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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은 악질 친일경찰 계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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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은 악질 친일경찰 계난수

익명 (미확인) | 금, 2018/04/20- 14:17

열전친일파 19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에 다룰 친일파는 통감부 시절부터 일본군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했고, 병합 후 헌병보조원으로 줄곧 있다가 3・1운동 이후 순사와 경부보를 거쳐 경부로 진급했고, 독립군 사이에서 평안북도의 ‘일등 창귀’(倀鬼 : 호랑이에 먹혀 죽은 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친 계난수이다. 1930년에는 참의부의 맹장 이응서를 체포한 공적에 힘입어 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 이 훈장을 받은 조선인 경찰은 일제 치하 36년간 혜산 보천보전투 때 귀환하는 김일성의 항일부대를 추격하고 국내 동조자를 색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최령(崔鈴. 해방 후 최연崔燕으로 개명)과 의열단 폭탄반입사건 관련자를 체포한 김덕기(金悳基) 등 10여 명뿐이다.
이러한 공적에 비해 계난수의 개인사에 대한 자료를 매우 드물고 1941년 이후의 행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신문기사와 일제 문서를 근거로 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망라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한 그의 활약상(?)을 추적한다. 또한 만주로 건너간 이후 간도성 사무관 시절의 행적과 1940년경 동북항일연군 체포・귀순 공작 활동을 당시 시대상황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헌병보조원에서 경부가 되기까지 17년 걸려

계난수는 1890년 8월 1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1906년 강계군 사립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했다. 1908년 7월 일본군 조선주차군 의주헌병대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1919년 3・1운동 직후까지 12년간 헌병보조원으로 일했다.
헌병보조원제도는 의병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1908년 6월 11일 한국칙령 제31호 「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에 의거해 실시되었다. “폭도의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헌병보조원을 모집하여, 한국주차일본헌병대에 의탁하고, 그 복무에 대해서는 헌병대장의 지휘를 받는다.”(제1조)라는 조문에서 헌병보조원의 성격과 역할이 여실히 드러난다. 헌병보조원은 만 20∼45세의 조선인 한글 해독자 중에서 모집되었으며, 군속의 신분을 보유하고 ‘폭도의 진압과 안녕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헌병의 업무를 보좌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 시기 모집 정원은 4천여 명인데, 1908년 7월 1일부터 9월에 걸쳐 채용이 완료되었다. 헌병보조원은 전원 주차헌병대가 관장하며, 1개월 이내의 견습기간을 마친 후 헌병 1인당 2∼3명씩 배치되었다. 대우는 본봉·출장여비와 일어 해득자에 대한 통역수당이며, 순사 봉급과 같은 수준이었다.
계난수는 병합 전후로 의주헌병대 헌병보조원으로 있었다. 그로 인해 1912년 8월 1일 칙령 제56호에 의해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이후 1912년에서 1919년 사이 강계헌병분견대가 설치되자 고향인 강계로 전근한 것으로 판단된다. 1919년 5월 강계헌병분견대에서 헌병보조원으로서 3·1운동과 관련해 증인 이정화(李晶和)에 대해 취조할 때 통사(통역)로 참여해 신문을 도왔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헌병보조원으로서 계난수의 구체적인 활약상은 나타나지 않으나, 강계 3・1운동에 관한 기록(“4월 8일 역사적인 새 아침은 밝았다. 거사준비에 착수한 지 2주일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읍내 헌병분견대의 주구로 악명 높던 계난수의 무리조차 오늘 거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독립운동사 제2권 : 삼일운동사』 1971, 484쪽) 에서 계난수가 강경읍 헌병분견대 주구로서 악명을 떨쳤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의 여파로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뀌고 그에 따라 기존의 헌병경찰제도도 보통경찰제도로 변화했다. 1919년 8월 조선총독부관제가 개정되어 ‘총독무관전임제’가 폐지되고, 총독의 육해군 통솔권한을 없애는 등 총독의 군사적 색채를 약화시켰으며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헌병보조원제도도 폐지되었다. 일제는 1920년대에 경찰력 감소를 이유로 일반경찰관을 대규모로 확충하였고, 헌병 및 헌병보조원 출신자 다수가 경찰관으로 전직하였는데 순사로 전직한 조선인 헌병보조원 출신자는 4천여 명에 이른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인의 순사 지원자는 항상 채용인원에 비해 7~8배에 달했다. 그 이유로 순사가 조선인이 취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관직 중 하나이고 제1차세계대전 후의 불황으로 생활난이 심각해진 점을 들 수 있다.
계난수는 1919년 8월 20일 조선총독부령 제134호에 의한 관제개정으로 총독부 도순사로 임명되었으며, 평안북도 강계경찰서 순사로 발령받았다. 1920년 11월 강계경찰서 순사부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계난수는 국내외에서 밀정을 활용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추적, 검거하였고, 독립군과 교전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 강계경찰서 순사부장으로서 평북경찰부의 지휘하에 만주 안동현(安東縣)으로 파견나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였다. 즉 1922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원이면서 안동현 소재 이륭양행(怡隆洋行) 고원으로 안동현 우편국에 수신함을 설치해 독립군들 사이의 연락을 중계하던 김문규(金文奎)를 체포했다. 1923년 10월. 평안북도 강계군 종서면에서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벌이던 김기현(金基鉉)이 종서면주재소를 습격하려 한다는 첩보를 탐지하고, 김기현을 체포하기 위해 종서면에 출동하였다가 김기현이 만주로 피신하자 주민 전창엽(田昌燁)·김기흡(金錡洽)·조상국(趙尙國) 등 10여 명을 체포하여 고문을 자행했다. 1924년 8월에는 참의부 소대장 장창헌(張昌憲) 및 독립군 2명을 유인해 일본경찰에 살해되도록 만든 밀정 홍인화(洪仁化)를 보복 살해한 참의부 부원 최윤흥(崔允興)을 밀정 박희빈(朴熙彬)의 밀고를 받고 검거했다. 1925년 6월에는 참의부 소속 독립군 이의준(李義俊), 김봉흥(金奉興), 전창식(田昌植) 등의 부하 20여 명과 강계군에서 전투를 벌였다.
1923년에 당해년도 도경부보시험에 응시해 합격되어 『조선총독부관보』 1924년 3월 13일자에 이름이 올랐다. 1925년 강계경찰서 경부보를 지낼 때 월봉 44원을 받았다. 1926년 12월 강계경찰서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했으며 1927년 11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로 전근했다.

 

참의부 맹장 이응서를 체포한 공로로 경찰관리 공로기장 받아

계난수가 평북경찰부로 전근할 무렵 그곳 고등경찰과장은 독립운동가 체포로 명성(?)이 자자한 김덕기였다. 김덕기는 영화 〈밀정〉의 모티브가 된 ‘황옥경부사건’을 탐지하여 의열단의 2차 국내폭파작전을 막았고, 정의부 총사령관 오동진을 함정에 빠뜨려 체포한 자다. 평북경찰부에서 계난수는 직속상관인 김덕기의 지휘를 받아 독립운동가 검거에 맹활약을 펼친다.
1929년 4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한 고려혁명군 중앙위원장 최승호(崔承皞)와 일행 3명을 체포했다. 최승호 일행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왔다가 여관에서 계난수가 이끄는 형사대에 의해 피체된 것이다. 최승호와 박화용은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예비, 총포화약취체령 위반으로 신의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어 각각 징역 10년과 3년을 언도받았다.

07

경찰관리공로기장 수여식. 『매일신보』1930.9.19.

