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누구도 살지 않는 불가사의의 아방궁, 용산총독관저 총독 주최 경로잔치와 일제 관리들의 수련회가 행해지던 공간

지역

누구도 살지 않는 불가사의의 아방궁, 용산총독관저 총독 주최 경로잔치와 일제 관리들의 수련회가 행해지던 공간

익명 (미확인) | 금, 2018/04/20- 14:31

식민지 비망록 35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문화재수난사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으로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101호)’이란 석조유물이 있다. 불교미술의 꽃이라는 일컫는 이 사리탑은 일본인 골동상에 의해 일찍이 1911년 여름 강원도 원주에 있는 절터를 벗어나 서울 명동과 일본 오사카 등지를 떠도는 통에 남다른 풍상을 겪었고, 1912년 12월경에 간신히 국내로 재반입된 이후 다시 총독부박물관의 야외전시유물로 전락한 이래 거의 한 세기가 넘도록 경복궁 안에 오갈 데 없이 갇혀 있어야 했던 비운의 문화재이다.
특히 한국전쟁 때는 포탄을 맞아 탑신이 크게 파손되는 악운이 겹치는 바람에 만신창이가 되었다가 콘크리트로 겨우 외형이 복구되었고, 2016년 4월에 와서야 전면적인 해체 수리 복원을 위해 대전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간 상태에 있다. 그런데 이 사리탑이 애당초 원래의 절터에서 무단 반출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게 된 내력이나마 자세히 알려지게 된 것은 흥미롭게도 후지무라 도쿠이치(藤村德一)라는 일본인이 『거류민지석물어(居留民之昔物語) 제1편』(1927)라는 책에 남겨놓은 「현묘탑강탈시말(玄妙塔强奪始末)」이라는 글 덕분이다.
그는 통감부 시절에 ‘퇴한명령(退韓命令)’을 받은 전력이 있고, 그 바람에 자기들 나름으로 반체제 인사로 간주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선지 그의 책에는 「관헌의 횡포와 관리의 비상식」이란 소제목이 말해주듯이 자기네 위정자(爲政者)들에 대한 반감이 노골적으로 반영된 내용이 곳곳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하세가와 원수(長谷川 元帥)와 아방궁(阿房宮)」이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정리된 글로 파악된다.

 

11

하세가와 총독과 용산총독관저의 전경이 배경도안으로 묘사된 조선총독부 발행 ‘시정7주년기념엽서’(1917)

 

세간에 용산의 ‘아방궁’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씨가 일찍이 러일전쟁 직후 한국주차군사령관으로 경성에 재임중에 러일전역비(러일전쟁비)의 잉여금 50만 엔을 들여 군사령관 관저로 하고자 건설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하세가와 씨는 물론이고 아직 그 누구도 이곳에 거처를 정한 바가 없는 불가사의한 건축물이다.(중략)
50만이라고 하는 국탕(國帑, 나랏돈)을 낭비하고 그 책임을 전가시키기 위해 궁여지책의 결과로 이를 이궁(離宮)으로 삼으려고 계획하기에 이른 것은, 국민이 단호하게 이를 힐책하지않을 수 없고, 20년 전의 50만 엔은 오늘날 2백만 엔에 필적할 거금으로 이를 낭비하고 그 후 처지가 곤란해져서 부적합한 곳에 이궁을 둬야 할 필요는 추호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내가 이 대건축물을 일컬어 늘 불충관(不忠館)이라고 하는 까닭인 것이다.

 

12

『일한병합기념사진첩』(1910)에 수록된 ‘데라우치통감 신임피로회장 약도’의 모습이다. 용산정거장 건너편으로 한국주차군사령부와 등진 자리에 포진한 통감관저의 위치 관계와 삼각도(三角道, 삼각지) 쪽에서 연결되는 행로가 잘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서 아방궁이라고 일컫는 곳은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이다. 흔히 총독관저라고 하면 남산 왜성대 인근에 자리한 옛 통감관저를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과는 별개의 관저가 또 하나 존재했다는 얘기이다. 그 위치는 지금의 용산미군기지 안에 포함된 곳으로 서울 용산역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중간쯤이었으며, 일제 때의 지번(地番)으로는 ‘한강통 11-43번지’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다.

 

일제강점기 총독관저의 소재지 변동에 관한 연혁

13

 

후지무라의 글에서 나타나듯이 용산총독관저는 원래 한국주차군사령관 관저의 용도로 세운 건축물(1907년 6월 기공, 1910년 4월 준공)이었다. 하지만 너무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립된 탓에 건물이 완공되기 이전에 이미 ‘통감관저’로 용도변경이 추진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총독부가 별도의 건물을 지어 이것과 맞교환하는 형태로 인수인계가 이뤄졌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정작 이곳이 총독관저로 바뀐 이후에는 아무도 이곳을 집무공간으로 삼았던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1932년 8월에 우가키(宇垣) 총독이 자기 가족과 함께 여가를 즐기기 위해 20여 일 남짓 이곳에 기거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참의 세월이 흐르도록 그 누구도 이곳을 거처로 정한 일조차 없었다. 무엇보다도 유지관리비용이 지나치게 컸고, 서울 시내와 동떨어진 곳에 자리하다 보니 업무상 불편이 크다는 것이 그 이유로 꼽혔다.

14

『일본지리풍속대계 제16권』(1930)에 수록된 용산총독관저 일대의 전경사진. 왼쪽 위에 지붕이 드러난 건물은 조선군사령부(옛 한국주차군사령부)이다.

 

16

같은 책에 수록된 용산총독관저의 대문 쪽에서 담아낸 전경사진.

