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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은 악질 친일경찰 계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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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은 악질 친일경찰 계난수

익명 (미확인) | 금, 2018/04/20- 14:17

열전친일파 19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에 다룰 친일파는 통감부 시절부터 일본군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했고, 병합 후 헌병보조원으로 줄곧 있다가 3・1운동 이후 순사와 경부보를 거쳐 경부로 진급했고, 독립군 사이에서 평안북도의 ‘일등 창귀’(倀鬼 : 호랑이에 먹혀 죽은 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친 계난수이다. 1930년에는 참의부의 맹장 이응서를 체포한 공적에 힘입어 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 이 훈장을 받은 조선인 경찰은 일제 치하 36년간 혜산 보천보전투 때 귀환하는 김일성의 항일부대를 추격하고 국내 동조자를 색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최령(崔鈴. 해방 후 최연崔燕으로 개명)과 의열단 폭탄반입사건 관련자를 체포한 김덕기(金悳基) 등 10여 명뿐이다.
이러한 공적에 비해 계난수의 개인사에 대한 자료를 매우 드물고 1941년 이후의 행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신문기사와 일제 문서를 근거로 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망라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한 그의 활약상(?)을 추적한다. 또한 만주로 건너간 이후 간도성 사무관 시절의 행적과 1940년경 동북항일연군 체포・귀순 공작 활동을 당시 시대상황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헌병보조원에서 경부가 되기까지 17년 걸려

계난수는 1890년 8월 1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1906년 강계군 사립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했다. 1908년 7월 일본군 조선주차군 의주헌병대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1919년 3・1운동 직후까지 12년간 헌병보조원으로 일했다.
헌병보조원제도는 의병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1908년 6월 11일 한국칙령 제31호 「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에 의거해 실시되었다. “폭도의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헌병보조원을 모집하여, 한국주차일본헌병대에 의탁하고, 그 복무에 대해서는 헌병대장의 지휘를 받는다.”(제1조)라는 조문에서 헌병보조원의 성격과 역할이 여실히 드러난다. 헌병보조원은 만 20∼45세의 조선인 한글 해독자 중에서 모집되었으며, 군속의 신분을 보유하고 ‘폭도의 진압과 안녕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헌병의 업무를 보좌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 시기 모집 정원은 4천여 명인데, 1908년 7월 1일부터 9월에 걸쳐 채용이 완료되었다. 헌병보조원은 전원 주차헌병대가 관장하며, 1개월 이내의 견습기간을 마친 후 헌병 1인당 2∼3명씩 배치되었다. 대우는 본봉·출장여비와 일어 해득자에 대한 통역수당이며, 순사 봉급과 같은 수준이었다.
계난수는 병합 전후로 의주헌병대 헌병보조원으로 있었다. 그로 인해 1912년 8월 1일 칙령 제56호에 의해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이후 1912년에서 1919년 사이 강계헌병분견대가 설치되자 고향인 강계로 전근한 것으로 판단된다. 1919년 5월 강계헌병분견대에서 헌병보조원으로서 3·1운동과 관련해 증인 이정화(李晶和)에 대해 취조할 때 통사(통역)로 참여해 신문을 도왔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헌병보조원으로서 계난수의 구체적인 활약상은 나타나지 않으나, 강계 3・1운동에 관한 기록(“4월 8일 역사적인 새 아침은 밝았다. 거사준비에 착수한 지 2주일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읍내 헌병분견대의 주구로 악명 높던 계난수의 무리조차 오늘 거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독립운동사 제2권 : 삼일운동사』 1971, 484쪽) 에서 계난수가 강경읍 헌병분견대 주구로서 악명을 떨쳤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의 여파로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뀌고 그에 따라 기존의 헌병경찰제도도 보통경찰제도로 변화했다. 1919년 8월 조선총독부관제가 개정되어 ‘총독무관전임제’가 폐지되고, 총독의 육해군 통솔권한을 없애는 등 총독의 군사적 색채를 약화시켰으며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헌병보조원제도도 폐지되었다. 일제는 1920년대에 경찰력 감소를 이유로 일반경찰관을 대규모로 확충하였고, 헌병 및 헌병보조원 출신자 다수가 경찰관으로 전직하였는데 순사로 전직한 조선인 헌병보조원 출신자는 4천여 명에 이른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인의 순사 지원자는 항상 채용인원에 비해 7~8배에 달했다. 그 이유로 순사가 조선인이 취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관직 중 하나이고 제1차세계대전 후의 불황으로 생활난이 심각해진 점을 들 수 있다.
계난수는 1919년 8월 20일 조선총독부령 제134호에 의한 관제개정으로 총독부 도순사로 임명되었으며, 평안북도 강계경찰서 순사로 발령받았다. 1920년 11월 강계경찰서 순사부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계난수는 국내외에서 밀정을 활용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추적, 검거하였고, 독립군과 교전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 강계경찰서 순사부장으로서 평북경찰부의 지휘하에 만주 안동현(安東縣)으로 파견나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였다. 즉 1922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원이면서 안동현 소재 이륭양행(怡隆洋行) 고원으로 안동현 우편국에 수신함을 설치해 독립군들 사이의 연락을 중계하던 김문규(金文奎)를 체포했다. 1923년 10월. 평안북도 강계군 종서면에서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벌이던 김기현(金基鉉)이 종서면주재소를 습격하려 한다는 첩보를 탐지하고, 김기현을 체포하기 위해 종서면에 출동하였다가 김기현이 만주로 피신하자 주민 전창엽(田昌燁)·김기흡(金錡洽)·조상국(趙尙國) 등 10여 명을 체포하여 고문을 자행했다. 1924년 8월에는 참의부 소대장 장창헌(張昌憲) 및 독립군 2명을 유인해 일본경찰에 살해되도록 만든 밀정 홍인화(洪仁化)를 보복 살해한 참의부 부원 최윤흥(崔允興)을 밀정 박희빈(朴熙彬)의 밀고를 받고 검거했다. 1925년 6월에는 참의부 소속 독립군 이의준(李義俊), 김봉흥(金奉興), 전창식(田昌植) 등의 부하 20여 명과 강계군에서 전투를 벌였다.
1923년에 당해년도 도경부보시험에 응시해 합격되어 『조선총독부관보』 1924년 3월 13일자에 이름이 올랐다. 1925년 강계경찰서 경부보를 지낼 때 월봉 44원을 받았다. 1926년 12월 강계경찰서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했으며 1927년 11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로 전근했다.