 

그해 5월 일찍이 사이토 총독이 국경시찰시 저격을 시도했고 참의부의 맹장으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200여 차례나 벌인 독립군의 거두 이응서(李應瑞)를 신의주에서 직접 체포했다. 그 공로로 계난수는 1930년 8월 4일 명치 43년 칙령 제438호에 의거해 칙정(勅定)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 경찰관리 공로기장은, 군인에게 천황이 직접 수여하는 금치훈장(金鵄勳章)에 비견될 정도로 권위 있는 상이다. 같은해 9월 17일 평북도청에서 열린 수여식에서 이시가와(石川) 평안북도지사에게서 공로기장을 전달받았다.(『매일신보』 1930.9.19. (3면) 「桂警部에 勅定 功勞章 授與式 擧行」) 이응서와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진행중이던 이응서가 1931년 2월 김덕기 고등경찰과장과 계난수 형사에 대해 불법감금과 절도, 폭행으로 고소를 제기했다. 신의주에서 체포된 다음 신의주경찰서에서 불법 감금과 고문・폭행을 당했고 자신이 갖고 있던 가방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이 이응서의 고소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김덕기 측도 이 문제를 일소에 부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08

 

1929년 12월경 계난수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7급)이면서 동시에 신의주경찰서 경부를 맡고 있었다. 1930년경 신의주경찰서의 발표에 따르면, 독립군이 국경을 침입할 때 경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된 자는 1년 내에 4천여 명이나 되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건수도 1백여 건에 이른다고 했다.
1931년 평안북도경찰부 재직중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그해 9월부터 1934년 3월까지 종군해 국경 대안경비를 비롯해 군대 및 군수품 수송, 민심사찰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1931년 9월에는 중국 안동현 등지에서 중국 관헌들에 대한 정보수집업무를 맡았고 10월에는 중국민에 대한 동향을 사찰했다. 1931년 12월 중국 군벌인 장학량(張學良)이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압록강 철교 부근에 대한 사찰 및 경계업무에 종사했다.
1932년 5월에는 오성륜(吳成崙)의 부하 김혁산(金革山), 임호(林虎) 등이 일본 관공리 암살과 관공서 폭파를 기도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밀정 이흥하(李興夏)를 시켜 정보를 수집했다. 이어 같은 달 신의주고등보통학교 학생격문살포사건 주모자인 이종림(李宗林), 박병상(朴炳商) 등을 체포하기 위해 김덕기(金悳基) 지휘하에 형사대를 이끌고 경성으로 출장, 수색활동을 벌였다.
같은 달 유석화(劉錫華) 순사부장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사건을 수사하고 혐의자를 체포했다. 계난수는, 김명시(金命時)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던 오빠 김형선(金炯善)을 도와 인천에서 기관지 〈꼼무니스트〉를 배포하며 노동운동을 하다가 조직이 탄로나자 중국으로 돌아가기위해 신의주에 왔다가 근우회 전 지부장 박은형의 집에 머물러 있던 것을 탐지하고 현장에서 그를 체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의 주요 인사 조봉암, 홍남표, 김찬, 김명시 등 16명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당시 평북경찰부 경부였던 스에나가 하루노리(末永淸憲)는 『조선사상범검거 실화집』에서 김명시의 체포과정을 상세히 다루었다. 또한 계난수는 같은 해 6월에는 중국상해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독립군들이 만주사변을 계기로 국내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안동현에 잠입해 상해교민단 단원 이계상(李啓尙)을 체포했다.
이후에도 계난수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로 계속 재직하며 고등경찰로 활약했다. 1932년 12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 관등 6급이었다. 1934년 3월 1일 만주국 황제가 수여하는 만주국 건국공로장, 1934년 4월 29일 만주사변 때 활약한 공로로 훈8등 서보장을 받았고, 같은 날짜에 ‘소화6년내지9년사변’에 대한 공로로 종군기장을 받았다. 1934년 11월 평안북도 도경부를 그만두고 만주로 건너갔다.

 

09

대만주국 건국공로훈장(1934)과 소화6년내지9년사변 종군기장(1934),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간도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 토벌•귀순공작을 벌이다

계난수는 1934년 12월 만주국 간도성공서(間島省公署) 경무청 특무과 사무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계난수와 함께 간도성으로 전근한 조선인 관리로는 전라북도 내무부 산업과장이었던 유홍순(민정청 실업과장),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윤태동(교육청 학무과장), 만주국 문교부 속관에서 시학관으로 승진한 김춘학(교육청 시학관) 등이 있었다. 이들은 만주국의 요청에 의해 조선총독부의 선발을 거쳐 조선인이 성 전체 인구의 60%(약 50만 명, 1934년 현재)를 차지하는 간도성 고위 관리로 영전해 온 것이다. 경무청 특무과는 주로 반만항일의 운동가들을 색출하고 신문하는 부서였다. 1937년 4월까지 경무청 특무관 사무관으로서 재직하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막론하여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는 임무를 담당했으리라 짐작된다. 1937년 4월 10일 경무청 특무과 사무관을 사직했다. 이후 일제시대 기록에서는 계난수가 종적을 감추었다가 해방 후 반민특위 관련문서 중 친일파 김창영 재판자료에서 다시 등장한다.

 

오호!! 밀림에 방황하는 제군!!
이 권고문을 보고 즉시 최후의 단안을 내려 갱생의 길로 뛰여 나오라!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고 참회할 것도 참회하고 이제까지의 군등(君等)의 세계에 유례없는 불안정한 생활에서 즉각으로 탈리(脫離)하야 동포애의 따뜻한 온정 속으로 돌아오라. 그리하야 군등의 무용과 의기를 신동아건설의 성업으로 전환 봉사하라! 때는 늦지 않다! 지금 곧 아(我) 150만 동포의 최후의 호소에 응하라. 최선을 다하야 제군을 평화로운 생활로 인도할 본위원회의 만반 준비가 제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金日成 等 反國家者에게 勸告文, 在滿同胞 百五十萬의 總意로」, 『삼천리』 제13권 1호(1941.1)

 

이 권고문은 1940년 12월경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본부가 길림・간도・통화성에서 항일무장활동을 벌이던 김일성 유격대 등 동북항일연군을 투항・귀순시키기 위해 비행기로 살포한 권고문이다.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길림・간도・통화성의 동북항일연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동남부치안숙정공작(東南部治安肅正工作)’을 실시하면서 이 지역에 일본군과 만주국군 6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고자 했다. 이때 위의 병력뿐만 아니라 일반 경찰, 특무기관, 지방행정기구, 협화회까지 총동원하여 사상・문화 토벌도 동시에 전개하였다. 이에 이범익 만주국 참의의 발의로 조선인 후원조직이 만주국 수도인 신경에 설립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다. 만주에서 발행된, 한글 어용신문인 만선일보는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뉴스’라는 난을 마련하여 조선인들의 후원금 내역과 후원회의 원호활동을 매일같이 보도하였다. 이때 김창영은 만주국 치안부 경무사 이사관 겸 통화성 경무청 이사관으로서(1939.5~1943.4)으로서 조선인 동북항일연군의 토벌과 귀순공작을 진두지휘하였다.

 

단기 4275년[1942년] 10월부터 6개월간은 안광훈(安光勳) 유홍순(劉鴻洵) 김송렬(金松烈) 계난수 등 외 일만 군경과 더불어 동만지구 일대의 숙청공작을 추진 협력하여 김일성 부대 임수산(林守山) 외 30여 명, 양정우(楊靖宇) 군사령부 총무부장 오성륜(吳成崙) 외 10여 명, 동 군사령부 경위여장(警衛旅長) 박득범(朴得範) 외 6명, 동 사령부 소속단장 김백산(金白山), 김일성 부대 정치주임 김재범(金在範) 외 6명 등 수백여 명의 항일조선군을 체포 숙청케 하였고(후략)(「김창영 의견서(1949.5.5.)」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김창영의 진술이 사실에 부합하는 점이 많지만 “4275년(1942) 10월부터”이라는 시점 부분은 ‘1940년 10월’의 오류로 판단된다. “1940년 10월부터 ‘추동계대토벌’이 시작되면서 군사토벌은 제3단계(1940.10~1941.3)에 들어서게 된다.(중략) 1942년 3월 19일 토벌사령부 및 각 토벌대의 해산명령이 내려져 소위 ‘野副大討伐’은 막을 내렸다”(윤휘탁, 『일제하 만주국연구』, 1996, 161쪽)에서 보듯이 1941년 3월경 제3단계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끝나기 때문이다. 또 김창영의 진술대로라면 박득범의 귀순시기가 1942년~1943년 사이지만, 1940년 10월 연길 野副토벌대사령부에서 발행한 「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에 따르면 1940년 6월 귀순하고, 10월에는 野副 토벌대장과 선전용 기념사진을 찍는다. 또한 양정우 1940년 2월 총살되어 효수, 조아범 1940년 12월 총살, 위증민 1941년 3월 병사 등 각종 기록에 비추어 김창영의 기억에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다.)

