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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살지 않는 불가사의의 아방궁, 용산총독관저 총독 주최 경로잔치와 일제 관리들의 수련회가 행해지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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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살지 않는 불가사의의 아방궁, 용산총독관저 총독 주최 경로잔치와 일제 관리들의 수련회가 행해지던 공간

익명 (미확인) | 금, 2018/04/20- 14:31

식민지 비망록 35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문화재수난사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으로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101호)’이란 석조유물이 있다. 불교미술의 꽃이라는 일컫는 이 사리탑은 일본인 골동상에 의해 일찍이 1911년 여름 강원도 원주에 있는 절터를 벗어나 서울 명동과 일본 오사카 등지를 떠도는 통에 남다른 풍상을 겪었고, 1912년 12월경에 간신히 국내로 재반입된 이후 다시 총독부박물관의 야외전시유물로 전락한 이래 거의 한 세기가 넘도록 경복궁 안에 오갈 데 없이 갇혀 있어야 했던 비운의 문화재이다.
특히 한국전쟁 때는 포탄을 맞아 탑신이 크게 파손되는 악운이 겹치는 바람에 만신창이가 되었다가 콘크리트로 겨우 외형이 복구되었고, 2016년 4월에 와서야 전면적인 해체 수리 복원을 위해 대전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간 상태에 있다. 그런데 이 사리탑이 애당초 원래의 절터에서 무단 반출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게 된 내력이나마 자세히 알려지게 된 것은 흥미롭게도 후지무라 도쿠이치(藤村德一)라는 일본인이 『거류민지석물어(居留民之昔物語) 제1편』(1927)라는 책에 남겨놓은 「현묘탑강탈시말(玄妙塔强奪始末)」이라는 글 덕분이다.
그는 통감부 시절에 ‘퇴한명령(退韓命令)’을 받은 전력이 있고, 그 바람에 자기들 나름으로 반체제 인사로 간주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선지 그의 책에는 「관헌의 횡포와 관리의 비상식」이란 소제목이 말해주듯이 자기네 위정자(爲政者)들에 대한 반감이 노골적으로 반영된 내용이 곳곳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하세가와 원수(長谷川 元帥)와 아방궁(阿房宮)」이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정리된 글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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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총독과 용산총독관저의 전경이 배경도안으로 묘사된 조선총독부 발행 ‘시정7주년기념엽서’(1917)

 

세간에 용산의 ‘아방궁’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씨가 일찍이 러일전쟁 직후 한국주차군사령관으로 경성에 재임중에 러일전역비(러일전쟁비)의 잉여금 50만 엔을 들여 군사령관 관저로 하고자 건설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하세가와 씨는 물론이고 아직 그 누구도 이곳에 거처를 정한 바가 없는 불가사의한 건축물이다.(중략)
50만이라고 하는 국탕(國帑, 나랏돈)을 낭비하고 그 책임을 전가시키기 위해 궁여지책의 결과로 이를 이궁(離宮)으로 삼으려고 계획하기에 이른 것은, 국민이 단호하게 이를 힐책하지않을 수 없고, 20년 전의 50만 엔은 오늘날 2백만 엔에 필적할 거금으로 이를 낭비하고 그 후 처지가 곤란해져서 부적합한 곳에 이궁을 둬야 할 필요는 추호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내가 이 대건축물을 일컬어 늘 불충관(不忠館)이라고 하는 까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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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병합기념사진첩』(1910)에 수록된 ‘데라우치통감 신임피로회장 약도’의 모습이다. 용산정거장 건너편으로 한국주차군사령부와 등진 자리에 포진한 통감관저의 위치 관계와 삼각도(三角道, 삼각지) 쪽에서 연결되는 행로가 잘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서 아방궁이라고 일컫는 곳은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이다. 흔히 총독관저라고 하면 남산 왜성대 인근에 자리한 옛 통감관저를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과는 별개의 관저가 또 하나 존재했다는 얘기이다. 그 위치는 지금의 용산미군기지 안에 포함된 곳으로 서울 용산역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중간쯤이었으며, 일제 때의 지번(地番)으로는 ‘한강통 11-43번지’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다.

