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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은 악질 친일경찰 계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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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은 악질 친일경찰 계난수

익명 (미확인) | 금, 2018/04/20- 14:17

열전친일파 19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에 다룰 친일파는 통감부 시절부터 일본군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했고, 병합 후 헌병보조원으로 줄곧 있다가 3・1운동 이후 순사와 경부보를 거쳐 경부로 진급했고, 독립군 사이에서 평안북도의 ‘일등 창귀’(倀鬼 : 호랑이에 먹혀 죽은 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친 계난수이다. 1930년에는 참의부의 맹장 이응서를 체포한 공적에 힘입어 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 이 훈장을 받은 조선인 경찰은 일제 치하 36년간 혜산 보천보전투 때 귀환하는 김일성의 항일부대를 추격하고 국내 동조자를 색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최령(崔鈴. 해방 후 최연崔燕으로 개명)과 의열단 폭탄반입사건 관련자를 체포한 김덕기(金悳基) 등 10여 명뿐이다.
이러한 공적에 비해 계난수의 개인사에 대한 자료를 매우 드물고 1941년 이후의 행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신문기사와 일제 문서를 근거로 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망라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한 그의 활약상(?)을 추적한다. 또한 만주로 건너간 이후 간도성 사무관 시절의 행적과 1940년경 동북항일연군 체포・귀순 공작 활동을 당시 시대상황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헌병보조원에서 경부가 되기까지 17년 걸려

계난수는 1890년 8월 1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1906년 강계군 사립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했다. 1908년 7월 일본군 조선주차군 의주헌병대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1919년 3・1운동 직후까지 12년간 헌병보조원으로 일했다.
헌병보조원제도는 의병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1908년 6월 11일 한국칙령 제31호 「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에 의거해 실시되었다. “폭도의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헌병보조원을 모집하여, 한국주차일본헌병대에 의탁하고, 그 복무에 대해서는 헌병대장의 지휘를 받는다.”(제1조)라는 조문에서 헌병보조원의 성격과 역할이 여실히 드러난다. 헌병보조원은 만 20∼45세의 조선인 한글 해독자 중에서 모집되었으며, 군속의 신분을 보유하고 ‘폭도의 진압과 안녕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헌병의 업무를 보좌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 시기 모집 정원은 4천여 명인데, 1908년 7월 1일부터 9월에 걸쳐 채용이 완료되었다. 헌병보조원은 전원 주차헌병대가 관장하며, 1개월 이내의 견습기간을 마친 후 헌병 1인당 2∼3명씩 배치되었다. 대우는 본봉·출장여비와 일어 해득자에 대한 통역수당이며, 순사 봉급과 같은 수준이었다.
계난수는 병합 전후로 의주헌병대 헌병보조원으로 있었다. 그로 인해 1912년 8월 1일 칙령 제56호에 의해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이후 1912년에서 1919년 사이 강계헌병분견대가 설치되자 고향인 강계로 전근한 것으로 판단된다. 1919년 5월 강계헌병분견대에서 헌병보조원으로서 3·1운동과 관련해 증인 이정화(李晶和)에 대해 취조할 때 통사(통역)로 참여해 신문을 도왔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헌병보조원으로서 계난수의 구체적인 활약상은 나타나지 않으나, 강계 3・1운동에 관한 기록(“4월 8일 역사적인 새 아침은 밝았다. 거사준비에 착수한 지 2주일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읍내 헌병분견대의 주구로 악명 높던 계난수의 무리조차 오늘 거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독립운동사 제2권 : 삼일운동사』 1971, 484쪽) 에서 계난수가 강경읍 헌병분견대 주구로서 악명을 떨쳤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의 여파로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뀌고 그에 따라 기존의 헌병경찰제도도 보통경찰제도로 변화했다. 1919년 8월 조선총독부관제가 개정되어 ‘총독무관전임제’가 폐지되고, 총독의 육해군 통솔권한을 없애는 등 총독의 군사적 색채를 약화시켰으며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헌병보조원제도도 폐지되었다. 일제는 1920년대에 경찰력 감소를 이유로 일반경찰관을 대규모로 확충하였고, 헌병 및 헌병보조원 출신자 다수가 경찰관으로 전직하였는데 순사로 전직한 조선인 헌병보조원 출신자는 4천여 명에 이른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인의 순사 지원자는 항상 채용인원에 비해 7~8배에 달했다. 그 이유로 순사가 조선인이 취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관직 중 하나이고 제1차세계대전 후의 불황으로 생활난이 심각해진 점을 들 수 있다.
계난수는 1919년 8월 20일 조선총독부령 제134호에 의한 관제개정으로 총독부 도순사로 임명되었으며, 평안북도 강계경찰서 순사로 발령받았다. 1920년 11월 강계경찰서 순사부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계난수는 국내외에서 밀정을 활용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추적, 검거하였고, 독립군과 교전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 강계경찰서 순사부장으로서 평북경찰부의 지휘하에 만주 안동현(安東縣)으로 파견나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였다. 즉 1922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원이면서 안동현 소재 이륭양행(怡隆洋行) 고원으로 안동현 우편국에 수신함을 설치해 독립군들 사이의 연락을 중계하던 김문규(金文奎)를 체포했다. 1923년 10월. 평안북도 강계군 종서면에서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벌이던 김기현(金基鉉)이 종서면주재소를 습격하려 한다는 첩보를 탐지하고, 김기현을 체포하기 위해 종서면에 출동하였다가 김기현이 만주로 피신하자 주민 전창엽(田昌燁)·김기흡(金錡洽)·조상국(趙尙國) 등 10여 명을 체포하여 고문을 자행했다. 1924년 8월에는 참의부 소대장 장창헌(張昌憲) 및 독립군 2명을 유인해 일본경찰에 살해되도록 만든 밀정 홍인화(洪仁化)를 보복 살해한 참의부 부원 최윤흥(崔允興)을 밀정 박희빈(朴熙彬)의 밀고를 받고 검거했다. 1925년 6월에는 참의부 소속 독립군 이의준(李義俊), 김봉흥(金奉興), 전창식(田昌植) 등의 부하 20여 명과 강계군에서 전투를 벌였다.
1923년에 당해년도 도경부보시험에 응시해 합격되어 『조선총독부관보』 1924년 3월 13일자에 이름이 올랐다. 1925년 강계경찰서 경부보를 지낼 때 월봉 44원을 받았다. 1926년 12월 강계경찰서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했으며 1927년 11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로 전근했다.

