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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은 악질 친일경찰 계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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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은 악질 친일경찰 계난수

익명 (미확인) | 금, 2018/04/20- 14:17

열전친일파 19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에 다룰 친일파는 통감부 시절부터 일본군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했고, 병합 후 헌병보조원으로 줄곧 있다가 3・1운동 이후 순사와 경부보를 거쳐 경부로 진급했고, 독립군 사이에서 평안북도의 ‘일등 창귀’(倀鬼 : 호랑이에 먹혀 죽은 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친 계난수이다. 1930년에는 참의부의 맹장 이응서를 체포한 공적에 힘입어 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 이 훈장을 받은 조선인 경찰은 일제 치하 36년간 혜산 보천보전투 때 귀환하는 김일성의 항일부대를 추격하고 국내 동조자를 색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최령(崔鈴. 해방 후 최연崔燕으로 개명)과 의열단 폭탄반입사건 관련자를 체포한 김덕기(金悳基) 등 10여 명뿐이다.
이러한 공적에 비해 계난수의 개인사에 대한 자료를 매우 드물고 1941년 이후의 행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신문기사와 일제 문서를 근거로 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망라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한 그의 활약상(?)을 추적한다. 또한 만주로 건너간 이후 간도성 사무관 시절의 행적과 1940년경 동북항일연군 체포・귀순 공작 활동을 당시 시대상황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헌병보조원에서 경부가 되기까지 17년 걸려

계난수는 1890년 8월 1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1906년 강계군 사립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했다. 1908년 7월 일본군 조선주차군 의주헌병대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1919년 3・1운동 직후까지 12년간 헌병보조원으로 일했다.
헌병보조원제도는 의병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1908년 6월 11일 한국칙령 제31호 「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에 의거해 실시되었다. “폭도의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헌병보조원을 모집하여, 한국주차일본헌병대에 의탁하고, 그 복무에 대해서는 헌병대장의 지휘를 받는다.”(제1조)라는 조문에서 헌병보조원의 성격과 역할이 여실히 드러난다. 헌병보조원은 만 20∼45세의 조선인 한글 해독자 중에서 모집되었으며, 군속의 신분을 보유하고 ‘폭도의 진압과 안녕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헌병의 업무를 보좌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 시기 모집 정원은 4천여 명인데, 1908년 7월 1일부터 9월에 걸쳐 채용이 완료되었다. 헌병보조원은 전원 주차헌병대가 관장하며, 1개월 이내의 견습기간을 마친 후 헌병 1인당 2∼3명씩 배치되었다. 대우는 본봉·출장여비와 일어 해득자에 대한 통역수당이며, 순사 봉급과 같은 수준이었다.
계난수는 병합 전후로 의주헌병대 헌병보조원으로 있었다. 그로 인해 1912년 8월 1일 칙령 제56호에 의해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이후 1912년에서 1919년 사이 강계헌병분견대가 설치되자 고향인 강계로 전근한 것으로 판단된다. 1919년 5월 강계헌병분견대에서 헌병보조원으로서 3·1운동과 관련해 증인 이정화(李晶和)에 대해 취조할 때 통사(통역)로 참여해 신문을 도왔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헌병보조원으로서 계난수의 구체적인 활약상은 나타나지 않으나, 강계 3・1운동에 관한 기록(“4월 8일 역사적인 새 아침은 밝았다. 거사준비에 착수한 지 2주일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읍내 헌병분견대의 주구로 악명 높던 계난수의 무리조차 오늘 거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독립운동사 제2권 : 삼일운동사』 1971, 484쪽) 에서 계난수가 강경읍 헌병분견대 주구로서 악명을 떨쳤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의 여파로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뀌고 그에 따라 기존의 헌병경찰제도도 보통경찰제도로 변화했다. 1919년 8월 조선총독부관제가 개정되어 ‘총독무관전임제’가 폐지되고, 총독의 육해군 통솔권한을 없애는 등 총독의 군사적 색채를 약화시켰으며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헌병보조원제도도 폐지되었다. 일제는 1920년대에 경찰력 감소를 이유로 일반경찰관을 대규모로 확충하였고, 헌병 및 헌병보조원 출신자 다수가 경찰관으로 전직하였는데 순사로 전직한 조선인 헌병보조원 출신자는 4천여 명에 이른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인의 순사 지원자는 항상 채용인원에 비해 7~8배에 달했다. 그 이유로 순사가 조선인이 취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관직 중 하나이고 제1차세계대전 후의 불황으로 생활난이 심각해진 점을 들 수 있다.
계난수는 1919년 8월 20일 조선총독부령 제134호에 의한 관제개정으로 총독부 도순사로 임명되었으며, 평안북도 강계경찰서 순사로 발령받았다. 1920년 11월 강계경찰서 순사부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계난수는 국내외에서 밀정을 활용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추적, 검거하였고, 독립군과 교전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 강계경찰서 순사부장으로서 평북경찰부의 지휘하에 만주 안동현(安東縣)으로 파견나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였다. 즉 1922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원이면서 안동현 소재 이륭양행(怡隆洋行) 고원으로 안동현 우편국에 수신함을 설치해 독립군들 사이의 연락을 중계하던 김문규(金文奎)를 체포했다. 1923년 10월. 평안북도 강계군 종서면에서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벌이던 김기현(金基鉉)이 종서면주재소를 습격하려 한다는 첩보를 탐지하고, 김기현을 체포하기 위해 종서면에 출동하였다가 김기현이 만주로 피신하자 주민 전창엽(田昌燁)·김기흡(金錡洽)·조상국(趙尙國) 등 10여 명을 체포하여 고문을 자행했다. 1924년 8월에는 참의부 소대장 장창헌(張昌憲) 및 독립군 2명을 유인해 일본경찰에 살해되도록 만든 밀정 홍인화(洪仁化)를 보복 살해한 참의부 부원 최윤흥(崔允興)을 밀정 박희빈(朴熙彬)의 밀고를 받고 검거했다. 1925년 6월에는 참의부 소속 독립군 이의준(李義俊), 김봉흥(金奉興), 전창식(田昌植) 등의 부하 20여 명과 강계군에서 전투를 벌였다.
1923년에 당해년도 도경부보시험에 응시해 합격되어 『조선총독부관보』 1924년 3월 13일자에 이름이 올랐다. 1925년 강계경찰서 경부보를 지낼 때 월봉 44원을 받았다. 1926년 12월 강계경찰서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했으며 1927년 11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로 전근했다.