 

상황이 이러하니 이곳은 그저 역대 통감이나 총독이 주관하는 연회와 접대가 드문드문 벌어지는 공간으로 사용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예를 들어 1910년 7월에 데라우치 통감이 부임했을 당시 축하피로연이 벌어진 장소가 이곳이었으며, 경술국치 이후로는 천장절 축하연이나 만찬회 따위가 곧잘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황제가 몸소 이곳까지 행차했다는 기록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은 간혹 식민지 조선을 찾은 일본 황족이나 서양의 귀빈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평상시에는 거의 비어있는 공간인 까닭에 그때마다 대대적인 건물수리와 조경공사가 벌어지곤 했다
용산총독관저가 이처럼 시설과 규모는 번듯하나 지나치게 화려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덩치가 큰 탓에 이러한 처치곤란의 신세를 타개하기 위해 나온 발상이 바로 이궁(離宮) 건설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감독을 지낸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와 같은 이는 『양경거류지(兩京去留誌)』(1915)를 통해 이를 조선에 있어서 천황 이궁의 하나로 삼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설파하기도 했다.

 

17

『매일신보』 1938년 11월 13일자에 실린 미나미 총독 주최 제3회 고령자 초대회 관련보도.

 

『매일신보』 1935년 7월 11일자에 수록된 기사에 따르면, 왜성대 총독관저를 병합기념관으로 보존하는 대신에 용산총독관저를 증축 개조하여 새로운 관저로 사용하려는 계획이 수립된 적이 있었으나, 이 역시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자못 흥미로운 것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1936년 이후 1941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80세 이상의 장수노인(長壽老人)을 전국에서 초대하여 이곳 총독관저에서 성대한 경로잔치를 벌였다는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국민정신 작흥과 경로사상 고취를 명분으로 내세운 이 행사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에 다음과 같은 미나미 총독의 인사말에서 잘 포착되고 있다. 『매일신보』 1938년 11월 13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는 그 내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는 미나미 총독이올시다. 오늘 고령자 제씨가 이 같이 다수히 참석하여 주신 것을 충심으로 기뻐합니다. 무릇 장로를 존경하는 것은 사람의 자연스런 지정이오 또 도덕의 근원인데 특히 동양에서는 경로의 좋은 습관이 깊이 사회에 침윤되어 왔고 조선도 고래로 이 미풍이 성황하였는데 이것을 민중 전반에 궁행실천시키고 싶어서 총독된 이후로 매년 고령자 위안회를 개최하고 지방에도 이를 장려하고 있는 터입니다.(중략)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은 천황폐하의 어능위(御稜威) 아래 용맹과감한 황군장병의 분투와 열렬한 총후국민의 협력에 의해서 여러분도 아다시피 지난번 항일의 제2수도인 한구(漢口)도 함락하고 적은 멀리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사변은 결코 이로써 끝나지 않고 금후 국민은 일층 공고한 각오와 노력이 필요한 터이니 여러분은 장로의 입장에서 젊은 사람들을 편달하여 주어야 합니다.

 

용산총독관저의 연혁을 따라가다 보면, 일제가 패망을 앞둔 시점에서 이곳은 다시 ‘조선총독부지도자연성소(朝鮮總督府指導者鍊成所)’의 용도로 사용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고이소(小磯) 총독이 반도통치의 세 가지 큰 방침의 하나로 내세운 ‘수양연성의 철저적 실천’을 구현하기 위해 1943년 3월 1일부터 용산총독관저를 이용하여 개설한 기관이었다.
황도수련원(皇道修鍊院)의 성격을 띤 이곳에서는 육군중장 출신의 사이토 야헤이타(齋藤彌平太)가 소장을 맡았고, 총독 자신을 포함하여 총독부의 각 국장과 도지사 등을 대상으로 한 연성회가 진행되었다. 또한 총독부 고등관은 물론이고 판검사, 부윤, 군수 등을 집결시킨 수련회도 곧잘 이곳에서 실시된 바 있었다.
『매일신보』 1944년 7월 7일자에 수록된 기사에는 중추원 참의 30명이 참가한 합숙훈련 상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18

『매일신보』 1943년 8월 29일자에 실린 총독부지도자연성소 입소식 관련 보도내용.

 

중추원 참의 30명의 합숙연성이 6일 오후 1시부터 용산의 총독부지도자연성소에서 5일간 예정으로 시작되었다. 참의들은 지난 4일부터 총독부에서 열린 중추원 회의에 출석하여 결전하 반도 민중의 전의앙양(戰意昻揚)과 황국근로관 확립에 관한 열성스러운 의견을 개진하였고 또 고이소 총독의 훈시를 듣고 금후 민중의 지도자로서 봉공할 결의를 굳게 한 터인데 연 2일간 계속된 회의로 자못 피로한 터임에도 불구하고 연성에 참가한 것이다. 이날 오후 1시 연성소에 집합한 전원은 처음 신체검사를 받고 연성소 직원으로부터 주의사항 설명을 들은 다음 오후 6시부터는 신배(神拜)로부터 시작하여 열성스러운 연성을 시작하였다.

 

이곳 용산총독관저는 한국전쟁 시기에 반파(半破)된 모습이 드러난 적이 있다는 사실만 드러났을 뿐 아무도 이 건물의 최후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용산 ‘아방궁’ 역시 일제침탈사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의 하나라는 점만큼은 오래도록 기억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후원회원마당]

친일파 흉상 철거, 고등학생의 민원에 보훈처가 답하다

임승관 전남동부지부장

김정태 흉상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작년, 전국적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행사가 있었다. 전남교육청의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남청소년 역사탐구대회’를 진행해 왔으며 작년
으로 9회째를 맞이했다. 작년도 주제는 ‘임정 100주년·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 전라도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의 실상과 해결방안’ ‘전남지역 친일잔재의 실상과 해결방안’이었으며 도내 중·고교 70여 팀이 참가했다.
참가팀 중에는 고흥 녹동고등학교 팀도 있었는데 이 학생들은 대회 과정에서 자신들의 고장에 김정태의 흉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정태(1869~1935)는 강제합병 후, 전남 영광군수, 광주군수, 순천군수 등을 지냈으며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전남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했다. 1924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한국병합기념장(1912),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15),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28) 등을 받았다.
김정태의 아들 김상형(1897~?) 역시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며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전조선시국강연반 연사로 참여하였다. 중추원 의원 시절에는 내선일체 정신의 구현은 “반도민중의 일본화”에 달렸다고 주장하며 “천황폐하를 경모하여 받드는 정조(情操)를 고양”시키기 위해 “마을에서 학교에서 황거망배(皇居望拜)와 천양무궁(天壤無窮)을 기원하고 마음을 정화해 황국신민임을 맹세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 자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상형은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에 송치되었다.
이와 같은 김정태의 친일행적을 확인한 학생들은 2019년 8월 고흥군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광복 74년이 지났음에도 이런 역겨운 동상이 주민들의 휴식공간인 옥하공원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고흥 군민들을 내려다보며 분명히 비웃고 있을 것입니다. 동상이 철거된다면 주민들의 애국심과 지역 역사의식이 한층 더 함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친일파 동상이 버젓이 세워진 채로 우릴 내려다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학생의 민원 글 발췌