 

참의부 맹장 이응서를 체포한 공로로 경찰관리 공로기장 받아

계난수가 평북경찰부로 전근할 무렵 그곳 고등경찰과장은 독립운동가 체포로 명성(?)이 자자한 김덕기였다. 김덕기는 영화 〈밀정〉의 모티브가 된 ‘황옥경부사건’을 탐지하여 의열단의 2차 국내폭파작전을 막았고, 정의부 총사령관 오동진을 함정에 빠뜨려 체포한 자다. 평북경찰부에서 계난수는 직속상관인 김덕기의 지휘를 받아 독립운동가 검거에 맹활약을 펼친다.
1929년 4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한 고려혁명군 중앙위원장 최승호(崔承皞)와 일행 3명을 체포했다. 최승호 일행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왔다가 여관에서 계난수가 이끄는 형사대에 의해 피체된 것이다. 최승호와 박화용은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예비, 총포화약취체령 위반으로 신의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어 각각 징역 10년과 3년을 언도받았다.

07

경찰관리공로기장 수여식. 『매일신보』1930.9.19.

 

그해 5월 일찍이 사이토 총독이 국경시찰시 저격을 시도했고 참의부의 맹장으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200여 차례나 벌인 독립군의 거두 이응서(李應瑞)를 신의주에서 직접 체포했다. 그 공로로 계난수는 1930년 8월 4일 명치 43년 칙령 제438호에 의거해 칙정(勅定)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 경찰관리 공로기장은, 군인에게 천황이 직접 수여하는 금치훈장(金鵄勳章)에 비견될 정도로 권위 있는 상이다. 같은해 9월 17일 평북도청에서 열린 수여식에서 이시가와(石川) 평안북도지사에게서 공로기장을 전달받았다.(『매일신보』 1930.9.19. (3면) 「桂警部에 勅定 功勞章 授與式 擧行」) 이응서와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진행중이던 이응서가 1931년 2월 김덕기 고등경찰과장과 계난수 형사에 대해 불법감금과 절도, 폭행으로 고소를 제기했다. 신의주에서 체포된 다음 신의주경찰서에서 불법 감금과 고문・폭행을 당했고 자신이 갖고 있던 가방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이 이응서의 고소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김덕기 측도 이 문제를 일소에 부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08

 

1929년 12월경 계난수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7급)이면서 동시에 신의주경찰서 경부를 맡고 있었다. 1930년경 신의주경찰서의 발표에 따르면, 독립군이 국경을 침입할 때 경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된 자는 1년 내에 4천여 명이나 되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건수도 1백여 건에 이른다고 했다.
1931년 평안북도경찰부 재직중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그해 9월부터 1934년 3월까지 종군해 국경 대안경비를 비롯해 군대 및 군수품 수송, 민심사찰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1931년 9월에는 중국 안동현 등지에서 중국 관헌들에 대한 정보수집업무를 맡았고 10월에는 중국민에 대한 동향을 사찰했다. 1931년 12월 중국 군벌인 장학량(張學良)이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압록강 철교 부근에 대한 사찰 및 경계업무에 종사했다.
1932년 5월에는 오성륜(吳成崙)의 부하 김혁산(金革山), 임호(林虎) 등이 일본 관공리 암살과 관공서 폭파를 기도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밀정 이흥하(李興夏)를 시켜 정보를 수집했다. 이어 같은 달 신의주고등보통학교 학생격문살포사건 주모자인 이종림(李宗林), 박병상(朴炳商) 등을 체포하기 위해 김덕기(金悳基) 지휘하에 형사대를 이끌고 경성으로 출장, 수색활동을 벌였다.
같은 달 유석화(劉錫華) 순사부장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사건을 수사하고 혐의자를 체포했다. 계난수는, 김명시(金命時)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던 오빠 김형선(金炯善)을 도와 인천에서 기관지 〈꼼무니스트〉를 배포하며 노동운동을 하다가 조직이 탄로나자 중국으로 돌아가기위해 신의주에 왔다가 근우회 전 지부장 박은형의 집에 머물러 있던 것을 탐지하고 현장에서 그를 체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의 주요 인사 조봉암, 홍남표, 김찬, 김명시 등 16명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당시 평북경찰부 경부였던 스에나가 하루노리(末永淸憲)는 『조선사상범검거 실화집』에서 김명시의 체포과정을 상세히 다루었다. 또한 계난수는 같은 해 6월에는 중국상해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독립군들이 만주사변을 계기로 국내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안동현에 잠입해 상해교민단 단원 이계상(李啓尙)을 체포했다.
이후에도 계난수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로 계속 재직하며 고등경찰로 활약했다. 1932년 12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 관등 6급이었다. 1934년 3월 1일 만주국 황제가 수여하는 만주국 건국공로장, 1934년 4월 29일 만주사변 때 활약한 공로로 훈8등 서보장을 받았고, 같은 날짜에 ‘소화6년내지9년사변’에 대한 공로로 종군기장을 받았다. 1934년 11월 평안북도 도경부를 그만두고 만주로 건너갔다.

 

09

대만주국 건국공로훈장(1934)과 소화6년내지9년사변 종군기장(1934),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간도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 토벌•귀순공작을 벌이다

계난수는 1934년 12월 만주국 간도성공서(間島省公署) 경무청 특무과 사무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계난수와 함께 간도성으로 전근한 조선인 관리로는 전라북도 내무부 산업과장이었던 유홍순(민정청 실업과장),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윤태동(교육청 학무과장), 만주국 문교부 속관에서 시학관으로 승진한 김춘학(교육청 시학관) 등이 있었다. 이들은 만주국의 요청에 의해 조선총독부의 선발을 거쳐 조선인이 성 전체 인구의 60%(약 50만 명, 1934년 현재)를 차지하는 간도성 고위 관리로 영전해 온 것이다. 경무청 특무과는 주로 반만항일의 운동가들을 색출하고 신문하는 부서였다. 1937년 4월까지 경무청 특무관 사무관으로서 재직하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막론하여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는 임무를 담당했으리라 짐작된다. 1937년 4월 10일 경무청 특무과 사무관을 사직했다. 이후 일제시대 기록에서는 계난수가 종적을 감추었다가 해방 후 반민특위 관련문서 중 친일파 김창영 재판자료에서 다시 등장한다.