 

참의부 맹장 이응서를 체포한 공로로 경찰관리 공로기장 받아

계난수가 평북경찰부로 전근할 무렵 그곳 고등경찰과장은 독립운동가 체포로 명성(?)이 자자한 김덕기였다. 김덕기는 영화 〈밀정〉의 모티브가 된 ‘황옥경부사건’을 탐지하여 의열단의 2차 국내폭파작전을 막았고, 정의부 총사령관 오동진을 함정에 빠뜨려 체포한 자다. 평북경찰부에서 계난수는 직속상관인 김덕기의 지휘를 받아 독립운동가 검거에 맹활약을 펼친다.
1929년 4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한 고려혁명군 중앙위원장 최승호(崔承皞)와 일행 3명을 체포했다. 최승호 일행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왔다가 여관에서 계난수가 이끄는 형사대에 의해 피체된 것이다. 최승호와 박화용은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예비, 총포화약취체령 위반으로 신의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어 각각 징역 10년과 3년을 언도받았다.

07

경찰관리공로기장 수여식. 『매일신보』1930.9.19.

 

그해 5월 일찍이 사이토 총독이 국경시찰시 저격을 시도했고 참의부의 맹장으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200여 차례나 벌인 독립군의 거두 이응서(李應瑞)를 신의주에서 직접 체포했다. 그 공로로 계난수는 1930년 8월 4일 명치 43년 칙령 제438호에 의거해 칙정(勅定)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 경찰관리 공로기장은, 군인에게 천황이 직접 수여하는 금치훈장(金鵄勳章)에 비견될 정도로 권위 있는 상이다. 같은해 9월 17일 평북도청에서 열린 수여식에서 이시가와(石川) 평안북도지사에게서 공로기장을 전달받았다.(『매일신보』 1930.9.19. (3면) 「桂警部에 勅定 功勞章 授與式 擧行」) 이응서와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진행중이던 이응서가 1931년 2월 김덕기 고등경찰과장과 계난수 형사에 대해 불법감금과 절도, 폭행으로 고소를 제기했다. 신의주에서 체포된 다음 신의주경찰서에서 불법 감금과 고문・폭행을 당했고 자신이 갖고 있던 가방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이 이응서의 고소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김덕기 측도 이 문제를 일소에 부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08

