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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3) – 계몽운동, 아시아연대론, 사회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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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3) – 계몽운동, 아시아연대론, 사회진화론

익명 (미확인) | 화, 2018/03/27- 16:19

사회진화론과 조선 그리고 이인직

사회와 사회적 결과의 상(上)에 진화론을 응용하야 사회적 단체로서 공구(攻究)의 대상을 삼는 것이 중요한 바니 개(蓋) 차(此) 단체가 개인과 무이(無異)함도 유(有)하나 생존의 수단을 인(因)하야 상호 경쟁함은 개인보다 가장 제(諸) 단체에 재(在)함이라 (중략) 차(此)와 여(如)히 일체의 사회적 제도는 선악의 각 인종을 일 사회적 단체에 결합한 것인데 기 단체는 상적(相滴)한 경쟁자와 경쟁하는 일 단위라. 부(夫) 자연도태의 제법(諸法)은 차 사회적 단체 상(上)에 행(行)하며 차(此) 단체는 사회진화 과정에 중요한 단위라.(이인직, 「사회학 속(續)」, <소년한반도>,19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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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한반도>창간호(1906.11.1)

 

이인직의 신소설은 보았어도 이른바 ‘진화론’에 대해 언급한 글은 대부분 처음 보았을 겁니다. 여기서 이인직이 언급한 진화론은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82)의 생물학적 진화론이 아니라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입니다. 사회진화론은 흔히 쓰이는 약육강식, 우승열패,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됐다면 이해될 런지요.
19세기 서구에는 다양한 사상들이 난무했습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의 사회학과 실증주의,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90)를 중심으로 한 사회진화론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진화론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서구를 풍미했던 이론입니다. ‘Social Darwinism’ 즉 ‘사회다위니즘’이란 이름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적으로 적용한 이론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명칭은 20세기 중반에 19세기의 사상적 흐름을 정리하면서 후세에 붙여진 이름이지 당시에 쓰이던 명칭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진화론에 대한 저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1859)보다 먼저 출간되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의 시조인 스펜서는 사회진화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진보의법칙과원인(Progress: Its Laws and Cause)>를1857년에발표했습니다.물론 사회진화론이 나중에 다윈의 진화론을 흡수한 것은 사실이며 심지어 다윈조차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사회진화론은 스펜서 개인의 이론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다윈의 이론을 흡수하여 사회의 발전을 사회유기체적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자유주의를 강조하여 인간의 경쟁을 장려하는 많은 사상가의 시도를 사회진화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상당히 왜곡하고 있습니다. <종의기원에대하여>라는 다윈의 진화론 저서 제목에서도 진화(evolution)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책의 본문 속에서도 다윈은 진화(evolution)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진화’라는 표현은 진화 이전 보다 ‘우월’해 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에서의 진화는 우월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의미는 생존경쟁(Struggle for Life)에 의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일 뿐입니다. “더 강하거나 우월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생존에 적합했기에 살아남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윈은 진화(evolution)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변화를 포함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더군다나 스펜서의 경우 생물학적 진화론의 관점은 다윈보다 라마르크(LAMARCK, Jean Baptiste 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1744-1829)에 가깝습니다. 이른바 ‘용불용설(用不用說)’로 대표되는 그의 이론은 ‘획득형질의 유전’ 즉 후천적인 노력으로 획득한 형질이 유전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진화론은 19세기 서구 사상계를 휩씁니다. 