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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제5차 유해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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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제5차 유해발굴조사

익명 (미확인) | 월, 2018/03/26- 17:28

연구소와 4.9통일평화재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포럼진실과정의 등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은 지난 2월 22일부터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마을 뒷산 폐금광 터에서 제5차 유해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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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1951년 1월 7일과 8일 ‘마을회의’ 또는 ‘도민증을 발급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고 가족들과 함께 나온 주민 약 200~300명이 경찰과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살해된 주민들은 인민군 점령 시기에 부역을 했다는 혐의가 덮어 씌워졌다.
10여 일 동안의 발굴작업 결과, 3월 8일 현재 40여 구의 유해가 수습되었는데, 발굴된 유해의 대부분이 어린아이와 여성들이고, 너무나 참혹한 희생자들의 모습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20대 여성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거꾸로 처박혀 발견된 두 구의 유해는 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로 보인다. 그 아이의 다리뼈 옆에서는 희생된 아이가 갖고 놀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구슬도 함께 발견되었다. 또한 옥비녀와 은비녀 10여 개, 돌반지로 보이는 아기의 은반지도 발굴되었다. 67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희생자들의 유해는 국가에 의해 이곳에서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박선주 단장을 비롯한 발굴단 관계자들은 그동안 여러 지역에서 유해발굴작업을 해왔지만, 참혹하게 아무렇게나 포개져 묻혀 있는 희생자들의 유해는 처음 본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산시의 예산 지원과 연구소 아산지회의 전면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번 발굴작업은 3월말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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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개발과 수탈의 현장에 서다’ 김제·군산 답사 진행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연세대근대한국학연구소가 함께 진행한 답사 프로그램 ‘식민지 개발과 수탈의 현장에 서다 – 김제·군산지역 역사기행’이 10월 5일(토) 전북지역에서 55명이 참가하여 진행되었다. 답사 해설은 허수열 충남대학교 교수가 맡아 주었다. 서울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40여 명과 전
북지역에서 합류한 후원회원 10명, 그리고 진행스텝으로 임무성, 김혜영, 김무성 상근자가 참여하였다.
3시간여를 버스를 타고 달려 신태인에 도착한 답사단은 점심을 같이 먹고 낙양취수장을 찾는 것으로 답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구마모토 농장, 벽골제, 만석보터, 죽산보유허, 해창관문 등을 탐방하며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에 남겨진 깊은 상처를 목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허수열 교수의 생생한 설명을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번 답사는 근대 한국이 형성되는 공간으로서의 중요한 역사문화적 현장을 직접 탐방하며 강의를 통한 교육을 병행함으로써 역사인식을 제고하였고 아울러 근대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관심과 열린 시야를 갖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더구나 허수열 교수는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삶이 좋아졌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였고, 근대한국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연구방향을 제시하여 참가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이번 답사에는 현지의 전북지부 회원들이 함께하며 많은 도움을 주었고, 김재호 지부장은 참가자 전원에게 새로 도정한 햅쌀을 한 부대씩 선물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화, 2019/10/29-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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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희’와 ‘철수’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한
작은 출판사의 꿈 – 출판사 <철수와 영희> 박정훈 대표

 

지난 10월 11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출판사 <철수와 영희> 박정훈 대표를 만났다. 박 대표는 월간 <작은책>, <보리 출판사>등에서 10여 년 동안 근무하다 2006년 사회과학 출판사 <철수와 영희>를 차렸다. 2013년에 도서 『10대와 통하는 독립운동가 이야기』(김삼웅 엮음)을 제작하며 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하여 지금껏 후원하고 있다. 매달 연구소에 박 대표가 출판한 책을 한 권씩 기증한다.


 

문 : ‘철수와 영희’라는 이름이 인상적입니다. 어떤 책을 만드는 출판사인가요.

답 : <철수와 영희>는 어린이 ‘영희’와 ‘철수’, 어른 ‘철수’와 ‘영희’가 건강하게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도움이 되는 책을 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2006년 8월 15일 출판사를 설립하여 현재까지 130여 종의 어린이, 청소년, 성인을 위한 인문, 사회, 생태 도서를 펴냈습니다. 대표 도서로는 <새로 쓰는 비슷한 말 꾸러미 사전>(최종규 저), <파브르에게 배우는 식물 이야기>(노정임 저), <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이철수, 하종강, 배경내, 송승훈 저), <10대와 통하는 동물 권리 이야기>(이유미 저) 등이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어린이, 청소년 도서에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인에게 사회과학책은 생각을 강화할 뿐 바꾸기는 어려운데 어린이와 청소년은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시기라 책의 영향력이 더욱 큽니다. 그래서 저희 출판사의 청소년 책들은 한국의 청소년들이 꼭 알아야 할 정치, 역사, 사회, 종교, 환경 등의 주제로 여러 시리즈를 펴내고 있으며 모두 국내 저자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현실을 잘 담기 위해서는 국내 저자가 집필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문 : 요즘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소리가 많이 들리는데요. 2014년부터 ‘도서정가제’가 시행되었습니다. 현재 출판계 상황이 어떤가요.

답 :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교과과정과 연계한 독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의무적으로 한 학기에 책한 권을 읽도록 권장합니다. 성인의 독서량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초중고생의 독서량이 없는 편은 아닙니다.
또 저희 출판사는 도서정가제의 혜택을 많이 받았습니다. 도서정가제 이전에 어린이 책 같은 경우 보통 책 가격의 절반을 유통 도매상에서 떼어갔는데요. 이밖에 학부모회 같은 곳에 도서 가격의 몇 프로를 기부하거나, 학교 같은 곳에서 도서를 할인해 달라는 요청도 많았어요. 소비자는 가능하면 책을 싸게 구매하려고 하죠. 그럼 자연스럽게 업체들 사이에서는 할인율 싸움이 생기는 거예요. 이 할인율 싸움에서 유리한 건 대형출판사입니다. 대형출판사는 책을 많이 찍는 만큼 권당 제작비가 적게 들어요. 작은 출판사가 대형출판사를 가격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면서 할인 폭을 규제하니까 저희 입장에서는 가격 경쟁에서 한층 자유로워져 서적 공급가를 높일 수 있어요. 서점에게 할인하지 않으니 수익률이 높아지고, 공급가를 높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죠. 이렇게 가격보다 책의 질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면서 저희 출판사는 오히려 혜택을 보았습니다.

