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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소식] 대구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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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소식] 대구지부

익명 (미확인) | 수, 2018/03/28- 14:52

민변 대구지부 조직활동의 가장 큰 특징은 매주 목요일 만나는 점심 회의에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항은 점심 모임 회의에서 보고되고 결정되며, 부설기관인 인권센터의 소송구조사건 변론상황도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지난 기간동안 있었던 변론사건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17. 8~ 2018. 3.)

1. 원폭피해소송

17. 8. 3. 원폭기자회견 3

2017년 8월 3일 최봉태 변호사를 단장으로 해서 대구지부에서는 원폭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조정 신청을 대구지방법원에 제출하였습니다. 미국 정부와 원폭제조사‧한국 정부를 상대로 원폭 피해자들의 치유, 권리규제를 위한 법적 투쟁을 시작하기로 했으며, 한국인 피해자들이 미국의 원폭 사용이 위법 행위라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법적 대응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당사자들이 제기한 조정 신청 취지는 원폭제조사에 원폭 투하 행위의 위법성을 묻고, 미국 정부의 사죄, 대한민국 정부의 피해자 구제를 위한 책임 있는 행동 등을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8월 21일 서울중앙지법으로 이송되어 9월 18일 우리 정부만을 대상으로 첫 조정 재판이 열렸으나 조정불성립 되어 현재 재판 중입니다.

 

2. 대구 여중생 성폭행  항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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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40대 중반의 남성 학원 원장이 자신이 운영하는 학원 수강생인 중3 여학생과 늦은 밤, 아무도 없는 불 꺼진 학원 강의실에서 문을 잠그고 성관계를 가졌으며 다음날 학생이 학교 보건교사 등과 상담 후 경찰에 성폭행을 신고하여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017년 3월 서부지청은 아동‧ 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위반(강간) 혐의에 대해 피의자가 폭행, 협박 또는 위계, 위력을 사용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며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 없음 불기소 처분을 내렸습니다. 피해 여중생 측 법률대리인을 맡은 박정민 변호사는 위력에 의한 강간 또는 아동복지법상 성적 학대행위라며 2017년 9월 검찰에 항고장을 제출하였습니다. 대구고등검찰청은 아동복지법위반에 대한 항고를 받아들여 고검에서 직접 수사해 처리하는 직접경정(재기수사) 결정을 하였고, 아동복지법위반(아동에대한음행강요·매개·성희롱등)으로 기소하여 현재 재판 진행 중입니다.

 

3. 박성수 씨(2) 명예훼손 사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전단지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한 혐의(명예훼손 등)로 구속기소된 사회운동가 박성수씨 사건은 민변본부의 김인숙 변호사와 민변대구지부 이승익, 류제모, 김미조 변호사가 주축이 되어 변론을 진행하였습니다. 1심에서 전부유죄,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투어진 명예훼손죄에 대하여 무죄, 정보통신법 위반에 관하여 일부 유죄‧ 일부 무죄, 집시법위반과 정통법 일부 유죄에 관하여 벌금 200만원 선고받았습니다. 현재 상고심 계속 중에 있습니다.

박성수씨가 만든 전단지를 대구시당 앞에서 배포한 혐의(명예훼손)로 재판에 넘겨진 변홍철씨와 신동재씨 역시 각각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대구지부는 201711월부터 신입회원 사무실 방문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목요일점심모임 회의를 마치고 참석한 회원들과 함께 사무실에서 다과와 담소를 나누는 일정입니다. 사무실에서 변호사님들을 뵈니 더욱 더 반가워하시고 변호사로서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 마음을 담은 작은 선물 전달 등 짧지만 뜻깊은 소통의 시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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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에 본부 소속 권영국, 김동창 변호사님께서 경주에 사무소를 개설하면서 대구지부소속 회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작년 송년회에 참석하신 두 분 사진으로 대구지부 소식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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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민변 국제인권기행 후기

조덕상 변호사

 

아인이, 시우에게 보내는 오사카 여행 편지

 

  편지에는 아빠가 처음으로 아인이와 둘이서 일본 오사카를 여행했던 2019년 2월 22일부터 25일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단다. 아인이와 함께 있었기에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더 기억에 남고 뜻깊은 여행이었다고 생각해. 여행의 여운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있을 때 그 느낌을 생생히 기록해두고, 나중에 그때를 추억할 수 있도록 이렇게 너희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번에 아쉽게도 같이 가지 못한 시우도 재미있게 읽어주었으면 좋겠구나.

  빠는 원래 해외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2009년에 엄마와 스위스로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거의 10년간 다른 나라를 가본 적이 없었지. 작년 12월에 우연히 회사에서 도쿄에 보내줘서 갔다 왔는데 그 때 늦바람이 들었는지도 몰라.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민변에서 제1회 인권기행으로 오사카를 갈 사람들을 모집한다고 했는데 예전에는 관심 없이 지나갔겠지만 이번에는 꼭 가고 싶었어. 그래서 엄마와 아인이, 시우와 모두 함께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개학이라 출근을 해야 했고 아빠 혼자서 아인이와 시우를 모두 데리고 다니는 건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아인이만 데리고 가기로 했단다. 아인이가 흔쾌히 승낙해주어 정말 고마웠어.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렇게 설렜던 건 참 오랜만이었지.

 

  발하기 전에 오사카 일기예보를 알아봤는데 처음에 여행기간 내내 비가 온다고 해서 많이 걱정했단다. 여행 중에 아인이를 싣고 다닐 유모차를 깜박하는 바람에 잠깐 막막하기도 했고, 오사카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아인이가 귀가 아프다며 울먹일 때는 조금 당황하기도 했어. 우여곡절 끝에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자 아인이 귀도 금방 나았고, 날씨 걱정은 말라는 듯 화창한 하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또 다행히 호텔에서 유모차를 빌려줘서 여행 중에 유용하게 쓸 수 있었고, 여행 중에 비는 한 번도 오지 않았어. 날씨도 참 따뜻했고.

  사이 공항에서 우리는 코리아NGO센터의 김현태 선생님과 몽당연필의 김명준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을 시작했어. 두 분 모두 일본에서 재일조선인, 특히 조선학교 학생들이 겪는 차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지. 오사카에서 첫 점심을 아인이가 열심히 먹고 있던 중에 코리아NGO센터의 김광민 선생님이 지금까지 자신이 어떻게 성장했고 코리아NGO센터에서 활동하게 됐는지를 찬찬히 들려주셨단다. 어린 시절 일본인들에게 차별을 받으며 선생님은 부모님을 무척 원망하며 방황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해. 오래전부터 지금도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비슷하게 겪은 아픔이었지. 그때를 떠올리다 선생님이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아빠도 가슴이 먹먹해졌지.

 

  인이가 아빠와 점심을 먹었던 곳은 오사카에서 재일조선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츠루하시’라는 동네란다. 식당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미유키모리 소학교’가 있었고 우리는 그 안에서 방과 후에 재일조선인 학생들이 모인 ‘민족학급’을 찾았어. 일본 아이들과 재일조선인 아이들이 함께 지내는 학교에서 재일조선인 학생들끼리 한국어와 한글 등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지. 안타깝게도, 또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도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아인이가 곤히 잠들었단다. 10명 남짓한 초등학교 5-6학년 학생들이 홍우공 선생님과 일본어로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데, 아빠가 일본어를 몰라서 처음에 너무 답답했어. 나중에 김현태 선생님이 수업 내용을 조금 알려주셨는데 학생들이 이번 학기 수업을 들은 소감들을 하나씩 들어보면서 거기서 느꼈던 점들을 서로 이야기했다고 하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한 남자아이가 너무 자주 손을 들다가 선생님께 가끔 퇴짜를 맞는 풍경이 재밌기도, 딱하기도 하더구나.

  러다 홍 선생님이 한자 이름을 몇 개 적더니 학생들에게 각자 어느 나라 사람인 것 같냐고 물었지. 정답은 다들 의외였단다. 누군가 일본식 또는 한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꼭 그 나라 국적은 아니라는 이야기였지. 그 중에는 홍 선생님의 할머니면서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던 분의 이름도 있었어. 이름에는 그 사람의 국적만이 아닌,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는 것이니까 말이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일본식 이름이 아닌 한국식 이름을 일본인들에게 드러내는 것이 두렵다는 이야기가 나왔어. 한국식 이름을 쓰는 것을 알면 많은 일본인들은 조선인이라면서 놀리고 괴롭히고 차별했으니까 말이야. 앞으로 용기를 갖고 한국식 이름을 당당히 쓰겠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홍 선생님은 왜 자기 이름을 말하는데 용기가 필요한가. 그런 세상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세상을 우리가 바꿔보자고 이야기하셨단다.

 

  후 유네스코 헌장을 같이 읽었어. 서로의 풍습과 생활에 대한 무지가 인류 역사에서 커다란 전쟁을 일으켰으니 인류의 지적·도덕적 연대 위에 평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헌장의 메시지가 조선학교 아이들이 자기 이름을 쓰는 문제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단다. 이후 홍 선생님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에게 적은 일본어 편지를 보았는데, 일본어는 모르지만 한자를 더듬거리며 읽다가 아빠는 왈칵 눈물이 났단다. 아들의 이름 3글자에 증조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억지로 창씨개명을 하면서도 본인의 성씨를 잊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 이후 아버지 대에서 원래의 성씨와 한국식 이름을 다시 쓰기 시작했던 노력, 아들이 태어나고 자랄 때 식구들이 느꼈던 해방감과 기대 등등. 아빠로서는 감히 짐작하기도 힘든 숱한 이야기들을 조금 상상했다가, 잠든 아인이를 보자 그냥 주르륵 흘러내렸어. 아빠와 너희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이름, 글씨, 말을 쓰기 위해 지금까지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든 아인이를 안고 아빠는 작은 카페에서 코리아NGO센터 활동가분들을 만날 수 있었단다. 4-5년 전에 극성을 부렸던 재특회 같은 일본인들이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혐오 표현을 쏟아내는 동영상을 보았어. 그때 아인이가 자고 있었던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왜 저 사람들은 저런 근거 없는 혐오를 양산해내는 것일까. 저런 혐오를 몸으로 겪어야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인이가 나중에 이런 질문을 아빠에게 한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참 막막한 기분이야. 그나마 다행히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저런 행위는 불법이라고 판결을 내리기도 했고, ‘카운터스’ 라고 해서 혐오 표현을 하는 자들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단다. 그런데 카운터스 중에서는 자랑스러운 일본의 시민들이 저렇게 못난 짓을 하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나선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해.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재일조선인들이 겪는 각종 차별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은 얼마나 있을까. 깊게 알면 알수록 힘 빠지고 슬픈 일이야.

 

  은 생각을 하면서 호텔로 돌아와 첫날 일정을 무사히 마쳤단다. 아인이가 곤히 낮잠을 잘 자고 저녁에 일어나줘서 아빠는 늦은 밤에 너를 유모차에 싣고 오사카의 도톤보리를 걸었어. 한국에서 놀러온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한편으로는 조선학교 아이들 생각도 많이 나서 묘한 기분이 들었단다. 너무 늦어서 관람차와 작은 배를 타지 못하고 돌아온 건 참 아쉬웠지.

 

   둘째 날에는 오사카 조선고급학교를 찾아갔단다. 전날 갔던 곳이 일본 공립학교 안의 작은 교실이었다면, 이 학교는 한국어와 한글로 교육을 받고 싶은 재일조선인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진 고등학교였어. 학교에 들어서니 교실에는 북한 지도자들의 초상화가 걸려있기도 하고, 학생들이 만든 게시물과 그림에는 마치 북한학교에 온 것 같은 선전문구와 표현이 가득했지. 겉으로만 보면 이 학교 사람들이 북한 체제를 추종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 그런 것들을 핑계 삼아 일본 정부가 다른 고급학교에는 교육지원금을 대주면서, 조선학교에는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고 있지. 하지만 해방 이후에 남한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을 버리다시피 했고, 북한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의 교육을 계속 도왔어. 그리고 무엇보다 재일조선인들이 스스로 우리 말과 글, 풍습을 지켜내려고 지금까지 싸워왔지. 이런 역사적 맥락을 모르고서 그들을 북한에 종속된 사람들이라며 차별하고 괴롭히는 일본인들에게 아빠는 분노와 허탈감을 느꼈단다.

  교 선생님들의 간단한 안내를 받고 우리는 학생들의 수업을 참관하러 들어갔어. 아인이와 함께 들어갔더니 많은 학생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계속 아인이에게 관심을 보였지? 나중에는 본의 아니게 집중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어. 수업 참관이 끝난 후 점심 도시락을 먹고 나서는 성악반 학생들이 ‘아침이슬’ 과 ‘백두와 한라는 내 조국’을 불러주었고, 합주반 학생들이 ‘군밤 타령’과 같은 민요를 멋지게 연주해주었어. 아인이도 끝까지 잘 듣고는 즐겁게 화답했지. 공연이 끝나고 나서 돌아가는 언니들에게 아인이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언니들이 우리말로 ‘귀엽다’라며 까르르 웃던 모습도,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언니와는 하이파이브를 했던 장면도 아빠 기억에 선하단다. 이후 여행하는 동안 아인이는 고급학교 언니들이 많이 보고 싶다고 했어.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는 시간이 있었는데 아인이가 조아인, 조시우 이름을 적고 아빠는 그 위에 ‘즐겁고 치열하게 도우며 성장해가는 여러분들을 언제나 기억하고 응원할게요’ 라고 썼지. 남한 학교와는 사뭇 다른 배움에 대한 열의와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 서로 협동하는 분위기가 참 좋았거든. 이곳 학생들이 남한, 북한, 일본 세 국가의 다양한 모습을 배우면서 따뜻한 마음과 넓은 시야를 가진 어른으로 성장해주길 바랐어.

 

  은 공연이 끝나고 아인이가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동안 아빠는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어머니 2분의 이야기를 들었어. 이 두 어머니는 우리가 여행을 오기 며칠 전에 UN 아동인권위원회는 일본 정부가 다른 외국인 학교와 조선학교를 차별하지 말라는 권고를 냈는데, 이 권고를 받기 위해 제네바까지 찾아가 싸웠던 분들이라고 했지. 그 전에 UN에서 여러 번 일본 정부에 권고를 했지만 일본 정부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어. 그나마 이번에 나온 권고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일본 정부에게 차별의 근거가 되는 관련 법령을 고치라는 내용으로 나왔다고 하네. UN에 호소하고, 일본 시민들에게 조선학교 차별의 문제점을 알리는 등 어른과 학생들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교육 지원금을 받지 못하다보니 학교 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고,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도 비싼 수업료를 부담해야 한다고 해. 선생님들과 어머니들은 우리들이 남한 사회에 조선학교의 실정을 널리 알려주길 간절히 바란다고 하셨어.

  교를 나와서는 잠든 아인이를 유모차에 눕혀주고, 조선학교 학생들을 위해 법정에서 싸웠던 변호사님들을 만났단다.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에 대한 교육 지원을 끊고 오사카 지방정부마저 지원을 중단하자 양심 있는 오사카의 변호사들은 재일조선인들 편에 서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단다. 1심 법원에서 변호사들이 승소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다음 2심 법원은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줬고, 지금 최고재판소의 마지막 판결을 기다리고 있어.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차별하려고 궁색한 핑계를 댔고 변호사들이 그 부당함을 지적했지만 2심 법원은 조선학교 학생들이 일본 학생들과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인권으로 인정하지 않았단다. 조선학교가 북한의 부당한 지배를 받고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하고, 학생들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학생들의 교육권을 왜 침해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법원 판결의 문제점을 아빠와 동료들이 열심히 지적했어. 과연 법정에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중에 일본 법원의 판결문을 받아서 읽어 보고 마지막 판결이 나올 때까지 우리가 일본의 변호사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단다.

 

 

  째 날의 공식 일정도 아인이 입장에서는 무척 지루했을 텐데, 다행히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어 아빠는 아인이와 오락실에 가서 재밌게 놀았단다. 공식 일정이 끝나고는 열심히 뛰어가 헵파이브 관람차를 타고 오사카의 야경을 볼 수 있었지. 가는 길에 표를 잃어버렸다가 지하철 역무원에게 사정해서 관람차 마감 시간에 겨우 도착했던 일도 생각나네.

 

  셋째 날 오전에는 ‘사랑방’이라는 재일조선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한 개호시설을 찾았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우리말과 글을 계속 배울 수 있는 곳이었는데 작지만 그만큼 더 따스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단다. 정귀미 선생님과 3분의 할머니가 녹차와 딸기를 대접해주셨는데 아인이가 딸기 한 접시를 다 먹었더니 나중에 남은 딸기를 챙겨주셨어. 정 선생님이 재일조선인을 위한 야간학교에서부터 시작된 사랑방의 역사를 차분히 들려주셨고, 마침 같이 계셨던 할머니께서 젊은 시절 중국인 학생들을 부당하게 체포한 일본 경찰을 찾아가 항의했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단다. 할머니들과 헤어질 때 아인이가 한 분씩 안아드렸던 장면이 생생하네.

 

  후에는 죠호꾸 조선초급학교 학생들의 예술발표회를 들으러 아사히구 구민홀에 갔었지. 59년 동안이나 이어진 공연이라니 정말 기대가 많이 됐단다. 2부 15개 꼭지였는데, 하나하나 다 기억에 많이 남았어. 아인이 또래 친구들의 합창이나 동화 공연도 재미있었고, 언니오빠들의 악기연주와 농악무 공연도 멋있었지. 1부가 끝날 무렵 아인이가 지루하다며 힘들어해서 나가려다가, 길원옥 할머니가 오셨다고 해서 아인이에게 기다려달라고 했지? 얼마 전 하늘나라로 가신 김복동 할머니와 이번에 찾아오신 길원옥 할머니는 오래 전 일본이 벌인 전쟁에서 끔찍한 피해를 입고서, 일본 정부와 계속 싸웠던 분들이야. 두 분은 오래 전부터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해주시고 재일조선인들의 투쟁에 큰 힘을 보태 주셨지.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 영상과 길원옥 할머니가 직접 나와 장학금을 전달하시고 ‘두만강’을 조용히 부르셨던 모습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구나.

  인이와 근처 개천을 조금 산책하느라 2부 공연은 조금 놓쳤어. 다시 들어왔더니 태권도 공연이 있었는데 아인이도 좋아했던 콩순이 태권노래가 나오길래 참 신기했단다. 마지막에 합창단이 ‘언제 어디서나’ 라는 노래를 들려주었는데 얼마 듣다가 아빠는 또 울고 말았어. 차별과 편견에 고통스럽지만 굳건하게 희망을 노래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 가사를 카메라에 담아 두었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을 때 재일조선인들은 물자를 일본인들과 함께 나누었고, 조선학교 학생들은 무서워하는 어린 후배들을 선생님들보다 먼저 보듬어주었다는데 그 사연이 노래 가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어. 작년 민변 송년회 때 공연을 준비하면서 ‘하나’라는 노래를 연습했었는데 조선학교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을 때였는데도 그 학생들의 간절한 마음이 조금 느껴져서 목이 메었던 기억이 나더구나. 나중에는 ‘우리를 보시라’,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란다’ 라는 노래도 찾아서 들어보았는데 참 좋더라. 공연이 끝나고 도톤보리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재일유학생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분들과 만난 소중한 자리였지. 조금 더 있고 싶었지만 일찍 나와 아인이와 약속한 배를 타러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놓쳐버렸지 뭐니. 대신 작은 관람차를 타고서 마지막 밤을 아쉽지만 행복하게 보냈단다.

 

 

  지막 날 오전에는 미유키모리 신사를 찾았어. 5세기에 인덕천황이 잠깐 쉬어갔던 곳에 지어진 신사라는데, 마침 가까운 곳에 우리가 자주 봤던 코리아타운이 있었지? 오래전부터 한반도와 일본에 살았던 사람들이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영향을 주고받은 흔적이 이런 작은 신사와 코리아타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어. 그 옛날 사람들이 오늘날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들을 차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 코리아타운을 둘러보면서는 1900년부터 다양한 이유로 경상도, 제주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단다. 조선학교 학생들의 문제는 결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일본과 남북한 사회가 함께 풀어나가야 하는 커다란 숙제라는 것을 느꼈던 시간이었지.

  지막으로 찾았던 작은 절은 통국사였어. 이 절은 재일조선인들이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곳이래. 통국사라는 이름에는 남한과 북한이 더 이상 다투지 않고 통일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이 담겨 있단다. 우리 같은 남한 사람들에게는 통일은 그렇게 절박하지 않은 문제일 수 있지만, 재일조선인들에게는 생존이 달려 있는 문제라 할 수 있지. 일본인들에게 차별을 받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남한과 북한이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니까. 아인이는 절 한 켠에 있었던, 낙서가 심했던 돌기둥 2개를 기억하니? 예전에 동과 서로 갈라져 다투었다가 지금은 통일된 독일이라는 나라에 있었던 베를린 장벽이었어. 그리고 제주도에서 있었던 4.3 사건의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비석도 있었지? 아직도 그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계신다고 하니 마음이 아팠어. 아인이가 직접 추모비에 향을 올리는 것을 끝으로 빠듯했지만 풍부한 생각거리를 던져준 여행이 끝났단다.

  인아, 고마워. 시우야, 미안해. 아빠가 이 여행을 가기로 결심한 것도, 이 여행의 매 순간이 더 감동스럽고 기억에 남게 된 것도, 너희들 덕분이란다. 비록 아인이가 아직은 많이 어려 조선학교 문제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이번 여행에서 우리랑 생김새와 말글,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놀리고 괴롭히면 안 된다는 걸 느꼈다면, 그리고 조선학교 학생들과 재일조선인 여러분의 따뜻함을 기억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해.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 공중파 채널에서 조선학교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단다(2019. 3. 5. KBS1 시사기획 창 ‘조선학교’). 김복동 할머니가 유언처럼 조선학교 이야기를 남기고 가신 후 조금씩 조선학교에 대한 남한 사회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다행이야. 앞으로 아빠도 조선학교를 위해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지 계속 생각해보려고 해. 일단은 책을 읽고 재일조선인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그리고 너희들이 더 자라서 기회가 오면 다시 너희들과 함께 조선학교 학생들을 만나러 가보고 싶구나. 부디 그 무렵에는 오랜 조선학교의 투쟁사가 그랬듯이 모든 조선학교가 무상화라는 열매를 맺고 있기를 같이 기도하자.

– 사랑하는 아빠가.

The post [기행문] 제 1회 민변 국제인권기행 후기 : 아인이, 시우에게 보내는 오사카 여행 편지 / 조덕상 변호사 appeared first on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민변.

화, 2019/03/1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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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지부에서 진행했던 시영운수 관련 소송의 대법원 판결에 대한 평석입니다.

 

 

통상임금 법정수당과 관련된 신의칙 법리의 쟁점

김주관 변호사 (인천지부)

1. 들어가며

최근 2019. 2. 14.자에 대법원에서 기존 통상임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하여 조금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판결을 선고하였다(대법원 2019. 2. 14.선고 2015다 217287 임금 판결)

대법원은 213. 12. 18. 선고 2012 다 89399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하여, 노동자의 사후적 통상임금 청구에 대하여 경영위험을 초래할 경우에 신의칙에 반하여 추가적인 임금 청구는 부당하다는 판결을 선고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 판결에서 의미하는 경영위험이 어느 정도인지 여부 및 신의칙에 위반한다는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 여부에 대한 구체적 기준이 없어서 혼란을 초래한 바 있었는데, 이번 대법원 판결선고를 통해서 조금 더 구체적 기준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번 판결의 요지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간단한 평석을 하기로 한다.

 

2. 대법원 2019. 2. 14.선고 2015다 217287 임금 판결의 요지

단체협약 등 노사합의의 내용이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정을 위반하여 무효인 경우에, 그 무효를 주장하는 것이 신의칙에 위배되는 권리의 행사라는 이유로 이를 배척한다면, 강행규정으로 정한 입법취지를 몰각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므로, 그러한 주장은 신의칙에 위배된다고 볼 수없음이 원칙이다. 그러나 노사합의의 내용이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정을 위반한다고 하여 그 노사합의의 무효주장에 대하여 예외 없이 신의칙의 적용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본 신의칙을 적용하기 위한 일반적인 요건을 갖춤은 물론,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정성에도 불구하고 신의칙을 우선하여 적용하는 것을 수긍할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여, 그 노사합의의 무효를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에 위배되어 허용될 수 없다.

노사합의에서 정기상여금은 그 자체로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아니한다는 전제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산정기준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하였고, 이를 전제로 임금수준을 정한 경우, 근로자측이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가산하고 이를 토대로 추가적인 법정수당의 지급을 구함으로써, 사용자에게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지워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관념에 비추어 신의칙에 현저히 반할 수 있다(대법원 2013. 12. 18. 선고 2012다 89399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다만 근로관계를 규율하는 강행규정보다 신의칙을 우선하여 적용할 것인지를 판단할 때에는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하여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향상시키고자 하는 근로기준법 등의 입법취지를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기업을 경영하는 주체는 사용자이고, 기업의 경영 상황은 기업내.외부의 여러 경제적.사회적 사정에 따라서 수시로 변할 수 있으므로, 통상임금 재산정에 따른 근로자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를 중대한 경영상의 위험을 초래하거나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로 배척한다면, 기업경영에 따른 위험을 사실상 근로자에게 전가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따라서, 근로자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가 사용자에게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여 신의칙에 위반되는지는 신중하고 엄격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3. 대법원 판결에 대한 비판적 검토

위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검토를 해보고자 한다.

