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독의 제주 4.3 이야기
























차코의 눈물: “Don’t cry for me, Argentina!”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서 울지 마오!)
김성훈 (환경정의 명예회장, 중앙대 명예교수, 경실련 소비자정의센터 대표)
지금은 세계 3대 GMO 콩 수출국이 된 아르헨티나의 한 시골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삼류 배우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퍼스트레이디 (페론 대통령의 영부인)’의 권좌에 오른 에비타(본명: 에바 페론)는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 여성들의 복지를 위해 힘쓰다가 비참한 병마에 걸려 33세라는 짧은 인생을 1952년 마감하였다. 그녀의 일생을 뮤지컬로 극화한 “Don’t cry for me, Argentina!(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서 울지 마오!)”가 1996년 맨처음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 올려졌을 때 전 세계인들은 흥분과 전율의 도가니에 빠졌다.
부자들과 대기업에 빌붙어 사는 일부 우파 언론과 지식인, 정치가들은 에비타의 포퓨리즘(대중영합주의 정책)이 아르헨티나의 경제파탄 주범이라고 저주하는가 하면, 대다수 시민들은 그녀를 가난한 사람, 노동자, 여성들의 천사로 회고하며 그녀의 요절을 애통해 했다.
GMO(유전자조작 생물체) 콩의 천국, “차코”의 눈물
그 유명한 뮤지컬이 브로드웨이를 눈물의 바다로 적시고 있을 무렵, 몬산토사를 비롯한 GMO/제초제 농약회사들이 개발한 항제초제, 항살충성 유전자변형(GMO) 콩 종자들과 고독성 농약들이 아르헨티나의 외진 산골 차코주(州)를 뒤덮기 시작했다. 일시적인 초기 증산효과와 인체 건강에 무해함을 역설하는 정부 농림당국의 적극적인 권유를 따랐음은 물론이다. 마침내 차코주는 GMO콩 재배 천국이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지금 세계 3대 GMO 콩 수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아르헨티나의 연간 수출액의 50%가 GMO 콩이 차지할 만큼, 일견 GMO 콩 재배는 아르헨티나의 효자산업이 되었고 그 가운데 차코주는 GMO의 메카로 축복받는 성지로 우뚝 떠올랐다.
차코에 GMO 콩이 도입된지 20년이 지난 9월 20일 일요일 대한민국의 MBC 방송국은 황금시간대에 놀랍게도 “차코의 눈물”편을 르포(현지보고) 형식으로 10여분간 방영하였다. AP 통신기자 나타샤 피사렌코가 맨 먼저 카메라를 들이 대었다. ‘아이샤 카노’라는 죽어가는 어린 소녀가 얼굴과 온 몸 곳곳에 검은 반점과 검은 털로 뒤덮여 눈망울만 원망하듯 빤히 올려다보는 장면이 자세히 클로즈업 되었다. 그리고 연달아 수많은 차코 지방 어린이들과 주민들이 뇌성마비, 종양, 암 등 신체 곳곳에 중증장애와 각종 이상(異常) 질병으로 스러져 가는 장면들이 소개되었다. 특히 신생아의 30%가 기형아로 태어나 죽었고 차코 일대의 가축 떼들이 이상질병으로 죽어갔다. 무시무시한 ‘지옥도’와 같은 풍경들이 차코 지방에 펼쳐지고 있었다. 세계적인 CNN과 BBC 방송국들이 일찍이 현장르포로 방영한 내용이었다. 흥분한 주민들은 지방 농정 주무당국자를 찾아가 항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신임 책임자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며 아르헨티나 수출의 주종인 GMO 콩 재배를 중단할 권한이 없음을 되려 설득하려 든다. 어디서 이미 많이 보고 들은 장면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의 안드레스 카타스 교수는 CNN, BBC 방송 등과의 인터뷰에서 이 모든 “차코 지방의 참상은 몬산토사의 라운드업 레디(RR) 콩 GMO종자를 심으면서부터 해마다 제초제⦁농약에 내성이 강화된 수퍼잡초와 수퍼곤충들이 생겨나 이를 제압하려 더 쎄고 더 많은 제초제와 살충제 농약을 살포하는 과정에서 땅이 오염되고 강과 들이 오염돼 모든 생물체와 인간의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진단한다.
사실 프랑스 등 많은 다른 나라들이 일찍이 여러 독립적인 동물실험 연구에서 이미 보고했던 현상이 실제 일어난 것이다. 인간과 유전자조직이 유사한 쥐나 돼지 등에 2년 이상 GMO 사료를 급여하는 실험을 한 다음 관찰한 결과에 의하면 GMO와 그 필수 동반자 글리포세이트 성분의 제초제 또는 니노익 성분의 제초제는 실험 포유류 동물들에게 종양, 유방암, 불임증, 난임증, 자폐증까지 일으킨다고 증거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이 세상에서 벌들이 사라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차코의 경우는 실험용 쥐 대신에 실제 주민들과 가축들이 피해를 입은 것이다. 아르헨티나 당국은 GMO 개발사의 이윤과 국가 수출 이익만을 위해 GMO 콩 재배를 처음 도입한 1996년에는 약 2만여톤의 라운드업 제초제(세계보건기구 WHO는 올해 3월 공식으로 그 주성분인 글리포세이트를 발암성 농약으로 규정하였다.)를 사용했으나 2008년엔 그 10배나 되는 23만톤을 뿌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 업보가 다름아닌 바로 “차코 지방의 눈물”인 것이다. 에비타가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가련한 백성들의 앞날을 위해 울어 달라고 노래한 뜻이 바로 이것이 아니던가.
한국 농업의 막장: GMO 쌀, 고추, 잔디 등의 상용화 시도?
MBC의 아르헨티나 GMO 콩 농사의 비극적인 참상이 보도되기 10여일전 지난 9월8일 대한민국 농림축산식품부 농촌진흥청 박수철 GMO개발사업단장은 서울의 한 공개 세미나에서 “올해 안에 GMO 벼(쌀)에 대한 안전성 심사를 신청할 계획”임을 밝혔다(2015. 9.14, 농민신문). 다만 아직 GMO 작물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식인 쌀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가 민감한 것을 고려하여 일단은 밥쌀용이 아닌 산업용 쌀로 안전성 심사를 받을 계획이다. 일단 화장품 원료(미백 기능성 원료)로 GMO 쌀 재배 허가를 2016년 7월경 먼저 받고, 수요와 소비의 확대추이를 봐가며 국민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기다린 다음 “밥상용 GMO 쌀”의 본격적인 상용화 계획을 착수할 것이라고 전략까지 공공연히 밝힌 것이다.
