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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은 악질 친일경찰 계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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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은 악질 친일경찰 계난수

익명 (미확인) | 금, 2018/04/20- 14:17

열전친일파 19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에 다룰 친일파는 통감부 시절부터 일본군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했고, 병합 후 헌병보조원으로 줄곧 있다가 3・1운동 이후 순사와 경부보를 거쳐 경부로 진급했고, 독립군 사이에서 평안북도의 ‘일등 창귀’(倀鬼 : 호랑이에 먹혀 죽은 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친 계난수이다. 1930년에는 참의부의 맹장 이응서를 체포한 공적에 힘입어 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 이 훈장을 받은 조선인 경찰은 일제 치하 36년간 혜산 보천보전투 때 귀환하는 김일성의 항일부대를 추격하고 국내 동조자를 색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최령(崔鈴. 해방 후 최연崔燕으로 개명)과 의열단 폭탄반입사건 관련자를 체포한 김덕기(金悳基) 등 10여 명뿐이다.
이러한 공적에 비해 계난수의 개인사에 대한 자료를 매우 드물고 1941년 이후의 행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신문기사와 일제 문서를 근거로 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망라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한 그의 활약상(?)을 추적한다. 또한 만주로 건너간 이후 간도성 사무관 시절의 행적과 1940년경 동북항일연군 체포・귀순 공작 활동을 당시 시대상황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헌병보조원에서 경부가 되기까지 17년 걸려

계난수는 1890년 8월 1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1906년 강계군 사립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했다. 1908년 7월 일본군 조선주차군 의주헌병대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1919년 3・1운동 직후까지 12년간 헌병보조원으로 일했다.
헌병보조원제도는 의병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1908년 6월 11일 한국칙령 제31호 「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에 의거해 실시되었다. “폭도의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헌병보조원을 모집하여, 한국주차일본헌병대에 의탁하고, 그 복무에 대해서는 헌병대장의 지휘를 받는다.”(제1조)라는 조문에서 헌병보조원의 성격과 역할이 여실히 드러난다. 헌병보조원은 만 20∼45세의 조선인 한글 해독자 중에서 모집되었으며, 군속의 신분을 보유하고 ‘폭도의 진압과 안녕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헌병의 업무를 보좌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 시기 모집 정원은 4천여 명인데, 1908년 7월 1일부터 9월에 걸쳐 채용이 완료되었다. 헌병보조원은 전원 주차헌병대가 관장하며, 1개월 이내의 견습기간을 마친 후 헌병 1인당 2∼3명씩 배치되었다. 대우는 본봉·출장여비와 일어 해득자에 대한 통역수당이며, 순사 봉급과 같은 수준이었다.
계난수는 병합 전후로 의주헌병대 헌병보조원으로 있었다. 그로 인해 1912년 8월 1일 칙령 제56호에 의해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이후 1912년에서 1919년 사이 강계헌병분견대가 설치되자 고향인 강계로 전근한 것으로 판단된다. 1919년 5월 강계헌병분견대에서 헌병보조원으로서 3·1운동과 관련해 증인 이정화(李晶和)에 대해 취조할 때 통사(통역)로 참여해 신문을 도왔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헌병보조원으로서 계난수의 구체적인 활약상은 나타나지 않으나, 강계 3・1운동에 관한 기록(“4월 8일 역사적인 새 아침은 밝았다. 거사준비에 착수한 지 2주일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읍내 헌병분견대의 주구로 악명 높던 계난수의 무리조차 오늘 거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독립운동사 제2권 : 삼일운동사』 1971, 484쪽) 에서 계난수가 강경읍 헌병분견대 주구로서 악명을 떨쳤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의 여파로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뀌고 그에 따라 기존의 헌병경찰제도도 보통경찰제도로 변화했다. 1919년 8월 조선총독부관제가 개정되어 ‘총독무관전임제’가 폐지되고, 총독의 육해군 통솔권한을 없애는 등 총독의 군사적 색채를 약화시켰으며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헌병보조원제도도 폐지되었다. 일제는 1920년대에 경찰력 감소를 이유로 일반경찰관을 대규모로 확충하였고, 헌병 및 헌병보조원 출신자 다수가 경찰관으로 전직하였는데 순사로 전직한 조선인 헌병보조원 출신자는 4천여 명에 이른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인의 순사 지원자는 항상 채용인원에 비해 7~8배에 달했다. 그 이유로 순사가 조선인이 취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관직 중 하나이고 제1차세계대전 후의 불황으로 생활난이 심각해진 점을 들 수 있다.
계난수는 1919년 8월 20일 조선총독부령 제134호에 의한 관제개정으로 총독부 도순사로 임명되었으며, 평안북도 강계경찰서 순사로 발령받았다. 1920년 11월 강계경찰서 순사부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계난수는 국내외에서 밀정을 활용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추적, 검거하였고, 독립군과 교전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 강계경찰서 순사부장으로서 평북경찰부의 지휘하에 만주 안동현(安東縣)으로 파견나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였다. 즉 1922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원이면서 안동현 소재 이륭양행(怡隆洋行) 고원으로 안동현 우편국에 수신함을 설치해 독립군들 사이의 연락을 중계하던 김문규(金文奎)를 체포했다. 1923년 10월. 평안북도 강계군 종서면에서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벌이던 김기현(金基鉉)이 종서면주재소를 습격하려 한다는 첩보를 탐지하고, 김기현을 체포하기 위해 종서면에 출동하였다가 김기현이 만주로 피신하자 주민 전창엽(田昌燁)·김기흡(金錡洽)·조상국(趙尙國) 등 10여 명을 체포하여 고문을 자행했다. 1924년 8월에는 참의부 소대장 장창헌(張昌憲) 및 독립군 2명을 유인해 일본경찰에 살해되도록 만든 밀정 홍인화(洪仁化)를 보복 살해한 참의부 부원 최윤흥(崔允興)을 밀정 박희빈(朴熙彬)의 밀고를 받고 검거했다. 1925년 6월에는 참의부 소속 독립군 이의준(李義俊), 김봉흥(金奉興), 전창식(田昌植) 등의 부하 20여 명과 강계군에서 전투를 벌였다.
1923년에 당해년도 도경부보시험에 응시해 합격되어 『조선총독부관보』 1924년 3월 13일자에 이름이 올랐다. 1925년 강계경찰서 경부보를 지낼 때 월봉 44원을 받았다. 1926년 12월 강계경찰서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했으며 1927년 11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로 전근했다.