 

오호!! 밀림에 방황하는 제군!!
이 권고문을 보고 즉시 최후의 단안을 내려 갱생의 길로 뛰여 나오라!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고 참회할 것도 참회하고 이제까지의 군등(君等)의 세계에 유례없는 불안정한 생활에서 즉각으로 탈리(脫離)하야 동포애의 따뜻한 온정 속으로 돌아오라. 그리하야 군등의 무용과 의기를 신동아건설의 성업으로 전환 봉사하라! 때는 늦지 않다! 지금 곧 아(我) 150만 동포의 최후의 호소에 응하라. 최선을 다하야 제군을 평화로운 생활로 인도할 본위원회의 만반 준비가 제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金日成 等 反國家者에게 勸告文, 在滿同胞 百五十萬의 總意로」, 『삼천리』 제13권 1호(1941.1)

 

이 권고문은 1940년 12월경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본부가 길림・간도・통화성에서 항일무장활동을 벌이던 김일성 유격대 등 동북항일연군을 투항・귀순시키기 위해 비행기로 살포한 권고문이다.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길림・간도・통화성의 동북항일연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동남부치안숙정공작(東南部治安肅正工作)’을 실시하면서 이 지역에 일본군과 만주국군 6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고자 했다. 이때 위의 병력뿐만 아니라 일반 경찰, 특무기관, 지방행정기구, 협화회까지 총동원하여 사상・문화 토벌도 동시에 전개하였다. 이에 이범익 만주국 참의의 발의로 조선인 후원조직이 만주국 수도인 신경에 설립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다. 만주에서 발행된, 한글 어용신문인 만선일보는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뉴스’라는 난을 마련하여 조선인들의 후원금 내역과 후원회의 원호활동을 매일같이 보도하였다. 이때 김창영은 만주국 치안부 경무사 이사관 겸 통화성 경무청 이사관으로서(1939.5~1943.4)으로서 조선인 동북항일연군의 토벌과 귀순공작을 진두지휘하였다.

 

단기 4275년[1942년] 10월부터 6개월간은 안광훈(安光勳) 유홍순(劉鴻洵) 김송렬(金松烈) 계난수 등 외 일만 군경과 더불어 동만지구 일대의 숙청공작을 추진 협력하여 김일성 부대 임수산(林守山) 외 30여 명, 양정우(楊靖宇) 군사령부 총무부장 오성륜(吳成崙) 외 10여 명, 동 군사령부 경위여장(警衛旅長) 박득범(朴得範) 외 6명, 동 사령부 소속단장 김백산(金白山), 김일성 부대 정치주임 김재범(金在範) 외 6명 등 수백여 명의 항일조선군을 체포 숙청케 하였고(후략)(「김창영 의견서(1949.5.5.)」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김창영의 진술이 사실에 부합하는 점이 많지만 “4275년(1942) 10월부터”이라는 시점 부분은 ‘1940년 10월’의 오류로 판단된다. “1940년 10월부터 ‘추동계대토벌’이 시작되면서 군사토벌은 제3단계(1940.10~1941.3)에 들어서게 된다.(중략) 1942년 3월 19일 토벌사령부 및 각 토벌대의 해산명령이 내려져 소위 ‘野副大討伐’은 막을 내렸다”(윤휘탁, 『일제하 만주국연구』, 1996, 161쪽)에서 보듯이 1941년 3월경 제3단계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끝나기 때문이다. 또 김창영의 진술대로라면 박득범의 귀순시기가 1942년~1943년 사이지만, 1940년 10월 연길 野副토벌대사령부에서 발행한 「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에 따르면 1940년 6월 귀순하고, 10월에는 野副 토벌대장과 선전용 기념사진을 찍는다. 또한 양정우 1940년 2월 총살되어 효수, 조아범 1940년 12월 총살, 위증민 1941년 3월 병사 등 각종 기록에 비추어 김창영의 기억에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다.)

 

10

1940년 10월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은 일본군 토벌대를 방문하고 일본 천황과 만주국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野副토벌대사령부에서 건립한 충혼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 가운데줄 왼쪽부터 김재범, 박득범, 김백산. 출처 「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 1940.10.19)

 

 

김창영은 1949년 5월 반민특위 조사에서 동북항일연군들을 토벌・귀순시킨 자신의 공적을 위와 같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그의 말처럼 일제의 ‘동남부치안숙정공작’으로 인해 오성륜・박득범・김재범 등 1천여 명의 동북항일연군들이 투항・귀순하고, 양정우・조아범・허형식 등 주요 지휘관들이 사살되어 길림・간도・통화성의 동북항일연군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한창 진행되던 1940년~1941년 사이, 계난수는 “귀순공작에 있어서 간도성 공작반 총지휘자는 조선인 유홍순이었고, 같은 성 연길현 공작반장은 조선인 김송렬, 같은 성내 왕청현 공작반장은 조선인 계난수(전 간도성 사무관)였다”(「김창영 피의자신문조서(제3회)(1949.4.20.)」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에서 보듯이 간도성 왕청현 공작반장으로서 제1로군사령부 경위여장 박득범 등 7명을 귀순시키는 등 치안숙정공작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1년 이후와 해방 후 계난수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진주로 만주국이 멸망했다. 이때 만주국에 있던 많은 친일파들이 인민재판으로 처형되거나 소련의 유배지로 끌려갔다. 계난수가 이 경우에 해당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후 계난수는 역사의 법정으로 호출되어 냉엄한 심판을 받는다.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친일행적이 수록되었다. 같은해 11월 30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의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에게 내려진 죄목은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한 행위”(특별법 제2조 제3호),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저해한 행위”(제5호), “일제의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탄압하는데 적극 앞장선 행위”(제16호),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협력해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행위”(제19호)이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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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全斗煥氏

 

夫妻回顧錄(부처회고록)

憤鬱又長歎(분울우장탄)

不恥焉如此(불치언여차)

衆言罰未完(중언벌미완)

 

전두환 씨에게 묻소

 

두 夫妻가 함께 회고록을 펴내니

분하고 답답한 맘 또 장탄식하네

부끄러워 않음 어찌 이와 같은가

罰이 미완성이라 많은 이 말하네.

