습활동 때부터, 서울KYC 회원이 되어야 합니다. (CMS 월회비 납부 의무있음) 5) 평화길라잡이 수습활동 수료 이후에는 월 1회 이상 활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4. 서울KYC 평화길라잡이 10기 기본교육 안내 ◎ 강의 시간 : 평일 오후 7시 30분 ~ 9시 30분 / 토요일 : 별도 공지 ◎ 실내교육장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강의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 도보 3분)
◯ 본 연구의 목표는 미래 한국사회 핵심의제인 다문화사회로의 전환에 대비할 수 있는 정책과 방향을 찾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문화정책 실행현장에서 활동해 온 전문가와 활동가들의 평가와 성과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현재 다문화정책의 문제점과 방향을 정리했다. 또한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의 요구와 새로운 문제의식을 담아 앞으로 10년의 다문화정책 방향을 위한 제언을 도출하고자 했다.
◯ 본 연구는 문헌분석과 심층인터뷰에 기초하여 다문화정책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했다. 현재 한국사회의 이주민 현황, 관련 정책의 성과와 문제점을 정리하고, 이주민 지원기관 및 관련 단체 전문가와 현장 활동가를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문화정책 10년, 현황과 점검
◯ 2015년 말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은 약 190만 명으로, 2014년 대비 5.7% 증가했고 최근 5년간 매년 8.6%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인구 대비 체류 외국인 비율은 3.69%에 이른다.
◯ 한국에 체류하는 이민자 중 규모가 가장 큰 집단은 이주노동자로, 2015년 말 법무부의 취업자격 체류 외국인 통계기준으로 62만5천 명이고, 그중 56만 명은 단순기능인력이다. 여기에는 방문취업 자격으로 이주한 재외동포 28만5천여 명이 포함된 것이다.
◯ 다문화정책의 주요 대상인 결혼이민자는 귀화자를 포함 30만5천 명이다. 다문화가족은 결혼이민자와 그 배우자를 포함하여 2015년 7월 기준 82만 명이며,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해 2020년에는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 우리 사회에서 다문화정책은 국제결혼 및 외국인근로자 유입 증가에 대한 대응방안 차원에서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외국인력의 관리를 위해 외국인 산업연수생(1991년) 제도가 시행된 이래로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관리 및 보호를 위한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 2003년 제정되었다.
◯ 1999년에는 「재외동포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을 통해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했던 외국국적동포를 대상으로 출입국과 체류, 취업의 자유 등 여러 특례를 규정하였다. 2004년에는 법 개정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해외로 강제이주한 재중동포, 재러동포 등도 외국동포의 범위에 포함되게 되었다. 재외동포 대상 취업관리제(2002년), 방문취업 자격 신설(2007년)도 이루어졌다.
◯ 본격적으로 다문화정책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2006년 이후이다. 2006년 4월, “여성결혼이민자 가족의 사회통합 지원대책”이 발표되었고, 2007년 이민자와 국민의 공존과 사회통합을 목적으로 하는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 2008년에는 「다문화가족지원법」이 제정되었다.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가정폭력, 인권문제 등이 사회문제화 되면서 국제결혼 건전화를 목적으로 한 조치와 법률 제정도 이루어졌다.
◯ 지난 10여 년은 여러 법률과 정책 수립을 통해 다문화정책의 기본 틀을 마련했다는 성과가 있다. 특히 소극적인 차원의 통제와 관리를 벗어나 적극적인 노동인력과 인재 유치, 사회통합과 국가안전시스템 구축을 위한 공존의 방향 모색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여기에 공공영역과 민간영역에서 이주민의 한국사회 정착과 적응, 역량강화를 위한 각종 사업을 전개하면서 다문화사회의 인프라를 확장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다문화정책은 여전히 결혼이민자를 주요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자민족 중심주의적 통합모델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다문화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책은 미흡하며, 가족결합권이 없는 이주노동자 가정은 아예 배제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진정한 ‘다문화사회’를 위한 정책으로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정부 부처간 중복지원 및 이벤트성 지원 정책이 문제가 되기도 하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은 정부는 물론 우리 사회에서 ‘다문화’의 개념 및 범주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합의가 부재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다문화정책, 미래사회를 위한 전환과 준비
◯ 비전과 전략의 부재: 전문가와 현장 활동가들은 다문화정책이 국가의 미래발전전략이라는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측면에서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한국사회 정책의제에서 다문화정책이 차지하는 낮은 위상, 국민의 낮은 다문화 수용성이 적극적인 비전 수립에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 결혼이주여성을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는 기존의 다문화정책이 자민족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어, 다문화주의적 통합의 관점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도 있다. 그렇지만 최근 양성평등과 인권에 관한 문제의식을 반영하여 정책 목표점을 수정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다.