 

참의부 맹장 이응서를 체포한 공로로 경찰관리 공로기장 받아

계난수가 평북경찰부로 전근할 무렵 그곳 고등경찰과장은 독립운동가 체포로 명성(?)이 자자한 김덕기였다. 김덕기는 영화 〈밀정〉의 모티브가 된 ‘황옥경부사건’을 탐지하여 의열단의 2차 국내폭파작전을 막았고, 정의부 총사령관 오동진을 함정에 빠뜨려 체포한 자다. 평북경찰부에서 계난수는 직속상관인 김덕기의 지휘를 받아 독립운동가 검거에 맹활약을 펼친다.
1929년 4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한 고려혁명군 중앙위원장 최승호(崔承皞)와 일행 3명을 체포했다. 최승호 일행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왔다가 여관에서 계난수가 이끄는 형사대에 의해 피체된 것이다. 최승호와 박화용은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예비, 총포화약취체령 위반으로 신의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어 각각 징역 10년과 3년을 언도받았다.

07

경찰관리공로기장 수여식. 『매일신보』1930.9.19.

 

그해 5월 일찍이 사이토 총독이 국경시찰시 저격을 시도했고 참의부의 맹장으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200여 차례나 벌인 독립군의 거두 이응서(李應瑞)를 신의주에서 직접 체포했다. 그 공로로 계난수는 1930년 8월 4일 명치 43년 칙령 제438호에 의거해 칙정(勅定)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 경찰관리 공로기장은, 군인에게 천황이 직접 수여하는 금치훈장(金鵄勳章)에 비견될 정도로 권위 있는 상이다. 같은해 9월 17일 평북도청에서 열린 수여식에서 이시가와(石川) 평안북도지사에게서 공로기장을 전달받았다.(『매일신보』 1930.9.19. (3면) 「桂警部에 勅定 功勞章 授與式 擧行」) 이응서와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진행중이던 이응서가 1931년 2월 김덕기 고등경찰과장과 계난수 형사에 대해 불법감금과 절도, 폭행으로 고소를 제기했다. 신의주에서 체포된 다음 신의주경찰서에서 불법 감금과 고문・폭행을 당했고 자신이 갖고 있던 가방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이 이응서의 고소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김덕기 측도 이 문제를 일소에 부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08

 

1929년 12월경 계난수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7급)이면서 동시에 신의주경찰서 경부를 맡고 있었다. 1930년경 신의주경찰서의 발표에 따르면, 독립군이 국경을 침입할 때 경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된 자는 1년 내에 4천여 명이나 되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건수도 1백여 건에 이른다고 했다.
1931년 평안북도경찰부 재직중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그해 9월부터 1934년 3월까지 종군해 국경 대안경비를 비롯해 군대 및 군수품 수송, 민심사찰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1931년 9월에는 중국 안동현 등지에서 중국 관헌들에 대한 정보수집업무를 맡았고 10월에는 중국민에 대한 동향을 사찰했다. 1931년 12월 중국 군벌인 장학량(張學良)이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압록강 철교 부근에 대한 사찰 및 경계업무에 종사했다.
1932년 5월에는 오성륜(吳成崙)의 부하 김혁산(金革山), 임호(林虎) 등이 일본 관공리 암살과 관공서 폭파를 기도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밀정 이흥하(李興夏)를 시켜 정보를 수집했다. 이어 같은 달 신의주고등보통학교 학생격문살포사건 주모자인 이종림(李宗林), 박병상(朴炳商) 등을 체포하기 위해 김덕기(金悳基) 지휘하에 형사대를 이끌고 경성으로 출장, 수색활동을 벌였다.
같은 달 유석화(劉錫華) 순사부장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사건을 수사하고 혐의자를 체포했다. 계난수는, 김명시(金命時)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던 오빠 김형선(金炯善)을 도와 인천에서 기관지 〈꼼무니스트〉를 배포하며 노동운동을 하다가 조직이 탄로나자 중국으로 돌아가기위해 신의주에 왔다가 근우회 전 지부장 박은형의 집에 머물러 있던 것을 탐지하고 현장에서 그를 체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의 주요 인사 조봉암, 홍남표, 김찬, 김명시 등 16명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당시 평북경찰부 경부였던 스에나가 하루노리(末永淸憲)는 『조선사상범검거 실화집』에서 김명시의 체포과정을 상세히 다루었다. 또한 계난수는 같은 해 6월에는 중국상해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독립군들이 만주사변을 계기로 국내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안동현에 잠입해 상해교민단 단원 이계상(李啓尙)을 체포했다.
이후에도 계난수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로 계속 재직하며 고등경찰로 활약했다. 1932년 12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 관등 6급이었다. 1934년 3월 1일 만주국 황제가 수여하는 만주국 건국공로장, 1934년 4월 29일 만주사변 때 활약한 공로로 훈8등 서보장을 받았고, 같은 날짜에 ‘소화6년내지9년사변’에 대한 공로로 종군기장을 받았다. 1934년 11월 평안북도 도경부를 그만두고 만주로 건너갔다.