GMO 단장이라는 고위 농업관료가 감히 윗 인사 및 결재 라인의 허락과 강력한 뒷받침이 없이는 이러한 경천동지할 정책을 공공연히 세상에 밝힐 수 없다고 볼 때, 이번 발표는 모르긴 해도 대한민국 최고 농정수반 아니면 그 윗선의 분까지 보고되어 승인 받았을 개연성이 크다. 그래서 GMO 사업단은 산업용 GMO 쌀에 이어 GMO 잔디 개발과 바이러스 저항성 GMO 고추에 대해서도 곧 안전성 심사를 청구하고 가뭄 저항성 벼(식용쌀?)를 비롯해 그간 농촌진흥청 농업과학원 GMO개발사업단이 이미 개발해 놓은 200여가지 GMO 작물 다수를 물실호기(勿失好機), 안전성 심사 대열에 합류시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대충 270여일 간의 심사기간만 지나면 상용재배가 허가된다.
그리하여 내년부터는 우리나라에도 GMO 쌀과 고추, 잔디 등등이 곧 상용화(재배)될 전망이다. 1998년 이래 농림부와 농진청의 불문율로 지켜져 왔던 전국 소비자단체와 생산자단체들의 사전 동의절차도 거치지 않고, 묻지마 실용화(전국 재배) 일변도로 치닫고 있다. 그 안전성 심사절차와 과정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전혀 신뢰성이 없다. 사전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실험연구가 없이 오로지 서류심사 즉 말 뿐인 심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 알다시피 그 안전성 심사위원들이란 분들이 다 그렇고 그런 분들이 뽑힐 것이다. 널리 알려진 GMO/농약/식품회사 장학생일지라도 “묻지마라. 갑자생이다.” 270일이라는 심사기일이 아까울 만큼 그들 대부분은 이미 친 바이오 유전자 변형 찬성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심지어 일부학자는 “농약은 과학이다.” “GMO 농산물 없인 77조원의 식품산업은 없다.”라고 평소 공공연하게 농약산업, 식품산업 찬미의 노래를 부르던 분들일게 뻔하다.
그리하여 식량 자급률 23%대인 우리나라에서 이젠 국산 GMO 농산물마저 출현하면 그렇지 않아도, 생산비와 가격면에서 경쟁력이 없는 우리 농업은 안전성면에서의 차별성마저 사라져 박근혜 정부들어 완전히 개방된 국제 쌀시장에서 경쟁력이 거의 없어진다. 게다가 농촌 산내들의 환경생태계가 오염, 파괴되면 아르헨티나 “차코州의 눈물”과 같은 비극적인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가뜩이나 WTO/FTA 공세 앞에 풍전등화격인 우리나라 농업 농촌 농민들에게 이같이 막장을 고할 GMO농업이 하필이면 농업 농촌 진흥을 담당하는 농촌진흥청 농업과학원에 의해 앞장을 섰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아이러니가 아니다.
내년부터 봄과 여름이 오면 GMO 쌀, 고추, 잔디의 화분이 바람에 흩날려 산내들과 논밭이 유난히 좁고 밀집된 대한민국 농토를 순식간에 GMO 천국으로 바꿔 놓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보통의 농민들은 캐나다의 카놀라 농민처럼, 자기는 GMO 종자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난데없이 GMO 보급사로부터 무허가 GMO 재배를 했다고 억울하게 특허법 위반으로 고소당해 막대한 벌금을 배상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국제적으로 가격경쟁력이 낮은 우리나라 농업은 유일한 차별점인 안전성과 환경생태계 건전성 면에서 마저 더 이상 국산이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 자명하다.
막상 GMO로 죽어갈 사람은 애궂은 농민 농촌 농업이며 소비자 국민들이다. “한국농업의 막장”이나 다름없는 GMO농업의 보급으로 이익을 보는 측은 외국사례로 볼 때, 초국경 다국적 제초제 및 농약회사와 GMO 종자회사, 대규모 식품가공업체, 그리고 그들에 빌붙어 떡고물을 즐기는 정치권, 농정관료, 언론사 그리고 나팔수 장학생 교수, 학자들뿐이다.
한 가닥 희미한 불 빛, 착한 농부 소비자 선구자들의 자구책
90년대부터 우리밀 우리콩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을 벌였던 시민, 종교계, 소비자, 농민들과 복음을 농촌에 외로이 전파해온 성직자들이 누가 묻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자구책을 들고 나왔다. 정부, 국회가 아니하면 우리라도 우리 농산물을 Non-GMO(GMO 아님)라는 선언을 하는 식품표시제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아이쿱, 한 살림, 두레 생협 등도 모든 자가식품과 가공식품에 Non-GMO(비 GMO) 표시를 하겠다고 결의하고 나섰다. 카농, 전농 등 농민단체들도 하나둘 이들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우리 농산물의 생명체 유전형질(DNA Gene)을 절대 조작하지 않겠다는 움직임이다. 소시모, 경실련 등 소비자단체들은 이미 식품완전표시제 운동을 시작한지 오래되었다.
성경의 창세기에 창조주가 사람과 모든 동물을 창조한 다음, 에덴동산에 나시어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운 농산물을 가리키며 이를 먹고 자손을 번성케 하라는 뜻대로 농산물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생산하고 가꾸겠다는 사람들이 숱하게 늘고 있다. 특이한 사항은 이들이 장차 현 정부의 GMO 상용화사업단장을 포함 지휘체계상 결재라인에 있는 윗선의 책임부서장들에게 미리 닥쳐올 피해와 재해에 대해 항구적인 연대책임과 구상권을 청구할 것이라고 법적 대응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동필 장관이 장차 GMO 폐해를 책임져야 할 날이 결코 일어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편집자 주> 한국은 아시아에 속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슈는 곧 아시아의 이슈이고 아시아의 이슈는 곧 한국의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멀게 느껴집니다. 매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아시아에 속한 한 국가로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7년부터 <프레시안>과 함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권, 민주주의, 개발과 관련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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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쯔위 사건', 돈벌이에만 혈안인 K-팝에 '경종' (01/27) / 나현필 국제민주연대 사무차장
* 지난 아시아생각 칼럼 보러가기
[언론기획] 아시아 생각 칼럼연재 (2013~2015) >> 바로가기
이날 정세균.이개호 국회의원, 조계사 지현 스님, 백양사 주지 광전 스님, 유두석 장성군수, 서울경기지역 신도... 조계사는 근대 한국 불교 최초의 포교당이며 일제하 4대문 안에 만들어진 최초의 사찰로 서울 종로구에 있다.
북한의 핵 위협, 일본의 재무장과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 중국의 군사력 확충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가들의 군비 경쟁과 군사적 긴장은 점점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 불안하고 위험한 악순환의 고리를 언제까지 그냥 두어야 할까요? <프레시안>과 <참여연대>는 악순환의 출발점인 정전체제의 한계를 진단하고, 한반도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안녕과 평화를 보장하는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이제는 평화'를 연재를 진행합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진을 통해 현안에 대한 분석과 대안, 국방·외교 분야를 바라보는 평화적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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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한반도에 전쟁의 포연이 가득하다. 그간 한미연합훈련이 일상적인 방어훈련이라고 주장하던 한미 양국은 최강의 핵병기를 앞세운 평양진격작전과 김정은 참수작전 추진을 숨기지 않고 있다. 북한 역시 자신들의 핵무기는 남조선을 향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던 일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핵무기 실전 배치를 앞세운 선제 '서울해방작전' 추진을 공공연하게 밝힌다.