 

10

1940년 10월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은 일본군 토벌대를 방문하고 일본 천황과 만주국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野副토벌대사령부에서 건립한 충혼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 가운데줄 왼쪽부터 김재범, 박득범, 김백산. 출처 「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 1940.10.19)

 

 

김창영은 1949년 5월 반민특위 조사에서 동북항일연군들을 토벌・귀순시킨 자신의 공적을 위와 같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그의 말처럼 일제의 ‘동남부치안숙정공작’으로 인해 오성륜・박득범・김재범 등 1천여 명의 동북항일연군들이 투항・귀순하고, 양정우・조아범・허형식 등 주요 지휘관들이 사살되어 길림・간도・통화성의 동북항일연군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한창 진행되던 1940년~1941년 사이, 계난수는 “귀순공작에 있어서 간도성 공작반 총지휘자는 조선인 유홍순이었고, 같은 성 연길현 공작반장은 조선인 김송렬, 같은 성내 왕청현 공작반장은 조선인 계난수(전 간도성 사무관)였다”(「김창영 피의자신문조서(제3회)(1949.4.20.)」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에서 보듯이 간도성 왕청현 공작반장으로서 제1로군사령부 경위여장 박득범 등 7명을 귀순시키는 등 치안숙정공작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1년 이후와 해방 후 계난수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진주로 만주국이 멸망했다. 이때 만주국에 있던 많은 친일파들이 인민재판으로 처형되거나 소련의 유배지로 끌려갔다. 계난수가 이 경우에 해당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후 계난수는 역사의 법정으로 호출되어 냉엄한 심판을 받는다.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친일행적이 수록되었다. 같은해 11월 30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의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에게 내려진 죄목은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한 행위”(특별법 제2조 제3호),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저해한 행위”(제5호), “일제의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탄압하는데 적극 앞장선 행위”(제16호),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협력해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행위”(제19호)이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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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김구가 강도살해한 일본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군 장교가 아닌 일본의 일반 약을 파는 상인으로 알려져 왔다.

김구도 이미 재판 과정에서 이 사실을 어느정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범일지에 민비를 죽인 일본군 장교로 거짓미화하여 조센진들을 속이고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하여 말도 안되는 것으로 조센진들을 우롱했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문제는 아직도 백범일지를 출판하는 출판사들은 이 사실을 어느정도 알고 있음에도 아직도 그거에 대해 안고쳐먹고 조센진들을 우롱하고 있다는 게다.

이는 당연 죽은 무고한 일본인 약상인에 대한 사자명예훼손을 저지른 김구에 대하여 출판사들이 묵인 방조한다고 보는게 맞는 것인게다.

당시 죽은 일본인 약상인의 후손들이 출판사를 상대로 “출판물에 의한 사자명예훼손 방조와 부작위”로 형사고소 및 민사소송은 당연한게다.

 

일, 2019/02/0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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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디자인연구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3.1운동의 주역들과 공간,

그리고 그 영향과 기억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민족대표 33인과 유관순 중심의 기억을

 

더욱 풍부하게 넓혀보고자 합니다.

 

세계 곳곳의 식민지들에서 벌어진 반식민 평화운동,

그리고 통일 한반도를 염두에 두고 북한의 시각에서 3.1운동을 되돌아봅니다.

한편, 3.1운동의 정신이 중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현장에서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그 열악한 현장과 치열했던 고민을 되돌아 봅니다.

나아가 지금 우리는 어떤 미래 100년을 향한 기억의 초석을 다져야 할지 고민해 봅니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의 링크를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rchd2018/221453853369

일, 2019/02/0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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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6,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26주년 되는 날의 소회 (2)
– 민족문제연구소 비리 관련자들과 맹목적 옹호자들, 정녕 임종국 선생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내가 제명된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런데 이사회의 제명 결정서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결정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정관에 의거 이사회에 주어진 권한에 따라 참석 이사 전원의 찬성으로 회원 여인철을 제명 처분한다. (51차 이사회는 이사 8인 중 이사 강만길을 제외한 7인이 참석하였으며, 여인철씨의 제척사유 주장에 따라 이사 임헌영과 조세열은 의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죄목(?)으로 제명당한 것인지가 나와있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할때 “정관 몇조 몇항에 의거, 무슨 죄목으로 제명함” 정도는 기본적으로 결정서에 담겨야할 것 같은데 그저 “정관에 의거”,  “이사회에 주어진 권한에 따라” 제명처분했단다.

제명의 이유는 당사자인 내가 추측하기에는, 아마도 내가 총회 때 정관개정을 통해 회원의 대표기구인 운영위원회의 기능과 위상을 축소시킴으로써 권한을 강화하려는 집행부의 기도에 반대하며 성명을 발표하고 총회장에 들어가 반대의사를 밝힌 것 등의 일련의 행동에 대한 응징일 것이다.  나를 괘씸죄로 회원에서 제거하면 될 줄 알았을 것이다.

지금 3공, 5공 시대인가? 내가 폭력을 쓴 것도 아니고, 말과 글로 문제제기한다고 제명을 하다니.  더구나 지부장과 운영위원장까지 지내며 20여년을 헌신하며 회원 활동을 한 사람을…

어떤 이사는 내가 “조직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했다 한다.  지난 20여년을 헌신한 사람이 왜 이제 와서 조직에 있어서는 안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작년 5월 11일자로 제명된 후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시민행동(민바행)을 동지들과 만들어 함께 행동해 왔다.  처음엔 운영위원회를 쪼그라뜨리는 정관 개악에 반대하며 시작했지만 지금은 문제의 양상과 심각성이 크게 달라졌다.

민문연과 투쟁하면서 알게 된 것은 민문연의 비리 비행 부정의 폭과 깊이가 생각 외로 넓고 크다는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크게 찍힌 꼴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결국 민바행에서 첫 민원을 낸 작년 7월 초 이후 5개월만인 12월 14일 감독관청인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형사고발보다 한 단계 낮은 처벌인 경고처분과 시정조치를 받았다.  4일간이나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나온 행정처분이며 결코 가볍지 않은 처벌이다.

경고처분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문제는 심각하다.
미승인 정관 사용에 ‘엄중경고’,  ‘기부금 부적정 사용’에 기관경고, 그리고 시정조처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사장을 포함한 이사 전원(5명)과 감사 전원(2명)은 경고처분을 받았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표면적 경고 이유는 미승인 정관 사용(임의로 “운영” 정관을 만들어 사용)이지만, 그 이면의 핵심은  지난 십수년동안 법적 효력이 있다는 “신고 정관”-회원들이 그 존재와 용도를 알지 못한- 을 이용해 “회원 10명”으로 총회를 열어오면서 전국의 1만 3천여 회원들을 속여온 것이다.

그리고 “회원 10명”의 구성원이 ‘이사 5명과 상근자 5명’이라니, 그들이 회원 몰래 총회를 열어 주요 사안을 결정해 왔다는 건 실질적으로 몇몇 상근자들이 운영위원회(회원)의 뜻을 무시하고 저들 마음대로 민족문제연구소를 주물러왔다는 것이다.

그 십수년 동안을 회원과 회원을 대표하는 운영위원회는 있으나마나, 그냥 허울로만 존재한 것이다.  그러니 회원으로서, 회원의 대표격인 운영위원장 으로서 분노가 이는 것이다.