 

고흥군은 학생들의 민원을 국가보훈처에 이첩했다. 김정태 흉상이 자리했던 옥하공원 내 토지를 비롯해 약 56만㎡의 토지가 김정태 후손들의 소유였으나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에 의해서 국가로 귀속된 이후 현재까지 국가보훈처가 관리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민원 전까지 국가보훈처는 그 땅에 친일파의 흉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민원을 넘겨받은 국가보훈처는 김정태의 후손에게 흉상을 자진 철거할 것을 통보했다. 그러나 후손들이 흉상 철거를 미루자 국가보훈처는 행정대집행을 통보했고, 결국 후손들은 4월 28일 오전 흉상을 철거했다. 철거는 국가보훈처와 고흥군청 관계자들이 오기 전에 신속히 진행 되었지만 필자는 오전 일찍 현장에 가 있었기에 다행히 철거의 모든 과정을 영상에 담아 지역언론사 등에 제공할 수 있었다.
김정태 흉상 철거는 아마도 친일파 기념물 철거를 학생들이 요구하고 고흥군과 국가보훈처 등 공공기관이 응답한 첫 번째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흉상 철거를 담당한 국가보훈처 담당자는 배움을 실천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행동과 민원 내용에 진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민원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백방으로 철거 방법을 알아내어 결국 성과를 이룬 보훈처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증명해 준 녹동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화, 2020/05/26- 22:56
0
0

[초점]

김세형 매일경제 고문이 6월 9일자 매경닷컴에 게재한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라는 칼럼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술하여 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의 신뢰를 크게 손상시켰다. 즉 칼럼에서 “일개 시민단체가 정치권의 보수・진보의 합의도 없이 입맛대로 정하다보니” “만해 한용운, 춘원 이광수까지 모조리 친일 명단에 들어가고” “민주당 고위층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고위급 관료 출신이었는데도 빠졌다.” 등등 〈친일인명사전〉 발간 취지나 수록자 선정기준, 사전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 허위 사실을 기사화했던 것이다. 연구소는 이러한 허위 왜곡보도를 바로잡고자 6월 18일에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신청했다. 이어서 7월 2일과 15일 두 차례의 조정심리를 가졌는데 2차 심리기일에 처음 출석한 매경닷컴측은 연구소의 입장을 전면 수용하였다. 이에 언론중재위원회는 ‘반론보도’ 형식으로 김세형 칼럼 하단에 다음 문구를 영구적으로 게재하도록 결정했다.
연구소는 앞으로도 〈친일인명사전〉과 연구소를 허위 비방하거나 음해하는 세력과 언론매체
에 강력히 대응할 방침이다.


 

본 신문(매경닷컴)은 지난 6월9일 게재한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김세형 칼럼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술했습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은 국민성금으로 학계를 망라한 180여명의 교수 연구자들이 8년간의 지난한 작업 끝에 이뤄낸 소중한 성과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의 객관성 공정성은 학계가 공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법부의 판결에서도 여러 차례 입증된 바 있습니다. 나아가 보수 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정부기관에서도 공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는 데서 그 엄밀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 칼럼에서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고 허위의 사실을 서술하고, ‘민주당 고위층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고위급 관료 출신이었는데도 빠졌다’는 등 근거 없는 내용을 기재하여 친일인명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신뢰도를 크게 손상하였습니다. 이에 본 칼럼에서 위 내용을 삭제하고, 친일인명사전의 선정기준을 수록합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 국세현 회원사업부팀장

월, 2020/07/27- 21:53
0
0

[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3)

부역언론의 ‘산파’, 두 사주(社主)의 민낯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1939년 12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하시 고이치로(三橋孝一郞)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를 자기 관사로 불렀다. 조선일보의 경영에 관한 내용을 청취하고 총독부의 ‘언문신문’ 관리 의향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최고의 실세 중 하나였던 미하시와 방응모의 만남을 「언문신문통제에 관한 건(諺文新聞統制ニ關スル件)」이라는 극비문서로 자세히 기록했다. 이 문서에 ‘협의(協議)’로 정의된 둘의 만남은 이날부터 무려 10차에 걸쳐 이어졌다. 
12월 22일 첫 번째 만남에서 방응모는 먼저 이렇게 고백했다.

“신문사업을 경영한 지 6년여에 그 실비(失費)가 많아서 곤란함에 빠져 오히려 교육 기타 사회사업 등의 문화 사업으로 전환하기를 희망한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자진’ 폐간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미하시는 반색했다. 2차대전 발발 등으로 어수선한 정국을 ‘언론통폐합’을 통해 다잡으려 했던 조선총독부의 모략을 언론사 사주(社主)가 스스로 나서 도와주는 셈이었다. 미하시는 실제로도 이 같은 방응모의 제안이 고마웠던지 통제방침에 잘 응하면, 방응모의 희망에 대해서도 “상당한 고려를 할 수 있다”며 선심을 썼다. 이에 방응모 또한 “그 뜻이 크게 움직”였다고 문서는 적고 있다.
12월 24일 두 번째 만남, 이틀 전의 면담을 통해 조선총독부가 협상에 응할 여지가 있음을 포착한 방응모는 이날부터 본격적인 사업상의 조건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기에 이른다. 당시 방응모가 총독부에 희망한 조건은 아래와 같다.

