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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은 악질 친일경찰 계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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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은 악질 친일경찰 계난수

익명 (미확인) | 금, 2018/04/20- 14:17

열전친일파 19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에 다룰 친일파는 통감부 시절부터 일본군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했고, 병합 후 헌병보조원으로 줄곧 있다가 3・1운동 이후 순사와 경부보를 거쳐 경부로 진급했고, 독립군 사이에서 평안북도의 ‘일등 창귀’(倀鬼 : 호랑이에 먹혀 죽은 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친 계난수이다. 1930년에는 참의부의 맹장 이응서를 체포한 공적에 힘입어 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 이 훈장을 받은 조선인 경찰은 일제 치하 36년간 혜산 보천보전투 때 귀환하는 김일성의 항일부대를 추격하고 국내 동조자를 색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최령(崔鈴. 해방 후 최연崔燕으로 개명)과 의열단 폭탄반입사건 관련자를 체포한 김덕기(金悳基) 등 10여 명뿐이다.
이러한 공적에 비해 계난수의 개인사에 대한 자료를 매우 드물고 1941년 이후의 행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신문기사와 일제 문서를 근거로 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망라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한 그의 활약상(?)을 추적한다. 또한 만주로 건너간 이후 간도성 사무관 시절의 행적과 1940년경 동북항일연군 체포・귀순 공작 활동을 당시 시대상황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헌병보조원에서 경부가 되기까지 17년 걸려

계난수는 1890년 8월 1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1906년 강계군 사립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했다. 1908년 7월 일본군 조선주차군 의주헌병대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1919년 3・1운동 직후까지 12년간 헌병보조원으로 일했다.
헌병보조원제도는 의병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1908년 6월 11일 한국칙령 제31호 「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에 의거해 실시되었다. “폭도의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헌병보조원을 모집하여, 한국주차일본헌병대에 의탁하고, 그 복무에 대해서는 헌병대장의 지휘를 받는다.”(제1조)라는 조문에서 헌병보조원의 성격과 역할이 여실히 드러난다. 헌병보조원은 만 20∼45세의 조선인 한글 해독자 중에서 모집되었으며, 군속의 신분을 보유하고 ‘폭도의 진압과 안녕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헌병의 업무를 보좌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 시기 모집 정원은 4천여 명인데, 1908년 7월 1일부터 9월에 걸쳐 채용이 완료되었다. 헌병보조원은 전원 주차헌병대가 관장하며, 1개월 이내의 견습기간을 마친 후 헌병 1인당 2∼3명씩 배치되었다. 대우는 본봉·출장여비와 일어 해득자에 대한 통역수당이며, 순사 봉급과 같은 수준이었다.
계난수는 병합 전후로 의주헌병대 헌병보조원으로 있었다. 그로 인해 1912년 8월 1일 칙령 제56호에 의해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이후 1912년에서 1919년 사이 강계헌병분견대가 설치되자 고향인 강계로 전근한 것으로 판단된다. 1919년 5월 강계헌병분견대에서 헌병보조원으로서 3·1운동과 관련해 증인 이정화(李晶和)에 대해 취조할 때 통사(통역)로 참여해 신문을 도왔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헌병보조원으로서 계난수의 구체적인 활약상은 나타나지 않으나, 강계 3・1운동에 관한 기록(“4월 8일 역사적인 새 아침은 밝았다. 거사준비에 착수한 지 2주일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읍내 헌병분견대의 주구로 악명 높던 계난수의 무리조차 오늘 거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독립운동사 제2권 : 삼일운동사』 1971, 484쪽) 에서 계난수가 강경읍 헌병분견대 주구로서 악명을 떨쳤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의 여파로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뀌고 그에 따라 기존의 헌병경찰제도도 보통경찰제도로 변화했다. 1919년 8월 조선총독부관제가 개정되어 ‘총독무관전임제’가 폐지되고, 총독의 육해군 통솔권한을 없애는 등 총독의 군사적 색채를 약화시켰으며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헌병보조원제도도 폐지되었다. 일제는 1920년대에 경찰력 감소를 이유로 일반경찰관을 대규모로 확충하였고, 헌병 및 헌병보조원 출신자 다수가 경찰관으로 전직하였는데 순사로 전직한 조선인 헌병보조원 출신자는 4천여 명에 이른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인의 순사 지원자는 항상 채용인원에 비해 7~8배에 달했다. 그 이유로 순사가 조선인이 취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관직 중 하나이고 제1차세계대전 후의 불황으로 생활난이 심각해진 점을 들 수 있다.
계난수는 1919년 8월 20일 조선총독부령 제134호에 의한 관제개정으로 총독부 도순사로 임명되었으며, 평안북도 강계경찰서 순사로 발령받았다. 1920년 11월 강계경찰서 순사부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계난수는 국내외에서 밀정을 활용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추적, 검거하였고, 독립군과 교전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 강계경찰서 순사부장으로서 평북경찰부의 지휘하에 만주 안동현(安東縣)으로 파견나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였다. 즉 1922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원이면서 안동현 소재 이륭양행(怡隆洋行) 고원으로 안동현 우편국에 수신함을 설치해 독립군들 사이의 연락을 중계하던 김문규(金文奎)를 체포했다. 1923년 10월. 평안북도 강계군 종서면에서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벌이던 김기현(金基鉉)이 종서면주재소를 습격하려 한다는 첩보를 탐지하고, 김기현을 체포하기 위해 종서면에 출동하였다가 김기현이 만주로 피신하자 주민 전창엽(田昌燁)·김기흡(金錡洽)·조상국(趙尙國) 등 10여 명을 체포하여 고문을 자행했다. 1924년 8월에는 참의부 소대장 장창헌(張昌憲) 및 독립군 2명을 유인해 일본경찰에 살해되도록 만든 밀정 홍인화(洪仁化)를 보복 살해한 참의부 부원 최윤흥(崔允興)을 밀정 박희빈(朴熙彬)의 밀고를 받고 검거했다. 1925년 6월에는 참의부 소속 독립군 이의준(李義俊), 김봉흥(金奉興), 전창식(田昌植) 등의 부하 20여 명과 강계군에서 전투를 벌였다.
1923년에 당해년도 도경부보시험에 응시해 합격되어 『조선총독부관보』 1924년 3월 13일자에 이름이 올랐다. 1925년 강계경찰서 경부보를 지낼 때 월봉 44원을 받았다. 1926년 12월 강계경찰서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했으며 1927년 11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로 전근했다.