 

참의부 맹장 이응서를 체포한 공로로 경찰관리 공로기장 받아

계난수가 평북경찰부로 전근할 무렵 그곳 고등경찰과장은 독립운동가 체포로 명성(?)이 자자한 김덕기였다. 김덕기는 영화 〈밀정〉의 모티브가 된 ‘황옥경부사건’을 탐지하여 의열단의 2차 국내폭파작전을 막았고, 정의부 총사령관 오동진을 함정에 빠뜨려 체포한 자다. 평북경찰부에서 계난수는 직속상관인 김덕기의 지휘를 받아 독립운동가 검거에 맹활약을 펼친다.
1929년 4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한 고려혁명군 중앙위원장 최승호(崔承皞)와 일행 3명을 체포했다. 최승호 일행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왔다가 여관에서 계난수가 이끄는 형사대에 의해 피체된 것이다. 최승호와 박화용은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예비, 총포화약취체령 위반으로 신의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어 각각 징역 10년과 3년을 언도받았다.

07

경찰관리공로기장 수여식. 『매일신보』1930.9.19.

 

그해 5월 일찍이 사이토 총독이 국경시찰시 저격을 시도했고 참의부의 맹장으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200여 차례나 벌인 독립군의 거두 이응서(李應瑞)를 신의주에서 직접 체포했다. 그 공로로 계난수는 1930년 8월 4일 명치 43년 칙령 제438호에 의거해 칙정(勅定)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 경찰관리 공로기장은, 군인에게 천황이 직접 수여하는 금치훈장(金鵄勳章)에 비견될 정도로 권위 있는 상이다. 같은해 9월 17일 평북도청에서 열린 수여식에서 이시가와(石川) 평안북도지사에게서 공로기장을 전달받았다.(『매일신보』 1930.9.19. (3면) 「桂警部에 勅定 功勞章 授與式 擧行」) 이응서와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진행중이던 이응서가 1931년 2월 김덕기 고등경찰과장과 계난수 형사에 대해 불법감금과 절도, 폭행으로 고소를 제기했다. 신의주에서 체포된 다음 신의주경찰서에서 불법 감금과 고문・폭행을 당했고 자신이 갖고 있던 가방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이 이응서의 고소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김덕기 측도 이 문제를 일소에 부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08

 

