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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제5차 유해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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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제5차 유해발굴조사

익명 (미확인) | 월, 2018/03/26- 17:28

연구소와 4.9통일평화재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포럼진실과정의 등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은 지난 2월 22일부터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마을 뒷산 폐금광 터에서 제5차 유해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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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1951년 1월 7일과 8일 ‘마을회의’ 또는 ‘도민증을 발급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고 가족들과 함께 나온 주민 약 200~300명이 경찰과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살해된 주민들은 인민군 점령 시기에 부역을 했다는 혐의가 덮어 씌워졌다.
10여 일 동안의 발굴작업 결과, 3월 8일 현재 40여 구의 유해가 수습되었는데, 발굴된 유해의 대부분이 어린아이와 여성들이고, 너무나 참혹한 희생자들의 모습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20대 여성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거꾸로 처박혀 발견된 두 구의 유해는 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로 보인다. 그 아이의 다리뼈 옆에서는 희생된 아이가 갖고 놀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구슬도 함께 발견되었다. 또한 옥비녀와 은비녀 10여 개, 돌반지로 보이는 아기의 은반지도 발굴되었다. 67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희생자들의 유해는 국가에 의해 이곳에서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박선주 단장을 비롯한 발굴단 관계자들은 그동안 여러 지역에서 유해발굴작업을 해왔지만, 참혹하게 아무렇게나 포개져 묻혀 있는 희생자들의 유해는 처음 본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산시의 예산 지원과 연구소 아산지회의 전면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번 발굴작업은 3월말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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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도쿄에서 함흥으로: 일제 문서로 보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 학술회의 열려

10월 4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한국언론회관 19층 기자회견장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며, 서울시·강북구·식민지역사박물관이 후원한 ‘도쿄에서 함흥으로: 일제 문서로 보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회의의 취지는 3·1운동 100주년을 정리하면서, 1919년 그때 우리 민족이 치열하게 추구했던 독립정신과 민주공화주의를 다시 한 번 조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일본에서 새로 발굴된 〈2·8독립선언 서명자 취조기록〉과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함흥지방법원 검사국 검사 이시카와의 함경도 지역 3·1운동 관련자 기소 준비자료 〈대정8년 보안법사건〉을 처음으로 집중 분석하였다.

학술회의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1부와 2부 주제 발표 및 3부 종합토론으로 진행되었다. 개회식에서 임헌영 소장의 개회사와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환영사, 그리고 한완상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의 격려사,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1부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서 최우석 독립기념관 연구원은 ‘2·8과 3·1 사이-3·1운동 준비과정을 중심으로’를 발제했다. 최 연구원은 3·1운동의 준비과정에서 2·8독립선언이 끼친 영향이 매우 컸다고 말하고 재일조선인유학생 송계백 고국 방문 시점의 분석과 민족대표들의 독립청원에서 독립선언으로 변화과정을 정리하여 자신의 논지를 입증하였다. 이어서 미야모토 마사아키(宮本正明) 와세다대학 대학사자료센터 연구원이 ‘취조기록을 통해 본 2·8독립 선언으로의 도정’을 발제했다. 여기서의 취조기록은 2012년 일본에서 발굴된 「東京辯護會·第二東京辯護士會合同圖書館所藏刑事訴訟記錄」 속에 포함된 「출판법위반」 부책(簿冊)이다.
미야모토 연구원은 2·8 독립선언 서명자(최팔용, 김도연, 김철수, 백관수, 윤창석, 이종근, 송계백, 김상덕, 서춘)를 일본 경찰과 검찰이 출판법 위반 혐의로 취조한 내용과 이들의 공판기록 등을 통해 2·8 독립선언 과정을 재구성했다. 신문기록상에는 최팔용이 2·8독립선언의 중심인물이며 선언서 작성에 이광수뿐 아니라 다른 서명자들이 참여했음을 새로이 밝혀냈다.
2부의 주제는 이시카와 자료와 함경도 지역 3·1운동이다. 첫 번째로 민족문제연구소 권시용 연구원은 ‘3·1운동 참여자 처벌과 법 적용’을 발제했다. 이 발제를 통해 이시카와 검사가 115개 사건에서 총 943명을 조사해 보안법, 출판법, 형법의 소요죄와 상해죄, 훼기, 방화죄, 제령 제7호를 적용해 529명을 기소했고 이중 광범위하게 적용된 혐의는 보안법 제7조 치안방해(81건)였음을 밝혔다. 한편 이시카와 검사의 기소자들에 대한 2심 판결 검토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하거나 적용 법령의 일부를 취소하고, 기소자의 34.5%가 1심보다 감형되는 사례를 확인함으로써 재판부가 3·1운동을 강경하게 진압하고 최대한 중형을 내리려 한 총독부의 방침에 완전히 부응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조한성 연구원의 ‘함남 함흥의 지역 네트워크와 3·1운동’ 발제가 있었다. 조 연구원은 이사카와 자료를 적극 활용하여 함흥군의 지역적 특성과 기독교 학교의 실태를 확인하고 3·1운동 소식을 함흥군에 알렸던 이순영(원산), 강봉우(북간도)의 기독교적 배경과 역할을 살펴보고 함흥군에서 일어난 독립신문·격문 제작 배포운동과 조선인 관리 동맹사직운동의 전개양상을 추적하였다. 이를 통해 3·1운동과 관련해 함흥군의 다양한 지역 네트워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명숙 연구원은 ‘함남 이원 3·1운동의 내외적 전파와 전개’를 발제했다. 이 연구원은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이원군 3·1운동의 진행과정과 천도교를 중심으로 한 시위 조직과 주체를 이시카와 자료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삼일운동DB를 활용해 면밀히 분석하였다. 아울러 이원군뿐 아니라 함경도 지역의 독립선언서 유입과 전파과정을 정리하고 각 군의 만세시위가 조직되어가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밝혀놓았다.
3부 종합토론에서는 한상권 전 덕성여대 교수를 좌장으로 하고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윤소영 독립기념관 연구원, 장신 한국교원대 교수,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허영란 울산대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하여 열띤 논의를 벌였다.