 

참의부 맹장 이응서를 체포한 공로로 경찰관리 공로기장 받아

계난수가 평북경찰부로 전근할 무렵 그곳 고등경찰과장은 독립운동가 체포로 명성(?)이 자자한 김덕기였다. 김덕기는 영화 〈밀정〉의 모티브가 된 ‘황옥경부사건’을 탐지하여 의열단의 2차 국내폭파작전을 막았고, 정의부 총사령관 오동진을 함정에 빠뜨려 체포한 자다. 평북경찰부에서 계난수는 직속상관인 김덕기의 지휘를 받아 독립운동가 검거에 맹활약을 펼친다.
1929년 4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한 고려혁명군 중앙위원장 최승호(崔承皞)와 일행 3명을 체포했다. 최승호 일행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왔다가 여관에서 계난수가 이끄는 형사대에 의해 피체된 것이다. 최승호와 박화용은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예비, 총포화약취체령 위반으로 신의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어 각각 징역 10년과 3년을 언도받았다.

07

경찰관리공로기장 수여식. 『매일신보』1930.9.19.

 

그해 5월 일찍이 사이토 총독이 국경시찰시 저격을 시도했고 참의부의 맹장으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200여 차례나 벌인 독립군의 거두 이응서(李應瑞)를 신의주에서 직접 체포했다. 그 공로로 계난수는 1930년 8월 4일 명치 43년 칙령 제438호에 의거해 칙정(勅定)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 경찰관리 공로기장은, 군인에게 천황이 직접 수여하는 금치훈장(金鵄勳章)에 비견될 정도로 권위 있는 상이다. 같은해 9월 17일 평북도청에서 열린 수여식에서 이시가와(石川) 평안북도지사에게서 공로기장을 전달받았다.(『매일신보』 1930.9.19. (3면) 「桂警部에 勅定 功勞章 授與式 擧行」) 이응서와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진행중이던 이응서가 1931년 2월 김덕기 고등경찰과장과 계난수 형사에 대해 불법감금과 절도, 폭행으로 고소를 제기했다. 신의주에서 체포된 다음 신의주경찰서에서 불법 감금과 고문・폭행을 당했고 자신이 갖고 있던 가방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이 이응서의 고소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김덕기 측도 이 문제를 일소에 부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08

 