이 심각한 일촉즉발의 상황은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가 몰고 온 급속한 소용돌이의 결과라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다. 그러나 모든 세상사가 그렇듯 현재의 고통과 위기는 누적된 작은 고통과 위기의 축적물이다. 오랜 누적이 있으면, 그 위에 작은 바늘 하나만 더 얹어져도 물에 가라앉는 법이다.
되돌아보면 2014년 11월, 북한이 "한미연합훈련 잠정 중단과 북한 핵실험 중지"를 제안하면서 이것이 되면 "올해 안에 한반도에서 많은 일을 해결하는 게 가능하다"고 각별히 의미를 부여했지만 미국은 이를 묵살해버렸다. 올해 1월에는 미국이 북한의 평화협정 논의 제안에 응하면서 비핵화 논의를 함께할 것을 제안했으나 북한이 이를 거부했다는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가 있었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작년의 8.25 남북합의는 누적된 불신의 일시적 봉합이었을 뿐이고, 이후의 남북관계는 '대결의 흉심을 감춘' 사실상의 대화 공세만 있었다.
핵 대 핵, 선제타격 대 선제타격의 구조
좀 더 시야를 넓히면, 한반도의 현 위기가 일시적이 아니라 매우 구조적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오바마 대통령의 '핵 없는 세계' 비전 선언 이후 미국의 전략은 초기에는 재래식 전력 우위와 선제 핵 불사용 원칙(no first use)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나, 핵 모호성을 거쳐 점차 핵 전진 배치 및 선제공격에 방점을 두는 '정밀비례대응전략'(measured response strategy)으로 이동해왔다. 이는 재래식 전력의 우위 태세를 유지하면서도 잠재적 적국이 핵 문턱을 넘을 경우 이들에 대해 동종, 동질의 비례적인 핵 대응으로 타격하겠다는 적극적 선제전략이다.
이러한 미국 핵전략의 변화가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의 일련의 공세적 '확장억지' 강화 방침 결정과 핵 선제타격을 포함하는 작전계획 5015 수립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진행되는 한미의 군사적 대응, 특히 올해 한미연합훈련의 내용은 각종 전략 핵무기를 총동원하여 미국의 정밀비례대응전략을 과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현재의 한반도 군사위기는 북한 4차 핵실험으로 인한 일시적 정세의 격화가 아니라 미국의 군사전략, 특히 핵전략의 변화와 함께 상당 기간 내연(內燃)되어온 것이다. 또한 앞으로도 한반도의 군사 정세는 미국의 핵전략과 그에 대응하는 북한의 전략이 충돌하는 구조적 위기, 즉 핵 대 핵, 선제타격 대 선제타격이 맞서는 강 대 강의 대립구도 하에 있게 될 것이다.

▲ 북한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은 15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탄도로켓 전투부(미사일 탄두 부분) 첨두의 대기권 재진입환경 모의시험을
지도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협상'에 대한 이중적 레토릭들
이러한 강 대 강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레토릭' 차원에서는, 그리고 제재 국면 이후를 고려하여 국제사회는 대화와 협상에 대한 논의도 진행하고 있다. 물론 대북협상 무용론이나 북한붕괴론, 통일론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현 제재 국면 이후 곧바로 대화나 협상 국면으로 이동하는 것은 '도발-보상'의 악순환을 방치하는 것이라고 강력히 반발할 것이다. 이들은 북한과의 협상 자체가 보상이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현재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강경론에 깊이 긴박 되어 있고, 사실상 제재라기보다 북한 붕괴를 염두에 둔 전면봉쇄를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 대북제재결의 2270호에는 대북 제재만이 아니라 대화 권고, 9.19 공동성명에 대한 지지와 6자회담 재개를 촉구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6자회담에 북한을 끌어내기 위해 미국 주도의 제재안을 수용하겠다는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이 크게 반영된 항목으로 보인다. 미국 역시 '제재가 대화유도 수단'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는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재 국면 이후 '곧바로' 대화나 협상 국면이 전개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대화와 협상이 실제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지는 여전히 속단하기 어려워 보인다. 현재 진행 중인 강 대 강의 한반도 대결위기 해소 혹은 궁극적인 협상의 종착점 제시와 관련하여, 국제사회의 시선을 끈 주장은 지난 2월 17일 중국이 제안한 이른바 '비핵화와 평화협정 병행추진론'일 것이다. 중국만이 아니라 러시아도 "합리적이며 객관적이고 공정한, 6자가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최대 공약수"라고 인정한 이 병행추진론에 대해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부정적이지만, 실제로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 10일 한미 양국은 "북한과 앞으로 어떤 대화를 하더라도 비핵화가 최우선"이며 "지금은 대화를 거론할 시기가 아니다"라고, 공식적으로는 중국의 병행추진론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비핵화 우선이라는 공식 입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문가는 미국 내 대북협상 기류가 바뀔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즉 미국이 선 비핵화에서 '비핵화-평화협정' 병행 논의 수용으로 점차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대북제재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인 지난 3일, 미 국무부는 중국이 제안한 '비핵화-평화협정' 병행 논의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 북·미 사이에 '비핵화 문제를 포함하는 평화협정 논의'가 시도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도 이런 변화의 기류를 강조하면서 박근혜 정부의 대북강경론이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미중의 협상을 발목 잡고 있다거나, 혹은 한반도 문제가 미중의 협상 테이블에서만 다뤄지고 한국은 소외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혹자는 휴전에 반대하여 이승만 정부가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 한국의 입장을 두고두고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것처럼, 박근혜 정부도 그런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점점 높아지는 협상의 '문턱'
그러나 박근혜 정부 고립을 '지금부터' 우려해야 할 정도로 한반도 문제의 협상 테이블이 순순히 진전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우선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오바마 정부가 그나마 북한 문제에 집중할 시간이 별로 없고, 또 비핵화-평화협정 동시해결 협상의 수용 여부도 아직은 불확실한 미지수의 영역이다.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이고 모호한 언술은 여전히 '비핵화 협상의 진전을 전제로 한다면 평화협정 협상을 검토할 용의가 있다'는 정도의 스탠스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설사 미국이 비핵화-평화협정 병행추진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하더라도 협상의 급진전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미국만이 아니라 북한 역시 협상의 목표를 계속 업그레이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 체제 들어 북한의 대미협상 전략과 태도에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한 가지 특징은 북한의 핵 보유를 전제로 하는 질서재편이 아니면, 북한으로서는 적극적인 협상에 나설 이유가 없다는 태도다. 이는 평화협정 협상을 진전시키면 그 밖의 문제, 즉 핵 문제를 포함한 쌍방의 안보 우려에 대해 협상할 수 있다는 '선 평화협정' 추진 주장으로 나타난다. 최근 북·미 협의 과정에서 미국이 비핵화 문제를 제기했을 때 북한이 거부했기 때문에 협상이 진전되지 않았다는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는 대화 회피에 대한 미국의 변명을 옹호하는 기사로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변화된 협상 태도를 그대로 전하는 측면도 있다.