• 편집부

화, 2019/10/29-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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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편집자 주–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자유신문』 1945년 10월 11일자 기사 「망명지사들 가족방문기(5)-김광서 장군편」이다. 자유신문사는 해방 직후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워온 망명지사들 가족을 방문하여 망명지사의 근황을 알아보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김광서 장군 편에서는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연고자들을 인터뷰했다. 이 자료를 통해 해방 직후 망명지사들에 대한 관심과 성원이 대단히 컸음을 알 수 있다.


 

해외에 망명한 혁명지사 중 로서아로 망명하여 이래 26년 동안 그곳에 있다는 김광서(일명 金擎天) 씨의 가족을 방문코저 더듬더듬 알 만한 길을 통해 처음 얻은 소식은 이러하였다. 사직골 막바지 전 부기동 아래 무덕문 뒤로 찾으면 아직도 전에 그가 살던 구지(舊址)가 있으리라는 대단 명료치 못한 말이었다. 그러나 기자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단서이었다. 무덕문 옛터라는 곳은 전에 일본인중학이던 경성중학 뒤 그리고 일인 관리들의 사택이 있는 동리이었다. 그러나 이러타 할 구지를 찾을 수 없어 그 동리에서 나아서 자라서 지금 70이 넘었다는 사직골 막바지의 고로(古老)를 찾으니 자기가 잘 아노라 하면서 들려준 이 얘기에서큰 광명을 발견하였다. 고로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저기 세집들이 많이 들어앉은 터가 바로 그 김대장댁 터이요. 지금 번지로 사직정 161번지(166번지의 오기-편집자)지요. 기미년 만세를 불렀던 바로 전 해(1918년) 가을에 김대장이 일본서 우리 동리에 나와 사시게 되었지요. 그때는 집 한가운데 연못이 있었고 연못가로 큰사랑, 작은 사랑이 이었는데 날마다같이 굉장히 손님들이 많이 오시더군요. 그때 식구는 김대장 내외분하고 나이 든 누이 한 분과 애기 둘 이렇게 단출합디다. 김대장은 아침저녁 용산군대에 나갈 적에 말을 타고 나가고 들어가는 □□ 우리와는 가까웁게 지내지 않았지만 드나드는 이 말로 보면 대단히 후한 이라고 합디다. 저 세집들이 □□ 수년 전까지도 돌기둥에 ‘김광서’라는 백자기 타원형 문패가 역력히 남아있더니 인제는 그도 저도 없어졌군요.
벌써 그 양반이 아라사로 가신 지도 스물여섯 해나 되니까 짧은 세월도 아니기는 하지요.

하며 노인은 1919년 3월 1일 만세소동이 있은 지 그 후 얼마 후에 과연 김대장의 자취가 사라지고 졸지에 헌병대와 경찰과 형사들이 그 집을 둘러싸서 이 동리 사람들까지 자유로 드나들지 못하였던 당시의 삼엄한 경계상황을 말하여 바깥과의 일체 연락이 끊긴 후 김대장의 가족들이 얼마나 갖은 위협과 곤란 중에 지내왔는가를 지금도 □□□□□□하는 태도로 한숨지었었다. 이같이 노인의 말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김경천 씨가 만세 후 로서아에 망명하였을 당시에 한 동리 사람으로 듣고 본 사실담에 한 토막이었다.