어느 시민단체에서 이런 망나니 사기극을 벌이는가?  그런 속임수를 획책한 핵심 상근자들은, 그리고 그 책임자는 그러고도 그 자리를 지키려 하는가? 그 자리를 지키고 싶은가?

그리고 교육청에서는 “기부금 부적정 운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부적정”하게 “운영” 했다는 것의 의미가 무언지 밝혀져야 한다. 돈을 어떻게 걷어서,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의 회원은 10명”이라며 신고한 집행부의 의사록에 대해 “흠결이 없다”고 한 서울시교육청의 판단대로라면 1년에 십수억원씩 들어오는 기부금품 처리에대해 기부금품법 위반 여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공무원이 불법을 인지했을 때 고발해야한다는 의무를 피해가기 위해 고의로 봐주기 처분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아직 남아 있다.

어쨌든 감독관청으로부터 위와 같은 내막의 행정처분을 받은 것은 우리 민족문제연구소로서는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도대체  민문연 집행부는 전국의 회원과 국민을 속여가며 그동안 무슨 짓을 해온 것인가?

18년만의 일이다.  2000년에 민문연이 서울시 동부교육청으로부터 고발조치 처분을  당했을 때는 이사 전원이 사퇴를 했다.  그래도 그때의 이사진은 양심이나 염치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민바행에서는 지난 1월 12일 성명을 통해 작금의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임헌영 소장과 지난 십수년 동안 “회원 10명”으로 회원들을 우롱해온 조세열 당시 사무총장과 방학진 사무국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다.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민바행 측을  법적 조치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시면서도 친일연구에 몸 바치신 고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세워졌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받들어야 할 그분의 정신은 무엇인가?  바로 친일연구를 하다가 알게 된 아버지의 친일 행적까지도 친일 자료에 남기는 엄정함, 그리고 가난과 질병에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친일연구에 매달린 기개 아닌가?  그(분) 덕에 오늘날의 민족문제연구소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에 그런 엄정함과 기개가 남아있나?  그저 오로지 끼리끼리, 패거리 정신과 기득권 지키기 소유욕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임종국 선생은 또 친일한 인사들이 반성하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개탄했다.  그런데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비리와 부정에 연관되거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을 “음해 세력”이라며 공격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비리 관련자들, 그리고 맹목적 비호자들, 정녕 정신적 사표여야 할 임종국 선생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2019. 1. 16.
회원가입 26년째 되는 날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제명자

목, 2019/02/07-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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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누구를 지지하지 않고 중이 싫으면 절을 나간다고 합니다

아마 여인철씨도 민족 문제 연구소가 싫고 마음과 뜻이 맞지 않아서 나가시고 당신 마음과 뜻을 생각하시면서 새 단체를 세우셨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시고 단체의 정관이나 계획등등 바로 세워서 참 그사람 여인철씨가 이끄는 단체가 마음에 들고 하시는 사업이 옳다고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새로 세운 단체에 가입할것입니다

당신이 이름을 지적하면서 사퇴하라고 하면 그자리에 당신이 그자리가 욕심이 나서 그런것 같습니다

당신이 쓴 글 다읽어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단한줄입니다 부정 불의 등등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라면 법에서 판결할것입니다  누구누구 일하는 분을 사퇴하라고 하면 그자리가 탐나서 그런가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않이라면 다시는 그런글  올리지 마시고 당신이 만든 단체 잘 운영하셔서 참 여인철씨가 훌륭하신 분이구나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단체에 가입 할것입니다 나역시 당신 단체 운영하는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면 협조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뚜렷한 계획없이 무조건 과거 몸담았던 단체와 임원들 성명 운운하면서 사퇴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당신네가 만든 단체가 날마다 발전하여 민중의 마음의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정희기념관건립반대 전 미주공동대표 이덕문

 

 

 

 

목, 2019/02/0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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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日帝治下朝鮮僧徒

 

邦亡奚削髮(방망해삭발)

利敵後人嘆(이적후인탄)

詰問望成佛(힐문망성불)

狂歌百尺竿(광가백척간)

 

일본 제국 治下의 朝鮮 중들에게 묻는다

 

나라 망했는데 어찌 중이 되었는가

敵 이롭게 했으니 훗사람 탄식한다

따져 묻겠노니 부처 되길 바랐는가

百尺竿頭 올라 미친 노래 불렀구나.

 

<時調로 改譯>

 

어찌 중이 됐는가 利敵行爲 탄식한다

따져서 묻겠노니 부처 되길 바랐는가

높다란 장대에 올라 狂歌를 불렀구나.

 

*僧徒:  수행하는  승려의  무리.  치도(緇徒)ㆍ치려(緇侶)ㆍ치류(緇流)  *削髮:  출가

(出家)하여  승려가  됨을 이르는  말 *利敵: 적을 이롭게 함 *後人: 훗사람 *詰問:

트집을 잡아 따져 물음 *狂歌: 곡조나 가사와 상관없이 마구 소리쳐 부르는 노래.

 

<2019.2.8, 이우식 지음>

금, 2019/02/08-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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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聞某國會議員美國半裸公演觀覽

 

辨覈非全裸(변핵비전라)

愚民忽解頤(우민홀해이)

貴公高位職(귀공고위직)

何故覓佳姬(하고멱가희)

 

어떤 국회 의원이 미국에서 반나체 공연을 관람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알몸 아니었다며 옳고 그름 밝히니

못난 백성 문득 입 딱 벌린 채 웃소

貴公은 높은 지위의 관직에 있는데

무슨 연유로 예쁜 아가씨 찾았는고.

 

<時調로 改譯>

 

알몸은 아니라 하니 어리석은 백성 웃소

貴公은 높은 지위의 관직에 있는 분인데

어떠한 연유로 인해 예쁜 여자 찾았는고.

 

*傳聞: 다른  사람을  통하여  전해  들음.  또는 그런 말 *半裸: 반나체 *辨覈: 옳고

그름을 가려 밝힘 *全裸: 알몸 *愚民: 어리석은 백성 *解頤: 턱을 푼다는 뜻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음을 이르는 *何故: 무슨 까닭 *佳姬: 젊고 아리따운 여자.

 

<2019.2.9, 이우식 지음>

토, 2019/02/09-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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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김환기화백의 전시회를 다녀왔는데 이력을 보니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친일행위를 하지는 않았는지 궁금해져서 검색해보니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좀더확실히 알고싶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잘 알것이라 생각해서 문의 드립니다.

김환기 화백은 친일파 또는 행위를 했었나요?

월, 2019/02/1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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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허위사실 인지·반복 게시 등에 비춰 볼 때 죄질 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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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기타

문재인 대통령과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방하는 허위 내용이 담긴 글과 영상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보수 성향 인사가 항소심에도 1심과 같이 실형을 받았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김대웅)는 공직선거법 및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방 모(50)씨의 항소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유지했다고 9일 밝혔다.

1심은 방 씨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6개월,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징역 4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방 씨는 게시글 내용이 허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피해자들을 비방할 목적으로 각 게시글을 게시했다고 충분히 볼 수 있다고 본 원심 판단은 정당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공표하고, 전파성이 높은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작성한 글의 개수·반복성에 비춰 그 죄질이 나쁘다”고 설명했다.

보수 성향 단체 대표로 알려진 방 씨는 지난 2016년 11월부터 19대 대선을 앞둔 2017년 4월까지 문 대통령에 대한 허위 내용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게시물의 ‘문 대통령 아버지는 북한 공산당 간부 출신’, ‘문 대통령은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파산관재인’, ‘문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 비자금 1조원의 환전을 시도했다’는 등 내용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파악했다.

지난 2014년 10월에는 트위터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일본 욱일기를 배경으로 한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을 조작했다’는 허위 사실을 세 차례 게시한 혐의도 받았다.