 

1929년 12월경 계난수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7급)이면서 동시에 신의주경찰서 경부를 맡고 있었다. 1930년경 신의주경찰서의 발표에 따르면, 독립군이 국경을 침입할 때 경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된 자는 1년 내에 4천여 명이나 되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건수도 1백여 건에 이른다고 했다.
1931년 평안북도경찰부 재직중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그해 9월부터 1934년 3월까지 종군해 국경 대안경비를 비롯해 군대 및 군수품 수송, 민심사찰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1931년 9월에는 중국 안동현 등지에서 중국 관헌들에 대한 정보수집업무를 맡았고 10월에는 중국민에 대한 동향을 사찰했다. 1931년 12월 중국 군벌인 장학량(張學良)이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압록강 철교 부근에 대한 사찰 및 경계업무에 종사했다.
1932년 5월에는 오성륜(吳成崙)의 부하 김혁산(金革山), 임호(林虎) 등이 일본 관공리 암살과 관공서 폭파를 기도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밀정 이흥하(李興夏)를 시켜 정보를 수집했다. 이어 같은 달 신의주고등보통학교 학생격문살포사건 주모자인 이종림(李宗林), 박병상(朴炳商) 등을 체포하기 위해 김덕기(金悳基) 지휘하에 형사대를 이끌고 경성으로 출장, 수색활동을 벌였다.
같은 달 유석화(劉錫華) 순사부장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사건을 수사하고 혐의자를 체포했다. 계난수는, 김명시(金命時)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던 오빠 김형선(金炯善)을 도와 인천에서 기관지 〈꼼무니스트〉를 배포하며 노동운동을 하다가 조직이 탄로나자 중국으로 돌아가기위해 신의주에 왔다가 근우회 전 지부장 박은형의 집에 머물러 있던 것을 탐지하고 현장에서 그를 체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의 주요 인사 조봉암, 홍남표, 김찬, 김명시 등 16명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당시 평북경찰부 경부였던 스에나가 하루노리(末永淸憲)는 『조선사상범검거 실화집』에서 김명시의 체포과정을 상세히 다루었다. 또한 계난수는 같은 해 6월에는 중국상해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독립군들이 만주사변을 계기로 국내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안동현에 잠입해 상해교민단 단원 이계상(李啓尙)을 체포했다.
이후에도 계난수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로 계속 재직하며 고등경찰로 활약했다. 1932년 12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 관등 6급이었다. 1934년 3월 1일 만주국 황제가 수여하는 만주국 건국공로장, 1934년 4월 29일 만주사변 때 활약한 공로로 훈8등 서보장을 받았고, 같은 날짜에 ‘소화6년내지9년사변’에 대한 공로로 종군기장을 받았다. 1934년 11월 평안북도 도경부를 그만두고 만주로 건너갔다.

 

09

대만주국 건국공로훈장(1934)과 소화6년내지9년사변 종군기장(1934),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간도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 토벌•귀순공작을 벌이다

계난수는 1934년 12월 만주국 간도성공서(間島省公署) 경무청 특무과 사무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계난수와 함께 간도성으로 전근한 조선인 관리로는 전라북도 내무부 산업과장이었던 유홍순(민정청 실업과장),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윤태동(교육청 학무과장), 만주국 문교부 속관에서 시학관으로 승진한 김춘학(교육청 시학관) 등이 있었다. 이들은 만주국의 요청에 의해 조선총독부의 선발을 거쳐 조선인이 성 전체 인구의 60%(약 50만 명, 1934년 현재)를 차지하는 간도성 고위 관리로 영전해 온 것이다. 경무청 특무과는 주로 반만항일의 운동가들을 색출하고 신문하는 부서였다. 1937년 4월까지 경무청 특무관 사무관으로서 재직하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막론하여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는 임무를 담당했으리라 짐작된다. 1937년 4월 10일 경무청 특무과 사무관을 사직했다. 이후 일제시대 기록에서는 계난수가 종적을 감추었다가 해방 후 반민특위 관련문서 중 친일파 김창영 재판자료에서 다시 등장한다.