◯ 전문가와 담론의 부재: 다문화사회로의 이행이 사회 전반에 미칠 파급력에 비해 사회적 논의가 부족하고, 다문화정책의 추진방향이나 내용에 대한 논의와 합의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2006년 이후 급격하게 증가한 다문화정책과 관련 예산은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 다문화에 대한 논의가 성숙되기 이전에 정부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관리와 통제 지원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관련 전문가가 많지 않고, 정치권 또한 다문화정책에 대한 뚜렷한 비전이나 입장 차이를 관찰하기 어렵다.
◯ 시민인식: 다문화에 대한 시민인식의 개선은 다문화사회로의 전환과 대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인식 개선이 단기간에 이루어지기 어려운 만큼 관련 사업의 추진도 쉽지 않지만, 그만큼 시민사회단체들의 활동이 필요한 영역이기도 하다. 결혼이주민,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나 편견이 있지만, 적극적인 인식개선 요구와 교육활동을 통해 인식개선이 가능할 것이라는 현장 활동가들의 기대도 확인할 수 있었다.
◯ 한국인의 세계시민으로서의 인식 수준이나 다문화수용성은 아직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2015년 우리나라 성인의 다문화수용성 지수는 53.95점, 청소년은 67.63점이었고 젊은 연령대일수록 다문화 수용성이 높고, 다문화 교육이나 자원봉사 등 관련 활동 참여경험이 긍정적인 인식 제고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주민과의 자연스러운 접촉과 다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 현장의 요구: 다문화정책 현장 활동가 인터뷰를 통해 이주민의 역량강화 지원, 이를 위한 상담과 성장의 기회 제공, 다문화가정 자녀를 위한 정책 등 다문화정책의 내실화 및 실효성 강화, 곧 닥쳐올 미래에 대한 정책이 마련되어야 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먼저, 이주민의 역량강화를 위한 지원 및 정책실행 과정의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결혼이주여성 대상 정책의 경우 결혼, 출산, 육아와 같은 생애주기별 지원 정책도 필요하지만, 정착 기간에 따른 적절한 지원이 필요하다. 초기정착 이후에 이주민들이 우리 사회에서 사회경제적 주체로서 자립할 수 있도록 관련 정책의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모니터링이 이루어지고, 그에 맞춰 정책과 사업의 내용이 개선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 역량강화와 실효성 측정은 상담 지원과도 연결된다. 이주 이후 삶의 문제 해결 및 갈등의 극복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결혼이주여성의 상담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인 경우가 많아 상담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꾸준한 검토가 필요하다.
◯ 현재의 다문화가족자녀정책은 학령기 이전 사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다문화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 다문화가족의 자녀들의 교육과 진학, 취업, 그리고 성인으로서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부분에 대해 논의하고 정책을 추진해야 할 때가 되었다. 다문화가정의 부모-자녀 관계 형성도 중요한 문제로, 자녀훈육법의 문화적 차이와 적응, 한국 교육 환경과의 거리감 및 정보력 부족 등의 문제를 고려한 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새로운 시민과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 변화하는 지형들: 지금까지 이주민들은 집단적으로 가시화되었지만, 이제는 그들이 개개의 시민, 지역주민, 이웃으로서 우리 사회와 어떻게 관계 맺을 지에 대해 고민할 시점이다. 한국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숙하는 것과 이주민 문화공동체의 성장이 동시에 추구되어져야 한다. 또한 정착 이후의 생애주기 변화, 이주민들 내 세대 변화, 본국으로부터 받는 영향과 같은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은 새롭게 등장하는 잠재적 시민주체로서 가장 주목받는 정책대상이다. 다문화청소년의 종단연구(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2011~2015) 결과는 대체적으로 아버지의 무관심과 어머니의 언어적 제한으로 인해 가정에서 충분한 심리, 정서 및 학습을 위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고, 이는 학업성취에도 반영된다.
◯ 지역과 다문화정책: 지역은 노동, 거주, 생활의 장으로써 직접적인 다문화공간이 된다. 지원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민간단체들과 갈등 또는 협업하거나 파트너가 되는 등 다양한 관계를 맺고, 중앙정부의 다문화정책을 지역의 수요와 특성에 맞추어 시행해야 하는 점에서 지자체의 역할은 크다.