1929년 12월경 계난수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7급)이면서 동시에 신의주경찰서 경부를 맡고 있었다. 1930년경 신의주경찰서의 발표에 따르면, 독립군이 국경을 침입할 때 경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된 자는 1년 내에 4천여 명이나 되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건수도 1백여 건에 이른다고 했다.
1931년 평안북도경찰부 재직중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그해 9월부터 1934년 3월까지 종군해 국경 대안경비를 비롯해 군대 및 군수품 수송, 민심사찰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1931년 9월에는 중국 안동현 등지에서 중국 관헌들에 대한 정보수집업무를 맡았고 10월에는 중국민에 대한 동향을 사찰했다. 1931년 12월 중국 군벌인 장학량(張學良)이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압록강 철교 부근에 대한 사찰 및 경계업무에 종사했다.
1932년 5월에는 오성륜(吳成崙)의 부하 김혁산(金革山), 임호(林虎) 등이 일본 관공리 암살과 관공서 폭파를 기도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밀정 이흥하(李興夏)를 시켜 정보를 수집했다. 이어 같은 달 신의주고등보통학교 학생격문살포사건 주모자인 이종림(李宗林), 박병상(朴炳商) 등을 체포하기 위해 김덕기(金悳基) 지휘하에 형사대를 이끌고 경성으로 출장, 수색활동을 벌였다.
같은 달 유석화(劉錫華) 순사부장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사건을 수사하고 혐의자를 체포했다. 계난수는, 김명시(金命時)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던 오빠 김형선(金炯善)을 도와 인천에서 기관지 〈꼼무니스트〉를 배포하며 노동운동을 하다가 조직이 탄로나자 중국으로 돌아가기위해 신의주에 왔다가 근우회 전 지부장 박은형의 집에 머물러 있던 것을 탐지하고 현장에서 그를 체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의 주요 인사 조봉암, 홍남표, 김찬, 김명시 등 16명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당시 평북경찰부 경부였던 스에나가 하루노리(末永淸憲)는 『조선사상범검거 실화집』에서 김명시의 체포과정을 상세히 다루었다. 또한 계난수는 같은 해 6월에는 중국상해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독립군들이 만주사변을 계기로 국내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안동현에 잠입해 상해교민단 단원 이계상(李啓尙)을 체포했다.
이후에도 계난수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로 계속 재직하며 고등경찰로 활약했다. 1932년 12월 평북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 관등 6급이었다. 1934년 3월 1일 만주국 황제가 수여하는 만주국 건국공로장, 1934년 4월 29일 만주사변 때 활약한 공로로 훈8등 서보장을 받았고, 같은 날짜에 ‘소화6년내지9년사변’에 대한 공로로 종군기장을 받았다. 1934년 11월 평안북도 도경부를 그만두고 만주로 건너갔다.

 

09

대만주국 건국공로훈장(1934)과 소화6년내지9년사변 종군기장(1934),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간도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 토벌•귀순공작을 벌이다

계난수는 1934년 12월 만주국 간도성공서(間島省公署) 경무청 특무과 사무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계난수와 함께 간도성으로 전근한 조선인 관리로는 전라북도 내무부 산업과장이었던 유홍순(민정청 실업과장),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윤태동(교육청 학무과장), 만주국 문교부 속관에서 시학관으로 승진한 김춘학(교육청 시학관) 등이 있었다. 이들은 만주국의 요청에 의해 조선총독부의 선발을 거쳐 조선인이 성 전체 인구의 60%(약 50만 명, 1934년 현재)를 차지하는 간도성 고위 관리로 영전해 온 것이다. 경무청 특무과는 주로 반만항일의 운동가들을 색출하고 신문하는 부서였다. 1937년 4월까지 경무청 특무관 사무관으로서 재직하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막론하여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는 임무를 담당했으리라 짐작된다. 1937년 4월 10일 경무청 특무과 사무관을 사직했다. 이후 일제시대 기록에서는 계난수가 종적을 감추었다가 해방 후 반민특위 관련문서 중 친일파 김창영 재판자료에서 다시 등장한다.

 

오호!! 밀림에 방황하는 제군!!
이 권고문을 보고 즉시 최후의 단안을 내려 갱생의 길로 뛰여 나오라!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고 참회할 것도 참회하고 이제까지의 군등(君等)의 세계에 유례없는 불안정한 생활에서 즉각으로 탈리(脫離)하야 동포애의 따뜻한 온정 속으로 돌아오라. 그리하야 군등의 무용과 의기를 신동아건설의 성업으로 전환 봉사하라! 때는 늦지 않다! 지금 곧 아(我) 150만 동포의 최후의 호소에 응하라. 최선을 다하야 제군을 평화로운 생활로 인도할 본위원회의 만반 준비가 제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金日成 等 反國家者에게 勸告文, 在滿同胞 百五十萬의 總意로」, 『삼천리』 제13권 1호(1941.1)

 

이 권고문은 1940년 12월경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본부가 길림・간도・통화성에서 항일무장활동을 벌이던 김일성 유격대 등 동북항일연군을 투항・귀순시키기 위해 비행기로 살포한 권고문이다.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길림・간도・통화성의 동북항일연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동남부치안숙정공작(東南部治安肅正工作)’을 실시하면서 이 지역에 일본군과 만주국군 6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고자 했다. 이때 위의 병력뿐만 아니라 일반 경찰, 특무기관, 지방행정기구, 협화회까지 총동원하여 사상・문화 토벌도 동시에 전개하였다. 이에 이범익 만주국 참의의 발의로 조선인 후원조직이 만주국 수도인 신경에 설립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다. 만주에서 발행된, 한글 어용신문인 만선일보는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뉴스’라는 난을 마련하여 조선인들의 후원금 내역과 후원회의 원호활동을 매일같이 보도하였다. 이때 김창영은 만주국 치안부 경무사 이사관 겸 통화성 경무청 이사관으로서(1939.5~1943.4)으로서 조선인 동북항일연군의 토벌과 귀순공작을 진두지휘하였다.