 

<時調로 改譯>

 

夫妻의 회고록에 憤鬱하여 또 장탄식

부끄러워하지 않음 어찌 이와 같은가

罰함이 미완성이라 많은 사람 말하네.

 

*夫妻: 부부(夫婦)  *回顧錄: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적은 기록 *憤鬱:

분한 마음이 일어나 답답함 *長歎: 긴 한숨을 지으며 깊이 탄식하는 일. 장탄

식(長歎息)  *如此: 이러함  *衆言: 많은  사람의  *未完: 未完成. 아직 덜 됨.

 

<이우식 지음>

일, 2018/09/02- 14:09
20
0

戊戌年國恥日

 

恥辱皆忘久(치욕개망구)

邦亡百八年(방망백팔년)

無量分斷苦(무량분단고)

鐵壁孰能穿(철벽숙능천)

 

戊戌年의 國恥日에

 

수치와 모욕 다 잊음도 오래

나라 망한 지 어느덧 百八年

헤아릴 수 없는 분단의 괴롬

견고한 벽을 뉘 능히 뚫으랴.

 

<時調로 改譯>

 

치욕을 잊음도 오래 亡國 어언 百八年

헤아릴 수도 없는 둘로 갈라진 괴로움

남북의 견고한 벽을 누가 능히 뚫으랴.

 

*國恥日: 나라가 수치를 당한 날. 흔히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國權을 강탈당한 날인

1910년 8월 29일을 이른다 *恥辱: 수치와 모욕 *無量: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음 *鐵壁: 쇠로 것처럼 견고한 벽. 쇠로 벽이란 뜻으로, 잘 무너지거나 깨뜨

려지지 않는 대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방비가 매우 튼튼함을 비유적으로 이름.

 

<이우식 지음>

일, 2018/09/02- 14:11
35
0

 

[헌병대 기동대 지원 자격]

 

안전놀이터 기본 조건

 

1.신체 등급 1~2등급 현역대상자

2.신장 175cm 이상

3.시력(나안) 0.8 이상

4.2종소형면허 혹은 원동기 자격증 소유

 

2종소형면허와 원동기 자격증이 필수인 이유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헌병 기동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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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8/09/03-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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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국정교과서 지지 홍아무개 교수… 교육부 “학회 보고 결정,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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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부,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 공개 교육부가 지난 2016년 공개한 국정교과서 (중학교 “역사 ①, ②”, 고등학교 “한국사”) 현장검토본. ⓒ 유성호

김상곤 교육부 장관은 지난 6월 8일 ‘국정화진상조사 백서’를 공개하면서 다음처럼 말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권력의 횡포이자, 시대착오적인 역사교육 농단이었다. 국정화가 교육부를 중심으로 추진됐던 게 사실이며, 정부의 과오에 대해 국민들께 깊은 사과를 드린다.”

하지만 이 발언이 나온 지 한 달 뒤인 지난 7월, 교육부와 경기도교육청이 국정교과서의 ‘핵심 설계자’를 자처한 인사에게 국가교육과정 연구책임자를 맡긴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관한 대국민 사과를 내놓고도 관련 인사를 ‘교육과정 작업’에 투입한 것이다. 이 연구는 2022 개정 교육과정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김상곤 ‘국정화 사과’ 뒤 한 달, 교육부의 황당 행동

2일 교육부 관계자 증언과 기자가 입수한 문서 내용에 따르면, 경기도교육청은 지난 7월 홍아무개 교수(고려대)를 연구책임자로 하는 ‘국가교육과정 전문가포럼’ 계약을 맺었다.

이 사업은 경기도교육청이 실무를 맡고 있지만, 교육부가 특별교부금 6000만 원을 지원하는 등 사실상 교육부가 계획, 주도해온 교육과정 사업이다. 홍 교수에 따르면 홍 교수를 책임자로 한 이 연구엔 한국교육과정학회 인사 등 1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 학회 유효회원은 100명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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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 교수가 주도하는 “국가교육과정 전문가 포럼” 안내문. ⓒ 윤근혁

지난 8월 24일, 홍 교수는 해당 연구사업 일환으로 ‘2018년 제1차 국가교육과정 전문가포럼’을 열기도 했다. 고려대에서 열린 이 포럼의 주제는 ‘학교교육과정 자율화를 위한 국가교육과정 개선 방안 모색’이었다. 이 자리엔 교육부 교육과정 담당 관리들을 포함해 230여 명이 참여했다.

눈길을 끈 건 개회사를 한 뒤 발표에 나선 홍 교수의 기조 발제 내용이었다. 주제는 ‘학교 교육과정 학생 선택권 확대 방안’. 박근혜 정부 당시 ‘교육과정 자율화와 학생 선택권을 제한한다’는 지적을 받아온 역사교과서 국정화 과정에서 주요하게 목소리를 낸 인사가 문재인 정부에서 ‘교육과정 자율화와 학생 선택권 확대’를 말한 것이다.

국정교과서 보고서를 보낸 교수에게 연구책임을?

홍 교수가 과거 교육부에 건넨 ‘정통 한국사교과서의 확보를 위한 방안과 과제'(2014. 12.) 보고서를 보면, 그는 당시 검정교과서에 대해 색깔론을 제기한 뒤 국정교과서 발간을 제안했다. 지난달 28일 만난 홍 교수는 기자에게 이 문건이 “국정교과서 핵심플랜을 제시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홍 교수는 이 보고서에서 “현재 (역사)교과서들은 북한 역사교과서를 표절했다고 할 정도로 역사관이 많이 닮아 있다”면서 “북한식 사관을 가진 재야 사학자들에게 (검정교과서 집필을) 맡겨둔다면 공교육을 책임진 교육부는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홍 교수는 “교과목의 적용 범위가 필수일 경우 국정(교과서)이 맞다”면서 “한국사의 경우 검정과 국사편찬위 발행 정통 한국사 공존→정통 한국사의 적용으로 나아가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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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 교수가 교육부에 2014년에 보낸 이른바 “정통 한국사교과서의 확보를 위한 방안과 과제” ⓒ 제보자

또 홍 교수는 지난 2014년 8월 교육부가 연 ‘한국사 교과서 발행체제 개선 토론회’ 자리에서나, 이 보고서 등을 통해 유관순 열사가 기존 고교 검정 <한국사>교과서에서 빠졌다는 사실을 공식 지적했다. 이후 교육부는 이 사실을 TV광고로 활용하는 등 국정교과서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 대해 홍 교수는 “내가 먼저 교육부에 제안한 것”이라면서 “원고료를 받았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이 보고서 제출 전에 진행된 위 토론회에 나와 ‘교과서 발행 구분 준거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방안’이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하기도 했다.