 

오호!! 밀림에 방황하는 제군!!
이 권고문을 보고 즉시 최후의 단안을 내려 갱생의 길로 뛰여 나오라!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고 참회할 것도 참회하고 이제까지의 군등(君等)의 세계에 유례없는 불안정한 생활에서 즉각으로 탈리(脫離)하야 동포애의 따뜻한 온정 속으로 돌아오라. 그리하야 군등의 무용과 의기를 신동아건설의 성업으로 전환 봉사하라! 때는 늦지 않다! 지금 곧 아(我) 150만 동포의 최후의 호소에 응하라. 최선을 다하야 제군을 평화로운 생활로 인도할 본위원회의 만반 준비가 제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金日成 等 反國家者에게 勸告文, 在滿同胞 百五十萬의 總意로」, 『삼천리』 제13권 1호(1941.1)

 

이 권고문은 1940년 12월경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본부가 길림・간도・통화성에서 항일무장활동을 벌이던 김일성 유격대 등 동북항일연군을 투항・귀순시키기 위해 비행기로 살포한 권고문이다.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길림・간도・통화성의 동북항일연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동남부치안숙정공작(東南部治安肅正工作)’을 실시하면서 이 지역에 일본군과 만주국군 6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고자 했다. 이때 위의 병력뿐만 아니라 일반 경찰, 특무기관, 지방행정기구, 협화회까지 총동원하여 사상・문화 토벌도 동시에 전개하였다. 이에 이범익 만주국 참의의 발의로 조선인 후원조직이 만주국 수도인 신경에 설립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다. 만주에서 발행된, 한글 어용신문인 만선일보는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뉴스’라는 난을 마련하여 조선인들의 후원금 내역과 후원회의 원호활동을 매일같이 보도하였다. 이때 김창영은 만주국 치안부 경무사 이사관 겸 통화성 경무청 이사관으로서(1939.5~1943.4)으로서 조선인 동북항일연군의 토벌과 귀순공작을 진두지휘하였다.

 

단기 4275년[1942년] 10월부터 6개월간은 안광훈(安光勳) 유홍순(劉鴻洵) 김송렬(金松烈) 계난수 등 외 일만 군경과 더불어 동만지구 일대의 숙청공작을 추진 협력하여 김일성 부대 임수산(林守山) 외 30여 명, 양정우(楊靖宇) 군사령부 총무부장 오성륜(吳成崙) 외 10여 명, 동 군사령부 경위여장(警衛旅長) 박득범(朴得範) 외 6명, 동 사령부 소속단장 김백산(金白山), 김일성 부대 정치주임 김재범(金在範) 외 6명 등 수백여 명의 항일조선군을 체포 숙청케 하였고(후략)(「김창영 의견서(1949.5.5.)」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김창영의 진술이 사실에 부합하는 점이 많지만 “4275년(1942) 10월부터”이라는 시점 부분은 ‘1940년 10월’의 오류로 판단된다. “1940년 10월부터 ‘추동계대토벌’이 시작되면서 군사토벌은 제3단계(1940.10~1941.3)에 들어서게 된다.(중략) 1942년 3월 19일 토벌사령부 및 각 토벌대의 해산명령이 내려져 소위 ‘野副大討伐’은 막을 내렸다”(윤휘탁, 『일제하 만주국연구』, 1996, 161쪽)에서 보듯이 1941년 3월경 제3단계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끝나기 때문이다. 또 김창영의 진술대로라면 박득범의 귀순시기가 1942년~1943년 사이지만, 1940년 10월 연길 野副토벌대사령부에서 발행한 「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에 따르면 1940년 6월 귀순하고, 10월에는 野副 토벌대장과 선전용 기념사진을 찍는다. 또한 양정우 1940년 2월 총살되어 효수, 조아범 1940년 12월 총살, 위증민 1941년 3월 병사 등 각종 기록에 비추어 김창영의 기억에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다.)