 

단기 4275년[1942년] 10월부터 6개월간은 안광훈(安光勳) 유홍순(劉鴻洵) 김송렬(金松烈) 계난수 등 외 일만 군경과 더불어 동만지구 일대의 숙청공작을 추진 협력하여 김일성 부대 임수산(林守山) 외 30여 명, 양정우(楊靖宇) 군사령부 총무부장 오성륜(吳成崙) 외 10여 명, 동 군사령부 경위여장(警衛旅長) 박득범(朴得範) 외 6명, 동 사령부 소속단장 김백산(金白山), 김일성 부대 정치주임 김재범(金在範) 외 6명 등 수백여 명의 항일조선군을 체포 숙청케 하였고(후략)(「김창영 의견서(1949.5.5.)」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김창영의 진술이 사실에 부합하는 점이 많지만 “4275년(1942) 10월부터”이라는 시점 부분은 ‘1940년 10월’의 오류로 판단된다. “1940년 10월부터 ‘추동계대토벌’이 시작되면서 군사토벌은 제3단계(1940.10~1941.3)에 들어서게 된다.(중략) 1942년 3월 19일 토벌사령부 및 각 토벌대의 해산명령이 내려져 소위 ‘野副大討伐’은 막을 내렸다”(윤휘탁, 『일제하 만주국연구』, 1996, 161쪽)에서 보듯이 1941년 3월경 제3단계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끝나기 때문이다. 또 김창영의 진술대로라면 박득범의 귀순시기가 1942년~1943년 사이지만, 1940년 10월 연길 野副토벌대사령부에서 발행한 「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에 따르면 1940년 6월 귀순하고, 10월에는 野副 토벌대장과 선전용 기념사진을 찍는다. 또한 양정우 1940년 2월 총살되어 효수, 조아범 1940년 12월 총살, 위증민 1941년 3월 병사 등 각종 기록에 비추어 김창영의 기억에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다.)

 

10

1940년 10월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은 일본군 토벌대를 방문하고 일본 천황과 만주국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野副토벌대사령부에서 건립한 충혼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 가운데줄 왼쪽부터 김재범, 박득범, 김백산. 출처 「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 1940.10.19)

 

 

김창영은 1949년 5월 반민특위 조사에서 동북항일연군들을 토벌・귀순시킨 자신의 공적을 위와 같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그의 말처럼 일제의 ‘동남부치안숙정공작’으로 인해 오성륜・박득범・김재범 등 1천여 명의 동북항일연군들이 투항・귀순하고, 양정우・조아범・허형식 등 주요 지휘관들이 사살되어 길림・간도・통화성의 동북항일연군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 한창 진행되던 1940년~1941년 사이, 계난수는 “귀순공작에 있어서 간도성 공작반 총지휘자는 조선인 유홍순이었고, 같은 성 연길현 공작반장은 조선인 김송렬, 같은 성내 왕청현 공작반장은 조선인 계난수(전 간도성 사무관)였다”(「김창영 피의자신문조서(제3회)(1949.4.20.)」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에서 보듯이 간도성 왕청현 공작반장으로서 제1로군사령부 경위여장 박득범 등 7명을 귀순시키는 등 치안숙정공작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1년 이후와 해방 후 계난수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진주로 만주국이 멸망했다. 이때 만주국에 있던 많은 친일파들이 인민재판으로 처형되거나 소련의 유배지로 끌려갔다. 계난수가 이 경우에 해당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후 계난수는 역사의 법정으로 호출되어 냉엄한 심판을 받는다.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친일행적이 수록되었다. 같은해 11월 30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의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에게 내려진 죄목은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한 행위”(특별법 제2조 제3호),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저해한 행위”(제5호), “일제의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탄압하는데 적극 앞장선 행위”(제16호),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협력해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행위”(제19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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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기 선생 12주기 추모식 거행

 

대전지부(지부장 박해룡)는 2월 5일 독립운동가 조문기(연구소 2대 이사장) 선생의 12주기 추모식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에서 진행했다. 이날 박해룡 대전지부장, 이순옥 부위원장과 대전지부 후원회원 그리고 방학실 기획실장을 비롯한 본부 상근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조문기 선생은 유만수, 강윤국과 더불어 1945년 7월 24일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이다. 이 의거는 경성부 부민관에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이 주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에 사제 시한폭탄 두 개를 설치해 폭발시켜 대회를 무산시킨 사건이다. 조문기 선생은 2001년 이돈명 변호사에 이어 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에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으나 사전 발간 1년 전인 2008년 타계하고 말았다. 정부는 2008년 고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2014년에는 모교인 화성매송초등학교 교정에 회원과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동상(제작 : 김서경 김운성)을 세우기도 했다. 동상과 묘비에는 평소 선생의 어록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 편집부