◇ ◇

기자는 다행히도 또 새로운 광명을 잡게 되었으니 위에서 들은 사직골 노인의 이야기가 김경천 씨에 대한 서화(序話)이라면 이것은 그 본실이며 후일담이다. 이 얘기를 들려준 분은 최근 소련으로부터 입국한 홍복린(洪福麟) 씨이다.

내가 김경천 선생을 처음 뵈옵기는 지금부터 25년 전 소련 연해주 따뷔이라는 조그만 어촌이었습니다. 20 당년의 나는 혈기에 날뛰는 한 젊은이였습니다. 말로는 큰 뜻을 품고 고국산천을 떠나 이곳에 나왔으나 아무런 계획도 아무런 경험도 없는 나로서는 사실 쓰라린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때 나를 건져주시며 나를 용기있게 해 주신 분이 바로 김경천 선생님이십니다. 선생은 내가 연해주에 들어가던 바로 전 해 가을에 그곳에 오셨던 것입니다. 선생은 일본의 현역 기병대위로 혁명에 뜻을 품고 3.1운동 당시에 국내운동에 참가하다가 일본 관헌의 마수에서 벗어나 연해주로 망명하신 것이었습니다. 로서아에 입국하신 후 처음에는 그가 일본 군인이었던 관계로 조사 밀정이라는 혐의로 로서아 관헌의 박해를 당하여 적지 않은 고생을 하시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조선의 혁명가임을 확실히 알게 되자 그네들은 특별한 대우를 하게 되어 당시 10여 만이나 넘는 연해주의 조선인 통솔자로 임명하고 따뷔 어항의 어업조합장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래 선생은 재주 조선인의 사도며 지도자로 활동하시는 한편 그분이 □□□ 뜻하였던 장차 조국의 완전 독립을 위하여 싸우고 또 조국이 완전 해방된 후 조국을 지킬 국군 육성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중략) 선생이 이미 59세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까지 모발이 흴 때는 아닙니다마는 이역 고투 20여 년에 선생의 모발은 은발같이 하얗게 되시었습니다. 선생의 위업 조국 국군의 선봉이 될 중견군은 지금 크게 자라고 있습니다. 현역 예비역 후비역을 통합하면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조국 군인은 10만이나 됩니다. 이번 독소전쟁에 하리보우 싸움에서 위훈을 세워 조선 군인의 성가를 세계에 떨친 것도 선생 휘하의 조선 군인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네들은 반드시 조국을 위해서 큰일을 할 것입니다.
로서아와는 지금까지 너무 □□하고 너무 비밀을 엄수해온 □□이었던 관계로 그간에 정보를 알 길이 없고 따라서 김선생의 소식도 망명 혁명지사 중에서 알려졌던 사실이지요.

홍복린 씨의 얼굴은 흥분으로 홍조를 띄우고 그의 말은 열화를 품은 것 같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김경천 씨와 다만 한 분의 육친인 손아래 누이 한 분이 현재 서울에 거주한다고 한다. 기자는 그분을 소개하기를 원하였더니 ‘너무 만나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만 두셔도 좋지요’ 하였다. 기자는 김선생의 한 분 누님이 가까운 장래에 그리우시던 오빠를 만나시고 길이 행복하시라고 혁명지사 유가족에 대한 경의와 축복을 표하기로 하였다.

수, 2019/10/30-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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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개발과 수탈의 현장에 서다’ 김제·군산 답사 진행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연세대근대한국학연구소가 함께 진행한 답사 프로그램 ‘식민지 개발과 수탈의 현장에 서다 – 김제·군산지역 역사기행’이 10월 5일(토) 전북지역에서 55명이 참가하여 진행되었다. 답사 해설은 허수열 충남대학교 교수가 맡아 주었다. 서울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40여 명과 전
북지역에서 합류한 후원회원 10명, 그리고 진행스텝으로 임무성, 김혜영, 김무성 상근자가 참여하였다.
3시간여를 버스를 타고 달려 신태인에 도착한 답사단은 점심을 같이 먹고 낙양취수장을 찾는 것으로 답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구마모토 농장, 벽골제, 만석보터, 죽산보유허, 해창관문 등을 탐방하며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에 남겨진 깊은 상처를 목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허수열 교수의 생생한 설명을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번 답사는 근대 한국이 형성되는 공간으로서의 중요한 역사문화적 현장을 직접 탐방하며 강의를 통한 교육을 병행함으로써 역사인식을 제고하였고 아울러 근대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관심과 열린 시야를 갖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더구나 허수열 교수는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삶이 좋아졌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였고, 근대한국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연구방향을 제시하여 참가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이번 답사에는 현지의 전북지부 회원들이 함께하며 많은 도움을 주었고, 김재호 지부장은 참가자 전원에게 새로 도정한 햅쌀을 한 부대씩 선물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화, 2019/10/29-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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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행사