 

10

1940년 10월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은 일본군 토벌대를 방문하고 일본 천황과 만주국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野副토벌대사령부에서 건립한 충혼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 가운데줄 왼쪽부터 김재범, 박득범, 김백산. 출처 「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 1940.10.19)

 

 

김창영은 1949년 5월 반민특위 조사에서 동북항일연군들을 토벌・귀순시킨 자신의 공적을 위와 같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그의 말처럼 일제의 ‘동남부치안숙정공작’으로 인해 오성륜・박득범・김재범 등 1천여 명의 동북항일연군들이 투항・귀순하고, 양정우・조아범・허형식 등 주요 지휘관들이 사살되어 길림・간도・통화성의 동북항일연군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한창 진행되던 1940년~1941년 사이, 계난수는 “귀순공작에 있어서 간도성 공작반 총지휘자는 조선인 유홍순이었고, 같은 성 연길현 공작반장은 조선인 김송렬, 같은 성내 왕청현 공작반장은 조선인 계난수(전 간도성 사무관)였다”(「김창영 피의자신문조서(제3회)(1949.4.20.)」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에서 보듯이 간도성 왕청현 공작반장으로서 제1로군사령부 경위여장 박득범 등 7명을 귀순시키는 등 치안숙정공작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1년 이후와 해방 후 계난수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진주로 만주국이 멸망했다. 이때 만주국에 있던 많은 친일파들이 인민재판으로 처형되거나 소련의 유배지로 끌려갔다. 계난수가 이 경우에 해당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후 계난수는 역사의 법정으로 호출되어 냉엄한 심판을 받는다.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친일행적이 수록되었다. 같은해 11월 30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의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에게 내려진 죄목은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한 행위”(특별법 제2조 제3호),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저해한 행위”(제5호), “일제의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탄압하는데 적극 앞장선 행위”(제16호),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협력해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행위”(제19호)이었다.

시민들의 의견

12월 7일 오후 6시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이하 ‘역사재단’) 주최로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에서 강만길저작집 출간기념회를 열었다. 강만길 고려대명예교수의 의사에 따라 직접 논문 지도를 받은 제자들만 참여하는 소박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신용옥 역사재단 상임이사의 사회로 진행된 기념식에서 저작집 간행위원회 대표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이어 신용옥 이사가 저작집 출간 경위
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제자인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의 감사인사, 저작집을 펴낸 창비 기획편집위원장인 백영서 교수 및 임헌영 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강교수는 답사에서 “이번 저작집 역시 학자로서 치열하게 살고자 한 삶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며 “앞으로 후학들이 나를 넘어서는 뛰어난 연구업적을 남기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고 소회를 밝혔다.

 

강만길저작집은, 역사재단이 2010년부터 기획한 것으로 역사재단과 창비사의 2년간의 노력 끝에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출간 40주년을 기념해 올 12월에 간행된 것이다. 강교수의 첫 저작인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을 시작으로 초판 출간 연도에 맞춰 19권의 저서를 순서대로 배치하고 2010년에 나온 〈역사가의 시간〉은 자서전이라는 성격을 고려해 저작집의 마지막 권으로 했으며 미출간 원고도 한 권의 단행본으로 엮었다. 특히 제자 20명이 각 저서에 대한 사학사적 의미를 조명하는 해제를 실어 그 의의를 더했다.
• 편집부

수, 2019/01/02-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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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9/01/03-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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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2018/12/30-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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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寄金正恩

 

壓制連三代(압제연삼대)

衆言未久亡(중언미구망)

民飢君飽喫(민기군포끽)

共産若豺狼(공산약시랑)

 

김정은에게 거듭 띄우는 글

 

압제하는 정치가 三代를 이으니

뭇사람 未久에 망한다고 말하네

백성은 굶는데 임금은 배부르니

공산주의란 승냥이와 이리 같네.

 

<時調로 改譯>

 

壓制三代 이으니 未久에 망한다 하네

백성은 굶고 있는데 임금은 배부르니

오호라! 공산주의란 豺狼과도 같다네.