문 : 출판업계에 더 필요한 제도가 있을까요

답 : 아직 도서 유통 도매상에서는 어음을 지급하는 관행이 있습니다. 처음 출판사를 시작 하시는 분들이 도매상과 거래하면 어음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공급가를 낮춰서 현금으로 받을 수도 있겠지만 어렵죠. 각 지역으로 분산된 모든 서점과 직접 거래할 수 없기에 도매상의 역할은 필수적입니다. 이런 구조에서 출판사가 도매상에게 어음을 받으면 저자분들과 기타 거래처에 돈을 지급할 수 없어요. 게다가 어음으로 거래하면 다른 책을 새로 제작하는데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더불어 사는 사회에 가치를 두며 책을 만들고 있는데 이 어음 관행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더는 어음을 받지 않습니다. 도매상에게 거래 정지를 당하고 정상화되는 등의 과정을 견디며 중간 협상을 했
습니다.
다른 하나는 도서관을 늘리고 사서를 정규직화 하는 것입니다. 괜찮은 책을 만들면 도서관에 납품
됩니다. 도서관 콘텐츠는 그곳 사서가 고르고요. 특히 어린이 책은 아이가 스스로 책을 사지 않고, 가이드가 필요해서 학교나 도서관에서 선정한 책을 부모가 구매합니다. 도서관 선정 도서의 중요성이 큰데
사서는 비정규직이 많습니다. 사서가 정규직이 되면 양질의 도서를 판단하고 도서관 구성 콘텐츠를 고민할 수 있는 여건이 나아집니다. 그러면 출판사는 책의 질로 경쟁하게 되어 도서 질이 높아지고 도서관은 좋은 책을 소장할 수 있어 서로가 좋은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문 : 출판사를 운영하며 어려운 상황도 있었나요

답 : 저희 책들이 좌편향 불온도서로 선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013년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한창이던 때 조선일보에서 사회면 전체를 할애해 “어린이 역사책도 좌편향 심각”이라는 타이틀로 대문짝만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기사에서 우리 출판사 책과 함께 9종의 어린이 역사책을 소개하며 어린이 역사서 상당수가 이승만과 박정희를 폄하했다는 등의 이유로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하거나 좌편향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판매 부수와 관련한 출판사 인터뷰를 인용해 이렇게 많이 팔린 책들이 좌편향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래도 이 기사는 큰 반향이 없었어요. 2015년 상황이 더욱 심각했죠.
2015년 문화일보에서 우리 도서 <10대와 통하는 한국전쟁이야기>(이임하 저)에 대한 기사를 실었어요. 이 도서는 부산시 교육청이 지정한 청소년 추천도서로 선정되어 있었는데 문화일보에서 책의 좌편향이 의심된다고 보도하자 청소년 추천도서 선정이 취소되었어요. 그게 문제를 더 촉발해서 문화일보 3회, 조선일보 3회, 동아일보 2회, 중앙일보 1회, 세계일보 1회 등 일주일 동안 수십 건의 기사가 신문과 방송에 나왔습니다.
문화일보는 우리 책이 6.25가 남침이라는 점을 외면하고 있다고 보도했는데, 남침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 본문에서 세 차례나 나옵니다. 이들 언론은 사실과 다르거나 앞뒤 문맥을 자르고 짜깁기하는 등의 왜곡 보도를 했습니다.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문화일보에서는 저자인 이임화 선생의 교수직에 의문을 품는 기사까지 썼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자를 위협하는 일까지 생길 것 같아 반박 자료를 만들어 한겨레와 경향에 들고 갔어요. 왜곡 보도를 계속하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기사를 내면서 상황이 조금 누그러들었죠.

그해에 다시 ‘스토리케이’라는 보수단체가 우리 출판사 책 3종을 또 좌편향으로 규정하여 역시 조선, 동아, 문화일보 등에 의해 기사화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 책이 좌편향으로 분류된 이유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악수하는 장면이 삽화로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TV 등을 통해 전 국민이 보았던 장면이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사진으로 실려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어쨌든 언론 보도에 놀란 경기도교육청은 관내 초, 중, 고등학교에 공문을 보내 관련 도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학교별로 폐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실제 관련 도서들이 경기도 관내 도서관에서 폐기되고 빠지는 일이 발생했지만 이후 도서관 사서들과 독서운동단체의 문제 제기로 다행히 이 공문은 철회되었습니다.

문 : 국정화 교과서 논란 속에서 고비가 많았군요. 이들 논란은 종식되었지만, 현재 출판사에서 ‘국방부
불온서적’ 관련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답 : 2008년 국방부가 23종의 도서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했던 사건이 유명했습니다. 국방부는 북한 찬양, 반정부‧반미, 반자본주의라는 이유를 들어 21군데 출판사의 23종 도서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해 군내 반입을 금지했는데, 이것이 한겨레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사회적 파문을 불러왔었죠. 결국 해당 도서를 펴낸 출판사 중 11군데 출판사와 11명의 저자가 2008년 10월 국방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며 법적 대응에 나섰습니다.
우리 출판사에서는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정태인, 하종강, 이임하 저)가 불온서적 리스트에 들어있었고 소송에 참여했습니다. 이 소송은 1심과 2심에서 “국방부장관의 불온서적 지정이 헌법상의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패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1, 2심까지 패소한 후 4군데의 출판사가 상고를 포기해 대법원까지 상고한 출판사는 이제 7군데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저자 한 분이 돌아가셔서 10명의 저자가 상고한 상태입니다. 지난해 대법원에서는 원심법원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이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서울고등법원으로 사건을 환송했습니다. 기나긴 법정 싸움이 여전히진행 중입니다.

 

문 : 2008년의 불온서적 재판이 여태껏 종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책을 내
고 계시고 출판사는 안정적으로 운영하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습니까.

답 : 같은 지향점을 가진 분들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작업하여 오래도록 사랑받는 책을 제작하고 싶습니다. <철수와영희>에서 책 출간 아이템을 정하고 책을 만드는 과정은 끊임없이 편집자가 스스로를 믿지 않는 과정입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야 한다는 것을 책을 만드는 과정마다 배우게 됩니다. 신인 저자들을 발굴해 여러가지 기획을 하는 과정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10대와 통하는 성과 사랑>(노을이 저)과 <10대와 통하는 음식이야기>(박성규 저)는 신인 작가인 부부의 책입니다. 노을이 씨가 먼저 쓰시고 반응이 좋아 남편분인 박성규 씨께도 집필을 부탁드려 다음 책이 나오는 데 4년 걸렸습니다. 신인 저자들은 느리더라도 부분 부분을 주의 깊게 제작합니다. 이런 책들을 더 많이 내고 싶어요.
처음 출판사를 차렸을 때 10년 이상 가는 책을 2, 3권이라도 건지는 게 소망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소망이 몇 배 이상 이루어졌어요. 모두 <철수와영희>를 성원해준 독자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펴내는 책들도 10년 이상 갈 수 있도록 더 새롭고 참신한 기획으로 책을 펴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희 출판사 책을 믿고 격려해주시는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화, 2019/10/29-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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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1 ]

