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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도 막아낸다는 일제의 비밀병기, 센닌바리(千人針) – 천 명의 남자들에게 글자를 받는 센닌리키(千人力)도 함께 성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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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도 막아낸다는 일제의 비밀병기, 센닌바리(千人針) – 천 명의 남자들에게 글자를 받는 센닌리키(千人力)도 함께 성행

익명 (미확인) | 화, 2018/03/27- 16:53

식민지 비망록 34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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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15년판조선사정> (1939)에 수록된 센닌바리 자료사진

 

여기 일제강점기에 제작 배포된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소화15년판조선사정(朝鮮事情)>(1939)에 수록된 이 사진은 그냥 보면 여느 조선인 아낙네들이 우물가에서 빨랫감을 건네며 정담을 나누는 일상풍경인 듯이 착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사진 아래에는 ‘천인침(千人針, 센닌바리)’이라는 짤막한 구절이 친절하게도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조선의 정겨운 시골풍경이기는커녕 일제에 의해 자행된 군국주의 동원체제의 시대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다.
<매일신보> 1944년 8월 12일자에 실린 「단성(丹誠)의천인침,여학생들이학병(學兵)에게」 제하의 기사를 보면 한여름에 여름방학은 고사하고 근로봉사에 더하여 이러한 센닌바리 제작에 여학생들이 광범위하게 동원된 상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경성부내의 여학도들이 더운 여름 근로작업하는 중에 틈을 내어 정성껏 만든 학병 오빠에게 보낼 센닌바리가 총독부 학무국 안에 있는 조선장학회에 연달아 들어와서 관계자들을 감격시키고 있다. 실로 조국의 흥망이 달려 있는 이 싸움에 안연히 교실에 남아 있을 수 없다고 연필 대신 총을 잡고 지난 1월 감연히 입대한 반도인 학병들의 사기를 격려하고저 조선장학회에서는 그동안 총독부 조선연맹 등과 협력하여 이들에게 센닌바리를 만들어 보내려고 준비중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부내 각 여학교에서는 자진하여 이 귀중한 일을 맡아 갔다.
각 여학교에서는 전력증강에 봉공하기 위하여 여름휴가도 없이 운모(雲母)의 가공이며 군의(軍衣) 재봉 등 근로봉사작업을 하는 터이었지만 학병을 위하여 이 일을 자원한 것이었다. 그 후 각 학교에서는 그 학교 학생들이 정성껏 한 바늘씩 뜬 다음 천 명이 다 못되는 남은 것은 거리로 가지고 나가서 땀을 흘려가면서 지나가는 부인들에게 청하여 한 바늘씩 얻어서 전부 완성시킨 것이다. 군국여성의 사무치는 열성과 의기로 뭉친 이 센닌바리에 관계자들은 감격하는 터인데 장학회에서는 이것을 조선신궁에 가지고 가서 참배하여 학병의 무운장구를 기원한 후 근근 조선 내 각 부대에 있는 학병들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이보다 약간 앞서 <매일신보> 1944년 7월2일자에 수록된 「이만큼 성장한 반도해병(半島海兵) 연마의 공(功) 일등병(一等兵)에」 제하의 기사에도 센닌바리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내 아들의 이날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저 식장에 임석한 해병의 어머니 경상남도 마산부 교방동 이와모토(岩本大山, 47) 여사는 말한다. 내 자식 석원(石原)이가 형설의 공이 이루어져 일등병에 진급한다는 말을 들으니 그 애가 출정할 때 주려고 한 바늘 한 바늘 꿰맨 센닌바리를 줄 때는 이때라고 생각되어 오늘 가지고 왔습니다. 그 애는 이미 폐하께 바친 병정입니다. 전쟁은 날로 치열해 가는 이때 석원이가 제일선에서 훌륭한 무훈을 세울 날도 머지않았거니 생각하면 감격으로 가슴이 메어집니다.