첫째, 통상임금과 관련하여 추가적 법정수당 청구에 대하여 신의칙법리를 도입한 것은 2013년 위 항목에서 언급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서였다. 강행규정성을 가지고 있는 근로기준법의 영역에 신의칙의 법리가 도입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면이 있었으나, 기업측면에서 과도한 재정정 부담을 사후적으로 가지게 되어 기업도산의 위험이 초래된다면 결과적으로 노동자에게도 피해가 올 수 있다는 사회정책적 측면이 대법원 판사들의 논리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위 전원합의체 판결의 전체적인 취지가 기업경영 측면에 우위를 두고 노동자의 법정수당 청구를 하위에 두는 방향으로 흘러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보니 하급심에서 여러 혼란이 있었으나 대체로는 노동자의 추가적 법정수당 청구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판결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그런데 이번 시영운수 사건 대법원 판결을 통하여, 노동자측의 법정수당 청구를 조금더 확장하는 취지의 결정이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법정수당 청구는 근로기준법령에 의해 보장된 구체적 권리라는 점에서 이를 신의칙에 의해 부정하려면 사용자측에서 적극적으로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에 대해서 입증하여야 한다고 본다. 사용자측에서 이러한 구체적인 입증노력 없이 쉽사리 경영상의 위험성을 판사로부터 인정받으려는 것은 노동법의 기본적 법리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고, 이번 대법원 판결을 통해서 확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번 시영운수 대법원 판결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해당성에 따른 추가적인 법정수당청구는 법원으로부터 인용될 여지가 높아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사용자측에서 적극적으로 중대한 경영상의 위험초래 상태를 입증한다면 법원도 사용자측의 손을 들어줄 여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향후에도 “ 신의칙에 위반되는지는 신중하고 엄격하게 판단하여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의 결론적 문구가 암시하듯이, 하급심 법원에서 이러한 추상적 기준을 구체적 사건에 적용함에 있어서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어찌되었든 이번 대법원 판결은 통상임금 관련 신의칙법리에 있어서 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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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9/03/27-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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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위원회 활동소식

박수빈 변호사

지난 10월에 사법위 소식을 알려드렸으니 벌써 5개월이나 지났습니다. 사법위는 여전히 공수처 설치를 위해 애쓰고 있으며, 지난해부터 이어져오고 있는 양승태 대법원 및 법원행청처의 사법농단 사태에 관하여 사법행정개혁 문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련의 사법농단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분노와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에 우리 모임은 사법농단 TF를 결성하여 대응하고 있으며, 사법위원회 위원들도 적극적으로 이에 결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사법부가 바로 설 수 있도록, 공수처 설치를 비롯한 각종 사법개혁문제가 해소될 수 있도록 우리 모임의 역량을 집중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지난 2018. 12. 11. 김인회 교수(사법위 위원)님을 모시고 ‘사법개혁을 생각하다’를 주제로 초청강연을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셨고, 사법개혁의 출발점이 어디여야 하는지에 대한 교수님의 진단을 들었습니다.

뒤이은 2019. 1. 4. 에는 2018.12.경 대법원이 발표한 법원행정처 개혁안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바람직한 개혁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민변 전 회원님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긴급 집담회를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서선영 위원님의 <사법행정 현황 및 문제점과 개혁과제>에 대한 발제가 이루어졌고, 참가하신 사법위 위원님을 비롯한 회원 여러분의 열띤 토론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논의와 고민을 바탕으로 민변 사무처 산하 사법정책연구지원팀과 협업하여 2019. 2. 15. 민주사법 제1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사법위만의 공은 아니나 이 자리를 빌어 관심가져주신 회원 여러분께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현재 법원에서는 지난 2019. 1. 24.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하여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사법농단의 중심 인물들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민변은 위 재판들의 모니터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사법농단TF는 대법원에 대하여 사법농단에 연루된 법관들의 징계 및 재판업무 배제조치를 요구하였으며, 국회에는 사법농단 관여 법관 탄핵소추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사법위원회 활동에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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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9/04/04-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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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대구지부

영풍 석포제련소 폐쇄를 위한 법률대응단 활동

 

2018. 11. 11. 아침, 제3차 낙동강 현장기행 시민조사단과 함께 영풍 석포제련소로 출발했다. 경북 봉화군 석포면의 석포제련소. 영풍그룹 계열인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와 함께 국내 아연 생산의 쌍벽을 이루는 곳이다. 철제품 부식방지 도금용으로 주로 쓰이는 아연은 한국에서 자급 가능한 몇 안 되는 비철금속이라고 한다.
석포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다가설수록 미세먼지를 머금은 안개가 짙어졌고 인적은 드물었다. 석포 초입의 휴게소에서 내려다 본 낙동강은 차고 맑아보였으나 아래쪽에는 무시무시한 게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길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니 석포사람들이 불편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다. 그들은, 아직 큰일 없었으니 앞으로도 쭉, 아니 자식들을 먹일 동안이라도 모른 체 해달라고 하는 듯 했다. 허나 그곳엔 진짜 무시무시한 게 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것은 희뿌연 무언가를 쉼 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희뿌연 무언가를 온전히 받아낸 산은 시뻘건 맨살을 내놓고 있었다. 맨살을 드러낸 산을 감싼 낙동강은 휴게소에서 본 그 낙동강이 아니었다. 48년이나 아팠던 낙동강은 더운 숨을 내쉬면서 왜 이제야 왔냐고 우리를 나무라는 듯했다.

「김무락 변호사(대구지부 사무차장)의 석포제련소 환경오염 실태 조사 후기」

2018. 11. 11. 제3차 낙동강 기행 중 영풍 석포제련소 환경오염 실태 조사 모습

영풍 석포제련소는 1,300만 영남인의 상수원인 낙동강의 상류에 자리하고 있어 석포제련소가 야기하는 식수원 오염에 대한 불안감이 낙동강을 따라 영남지역 전체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에 민변 대구지부에서는 법률대응단을 구성하였습니다. (김무락, 박경찬, 백수범, 성상희, 이유정, 정재형, 최지연 변호사)

1970년 영풍이 봉화군 석포면에 제련소를 준공, 가동하여 온 이래 50년 가까이 누적되어 온 환경오염의 문제는 석포면이 위치한 지역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전국적으로 알려지지 못하고, 석포면 인근 주민과 소수의 사람들만이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문제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14년 6월에 와서야 시민들이 석포제련소부지 내 토양이 중금속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고 국민권익위에 신고를 하였고, 2015. 3. 토양정밀조사결과 석포제련소 부지 내 6만여 ㎡의 토양이 토양오염우려기준의 최대 414배 초과하는 중금속이 검출되면서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심각성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봉화군이 1,2공장 부지의 오염토양을 정화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주식회사 영풍(이하 ㈜ 영풍)은 토양정화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가 봉화군에 토양정화기간을 2년 연장해 줄 것을 신청하였고, 봉화군이 거부하자 2017. 5. ㈜영풍은 봉화군수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행정소송에서 1, 2심은 ㈜영풍이 승소하였고, 현재 대법원에 상고심이 진행중입니다.

2018년 2월 시민들이 ㈜영풍의 폐수 70만톤 무단방류 사실을 신고하였고, 관계기관의 합동점검 결과 7가지 불법행위가 적발되어 2018. 4. 5. 경상북도가 조업정지 20일 행정처분을 내렸습니다. ㈜영풍은 이에 불복하여 경상북도지사를 상대로 조업정지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행정심판을 제기하였다가 기각되었는데도 다시 대구지방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현재 1심이 계속중이고, 2019. 4. 3. 법률대응단에서는 봉화주민 4명, 안동주민 2명으로 피고 보조참가인을 모집하여 보조참가신청서를 대구지방법원에 제출하였습니다. 피고 보조참가인 소송대리인에 대구지부 회원 19명이 연명에 동참하였습니다.

 

▷ 민변 대구지부 주최 토론회

2018. 11. 14. 민변 대구지부와 영풍 석포제련소 공동대책위원회는 ‘낙동강 최상류 영풍 석포제련소로 인한 식수원 오염 실태와 법률대응 방안’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였습니다. 토론회의 발제자로 나선 백수범 변호사는 영풍 석포제련소 환경오염 행위에 대한 법률대응 방안을 차분히 설명하였고, 토론자로 참여한 최지연 변호사는 백수범 변호사의 법률대응 방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지정토론을 마무리하였습니다. 토론회에는 정재형 변호사(토론사회), 김무락 변호사(전체 사회), 오랜 기간 영풍 석포제련소 문제를 다뤄 온 맹지연 환경운동연합 생태보전국장, 정수근 대구환경운동연합 생태보존국장, 이상식 영풍제련소 공대위 공동대표, 신기선 영풍제련소 공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이 참여하였습니다.

 

▷ 2018. 11. 30. KBS 추적60분

“낙동강 미스터리, 48년 영풍공화국의 진실”방영

2018. 12. 18.~19. 1박 2일간 봉화 승부리를 방문한 백수범, 김무락 변호사

 

 

2019. 3. 14. 영풍공대위와 법률대응단 합동회의 및 대구민변과의 간담회

 

▷ 법률대응 진행상황

토지정화명령 건은 법률검토를 거쳐 봉화군과 대법원에 법률의견서를 제출하기로 하며 현 상황에서 적절하고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추가 대응방법을 검토하기로 하였습니다. 3공장 불법건축물의 합법화 과정, 2, 3공장 폐수 무단방류와 관련하여서도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형사고발과 감사청구 등의 법률대응을 하기 위해 검토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손해배상소송 관련하여서는 우선 소수의 원고라도 모집하여 시범소송으로서 영풍 석포제련소 오염물질 배출로 인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법률대응기금 마련을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 1차 모금 마무리하였습니다. 개인과 단체 합하여 101명이 참여했고 모금액은 2천여만원입니다. 모집된 성금은 원고들이 소송비용에 대한 부담없이 소송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변호사보수를 포함한 각종 법률비용으로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의 노력이 쌓여 다행히도 최근 여러 방면의 환경이 진전되어 가고 있으니 이 불씨를 잘 살려가면 머지 않아 문제해결의 적기가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민변 대구지부는 그동안 애써오신 영풍제련소 공대위와 봉화대책위 및 활동가 분들과 협력하여 영풍 석포제련소 문제에 함께 대응해 나아기로 하였습니다. 대구지부의 활동에 전국 회원님들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리며 대구지부 근황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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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9/04/0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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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표지안녕하세요? 저는 김영준 변호사라고 합니다, 민변 활동은 올해가 딱 10년째네요. 공부모임을 비롯해서 민변 활동을 막 시작하던 시기에 저와 가까운 교사가 해직되면서 교육 관련 활동을 시작했는데, 교육청소년위원회에서 오랫동안 간사변호사로 활동하다 이렇게 위원장이 된 지 3년째가 되었네요.

교육청소년위원회는 2007년 송병춘 변호사님이 처음 만드셔서 위원장을 역임하시고, 김기현 변호사님, 이명춘 변호사님이 위원장을 맡으셨어요. 제가 4대 위원장이네요.

교육, 중요하잖아요?

학부모라고 한다면 자기 자녀를 가르치는 문제를 고민하게 되죠. 한 개인으로서도 계속 교육을 받아왔고, 또 평생교육 시대에 앞으로도 계속 교육을 받아야 하고요. 그런 점에서 교육은 누구나 접점이 있는 분야예요. 그러다 보니 교육청소년위원회는 정말 사건이 끊이지 않는 곳이죠.

교육위가 맡는 사건들은 정말 다양해요. 교육기관이나 교육주체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분야마다 사건마다 각기 다 다르죠. 크게는 고등교육 문제와 초중등교육 문제로 나눠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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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있는 판결을 끌어냈던 비리사학 대응 활동

우선 비리사학의 전횡에 법적으로 대응하는 활동이 있겠네요. 비리사학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 학생과 교수의 학교 운영 참여권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수원대학교 학생들의 등록금 환불 소송 승소 같은 의미 있는 판결이 많이 나왔어요.

원주에 있는 상지대는 지역에서 오랫동안 비리사학의 대명사로 불렸어요. 상지대 구 재단의 김문기 씨는 학교의 설립자는 아닌데 재단 이사장으로 많은 비리를 저질렀죠.

사립학교에 분쟁이 생겼을 때 임시이사 선임과 해임, 임시이사를 선임한 학교의 정상화 추진에 필요한 사항을 심의하는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이하 사분위)라는 기구가 있어요. 그런데 사분위가 김문기 씨 측을 복귀시키는 결정을 했고, 교수들과 교직원, 학생들은 반대했죠. 교수들과 학생들이 싸운 결과 2015년 대법원에서 교직원과 학생 역시 학교 운영에 참여할 권리가 있고, 이 권리는 학교 법인이 위기에 빠졌다고 해도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 있는 판결을 내렸어요.

그 후 다시 파견된 임시이사가 모호한 태도를 취해 문제가 됐지만 최근 사분위가 다시 임시이사를 파견했는데, 이 중에 민변 김호철 부회장님도 있습니다. 비리 재단과 오랫동안 싸워오셨던 상지대 정대화 교수님은 지금 총장 직무대행이 되셨죠. 상지대는 지금 정상화 되는 기로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수원대도 교육위가 비리 재단과 싸우는 분들에게 오랫동안 법률적인 도움을 드렸던 학교예요. 총장이 여러 비리와 전횡을 저지르면서 “교수들 무릎을 꿇렸다”는 소문까지 나왔고, 한편으로는 학생들의 교육여건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어요. 교육비 환원율이 누가 봐도 비정상일 정도로 낮았어요. 결국 교육위가 학생들과 함께 등록금 환불 소송을 제기해서 학생들이 1심과 2심에서 승소했습니다. 지금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 두 학교의 법적 다툼에는 이영기, 하주희, 손영실 변호사님이 교수님, 학생들과 함께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학교를 점거한 학생들, 학생들에게도 학교 운영에 참여할 권리를

최근에는 상지대 학생들처럼 학교의 운영에 참여할 권리를 인정해달라는 학생들의 요구가 높아요. 학생들도 학교의 구성원인 만큼 학교 운영에 참여할 권리에 대한 요구는 높아지고 있는데 학생들의 참여권은 제도적으로 잘 보장되지 않고 있어요.

현실적으로 학교 운영에 학생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대학평의원회 하나예요. 그런데 교수, 교직원, 동문, 이사회 등으로 구성된 대학평의원회 위원 열 명 중에 학생은 한두 명 포함될까말까 해요. 게다가 대학평의원회 결정에 구속력도 없어요. 예를 들면 2013년 중앙대에서 학교가 대학평의원회의 보류결정을 무시하고 학과구조조정을 밀어붙이자 학생들이 구조조정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는데, 중앙지방법원이 받아들여주지 않았죠.

또 총장 선출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학교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신대에서는 교수와 학생들이 투표를 거쳐 총장 후보를 뽑았는데, 정작 이사회에서는 1순위, 2순위 후보를 제껴두고 3순위 후보를 총장으로 임명했어요. 대학의 중요한 정책들이 당장 학생들의 교육받을 권리, 수업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데도 학교가 의사결정을 일방적으로 하는 거죠.

이렇게 학교 운영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학교를 점거하고 싸우는 일도 많아졌어요. 한동안 떠들썩했던 이화여대도 있고, 동국대에서도 논문을 표절한 총장과 그 총장을 임명한 이사장을 비판하면서 점거농성을 했었어요. 서울대는 시흥캠퍼스 문제로 학생들이 본관을 점거했고, 한신대도 총장 선출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며 본관점거 농성을 했어요. 이런 과정에서 학생들이 징계나 재판까지 받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 학생들을 변론하는 일도 교육위의 활동 중 하나예요.

학생들의 학교 운영 참여 같은 권리가 좀 제도적으로 정비되어서 더 이상 징계나 재판을 받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런 학생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대학에 지원된 그 돈들은 투명하게 쓰였을까

이렇게 각 학교에서 비리사학과의 법적 분쟁을 지원하거나 학교와 분쟁을 겪은 학생들을 변론하는 활동도 있지만 대학 정책 분야에서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요. 대학 구조조정과 대학재정지원사업에 대해 토론회도 하고, 제안서도 제출하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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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등록금 운동이 거둔 성과 중 하나가 2011년에 도입된 등록금 인상률 상한제예요. 물가상승률과 연동해 일정비율 이상을 인상할 수 없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로 그동안 계속 등록금을 올려왔던 사립대학들이 전처럼 등록금을 인상할 수 없어졌죠. 교비 대부분을 등록금에 의존하는 사립대학들이 재원이 쪼들리는 상황이 되자 교육부가 ‘대학 재정지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공모사업을 시행하고 있어요.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던 코어 사업, 프라임사업, 평생교육 단과대학 같은 공모사업이 교육부의 대학 재정 지원사업들이에요. 그런데 이 지원사업의 지원대상 선정과 운영과정이 불투명해요. 국정농단 특검 수사 결과 프라임사업 지원 대상 선정 과정에서 이대가 부당한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이 들어났잖아요.

교육부는 대학재정지원사업과 동시에 학령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들어 대학구조조정도 추진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대학구조조정이 진행되면 결국 대학이 취업률 같은 눈에 보이는 지표만 강조하게 돼요. 예술, 인문학, 사회학, 기초학문은 고사하는 거죠. 그래서 전반적으로 재점검이 필요해요. 이런 취지에서 지난 7월 18일 국회에서 대학 재정지원사업의 개편과 정책감사를 위한 토론회를 열었어요. 이 토론회 논의를 바탕으로 민교협, 교수노조 같은 교수단체와 함께 교육부에 기존의 대학재정지원사업에 대한 정책감사를 제안해놓은 상태입니다.

교육분야 대표 적폐, 국정 역사교과서

이제 초중등교육 분야를 얘기해볼까요?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건은 교육 분야의 대표적인 적폐였죠. 국정교과서 문제에 대해 반대 여론이 높았고, “획일적인 역사관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안 된다, 헌법과 민주주의에 반하는 일이다”라는 생각에서 민변에서 TF를 꾸려 활동했습니다.

TF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막기 위해 행정소송과 헌법소원도 제기했어요. 마지막에는 교육부가 꼼수를 써서 ‘국정 역사교과서 연구학교를 지정하고 연구학교에서는 국정교과서를 배울 수 있게 하겠다’고 했죠. 워낙 반대여론이 높아서 경북의 문명고만 연구학교 지정을 신청했습니다. 이것도 저와 이영기 변호사님이 소송을 해서 연구학교 지정 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아냈습니다.

정부가 새로 바뀌고 문재인 정부 1호 명령으로 국정교과서 문제를 해결했어요. 민변도 뭐 국정교과서 저지 네트워크에 참여해서 열심히 싸웠고, 다행히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서 그 문제를 잘 해결한 셈이죠.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너무 소모적이잖아요, 반역사적이고요. 국정교과서 추진 과정도 문제가 많아요. 예비비를 무리하게 편성해서 그 예비비 중 상당액을 국정교과서를 홍보하는 홍보비로, 쉽게 말해 신문 광고하는데 써버렸거든요. 또 국정교과서 집필자를 공개하지 않아서 ‘복면집필’이란 얘기도 나올 정도로 불투명하게 진행됐는데 원고료조차 이전의 교과서 편찬사업에 비해 상당히 고액을 지급했다고 하더군요. 저희는 더 이상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안 된다는 취지에서 지난주에 감사원에 감사청구서를 접수시켰고, 현재 감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 잘 해결되겠죠?

전교조의 교원노조 지위도 회복되어야죠. 국민의 정부 때 교원노조가 합법화된 후에,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내내 탄압이 이어졌어요. 이명박 정부 때는 일제고사와 전교조 시국선언을 이유로 교사들이 수십 명 해고됐어요. 국회의원이 전교조 명단을 공개해버렸던 사건도 있었고요. 그런데 저희가 소송으로 다퉈 전부 이겼어요.

전교조 명단 공개 사건은 제가 했어요. 저한테는 평소 잘 알고 지냈던 해직 교사를 변론한 것과 이 사건이 교육위 활동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아예 전교조에 법외노조 통보를 했죠. 전체 조합원 중에서 9명이 해직 후 재판에서도 패소하면서 더는 교사가 아니게 되었는데, 그 분들을 조합원으로 두고 있다는 이유로 법외노조 통보를 한 거예요. 사실 이건 노동법의 원리에도 반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이명박 정부에서는 법원이 보루 같은 역할도 했었는데, 박근혜 정부 들어서니까 이기는 판결도 적어지더라고요. 해직자를 조합원으로 둘 것인지 말 것인지는 노동조합의 자주권의 문제거든요. 지금 전교조는 법외노조 상태에 있지만, 이 문제는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새 정부에서 잘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번에 대법원장 되신 분이 대법원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에 대해 효력정지 결정을 하셨던 분이더라고요.

부당한 문제에 맞서는 건 오히려 쉬워요

최근에는 교원 임용절벽 문제도 심각해요. 그동안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인데도 교원 정원은 줄이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발령이 제한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임용고시에 합격한 교원이 3년 안에 발령을 받지 않으면 1급 정교사 자격이 만료되거든요. 이런 문제가 누적되자 더는 미룰 수 없어서, 서울시 교육청에서 올해 교원 신규 발령 인원을 확 줄여버렸어요.

그런데 동시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가진 기간제 교사를 정교사화 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죠. 일부 사립학교에서 정교사가 해야 할 일을 계속해서 기간제 교사를 채용하면서 ‘비용절감’을 추진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 임신·육아 휴직처럼 정말 대체근무자가 필요한 경우도 있거든요. 임용고시에 합격하고도 교사로 발령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교사로 일하고 있지만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소모품처럼 사용되는 사람들의 문제가 동시에 얽혀있어요. 그래서 기간제 교사 정교사화 문제에 대해서는 ‘비정규직 정규직화의 차원에서 경력이 있으면 정교사로 발령하는 것이 맞다’는 견해도 있고, ‘교사는 임용고시 등의 문제와 얽혀 복잡하기 때문에 함부로 결정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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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기간제 교사 정교사화 같은 문제에 비하면 부당한 일에 맞서 싸우는 일은 오히려 쉬워요. 교수를 파면해임한 학교와 싸워서 이기는 것, 징계 받은 학생들을 변호하는 것, 전교조 해직 교사들에 대해 다투거나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에 대해 싸우고, 국정교과서 저지를 위해 싸우는 일들 말이에요. 이런 일들은 싸워야 할 상대가 분명하다고 할까요? 그런데 기간제 교사 문제, 시간강사 처우 문제, 대입 수능 개편안 같은 정책 문제는 아직 국민도 정부도 아직 공론을 모아야 하는 과정이라고 보여요. 저희도 공부를 더 해야 할 거 같고요.

모여서 함께 해나갈 일이 아직도 많아요

교육 분야는 계속 이슈가 제기되고 있고, 우리가 앞으로 개척해나가야 하는 분야인 것 같아요. 어디에서 조사한 결과로는 이런 얘기도 있더라고요. 현 정부 정책 지지율이 대체로 60~70% 선인데 교육 분야는 이보다 훨씬 저조하다는 거예요. 교육 분야는 새로운 정책의 틀을 만들어가야 하는 단계예요.

제가 교육위 간사변호사, 위원장을 맡으면서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느낀 건데, 이른바 ‘진보진영’의 교육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도가 우리 생각만큼 높지 않아요. 경쟁 위주의 교육정책에 더 익숙한 거 같고요. 우리가 생각하는 교육정책에 대해 더 설명하고 공감대를 넓히고, 더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이 필요해요. 또 여러 가지 이슈가 제기되고 있어서 차근차근 공감을 모아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 많은 그런 곳입니다.

교육위의 이슈나 사건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교육위 위원마다 담당 분야를 정했거든요. 예를 들면 대학 분야는 하주희, 이영기 변호사님이, 사립학교법은 저와 이영기 변호사님, 초중등교육은 강영구, 탁경국 변호사님이 주로 맡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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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교육위 변호사님들이 인원은 많지 않지만 민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공익인권변론센터 송상교 소장도 교육위에서 활동하고 있고, 하주희 변호사는 지금 미군문제연구위원회 위원장이시고, 이영기 변호사님도 환경보건위원회 위원장님이셨죠.

사실 교육 사건들은 생각보다 진입장벽이 좀 있는 거 같아요. 교육 사건은 어떤 계기가 있어야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예를 들면 사대를 나오셨거나, 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많거나, 자녀를 키우면서 교육에 관심이 커졌다든가. 교육 분야는 새롭게 만들어나갈 부분이 많은 분야입니다. 새 정부에서 새로운 교육 정책을 수립하고 펼치는 과정에서 민변 교육청소년위원회가 해야 할 역할도 많이 있으니까. 많이 오셔서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금, 2017/09/0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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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행정법원, 서울고등법원, 대법원 재판연구관 등 18년 동안 법관으로 근무하면서 노동 재판 실무 편람과 국내 최초의 근로기준법 주석서인 근로기준법 주해 발간에 큰 역할을 했어요.
  • 그뿐인가요. 판사면서도 SNS에 한미 FTA 비준동의안 강행처리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공직자윤리위원회에 회부되기도 했는데, 동료 판사들이 옹호하며 나서 징계를 받지는 않았어요.
  • 그런데도 멈출 수 없었어요. 2013년에는 국방부장관 후보자 임명을 두고 공개적으로 반대한다고 했거든요.
  • 법원 내 사법개혁 논의를 주도해 온 연구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장도 했어요. 지금은 민변 회원이에요.
  • 요즘 일부 언론이 정부 요직을 장악한다는 바로 그 ‘우리법연구회’와 ‘민변’을 모두 관통하고 있는, 그야말로 ‘핫’한 나는, 최은배 변호사(사법연수원 22기)입니다.

 

 

이혜정 : ‘판사 최은배하면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했던 페이스북 글이 먼저 떠올라요. 당시 응원이나 비판도 많았겠지만, 특히 법원 내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최은배 : 사실 그렇게까지 이야기가 크게 번질 줄 몰랐어요. 그런 부분도 생각 못하고 올렸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죠. 글을 쓸 때는 페이스북 친구 200명 정도가 보고, 서로 공감하고 말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글을 밤 9시쯤 올렸는데 이틀 후 조간신문부터 조선일보에서 “이 사람이 이랬다더라”하는 식으로 보도하기 시작한 거예요. 제 일이 더는 제 일이 아니게 돼버린거죠.

그때 사용했던 말 자체는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었어요. 당시 이상득 의원이 미국 대사한테 했던 말이거든요. 이상득 의원이 동생인 이명박 대통령은 ‘to the core’ 그러니까 ‘뼛속까지 한미동맹에 대한 의견이 확실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했거든요. 이걸 약간 비틀어서 “그래서 FTA 했나보다” 한 거였어요.

 

사실 제가 FTA나 통상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FTA에 대해 오해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국회 비준 절차가 충분한 토론 없이 날치기로 진행됐고, 시민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잖아요. 국가 간의 문제이긴 하지만 결국 농림수산업을 희생시키고 공업, 특히 자동차를 더 팔기 위해서 우리 경제 안에서 형성되는 부를 밖으로 이전하는 것이고요. 이런 문제로 서민들이 더욱 고통당한다는 공감도 있었고요. 공직자로서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과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문제는 구분되는 일입니다. 지금도 공무원법 집단행동 금지 조항은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는 부정선거의 악몽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법에 못 박았지만, 사실 정치적 중립은 그런 데서 오는 게 아니거든요. 공직자가 의무를 다하는 것과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것은 양립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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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는 제가 무슨 말만 해도 반응이 득달같이 일어나는 상황이 됐어요. 나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보편타당한 가치에 대해서만 말하고 어딘가 휘말릴 수 있는 말은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를 들면 이 사건은 언론에 보도된 사건은 아닌데요. 2012년 대선 때 대선후보 토론회를 보고 페이스북에 “국가원수가 되면 외신 기자 앞에서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저렇게 아무 말도 안 하니 너무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썼어요. 그랬더니 다음날 바로 법원장이 ‘그러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나도 판사로서 나라 일을 한다고 앉아있는데, 정말 판사가 말을 못하게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2013년 국방부장관 후보자 임명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을 때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 걱정되고, 누구하고 토론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조용하게 페이스북에 올려봤다가 사단이 났어요.

 

남이 하는 말을 내 뜻과 맞지 않다고 배척하고 불이익을 주는 게 아니라 가만히 내버려두면 어떤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틀리거나 잘못된 의견이라면 자연히 사라지겠죠. 그런 사회가 빨리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고.