◯ 참여와 관계맺기: 지원과 복지사업 중심의 다문화사업은 ‘참여’의 관점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주민참여 및 주민자치에 이주민들이 참여하는 방식, 관계맺기를 통한 성장, 지속적인 교육과 멘토링 등에 대한 모색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 다문화인식교육과 시민교육: 이주민들이 학교, 직장,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관계와 참여의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문화인식교육과 생활 · 시민교육이 중요하다. 각 사회기관에 걸쳐 교육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교육매뉴얼을 갖추고, 다양성, 인권, 양성평등의 내용이 반영된 지침과 가이드 마련이 필요하다.
결론 및 제언
◯ 결론: 현 정부 들어서 다문화정책에 관한 논의는 거의 사라졌다. 과거 쏟아져 나오던 다문화정책에 비해 현재는 관심 갖는 이들이 점점 줄어가고 있다. 각종 지원사업들도 중단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고심 중이다.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은 자라고 있지만, 한국사회의 다문화인식은 제자리걸음이다. 저성장 · 불평등사회가 되어가는 이런 때일수록 제대로 된 다문화와 이주정책을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다문화주의는 어떤 가치를 담고 있고, 우리 사회는 그 가치들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논쟁하고 합의해야 할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 또한 다문화 논의가 국가의제 정책담론의 영역에서만 이뤄지는 데 그쳐서는 안되며,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 실천을 이뤄야 한다. 이주민과 선주민이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다문화 2세대가 우리 사회의 주인공이 될 때쯤에는 완만해진 정책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앞으로 10년의 다문화사회를 준비해가야 할 것이다.
◯ 제언: 시민들과 함께 사회혁신을 위한 우리 사회 대안을 모색하는 ‘싱크앤두(Think&Do)탱크’ 희망제작소는 다문화정책 담론 형성을 위한 논의의 장 마련이 시급하다고 판단, 다문화인식교육의 다양한 툴과 방식에 대한 연구를 제안한다. 또한, 시민들의 문화다양성에 대한 의식을 높여 우리 사회가 인종적 우월의식이나 차별, 소수자에 대한 억압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도전할 수 있도록 문제의식을 발견해야 함을 상기시켜야 한다. 또한, 시민들과 함께 찾아가는 다문화 시민의식 개선 프로젝트,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사람들이 경계 없이 이웃과 주민으로 즐겁게 살아가는 방식의 커뮤니티 실험 기획을 제안한다.
도시에 녹아있는 역사를 찾아가는 근현대사아카데미!
8월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 김해 봉하마을을 방문했습니다.
봉화산 아래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가와 사저, 묘역 등이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온 뒤 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마을 부녀회에서 열었다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에
명계남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을 만나 간단한 안내를 듣고 함께 묘역을 참배했습니다.
묘역은 봉분 없이 고인돌 형태로 되어 있고,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노 전 대통령의 말이 적혀있습니다.
다같이 묵념하며 그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주위 바닥은 시민들의 마음이 새겨진 돌로 가득합니다.
추모의 마음, 안타깝다, 행복했다 등등 노 전 대통령을 기리며
누군가는 그의 신념을 이어갈 것을 다짐하고,
누군가는 다시는 이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묘역 전체가 '사람사는 세상', 하나의 마을을 형상화했다고 하는데요,
사후에도 시민들에게 끝 없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팬클럽 노사모는 시민 정치참여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참여정부'라는 이름이 보여주듯이 시민 참여를 보장하고, 또한 권력을 나누고자 한 모습을 기억합니다.
명계남 상임위원은 노 전 대통령을 보는 사람도 있고, 못 본 사람도 있는,
또 본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하는 '섬광'이라고 생각한다는 말과 더불어
현실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지금의 정치 현실을 생각하니 답답해져오는 마음을 안고 봉화산을 올랐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어렸을 때부터 퇴임 후에도 수없이 올랐을 봉화산.
그의 마지막까지 함께한 산 정상에 오르면 봉하마을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위에서 보니, 마을을 형상화했다는 묘역의 이등변 삼각형 모양도 뚜렷이 보입니다.
49재를 지낸 정토원에는 노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봉화산을 내려와, 묘역 건너편 임시로 마련되었다는 추모의 집 한쪽에는 영상전시실이 있고,
한쪽은 사진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상고 출신으로 사시 합격, 인권변호사 활동,
정계 입문과 '청문회 스타', '바보'라는 별명을 얻은 부산 출마,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 대통령 선출, 탄핵 소추와 기각,
퇴임 후 귀향, 친환경 농업을 추진한 봉하마을에서의 시간까지.