 

09

대만주국 건국공로훈장(1934)과 소화6년내지9년사변 종군기장(1934),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간도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 토벌•귀순공작을 벌이다

계난수는 1934년 12월 만주국 간도성공서(間島省公署) 경무청 특무과 사무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계난수와 함께 간도성으로 전근한 조선인 관리로는 전라북도 내무부 산업과장이었던 유홍순(민정청 실업과장),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윤태동(교육청 학무과장), 만주국 문교부 속관에서 시학관으로 승진한 김춘학(교육청 시학관) 등이 있었다. 이들은 만주국의 요청에 의해 조선총독부의 선발을 거쳐 조선인이 성 전체 인구의 60%(약 50만 명, 1934년 현재)를 차지하는 간도성 고위 관리로 영전해 온 것이다. 경무청 특무과는 주로 반만항일의 운동가들을 색출하고 신문하는 부서였다. 1937년 4월까지 경무청 특무관 사무관으로서 재직하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막론하여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는 임무를 담당했으리라 짐작된다. 1937년 4월 10일 경무청 특무과 사무관을 사직했다. 이후 일제시대 기록에서는 계난수가 종적을 감추었다가 해방 후 반민특위 관련문서 중 친일파 김창영 재판자료에서 다시 등장한다.

 

오호!! 밀림에 방황하는 제군!!
이 권고문을 보고 즉시 최후의 단안을 내려 갱생의 길로 뛰여 나오라!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고 참회할 것도 참회하고 이제까지의 군등(君等)의 세계에 유례없는 불안정한 생활에서 즉각으로 탈리(脫離)하야 동포애의 따뜻한 온정 속으로 돌아오라. 그리하야 군등의 무용과 의기를 신동아건설의 성업으로 전환 봉사하라! 때는 늦지 않다! 지금 곧 아(我) 150만 동포의 최후의 호소에 응하라. 최선을 다하야 제군을 평화로운 생활로 인도할 본위원회의 만반 준비가 제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金日成 等 反國家者에게 勸告文, 在滿同胞 百五十萬의 總意로」, 『삼천리』 제13권 1호(1941.1)

 

이 권고문은 1940년 12월경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본부가 길림・간도・통화성에서 항일무장활동을 벌이던 김일성 유격대 등 동북항일연군을 투항・귀순시키기 위해 비행기로 살포한 권고문이다.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길림・간도・통화성의 동북항일연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동남부치안숙정공작(東南部治安肅正工作)’을 실시하면서 이 지역에 일본군과 만주국군 6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고자 했다. 이때 위의 병력뿐만 아니라 일반 경찰, 특무기관, 지방행정기구, 협화회까지 총동원하여 사상・문화 토벌도 동시에 전개하였다. 이에 이범익 만주국 참의의 발의로 조선인 후원조직이 만주국 수도인 신경에 설립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다. 만주에서 발행된, 한글 어용신문인 만선일보는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뉴스’라는 난을 마련하여 조선인들의 후원금 내역과 후원회의 원호활동을 매일같이 보도하였다. 이때 김창영은 만주국 치안부 경무사 이사관 겸 통화성 경무청 이사관으로서(1939.5~1943.4)으로서 조선인 동북항일연군의 토벌과 귀순공작을 진두지휘하였다.

 

단기 4275년[1942년] 10월부터 6개월간은 안광훈(安光勳) 유홍순(劉鴻洵) 김송렬(金松烈) 계난수 등 외 일만 군경과 더불어 동만지구 일대의 숙청공작을 추진 협력하여 김일성 부대 임수산(林守山) 외 30여 명, 양정우(楊靖宇) 군사령부 총무부장 오성륜(吳成崙) 외 10여 명, 동 군사령부 경위여장(警衛旅長) 박득범(朴得範) 외 6명, 동 사령부 소속단장 김백산(金白山), 김일성 부대 정치주임 김재범(金在範) 외 6명 등 수백여 명의 항일조선군을 체포 숙청케 하였고(후략)(「김창영 의견서(1949.5.5.)」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김창영의 진술이 사실에 부합하는 점이 많지만 “4275년(1942) 10월부터”이라는 시점 부분은 ‘1940년 10월’의 오류로 판단된다. “1940년 10월부터 ‘추동계대토벌’이 시작되면서 군사토벌은 제3단계(1940.10~1941.3)에 들어서게 된다.(중략) 1942년 3월 19일 토벌사령부 및 각 토벌대의 해산명령이 내려져 소위 ‘野副大討伐’은 막을 내렸다”(윤휘탁, 『일제하 만주국연구』, 1996, 161쪽)에서 보듯이 1941년 3월경 제3단계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끝나기 때문이다. 또 김창영의 진술대로라면 박득범의 귀순시기가 1942년~1943년 사이지만, 1940년 10월 연길 野副토벌대사령부에서 발행한 「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에 따르면 1940년 6월 귀순하고, 10월에는 野副 토벌대장과 선전용 기념사진을 찍는다. 또한 양정우 1940년 2월 총살되어 효수, 조아범 1940년 12월 총살, 위증민 1941년 3월 병사 등 각종 기록에 비추어 김창영의 기억에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다.)