1929년 12월경 계난수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7급)이면서 동시에 신의주경찰서 경부를 맡고 있었다. 1930년경 신의주경찰서의 발표에 따르면, 독립군이 국경을 침입할 때 경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된 자는 1년 내에 4천여 명이나 되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건수도 1백여 건에 이른다고 했다.
1931년 평안북도경찰부 재직중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그해 9월부터 1934년 3월까지 종군해 국경 대안경비를 비롯해 군대 및 군수품 수송, 민심사찰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1931년 9월에는 중국 안동현 등지에서 중국 관헌들에 대한 정보수집업무를 맡았고 10월에는 중국민에 대한 동향을 사찰했다. 1931년 12월 중국 군벌인 장학량(張學良)이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압록강 철교 부근에 대한 사찰 및 경계업무에 종사했다.
1932년 5월에는 오성륜(吳成崙)의 부하 김혁산(金革山), 임호(林虎) 등이 일본 관공리 암살과 관공서 폭파를 기도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밀정 이흥하(李興夏)를 시켜 정보를 수집했다. 이어 같은 달 신의주고등보통학교 학생격문살포사건 주모자인 이종림(李宗林), 박병상(朴炳商) 등을 체포하기 위해 김덕기(金悳基) 지휘하에 형사대를 이끌고 경성으로 출장, 수색활동을 벌였다.
같은 달 유석화(劉錫華) 순사부장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사건을 수사하고 혐의자를 체포했다. 계난수는, 김명시(金命時)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던 오빠 김형선(金炯善)을 도와 인천에서 기관지 〈꼼무니스트〉를 배포하며 노동운동을 하다가 조직이 탄로나자 중국으로 돌아가기위해 신의주에 왔다가 근우회 전 지부장 박은형의 집에 머물러 있던 것을 탐지하고 현장에서 그를 체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의 주요 인사 조봉암, 홍남표, 김찬, 김명시 등 16명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당시 평북경찰부 경부였던 스에나가 하루노리(末永淸憲)는 『조선사상범검거 실화집』에서 김명시의 체포과정을 상세히 다루었다. 또한 계난수는 같은 해 6월에는 중국상해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독립군들이 만주사변을 계기로 국내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안동현에 잠입해 상해교민단 단원 이계상(李啓尙)을 체포했다.
이후에도 계난수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로 계속 재직하며 고등경찰로 활약했다. 1932년 12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 관등 6급이었다. 1934년 3월 1일 만주국 황제가 수여하는 만주국 건국공로장, 1934년 4월 29일 만주사변 때 활약한 공로로 훈8등 서보장을 받았고, 같은 날짜에 ‘소화6년내지9년사변’에 대한 공로로 종군기장을 받았다. 1934년 11월 평안북도 도경부를 그만두고 만주로 건너갔다.

 

09

대만주국 건국공로훈장(1934)과 소화6년내지9년사변 종군기장(1934),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간도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 토벌•귀순공작을 벌이다

계난수는 1934년 12월 만주국 간도성공서(間島省公署) 경무청 특무과 사무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계난수와 함께 간도성으로 전근한 조선인 관리로는 전라북도 내무부 산업과장이었던 유홍순(민정청 실업과장),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윤태동(교육청 학무과장), 만주국 문교부 속관에서 시학관으로 승진한 김춘학(교육청 시학관) 등이 있었다. 이들은 만주국의 요청에 의해 조선총독부의 선발을 거쳐 조선인이 성 전체 인구의 60%(약 50만 명, 1934년 현재)를 차지하는 간도성 고위 관리로 영전해 온 것이다. 경무청 특무과는 주로 반만항일의 운동가들을 색출하고 신문하는 부서였다. 1937년 4월까지 경무청 특무관 사무관으로서 재직하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막론하여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는 임무를 담당했으리라 짐작된다. 1937년 4월 10일 경무청 특무과 사무관을 사직했다. 이후 일제시대 기록에서는 계난수가 종적을 감추었다가 해방 후 반민특위 관련문서 중 친일파 김창영 재판자료에서 다시 등장한다.

 

오호!! 밀림에 방황하는 제군!!
이 권고문을 보고 즉시 최후의 단안을 내려 갱생의 길로 뛰여 나오라!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고 참회할 것도 참회하고 이제까지의 군등(君等)의 세계에 유례없는 불안정한 생활에서 즉각으로 탈리(脫離)하야 동포애의 따뜻한 온정 속으로 돌아오라. 그리하야 군등의 무용과 의기를 신동아건설의 성업으로 전환 봉사하라! 때는 늦지 않다! 지금 곧 아(我) 150만 동포의 최후의 호소에 응하라. 최선을 다하야 제군을 평화로운 생활로 인도할 본위원회의 만반 준비가 제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金日成 等 反國家者에게 勸告文, 在滿同胞 百五十萬의 總意로」, 『삼천리』 제13권 1호(1941.1)

 

이 권고문은 1940년 12월경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본부가 길림・간도・통화성에서 항일무장활동을 벌이던 김일성 유격대 등 동북항일연군을 투항・귀순시키기 위해 비행기로 살포한 권고문이다.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길림・간도・통화성의 동북항일연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동남부치안숙정공작(東南部治安肅正工作)’을 실시하면서 이 지역에 일본군과 만주국군 6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고자 했다. 이때 위의 병력뿐만 아니라 일반 경찰, 특무기관, 지방행정기구, 협화회까지 총동원하여 사상・문화 토벌도 동시에 전개하였다. 이에 이범익 만주국 참의의 발의로 조선인 후원조직이 만주국 수도인 신경에 설립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다. 만주에서 발행된, 한글 어용신문인 만선일보는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뉴스’라는 난을 마련하여 조선인들의 후원금 내역과 후원회의 원호활동을 매일같이 보도하였다. 이때 김창영은 만주국 치안부 경무사 이사관 겸 통화성 경무청 이사관으로서(1939.5~1943.4)으로서 조선인 동북항일연군의 토벌과 귀순공작을 진두지휘하였다.