기록과 유품을 보며 극적인 삶을 살다 간 그의 일생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추모의 집 밖에도 노 전 대통령의 사진과 메시지가 전시되어 있고
'사람 사는 세상', '시민의 힘' 등의 글귀가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었습니다.
서울KYC가 봉하마을을 찾은 이날은
노무현 대통령 탄생 70주년을 기념하는 봉하음악회가 열리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봉하마을 곳곳이 노란색 바람개비를 들고 지나가는 시민들로 북적이고 있었는데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그리고 대통령으로서의 공과를 따지기 전에
봉하마을을 찾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자연스레
무엇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오게 만드는 걸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당시 정권과는 사뭇 다른 지금
'시민의 힘'에 대한 믿음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소통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시민'으로 보는지 '신민'으로 보는지 알 수 없는 현 정권에서
노 전 대통령이 남긴 메시지는 큰 힘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근현대사아카데미가 6월에 찾은 지역은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리며 진보운동에 앞장 섰던 대구입니다.
인혁당 사건을 비롯해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 민주화 운동, 미군정에 저항했던 10월 항쟁,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의 흔적을 찾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답사는 인혁열사 계승사업회 김찬수 선생님과 함께했습니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인혁열사 묘역입니다. 이곳에는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 당한 여덟 분 중 네 분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74년, 장기 집권의 망상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 정권이 유신 반대 투쟁을 억압하기 위해 학생운동 상층부를 체포한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은 민청학련 사건 배후에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이 있다고 하며 관련자들을 기소, 8명에게 사형 판결을 한 다음날 새벽 집행해버리고 만 사건입니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될 만큼,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법살인이었습니다.
추모조차도 이적 행위로 취급되는 상황으로 인해 십수년의 세월을 숨죽여 보낸 후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재평가 움직임은 89년에야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2007년, 재심을 통해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들은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바란 활동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과제들은 아직까지 진행중입니다.
인혁열사 묘를 뒤로 하고, 10월 항쟁의 흔적을 찾아갔습니다.
미군정과 친일 세력에 저항한 10월 항쟁의 발단은 쌀 배급과 임금인상을 요구한 노동자 총파업입니다. 해방 이후 미군정 식량 정책의 실패로 민중들의 어려움은 극에 달했는데요. 미군정과 경찰은 노동자 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해 발포로 2명이 사망하게 됩니다.
이에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여 경찰서를 포위, 무장해제시키고 친일 지주들을 습격해 빼앗은 물건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대구는 잠시 해방구가 되지만, 곧바로 이어진 미군정과 경찰의 진압으로 10월 항쟁은 막을 내립니다.
항쟁 과정에서 살해된 사람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당시 파업을 이끌었던 전평 사무소, 운수노조 사무실이 있던 건물 등 흔적만이 남아있습니다.
대구 진골목은 대구 근대의 역사를 아직 간직하고 있는 골목길입니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양옥 건물을 비롯해 30년대식 개량한옥들, 1920년대 지어진 서양식 건물인 대구화교협회 건물 등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4.19 혁명의 진원지임을 알려주는 표지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3.15 마산시위 전 대구에서는 2.28 학생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저항한 민주운동입니다.
이외에도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었던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자리는 대구 근대역사관으로 변모해있는데요, 이곳에서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대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구는 삼성그룹이 출발한 지역이기도 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해서인지 이 역사관에서는 박정희를 '잠시 일본군 장교가 되었으나 광복 후 국군장교로 복무'했다고, 대구를 '박정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근대역사관 옆에 있는 10월 항쟁 최종 집결지, 대구 중부경찰서를 거쳐 근처에 있는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도 둘러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경산 코발트 광산입니다. 이 광산은 일제의 태평양 전쟁에 사용될 코발트를 수탈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원 등 약 3,500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광산을 비롯한 이 일대에서 학살되었습니다.
일제 하에서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자원수탈이 이루어지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공간. 이 코발트 광산에 한국 근현대사의 지워지지 않을 한이 담겨있습니다.
아직 발굴되지 못한 유골들은 차가운 광산 안에 여전히 묻혀 있고,
광산 밖 컨테이너에는 일부 유골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대구가 가지고 있는 역사를 살펴보면서, 국가권력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너무 많은, 무고한, 해결되지 못한 죽음들이 힘겹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죽음들을 기억하고 이어갈 필요성 또한 함께 느끼게 됩니다.