철도순직자조혼비, 조선철도 1천리 돌파가 남긴 기념물
해마다 용산철도공원에서 벌어진 철도순직자조혼제의 풍경

이순우 책임연구원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주도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편찬한 <신자전(新字典) >(1915)의 말미를 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뜻이 완전히 색달라졌거나 새로 창안되어 일본 등지에서 흘러들어온 여러 한자어들을 따로 묶어 수록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달러(dollar)를 불(弗)로 쓴다거나 센트(cent)를 선(仙)으로 표기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또한 서양식 미터법의 도입에 따라 미터(m)는 미(米)로, 그램(g)은 와(瓦) 또는 극(克)으로, 리터(ℓ)는 입(立)으로 사용하는 방식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흥미로운 것은 가령 천(粁)과 같은 글자인데, 미터(米)가 천(千)개 모여 있는 모양이므로 이는 곧 ‘킬로미터’를 뜻한다. 마찬가지로 천(瓩)이라는 글자 역시 그램(瓦)이 천(千)개이므로 ‘킬로그램’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야드 파운드법에 따른 한자어에도 재미있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는 촌(寸, 치)이나 척(尺, 자)과 같은 재래식 단위표기의 개념을 결합 활용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는데, 예를들어 촌(吋)은 인치(inch)이며, 척(呎)은 피트(feet)이며, 마(碼)는 야드(yard)이며, 리(哩)는 마일(mile)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전적으로 영국(英國)에서 건너온 단위이므로 대개 촌(吋)은 영촌(英寸)이라 하고, 척(呎)과 리(哩)는 각각 영척(英尺)과 영리(英里)라고 적어도 상관이 없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야드 파운드법에 따른 한자식 표기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영역의 하나가 바로 철도 관련 분야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철도라고 하면 종주국이라고 하는 영국의 영향이 월등히 큰 측면이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유달리 미터법보다는 야드 파운드법이 선호되는 경향이 우세했다. 따라서 정거장 사이의 거리라든가 철도선로의 총연장은 몇 킬로미터가 아니라 몇 마일로 기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15년 7월 23일자의 제1면 상단에는 ‘조선철도 일천리 개통기념(朝鮮鐵道 一千哩 開通記念) 철도대경주(鐵道大競走)’ 행사를 예고하는 안내 문안이 큼직하게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1천 리’는 ‘1천 마일’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는 곧 ‘1,609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에 해당하는 셈이다. 경술국치 이후 호남선(湖南線, 1914년 1월)과 경원선(京元線, 1914년 8월)이 잇따라 개통된 데에 이어 1914년 10월부터 착공한 함경선(咸鏡線)의 원산 문천 구간 12.5마일이 1915년 8월 1일에 부분 개통됨에 따라 조선총독부 철도국 소관의 철도영업이정(鐵道營業哩程)은 마침내 1,000마일을 돌파하여 총누계 1,006마일을 상회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는 대개 산업의 개발과 문화의 보급이 교통운수의 진보에 의지하는 바가 크고, 특히 지방에서는 교통의 발달이 개진(開進) 방법의 최대요건이라 일컬어진다는 뜻에 따라 철도영업거리가 1천 마일을 돌파한 것에 대해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종관선(朝鮮縱貫線)은 부산의 해륙연락설비와 압록강의 대가교(大架橋)를 통해 유라시아 대교통로 간선철도(歐亞 大交通路 幹線鐵道)의 일부로서 지대한 가치를 지닌다는 해석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의 이면에는 “조선의 재력(財力)과 부력(富力)의 정도에 비하면 1천 마일의 철도를 가진 것 자체가 조선통치 5년간의 치적에 있어서 가히 자랑거리의 하나가 됨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자화자찬식의 인식을 깔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큰 경사이니만큼 때마침 총독정치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景福宮)에서 거행되는 시정오년기념(始政五年記念)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에 맞춰 성대한 축하회와 더불어 기념조형물을 건립하려는 계획이 진즉부터 추진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에 따라 한창 공진회가 진행중이던 1915년 10월 3일에는 일본 황족 칸인노미야(閑院宮)와 이른바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 순종)’, 그리고 데라우치 조선총독을 비롯하여 야마가타 정무총감 등 총독부 고위관리들이 일제히 참석한 가운데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철도 1천리 기념축하식이 거행되고, 경회루에서는 축하연회가 열려 성황을 이루었다. 이튿날인 10월 4일 오후 2시에는 철도국 소관 용산철도정원(龍山鐵道庭園, 나중의 용산철도공원)에 건립된 조혼비(弔魂碑) 앞에서 제막식을 겸해 철도순직자조혼제(鐵道殉職者弔魂祭)가 열렸고, 곧이어 이웃하는 철도구락부(鐵道俱樂部)로 자리를 옮겨 국원공적표창식(局員功績表彰式)이 진행되었다.

이때 제막된 ‘조혼비’는 추풍령(秋風嶺)에서 채석한 화강암으로 제작되어 총 높이가 41.6 척(尺; 12.6미터)에 달했으며, 비면의 글씨는 데라우치 총독이 쓴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여기에는 총독부 철도국 장관 오야 곤페이(大屋權平, 1862~1924)가 지은 비문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비석의 앞면은 조선총독 데라우치 백작의 휘호이다. 조선철도는 경인선으로 효시를 삼는다. 이윽고 경부철도의 부설계획이 있었는데, 이때 일로(日露, 일본과 러시아)의 국교(國交)가 장차 위태로워지려 하매 우리 정부(일본정부)는 곧 보조 공비를 내어 이를 서둘러 완성하려했다. 오래지 않아 간과(干戈, 방패와 창)가 충돌하여 향도(餉道, 군량을 나르는길)가 긴급을 요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정부는 다시 육군으로 하여금 경의, 마산 양 철도의 속성을 서둘러 동사자(董事者)는 밤낮으로 병마(兵馬)를 바삐 분주하게 한 사이에 3선은 모두 완성되었다. 평화극복 후에 여러 선로는 국유(國有)로 귀속되고 통감부를 거쳐 총독부 관리로 옮겨졌다. 기설선로가 개수되었고, 압록강 갑교(閘橋)가 가설됨으로써 유라시아대륙과 연락이 되고 국제철도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평남, 호남, 경원 3선로가 완성되고 다시 함경선의 기공으로 나아갔다. 이 사이에 봉공순직(奉公殉職)한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자신을 돌보지 않은 절개를 어찌 백전무공(百戰武功)이라 하지 않으리. 이에 철도 일천리의 가신(佳辰, 경사)을 맞이하여 그 영혼을 위로하고자 비석을 세우고 동도지은(同道之恩)을 오래도록 기록하노라.
대정 4년(1915년) 10월 조선총독부철도국장관 공학박사 오야 곤페이 짓고 쓰다.