헌법에서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이렇게 네 가지 자유를 규정해요. 앞의 두 가지는 개인적인 표현이고 뒤의 둘은 집단적인 표현이죠. 40년 전에 처음 헌법을 공부할 때는 왜 ‘결사’가 표현의 자유 문제로 귀결되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모여서 노는 것도 결사이고,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러 모이고 동창 만나러 모이는 게 왜 표현의 자유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한참 후에 국가보안법 사건을 다룰 때에야 이게 왜 표현의 자유 문제인지를 깨달았어요. 어느 조직에 있느냐를 기준으로 상대의 생각을 재단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결사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 문제로 연결되더라구요. 우리나라는 반공이라는 이념 하나로 다른 의견을 완전히 배제해왔고, 또 이렇게 얻은 권력이나 이득을 지키려는 습성으로 항상 적을 만들어왔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법연구회나 국제인권법연구회 같은 모임은 ‘적’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잣대나 도구가 돼요. 옛날에는 ‘빨갱이’라는 말로 배제하면 다 통했는데 지금은 국민들이 ‘빨갱이’, ‘공산주의자’ 같은 말에 반응해주지 않으니 어떤 소수자를 만들어서 배제해요. 소수자를 만들어 냄으로써 상대를 배제하고 공격하는 일은 어떤 형태로든 빨리 극복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혜정 : 일반 시민들은 비슷한 정치적 표현으로 실제 기소된 분들이 많아요. 민변에서 표현의 자유 기금으로 도와드리기도 하구요.

 

최은배 : 표현의 자유에 대해 형법으로 제한하고 민사상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불이익을 주는 게 분명히 있다고 봐요. 사람들이 프랑스 식 관용, 즉, 똘레랑스의 훈련이 되면 사회적으로도 나 역시 저런 상황의 당사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역지사지가 가능할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요. 프랑스는 시민혁명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의 경험이 쌓였고, 2차대전 같은 비극의 피바람도 겪는 과정에서 똘레랑스를 확립할 수 있었죠. 우리나라도 동족상잔, 이념갈등 같은 피바람을 겪을 만큼 겪었는데.. 우리는 똘레랑스로 서로를 포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배제하는 양상으로 나타나요.

 

정치나 선거의 영역 안에서 이야기하자면, 이런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명분은 대체로 ‘선거가 혼탁해진다’ 이런 얘기잖아요. 옛날에는 일반 시민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 많지 않았죠. 미디어는 신문이나 방송같이 개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뿐이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욕설을 한다든가 그냥 확성기나 스피커에 대고 말하는 것,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는 것 정도였죠. 그런데 지금은 퍼스널 미디어가 발달했고, 이를 통해 의견을 표출하는 건, 보기 싫거나 듣고 싶지 않으면 피하면 되잖아요. 표현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한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요?

물론 서구에서도 홀로코스트 같은 사건을 옹호하는 등 반인류적인 발언, 혐오발언을 하는 것은 처벌해요. 이런 부분은 제한되어야 마땅합니다. 동시에 정당한 발언을 했음에도 ‘혐오발언’으로 몰려 처벌당할 위험도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 이론이 충분히 쌓여야겠죠. 혐오발언과 혐오발언이 아닌 것을 구분할 충분한 기준이 있다면 혐오발언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발언에 대해 제한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부터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나도 어떤 점에서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새기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학교 현장에서는 앞만 보고 가르치잖아요. ‘좋은 대학 가야 한다, 이런 게 행복이다, 노력하면 오늘은 괴로워도 나중에는 도움이 된다…’ 이런 이야기 대신 내가 실패를 겪거나 약자가 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고, 공동체 안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죠.

그래서 노동위원회에서 노동자의 삶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얘기도 하고 있어요. 다들 자라서 노동자가 될 텐데 노동3권 같은 기초적인 권리도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거죠. 노동자의 권리도 가르치고, 토론과 회의를 통한 민주주의의 진정한 면모도 겪어보게 해야 해요. 학교 다닐 때 그런 걸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때부터 배우기 시작해요.

 

법률가로서의 소양에도 문제가 있죠. 예를 들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단체법 이론을 이해하는데도 차이가 있어요. 총회를 소집하고 회의를 진행하고 토론하고 결의하는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그 결의는 무효잖아요. 이런 과정이 민법의 가장 기본이에요. 그런데 학교 다닐 때는 전혀 배우거나 겪어보지 못하다가 법조인이 되어서야 주입식으로 배우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사람들이 자라는 동안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푸는 방법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아요. 그나마 학교에서 전교조 교사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그 세대 때부터 조금씩 배우지 않았나 싶네요.

 

이혜정 : 그런데 오랜 법관 생활 후 어떤 계기로 민변에 가입하시게 되었나요.

 

최은배 : 제가 민변에 가입할 때 민변 회장이셨던 한택근 변호사님이 저와 연수원 동기입니다. 사법 연수원 때부터 같이 지냈고, 모임도 같이하고 해서 저는 변호사가 되면 민변에 가입하는 걸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민변 가입을 안 하면 한택근 변호사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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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들은 법원에 있다가 나와서 변호사가 되면 공직 출신이기 때문에 특정 단체에 가입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법원에 있을 때도 우리법연구회에서 활동했어요. 그때도 비슷한 프레임이 있었어요. 보통 법원행정처 업무로 들어가게 되면 상당수의 법관들이 우리법연구회를 탈퇴하고는 했어요. 법원행정처에서 일하다 보면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때도 있는데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이유가 많았죠. 그런데 저는 법원행정처에서 일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어요.

 

이혜정 : 판사 재직 시절에 바라보았던 민변은 어땠나요?

 

최은배 : 사실 제가 판사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기본적으로 민변에 아는 분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오히려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제 시각이 일반적인 판사들의 시각이 아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대학 때부터 조영래 변호사님을 비롯한 정법회 변호사님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법이 인권이라는 가치를 지키는 한 저는 민변이 모든 변호사의 가치를 포함할 수 있다고 봐요.

70년대에는 사법시험을 통과해 법조인이 되는 것이 운동의 차선책이 될 수도 있었는데, 80년대 초반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87년 이전에는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을 하거나 뭔가 양심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사법시험을 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 시절에 제가 사법시험을 치르고 법률가가 되었다면 제 주변 사람들도 지금과 달랐을 거고, 제 생각도 지금과 달랐겠죠. 87년 이후에는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사법시험을 부담 없이 치를 수 있게 되었고, 저도 주위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이혜정 : 그렇다면 법원에서 판사로서 민변을 바라보다가, 지금은 민변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민변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최은배 : 저는 법관 생활 하면서도 노동법을 많이 다뤘고, 민변에서도 노동위원회 활동을 많이 하고 있어요. 법원에 있을 때터 노동위원회 위원들과 이미 알고 지냈기 때문에 그 점이 좀 편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민변에 막 가입했을 때도 낯설거나 겉도는 느낌은 받지 않았어요. 다만 저는 법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전관예우’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거든요. 새내기 변호사님들은 민변 활동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저는 중간에 들어왔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가입한 새내기 변호사님들이랑 같은 스텝으로 함께하기는 어렵더라고요.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하면, 비슷한 법조경력에 잘 알고 지냈던 분들이 여기서는 너무 높은 자리에 계세요. 회장 하시고, 총장 하시고(웃음). 그렇다고 막 가입한 새내기 변호사님들과 같이 다니기에는 또 세대차이가 나고요. 활동하면서 그런 부분은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지만, 다들 너무 잘해주시기 때문에 민변에서 늘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혜정 : 혹시 판사일 때 할 수 없었던 일 중에, 민변에서 회원으로서, 변호사로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최은배 : 법원에 있을 때는 사실 생각할 겨를이 별로 없었어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오랫동안 고민하고 준비하지는 않았거든요. 판사를 잠시 머무는 자리라고 여기면서 언젠가 변호사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저는 판사로 계속 일할 생각이었어요. 여러 가지 문제로 사직을 결심하고 얼마 되지 않아 변호사가 되었고요. 판사로 일하는 동안에는 변호사들로부터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는 요구사항을 주로 들었죠. 피드백이나 모니터링 중심이었고요. 내가 변호사가 되면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나 준비를 하지는 못했고요.

대신 법관으로서 법원을 어떻게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건 있어요. 법원을 나오면 변호사가 되어 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죠. 민변에서는 사법위원회가 법원 개혁에 대한 일을 주관하고 계시죠. 저보다 전문성을 갖춘 분들도 계시고요. 저는 법원 안에서도 사법제도나 앞으로 법원이 추구해야 할 지향보다는 재판을 잘 하는 것, 어려운 사람이나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자를 위한 재판이 이뤄지게 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사법제도나 외국의 법관 양성, 외국의 사법 인사 제도 같은 분야는 저 말고도 전문성을 갖춘 분들이 많으니 오히려 제가 따라가기 바빠요.

 

이혜정 : 판사하고 변호사를 경험하셨는데, 그 중 어느 쪽이 더 적성에 맞으신가요.

 

최은배 : 판사는 국가의 녹을 받는 공직입니다. 사실 가정경제면에서 보자면 월급은 모자란 편이죠. 물론 판사가 받는 월급은 공무원 중에서 최고액에 가깝고, 흔히 ‘월급쟁이’라 말하는 분들에 비하면 많기는 합니다만, 반대로 변호사들은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니 능력에 따라서는 많은 수익을 올릴 수도 있지요. 그런데 역으로 경기 부침에 따라 집에 월급을 못 가져다 줄 수도 있더라고요. 저도 작년에 한 달 반 정도 집에 월급 가져다주기가 어려웠어요. 그래도 다행히 제가 노동법에 특히 전문성이 있다는 약간의 이름을 얻어서 사람들의 신뢰를 사는 면이 있어요. 그 덕에 다른 부장판사 출신들보다 형편이 좀 더 나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담인데, 흔히 아기가 태어나서 사주를 보면 관운이 있다, 재물 복이 있다, 혹은 장수할 거다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아버지가 제 이름을 지어준 작명소에서 제 사주를 봤더니, 행정 관료가 될 거라고 했답니다. 법관이 아니고요.

 

이혜정 : 판사는 변호사가 서면으로 정제하고 정리한 언어로 사건을 접하고, 변호사는 정제하기 전 날것 그대로의 사건을 만나게 되죠. 양쪽을 경험한 지금, 느낌이 어떤지 궁금해요.

 

최은배 : 일반론적으로 답하자면, 저도 절실하게 깨달았죠. 법원에 있을 때 변호사인 친구들이 “변호사가 서면으로 법원에 제출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는지 아느냐”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변호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법률 언어로 번역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예요. 변호사는 사건의 전후와 쟁점을 법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하고요. 그런데 이건 이성으로 파악하는 얘기고요, 사실 판사는 괴로워요.

봐야 하는 서면도 많고, 재판도 많고, 일에 시달리고, 짜증도 나고, 변호사하고 싸우기도 하죠. 가끔은 변호사의 서면을 받았을 때 “이렇게밖에 못하나”, “이런 신청은 무슨 의미가 있어서 하나, 안 해도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실제로 법정에서 “그쪽에서 받아봐라, 당신이 요청한 그 자료 받으면 제대로 쓸 수 있겠냐”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 판사일 땐 제가 판단하기에 부적절하거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취하시키라고 하기도 했는데, 변호사가 되니까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변호사 편에 서게 되더라고요. 의뢰인이 무리한 요구를 할 때는 “판사한테 오히려 인상만 망가진다”고 말리기도 하지만요.

 

변호사가 되어보니 알게 된 점은, 법원의 명령이 절대적이라는 거예요. 모든 기관이 법원의 명령을 핑계로 미룰 수 없어요. “판사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고요. 법원의 명령이 강력해요. 실제로 법원이 적극적으로 나서줘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사건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회사에서 영업비밀이라고 자료 요청을 거부할 때 법원이 명령해주면 훨씬 쉽게 풀리잖아요. 판사일 땐 몰랐는데 의외로 법원이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요. 법원이 강하게 나갈 때는 강하게 나가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변호사들이 많은 부분 더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도 법원이 소심한 태도를 보이는 부분이 많아요.

 

이혜정 : 작년에는 변호사님이 민변에서 신입변호사를 위한 강연도 하셨죠. 판사의 경험을 토대로 볼 때 좋은 변호사는 어떤 변호사인지, 후배 법조인들에게 팁을 주시다면.

IMG_0312최은배 : 사실 법조인이 되기 위해 고민하고 공부한 시간에 비하면 아무 내용 없는 답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서면은 공들인 만큼, 공부하고 쌓아온 실력만큼 나오게 되어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사실 판사 입장에서 가장 보기 편한 서면을 내는 사람들은 부장판사 출신인 변호사가 직접 쓴 서면이에요.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가 직접 자기 판결문을 쓰듯 써 낸 서면이 가끔 있거든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판사를 경험할 수 없고, 또 부장판사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더 적잖아요. 그러니 이건 특별한 일부의 이야기죠.

좀 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첫째 핵심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컴팩트하게 쓰는 게 중요합니다. 이야기 많이 하는 게, 서면 60페이지씩 써 내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고민하는 만큼 정제된 서면을 쓰게 됩니다. 분량을 늘리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해요. 판결문도 너무 긴 판결문보다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읽을 만한 판결문이 더 좋고요. 짧게 쓴다고 생각도 짧은 건 아니에요.

둘째는 국어 실력입니다. 법학 소양의 문제가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 그 변호사를 가르친 국어선생님이 누구인지 궁금해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부장판사가 되고 남의 글을 고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건데, 나이 드신 변호사님들 중에 서면의 문장이 항상 ‘것입니다’로 끝나는 분들이 있어요. “~할 것입니다” 이렇게. 그게 모든 문단에 나와요. 그러면 읽는 입장에서 지쳐요. 최근 문장 교정하는 법을 다룬 책이 있는데, 전문교정인이 ‘적·의를 보이는 것·들’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적, 의, 것, 들 이 네 가지만 주의하면 훨씬 깔끔한 문장을 쓸 수 있다고 지적하더군요.

중언부언하는 서면, 보여주기 식으로 분량만 길게 쓴 서면, 습관적으로 문장에 군더더기가 붙어 읽는 사람을 지치게 하는 서면. 이런 글쓰기와 국어 실력 문제가 두 번째 문제예요.

세 번째가 법학이론의 문제입니다. 본인이 공부를 충실하게 한 만큼 장기적으로 실력차이가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사법시험 세대에 빗댄다면, 민법 총칙 교과서 네 권을 다 읽은 사람과 수험서로 본 사람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길게 보면 노동법을 다룰 때도 민법을 성실하게 공부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정치한 논리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이혜정 : 서면이 중요하다, 판사님도 정성들인 만큼 본다, 글 잘 쓰기 위한 노력을 하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하죠. 그런데 가끔은 저 수많은 사건과 기록을 판사님이 정말 다 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해요.

 

최은배 : 기본적으로 눈에 들어와야 더 읽게 된다는 건 맞아요. 사실 세 페이지 정도 넘기다가 덮게 되는 서면도 있어요. 제목만 봐도 ‘했던 말 또 내는구나, 상대방이 서면 써냈으니까 반박하겠지’ 지레짐작으로 안 본 서면도 있었고요. 그런 재판에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서면이 몇 개 안 나와요. 소장, 답변서, 답변서에 대해 제출한 원고의 서면, 그리고 끝이죠. 나머지는 감정이 필요할 때, 혹은 중요한 증거 조사 결과가 밝혀졌을 때 보면 되고요.

민사재판도 재판이 수십 차까지 길어지는 재판이 많고 변호인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만, 자기가 원고라면 첫 번째 변론기일, 증거조사 이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해요. 법정에서 요구하는 것도 이 두 가지이고, 시간이 모자라 똑같은 말 그대로 쓴 똑같은 서면 내는 것보다 이 두 가지에 집중하는 게 낫다 싶어요. 변론의 기술보다 강력한 건 진실이에요. 사실관계가 우리한테 유리하다면 글도 간단히 핵심만 전달하면 되죠. 그게 아닌데 어떻게든 돌이키고 만회하려고 하면 말이 길어지고, 중언부언하게 되고 변명처럼 느껴집니다.

 

이혜정 : 지금 민변 활동 중에도 노동위원회 활동을 가장 많이 하고 계시잖아요. 노동법 전문가로서 최근 통상임금 판결은 어떻게 보시나요.

최은배 : 저도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사용자 입장이 되었어요. 도발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사용자가 큰돈을 버는 것은 위험부담을 떠안는 대가 아닐까요? 기업이 성공과 실패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는 사업적 위험을 감수한 결과 성공하여 큰돈을 벌었다면 할 말이 없어요.

그런데 사업 기반이 모두 마련되어있어 땅 짚고 헤엄치면서 들어오는 돈만 챙기는 기업도 있어요. 특히 지금의 통신사 같은 기업들이요. 그런 기업을 운영하는 CEO는 앉아서 1억 이상 급여를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고 스톡옵션으로 수십억씩 챙겨가기도 하죠. 그런 건 옳지 않다고 봐요. 주주들도 마찬가지고요.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기업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에요. 기업 그 자체가 기업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인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조직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세팅하는 것이 기업입니다. 사람의 조직과 사업 기반에서 재화가 생산되고, 용역과 재화가 결합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하나의 조직체고 용조물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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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의 기업은 회사라는 이유만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비용’ 취급하면서 기업 그 자체의 보전만을 가치로 삼고 있어요.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돈입니다. 매출이 적어서 임금을 지불하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 하더라도 그게 정당한 사업의 결과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상한 일이 아니죠.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비축해두는 유보금, 예비비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겠죠.

기업에서 실제로 일을 한 노동자들의 임금이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의 절반도 안 된다면 좀 이상한 일 아닐까요? 대기업의 순수익 중 일부는 국가가 세금으로 거둬들여서 돈이 되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에 분배해줘야죠. 결국 임금, 세금, 상품 원가를 제하고 나면 주주가 가져갈 이익이 그렇게 크지 않은 게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주주가 자본을 투입한 것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보상해주는 게 맞지만, 회사가 주주만의 것은 아니잖아요. 주주자본주의는 미국의 자본주의 형성 초기에 나타난 극단적인 이론이에요. 지금은 기업의 존재 이유는 주주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에 있다는 게 정설이에요. 기업의 기반은 그 회사의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첫째, 회사의 사업에 노동을 투여하는 노동자가 둘째입니다. 자본은 마지막이에요. 소비자, 노동자, 자본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기업입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기업과 노동관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회 문제가 해결될 거예요.

우리 사회는 노동자는 비용 지출을 발생시키는 대상으로만 보고, 이윤이 안 나면 인건비를 가장 먼저 깎아요. 일을 할 사람을 조직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는 기업의 존재 가치가 우선시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공헌은 ‘비용’으로 환산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판결을 본다면 임금을 더 주는 바람에 적자가 생겨도 그 때문에 기업이 망하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사람이 모이는 조직체이니 이 문제도 사람이 해결하겠죠.

 

이혜정 : 마지막으로, 요즘 법원개혁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어요. 가장 시급한 사법개혁을 꼽으라면 무엇을 꼽으시겠어요.

 

최은배 : 법원 내부의 문제라서 국민들이 실감하기 어려운 문제로는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력 문제가 있어요. 기업에서도 직급별로 권한이 구분되어야 하잖아요. 판사도 스스로 협의회를 구성해서 의견도 내야하고, 사법 현장에서 대법원장 개인의 판단에만 근거하여 행정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일하는 여러 판사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권력이나 권한을 분산해야 해요. 지금은 전국의 모든 법정이 일사분란하게 의자 개수까지도 대법원의 결정을 따르고, 법원장은 법원 안에서 기금 운영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권한을 모두 분산시켜야죠. 연방제 국가는 주 법원과 연방법원이 완전히 달라요. 우리나라도 법원 자체적으로 특색 있는 법정도 만들어보고, 재판 받으러 온 사람들의 의견이나 아이디어가 법원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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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법부가 국민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다른 게 없습니다. 판사 수 늘리고 법정 늘리고 법원 많이 만들어서 국민이 재판을 받을 기회가 보장되어야 하는 게 가장 급선무입니다. 판사나 사법부의 틀도 국회의 입법에 의해 결정되고, 행정부는 공무원의 정원을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크게 형성되어야 합니다.

최근에는 사실상 검사가 민사재판을 하고 있거든요. 판사가 모자라니 민사재판을 진행하는데 오래 걸려서 재산 분쟁이 일어나면 사기, 횡령, 배임 같은 형사 사건으로 해결하려 해요. 법원이 제대로 기능하면 재산 문제나 개인 분쟁을 민사 재판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검사가 하는 많은 일을 법원이 가져와야 하고, 그러려면 법원이 경찰서만큼 많아야 해요. 경찰서는 자치구마다 하나씩 있잖아요. 법원이 인구 50만명당 하나씩은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러면 검사가 형벌로 다스려 사회 질서와 사법정의를 지키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금, 2017/09/29-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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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이슈로 뜨겁다. 동성애와 동성혼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지난 5월 동성애자 군인들은 군형법 추행죄로 대거 잡혀갔고, 이번 10월 제주퀴어문화축제와 퀴어여성체육대회는 지자체로부터 미풍양속이란 이유로 장소가 불허됐다. 성 정체성과 성적지향을 포함해 다양한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차별금지법은 10년째 캐비닛 안에 잠겨있다. 성 소수자와 전혀 친근해 보이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성 소수자’로 살아남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한민국 최초의 트랜스젠더 변호사이자, 민변 6개월 차인 새내기 박한희 변호사를 민변 사무실에서 만났다. 당차게 대화를 이어가지만, 수줍은 웃음이 돋보이는 ‘트랜스젠더 여성’ 박한희 변호사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최은빈 : 국내에서는 최초로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변호사로서, 혹시 남다른 고충이나 보람이 있으신가요.

박한희 : 한국사회에서 트랜스젠더는 하리수씨 같은 연예인이나, 유흥업, 예체능 등이 대표가 됐어요. 변호사라는 전문직 또는 사무직에서는 대표가 안 됐고요. 그런데 제 기사는 그게 화제가 됐던 것 같아요. 페북에 알려지면서 응원 메시지를 많이 받았어요. 한 친구는 기사를 보고 트랜스젠더도 변호사가 할 수 있다고 부모님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고 하더라고요. 퀴어문화축제에 갔을 때도 젊은 트랜스젠더 친구들이 와서 기사를 보고 감동 받아서 주변에 얘기하고 다닌다고 하고요. 이런 얘기를 들으니까, 내가 한 선택이 어쨌든 젊은 친구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꼈어요. 사실 제가 한 선택도 나이가 많은 분들로부터 롤 모델을 받았던 거잖아요. “저도 하나의 롤 모델이 될 수 있겠구나”를 느끼면서 보람이 된 것 같아요.

고충은 사실 이게 최초이자 지금은 혼자잖아요. 그래서 “저로서 과잉대표 되지 않을까?” 그런 부담이 있는 거 같아요. 이거는 꼭 트랜스젠더 변호사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강의를 나가도 트랜스젠더를 실제를 본 사람이라고 질문을 하면 거의 손 드는 사람이 없어요. 한두 명 정도. 그 사람들은 살면서 제가 실제로 눈앞에 처음 보는 트랜스젠더인거에요.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지만, 나라는 존재 행동 하나하나가 트랜스젠더 전체의 문제로 해석되지 않겠냐는 조심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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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새얀 : 성 소수자로서 사회에서 약자성을 깨닫고, 이것을 극복한 과정이 궁금해요.

박한희 : 저도 못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었고, 무기력한 것도 많았어요. 남들과 다르다고 정체화한 건 중학생 때 13~14살 때였는데, 저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한 28살부터였나 싶어요.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존재고, 이렇게밖에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게 길었어요. 그에 따라 고충도 많았죠. 회사도 다녔지만, 우울증을 겪기도 하고 중간에 다 그만두고 싶어지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바뀐 계기는 “더 이상 이렇게는 살기는 싫다”는 것이었던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제가 커밍아웃을 결심한 건 29~30살 넘어가는 로스쿨 겨울방학이었는데, “내가 과연 이렇게 살아서 의미가 있을까? 계속 숨기고, 감추고, 피해 다녀야 하나?”라는 억울함이 있었죠. 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내가 개인적으로 잘못한 건 사실상 없는데 왜 이래야 하나?”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렇게 되는 데는 나만의 결정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도움들이 있었어요. 두 명 정도가 있는데, 한 명은 저보다 6살 많은 트랜스젠더 언니에요. 그 언니는 남자로 회사에 입사해서, 회사에서 커밍아웃했어요. 휴직하고 수술을 받고 성별정정을 해서 여자로 복직했고요. 지금도 그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어요. 그 언니를 지금까지 안 건 벌써 10년 정도 되는데, 그분을 알면서 저도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 안에서 커밍아웃하는 것과 회사 안에서 커밍아웃을 하는 건 난이도가 천지 차이거든요. 자기가 다니는 직장에서 해고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을 보면서 “나도 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해도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하지 않겠구나”를 느꼈어요.

다른 하나는, 로스쿨에서 커밍아웃했을 때, 법조계라는 보수적인 공간에서 “과연 나 같은 성 소수자가 받아들여질까”라는 고민이 있었어요. 그때 상담을 했던 분이 희망법의 한가람 변호사님이었어요. 저는 희망법에 상담 메일을 보냈고, 한가람 변호사님이 저한테 사무실로 한번 찾아오라고 하셨어요. 그때 변호사님은 자신도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했고, 주변 동성애자 친구들과 후배들도 많이 있지만, 다 커밍아웃할 수 있는 길이 충분히 있다고 얘기해줬어요. 오히려 운동하면서 바꿔나갈 수 있다는 얘기를 해줬죠. 그때의 대화가 지금 제가 희망법에서 하는 일이기도 해요. 성 소수자를 위해 일을 하는 계기가 되었죠.

류태광 : 대한민국에서 MTF 트랜스젠더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 여쭙고 싶어요.

박한희 :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게, MTF 트랜스젠더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운동적으로는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말을 요즘 쓰고 있어요. MTF이라는 말 자체가 기정성별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에 당사자 입장에서는 안 쓰는 게 좋겠다는 얘기도 많았어요.