 


 

① 동아일보도 함께 처분될 것
② 본사 발행의 3종(조광·여성·소년) 출판물은 계속 간행될 수 있게 할 것
③ 폐간 당일까지 본 협의에 응하는 것에 대해서는 외부에 대해 극비에 부쳐질 것
④ 종업원의 취직·전직의 알선 및 수당 지급에 유감이 없게 할 것
⑤ 건물을 포괄 약 100만 원 정도로 양도하는 데 차질이 없게 할 것
⑥ 장래 교육 또는 사회사업 방면에 활동하고자 희망함에 대해 원조해 줄 것

 


 

정리하자면 경쟁 언론사를 제거하고, 조선일보의 바통을 이어받을 출판사업은 유지하며, 새 사업으로의 진출과, 총독부의 원조 보상금 등을 충분히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자기네들은 사업은 유지하면서 경쟁사는 제거해버리는, 치밀한 ‘이면공작’이다. 방응모는 총독부의 약속을 토대로 조선일보의 출판부를 따로 독립시켜 ‘주식회사 조광사’를 발족시킬 수 있었다(1940.4). 즉, 조선일보의 중요한 알맹이는 살아남은 것이다. 잡지 <조광>은 원색적 친일과 전쟁선동의 논조를 유지하며 한글 신문과 잡지가 폐간당한 상황에서도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살아남는다.
세 번째 만남인 12월 28일, 방응모는 마침내 자신의 요구사항이 대부분 반영된 각서를 조인한다. 폐간계 제출은 이 같은 협상이 일단락된 뒤 이뤄졌다. 조선일보의 폐간은 사실상 사주 방응모의 자발적 의지로 결정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와 방응모의 협상은 10차에 걸쳐 계속됐고 이어진 협상과정에서도 폐간에 저항 따윈 없었다. 그저 폐간의 형식을 만들고 각종 이권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확답을 받아내는데 진력했을 뿐이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조선일보와 중요한 협상안들을 마무리한지 한 달여 지난 시점에서야 동아일보와 첫 협상이 시작됐다. 「언문신문통제에 관한 건」에 따르면 동아일보가 “(폐간에) 응하는 기색이 없”었다는 총독부 당국의 평가와 경무국장이 사장 백관수, 고문 송진우를 불러 ‘권설(勸說)’했다는 내용 등이 적시되어 있다. 조선일보와의 ‘협상’ 기록에 비해서는 대조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폐간’이라는 총독부의 극단적 조치를 대하는 두 신문사의 태도는 다소 달랐다. 그러나 두 신문은 이미 총독부 기관지와 다름없는 논조의 기사와 일본 동맹통신사로부터 제공받은 전쟁 보도 기사들로 지면을 도배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선‧동아 두 언론사가 총독부의 언론통제 방침에 충실했음에도 1940년 언론통폐합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전황이 복잡해지고 장기화되는 국면에서 총독부는 <매일신보>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두 한글신문의 활용가치를 더 이상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돈, 돈, 돈 … 퇴직사원들은 절망으로

이런 경과를 통해 두 신문은 1940년 8월 11일자 석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20년의 사사(社史)를 잠시 마감한다. 조동 100년사에 남긴 두 언론의 공백, 즉 ‘폐간기’는 해방 전까지 약 5년정도 지속된다.(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1945년 11월 23일, 12월 1일에 복간을 선언했다)
물론 유력한 자본가였던 방응모와 김성수에게 ‘폐간’은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정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20년간 실질적으로 신문사를 떠받치며 저널리즘의 현장에서 고생한 사원, 배달부들로 이들은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조선, 동아일보는 사원들에게 <매일신보>한테 받은 영업권 보상금에다 회사 차원에서 자금을 더 증액하여 퇴직금을 지급했다. 동아일보는 2년간의 봉급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조선일보는 1년간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3년 이상 근무한 사원에게 법정퇴직금을 지급하기로 한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의 실상은 참담했다. 불만이 쌓인 사원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결국 조선총독부가 관련 사안을 진상조사하기에 이른다. 경기도경찰부가 경무국장 앞으로 작성한 보고서 「폐간 양언문지의 사원 퇴직금 지급상황에 관한 건(廢刊 兩諺文紙ノ社員退職金 支給狀況ニ關スル件)」에는 조선일보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 현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350명의 사원들에게 총 23만 2,891원을, 동아일보는 303명의 사원에게 37만 968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일단 총액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발생한다
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퇴직금 지급율이 가장 저조한 계층은 배달원으로 조선일보는 배달원에게 ‘평균 6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동아일보가 배달원에게 평균 734원의 퇴직금을 지급한 것에 비추어 보면 122배의 차이가 발생했다. 사원, 준사원, 공장종사원에게 지급한 평균액 또한 그 차이가 뚜렷하다. 1,473원의 동아일보 평균 지급액에 비해 조선일보의 평균 지급액은 801원에 불과해 여기서도 2배 가까운 차이가 발생한다. 다만, 퇴직금의 최고 지급액은 조선일보가 9,617원으로 동아일보 7,614원에 비해 높았는데 이 9,617원의 최고액을 가져간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사장인 방응모였다.

 

 

조선일보의 퇴직금 문제를 조사한 경기도경찰부는 “조선일보사의 지급율은 전자(동아일보)에 대해 비교도 안될 만큼 소액”이며 “양사의 차이가 너무나도 심하여 조선일보사원의 불평은 무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어 조선일보 사원들이 “방응모에 면회를 구하여 하등의 구제책을 요구”했으나 방응모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야말로 사주의, 사주에 의한, 사주를 위한 퇴직금 행정이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양사의 사주, 전쟁의 나팔수로 변신하다

