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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3) – 계몽운동, 아시아연대론, 사회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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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3) – 계몽운동, 아시아연대론, 사회진화론

익명 (미확인) | 화, 2018/03/27- 16:19

사회진화론과 조선 그리고 이인직

사회와 사회적 결과의 상(上)에 진화론을 응용하야 사회적 단체로서 공구(攻究)의 대상을 삼는 것이 중요한 바니 개(蓋) 차(此) 단체가 개인과 무이(無異)함도 유(有)하나 생존의 수단을 인(因)하야 상호 경쟁함은 개인보다 가장 제(諸) 단체에 재(在)함이라 (중략) 차(此)와 여(如)히 일체의 사회적 제도는 선악의 각 인종을 일 사회적 단체에 결합한 것인데 기 단체는 상적(相滴)한 경쟁자와 경쟁하는 일 단위라. 부(夫) 자연도태의 제법(諸法)은 차 사회적 단체 상(上)에 행(行)하며 차(此) 단체는 사회진화 과정에 중요한 단위라.(이인직, 「사회학 속(續)」, <소년한반도>,19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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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한반도>창간호(1906.11.1)

 

이인직의 신소설은 보았어도 이른바 ‘진화론’에 대해 언급한 글은 대부분 처음 보았을 겁니다. 여기서 이인직이 언급한 진화론은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82)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아니라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입니다. 사회진화론은 흔히 쓰이는 약육강식, 우승열패,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됐다면 이해될 런지요.
19세기 서구에는 다양한 사상들이 난무했습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의 사회학과 실증주의,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90)를 중심으로 한 사회진화론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진화론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를 풍미했던 이론입니다. ‘Social Darwinism’ 즉 ‘사회다위니즘’이란 이름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적으로 적용한 이론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명칭은 20세기 중반에 19세기의 사상적 흐름을 정리하면서 후세에 붙여진 이름이지 당시에 쓰이던 명칭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진화론에 대한 저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1859)보다 먼저 출간되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의 시조인 스펜서는 사회진화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진보의법칙과원인(Progress: Its Laws and Cause)>를1857년에발표했습니다.물론 사회진화론이 나중에 다윈의 진화론을 흡수한 것은 사실이며 심지어 다윈조차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사회진화론은 스펜서 개인의 이론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다윈의 이론을 흡수하여 사회의 발전을 사회유기체적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자유주의를 강조하여 인간의 경쟁을 장려하는 많은 사상가의 시도를 사회진화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상당히 왜곡하고 있습니다. <종의기원에대하여>라는 다윈의 진화론 저서 제목에서도 진화(evolution)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책의 본문 속에서도 다윈은 진화(evolution)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진화’라는 표현은 진화 이전 보다 ‘우월’해 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에서의 진화는 우월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의미는 생존경쟁(Struggle for Life)에 의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일 뿐입니다. “더 강하거나 우월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생존에 적합했기에 살아남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윈은 진화(evolution)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변화를 포함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더군다나 스펜서의 경우 생물학적 진화론의 관점은 다윈보다 라마르크(LAMARCK, Jean Baptiste 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1744-1829)에 가깝습니다. 이른바 ‘용불용설(用不用說)’로 대표되는 그의 이론은 ‘획득형질의 유전’ 즉 후천적인 노력으로 획득한 형질이 유전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진화론은 19세기 서구 사상계를 휩씁니다. 