기자가 입수한 ‘올바른 역사교과서 지지 확보 방안'(2016. 9.)이라는 교육부 내부 문서를 보면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은 ‘국정교과서 지지교수’로 전국에서 홍 교수 등 5명을 지목한 뒤 “10월, 차관 면담”이라고 적어놓기도 했다.

교육부 “학회 보고 연구 맡겨”… 홍 교수 “국정교과서 지금도 지지”

현직 고교역사 교사인 김육훈 전 역사교육연구소장(전 역사교과서국정화진상조사위원)은 지난 1일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권 당시 역사교과서 국정화 주장을 선도적으로 제기했던 사람이 교육과정 연구의 책임자이며 나아가 ‘학생선택권 신장 방안’을 연구한다는 것이 참 어처구니없다”면서 “교육당국이 이 사실을 알고도 진행한 일인지 묻고 싶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 교육과정 관련 부서 관계자는 지난달 27일 기자와 한 전화통화에서 “우리는 홍 교수를 보고 정책연구를 맡긴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학회를 보고 맡긴 것”이라면서도 “홍 교수가 교육과정학회장이란 것을 뒤늦게 알았다. 꼼꼼하게 못 살펴본 점은 불찰”이라고 해명했다. 홍 교수는 올해 1월부터 학회장을 맡아왔다.

홍 교수도 기자와 직접 만나 “교육부가 나한테 연구를 준 게 아니라 내가 학회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책임자) 일을 하는 것”이라면서 “내가 국정교과서를 지금도 지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번 교육과정 포럼 참여도 일관적 애국의 측면”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홍 교수는 “진영논리에 따라 나를 배제하라는 것은 ‘왜 블랙리스트를 작동 안 시키느냐’라는 논리와 똑같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8-09-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자칭 국정교과서 ‘핵심 설계자’에게 국가교육과정 연구책임 맡긴 교육부

월, 2018/09/0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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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8/09/03-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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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김희원의 거짓말에 대한 김점구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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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김희원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문제를 제기하는 나(독도수호대 대표)를 음해하기 위해 독도수호대 회원을 사칭하며, ‘독도수호대가 정관 공개를 거부했다’는 허위의 주장을 하며, 독도수호대와 나에  대한 명예훼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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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원은 9월2일자 내 페이스북에 “회원에게 정관 공개를 거부한 이유가 뭔지 궁금하네요. 왜 회원에게 공개 안하시나요”라는 허위의 글을 게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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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희원은 독도수호대 회원이 아니다.
독도수호대와 인연은 독도탐방행사에 참가자로 동행했던 것이 유일하다.
8월 17일 가입신청을 했으나 현재 미승인 상태이고, 첫회 회비 미납상태다. 회비가 납부되면 정식 회원 자격이 부여된다.
그러나 회비를 납부하기도 전에 독도수호대에 대한 허위의 주장을 한 것을 볼때 정상적인 회원 가입이라 볼수 없고, 해당 행위를 했으므로 가입을 보류할 수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독도탐방 행사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회원이라고 주장한다면, 민족문제연구소가 주도한 시민역사관 건립에 참여안 발기인, 기부자 모두는 회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들을 회원이라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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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김희원은 독도수호대에 정관 공개를 요청한 사실이 없다. 당연히 거부한 사실도 없다.
김희원이 해수부에 공개청구했으나 해수부는 자체 판단으로 비공개했고, 독도수호대에 공개여부를 물은 사실(정보공개법에서 정한 제3자 의견 조회)이 없다. 당연히 “정관 공개 거부”도 성립할 수 없다.
김희원은 ‘독도수호대가 공개 거부’라는 주장만 할 뿐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거부한 사실이 없으므로 증명은 불가능하다.
이로써 민족문제연구소 부위원장 김희원의 거짓말은 명명백하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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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김희원은 왜 독도수호대 회원을 사칭하며 ‘정관 공개 거부’라는 거짓말로 독도수호대와 나를 음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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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문제를 제기하는 내 입에 재갈을 물리고, 민족문제연구소 문제가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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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이미 민족문제연구소의 문제를 제기하는 전 운영위원장을 제명했고, 현 간부는 서울 소재 지부장을, 자칭 지부장은 전남 소재 지부장을 각각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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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원은 1만 3천여 회원이 속해있는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이고, 김희원의 허위 주장은 일개 개인의 의견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김희원의 허위 주장이 ‘민족문제연구소가 독도수호대를 상대로 명예훼손을 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를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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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민족문제연구소 설립 초기부터 회원이다.
자기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만천하에 고발한 임종국 선생의 진실을 향한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민족문제연구소의 정신이라고 생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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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민족문제연구소 상근자와 운영위원은 어떠한가?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거짓말을 일삼고 일부 운영위원은 작당한 듯이 문제를 제기하는 회원을 중상모략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미 내가 민족문제연구소의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가 “………….”(때가 되면 밝힌다)라며 허위 주장을 한 사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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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구한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김희원 부위장은 독도수호대와 나를 상대로 하는 허위주장에 대해 공개사과하고, 그 사과문을 홈페이지에 게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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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과를 하지 않고 원상회복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명예회복을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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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4

화, 2018/09/04-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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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告人君(봉고인군)

 

一國興亡路(일국흥망로)

人君左右之(인군좌우지)

難題南北解(난제남북해)

最重不相欺(최중불상기)

 

삼가 나라님께 아뢰오

 

한 나라가 흥하고 또한 망하는 길

나라님이 좌지우지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남과 북 함께 풀되

서로 안 속이는 게 가장 重합니다.