 

10

1940년 10월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은 일본군 토벌대를 방문하고 일본 천황과 만주국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野副토벌대사령부에서 건립한 충혼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 가운데줄 왼쪽부터 김재범, 박득범, 김백산. 출처 「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 1940.10.19)

 

 

김창영은 1949년 5월 반민특위 조사에서 동북항일연군들을 토벌・귀순시킨 자신의 공적을 위와 같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그의 말처럼 일제의 ‘동남부치안숙정공작’으로 인해 오성륜・박득범・김재범 등 1천여 명의 동북항일연군들이 투항・귀순하고, 양정우・조아범・허형식 등 주요 지휘관들이 사살되어 길림・간도・통화성의 동북항일연군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한창 진행되던 1940년~1941년 사이, 계난수는 “귀순공작에 있어서 간도성 공작반 총지휘자는 조선인 유홍순이었고, 같은 성 연길현 공작반장은 조선인 김송렬, 같은 성내 왕청현 공작반장은 조선인 계난수(전 간도성 사무관)였다”(「김창영 피의자신문조서(제3회)(1949.4.20.)」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에서 보듯이 간도성 왕청현 공작반장으로서 제1로군사령부 경위여장 박득범 등 7명을 귀순시키는 등 치안숙정공작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1년 이후와 해방 후 계난수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진주로 만주국이 멸망했다. 이때 만주국에 있던 많은 친일파들이 인민재판으로 처형되거나 소련의 유배지로 끌려갔다. 계난수가 이 경우에 해당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후 계난수는 역사의 법정으로 호출되어 냉엄한 심판을 받는다.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친일행적이 수록되었다. 같은해 11월 30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의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에게 내려진 죄목은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한 행위”(특별법 제2조 제3호),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저해한 행위”(제5호), “일제의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탄압하는데 적극 앞장선 행위”(제16호),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협력해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행위”(제19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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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폭파 의거’ 75주년 기념 행사

1945년 7월 24일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중의원까지 지낸 친일거두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주최로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앞세워 태평양전쟁에 조선 젊은이들의 참여를 선동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을 비롯한 일제의 수괴들과 거물급 친일파들이 대거 참석하고 있었다. 대회 소식을 사전에 입수한 ‘대한애국청년당’ 소속 조문기(1927~2008, 민족문제연구소 제2대 이사장 역임), 유만수(1924~1975), 강윤국(1926~2009) 등은 대담하게 대회장에 다이너마이트 2개를 설치, 폭파시켜 대회를 무산시켰다. 이 통쾌한 의거로써 패망 전 최후의 발악을 하던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일본 패망 직전 경성 한복판에서 조선독립의 의지를 널리 알린 일제강점기 의열투쟁의 대미를 장식한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연구소는 매년 의거일에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특히 의거 70주년이었던 2015년 7월 24일에는 의거 현장인 서울특별시의회 본 회의장에서 재연극 ‘정의의 폭탄’을 공연한 후 영상과 교육자료로 제작하여 서울 시내 중·고등학교 210여곳에 배포한 바 있다. 서울특별시의회 역시 3·1운동 100주년이었던 2019년 서울특별시의회 본회의장이 항일투쟁의 현장임을 알리는 홍보 영상과 전시물을 제작해 독립정신 고취에 나서고 있다.
연구소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기 위해 의거 기념식은 생략하고 7월 24일 임헌영 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이항증(임정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선생 후손), 차영조(임정 비서장 동암 차리석 선생 후손),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선생 후손), 김재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기획팀장, 방학진 기획실장 등이 김인호 서울시의회 의장과 함께 의회 내 부민관 의거 전시 시설을 관람하고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서울 왕산로(의병장 허위 선생의 호를 딴 도로로 청량리 시조사 입구에서 신설동역에 이르는 길)에 왕산 허위 의병장 동상 건립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한편 연구소 후원회원이기도 한 김인호 의장은 이날 “우리 민족은 큰 위기를 겪을 때마다 굳은 의지와 기개로 반드시 위기를 극복해낸 경험이 있다.”고 언급하며 “부민관 폭파 의거 75주년을 맞이해 우리의 민족정신을 다시금 되새기고, 지금 처한 위기를 의연하게 대응해나가는 서울시의회가 되겠다.”고 밝혔다

수, 2020/08/26-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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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개막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이 8월 11일 개막하였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인 3월 5일 또는 4월 1일에 개막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로 연기되었다. 창간일 대신 두 신문이 1940년 일제에 의해 폐간 당한 8월 11일에 맞추어 개막하였다. 이 기획전은 일제가 발행을 허가한 1920년부터 1940년 폐간되기까지 20년간 두 신문의 부일협력 행위를 추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하는 이번 기획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모두 4부로 구성되었는데, 먼저 198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낯 뜨거운 ‘민족지’ 논쟁을 소개하며 “두 신문이 과연 민족지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제1부 「조선의 ‘입’을 열다」에서는 조선‧동아의 창간배경을 파헤쳤다. 3‧1운동 후 일제는 민심 파악과 여론 조작을 위해 민간신문의 설립을 허용했다는 사실과 두 신문의 창간 주도세력의 성격을 통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태생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2부 「황군의 나팔수가 된 조선·동아」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 개전을 계기로 경쟁적으로 침략전쟁 미화에 나선 두 신문의 보도 실태를 조명한다. 그리고 두 신문의 투항이 사실상 이해관계에 따른 자발적 선택이었음을 다양한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총독부의 보도지침이 강제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본국민적 태도’를 보인 전쟁 보도는 조선·동아의 노골적인 부역행위의 결정판이었다.
제3부 「가자, 전선으로! 천황을 위해」는 조선·동아가 1938년 시행된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제도와 전쟁동원을 어떻게 선전·선동했는지를 고발한다. 조선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희생양으로 내몬 행위는 단순한 부역이 아니라 전쟁범죄로 규정해야 할 두 신문의 흑역사이다.