 

일제강점기 총독관저의 소재지 변동에 관한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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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무라의 글에서 나타나듯이 용산총독관저는 원래 한국주차군사령관 관저의 용도로 세운 건축물(1907년 6월 기공, 1910년 4월 준공)이었다. 하지만 너무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립된 탓에 건물이 완공되기 이전에 이미 ‘통감관저’로 용도변경이 추진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총독부가 별도의 건물을 지어 이것과 맞교환하는 형태로 인수인계가 이뤄졌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정작 이곳이 총독관저로 바뀐 이후에는 아무도 이곳을 집무공간으로 삼았던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1932년 8월에 우가키(宇垣) 총독이 자기 가족과 함께 여가를 즐기기 위해 20여 일 남짓 이곳에 기거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참의 세월이 흐르도록 그 누구도 이곳을 거처로 정한 일조차 없었다. 무엇보다도 유지관리비용이 지나치게 컸고, 서울 시내와 동떨어진 곳에 자리하다 보니 업무상 불편이 크다는 것이 그 이유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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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지리풍속대계 제16권』(1930)에 수록된 용산총독관저 일대의 전경사진. 왼쪽 위에 지붕이 드러난 건물은 조선군사령부(옛 한국주차군사령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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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에 수록된 용산총독관저의 대문 쪽에서 담아낸 전경사진.

 

상황이 이러하니 이곳은 그저 역대 통감이나 총독이 주관하는 연회와 접대가 드문드문 벌어지는 공간으로 사용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예를 들어 1910년 7월에 데라우치 통감이 부임했을 당시 축하피로연이 벌어진 장소가 이곳이었으며, 경술국치 이후로는 천장절 축하연이나 만찬회 따위가 곧잘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황제가 몸소 이곳까지 행차했다는 기록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은 간혹 식민지 조선을 찾은 일본 황족이나 서양의 귀빈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평상시에는 거의 비어있는 공간인 까닭에 그때마다 대대적인 건물수리와 조경공사가 벌어지곤 했다
용산총독관저가 이처럼 시설과 규모는 번듯하나 지나치게 화려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덩치가 큰 탓에 이러한 처치곤란의 신세를 타개하기 위해 나온 발상이 바로 이궁(離宮) 건설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감독을 지낸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와 같은 이는 『양경거류지(兩京去留誌)』(1915)를 통해 이를 조선에 있어서 천황 이궁의 하나로 삼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설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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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8년 11월 13일자에 실린 미나미 총독 주최 제3회 고령자 초대회 관련보도.

 

『매일신보』 1935년 7월 11일자에 수록된 기사에 따르면, 왜성대 총독관저를 병합기념관으로 보존하는 대신에 용산총독관저를 증축 개조하여 새로운 관저로 사용하려는 계획이 수립된 적이 있었으나, 이 역시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자못 흥미로운 것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1936년 이후 1941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80세 이상의 장수노인(長壽老人)을 전국에서 초대하여 이곳 총독관저에서 성대한 경로잔치를 벌였다는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국민정신 작흥과 경로사상 고취를 명분으로 내세운 이 행사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에 다음과 같은 미나미 총독의 인사말에서 잘 포착되고 있다. 『매일신보』 1938년 11월 13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는 그 내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는 미나미 총독이올시다. 오늘 고령자 제씨가 이 같이 다수히 참석하여 주신 것을 충심으로 기뻐합니다. 무릇 장로를 존경하는 것은 사람의 자연스런 지정이오 또 도덕의 근원인데 특히 동양에서는 경로의 좋은 습관이 깊이 사회에 침윤되어 왔고 조선도 고래로 이 미풍이 성황하였는데 이것을 민중 전반에 궁행실천시키고 싶어서 총독된 이후로 매년 고령자 위안회를 개최하고 지방에도 이를 장려하고 있는 터입니다.(중략)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은 천황폐하의 어능위(御稜威) 아래 용맹과감한 황군장병의 분투와 열렬한 총후국민의 협력에 의해서 여러분도 아다시피 지난번 항일의 제2수도인 한구(漢口)도 함락하고 적은 멀리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사변은 결코 이로써 끝나지 않고 금후 국민은 일층 공고한 각오와 노력이 필요한 터이니 여러분은 장로의 입장에서 젊은 사람들을 편달하여 주어야 합니다.

 

용산총독관저의 연혁을 따라가다 보면, 일제가 패망을 앞둔 시점에서 이곳은 다시 ‘조선총독부지도자연성소(朝鮮總督府指導者鍊成所)’의 용도로 사용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고이소(小磯) 총독이 반도통치의 세 가지 큰 방침의 하나로 내세운 ‘수양연성의 철저적 실천’을 구현하기 위해 1943년 3월 1일부터 용산총독관저를 이용하여 개설한 기관이었다.
황도수련원(皇道修鍊院)의 성격을 띤 이곳에서는 육군중장 출신의 사이토 야헤이타(齋藤彌平太)가 소장을 맡았고, 총독 자신을 포함하여 총독부의 각 국장과 도지사 등을 대상으로 한 연성회가 진행되었다. 또한 총독부 고등관은 물론이고 판검사, 부윤, 군수 등을 집결시킨 수련회도 곧잘 이곳에서 실시된 바 있었다.
『매일신보』 1944년 7월 7일자에 수록된 기사에는 중추원 참의 30명이 참가한 합숙훈련 상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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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8월 29일자에 실린 총독부지도자연성소 입소식 관련 보도내용.