11월 9일 임종국 선생 30주기를 맞아 천안에서 회원들과 시민, 충남지역 학생들이 모여 임종국 선생 추모행사가 진행되었다. 선생의 흉상이 세워진 천안 신부공원 답사를 시작으로 천안공원묘원에서 추모식을 거행하고, 선생이 마지막 여생을 보낸 요산재에서 안내 이정표를 세우는 행사를 거행했으며 저녁 6시 천안중앙고등학교에서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의 밤’ 행사를 끝으로 전체 일정을 마쳤다. 이번 추모행사는 민족문제연구소·임종국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충남지부·천안지회·아산지회·천안역사문화연구회가 주관, 충남교육청과 충남역사교사모임이 후원하였다. 본부에서는 박수현 사무처장, 방학진 기획실장, 임무성 교육위원, 박광종, 이순우, 권시용, 조한성 선임연
구원, 손기순, 신다희, 국세현, 류감석, 김무성이 참여했고, 지부에서는 이민우 운영위원장, 권희용 충남지부장, 최기섭 천안지회장, 박해룡 대전지부장, 독립운동가 동암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선생,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장을 비롯한 회원 40명이 참가하였다.
천안공원묘원에서의 추모식에서는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참석해 추모사를 하고, 이민우 운영위원장을 필두로 전 회원이 참배하며 임종국 선생의 정신을 기렸다. 임종국 선생 유족 대표로 선생의 여동생 임경화 여사와 사위인 조원희 님이 참석하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추모의 밤 행사에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김지철 충남교육감, 윤일규 국회의원, 홍성표 아산시의원이 참석했다. 또 충남역사답사에 참여한 충남지역 고등학생 100여 명이 참석해 임종국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이 행사에는 고 노동은 교수의 아들 노관우 씨가 중심이 된 밴드가 판소리 심청가와 〈항일음악 330곡집〉에 수록된 ‘새야새야파랑새야’
, ‘대한혼가’, ‘광복군 아리랑’을 불러 추모의 뜻을 더했다.

• 김무성 회원사업부팀장

금, 2019/11/29-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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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생을 바쳐 기록한 1만2천 장의 카드…우리는 그에게 빚을 졌다
– 임종국 선생 30주기, 그 뜻에 가닿으려면

최우현 서울북부지부 회원

 

 

우리는 먼저 떠난 고인(故人)들을 기리고 추모한다. 떠난 이를 향한 그리움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의 생애를 회고해보는 것이다. 가끔씩은 고인이 떠난 시점을 기점으로 시간사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1주기, 10주기, 30주기… 이처럼 말이다. 이런 경우 그만큼 고인이 관철한 삶이 강렬했거나, 사상과 행적을 기념할 필요가 높았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지난 11월 9일 천안 일원에서 열린 ‘임종국 선생’의 30주기에 특별한 추모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제 연구에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평생을 통해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의 행적을 조사했으며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다시피 골몰하여 후대 연구의 기반을 조성했다.
우리가 흔히 ‘친일파’로 알고 또 지칭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기록이 그가 작성한 1만 2천 장에 달하는 ‘친일인명카드’ 속에 담겼고, 후일 이는 〈친일인명사전〉의 뿌리가 됐다. 〈친일문학론〉(1966), 〈일제 침략과 친일파〉(1983), 〈일제하의 사상탄압〉(1985) 등 실증에 입각한 저서들도 남겼다.
특히 올해가 〈반일종족주의〉, 류석춘 교수 논란 등 친일 논란이 두드러진 한 해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임종국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되짚어보는 일은 더욱 의미가 있다. 이날 추모를 위해 모인 시민들의 행렬은 선생이 영면한 천안공원묘원과 필사의 연구를 이어나간 요산재(樂山齋)등 공간의 발자취를 따라 이어졌다.
임종국 선생은 생애 마지막 9년여 시간을 천안에서 보냈다. 건강문제도 있었거니와 친일파연구와 집필에 전념할 공간의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천안이라는 고장과 선생의 인연이 깊은 이유다. 2016년에는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조형물(흉상)도 천안 신부공원 광장에 들어섰다. 참고로 천안 신부공원에는 임종국 선생의 조형물과 더불어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과 ‘6월 민주항쟁 30주년 표석’이 함께 자리해 있다. 민족, 민주, 평화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날 80여 명에 이르는 시민, 자원봉사자,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선생의 영면지인 천안공원묘역(무학지구 철쭉 4-1)에 운집했다. 임종국 선생의 막내 누이동생인 임경화 여사를 비롯해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차영조 독립유공자 유족회 부회장(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 외아들),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장 등 각계, 지역의 인사들도 자리했다.
30주기를 맞이하여 현장에서는 임종국 선생의 육성이 담겨있는 인터뷰 녹음본이 공개되기도 했다. 해당 녹음본은 1988년 CBS 라디오에 출연한 임종국 선생과 임헌영 소장(당시 문학평론가)의 대담을 담은 것이다. 해당 녹음본 속의 임종국 선생은 당시 폐기종 등으로 몸이 좋지 않아 어렵게 말을 이어가면서도 친일 청산이 왜 필요한 가를 강하게 피력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의 영향이란 것은 (우리 일상에) 알게 모르게 상당 부분 파고 들어와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주체성을 완전히 마비시켜 놓은 이런 상태가 돼있거든요. ”
– CBS 라디오, 임종국 선생 인터뷰(1988년)