 

26<일로전쟁 시사화보> 제2권(1904년5월8일발행)에는일본오사카지역에서 크게 유행하던 백목면으로 하라마키(服卷)를 만드는 풍경삽화가 묘사되어 있다.

 

센닌바리라는 것은 1미터 남짓 되는 흰 천에다 붉은 실로 천 명의 여성들로부터 바늘 한 땀씩을 얻어 매듭지어 만들며, 이렇게 하면 적의 탄환에 맞지 않는다고 믿는 일종의 부적 역할을 했던 다소간 해괴한 물건을 가리킨다. ‘천’이라는 숫자는 “호랑이가 하룻밤에 천리를 오고 간다”는 속담에 따른 것이라 한다.
제작 주체는 출정군인을 둔 가족인 경우가 보통이지만, 군국주의가 가속화하면서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와 같은 관변단체가 개입하거나 여학생들이 대거 동원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초창기에는 범띠 여성 1천 명에게서 바늘땀을 받는 식으로 이뤄졌으나, 여러 차례의 침략전쟁을 거치고 특히 중일전쟁 때에 이르러 출정군인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이런저런 형편을 가릴 처지가 되지 못하자 범띠의 여성에게는 나이 수만큼, 다른 일반여성에게는 한 땀씩 수를 놓게 하는 방식으로 제작하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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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전쟁시사화보>제6호(1904년5월25일발행)에수록된 삽화자료. 센닌바리 제작광경이 담긴 이 그림에는 ‘센닌리키(千人力)’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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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4월에 처음 등장한 ‘구멍 뚫린’ 오전짜리 동전(왼쪽)의 모습. 센닌바리의 제작에는 이런 유공동전은 총알구멍을 연상시킨다 하여 그 사용이 금기시되었다.

 

센닌바리의 제작에 관한 연원을 좇아가다보면, 러일전쟁 때 출정군인을 둔 가족이 무사귀환을 비는 뜻에서 백목면(白木綿)으로 만든 복권(腹卷, 하라마키) 또는 천인결(千人結, 센닌유이)을 만들어 보내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다. 실제로 <일로전쟁사진화보>나 <일로전쟁시사화보>와 같은 당시의 전시화보잡지를 보면 길거리를 지나는 여인들에게서 바늘 한 땀을 얻어내는 장면이 묘사된 삽화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원래 센닌바리를 만드는 일은 단순히 봉제선을 이어 만들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무운장구(武運長久)나 사봉(仕奉), 필승(必勝)과 같은 구호문자나 호랑이 문양 또는 일장기의 모습을 함께 새겨 넣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밖에 센닌바리 안에 여자의 머리카락을 넣으면 총알이 피해간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이것을 모자에 꿰매거나 복대의 형태로 착용하는 과정에서 이를 신주처럼 몸에 계속 걸치고 있는 바람에 오히려 몸에 이가 번식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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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가 제작 배포한 엽서자료에는 일본인과 조선여인이 함께 어울려 센닌바리 바늘땀을 짓고 있는 광경이 담겨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구멍이 없는’ 5전짜리 동전이나 10전짜리 동전을 함께 꿰매어 넣는 일도 성행했던 모양이다. 이 경우 총알구멍을 연상시키는 유공동전(有孔銅錢)은 당연히 사용치 않았다. 오전(五錢, 고센)은 사전(四錢, 시센)과 발음이 똑같은 사선(死線, 시센)을 지났다는 뜻으로 새겨지며, 또 십전(十錢, 쥬센)은 구전(九錢, 쿠센)과 발음이 같은 고전(苦戰, 쿠센)을 넘어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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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가 제작 배포한 엽서자료. 여기에는 길거리의 남자들에게서 글자를 받아 센닌리키를 제작하는 모습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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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5월 27일자에 소개된 친일조각가 윤효중의 목조 ‘천인침’. 이 작품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되어 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천인침과 거의 짝을 이루는 것으로 천인력(千人力, 센닌리키)라는 것도 있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1939년 2월9일자에 수록된 국방헌금 및 위문품등의 내역을 보면 중일전쟁개시 직후인 1937년 8월 이후 1938년 12월말까지 이 기간에 위문대(慰問袋)가 149,204개, 그리고 센닌바리 및 센닌리키가 모두 4,185점이 헌납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센닌리키라는 말은 초창기에 센닌바리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원래는 천 명의 남성으로부터 역(力)이라는 글자를 얻어 제작한 것을 착용하면 남자 천 명의 힘과 동일한 용맹함을 얻게 된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이 격화되면 될수록 길거리 여기저기에는 여자들에게서 바늘땀을 얻고, 남자들에게서 한 글씨를 받아내는 장면이 일상풍경처럼 연출되곤 했던 것이다. 그나마 이것조차 나중에는 변질되어 ‘역(力)’이라는 스탬프를 만들어 급조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모두가 다 군국주의 일본의 무모한 침략야욕이 낳은 서글픈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난데없는 센닌바리의 제작 열풍에 부화뇌동한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도쿄미술학교 조각과 출신의 윤효중(尹孝重, 1917~1967)이 여기에 속한다. 그가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이 바로 바늘땀을 짓는 조선여인의 모습을 나무에 새긴 ‘천인침’이었으며, 그해 특선(特選)에 선정되는 한편 조선총독상을 받았다.
그리고 센닌바리와 관련하여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의 하나는 <매일신보> 1944년 1월20일자에 수록된 마츠무라 코이치(松村紘一)의 기고문 「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 천인침」이다. 여기에 나오는 마츠무라는 친일 문인으로 변절한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창씨명이다.