 

중추원 참의 30명의 합숙연성이 6일 오후 1시부터 용산의 총독부지도자연성소에서 5일간 예정으로 시작되었다. 참의들은 지난 4일부터 총독부에서 열린 중추원 회의에 출석하여 결전하 반도 민중의 전의앙양(戰意昻揚)과 황국근로관 확립에 관한 열성스러운 의견을 개진하였고 또 고이소 총독의 훈시를 듣고 금후 민중의 지도자로서 봉공할 결의를 굳게 한 터인데 연 2일간 계속된 회의로 자못 피로한 터임에도 불구하고 연성에 참가한 것이다. 이날 오후 1시 연성소에 집합한 전원은 처음 신체검사를 받고 연성소 직원으로부터 주의사항 설명을 들은 다음 오후 6시부터는 신배(神拜)로부터 시작하여 열성스러운 연성을 시작하였다.

 

이곳 용산총독관저는 한국전쟁 시기에 반파(半破)된 모습이 드러난 적이 있다는 사실만 드러났을 뿐 아무도 이 건물의 최후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용산 ‘아방궁’ 역시 일제침탈사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의 하나라는 점만큼은 오래도록 기억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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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부터 18일까지 박정희 신화를 소재로 한 연극 〈국부〉가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2017 시즌 프로그램으로 공연되었다. 연극 〈노란봉투〉의 전일철이 연출한 공동창작 작품으로 같은 소재로 작년에 올려진 〈해야된다〉의 후속작인 셈이다(극단 돌파구). 〈해야된다〉는 “하면 된다”는 박정희 시절 구호를 비튼 것으로 최근 검열과 블랙리스트사태에 대한 연극인들의 답변인 ‘권리장전2016_검열각하’ 프로젝트(6월~10월 대학로 연우소극장)의 참여작이기도 하다. 이 연작들은 작년 구미시가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기획한 28억짜리 뮤지컬이 계기가 되었다. 이 기획은 논란 끝에 취소되었고 이제 역설적으로 전일철의 〈국부〉가 무대를 채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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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국부〉의 포스터에는 북한 출신 작가 선무(線無, 휴전선은 없다)의 〈청소〉가 사용되었다. 하녀가 줄지어 걸린 액자들을 열심히 닦는 것처럼 무대 가득 액자의 틀이 설치되었다. 이 프레임 위를 배우들이 종횡하며 걸터앉기도 하면서 박정희로 상징되는 우상을 둘러싼 만화경이 펼쳐진다.
연극은 크게 3장으로 구성되는데 제1장에서 박정희를 경험한 사람들 그러나 찬양 일변도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간단한 박정희의 이력서를 들려준다. 그 다음엔 모세의 출애굽기를 ‘신화’의 모티브로 삼고 종장 ‘초인’에서 박정희 피살의 술판을 극화하고 있다.
나는 용케 6월 14일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는데 전날 공연에서는 해프닝도 있었던 모양이다. 나이든 관객들이 대거(?) 오시는 바람에 공연관계자들을 긴장시키더니 급기야 공연 중에 퇴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고 한다. 박정희 찬양을 기대하고 온 분들은 아닌 듯하고 이게 찬양이지 뭐냐 하며 항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연극 〈국부〉는 박정희를 다루었지만 소재일 따름이지 그에 대한 복고가 아니다. 성서와 신화의 세계를 접목시키면서 발터 벤야민이 얘기한 근원적 폭력의 신성함 획득을 실감케 한다. 어느새 박정희와 겹쳐진 한국 기독교의 확산이 우리 정신세계에 여러 상징거리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국부〉의 제목을 일본식으로 굵직한 한자 글씨체로 무대 화면에 띄운 것은 일제 식민 유산을 연상시키도 한다. 이승만 등 면면히 이어지는 우상들의 수립과 교체과정에 대한 연작적 고찰이며 우상과 파시즘 문제를 화두로보편화시켜 보려는 시도로도 보인다.
신화 해체를 위한 설계도면처럼 구성요소들을 극적으로 나열하고 거울처럼 관객들에게 비춰주면서 아직도 그런 관념들과 판타지들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낯설고 그저 지난 시대의 낡음만을 느끼는지 확인해보시라고 제시하는 것만 같다. 종장 ‘초인’에서 나오는 피살 장면의 재구성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여러 시점들과 해석들을 드라마로 보여주고 있다.
그날 밤 등장인물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이 연극을 보고 기억하는 방식은 다 다른 모양이다. 잘못된 인과관계 파악과 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조건 반사적으로 형성된 신화들.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선택과 배제의 문제 등 논쟁적 요소들이 전문가들에겐 눈에 뜨일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역사와 신화의 사이에서 역사를 하는 분들께도 연기가 가지는 성찰적 미덕을 느껴볼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다.
공연 후 개인적으로는 연출가, 극장장, 평론가 등과 함께 조촐한 뒤풀이 자리에서 이모 저모를 더 듣는 호사도 누렸다. 세대 차이와 역사인식, 지식과 관람의 관계, 주체성 또는 시민의식의 형성과 편파적 추모방식의 강고함의 상관 등 여러 생각들이 표출되었지만 나로선 배우들의 몸의 언어를 통한 다양함의 광경 등 볼거리와 머리에 기억해둘 만한 장면들이 무척 많았다고 생각한다. 연극소개 사이트는 http://www.nsartscenter.or.kr/Home/Perf/PerfDetail.aspx?IdPerf=1111. 팸플릿에는 충북대 이성재 교수의 논고 등 읽을거리가 풍부하다.