결국 다윈마저도 <종의 기원에 대하여> 제5판에서 ‘진화(evolution)’라는 말을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애초에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철학과 자연과학의 통합된 이론을 만드는 것과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를 목적으로 했습니다만, 문제는 당시 제국주의는 이것을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활용한다는 점이며, 사회진화론이 그에 부합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한중일 3국의 사회진화론의 수용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일본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1836~1916)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 중 가토 히로유키와 량치차오는 절대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진화론은 1880년대부터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을 아시아에서 가장 처음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가토 히로유키가 다윈과 스펜서의 번역서 수준을 넘어서서 사회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원리론을 형성해가고 있었습니다. ‘evolution’의 역어로 진보와 개화를 조합한 ‘진화’라는 신조어를 만든 것도 그였습니다. 개화파의 ‘개화자강론’은 국가주의와 제국주의론을 뒷받침하는 구실을 하던 일본 사회진화론의 수용 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진화론을 접하고 흡수했던 경우는 유길준처럼 서구 유학을 통해 직접 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중국과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중국과 일본에 의해 재가공된 사회진화론이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사회진화론을 해석하는 방식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일본은 다소 공격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이는 사회진화론에 대한 번역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옌푸(嚴復, 1854~1921)와 가토의 번역을 비교하면 ‘evolution’을 각각 ‘천연(天演)’과 ‘진화(進化)’, ‘struggle for existence’을 ‘물경(物競)’과 ‘생존경쟁(生存競爭)’, ‘natural selection’을 ‘천택(天擇)’과 ‘도태(淘汰)’, ‘survival of the fittest’을 ‘택종유량(擇種留良)’과 ‘우승열패(優勝劣敗)’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 번역합니다. 이외에도 옌푸는 사회복지와 관련된 용어들은 ‘부강’과 관련되는 용어로 번역했습니다. ‘natural selection’(자연선택)을 예로 들면 옌푸는 원 단어의 뜻에 가까운 ‘천택’으로 번역한 반면 가토의 경우 불필요한 것, 부적당한 것이 ‘제거’되고 적합한 것만이 남긴다는 의미의 ‘도태’라는 단어를 선택합니다.
일본의 사회진화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사회유기체설’입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사회도 생물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유기체라고 보았습니다. 이 이론은 스펜서가 비록 ‘자유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사회진화론을 논리를 전개했음에도 논리적 귀결은 전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회유기체설은 사회를 유기적 전체로 파악함으로써 개인을 사회에 종속되는 존재로 인식하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1880년대 일본정부는 ‘천부인권설’에 근거한 자유민권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의 개인에 대한 우월성을 지향하던 국권신장파 가토를 앞세웠고 결국 관민협조론이 득세하게 됩니다.
일본의 사회진화론 외에도 중국의 사회진화론 또한 국내 지식인에게 흡수되는데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95)의 <진화와윤리>를번역한옌푸의<천연론(天演論)>(1898)등이 출판과 동시에 한국에 수입되기도 했지만 중국의 사회진화론이 지식인을 비롯한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량치차오의 글을 통해서입니다. 1899년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에량치차오의 논설 「애국론(愛國論)」을 시작으로 량치차오 붐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1903년 량치차오의 사회진화론이 담겨있는 <음빙실문집(飮冰室文集)>(1902)을비롯해1914년까지100여개의 글이 번역 소개됩니다. 량치차오의 사회진화론은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강’과 ‘부국강병’으로 귀결되며 한국의 ‘계몽주의’와 ‘자강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량치차오 역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일본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게 되고 종국에 사회진화론과 관련된 용어도 가토가 번역한 용어로 모두 교체하게 됩니다.
다소 장황하게 ‘사회진화론’에 대해 정리한 것은 이인직을 비롯해 당시 지식인들이 혼란된 세계관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근대 사상과 문물이 밀려들어오고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이라는 혼란 속에서 구한말 지식인들이 판단과 선택을 하게 했던 사상적 배경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 ‘용서’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 시기 한국의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과 그에 근거한 근대지상주의, 동양평화론, 대동합방론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정치학교에서 공부한 이인직은 일본의 사회진화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연이(然而) 기(其) 발전(發展)하야 일정(一定)의 직능(職能)을 수(遂)하는 소사회(小社會)와 차등(此等) 소사회(小社會)를 포함(包含)하는 대사회(大社會)의 간(間)에는 중요(重要)한 차별(差別)이 유(有)함으로써 (중략) 기(其) 사회(社會)의 골격(骨格)되고 구조(構造)된 자 (者)-니라. 생물학상(生物學上)의 어(語)를 적(籍)하야 말하진디 기(其) 기관(機關)이라 칭 (稱)할만한 자(者)라 (중략) 오인(吾人)은 사회(社會)의 일분자(一分子)이라.(이인직, 「사회」, <소년한반도> 1, 1906)

 