 

삼팔조끼(명주조끼)에 풀솜을 두어 붉은 실로 한 바늘 두 바늘 천 사람의 어머니와 누이의 정성을 모두어 뜨는 ‘센닌바리’. 학병의 입영날짜를 앞두고 종로네거리 백화점 어구에 세패 네패로 벌어진 정성의 바느질. 어제날까지도 보기 어렵던 새로운 풍경을 나는 가던 발을 멈추고 묵묵히 본다.(중략)
그 정성은 곧 무운장구를 비는 정성인 동시에 임전무퇴의 용기를 비는 것이요 칠생보국(七生報國)의 충성을 비는 것일지며 옥쇄(玉碎)의 영광과 격멸의 기백과 필승의 신념을 바늘마다 아로새긴 정성일 것이다.
대동아전쟁 이후로 오늘날까지 흰옷 입은 이 땅의 백성도 황국의 충성스런 인민으로서 그의 지킬 본분을 지켜온다 하였지마는 오늘처럼 뜨거운 가슴을 정성 드린 ‘센닌바리’를 누비어 본 적이 없었으리라.(중략)
저기서는 더벅머리 여학생 한 떼가 바늘을 움직이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마스크 쓴 노인이 붉은 실을 꿰고 있다. 웃옷을 입은 상점의 점원들도 웃는 낯으로 한 바늘 꿰매고 있다. 이 아름다운 풍경 굳센 어머니 굳센 누이 굳센 병정 그리고 굳센 나라. ‘센닌바리’는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의 나타남인 동시에 이 땅의 가장 굳셈을 자랑하는 풍속임을 이제사 나는 깨달았노라.

 

자랑스런 풍속으로까지 미화한 센닌바리야말로 일제의 군국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교묘한 자
기위안의 최면술인 동시에 삶과 죽음의 책임마저 고약하게도 그저 개개인과 그 가족의 운수 탓
으로 돌려버리는 일종의 면죄부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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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가슴 뜨거워지는 한순간이 중요하다’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 개발자들

인터뷰 김수빈 회원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의 개발자인 고용진(왼쪽)과 안겨레(오른쪽)

 