1심은 “방씨의 이런 범행은 선거 공정성을 훼손하고, 불특정 다수인에게 그릇된 인식을 하게 할 위험이 있어 사회적 해악이 매우 크다”며 실형을 선고했다.

<2019-02-09>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문 대통령 아버지는 공산당’ SNS 허위 글 올린 50대 2심도 실형 

※관련기사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민족문제연구소 명예훼손 방자경 2심도 유죄, 징역 10개월 

☞YTN: ‘문재인 부친은 공산당’ SNS 허위글..50대 2심도 실형 

☞뉴시스: ‘문재인 부친은 공산당’ SNS 허위글..50대 2심도 실형 

☞세계일보: ‘문재인 부친은 공산당’ SNS 허위글 50대 2심도 실형

☞일요신문: ‘文 대통령 아버지 공산당 간부’ 허위 사실 게시한 보수 인사 ‘실형’

월, 2019/02/1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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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美頂上會談

 

何邦先破約(하방선파약)

不信又相疑(불신우상의)

老虎逢狼子(노호봉낭자)

將來豈可期(장래기가기)

 

북한과 미국의 정상 회담

 

어느 나라에서 먼저 약속을 깰까

믿지 못하겠는지라 또 서로 의심

늙은 호랑이가 이리 새끼 만나니

다가올 앞날 어찌 가히 기약하랴.

 

<時調로 改譯>

 

뉘 먼저 약속 깰까, 믿지 못해 서로 의심

늙어 버린 호랑이가 이리 새끼를 만나니

다가올 저 앞날일랑 어찌 가히 기약하랴.

 

*破約: 약속이나 계약 따위가 깨어짐. 약속이나 계약 따위를 깨뜨림 *狼子: 이

새끼  *不信: 믿지  아니함.  또는 믿지 못함 *可期: 기대하거나 또는 기약할 만함.

 

<2019.2.12, 이우식 지음>

화, 2019/02/1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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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부터 기생까지 만세운동 선봉…3ㆍ1운동 직전 첫 ‘여성 독립선언서’ 발표
임시정부 헌장에도 남녀평등 명문화…”독립운동계, 여성 역할에 깊은 이해”

(서울=연합뉴스) 김호준 기자 = 3·1 만세운동때 선봉에 섰던 여성은 유관순 열사만이 아니었다.

어린 학생부터 평범함 주부, 간호사, 기생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전국 각지의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은 물론이고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3·1운동은 여성들이 오랜 세월 성차별의 굴레에서 벗어나 항일운동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서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3·1운동 이후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여성 독립운동단체들도 우후죽순으로 결성돼 항일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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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독립기념관 소장 자료·여성가족부 제공]

3·1운동 직전 만주지역에선 1천335자 한글로 작성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발표됐다. 이 선언서의 말미에는 기원 4252년(1919년) 2월이라고 표기돼 있고, 김인종, 김숙경, 김옥경, 고순경, 김숙원, 최영자, 박봉희, 이정숙 등 여성 독립운동가 8인이 서명했다.

국가기록원이 발간한 ‘여성독립운동사(3·1운동 편)’는 이 선언서를 “3·1운동 이전에 발표된 여성들의 첫 독립선언서”라고 평가했다.

선언서는 여성도 독립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여성도 남성과 같은 국민 구성원임을 강조했다. 자주독립 정신과 함께 남녀평등 의식을 표명한 것이다.

여성들은 3·1운동 당시 서울, 개성, 평양, 부산, 광주, 전주 등 주요 도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 도시에는 여학교와 교회 부인회 조직 등이 있어 여성들을 조직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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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자혜 선생[국가보훈처 제공]

서울에선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배화여학교 등을 중심으로 여학생과 졸업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조선총독부 부속 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들도 서울의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중심인물은 동료 간호사들과 함께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한 박자혜 선생이다. 간우회 회원들은 각종 유인물을 작성해 배포하는 등 만세시위의 전면에 섰다.

개성에선 당시 여자성경학원 기숙사 사감을 지내던 어윤희 선생이 남성들도 선뜻 나서지 못했던 독립선언서 배부를 자청하는 등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선생이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돌리는 광경을 본 학생들이 독립선언서 배부에 동참했고 이는 개성 만세시위를 촉발하는 기폭제가 됐다. 일제에 체포된 선생은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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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윤희 선생[국가보훈처 제공]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는 3·1운동으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몰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왔던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 열사가 주도했다. 태극기를 직접 제작해 배포하는 등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열사는 일본 헌병에 체포된 이후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순국했다.

부산 일신여학교의 만세시위는 경남지역 3·1운동의 효시로 평가된다. 교사인 주경애 선생은 12명의 여학생과 시위 준비를 한 뒤 저녁에 기습적으로 거리에서 만세시위를 했고 이때 거리의 군중들도 시위에 동참해 시위대는 순식간에 수백명으로 늘었다.

평양 만세시위에선 숭의여학교와 교회 여신도들의 활약이 컸다. 숭의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직접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남산현교회에서 열린 고종황제 봉도식(奉悼式)에선 여신도 20여명이 나서 만세시위를 촉발했고, 미국 선교사 거주지인 신양리에선 기독교 부인 200여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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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순 열사 [국가보훈처 제공]

수원과 해주 등지에선 기생들이 만세시위에 불을 붙였다.

당시 수원 기생조합의 총무였던 김향화 선생은 자혜병원 앞에서 동료 기생들과 만세행진을 벌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김향화 선생은 일제에 체포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해주에선 김해중월 선생 등의 주도로 기생들이 자신의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만세행진을 벌였고, 여기에 시민들이 동참해 만세시위 군중이 수천 명에 달했다.

3·1운동을 통해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선 여성들은 서울과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항일 여성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다.

여성단체 중 서울 중심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평양 중심의 대한애국부인회는 조직 규모가 방대해 지방 곳곳에 지회를 두고 활동했다. 평안남도 순천의 대한국민회부인향촌회, 평안남도 강서의 대한독립여자청년회, 평안남도 대동의 대한독립부인청년회, 평안남도 개천의 여자복음회 등 항일여성단체들도 비밀리에 활동했다. 중국에선 김순애·이화숙 선생 등이 주축이 된 애국부인회, 일본에선 여성 유학생 중심으로 여자학흥회가 조직됐다.

미국에선 로스앤젤레스의 대한여자애국단과 유학생 중심의 근화회, 하와이의 대한부인구제회 등이 결성됐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첫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고 했다”며 “3·1운동 당시 독립운동계를 비롯해 민중들 사이에서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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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 문화재 등록 예고
(서울=연합뉴스) 문화재청이 독립운동가 조소앙(본명 조용은·1887∼1958)이 삼균주의(三均主義)에 따라 독립운동과 건국 방침을 국한문 혼용으로 적은 친필 문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6일 전했다. 2018.11.6 [문화재청 제공] [email protected]

<2019-02-12> 연합뉴스 

☞기사원문: [3ㆍ1운동.임정 百주년](25) 성차별 굴레 벗고 항일 주체로 우뚝

화, 2019/02/12-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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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지명 결정판 군산…도시 곳곳 수탈의 역사 담긴 지명 수두룩  

전국 지명의 30퍼센트 일제식 추정 
미쓰비시 창업주 호 딴 전주 동산동 본래 쪽구름, 조각구름이란 우리말 이름 가진 곳 
군산 서수면, 푸른 이삭이 넘실 거리는 땅이라는 일제식 지명 
지자체 의지만 있다면 곧바로 지명 개정 가능…의지의 문제


■ 방송 : 전북CBS 라디오 <사람과 사람> FM 103.7 (17:05~18:00)

■ 진행 : 박민 참여미디어연구소장
■ 대담 :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김재호 소장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인데요. 아직 우리 사회 곳곳에는 일제가 남긴 잔재가 사회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지명인데요. 자세한 내용,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김재호 소장과 짚어보죠. 소장님 어서 오세요.