개(盖) 국가(國家)의 대직능(大職能)은 내부(內部)의 규리(睽離)와 외부(外部)의 공격(攻擊)에 대(對)하야 신민(臣民)을 보호(保護)하는 바라. 차(此)와 여(如)히 일체(一切)의 사회적(社會的) 제도(制度) 선악(善惡)의 각종인(各種人)을 일사회적(一社會的) 단체(單體)에 결합(結合)한 것인디 기(其) 단체(團體)는 상적(相適)한 경쟁자(競爭者)와 경쟁(競爭)하는 일단위(一單位)라. 부(夫) 자연도태(自然淘汰)의 제법(諸法)은 차(此) 사회적(社會的) 단체상(團 體上)에 행(行)하며 차(此) 단체(團體)는 사회진화과정(社會進化過程)에 중요(重要)한 단위 (單位)라.(이인직, 「사회학 속」, <소년한반도> 3, 1907)

 

위 글은 ‘사회유기체설’에 정확히 부합하는 내용입니다. 생존경쟁과 그 경쟁에서 도태되는 단위를 국가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국가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국가 내의 각 성원들은 그들의 직능을 국가를 위하여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이인직만이 아니라 당시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논리였습니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의 이익 혹은 권리가 우선시됩니다. 어쩌면 이 논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군사독재시절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논리가 그것입니다.

 

이인직과 친일

이인직이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본격적으로 계몽운동에 투신하는 시기는 1906년 귀국 후인 일제의 통감정치 때입니다. 이인직은 당연히 통감정치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토의 사회진화론에 따르면 국가 간에도 생존경쟁에 의해 적자생존의 논리가 적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본 사회진화론의 논리 중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 1850-1922)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1893)입니다.그 내용은“동양의쇠운을만회하고흥아(興亞)의 대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동아(東亞)의 여러 나라가 대동아연맹을 결성해야 한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중국과는 동맹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사상은 이후 일본 군국주의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사상적 기초인 ‘대동아공영권’으로 이어집니다. 즉 ‘대동합방론’은 일본의 아시아 제국(諸國)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이인직은 귀국 전부터 이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슬프다. 나라의 세력과 백성의 힘이 쇠미해짐이 이와 같이 심하니 어찌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양(洋)을 따지지 말고 우방에게 호소하고 그 감응의 동정을 구하는 것이 실로 목하의 급무일 것이다. 지금 사처(四處)를 돌아봐도 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동양의 문명국 일본밖에 없다 (중략) 원컨대 선진한 일본국 인인군자(仁人君子)는 그 동정을 찬성하여 문명의 모범을 가르쳐주시기를 (「韓國新聞創設趣旨書」, <都新聞>,1903.5.5)

 

방금 서세동점하여 아주일폭(亞洲一幅)은 거의 사분오열에 이르려고 한다. 단 일본은 홀연히 국초(國礎)를 굳게 하여 동양의 우이(牛耳)를 잡고 보차순치(輔車脣齒)의 의(宜)를 인방(隣邦)에게 두텁게 하여, 백년의 장책을 이에 확립하였다.(「夢中放語」, <都新聞>,1901.12.8)

 

이인직이 1906년 2월 친일단체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 주필로간 것은어찌보면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4개월만인 같은 해 6월에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천도교에서 창간한 민족지 <만세보(萬歲報)>의 주필로 자리를 옮겨 신소설 <혈의누>를 연재하기도 했지만 그가 어떤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답은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대한신문>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그는 이완용의 비서역할을 겸하며 일관되게 친일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09년 12월 4일 이완용 내각과 대립하던 일진회 이용구가 합방청원서를 제출하자 이완용 내각은 이인직 등을 동원하여 즉각 조직적 반대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인직은 「국민대연설회」의 연사로 직접 나서기까지 했는데, 그 반대운동은 겉으로는 합방에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일진회에 합방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반대운동이었습니다. 12월 22일 이완용은 명동에서 이재명의 칼에 찔려 중태에 빠졌지만, 이틀 전인 12월 20일 이인직은 이완용의 밀명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각 신문, 재일유학생, 대한동지회 등과 교섭해 일진회 반대 여론을 조성하고 이듬해 3월에 귀국합니다.
결국 1910년 8월 4일 일본어를 못하는 이완용을 대신해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츠(小松綠)와 합방에 관한 담판을 벌입니다. 이인직은 통감부와 대한제국 내각 간의 연결통로 역할을 했고, 두 사람의 담판은 양측의 재가를 얻어 한일합방조약의 초안이 됩니다.
이인직이 했던 역할에 비하면 합방 후 그 대가는 초라했습니다. 이완용을 비롯한 한일합방의 공로자들에게는 귀족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이 내려졌으나 이인직에게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서얼 출신인 것이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완용과 그의 절친 조중응이 각각 백작・자작과 은사금을 받고 죽을 때까지 호위호식을 누린 것과 비교하면 그가 그토록 봉건주의를 비판했던 결과가 무색해지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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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직 사망 기사. 매일신보 1916. 11. 28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의 객원을 거쳐 종래에는 친일유림단체경학원(經學院) 의사성(司成)에 올라 천황을 찬양하는 글을 쓰며 여생을 보냅니다. 1916년 11월 총독부의원에서 입원 치료중 사망하는데 장례식은 일본 천리교 의식에 따라 치러졌고 아현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집니다. 그가 죽자 조선총독부에서 지급한 장례비는 450원이었습니다.