∷ 조시현 연구위원

금, 2017/07/2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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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핵실험수는 1000번이상  북한의 핵실험수는 6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많은 제나라의 핵무기부터 없애치우고 주둥이를 나불거려라

 

도적이 매를 드는격으로 일본에 핵폭탄을 터트려 죄없는 민간인들을 죽여버린 미쿡놈들이 제켠에서 제재를 떠드니 미국부터 제재함이 마땅하도다

토, 2017/09/0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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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33] 일제에 끌려간 게 사람만이 아니었더라 – 이출우검역소를 거쳐 일본에 끌려간 160여 만 마리의 조선 소

이순우 책임연구원

 

반도(半島, 조선)의 소는 논갈기, 밭갈기와 농사짓기에는 물론이고 일반운수용으로 혹은 피혁용, 식용으로도 그 이름이 널리 전동아(全東亞)에 떨쳐서 해마다 내지(內地, 일본)를 비롯하여 만주, 남양 방면으로 대량적으로 수이출되어 축산반도의 명성은 해를 거듭할수록 드높아가고 있다. 이에 반도에서도 전선(全鮮) 2천만 농가에 외쳐서 그동안 축우증식에 철저한 지도 장려를 거듭하여 온 결과 현재에는 175만여 두의 소가 총후농촌에서 씩씩한 식량증산의 일꾼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농촌 노무력이 상당히 긴박한 내지의 농촌을 비롯하여 만주 방면에서는 반도의 소를 더욱 많이 보내어달라고 얼마 전 총독부에 부탁하여 왔으므로 본부 농림국에서는 금년도에는 내지에 7만 마리, 만주에 2만 5천 마리, 합계 9만 5천 마리를 수이출키로 결정하고 각도 축산과와 연락하여 전북을 제외한 12도에 각각 그 수량을 결정
한 다음 근근 일제히 현지로 보내기로 되었다. 이것으로써 반도의 소는 결전하의 식량증산과 수송전선의 씩씩한 일꾼으로 또는 피혁용, 식용으로 더욱 커다란 책무를 완수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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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2년 4월 24일자에 수록된 기사를 보면, 총독부의 공식집계 이전 시기인 1907년
과 1908년에도 이미 각각 19,787마리와 18,060마리의 이출우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것은 <매일신보> 1943년 4월 25일자에 수록된 「조선우(朝鮮牛) 9만 5천 두(頭), 내지와 만주 방면으로 수이출(輸移出)」 제하의 보도내용이다. 이 기사가 나온 때는 일제의 패망이 불과 2년 남짓 남은 시점이었다. 이를테면 식민통치기의 막바지에 이르도록 그들의 침략전쟁을 위해 사람이건 물자건 간에 닥치는 대로 총동원하는 국면이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위의 기사에는 일 잘하고 죽어서까지 가죽과 고기로도 활용할 수 있는 조선소가 일본과 만주 등지로 대량반출되고 있는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소들은 통칭 ‘이출우(移出牛)’라고 하였다.
‘이출’이라는 표현은 한 나라 안에서 다른 지역으로 물자가 옮겨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 말에는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이 일본의 한 지방으로 간주될 뿐이라는 뜻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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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 근거를 둔 일지식료회사(日支食料會社)가 배포한 1920년대 초반 무렵의 조선우 판매광고. 광고문안에 “조선우는 하루에 3반보(反步, 300평)의 밭을 갈고, 200관적(貫積)의 짐수레를 끌고, 쌀 4표(俵, 가마니)를 지고, 비료와 송아지를 생산하며, 최후에는 고기소로 하여 산 가격보다도 아주 비싸게 파는 이익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이출우의 연원이 궁금하여 몇 가지 자료를 뒤져봤더니, 쓰즈미 요시오(鼓義男)가 편찬한 <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朝鮮興業株式會社三十周年記念誌)>(1936), 168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흥업은 부산이출우검역소에 계류된 소들의 우사(牛舍) 및 사양관리(飼養管理)를 담당하는 회사였다.