목, 2020/02/20-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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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소식]

 

오다 치요코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 이사, 박물관 후원금과 감상문 보내와

 

작년 3월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방문했던 평화자료관·쿠사노이에(草の家) 이사 오다 치요코(織田千代子) 님이 최근 사고로 동생을 잃었다. 동생에게 받은 유산 중 일부인 100만 원을 작년 12월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금으로 보내주셨다. 그리고 올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 소감을 바다 건너 편지로 보내오셨다. 그 전문을 아래 소개하고자 한다. •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정리


저는 2019년 2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쿠사노이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
로 회원 12명과 함께 ‘한국 평화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쿠사노이에에서 활동했던 김영환 씨가 있는 식민
지역사박물관을 김영환 씨의 안내로 둘러보았습니다.
이 박물관은 많은 사람들의 기부로 세워졌는데, 훌륭한 5층 건물의 모습에 놀랐습니다. 식민지역사박
물관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 지배했을 때의 자료를 수집, 전시, 소개하여,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실
현하기 위한 연구와 실천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전시되어있는 유물을 보고 놀라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과거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들뿐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한국병합’의
이름으로 침략하여 한국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친일파’라고 불린 사람들의 존재였습니다. 지금까지 ‘친일파’라는 말은 들어본 적
은 있었지만, 특별히 관심도 없었고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비로소 ‘친일파’에 대해 그들이 독립 후 한
국의 입법, 사법, 산업, 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물관을 견학한 감상은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여러 사실을 알았을 때, 일본인으로서 한국과 일
본의 올바른 과거의 역사에 대해 너무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자신
이 부끄러웠고, 가슴이 아파 우울해졌습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어 정
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일본인이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고 슬펐습니다. 앞으로 조금이라도 과거의 역사를 공부해서 알고 싶습니다.


 

금, 2020/02/21-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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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일본 정부에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봉환을 촉구하는 요청서 전달 및 협의 열려

 

1월 21일 일본국회의원회관에서는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보추협)가 일본 시민단체와 함께 일제의 침략전쟁에 군인, 군속으로 동원되어 희생된 한국인 전사자의 유골봉환을 하루 속히 실현하도록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하고 일본 정부 당국자와 유골문제에 관한 협의를 가졌다. 이날 협의에는 보추협의 이희자 대표와 유족 박남순 씨,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이 참가했다.
연구소와 보추협은 일본의 연대단체 ‘전몰자 유골을 가족의 품에 연락회’와 오키나와에서 전사자 유해발굴을 벌이고 있는 ‘가마후야’와 함께 2014년부터 매년 일본 정부에게 한국인 전사자의 조속한 유골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하고 협의를 벌여왔다.
30여 사가 넘는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가 취재경쟁을 벌였으며, 곤도 쇼이치(近藤昭一), 아카미네 세켄(赤嶺政賢) 등 7명의 국회의원도 이날 협의에 함께 참가하여 이 문제에 대한 뜨 거운 관심을 보여줬다.
요청서 전달 뒤에 이루어진 일본 정부(후생성, 외무성) 당국자와의 협의에서는 후생성 당국자로부터 오키나와에서 발굴된 전사자 700위의 유골에 대해 3월말까지 DNA 검사를 위한 검체의 채취가 이루어지고 4월부터 DNA 감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후생성 실무자가 DNA 검체를 채취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시민단체와 국회의원들은 DNA 감정의 성패가 달려있는 검체의 채취가 비전문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며 전문가의 참여를 요구했다. 오키나와에서 희생된 한국인 유족 163명은 한국 정부를 통해 DNA 검사를 요청했다.
또한 참가자들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유골조사에 대해 DNA 감정의 대상이 되는 유골이 너무 적은 상황을 지적하며, 현지에서 실시되고 있는 유골의 화장을 중지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후생성의 회의 자료에 ‘유족들이 화장을 원한다’는 내용이 현지에서의 화장을 하는 명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로부터 거짓으로 유족감정을 들먹인다는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목, 2020/02/20-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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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민족문학연구회, <겨레의 큰 별들> 출간

민족문학연구회(회장 맹문재)는 지난해 광복절에 펴낸 독립운동가 기림시선 1집 〈독립운동의 접두사〉에 이어 올 3월에 기림시선 2집 〈겨레의 큰 별들〉을 민연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이 시집에는 민족문학연구회 소속 작가 45인이 쓴 가네코 후미코와 그 남편 박열, 김구, 민영환, 유관 순, 유일한, 이동녕, 장준하, 차리석, 한용운 등 45인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 45편이 실렸다.
‘책을 펴내며’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삶을 바친 그 분들의 삶과 정신을 올곧게 되찾아 바로 세우고 그 정신의 바탕 위에서 우리를 성찰하는 것은 단순히 그 분들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만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며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
림시선의 편찬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책에는 45편의 기림시뿐 아니라 45인의 독립운동가 약력을 수록했고 김성동 작가의 발문 「‘친일파’가 아니라 ‘민족반역자’다」를 실었다. 민족문학연구회는 기림시선을 앞으로도 꾸준히 발간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101년 전 3·1운동의 함성 소리가 귀에 맴도는 요즘,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목, 2020/03/26-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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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항일운동 유적지 취재기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 땅”
해간도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를 가다