김덕영 선임연구원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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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광복회가 국회의원 후보자 대상으로 국립묘지법 개정 설문조사를 실시하여여야 국회의원 90명이 법 개정에 찬성한데 이어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는 5월 24일과 6월 13일 각
각 서울과 대전현충원에서 ‘친일과 항일의 현장 현충원 역사 바로 세우기’ 행사를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과 연구소 후원으로 진행했다. 이번 행사에는 서울과 대전현충원이 속해 있는 서울 동작구와 대전 유성구의 이수진, 김병기, 조승래 의원이 직접 참석해 국립묘지법 개정을 약속했다.
국민여론 역시 친일파 이장에 긍정적이다.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2019년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청산 문제 전반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당시 조사결과도 10명 중 7명(74.4%)이 이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반대는 17.5%) 6월 2일 오마이뉴스가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 결과에서도 ‘이장해야 한다’는 응답이 54.0%로 절반을 넘었다.(이장 반대 32.3%)

화, 2020/06/23-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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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광복회, 반민특위 습격일에 경찰청장 사과 요구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6월 6일 오후 3시, 1949년 6월 6일 당시 친일경찰이 자행한 반민특 위 습격 사건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반민특위 유족과 광복회원, 일반시민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중부경찰서를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가졌다. 또한 당시 습격의 책임을 지
고 현 민갑룡 경찰청장의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지난해 4월 3일 서울 광화
문광장에서 열린 제71주년 4‧3 광화문 추념식에 참석, 경찰총수로서는 처음으로 “무고하게 희
생된 분들께 사죄드린다”는 뜻을 밝혔으며 올해 5월 12일에도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경찰
의 지난날을 반성 한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이날 행사는 중부경찰서 앞 가로수에 리본달기를 시작으로 김원웅 광복회장의 대회사, 송영길 의원의 인사말, 임헌영 소장 등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의 연대사, 구호제창 순으로 마무리됐다. 김원웅 회장은 “71년 전 오늘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폭란의 날’로써 가슴 아프고 슬픈 날이었다.
이 날로부터 이 나라는 ‘친일파의, 친일파에 의한,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며, “광복회는 올해부터 이 날을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하고, 매년 이 날을 애상(哀傷)의 날로 기억하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밝혔다. 임헌영 소장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모든 부패와 부정의 뿌리는 반민법을 무력화시킨 데서 비롯됐다. 물론, 그 명령자는 이승만이지만 친일경찰들이 대세를 이루어 반민특위를 무장 습격한 경찰의 수치스런 과거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며, “아직도 과연 경찰이 과거의 미망에서 깨어났는지 각성하는 계기를 삼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화, 2020/06/2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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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2)