 

단기 4275년[1942년] 10월부터 6개월간은 안광훈(安光勳) 유홍순(劉鴻洵) 김송렬(金松烈) 계난수 등 외 일만 군경과 더불어 동만지구 일대의 숙청공작을 추진 협력하여 김일성 부대 임수산(林守山) 외 30여 명, 양정우(楊靖宇) 군사령부 총무부장 오성륜(吳成崙) 외 10여 명, 동 군사령부 경위여장(警衛旅長) 박득범(朴得範) 외 6명, 동 사령부 소속단장 김백산(金白山), 김일성 부대 정치주임 김재범(金在範) 외 6명 등 수백여 명의 항일조선군을 체포 숙청케 하였고(후략)(「김창영 의견서(1949.5.5.)」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김창영의 진술이 사실에 부합하는 점이 많지만 “4275년(1942) 10월부터”이라는 시점 부분은 ‘1940년 10월’의 오류로 판단된다. “1940년 10월부터 ‘추동계대토벌’이 시작되면서 군사토벌은 제3단계(1940.10~1941.3)에 들어서게 된다.(중략) 1942년 3월 19일 토벌사령부 및 각 토벌대의 해산명령이 내려져 소위 ‘野副大討伐’은 막을 내렸다”(윤휘탁, 『일제하 만주국연구』, 1996, 161쪽)에서 보듯이 1941년 3월경 제3단계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끝나기 때문이다. 또 김창영의 진술대로라면 박득범의 귀순시기가 1942년~1943년 사이지만, 1940년 10월 연길 野副토벌대사령부에서 발행한 「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에 따르면 1940년 6월 귀순하고, 10월에는 野副 토벌대장과 선전용 기념사진을 찍는다. 또한 양정우 1940년 2월 총살되어 효수, 조아범 1940년 12월 총살, 위증민 1941년 3월 병사 등 각종 기록에 비추어 김창영의 기억에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다.)

 

10

1940년 10월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은 일본군 토벌대를 방문하고 일본 천황과 만주국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野副토벌대사령부에서 건립한 충혼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 가운데줄 왼쪽부터 김재범, 박득범, 김백산. 출처 「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 1940.10.19)

 

 

김창영은 1949년 5월 반민특위 조사에서 동북항일연군들을 토벌・귀순시킨 자신의 공적을 위와 같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그의 말처럼 일제의 ‘동남부치안숙정공작’으로 인해 오성륜・박득범・김재범 등 1천여 명의 동북항일연군들이 투항・귀순하고, 양정우・조아범・허형식 등 주요 지휘관들이 사살되어 길림・간도・통화성의 동북항일연군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한창 진행되던 1940년~1941년 사이, 계난수는 “귀순공작에 있어서 간도성 공작반 총지휘자는 조선인 유홍순이었고, 같은 성 연길현 공작반장은 조선인 김송렬, 같은 성내 왕청현 공작반장은 조선인 계난수(전 간도성 사무관)였다”(「김창영 피의자신문조서(제3회)(1949.4.20.)」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에서 보듯이 간도성 왕청현 공작반장으로서 제1로군사령부 경위여장 박득범 등 7명을 귀순시키는 등 치안숙정공작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1년 이후와 해방 후 계난수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진주로 만주국이 멸망했다. 이때 만주국에 있던 많은 친일파들이 인민재판으로 처형되거나 소련의 유배지로 끌려갔다. 계난수가 이 경우에 해당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후 계난수는 역사의 법정으로 호출되어 냉엄한 심판을 받는다.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친일행적이 수록되었다. 같은해 11월 30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의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에게 내려진 죄목은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한 행위”(특별법 제2조 제3호),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저해한 행위”(제5호), “일제의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탄압하는데 적극 앞장선 행위”(제16호),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협력해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행위”(제19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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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들, 조선통신사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다