근현대사아카데미는 꼭 기억해야할, 때로는 현재진행형인 역사를 계속 찾아갑니다. 7월은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군산으로 가 일제강점기 자취를 살펴봅니다.
6월 18일 근현대사아카데미 실내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강의는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장 김승은 실장님께서 함께해주셨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 재조명"이 주제였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일협정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맺어졌고, 일본은 그 당시 배상을 모두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일협정이 어떤 상황에서, 무슨 내용으로 맺어진 협정인지는 대부분 모르고 있습니다. 이번 근현대사아카데미 강의에서는 한일협정에 대해 쉽게, 자세히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강의였을지 궁금하시죠?
우선 한일협정이란 무엇일까요? 한일협정은 한국과 일본의 국교를 정상화하는 협정입니다.
20여년동안 국교를 정상화하지 않고 있었다가 한일협정때부터 국교가 정상화되었습니다. 실제로 한일협정을 맺기위해 1952년 한일회담을 했고 협정을 맺기까지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일협정하면 많이 이야기하는것이 일본에서 주장하는 '배상금'인데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차관 3억달러였지만 실제로 '돈'을 받은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상 3억달러의 경우 이에 해당하는 생산품, 시설, 기자재 등을 받았고 유상과 차관은 배상이라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일본에서는 배상이었다고 말하지만 간접적으로는 "수출"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이에 대해서 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이라는 명목을 달았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세계를 상대로 한일협정때 돈을 다 줬음에도 피해자들이 계속 돈을 달라고 떼쓰고 있다며 이들을 떼쟁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전쟁은 '돈'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고 청일전쟁 배상금 역시 예산의 4년치에 해당할만큼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때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해 대공황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패전국과 승전국 모두 어려운 경제상황을 겪었습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줄 곳이 일본뿐이라 생각했던 미국은 만약 일본 역시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해 어려운 경제상황을 겪을 경우 공산주의가 확대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고 일본의 전쟁 책임과 식민지 지배책임을 강하게 추궁하는 대신 대소반공체제 구축을 위해 일본을 파트너로 삼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일회담을 조속히 마무리짓기 위해 미국이 한일회담 과정에 깊게 관여하여 정치적 타결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한일협정을 위해 나섰던 한국 정부 역시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과거사 청산, 피해자에 대한 사과 및 보상에 대한 부분은 뒷전으로 둔 채 경제발전과 안보에만 집중하여 금액 조정에만 신경썼습니다. 이는 일본이 바라던 바이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만, 조선인을 모집하여 포로감시원으로 활동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패망후 사로잡혀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포로감시원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들어가게 된 사람이 200여명, 사형을 당한 사람도 수십명이었습니다. A급 전범으로 사형을 받은 일본인이 7명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과연 옳은 판결과 형 집행이었을까요?
당시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조선인들은 동진회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그때의 억울함에 대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때그때의 작은 보상을 할뿐 일본은 여전히 그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포로감시원으로 활동했던 사람들, 강제징용되어 끌려갔던 사람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본군 위안부로 처절한 삶을 살았던 여성들, 일본에 있으면서 원폭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까지.
너무나 많은 피해자들이 있었지만 한일협정에서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한일협정은 언뜻 보기에도 우리에게 유리한점이 별로 보이지 않는 협정입니다. 침략에 대한 사과도, 그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게 전해진 사과와 보상도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실제로 한일협정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국민들을 진압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국민들의 목소리를 억눌렀습니다.
피해자들이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할때마다 일본은 한일협정때 다 정리가 됐다라는 입장이었고 그러다보니 한일협정 내용을 알기 위해 정보 공개 소송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한일협정 정보가 공개되었고, 일본에서도 정보 공개 소송이 진행되어 내용이 공개됐습니다. 우리나라가 가진 정보에는 간략한 내용들만이 담겨있었지만 실제 일본에서 공개된 정보는 그 양도 엄청났고 세세한 이야기들까지 다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지에서 원본을 볼 수 있으니 직접 보셔도 좋을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일본이 근대 산업시설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되었던 하지마 지역 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 한단 소식이 자꾸 들려옵니다. 그 중 한곳은 요시다 쇼인의 개인 서당인데 이곳이 대체 산업화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걸까요? 요시대 쇼인은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 등을 주창하며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이토 히로부미 등 이 서당 출신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봤을때 일본의 산업화는 침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전쟁에 대한 반성이 보이지 않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에게 진실된 사과 역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일협정에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는 일본, 산업화라는 말로 침략을 대신하려는 일본. 그리고 그런 일본에게 제대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지 못하는 한국까지.