북한으로서는 '불멸의 핵 강국 건설'을 포기하는 대가로 평화협정이라는 종잇조각을 얻기보다는,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등 동아시아의 미국 핵 및 군사력 배치 전반의 변경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엔 한반도 문제는 미중 간의 협상이 아니라 북한이 추구하는 질서변화를 의제로 북한과 협상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또한 북한과 협상하려면 대북 적대정책의 상징인 한미연합훈련을 중지하라는 요구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협상의 문턱을 높임으로써 협상 전에 먼저 상대의 협상 의지, 즉 적대시 정책의 철회 의사를 증명해 보이라는 뜻이다.
그에 따라 북한의 협상 태도도 변화되고 있다. 김정일 시대의 북한 협상 전략은 '단계적 비핵화와 경제‧평화 보장'을 교환하는 틀 속에서 핵 실험을 단기적 협상과 분리하지 않았으나,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서는 살라미식의 협상보다는 핵 억지력의 확보 이후 그것을 토대로 동아시아 질서의 근본적 재편을 추구하는 일괄 협상 전략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미국의 '전략적 인내'만이 아니라 북한의 새로운 협상 전략과 태도도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협상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인 중 하나이다. 결국 중국이 제기한 '비핵화-평화협정 병행추진'은 중국 스스로 자평하듯 '가장 합리적이고 공정한' 방안이지만, 미국의 이중성과 모호한 태도, 박근혜 정부의 철없는 강경함, 그리고 북한의 협상 문턱 높이기 등으로 그 출발부터 험로가 예상된다.
한반도 평화 위기는 강 대 강의 군사위기만이 아니라 협상의 문과 문턱이 점점 좁아지고 높아지는 협상 장애의 심화와 함께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군사 위기와 협상의 위기가 중첩되면서 위기가 가중되는 한반도 평화 위기의 구조는 평화문제가 국가주의의 틀 속에서 교착되고 있는 가장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평화 위기의 구조는 평화문제가 정부 주도에만 맡겨져서는 절대 해결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특히 평화를 지향하는 국정운영체제로 전환시키지 않는 한, 평화 위기는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국가주의로부터 자유로운 한국과 동아시아의 시민사회가 평화를 위한 행동에 '지금 바로' 나서야 하는 절박한 이유이다.
북한의 핵 위협, 일본의 재무장과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 중국의 군사력 확충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가들의 군비 경쟁과 군사적 긴장은 점점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 불안하고 위험한 악순환의 고리를 언제까지 그냥 두어야 할까요? <프레시안>과 <참여연대>는 악순환의 출발점인 정전체제의 한계를 진단하고, 한반도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안녕과 평화를 보장하는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이제는 평화'를 연재를 진행합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진을 통해 현안에 대한 분석과 대안, 국방·외교 분야를 바라보는 평화적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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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 공익법센터 어필 상근변호사
탈북자 신상 공개를 감행하는 세계관
총선을 닷새 앞둔 지난 4월 8일, 통일부는 '집단 탈북 관련 브리핑'을 통해 "북한이 해외 식당에 파견하여 근무 중이던 남자 지배인 1명과 여자 종업원 12명이 4월 7일 서울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그들의 탈북 동기와 마스크 착용 전신 사진도 앞장서서 공개했다.
이 브리핑은 내용과 시점 양면에서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제재가 성공적으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음을 선전하는 북풍 몰이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총체적인 숙고가 부재했던 이 브리핑은 총선 결과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오히려 현재까지도 풀기 어려운 문제만을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정략적 행위의 타당성이나 목적의 탈법성 자체보다, 한국에서 난민을 옹호하는 활동가들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난민의 생명을 담보로 정무적 이익을 얻으려는 시도를 감행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그들의 세계관 자체다.
난민의 신상은 왜 보호되어야 하는가
탈북자들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국민이다. 하지만 제3국에서는 난민협약 등 국제법에 따라 명확히 '난민(Refugee)'에 해당하며, 난민협약은 난민에 관한 신상 정보는 물론이고 난민이 특정 국가에 비호 신청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공개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이에 적용을 받진 않지만, 한국의 난민법 역시 제17조 제1항에서 본인의 동의 없이 난민 신청자를 특정할 수 있는 인적 사항과 사진 등의 공개 금지, 정보 공개 및 누설 금지 규정과 벌칙 규정을 두고 있다.
왜 이렇게 난민의 신상 정보를 보호해야 하는가? 국적 국가로부터 박해를 피해 제3국에 난민 신청을 했다는 정보는 난민인 탈북자들에게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당사자를 특정할 수 있는 정보가 누설되어 본국 정부가 이를 알게 될 경우, 본국에 있는 가족 및 기타 관련자들에게 조사, 처벌 등 박해가 가해질 것이 명백하다.
과연 대한민국 정부는 이 브리핑에 대해 그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동의를 거쳤는가? 브리핑이 난민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에게 끼칠 무서운 결과에 대해 과연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난민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이뤄진 이 브리핑은 과연 한국 정부에게 난민이란 누구인가를 질문케 한다.
한국 정부에게 난민은 누구인가
한국 정부에게 난민은 구체적 인간이 아니라 정책적 재료다. 우선 난민은 '인권 선진국'이라는 허구적 이미지의 대외 선전 수단이다. 아시아에서 사실상 최초의 난민법 입법 및 시행, 유엔난민기구 집행이사회 의장국 역임, 시리아 난민에 대한 인도적 체류허가 등은 국제사회에 반복적으로 선전된다.
1994년부터 2015년까지 21년 동안 1만5250명이 난민 신청을 했고, 그중 576명이 난민 인정을 받았으며, 910명이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았다. 21년간 신청자 중 평균 3.78%만이 난민 인정을 받아 한국에서 살 수 있었고 나머지는 미등록 체류자로 살거나 추방되어야 했다는 사실은 대외적 선전 뒤로 숨겨진다.
한국 정부에 난민은 사실 거의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비호를 구하는 대부분의 난민 신청자들은 난민 제도를 남용해서 한국 체류를 꾀하는 허위 신청자들로 여겨질 뿐이고, 난민 제도는 강력한 국경 관리와 체류자 관리를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또한 한국 정부에게 난민은 정책적 필요에 따라 활용되는 얼굴과 목소리가 없는 '타자'다. 난민 문제에 더해 남북 관계의 모순까지 함께 투영된 존재인 탈북자는 이번 사건에서처럼 체제 우위성의 선전도구로 활용되거나, 분단 체제를 항구화할 담론을 간접적으로 유포할 도구로 활용된다.