 

<時調로 改譯>

 

한 나라의 흥망은 人君께 달렸습니다

어려운 문제일랑 남북이 더불어 풀되

속이지 아니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奉告: 받들어  고함. 또는  삼가  아룀  *人君: 나라님.  임금  *左右之: 좌지우지(左之

右之).  이리저리  제 마음대로  휘두르거나  다룸  *興亡: 잘되어  일어남과  못되어

어짐 *難題: 難問題.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나 사건 *最重: 가장 귀하고 중요함.

 

<2018.9.4, 이우식 지음>

화, 2018/09/04-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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敢問人君敎育部長官任命

 

四方多傑物(사방다걸물)

擢擧豈如斯(탁거기여사)

衆歎號回撤(중탄호회철)

祈望再考思(기망재고사)

 

교육부 장관 임명에 대해 감히 나라님께 여쭙소

 

사방에 뛰어난 인물 많기도 하건만

발탁해 重用함 어찌 이와 같습니까

많은 이 탄식하며 撤回 부르짖으니

거듭 考慮하기를 빌고 또 바랍니다.

 

<時調로 改譯>

 

사방 傑物 많건만 擢擧 왜 이러합니까

많은 이 탄식하며 임명 撤回를 외치니

거듭해 고려해 보길 빌고 또 바랍니다.

 

*敢問: 쉽게  대하기  어려운  상대에게  거북함이나  두려움을  무릅쓰고 물음. 또는

그 물음  *人君: 임금.  나라님  *傑物: 뛰어난  물건.  뛰어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擢擧: 발탁(拔擢)하여 중용(重用)함 *如斯: 이러함 *回撤:

철회(撤回). 이미 제출(提出)하였던 것이나 주장(主張)하였던 것을 다시 회수(回

收)하거나 번복(飜覆)함 *祈望: 빌고 바람 *考思: 고려(考慮). 생각하고 헤아려 봄.

 

<2018.9.4, 이우식 지음>

화, 2018/09/0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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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명칭 직권변경 위해 변경안내 공고… 대체 도로명으로 ‘고려대로’ 등 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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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구청장 이승로)가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해 ‘인촌로’의 도로명 변경을 추진한다.

인촌은 고려대 설립자 김성수의 호로, 그는 일제의 징병·학병을 지지하는 글을 싣는 등 친일 행각을 벌여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이다. 지난해 4월 대법원은 김성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판결했고, 정부는 지난 2월 국무회의를 통해 그가 1962년에 받은 건국 공로훈장을 취소했다. 인촌로 명칭 변경은 그동안 시민사회에서 꾸준히 제기돼 온 문제다.

성북구는 “대법원 판결과 정부의 훈장 취소에 따른 조치이자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 등의 부적합한 도로명 변경에 대한 요구를 적극 수용한 것”이라며 “정부는 훈장 취소 및 생가와 동상 등 5곳의 현충시설 해체를 진행한 바 있다, 성북구도 시민사회의 요구 등을 반영해 인촌로 변경을 본격적으로 추진, 친 일 적폐 청산에 기여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인촌로는 6호선 보문-고대병원-안암-고대앞사거리 구간(폭 25m, 길이 약 1.2km)의 도로로 종속도로 190개, 건물번호는 1527개가 해당 도로에 포함돼 있다. 2010년 정부의 도로명 및 건물번호 기준의 주소체계 시행에 따라 해당 도로에 인촌로란 이름이 붙었다.

성북구는 “명칭 직권변경을 위한 첫 단추로 9월 초 도로명 변경안내문을 공고하고 주민의견을 수렴하겠다”라며 “이후 도로명주소위원회 심의를 거쳐 주소사용자를 대상으로 서면동의를 받을 계획이다, 추후 도로명부여 세부기준의 검토과정이 남아 있으나 우선은 지역적 특성을 감안한 ‘고려대로’ 등이 대체 도로명으로 거론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인촌로를 사용하는 건물의 지역주민, 외국인, 사업자 등을 포함한 주소사용자의 과반수 동의가 필요하다”며 “도로명 변경의 타당성을 알리고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도로명 인촌로 변경추진 기획팀(T/F)도 운영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만해 한용운이 성북동으로 거처를 옮긴 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일대에 거주하며 성북구는 항일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다”라며 “단순히 도로명 변경의 의미를 넘어 엄혹한 일제치하에서도 광복의 희망을 잃지 않았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는 각오로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앞서 광주 서구는 친일 장교출신인 김백일의 이름에서 유래한 ‘백일로’를 ‘학생독립로’로 변경한 바 있다(관련기사 : 친일 인사 이름 딴 광주 ‘백일로’ 사라진다).

<2018-09-0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파 도로명’ 인촌로, 8년 만에 이름 바뀌나

화, 2018/09/04-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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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기념 답사 동행기] 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용산은 오랜 시간 ‘남의 땅’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주둔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일본이 물러간 뒤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그리고 지난 6월, ‘전 주인’이었던 주한미군사령부가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비로소 용산은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주한미군사령부의 이전과 함께 용산의 역사적 가치를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도 일고 있다. 최근 국가보훈처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는 효창공원을 독립기념공원으로 만들자는 방안을 밝혔다. 지난 8월 29일에는 숙명여대를 사이에 두고 효창공원 건너편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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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식민통치의 흔적이 남겨진 용산에 세워진 “식민지역사박물관” ⓒ 김경준

지난 1일,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개관 후 첫 행보로 용산에 얽힌 일제 침략의 역사를 시민들과 함께 짚어보는 ‘특별답사’를 진행했다. 답사에는 30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했다. 뜻 깊은 이번 답사에 기자도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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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기념 특별답사에 참여한 시민들의 모습 ⓒ 김경준

일제에 의해 ‘군사기지’가 된 용산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은 ‘군사기지’였다. 용산의 군사기지화는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일제는 이곳을 군용철도인 경의선의 분기점으로 설정한 뒤, 각종 군용시설물을 설치했다.