이러한 일들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우리 세대가 성숙해야 과거 청산 역시 가능합니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이를 세계인과 공유해야 합니다.
이 강의를 들으며 한일간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사 마찰의 시발점이 된 1965년 6월에 체결된 한일협정에 대해 다시 배우고,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쉽지 않은 내용인 한일협정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신 김승은 실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7월 근현대사 아카데미 실내강의는 "남북관계의 현실과 대안"이라는 주제로 코리아연구원 김창수 원장님과 함께했습니다.
"통일"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마음이 생기시나요? 지금 통일이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이번 시간을 통해 수강생들의 가슴을 뛰게 해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강의는 시작되었습니다.
본격적인 강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통일은 왜 필요할까요? 통일이 필요한 이유는 다섯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신성장동력 창출을 위해, 전쟁 위협 제거와 평화 정착을 위해,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과 북한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이전에는 과반수가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지만 지금은 많이 줄었고, '전쟁 위협 제거'와 같은 응답이 늘었습니다.
사실 현재는 통일 운동이 많이 어려운 사정입니다. 정치적으로 남북관계는 멈춘지 오래되었고, 남북 화해와 협력를 위한 민간교류도 거의 없습니다.
군부독재는 공안정국을 만들어 유지되었고, 반공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를 지배했기때문에
"통일"은 거의 금기시되었습니다.
통일 운동은 4.19혁명 이후 그리고 6월 항쟁 이후 민주화된 공간이 만들어지고나서야 활발해졌습니다.
지금을 어떤 모습일까요? 김대중, 노무현 시절의 두차례 남북정상회담 이후,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 화해협력의 상징이었던 금강산과 개성 관광은 닫혔고, 개성공단은 멈췄습니다. 지금도 남북한의 정치적 협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사회는 '종북몰이'가 유행이 되었고, 이해할 수 없는 북한의 행태는 상식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로인해 북한에 대한 피로감이 높아졌고, 통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니, "통일"에 대한 공감대는 더욱 멀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통일담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말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한국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서, 북한을 통해 중국, 러시아와 대륙으로 연결되면 새로운 성장동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측면으로 본다면 이는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통일은 과정이기 때문에, 준비와 실행이 필요합니다.
우선 북한과의 관계가 개선되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은 안보와 경제, 즉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져야 안보와 경제 사이에서 눈치를 보지 않고, 동아시아 질서 재편에 우리가 주도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중국을 만들기 위해 2013년 중국 시진핑 주석이 발표한 일대일로 구상처럼, 한국판 일대일로 구상이 필요합니다. 환황해권, 환동해권을 형성해 남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연결하는 아시아 물류, 에너지 공동체를 이룰 것을 제안합니다. 북한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로 가는 철도가 연결되면 물류비용이 절감되고, 러시아의 천연가스가 북한을 통해 들어온다면 에너지 비용을 크게 절약할 수 있습니다.
북한을 통해 대륙과 연결된다면 일제강점기 손기정, 나혜석이 그랬듯, 기차를 타고 유럽에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기차를 타고 유럽에 간다면, 그들의 상상력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화려가 수사를 가득담은 비전은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결국 그것을 어떻게 만들고 실현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지금 정부는 단지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남북을 빌미로 동북아시아에서 표출되는 현재 상황에서,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에서 벗어나, 유라시아, 동아시아라는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동아시아 경제 공동체를 이룬다는, 경제를 통한 공감대와 협력을 모으고, 거기에서 반전과 평화의 가치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얼마전 전경련은 남북경제교류 신5대 원칙을 발표했습니다. 중국의 주요 2개국(G2) 부상, 북·중·러 접경지역 개발, 북한의 시장화 흐름 등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남북 경제협력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인 것입니다.
남북경제협력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높아진다면, 남북간의 불필요한 군사적.정치적 긴장을 낮추고 반전평화의 환경을 만드는 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반도 평화가 이루어진다면, 2045년 광복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이 세계 5강 국가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권에 관계없이 지속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토론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 꿈과 비전을 가지고 문제점 또한 비판할 수 있는 열린 논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열린 토론이 풍성해질때, 통일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펼쳐질때, 사람들과 통일을 이야기하면 "다시" 가슴이 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김창수 원장님의 강의를 통해,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좀더 넓은 범위에서 한반도를 바라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한 언젠가 기차를 타고 육로를 따라 유럽 여행을 가게 될 날을 상상해보게 됩니다.