심지어 난민들은 한국 사회에 안보 불안을 가져오는 잠재적인 대상으로까지 이해된다. 작년 말 시리아 난민에 대한 국정원장의 느닷없는 현안 보고는 난민과 테러를 연계시켜 소위 '종북 세력'과 구별된 새로운 안보 불안의 주체로 난민을 활용하려는 시도였다.
예일 대학교 정치학 교수인 제임스 스콧은 저서 <국가처럼 보기(Seeing Like a State)>에서 국가가 공간과 사람을 읽기 쉽게 치환해가는 속성을 '가독성과 단순화'라는 키워드로 분석한다.
한국 정부에게도 난민은 통계로 읽히는 체류 외국인 중 일부, 지방자치단체 시설 보수 예산에도 못 미치는 연 17억 가량 예산의 집행 용처, 극히 적은 숫자로 존재하는 무명의 체류 관리 대상일 뿐이지 구체적 인간이 아니다. 과연 대한민국 정부에게 피와 살, 존엄한 영혼을 가진 난민의 인간성은 어디에 있는가.
난민과 국가의 보호, 평화
박해를 피해온 난민은 우리에게 국가의 보호를 되묻는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비극적 사건 속에서 우리는 '국가가 과연 인간을 보호하는가'에서부터 '오히려 국가가 인간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질문을 곱씹어왔다.
난민 역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국가와 그에 준하는 집단으로부터의 박해를 피해온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국도, 그리고 한국도 그들을 선뜻 보호하지 않는 경계 속에서 자신의 몸뚱어리에만 의지하고 있을 뿐이다.
난민의 존재는 평화의 소중함을 되묻는다. 국가와 그에 준하는 집단들의 폭력적 박해를 피해온 그들은 언어, 문화, 역사적 경험이 모두 다른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로서 또 다른 비평화를 경험한다. 평화를 찾아온 난민들이 경험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에게마저도 가혹한 '헬조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영상 메시지를 통해 "전쟁의 처절함을 체험한 난민들은 어떻게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난민의 존재는 우리가 모두 지구에 온 외부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한다"고 심오한 통찰을 줬다.
우리는 우리가 국가의 경계를 초월한 코스모폴리탄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역시 어디에선가 이방인이며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에 난민들 곁에 선다. 한국 정부가 그들을 얼굴도 목소리도 없는 존재로 치환하여 정책적 재료로 활용하고 있을 때, 국가의 의무를 요구하고 평화를 희망하는 우리는 어떻게 그들 곁에 서고 연대할 것인가.
조강희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인천시가 최근 ’2020 미세먼지 저감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러한 대응은 미세먼지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높아지고 환경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지자체 차원에서 매우 시급하고 적절하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기존대책을 재탕했다. 이런 대책으로 과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첫째, 기존대책에 대한 울겨먹기로 크게 새로운 것이 없다. 인천시는 발전산업부문, 수송부문, 생활주변부문, 미세먼지측정부문 등으로 나눠서 미세먼지 대책을 발표했지만, 이는 지난 2013년 발표한 기존 2차 수도권대기환경관리기본계획(2015~2024)에 대부분 제시됐던 내용들이다.
그나마 기존과 다른 추가된 내용은 관련 예산을 1161억원을 늘려 4486억원의 재원을 투입하겠다는 것과 이를 위해 관련 전담팀을 신설한다는 것인데, 이 또한 재정마련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다. 인천 스스로 미세먼지 원인 영향조사도 추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둘째, 국가기반시설 배출원에 대한 대책이 없다. 인천의 미세먼지 주요 원인은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9개 발전사와 정유사, 인천국제공항, 인천항, 매립지공사 등 국가 주요 대기오염물질 배출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각 기관에서 제시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기존에 맺은 블루스카이 협약 등 강제성이 없는 자발적인 감축을 유도하고 모니터링 하겠다는 것 이외에 새로운 대안이 없다.
알다시피 인천지역 미세먼지 전체 배출량 가운데 항공기와 선박 등 비도로오염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32.8%로 가장 높고, 발전소 등에서 나오는 미세먼지로 인한 2차 오염은 그 측정도 안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천시가 국가기관을 규제할 현행법령이 없다는 핑계로 그들의 자율적 조치에 의존하는 것은 인천시민의 입장에서 동의할 수 없다. 인천 시민의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면 이들 기관의 폐쇄까지 고려할 수 있는 강력한 규제장치와 관련 조례 등을 제정해야 한다.
셋째, 인천시가 주도하는 미세먼지 원인조사가 추진돼야 한다. 관리대책에 앞서 기초가 돼야 할 미세먼지 발생원인과 이에 따른 영향조사 데이터가 너무 부실하다. 그나마 거의 대부분 국립환경과학원 등 중앙정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300만 인구의 전국 3대 도시 인천의 현실이다. 이렇다보니 인천의 주요 대기오염원인 항만, 공항, 발전소, 정유소 등이 인천 대기환경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연구가 절실한 상황이다.
하지만 인천 대기환경에 대한 조사연구는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고 있고, 이를 근거로 중앙정부에 대기환경 개선에 필요한 재원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조차 없다. 결과적으로 그동안 인천시 대기환경 관리대책은 대부분 노후 경유차 배출저감 사업 등 국비 보조사업을 시행하는 수준에 그치는 등 자기 목소리를 못내고 있는 형편이다.
넷째, 미세먼지 관리 목표를 더 낮추어야 한다. 이번 인천시는 2020년까지 미세먼지 PM10농도를 40㎍/㎥으로 낮추겠다는 것인데 이러한 수치는 인천시민들의 건강을 더 이상 책임질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외국도시의 경우 보더라도 2014년 현재, 일본 도교는 21㎍/㎥, 영국 런던은 18㎍/㎥, 프랑스 파리는 26㎍/㎥를 유지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인천의 도시 미세먼지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가까운 서울의 경우도 2024년까지 PM10농도를 30㎍/㎥로 낮추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인천시민의 대토론회를 통해서라도 건강을 위해 미세먼지 관리 목표를 더 낮추는 목표가 다시 제시돼야 한다.