이은지 YTN 라디오 PD

 

과거 역사를 더듬어보고 미래로 이어주는 중간지점이 한·러수교 30주년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와 미래를 잇는 데에 연해주 독립운동 유적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러시아가 소련의 많은 레거시(전통)를 부정했는데 현대까지 계속 유지되는 것 중 하나가 ‘꺼지지 않는 불꽃’ 이라는 겁니다. 조국을 위해 싸운 무명용사들을 우리 후손들이 기억하겠다, 그들의 불빛이 꺼지지 않게 하겠다는 거죠. 우리에게도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독립운동에는 좌우가 없습니다. 이념 때문에 잊힌 러시아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우리가 새롭게 발굴하고 체계화하여 지켜나가고, 의미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오성환 총영사 인터뷰에서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다

지난해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서간도를 답사한 후 제작한 라디오 다큐멘터리 〈서간도 독립운동가 무명씨의 꿈〉(연출 : 이은지, 구성 : 홍기희)에 담았던 문장입니다.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데에도 이런 ‘투쟁’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필수적인 과정은 시간을 다툽니다.
기억은 한 세대를 거치면서 그 양과 선명도가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가의 대부라고 불렸던 ‘페치카 최’ 최재형의 손자인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이 지난 2월 14일 별세했습니다.
“이제라도 찾고, 우선 기억하는 것부터 기록해놓아야 한다”던 그의 한마디가 마음에 사무칩니다. 이에 저는 지난해 11월 해간도 항일독립운동 본거지라고 불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일대를 답사하고 온 기억들을 이곳에 기록합니다.
연해주(沿海州)는 해간도(海間島)로 불리며 만주의 북간도, 서간도와 더불어 항일운동의 3대 거점이라고 하죠. 최재형·이범윤·안중근·이위종의 동의회, 안중근의 단지동맹, 헤이그 특사 출발지, 의병부대 ‘13도 의군’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와 1919년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회의’ 등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먼저 일제강점기 한인들과 해간도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이 되었던 신한촌으로 향했습니다.

 

① 한글 주소가 있는 곳,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요람 신한촌

당시 춘원 이광수는 신한촌을 두고 “바윗등에 굴 붙듯이 등성이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나타났다”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서울거리 집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 7번지 일대― 한민학교와 이동휘 선생 집 추정 터

 

구글맵을 켜고 신한촌이 있었다던 산등성이를 올라가봤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춘원이 묘사했던 당시 모습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스탈린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낡은 아파트가 빼곡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독립문이 있었다던 곳은 듬성듬성한 겨울나무로 채워져 있어, 추정만 가능할 뿐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하바로브스크 울리짜 7번지에 살고 있는 김치보와 서울스카야 9번지에 살고 있는 채성하”라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신한촌 일대에 서울 거리가 존재했다는 기록인데, 실제 ‘서울거리 A2’ 주소판이 부착된 집 한 채가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가옥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구글맵을 켜고 영하 10도의 거리를 찾아 헤맸습니다.
오! 폐가들로 둘러싸인 곳, 앞으로는 철로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급경사 언덕에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누군가 살고 있는 듯,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은 없었습니다. 대신 한 러시아인과 인터뷰를 시도해보았습니다.
“이 집을 알고 있나요?”
“네. 한인들이 살고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살았었죠.”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옵니까?”
“한국에서 방문객이 많이들 찾아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죠.”

 

택시를 잡으려고 큰 길로 나와 ‘얀덱스’를 켜보니, 이런!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하바로보스크 22번지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선생이 살던 집이 있었다는 바로 그 주소였습니다. 역시나 이곳도 상점이 세워져있었습니다.

 

② 한인들의 터전 신한촌과 개척리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 26A 신한촌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으로 향했습니다.
묵념을 하고 참배객을 기다리는 사이 30여 분간 한국인 관광객 2팀과 러시아인 부부 한 쌍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시도했습니다.