조선·동아 전쟁범죄의 민낯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언론은 ‘표현의 자유’를 기본 정신으로 성장한다. 자유는 언론이 성장하기 위한 토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의 자유’는 권력의 억압적 성격에 저항하는 언론의 속성으로 상당한 순기능을 우리 사회에 가져다준다. 그러나 반대로, 권력의 위치에 선 언론이 행하는 ‘표현의 자유’는 국가의 이름하에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장치로 변질된다. 여기에 심각하게 경도된 언론들은 특히 전쟁이나 사변 같은 사태에 민중을 선동하면서 중대한 인권범죄를 합리화하거나 폭력과 증오의 ‘표현의 자유’를 외치기도 한다.
국제인권규약은 전쟁선동, 선전 등에 대한 언론의 자유에 분명한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 제20조에 따르면 전쟁을 위한 어떠한 선전도 법률에 의하여 금지되며, 차별이나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이 될 만한 증오의 고취 또한 금지된다. 물론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생한 국제적 선언으로 그보다 이전의 사례에 일방적으로 적용하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같은 규약은 존재 자체로 언론의 전쟁부역 행위가 얼마만큼 심각한 폐해를 끼쳤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이재승 교수는 규약 제20조가 “특정한 유형의 표현들이 갖는 파괴적인 성격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언론이 앞장서 민중을 전쟁의 참상 속으로 이끈 사례는 우리 역사에도 적지 않다. 특히 여기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이어진 일제의 침략전쟁 시기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보인 ‘전범언론’으로서의 면모들을 조명해보기로 한다. 이는 한글신문 100년 역사를 자화자찬하기에 앞서 스스로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분명한 ‘상흔’이고 어둠이다. 물론 이들이 전쟁부역언론으로 존재한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3년 남짓한 짧은 시기에 불과하지만, 그 보도들은 전쟁이라는 극도의 사회적 불안에 떨었을 조선 민중을 달래고 전쟁의 양상을 투명하게 보도하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앞장서 전쟁을 선전하고 전쟁의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일본국민들의 입장에서 게재하라
두 신문은 과연 어떤 입장에서 전쟁보도를 시작했을까? 조선일보는 올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발간한 〈간추린 조선일보 100년사 – 민족과 함께 한 세기〉에서 중일전쟁과 그 이후의 보도경향을 “강요당한 친일지면”으로 정리했다. 말하자면, 총독부가 자신들의 보도태도를 ‘친일적’ 으로 바꾸려 압박했고 그에 따른 <언문신문지면개선사항>,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 과 같은 “총독부의 모진 탄압”이 더해져 “획일화된 지면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한층 강화된 언론통제책을 써서 언로(言路)를 막으려 한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총독부는 1936년 8월 발생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언론통제를 강화하게 된다.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를 무기한 정간조치 했고, 이듬해 1937년 일본 황실기사 취급방침과 총독부 시정방침에 대한 보도 강화 등을 지시하는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 18개항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와 같은 총독부의 압박이 본격적으로 가해지기도 전에 ‘스스로’ 굴종을 자처하고 나섰다. 연구소가 찾아낸 경성종로경찰서 비밀문서 4466호, <조선일보의 비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은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주필 서춘, 편집국장 김형원, 영업국장 김광수 등은 조선총독부의 언론사 대표자 소집, 협조요청이 있기 전인 1937년 7월 11일, 이미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친일적’ 편집방침을 확고히 결정했다.

 

<조선일보의 비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1938.5.24,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이 문건에는 조선일보 간부진의 회의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7월 11일 회의를 통해 기사를 일본국민의 입장에서 게재하도록 결정했다.

 

당시 회의에서는 중일전쟁이 막 시작되던 시류를 일본적 입장에서 반영하여, “일본군, 중국 장개석 씨” 등의 용어를 “아군·황군, 지나 장개석” 등으로 고치고 논설은 “일본국민으로서의 입장에서 게재”할 것에 대해 논의했다. 특히 사장 방응모는 회의에 참석한 이들에게 “동아일보는 일장기 마크 1개 문제로 수십 만 엔의 손해를 입지 않았는가. 또 민중을 1919년처럼 지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려 편집방향에 반대하던 김형원·김광수를 굴복시켰다. 이에 제2회차 호외부터 “일본국민의 태도”로써 편집하기로 했다.
동아일보의 실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일제에 복종을 다짐하는 청원서와 서약서를 제출하고 ‘사고(社告)’까지 특필함으로써 본격적인 부역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조선총독부 미츠하시(三橋孝一郞) 경무국장은 동아일보 정간 해지 담화에서 동아일보가 “총독정치에 익찬(翼贊)할 것을 선서”하였고 “일본제국의 신문지로서 진(眞)사명에 매진할 것을 서약”하였다고 평가했다.(「동아일보 발행 정지 처분의 해제에 이른 경과」, 1937)