조영숙 도쿄지회 총무

2019년 11월 10일 오오타(大田)민단 주최의 역사탐방 여행으로 시즈오카의 淸見寺를 찾았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 후지산도 멋지게 보였고, 마침 이날이 일본의 새 천황 즉위 퍼레이드가 있는 날이라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여행했다.
올해는 무오독립선, 2·8독립선언, 3·1혁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뜻깊은 해이다. 그야말로 선열님들의 해이다. 선열님들의 뜻을 이어받아 동북아 평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뜻깊은 올해에 불행하게도 한일관계는 최악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그 옛날, 양국은 원한과 불신의 상처를 딛고 조선통신사를 통해 평화와 교류의 역사를 200여 년간 이어왔다. 한일관계의 틈새에 끼어 살고있는 우리 재일동포들이 어찌 그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그리워하고 다시 새겨보고 싶지 않겠는가?(조선통신사와 관련한 여러 유물들이 한일 두 나라의 시민사회의 노력에 의해 2018년 유네스코의‘세계기억유산’에 등록되었다.)
淸見寺에 도착하여 안내 설명을 듣다가 우리 일행 모두가 깜짝 놀랐다. 2019년 7월 7일자 동경신문 기사의 복사본을 배부받았는데, 그 기사 내용에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가을에 일본을 방문하여 淸見寺에서 아베 수상을 만날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다.(2018년은 양국의 문화교류를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수상이 함께 발표한 ‘한일관계 파트너십 선언’ 20주년이 되던 해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이후 강제징용문제, 수출규제 강화문제, 지소미아문제 등으로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동경신문은 이 어려운 한일관계에 국민들의 대립감정을 진정시키고 대화를 통해 길을 찾기 바란다며 꿈으로 끝난 淸見寺에서의 한일 정상의 만남을 다시 꿈꾼다며 글을 맺고 있다.
두 정상의 만남을 가장 간절히 바라는 건 재일동포들이 아닐까? 한일 두 나라가 갈등하면 몇 배가 더 아프고 두 나라가 잘 지내면 평안하게 꽃피는 존재가 바로 재일동포들이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은 일제시대 살길을 찾아 건너온 동포들의 후손으로부터 뉴카마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선통신사가 머문 淸見寺를 찾아가는 날도 이런 다양한 재일동포들과 일본인도 함께 했다.
조선통신사는 처음엔 두 나라의 정치적인 목적이 우선이었다고 한다. 조선측에선 조선포로 귀환, 일본정세 파악 등이었고 일본측에선 도쿠카와 이에야스 막부의 새로운 외교방침, 국내정치적 목적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엔 문화교류로 확대 발전되어 조선의 선진문물이 일본에 많이 전해졌고 일본 문화도 조선에 전해지는 무지개 가교였다. 마침 그날 여행에서 출출할 때 먹으려고 고구마를 삶아 가져갔다. 고구마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작물로 많은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낸 구황작물이 되었다.
한편 조선의 선진문물 중에서 일본에 전해진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허준의 <동의보감> 속의 의술이 일본에 전해져 많은 일본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귀한 역할을 했다. 그 귀한 역할을 이 시대 재일동포에게 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사회를 일본인들과 함께 만들며 공생하는 재일동포들, 그러나 재일동포 문제가 한일협정 때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동포들은 일본사회에서 차별받고 한편 조국의 버림 속에서 살아왔다.
몇 겹의 고통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 동포들이 이제 노령을 맞아 몸의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동의보감’이 이 시대 재일동포들에게 빛과 힘이 되어주기를 희망해본다.(<동의보감>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으로 끝난 한일정상회담이 다시 열려야 한다. 그 정상회담이 열리는 장소는 작년 오오타민단에서 역사탐방을 간 ‘고마진자(高麗神社)’ 쯤이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그곳은 고대 양국간의 풍요로운 교류가 있었음을 증거하는 곳이다.
꽁꽁 묶인 한일관계가 부디 잘 풀리기를 기원하면서 내년의 역사탐방은 좀더 재일의 뿌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 떠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오오타민단 지부에 전한다.
• 이 감상문은 오오타민단 소식지 제85호(2020.3.27.)에 간략히 실렸다.

화, 2020/05/26-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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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어떤 인연 –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에 부쳐

김경현 후원회원(행정안전부 전문위원)

 

2001년 8월부터 연구소를 후원하기 시작한 김경현 후원회원은 제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자이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3팀장을 지냈다. 현재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서 전문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 글은 2018년 타계한 ‘진주정신’의 표상으로 일컬으며 지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왔던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를 맞이해 고인과의 인연을 되돌아보고 쓴 회고담이자 추도사이다.- 엮은이