 

대체로 조선우의 내지(內地) 수출에 관해서는 …… 근대에 있어서는 명치 17년(1883년) 오이타현(大分縣) 사람 사토 이사고로(佐藤伊佐五郞)와 시모노세키(下關)의 미치모리 만지로(道森萬次郞) 양씨가 이, 삼십 두를 부산에서 수입한 것을 효시로 한다. 그 후 청일, 러일 양전역(戰役)의 결과는 군수용 우육 공급상 내지에 있어서 축우의 감소를 가져왔고, 이것의 보충을 계기로 하여 해마다 다수의 축우가 수출되어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진출에 동반하여 당연 문제가 된 것은 우역(牛疫)의 전파와 그 예방이었다. 명치 연간 내지에 있어서 우역의 유행은 전후 11회에 이르고 그 손실은 7만 두에 달하고 있지만 그 병원지(病源地)는 항상 조선에 있었다고 칭해지고 있다. 명치 37년(1904년) 농상무성(農商務省)은 후쿠오카현 수입수역검역소(福岡縣 輸入獸疫檢疫所)를 설치하고 내지 축우의 옹호에 나
섰는데 명치 41년(1908년)에는 또 다시 2부(府) 14현(縣)에 걸쳐 우역의 대유행을 보게 됨에 따라, 마침내 한국정부에 대해 부산진(釜山鎭)에 이출우검역소의 건설을 교섭하였고 이로써 발본색원의 방책을 강구하려고 했다.

 

여길 보면 일본에서 발생한 우역의 근원지를 조선으로 지목하고, 한국정부에 대해 검역소의 설치를 요구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1909년 7월 10일에 법률 제21호 「수출우검역법」과 칙령 제65호 「수출우검역소관제」가 제정 공포되었는데, 이 당시는 아직 대한제국의 실체가 남아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의당 ‘이출’이 아닌 ‘수출’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경상남도 동래부 용주면 우암동(慶尙南道 東萊府 龍珠面 牛巖洞)에 수출우검역소가 처음 설치되어, 이곳에서 우역, 탄저, 유행성아구창(流行性鵝口瘡, 구제역)에 대한 검역을 실시할 목적으로 9일간 계류검사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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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뉴얼리포트(1908~1909)>에 수록된 부산 우암동 소재 ‘수출우검역소(1909년 개설)’의 전경. 이곳은 경술국치 이후 ‘이출우검역소’로 이름만 변경된 채 그대로 사용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는 이출우검역소로 명칭이 변경되는 한편 부산세관(釜山稅關)에 부속된 기구로 변했다가 1912년 3월에 총독부경찰관서관제의 개정에 따라 위생관련업무 일체가 경찰사무로 귀속되면서 이곳은 다시 경무총감부 위생과의 소관 기구로 바뀌기에 이른다. 곧이어 1919년 8월에는 경찰관서관제의 폐지와 더불어 도지사(道知事)의 소관에 속하는 검역기구로 전환되었다.
그 사이에 1915년에 제정된 「수역예방령(獸疫豫防令)」과 「이출우검역규칙」에 따라 이출우에 대한 검역이 점차 강화되어 부산항은 물론이고 마산항, 원산항, 성진항, 행암만(行巖灣, 진해), 청진항, 웅기항 등지로 검역대상항구가 계속 확장되었다. 특히 1925년 8월에는 총독부령으로 「축우(畜牛)의 이출에 관한 건」을 제정하여 “수역예방령 제13조의 규정에 의해 행하는 검역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니면 이를 이출할 수 없다”고 정하는 한편 「이출우검역규칙」도 전면 개정하여 “경기도 인천항, 경상남도 부산항, 평안남도 진남포항, 함경남도 원산항 및 함경북도 성진항에서 의무적으로 이뤄지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부산이출우검역소를 제외한 나머지 네 곳의 항구에는 해당 이출우검역소가 신설된 바 있다. 그 후 1937년 11월에 이르러 경상북도 포항항에도 이출우검역소가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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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 설치되었다가 1943년에 폐쇄된 인천이출우검역소(인천 항동 소재)의 전경. <일본제국가축전염병 예방사>, 1938.