 

*壓制: 권력이나 폭력으로  남을  꼼짝 못 하게  강제로  누름 *三代: 아버지, 아들,

손자의  대. ≒삼세(三世)  *衆言: 많은  사람의  말 *未久: 얼마 오래지 아니함

*飽喫: 배부르게 먹음. 포식(飽食). 포복(飽腹) *共産: 공산주의(共産主義).

을 공동(共同)으로  관리하고  소유함  *豺狼: 승냥이와 이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

 

<2019.1.4, 이우식 지음>

금, 2019/01/04-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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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급식이 아닌 학교 다닐쩍에 도시락 처먹던 세대들은 잘 알게야. 

점심시간에 애들끼리 도시락 먹으면 당연 서로 같이 싸온 반찬 나눠먹고 하는게 올바른 것이며 국가간 외교로 따지면 주는게 있으면 받는게 있는 국제적 참다운 교류인게다. 

그런데 꼭 도시락은 안 싸오고 거지새끼 처럼 염치도 없이 애들한테 밥이나 얻어 처먹고 반찬이나 축내면서 왔다갔다하는 얄미운 새끼들 있지? 

바로 이런 새끼들이 지금 북괴 빨갱이같은 새끼인게다. 

남한한테 얻어먹고 퍼가고 바라는건 졸라리 많으면서 정작 남한한테는 아무런 도움도 안되고 오히려 해만되고 말썽이나 부리는 애물딴지 개버러지 새끼들 

바로 북괴 빨갱이거지10새끼들인게다.

금, 2019/01/0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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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시빌

팔용동

목장원

주소는

창원 의창구  팔용로 494-20

박상규윤항기의 경상5회 갑짱들아!

진영당감 일세

ㅍㅏ이브

손소리통  목장원:256-6205

합천봉산똥대지가

생각나는  오마고  창원 경상고 다섯기  정기총회에서

ㅂㅗ고픈 칠팔칠구팔공의  경상고5기

황금도야지해  에는 희비 제대로 내고

경조사 스님에게  찾아 배야 대는데,

기해와기회

올겐 진짜  너거 한테 비찐거 가파야 대는데,

0110모교일  19:00에 봄세

금, 2019/01/0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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笑筆强於刀諺

 

日本霜刀國(일본상도국)

朝鮮久筆邦(조선구필방)

如何其結果(여하기결과)

誤信正無雙(오신정무쌍)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속담을 비웃다

 

일본은 시퍼런 칼의 나라였고

조선은 오래 붓의 나라였지만

그 결과는 마침내 어떠했던가

잘못된 믿음 참으로 무쌍했네.

 

<時調로 改譯>

 

일본은 서슬도 푸른 칼의 나라였었고

조선은 오랜 세월 붓의 나라였었지만

그 결과 어떠했던가 誤信 무쌍하였네.

 

*霜刀: 서릿발같이  푸르고  날카롭게  서슬이      *如何:   형편이나 정도가

어떤가의  뜻을  나타내는 *結果: 어떠한 원인으로 결말생김. 그런 결말의

상태 *誤信: 잘못 믿음 *無雙: 서로 견줄 만한 게 없을 정도로 뛰어나거나 심함.

 

<2019.1.5, 이우식 지음>

토, 2019/01/05-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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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임종국 선생의 엄정함과 양심이 지배하는 사회를 소망하며

새해 우리 사회를 향한 나의 소망 두 개.

하나는 우리 사회가 엄정함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엄정함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패거리 짓기, 같은편 편들기와 봐주기가 지배하는 사회다.

친일연구를 하다가 알게 된 아버지의 친일행적까지도, 대학 은사 유진오 등 많은 인연 닿는 인사들까지도 “그런 저런 사정은 일체 눈을 감기로 작정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자료와, 그것을 정리한 카드 속에 묻혀서 생사를 함께 할 뿐인 것이다”라고 쓴 임종국 선생의 엄정함이 오늘날 우리 시대가 다시 불러와 기려야 할 시대정신이다.