신문이 폐간되고 사원들이 퇴직금 문제로 허덕이는 사이 김성수와 방응모 두 사주들 또한 분주했다. 바로 전쟁부역의 ‘나팔수’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진작부터 다양한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전쟁협력 관변단체에 참여했으며 시국강좌, 기사, 방송 등을 통해 전쟁 선동의 일익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폐간 이후에도 이들의 활동들은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교육자를 자처했던 김성수의 학병지원강요 행적은 충격적이다. 김성수는 1943년 10월 조선에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자신이 맡고 있던 보성전문학교의 지원율을 높이기 위해 각종 활동에 나섰다. 그는 자신이 교장을 맡고 있는 보성전문학교의 학병 지원 실적이 신통치 않자 직접 조회에 나서 학생들을 설득하는가 하면 교내에 조선군 논객 ‘에가미(江上守彦)’ 중좌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학병지원병 독려를 위한 교장회의, 좌담회에 참여하고 지원을 호소하는 글도 여럿 기고했다. 그 결과 보성전문은 학병지원을 강요하는 집회를 가장 많이 개최한 학교가 되어버렸다.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석간 1면에 실린 김성수의 대표적인 친일논설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다른 학교 학생들에 비해 일제의 전시정책에 비협조적인 경향을 보인 보성전문 학생들에게 이 같은 ‘교장’ 김성수의 전쟁선동 행위는 상당한 혼돈을 주었다.
실제로 학병지원 마감시점인 11월 17일, 보성전문의 학병 지원율은 53.6%에 불과했다. 가장 많은 선전활동을 했음에도 학생들의 지원율이 저조하자 김성수는 “한명이라도 지원에서 빠지는 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징용”되어야 한다는 모진 발언으로 학생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희생과 죽음을 강요하면서 거부하는 학생들의 의지를 ‘문약(文弱)’이라며 폄훼하기도 했다.
한편, 방응모는 일본 육해군의 ‘응원단장’과 같은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1933년에 이미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제16호)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한 바 있다.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한 직후의 일이었다. 조선총독부와의 거래에 밝았던 방응모는 중일전쟁이 터지자 적극적인 전쟁부역 행위에 나섰다. 1937년부터 경성군사후원연맹, 경성부지원병후원회,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 이사 등으로 참여했으며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감사역을 맡기도 했다. 일제의 진주만 기습을 찬양하는가 하면, “일억국민의 총궐기”를 부르짖으며 침략전쟁에 감정적으로도 동화된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조선, 동아일보는 사라졌지만 사주들의 친일행각은 폐간 뒤에도 계속됐다. 아니, 신문을 통한 친일행위가 사라진 만큼 더욱 열심히 부역에 매진한 듯도 보인다. 특히 방응모는 조선일보의 후신인<조광>을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인 청년들에게 징병을 권유하는 논설과 문예물로 채워 완전한 친일잡지로 거듭났다.

 

민족을 배반한 한 세기. 반성 없인 영광도 없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양사의 사주 방응모와 김성수는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언론재벌이 된 그 후손들은 2010년 당당하게 국가를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취소’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럼에도 방응모는 2012년에, 김성수 2018년에 반민족행위자로 최종 확정되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부역행위에 대한 반성은커녕 민족의 수난기를 함께 한 역사를 부각하며 ‘민족지’로서의 미화를 창간 100년이 된 이 시점에도 거듭하고 있다.
이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역사퇴행적 행태들을 볼 때마다 나치 부역언론을 단죄했던 프랑스의 사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한 언론인 개개인에 대한 숙청뿐만 아니라 언론사 자체에 대한 단죄도 강력하게 진행했다. 나치에 협력한 주류 언론은 모두 폐간되었으며 그들이 사용한 모든 시설과 공간 등 재산도 몰수하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항을 지속해온 〈콩바〉, 〈데팡스 드 라 프랑스〉 등 지하언론이 사용하도록 조치됐다.
‘어쩔 수 없었다’ 식의 변명을 일삼던 언론인들도 가차 없이 심판을 받았다. 한 예로 나치독일을 미화한 일간지 〈르마텡〉의 편집국장 로잔은 (조선, 동아의 사주들처럼) “압력에 못 이겨”라는 변명으로 일관했지만 프랑스 재판부는 “독일 선전상 괴벨스의 품에 결국 안겼다”고 질타하면서 로잔에게 20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프랑스 나치청산에 대해 천착해온 주섭일은 “이 같은 (청산)과정들이 프랑스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자유와 사회정의, 인권이 참되게 존중받는 민주국가 건설에 이정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렇듯 엄정했던 프랑스의 청산사례들과 우리 역사의 청산과제들을 비교해 볼 때면 ‘한발 늦었다’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동아 100년을 맞은 지금 더욱 절실하게 언론개혁을 외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취지에서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마련했다. 3회에 걸친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의 연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은 오는 8월 11일 열리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번 기획전과 연계한 특강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도 함께 진행되니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 참고문헌
박용규,
「일제 말기(1937~1945)의 언론통제정책과 언론구조변동」, 한국언론학보, 2009
장신, 「일제말기 김성수의 친일 행적과 변호론 비판」,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009
주섭일,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연대, 2004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1~3, 민족문제연구소, 2009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보유편>, 2017

월, 2020/07/27- 21:58
0
0

[식민지 비망록 60]

역대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이 잇달아 벽제관을 시찰한 까닭은?
사쿠라와 단풍나무 동산으로 구축한 그들만의 성지

이순우 책임연구원

 

<승정원일기> 고종 40년(1903년) 10월 3일(양력 11월 21일) 기사에는 평양이궁(平壤離宮)인 풍경궁(豐慶宮)에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현지로 떠나려던 의정 이근명(議政 李根命, 1840~1916)에게 고종황제가 하문하는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화 한 토막이 수록되어 있다.