 

이출우검역소의 개설 및 폐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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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출우검역소의 제도가 다시 한 번 크게 변경된 때는 1943년 7월이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결전식량증산(決戰食糧增産)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이출우가 격증함에 따라 검역의 철저를 기하는 동시에 여러 항구에 흩어져 있는 각 검역소를 통합 정리하기 위해 종래 도지사 소관이던 부산, 진남포, 원산 등 세 곳은 총독부 직할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나머지 검역소는 일괄 폐지하였다. 또한 종래의 이출우 검역사무에 더하여 황해도 신계군과 장연군에 각각 모리나가제과(森永製菓)와 메이지제과(明治製菓)의 목장을 설치하고 1944년부터 100마리씩의 젖소를 이식함과 동시에 연유, 분유, 버터 등을 생산하는 시설을 갖추는 등 조선에서 낙농사업(酪農事業)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에 따라 일본에서 이입되는 유우(乳牛, 젖소)에 대한 결핵병검사도 이곳에서 수행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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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통해 수송된 이출우들이 부산진역에서 하역되고 있는 모습. <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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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재능력 500두에 달하는 이출우 수송전용선 닛쵸마루(日朝丸)의 모습. 부산에서 시모노세키 후쿠우라(下關 福浦)까지 불과 13시간이면 도착하며, 이곳에 도착한 이출우는 다시 5일간의 검역을 거친
이후 일본 전역으로 팔려나가게 된다. <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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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 (1936)에 수록된 ‘조선우 집산계통 약도’이다. 여기에는 조선 각지에서 수집된 소들이 각 항구를 통해 일본 또는 만주로 빠져나간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와 함께 「조선가축전염병예방령」의 개정을 통해 우역(牛疫), 탄저(炭疽), 기종저(氣腫疽), 우폐역(牛肺疫), 구제역(口蹄疫), 비저(鼻疽), 양두(羊痘), 돈콜레라(豚コレラ), 돈역(豚疫), 돈단독(豚丹毒), 광견병(狂犬病), 가금콜레라(家禽コレラ) 등 12종이었던 법정가축 전염병의 종류에 우(牛)의 야수역(野獸疫), 가성피저(假性皮疽), 마(馬)의 전염성빈혈(傳染性貧血), 가금페스트(家禽ペスト) 등 4종이
추가되었고, 종래 도지사에게만 속했던 가축전염병예방에 관한 처분권한을 이출우검역소장에게도 부여하는 내용이 신설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출우검역소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소는 과연 어느 정도의 규모였을까? 조선총독부가 해마다 펴낸 <조선가축위생통계>에 따르면 1909년 이후 1942년에 이르는 기간에 무려 147만 여 마리가 이출되었으며, 그 가운데 부산항을 통해 빠져나간 것만 100만 마리에 달할 정도로 이 지역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 수치에서 빠진 1943년 이후에도 해마다 최소 7만 마리 정도가 일본으로 유출되었으므로 이를 추계하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이출우의 총규모는 160만 마리를 상회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수난을 겪은 분야가 어디 한 둘이랴마는 이렇듯 이 땅의 소들에게도 수탈의 손길이 비껴나지 않았음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이들은 대개 뼈 빠지게 일만 하고 결국 한 줌의 고기소가 되어 사라졌을 테지만, 이 대목에서 불현듯 일본 땅 어디에 조선소의 혈통을 이은 후손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그 현황이 자꾸 궁금해진다.

금, 2018/02/2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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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대한민국은 미군정의 하사물이 아니다”

미국이 건국일은 1776년 7월 4일이다. 정조 임금이 즉위한 그해 4월 27일(음력 3월 10일)로부터 68일 뒤다. 그날 미국인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식민지배를 거부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선출되고 정부가 구성된 해는 1789년이다. 4월 30일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 정부가 모습을 갖췄다. 건국된 날, 그러니까 독립을 선언한 날로부터 23년 만이었다. 미국 헌법 제7조는 1789년이 아니라 1776년을 독립 원년, 미국 1년으로 계산한다. 미국 땅을 실효적으로 지배할 정부가 갖춰지지 않았어도 독립을 선언한 해에 미국이 건국됐다고 보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서문)에서도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3·1운동이 있은 1919년을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미국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제가 되는 것은, 보수세력이 1919년이 아닌 1948년을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헌법 전문을 무시하고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보고 있다.