 

그런 한편, 임종국 선생의 막내 누이동생인 임경화 여사는 재야에서 오직 연구에만 전념하며 가난한 삶을 살았던 선생의 모습들을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실제로도 선생은 연구비가 없어 여동생에게 돈을 빌릴 정도로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다음 일정은 요산재로 이어졌다. 요산재는 선생이 천안에서 기거한 동안 집필실이자 일터(밤농사), 잠자리이자 부엌으로 역할을 한 삶의 현장이다. 이러한 고로 요산재는 우리가 흔히 아는 고상한 연구실이나 향기로운 서재와는 다른, 치열한 생존의 공간이다.
〈총독부 관보〉 35년분 2만 매 이상, 〈매일신보〉 10년 필사분 등을 연구할 정도로 정열적이었던 선생의 학열과 연구과정을 상상해보면 이곳 요산재의 공간적 의미가 더욱 각별해진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임종국 선생 연보에 따르면, 선생이 요산재에 머무른 1980년~1989년 사이 발간된 선생의 연구 저작은 〈일제침략과 친일파〉, 〈밤의 일제 침략사〉, 〈일제하의 사상탄압〉, 〈한국문학의 민중사〉 등 9권에 달한다.
그러나 지금의 요산재는 새롭게 리모델링되어 당시의 대략적인 집 형태만 남아있으며, 현 거주민 또한 임종국 선생과 관계가 없는 민간인이다. 즉, 사유지이므로 접근이나 답사는 어렵다.
다만 이날은 30주년 관계로 주최 측(민족문제연구소)과 거주자의 협의가 이루어진 상황이었음을 기사를 통해 밝힌다.
이어 천안중앙고등학교에서 열린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문화제를 마지막으로 이날의 추모식 일정은 모두 마무리됐다. 여기서도 김지철 충남 교육감, 윤일규 국회의원 등 공직인사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등 시민단체 인사들의 다양한 의견 표명이 있었지만 논점은 모두 비슷했다. 친일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이 떠난 지 30년, 그 이후 우리 주변의 친일 청산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반성해보자는 것이었다.
임종국 선생은 어찌 그토록 치열할 수 있었을까? 선생은 자신의 저서 〈친일문학론〉을 통해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내어놓고 있다. 선생은 우민화, 민족말살을 기조로 한 식민교육이 자신을 역사와 민족에 무지한 ‘천치’로 만들었음을 지적한다.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선생은 친일문제 연구에 몰입했다.

 

식민지 교육 밑에서,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을 뿐 한번 회의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이제 친일문학론을 쓰면서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 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임종국, 〈친일문학론〉(1966)

 

‘친일파’라는 말 자체를 금기시하던 당시(1965년)의 풍토는 선생의 연구를 외면했고 선생은 가난했다. 하지만 굴하지는 않았다. 그의 붓끝은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건 없건, 관료이건 문필, 예술가이건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육친(아버지 임문호)과 스승(유진오)의 친일행적까지 가리지 않고 고발했다. 선생으로서는 뼈를 깎아내는 아픔이었겠지만 그것이 친일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의 공정이고 입장이었다.

“야인이요, 백면서생으로 고독한 육십 년을 살았지만 내게 후회는 없다. 중뿔난 짓이라도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면 내 산자리가 허망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임종국 어록에서) 그 말대로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기에, 우리 후대 사람은 선생에게 모종의 빚을 지고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작지 않다.

금, 2019/11/29-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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