열정적으로 강의해주신 김창수 원장님과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8월 근현대사 아카데미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안전한 사회를 위한 재발방지 대책이 마련되기를 기원하는 봄순성을 하려고 합니다. 예부터 한양도성을 하루에 한바퀴를 돌면서 소원을 기원하였다고 합니다.
4월 16일 하루동안 만이라도, 한가지 소원을 기원하는 간절함으로 세월호 진실을 향해 한걸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6년 4월 16일 토요일 세월호 진실을 향한 걸음! 서울KYC 봄순성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가족, 친구, 동료 등 함께하고픈 사람들과 참여해세요~ - 봄순성일정 : 2016년 4월 16일 토요일 08:00 - 모이는장소 : 숭례문 수선전도 광장(서울역 4번출구 직진 3분) - 준 비 물 : 물, 점심, 간식, 신분증(필히 지참) (순성완주 후 세월호 2주기 추모문화제에 참가할 예정입니다.)
- 진행 일정 08:00 숭례문 앞 집결. 참가자 인사, 일정 안내 08:20 ~09:30 숭례문 ~ 인왕산 입구 09:30 ~10:30 인왕산 ~ 창의문 쉼터 10:30 ~12:30 창의문 쉼터 ~ 숙정문 ~ 와룡공원(점심식사) 12:30 ~13:30 와룡공원 ~ 낙산정상 13:30 ~15:30 낙산정상 ~ 광희문 ~ 국립국장 15:30 ~17:30 국립극장 ~목멱산(남산) ~ 숭례문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중간에 합류하는 참가자들은 참고 하세요.
*준비물 : 생수, 간식과 도시락, 신분증(백악구간 출입시 반드시 필요), 손수건 등 기타 문의사항 : 사무국 02.2273.2276
2011년 한양경성서울 600년 역사도시를 걷는다 2012년 100년, 남산의 역사를 걷는다 2013년 낙산. 그리고 동대문의 기억 2014년 백악아래 펼쳐진 600년 수도 서울의 중심 그리고 2015년 역사도시 서울, 그리고 서촌의 근대적 변화 2011년부터 시작된 서울KYC 역사도시 걷기 시민강좌가 올해 5회째를 맞이했습니다.
한양도성 안을 걸으며, 역사도시 "서울"을 이해하는 강의와 답사로 시작해서 매년 한양도성의 남쪽, 동쪽, 북쪽을 거쳐 2015년 올해는 한양도성의 서쪽 안팎을 주제로 했습니다.
3번의 실내강의와 3번의 현장답사! 최근 "핫플레이스"가 된 상촌-웃대-서촌-세종마을에 대한 관심 때문일까요? 작은 교육장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회원들과 시민들이 신청해주셨습니다.
현대에 와서 "서촌"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누가 살았고, 어떤 역사가 있는지 전우용 선생님이 첫강의를 열어주셨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서촌"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과거의 서촌과 다르고, 정확한 위치와 명칭은 아니라고 합니다.
[참고] 북산 밑을 북촌, 남산 밑을 남촌, 낙산 근처를 동촌, 서소문 내외를 서촌, 장교, 수표교 어름을 중촌, 광통교 이상을 우대, 효교동 이하를 아래대, 강변을 오강, 성밖 사면 십리 이하를 내자(字內라 함은 서울 성벽에 천지현황의 순으로 어느 점으로부터 어느 점까지의 간은 천자구역 혹은 지자구역이라 하여 그 문자와 문자의 간을 각 군영에서 분담 수비한 고이다)라 하여 동서남북의 네 촌(통칭 왈 四山밑)에는 양반이 살되 북촌에는 문반, 남촌에는 무반이 살았으며, … 西村에는 西人이 살았으며 그 후 서인이 다시 노론 소론으로 나뉘고, 동인이 다시 남인 북인 또 대북 소북으로 나뉨에 미쳐는 서촌은 소론, 북촌은 노론, 남촌은 남인이 살았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실은 소론까지 잡거하되 주로 무반이 살았으며 그리고 동촌에는 小北, 중촌에는 중인, 우대는 육조 이하의 각사에 소속한 吏輩 庫直 족속이 살되 특히 茶洞, 相思洞 등지에 商賈(통칭 시정배)가 살았고 아래대는 각종의 軍屬(장교 집사등류)이 살았으며 특히 궁가를 중심으로 하여 경복궁 서편 누하동 근처는 소위 대전별감(궁가의 隸屬)파들이 살고 창덕궁 동편의 원남동 연지동 근처는 武監 족속이 살았으며 동소문안 성균관 근처는 館人(속칭 관사람)이 살고 왕십리에는 軍銃(兵村)들이 살고 오강변에는 船人商賈들이 많이 살았는데 속칭 강대사람이라 함은 강변에 사는 사람을 지칭함이었다. (이중화, ‘京城 町洞名의 由來及今昔의 比較’ “別乾坤” 4-6, 1929.10)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를 통해 인왕산아래 명소를 둘러보는 두번째 강의 "윤진영"선생님 중인들이 중심이 되어 시사를 조직하고, 공동시집을 발간하며 "중인문학"을 꽃피우던 지역 조선의 기후에 맞게, 바위산과 소나무가 멋졌던 인왕 인왕산과 그 주변 지역을 멋진 그림으로 남겼던 겸재정선의 많은 작품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따라가보는 재미있는 시간도 이어졌습니다. 수송동 계곡은 겸재정선이 남긴 그림을 기초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옛모습을 통해, 새것을 만들어가며 과거와 현재가 만나 원형이 복원된 멋진곳이네요.