◆ 김재호> 네, 반갑습니다.

◇ 박민> 3.1절 100주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기도 하고요. 역사운동을 하는 분으로서 소감이 더욱 남다를 것 같아요?

◆ 김재호> 네, 남다르기는 한데요. 현재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가 100년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다 보니 일제 잔재나 3.1정신을 그동안 역사 속에서 제대로 조명해냈는가 하는 부분은 의문입니다. 요즘 많이 부각되는 것이 3.1운동이 운동이냐 혁명이냐인데요. 논란이 되겠지만 우리가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고요. 3.1운동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좀 더 살펴보면요. 1908년, 1909년으로 넘어가면서 호남 지방 의병들이 초토화 됩니다. 그리고 경술국치가 이뤄지고요. 이후 거의 10여 년에 걸쳐 무단통치가 행해집니다. 무단통치라는 것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부분들에 저항해서 민족적인 거사로써 일어난 것이 3.1운동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고요. 3.1운동은 이후 우리 독립운동의 방향, 항일무장투쟁이나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 등에 교훈을 남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박민> 우리 민족 독립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인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나란히 100주년을 맞는 시점인데요. 중요한 것은 아직 일제의 잔재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깊숙이 남아있죠. 대표적인 사례가 지명인 것 같아요?

◆ 김재호> 한글학자 배우리 씨에 의하면 우리나라 지명의 약 30퍼센트가 아직도 일제 지명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 박민> 우리 지역에도 있죠. 대표적으로 꼽는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김재호> 우리 지역에도 굉장히 많습니다. 전주 동산동이 대표적이죠.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투하한 두 번째 핵무기가 나가사키에 떨어집니다. 나가사키 조선소에는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돼 가있었단 말이죠. 거기가 초토화되면서 조선인들이 대량 학살됩니다.

◇ 박민> 혹시 미쓰비시 중공업 말씀하시는 건가요?

◆ 김재호> 미쓰비시 그룹은 일본의 군국주의 기업 중에서 가장 최상위층에 있는 그룹이죠. 그런데 미쓰비시 그룹이 한국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해서 동산농사주식회사를 차립니다. 수원에 조선지점을 두고 전국에 여러 지점을 둡니다. 전주에 동산농사주식회사의 전주지점이 있었고요. 동산농사의 동산을 따서 동산동이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동산은 미쓰비시 창업주인 이와사키 야타로의 호입니다. 그러니까 창업주의 호를 따서 지은 지명이 동산동이라는 거죠. 원래 이 지역은 편운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말로는 조각구름이나 쪽구름이라는 뜻입니다. 예쁘죠. 그런데 동산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안 바뀌고 3.1운동 100주년이 된 지금까지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는 거예요. 큰 문제죠. 그렇다면 동산농사주식회사가 한국에 와서 얼마나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는가도 봐야 해요. 여의도의 24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땅이죠. 상상이 가지는 않죠. 전국적으로 2100만여 평 정도 되니까요. 그런데 그들의 호를 딴 동산이라는 지명을 아직도 안 바꾸고 있다는 겁니다.

◇ 박민> 그렇다면 동산농사주식회사의 땅이 전국적으로 흩어져있을 텐데 전주만 지명이 남아있는 건가요. 아니면 다른 지역에도 이 지명이 남아 있습니까?

◆ 김재호> 이 부분은 전수조사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전국적으로 동산동이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서 보여요. 그런데 아직은 그 부분이 저희 같은 시민사회단체가 전수조사 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거든요. 추정은 하고 있지만 정확한 사실관계가 필요합니다.

◇ 박민> 그런데 전주 동산동은 분명하다는 말씀이죠?

◆ 김재호> 네 맞습니다.

◇ 박민> 이거는 어떻게 확인하신 거예요?

◆ 김재호> 이 부분은 실제 많은 기록들에서 나오고요.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안이 분명해 보입니다. 지명이 바뀐 시기도 일제강점기 때 바뀌었고요.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쭉 유지돼 왔습니다. 문제는 그겁니다. 자치단체나 시의회가 여기에 대해서 절박함을 느끼지 못하면 힘듭니다. 동산동의 유례가 어떻게 전해져 오는 것인지 주민들에게 명확하게 설명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설명 절차가 부실합니다. 주민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크게 필요성을 못 느끼고요. 이 문제가 피부로 와닿지 않는데 바꾸려고 하겠어요? 그리고 지명을 개명하는 문제에서 행정적인 절차가 쌓이잖아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공무원들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잠깐 개정 논의를 하다가 결국 무산됐고 계속 동산동이라는 지명을 쓰고 있는 겁니다.

◇ 박민> 그런데 최근에 또다시 논의가 되고 있다고요?

◆ 김재호> 아무래도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저희 단체, 시민단체들이 지명을 바꿔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최근 들어서 김승수 전주시장도 절박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개정과 관련한 절차를 밟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박민> 전주시의 상황을 짚어봤습니다만 일제 잔재하면 군산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여기도 일본식 지명이 많이 남아있죠?

◆ 김재호> 그렇습니다. 군산은 거의 일본식 지명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 전죽마을, 중야마을, 팔목마을 이런 데는 대부분 일본인 지주나 아니면 측량기사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어요. 일본이 식민 통치 편의를 위해서 숫자로 이름을 붙인 마을이 아직도 남아있거든요. 해2마을, 해7마을, 해8마을 이런 식으로도 남아있고요. 군산이 동이 59개인데 쌀 ‘미’자가 들어간 동이 아직도 다섯 개가 남아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군산 식민통치 중심부라고 할 수 있었던 지역인 금광동, 영동, 중동, 영화동 이런 곳들도 모두 일본식 지명입니다. 그런데 군산시는 이런 문제에는 소홀하고요. 오히려 식민 거리를 재현하는 일에는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 박민> 개정 움직임은 없나요?

◆ 김재호> 제가 보기에는 서수면을 제외하고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수면도 지금 행정 차원에서 논의가 되는 것은 아니고 주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주민들 사이에서 서수면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 박민> 서수가 어떤 의미이기에 그렇습니까?

◆ 김재호> 서수는 한두 군데 있는 지명이 아니에요. 서수는 대만에도 있고 사할린에도 있고요. 일본에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서수는 신칸센에도 있고 일본 여자 이름에도 서수가 쓰입니다. 푸른 이삭이 넘실거리는 땅이라는 게 서수의 뜻입니다. 자신들이 식민통치하는 국가의 이상향을 지명에 심어놓은 거예요. 침략과 약탈을 본질로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는 그게 이상향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지배를 당한 입장에서는 지옥인 거죠. 여기 같은 경우에는 가와사키라는 농장주가 서수라는 지명을 지었다고 해요.

◇ 박민> 지명을 바꿀 때 절차가 까다롭거나 복잡한 부분이 있습니까. 아니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습니까?

◆ 김재호> 도로명 주소를 변경하거나 동과 면을 변경할 때 차이가 있어요. 행정동이나 동명 개정은 지방자치법 4조에 분명히 명시돼 있어요.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바꿀 수 있어요. 물론 주민공청회나 설명회는 필요합니다만, 지방자치단체와 시의회가 마음만 먹으면 사실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거죠. 도로명 주소는 주민들의 동의 절차가 필요해요. 복잡하긴 하지만요.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요. 의지가 문제라는 겁니다.

◇ 박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우리 생활 곳곳에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 실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지명을 중심으로 살펴봤는데요.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김재호 소장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재호> 네, 고맙습니다.

<2019-02-12> 노컷뉴스 

☞기사원문: 일제 지명 사용하는 전주 ‘동산동’, 전범기업 창업주 호 딴 지명도…

화, 2019/02/12-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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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찬 전시 내용 가득…찾는 일본인은 아직 많지 않아
日관람객 “3·1운동에 한국인 프라이드 대단하다 느껴”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많은 일본인은 3·1 독립운동은커녕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과거의 사실을 아는 것에서부터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얘기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일제의 식민지배에 평화적으로 저항한 한국인들의 독립만세 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일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도쿄(東京).