 

이로부터 해마다 10월 4일에는 이곳에서 철도종사자로서 철도건설이나 유지보수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운수업무에 종사하다가 순직한 이들에 대한 조혼위령제가 꼬박꼬박 거행되는 풍경이 펼쳐졌다. 다만, 1937년에 총독부 철도국이 경인철도 시절에 노량진 제물포 구간을 처음 운행한 날인 9월 18일을 택하여 ‘철도기념일(鐵道記念日)’을 새로 제정한 것에 영향을 받아 1940년 이후로는 바로 이 날짜에 조혼제가 열리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남아 있는 자료의 한계로 해마다 증가하는 철도순직자의 추이를 따로 집계할 수는 없었으나, 최소한 1940년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그 숫자가 현저하게 증가하는 현상만큼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32년에 누적 순직자는 2,790명(전년대비 +146명)이었던 것이 1939년에는 4,137명(+296명)으로, 다시 1943년에는 조혼제의 합사자(合祀者)가 6,132명(+593명)으로 급증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절대 규모면에서 1915년 최초의 조혼제 당시 철도순직자의 총수가 635명이었다는 점과도 크게 대비가 된다. 이와 같은 시기에 조선경찰협회와 조선소방협회의 주관으로 해마다 경복궁 근정전 용상에
제단을 설치하고 행사를 치른 순직경찰관 경방직원초혼제(警防職員招魂祭)의 경우, 1944년 10월 현재 순직경찰관이 403명에 순직소방수가 55명으로 이를 모두 합쳐도 458명 정도의 규모였다. 이러한 사실과 비교하면, 철도순직자의 규모가 압도적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실감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곳 조혼비가 자리한 용산철도공원 일대(지금의 ‘한강로 3가 65번지’ 철우아파트및 용산세무서가 자리한 위치)는 야구대회나 자전거경주 등 여러 가지 체육행사가 벌어진 공간이라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곳에서는 심지어 풀장이 마련되어 이곳에서 수영대회가 열리거나 근처의 연못에서 아이스하키 대회가 거행된 시절도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우선 <동아일보> 1930년 4월 12일자에 연재된 「10주년 기념 조선야구사(朝鮮野球史), (10) 조선 최초의 야구대회」 제하의 기사를 보면, 1915년 6월 13일에 조선공론사(朝鮮公論社)가 전조선야구대회(全朝鮮野球大會)를 최초로 이곳 용산철도공원, 속칭 ‘구(舊) 그라운드’에서 개최하였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이때 참가단체로는 철도구락부청년단, 체신구락부, 조선은행군, 경성중학, 경성실업구락부군, 철도구락부소년단 등 여섯 팀 이외에 조선인 단체로 오성친목회군(五星親睦會軍)이 유일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이곳은 용산 병영지의 인접지역에 자리한 탓에 이곳에 일본군 병력이 집결한 흔적도 곧잘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16년 4월 15일자에는 신설되는 제19사단 병력과 종전의 조선주차 제9사단 병력이 교대되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환송 및 환영을 위한 대원유회(大園遊會)가 용산철도공원에서 펼쳐질 예정이라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1930년 10월에 사단대항연습(師團對抗演習)이란 대규모 군사훈련이 거행될 당시에는 이 일대에서 고사포대(高射砲隊)가 진지를 펼친 한편 훈련참가부대의 강평회(講評會)와 야연(野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해방 이후 시기에 이르러 일제가 용산철도공원에 조성했던 철도순직자조혼비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에 별도의 순직비가 조성되고 순직철도종사원에 대한 합동추도식이 해마다 재연된 흔적이 완연히 포착된다. 이와 관련하여 <경향신문> 1955년 9월 18일자에 수록된 「합동위령제 엄수, 철도사고 순직자」 제하의 기사는 어떠한 연유로 철도순직자에 대한 위령제가 재개된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교통부에서는 16일 오후 1시부터 용산에 있는 동부(同部) 후정에서 제3차(회) 순직자합동위령제(殉職者合同慰靈祭)를 거행하였다. 그런데 금번 위령제는 (단기) 84년(1951년) 9월 1일 이래 철도운수사업에 종사하다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141주(柱)의 영령을 추도하기 위한 것으로 위령제가 끝난 후 유가족들에게는 광목(廣木) 반 통과 기타 물품이 증정되었으며, 특히 동 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상경한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시내 극장에 안내하고 이들에게 위안의 하루를 보내게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교통부(交通部)의 후정(後庭)이라고 하는 곳은 ‘한강로 3가 63번지 구역’에 자리한 교통고등학교 구역을 가리킨다. 1953년 7월 부산에 피난중이던 정부가 환도(還都)할 적에 오갈 데가 없어진 교통부가 용산의 교통학교 교재전시장(敎材展示場) 용도로 사용하던 건물을 새로운 청사로 삼아 터를 잡았고, 그 후 1963년 9월 1일에는 철도청(鐵道廳)이 발족하면서 교통부 청사를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연유로 철도순직자위령제가 벌어지는 공간은 시기에 따라 교통부 후정이나 철도청 뒷마당으로 표기되었고, 또 어떤 때는 순직비의 소재지가 철도고등학교 교정(校庭)이라거나 교통공무원교육원 뒤뜰로 표기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이라는 혼란기가 실제로 다수의 철도순직자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촉매제가 되어 일제의 유습(遺習)이 분명했던 철도순직자 조혼제의 관행은 그 유래를 따질 겨를도 없이 불과 7, 8년 사이에 고스란히 부활하는 상황이 초래되고 말았던 것이다.

수, 2019/10/30-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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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특별전 개막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기억을 둘러싼 투쟁-친일인명사전 발간 그후 10년”을 개막했다. 2019년 식민지역사박물관의 네 번째 기획전이다. 임종국 선생 서거 30주기와 맞물려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설립된 민족문제연구소가 시민들과 함께 싸워 온 친일청산운동의 발자취를 전시회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회는 크게 6부로 구성되었다. 1부 ‘시민의 힘으로 만든 과거청산의 기록, 친일인명사전’은 사전 발간까지의 경과와 국가 차원의 친일청산을 이끌어낸 의미를 되짚었다. 2부 ‘상식과 정의가 된 친일청산’에서는 친일파의 서훈 취소, 국립묘지 친일파 묘 이장 추진 등 국가에 책임을 묻는 질문과 친일파 기념사업‧기념물 중단을 위한 시민들의 역사운동이 전국에서 어떻게 펼
쳐져 왔는지를 살폈다. 3부 ‘친일파는 살아있다’는 친일파의 변명, 이어지고 있는 망언과 궤변의 계보와 참회록을 비교해서 읽을 수 있도록 꾸몄다. 그 가운데 일제 고등경찰의 고문기술의 계보자, 일본군의 의병학살로부터 비롯된 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계보도 함께 살폈다. 4부 ‘시민 박기서는 왜 살인범이 되었나’에서는 1990년대 전반 프랑스와 한국 사회에 뜨거운 논란을 던졌
던 ‘나치협력자 르네 부스케 살해사건’과 ‘백범 암살범 안두희 살해사건’을 다루었다. 사법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현실에서 시민이 살해범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과거청산의 고통스런 역사를 되짚었다. 5부 ‘친일청산의 파수꾼들’에
서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우리 사회에서 친일청산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4명의 주인공의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다. 6부 ‘친일청산, 시민의 손으로 기록한다’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후원회원들과 함께 만들어 온 친일청산의 역
사를 살펴 볼 아카이브가 전시되어 있다. 지난 28년간 수많은 ‘임종국들’이 걸어온 발자취가 금기를 깨고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게 한 오늘 우리를 만나게 해 준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특별히 기증된 이윤엽 작가의 임종국 선생 판화도 전시되었다. 특별코너로 보성여고 학생들이 직접 기획·참여한 ‘우리 학교 속 일제 잔재’라는 특별전시는 많은 관람객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 10년이 지났지만 ‘기억을 둘러싼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 전시가 <친일인명사전> 발간 10년을 돌아보는 한편, 진실한 역사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 김승은 학예실장