최근 환경부의 미세먼지에 대한 미숙한 대응과 무책임한 대책은 과연 환경부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번 인천시 미세먼지 대책은 시민의 건강을 고려하지 못한 너무 안이한 대책이다. 기존 정책을 우려먹거나 일부 보완하거나 수정한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지난 1990년대 말 인천시가 추진했던 ‘먼지와의 전쟁’ 구호가 다시 필요하다. 2016년 지금 인천시는 ’2차 먼지와의 전쟁’을 대대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2016년 7월 8일 인천일보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주은선 l 경기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가끔씩이나마 리우 올림픽 중계나 기사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낯선 종목들에서도, 또 한국선수가 출전하지 않는 종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세계적인 선수들의 기량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선수들의 태도이다. 워낙 하나하나 어려운 종목들이고 대단한 명예가 걸린만큼 긴장을 유발하는 장이기 때문인지 실수도 흔하게 볼 수 있으며, 불운의 장면들도 행운의 장면들만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런 장면들에서 선수들이 특히 실수, 불운, 패배를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는지를 관찰하면, 많은 경우 악재를 돌파하기 위한 상당한 의지와 침착함, 그리고 의연함을 발견하게 된다. 중간에 넘어진 선수가 다시 일어나 장거리 달리기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고, 더욱 흔히는 실수 직후 바로 자신의 경기에 끝까지 임하여 평범한 순위에 머문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올림픽 3연패를 꿈꾸던 선수가 4위에 머물렀지만 금메달을 딴 팀후배를 따뜻하게 축하해주는 장면이나, 마지막 연장전에서 불과 1점 차 패배를 당한 후에도 상대방의 선전에 박수를 보내는 장면 역시 기억에 남는다. 개인의 긍지와 자존심은 성과가 아닌 태도를 통해서도 표현된다. 또한 남한과 북한의 체조선수들이 보인 친밀함뿐만 아니라 국적, 종교, 인종 차이와 무관하게 서로에 대한 존중과 격려의 모습은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이는 많은 선수들이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인간으로서 자존심과 긍지를 지키는 것, 그리고 우애에 상당한 가치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아하기까지 한 이러한 태도들을 계속 지켜보다 보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이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같은 인간으로서 꽤 괜찮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조차 든다. 타인의 긍지와 명예를 개의치 않는 공격과 혐오 발언들이 난무하던 우리 사회가 잠시 단절의 시간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일단은 필자에게는 다행이다. 게다가 우리 인간이 자존심과 명예, 다양한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우애를 추구하는 보편성을 가진 존재임을 다시금 기억하게 된다. 돈과 도박, 국가주의 등 많은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은 자긍심과 우애라는 보편적 가치를 상기시키는 계기였다.
그런데 요즈음에 보인 우리 정부의 태도는 인간의 자긍심과 명예에 대한 태도라는 면에서 올림픽이 보여 준 아름다움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피해를 입은 자가 그 이유와 진실을 명명백백히 알게 되고, 정당한 사과를 받는 것은 개인적, 역사적 치유의 과정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일본 정부와의 합의, 특히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 지급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보다는 정부 입장에서 일단 사안을 종결하는 데 무게를 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희생당한 개인들이 진짜 사과를 받고 용서를 베풀며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제거해 버린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와의 협상을 미루며 책임을 피해왔던 것을 고려하더라도 피해 당사자에 대한 사과가 먼저 이뤄졌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월호 특위 활동을 서둘러 마무리지어버린 정부 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정당한 근거 없이 서둘러 마무리지어버린 것 역시 진실과 책임의 명확화를 통한 치유와 회복을 막아버린다는 점에서, 또한 결국 부실한 보상으로 사안을 종결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유족 개인들의 명예나 자긍심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드 배치 결정에서도, 백남기 농민 사건 이후의 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부가 이렇게 개인의 자존심과 명예에 무심한 것은 국가는 개인이란 존재 위에 군림한다는 오래된 착각 때문인 것인지...
이러한 국가의 태도는 복지에 관해서도 여전하다. 개인의 자존심과 명예는 피해 배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국가가 공공복지를 제공하는 과정에서도 지켜져야 한다. 특히 자본주의 시장에서 끊임없이 상품가치로 판단당하고 밀려나는 시민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존중과 타인들과의 우애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부정수급 단속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말하며, 새로 시작된 청년수당 수급자들의 취업준비 여부는 불확실하므로 이는 세금낭비라고 말한다. 마치 얼마나 이들의 취업노력을 잘 감시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인 것처럼. 정부에게 복지는 그저 돈의 문제이거나 정쟁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기획재정부가 제안하는 재정건전화법 역시 복지를 무엇보다도 돈의 문제로 바라보고 복지정책들의 발전을 제로섬 게임으로 만들려 한다는 점에서 이런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의 복지에 대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방향이다. 어떤 복지제도를 어떻게 설계하여 실시하느냐는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 것이며, 우리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기본소득론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이유는 방향, 즉 철학에 대한 갈망 때문일 것이다.
정부가 올림픽에서 끌어내는 교훈은 개인에게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공동체에 헌신하도록 요구하는 것인 것 같다. 광복절 경축사가 그렇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올림픽은 우리가 다시 타인에 대한 혐오보다는 우애를, 그리고 명예와 자긍심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으로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갖는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사실 인간이 이기적이며 이익에 집착하는 존재인지, 명예와 우애를 추구하는 존재인지는 알 수 없다. 정해진 것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국가가 정치사회적 사안을 다루고 공공복지를 운영하는 기본 방침이 서로 감시하거나, 혐오하거나, 타인의 명예를 개의치 않는 행위를 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었으면 한다. 복지에 관해서도, 추구하는 우리의 삶과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도 더 깊이있는 모색이 필요하다.
지난 6월 공식 출범 이후 (사)다른백년은 논평 활동을 통해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정론 정립 △전문가 네트워크 구축 △정론의 유통과 확산 등을 목표로 많은 글을 공개해왔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공개된 글은 주간논평 15개, 금주의인물 25개, 그리고 백년칼럼 4명(이래경, 김동춘, 김상준, 이대근)이었습니다.

<주간논평>은 다음과 같이 해당 시기에 가장 핫한 이슈를 선정해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의 글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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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억 대구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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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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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언 전 KBS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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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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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희 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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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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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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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호 서원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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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환 미국 캔자스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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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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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선 연세대 연구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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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원 국민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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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호 프리랜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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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
<금주의 인물>은 매주 국내 인물과 해외 인물을 번갈아 가면서 소개했고, 화제의 인물을 통해 시대변화의 흐름을 읽고자 했습니다. 황경상 경향신문 기자, 이동현 한국일보 기자, 이승준 한겨레신문기자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돌아가며 매주 화제의 인물을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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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인물 |
해외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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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칼럼>은 이래경 칼럼, 김동춘 칼럼, 김상준 칼럼, 이대근 칼럼 등 (사)다른백년의 이사들이 정기적으로 기고했습니다.
2017년 새해가 시작됩니다. 새해에도 정론의 정립과 확산, 전문가 네트워크의 구축 등을 위해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이 글은 국제앰네스티의 공식 입장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며, 앰네스티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나의 생각.