도쿄에서도 중심가인 신주쿠구(區) 오쿠보의 한국광장 빌딩 7층에는 일본인 시민운동가들이 운영하는 ‘고려(高麗ㆍ일본발음 고라이)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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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한국광장 빌딩 7층의 고려박물관에서 일본인들이 주관하는 ‘3ㆍ1독립운동 100년을 생각하는 기획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은 전시장 모습.

이곳에서 3·1 독립운동 100년을 생각하는 전시회가 지난 6일 시작됐다.

오는 6월 23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회는 아직은 일본인들의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발걸음은 간간이 이어지고 있다.

고려박물관은 일본 시민들만의 힘으로 2001년 12월 만들어진 한국 역사 박물관이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정확히 배워 알리고자 하는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회비를 모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일본 전국에서 700여 명이 연회비로 5천엔(약 5만원)씩을 내고 있다.

한국의 역사를 소개하는 상설 전시 외에 수시로 기획전을 열고 있는데, 3·1절 100주년을 앞두고 기획전시회를 시작했다.

기획전은 자원봉사 활동가 80여 명이 7~8명씩 한 조를 이루어 매번 한국 역사에 연관된 주제로 마련하는데, 이번 3·1절 기획전은 구상 단계부터 따지면 8명이 매달려 1년 6개월 정도 준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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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박물관에서 이사 겸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하라다 교코 씨가 전시물을 설명하고 있다.

작년 6월에는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박물관 회원 6명을 포함한 14명이 3박 4일 일정으로 직접 한국을 찾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시작으로 천안 유관순기념관, 아우내 장터, 독립기념관, 제암리순국박물관, 서대문형무소 등 3.1운동 관련 자료를 모을 수 있는 곳곳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이렇게 모은 자료를 연구하고 분석해 총 24장의 패널로 3·1운동 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정리한 전시물을 내놓았다.

작년까지 고려박물관 이사장을 지낸 뒤 지금은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하라다 교코(77) 이사는 7일 “모든 멤버들이 함께 공부하고 배우면서 전시 패널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봉사자들이 꾸민 전시회라고 했지만 내용은 전문가들의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알찼다.

3·1운동 이전의 한일 관계 역사를 먼저 소개한 뒤 3·1 운동 전개 과정, 종교의 역할, 여성의 참가, 제암리 학살사건, 3·1운동 당시의 신문보도와 일본인의 관점, 3·1운동 이후 100년에 걸친 격동의 한국사를 핵심을 빠뜨리지 않고 자료사진까지 곁들여 명료하게 설명했다.

3·1 운동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24장의 패널을 훑어가면 한국인들이 가혹한 탄압을 받으면서 왜 평화적인 만세 운동에 나섰는지, 일제의 당시 대응은 어땠는지, 한국 식민지화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엇갈린 시각 등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또 전시장 한 가운데에는 3·1운동 관련 기술이 거의 돼 있지 않는 일본 역사교과서 여러 종을 펴놓았다. 일본인들이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있지 못하며 앞으로 배워 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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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박물관 전시장에 펼쳐 놓은 일본 역사교과서. 한국인들의 비폭력 독립운동인 3·1 운동이 제대로 기록돼 있지 않다는 것이 하라다 이사의 설명이다.

중학교 교사 출신인 하라다 이사는 “3·1 독립운동 정신에는 동양평화 사상이 깃들어 있다”면서 “우리 일본인들이 많이 와서 배우고 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시회 시작 이틀째인 7일까지 이곳을 찾은 일본인은 10명이 채 안 된다고 했다.

하라다 이사는 “일본 언론이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보도를 해줘야 하는데 몇몇 매체가 문의만 하고 아직 오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날 전시회를 찾은 다마키 시노(56·고교 영어교사) 씨는 “한국에 여러 차례 갔는데, 서대문형무소역사관도 둘러본 적이 있다”며 “3·1독립운동에 대한 한국인들의 프라이드(자긍심)가 대단하다고 느꼈다”며 방한 때의 인상을 전했다.

다마키 씨와 3·1운동 기획전을 함께 관람한 니와 쇼코(57·고교 일본어 교사) 씨는 “두 나라 국민은 물론이고 국가 간에도 사이 좋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려박물관은 낮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열고, 월·화요일은 휴관한다.

[email protected]

<2019-02-07> 연합뉴스 

☞기사원문: 일본인들이 도쿄 한복판에 연 ‘3·1운동 전시회’

화, 2019/02/12-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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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2.8 독립선언문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 수립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았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이 선언문의 취지와 의미가 충분히 연구되거나 확산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었는데요.

뒤늦게나마 2.8 독립선언문이 모두 5개 국어로 번역돼 배포되는 등 그 의미를 알리는 운동도 활발해질 전망입니다.

정새배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활자를 구하지 못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여 쓴 6장의 선언문.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해 뜨거운 피를 흘리겠다며 조국 독립의 열망을 담았습니다.

[조한성/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 “오족(우리 민족)이 정당한 방법으로 자유를 요구할 텐데,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해서 끝까지 자유행동을 취해서…”]

선언문에 40여 회나 등장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은 3.1 운동을 거치며 더욱 굳어져 임시정부의 기틀로 이어졌습니다.

[조영진/한국독립유공자협회 회장 : “(조선의 젊은이들은) 빼앗긴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불굴의 기개와 용기로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되는 건 집회 결사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가 침해되는 상황을 비판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고 언급한 대목입니다.

엄혹한 압제의 상황에서도 청년들이 꿈꿨던 독립국가는 어느 누구도 특권이 없고 모두에게 자유와 민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였던 겁니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이냐. 황제가 있는 나라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는 것이고요.”]

서울시는 선구적인 2.8 독립선언서의 정신을 기리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5개 언어로 번역해 전세계에 배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뒤늦게나마 2.8선언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려는 노력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독립기념관은 다음달 3.1 운동 기념관이 완공되는 대로 2.8 선언문 원본을 일반에 공개할 예정입니다.

KBS 뉴스 정새배입니다.

<2019-02-09> KBS NEWS 

☞기사원문: “자유 향한 열망”…2·8 독립선언문 5개 국어로 번역

화, 2019/02/1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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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문 대표님께  

우리말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중이 그 절 주인인데, 왜 절을 떠나야 하지요? 절이 싫어지게 만든 자들을 떠나보내야 하지 않나요? 아마 그 중은 절의 주인이 아닌 모양입니다. 아니면 생각없는 떠돌이 땡중이던가  

저는 저를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인(의 한명)”이라고 생각하고 주인(회원)의 의무인 회비를 내왔고, 지부장으로 10년을 헌신했고 회원들의 대표기구인 운영위원회 운영위원도 하고, 나중엔 (9, 2015.3~2017. 3) 운영위원장도 역임했습니다.  

그동안 민족문제연구소의 대개의 모든 근무자들은 연구소를 열심히 키워오고 세상에 이름을 내고 잘 해왔다고 봅니다. 우리 회원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숙원사업인 친일인명사전도, 백년전쟁 비디오도 만들어내고, 역사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한 여러 일들도 해오면서. 그러면서 세상에 연구소 이름이 알려지고, “회원들이 연구소 취지가 좋다며 늘어나기 시작하고 회비수입도 늘고그래서 지금 그 정도면 크고 상대적으로 부유한 연구소로 성장했습니다.

랬더니만 어느 시점부터 상근직원들이 배은망덕하게도 주인을 몰라보고 무시하며 저네들 마음대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알고 보니 오래전부터 주인들 모르게 몰래 희한한 일들을 꾸며왔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급기야는 전국에 회원이 13천여 명이 있다고 저들 스스로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우리들을 회원님이라 칭하더니 어느날, “회원 10이 그동안 십수년 동안을 모든 일을 우리 진짜 (저들에 의하면 가짜) 회원들 몰래 정기총회도 하고 임시총회도 하며 주요 대사들을 처리해왔다는 사실이 들통난 겁니다.  