그리고 사실 차별은 되게 개별적이에요. 똑같은 트랜스젠더라고 해도, 차별은 개개인에 따라 상황이 어떤지, 하는 일이 무엇인지, 트랜지션(성별 이행)을 얼마나 했는지, 수술은 했는지, 성별정정을 했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트랜스젠더가 이런 차별을 겪는다’를 나를 기준으로 일반화할 수 없어요. 일단 제 기준으로는 저는 수술을 하지 않았고, 할 생각이 없는 비수술 트랜스젠더에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지금 한국체계 내에서는 법성별을 바꿀 수 없는 상태고, 법적 성별은 남성이고 주민등록번호도 1번이에요. 지금으로서는 가장 크게 다가오는 건 신분증적 차별인 것 같아요. 신분증을 내세울 때, 내가 어디에 뭘 적어야 할 때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요. 은행을 간다든지, 병원을 간다든지, 인터넷에 무엇을 가입할 때도 남성이라고 적어야 가입이 되니까요. 주민등록증은 항상 갖고 다녀야 뭘 할 수 있잖아요. 번호도 항상 입력해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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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다는 게 법적인 차별에서 큰 것 같고요. 특히 저는 다행히 하는 일 자체가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이게 취업이랑 연관이 되거든요. 취업할 때 주민등록번호와 성별을 적어야 하기 때문에 취업이 많이 안 돼요. 자기가 여성적으로 보이지만 법정 성별이 남성이니까 취업이 안 되는 거예요. 면접에서 떨어지고, “당신은 왜 주민등록번호가 이래요?” 라고 물어보기도 하고요. 정규직 이런 곳은 사실상 취업하기가 아주 어렵고요, 서류에서부터 떨어지거나 면접에서 떨어지거나 실제로 붙은 다음에 알게 되어서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대부분 사람이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으로 종사하는 경우가 많아서 고용이 불안정해요. 또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사람을 판단할 때 가장 먼저 판단하는 게 성별인 것 같아요. 가령 “남자야?, 여자야?”, “재 그거 아니야 그거?” 등. 제가 생각하기에 한 3~4개월에 한 번씩 겪는 것 같아요. 되게 비일비재한 것 같아요.

류태광 : 방금도 언급됐지만, ‘성 정체성’은 외관상 드러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박탈당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요 자연히 빈곤에 더욱 취약할 것 같고요. 트랜스젠더와 빈곤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한희 : 실제로 2014년에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성 소수자 3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거든요, 전체적인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 실제 트랜스젠더 집단의 평균소득이 가장 낮게 나왔어요. 일본에서도 성소수자 직장 환경 실태 조사를 하는데 항상 트랜스젠더 집단이 가장 수입이 낮고 이직률이 높고 근속기간이 짧은 것으로 나와요.

이게 악순환인데 우리나라는 수술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돈을 벌려면 취업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 했으니까 성별정정이 안돼요. 그래서 취업을 못 해요. 취업을 못 하니까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 해요. 그러니까 취업을 못 해요. 이게 계속 악순환이 되는 거예요. 20대의 10년을 거의 돈 모으는 데에 쓰게 되죠. 비정규직이나 공장 일 하거나 알바하면서 모아야 하니까 5~6년, 길게는 10년, 이렇게 걸려서 그 일 하나만 하는 경우도 많고요.

트랜스젠더와 빈곤은 되게 복합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고용상 차별을 금지하는 것도 당연하고, 불필요하게 이력서에서 성별 표시를 안 하는 것도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굳이 사람이 살면서 법적으로 성별이 요구되는 직장도 있겠지만 그게 꼭 필요하지 않은 직장도 있잖아요. 성별정정 요건을 완화하는 것도 필요하죠. 여러 가지 제도적인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빈곤이나 취업, 노동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민경원 :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요건과 관련해 법률이든지 판례든지 어떤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박한희 : 지금 현재로선. 우리나라보다 더 엄격한 요건으로 허가되는 나라는 거의 없어요. 그보다 엄격하면 허가를 안 해주는 나라고요. 대법원의 경우 성별정정은 위에서 허가해주는 거고, 허가해주기 위해서는 판단을 해야 하고, 판단하기 위해선 판단 기준을 굉장히 엄격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가장 큰 틀은 이게 권리라는 걸 인식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법 앞에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권리, 거기서 도출되는 게 내가 나의 성별을 법 앞에 인정받을 권리, 다른 사람과 차이 없이 내가 원하는 성별을 법 앞에 인정받을 권리요. 세계 인권 선언에서도 그렇고 우리 헌법에서도 반영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걸 권리라고 생각하고 출발하면 의문이 되는 거죠. “그러면 이게 내 권리인데, 내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 이것도 수술하고, 저것도 수술하고, 이것도 고쳐야 해? 이게 정말 내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 정당한 요건이야?“

결국, 프레임을 먼저 바꾸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애썼으니까 위에서 허가해주는 게 아니라, ‘너희 권리를 제한할 건데 이런 거로 제한하는 게 정당화될까‘라고 고민해야 하죠. 그래서 국제적인 추세는 최근에 아르헨티나 덴마크 몰타 등 6개 나라는 아무 조건이 없어요. 일종의 신고에요. 내가 ’성별을 바꿉니다‘라고 신고를 하면 ’바꿔줄게‘ 이런 식이에요. 가령 덴마크 같은 경우는 성별을 바꾼다고 하면 6개월 정도 숙련 기간을 둬요. 아일랜드는 이런 숙련 기간도 없어요. 아마 동성혼이 점차 늘어나는 것처럼 자기 결정권에 기반을 둔 성별정정이 늘어나지 않을까 싶어요. 자기가 결정해서 하는 성별정정. 그쪽으로 방향이 바뀌지 않을까. 우리도 언젠가는 한번 바뀔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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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원 : 외과 수술 자체가 되게 위험하고 평균 수명도 확 줄어든다고 들었는데, 그런 걸 이렇게 법이 요구하는 것 자체가 너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박한희 : 수술이 되게 위험하진 않아요. 수명이 확 떨어지지도 않고요. 트랜스젠더 오해 중의 하나가 ‘오래 못 산다’가 있는데, 모든 외과수술이 당연히 위험성이 있고 신체적 부담도 있지만 죽는 수술은 아니잖아요. 그것과 비슷하죠. 그렇지만 국가가 그런 수술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돼요. 우리 헌법은 신체의 자유와 운전성을 보장하는데 내 신체를 국가가 훼손하겠다는 거죠. 네가 너처럼 살기 위해서는 국가가 너한테 수술을 강제해서 너의 신체를 훼손하겠다는 거니까요. 사실상 국가가 외과수술을 강요하는 거예요. 이게 생식기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옛날에 우생학적 절차처럼 국가가 불임수술을 강제하는 것과 같죠. 실제로 작년에 스웨덴 판결에서 트랜스젠더 수술 여건을 없애는 동시에 그동안 수술을 받았던 트랜스젠더에게 국가 배상을 해줬어요.

김민주 : 비교법적으로, 비교사회학적으로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가 성별정정과 관련해 특히 모자란 점이 어떤 지점이라 생각하시나요?

박한희 : 우리나라가 가장 특히 모자란 점은 이건 우리나라에만 있는 요건인데, 우리나라는 미성년자가 성별정정을 못해요. 부모 동의서를 받아야 해요. 사실 이건 법적으로도 말이 안 돼요. 성인의 법률 행위가 부모 동의서를 받아야 하는 행위죠. 심지어 법원에 따라서 이건 판사 재량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곳은 10년 전에 이혼한 아버지의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해요. 다행히 최근 몇몇 법원들은 사유서를 제출하면 대체는 해줘요. 사람에 따라서 수술을 위한 돈은 사실 모으면 돼요. 그러나 부모님의 설득은 자기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부모님이 종교적인 이유로 절대로 허가를 안 해주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오히려 처음부터 포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 요건 자체가 있는 건 정말 이상해요. 이건 정말 한국만 있거든요. 일본도 없는데 이게 왜 들어왔는지 모르겠어요.

최은빈 :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위해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하신건가요?

박한희 : 사실 변호사는 성 소수자 인권운동을 위해서 한 건 아니었어요. 제가 법조인이 된 건 좀 두루뭉술해요. 들으면 이상할 수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회사 다니기가 싫었던 것 같아요. 제가 삼성엔지니어링 건설회사를 2년 다녔는데, 거기 규율이 되게 심하거든요. 항상 양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해요. 머리가 귀만 덮어도 선배가 지나가면서 “한희씨 머리 좀 잘라야겠는데? 미용실 좀 갔다 오지.” 이래요. 저는 그런 것들이 되게 싫었어요. 그래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로스쿨이나 의전을 생각했어요. 전문직을 가지면 좀 자유롭잖아요. 그러면서 나 같은 트랜스젠더, 성 소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이 뭘까, 전문직이면서 동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은 뭘까를 고민하기도 했어요. 의사는 정신과 의사를 생각했고, 변호사는 법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의전과 로스쿨을 놓고 비교를 했는데, 의대를 다니는 친구가 의대는 규율이 빡세다 하더라고요. 의대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머리도 못 기르고, 슬리퍼도 금지하고, 반바지도 못 입게 하고요. 그래서 의대는 가면 안 되겠다, 회사랑 다를 바가 없겠다고 생각해서 로스쿨을 가자고 선택했어요. 당시에는 운동적인 차원까지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아요. 단지 내가 변호사를 직업으로 가지면, 사무실을 차렸을 때 어떤 형태로든 성 소수자 의뢰인에게 뭔가를 할 수 있겠다 정도였죠. 제가 이렇게 직접 현장에서 뛰는 활동가가 되겠다는 생각까지는 안 했던 것 같아요.

류태광 : 6개월은 짧으면 짧은 기간인데 혹시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소송을 수행하셨다면 소송이 있을까요?

박한희 : 제가 처음 희망법에 들어와서 했던 게 기지국 수사에 대한 위헌 소송이에요. ‘통신비밀 보호법 제13조’ 또 ‘기지국 수사’라고, 소위 말하는 검찰이나 경찰이 사건 현장 인근에 일어난 모든 전화번호를 수집하는 수사가 있어요. 이게 희망법에서 2013년 첫 헌법소송을 했던 건데, 사실상 헌재에서 계속 묶어두고 있다가 이번에 공개변론을 열었어요. 제가 들어온 7월에요. 주심은 한가람 변호사님이었는데, 변호사님이 이거같이 하자고 해서 들어 간지 일주일 됐는데, 헌법 소원 변론 요지서를 써오라고 했어요. 정말… 변시할때도 그런 건 안 쓰거든요. (일동웃음) 헌법재판소 변론 요지서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데, 써오라고 해서 써와서, 첨삭 받고 고치고 고쳐서, 어떻게 했어요. 성 소수자 인권은 저도 알고 있고 활동하면서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건 정보 인권적인 내용이니까 개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7월이면 대통령을 탄핵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인데, 말로만 듣던, 그 대법정에 공개변론을 하러 간 거예요, 제가. 저는 아직 수습이니까 방청석에 앉아 있었지만, 어쨌든 2개월 만에 거기 간 거니까, 엄청 떨렸죠. 그래서 가족들한테 전화하니까 너 벌써 거기 가냐고 하더라고요. (일동웃음) 왜냐하면 헌법 소송은 안 하면 정말 안하거든요. 본인이 의도하지 않으면 안 하게 되니까요.

류태광 : 정치, 경제, 언론 등 산적한 적폐가 많기 때문에 성 소수자 인권은 ‘나중에’라는 주장도 일각에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주장에 하시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

박한희 : 성 소수자 인권이라는 게 마치 성 소수자만 챙기는 것 같지만, 어떤 인권이 하나의 인권으로 분리 돼서 떼놓고 단계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인권은 다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차별도 사회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죠. 소수자 인권이 말하는 건 결국 차별이에요, 사회적인 차별. 사회적으로 누군가가 차별을 받고 있는데, 여기에 왜 나중이 있고 지금이 있죠? 오히려 그게 가장 큰 적폐가 아닌가. 권력적 차별이나 경제적 차별, 노동 차별 등이 다 복합해서 일어난 게 이전 정권의 문제였는데, 그 차별이라는 적폐를 무시한 상태에서 사회적 경제적인 개선을 이룰 수 있겠느냐 싶어요. 사실 그건 당연히 같이 가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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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 : 법조인으로서 성 소수자 인권 실현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박한희 : 성 소수자 운동 전체에서 얘기할 수 있는 건, 저번 제네바 UPR(Universal Periodic Review)에 가서 얘기한 건데, 일차적으로는 군형법 추행죄죠. 우리나라는 징집국가로써 모든 남성이 군대에 가고 그 군대 문화의 영향이 사회 전체에 미치고 있기 때문에 군형법 추행죄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징적인 사회적 조항이에요. 군형법이 지금은 처벌하고 있지만, 처벌을 안 한다고 해도 성 소수자는 언제든지 범죄자가 될 수 있고, 이등 시민이 될 수 있는 상징적인 조항이기 때문에 이거는 무조건 없애야 할 조항이에요.

두 번째로는 입법과제로써 얘기할 수 있는 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에요. 이건 벌써 10년째 얘기되고 있지만 아직도 제정이 안 되고 있어요. 성적 지향, 성 정체성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은 기본 틀인 것 같아요. 누군가가 누군가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자가 아니라는 걸 약속받고, 동시에 누군가가 누군가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틀이 깔려야지, 그때부터 최소한 구체적인 제도적 보장으로 무엇이 필요할지를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평등이라는 틀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것 같아요.

그리고 또 뽑자면, 과제로써 하고 싶은 건 교육. 교육부에서 만든 국가 수준의 성평등 성교육 표준안은 성 소수자 얘기가 전혀 없어요. 사실 우리는 교육부에서 만든 교육안에 대해 계속 폐지 운동을 하고 있어요. 표준안은 ‘동성애는 인권의 문제이므로 성교육에서 가르치지 않음’이라고 앞에 써놨어요. 동성애는 인권과 사회 이런 데서 가르치지 성교육에서 가르치지 않고 있죠. 교육현장에서 교육이 되어야지, 그 사람들이 나중에 더 자라서 어떤 의견을 실제로 낼 수 있고, 사회적으로 의견이 반영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김민주 :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십 년 째 공회전하고 있는데 이 제정을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박한희 : 되게 복합적이겠죠. 사실 처음에 가로막은 건 재계와 교회의 반대였어요. 교회는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렇게까지 아니었죠. 오히려 재계의 반대가 최종적일 거라 생각해요. 비정규직 차별 금지나 학력 차별 금지 등 지금 나오는 블라인드 채용처럼 이런 걸 하면 저항감이 있으니까요.

정부랑 국회가 의지가 없는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해요. 사실 필요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정부는 왜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차별이라는 게 지금 되게 복잡한 문제라서요. 사회적으로 우리가 평등이 아직 확산이 안 됐을 수도 있어요. 또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명제는 동의하지만, 어떤 게 정말 차별받지 않는지에 대한 의식도 필요한 거니까요. 사실 그걸 끌어올려야 하는 정부는 사회적 논란, 사회적 합의라는 이유만으로 방치하는 문제도 있을 수 있고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동력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여성 노동, 장애, 이주, 성 소수자, 거의 모든 분야의 114개 단체가 연대하고 있어요. 전방위적으로 캠페인과 서명운동 등 여러 가지를 하고 있어요. 대중인식 개선과 차별이 뭔지에 대한 간담회도 하고, 정부 대상으로 법안을 만드는 것도 하고 있어요. 그래서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공회전하는 이유는 상당히 복합적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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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광 : 얼마 전 지자체가 제주퀴어문화축제나 퀴어여성체육대회를 위한 장소를 불허한 사건이 있었는데, 성 소수자 차별은 아직도 가시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박한희 : 제주퀴어문화축제는 오늘이 집행정지기일이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그건 제가 직접 하지는 않았고요. 퀴어여성체육대회는 제가 기획단이에요. 제가 차별받은 당사자에요. (일동 웃음) 불허 통보를 받고 실제로 면담도 갔어요. 이건 지금 인권위 진정을 써서 내서 인권위 진정에 들어가 있는 상태고요. 얼마 전에 궐기대회도 했었는데, 그것도 항의하는 것이었죠. 고민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퀴어여성체육대회는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살면서 너무나 편하게 가는 체육대회가 성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불허를 당한 것은 일상에서 차별을 잘 보여줬던 것 같아요. 체육대회는 학교 운동회부터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 열리거든요. 이런 것들을 좀 더 의미를 살리고 얘기하면 우리가 지금 어떤 권리를 빼앗기고 있는 건지 얘기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런 일을 당하니까 사람들이 차별금지법이 없어서 내가 무슨 차별을 받는지 확 깨닫게 되었다는 거예요. 넓은 권리에서 ‘건강권을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주거권을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잘 와 닿지 않는데, ‘내가 공을 차고 싶은데 못 차게 한다.’라고 하면 피부로 느껴지니까, 좀 더 얘기할 수 있고 의미화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좀 더 공격적으로 나갈 필요도 있는 것 같고요.

최새얀 : 로스쿨에서도 LGBTQ를 삶으로 사는 법조인들도 많을 텐데, 미리 경험한 입장에서 예비 퀴어 법조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박한희 : 할 말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로스쿨이 생기면서, 로스쿨이 LGBT퀴어들을 끌어들이는 것 같아요. 주변에서 실제로 많이 가거든요. 일종의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는 거죠. 전문직이라는 직업적 안정성, 사무직을 가졌을 때 비해서 전문직을 가졌을 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에 로스쿨을 많이 오는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도 이 법조에서 끝날 것으로 생각했어요. 로스쿨을 들어왔지만 들어와서 커밍아웃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안 했었거든요. 로스쿨 들어온 이유는 그냥 커밍아웃 안 하고, 남자 변호사로 살면서 성 소수자를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들어왔어요. 실제로 저 주변에 그냥 법조인이 아닌 커뮤니티의 트랜스젠더분들도 “너 커밍아웃하면 끝난다, 너 법조계에서 대체 어떻게 커밍아웃할 것이냐, 말이 되냐“라고 했는데, 끝나진 않더라고요. 당연히 그게 항상 좋은 결과로 나온다고 볼 순 없지만, 그냥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특히 게이 같은 경우에는 게이 법조회라고 있어요. 퍽퍽한 법조계 현실에서 게이다움을 잃지 말기 위한 게이 법조회가 있거든요. 한 오십 몇 명 있어요. 혹시 게이분이면, 거기를 가입해도 좋고. LGBT 법조회도 만들고 싶은데 아직 못 만들고 있지만, 아마 점점 만들어질 거예요. 현재 로스쿨생이나 현직 법조인을 대상으로 여름마다 ‘LGBTI 법률가대회’도 있어요. LGBTI 법률가들도 법조회의 형태로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고요. 어쨌든 본인이 항상 모든 걸 드러내고 살 순 없지만, 어떻게든 숨을 틀 수 있고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 그런 것들이 점점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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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빈 :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 따로 있으셨나요? 질문지에 없어서 아쉬웠던 점, 말하고 싶었던 게 있으신가요?

박한희 : 저희 희망법은 정부와 기업의 후원을 받지 않고, (일동 웃음) 민변 회원분들 많이 후원해주세요.

월, 2017/11/06-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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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혁1

 

대설주의보가 내린 빙판길 위를 거침없이 달리는 변호사. 민변 언론위원장 이강혁 변호사를 만나보았다. 9년 경력의 기자였던 그는 지금 법조인으로서 언론의 영역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7년 만에 파업에 마침표를 찍은 MBC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동시에 여전히 아픈 손가락인 KBS와 언론 생태계 전반을 걱정하는 그의 솔직한 생각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반쪽짜리 성공으로 끝날 수 없는 돌마고(돌아오라 마봉춘 고봉순) 파티의 아름다운 피날레를 위해 오늘도 이강혁 변호사는 달린다. 아이스 스케이팅도 마다하지 않는 언론 지킴이 이강혁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강혁최종

 

민변 언론위원회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특히 언론위원장으로서 맡은 직무는 무엇인지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언론위원회는 영어로 대외적으로 소개할 때 ‘committee on media’, 즉 ‘언론매체에 관한 위원회’예요. 하지만 언론의 자유는 좁은 의미의 언론매체만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표현의 자유 전반으로 이해되기도 해서, 그 모든 것을 다 하냐고 묻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잠재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도 있고 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역사적으로 언론위원회는 언론 매체 중심으로 활동을 해왔어요.
처음 언론위원회 조직을 만든 안상운 변호사님께서 언론매체의 문제, 그중에서도 언론의 왜곡·과장 보도로 인한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시작했어요. 이걸 중심으로 오긴 했지만, 활동 영역을 넓혔어요. 언론보도 피해자 구제에서는 언론이 대상화되어있지만, 언론을 중심에 놓고 언론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활동도 하고 있어요.
정리하자면, 활동영역의 기본은 언론 보도의 피해자 구제 지원이에요. 그 유관분야로 우리 민변을 언론과의 관계에서 수호하는 역할도 하고 있어요. 민변 회원들도 언론 보도의 피해가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특히 조·중·동에 의해 종북으로 매도당하고 공격받기도 해요. 그때 언론위원회가 소송을 대리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언론매체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언론매체 내부에서의 개혁운동 같은 것을 지원하기도 해요. 대표적인 예로 현재 방송개혁을 위한 양대 공영방송 파업에 결합하여 지원하는 활동을 들 수 있고요. 조금 더 나아가서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언론의 자유 개념이 포괄적이기 때문에 더 폭넓게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둔 채 다양한 관심을 두고 추가의 활동 영역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분들이 오셔서 어떤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폭이 넓어질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하는 위원회입니다.

9년 넘게 신문기자 생활을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계기로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신문기자가 된 것 자체가 투철한 계획이나 적성이라든가 장래 진로와 전망을 확실히 정리한 상태에서 되었다기보다는 상황에 의해 불가피하게 된 면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당시만 해도 보편적으로 민주화운동·학생운동에 많이 참여하는 분위기였고, 저도 그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운동에 참여했어요. 그 과정에서 감옥에도 다녀오다 보니 소위 말하는 블랙리스트 대상자가 되었고요. 그래서 다른 분야로 갈 수는 없었고요. 노동운동을 하거나, 언론사도 다른 언론사가 아닌 ‘한겨레신문’ 밖에 대안이 없었어요. 이 두 가지의 선택지 가운데에서 고민했는데, 나름대로 학생운동도 하고 그 당시에는 투철한 혁명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하긴 했습니다만, 저는 백면서생 스타일이고 미국식 자유주의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고 급진주의적인 성향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여러모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기자 생활을 했습니다.
사실은 직업으로서의 기자 생활이 아주 잘 맞았던 것 같지는 않아요. 우리 언론사들에서는 제도의 틀에 맞서 소위 ‘곤조’, 즉 근성을 부리고 거칠게 싸우며 공격적으로 하는 것이 권장되는 분위기거든요. 그래야 특종기사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최근 문재인 대통령 중국 방문 과정에서 중국 경호원들과의 충돌과정에서도 (관련 기자님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편린이 드러났죠. 이것이 제 서생적인 기질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겨레신문 동료들이 인간으로서, 그리고 우리 시대에 살면서 품는 지향성 면에서 굉장히 존경할만한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우고 즐겁게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직업적으로 안 맞는 부분들 때문에 계속 고민을 했죠.
그러다 정권 교체(김대중 대통령 당선)가 이루어지고 (표현이 왜곡되어 들릴 수 있고 한겨레에 계신 분들이 오해할 수도 있어 조심스럽지만) 한겨레신문이 일종의 여당지가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굳이 그곳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고 개인적으로 더 하고 싶은 일, 더 맞는 것을 찾아도 될 것 같아서 다른 직업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퇴직하고 처음에는 사법시험을 준비했는데 건강 문제 등으로 실패했죠. 그 후 생계를 위해 고등학생 대상 논술학원 강사를 몇 년 했습니다. 그러다가 보다 안정적인 활동을 하려면 아무래도 변호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마무리 짓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로스쿨 1기로 들어가 변호사가 되었고, 이 시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기자가 직업으로서 맞지 않은 것 외에 구체적으로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 그 점에 관해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안타깝고 아쉽게 생각했던 점이 있어요. 한겨레신문이 좋은 선·후배가 모인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어떤 기사를 쓰기 싫은데도 써야 하는 것 등이요. 타사처럼 위에서 억압하거나 안 좋은 기사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도 의견 차이가 있어요. 제가 워낙 개인주의적이고 못된 성미라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면에서 ‘나 혼자 간섭받지 않고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봤을 때 변호사가 떠올랐어요.
또, 언론사 기자 생활이 소모적인 부분이 많았는데, 자기계발을 하면서 공부를 하고 실력을 쌓고 싶었어요. 일반적인 학문 공부를 하는 것이 제일 좋겠습니다만, 생계에 대한 압박이 있어 도저히 그 나이에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법학을 다루는 변호사를 선택했는데, (신문사의 동료들에게 죄송하지만) 하고 싶은 일이라는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지금이 기자 때보다 더 맞는 것 같아서 후회 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6

 