금, 2019/11/29-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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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행사

11월 9일 임종국 선생 30주기를 맞아 천안에서 회원들과 시민, 충남지역 학생들이 모여 임종국 선생 추모행사가 진행되었다. 선생의 흉상이 세워진 천안 신부공원 답사를 시작으로 천안공원묘원에서 추모식을 거행하고, 선생이 마지막 여생을 보낸 요산재에서 안내 이정표를 세우는 행사를 거행했으며 저녁 6시 천안중앙고등학교에서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의 밤’ 행사를 끝으로 전체 일정을 마쳤다. 이번 추모행사는 민족문제연구소·임종국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충남지부·천안지회·아산지회·천안역사문화연구회가 주관, 충남교육청과 충남역사교사모임이 후원하였다. 본부에서는 박수현 사무처장, 방학진 기획실장, 임무성 교육위원, 박광종, 이순우, 권시용, 조한성 선임연
구원, 손기순, 신다희, 국세현, 류감석, 김무성이 참여했고, 지부에서는 이민우 운영위원장, 권희용 충남지부장, 최기섭 천안지회장, 박해룡 대전지부장, 독립운동가 동암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선생,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장을 비롯한 회원 40명이 참가하였다.
천안공원묘원에서의 추모식에서는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참석해 추모사를 하고, 이민우 운영위원장을 필두로 전 회원이 참배하며 임종국 선생의 정신을 기렸다. 임종국 선생 유족 대표로 선생의 여동생 임경화 여사와 사위인 조원희 님이 참석하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추모의 밤 행사에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김지철 충남교육감, 윤일규 국회의원, 홍성표 아산시의원이 참석했다. 또 충남역사답사에 참여한 충남지역 고등학생 100여 명이 참석해 임종국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이 행사에는 고 노동은 교수의 아들 노관우 씨가 중심이 된 밴드가 판소리 심청가와 〈항일음악 330곡집〉에 수록된 ‘새야새야파랑새야’
, ‘대한혼가’, ‘광복군 아리랑’을 불러 추모의 뜻을 더했다.

• 김무성 회원사업부팀장

금, 2019/11/29-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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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생을 바쳐 기록한 1만2천 장의 카드…우리는 그에게 빚을 졌다
– 임종국 선생 30주기, 그 뜻에 가닿으려면

최우현 서울북부지부 회원

 

 

우리는 먼저 떠난 고인(故人)들을 기리고 추모한다. 떠난 이를 향한 그리움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의 생애를 회고해보는 것이다. 가끔씩은 고인이 떠난 시점을 기점으로 시간사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1주기, 10주기, 30주기… 이처럼 말이다. 이런 경우 그만큼 고인이 관철한 삶이 강렬했거나, 사상과 행적을 기념할 필요가 높았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지난 11월 9일 천안 일원에서 열린 ‘임종국 선생’의 30주기에 특별한 추모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제 연구에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평생을 통해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의 행적을 조사했으며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다시피 골몰하여 후대 연구의 기반을 조성했다.
우리가 흔히 ‘친일파’로 알고 또 지칭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기록이 그가 작성한 1만 2천 장에 달하는 ‘친일인명카드’ 속에 담겼고, 후일 이는 〈친일인명사전〉의 뿌리가 됐다. 〈친일문학론〉(1966), 〈일제 침략과 친일파〉(1983), 〈일제하의 사상탄압〉(1985) 등 실증에 입각한 저서들도 남겼다.
특히 올해가 〈반일종족주의〉, 류석춘 교수 논란 등 친일 논란이 두드러진 한 해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임종국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되짚어보는 일은 더욱 의미가 있다. 이날 추모를 위해 모인 시민들의 행렬은 선생이 영면한 천안공원묘원과 필사의 연구를 이어나간 요산재(樂山齋)등 공간의 발자취를 따라 이어졌다.
임종국 선생은 생애 마지막 9년여 시간을 천안에서 보냈다. 건강문제도 있었거니와 친일파연구와 집필에 전념할 공간의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천안이라는 고장과 선생의 인연이 깊은 이유다. 2016년에는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조형물(흉상)도 천안 신부공원 광장에 들어섰다. 참고로 천안 신부공원에는 임종국 선생의 조형물과 더불어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과 ‘6월 민주항쟁 30주년 표석’이 함께 자리해 있다. 민족, 민주, 평화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날 80여 명에 이르는 시민, 자원봉사자,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선생의 영면지인 천안공원묘역(무학지구 철쭉 4-1)에 운집했다. 임종국 선생의 막내 누이동생인 임경화 여사를 비롯해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차영조 독립유공자 유족회 부회장(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 외아들),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장 등 각계, 지역의 인사들도 자리했다.
30주기를 맞이하여 현장에서는 임종국 선생의 육성이 담겨있는 인터뷰 녹음본이 공개되기도 했다. 해당 녹음본은 1988년 CBS 라디오에 출연한 임종국 선생과 임헌영 소장(당시 문학평론가)의 대담을 담은 것이다. 해당 녹음본 속의 임종국 선생은 당시 폐기종 등으로 몸이 좋지 않아 어렵게 말을 이어가면서도 친일 청산이 왜 필요한 가를 강하게 피력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의 영향이란 것은 (우리 일상에) 알게 모르게 상당 부분 파고 들어와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주체성을 완전히 마비시켜 놓은 이런 상태가 돼있거든요. ”
– CBS 라디오, 임종국 선생 인터뷰(1988년)

 