일제강점기, 해방과 전쟁을 지나 도시 "서울"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경복궁 서쪽 지역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살펴보는 강의 "안창모 선생님" 총독부가 경복궁에 자리잡으며, 서쪽은 동척 관사를 비롯해 제법 규모있는 관사가 들어옵니다. 지금도 그 형태가 많이 남아있다고 하네요. 경무대가 청와대에 들어서면서, 북악과 인왕 아래지역은 도시 개발이 지체되고 단절도 생깁니다.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주변 지역의 분위기도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런 이유로 상대적으로 북촌에 비해 오래된 골목길이 그대로 남아있게 된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되며, 이 지역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있는데. 어떻게 될까요??
현장답사도 세번 이뤄졌습니다. 그 첫번째는, 안창모선생님과 함께 대한제국의 꿈을 꾸었고 근대 이후 정치외교의 중심지였던 정동일대를 둘러봤습니다. 대한문에서 시작해서, 성공회대성당, 서울시청서소문별관 전망대, 정동,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그리고 사직동에서 마무리 했습니다. 경운궁과 대한문이 대한제국의 중심으로, 어떻게 새로운 도심으로 성장하게 되었는지 살피고 경운궁에 외국공사관이 들어서며, 맞이한 변화들. 학교, 병원, 교회 등 근대의 모습을 어떻게 지켜고 보존할 것인가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두번째 답사는 돈의문 밖, 물길(만초천)을 따라걷는 답사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선생님과 함께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를 시작으로 독립문공원, 영천시장, 서지西池 터, 경기감영터(적십자병원)를 지나 만초천 위에 지어 구부러진 서소문아파트, 서소문공원까지 갔습니다. 조선후기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이 지역의 변화가 많았다고 합니다. 최초의 일본 공사관이 있던 지역이고, 근대적 시설도 많이 들어섭니다. 사대외교의 상징 영은문을 헐고 자주독립의 의미로 만들어진 독립문 일본에 의해 교묘하게 이용당한 '독립'의 진정한 의미와는 좀 멀기도 했습니다. 경인철도와 종로선 전차의 두선로가 교차하던 지점이라 호텔등도 생겨나고 번성했던 이곳. 만초천이 복개되면서 많은 도시의 변화들이 생겨나고 이젠 그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물길 위에 지어져 휘어진 모습으로 남아있는 서소문아파트가 옛지형을 상상하게 합니다.
세번째 답사는, 경복궁 서쪽의 큰 물길인 백운동천과 옥인동천 물길따라 걷는 답사입니다.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시작하면서, 내사산을 중심으로 경복궁과 종묘,사직, 육조, 종로와 운종가! 600년 계획도시 "한성"의 도시 구조를 이해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치만, 경복궁으로 흘러들어가는 대은암천 길을 따라 동척 관사 지역이었던 통의동으로 들어갑니다. 이 지역은 비교적 오래된 건물과 골목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물길이 복개되면서, 도로가 생기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길이 또 넓어지고 골목이 나뉘어지고 하는 등, 지형적 변화도 그대로 느껴볼 수 있는 지역입니다. 옥인동은 오전인데도, 찾아오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칩니다. 서울 도심에서, 오래된 과거의 풍경을 간직하며 시간의 층위들이 쌓여가고있는 지역. 또하나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오래된 풍경과 함께 그 풍경을 만들고, 지속시켜온 시간과 역사, 사람들의 이야기도 제대로 기억해서, 역사도시 서울의 또하나의 상징으로 남는 지역이 되길 바래봅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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