동문이니까, 동향 사람이니까, 같은 편이니까…등등의 부족사회 수준의 감성으로 잘못된 것에 눈감고 침묵하고 봐주는 사회 분위기, 2019년에는 사라졌으면 좋겠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양심회복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썩지 않은 구석이 없다.”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내가 유학에서 돌아와 인사차 찾아뵌 교수님이 1991년에 하신 말씀이다.  그 후 한 세대 가량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 사회는 그때보다 나아졌을까?  아니다.  세상 곳곳이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로 얼룩져있다.

아예 ‘양심’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진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무감각하거나 무관심하다.  처벌도 죄질에 비하면 솜방망이다.  앞에서 말한 엄정함이 부족한 때문이다.  그러니 어물쩍 넘어가고, 비리와 부정부패는 계속된다.  저지르는 사람들이나 그냥 넘기는 사람들이나, 양심과 엄정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수준 낮은 사회 분위기가 2019년에는 사라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2019. 1. 4
민족문제연구소 제명자, 회원
여인철

토, 2019/01/05-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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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변호인단 “강제징용 기업 한국 자산 압류해달라” 강제집행 신청
아베 주장하는 ‘국제법‘ 뭐냐 질문에… 법조계 “나도 물어보고 싶다”
법조계 “‘국제법 위반했다’ 국내외 향한 ‘여론전’… 그 이상 이하도 아냐”

[법률방송뉴스=유재광 앵커]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두고 일본이 범정부 차원에서 반발하고 있습니다. ‘LAW 인사이드’ 신새아 기자 나와 있습니다.

어제(6일) 아베 신조 총리가 뭐라고 입장을 밝힌 모양인데 어떤 내용인가요.

[기자] 네. 아베 총리가 어제 NHK ‘일요토론’ 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받은 전범기업 신일본철주금의 한국 내 자산 압류 신청에 대해 “매우 유감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반도 출신 노동자’와 관련해서 압류를 향한 움직임은 매우 유감이다”

“국제법에 근거해 의연한 대응을 취하기 위해 구체적 조치에 대한 검토를 관계부처에 지시했다”는 것이 아베 총리의 워딩입니다.

아베 총리는 그러면서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이 끝났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앵커] 아베 총리가 “매우 유감이다”고 한 전범기업에 대한 자산 압류 신청, 어떤 내용인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죠.

[기자] 네, 지난 연말 우리 강제징용 피해자들 변호인단이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에 일본 전범기업인 신일철주금이 포스코와 함께 설립한 합작회사 ‘PNR’의 한국 자산을 압류해달라며 강제집행을 신청했는데요.

관련해서 변호인단은 지난해 두 차례 신일철주금 본사를 직접 방문해 협의를 요청했지만 신일철주금 측이 면담조차 거부하며 모르쇠로 일관하자 이에 대한 대응 조치로 한국 내 자산 압류를 신청한 것입니다.

여기다가 배상 판결을 받은 또 다른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에 대해서도 비슷한 압류 절차를 진행할 계획인데요. 이에 일본 정부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앵커] 아베 총리 워딩을 보니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등 ‘국제법’을 많이 언급하고 있던데 국제법이 어떻게 돼 있다는 건가요.

[기자] 네, 안 그래도 궁금해서 강제징용 손배소송을 수행한 김세은 변호사에게 “국제법이 어떻게 돼 있어서 아베 총리가 그러는 거냐” 라고 물어봤는데요. 돌아온 답변이 걸작이었습니다.

“그 국제법이 도대체 뭔지 나도 물어보고 싶다”는 답변이었는데요. 직접 들어 보시죠.

[김세은 변호사 / 법무법인 해마루]

“아, 저희도 사실 그게 궁금한데요. 일본 측에 좀 물어봐 주셔야 될 거 같은데. 어느 국제법, 계속 아베 총리나 고노 외무상 워딩이 그래요. 국제법 위반이다, 국제법에 근거해서 조치를 취하겠다고 얘기를 하는데 어느 국제법인지 사실 국제법이라는 건 없어요.”