변호사가 된 후에 여러 소송을 수행하셨을 텐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소송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작년에 신문법시행령에 대해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결정을 얻어낸 헌법소원 사건(2015헌마1206)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박근혜 정권이 (이미 드러난 공영방송 등에 대한 개입 외에) 인터넷언론 쪽에도 개입을 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2015년 당시에도 이런 정황을 포착하여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어요.
인터넷신문의 기준은 신문법과 신문법시행령에 규정되어 있는데, 기존에는 상시로 고용해야 하는 취재 및 편집 인력을 3인 이상 요구했거든요. 그런데 문체부에서 기업들 대상의 신뢰하기 어려운 설문조사 결과 등을 내세워 ‘인터넷신문들이 기업체를 공갈하고 안 좋은 쪽으로 쓴다, 언론계의 물을 흐리고 질을 떨어뜨린다’는 등의 논리를 펴면서, 신문법시행령의 인터넷신문 인력 기준을 3인에서 5인으로 개정했어요. 인터넷신문 업계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1인 미디어나 2인, 3인 미디어 수준이 많은 것이 인터넷신문의 현실이거든요. 당장 사람을 더 고용한다는 것은 인건비가 들어간다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이런 매체들은 더 많은 자본을 투자하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 문을 닫으라는 이야기인 셈이에요. 그때 당시 조사한 바로는 절반 이상의 기존 인터넷매체가 폐업을 고민했었고, 그래서 충격이 컸죠. 이 시행령 개정 배경으로는 앞서 언급한 나름 내세운 명분은 있었지만, 사실은 인터넷 언론을 완전히 장악해나가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고 봤습니다. 신문 쪽에서는 ‘한경오 진영’이 있긴 합니다만 조·중·동이 꽉 잡고 있고, 공영방송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물론 종편에서도 JTBC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이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통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야가 ‘인터넷’ 언론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기준 요건 강화를 통해 많은 인터넷신문사들의 문을 닫게 하고 시장 자체를 재편하는 계기로 삼으려 했던 거죠.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1인 미디어가 가능한 시대잖아요. 소수의 인력으로 하더라도 특정 전문 분야를 성실하게 지속해서 취재하고 보도한다면 기존의 대형매체들이 하지 못하는 영역을 다룰 수 있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거든요. 물론 영세한 업체 중 문제가 있는 업체도 있긴 하지만,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다 태우면 안 되듯이 당시 개정한 시행령처럼 과도한 기준을 요구해서 이에 미치지 못하는 매체들은 모두 없어지게 하면 안 되는 거죠. 이런 측면에서 너무 획일적이고 지나친 입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어요.
사실은 헌법재판소 재판관들도 신문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한 기존 정권에서 임명한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헌법재판소 재판관들도 최소한의 자유주의적인 언론관에 입각해서 이건 너무 심하다고 인정한 것 같아요. 그래서 7:2로 위헌이라는 판단을 받았고, 덕분에 많은 인터넷신문들이 문을 닫지 않고 살아나게 됐습니다. 그종사자 분들한테도 그렇고, 무엇보다 언론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칠 시도를 막아냈다는 측면에서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현재까지 KBS는 파업 중이지만, MBC는 최근 김장겸 사장이 해임되고 해직된 최승호 PD가 사장으로 내정됐습니다.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남다른 감정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일단 저 자신도 그렇고, 많은 분이 양대 공영방송인 KBS와 MBC의 언론인들에 대해서 많이 실망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2012 MBC 파업이라든가 열심히 언론을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한 분들이 계시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방송이 엉망으로 왜곡돼 갈 때 무엇을 하셨는지, 더 적극적인 노력이나 저항을 할 수는 없었는지 등에 대해서 의심이나 약간의 불신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파업을 MBC는 마무리했지만, KBS는 지금도 진행하고 있잖아요. 소위 무노동무임금 원칙에 의해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러 달 파업을 하고 계시는데, 몇 달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KBS 같은 경우에는 최근에 사태의 분기점으로 강규형 이사 해임 사전통지가 되면서, 저도 파업을 이끄는 새노조 위원장께 “이젠 파업을 접으시라, 너무 힘드니까”라고 그렇게 권유를 많이 했는데 “힘들더라도 끝까지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교훈이 남는다.”라며 투쟁을 끝까지 이어가겠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이런 모습들과 아울러, 영화 <공범자들>을 통해 2012 MBC 파업 이후 지속해서 싸워오고 고통받아온 뜻 있는 방송인들의 노력을 생생하게 눈으로 보면서, 적어도 이런 움직임과 운동을 주도하는 분들은 나름대로 다시 기회를 가질 자격과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과 믿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파업에 참여하는 분 중에는 대세를 따라서 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것처럼 꾸준하게 싸워오고 지금도 절절하게 실천하는 분들은 정말 진정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분들을 중심으로 공영방송이 개혁되고 제자리를 찾아갈 희망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5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동안 공영방송 장악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핵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무섭게 했죠. 국정원까지 동원해서요. 특히 노조가 저항하니까 플랜을 만들고 그 플랜에 맞춰 해바라기 언론인들에게 지시를 내려서 노조 활동을 하거나 뜻있는 언론인들을 한직으로 부당인사를 하는 등의 식으로요. 물론 정권이란 가해자가 있고 이것이 핵심이지만, 이외에도, 주체적인 반성이란 면에서 본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언론사 내부에서 양지를 좇은 해바라기 언론인들의 문제이겠죠.
정권이나 자본 등 외부의 유혹이나 압력은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거든요. 그래서 내부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는 주체의식이 중요한데, 그런 부분에서 타락한 해바라기 언론인들이 호응을 했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 악화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특히 결과적으로는 비슷했을지 모르겠지만, 많은 국민들이 공영방송에 대해 심각한 불신을 가지게 됐던 부분이 그런 것들 때문이었으리라는 면에서 굉장히 그 문제가 컸죠. 노조 파업 하시는 분들도 주목하고 있는 사안인데, 정권의 언론장악을 내부에서 협조해주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한 분들에 대해서 법적인 차원이든 도덕적이고 직업적인 차원이든 확실한 책임추궁과 청산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론인들이 언론의 자유를 보장받고 중요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절대로 그렇게 처신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교훈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변 언론위원회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파업에 연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매주 금요일에 불금파티라고 외부 지원 단체 연대 집회가 있습니다. 저나 위원님들이 참석하면서 연대를 꾸준히 했죠. 개별적인 법률 지원에 대해서는 대표적인 예로 방송통신위원회에서 해임통지를 한 KBS 강규형 이사 사안을 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애견 동호회 활동을 하는데, KBS 법인카드로 동료 동호인들에게 밥을 사주는 등의 비리가 드러났습니다. KBS 이사들 문제가 제기되니까, 애견 동호회 분들이 KBS 노조에다가 제보를 한 거죠. 그런데 그걸 알고 그분이 제보를 한 사람들에게 협박성 문자를 여러 날 보냈습니다. 모 유명 사립대 교수님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수님의 말이라 생각하기 힘든 폭언적 내용이 가득한 채로요. 그래서 언론위 소속 위원이신 서창효 변호사님이 KBS노조를 대리해 강부영 이사를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파업에서 내용으로 봤을 때 제일 크게 쟁점으로 부각됐던 것은 ‘공공기관 경영진의 임기를 정권교체 과정에서 보장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2008년도에 노무현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KBS에 정연주 사장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을 이명박 정권에서 쫓아내기 위해서, 어떻게 보면 외형적으로는 지금과 비슷하게 KBS 이사를 바꾸고 이어 사장을 바꾸는 수순을 진행했습니다. 나중에 판결을 통해서 위법이라는 판단을 받긴 했습니다만, 이미 임기가 지난 뒤라 원상회복은 못 했죠. 당시 사태와 이번 투쟁이 외형적으로는 비슷하기 때문에 뒤집어서 보면 우리가 그 과오를 또 범하는 것이 아니냐, 안 좋은 전례를 남길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도 있었습니다. 근데 그 문제에 대해서 다른 언론단체들은 상대적으로 깊게 고민을 하지 않고, 적폐 세력이 말도 안 되는 얘기 하는 것으로 치부해버리거나, 우리는 어떤 논리에도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지지한다는 식으로만 대부분 정리를 했죠.
하지만 우리 민변 언론위원회 같은 경우는, 특히 법률적인 문제도 많이 깔렸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죠. 역으로 저쪽에서 소송한다고 큰소리치며 이미 법정공방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이고, 당장 정연주 사장님 판결 때 우리가 이겼던 것처럼 소송에서 우리가 질 수도 있는 문제이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지게 된다면 역사적으로 그 과오에 대한 책임 문제, 또 나아가서 사회 전체의 적폐청산과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부담이 클 수 있습니다. 간단한 문제는 아니죠.
그래서 그 부분을 나름대로 언론위원회에서 심도 있게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공영방송 경영진 같은 경우 ‘일반적으로는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임기를 보장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예외적으로 해임하지 않을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임기 보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해임 절차 규정이 대통령 탄핵처럼 세부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기에 이전의 판례나 일반적인 단체법 법리를 적용해 절차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는 등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정리해서, 가장 먼저 성명으로 발표했고 위원장 명의로 오마이뉴스에 기고해서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물리적으로 당장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영방송 정상화 투쟁의 정당화 논거를 제공하는 데 있어서 나름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4

 

공영방송 장악 금지와 관련한 여러 법률안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권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독립된 언론을 위해 추진해야 할 법적 과제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박근혜 정권 말 즈음에 ‘언론 장악 방지법’이라고 당시에 야 3당인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국민의당이 같이 법안을 만들어 놓은 게 있습니다. 기존 KBS‧MBC 이사 구성이 일방적으로 여 쪽에 편향되어 있었다면, 이 법안의 핵심적인 내용은 7대 6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자는 것입니다. 특히 사장 선출과 선임을 할 때는 편향성을 가지지 않는 사람을 사장으로 해야 한다는 취지로, 3분의 2 동의를 받는 ‘특별 다수제’가 있습니다. 결국엔 야 쪽의 동의를 받아야만 하는 거죠. 이게 현 여권(옛 야권)의 기존 입장이었습니다. 사실 이 법안은 지금의 자유한국당이 여당 지위를 지속할 가능성이 높지 않겠느냐 하는 압박감에 많이 시달리면서, 최소한의 보험용으로 이만큼의 견제선은 확보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정리되고 제시된 성격이 강합니다.
그런데 이 법안이 나온 이후에 촛불혁명이 일어났고, 촛불혁명에서 확인한 에너지와 요구는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봤을 때 지금 얘기한 언론장악방지법안은 여당이나 대통령으로부터는 조금 자유로운 거리를 둘 수 있지만, 정치권 전반, 즉 기존 정당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입법부의 각 교섭단체가 추천해서 이사들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이 법안을 시행하면 각 당의 세력 구도에 따라 이사회가 구성되고 제어되는 구조가 되거든요.
그래서 이게 과연 정답이냐는 문제 제기가 쭉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도 집권 뒤 그런 맥락에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죠. 언론사 노조들, 언론 단체들에서도 같은 문제 제기가 있었고요. 이런 맥락에서 공영방송 이사회 구성 등을 정치권에만 맡길 게 아니라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가미하여 국민들의 뜻을 반영하도록 하자는 대안이 주장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이사를 전부 선출한다는 것은 어렵더라도 일부나마 선출해서 민의를 직접 대변하는 이들 국민 선출 이사가 여·야 추천 이사 간에 의견이 갈릴 때 캐스팅 보트가 되는 구조로 가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정의당 추혜선 의원이 이미 이런 법안을 제출한 상태이고요. 대표적 언론단체인 민언련에서도 그런 방안을 낸 상태입니다. 심지어는 방송법 개정을 계속 반대하다가, 또 최근에는 언론장악방지법안 식으로 개정을 하자고 하던 자유한국당마저 지금 말한 새로운 근본적인 요구가 나오다 보니까 강효상 의원이 새로운 법안을 제출한 상태입니다. 이 강효상 의원 안은 직접 국민들이 참여하는 방식은 아닌데, 각 사회·직능단체들의 추천으로 공영방송 이사회를 구성하는 방식으로서, 정치권에 그냥 맡겨놓는 것보다는 나름 진전된 방식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안의 문제점은 명확한 기준 없이 추천 단체들을 아예 명시해놨는데, 속이 들여다보이게 교총이라든지 (조‧중‧동이 주도하는) 신문협회라든지 자유한국당 입장에서 우호적이라 생각하는 단체들을 여럿 포함시켜놨다는 점이죠.
따라서 걸러서 보기는 해야 합니다만, 어쨌건 결국 언론장악방지법안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쟁점 구도가 형성되어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롤 플레이어로서 안을 내놓아야 할 더불어민주당은 아직 새로운 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 측인 방송통신위원회에서는 지금 막 자문기구를 통해서 안을 만들어 내고 있고요. 새해 1, 2월 정도에 그런 안들까지 나오게 되면, 정권에 좌지우지 되지 않도록 언론 독립을 법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논의가 각 세력의 안을 토대로 본격화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핵심적인 방향은 여야 정치권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직접 민주주의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겠죠.

 

추상적인 의미의 직접 민주주의 도입을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인 형태로써 도입되어야 할 안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다양한 논의들이 이뤄지고 있는데, 아직 민변 언론위원회에서는 결정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세부적으로 말하긴 그렇습니다. 다만, 얼마 전 운영됐던 신고리 원전 공론화위원회처럼, 무작위로 국민들에게 공영방송 사장과 이사 선출과정에 참여하겠는지 의사를 물어서 의사가 확인된 분들을 상대로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선출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보통 ‘국민참여단’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세부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는 더 연구할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 2017/12/2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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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미기_김창호(메인)

 

 

아버지가 열어 놓은 길, 아들이 걷는다.

– 일본 제1호 외국인변호사 故김경득 변호사의 장남 김창호 변호사를 만나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그대로인걸…”(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中에서)

이야기 하나 : 재일한국인 청년의 애환을 유쾌하게 그린 영화 “GO”는 로미오와 줄리엣 속 대사 한 대목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인공 스기하라는 자신이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한국인인지 헷갈린다. 이름이 스기하라인지 이정호인지도 헷갈린다. 그래서 ‘나는 누구지’라는 물음은 지겹게 그를 쫓아다닌다. 어느 날 일본인 여자 친구에게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내가 좋다던 그녀는 무섭다고 했다. 나는 어제와 같은 그대로의 나일뿐인데 말이다. 진짜 나는 누구일까.

이야기 둘 : 사기사와 메구무의 소설 “진짜 여름”의 주인공 청년은 길을 가거나 운전을 하다가도 경찰만 보일라치면 저 멀리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불심검문이라도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고 한국인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청년은 일본인 애인이 자신이 한국인임을 알까봐 늘 전전긍긍한다.

두 개의 이야기는 배타적인 일본 사회에서 재일한국인들이 겪는 차별과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이름이 달라도 국적이 달라도 나만의 향기는 그대로일진데, 한국인임이 드러나는 순간 차별과 멸시를 감당해야 한다. 여기 이야기 속 주인공들처럼 한국인임이 드러날까 노심초사하다 차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일본 이름을 버리고 다시 태어난 이가 있었으니, 그는 최초의 재일한국인 변호사 김경득. 안타깝게도 김경득 변호사님은 10여년전 돌아가셨지만 그의 아들 김창호 변호사가 민변의 특별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김창호2

 

이혜정 : 김창호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잘 모르는 회원들을 위해 소개 먼저 부탁 드릴께요.

김창호 : 안녕하세요. 저는 일본에서 태어난 교포 3세 김창호입니다. 아버지로 하면 3세인데, 어머니는 한국분이시니까 정확히는 2.5세라고 할 수 있어요. 일본에서 변호사 일을 몇 년 하다가 유학을 다녀왔고, 공익적인 일을 하고 싶어 한국의 공익변호사는 어떤지, 예를 들면 ‘공감’에서 4년 전 인턴으로 1달 정도 있었는데, 그때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알게 돼 지금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장기간 한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1년 정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작년 2월에 한국에 왔어요.

이혜정 : 민변 특별회원으로 가입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김창호 : 민변 가입은 작년 4월인가 5월에 한 것 같아요. 민변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요. 제가 일본에서 사법시험을 봐서 합격을 2006년에 했거든요. 2007년 사법연수원에 가서 연수를 받고, 변호사 활동은 2008년부터 했으니 10년 정도 됐는데, 세계한인변호사대회에서 황필규 변호사님, 정미화 변호사님을 알게 되었어요. 제가 처음 변호사가 되었을 때 세계한인변호사대회에 초대해 주신 분이 바로 정미화 변호사님이셨어요. 그리고 정미화 변호사님 부인이 저희 어머니와 대학 동창이었어요. 그런 관계로 민변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민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은 몰라서 작년 2월에 왔을 때 황필규 변호사님이 국제연대위원회에 초대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민변에 여러 위원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혜정 : 민변 어느 위원회를 가봤나요. 민변 활동이 궁금하네요.

김창호 : 주로 나갔던 위원회는 국제연대위에요. 저는 일본 변호사라 그래도 국제적인 일은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나 싶어 참여했어요. 국제통상위도 그렇고요. 그런데 민변이 좋은 것은 민변에 있으면 한국의 모든 이슈를 조금씩 다 알게 되잖아요(웃음). 교육위나 언론위는 한번 정도 참여했어요. 민변에서 진행하는 기획이 재밌는게 많아서 여행도 여러 번 갔다 왔어요. 여러 외국 변호사 모시고 진행하는 것도 재밌고, 한국의 공익변호사를 알게 된 게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 제가 가장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공감’이나 ‘동천’ 같은 공익전담 변호사가 일본에는 없어서 어떻게 해야 그게 가능한지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 분들과 대화해 보면, ‘사실 나도 민변회원이다. 그래서 민변활동 같이 하고 있다’ 하시는 분들 되게 많지 않나요? 민변 변호사들이 옛날부터 자기 일을 하면서 공익활동 하시는 분과 전담으로 하는 변호사들이 연결이 잘 되어 있구나 하는 점을 느낄 수 있었어요. 민변 노동위가 오사카와, 미군위는 오키나와와 교류를 하고 있는데, 계속적으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혜정 : 숱하게 많이 받은 질문이겠지만 아버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어요. 아버님인 김경득 변호사님은 1949년 일본 와카야마에서 태어나 일본 초·중·고교를 다니면서 일본 이름을 썼고, 한국 핏줄이란 게 남들에게 알려질까 봐 한글 공부를 거부하고, 길에서 어머니를 마주쳐도 모르는 체했다면서, 어린 시절에는 일본으로부터 냉대받고 경멸받는 한국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당시를 ‘민족에서 도망쳤던 때’였다고 고백하시면서요.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기자를 꿈꾸셨다가 좌절돼 사법시험에 도전하셨다고요.

김창호 : 맞아요.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와서 취직하려고 했는데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신문사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일반 상장기업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웠어요. 기자에 관심이 많았는데 일자리를 구하려고 대학교 취업 상담실을 찾아갔더니 직원이 노트를 가져와서 이름을 적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취업이 어려운 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특별관리 장부였어요. 대학생 때까지 일본 이름을 썼었는데…그런 차별을 경험하고 나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정체성을 숨기지 말고 밝히고 살아야 한다. 그럼 어떤 길을 갈 수 있을까’.. 고민했을 때 변호사라는 직업이 그 옆에 있었던 것 같아요. 1970년대 초에 대만 사람이 대만 국적으로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했어요. 그런데 일본은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국적을 바꿔야 해서 그 사람은 일본 이름으로 해서 변호사가 됐어요. 지금도 저와 같이 일을 하고 있는데요. 지금도 인종 차별 관련한 변호 활동을 하고 계세요. 70살이 넘었어요. 아버지가 그때 그분의 기사를 보고 사법시험을 시작하셨어요.

이혜정 : 말씀하신 것처럼 당시 일본은 사법시험에 붙어도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은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수 없었다면서요. 아르바이트로 와세다 대학 청소를 하면서 어렵게 사법시험에 붙었는데, 사법연수원 입소가 거부되자 아버님이 일본 최고재판소에 청원서를 수차례 보내고 아사히신문에 기고문도 보냈다고 들었어요. 아버님이 일본 최고재판소에 보낸 청원서를 소개할께요.

 

“저는 변호사를 지망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사법연수생에 채용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는 재판관·검찰관과는 달리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인(私人)의 입장에서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사회정의의 실현에 진력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직업적 성격을 일본국 헌법의 정신에 비추어 본다면, 외국인이 변호사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현 변호사법이 외국인이 변호사가 되는 것을 배제하고 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를 고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인도 일본인과 동등하게 변호사가 될 수 있어야 된다고 한다면, 변호사가 되기 위한 길도 일본인과 동등하게 열려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률적으로 사법연수생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길을 막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법연수생 채용선발 결격 사유 제1호는 적어도 변호사가 되려는 외국인에게 적용되지 말아야 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사안이 저 개인이 사법연수생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제가 일본국에 귀화하면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일이 저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 사는 65만 동포의 권리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하였으며, 개인적으로 해결(귀화)할 문제가 아니며, 이는 일본의 민주화에도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민주주의란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자유, 개인의 존엄이 최대한도로 존중받는 사회체제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가치관은 다양하며, 개개인은 이질적이므로 소수자의 권리존중이 민주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는 재일한인의 민족적 특성, 소수자로의 권리가 반드시 존중받고 있지 못한 상황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으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체의 한국적인 것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여 왔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해를 거듭하며 일본인처럼 행동하는 것이 습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의 차별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처럼 가장하는 것은 매우 고통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졸업이 가까워짐에 따라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까봐 주위에 신경을 쓰며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것의 비참함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인처럼 보이기 위하여 낭비한 노력의 바보스러움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노력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차별을 없애는 것이지, 일본인으로 가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차별에 대처할 재일한인의 살아갈 방도는 한편으로는 조국의 통일을 빨리 실현해 조국과 일본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생활의 현장에서 한국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존재를 통하여 일본인의 의식 속에 있는 한국인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지금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최고재판소로부터 국적변경을 강요받고 있는 시점에서 경솔하게 귀화신청을 하는 것은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제가 변호사로서 설 자리 그 자체를 잃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귀화한 제가 어떠한 형태로 한국인 차별해소에 관련할 수 있고, 귀화를 한 제가 어떻게 재일동포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요. 또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원망스러워 하며 가슴 아파하는 동포 자녀에 대하여, “한국인인 것을 수치스러워 하지 말고 강인하게 살아라”고 말해 봐도 이 말이 귀화한 인간의 말이라면 도대체 어떠한 효과가 있을까요.

일본 사회의 한국인 차별이 없어지지 않는 한 저의 귀화는 어떠한 이유를 붙여도 결국은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따라 다닐 것입니다. 저처럼 자기 민족에게 등을 돌려온 인간이라도 지금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제가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게 하는 일본국으로의 귀화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사법연수생 임용청원서”, 재일변호사 김경득 추모집 중에서)

 

– 김경득 변호사는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은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수 없다’는 조항에 맞서 긴 싸움을 한 끝에 마침내 일본 내 한국 국적 변호사 1호가 되었다. 1976. 12. 14.자 아사히 신문에 ‘변호사로 인정해 달라’고 투고한 글을 보자.

나 김경득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이다. 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최고재판소로부터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는 한, 사법연수생으로 채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귀화할 수 없다. 어린 시절 나는 내 안의 한국을 거부했다. 조선말 배우는 것도 거부하고 길에서 어머니를 마주쳐도 모르는 체 지나쳤다. 내가 한국 핏줄임을 알까 두려웠다. 대학 졸업 무렵, 나는 희망하던 언론계 취직이 99.9%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일본 사회의 차별을 피해 살려던 생각을 버렸다. 한국인임을 써 붙이고 살기로 결심했다. ‘한국인 변호사가 되어 한국인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설 것을 생애의 목표로 삼았다.”

 

김창호 : 당시 주위에서 아버지를 말리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고 했어요. 쉽지 않은 문제이고,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리고 변호사까지 됐는데 부모님 생활을 도와 주는게 맞지 않냐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고 해요. 그런데 차별을 없애기 위해 변호사가 되신 것이고, 아버지뿐 아니라 대학 교수, 변호사 후배들이 외국국적자 차별을 해방해야 한다는 성명도 내주었어요. 언론에서도 도와주는 분위기가 있었고요. 아버지가 사법시험에 1976년 합격해서 적어도 10년 정도 투쟁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의견서를 계속 내셨는데 다음 해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그 방침을 바뀌게 하셨던 거죠.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 정말 대단하세요. 아버님이 그렇게 힘들게 새로운 길을 만들었고, 그 후에 김창호 변호사님처럼 그 길을 따르는 분들도 많이 계셨겠네요.

김창호 : 지금은 재일교포 변호사가 120명 정도 있어요.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가 그것이고요. 70-90년대만 해도 외국 국적자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면 따로 면접이 있어서 최고재판소 담당자와 따로 이야기해서 뭔가 하사하는 식이 되어서… 면접을 하긴 하지만 못 들어 간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이후에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라 할 수 있어요. 2000년도부터 일본도 로스쿨을 시작하면서 국적조항 자체를 삭제했어요. 지금은 주로 외국 국적 갖고 일본변호사 되신 분 대부분이 한국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나오고 대학교 일본으로 유학 와서 일본변호사가 됐다는 분 몇몇 계시고요. 중국이나 미국 국적을 갖고 변호사 되신 분들도 꽤 있으시고요. 좋은 쪽으로 진행된 사례입니다.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어머님을 한국에서 만나셨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해요. 김창호 변호사님도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김창호 : 저는 와카야마에서 태어났어요. 제 여동생이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오사카 근처 와카야마에서 태어나셨고, 저도 거기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많이 좋아한 것 같아요(웃음). 어머니가 아버지를 강한 의사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80년대 초만 해도 한국이 일본에 대한 인상이 아주 안 좋았을 때였어요. 주변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고도 했는데.. 어머니쪽 부모님이 아버지를 많이 좋아하셨대요. 인터뷰 내용과 좀 맞지 않는 것 같은데(웃음)..,저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중매결혼이 많았는데 외할머니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좋아해서 연애결혼 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연애결혼을 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하셨어요.

이혜정 : 김창호 변호사님이 장남이고, 형제가 2남 2녀라고 들었는데, 모두 법조인인가요.

김창호 : 여동생 한명은 변호사 자격은 있는데 등록은 안하고 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과정을 마친 상태구요. 여동생 한명은 건강이 많이 안 좋아서..아버지 추모집 낼 때만 해도 살아있었는데, 병으로 일찍 사망했어요. 그 때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법대, 로스쿨까지 갔는데 건강 때문에 그렇게 됐어요. 남동생은 그냥 일반 회사원으로 있습니다.

이혜정 : 몰랐어요..가족분들이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3명이나 아버지의 길을 선택했어요.

김창호 : 저희들이 문과 쪽이라서..어머니도 법대 출신이에요. 사실 이공계 갈 수 있는 머리가 있으면 아마 그쪽으로 갔을 수도 있는데, 지금은 아버지 시대와 달리 취직이 어느 정도 가능해요. 그 안에서 일본 사람과 경쟁해서 승리하는 것은 어렵겠지만..문과로서 차별 없이 일할 수 있는 일 중 변호사가 하나의 좋은 직업인 것 같아 사법시험을 봤어요. 대학교 때는 학자 같은 것도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2005년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시험에 합격해서 제가 뭔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2006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했어요.

이혜정 :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다고 들었어요.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불을 꺼도 또 키고 공부하고, 쟤가 저러다가 머리가 이상해 지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할 정도였다고요. 한국도 사법시험이 어렵지만 일본도 무지 어렵지 않나요.

김창호 : 저는 되게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정도 열심히 하긴 했는데…당시에는 매우 젊어서 가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취직 활동하는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변호사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한국도 그렇지만 옛날 사시라고 하는게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도 합격률이 2% 정도니까 운이 안 좋으면 안되는 거잖아요.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집에서는 한국어만 써야 하고, 어머님이 일본말 쓰면 엄청 뭐라고 하시는 바람에 김창호 변호사님이 6살 때까지 일본어를 못했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볼 책을 직접 빌려 오셨다고 하던데, 가정에서 아버님의 모습은 어땠나요.

김창호 : 아버지는 한국어를 많이 강요하셨어요. 어머니는 일본에서 생활하려면 일본어도 필요한데, 당시에 유치원이나 학교 다닐 때 집이 도심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살아서 조선학교가 주변에 없었어요. 그래서 일본 학교나 일본 유치원에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집에 돌아올 때도 일본어로 이야기하고요. 그런데 계속 집에서 한국어를 쓰라고 하셔서 어릴 때는 그게 좀 싫기도 했어요. 집에서 아버지가 이야기 할 때는 한국어로 하는데, 저희가 대답할 때는 거의 일본어로 했어요. 그리고 빌려오신 책은 다 일본 책이었어요(웃음). 아마 한국어 책이 주변에 별로 없었고, 읽는 것도 더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 앞선 두개의 이야기를 통해 보듯이 재일한국인은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진짜 여름’의 작가 사기사와 메구무는 재일교포를 이렇게 정의한다.

 한국인으로 한국 국적을 지니고 있으면서 일본에서 자라나 일본의 교육을 받았다. 가정에서는 아직 한국의 풍습이나 습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고방식이나 감정적인 면에서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에 가깝다.”