“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제 어머니는 어릴 적 한인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이 기념비는 한때 이곳에 거주하다가 탄압당한 한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저희는 한인들이 강제이주 당한 것이 매우 유감입니다. 이 기념비가 세워져서 선조들을 기릴 수 있어 기쁩니다”.
– 신한촌 기념비에서 만난 러시아인 부부

“이분들 때문에 우리가 잘 사는 나라가 됐고 이렇게 행복하게 됐는데, 부디 이 얼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들 가슴에 남아서 역사가 사라지지 않도록 다짐을 해봅니다. 굳이 여기를 한번와서 찾아 뵙고 싶더라구요”
– 신한촌 기념비에 참배하러 온 한국인 관광객 모녀

 

허술한 철조망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런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3개의 탑과 주변의 8개 작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기념비를 세운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설명으로는 일제강점기 3개의 임시정부와 강제이주 당한 8개 지역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념비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을까? 같이 갔던 가이드는 당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의 숫자가 너무 많아 다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 아닐까 라고 말했습니다. 기념비는 고려인 자원봉사자 부부가 관리하고 있다는데, 남편 되는 분이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현장에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기념비 아래쪽과 위쪽의 색깔이 다릅니다. 러시아인들이 낙서를 하거나 오물을 버린 흔적이라고 합니다.

 

킹크랩을 먹겠다고 블라디보스토크 젊음의 거리, 포그라니치나야 거리로 향했습니다. 맛집과 카페들이 밀집해있는 핫플레이스랍니다. 거리의 두 명 중 한 명은 한국인 관광객이었습니다. 사진도 찍고 킹크랩과 독도새우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이 과거에는 ‘개척기’로 불렸던 까리에스키 거리였다고 합니다. 이 거리 344호에 해조신문사가 있었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모의를 했다는 대동공보사도 있었다고 합니다. 두 명 중 한 명이었던 우리 관광객들 중에 이 역사적 사실을 알고 걸었던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③ 블라디보스토크 역

블라디보스토크 역과 시베리아횡단열차

출발점을 가리키고 있는 필자 이은지 PD

 

“어떤 역인지 알고 오셨어요?” “아니요, 여기가 무슨 역이야?”
“블라디보스토크 역이요. 이곳에서 누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탔는지 아세요?”
“잘 모르겠어요.”

“전혀 못 들어봤는데.”

“몰라요.”

“가이드가 설명 안해주던데요.”

2019년 11월 25일 아침. 총길이 9,288킬로미터에 이르는 시베리아횡단열차 종착역이자 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만난 한국인 관광객들과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실었습니다.
이 철길에도 우리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1909년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해 이곳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고 하죠. 헤이그 밀사였던 이준 열사가 출발한 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생각보다 조용히 역사를 들어오던 시베리아횡단열차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역사 안은 아담했습니다. 다만 입출구가 여러 개인데다 각각 거리가 상당하고 드나들 때마다 짐 검사를 받아야 해서, 탑승할 열차와 개찰구를 잘 확인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저도 한번 잘못 들어갔다가 전속력 달리기를 해야 했으니까요.
우수리스크로 향하기 전, 오성환 총영사는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정부와 우리 영사관이 협력해 블라디보스토크 역사탐방 지도를 제작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블라디보스토크에 역사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음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적지를 찾아서 안내판 같은 것을 설치했으면 좋겠다고 러시아 시정부한테 제안해왔습니다. 신한촌, 구한촌… 여러 역사 유적지를 엮어서 하나의 관광지도로 만들면 블라디보스토크가 단순히 킹크랩 먹고 바다 구경하고 사진 찍는 장소가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역사의 목소리를 듣고 갈 수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는 거죠. 한러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영사관이 지도를 제작할 용의가 있다’고 하니까 블라디보스토크 시정부 측에서도 사적지 지도 앱을 만들겠다고 이야기가 됐습니다.”
항일유적지 지도앱을 보면서 답사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④ 고려인 이주의 피눈물이 서린 철길, 라즈돌노예 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 우수리스크. 차로 2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라는데, 전날 내린 눈이 얼어붙어 3시간 30분 가량 걸려 도착했습니다. 처음 정차한 곳은 라즈돌노예 역이었습니다.

 

기차가 아주 가끔 멈췄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그냥 천으로 덮어 기차역 플래폼에 남겼습니다. 역 객차에서 아이가 숨져 창문 밖으로 시신을 창밖으로 내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식량부족과 병에 시달렸고 차량마다 있던 원형난로는 달리는 중에 사용하지 못했고, 옷도 이불도 받지 못해 너무도 추웠어. 변소도 없어 기차가 멈추면 기차 밑에서 급히 볼 일을 보다 깔려죽기도 했어. 특히 위생상태가 불량해 많은 사람들이 앓았는데 병자가 생기면 그 즉시 실어 내갔고 모두 실종자가 되었지. 식량도 물도 받지 못했기에 오는 동안 풀과 뿌리를 모야 으깨어 먹었어. 아이들이 특히 많이 죽었지 – 김 블라지미르 회고록에서 기차역이 이토록 슬프게 보일 수 있을까. 눈 쌓인 철도가 이토록 서럽게 차가울 수 있을까.
눈발이 매섭게 날리던 날 라즈돌노예 역의 전경은 비통하다 못해 아팠습니다.