100년 전, 독립운동에 뛰어든 청년들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들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목표도 가족을 지켜 내겠다는 책임감도 제국주의와 반민족행위자를 몰아내고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사명감도 봉건적 속박에서 억압받는 성을 해방하겠다는 처절함도 있었겠지만, 이런 생각들은 모두 저마다 ‘가슴 뜨거워지는 한 순간’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로부터 100년 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의 가슴엔 과연 어떤 ‘한순간’이자리 잡고 있을까? 그 뜨거움의 원천은 각기 다르겠지만, 그 한순간을 만났고, 이에 두려움도 무릅쓰고 한 발짝 내디딘 청년들이 있다.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을 개발한 고용성 개발자와 안겨레 개발자가 바로 그들이다. 10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 회의실에서 ‘난세의 영웅’ 개발자 두 분과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문: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겨레 : 안녕하세요, 한림대 법학과 재학 중인 안겨레입니다. 한림대학교 내 창업교육센터에서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 게임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고용성 : 안녕하세요, 한림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고용성입니다. ‘난세의 영웅’ 개발과 저희 회사 경영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문 : 한국사 RPG ‘난세의 영웅’은 어떤 게임인가요?
안겨레 : ‘난세의 영웅’은 선사시대부터 건국 이후까지의 역사를 다룬 한국사 RPG입니다. 주인공은 3명이고, 시대가 진행될수록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저희 게임의 주요 콘텐츠 중에 하나가 캐릭터가 돌아다니며 NPC에게 말을 거는 방식인데요, NPC와의 대화를 통해 한국사에 관한 정보와 게임 진행에 관한 정보를 고루 얻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게임 안에 담긴 한국사 정보는 고등학교 이상의 수준입니다. 수능은 물론, 한국사능력검정 1급, 국가직 공무원, 지방직 공무원 등의 시험 출제율 최상위에 뽑힌 것만을 골라서 게임에 넣었습니다. 또한 역사를 다루다 보니 철학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선과 악, 정의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경제란 무엇인가?, 명분이 왜 필요한가? 등등의 요소가 단순히 이 게임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역사를 통해 더 발전된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유도합니다. 철학적 접근이 어렵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접근성이 높은 게임매체를 통해 조금 더 생생하게 흐름을 잡아주는 것은 어린 학생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문 : 원래부터 게임 개발에 흥미가 많았나요?
고용성 : 저희는 중학교 동창인데요, 그때 같이 재밌게 만들던 게임 제작 프로그램이 군대제대 후 최신화로 업데이트된 걸 알고 다시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때 당시엔 역사에 초점을 맞췄다기보단 게임에 조금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안겨레 : 저도 처음에 게임 개발보다 게임 자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래서 게임 개발을 업으로 삼으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수학을 포기하고 문과에 진학한 상태라 그 생각을 접고 공부에만 매진했죠.

문 : 그렇다면 어떠한 계기로 한국사 게임을 만들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안겨레 : 저는 중국의 ‘삼국지’를 정말 좋아합니다. 삼국지 게임을 하다 흥미가 생겨 <삼국지>를 읽었고, 나중엔 책을 줄줄 외울 정도로 빠져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오히려 한국사를 삼국지보다 늦게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2013년 제대 후에 노량진에서 검찰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한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다 보니 흥미가 생기고, 제일 자신 있는 전략과목이 되었습니다. 공부가 정말 힘들었던 어느 날, 예전에 즐겁게 했던 삼국지 게임이 떠올라 ‘한국사 게임도 있겠지’라는 생각에 검색해 보았는데, 단 하나도 없는 상황에 매우 의아했어요. ‘삼국지 게임도 있는데, 우리나라 역사를 다룬 게임은 왜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삼국지 게임에 빠져 삼국지를 섭렵하게 됐듯이, 한국사 게임을 통해 사람들이 한국사에 빠지는 세상이 자꾸만 떠올랐어요. 그래서 ‘차라리 내가 만들어보자’라고 생각했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검찰직 시험을 포기하고, 게임 제작에 뛰어들게 되었죠. 