 

…… 이어 전교하기를,
“어느 곳으로 길을 잡았는가?”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처음에는 수로(水路)로 가기로 계획하였습니다만, 감동당상 민영철(監董堂上 閔泳喆)이 전보한 바에 근일(近日) 수로에 풍랑이 잦아 육행(陸行)을 권하기에 육로로 가려고 하나이다.” 하였다.
…… 상(上)이 이르기를, “며칠간의 노정(路程)인가?”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550리인데, 하루에 7, 80리를 가면 7, 8일이면 가능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갑오년(1894년) 이전에 칙사(勅使)나 동지사(冬至使)가 지날 때는 도로가 광탄(廣坦)하고 점막(店幕)도 즐비했는데, 지금은 틀림없이 많이 황폐해졌을 것이니라. ” 하니, 이근명이 가로되, “그렇습니다.” 하였다

 

사진엽서에 남아 있는 벽제관의 옛 모습이다. 아래의 설명문에는 “임진왜란 때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명나라군대를 격파했던 곳”이라고 하여 이 공간의 의미를 전적으로 자신들의 전승지라는 점과 결부시켜놓고있다. 언덕 위에 보이는 것이 ‘괘갑수(掛甲樹)’라고 전해지는 느티나무이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왼쪽) 벽제관의 외대문에 달려 있는 ‘벽제관(碧蹄館)’ 편액의 모습이다. 이 사진의 아래에는 성종 때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 1430-1502)이 쓴 글씨라고 전한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 편액의 잔편은 현재 일산호수공원에 있는 ‘고양600년기념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벽제관>, 1938)
(오른쪽) 여러 차례에 걸친 ‘보존공사’로 인해 오히려 원형을 상실해가고 있는 벽제관의 모습이다. 이곳은 원래 온돌 구조의 방바닥과 벽면이 가리고 있는 형태였으나 느닷없이 마루 모양으로 변형되었고, 더구나 앞뜰과 주변 일대는 사쿠라와 단풍나무가 점령한 상태로 바뀌어 있다.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벽제관>, 1938)

 

이러한 대화는 1894년 청일전쟁과 더불어 전통적인 외교관계가 단절된 이후 불과 10여 년 사이에 두 나라의 사신들이 오가던 곳이 옛 모습을 크게 상실하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선박이나 철도와 같은 근대적인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인해 이러한 옛길의 이용빈도가 두드러지게 저하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흔히 사행로(使行路) 또는 연행로(燕行路)라고 불렀던 이 길은 서울에서 의주까지 1,050리(里), 다시 의주에서 북경까지 2,061리, 도합 3,111리에 왕복으로는 6,222리나 되는 머나먼 행로이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문집 <담헌서(湛軒書)> 「외집(外集)」 권10에 수록된 ‘연기(燕記)’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노정(路程)이 정리되어 있다.

 

한성(漢城) → 고양 벽제관(高陽 碧蹄館, 40리) → 파주 파평관(坡州 坡平館, 40리) → 장단 임단관(長湍 臨湍館, 30리) → 송도 태평관(松都 太平館, 45리) → 금천 금릉관(金川金陵館, 70리) → 평산 동양관(平山 東陽館, 30리) → 총수참 보산관(葱秀站 寶山館, 30리) → 서흥 용천관(瑞興 龍泉館, 50리) →검수참 봉양관(劒水站 鳳陽館, 40리) → 봉산동선관(鳳山 洞仙館, 30리) → 황주 제안관(黃州 齊安館, 40리) → 중화 생양관(中和 生陽館, 50리) → 평양 대동관(平壤 大同館, 50리) → 순안 안정관(順安 安定館, 50리) → 숙천 숙녕관(肅川 肅寧館, 60리) → 안주 안흥관(安州 安興館, 60리) → 가산 가평관(嘉山 嘉平館, 50리) → 납청정(納淸亭, 25리) → 정주 신안관(定州 新安館, 45리) → 곽산운흥관(郭山 雲興館, 30리) → 선천 임반관(宣川 林畔館, 40리) → 철산 차련관(鐵山 車 輦館, 40리) → 용천 양책관(龍川 良策館, 30리) → 소곶참 의순관(所串站 義順館, 40리) → 의주 용만관(義州 龍灣館, 35리) → [이하 중국 행로는 생략]

 

여기에서 보듯이 이 머나먼 행로 가운데 서울 도성에서 벗어난 첫 번째 기착지이자 되돌아오는 여정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숙소의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고양 벽제관(高陽 碧蹄館)이다.사신을 떠나보내고 맞이하는 공식행렬과는 별개로 수행원들의 친구나 친지들이 이들의 무사 귀환을 빌며 전송하고 작별하거나 귀로에 오른 이들을 다시 마중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곳을 소재로 한 무수한 시문(詩文)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이 땅의 주인행세를 했던 일본인들에게는 벽제관이라는 공간을 기억하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벽제관 일대가 임진왜란 당시 그들을 추격하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의 직속부대를 맞이하여 치명적인 반격을 가했던 일본군의 전승지(戰勝地)였으므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탓에 이곳이 남다른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곤 했다는 것은 식민통치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는 역대 총독과 정무총감이 잇달아 이곳을 시찰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흔적은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에 의한 벽제관 시찰이다.
<매일신보> 1912년 4월 30일자에는 「총독 벽제관행(總督 碧蹄館行)」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의 행로를 이렇게 간단히 정리하고 있다.

 

데라우치 총독(寺內 總督)은 재작(再昨) 28일(日) 오후(午後) 2시(時)부터 아카시 소장(明石 少將), 아라이 탁지부장관(荒井 度支部長官), 후지타 부관(藤田 副官)을 종(從)하여 자동차(自動車)를 승(乘)하고 고양군 벽제관(高陽郡 碧蹄館)에 부왕(赴往)하여 문록역(文祿役)의 전적(戰跡)을 시찰(視察)하고 오후(午後) 6시(時)에 귀저(歸邸)하였다더라.