 

⑤ 강물소리에 묻힌 이상설 유허비

우수리스크 초입 수이푼강 근처에는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비가 서 있었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고종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했던 분입니다. 1914년 이동휘, 이동녕 등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우리나라 최초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허비는 왜 강가에 있을까요?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그의 유언입니다. 이 유언에 따라 수이푼강에 화장해 재를 강물에 뿌렸다고 합니다. 수이푼 강물은 블라디보스토크 아무르만으로 흘러 동해에 다다른다고 하니, 그 위치 선정에도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유허비를 둘러싸고 물길이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현지 가이드 말에 따르면, 2017년 김정숙 여사 방문 시에 자갈길을 깔았으나 그해에 비가 많이 와서 다 쓸려갔고 올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와서 큰 도로까지 물이 찼었다고 합니다. 그 물이 빠지지 않고 남아있다가 겨울이 와 얼어붙었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러시아에서 9년을 살았다는 현지 가이드는 “관리가 정말 안 된다. 한국인들이 관리 안하면 러시아 사람들은 여기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라며 우수리스크 지역 내 독립운동 유적지 관리 문제를 지적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유허비에 쌓인 눈을 손으로 쓸고 묵념을 했습니다.

⑥ 작은 간판 하나, 전로한족중앙총회 개최지

1919년 2월 25일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전로국내조선인회의가 개최됩니다. 그 전신으로 1918년 6월 열렸던 제2회 전로한족중앙총회 자리가 현재 학교 운동장으로 변해 남아있습니다. 주소는 우수리스크시 막심고리끼거리 20번지.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을 맞이해 안내문 하나를 설치해 건물 입구에 달아두었다고 하니, 타 유적지에 비해 다행인 일입니다. 문이 잠겨있어 안쪽까지 들어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 장소였던 학교 건물과 안내문

 

⑦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남아있는 페치카 최재형의 집

조국은 최재형 선생을 잊은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태어날 당시 아버지 없이 태어났고, 어머니는 당시 탄압 대상자였습니다. 탄압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묻는다면 ‘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최재형 선생의 DNA 덕분이 아닌가…….
우리의 가장 큰 역할은 기억하는 일과 역사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선 기록해놓는다면, 어쩌면 우리의 후손들이 그 뒷일을 감당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기록해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최재형 후손 최 발렌틴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

 

모스크바 어느 한식당에서 최재형의 후손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그는 불의의 사고로 지난 14일 별세했습니다. ‘조국은 최재형 선생은 잊은 적이 없다’ 라는데, 그는 사고 후 병원비 5만 유로가 없어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고택은 당시의 집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에 붉은 색과 흰색으로 칠한 벽돌집. 한쪽 창문이 깨진 상태 그대롭니다.

 

최재형의 집

 

우수리스크시 보로다르스카야 38번지라고 적혀있는 이곳이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했던 집입니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러시아 선원생활을 하며 재력을 쌓았고, 그 돈으로 한인들의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동의회, 대동공보, 권업회의 중추 역할을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구요. 안중근 의사의 배후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고택 안에는 최재형과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미디어 교육실에서는 관광객들에게 최재형과 관련된 영상을 상영해주고 있었고, 러시아 현지인으로 보이는 관리인이 2명이나 있었습니다!(다른 유적지의 황량함, 황무지에 내버려둔 듯한 모습과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었습니다) 마당에는 최재형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자료마다 QR코드가 부착돼있었는데, 현지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 QR코드 연결은 힘들었습니다.

최재형 선생이 잡혀갔던 4월참변을 추도하는 기념비는 코마로바거리 1번지에 세워져있습니다. 러시아정부에서 세웠다고 합니다.
올해는 한러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잃어버린 해간도 항일운동 역사를 재조명하기에 딱 좋은 시기입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두만강을 건너간 선조들의 해간도 투쟁 이야기.
1907년 헤이그특사 파견과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 연해주 최초의 항일의병부대 주축이된 이범윤 부대, 그리고 성명회와 최재형과 홍범도의 권업회·권업신문, 통합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던 이동휘, 대한광복군정부 이상설 정통령.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강제이주의 역사까지, 수많은 불꽃들이 꺼지지 않고 타올랐던 곳.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 땅”(성명회)의 역사를 이제는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요. 10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우리가 기록해놓는다면, 100년 후의 후손들에게는 이 기록이 ‘역사’로 기억될 것이니까요.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긴 이야기를 마칩니다.

 

(경천아일록을 보며) 김경천 장군이 일기를 썼을 당시는 하나의 민족으로 살았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남북으로 나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생각해보면 결국 조국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평화를 사랑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라는 그런 메시지를 주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실 빨치산 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영하 20도, 30도 그런 추운 기후에서 활동하셨고, 옷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먹을 것도 없었던 그런 상황 속에서 독립을 위해서 활동했습니다. 어쩌면 그 모두가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일기를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 잊혔거든요. 잊혔지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오랫동안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이 바로 이 일기장에서 후손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 김경천 장군 손녀 일레나와 갈리나

목, 2020/03/26-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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