보수세력이 그렇게 하는 데는 숨은 동기가 있다. 지난 7일 서울특별시와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이 태화복지재단 강당에서 주최한 ‘민주공화정 100년 심포지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보수세력이 1919년을 외면하고 기피하는 동기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태화복지재단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이 있었던 곳이다. 위 심포지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3·1운동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됐는지 규명하고자 열린 학술대회다.

왜 보수세력은 ‘1948년 8월 15일 건국절’을 미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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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지엄 패널들 ⓒ 인디엔피 제공

심포지엄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것은 헌법 제1조 제1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부분이다. 제1조 제1항은 1948년에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의 머리에서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었다. 3·1운동으로 표출된 민족적 의지를 집대성한 임시정부 헌법을 계승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이란 명의의 임시헌법 제1조 제1항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선언했다.

이를 두고, 기조발언을 맡은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헌법 문서에서 ‘민주공화국’을 명기한 것은 임시헌장이 세계 최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면서 “서구에서도 우리보다 늦은 1920년에야 비로소 체코와 오스트리아가 민주공화국을 헌법에 명기했다”라고 설명했다.

임시헌장 속의 ‘민주공화제’는 단순히 국민이 주인 되는 체체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민주’뿐 아니라 공화(共和)에도 방점이 찍혀 있었다. 공화는 공존과 상생을 전제로 한다. 그 속에는 임시헌장을 기초한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담겨 있었다.

강정인 교수는 “조소앙은 삼균주의의 핵심이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한 생활’이라고 선언했다”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는 ‘정치 균등화, 경제 균등화, 교육 균등화’로 … 주장했다”라고 말한 뒤 “삼균주의가 공화주의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공화’는 한마디로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갑질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런 이념이 조소앙을 비롯해 1919년에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의식을 지배했으며 그 의식이 1948년 대한민국 헌법에 투영된 것이다. 삼균주의가 담긴 공화 이념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라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으로도 표현됐다.

‘민주공화정’의 역사, 유구하다

3·1운동 참가자들이 “대한독립 만세”나 “일본 물러가라”나 외쳤지, 사회적 균등까지 요구했다고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다. 2016~2017년 촛불집회에서도 참가자 대부분은 ‘박근혜 하야’나 ‘박근혜 탄핵’ 같은 단순한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그게 촛불집회의 이념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치의 근본적인 부조리를 배척하고 새로운 나라를 열자는 게 촛불집회를 지배한 이념이었다.

3·1운동 때도 마찬가지다. 외형상의 구호는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식민통치와 불공평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또 백성이 주인되고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란 규정이 임시헌장 제1조 제1항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민주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투쟁이 1919년부터 본격화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헌법이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1919년 당시, 우리 민족은 일본 왕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로부터 9년 전까지는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민주공화정과 상반된 환경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우리 민족이 민주공화정을 의식적으로 지향했다는 게 얼른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심포지엄 맨 마지막에 발언한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서해성 총감독은 “우리 민주공화정의 역사는 대체 언제 시작된 것일까?”라고 질문한 뒤 “여기서 또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건, 민주공화정이란 게 3·1운동이 일어나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일 수 없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민주공화정을 향한 투쟁이 예전부터 있었기에, 3·1운동 때 그것이 민족적 이념으로 표출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기조발언에 이어 첫 번째 발제를 맡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한국 민주공화제의 기원과 사력(史歷)’이란 발표에서 이런 말을 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역사학 교수 프리만은 ‘로마는 그 이전 역사의 모든 흐름이 유입되어 그곳에서 대문명을 이루었고, 그 이후 역사의 모든 흐름이 그곳을 발원하여 다시 흘러가는 거대한 호수다’라고 의미 있는 발언을 하였다. 이 말을 우리나라의 3·1혁명과 민주공화주의 발전 과정에 대입하면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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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웅 전 관장 ⓒ 인디엔피 제공

민주공화정에 대한 꿈이 3·1운동 때 갑자기 표현된 게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표현됐다는 것이다. 김삼웅 전 관장은 민주공화정에 대한 대중의 자각이 1894년 동학혁명을 계기로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동학혁명이 민주공화정이란 정치체제를 지향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 중심의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동학 정신이 민주공화정의 취지와 연결된다는 의미다.

김 전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래에서 ‘시천주’는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신다’는 의미이고, ‘인시천’은 인내천과 동의어다.

“조선 후기 일반 백성들에게 근대적 주권의식을 일깨운 것은 최재우가 창도한 동학이었다. 동학은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인시천(人是天)의 교리를 내세우며 사람 중심, 만인평등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는 동학혁명을 계기로 촉발된 사람 중심 세상에 대한 열망이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같은 혁신운동을 통해 민주공화정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하고, 이것이 3·1운동과 임시정부로 응집된 뒤 1948년 헌법을 향해 흘러갔다고 강조했다.