 

데라우치 총독 자신이 남긴 일기(日記)에도 이날의 동선이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그가 이날 벽제관 앞에 벚나무(櫻樹, 사쿠라)를 심어 기념으로 삼았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이때 그가 심은 벚나무 주위에는 나중에 돌기둥에 쇠사슬을 연결하여 보호난간을 둘러 정성껏 관리하는 모습이 연출된 것으로 알려진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한 벽제관 일대의 공간변형을 통틀어 가장 두드러진 풍경의 하나는 이곳 주변이 온통 벚꽃 동산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29년 4월 4일자에 수록된 「녹화운동(綠化運動)의 선구(先驅), 본사기념식수(本社紀念植樹), 작(昨) 3일(日) 기념일(紀念日)을 복(卜)하여, 벽제관(碧蹄館)에 앵풍 만주(櫻楓 萬株)」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본사(本社)에서는 기념식수일(紀念植樹日)에 순응(順應)하여 3일 벽제관에서 기념식수를 하였는데 수년 전 본사에서는 한강반(漢江畔) 급(及) 이번에 기념식수를 한 벽제관에 앵화(櫻花)의 식수를 행하여 지금에는 직경 척여(直徑 尺餘)의 대목(大木)이 되어 과거 본사공적(本社功績)을 영구히 전하게 되었다. 이에 감(鑑)하여 본사는 작추(昨秋)에 거행된 소화대제(昭和大帝)의 어대전(御大典)을 광고(曠古)에 전하려고 종종(種種) 기념사업을 연구한 결과 조선에 재(在)한 민간녹화운동(民間綠化運動)의 선구(先驅)로서 식수(植樹)는 가장 적당한 사업이므로 이번에 벽제관 뒤의 국유지(國有地) 수십정보(數十町步)에 앵목(櫻木) 5천 주(株), 풍(楓) 5천 주 합계(合計) 1만 주(株)를 식재하였다. 당일은 본사원(本社員)은 물론 경성부내(京城府內)에서 다수의 내빈을 초대하고, 벽제관 부근 주민도 봉사적(奉仕的)으로 참가하여 기념식수를 하였다.

<조선> 1930년 9월호에 수록된 벽제관 후면 언덕의 ‘괘갑수(掛甲樹)’이다. 이곳이 정말 왜군의 갑주가 걸린 곳이었는지는 일본인들 스스로 의심하는 바였지만, 어쨌거나 사진에서 보듯이 돌난간과 표석을 세워 나름으로 소중한 기념물의 하나로 관리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념식수일’은 조선총독부가 한국병합(韓國倂合)의 대업(大業)을 영구히 기리는 동시에 애림사상(愛林思想)을 고취하고 식림(植林)을 장려한다는 명분으로 1911년 4월 3일 신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 공휴일)을 기하여 처음 기념수재일(記念樹裁日)로 정한 이래로 해마다 식목행사를 거행한 날이다. 위의 신문기사에 따르면,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주축이 되어 벽제관 주변에 벚나무와 단풍나무 1만 그루를 심었고, 이보다 앞서 ‘수년 전’에도 이미 이곳에서 식목행사를 거행한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 비단 이 시기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 시점부터 벽제관 일대에는 일본산 벚나무가 대량으로 식재되기 시작했다는 흔적도 발견된다. 가령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감독으로 장기간 서울에 체류했던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가 남긴 <연하승유기(烟霞勝遊記) 하권(下)>(1924), 325쪽에는 그 자신이 1916년 3월 17일에 벽제관을 탐방한 때의 감흥을 이렇게 적은 바 있다.

 

…… 관후(館後)의 소구(小丘)에는 당년(當年)의 괘갑수(掛甲樹)라고 칭(稱)하는 노규(老槻, 느티나무 고목)가 있다. 구상(丘上)에서 지점(指點)하면, 양군공전(兩軍攻戰)의 터가역력(歷歷)하게 보인다. 이 주변에는 천주(千株)의 길야앵(吉野櫻, 요시노 사쿠라), 천주(千株)의 풍(楓, 카에데)을 기념(記念) 삼아 심었지만, 거의 전벌(剪伐)되어져 가까스로 두어 그루를 남기고 있을 따름이다. 조선인(朝鮮人)의 수목(樹木)에 무돈(無頓)이 지나침은 참으로 가공(可恐)할 만 했다.

 

여기에 나오는 ‘괘갑수’는 벽제관전투 당시 싸움을 마치고 일본군 장졸(將卒)이 갑주(甲冑)를 벗어 이곳에 걸어놓고 휴식을 취했다거나 그 당시 선봉에 섰던 왜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가 자신의 투구를 걸었던 곳이라거나 하는 식의 전설이 있는 벽제관 뒷동산의 느티나무였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얘기는 일본인들 스스로가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글들이 곧잘 남아 있기는 한데, 어쨌거나 이곳 역시 그들이 늘 자랑스러운 곳으로 여기는 중요한 기념물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매일신보> 1928년 4월 3일자에 수록된 이케카미 정무총감의 벽제관 수리공사 현장시찰 관련 보도내용이다. 여기에는 이케카미 정무총감이 정의현(鄭儀鉉) 벽제면장과 더불어 기념식수를 하는 보도사진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건설(公園建設)을 계획, 면민(面民)은 관상목 식재(觀賞木 植栽)」 제하의 기사 등에도 벽제관 일대에 대규모로 벚나무를 식재한다는 소식을 잇달아 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처럼 벽제관 일대에 벚나무와 단풍나무를 적극적으로 심고 이를 관리하려고 했던 것은 이곳을 일본군의 전승지(戰勝地)라는 공간의 의미에 더하여 봄가을로 벚꽃구경과 단풍나들이의 명소와 같은 탐방지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제강점기 후반에 이르러 경승지(景勝地)로 자리매김한 벽제관 일대는 관람객들을 쉽사리 맞이할 수 있는 유원지(遊園地)의 형태로 적극 개발하기 위한 조치들이 거듭 시도된 바 있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6년 5월 22일자에 수록된 「벽제관 전등시설(碧蹄館 電燈施設)과 뻐스 연장요망(延長要望), 벽제면민(碧蹄面民)이 경전(京電)에 진정(陳情)」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이러한 변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벽제(碧蹄)] 고양군 벽제관은 대도회지 경성(大都會地 京城)을 거(距)하기 4, 50리의 지점에 있어 불결(不潔)한 공기와 풍진(風塵) 사이에서 피곤한 뇌를 잠시 수양(修養)할 만한 유일한 유원지로서 근일(近日)은 매일 수십 명의 관람객을 맞게 되는 바인데 조등기관(照燈機關)과 교통기관(交通機關)이 불완전함을 관민일동(官民一同)이 통감(痛感)한 바있어 거(去) 18일에 신면장(申面長), 카타카쿠 부장(片角部長), 후지노 교장(藤野校長), 이 본보 분국장(李 本報分局長), 기타 민간유지(其他 民間有志) 수십 명이 회동하여 전등가설(電燈架設)과 뻐스 총연장(總延長)을 경전회사(京電會社)에 실행토록 내(來) 22일에 진정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일반민간에서는 지방발전(地方發展)과 산업개발상(産業開發上) 필요하므로 실행을 기대중이며 교섭위원(交涉委員)으로 좌(左)의 제민(諸民)을 선정하였다. 신 면장(申面長), 이 이사(李理事), 카타카쿠 부장(片角部長), 임창운(林昌雲), 이본보 분국장(李 本報分局長), 코야마 협의원(小山協議員), 후지노 교장(藤野校長), 사에키 소장(佐伯所長), 안 기자(安記者).