문 : 대전환이 일어났네요. 진로를 변경했을 때, 고민이 많이 되지 않았나요?
안겨레 : 저는 법학과, 용성이는 경영학과다 보니 프로그램에 대한 지식은 뛰어나지 못했어요. 옛날 중학교 때 장난스레 가지고 놀던 게임 툴만으로는 전문적인 게임을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진로를 변경해도 괜찮을까’란 고민과 두려움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문과생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시대가 저를 부르는 것 같았고, 제 마음은 마른 낙엽에 옮겨 붙은 불씨처럼 계속 커져만 갔어요. 제가 좋아했던 게임 속 영웅들, 역사 속 위인들은 도전적이고 가치 있는 일을 해냈기 때문에 제가 이 일을 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그 순간에도 제 마음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결국 ‘부족한 건 배우면 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늦었다는 건 없다’는 생각으로 짐을 챙겨 노량진에서 나왔습니다.

문 : 고용성 님은 어떤 계기로 안겨레 님과 함께 게임을 개발하게 되었나요?
고용성 : 겨레가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저는 창원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었어요. 군대에서 만난 선임이 그 음식점 대표여서 제대 후에 음식을 배우고, 그쪽 계열로 창업하려 했는데 겨레가 함께 게임을 개발하자는 연락이 와서 그걸 접고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음식점을 하면서 2년간 번 돈을 ‘난세의 영웅’ 초기 창업 자금에 보탰습니다.

문 : 창업 자금이 꽤 들었을 것 같은데요, 자금과 관련된 계획은 어떻게 세웠나요?
고용성 : 원래 개발 자금으로 1년 반 정도는 지출하리라 예상했지만, 하다 보니 너무 어려운 점도 많고, 처음이라 익숙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시간이 더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림대 학교 창업지원센터에서 심사를 거쳐 창업 지원금을 받아 충당해 나갔습니다.

문 : 게임은 두 분이서 만드신 건가요?
안겨레 : 처음 출시했을 때는 저희 둘이서만 만들었고, 후에 리메이크할 때는 전문 프로그래머한테 외주를 맡기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프로그래머도 저희 게임팬이었는데, 리메이크 소식을 듣고 돕겠다는 연락을 주셨어요. 그래서 외주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희만의 엔진이 다 만들어진 상황이라서 자체적인 개발이 가능한 정도까지 끌어올리게 되었습니다.

문 : 한국사가 워낙 방대해서 게임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이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텐데요.
안겨레 : 네, 사실 시나리오라는 걸 처음 써봤는데 다행히 옛날에 책을 읽은 경험이 많아서 초반에는 잘 풀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요즘 창작의 고통이 심하게 와서 글이 안 써지면 개발업무를 하고, 그러다가 스토리가 떠오르면 그때 다시 글을 쓰는 패턴으로 조절하고 있습니다.


문 : 한국사 자료를 모으는 작업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자료적인 면에서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있었나요?
안겨레 : 한국사 내용은 주로 시험 출제 빈도가 높은 것들로만 구성했습니다. 게임 안에서도 캐릭터들이 대화할 때 나오는 붉은 자막은 한국사 시험 관련, 푸른 자막은 게임 진행 관련정보로 구분해 놓았어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이 게임을 하기 싫어도 공부하기 위해서 찾아오고, 반대로 한국사가 좋아서 왔는데 시험에도 도움이 되니까 한국사 자격증을 따게 되는 등 좋은 영향을 끼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 : 게임 스토리는 어느 시대까지 진행되나요?
안겨레 : 현재 선사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이미 나온 상태고, 올해 12월에 조선 후기편이 나옵니다. 앞으로 개화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편까지 더 나올 예정입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2021년까지 완성될 것 같습니다. 한국사 시험 범위 내에서 다루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를 끝으로 마무리를 지으려 합니다.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면서, 한국사 시험에 높은 출제 빈도수 위주로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희 게임 팬카페의 팬들이 빨리 다음 장을 달라고 하셔서 (웃음) ‘7장’인 조선 후기까지를 후딱 내고,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를 ‘1기’, 개화기부터는 ‘2기’로 나누어 약간의 기간을 두고 출시하려 합니다. 일단 전체를 다 만들고, 구글 스토어 말고도 다른 플랫폼에 출시해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익이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문 : 난세의 영웅 팬카페의 연령 분포는 어떤가요?
안겨레 : 10대부터 60대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그중 20대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30대, 10대 순입니다.