수만 명이 18일간 시위, 무려 1898년 이야기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최형익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동학혁명 직후의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가 민주공화정 운동에 기여한 역할을 보다 높게 평가했다.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가 추구한 게 의회 설립 운동이었다면서 “수만의 서울 시민들이 (1898년) 12월 6일부터 23일까지 18일 동안 철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사실의 역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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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형익 교수 ⓒ 인디엔피 제공

1898년에 한양 시내에서 수만 명이 18일간 시위했다면, 2016~2017년 촛불집회를 연상시키는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런 집회에서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면, 민주공화국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열망이 그 당시에도 상당히 성숙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토양이 있었기에 1919년 임시헌장에 민주공화제가 규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3·1운동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19년 이래로 민주공화국을 열렬히 지항하면서 독립운동을 했기에 1948년 헌법에 그 이념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3·1운동과 임시정부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무책임과 좌우의 분열로 제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배태한 1919년 당시의 우리 민족은 민주공화국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 열망까지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열망이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진 것이건만, 보수세력은 1919년과 1948년의 연관성을 어떻게든 부정하려 하는 것이다.

앞에서, 보수세력이 3·1운동과 대한민국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숨은 동기를 심포지엄 학술 토론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고 했다. 심포지엄에서는 동학혁명 및 만민공동회에서 표출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3·1운동으로 집약되고 이것이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이어졌다는 발표들이 있었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열망 밟은 보수세력

동학혁명과 만민공동회의 본질은 촛불혁명과 다르지 않다. 동학혁명·만민공동회는 낡은 세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운동들은 보수파의 탄압으로 좌절됐다. 동학운동은 일본군뿐 아니라 보수파에 의해서도 진압됐다. 보수파는 민병대를 만들어 동학 진압에 기여했다. 만민공동회 역시 보수파에 의해 진압됐다.

동학과 만민공동회를 진압한 보수파는 1910년 국권 침탈 때도 살아남았다. 일본이 조선 백성들을 손쉽게 지배할 목적으로 그들과 손잡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1919년 3·1운동 때도 끄떡하지 않았다. 대중이 식민지배에 항거할 때 그들은 시위군중을 무지몽매한 자들로 폄하했다. 신문을 통해 경고문을 발표한 이완용의 글에서도 그런 인식이 드러났다. 이완용을 비롯한 보수파의 태도는, 촛불혁명에 맞서 태극기집회를 벌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수파의 후예들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할 때도 살아남았다. 한국 사정을 모르는 미군정이 그들을 파트너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 후예들은 1960년 4·19 혁명 때도 살아남았다. 이듬해 발생한 박정희 쿠데타가 미국의 승인을 받으면서 진보적 사회개혁이 차단된 덕분이었다. 그 후예들은 1987년 6월항쟁 때도 살아남았다. 이때 상당한 타격을 입긴 했지만, 아직 숨을 유지하고 있다. 2016~2017년 촛불혁명으로 한 방 더 맞았지만, 아직은 숨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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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지엄 청중들 ⓒ 인디엔피 제공

1919년 건국,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동학혁명 때부터 3·1운동 때까지 그리고 1948년 정부수립 때까지도 물론이고, 그 후로도 한국 보수파는 계속 명맥을 유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동학혁명 이래의 이념을 집약한 3·1운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대한민국 출발점을 3·1운동에 두는 헌법 전문이 불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의 관계를 부정하는 태도는 미군정을 대한민국의 은인으로 보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물론 미군정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미군정 때문에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된 것은 아니다. 민주공화국이 된 것은 위에서 소개한 역사 덕분이다.

심포지엄에서 서해성 총감독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건 적어도 대한민국이 미군정 체제의 하사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최형익 교수도 유사한 말을 했다. “민주공화정으로서의 대한민국이 1945년 미군정에 의해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민중적 각성과 내적 발전의 결과였음을 (…) 드러내고자 한다.”

미국 정부는 1789년에 세워졌는데도 미국인들과 미국 헌법은 미국이 1776년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됐다고 하는 것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따라서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김삼웅 전 관장이 발표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의 말에서 ‘살피게 한다’를 문맥에 맞춰 ‘알 수 있다’로, ‘관학자들’을 ‘관변 학자들’로 대체했다.

“이명박·박근혜 중심의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인, 관변 학자들이 1948년 8·15 정부수립일을 광복절 대신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반헌법적인가를 알 수 있다.”

<2017-12-1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보수세력이 ‘1919년 건국’을 부정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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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17/12/1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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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7/10/2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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