 

제4부 「조선·동아 사주의 진면목」에서는 일제하 조선일보 방응모와 동아일보 김성수의 친일행적을 다룬다. 언론사를 사유화한 두 사주는 전쟁협력을 위한 각종 관변단체의 임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강연·기고 등을 통해 일제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하는 활동을 펼쳤다. 방응모가 고사기관총을 국방헌납하고 김성수가 “탄환으로 만들어 나라를 지켜달라”며 철대문을 뜯어다 바친 반민족범죄도 소개한다. 에필로그에서는 프랑스의 친나치 언론 숙청과 우리의 반복되고 있는 부역언론의 현재를 비교하였다.
고경일 작가의 카툰과 레오다브의 그래피티가 전시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고, 언론개혁 특강 등 부대행사가 전시 폐막 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전시물로는 동아일보가 정간 해제를 목적으로 총독부에 복종을 서약한 경위가 담긴 「동아일보 발행정지 처분의 해제에 이른 경과」와 조선일보 폐간 당시 사주 방응모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밀약을 담은 「언문신문 통제에 관한 건」 등 조선총독부의 극비문서가 있다.
그동안 조선‧동아 1면에 실린 일왕부부의 사진에만 주목했다면 1면에 일왕부부의 사진이 실리게 된 뒷배경을 바로 이 극비문서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입수한 재일 조선인 유학생 단체들의 동아일보 ‘성토문’ 원본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1924년 만들어진 이 성토문 전단은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광수가 쓴 사설 ‘민족적 경륜’의 친일 성향과 패배 의식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조선 민중이 ‘민족지’를 표방한 동아일보에 얼마나 실망과 분노를 토해내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짐에 따라 전시장을 직접 올 수 없는 분들을 위해 VR온라인전시도 추진중이다. 전시 홍보 영상은 유튜브 민족문제연구소 채널에서 보실 수 있으며 기획전 도록도 회원들에게 제공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10월 25일까지 열린다. 언론개혁의 의지를 담아 회원들의 많은 참여와 성원을 바란다.

수, 2020/08/26-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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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 특강 열려

 

기획전 개막과 더불어 언론개혁을 촉구하는 특강도 함께 열렸다. 적폐언론의 대명사가 된 두 신문이 지난과오에 대해 침묵하고 이제는 최소한의 언론윤리마저 저버리고 극우수구세력의 대변지 역할에 앞장서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들의 진면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일제강점기 조선‧동아의 100년을 돌아보고 한국 언론의 문제점과 개혁 방향을 진단해 보는 특강을 마련했다.
과거 유신독재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펼친 원로 언론인 김종철 전 동아투위 위원장부터, 조선‧동아 100년의 역사를 추적해온 역사학자 장신 교수와 적폐언론의 개혁 방향을 제시할 언론학자 박용규‧정준희 교수, 현재 적폐 언론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언론감시 활동가 민주언론시민연합 신미희 사무처장과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을 모시고 한국 언론의 과거와 현재, 언론개혁의 미래를 살펴보았다.
코로나 19로 8월 20일부터 현장참가는 제한하고 모두 온라인으로만 진행하고 있다. 8월 11일부터 8월 27일까지 6회에 걸친 특강은 유튜브 민족문제연구소 채널(https://www.youtube.com/user/MinjokMovie)에서 보실 수 있다.

• 김승은 학예실장

수, 2020/08/26-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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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조선일보 방씨 일가의 ‘그린벨트 훼손 불법 호화 묘지’ 규탄 집회

 

 

연구소 경기북부지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의정부시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준)는 8월 8일 의정부종합운동장 엄복동 동상 앞에서 ‘친일파 조선일보 방씨 일가 불법행위범시민 규탄대회’를 열고 불법 호화묘지에 대한 행정절차에 즉각 돌입할 것을 의정부시에 요구했다.
앞서 고발뉴스는 지난해 1월부터 방씨 일가가 700여 평에 이르는 그린벨트 임야를 훼손해 호화 분묘를 불법 조성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의정부시는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음을 연속 보도했다. 고발뉴스의 보도를 접한 기념사업회는 이날 집회에서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해방 후에는 친독재를 일삼아온 조선일보 사주 방씨 일가가 수십 년 전부터 의정부시 가능동에 불법 조성한 가족묘지에 대해 관계당국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에 상응하는 법적 조치와 원상회복을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또한 ‘의정부 관내 불법 조성된 조선일보 방응모 일가의 가족묘에 대하여 법률에 따라 엄격한 처벌과 원상복구를 위하여 청원드립니다’란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도 올려놓았다. 참가자들은 집회를 마친 후 엄복동 동상부터 가족묘가 시작되는 입구까지 행진했다. 의정부시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준)는 올 가
을에 정식 창립과 동시에 조선일보를 산림법, 장묘법, 개발제한구역특별법 등 위반 혐의로 고발할 예정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20/08/26-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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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61]