 

전쟁선전의 서막 ‘무력철퇴를 가해야’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 발생 이후 전선이 상해로 확대되어 감에 따라 두 신문도 본격적인 전쟁 선전의 구호를 지면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 이들의 보도는 일제가 도발한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일본군을 “아군(我軍)” 또는 “황군(皇軍)”으로 내면화시키고 있었다.
1937년 7월 16일 동아일보는 조선신궁에서 거행된 기원제 보도에서 “황군”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하며 전쟁선전의 막을 올렸다. 이어 8월 20일 사설을 통해 “황군은 드디어 화평해결의 희망을 방기하고 전단을 개시했다”며 스스로의 입장을 사설에 담기 시작했다.
바로 3일 뒤인 8월 23일에는 조선일보가 “지나응징”의 구호를 사설에 게재하며 선전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는 당시 일본 육군에서 슬로건처럼 유행했던 “폭려지나응징(暴戾支那膺懲)1”과 상응하는 어투의 사설이기도 했다. 더불어 조선일보는 중국정부에 “자진하야 전비(前非)를 깨닫는 날까지 무력철퇴를 가하는 것이 즉, 응징의 유일한 목적”이라며 호전적 논조로 일제의 입장을 대변했다.
일본군이 침략의 전선을 확대하는 동안 수시로 날아온 ‘일본동맹통신발’ 전황보도를 두 신문은 별다른 수정이나 검토 없이 지면을 할애해 실었다. 조선, 동아는 일본 동맹통신사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일제의 전쟁선전에 일본 통신사들이 적극 활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면 조선, 동아의 ‘받아쓰기’는 침략전쟁을 널리 퍼트리는 ‘확성기’나 다름없었다.
두 신문의 전쟁보도 경쟁이 극에 달한 것은 1937년 12월 중순, 난징침략 때였다. 이 12월을 기점으로 조선일보가 보도한 난징 관련 기사는 무려 161건, 동아일보는 109건에 이른다. 전쟁 사진 또한 ‘남경함락화보’, ‘사변화보’ 등의 제목으로 수시로 보도되었다. 특히 난징 ‘함락’ 하루 전인 12월 12일자 조선일보 석간에는 ‘남경함락축하행사’를 주제로 한 기사가 특필되기도 했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일본군의 승리가 “충용한 황군장병의 우월”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내세우면서 이 전쟁이 중국 국민의 “배일환상(排日幻想)”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켰다는 등의 논리로 일본 정부의 침략의도를 완전히 대변했다.
한편, 동아일보는 12월 12일 사설에 일장기까지 함께 게재했다. 통상 게재되지 않았던 일장기 이미지를 ‘난징함락’을 기념하며 조간 2면 1단에 특별 삽입한 것이다. 사설은 일본 정부가 “군사행동의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장기전을 불사”해야 한다고 적으면서 난징 내에서 진행되고 있던 시가전에 대해 “숙청(肅淸)공작도 시간문제”라며 전투적 논조를 사용했다.


1 인도(人道)에서 벗어난 모질고 사나운 중국을 혼낸다는 뜻

 

조선일보 1937년 12월 12일 석간 2면
해당 기사는 “오직 앞으로 남은 문제는 아직도 성중에 머물러 있어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시내잔적의 소탕이 있을 뿐이다”라는 평가와 함께 난징함락이 “전국적으로 국민환호의 대상”이 되어 축제가 전 조선적으로 진행됨을 자축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난징 침략 후 참혹한 시가전이 일어났던 시기에 보도된 기사들은 더욱 자극적이었다. 12월14일 동아일보는 동맹통신의 기사를 인용, “격렬한 백주시가전 혈(血), 시(屍), 규환(叫喚)에 충만”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는 “적병 최후의 절규가 들”린다는 표현과 함께 “대일장기(大日章旗)는 욱광(旭光)을 받으면서 번양하고 있”는 풍경을 지극히 ‘일본적’ 입장에서 표현해내고 있었다. 참고로 이 보도는 난징대학살이 일어났던 시기(12월 13일~15일)에 게재됐다. 난징 대학살과 이 보도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증유의 대학살이 일어났던 시기에 ‘피와 시체, 규환’으로 넘쳐나던 전장을 그 어떠한 문제의식과 인도적 양심 없이 보도했다는 것에서 분명한 비판점이 있어 보인다.