 

여기에 나오는 ‘신 면장’은 일제강점기에 춘천군수, 원주군수, 홍천군수(1924년 12월 퇴직)를 역임하고 나중에 고양군 벽제면장(1932.1~1939.10)을 지낸 신규선(申圭善, 1882~1958)을 말하며, 지금도 벽제관 터 앞에는 1941년 1월에 건립한 ‘면장 신규선 치적비’가 남아 있다. 그리고 ‘사에키 소장’이라고 하는 이는 벽제우편소장(碧蹄郵便所長)이던 일본인 사에키 토루(佐伯融)를 가리킨다.
그는 벽제관고적보존회의 활동에 앞장서 참여하였고, 나중에 벽제관전적기념비(碧蹄館戰蹟記念碑, 1933년 9월 9일 제막)를 조성할 때도 주도적인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총독부의 고관 또는 내외귀빈(內外貴賓)을 포함하여 일반 탐방객이 벽제관을 찾을 때마다 벽제관 일대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옛 벽제면사무소가 자리했던 벽제관 터 앞쪽 비석군에는 ‘벽제면장 신규선(申圭善) 치적비(1941년 1
월 25일 제막)’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벽제우편소장 사에키 토루(佐伯融)의 경력과 활동상이 자세히 소개된 <매일신보> 1933년 10월 12일
자의 보도내용이다. 그는 벽제관 전적지의 보존과 기념비 건립에 주도적인 활동을 했고, 조선총독의 시찰 때거나 일반 탐방객의 방문 때건 간에 벽제관 일대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44년 10월 1일자에 수록된 「형석(螢石)의 채굴을 독려, 개성에서 고미술(古美術)도 감상한 총독」 제하의 기사를 통해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875~1953)가 부임 후 두 달 남짓에 이곳 벽제관을 시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이렇게 누누이 훈시를 한 다음 점심을 마치고 개풍군 중면(開豊郡 中面)에 있는 종양장(種羊場)을 시찰하고 대룡광산(大龍鑛山)을 찾아 경금속(輕金屬) 증산에 중요한 자재인 형석(螢石)의 채굴하는 현장을 독려하고 자동차로 귀로에 올랐다. 모색이 어리는 장단(長湍) 나루를 나룻배로 건너, 도중 벽제관(碧蹄館)에 들러 충혼비(忠魂碑)의 비명(碑銘)을 읽고 측근의 설명을 들어가며 한 동안 감개 깊은 듯 2백여 년 전의 옛일을 회고하고 일로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렇듯 일제는 자신들의 패망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사쿠라와 단풍나무의 천국으로 변한 자신들만의 성지(聖地)에서 얼토당토않게 그저 그 옛날과 같은 또 한번의 전승을 간절히 꿈꾸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화, 2020/07/28- 00:13
0
0

[초점]

‘부민관 폭파 의거’ 75주년 기념 행사

1945년 7월 24일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중의원까지 지낸 친일거두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주최로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앞세워 태평양전쟁에 조선 젊은이들의 참여를 선동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을 비롯한 일제의 수괴들과 거물급 친일파들이 대거 참석하고 있었다. 대회 소식을 사전에 입수한 ‘대한애국청년당’ 소속 조문기(1927~2008, 민족문제연구소 제2대 이사장 역임), 유만수(1924~1975), 강윤국(1926~2009) 등은 대담하게 대회장에 다이너마이트 2개를 설치, 폭파시켜 대회를 무산시켰다. 이 통쾌한 의거로써 패망 전 최후의 발악을 하던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일본 패망 직전 경성 한복판에서 조선독립의 의지를 널리 알린 일제강점기 의열투쟁의 대미를 장식한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연구소는 매년 의거일에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특히 의거 70주년이었던 2015년 7월 24일에는 의거 현장인 서울특별시의회 본 회의장에서 재연극 ‘정의의 폭탄’을 공연한 후 영상과 교육자료로 제작하여 서울 시내 중·고등학교 210여곳에 배포한 바 있다. 서울특별시의회 역시 3·1운동 100주년이었던 2019년 서울특별시의회 본회의장이 항일투쟁의 현장임을 알리는 홍보 영상과 전시물을 제작해 독립정신 고취에 나서고 있다.
연구소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기 위해 의거 기념식은 생략하고 7월 24일 임헌영 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이항증(임정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선생 후손), 차영조(임정 비서장 동암 차리석 선생 후손),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선생 후손), 김재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기획팀장, 방학진 기획실장 등이 김인호 서울시의회 의장과 함께 의회 내 부민관 의거 전시 시설을 관람하고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서울 왕산로(의병장 허위 선생의 호를 딴 도로로 청량리 시조사 입구에서 신설동역에 이르는 길)에 왕산 허위 의병장 동상 건립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한편 연구소 후원회원이기도 한 김인호 의장은 이날 “우리 민족은 큰 위기를 겪을 때마다 굳은 의지와 기개로 반드시 위기를 극복해낸 경험이 있다.”고 언급하며 “부민관 폭파 의거 75주년을 맞이해 우리의 민족정신을 다시금 되새기고, 지금 처한 위기를 의연하게 대응해나가는 서울시의회가 되겠다.”고 밝혔다

수, 2020/08/26- 00:28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