벽제관 후면 언덕에 솟아오른 ‘전적기념비’의 정체는?
침략전쟁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랐던 그들만의 기념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제강점기 도시인의 일상생활에 관한 자료를 뒤적이다 보면 곧잘 마주치는 용어의 하나가 ‘하이킹(hiking)’이다. 누군가는 이를 ‘산책여행(散策旅行)’이라고 옮겨놓은 것을 본 적도 있는데, 어쨌거나 도회지 생활에 심신이 지친 사람들이 배낭을 꾸려 반나절이나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교외지역으로 도보여행을 하는 것을 일컫는 표현이다.
이러한 하이킹은 1930년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던 시기에 크게 성행한 적이 있었고, 심지어 전시체제기가 본격화한 이후에도 “걷는 것은 훌륭한 국민운동”이라고 하여 이러한 활동 자체가 크게 장려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경성 근교(京城 近郊)의 하이킹 코스를 소개하는 특집 연재기사들이 잇따라 신문지상에 등장하였고, 여러 단체에서 주선하여 벌어지는 하이킹 행사도 신청자 모집에 어렵잖게 큰 호응을 이끌어 내곤 했다.
이 당시에 무수하게 쏟아졌던 하이킹 관련 안내서적을 통틀어 그 으뜸으로 꼽히는 것은 단연 ‘경전하이킹코스(京電ハイキングコース)’ 시리즈였다. 1937년 10월 15일에 제1집 <북한산(北漢山)>이 처음 선을 보인 이후로 같은 달에 <비봉(碑峰)>(제2집), <풍납리토성(風納里土城)>(제3집), <당인리(唐人里)>(제4집), <양천(陽川)>(제5집) 등이 한꺼번에 배포되었고, 해를 바꿔 1938년 5월에는 <벽제관(碧蹄館)>(제6집)과 <남한산(南漢山)>(제7집)이 추가로 발간되었다. 이 시리즈의 제1집 말미에 수록된 ‘편집후기’를 보면 앞으로 발간할 예정인 전체 30개에 달하는 하이킹코스의 목록이 장황하게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최초의 방대한 계획과는 달리 실제로는 총7편을 펴낸 것을 마지막으로 시리즈의 발간은 중단되고 말았다. 아무튼 이들 자료는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의 전무였던 무샤 렌조(武者鍊三)의 지시에 따라 3년 정도의 기획기간에 걸쳐 편찬한 결과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성전기의 산악부원과 감리실원이 주축이 되어 실지조사를 겸하고 카토 칸카쿠(加藤灌覺), 오카다 코(岡田貢), 이마무라 토모(今村鞆) 등과 같은 준관변학자(準官邊學者)의 도움을 받았으며, 또한 전문적인 사진촬영자가 배치되어 다양한 화보 성격의 사진자료가 첨부되었다. 여기에는 도보여행지로 이동하는 교통편에 관한 정보라든가 각 지점 간의 행로 등이 소상히 서술되어 있고, 각 코스에서 풍치가 빼어난 곳들에 대한 소개는 물론이고 주변 행로에 흩어진 고적(古蹟)에 대한 설명도 비교적 풍부하게 곁들여졌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시리즈로 펴낸 ‘경전하이킹코스’의 제6집 <벽제관(碧蹄館)> (1938년 5월 1일 발행)의 표지 모습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임진왜란 당시 벽제관전투의 현장이 묘사된 지도자료이다. 흔히 벽제관전투라고는 하지만 실제의 전장은 여석현(礪石峴, 숫돌고개)을 중심으로 한 곳이었으며, 더구나 벽제관의 위치도 지금과는 다르게 ‘빈정리’에 자리하고 있었다.(경성전기주식회사, <벽제관>, 1938)

 

<벽제관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1938)에 수록된 문록교(文祿橋, 분로쿠바시) 쪽에서 바라본 벽제관 일대의 원경사진으로 산중턱에 보이는 하얀 돌기둥이 곧 ‘벽제관전적기념비’이다.

 

여석현(礪石峴, 숫돌고개)의 정상에 설치된 벽제관 고전장 표석의 모습이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설치한 흔적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잔존여부를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벽제관>, 1938)

 

혹여 이러한 행로 도중에 일본인과 관련한 사적지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촘촘하고 상세한 설명이 주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들 가운데 1938년 5월 1일에 발간된 <벽제관(碧蹄館)>(제6집)은 바로 이러한 범주에 속한 대표적인 하이킹 안내서였다.
벽제관이라고 하면 두말할 나위 없이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자기네 선조들의 전승지(戰勝地)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그 어느 곳에 못지않게 세밀한 사료조사와 현지탐방이 뒤따랐던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한 결과를 담은 것이니만큼 비록 소책자일망정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려 제작한 흔적이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역력히 감지되고 있다. 그런데 이 <벽제관>의 75~76쪽에는 벽제관 주변의 탐방행로를 이렇게 그려놓고 있는 대목이 눈에 띈다.

 