결국 다윈마저도 <종의 기원에 대하여> 제5판에서 ‘진화(evolution)’라는 말을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애초에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철학과 자연과학의 통합된 이론을 만드는 것과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를 목적으로 했습니다만, 문제는 당시 제국주의는 이것을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활용한다는 점이며, 사회진화론이 그에 부합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한중일 3국의 사회진화론의 수용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일본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1836~1916)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 중 가토 히로유키와 량치차오는 절대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진화론은 1880년대부터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을 아시아에서 가장 처음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가토 히로유키가 다윈과 스펜서의 번역서 수준을 넘어서서 사회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원리론을 형성해가고 있었습니다. ‘evolution’의 역어로 진보와 개화를 조합한 ‘진화’라는 신조어를 만든 것도 그였습니다. 개화파의 ‘개화자강론’은 국가주의와 제국주의론을 뒷받침하는 구실을 하던 일본 사회진화론의 수용 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진화론을 접하고 흡수했던 경우는 유길준처럼 서구 유학을 통해 직접 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중국과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중국과 일본에 의해 재가공된 사회진화론이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사회진화론을 해석하는 방식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일본은 다소 공격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이는 사회진화론에 대한 번역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옌푸(嚴復, 1854~1921)와 가토의 번역을 비교하면 ‘evolution’을 각각 ‘천연(天演)’과 ‘진화(進化)’, ‘struggle for existence’을 ‘물경(物競)’과 ‘생존경쟁(生存競爭)’, ‘natural selection’을 ‘천택(天擇)’과 ‘도태(淘汰)’, ‘survival of the fittest’을 ‘택종유량(擇種留良)’과 ‘우승열패(優勝劣敗)’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 번역합니다. 이외에도 옌푸는 사회복지와 관련된 용어들은 ‘부강’과 관련되는 용어로 번역했습니다. ‘natural selection’(자연선택)을 예로 들면 옌푸는 원 단어의 뜻에 가까운 ‘천택’으로 번역한 반면 가토의 경우 불필요한 것, 부적당한 것이 ‘제거’되고 적합한 것만이 남긴다는 의미의 ‘도태’라는 단어를 선택합니다.
일본의 사회진화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사회유기체설’입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사회도 생물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유기체라고 보았습니다. 이 이론은 스펜서가 비록 ‘자유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사회진화론을 논리를 전개했음에도 논리적 귀결은 전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회유기체설은 사회를 유기적 전체로 파악함으로써 개인을 사회에 종속되는 존재로 인식하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1880년대 일본정부는 ‘천부인권설’에 근거한 자유민권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의 개인에 대한 우월성을 지향하던 국권신장파 가토를 앞세웠고 결국 관민협조론이 득세하게 됩니다.
일본의 사회진화론 외에도 중국의 사회진화론 또한 국내 지식인에게 흡수되는데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95)의 <진화와윤리>를번역한옌푸의<천연론(天演論)>(1898)등이 출판과 동시에 한국에 수입되기도 했지만 중국의 사회진화론이 지식인을 비롯한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량치차오의 글을 통해서입니다. 1899년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에량치차오의 논설 「애국론(愛國論)」을 시작으로 량치차오 붐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1903년 량치차오의 사회진화론이 담겨있는 <음빙실문집(飮冰室文集)>(1902)을비롯해1914년까지100여개의 글이 번역 소개됩니다. 량치차오의 사회진화론은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강’과 ‘부국강병’으로 귀결되며 한국의 ‘계몽주의’와 ‘자강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량치차오 역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일본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게 되고 종국에 사회진화론과 관련된 용어도 가토가 번역한 용어로 모두 교체하게 됩니다.
다소 장황하게 ‘사회진화론’에 대해 정리한 것은 이인직을 비롯해 당시 지식인들이 혼란된 세계관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근대 사상과 문물이 밀려들어오고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이라는 혼란 속에서 구한말 지식인들이 판단과 선택을 하게 했던 사상적 배경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 ‘용서’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 시기 한국의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과 그에 근거한 근대지상주의, 동양평화론, 대동합방론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정치학교에서 공부한 이인직은 일본의 사회진화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연이(然而) 기(其) 발전(發展)하야 일정(一定)의 직능(職能)을 수(遂)하는 소사회(小社會)와 차등(此等) 소사회(小社會)를 포함(包含)하는 대사회(大社會)의 간(間)에는 중요(重要)한 차별(差別)이 유(有)함으로써 (중략) 기(其) 사회(社會)의 골격(骨格)되고 구조(構造)된 자 (者)-니라. 생물학상(生物學上)의 어(語)를 적(籍)하야 말하진디 기(其) 기관(機關)이라 칭 (稱)할만한 자(者)라 (중략) 오인(吾人)은 사회(社會)의 일분자(一分子)이라.(이인직, 「사회」, <소년한반도> 1, 1906)