그런 한편, 임종국 선생의 막내 누이동생인 임경화 여사는 재야에서 오직 연구에만 전념하며 가난한 삶을 살았던 선생의 모습들을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실제로도 선생은 연구비가 없어 여동생에게 돈을 빌릴 정도로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다음 일정은 요산재로 이어졌다. 요산재는 선생이 천안에서 기거한 동안 집필실이자 일터(밤농사), 잠자리이자 부엌으로 역할을 한 삶의 현장이다. 이러한 고로 요산재는 우리가 흔히 아는 고상한 연구실이나 향기로운 서재와는 다른, 치열한 생존의 공간이다.
〈총독부 관보〉 35년분 2만 매 이상, 〈매일신보〉 10년 필사분 등을 연구할 정도로 정열적이었던 선생의 학열과 연구과정을 상상해보면 이곳 요산재의 공간적 의미가 더욱 각별해진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임종국 선생 연보에 따르면, 선생이 요산재에 머무른 1980년~1989년 사이 발간된 선생의 연구 저작은 〈일제침략과 친일파〉, 〈밤의 일제 침략사〉, 〈일제하의 사상탄압〉, 〈한국문학의 민중사〉 등 9권에 달한다.
그러나 지금의 요산재는 새롭게 리모델링되어 당시의 대략적인 집 형태만 남아있으며, 현 거주민 또한 임종국 선생과 관계가 없는 민간인이다. 즉, 사유지이므로 접근이나 답사는 어렵다.
다만 이날은 30주년 관계로 주최 측(민족문제연구소)과 거주자의 협의가 이루어진 상황이었음을 기사를 통해 밝힌다.
이어 천안중앙고등학교에서 열린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문화제를 마지막으로 이날의 추모식 일정은 모두 마무리됐다. 여기서도 김지철 충남 교육감, 윤일규 국회의원 등 공직인사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등 시민단체 인사들의 다양한 의견 표명이 있었지만 논점은 모두 비슷했다. 친일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이 떠난 지 30년, 그 이후 우리 주변의 친일 청산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반성해보자는 것이었다.
임종국 선생은 어찌 그토록 치열할 수 있었을까? 선생은 자신의 저서 〈친일문학론〉을 통해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내어놓고 있다. 선생은 우민화, 민족말살을 기조로 한 식민교육이 자신을 역사와 민족에 무지한 ‘천치’로 만들었음을 지적한다.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선생은 친일문제 연구에 몰입했다.

 

식민지 교육 밑에서,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을 뿐 한번 회의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이제 친일문학론을 쓰면서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 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임종국, 〈친일문학론〉(1966)

 

‘친일파’라는 말 자체를 금기시하던 당시(1965년)의 풍토는 선생의 연구를 외면했고 선생은 가난했다. 하지만 굴하지는 않았다. 그의 붓끝은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건 없건, 관료이건 문필, 예술가이건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육친(아버지 임문호)과 스승(유진오)의 친일행적까지 가리지 않고 고발했다. 선생으로서는 뼈를 깎아내는 아픔이었겠지만 그것이 친일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의 공정이고 입장이었다.

“야인이요, 백면서생으로 고독한 육십 년을 살았지만 내게 후회는 없다. 중뿔난 짓이라도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면 내 산자리가 허망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임종국 어록에서) 그 말대로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기에, 우리 후대 사람은 선생에게 모종의 빚을 지고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작지 않다.

금, 2019/11/29-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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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상 수상소감]

시대를 넘어 함께한 동지의 길

노관우 특별상 수상자 노동은 교수의 아들

먼저 이런 뜻깊은 상을 받게 되어 아들인 저를 비롯한 온 가족들과 아버지의 제자 분들의 기쁜 마음을 담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임종국 선생님이 남겨주신 소중한 발자취와 아버지께서 평생 근현대음악을 연구하시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고 알려 오시고자 했던 걸음걸음이 그 모양은 달라도 한 방향으로 나아가셨다고 직감합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함께 손을 맞잡고 걸어오셨음을 느낍니다. 또한 일본의 경제도발에 대한 작금의 국민적 분노 속에서 그동안은 없었던 특별상을 받게 되니 더욱 각별한 감회를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임종국상을 수상하신
다고 하니 많은 분들에게 그 타이밍이 절묘하다며 특별한 축하를 많이 받았습니다.
쌀쌀했던 날들을 촛불집회로 뜨겁게 녹여대던 3년 전 11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병상에서 뉴스를 보시며 하시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 촛불을 보시면서 제게 ‘촛불집회에는 가봤느냐’며 당신도 몸만 괜찮으면 가보고 싶다고 아쉬워하시던 얼굴과 목소리가 더욱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이런 뜻깊은 상을 직접 받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아버지를 대신하는 자리가 늘 조심스럽고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아버지께서는 <민족음악현단계> <민족음악론> 등을 저술하시는 한편으로 대학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시며 민족음악연구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오셨고, <노동은의 음악상자> 시리즈, <한국근대음악사> <한국음악론> 등을 통해 애국가문제, 친일음악, 뽕짝 등 우리 근대음악사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알리시는데 늘 앞장서셨습니다.
임종 직전까지도 오랜 기간 작업하셨던 <항일음악 330곡집>의 마지막 교정을 하루에 몇 시간씩 보셨고 재작년에 민족문제연구소를 통해 발간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공부하던 많은 학생들이 이제는 각계각층 여러 분야에서 전문적인 연구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계시지는 않지만 그 삶과 연구의 흔적들이 나침반이 되어 여전히 많은 후학들에게 영감을 주고 계십니다.
끝으로 아버지의 소감을 대신 전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번 가늠해볼만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제가 10살이 채 되지 않았던 1996년에 아버지께서 단재학술상을 받으셨습니다. 시상식 날 온 가족들을 데리고 가느라 저도 어린 나이에 멋지게 옷을 입고 따라갔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그 이후에도 여러 상을 타셨지만 늘 가족들에게 단재학술상을 받은 것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평생 학자로서 그 상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시며 연구에 매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임종국상도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그 어떤 상보다도 기쁘고 자랑스러워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재학술상이 아버지의 평생 연구에 영감을 주었다면 임종국상이 아버지의 평생의 연구를 인정받고 보상받는 기분이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금, 2019/11/29-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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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상 수상소감]