…… 현재 그 관리는 당지(當地)의 우편소장(郵便所長) 사에키 토루(佐伯融) 씨 등을 중심으로 하는 벽제관전적보존회(碧蹄館戰蹟保存會)에 맡겨져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거의 동씨(同氏)의 안내로 전적견학(戰蹟見學)의 편의를 얻고 있음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벽제관의 역(役)이 있던 이래로 춘풍추우 340년 소화 8년(1933년) 9월에 이르러 이 전적을 기념하기 위한 일대기념비(一大記念碑)의 건립이 실현되었다. 비(碑)의 모양은 애급(埃及, 이집트) 나일 하반(河畔)의 광야에 흘립한 오벨리스크(Obelisk)를 본뜬 것으로, 경성으로부터 벽제관에 오는 손님들이 명군(明軍)의 진지였던 월천리(越川里)에 이어지는 작은언덕을 지나자마자 곧장 북방 밀수(密樹)의 언덕 위에 그 높고 하얀 자태를 인식하는 일이 가능하다. 비는 양질의 화강암(花崗岩)으로 제작되어 전기(電氣) 연마를 하여 광택이 아름답고 새로 식수한 수십 주의 앵수(櫻樹, 벚나무) 가운데에 서있다. 비의 표면에는 고 중추원촉탁 김돈희(故中樞院囑託 金敦熙) 씨의 글씨로 ‘벽제관전적기념비(碧蹄館戰蹟記念碑)’
라는 여덟 글자를 새겼으며, 이면(裏面) 비의 대석(臺石)에는 당시 경기도지사 마츠모토 마코토(京畿道知事 松本誠)씨의 이름으로 다음의 명(銘)이 새겨져 있는데, 글은 이왕직 촉탁에하라 젠즈치(江原善槌)가 지은 것이다.
비가 있는 언덕 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괘갑수(掛甲樹)라고 전해지는 느티나무 고목이 있다. 언덕 아래에는 벽제관의 건물이 있다. (비명 부분은 인용생략)

 

이 내용에 따르면, 벽제관으로 가는 작은 고갯길을 넘어서자마자 모든 도보여행객들은 누구나 저 벌판 너머로 온통 사쿠라의 동산으로 변신한 언덕 위에 높이 솟아 있는 ‘벽제관전적기념비’의 존재를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구도였다. 여기에 나오는 중추원촉탁 김돈희(1871~1937)는 일제 때 서예가로 크게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그는 선암사 강선루, 낙산사 의상대 등의 편액 글씨를 남겼으며, 특히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제호(題號)도 바로 그의 글씨라고 알려진다.
일찍이 이곳 벽제관 지역에는 1911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명목상 고양군수(高陽郡守)가 회장을 맡고 기타 지역유지가 여기에 참가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의 보존회 설립이 추진되었으며, 그 결과 1915년 4월에 “문록역(文祿役, 임진왜란) 때의 유적인 벽제관, 괘갑수(掛甲樹) 등의 보존 관리 및 이를 널리 사회에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벽제관고적보존회(碧蹄館古蹟保存會)가 설립인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나중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碧蹄館戰蹟紀念碑建設會)라는 것이 꾸려져 기념탑의 건립까지 시도된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3년 10월 12일자에 수록된 「이십여 성상(二十餘 星霜)을 농촌계발(農村啓發)에 전심(專心), 벽제일대(碧蹄一帶)에서는 신(神) 같이 앙모(仰慕), 사에키 토루(佐伯融) 씨의 공적(功績)」이라는 제목의 인물탐방기사를 통해 그 내막을 엿볼 수 있다.

 

…… 당지(當地)에 군청(郡廳)이 있을 시(時)에는 300여 호(戶)의 인가(人家)가 즐비하던 것이 군청이 20여 년 전에 경성(京城)으로 이전한 후로는 폐가파옥(廢家破屋)이 연년(年年)히 증가하여 지방이 쇠퇴하여짐을 우려하고 발전책(發展策)을 연구하였으나 장래 산간촌락(山間村落)으로 아무리 생각하여도 적당한 대책이 없어 고심하였다.
당지의 벽제관은 역사가 깊은 고적이오 또한 문록역 고전쟁지(古戰爭地)이므로 이를 보존에 주력하여 각 지방에 선전(宣傳)하여 10여 성상(星霜)을 두고 당국에 교섭한 결과 재작춘(再昨春)에 기부인가(寄附認可)를 받는 동시에 당국 원조와 동지의 찬조를 얻어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를 조직하고 내선만(內鮮滿) 각지를 통하여 기부금모집에 노력한 결과 9천여 원(圓, 엔)의 거액을 모집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불행히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자 이어서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속출(續出)되어 국내는 전시상태를 이루었으니 계획하였던 사업도 지연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래(以來) 국제관계가 점차로 진압(鎭壓)됨을 따라 금춘(今春)에 공사가 착수하여 이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근만원(近萬圓)의 공비(工費)로 건설된 기념비는 웅장하게도 벽제관 후산상(碧蹄館 後山上)에 돌립(突立)하여 벽제의 면목을 일신케 되었으며 벽제관공원(碧蹄館公園)이라고 부르게까지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일본인 사에키 토루는 1911년 이후 고양우편소장을 거쳐 벽제우편소장으로 장기 재직하면서 벽제관고적보존회의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특히 총독부의 고관 또는 내외귀빈(內外貴賓)을 포함하여 일반 탐방객이 벽제관을 찾을 때마다 이곳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다시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를 꾸려 1931년 이래 모금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9천 원의 기부금에다 당국의 보조금 1천 원을 더하여 1933년 봄에 이르러 마침내 기념비의 제작에 착수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벽제관전적기념비의 건립 제원(諸元)에 대해서는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 제12집 제9호(1933년 9월)에 수록된 「벽제관전적기념비 설계개요(設計槪要)」라는 자료에 잘 요약 정리되어 있다.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에서 제작 발행한 ‘벽제관전적기념비’의 모습이다. 벽제관 후면 언덕 위에 세워진 이 기념비의 전면에 보이는 글씨는 중추원촉탁 김돈희(中樞院囑託 金敦熙)가 썼으며, 그 아래쪽에 ‘조혼(弔魂)’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벽제관 건물과 벽제관전적기념비를 도안(圖案)에 담은 통신일부인(通信日附印)의 모습이다. 1934년 1월 20일부터 벽제우편소를 통해 사용하는 우편물에 적용되는 일종의 기념스탬프이다. (조선총독부 체신국, <조선체신사업연혁사>, 1938)