 

전쟁, 그리고 ‘만들어 낸 영웅’
두 신문의 전쟁부역은 단순히 전황보도에만 그치지 않았다. 1938년 일제가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고 조선인의 병력 동원에 나서자 조선, 동아일보는 지원병제도를 선전하는 기획기사, 사설, 사진보도를 연이어 작성했다. 각 지역별 지원병 실적을 경쟁적으로 발굴, 보도했다. 신문 1면의 대부분이 지원병 특집 기사로 구성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들은 조선청년의 ‘지원열’을 선전하기 위해 각종 미담사례를 발굴해 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9년 ‘이인석 상등병 영웅화 보도’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 제1기생으로 동원된 이인석은 1939년 6월 중국 산서전선에서 전사했다. 조선인 지원병으로는 최초의 전사자였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이인석의 전사소식이 전해진 즉시 “영예의 전사”라는 수식어를 달며 미화했다. 이에 질세라 동아일보는 바로 이튿날 이인석의 가정방문 기사를 실었다.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겨있을, 부인의 소감을 어떻게라도 싣겠다며 고인의 자택을 찾아가는 ‘위문’을 감행한 것이다.
나아가 두 신문은 이인석 상등병의 고별식, 위령제 등이 행해지는 현장을 찾아가 이인석 상등병의 유가족들을 상대로 ‘셔터’를 눌렀다. 유가족들의 “애수”와 전사의 명예로움을 더해주는 기사를 쓰기 위함이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1939년 10월 석간 2면 기사 “색연필”을 통해 이인석 상등병의 죽음이 “조선 사람에게 몇 갑절의 열매를 맺게 할” “고마운 주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두 신문이 동원된 조선청년에 대한 추모보다는 일제를 위한 전사자의 현창(顯彰)에 초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39년 7월 9일 조간 2면. 동아일보 대전지국이 故 이인석 상등병의 가정을 방문, 미망인을 만난 내용을 담은 기사

 

조선일보 1939년 10월 1일 석간 2면. 위령제 관련 기사에서 보도된 이인석 상등병의 양친과 부인(가운데)

 

두 신문의 이인석 영웅화 보도는 조선, 동아 폐간 직전인 1940년까지 이어졌다. 지원병 제도의 성과를 올리고 지원을 부추기는데 이인석 상등병의 전사를 인용한 것은 물론, 이인석 상등병을 소재로 한 음악극(나니와부시)까지 만들어진 당시 상황에 편승해 적극적인 홍보기사까지 신문에 싣기도 했다.

 

100년 세월에도 부재한 ‘반성’
일제의 침략전쟁에 부역했던 이 시기들은 조선, 동아일보 입장에서도 분명 지우고 싶은 과거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올해 100주년을 기념한 사설에서 중일전쟁 이후 자신들의 과오를 그저 “100년 비바람을 버텨온 나무에 남은 크고 작은 상흔”이라며 뜬구름 잡는 논평을 남겼다. 또 “일제강압과 신문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이 오점으로 남아 있다”고도 평가했다. 그나마 동아일보가 이번 100주년을 맞이해, 일제 침략시기의 언론부역에 대한 ‘사과’를 표명한 것은 나름의 진전 같아 보인다. 물론 그조차 “조선총독부의 집요한 압박으로 저들의 요구가 반영된 지면이 제작”되었다고 에둘러 변명하였기에 그 진정성이 완전하다고 하긴 어렵다.

일제강압과 신문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이 대체 왜 그 같이 현란한 전쟁부역으로 나타났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같은 논평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일제강점기가 조선일보에 있어 ‘크고 작은 상흔’이었다면 조선일보의 전쟁선전에 상처 입은 민중들의 아픔은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신문을 반성과 성찰의 시험대에 올리는 것이다.

 

▪ 참고문헌
최상원 외, 「1937년 일본군의 중국 난징 점령 관련 한국언론의 보도태도」. <지역과커뮤니케이션> 14, 2010.2
박용규, 「일제의 지배정책에 대한 신문들의 논조 변화」, <한국언론정보학보> 2005.5
장신, 「1930년대 언론의 상업화와 조선동아일보의 선택」, 역사비평, 2005.2
조선일보사, <간추린 조선일보 100년사 – 민족과 함께 한 세기>, 2020
이재승, 「증오적 표현과 역사의 부정」, 국회 토론회 <올바른 기억확립을 위한 법률 제정을 위한 토론회>, 2007.5.16.