용산에는 제20사단 제39여단 보병 제78연대·기병 제28연대·야포병 제26연대·제40여단 보병 제79연대 등 일본군 4개 연대가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 1908년 10월에는 ‘조선주차군사령부’가 설치됐다.

▲ 용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벌이는 일본군대의 모습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이후 상주군 편제로 바뀌면서 1918년 6월부터는 ‘조선군사령부’로 개칭됐다. 조선군 사령관은 한반도 전역에 배치된 일본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조선총독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다. 조선군 사령관 출신으로 조선총독에 부임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2대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9대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 등이 대표적이다.

지금의 용산우체국 옆으로 200미터가량 곧게 뻗은 도로의 끝에 조선군사령부 청사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기지가 조성되면서 자연스레 청사가 멸실됐다고 한다. 청사는 없어졌어도 당시의 흔적을 증명하는 콘크리트 벙커 건물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은 상태라 단단한 출입문으로 막혀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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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에 있던 조선군사령부 청사의 모습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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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조선군사령부 청사가 있었던 자리엔 미군기지가 들어서 있다. 지난 6월, 주한미군사령부가 경기 평택으로 이전했지만 아직 이곳의 출입구는 굳게 닫혀있다. ⓒ 김경준

코앞에 그 흔적이 있지만, 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현장해설을 맡은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실망하는 답사단원들에게 “그래도 과거에는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이 근처도 못 오게 했었다”라면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조선군사령부 건너편에는 조선총독관저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총독 관저하면 남산 왜성대 부근에 있었던 통감 관저나 조선총독부 뒤편 경무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용산에도 또 다른 총독 관저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역대 조선총독 그 누구도 집무 혹은 거주공간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지관리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고, 시내와 멀리 떨어져 업무상 불편이 크다는 게 이유였다. 대신 연회를 위한 공간 혹은 일본 황족 및 서양 귀빈을 위한 숙소로 드문드문 활용됐다고 전해진다. 총독 관저는 한국전쟁 당시 반파되면서 철거됐다. 총독 관저가 있던 터 역시 미군기지 안에 있어 그 흔적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쇼핑객·여행객으로 분주한 용산역 광장… 그 속에 숨은 사연

답사단이 용산역 광장에 도착했을 때, 광장은 주말을 맞아 쇼핑객과 관광객 그리고 먼 길 떠나는 열차 승객들로 북적였다. 지금은 평화롭기 짝이 없는 공간이지만, 이곳 역시 알고 보면 한 많고 사연 많은 공간이다.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장으로 떠나는 일본군 병력들이 모두 이곳에서 출정식을 거행했기 때문이다.

징용·징병으로 끌려간 강제동원 피해자들 역시 이곳에서 그리운 고국 땅, 가족과 눈물의 작별을 해야만 했다. 최소 10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용산역 광장에 모여 열차를 타고 군함도, 사할린, 쿠릴열도, 남양군도로 끌려갔다.

가슴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지난해 8월에는 용산역 광장 한 켠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세워졌다. 답사단 일행이 노동자상을 둘러싸고 광장에 얽힌 구슬픈 사연을 듣는 동안, 지나가는 시민들도 관심 갖고 노동자상 옆의 안내 문구를 읽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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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8월에 용산역 광장에 세워진 “강제징용 노동자상”.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역 광장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전장으로 끌려가기 위해 집결했던 장소였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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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징용 노동자상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단원들의 모습 ⓒ 김경준

철도노동 순직자들을 위한 위령제의 진실

철도 건설과 함께 용산을 철도 행정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던 일제는 용산역을 중심으로 철도관리국, 철도병원, 철도구락부, 철도원양성소 등 철도 관련 시설을 대거 조성했다.

용산역 맞은 편에 있는 낡은 건물은 1928년에 지어진 ‘용산 철도병원’이다. 철도공사 도중 다친 노동자들을 치료할 목적으로 지어진 이 병원은 해방 후 중앙대학교에서 위탁 경영하다가 중앙대병원이 흑석동으로 이전하면서 빈 건물로 남게 됐다. 답사에 참여한 한 시민의 입에서 “만날 지나다니면서 도대체 무슨 건물일까 궁금했었는데…” 하는 읊조림이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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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에 세워진 “용산철도병원”. 해방 후 중앙대에서 위탁 경영하다가 현재는 주인 없는 빈 건물로 방치되고 있다. ⓒ 김경준

이순우 연구원은 “이 건물은 2008년에 등록문화재로 등재됐으니 철거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계속 빈 건물로 방치할 수는 없을 테고, 옛 서울역사 건물처럼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정부 당국의 관심을 촉구했다.

용산역에서 이촌역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는 철도선형과 서빙고로 도로가 만들어낸 원뿔 모양의 지형이 나타난다. 과거 이곳엔 ‘용산철도공원’이 있었다. 일제는 1915년 철도공원 안에 철도순직자조혼비(鐵道殉職者弔魂碑)를 세우고 매년 순직한 철도노동자들을 위한 조혼제(위령제)를 지냈다.

현재 이 비석은 존재하지 않지만, 위령제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이 연구원은 “유족들 입장에서야 가족에 대한 위령제를 지내는 게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위령제를 지내는 전통이 일제 때부터 시작돼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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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철도공원이 있었던 자리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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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철도공원이 있던 자리에서 “철도순직자조혼비” 사진을 소개하는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김경준

개성에 있던 비석은 왜 용산으로 왔을까

용산역 뒤편에 있는 철도회관 입구에는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비석이 있다. ‘연복사탑중창비'(演福寺塔重創碑)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공덕으로 건립된 연복사 오층불탑의 건립 내력을 담은 비석이다.

본래 이 비석의 소재지는 경기도 개성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일제에 의해 용산의 철도구락부 구역으로 옮겨졌다. 이후 이 비석은 한동안 학계에서 소재불명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2012년 우연히 길을 가다 이 비석을 발견한 한 시민이 블로그에 포스팅하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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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역사 뒷편 철도회관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연복사탑중창비” ⓒ 김경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던 비석이 긴 세월 동안 소재불명이었다는 사실도 우습지만,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강제로 쫓겨나 엉뚱한 곳에서 방치돼야만 했던 비석의 신세도 처량하기만 했다. 일제에 의한 우리 문화재 수난사의 한 대목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생태공원보다는 역사공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올해 광복절 경축식이 열린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은 과거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연병장으로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광복절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이곳은 114년 만에 국민의 품으로 돌아와 비로소 온전히 우리 땅이 된 서울의 심장부, 용산”이라며 경축식을 용산에서 거행하는 까닭을 밝혔다. 그리고 미군이 떠나간 자리에 “미국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같은 자연생태공원을 조성하겠다”라고 천명했다.