박노정 선생님의 생전 모습(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박노정(朴魯貞, 1950~2018) 선생님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분의 삶을 이야기해야 제가 맺은 인연에 대한 의미도 부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노정 선생님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경남 진주시 봉곡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주 교육장을 지낸 부친과 중등학교 교장을 지낸 형이 있는 교육자 집안이었습니다. 경상대학교 농과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학군장교(ROTC)로 임관해 전방에서 육군보병 소대장을 지냈으나 폭압적인 군대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군병원에 입원했다가 의가사로 제대했습니다.
이후 출가하고 입산해 팔공산 원효암 등지를 전전하며 승려생활을 하다가 속세에 나왔는데, 고향 진주에 돌아온 후 시인과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사회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습니다.
문인활동으로 ‘동기 이경순선생’ 전집간행위원회 상임위원, 진주문인협회장, ‘진주 가을문예’운영위원장, 진주민예총 회장, 이형기시인 기념사업회장, 경남시인협회장 등을 지냈습니다. 이경순(李敬純)은 일제 때 아나키스트로 활동했던 진주의 시인이고, 이형기(李炯基)도 시 「낙화(落花)」로 유명한 진주의 시인입니다.
특히 사회단체활동으로 남성당 김장하(金章河) 선생께서 설립한 진주 남성문화재단에서 이사로 활동했으며, 진주문화예술재단 이사를 비롯해 진주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진주정신지키기모임 대표, 진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6․15공동선언실현을 위한 진주시민운동’ 상임대표, 진주주민협의회 공동대표, 독도수호와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저지를 위한 시민운동본부 공동대표 겸 ‘친일잔재청산 시민운동 공동대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시민단체를 맡아 지역사회운동을 이끄는데 헌신했습니다.
박선생님의 지역사회활동 중 가장 두드러지고 애정을 쏟았던 활동은 지역언론운동이었습니다. 1990년 3월 시민주를 모아 <진주신문>이 창간될 때 발행인과 편집인을 맡았는데, 창간 호에 축하시를 발표했습니다. 이후 2002년까지 <진주신문> 대표이사를 지내며 지역언론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박선생님은 <진주신문> 발행인을 지낼 때 지역권력과 토호세력을 상대로 비리와 부정을 폭로하면서 여러 차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사건으로 피소되어 법정에 서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친일청산운동에 앞장서 친일화가였던 이당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논개영정(論介影幀)’을 논개의 사당인 진주성 의기사에서 뜯어내 폐출했다가 유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박선생님은 ‘진주정신’을 지키고 역사정의를 세운 행위가 죄가 된다면 벌을 달게받겠다고 벌금납부를 거부해 강제노역형에 처해짐으로써 진주교도소 노역장에 유치되었습니다. 이에 진주시민들이 앞장서 모금운동을 벌여 그 성금으로 벌금을 납부해 풀려났으며, 남은 금액은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를 창립하는데 의미있는 기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진주지역사회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실천적 삶의 모습을 보여준 박선생님이었습니다. 과연 저는 어떻게 박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의 끈을 맺게 되었을까요. 1980년대 중반 대학 재학 때 절친했던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선배를 통해 박선생님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는 경상대 터울시조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여태전(余泰田) 선배였습니다. 어느날 저는 여태전 선배의 손에 이끌려 박선생님이 본성동 옛 진주시청 앞에서 운영하는 찻집 ‘아란야(阿蘭若)’[불교용어로 ‘수행처’를 의미함]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박선생님이 가르치는 <금강경(金剛經)> 강의를 듣다가 따분해서 밥만 몇 차례 얻어먹고 도망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박선생님은 개의치 않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저를 불러 <진주신문>에 들어오라고 이끌어 1991년 8월 저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직업으로 팔자에도 없는 신문기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박선생님은 아란야를 방문한 양산 효암학원 채현국(蔡鉉國) 이사장에게 여태전 선배를 훌륭한 젊은이라고 소개해 여선배가 바라던 교직의 길을 걷게 해 주었습니다.
여선배는 양산 효암여상을 시작으로 진주 삼현여고 교사, 산청 간디학교 교감, 창원 태봉고교장을 거쳐 남해 상주중학교장을 지내며 대안교육에 힘쓴 훌륭한 교육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여선배도 박선생님이 추구했던 바와 같이 민족정신과 역사정의활동에 공감하여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지요.
한편 박선생님이 <진주신문>에 있을 때 가끔 직원회식을 가졌는데 드물었지만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술은 전혀 마시지 못했지만 노래는 꽤 잘 불렀습니다. 2차로 자리를 옮긴 노래방에서 반주에 맞추어 노래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르던 것을 잊지 못합니다. 이 노래는 음유시인으로 잘 알려진 백창우(白昌牛) 시인이 작사・작곡하고 가창력과 호소력이 있던 임희숙(任喜淑) 가수가 1984년에 불러 히트한 곡입니다. 노랫말과 음율이 마치 박선생님이 젊은 시절에 겪었던 고단하고 힘들었던 신산한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3년 저는 박선생님과 함께 검찰조사를 받고 법정에 서야만 했던 운명적인 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제가 당시 경남지역의 최대 현안사업이던 남강댐 보강공사에 따른 수몰지 보상과 관련한 측량비리 및 부정보상에 대한 문제를 심층 취재한 기사를 작성해 보도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그때 이 기사를 본 사천군의회 이원식(李源植) 의원이 자신의 땅에 측량비리와 부정보상이 있다는 취지로 보도한 <진주신문>의 기사에 대해 취재기자였던 저와 신문발행인이었던 박선생님을 창원지방검찰청 진주지청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했던 것입니다.