성인이 되고 나서 우연히 할머니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기사와 메구무는 한국을 찾았고, 짧은 한국생활을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아쉬움을 그녀만의 소설가적 감성으로 표현했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하룻밤을 자고 나니 시들해지고 마는 사내가 있다. 반대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혹은 슬슬 피하기까지 하다가 엉겁결에 몸을 허락하고 나니 별안간 마음마저 빼앗기고 마는 사내도 있다. 나에게는 한국이 두 번째 사나이와 비슷하다.”

김창호 변호사에게 한국은 어떤 곳일까. 어떤 고민과 어떤 정체성을 느끼고 살아왔을까.

 

김창호 : 저의 아버지 경우에는 재일교포 2세로 전형적으로 일본 이름을 쓰다가 정체성을 의식하셨어요. 저는 태어나서부터 한국식 이름을 써왔고 어머니도 한국인이에요. 보통 재일교포 3세 정도가 되면 일본식 이름을 쓰고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데 그런 경우와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 때보다 상황이 많이 나아진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김’씨라는 성을 부를 때 아직도 약간 긴장하는 것은 있어요. 은행에서 순서를 기다릴 때도 ‘김상’이라고 부를 때, 사람들이 많이 쳐다봐요. 일본에 많이 없는 성이라서 꼭 차별적인 시선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재일교포 3세라는 의식을 갖고 살고 있는데, 일본 사회에서 일본사람과 같은 노력과 능력이 있어도 같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더 많이 노력했어요. ‘창호’라는 이름이 일본에서 발음하기 어려워요. 차무호. 김치양호. 이런 발음이 되니까.. 이것 때문에 괴롭힘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는데, 초등학교 졸업식 때 일본에서 ‘기미가요’를 불러야 해요. ‘기미가요’라는 노래 자체가 일본군의 천황을 칭송하는 노래라서 절대로 부르면 안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어요. 그래서 전부 기립해서 노래 부를 때 저만 혼자 앉아있었어요. 그 때 제가 일본의 소수파라는 것을 처음 느낄 수 있었어요. 졸업장에도 일본에서 천황이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날짜를 쓰는데, ‘쇼와’나 지금은 ‘평성’을 쓰고 있어요. 아버지가 이것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교육위원장이랑 협상을 해서 제 졸업장만 매직으로 찍찍 그어서 양력으로 표기했어요. 그 당시 저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고 별로 안 좋아 했었어요. 그런 경험을 통해서 일본 사회에서 좀 특이한 존재이긴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계속 갖게 되었어요.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일하시느라 무지 바쁘셨을텐데.. 교장이랑 협상도 다니셨네요.

김창호 : 바쁘셔서 운동회나 졸업식에도 거의 못 왔던 것 같아요. 그래도 졸업장은 다 바꾸셨어요(웃음).

 

김창호4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정말 의미 있는 소송을 많이 하셨잖아요. 국민연금 청구소송, 사할린 잔류 한국인 귀환 청구소송, 지문날인 거부소송, 일본 군속 장애연금지급 청구소송, 공무원관리직 수험자격 소송 등 2005년 암으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재일한국인 인권옹호활동에 앞장섰잖아요. 일본은 외국인에 한해서만 지문날인을 받고 있나 봐요.

김창호 : 맞아요. 일본은 주민등록증도 없어요. 사실 한국에 왔을 때 가장 놀라웠던게 그 동안 한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주민등록증을 만든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장기간 있게 돼서 만들게 되었어요. 그때 저는 지문찍기가 너무 싫어서 사진도 찍어 놓았어요. 일본에서 지문 날인은 재일교포가 싸웠던 하나의 이유로, 90년대 이후 없어졌어요. 아버지가 이상호씨 재판에서 졌는데, 이후 없어졌어요. 재일교포들에게 적용할 때 문제가 생기니 재일교포들만 제외하고 다른 외국인들은 지문날인을 시행하고 있어요. 어머니의 경우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일반 영주권인데, 어머니가 일본 들어올 때는 한번씩 지문날인을 하고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재일교포는 문제되지 않았지만 다른 외국인들을 위해 싸워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가 여러 소송을 하시긴 했어요. 사실 사회적 변화를 이끌긴 했지만 소송 결과로 보면 많이 졌던 것 같아요. 지문날인 하나만 잘 된 것 같고, 국민연금은 졌어요. 1970년 말에 외국인도 연금에 가입하게 되어 있어서 지금 태어난 사람들은 문제가 없는데, 그 당시에는 연금을 받으려면 25년 정도가 필요했어요. 25년을 납부해야 받을 수 있다면 45살 넘은 분들은 자동적으로 못 받게 되잖아요. 그런 경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야 됐어요. 헌법 위반으로 제소했는데, 최고재판소에서 그것은 국가의 재량이라고 했어요. 아버지가 위안부 소송도 하셨고, 옛날 재일교포 일본군의 군인이었던 분의 재판도 했어요. 결과적으로 졌어요. 주위에서 계속 이야기는 들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계속 지는 소송만 하셨어요.

이혜정 : 한국에 1년 정도 머무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김창호 : 여러 가지 있어요. 작년에 계속 있었는데, 2016년 말부터 촛불집회가 있었어요. 저는 2017년 2월에 와서 거의 막바지였어요. 탄핵 직전까지 매우 재밌었어요. 역사의 순간에 한국에 있었던거에요. 탄핵의 순간도 TV로 볼 수 있었고요. 시민단체 운동의 힘, 변화의 시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컸어요. 처음 대선투표는 4-5년전 미국 유학가 있을 때, 현지에서 재외국민들에게도 투표권을 인정하라는 판결이 났고, 이번에는 한국에 있을 때 투표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찍은 후보가 그 당시에는 떨어졌지만, 이번에 똑같이 찍어서 결국 당선됐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공익활동하고 계신 변호사들 만난 것도 그렇고, 좋은 기억이 많아서 하나 고르기가 어려워요.

이혜정 : 곧 일본에 돌아가신다고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향후 활동 계획은 어떤가요.

김창호 : 이번 2월에 활동을 마치면 1년 정도 대만에서 NGO활동을 하려고 해요. 아버지도 그랬지만 한중일 또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에요. 인권 일이든 변호사 일이든 그런 방향으로 가면 좋을 것 같아요. 한국은 어느 정도 아는 분이 계시고 중국은 다른 관계를 갖거나 중국어를 배워보고 싶어요. 그게 끝나면 ‘공감’과 같은 공익법인을 만들고 싶어요. 일본에 아는 변호사들과 이야기 할 때 어떻게 하면 공익 법인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요. 아무래도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공익로펌 모델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해온 일을 돌아보면, 아버지는 국내소송을 주로 해왔고, 많이 졌어요. 저는 국내소송 뿐 아니라 국제적인 활동을 하고 싶어요. 휴먼라이트와 함께 하는 것도 그렇고, 인권 NGO로서 민변 국제연대위도 그렇지만 제네바와 같은 곳에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하고, 외부에서 압력을 가하는 거죠. 제가 그런 활동을 유학기간 합쳐서 3-4년 정도 계속 해왔고, 민변에서 UPR을 진행하고 있듯이 일본도 UPR이 있어서 운동해왔어요. 국제적인 일을 하나의 업무로 해야 할 것 같아요.

또 다른 문제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 같은 차별이나 혐오 관련 활동을 하고 싶어요. 어제도 마쓰이 의원이 한국·조선 국적, 일본 귀화자 등 의원 이름 열거하면서 “몇 번이고 죽일 가치 있다”고 독설한바 있어요. 요즘에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지방의원 같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혐한’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요. 일본 사회 내에서 혐한 분위기가 지난 몇 년 간 계속 강해지고 있어요. 언론을 통해 보수 세력들이 그런 생각을 많이 유포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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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민변 변호사들과 계속 교류를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민변 상근변호사나 간사님들과 공익 분야에 대한 교류도 재밌을 것 같아요. 재일교포 분야와 다르기는 하지만 일본기업이 해외에서 일으키는 인권 또는 노동문제도 다루고 싶어요. 예를 들면 유니클로라는 기업이 인기가 많은데, 중국이나 미얀마 공장에서 문제가 많았어요. 전통적인 변호사 일보다는 국제 쪽 문제를 누군가가 해야 하는데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특히 인권활동하시는 분들이 국제적인 활동에 좀 약하고 시간 배분이 어려워요. 일본사회에서 재일교포만으로 활동하게 되면 불필요한 비판을 받게 돼요. 특히 역사문제로 가게 되면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일본사람과 같이 해야 사회적으로 진동하는 운동을 같이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기가 간단치 않아요. 오늘 민변에서 인터뷰에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수, 2018/01/3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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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사랑방인가요?

전 우리 민변이 이런 사랑방처럼 편안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2018년 3월 민변 사무실 내 휴게공간인 사랑방에서 김호철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인터뷰가 진행된 사랑방처럼 민변이 ‘소통, 공감, 편안함과 행복’의 모습으로 후배들에게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2000년대 초반, 민변은 너무 엄숙주의에 빠져 있다고 선배들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민변 회원이라 하면 만나서 반가워 농담도 하고, 변호사로서 영업을 하다가 도움이 되었던 것을 서로 공유도 할 수 있는 건데, 민변은 너무 근엄하고 진지한 얘기만 한다고 했다가 분위기가 썰렁해졌습니다.(웃음) 아, 괜히 이야기했나하는 생각이 들었죠. 조금 더 격이 없는 소통을 할 수 있고 유쾌발랄한 분위기를 더 가질 수 있도록 모임을 개선해야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뭐, 요즘 후배들도 우리를 바라보면서 너무 어렵고 엄숙주의에 빠져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겠지만요. (웃음)”

 

김호철 변호사는 현재 민변의 부회장이며 최근 13대 민변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민변과 함께한 그의 변호사 활동들과 차기 회장 당선인으로서 가진 포부는 어떤 것일까.

 

 

이혜정 김호철 변호사님, 얼마 전에 차기 회장으로 당선되셨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대부분의 민변 회원들이 뉴스레터를 통해 변호사님 인터뷰를 접할 텐데요, 특히 신입회원들의 경우 김호철 변호사님을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김호철 1994년 변호사 개업 당시, 민변 회원이셨던 ‘고 최일숙’, ‘정영원’변호사와 함께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현 서울동부지방법원) 근처에 법률 사무소를 열었습니다. 당시 초년생에 불과했던 변호사 셋이서 그래도 변호사의 품위와 의무를 다하고자 공익적인 업무를 더불어 하자는 결정을 했고, 법무법인 ‘동부종합법률사무소’를 개설하여 2002년까지 활동했습니다. 당시 저희 세명이서 민변 국가보안법 사건의 동부관할 사건을 대부분 소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외에도 환경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환경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당시 출판홍보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민변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이혜정 와~ 활동 많이 하셨는데요? (웃음)

 

김호철 (웃음) 네, 그리고 민변 선배님의 추천으로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상임위원으로 들어가 3년간 공무원 신분으로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3년간의 위원회 일을 마치고) 복귀 후에는 공백이 너무 커서 본업인 변호사 일에 전념하느라 2009년부터 2015년까지는 민변 활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가 지금 회장님이신 정연순 변호사님의 제안으로 2015년도에 민변의 부회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변호사 개업과 함께 당연하듯 시작한 민변 활동, 회장후보에 출마할 의무감을 안기다.

 

이혜정 변호사가 되면 바로 민변에 가입해야겠다고 이전부터 생각을 하신건가요?

 

김호철 당연하죠. 변호사 생활은 민변활동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이재명 시장(현 성남시장)이 밝혀서 민변이 대중에게도 알려지긴 했지만, 사법연수원시절부터 우리사회 인권과 민주사회 발전을 위해 함께 고민을 나누던 멤버들이 있었습니다.

 

이혜정 회장 후보 출마를 결심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을 텐데요.

 

김호철 제가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쉽게 나서지 못했습니다. 민변이 오랜 기간 쌓아온 사회적인 신뢰에 걸맞은 신뢰 자산을 내가 구축하고 있는가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민변 회원들을 대표해서 개별 회원들의 사정과 바람을 잘 파악하고 실현할 수 있을까… 여러모로 자신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보 등록을 한 것은 20여 년간 회원으로 있으면서 의무감이 들어서 입니다. 과거에 회원들의 활동들을 쫓아가면서 죄송함과 부채 의식을 지니고 있는 와중에 후보등록자가 없어서 고민하시는 선배님들과 회원 분들을 보며, 의무감이 발동했습니다.

 

이혜정 민변 회장에 나간다고 하니 가족이나 주변 분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김호철 그 점에 대해서 지금 있는 법무법인 한결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법무법인 내에 후배변호사들과의 협업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기도 하고요. 민변에서의 활동으로 인한 저의 공백을 기꺼이 감수해주는 법무법인과 후배변호사들에게 감사합니다.

가족은 뭐….(웃음) 변호사 생활 내내 가족에게 미안해하면서 눈치 보면서 살아와서.. (웃음) 이번에도 적절하게 ‘눈치껏’ 별 일 아닌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환경문제는 환경운동이 우선이고 소송은 다음이라는 원칙

 

이혜정 변호사님 프로필을 쭉 살펴보면 주로 환경전문 변호사로서 활동을 많이 하셨던데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김호철 사법연수원 시절에 환경권 학회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학회에서 공부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공해 현실을 제대로 알기 위해 찾아간 곳이 지금의 환경운동연합에서 진행한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그때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공해 문제, 환경 문제의 현실을 현장에서 공부할 수 있었죠. 이런 것들이 이어져 자연스럽게 환경운동 volunteer라는 저만의 정체성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소송이니까 환경소송을 담당하게 된 거구요.

환경소송을 할 때는 ‘환경문제는 운동이 우선이고 소송은 다음’이라는 저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임해 왔습니다. 새만금 소송과 일조 침해소송, 핵폐기장 설치 관련 소송부터 최근의 월성 원전 수명연장 취소소송까지, 운동을 우선적으로 하고 법적 판단은 보충적이고 최종적으로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임했습니다. 덕분에 관련 쟁점들이 많이 정리되었고 사회적 공방 속에서 상대측의 문제들을 충분히 인식하며 일해 좋은 결과를 많이 얻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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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정 직접 진행하셨던 월성원전 소송부터 최근에 생긴 신고리공론화위원회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탈핵’이나 ‘탈원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탈핵’이나 ‘탈원전’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나라를 위한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일까요.

 

김호철 인류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기후변화인데, 이는 인류의 욕망 때문에 발생한 온실가스가 가져온 인공적 위험이고 자연의 정화능력이나 순환을 교란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위협이죠. 하지만 자연을 무작정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난다면 재생에너지처럼 생태계를 교란시키지 않으면서도 자연의 무한한 힘을 잘 선용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핵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핵무기 개발이라는 반생명적인 활동의 부산물이 초래하는 인공적 위험은 가공할만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탈핵’의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자연이 보유한 무한한 에너지를 얼마든지 인류에게 최대한 위험이 없는 방향으로 개발할 수 있습니다. 탈핵은 그동안 인류가 공감해온 방향이지, 시대에 역행하거나 일부 사람들의 편협한 이념적 잣대에서 비롯된 주장은 아닙니다. 재생에너지나 기존의 자연의 힘을 이용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연구와 투자를 해야 하고 법률가로서 이 과정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혜정 최근 신입회원들의 관심사를 보면 환경 분야에 관심 있는 회원들이 많더라고요. 관련해 환경전문 변호사로서 후배들에게 조언을 하신다면요?

 

김호철 우선은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 중 가장 (먼저) 풀어야할 숙제가 기후변화와 탈핵입니다. 법률가로서 이 문제를 풀어나갈 방법을 찾고 관심을 지속적으로 갖는 게 중요할 것입니다. 환경보건위원회를 찾아가서 예비 법조인을 위한 민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추천드려요.

원자력 발전에 있어 가장 큰 원칙은, 진흥과 규제가 분리되어서 규제가 독립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다가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서야 미미하게 지켜지는 실정이에요. 그러다보니 규제기관이 규제권한을 행사하는 틀과 체계가 잡혀있지 않고 미흡한 부분이 많습니다. 법률가는 가동 중인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규제가 제대로 행사되었는지 법률적으로 살펴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소송이나 정책 제안 혹은 정책 비판을 함으로써 시민들의 안전을 담보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 하나 닫는다고 해서 위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위험관리가 되고 있는지 감독하는 것도 법률가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해결해야 할 중요한 사안들은 많은데 관심이 좀 떨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또 환경보건 분야는 활동영역이 국제적으로도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어요.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의 3년 중 얻은 문제의식

 

이혜정 변호사님께서는 환경문제 외에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도 하셨습니다. 최근에는 워낙 군대 관련 사건 사고들이 많이 발생하기도 하고 관련한 사법개혁 논의도 진행되고 있는데요. 변호사님께서 경험하셨던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군대 문제는 어떠한 방향으로 해결되어야 할지,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김호철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 당시 여호와의 증인이 박정희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인해 폭행과 가혹한 고문을 당하다가 사망한 사건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이 분 외에도 양심에 따라 집총거부를 주장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이 많이 계시죠. 문제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집총거부에 대한 양심의 순결함은 사회가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양심을 지켜주기 위한 사회적 배려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인권의 문제입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사회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법적 판단, 제도적 보완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군의문사와 관련해서는, 폐쇄적이고 통제적인 군사 문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어렵더라도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제도가 뒷받침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군복무라는 것이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 시민이 일정기간 희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민으로서의 인권이 군사법을 통해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경우 민주화가 정착됨에 따라 군대 내 사망자 수가 점점 줄긴 했어요. 5공화국 시절 자살자를 비롯한 군대 내 사망자가 1,000명에 가까웠다면 노태우 시절 400~500명 정도로 떨어졌고, 김영삼 정부시절 300~200정도, 김대중 시절 100명대, 노무현 시절도 100명대 초반 유지를 하다가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면서 현재는 100명 미만으로 떨어졌습니다. 예전보다 좋아진 거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폐쇄적 군대 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짓눌린차기 회장 당선인이 해야 할 일들과 회원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

 

이혜정 다시 민변으로 돌아와서요, 차기 회장으로 당선되신 만큼 앞으로 많은 회원들과 스킨십도 하셔야 할 텐데요. 김호철호 민변을 통해 그려나가고 싶은 민변은 어떤 모습인가요.

 

김호철 안 그래도 요즘 민변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고 있는데, 책을 찾다보니 (가방에 있던 민변 발전 전략 보고서 꺼내들며) 2012년도 당시 김선수 회장님 때 발간된 민변 발전전략보고서가 있더라고요. 현 회장님 역시 이 전략발전보고서에 나와 있는 과제들을 충실히 이행해 오신 것 같아서 이제는 발전전략보고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비전, 발전 전략을 세워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사무처 구성을 선결 과제로 삼고 이후에 머리를 맞대 각 위원회의 활동 역량을 충분히 모아서 새로운 세대가 민변의 주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발전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혜정 올해 민변은 30주년을 앞두고 있고, 변곡점에 있어요. 회원들이 늘어났지만 예전만큼의 희생과 헌신을 요구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생계가 어려워서 시간을 내서 민변 활동하기가 어렵다는 회원들도 있고, 일부 회원들은 회비 내는 것도 부담스러워 탈회하기도 해요. 이런 회원들을 아우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성 많은 회원들을 이끌어가면서 우선적으로 하고 싶은 활동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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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철 본부와 지부 회원 간의 정서격차, 민변 활동 회원과 비활동 회원 사이의 이질감, 민변활동에 참여하는 양상의 차이, 이런 점들을 우선적으로 파악해야할 것 같습니다. 비활동 회원이 민변에 바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먼저 경청해야 할 것 같아요. 그분들이 말을 하실 수 있도록 오프라인, 온라인의 소통의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필요하면 찾아가고, 또 오시도록 하면서 거기서부터 답을 찾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질의 소통공간을 찾아가야 할 것 같아요.

 

이혜정 그런 문제가 끊임없이 고민되어 와서 인트라넷, 페이스북 민변 그룹 등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고민 지점이죠. 지금 이 자리에서 민변의 선배, 후배 변호사들에게 차기 회장으로서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를 먼저 말씀해주시는 것은 어떨까요.

 

김호철 부족한 사람이 회장으로 당선 되어서 거대한 민변을 끌고 가기엔 아직 짓눌려 있어요. 짓눌린 회장 당선인이 좀 기를 펼 수 있도록, 민변이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잘 이끌 수 있도록 좀 도와달라는 그 말씀을 우선 드리고 싶어요. 많이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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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정 마지막으로 변호사님께 있어 ‘민변이란’ 어떤 것인가요?

 

김호철 삶의 등불이죠 (웃음). 변호사 생활을 하다보면 다양한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칫 일탈하기 쉬울 수도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변호사 개업 당시부터 지금까지 일탈하지 않고 나름 원칙을 갖고 (변호사 생활을)할 수 있었던 것은 민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민변은 ‘내 삶의 등불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금, 2018/03/30-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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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는 왜 거리로 나섰는가

 

류하경 회원

 

대법원이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정권과 재판거래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우리는 대법원 동문 앞에서 지난 6월 5일 “사법농단규탄 법률가 선언” 기자회견을 열었다. 오전 11시 30분 취재열기는 뜨거웠다. 많은 수의 변호사, 법학교수들이 분노 담긴 규탄 발언을 쏟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 선언문 낭독이 있었다. 선언문은 기자들에게 사전에 배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언문 말미에 농성돌입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5일전인 5월 31일 초동모임을 갖고 긴 토론 끝에 천막농성을 결의했다. 이 내용이 알려질 경우 보안상 문제가 생겨 천막농성 시작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어서 비밀유지에 만전을 기했다.

 

낭독자가 선언문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시대를 밝히는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되새기며, 그리고 법원에 대한 분노를 모아 위와 같은 내용으로 법률가 시국농성을 선언합니다.”

 

문장이 마무리되는 그 때,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투쟁 노동자들이 미리 준비한 천막을 대법원 동문에서 서초역 6번 출구로 가는 인도 위에 펼쳤다. 10여초나 되었을까 천막은 금세 설치되었다. 마이크를 잡고 소리쳤다. “지금 농성천막이 설치되었습니다. 현 시간부로 법률가 농성 시작을 선언합니다. 자, 참가자 여러분 모두 천막으로 가서 빨리 앉아주십시오.” 법원 경위와 주위에 서있던 경찰들은 우리 쪽으로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너무나 순식간이었고 천막을 지키려 달려간 우리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함성과 박수로 농성이 시작되었다. 오늘까지 10일차 노숙농성이다.

 

1971년 최초의 사법파동이 있었다. 판사들이 공안사건에 자꾸 무죄를 내리는 것이 박정희는 맘에 들지 않았고 결국 서슬퍼런 군부독재가 양심껏 재판하는 판사들을 손보기 시작하자 이에 법원 전체가 들고 일어난 것이다. 독재자 박정희의 칼은 검찰이었다. 서울지검 공안부는 대표적인 소신 판사인 이범렬 부장판사를 표적 수사하여 관례상 접대를 이유로 구속영장까지 청구했다. 접대자체가 전혀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법원은 시기와 대상의 형평성을 보건대 정황상 소신 판사에 대한 표적수사로 결론지었고, 이를 독재정권이 법원의 독립성에 도전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전국 법관의 1/3인 153명의 판사가 사표를 제출했다. 박정희는 법무부장관에게 수사중지를 지시하고 대법원장은 법관처우개선을 약속하면서 사법파동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당시 대법원장을 찾아가 법관들의 항의를 전달한 7명의 판사 중 스스로 사직한 홍성우, 김공식 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최영도, 목요상, 김인중, 금병훈, 장수길 등 5명의 판사는 모두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이후에도 1988년 2월 소장 판사 335명이 5공화국에서 중용되었던 김용철 대법원장 재임명을 반대하며 성명을 발표하면서 시위하여 결국 김용철 대법원장이 사퇴하였고(2차 사법파동), 1993년 6월에는 판사 40여명이 군부독재에 협조한 사법부의 자기반성을 촉구하며 항의하여 대법원장이 사퇴하기에 이른 일도 있다(3차 사법파동). 그리고 2003년, 판사 160여명이 기수 서열에 따른 보수적 남성 법원장만이 대법관이 되는 관례에 항의하며 대법관 제청에 반대하는 연명을 제출했다(4차 사법파동).

 

이처럼 법원은 지난 군부독재 시절 권력의 폭압적 분위기에서 그릇된 재판을 했거나, 정당한 지휘권과 인사권을 침해당한 역사가 있다. 그런데 작금의 사법파동은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다. 법원이 사사로운 제 이익을 위해서 스스로 정권에 부역한 것이다. 특히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법원이 박근혜 정권과 거래한 재판들이 모두, 노동자·사회적약자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가장 마지막으로 법원에 기댄 사건들이라는 점이다. 1차~4차 사법파동에서 피해자가 법원 또는 판사였다면, 이번 사법파동에서는 법원과 판사가 가해자가 되었다. 그래서 사법파동이 아닌 “사법농단”이라고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

 

문제가 된 대법원 판결들을 살펴보니, 사법농단의 피해자는 투쟁하는 노동자, 가난한 서민, 독재의 폭력에 저항하다가 희생된 과거사 피해자들이었다. 법원은 제도에 희생된 약자를 권력에 아부하기 위한 ‘협상카드’로 사용함으로써 이들을 두 번 죽였다. 대법원이 정권의 하수인이 되었다. 강요에 의한 굴복이 아닌 자발적·적극적 부역이기에 이는 조금도 감경될 수 없고 오히려 가장 엄하게 가중처벌 되어야 할 역사범죄다.

 

변호사도 중요한 직접 피해자다. 재판이 이 모양이면 우리가 쓰는 서면이 다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재판이 이 모양이면 국민이 권력자를 찾아가지 무엇 하러 변호사를 선임하겠는가. 변호사는 독립성과 공정성을 스스로 내팽개쳐 버린 법원에서 더 이상 재판을 할 수 없다. 심판이 부패하고 경기장이 무너져 내렸는데 선수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시합 준비에만 매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리로 나왔다.

 

대법원 앞에서 법률가들이 천막 노숙농성에 돌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일상적이지 않은 사태에 일상적으로 대응할 수는 없다. 초유의 사법농단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법률가들이 책상머리와 법정을 벗어나 초유의 노숙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피해 당사자들 외의 국민 대다수는 이 사태가 어떻게 역사를 후퇴시켰는지, 그 피해의 규모와 향후 예방의 필요성에 대해 크게 절감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사법농단에 대한 사회적 파장은 지금보다는 더 커져야 한다. 독립적이며 공정하여 시시비비를 가리고 정의를 세우는 주춧돌이어야 할 법원이 썩어버리면 힘의 논리와 권모술수만이 지배하는 정글에서 모두가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문명의 파괴다. 역사의 종말이다. 대통령이 권력을 팔아먹은 국정농단에 버금가거나 이를 능가하는 심각한 사태다.

 

그렇다면 사안의 엄중함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는 우리 법률가들이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한다. 법률가들이 행동함으로써 사회적 공론을 주도하고 토론의 장을 열어,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이 사법농단 사태를 부각시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거리로 나서게 되었다.