 

개(盖) 국가(國家)의 대직능(大職能)은 내부(內部)의 규리(睽離)와 외부(外部)의 공격(攻擊)에 대(對)하야 신민(臣民)을 보호(保護)하는 바라. 차(此)와 여(如)히 일체(一切)의 사회적(社會的) 제도(制度) 선악(善惡)의 각종인(各種人)을 일사회적(一社會的) 단체(單體)에 결합(結合)한 것인디 기(其) 단체(團體)는 상적(相適)한 경쟁자(競爭者)와 경쟁(競爭)하는 일단위(一單位)라. 부(夫) 자연도태(自然淘汰)의 제법(諸法)은 차(此) 사회적(社會的) 단체상(團 體上)에 행(行)하며 차(此) 단체(團體)는 사회진화과정(社會進化過程)에 중요(重要)한 단위 (單位)라.(이인직, 「사회학 속」, <소년한반도> 3, 1907)

 

위 글은 ‘사회유기체설’에 정확히 부합하는 내용입니다. 생존경쟁과 그 경쟁에서 도태되는 단위를 국가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국가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국가 내의 각 성원들은 그들의 직능을 국가를 위하여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이인직만이 아니라 당시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논리였습니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의 이익 혹은 권리가 우선시됩니다. 어쩌면 이 논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군사독재시절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논리가 그것입니다.

 

이인직과 친일

이인직이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본격적으로 계몽운동에 투신하는 시기는 1906년 귀국 후인 일제의 통감정치 때입니다. 이인직은 당연히 통감정치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토의 사회진화론에 따르면 국가 간에도 생존경쟁에 의해 적자생존의 논리가 적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본 사회진화론의 논리 중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 1850-1922)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1893)입니다.그 내용은“동양의쇠운을만회하고흥아(興亞)의 대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동아(東亞)의 여러 나라가 대동아연맹을 결성해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중국과는 동맹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사상은 이후 일본 군국주의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사상적 기초인 ‘대동아공영권’으로 이어집니다. 즉 ‘대동합방론’은 일본의 아시아 제국(諸國)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이인직은 귀국 전부터 이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슬프다. 나라의 세력과 백성의 힘이 쇠미해짐이 이와 같이 심하니 어찌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양(洋)을 따지지 말고 우방에게 호소하고 그 감응의 동정을 구하는 것이 실로 목하의 급무일 것이다. 지금 사처(四處)를 돌아봐도 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동양의 문명국 일본밖에 없다 (중략) 원컨대 선진한 일본국 인인군자(仁人君子)는 그 동정을 찬성하여 문명의 모범을 가르쳐주시기를 (「韓國新聞創設趣旨書」, <都新聞>,1903.5.5)

 

방금 서세동점하여 아주일폭(亞洲一幅)은 거의 사분오열에 이르려고 한다. 단 일본은 홀연히 국초(國礎)를 굳게 하여 동양의 우이(牛耳)를 잡고 보차순치(輔車脣齒)의 의(宜)를 인방(隣邦)에게 두텁게 하여, 백년의 장책을 이에 확립하였다.(「夢中放語」, <都新聞>,1901.12.8)

 