진주지청은 고소사건을 접수하자마자 경찰에 사건을 배당하지 않고 직접 수사에 착수해 신속하게 두 사람을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검찰에 구속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로 당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이의원은 당시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순회심판 조정위원을 맡고 있었던 지역유력자로서 검찰과 법원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원식 의원은 당시 사천군의원으로서 지역현안과 관련해 언론보도 및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회적 지위에 있었으므로 <진주신문>의 기사가 비방을 목적으로 작성된 사실무근한 허위사실로 보기 어려워 그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심 진주지원 재판에서 검사는 피고인들에게 징역 3년씩을 구형했고 판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습니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각 불복하고 항소했습니다. 그 결과 창원지방법원에서 열린 2심 합의부재판에서는 치열한 법정공방 끝에 사실관계가 입증되고 언론보도의 공익성이 인정되어 실형을 내린 원심판결을 파기했습니다. 그러나 기사에 일부 비방의 목적이 있다고 여전히 판단함으로써 벌금형이 선택되어 각각 벌금 100만원이 선고되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벌금형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다시 상고했는데 대법원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원심파기환송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냈습니다. 1997년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비방의 목적이 있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함으로써 사건을 창원지방법원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지역유력자이며 공적인 존재로서 현직 군의원에 대한 비리의혹은 정당한 공적 관심의 대상이므로 언론보도로 인한 군의원 개인의 명예가 훼손된다고 하기보다 지역민의 알권리가 우선되어야 함으로 이를 취재해 보도하는 언론의 행위가 부당하다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판결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창원지방법원 형사부로 되돌아온 파기환송심 재판에서 피고인들에게 모두 무죄가 선고되면서 이 사건은 완전히 끝나 판결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5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끌어온 <진주신문>에 대한 남강댐 수몰지 보상과 관련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사건이 무죄로 판결되면서 진실이 승리하고 정의가 살아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저 자신의 개인적인 승리보다 올곧은 언론인의 자세로 초지일관한 박선생님의 승리였고, 또한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진주신문>의 승리였습니다. 이후 저는 <진주신문> 필화사건을 깨끗하게 마무리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신문사를 떠났습니다. 비록 IMF사태를 계기로 신문사를 그만 두고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와 논개제에서 잠시 문화운동을 하다가 2004년 역사운동을 위해 진주를 떠나 서울로 왔지만, 박선생님과 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주에서 친일청산운동을 하던 박선생님을 서울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는데, 2009년 <친일인명사전> 출간을 기념하는 국민대회가 열리던 자리였습니다. 원래 숙명여대 강당에서 열기로 예정되었으나 대학측의 거부로 효창공원의 백범 김구(金九) 선생 묘소로 옮겨져 열릴 때 그곳을 찾아온 박선생님을 발견하고 매우 놀라워하며 뜨겁게 해후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당시 저는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활동을 하면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편찬활동에도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박선생님은 2015년 형평문학선양사업회장 등을 지내며 만년에도 활발히 활동했으나 2018년 지병이 악화되어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00세시대라는 요즘의 장수추세에 비추어 보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너무 이른 야속한 죽음은 아니었는지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부인 황선옥(黃善玉) 여사께서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박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시에서 자신과 함께 했던 ‘낯선 사내’를 스스로 지우고 먼 길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박선생님이 지웠던 낯선 사내는 생애
의 전부를 자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청빈한 삶을 살았던 박선생님의 자화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 박선생님은 결코 낯선 사내가 아니었으며 그는 아직도 저의 ‘영원한 <진주신문> 발행인’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진주신문>도 박선생님도 없고 단지 이름만 같은 짝퉁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여전히 제 마음속에는 젊은 혈기가 넘치던 그때 그 시절의 <진주신문>과 박선생님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박선생님의 장례식 때 황여사께서 다음 생에는 부부가 아닌 좋은 친구로 만나자고 했던 말이 뇌리에 남습니다. 저 역시 다음 생에는 기자와 발행인이 아니더라도 어떤 인연이든지 끈이 이어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도 괘념치 않을 것입니다.
박선생님이 생전에 남긴 시집으로는 첫 시집 <바람도 한참은 바람난 바람이 되어>를 비롯해 <눈물공양>과 <운주사> 등이 있는데, 저는 첫 시집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아직도 귓전에는 박선생님이 신문사에서 저를 부르던 호칭이 이명처럼 들려옵니다. ‘김경현 기자’가 아닌 “경현 수좌”라고 부르곤 했던 다정한 목소리가 이제는 바람이 되어 다시 귓전을 스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또 다른 저의 사회학과 선배이던 양곡(暘谷) 시인의 시 「고 박노정 시인」을 인용합니다. 이 시를 음미하면서 박선생님의 영면을 빌며, 2주기(7월 4일)를 앞두고 그분의 삶과 인연을 소중하게 추억하고자 합니다.