국회에 걸린 <더러운 잠>이 여성비하적이라고 비판하고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인가? ( X )
국회에 걸린 <더러운 잠>을 자칭 ‘박사모’가 와서 물리적으로 훼손하고 뜯어낸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인가? ( O )
<더러운 잠>을 둘러싼 일련의 소란은 무척 혼란스럽다. 여성사회단체와 페미니스트를 필두로 한 사람들은 이것이 여성비하적이라고 한다. 예술계에서는 풍자이며 표현의 자유라고 한다. 야권 지지자들은 이것이 시국비판이며 소수자가 아닌 박근혜라는 최고권력자 비판이지 어떻게 여성비하냐고 한다. ‘박사모’는 그림을 물리적으로 뜯어내고 훼손했다. 그걸 본 어떤 야권 지지자들은 이것을 ‘여성혐오적이라고 하는 것은 박근혜를 두둔하는 것’이라고 하는 괴상한 결과에 도달한다. 한국 페미니즘의 적이라고 할만한 박근혜를 묘사한 것을 두고 “여성비하”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페미니스트는 ‘박사모’와 같은 취급을 받는 억울한 지경에 이르렀다. ‘일베’는 원래 이미지 합성을 통해 모독하는 것을 장기로 삼는 곳이니만큼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이를 놓칠리 없는 박근혜는 탄핵심판과 전혀 관련 없는 이 사안을 두고 끌어다가 ‘세월호 7시간 행적 의혹은 여성비하’라는 기적의 논리를 펼쳤다. 물론 야권 지지자이며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페미니스트인 남성인 나 같은 사람도 있다. 단체 안에서도 이것에 대한 시각은 개인마다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얘기할 수 있는 논점과 고려해야할 맥락은 너무 다양한데 사람들은 저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주장하고 있다. 정말 혼란스럽다.

표현의 자유는 여러 가지의 법리적 이론이 있으며, 이론마다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의 한계와 그 근거가 분분하다.1) 권리로서 표현의 자유의 출발은 국가가 개인의 사상과 표현을 이유로 탄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는 혐오표현 등은 명백히 제한해야 한다는 식으로 논의가 더 촘촘해지고, 확장되고 있다. (그래서 복잡해지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표현의 자유는 다른 자유권과 마찬가지로 신성 불가침의 권리가 아니며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사상을 어떠한 형태로 나타내거나 발표한다고 해서 공권력에 의해 억압 당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비평,비난 받지 않을 자유’나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자유’가 아닌 것이다. 다른 사람의 권리, 특히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표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는 마법의 언어처럼 오남용 되고 있다.2) 게으르고 저급한 예술적 성취나 타인을 모독하는 등의 저열한 의도로 제작한 창작물을 만들어놓고 “표현의 자유니까 존중해달라”고 말한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한계와 그것을 법적, 규범, 윤리적으로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 공유되는 사회적 합의선이 부재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으로 보인다. 표현의 자유가 다른 가치와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억지에 불과하다. 자유는 일반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향유되는 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타인의 주거에 무단침입해서 원래 살던 사람을 쫓아내는 것을 거주 이전의 자유라고 하지는 않는다. 길을 걸어다니며 아무 곳에나 침을 뱉고 담뱃재를 날리며 피해를 준 사람에게 지나가던 다른 행인이 항의했다고 해서 ‘이동의 자유’가 침해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러운 잠>에서 예술품에서 발견하길 기대되는 어떤 새로운 미학적인 쾌감이 있는가? 아니, 이 그림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그렇다면 풍자로서 대통령 박근혜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통찰이 있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박 대통령의 정치인으로서의 특징이나 그가 저지른 수많은 정치·사회적인 실패는 방기한 채 오로지 여성성만을 부각시키고 벌거벗겨 모욕하는 방식은 다분히 여성비하의 결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싸드와 세월호를 그려넣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에 적절한 방식이 아니며 그저 박근혜를 비난하기 위해 세월호를 가져다 썼다고 보여진다) 혹자는 <더러운 잠>이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박근혜를 풍자하고 있는데 이것이 왜 여성 전체에 대한 모독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 혹자는 높은 확률로 남성이다) 그러나 거기에 누드로 묘사된 것이 박근혜라고 해서 박근혜만 불쾌감을 느껴야한다는 주장은 인간의 인지능력에 대한 굉장히 빈곤한 이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전혀 모르는 여자의 외설적인 사진을 그저 보여주기만 해도 성희롱이 성립할 수 있다. 원치 않는 성적 당혹감과 모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미지가 메세지를 재현하고 생산해내는 방식에 기인하는 것이지, 거기에 그려진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 해서 희석될리 없다. 더군다나 일평생에 걸쳐 여성의 외모와 몸을 평가하고 대상화하는 이 사회, 이 문화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성이 아니면 이것이 모독인지 아닌지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뿐만 아니라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그 그림에서 성적 모욕감과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 불편함을 작품이 의도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 불편함을 비평하고 표현하는 것 또한 관람자의 것이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느껴지는 모욕감은 박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엉뚱하게도 박근혜 대통령과 전혀 관련 없는 다른 평범한 여성들과 문제 의식을 공유하는 시민들의 것이기도 하다. 선출 공무원, 정치인, 대통령으로서의 박근혜가 저지른 정치적 비위가 아닌 대통령의 성별에만 매달려 여성 박근혜를 공격한 결과는 결국 역설적으로 박근혜를 젠더 뒤에 숨게끔 만드는 역효과를 낳았기 때문에 결국 실패한 비판이 될 수 밖에 없다. 여성 일반을 모욕하려는 창작자의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은 그저 <더러운 잠>이 박근혜 혹은 정치를 비판하려는 방식이 게으르고 나태했다는 자기고백에 불과할 뿐이다.3) 같은 맥락에, 광화문 광장에서 “미친년”이라는 피켓을 보고 불쾌감을 느끼거나 “미스 박”을 호출하는 DJ DOC의 노래를 광장에서 듣길 원치 않았던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평소에 정치비판에는 전혀 무관심했던 힙합씬은 왜 갑자기 혁명가 흉내를 내는 것이고 그 가사는 왜 꼭 여성성 공격으로 귀결되는가)

젠더 권력은 여성의 몸을 볼거리로 전락시키고, 남성의 시선에 권력을 부여해왔다. ‘일베’나 ‘박사모’를 비롯한 박근혜의 지지자들이 ‘반격’을 하기 위해 이 전시의 당사자인 표창원 의원이나 이구영 작가를 모독하지 않고, 표 의원의 부인과 딸의 사진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공격했다는 점을 잘 생각해보면 이 작품에 왜 여성비하적이며 박근혜와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이 모욕감을 느끼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방증이 될 것이다. 심지어는 새누리당 여성의원들조차 “표창원 네 마누라를 벗겨주마”라는 여성비하와 성적 괴롭힘을 담은 피켓을 들어(음주운전을 비난하는 음주운전자 같다) 표 의원이 아닌 그의 부인을 타겟으로 모욕의 매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지난 몇 년간 “표현의 자유”를 엉뚱하게 갖다 쓰는 이들이 사회 공동체가 지켜야할 최소선을 위협하는 저열한 공격들을 봐왔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는 존엄에 대한 공격이었다. 진실규명을 위한 단식농성을 벌이는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앞에서 “폭식투쟁”을 했던 사람들은 어떤가? 평소에 광화문 광장에서 뭘 먹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들은 그 상황, 그 맥락에서 약자이고 피해 당사자인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굳이 거기서 피자를 ‘폭식’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것이 보호받아야 할 “표현의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 트럼프의 대두로 공공연하게 미국 사회에서 발화되는 무슬림, 성소수자,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위협과 비하처럼 타인을 공연히 공격하거나 사회가 공유해야 할 가치를 저해하는 표현도 보호받아야 하는가?