미군기지 자리에 도심 속 생태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구상에 이견을 제시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용산을 식민지 침략의 역사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메시지가 없었던 점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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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 용산지사 뒷편에 위치한 서울교 원불교당. 일제강점기 당시 이 자리엔 용광서(龍光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침략전쟁을 수행하다 죽은 전몰장병의 유골을 안치했던 사찰이었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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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영삼거리 앞에 위치한 구 경룡관(京龍館) 터. 1921년에 세워진 경룡관은 일본인 전용극장이었다. 일제 말기에 성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해방 이후까지도 같은 이름으로 운영되다가 2003년에 폐관했다. ⓒ 김경준

용산은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과도 같은 지역이다. 생태공원 조성에 앞서 용산에 깃든 치욕의 역사를 기념하는 역사공원 조성이 우선돼야 한다. 아픈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다짐하는 뜻에서 미군이 떠나간 바로 그 자리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건 어떨까. 식민통치의 본산이나 다름 없던 용산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세운 이유가 그렇듯이 말이다.

<2018-09-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붐비는 용산역 광장, 그 속에 숨은 한맺힌 사실

화, 2018/09/04-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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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8/09/05-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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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8/09/0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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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의회, ‘반민족행위자 단죄 촉구결의안’ 채택… 시민단체 “경의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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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지역 51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3일 오전 대전시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날 대전시의회가 만장일치로 ‘반민족·반헌법행위자 단죄 및 국립현충원묘소이장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대전시의회가 만장일치로 ‘반민족·반헌법행위자 단죄 및 국립현충원묘소이장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이 결의안을 대표발의한 의원에게 감사를 표하고, 대전시의회에도 ‘경의’를 표했다.

대전시의회(의장 김종천)는 3일 오전 제239회 정례회 제1차 본회의를 열어 ‘반민족·반헌법행위자 단죄 및 국립현충원묘소이장을 촉구하는 결의안(이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오광영(더불어민주당·유성2) 의원이 지난 20일 동료의원 13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한 것으로, 대전시의회는 결의안을 통해 “친일파와 군사쿠데타 주역 등과 같은 반민족·반헌법행위자 63명이 아직도 서울과 대전 등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며 “친일청산, 역사적폐청산을 위해 반드시 그들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대전시의회는 또 반민족·반헌법행위로 인해 4.19를 불러온 장본인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이 ‘배재학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배재대 교정에 서 있는 것과 관련,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정권 유지에 이용하는가 하면 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자인 ‘이승만’을 기리는 동상이 십수 년째 서 있고, 독재자의 호를 딴 우남관 등 건물 이름도 아직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며 “하루빨리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채택된 결의안은 앞으로 청와대와 국회, 정부, 각 정당, 국가보훈처, 배재대학교 등에 보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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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이 지난 5월 24일 오전 11시 대전 배재대학교 이승만 동상 앞에서 동상 철거 집중홍보를 하고 있다. ⓒ 이승만동상철거공동행동

이러한 결의안 채택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를 비롯한 대전지역 51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3일 오전 대전시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전시의회에 ‘경의’를 표하고, 이승만 동상 철거와 친일반민족·반헌법행위자 이장을 촉구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오늘 대전시의회가 오광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반민족·반헌법행위자 단죄 및 국립현충원묘소이장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며 “그동안 이승만 동상 철거와 반민족행위자 이장을 촉구하는 시민운동을 해온 단체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소식”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 지역 대전국립현충원에는 김창룡을 비롯한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유학성 등 군사반란에 참여하였던 반헌법행위자들이 역대 정권의 비호 아래 대전시민들을 비웃듯이 편안한 잠을 자고 있다”며 “그곳은 독립유공자를 비롯한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희생하신 분들이 영면하셔야 할 영예로운 곳인데, 어찌 국립묘지가 그런 자들의 공동묘지가 되어가고 있는지,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개탄했다.

이들은 또 “뿐만 아니라 배재대 교정에는 독재자이자 민간인학살의 책임자인 이승만 동상이 버젓이 서 있다. 4.19혁명에 의해 역사적 평가가 끝났음에도 학교 당국 일부 관계자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며 “하루빨리 학교당국은 이승만 동상을 자진 철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우리 대전지역이 안고 있는 이 두 가지 과제, 즉 김창룡 등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반헌법행위자를 국립묘지 밖으로 이장하는 것과 배재대학교 교정의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적폐를 청산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발언에 나선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가 친일파와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오염됐다. 또 배움의 전당 배재대학교는 독재자 이승만의 동상으로 더럽혀져 있다”며 “이제는 그러한 더러운 ‘적폐’를 깨끗하게 청산할 때이다. 더 이상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2018-09-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이승만 동상 철거하고, 국립묘지에서 친일파 이장하라”

수, 2018/09/0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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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人吟(유인음)

 

流人無定處(유인무정처)

此夜宿誰家(차야숙수가)

樹下巖間臥(수하암간와)

群星似撒沙(군성사살사)

 

떠도는 이의 노래

 

떠도는 이에겐 정해진 곳 없으니

이 밤에는 누구의 집에서 묵을까

나무 아래 바위틈에 몸을 누이니

수많은 별들은 모래를 흩뿌린 듯.

 

<時調로 改譯>

 

流人은 定處 없으니 此夜 어디 묵을까

나무 아래 바위틈에 지친 몸을 누이니

밤하늘 수많은 별들 모래를 흩뿌린 듯.

 

*流人:  他地를  떠도는  사람  *無定處:  일정하게  정해진  곳이  없음  *此夜:  이 밤

*樹下: 나무의 아래나 밑 *群星: 무리를 이룬 많은 별 *撒沙: 모래를 흩어 뿌림.

 

<2018.9.6, 이우식 지음>

목, 2018/09/06-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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