이인직이 1906년 2월 친일단체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 주필로간 것은어찌보면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4개월만인 같은 해 6월에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천도교에서 창간한 민족지 <만세보(萬歲報)>의 주필로 자리를 옮겨 신소설 <혈의누>를 연재하기도 했지만 그가 어떤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답은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대한신문>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그는 이완용의 비서역할을 겸하며 일관되게 친일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09년 12월 4일 이완용 내각과 대립하던 일진회 이용구가 합방청원서를 제출하자 이완용 내각은 이인직 등을 동원하여 즉각 조직적 반대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인직은 「국민대연설회」의 연사로 직접 나서기까지 했는데, 그 반대운동은 겉으로는 합방에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일진회에 합방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반대운동이었습니다. 12월 22일 이완용은 명동에서 이재명의 칼에 찔려 중태에 빠졌지만, 이틀 전인 12월 20일 이인직은 이완용의 밀명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각 신문, 재일유학생, 대한동지회 등과 교섭해 일진회 반대 여론을 조성하고 이듬해 3월에 귀국합니다.
결국 1910년 8월 4일 일본어를 못하는 이완용을 대신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츠(小松綠)와 합방에 관한 담판을 벌입니다. 이인직은 통감부와 대한제국 내각 간의 연결통로 역할을 했고, 두 사람의 담판은 양측의 재가를 얻어 한일합방조약의 초안이 됩니다.
이인직이 했던 역할에 비하면 합방 후 그 대가는 초라했습니다. 이완용을 비롯한 한일합방의 공로자들에게는 귀족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이 내려졌으나 이인직에게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서얼 출신인 것이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완용과 그의 절친 조중응이 각각 백작・자작과 은사금을 받고 죽을 때까지 호위호식을 누린 것과 비교하면 그가 그토록 봉건주의를 비판했던 결과가 무색해지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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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직 사망 기사. 매일신보 1916. 11. 28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의 객원을 거쳐 종래에는 친일유림단체경학원(經學院) 의사성(司成)에 올라 천황을 찬양하는 글을 쓰며 여생을 보냅니다. 1916년 11월 총독부의원에서 입원 치료중 사망하는데 장례식은 일본 천리교 의식에 따라 치러졌고 아현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집니다. 그가 죽자 조선총독부에서 지급한 장례비는 450원이었습니다.

김덕영 선임연구원

시민들의 의견

친일청산을 위한 제안

 

독립운동하신 분들과 후손이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실정에 대하여 안타깝다 못해 국가의 정통성마저 의구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독립운동 후손분들에 대한 예우는 더욱 존중하고 높여야 하여야 한다는 등의 말장난은 그만하고 친일파에 대한 재산몰수라든지 물리적인 처단이 어렵다면 역사의 평가와 응징을 통하여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후대에 교훈을 남겨야합니다.

 

하여 제나름대로 제언을 한다면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좀 더 면밀한 분석과 정리를 통하여 역사로서 응징한다.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친일파들은 즉시 파묘하고 거기에 친일행위자가 묻혔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그 자의 무릅 꿇은 청동상을 세운다.

광화문광장, 독립기념관 광장등에 독립과 친일역사거리를 만들어 친일매국노들의 이름과 행적을 새긴 청동으로 깔고 그 내용이 선명하게 보일수 있도록 강화유리로 처리하여 사람들이 밝고 다니게한다.

그 앞에는 가장 존경받는 모습으로 독립운동가의 청동상을 만들고 앞에는 무릅 꿇은 친일파 조각상을 만들어 역사로서 응징한다.

친일파가 태어난 곳에는 그 지역을 상징하는 장소에 위와 같은 것을 지역규모에 맞게 설치한다

3.1절과 광복절에는 독립기념관과 광화문광장에 친일파상징물을 만들어 상징물을 밟는 친일밟기(지신밟기)놀이로 승화시켜 문화로 발전시킨다.

친일후손들에게는 일정기간 기준을 설정하여 공직은 철저히 배제한다.

중국의 남송 악왕묘(악의) 옆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간신 진회부부의 무릎꿇은 간신조각상이 있고 사람들이 침을 많이 뱉어 형식적으로 침을 밷지 마세요란 표지도 해 놓았다고 합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방법이라도 강구하여 국가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였으면 합니다

 

 

 

수, 2018/10/1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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香港映畵俳優周潤發氏全財産寄附

 

錢蟲盈四海(전충영사해)

快擲此誰何(쾌척차수하)

衆語眞英傑(중어진영걸)

村儒詠讚歌(촌유영찬가)

 

홍콩의 영화배우 주윤발 씨의 전 재산 기부

 

온 세상이 돈벌레들로 가득한데

시원스레 내던지니 이 누구인가

뭇사람이 진짜 英傑이라 말하니

시골의 선비도 찬가를 읊는다네.