 

[총고(總高)] 38척(尺) 2촌(寸), 비(碑)의 높이 33척 3촌, 하부(下部) 크기 5척 2촌각(寸角), 상부(上部) 크기 2척 7촌각
[기단(基壇)]은 원형(圓形)으로 높이 2척 9촌, 외경(外徑) 40척, 내경(內徑) 36척, 삼방(三方, 세 방향)에 폭(幅) 8척의 계단(階段)을 두고, 계단 좌우에 길이 7척 폭 4척의 장원형(長圓形)의 수석(袖石, 소맷돌)을 붙임. 탑신(塔身)과 기단(基壇)은 둘 다 전부 화강석으로 만듬.
[탑신(塔身)] 앞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 아래에 조혼(弔魂)이라 새기고, 뒤에는 건설유래기(建設由來記)를 새김.
[기단(基壇)] 상(床)은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중앙 원형을 따라서 배수구(排水溝)를 두며, 사방(四方)으로 방사선상(放射線狀)의 토관(土管)으로 배수시키도록 사리(砂利, 자갈)를 까는 것으로 함.
[기공(起工)] 소화 8년(1933년) 4월 5일
[준공(竣工)] 소화 8년(1933년) 7월 5일
[제막식(除幕式)] 소화 8년 9월 9일
[공비(工費)] 4,165원(圓)
[양식(樣式)] 근대식(近代式)
[설계(設計)] 조선총독관방 회계과(朝鮮總督官房 會計課)
[시공사(施工者)] 경성미술품제작소(京城美術品製作所)

 

이에 따라 1933년 9월 9일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의 제막식이 거행되었으며, 당시의 조선총독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가 몸소 이 행사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사를 남겼다.

 

…… 방금(方今) 내외(內外)의 정세(情勢)는 더욱 난국(難局)에 향(嚮)하여 동아(東亞)는 드디어 다사(多事)코자 하여 국민(國民)의 왕성(旺盛)한 사기(士氣)와 열렬(熱烈)한 건투갱진(健鬪更進)하여 아세아민족(亞細亞民族)의 각성(覺醒)을 요(要)함이 익공(益功)한 추(秋)에 당(當)하여 여사(如斯)히 왕사(往事)를 추회(追懷)하여 미래(未來)에 선처(善處)한 도표(道標)가 될 만한 의의(意義) 있는 시설(施設)의 실현(實現)은 정신(精神)의 작흥(作興), 극동민족(極東民族)의 융합(融合)에 선보(禪補)됨이 자못 대(大)할 줄로 신(信)한다.

 

요약하자면 바야흐로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가 진행되는 이때에 옛 벽제관 전투를 기리는 시설물의 등장은 그 자체가 미래의 길잡이가 될 만한 것이라는 언급인 셈이다. 또한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다시 극동민족의 융합을 이끌어내는 승전의 주체가 되리라는 것을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벽제관 일대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여긴 탓인지 일본군대의 사기를 앙양하고 전의를 새롭게 다지는 공간으로 종종 사용된 흔적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1933년 10월에는 때를 맞춘 듯이 용산주둔 일본군 보병 제78연대가 벽제관 일대에서 추계대훈련을 실시한 적이 있었고, 좀 더 나중의 일이지만 1938년 12월에는 육군병지원자훈련소(陸軍兵志願者訓練所) 생도 200명이 벽제관 마을에서 견학차 하룻밤을 머물렀던 사실도 드러난다.
그리고 일제패망기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1943년 10월에는 벽제관전투 350년이 되는 해라고하여 당시 전몰자에 대한 추조제(追弔祭)가 이곳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벽제관전적기념비가 해방 이후 어느 시기에 철거되어 사라진 것인지는 분명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동아일보> 1950년 1월 22일자에 게재된 김진구(金振九)의 연재기고문 「국치비존폐(國恥碑存廢)의 시비(是非) 하(下)」를 보면, “…… 구랍 29일 회견할 때에 구 경기도지사(具 京畿道知事)는 희망적으로 표명하였다. 일인 소행인 벽제관(碧蹄館)의 전적비(戰蹟碑)와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장난인 인왕산맥(仁旺山脈)의 암석각자(岩石刻字)만은 제거하고 싶다고 ……” 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것으로 보면 1950년을 넘어가는 시점까지도 벽제관 전적기념비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매일신보> 1940년 6월 28일자에 수록된 벽제관 사방공사 관련 ‘치산치수비’의 제막식 기사이다. 이 기사에는 분명 벽제관 앞에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은 그 행방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대개 벽제관이라고 하면 이 전적기념비의 존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것 말고도 별스러운 기념물이 하나 더 있었다. 1940년 6월 24일에 제막된 ‘치산치수지비(治山治水之碑)’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은 1930년부터 1936년까지 6년 계속사업으로 고양리(高陽里) 주변 3개리에 걸쳐 사방사업(砂防事業)을 실시한 결과 산림녹화를 이룩한 것을 기리고자 일제가 이에 대한 기념물로 조성한 것이었다.
<매일신보> 1940년 6월 24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 따르면 분명히 벽제관 앞에다 이것을 설치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이 역시 해방 이후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혹여 이 근처에 매몰 처리된 것이라면 언젠가는 홀연히 그 존재가 다시 드러나서 이것의 정체가 뭔지를 재확인하기 위해 달갑지 않게 일제강점기의 해묵은 기록을 다시 뒤져봐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수, 2020/08/26-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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