공영방송의 책무를 잊지 않을 것

KBS 밀정 제작팀 언론상 수상자

면구스러운 이야기부터 하자면, <밀정> 2부작이 여기저기서 좋은 평가를 잇달아 받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5분짜리 영상조차도 ‘길어서’ 시청하기 힘들다는 초고속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많은 열정을 쏟아 만든 진지한 다큐멘
터리는 그 분량에 상관없이 여전히 시청자들에게 소구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도 재확인했다고 할까요.
그러나 <임종국상>은 여타 평가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 묵직한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인가. 계속 되뇌게 됩니다.
‘과공비례’가 되지 않기 위해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상을 받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이번 상은 젊은 저널리스트들이 보여준 성취에 대한 축하임과 동시에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응원도 함께 포함된 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힘이 나고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책장에 꽂힌 <친일문학론>을 다시 꺼내보다가 임종국 선생님이 (지난해 작고한) 김윤식 선생님과 각별한 교우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거장은, 다른 거장을 알아보는 안목을 청년시절부터 갖추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열하게 살다 가신 두 분의 업적을 어떻게 한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냐마는, 어쩌면 이들은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를 탐구하는 것을 한평생 업으로 삼은 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스치듯 들었습니다.
저희들의 밀정 추적도 100주년이라는 축제기간에 걸맞지 않은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의 일단을 가감 없이 들춰내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둡고 불편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엄정함이란 ‘빛과 그늘’을 모두 직시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누군가를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어둠을 자꾸 이야기해야만 밝은 부분이 더욱 빛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조언 말씀이 저희들 마음속 출발점 같은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댓글을 읽어보면 시청자들도 이미 그렇게 총체적으로 방송의 의미를 확장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부당한 정치권력에서 벗어나 이제 다시 새롭게 출발하고 있는 KBS는, 그러나 전혀 다른 차원의 파고를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급변해버린 언론환경이 그것입니다. 그날의 뉴스가 그날 다 소비되지 못한 채 휘발되고, 장기간 공들여 기획 취재한 보도물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라지며, 유명인이나 연예인의 ‘몰락의 서사’만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그런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언론사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탐사보도 역시 새로운 방향 설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제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이번 <밀정> 2부작은, 그런 환경에 놓인 저희들에게 어떤 기본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저널리즘의 기본이란 무엇인가. 비판적 문제의식과 끈질긴 탐구를 배제한 채로는 그 어떤 탐사보도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 기본 요소 하나하나를 벽돌 쌓듯 충실히 이행할 때 시청자들은 많든 적든 분명한 호응을 보여준다는 것 말입니다. 특히 <밀정>
2부작은 장기간의 취재와 투입된 예산·인력의 스케일 측면에서 볼 때, 공영방송 KBS만이 수행할 수 있는 탐사보도였다고 감히 단언합니다.
KBS는 이런 걸 잘해야 하고, 이런 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드러낼 줄 알아야 합니다. 언론사의 난립 속에 KBS가 살아남을 수 있는 한 갈래의 길이 여기에 있다는 게 저희들 생각입니다.
내년 2020년이 되면, 아마도 100주년인 올해만큼 역사 돌아보기의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니까요. 그러나 단지 역사적 소재를 많이 다루고 안 다루고의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공동체가 응당 공유해야 할 건강한 역사의식을 현재적 맥락에서 끊임없이 환기하는 것이 공영방송의 책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임종국상>이 저희들에게 주문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 강조점이 찍혀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책무와 주문을 늘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금, 2019/11/29-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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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상 수상소감]

‘동포가 읽을 만한 역사’를 위하여

정영환 학술상 수상자

 

내가 처음으로 투옥된 것은 1930년이다. 그런데 당시 내가 알았던 조선에 대한 지식이란 실로 미미하였다. […] 그러기에 예심법정에서 조선총독정치에 대해 말해보라고 판사가 권하여도 그걸 구체적으로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나는 이건 아니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무식함이 부끄러워졌다. […] 그래서 나는 1934년 출옥과 동시에 바로 조선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였다.(김두용,<조선근대사회사화>, 향토서방, 1947년, 1쪽)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노동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에 투신한 김두용은 해방 직후에 출간한 책 첫머리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이 글을 처음 접한 것은 2002년, 제가 졸업논문을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때는 스쳐 지나간 구절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일본에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이 ‘역
사’를 갈망하게 될 동기는 이 김두용의 경우와 여전히 대동소이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체포와 투옥이란 극단적인 경험은 누구나가 겪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본인 친구나 동료들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식민지배를 변명하려는 언행에 당황하면서도 제대로 된 반론 하나 못한 경험은 이 글이 씌어져서 70년 이상이 지난 현재도 재일조선인들에게 여전히 평범한 일상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이 북돋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질문에 맞서기 위한 지식으로서의 ‘역사’. 재일조선인들이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한국 분들 눈에는 지나치게 비장하게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장할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절심함이 재일조선인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을 쓰고 싶다.
’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 한국어판 서문 첫마디를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던 것은 이런 절실함을 갖는 재일동포들이 ‘읽을 만한 책’을 쓸 것이 제 바
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003년에 대학원으로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였을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염원입니다. 제가 그려낸 역사를 ‘동포’들이 자신의 경험으로 실감할 수 있을 만한 그런 글, 즉 일본사의 ‘공백’을 메우는 역사나 ‘재일조선인문제’의 역사가 아니라 재일조선인들의 생존을 위한 고뇌의 역사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남한에 입국한 적도 없었고 제가 염두에 둔 ‘동포’는 재일동포들이었습니다. 특히 재일조선인운동에 투신하여 각지에서 ‘일꾼’으로 사업하던 ‘동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바람이었습니다. 즉 당시 제가 상상하는 ‘동포’ 개념은 일본 열도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16년이 지난 오늘, 제 책은 임경화 선생님의 노고 덕분에 번역이 되어 한국의 ‘동포’를 독자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 연구와 우리 민족사의 정립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님을 기리는 상을 수여받을 영예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적(朝鮮籍)’이라서 ‘국가안보상 위협이 될 우려가 있다’ 혹은 ‘간첩활동을 할 개연성이 높다’ 등
의 이유로 입국이 불허되는 처치에 있었던 제가 이런 영광스러운 날을 맞이한다고는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민족사의 정립’을 위해 항상 싸우시는 분들 덕분으로 이런 만남의 공간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가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이 되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만 겨우 소장 연구자의 입구에 선 저의 저작에 주목해주시고 더 많은 ‘동포’와 만날 기회를 주신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선생님들께 먼저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자 후기’에도 썼듯이 이 책의 기초가 되는 조사를 시작한 것은 2002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두 명의 재일조선인이 쓴 책에 큰 감격과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 권은 서경식 선생님의 <분단을 산다>(1997년)입니다.
‘<쟈이니치>를 넘어서’란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쟈이니치’론, 즉 재일조선인을 일본 국내의 민족적 소수자로만 보는 탈민족적인 담
론을 비판하면서도 구태의연하고 본질주의적인 민족관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민족관’을 위한 검토를 담은 책이었습니다.
비타협적이고 논쟁적인 글쓰기 스타일과 무엇보다도 재일조선인이란 존재를 협애한 일본 틀이 아니라 식민주의가 낳은 제3세계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시각에 매혹되었습니다. 서경식 선생님의 책과의 만남 없이는 이번 책의 ‘조선근현대사로서의 재일조선인사’란 기본시각도 식민주의와 분단이 낳은 폭력과 이산(離散)이란 주제에 대한 관심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한 권은 박경식 선생님의 <해방후 재일조선인운동사>(1989년)입니다. 법학부에서 헌법을 배우고 있었던 제가 재일조선인사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 이 책이 묘사한 재일조선인들의 운동사에 흥미가 끌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1980년에 일본 지바현에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조선학교를 다녔습니다. 민족교육은 저에게 우리말과 역사 그리고 조국에 대한 인식을 키워주
었고 동포사회의 ‘일군’으로 사업하는 많은 분들과의 교류는 일본의 치안당국이 묘사하는 ‘운동’상과 전혀 다른 재일조선인운동의 역동성을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단 민족교육을 통해 배운 재일조선인사는 한편에서는 교과서적인 ‘올바른 노선’의 해설이기도 하였습니다.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이 북돋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질문에 맞서기 위한
지식으로서의 ‘역사’
. 재일조선인들이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한국
분들 눈에는 지나치게 비장하게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장할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절심함이 재일조선인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경식 선생님의 책에는 새조선 건설노선이나 참정권을 포함한 일본에서의 권리 획득을 둘러싼 여러 논쟁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어 이런 올바른 노선의 해설이 아닌 고민과 논쟁, 갈등의 역사는 신선했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책들을 통해 우리 역사의 밑바닥에는 재일조선인들이 자신의 기록을 남기려고 애써온 분투가 깔려있음을 알게 되고 역사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박경식 선생님을 비롯한 초창기 재일조선인사 연구자들은 대다수가 재야의 연구자들이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야말로 온몸을 바쳐서 자료를 찾아내시어 조선인강제연행이나 간토대학살 그리고 재일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의 수많은 사실들을 발굴하였습니다. 박경식 선생님의 ????조선인강제연행의 기록????이 한일협정체결을 앞둔 1965년에 간행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런 연구는 그저 연구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사회의 일그러진 조선관을 시정한다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동반하고 있었고 또한 조국의 분단을 극복하여 통일을 이룩할 길을 역사 속에서 찾기 위한 분투의 기록이었습니다.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에 수록한 제 연구 또한 박경식 선생님을 비롯한 초창기 연구자들의 연구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가혹한 분단과 민족차별이 횡행하는 전후 일본사회 속에서 그야말로 ‘민족사 정립’을 위해 외롭게 발언과 연구를 이어오신 연구자들에게 감사의 의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원저는 2013년에 일본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일본어판 출판과 한국어판의 간행은 서문과 후기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수많은 분들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영예로운 상을 받게 되었던 것도 그간 도움을 주신 분들 덕분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감사드립니다.
특히 이번 책을 우리말로 옮겨주시고 많은 ‘동포’들과 만날 기회를 주신 임경화 선생님과 제 책 출판을 위해 힘써주신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현재 ‘해방5년사’를 이어 조선전쟁(한국전쟁)기의 재일조선인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연구성과로 이번 시상을 통해 저에게 주신 기대에 보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게 법학에서 사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진학의 길을 선택한 무모한 아들을 항상 응원해주신 어머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면서 제 수상소감을 맺겠습니다.