문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과 ‘난세의 영웅’ 팬들이 함께 답사를 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30대가 가장 많다는 것이 참 다행이네요. 게임 홍보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안겨레 : 사실 저희가 조선 후기편 개발로 인해 지금은 홍보를 거의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번 편이 완성된 후에 홍보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 같은데요, 현재 성남시에서 진행하는 ‘인디크래프트’에 저희가 선정되어서 그쪽에서 저희 홍보를 전담해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고, ‘구글피처드’에서도 홍보가 이루어지게 될 것 같습니다. 한림대에서도 홍보 지원을 해주기로 하였고요.

문 : 게임 타이틀을 왜 ‘난세의 영웅’으로 정하게 됐나요?
안겨레 : 제 개인적인 역사인식인데요, 평범한 사람도 난세를 만나면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숨지 않고 뛰쳐나온 경험이 많죠. 그런 위기 순간에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영웅’이란 말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서도 언제든지 영웅이 등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난세’란 개념은 더 포괄적이죠. 그래서 더 다양한 방면에서영웅이 등장할 수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게임 타이틀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문 : 게임이 다 완성되고 나면, 본인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계획들이 있나요?
안겨레 : 다 완성되고 나면, 일단 게임을 깔끔하게 한 번 더 다듬고 홍보 쪽으로 매진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후엔 계속 게임업계에 종사하게 될지, 아니면 공부를 좀 더 해서 애플리케이션 등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나갈지 고민 중입니다.
고용성 : 저는 ‘난세의 영웅’이 완성되고 나면 외전 버전까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프로그램 쪽으로 진로를 잡고 싶습니다.

문 : 처음에 두 분께서 한국사 게임 개발에 뛰어들었을 때는, 우리 역사콘텐츠의 부재를 절감해서 두 팔 걷어붙였지만, 일이 진행되어갈수록 부담감과 무게감이 가중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난관들을 어떻게 버티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겨레 : 사실 한국사 게임이 없습니다. 국내 내수시장이 작아 돈이 안됩니다. 중견기업 정도 되면 이런 게임은 안 한다고 해요. 수지 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인데요, 또 두 명만으로 만들기엔 엄청 버거운 내용이라서 저희가 생각하기로는 앞으로도 이런 게임이 나오기는 힘들 거라 예상합니다. 오히려 저희가 독점한 상태가 되어버린 거죠. 게임 플레이어들이 이 게임은 ‘미래형 교과서다’라고 할 만큼 저희 게임이 좋은 반응들을 얻고 있어서 학원가에서도 원장님들이 저희 게임을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도 정말 많이 힘들던 때가 있었는데, 이건 유일하게 저희가 누릴 수 있는 ‘빈집’이고, 그 생각으로 계속해 오다 보니 지금은 조금 숨통이 트인 상황입니다. 큰 난관들을 겪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보란 듯이 멋진 한국사 게임을 출시해 주신 고용성 님, 안겨레 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고 가장 존경하는 위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회영 선생’이라 말씀하신 안겨레 님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회영 형제를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는 안겨레 님은 역사에 관심을 갖는데 ‘그 가슴 뜨거워지는 한순간이 중요하다’고 했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나에게 이 두 분이 바로 ‘난세의 영웅’이다. 더불어 한국사 게임 콘텐츠의 부재에 의문을 품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없으면 내가 만들어야지’ 하며 정면 돌파한 두 분의 열정적이고 진심 어린 모습을 보니 나 역시 마음 한켠이 뜨거워졌다. ‘난세 속에 온 국민이 잠재적 위인’이라는 노래 가사도 있듯이, 게임 ‘난세의 영웅’을 통해 우리역사를 기억하고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수, 2020/11/11-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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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개최