 

<時調로 改譯>

 

돈벌레 세상인데 쾌척하니 이 뉘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진짜 英傑이라 하니

시골에 사는 선비도 찬가를 읊는다네.

 

*香港: 홍콩  *四海: 온  세상.  사방의  바다  *快擲: 금품을  마땅히 쓸 자리에 시원

스럽게 내놓음 *誰何: 누구 *英傑: 영웅호걸(英雄豪傑) *村儒: 시골에 사는 선비.

 

<2018.10.18, 이우식 지음>

목, 2018/10/1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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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cafe.daum.net/minjokstraight/ihsH/2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10명? 1만3천명?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러분!

2018년 3월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12,959명입니다.

실제 회비를 내는 회원은 월 평균 9,818명입니다.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도 정기총회 자료집 7~8P)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는 1만3천여 명이 아니라 고작 10명이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임원이 5명입니다.

결국, 임원을 제외하면 회원은 고작 5명입니다.

■ 2017년 12월 ~ 2018년 3월 신입회원
민족문제연구소는 회보 『민족사랑』에 매월 신입회원과 신입회원 인사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017년 12월 신입회원만 27명이고, 2018년 1월 40명, 2018년 2월 69명입니다.
2018년도 정기총회가 열린 3월에는 46명이었습니다.
3월달 신입회원도 안되는 10명을 대상으로 총회를 소집하고, 의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2017년 12월 신입회원 27명

◎ 2018년 1월 신입회원 40명

 

◎ 2018년 2월 신입회원 69명

 

◎ 2018년 3월 신입회원 46명

■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도 정기총회, 숙명여대 순헌관 중강당

2018년 3월 24일.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도 정기총회가 숙명여대 순헌관 중강당에서 열렸습니다.

전국에서 수 백여 명의 회원이 참석했습니다.

(2018.10.12. 숙명여대에서 좌석수는 360석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알림/화보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10명!!!!!!!!!!
민족문제연구소는 3월 8일에 정기총회를 열었다며 서울시교육청에 의사록을 신고했고, 4월 24일에 임시총회를 열었다며 의사록을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의 회원이 참석한 3월 24일자 2018년도 정기총회 의사록은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3월 8일자 정기총회와 4월 24일자 임시총회는 도대체 누가 열었고, 누가 허위로 의사록을 작성했을까요?

민족문제연구소가 서울시교육청에 신고한 총회의사록을 보겠습니다.

■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 정기총회 회의록 

1. 회의 일시 : 2018년 3월 8일 17:00~19:00

2. 회의 장소 : 민족문제연구소 3층

3. 회원 총수 : 10명(함○○, 임○○, 윤○○, 조○○, 신○○, 김○○, 박○○, 박○○, 방○○, 이○○)

4. 임원 총수 :   5명(함○○, 임○○, 윤○○, 조○○, 신○○)

5. 출석 회원 :   9명(함○○, 임○○, 윤○○, 조○○, 신○○, 김○○, 박○○, 방○○, 이○○)

6. 출석 감사 :   2명(임○○, 최○○)

7. 회의 안건 : 2017년 결산 승인(안)

8. 회의 내용 

                     정관 규정에  따라 위와 같이 법정수에 달하는 회원이 출석, 본 총회가 적법하게 성립되었음을 알린 후 개회를 선언하고, 사전에 통지한 사항인 다음의 의안을 부의하고 심의를 구하다.