 

금, 2018/06/15-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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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기 자원활동가 인터뷰]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는 사회를 꿈꾸다 : 조현주 변호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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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한 점 없이 맑던 6월의 어느 날, 공공운수노조 법률원에서 조현주 변호사를 만났다. 변호사가 된 후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자의 곁에서 보낸 그는 만도지부 투쟁, 쌍용자동차 대한문분향소 투쟁, 콘티넨탈지회 노조 간 차별 소송 등 굵직한 노동 사건들을 맡아왔다.

최근 열린 민변 31차 정기총회에서 모범회원상을 수상한 그는 ‘세상에 이로운 변호사’가 되어야겠다는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 같다는 소감을 밝혔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는 사회를 꿈꾼다는 조현주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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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변호사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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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현주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조현주 변호사입니다. 2009년에 변호사가 된 후 2011년에 민주노총 법률원을 시작으로 금속노조 볍률원을 거쳐 작년 5월부터 공공운수노조 법률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Q. ‘조현주 변호사‘라고 하면 ’노동‘이라는 키워드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같아요. 대학시절부터 노동 변호사를 꿈꾸신 건가요?
사실 대학교에 들어갈 땐 변호사가 되어야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노동 분야에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어요.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마냥 낭만적인 캠퍼스 라이프를 꿈꿨죠. 그러던 중 정말 우연한 계기로 학내문제 관련 집회에 참가하게 됐어요. 그런데 거기서 연세대학교 학생 한 명이 죽는 일이 발생한 거예요. 그 학생은 풍물패 단원이었는데, 집회가 진행되기 전 준비 작업을 했을 뿐인데 토끼몰이식의 시위 진압으로 인해 맨 앞에서 맞아 죽은 거죠. 그 학생이 위협적인 무기를 가지고 폭력적인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걸 보면서 왜 민주주의 사회에서 집회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는 건지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 후 자연스럽게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웠고,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어요.

이후 졸업할 시기가 되어 ‘내가 뭘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고, 제 대답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때 행복하다’는 거였어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 즉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 길로 시험 준비를 하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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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원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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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럼 사법고시 합격 후 처음부터 법률원에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으셨던 건가요?
네. 연수원 수료할 때 법률원에 지원을 했는데 그 때는 지원이 늦기도 했고 채용이 안 되었어요. 그래서 우선 일반 법률사무소에서 2년 정도 근무를 한 후에 다시 지원을 해서 운 좋게 민주노총법률원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Q. 현재는 공공운수노조 법률원에서 일하신다고 하셨는데 어떤 업무를 하고 계신지 구체적으로 설명 부탁드려요.
우선 공공운수노조 법률원은 공공운수노조의 부설기관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노조 관련한 일을 하는데요, 구체적으로는 상담 및 자문, 의견서 작성, 법률 교육, 다른 단체와의 연대활동, 기본적인 송무 등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사무실에는 변호사 9분, 노무사님 4분, 차장님 3분이 함께 일을 하고 있습니다.

Q. 업무의 강도는 어떤지 궁금해요.
법률원에 들어오기 전에 바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저도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라 걱정을 했어요. 지금은 법률원 규모도 어느 정도 커지고 인원 충당이 많이 돼서 예전 선배들만큼 고생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기본적인 업무는 상당한 편에 속해요.

특히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시기에는 처리해야 할 일이 상당히 많아지죠. 또 단순히 투쟁은 끝나더라도 법률적인 싸움은 지속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기본적으로 업무량은 있는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주말에는 최대한 쉬려고 노력하는데, 이때는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거나 미술관도 가거나 다른 취미생활을 해요.

Q.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높은 업무강도를 버티기 위한 나름의 비법이라도 있나요?
정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요, 저 스스로도 아직 비법을 찾지 못했거든요.(웃음)
다만, 예전에는 최대한 일을 빨리 끝내려고 식사도 자리에서 대충 해치웠는데, 이제는 점심시간에 바깥공기도 쐬고 많이 걸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있는 것만큼 척추에 무리가 가는 것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식사시간에는 조금 여유를 가지고 산책도하고, 혈액을 순환시켜주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에요.

Q. 그동안 다양한 법률원에서 활동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제가 금속노조법률원에 있었던 2016년 초에 노조가 처음으로 압수수색을 당한 사건이 있었어요. 그 때 금속노조 사무처 분이 “그래도 변호사님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어요.”라고 문자를 보내주셨어요. 그때 내가 도움이 됐구나, 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문자를 보내주셨던 게 아직까지 기억에 많이 남아요.

이 외에도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여럿 있어요. 일을 하다가 자신감이 떨어지거나 하는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떠올리는 분들, 노조들이 있어요. 절 잊지 않으시고 “보고 싶다”고 연락 주시는 분, “고맙다. 잘했다”고 말해주셨던 분들이요.

한번은 제가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수련회에 참석해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는데, 최근에 지회장님이 농담으로 ‘변호사님이 불러준 그 노래 때문에 우리가 투쟁할 수 있었어요’라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그런 가벼운 농담일지라도 기억에 남죠. 이런 순간순간들이 모여서 저한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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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갑질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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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직장갑질 119에서 활동을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정확히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직장갑질 119>는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네이버 밴드, 메일 등을 통해서 노동자분들이 직장에서 받으신 부당한 대우에 대해 말해주시면 스태프들이 법률 자문을 해주는 시스템인데요, 저도 스태프로 직장 내 부당한 대우나 차별적 관행에 대한 법률 자문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Q. 직장갑질 119에 자문을 의뢰하는 분들은 대부분 어떤 피해를 입으신 분들인가요?
피해자 분들이 얘기해주시는 사건들은 대부분 근로기준법 위반과 관련된 것들이에요. 임금체불이나 근로시간 산정, 연차 수당과 관련된 문제들이 상당히 많고요, 이 외에도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는 비율도 꽤 높은 편입니다. 이런 고민들을 들으면 저는 항상 노조에 가입하거나, 노조를 직접 만드시라고 제안을 하는 편이에요. 문제를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혼자보단 여럿이 힘을 합쳐 해결하는 게 훨씬 수월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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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직장갑질 119에서 진행되는 상담과 법률원 측에서 진행하는 노동 상담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민주노총 법률원에서도 유선 상으로 노동 상담을 하긴 해요. 다만, 이쪽으로 전화를 주시는 분들은 대부분 노동조합에 대해 거부감이 없으신 분들이고, 상담이 진행되기 전에 저희가 거의 이름, 전화번호 등을 확인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누군지 저희가 좀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죠.

이에 반해 직장갑질 119를 통해 문의해주시는 분들은 모두 익명이기 때문에 저희가 정확한 신원을 파악할 수 없어요. 익명이기 때문에 상담을 신청해주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덜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고, 접근성이 좋아지는 측면은 있어요. 한편으로 저희가 상담을 해드려도 실질적으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활동이 정말 중요한데 이분들이 상담 후에 노동조합 활동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실지는 미지수죠. 이 부분은 민주노총 법률원 유선 상담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갑질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법률상담을 넘어서 ‘직접 힘을 모아 부당한 것을 바꾸자’는 것이 필요한데 그런 측면에서 상담을 넘어선 집단적 변화를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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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목소리를 듣는 사회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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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변호사로서 노동 현장에 함께 하시면서 노동권 보장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법적 장치, 사법 환경이 있나요?
문제들이 한 둘이 아니라 단정하기 어렵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를 규정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특히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되는 분들이 있는데, 이 분들은 지금 법원의 해석으로 ‘노동자’의 범위에 포섭되고 있거든요. 이분들이 더 이상 법원의 해석을 기다리지 않고 권리를 보장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 부분은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한 사항이기도 하고요. 유엔 사회권위원회에서도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라는 권고가 내려왔는데 이행기간이 내년 상반기로 알고 있어요.

이 외에도 지금 창구단일화 구조는 사용자의 입맛에 맞춰 교섭을 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변경되어야 하고,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법정형이 낮은 것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또 지금 현행법에서는 강요된 근로를 금지하기는 하는데 ‘감금’과 같은 수단을 요구해요. 즉, 아무리 강요된 근로가 발생했더라도 그것이 ‘감금’과 같은 수단에 의한 것이 아니면 형사적 처벌을 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현실적으로 요새 누가 감금해놓고 강제로 일을 시키나요? 법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인거죠. 뿐만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을 때 그게 실질적으로는 폭행을 하거나 협박에 이르는 정도는 아니어서 법적 처벌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지속되는 경우가 있고요. 이렇게 법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부분들은 시급히 개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2013년 변호사님께서 쓰신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는 사회”라는 칼럼을 읽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는 사회가 되기 위한 선결과제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노동자의 개념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우리사회는 ‘노동자’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막노동‘의 이미지만 떠올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저들은 노동자야’, ‘나는 커서 노동자가 되지 않을 거야’, ‘나는 노사관계와 관련이 없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도 많은 것 같아요. 왜 이런 편견들이 생겨나는 걸까요? 우리가 학교에서 이 부분에 대해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죠. 우리 모두가 노동자가 될 수 있고, 노동자가 되었을 때 어떠한 권리들을 요구할 수 있는 지에 대해 학교에서 어릴 때부터 교육이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해요.

또,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막연하게 ‘투쟁을 하는 단체’, ‘공격적인 단체’라고 편견을 갖는 부분도 개선되어야겠죠. 노동조합을 활동할 권리가 헌법에 명시된 이유는 이 활동을 통해 우리가 기본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만큼 노동조합이 중요한 데 그 중요성이 과소평가되는 것 같아요. 이 외에도, 노동조합의 투쟁방식도 천차만별일 수 있는 데 노조에 대해 공격적 이미지만 갖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런 편견들이 해소될 때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는 사회가 만들어 질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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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한 인터뷰에서 “정의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변호사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추상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윤보다 사람의 가치가 소중한 것’이구요, 구체적으로는 ‘구성원들의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음식과 식당이 차고 넘치는 데 굶어 죽는 분들이 있고, 길거리에 집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 한 몸 뉘일 곳이 없는 분들이 있다는 게 이해가 안가요. 아픈데 돈이 없어서 죽어야 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고, 노후를 위해서 일평생을 바치는 그것도 이해가 안 가요. 이런 기본적인 것들이 해결되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 실질적인 평등이 보장되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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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마지막으로, 인간 조현주의 앞으로의 계획, 꿈은 무엇인가요?
법률원에 처음 들어올 때 술자리에서 꿈 얘기를 했는데, 나중에 묘비에 ‘인권변호사‘ 라는 글자가 새겨질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살다 보면 현실적 여건 때문에 지금 이야기 하는 꿈이 바뀔 수는 있겠죠.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인권변호사’로 오래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금, 2018/06/29-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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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본 잡담은 1%의 진실과 99%의 허구로 이루어진 것으로, 위법행위에 관한 진술이 아님을 명백히 합니다.

 

<어리버리 신입변의 좌충우돌 사법농단규탄법률가농성단 참가기>

-이경재 변호사

   6월 초순인데도 햇볕이 뜨겁다. 6월이 이렇게 더우니 올해 여름은 정말 덥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대법원 동문을 향해 투덜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오늘 11시 대법원 동문 앞에 있을 법률가 기자회견은 여느 회견과 다른, ‘꿍꿍이’가 있는 발표이다. 공표된 사실과 달리 기자회견 말미에 기습적으로 농성 시작을 알리며, 천막을 치기로 예정되어 있는 것.

   현재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원청구가 되어 있기는 하나, 아무튼 현행 집시법 제11조 위반행위이다. 제길 변호사가 되어 공식적으로 하는 첫번째 일이 위법행위라니, 내가 잘못하는건지 법이 잘못된것인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얼추 11시 정각에 대법원 동문에 도착했다. 동문 앞은 ‘피해자 집단고발관련 기자회견중으로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다. 모르겠다. 너무 덥다. 어떻게든 더위만 피하고 싶다. 그늘을 찾아, 선글라스를 꼈다. 아 그래도 덥다. 법률가농성단 상황실팀원 L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농성시작선언’신호에 맞추어 게시판앞에 쌍용차지부, 콜텍지부 등 조합원아저씨들이 천막을 세워주시고, 동시에 ‘젊은’변호사들이 경찰에 대한 스크럼을 짜기로 했다고 하였다. 그래 나보고 몸싸움하라는 거지. 음. 판넬을 들고 얼굴을 가리고 기자회견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11시30분 :
드디어 교수님들, 피해당사자들 및 변호사들의 발언이 시작되었다.
노동위원회 위원장만 수 회 연임하셨다는 K변호사님의 피를 토하는듯한 일갈은 정말 소름이 돋는다. 아 그래도 덥다. 선글라스로 간간이 문 뒤쪽 경찰들 동태를 살폈으나, 피해자 기자회견보다는 오히려 긴장을 늦춘 상태다. 두근두근 거리는 박동소리는 나만 느끼는 건지, 혹시 모를 위급사태에 대비한 녹음은 잘되고 있는지, 모든 것이 걱정이다. 혹시라도 체포되면 이 녹취가 증거자료가 되나? 이거 지금이라도 녹음하지 말아야 하나? 체포되면, 집에 연락가나? 그럼 뭐라 말하지?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정말 덥다.
앞에 있는 기자들도 지치기 시작했는지 점점 현장을 떠나고 있다.

 

12시 20여분경 :
기자회견문은 얼추 끝나간다. 침을 삼켰다. L교수님이 ’농성을 시작합니다!‘ 선언하셨다. 사회를 맡은 R변호사가 “여러분들 뒤를 향해 주십시오” 외쳤다. 대법원 동문은 여전히 닫혀 있고, 경찰들은 당황했는지 미동도 없다.

그 순간 게시판 앞에서는 대형천막이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막으로 향해주십시오” R변호사가 지시한다.
벌써 게시판 앞은 아수라장이다. 사복을 입은 정보과 형사들은 누군가에게 항의하고 있고, 법률원장인 K변호사님 등은 ’날씨가 덥잖아요. 그냥 그늘 만들려고 친거에요‘라는 말을 넉살좋게 형사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주말장터에서나 봄직한 대형천막은 벌써 완성이 되었고, 은박 바닥을 한창 깔고 있는 찰나였다. 얼떨결에 천막 안 중앙에 껴서 말려있는 바닥을 피려고 손을 내밀었다.
누군가의 “너 뭐야” 소리가 들린다. (아 경찰들이 투입되어 막기 시작하는구나 혼자 생각했다) 그 다음 “막아 막아” 소리가 들렸다. (아 이제 체포되는건가)

그런데 사람들이 나를 잡기 시작했다.
‘뭐지???’ 하는 순간. 당혹. 그리고 깨달음.
‘아 나는 오해당하고 있구나’

“같은편이에요, 같은편이에요! 잡지마세요” 소리를 질렀다. 이런.

이럴수가. 경찰로 여겨지는 허탈함 속에 다시 바닥을 깔았다. 그러나 이미 맥은 빠졌다.
여하튼 천막은 완성되고, 판넬을 든 법률가들은 신속히 천막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다행히도 경찰들의 물리적 저지 없었다. 신난 건 기자들. 후레쉬 소리가 작렬한다.
그래도 덥다.
L변호사의 사회로 1인 발언 시작되고, 천막농성단은 안정기로 돌입하였다.

뭔가 비장함으로 시작했으나 정보과 형사로 오인당함으로 인해 허탈함으로 끝났다.-사복경찰은 정장 차림새에 시커먼 얼굴에 깍두기머리, 그리고 매서운 눈매를 연상했는데, 근데 그런데 그게 나라니. 나라니.ㅜㅜ

이렇게 시작된 법률가농성단의 천막은 시국미사를 끝으로 14일 만에 철거되었다. 쌍차 수석부지부장님은 농성 2주 내내 집요한 나의 원망을 들으셨다. 농성이 끝난 후 며칠간은 아침마다 왠지 동문에 가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곧 평상시처럼 복귀가 되더라.

그러나 곧 30번째 죽음이 쌍차지부를 찾아왔고, 대한문에 다시 분향소가 차려 졌다.
모두들 지치지않고 끝까지 연대하길, 그들이 우리를 도왔듯이,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기를.
농성단에서 친해진 D변호사님이 주신 엽서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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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8/07/1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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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 유흥도 모범
임재성 변호사를 만나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7월의 어느 저녁, 약속시간을 살짝 넘겨 법무법인 해마루에 도착했다. 본격적으로 야근에 파묻힐 시간에 흔쾌히 일정을 잡아준 임재성 변호사에게 죄송하고, 감사하다. 

너무 궁금한 사람이었다. 연예인을 보는 기분으로 사심 가득 이것저것 많이도 물어보았다. 임재성 변호사는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거의 무지한 인터뷰어에게 해준 개인 과외는 덤.

먼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임재성 변호사입니다. 4회 변호사 시험으로 변호사가 됐고 지금은 법무법인 해마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변호사가 되기 전에는 사회학 대학원에서 평화연구를 하였구요, 평화단체에서도 활동하였습니다. 사회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로스쿨에 진학한 것인데, 변호사라는 자격이 이후 활동과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지도교수도 제 학부가 법대이고 당시 박사학위 논문을 ‘병역법’을 소재로 한국사회의 군사주의를 다루는 것으로 준비하고 있었기에 법사회학을 잘 해보라며 적극 추천해주셨습니다. 변호사가 되고 난 지금은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연구나 활동보다는 일반 송무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요.

로스쿨 전까지 궤적이 통상의 사람들과는 좀 달랐네요?

통상적이지 않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저 같은 사람들이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제도가 로스쿨 이 아닐까 합니다. 로스쿨에 다니면서는 로스쿨 설립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학생이 ‘나’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어요. 변호사시험 합격이 부담이긴 하였지만 문 닫고 합격해도 된다 생각에 학점이나 변호사시험 걱정에 매이기보다는 법철학, 헌법이론 등 비수험 수업을 많이 듣고, 틈틈이 논문을 쓰거나 외부 투고를 하면서 로스쿨 시절을 보냈습니다. 졸업한 이후 전형적인 변호사 업무보다는 연구나 활동을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좀 다르게 먹었던 거지요.

로스쿨은 직업학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변호사님과 같은 이유로 진학을 결정한다는 게 좀 낯설어요.

현실은 그렇게 운영되지만 제도는 활용하기 나름 아닐까요. 물론 합격률 하락으로 현재 로스쿨의 모습은 암담한 상황이긴 합니다. 처음엔 졸업 후 바로 대학원에 돌아가서 박사 논문을 쓸 생각도 있었지만, 법학공부를 하면 할수록 송무 경험에 욕심이 났어요. 다행히 졸업 즈음에 송무를 하면서 활동을 병행할 수 있는 지금의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요. 그리고 결국 올해 박사학위 논문을 법사회학 전공으로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게 병행이 되셨어요?

사무실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세상에! 사무실 자랑도 같이 해서 설명을 좀 해 주셔요.

2016년 10월쯤 제 욕심과 마음을 사무실에 말씀드렸는데, 논의를 하신 후 2017년 1년간 신건 배당에서 제외해주셨어요. 글을 쓰려면 ‘덩어리’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을 얻을 수 있었지요. 사무실에서 받은 1년을 좀 넘겨서 이번 1학기까지 논문을 썼고, 이번 7월에 겨우 통과가 되었네요.

사무실 이야기를 좀 하면, 법무법인 해마루는 흔히 ‘민변 계열 펌’이라고 설명되곤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그 이유로 입사하신 분들도 꽤 되구요. 해마루에는 민변 회원이 아니신 분들도 있으시지만, 민변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공유는 있습니다. 민변 회원 여부를 떠나 그러한 지향성을 사무실이 지켜나가야 할 가치라고 구성원들이 인식하고 또 그렇게 노력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고용 변호사가 민변 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매일매일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상당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하는데, 해마루는 ‘지원’까지는 아니라도 ‘응원’해주신다고. 민변 활동을 응원하고 여러 배려도 해주시지만, 주어진 일은 어떻게든 해놓아야 하는. 회사에 고용된 변호사로서 당연한 것이지만, 민변 회의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와 앉아있는 새벽에 살짝 힘들 때도 있지요. 아, 민변 회비를 사무실에서 내주시니 ‘지원’은 분명히 있네요. 정정하겠습니다.

적지 않은 변호사님들이 특히 고용 변호사님들이 사무실에서는 기계적으로 주어진 일을 하고, 민변에 와서야 비로소 가치 지향적인 일을 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고, 견디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요. 해마루도 회사이고, 회사의 유지를 위해서는 이익을 내야하니 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고용 변호사의 이런 심리적 고충도 사무실 내부에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나은 조건인 것은 사실이지요.

 

변호사님께 제일 먼저 여쭈어볼 건 역시 병역거부죠.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사유로 병역거부를 하는 것은 흔하지는 않지요?

거의 없죠.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90명 정도가 비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자입니다. 2002년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최초의 병역거부 선언자 오태양 이후 17년 동안의 통계이니, 일 년에 5명 정도의 병역거부자가 나왔다고 볼 수 있겠네요.

농담처럼, ‘불효자 피가 있다’라고 하는데, 변호사님은 병역거부를 어떻게 마음먹고 실행하셨는지 그 과정이 정말 궁금합니다.

대학 입학하고 학생운동을 꽤 열심히 했어요. 귀가 얇은 편인데, 선배들의 진지함에 혹 했지요.

대단한 공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일련의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데모에 나가고, 그 과정에서 경찰이나 용역깡패들의 폭력을 보면서 국가 공권력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감이 켜졌죠. 특히 집회에서 경찰의 진압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랐어요. 경찰방패와 곤봉으로 시위대를 치고 들어와 엄청난 구타를 가하기 일쑤였죠. 철거촌에서 경찰 비호아래 이루어지는 용역깡패의 폭력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고요.

현역입영 대상자였기에 군인이 되어야했지만, 앞선 경험으로 국가공권력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에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그 적대감이 ‘거부’라는 선택항을 바로 연결되지는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처럼 그냥 “때워야지”생각했고, 학생운동 늦게까지 하면서 최대한 미루다가 갔다 와야지 정도의 계획이었습니다.

2002년 병역거부가 한국사회에서 공론화되고, 언어와 선택항이 생겼지요. 병역의 뒤에 ‘거부’가 붙는 언어, 병역을 ‘거부’할 수 있다는 선택. 그 때 참 놀랐어요.

다른 길을 발견하신 거네요.

제가 속했던 학생운동 조직이 2011년 9·11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이 이어지는 국면에서 적극적으로 평화운동에 결합했어요. 공권력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평화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대적 경험을 할 수 있었지요.

질문이 왜 병역거부를 하였냐? 인데, 짧게 정리하면 운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대 문제로 고민했던 그 시기에 병역거부라는 운동이 등장했고 제가 했던 학생운동 조직이 평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제 선택항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비종교적인 병역거부는 대부분 전쟁의 시기에 급격하게 증가합니다. 베트남전쟁 때 미국의 병역거부가 대표적이에요. 전쟁의 시기에 자신이 입는 군복이, 자신이 드는 총의 의미가 분명해지니까요. 저 역시 이라크로 파병되는 한국군인들을 보면서, 그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권력자들을 보면서 평화라는 것이 신념이 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다고요?

양심이나 신념은 형성되는 과정이 필요하죠. 물론 그 과정이 꼭 긴 시간일 필요는 없지만요. 저 역시 어느 순간, ‘병역거부’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제가 했던 활동들 속에서, 당시의 사회환경들 자연스럽게 ‘살인훈련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살겠다’라는 마음을 키워나갔던 것 같아요. 그런 시대적 경험을 제가 대학생 시절을 갖을 수 있었던 것에는 운이 분명 있지요.

또 하나는, 현실적인 부분에서의 운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이 선택을 했을 때 부모님이 쓰러지셨거나 그랬으면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당시 집안 분위기가 어머니가 자해를 시도하셨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분위기거든요. 저희 집 대장이 아직도 할아버지이신데 할아버지는 아직도 제가 중국에 병역 특례를 다녀왔는지 알고 있으세요. 제가 마음을 꺾지 않자 온 가족이 함께 거짓말을 하였던 것이죠. 만약 할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쓰러지셔서 병원에 가셨다, 그랬다면 제 결정을 지키는 것이 참 힘들었을 거 같아요. 병역거부자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로 포기하는데, 저는 그런 측면에서 운이 좋았어요.

다시 그 시기로 되돌아간다면, 같은 결정을 하셨을까요?

모르죠. 조건이 바뀌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내 신념이라 하더라도.
그때로 돌아가도 절대로 총을 잡지 않고 감옥에 갈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건 너무 자신에 대한 확신인 것 같고.

(이 분 매력있다. 겸손하다. 다시 같은 선택을 하겠다, 라고 말해도 누구나 고개 끄덕일 텐데.)

질문을 좀 바꿔서 후회하지 않느라고 물어보면,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답할 수는 있어요. 병역거부라는 선택과 감옥에서의 시간이 이후의 삶에서 하나의 준거점처럼 저한테 많은 의미를 가지는데 그런 무거운 추가 하나 있으니 어떤 결정이나 판단에 있어서 든든하게 기댈 곳이 있는 느낌이랄까요?

불이익을 말씀을 하시기도 하는데, 물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은 심각한 인권침해지요. 말해 무엇 할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제가 병역거부 전에도 후에도 많은 것을 누렸다고 생각해요. 출소 이후 제가 진학하였던 사회학과 대학원도 그 결정을 높게 평가해주는 분위기였고, 병역거부로 석사논문까지 썼죠. 로스쿨에서 그랬구요. 해마루 입사에도 ‘전과자 가산점’을 제가 누린 것은 아닐까 추측도 해봅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해요, 수많은 이들의 오랜 고통을, 정작 나는 상징자본처럼 누리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마음에요.

구속 생활은 어떠셨나요.

노회찬 의원이 얼마 전에 안타깝게 돌아가셨는데, 제가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서울구치소에 접견을 오신 적이 있어요. 노회찬 의원이 17대 국회에서 대체복무 법안을 발의하였는데, 이후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병역거부자들을 만나러 오신거죠. 그렇게 한 번 국회의원이 접견을 온 수감자들은 구치소에서 함부로 못해요. 방에서도 특별한 사람이 되죠. 쟤는 국회의원이 접견 오는 사람. 노회찬 의원 덕에 얼마나 잘난 척을 하고 살았게요.

몸은 갇혀 있지만 마음을 갇히지 말자, 생각했지만 좁은 방을 여러 명이 같이 쓰다 보니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신문 칼럼 필사를 좀 했어요. 무언가를 쓰면 확실히 집중이 되니까요. 그 때 습관이 지금도 배어서 여전히 신문은 종이신문을 구독해서 보고, 또 스크랩도 하고 있어요.

병역거부 운동이 ‘남성’만의 운동이라고 쉽게 상상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관한 의견이 어떠신가요.

모든 사회운동에는 당사자도 참여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도 참여하죠. 근데 병역거부는 특히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예를 들어 우리가 치매 노인들이나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치매 노인이 아닌데, 장애인이 아닌데 왜 그 운동을 하냐고 묻지 않잖아요.