[앵커] “국제법이 없다”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기자] 네, 통상 ‘국제법을 어겼다’고 할 때는 김세은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어떤 국제 조약, 또는 어떤 국제 협약, 몇 조 몇 조, 이걸 위반한 거다“ 이렇게 얘기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베 총리의 워딩은 이런 게 없이 그냥 거두절미하고 “국제법 위반이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는 건데요. 국내외를 향한 ‘여론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게 김세은 변호사의 말입니다. 직접 들어보시죠.

[김세은 변호사 / 법무법인 해마루]

“사실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모호하게 그냥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엄청 ‘국제법 위반이다’ 라고 이야기 하면 우리가 되게 큰 잘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어떤 걸 위반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주장이고요”

일본 정부 일부 각료가 ‘한국에 대한 트럼프식 관세 보복’ 등을 언급하는 것도 다 이런 여론전, 보수우익 결집 등 정치적 목적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앵커] 일본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면 어떻게 되나요.

[기자] 네,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재판을 받는 건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재판처럼 어느 일방이 제소를 한다고 해서 바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고요. 양 국 정부가 모두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기로 동의를 해야 재판 관할권이 국제사법재판소에 발생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미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새삼 국제 분쟁화 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국제사법재판소 재판은 옵션이 못 된다는 게 법조계의 설명입니다.

[앵커] 일본 정부는 저렇게 강경하게 나오는데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처해야 될까요, 그러면.

[기자] 네, 한일청구권협정 3조 1항엔 ‘본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배상업무가 종료됐다는 일본과 그건 정부 차원의 일이고 민간 차원은 다른 문제라는 게 우리 정부 입장인데요.

일단 외교 경로를 통해 풀어보고 안 되면 별도의 중재위원회를 구성한다든다 하는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의 말을 한 번 들어보시죠.

[조시현 /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한국 외교부가 지금 오늘 반응이 나왔잖아요. ‘비우호적이고,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다’고 했는데 저는 지금 단계에서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말한 것은 아닌가. 아베 정부가 제일 먼저 취할 것은 뭐냐면 협의를 해야죠. 언론 선전전을 할 것이 아니고…”

[앵커] 일본은 총리까지 나서 여론전을 펼치는데 우리 정부도 기민하게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될 것 같네요. 오늘 잘 들었습니다.

<2019-01-07>법률방송뉴스 

☞기사원문: 아베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결”… 강제징용 변호사 “아베가 말하는 ‘국제법’은 없다”

화, 2019/01/0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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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8일 충북지부전체회원모임에서 임헌영 소장님은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사무국에 요청을 하라고 하셨고, 지난 3월 24일 정기총회에서도 의문이 있으면 언제든지 사무국에 연락을하여 문의하라고 했습니다.

2018. 12. 14. 서울시교육청은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하여 행정처분을 했습니다.
행정처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운영에 있어서 법률 또는 행정처분 기준을 위반했기 때문이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 회원들이 공유하여야 할 중차대한 사안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영업상 경영상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며 비공개했던 총회 의사록을 교육청을 통해 입수해 확인해 본 결과
2002년 1월에도 동부교육청이 법인실태 조사후 고발 및 시정시시를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회원은 민문연 집행부에서 어떻게 연구소를 운영했으면 고발을 당해야 했는지 그 이유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작년에 또 서울시교육청이 현장 실사를 하고, 행정처분을 했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이 행정처분한 공문을 제공해주시고, 회원에게 공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화, 2019/01/08-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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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그날의 조서 기록 – 그대는 어째서 독립만세를 불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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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받는 사람의 실루엣
테이블
서류뭉텅이들

전등

1919년 3월 1일

100년 전 그 날은 몇몇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학교 기숙사에서, 총독부 순사로 보초를 서던 곳에서, 농촌의 민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뛰쳐 나왔던 모든 사람들의 걸음이다.

일제는 3·1운동 참여자들을 취조한 신문조서를 2000여건이나 남겼다.

참여자 200만명, 사망 7500여명, 피검자 4만7000여명이라는 규모에는 못 미치지만

당시 참여했던 민중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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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조서 기록을 열람합니다…

3.1운동 당시 신문조서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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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다함께 만들어온 세상 100년
그대는 어째서 독립만세를 불렀는가
100년전 3.1 운동 그날의 신문기록







화, 2019/01/08-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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