[의안 상정] : 2017년도 결산 승인(안)

이하 생략…

■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2018년 임시총회 회의록

1. 회의 일시 : 2018년 4월 24일 18:00~19:00

2. 회의 장소 :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47다길 27(청파동2가, 서현빌딩 3층) 소재 당 법인의 사무소

3. 회원 총수 : 10명(함○○, 임○○, 윤○○, 조○○, 신○○, 김○○, 박○○, 박○○, 방○○, 이○○)

4. 임원 총수 :   5명(함○○, 임○○, 윤○○, 조○○, 신○○)

5. 출석 회원 : 10명(함○○, 임○○, 윤○○, 조○○, 신○○, 김○○, 박○○, 박○○, 방○○, 이○○)

6. 회의 안건 : 2017년 결산 승인(안)

7. 회의 내용 

                     정관 규정에  따라 위와 같이 법정수에 달하는 회원이 출석, 본 총회가 적법하게 성립되었음을 알린 후 개회를 선언하고, 사전에 통지한 사항인 다음의 의안을 부의하고 심의를 구하다.

[의안 상정] : 감사 선임

                 감사 최○○

위 피선자는 즉석에서 그 취임을 승낙하다. …

■ 언제부터 회원이 10명이 되었나?
○ 1997년 106명, 1999년~2000년 100명, 2002년 30명, 2003년 3월에 10명, 11월에 20명, 2004년 2월에 20명입니다.
2000년 초반 부터 회원이 많이 늘었는데 오히려 줄고 있습니다.
*년도별 총회의사록의 총 회원수는 여기에서 확인하세요.  http://cafe.daum.net/minjokstraight/jWTQ/6

◎ 1997년 6월 15일 정기총회 106명

2004년 4월 17일자 임시총회부터 전체 회원은 10명이 됩니다.
2008년 7월 15일자 임시총회에서 9명으로 줄고, 2009년 2월 21일자 정기총회에서 다시 10명이 됩니다.
이때 부터 2018년 4월까지 10명이 유지됩니다.

전체적으로 볼때 2004년부터 2018년까지 14년 동안 신규 회원이 한 명도 늘지 않고 10명을 유지합니다.

◎ 2004년 4월 17일 정기총회 10명


의사록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8년까지 회원이 단 한명도 증가하지 않습니다.


■ 1만3천여 회원은 어디로 갔습니까?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3월 24일 숙명여대에서 개최한 총회는 무엇입니까?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언제 10명에게 1만3천여 회원의 권리를 대신하라고 했습니까?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언제 10명이 감사를 선출하고, 결산 승인을 대신하라고 했습니다?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개최한 총회에서 선출한 임원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 우리 1만3천여 회원이 총회에서 승인안 결산승인, 예산승인, 사업승인은 무엇입니까?

목, 2018/10/18-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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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牧師輩與僧徒

 

病者焉嘲藥(병자언조약)

飢人捨食糧(기인사식량)

耶蘇同佛淚(야소동불루)

盜賊數無量(도적수무량)

 

목사들과 중들에게 告함

 

病者가 어찌 藥을 조롱하겠으며

굶주린 이가 양식을 버리겠는가

예수와 부처 눈물을 흘리시나니

도둑놈 숫자 헤아리지 못하겠다.

 

<時調로 改譯>

 

병든 이가 어찌하여 藥을 조롱하겠으며

잔뜩 굶주린 사람이 양식을 버리겠는가

예수와 부처가 우니 도둑놈이 無量하다.

 

*僧徒: 수행하는 중의 무리 *飢人: 기자(飢者). 굶주린 사람 *食糧: 양식 *耶蘇:

‘예수’의 음역어(音譯語) *盜賊: 도둑 *無量: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음.

 

<2018.10.19, 이우식 지음>

금, 2018/10/19-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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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10/1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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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1

▲ 주인을 기다리는 이름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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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리그라퍼 김효룡 작가님이 참가자들에게 예쁜 글씨를 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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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날 3팀으로 나누어 마곡사를 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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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시 문화해설사분이 마곡사 답사를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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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 답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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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와에 놓인 돌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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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양주 김재광 회원 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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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의 가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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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 백범당에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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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지’를 집필한 지수걸 연구소 이사(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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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 대광보전 안에 시주자 명단에 ‘조병갑’의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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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곡사 돌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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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운동가 주하주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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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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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준찬 최수련 부부의 우리가락 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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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섭 공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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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섭 공주시장과 공주지회 회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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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의인 고 안병하 치안감님의 아들 안호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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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밤까지 이어진 뒤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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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튿날 숙소를 떠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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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튿날 숙소를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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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세종회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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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에서 답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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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치 전적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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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우 운영위원장의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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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을 기약하며 ‘친일파 청산!’