 

10월 23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며, 강북구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독립전쟁 선
포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이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회의는 대한민국임시
정부의 독립전쟁선포 100주년이자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이 되는 올해 독립전쟁사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에 부응하고자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3·1운동 이후 본격화한 만주 일대의 항일무장투쟁을 재조명하였다.
학술회의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Ⅰ부에서 기조발제와 주제 발표 및 토론, Ⅱ부는 종합토론으로 진행되었다. 임헌영 소장의 개회사와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환영사로 학술회의가 시작되었다.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학술회의 Ⅰ부는 심철기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실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기조발제를 맡은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는 ‘독립전쟁과 신흥무관학교의 역할’이란 제목으로 독립전쟁에서 신흥무관학교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에 대해서 발표하였다. 제1주제 ‘1910년대 유교계의 독립운동과 신흥무관학교’는 서동일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가 발표하였다. 일제 강점 초기 만주에 정착한 유림들과 신흥무관학교의 관계를 중심으로 유교계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참여에 대해 다루었다. 토론자로 나선 박성순 단국대학교 교수는 신흥무관학교와 유교계가 어느 정도로 관계가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제2주제 ‘신흥무관학교 출신(자) 현황 분석과 독립운동’은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발표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구축한 신흥무관학교 인명 DB를 토대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의 활동과 분화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토론자로 나선 숭실대학교 황민호교수는 신흥
무관학교와 관련이 있는 436명의 인물들을 직접관련 단체 9개와 간접관련 단체 5개로 구분하고 중요 인물들의 특징을 파악한 것은 엄청난 공력이 들어가고 동시에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졸업 후 독립운동과 관련해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나 단체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하였다. 
다음으로 한성민 대전대학교 교수가 제3주제인 ‘일본의 간도출병 배경 검토’를 발표하였다. 일제가 1920년 ‘훈춘사건’을 빌미로 간도지역에서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한 ‘간도 출병’의 배경을 당시 사료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토론자 강릉원주대학교 이명종교수는 일제의 ‘간도출병’을 전체적인 배경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데 연구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마지막으로 제4주제는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청산리 전역과 절반의 작전’으로 발표하였다. 청산리 전투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 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독립전쟁과 일본군의 활동을 추적하는데 지도를 활용하여 보여줌으로써 청중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었다. 토론자 동덕여자대학교 이승희 교수는 <吉長日報>라고 하는 중국신문을 검토대상으로 삼고 청산리 전투에만 국한하지 않고 중국 동북지역 독립군활동의 양상과 일본군의 움직임을 규명한 점과 중국 동북지역 한인 무장투쟁과 일제 침략정책의 상관관계를 도출해내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였다.
Ⅱ부 종합토론에서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의 주재로 발표자 및 토론자 전원이 참여하여 열띤 논의를 벌였다. 이번 학술회의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상황에 맞춰 관계자와 예약 참석자 50명만 제한적으로 참석하여 진행되었지만 학술회의의 모든 진행 과정을 촬영하여 편집영상을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에 게시함으로써 〈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수, 2020/12/02-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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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효창독립커피 4탄 김창숙 커피, 5탄 지청천 커피 출시

 

연구소는 일상 속에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자 효창독립커피를 기획하여 4월 차리석 커피를 시작으로 이상룡, 권기옥 커피에 이어 12월 24일부터 김창숙 커피와 지청천 커피를 선보인다. 김창숙 커피의 디자인은 국외 독립운동유적지를 찾아 알리고 있는 사진작가 김동우 회원이 성균관대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안에 있는 김창숙 선생 동상을 촬영했으며 한글 글씨는 이진경 작가가 써주었다. 지청천 커피의 디자인은 이윤엽 판화가가 제작했다. 효창독립커피 구입은 hyochangmall.com(효창몰)에서 가능하다.

수, 2020/12/3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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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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