유발거사(有髮居士)였다/술은 마시지 못해 차를 즐기며/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언제나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시(詩)를 좋아했고/문화와 예술을 좋아했다/무엇보다도 올곧고 결 바른 시대의/민족정신을 좋아했다????에나 진주사람이었다/옳고 바른 일에는 늘 앞장서고자 했고/시들어져가거나 꺼져가는 목숨들에게는 슬그머니 다가가/빙그레 미소 지으며 새로운 생명과 가치를 불어넣어주곤 했다.

화, 2020/05/2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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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친일파 흉상 철거, 고등학생의 민원에 보훈처가 답하다

임승관 전남동부지부장

김정태 흉상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작년, 전국적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행사가 있었다. 전남교육청의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남청소년 역사탐구대회’를 진행해 왔으며 작년
으로 9회째를 맞이했다. 작년도 주제는 ‘임정 100주년·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 전라도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의 실상과 해결방안’ ‘전남지역 친일잔재의 실상과 해결방안’이었으며 도내 중·고교 70여 팀이 참가했다.
참가팀 중에는 고흥 녹동고등학교 팀도 있었는데 이 학생들은 대회 과정에서 자신들의 고장에 김정태의 흉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정태(1869~1935)는 강제합병 후, 전남 영광군수, 광주군수, 순천군수 등을 지냈으며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전남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했다. 1924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한국병합기념장(1912),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15),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28) 등을 받았다.
김정태의 아들 김상형(1897~?) 역시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며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전조선시국강연반 연사로 참여하였다. 중추원 의원 시절에는 내선일체 정신의 구현은 “반도민중의 일본화”에 달렸다고 주장하며 “천황폐하를 경모하여 받드는 정조(情操)를 고양”시키기 위해 “마을에서 학교에서 황거망배(皇居望拜)와 천양무궁(天壤無窮)을 기원하고 마음을 정화해 황국신민임을 맹세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 자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상형은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에 송치되었다.
이와 같은 김정태의 친일행적을 확인한 학생들은 2019년 8월 고흥군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광복 74년이 지났음에도 이런 역겨운 동상이 주민들의 휴식공간인 옥하공원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고흥 군민들을 내려다보며 분명히 비웃고 있을 것입니다. 동상이 철거된다면 주민들의 애국심과 지역 역사의식이 한층 더 함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친일파 동상이 버젓이 세워진 채로 우릴 내려다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학생의 민원 글 발췌

 

고흥군은 학생들의 민원을 국가보훈처에 이첩했다. 김정태 흉상이 자리했던 옥하공원 내 토지를 비롯해 약 56만㎡의 토지가 김정태 후손들의 소유였으나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에 의해서 국가로 귀속된 이후 현재까지 국가보훈처가 관리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민원 전까지 국가보훈처는 그 땅에 친일파의 흉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민원을 넘겨받은 국가보훈처는 김정태의 후손에게 흉상을 자진 철거할 것을 통보했다. 그러나 후손들이 흉상 철거를 미루자 국가보훈처는 행정대집행을 통보했고, 결국 후손들은 4월 28일 오전 흉상을 철거했다. 철거는 국가보훈처와 고흥군청 관계자들이 오기 전에 신속히 진행 되었지만 필자는 오전 일찍 현장에 가 있었기에 다행히 철거의 모든 과정을 영상에 담아 지역언론사 등에 제공할 수 있었다.
김정태 흉상 철거는 아마도 친일파 기념물 철거를 학생들이 요구하고 고흥군과 국가보훈처 등 공공기관이 응답한 첫 번째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흉상 철거를 담당한 국가보훈처 담당자는 배움을 실천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행동과 민원 내용에 진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민원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백방으로 철거 방법을 알아내어 결국 성과를 이룬 보훈처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증명해 준 녹동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화, 2020/05/2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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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창군 80주년 광복군 합동추모제전

 

한국광복군 창군 80주년을 맞아 한국광복군동지회 주최로 6월 1일 국립서울현충원 대한독립군 무명용사위령탑에서 ‘창군 80주년 광복군 합동추모제전’이 봉행됐다. 김영관(97)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이 추념사를 했는데 현재 생존 광복군은 15명으로 그나마 거동이 자유로운 분은 김영관 회장뿐이다.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로 불리고 있으나 회원들이 점점 나이 들어가며 동지회 사무실 운영조차 어렵게 꾸려가고 있어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특히 이날 추모제전에는 국방부 등 유관 기관의 참여와 후원이 눈에 띄지 않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 무색했다. 이날 추모제전에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참석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6/2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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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광복회, 반민특위 습격일에 경찰청장 사과 요구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6월 6일 오후 3시, 1949년 6월 6일 당시 친일경찰이 자행한 반민특 위 습격 사건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반민특위 유족과 광복회원, 일반시민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중부경찰서를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가졌다. 또한 당시 습격의 책임을 지
고 현 민갑룡 경찰청장의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지난해 4월 3일 서울 광화
문광장에서 열린 제71주년 4‧3 광화문 추념식에 참석, 경찰총수로서는 처음으로 “무고하게 희
생된 분들께 사죄드린다”는 뜻을 밝혔으며 올해 5월 12일에도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경찰
의 지난날을 반성 한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이날 행사는 중부경찰서 앞 가로수에 리본달기를 시작으로 김원웅 광복회장의 대회사, 송영길 의원의 인사말, 임헌영 소장 등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의 연대사, 구호제창 순으로 마무리됐다. 김원웅 회장은 “71년 전 오늘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폭란의 날’로써 가슴 아프고 슬픈 날이었다.
이 날로부터 이 나라는 ‘친일파의, 친일파에 의한,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며, “광복회는 올해부터 이 날을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하고, 매년 이 날을 애상(哀傷)의 날로 기억하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밝혔다. 임헌영 소장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모든 부패와 부정의 뿌리는 반민법을 무력화시킨 데서 비롯됐다. 물론, 그 명령자는 이승만이지만 친일경찰들이 대세를 이루어 반민특위를 무장 습격한 경찰의 수치스런 과거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며, “아직도 과연 경찰이 과거의 미망에서 깨어났는지 각성하는 계기를 삼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화, 2020/06/2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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