금, 2018/10/19-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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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內外政勢

 

狡猫摩鼠子(교묘마서자)

餓虎舐羔羊(아호지고양)

兩者云仁愛(양자운인애)

歎聲滿四方(탄성만사방)

 

나라 안팎의 政勢

 

교활한 고양이가 쥐를 쓰다듬고

굶주린 호랑이가 어린羊을 핥네

兩者가 어짊과 사랑을 운운하니

감탄의 소리가 사방에 가득하네.

 

<時調로 改譯>

 

狡猫가 쥐 어르고 餓虎가 어린羊 핥네

어짊과 또 사랑 따위 兩者가 운운하니

오호라! 감탄의 소리 사방에 가득하네.

 

*國內外: 나라 안팎 *鼠子: 쥐 *餓虎: 굶주린 범이는 뜻으로, 매우 위험하거나

무서운 대상을 이르는 말 *羔羊: 어린羊. 또는 염소와 羊 *仁愛: 어진 마음으로 

사랑함.  그 사랑  *歎聲: 몹시  감탄하는  소리. 몹시  한탄하거나  탄식하는 소리.

 

<2018.10.21, 이우식 지음>

일, 2018/10/2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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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隣村老巨富入獄

 

錢財無限慾(전재무한욕)

末路果如何(말로과여하)

我樂貧窮道(아락빈궁도)

蝸廬又醉哦(와려우취아)

 

이웃 마을 늙은 巨富가 감옥에 갇힘을 보며

 

돈에 대한 욕심이 무한하더니

마지막 무렵이 과연 어떠한가

나는야 빈궁함의 道를 즐기며

오두막에서 또 취하여 읊는다.

 

<時調로 改譯>

 

錢財慾 끝없더니 末路 과연 어떠한가

나는야 가난함과 궁색의 道를 즐기며

초라한 오두막에서 또 취하여 읊는다.

 

*隣村: 이웃  마을 *巨富: 대단히  많은  재산.  富者  중에서도 특히 큰 富者 *入獄:

감옥에  들어감. 또는  감옥에 갇힘. ≒입뢰(入牢) *錢財: 돈 *末路: 사람의 일생

가운데에서  마지막 무렵. 또는 망해 가는 마지막 무렵의 모습 *貧窮: 가난하고

궁색  *蝸廬: 달팽이의  집이라는  뜻으로, 작고  초라한  집을 비유으로 이르

. 와사(蝸舍). 와실(蝸室). 와옥(蝸屋). 또는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2018.10.22, 이우식 지음>

월, 2018/10/22-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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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합 뉴스에서 민족 문제 연구소에서 식민지 역사 박물관에

백범 김구 선생님을 암살한 안두희를 죽인 몽둥이 “정의봉”을 식민지 역사 박물관에 전시하도록

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이에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백범 김구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어렸을 때에 선친께서 읽어주시던 백범 일지를 기억합니다.

또한 고인의 통일을 위한 노력을 진심으로 높이 평가하고,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하신 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두희는 분명히 일제가 아닌 대한민국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법의 심판을 받은 사람입니다. 판결문에도 진범으로 되어 있고 수사 기록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법의 심판이 충분했냐와는 별개로 그 사람은 법의 심판을 받은 사람입니다.

현대 사회와 대한민국에서 모든 심판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테러가 성행하고, 법을 무시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습니다.

내가 억울하다고 몽둥이를 휘두르고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이 추앙받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일까요?

대한민국에는 준법 정신과 법과 원칙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안두희를 때려죽인 사람은 살인범이며, 우리 사회의 법치를 어지럽힌 범죄자입니다.

이 결정을 민주 시민의 입장에서 재고 부탁 드립니다.

 

월, 2018/10/22-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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