저는 안보영역의 특수성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병역 문제에 대해서는 여성들만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제되지요. ‘신성한 병역의 의무‘라고 흔히 이야기하는데 ’신성‘이라는 것은 세속의 모독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합리적 비판이나 문제제기가 모욕과 등치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자격을 따져 묻게 되는 구조가 바로 병역의 신성화입니다. 지금 육군 사병 기준으로 군복무 기간을 18개월로 줄인다고 하는데, 꼭 18개월 해야 돼? 12개월 하면 안 돼? 이런 말을 못하는 거지요. 이런 말을 하면 바로 너 군대 갔다 왔어? 니가 뭘 알아? 이런 이야기가 등장하는 구조. 병역의 신성화라는 건 결국 정보와 해석의 폐쇄성이에요. 우리가 알아서 할게, 너희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

세상의 생각과는 다르게 병역거부 운동에 있어서 많은 여성활동가들이 참여하였고, 그녀들의 역할도 지대하였습니다. 병역거부운동을 넘어서 한국 평화운동이나 평화연구에 있어서도 여성활동가, 연구가들의 역할이 그러하였구요. 왜일까 생각을 해보면, 생물학적 성이라는 기준만으로 일반화하기 조심스럽지만, 군대 경험이 없고 그 이유로 발언권마저 배제 당해온 여성들이 당연시되는 군사주의에 보다 민감했던 것 아닐까, 자신이 불편하게 느끼는 군사주의를 바꾸기 위한 운동에 참여했던 것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병역거부운동은, 군대와 관련된 운동은 남성들만의 것이라고 보는 시선이 바로 신성화의 논리, 배제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 아닐까요?

(질문 하고 혼나는 기분, 오늘 여러 번 느꼈다)

최근 헌법재판소 결정이 특별히 의미가 있으실 것 같아요. 소회를 여쭙겠습니다.

한편으로는 감격스럽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워요. 드디어 되었구나 싶지만, 이렇게 오랜 고통 끝에서야 되었구나 싶기도 하구요.

제가 2005년에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최후 진술을 했어요. 피고인으로서. 2018년에는 변호인으로서 최후변론을 하였지요. 같은 법원에서 저와 똑같은 병역법 88조 위반으로 기소가 된 병역거부자의 변호인으로서 말이에요. 피고인도 안 우는데 변호인이 최후 변론하면서 울었어요. 방청하던 활동가 친구가 판사가 보면 니가 감옥 가는 줄 알겠더라 하더라구요. 당사자는 담담하게 얘기를 했지만, 저는 변론을 하면서 좀 서럽더라구요. 13년 전에 했던 “무죄를 선고해주십시오”를 지금까지 이렇게 간절히 말해야 하다니.

헌재 결정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 예상을 하셨습니까? 물론 기대야 당연히 하셨겠지만.

2015년 이후 하급심의 계속된 무죄판결을 보면서 사법부가 이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병역거부 하급심 무죄판결은 한국 사법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현상이었어요. 상급법원의 판단이 없는 상황에서 하급심이 엇갈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015년부터 무죄 판결이 나오자 2016년 대법원 소부에서 유죄를 선고하였는데, 보름도 안돼서 하급심에서 다시 무죄판결을 내렸죠.

2015년, 16년, 17년 3년 동안 80여건의 하급심 무죄판결이 나왔는데, 판사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이 사람들 감옥에 보낼 수 없다 선언을 한 것이에요.

헌법재판소의 중요 결정들에 대한 사례분석을 해보면 대부분 시대를 앞서나가는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변화된 시대를 추인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저는 이번 결정 역시 변화된 시대를 추인하는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문재인 정부도 대체복무 도입입장을 수차례 입장을 밝힌 바 있구요.

지난 총회에서 모범회원 상을 수상하셨어요. 플랜카드에 ‘유흥도 열심’ 이렇게 적혀있던데요.

유흥이라면 좀 포괄적인데, 술을 즐겨 해서 그런 거 아닐까 싶네요. 술을 좋아하고, 인생의 낙으로 삼고 있고 그러네요. 또 지금 민변 베트남전 티에프에도 술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뒷풀이를 참 성실하게 합니다. 베트남 현지 조사 가서도 일과 시간이 끝나면 불타는 밤들을 보냈는데. 그런 연유로 그런 플랑을 만들어주신 것이 아닐까 해요.

수상 소감 한 번 더 부탁드리면 피곤하실까요.

페이스북에서도 썼는데, 평화운동 하던 사람, 변호사가 되어서도 평화운동 할 수 있게 해준 민변에 감사하지요. 민변 집행국과 공익변론센터에서 시민평화법정 준비에 정말 많은 인적, 물적 지원을 해주셨어요. 티에프가 크게 지른 사업 수습하게 해주신 거죠.

우리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티에프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고생일 거라는 예감은 들었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보니, 피해자 진술부터 하나하나 다시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제대로 된 베트남어 통역, 번역자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구요. 티에프 구성원 모두가 헌신적으로 준비했는데, 모범회원 상은 거기에 대한 공동체의 평가라고 생각해서 기분이 좋았어요.

시민평화법정이 뭔지 제가 몰라서, 준비하신 변호사님께 물어봤어요 이게 도대체 뭐냐, 대본은 누가 쓰고, 대본대로 가는거냐 아니면 돌발사항이 있냐. 결론은 정해져있냐, 이게 하나의 연극이냐, 이런 질문들이요.

연극이라는 평가도 있지요. 민간법정이기에 피할 수 없는 시선이라고 봅니다. 민간법정 자체가 강제력을 가진 판결을 얻기 위한 재판이 아닌 공론화를 위한 운동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형식이 아닌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민평화법정에서 다루어진 주장과 증거의 수준, 법정증언과 판결의 내용 등을 볼 때 저희는 실제 법정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손색이 없어야 한다는 기준을 잡고 준비하였어요. 비록 티에프 내부에서 역할을 나눴지만 원/피고 간의 공방도 사전 조율 없이 충분히 전개 하였구요. 방청 오셨던 참천군인분들도 판결에는 불만을 표시하셨지만, 재판 과정에서는 ‘나라에서 하는 것보다 잘하네’ 말씀을 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누군가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어차피 결론 뻔하게 내려놓고 한 거 아니야? 시민평화법정의 재판부로 모셨던 이석태 변호사님, 양현아 교수님, 김영란 대법관님 모두 그 부분을 인식하셨습니다. 그래도 더더욱 당위가 아닌 증거로써 주장을 입증해야 함을 강조하셨어요.

한국에서 진행된 어떤 민간법정에서도 이정도의 절차를 진행했을까 싶어요. 2일 간의 법정 전에 2주, 1주 전에 각 두 번의 변론 준비 기일을 진행하였어요. 원·피고 대리인 출석해서 공개된 장소에서 말이죠. 그 공개된 변론 준비 기일에 증거 신청과 증거 검토 그리고 재판부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항에 대한 석명들이 이루어졌습니다.

민간법정은 널리 활용되는 운동의 방식이기도 해요. 연극적 요소도 있지만, 법정이라는 형식이 주는 실체규명의 과정이 매력적이고, 판결문이라는 결론까지 도출되기 때문이지요. 2000년 동경에서 열렸던 일본군‘위안부’ 관련 국제여성전범법정이었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총9개 국가 64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일본의 시민사회가 초대를 했죠. 그것이 저희의 롤모델이었습니다. 가해국의 시민사회가 가해국의 수도에서 자신의 책임을 묻는 법정. 2000년에 일본 시민사회가 국제적인 연대로서 이루어냈다면, 2018년에 한국 시민사회가 해보자.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것, 여기서 좀 풀어 주세요.

시작은 소박했어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가 오랜 전부터 알려졌지만 구체적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국가배상소송 통해 파열구를 내보자 의견을 모았는데, 운동이 너무 소송에 갇혀서도 안 된다는 우려도 있었지요. 그래서 소송을 준비하는 품으로 여론을 환기하는 민간법정을 해보자 생각을 한 것이에요. 리서치 과정에서 2000년 동경 법정도 확인되면서 조금 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구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이 너무 커졌죠. 실제 소송이라면 한 쪽 당사자의 주장만 준비만 하면 되지만, 민간법정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직접 해야 하는 것이자나요. 법정을 세우고, 절차를 담은 헌장을 공포하고, 재판부를 모시고. 베트남이라는 언어적 지리적 거리가 있는 곳에서 조사를 하고, 원고들을 모시는 작업도 상당한 비용과 공력이 드는 과정이었어요. 베트남 정부가 이 문제에 있어서 여전히 폐쇄적인 입장이었기에 언제든 초정이 무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구요.

티에프에서 2회 현지조사를 다녀왔는데 그 자료들을 번역하는 과정도 참 고달펐습니다. 김남주, 이선경, 배광열, 오민애 변호사님이 번역 때문에 고생 참 많이 하셨어요. 지금까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 인터뷰 자료들은 피해자 진술을 그대로 베트남어로 녹취한 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현지 인터뷰 과정에서의 통역자의 진술을 정리한 것이 피해자의 진술로 유통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소송자료로는 전혀 쓸 수 없는 자료였기에 인터뷰를 영상을 바탕으로 라인 바이 라인으로 녹취를 하고 이후 번역을 진행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을 제대로 처리해줄 수 있는 인력을 구하기 어렵더라구요. 피해지역이 베트남 중부라 사투리가 심하고 피해자들이 고령이기 때문에 만만치 않다라는 설명은 들었지만, 이 문제는 아직까지 티에프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또한 시민평화법정에서 정작 피해자들이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도 있었어요. 준비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베트남어를 하지 못하고, 피해자분들과의 지리적 거리도 먼 상황에서 준비의 대부분이 한국 법률가와 활동가들의 판단과 결정으로 이루어졌거든요. 물론 시민평화법정을 시작하기 전 피해자분들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원고를 해주실 수 있겠냐는 동의를 얻었고, 2차 현지조사를 통해서 다시 설명을 드렸지만 피해자들과 충분한 소통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이 원고로서 앉아 있으실 법정이 한국어로 진행되었으며, 이틀간 15시간에 달하는 과정이었죠. 절차에 익숙한 변호사들도 그 시간동안 앉아있는 게 쉽지 않잖아요. 위스퍼링 통역을 준비하였지만 60에 가까운, 태어나서 재판이라는 것은 처음 겪어보는 분들이 이 재판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정작 원고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재판을 우리가 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복잡했어요.

하지만 법정에서 원고들은 단 한순간도 법정을 떠나지 않았어요. 잠깐 쉬시다가도 밖에 무슨 소리만 나면 이분들이 뛰어 나가시는 거예요. 궁금하다고. 자기들의 재판이었어요. 피고 대한민국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 베트남에서 오신 원고였어요. 혹시 재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시는 것은 아니까 걱정되는 마음에 실제 재판이 아니다 말씀을 드리면, 안다고, 하지만 내가 죽기 전에 이런 재판을 언제 받아보겠냐고, 지금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해주시더라구요. 제가 얼마나 관념적이었는지, 마음속에서 이 분들을 운동의 주체가 아닌 증언의 도구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지요. 뻔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피해자에서 운동가가 되는 과정이 이 분들에게는 이번 법정이 아니었을까 싶었어요.

다들 가슴 속에 하고 싶은 말들이 있으셨구나.

대본 짰냐고 물어 봤잖아요. 베트남에서 오셨던 분들의 당사자신문과 최후진술은 전혀 사전준비가 없었어요. 사실 준비를 했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했어요. 재판부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최후진술. 무엇하나 읽지도 보지도 않고 마음으로 답변하셨어요.

그런데 세상에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 거예요. 최후진술을 하시는데, 여기까지 차오르는 얘기를 그 300명 400명 되는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하시더라고요.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왔고, 그 진실을 이야기했다. 기억해달라며. 제가 법정이 끝나고 매체에 투고한 글이 하나 있는데 그 제목이 “눈부셨던 응우옌티탄들”이었어요(원고 2명의 이름이 응우옌티탄으로 동명이인이었다), 정말 그랬어요. 눈부셨어요.

(대본이 있었냐는 질문에 화가 나서 말이 길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당시를 떠올리는 임재성 변호사의 표정에서 감격스러움이 묻어나온다.)

시사인에 고정칼럼을 쓰셨던데, 그 때 변호사님 설명이 ‘평화연구자’더라구요. 보통 변호사, 교수 이렇게 직함을 쓰지 않나요?

일본에서 잠깐 공부했던 시기가 있는데 그때 참 마음에 들었던 게 그런 거였어요. 우리는 보통 소속을 얘기하잖아요. 무슨 대학, 무슨 법무법인. 소속이 없으면 명함이 없는. 근데 일본에서는 ‘작가’, ‘연구자’ 이런 호칭이 많고, 자연스럽게 통용되요. 또 연구자 앞에는 그 사람이 관심 갖고 있는 주제가 붙는데, 어느 대학에 있다는 호칭보다 그 사람을 훨씬 더 많이 설명해주는 것 같더라고요. 평화연구자, 인권연구자, 이주연구자 등과 같이 말이죠.

조금 더 내심으로 들어가면, 변호사든, 박사든 그것은 자격이나 직업의 문제이고 제가 지향하는 것은 평화연구자에요.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임재성 변호사의 사무실 한편에 시민평화법정 기념사진이 걸려있다.

 

마지막으로 민변 회원들과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는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병역거부 운동과 민변이 할 일이 더 많아질 거라고 봐요. 사실 지금 민변에서는 병역거부 사건을 해보신 젊은 변호사님들이 없어요. 근래에는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병역거부자들이 변호인을 선임하여 재판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제 대체복무제가 도입이 되면 관련된 소송들이 증가할 거예요. 대체복무심의 위원회가 불인정 결정을 하면 이를 행정소송으로 다투는 소송이지요. 위원회가 어떻게 구성될지 아직 미지수이지만, 초기에 보수적인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지요. 종교적 사유 및 많은 입증자료가 있는 비폭력-평화주의 신념 정도의 범위에서 말이죠. 초기 불인정 결정에 대한 행정소송을 통해서 나오는 사법부의 판단들이 대체복무심의위원회 방향에 중요한 기준들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봐요. 그 과정에서 민변의 변호사들이 세밀한 연구를 통해서 대응해야 겠지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곧 만들어질 대체복무심의 위원회가 병역거부자 여부를 판정하게 될 텐데, 이는 우리 사회가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양심 심사 기구가 될 거에요. 그 위원회가 이 사람은 양심 인정. 저 사람은 양심은 불인정, 이렇게 판단을 하겠지요.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비폭력 평화주의 신념’은 인정하지만, ‘남성성이 지배하는 군사주의적 공간은 나의 성적정체성과 배치된다’는 마음은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이 아니라는 판단이 나올 수 있어요. 그런 결정이 나왔을 때 소송을 준비해야죠. 초기에 좋은 선례를 만드는 과정에 민변 변호사들이 함께 하였으면 합니다. 또한 위원회의 심사 단계에서부터 변호사의 조력이 필요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역시 준비할 필요가 있구요.

3시간의 긴 인터뷰를 이 지면에 다 담지 못해 아쉽다.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하거나, 견해에 전부 공감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이를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멋있는지는 확실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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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8/1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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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처 레터”는 우리모임 회원 여러분께 드리는 사무처 구성원들의 편지입니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참가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질문하는 퀴어들!

장길완 간사

출처: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안녕하세요 민변 회원여러분, 사무처에서 상근하고 있는 장길완 간사입니다.

제가 뉴스레터로는 처음 인사드리는데요, 항상 사무처 공간에서 얼굴 맞대며 반갑게 인사드렸었는데, 이렇게 글로 인사드리니까 참 쑥스럽고 그렇습니다^^; 글재주가 없어서, 무슨 이야기로 활동 소식과 인사를 드릴까 하다가,,,! 제 19회 서울퀴어문화축제 참가 소식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퀴어-앨라이, 그리고 혐오세력 모두에게 공평한(?) 무더위가 있었던 지난달 7월 14일 서울광장에서의 서울퀴퍼 참가 소식을 전해 드릴게요! (길어도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드려요)

민변은 올해도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소수자인권위원회, 공익인권변론센터가 주관하는 부스를 운영하였고, 회장님 총장님 위원장님을 포함 30명이 넘는 회원들이 함께했습니다. 광장에 도착하고 입구를 통해 들어갈 때부터, 장장 8시간 동안 6 색깔 무지개를 질릴 정도로 봤는데요, 저기도 무지개, 여기도 무지개, 민변 깃발도 무지개, 그래서 오히려 무채색이 눈에 띌 정도의 벅찬 분위기였습니다. 당일 민변 부스에서도 퀴퍼의 전통에 맞춰 형형색색의 무지개 굿즈들을 쌓아놓고 후원금을 모금했고, 만약 성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이 제정된다면 어떤 조항이 들어가면 좋을지? 퀴어-앨라이들의 의견을 받았습니다.

포스트잇을 두 통이나 쓸 정도로 많은 분이 의견을 남겨주셨습니다. 성소수자 인권 증진을 위한 시민들의 의견을 토대로 민변이 결합할 활동이 정말 많다고 느꼈습니다.

민변 프라이드 플래그 정말 이쁘죠? 디자인은 박한희 회원께서, 기수는 김동현 위원장이 해주셨습니다. 금손!

김-치- 사진만 찍으면 어색한 변호사들… 신나는 그 날의 기운이 여기까지 전해지네요

(비온뒤무지개재단은 한국여성의전화와 함께 행진 트럭을 운영했고, 올해도 반성매매인권행동이룸, 한국여성민우회, 장애여성공감 등 페미니스트 단체들의 부스와 난민인권센터,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민주노총 등 사회운동단체들의 부스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저도 각 단체들의 부스에서 파는 굿즈가 너무 이뻐서 정신없이 업어 오다보니 다음 날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 지갑 눈 닫아…)

올해 서울퀴퍼에서는 더욱 페미니스트-퀴어와의 연대를, 사회적 소수자들 간의 연대를 두드러지게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성 인권과 성소수자 인권, 그리고 수많은 사회적 소수자로 위치 지어 지는 이들의 인권은 분리되어 생각될 수도, 분리되어 보장받아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여성으로 위치 지어지는 불평등,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장애가 ‘장애’로 배치되는 불평등, 난민-이주민을 ‘잠재적 위협’으로 상상하는 불평등, 성소수자가 일상에서 지워지고, 존재를 부정당하게 되는 불평등한 현실 등, 사회적 소수자가 불평등한 조건에 놓이고, 차별을 경험하는 것은 다층적이고 다면적이고, 공적/사적의 영역에 상관없이 경험하는 것이며,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는 교차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여성과 남성, 두 가지의 성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그 두 가지의 성별만이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는 생각, 이러한 두 개의 성별 중 ‘여성’이라는 범주가 만들어지고, 그 범주에 위치된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불평등과 폭력의 문제는, 성별이분법이라는 문법 하에 퀴어가 경험하는 차별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서로의 차이가 절대 공존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간극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러한 차이를 기반으로 한 소수자들의 연대가 결국 교차적인 구조적 차별을 없애고, 서로 서로의 불평등한 위치를 바꿔나갈 힘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특정한 관계(이성애), 특정한 성적 실천(여성성, 남성성에 맞춘 젠더롤), 특정한 몸(지정성별과 ‘동일한’ 몸)만이 정상으로 여겨지고, ‘정상’의 위치를 점유하는 이들만이 1등 시민으로 존재하는 사회에 저항하며,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인식의 지평을 열어가는 모습들은 올해 서울퀴퍼에서 더 두드러지게 볼 수 있었습니다. 참여한 많은 이들이 혐오세력에 기죽지 않고, 광장에 모인 다양한 서로의 존재들을 축하하고 자긍심을 북돋는 시간이었습니다.

아 물론 혐오세력은 날씨가 엄청났는데도 불구하고 몇 년째 계속 시청광장 일대에서 동성애 축제를 반대한다고 외쳤습니다. (퀴퍼에는 트랜스젠더, 양성애자 등 보다 다양한 성적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오는데 말이죠..?) 서울퀴어문화축제는 2015년부터 시청광장에서 진행되었는데, 그즈음부터 한 차례도 빠짐없이 혐오세력이 방문(?)해주었습니다. 시청광장은 아마 회원 여러분에게 익숙한 공간이실 텐데요, 그 공간 자체가 시민들이 광장을 통해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민주주의를 열어가기 위해 모였던 공간이고, 610 민주항쟁부터 최근의 촛불집회까지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던 곳이니까요. 이렇게 역사적인 공간인 시청광장에서, 그간 성소수자를 사회 구성원으로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한국 사회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가로지르는 퀴어들이 그 경계를 무너뜨리고, 차별과 낙인을 넘어 다양한 성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자고 자신을 드러내는 서울퀴퍼가 개최되는 것 자체가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혐오세력은 공적 공간에 저렇게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축제하는 게 너무 싫을 텐데, 어쩌겠어요, 저희는 귀엽고 사랑스러운데요.

아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는 아예 프라이드 플래그를 건물에 걸어놓았습니다. 국가 기관이 축제에 참여하고, 성소수자 인권 증진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하는 모습들은, 한국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많은 퀴어 시민들에게 용기와 힘으로 다가왔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시발점으로 많은 국가기관에서 성소수자 인권을 ‘나중’의 문제로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한국 사회에 살아가는 퀴어들의 불평등한 위치에 주목하고, 권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책임 있는 자세와 행동을 보여주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퀴어 이슈가 사소한 문제이자 사적인 일이라 여기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 문제는 그간 우리 사회가 응답했어야 하는 일이고, 국가와 공동체가 성소수자의 권리가 보장되도록 바꿔 나가야할 책임이 있는 공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공적/사적 영역, 두 가지의 영역이 완벽하게 분리되어서 이야기되기도 어렵지만, 개인적인 일이라 여기고, 그렇기에 사소한 것으로 얘기되는 퀴어 운동은 오히려 사회 시스템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가 누군가를 사회 구성원에서 탈락시키고, 그렇게 해야만 운영되는 사회이며, 탈락된 이들의 안위와 사람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구성원으로서 탈락된 이들이 이 사회의 구조가 어떻게 설계되어 있고, 삶의 풍경을 어떤 방식으로 바꿔나가고 싶다는 것을 말하고 질문하고 바꿔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고 ‘공적인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직 미약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가 퍼레이드에 참여한 퀴어-앨라이들에게 환영과 지지의 메세지를 던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축제가 끝난 지는 이제 한 달이 넘었네요. (한 달 만에 이 글을 쓰려고 하니 기억이 가물가물 했습니다^^;). 올해 서울퀴어문화축제 사회를 두 번째로 맡아 진행하며 무대 위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다 보니, 문득 3년 전에 공개 커밍아웃하고 퀴어 운동을 했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3년 전에, 당시 제가 활동하던 공간에서 커밍아웃 했고, 이후로 지금까지 오픈 게이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커밍아웃이 항상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던 것도 아니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주 저를 이성애자일 것이라 ‘당연’하게 생각하고 물어보는 질문을 하며, 제가 인생에서 ‘처음’ 만난 게이라고 말하며 “모든 게이는 다 장길완 같을 것이다,“ 라고 넘겨 짓는 타자화의 경험도 있었으며(이성애자가 어떤 언행을 한다고 해서, 그게 곧 바로 이성애자들은 다 저럴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성차별과 성별이분법을 해체하고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가기 위한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는 등의 말들도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제가 맺는 친밀한 관계들은 사회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인정’받을 길이 없어, 앞으로 노후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하는 걱정도 앞서네요. 이런 것들은 제가 커밍아웃했어도, 대체로 ‘안전한’ 공동체에 속해 있는 ‘혜택’을 누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커밍아웃’을 해야 하고, ‘1등 시민’이었으면 증명 받지 않아도 되는 부분들을 ‘질문’받고 하는 당면한 현실입니다. 주변의 트랜스젠더 친구들이 경험하는 성별 정정과 정체성에 맞는 젠더 표현을 하는 것의 난관과 트랜지션을 선택해 나가는 과정, 그리고 레즈비언 친구들이 가부장제-성차별 사회에서 이성애-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 계속 마주하는 어떤 식의 압박 등 우리가 삶에서 겪는 수많은 난관들을 함께 마주칠 때, 언제쯤 변화된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까? 를 질문하며 먹먹해지기도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서울퀴어문화축제가 결국 시청광장을 점유하며 일 년의 몇 안 되는 하루를 무지개로 물들이듯이, 인내심을 가지고 변화된 세상을 만들어 가면 넘어설 수 있는 난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퇴진으로 촉발된 ‘촛불혁명‘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참 많이 듣는데요, 촛불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이제는 일상에서의 민주주의가 관철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노동권을 보장받는 일, 사법 농단의 전모가 밝혀지고 있는 지금 사법부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개혁해나가야 하는 일,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언제나 ’무시해도 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문화를 바꾸고, 권력과 위계로부터 발생하는 성폭력을 추방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 비장애인에게 맞춰진 사회 시스템을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꿔내는 일, 이 모든 것들이 촛불 이후에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해 바꿔나가야 하는 것들이라 생각합니다. 촛불이 끝난 이후에도,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성소수자가 감내하고, 싸워 나가야 하는 ‘일상’에서의 차별은 여전히 유효하게 잔존하는 지금, 저도 그렇고, 많은 퀴어 운동가들도 그렇고, 그리고 민변도 그렇고 해야 할 활동이 참 많습니다. 민변은 계속해서 성소수자 존재를, 성소수자의 존재와 퀴어-인식론을 법에 기입하고 바꿔나가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군형법 92조의 6 폐지 활동,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 참여, 각 지자체의 인권조례를 지키기 위한 활동, 성별이분법적 인식에 기반한 문화재청 한복가이드라인을 국가인권위에 제소하는 등 많은 활동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민변 회원분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활동에 참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이제 이만 이렇게 장황하고 긴 글을 끝내며! 축제에 참여해서 고생한 민변의 회원들과 상근자들께도 감사 인사드리고, 아직 축제를 못 오신 분들이 있다면, 앞으로 열릴 다른 지역(ex. 부산, 인천, 제주 등)의 퀴어문화축제와 내년에 있을 서울퀴어문화축제 때 함께 참여하고, 퀴어들의 끼를 흠뻑 경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내년은 서울퀴어문화축제 20주년이래요! 대박)

그럼 무더위 잘 이겨내시고, 자주 뵙겠습니다!

덧붙여,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연인원 몇 만 명이 오는 서울퀴어퍼레이드, 그리고 한국퀴어영화제를 주최하고 주관하고 있습니다. 많은 시민사회노동 단체들이 그렇듯… 항상 사람과! 돈이 충분치 않다고 합니다. 여유가 되시는 분들은 서울퀴퍼 조직위 후원도 해주시고, 그리고 성소수자 인권 운동 단체들의 역동적이고 끼발랄한 활동들에도 많은 관심과 후원 부탁드릴게요. 이제 진짜 안녕!

 

2018.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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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8/17-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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