그렇게 저들 회원 10끼리 몰래 총회를 하고 난 뒤 감독관청에 신고까지 해놓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다시 전국의 회원들을 모아 정기총회를 또 열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모르는 전국의 진짜 회원들은 그게 진짜 총회인줄 알고 일년에 한번 열리는 총회인데 꼭 가봐야지하면서 전국 지방에서 차를 대절해 올라온 것입니다. 그 법적인 효력도 없는 가짜 총회를 위해서 말입니다.  

회원 10‘(등기)이사 5명과 상근자 5이었습니다. 상근자들이 주인인 회원으로 변신해 몰래 주인행세를 한 것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회원이 10이라니…? 그래서 깜짝 놀라 그럼 당신들이 말하는 회원 10말고, 전국의 회원 13천여 명은 뭐냐라고 물으니 아직 답을 못하는 것입니다.  

듣기에 저들이 슬쩍 흘리는 말로는, 이제 주인에게 몰래 주인 행세를 한 것이 발각이 되니 이제 와서 우리들 회원(법적 용어로는 사원)”에게 당신들은 사실은 (주인인) “회원(사원)”이 아니라, 단순 기부자 내지는 아무 권리도 없는 후원 회원이었어요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속았지요? 우리를 속여 온 거지요? 지난 십여년 동안이나, 완벽하게, 언제까지나 영원히 비밀로 남을 줄 알고?  

그러면 그동안 우리를 주인인 회원(사원)”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의무라며 그동안 빼간 돈 (회비)는 뭡니까? 이거 사기 아닌가요?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절이 싫으면 절을 떠나라구요? 이덕문 미주 회원님, 그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나요?  

– “당신이 이름을 지적하면서 사퇴하라고 하면 그자리에 당신이 그자리가 욕심이 나서 그런것 같습니다  

이거 이덕문 회원님 생각입니까? 아니면, 집행부 어느 상근자한테 들은 얘기입니까? 하도 여러 군데, 지방에서 여러 회원들에게 똑 같이 듣는 말이라 묻습니다. 어느 지방 소위 원로라는 양반도 제에게 그럽디다. “연구소가 무슨 권한 쟁취하는 데냐? 자리를 맡고 싶으면 정치나 선거에 나가라. 그 원로는 사무국의 어떤 상근자하고 친하다고 들었습니다. 이덕문 회원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더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질문들이 똑 같이 유치한지  

– “그런 생각이 않이라면 다시는 그런글 올리지 마시고 당신이 만든 단체 잘 운영하셔서 참 여인철씨가 훌륭하신 분이구나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단체에 가입 할것입니다 나역시 당신 단체 운영하는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면 협조합니다

제가 속해있는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시민행동(민바행)은 뭘 새로 운영하려고 만든 단체가 아닙니다. 명칭 그대로, 비리와 부정에 휩싸인 민족문제연구소를 바로세우기 위해 뜻있는 사람들이 모인 회원/일반시민 단체입니다. 이덕문 회원도 민족문제연구소를 바로 세워야겠다는 뜻이 있다면 가입 환영합니다. 연구소 회비를 중단하고 저희 민바행에 회비를 내는 회원도 있습니다.  

– “그러나 지금은 어떤 뚜렷한 계획없이 무조건 과거 몸담았던 단체와 임원들 성명 운운하면서 사퇴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상근자들의 이러한 비리행위는 작년 8월 감독관청인 서울시교육청의 4일간에 걸친 감사(실태조사) 결과에 따라 작년 1214일에 행정처분(미승인 정관 사용에 대해 엄중경고, 기부금 부적정 사용에 대해 기관경고, 그리고 시정조처, 그 결과 이사 5인 전원과 감사 2인 전원에게 경고 처분)을 받게 되었으며 이는 민족문제연구소 역사상 2000년 이래 두 번째 있는 일로 연구소를 완전히 믿고 따라온 전국의 13천여명의 회원들에게는 참으로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집행부 임원진/집행부에서는 일체 한마디 반성 또는 사과도 없이 침묵하며 오히려 그동안 문제제기해온 저희 민바행 회원들을 음해 세력이라 깎아 내리며 법적 조치 운운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 민족문제연구소의 참 모습이란 말입니까? 오늘의 민족문제연구소를 있게 하신 고 임종국 선생께 부끄럽지도 않단 말입니까?  

저희 민바행은 다시 말씀드리면, 뚜렷한 계획과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오래된 주인인 회원들을 속여 가며 연구소를 비리와 부정의 수렁으로 빠뜨리고, 그럼으로써 전국의 회원들에게 치욕을 안겼을 뿐 아니라,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성원해오던 국민의 신망을 저버린 비리의 주범들과 책임자들의 책임을 반드시 묻고 민족문제연구소를 바로세우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 민바행은 “국민 주권”, 아니, 민족문제연구소에 “회원 주권”을 바로세우는 역할을 하려 합니다. 그 길에 이덕문 대표님도 같이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19. 2. 12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제명자

(9) 운영위원장 여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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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누구를 지지하지 않고 중이 싫으면 절을 나간다고 합니다  

아마 여인철씨도 민족 문제 연구소가 싫고 마음과 뜻이 맞지 않아서 나가시고 당신 마음과 뜻을 생각하시면서 새 단체를 세우셨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시고 단체의 정관이나 계획등등 바로 세워서 참 그사람 여인철씨가 이끄는 단체가 마음에 들고 하시는 사업이 옳다고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새로 세운 단체에 가입할것입니다  

당신이 이름을 지적하면서 사퇴하라고 하면 그자리에 당신이 그자리가 욕심이 나서 그런것 같습니다  

당신이 쓴 글 다읽어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단한줄입니다 부정 불의 등등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라면 법에서 판결할것입니다 누구누구 일하는 분을 사퇴하라고 하면 그자리가 탐나서 그런가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않이라면 다시는 그런글 올리지 마시고 당신이 만든 단체 잘 운영하셔서 참 여인철씨가 훌륭하신 분이구나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단체에 가입 할것입니다 나역시 당신 단체 운영하는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면 협조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뚜렷한 계획없이 무조건 과거 몸담았던 단체와 임원들 성명 운운하면서 사퇴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당신네가 만든 단체가 날마다 발전하여 민중의 마음의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정희기념관건립반대 전 미주공동대표 이덕문

 

 

 

화, 2019/02/12-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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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스님것이 아니고  종교불교 재산입니다

저보고 대표내어 놓으라고 하면 저보다 잘할 사람이 있으니 내어놓으라고 하면 내어 놓습니다

민바행  정권이 잘 되어있다면 실천하시면서 보여주세요 저는 민바행 단체에 가입 안합니다

그러나 지금 사회와 정치가 시시각각 변하니 부도덕 불의를 타도하시면서 언론에 기재하시고 올타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협조를 구하신다면 협조합니다  당연히 해야지요

박정희 기념관반대는 저와 이곳 주 대표님들께서 지방언론에 광고를 내면서 반대 했지만 고김대중대통령의 정책이고 200억 국민의 혈세를 기념관 세우는데 도와 주셔서 우리는 실패하였습니다

여인철 씨는 이제는 민족연구소와 아무런 관게가 없습니다  회원도 아니고 과거에는 회원이고 운영위원이였지만 지금은 탈퇴하시고 새로 단체를 만드셨으니 단체 정관 주체로 일을 하세요

지금 해야할 일들이 너무많지요 5.18 광주 유가족 모욕  박정희 스위스에 감쳐진 비자금 ,강남땅 몇만평은 박정희 땅 혹은 박회장 땅  이기사는 이미 언론에서 밝히 기사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 언론이니 이런것들을 밝혀 주시고 더이상 민족 문제연구소 임원사퇴는 맗하지 마세요

이제는 부정 불법은 회원들이 알아서 할것입니다

 

수, 2019/02/13-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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