화, 2020/06/2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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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과 양승태 사법부의 추악한 재판거래, 그 책임을 묻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지난 5월 25일 일제강점기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와 고 김규수 할아버지의 유족은 박근혜 정부 시기 사법농단, 재판거래의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했다.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아 지원해 온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은 지난 2018년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음에도 일본 정부의 방해로 가해 기업이 아직까지 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번 소송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정무수석, 윤병세 외교부 장관, 피고기업의 대리인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들과 양승태 대법원장, 임종헌 법원행정처장 등 법관다수가 조직적으로 공모하여 실행한 재판거래에 대해 국가배상법에 따라 공무원의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을 묻는 소송이다. 이 사건 원고들은 2005년 2월 한국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1, 2심에서 패소하였으나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에서 역전 승소했다. 2013년 7월 10일 서울고등법원의 파기환송심에서 승소한 원고들은 대법원 재상고심의 최종 승소 판결이 곧 내려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최종 확정판결이 내려지기까지 5년의 시간 동안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사법부는 판결을 뒤엎기 위해 피고기업의 대리인까지 동원하여 조직적인 재판거래를 자행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숨을 대가로 추악한 재판거래가 이루어지는 동안 연구소와 원고들은 조속한 판결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기자회견을 여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사법농단으로 판결이 지연되는 동안 네 분의 원고 가운데 세 분이 돌아가시고 말았다(여운택 2013년 12월, 신천수 2014년 10월, 김규수 2018년 6월 사망). 1965년 박정희의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권회복이 가로막혀 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21년의 재판투쟁 끝에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65년 체제’를 극복한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을 쟁취했지만 끝내 법정에서 승소 판결을 듣지 못한 것이다. 국가는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판거래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명확히 사죄하고 배상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숨을 대가로 한 사법농단에 관여하여 불법행위를 저지른 모든 자들의 잘못을 명확히
하고, 그 책임을 묻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이번 소송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 역사정의의 실현, 그리고 사법개혁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소중한 디딤돌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금, 2021/06/25-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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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2020 행사, 일본 타이완 서울에서 화상회의로 동시 진행

 

 

8월 8일 도쿄의 재일본한국 YMCA에서는 ‘2020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이 열렸다. 이 행사는 침략신사 야스쿠니를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동아시아 시민들이 2006년부터 “야스쿠니 반대! 합사 철회!”를 외치며 평화의 촛불을 들어 온 이래 올해 15주년을 맞았다. 연구소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의 사무국을 맡아 야스쿠니합사철폐 소송을 비롯하여 야스쿠니반대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올해 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해 화상회의 형식으로 일본, 타이완, 서울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서승 공동대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이희자 대표를 비롯한 유족들과 심포지엄의 발표를 맡은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 등 한국 참가자 20여 명은 연구소 5층 강의실에서 온라인으로 참가했다.
‘코로나, 올림픽과 야스쿠니’를 주제로 진행된 심포지엄에서는 기조발제를 맡은 다카하시 테쓰야(高橋哲哉) 도쿄대학 교수를 비롯하여 후쿠시마(무토 루이코 武藤類子), 오키나와(고메스 기요사네 米須清真)를 주제로 한 발표가 있었고, 우롱유엔(呉栄元) 타이완 노동당 주석은 ‘백색테러와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주제로, 김동춘 교수가 ‘일제 식민통치와 한국전쟁’을 주제로 발표했다.
재일조선인 가수 이정미 씨의 콘서트, 서승 공동대표의 폐회사에 이어 화상으로 진행된 촛불시위 순서에서는 한국 유족들을 비롯한 일본, 타이완 참가자들이 아침이슬을 함께 부르며 ‘NO 야스쿠니! NO 아베!’의 결의를 한 목소리로 외쳤다. 코로나19 사태로 비록 한 자리에서 만나지는 못하지만 평화를 염원하는 동아시아 시민들의 연대의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수, 2020/08/26-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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