“표현의 자유”는 수준 낮은 창작물을 변명하는 방패가 아니며 ‘악’으로 상정되는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는 절대선은 더더욱 아니다. <더러운 잠> 전시로 비롯된 것과 같은 논란과 논쟁을 통해 “표현의 자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사회적 합의선을 찾아가는 것은 바람직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성별/나이/외모/신체/학력/지역/인종/성적지향/장애를 도구로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은 멈춰야 한다. 다른 누군가를 상처주는 방식이 아닌, 더 예리하고 더 세련된 비판과 풍자를 원한다. 지금은 2017년이고, 이제는 좀 그럴 때가 되었다.
꿀곰,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간사
1) 홍성수 숙대 법과대학 교수의 ‘표현의 자유와 인권’ 강좌를 정리한 포스팅에 표현의 자유에 대한 법학계의 몇 가지 이론과 국내와 미국의 9가지 판례 사례가 잘 정리되어 있다.
2) 정작 진짜 표현의 자유가 필요한 부분에서는 위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해야 하는 앰네스티의 웹사이트에 표현의 자유가 제한받을 수 있다고 쓰는 것이 조심스럽다. 다른 권리와 가치와 충돌하여 현저한 해악을 미치는 경우에 한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명확히 한다.
2-1) 정말 표현의 자유가 공격 받고 제한 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라고 본다.
시위를 취재했다는 이유로 고문하고 재판 없이 무기한 구금되어 있는 이집트의 사진기자 샤칸
가상의 왕국을 다룬 연극을 공연한 것이 ‘왕실모독죄’라며 징역형을 선고한 태국 정부
정부 비판적인 블로그를 운영했다는 이유로 벌금 약 10억, 채찍질 1000대,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라이프 바다위
트위터에 인권침해 우려를 표현했다는 이유로 투옥시키는 바레인 정부
정부 비판적인 방송 채널에 방송 금지 처분을 내린 파키스탄 정부
3) 2016년 5월에 홍대에 ‘일베’ 회원을 인증하는 손가락 조형물이 작품으로 등장해 당시에도 표현의 자유에 대해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일베’는 피해자인양 굴었다. 홍대 ‘일베 조형물’에 대한 내 생각은 일단 너무 게으르다는 것. 어떠한 해석이나 변형 없이 그 자리에 그저 재현하는 것이 예술로서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하물며 재현의 대상이 아름다운 것도, 소외된 것도 아닌 고작 일베 인증이라면.

<편집자 주> 한국은 아시아에 속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슈는 곧 아시아의 이슈이고 아시아의 이슈는 곧 한국의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멀게 느껴집니다. 매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아시아에 속한 한 국가로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7년부터 <프레시안>과 함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권, 민주주의, 개발과 관련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바로가기 http://www.pressian.com
1) 시리아 토마호크 공습, 짜고 친 힘자랑 (4/14) / 최재훈 경계를넘어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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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출구 추모 메시지 ⓒ비더슈탄트
최지은, 전 ize 기자
수천 개의 비명들이 포스트잇 위로 날리고 있었다. 1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에 대한 나의 기억은 매번 그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추모의 꽃다발과 “우리는 모두 우연히 살아남은 여성들입니다.“ 라는 외침 사이에서 누군가 물었다. “과연 남자여도 죽였을까.” 그렇지 않다. 2016년 5월 17일, 서초동의 한 상가 화장실에 숨어 있던 서른 세 살의 남성 김 모 씨는 여섯 명의 남성을 그냥 보낸 뒤 일곱 번째로 들어온 사람이자 첫 번째 여성을 흉기로 찔렀다. 그는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범행의 원인을 그가 앓았던 조현병에 돌렸다. 여성혐오 범죄를 근절해 달라는 외침이 높아졌지만 언론과 사회는 ‘묻지마 살인’이라는 말로 여성들의 절규를 적극 거부했다. 강남역의 포스트잇 사이에 붙어 있던 한 남성의 훈계처럼. “여자라서 죽은 게 아니고 운이 안 좋아 피해를 입은 겁니다. 남자들을 싸잡아 욕하는 행동은 여자들의 미개함을 스스로 드러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는 또 하나의 기억이 더해졌다. 어느 날 밤, 집 근처에 숨어 있던 남자가 나를 추행하고 도주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범인은 나와 일면식도 없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술에 취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먼저 지나간 한 명의 남성이나 두 명의 여성을 공격하지 않을 만큼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었다. 또한 주변에 행인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범행을 저질렀을 만큼 충분히 계획적이었다. 그가 나를 공격한 이유는 단지, 그 시각 그 장소에 혼자 있는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그 날 새벽 경찰서에서 진술조서를 쓰다가 문득,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그 여성이 떠올랐다. 아무런 경계 없이 들어선 일상적 공간에서 모르는 남자가 갑자기 자신을 공격했을 때, 그는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을까. 어쩌면 그 여성은 자신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을 지도 모른다. 범행은 순간이었다. 맥락도 전조도 없었다. 대비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만약 나를 추행한 범인이 흉기를 들고 있었다면, 지난 3월 LA 한인 타운에서 한 여성에게 “한국인이냐”라고 물은 뒤 무참히 폭행한 20대 남자처럼 둔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 나는 살아서 이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리고 ‘다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난 달 13일, 김 모 씨는 대법원에서 징역 30년을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김 씨가 여성을 혐오했다기보다 남성을 무서워하는 성격으로 받은 피해 의식 탓에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고 판단했다. 약자인 여성이기 때문에 손쉽게 범행 대상이 되지만 그 기저에 여성혐오가 있음을 인정받지는 못한다. ‘저 사람은 여성인가? 여성은 공격하기 쉬운 대상인가?’ 남성 가해자들은 이미 자신에게 묻고 답한 뒤 범행을 저질렀음에도 끔찍한 사건마다 ‘묻지마’라는 단어가 붙는 것을 볼 때마다 여성들은 자신이 언젠가 겪게 될지 모르는, 혹은 이미 겪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내가 겪은 사건에 대해 알게 된 주위 여성들은 위로와 함께 자신이 겪었던 폭력과 추행에 대해 털어놓았다. 공기처럼 흔하고 깊은 상처들을 안고 살아남은 여성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더해 힘을 기른다. 지난 1년,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앞으로 얼마나 나아질 수 있을까.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살기 위해 계속 묻고 함께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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