금, 2019/11/29-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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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민족문제연구소 군산·김제 답사기

김영희 서울 광진 회원

<반일 종족주의>라는, 직함은 허위이고 폭력이 일상화된 대표저자와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배설물로 인해 지난여름부터 심기가 불편했다. 무슨 짓을 했길래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그것도 아베의 경제 도발로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탄력을 받는 이 시기에. 무시가 상책이지 하고 모른척했지만 불편함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조모씨가 ‘구역질나는 책’이라 하든, 홍모씨가 ‘보수 우파의 상식과 어긋나는 책’이라 하든, 그런 표현은 이 책에는 과분하게 고상했다.
자기정체성을 깨닫지 못한 채 정확하지 않은 통계수치에 수상한 목적성을 가지고 접근하는 저 곡학아세파에 대해 나는 그저 한 가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지금의 이 독립된 나라에서조차 자발적으로 습득한 식민사관이 저다지도 투철한 저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었다면 과연 어떤 지경까지 친일을 했을까?’
가을 초입 그들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는데 힘써 오신 허수열 교수님이 인솔하는 군산·김제 답사가 있다는 소식을 문자로 받았을 때, 기회를 놓칠세라 당장 신청했다. 살아가면서 교통사고처럼 일상공간에서 돌발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가진 태극기부대스러운 사고들. 이에 대처할 무기가 절실했는데 그들의 논리적 오류를 학문적으로 따져볼 기회를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답사대상자로 선택받아 안내 문자가 왔을 때는 감격과 함께 뒤늦게 걱정이 시작되었다. 왜 혼자 신청했을까. 좋은 것은 혼자 보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여행만큼은 절대 혼자는 안 가던 나는 버스에 올라타기까지 용기를 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여행은 시쳇말로 ‘취저’(취향저격)였다. 죄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진지하게 학습하는 분위기여서 혼자인 것이 오히려 조용히 설명에 집중할 수 있었고 버스이동시간에 어색함을 깨기 위한 그 흔한 자기소개도 안 시켜서 숫기 없는 나로서는 매우 감사했다. 연구소에서 정성껏 준비한 간식 봉투, 물과 커피음료, 수첩과 필기구, 맛깔난 전라도 상차림의 점심과 저녁식사, 전북 민문연 회원들께서 준비해주신 김제농협 신동진쌀까지 선물로 그득히 받았다. 참가비도 없었으므로 어느 것 하나도 받기가 송구스러웠지만 20여 년 민문연 회비를 내었으니 오늘은 되받는다는 생각으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고 합리화해봐도 참으로 많이 챙겨주셨다. 받은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역시 허수열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지식의 세례였다. 이날 들은 지식들은 식민지근대화든 조국근대화든 경제대통령이든 근대화시켜준다 잘 살게 해준다는 경제적 논리를 내세워 자기욕망을 채우려는 세력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매우 유용하게 조용하면서 강한 위력을 발휘할 것들이었다.

10월 5일 토요일. 날씨는 맑았다. 사실 군산 답사라길래 군산 시내 곳곳의 적산가옥이나 항만시설을 둘러보는 것인가 하고 떠났는데, 자료집을 여는 순간 온통 논과 강줄기와 방조제만이 표시된 지도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도심으로 들어갈 일이 없을 답사라는 것을. 이동하는 중에 펼쳐지는 호남의 너른 들 자체가 오늘 답사지의 처음이고 끝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 구경 할 일도 전혀 없었다. 마지막 답사지인 김제 죽산리 일본인 하시모토의 농장 사무실과 원평천 해창갑문을 제외하고는 구경온 사람들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황량하여 별스럽고 그래서 더 전문적인 연구자들 같아 보이기도 하는 우리는 참으로 특이한 답사단원들이었다.
이 답사를 원경으로 묘사하면 밀레의 자연주의 화풍의 평화로운 그림, 근경으로 묘사하면 수확기가 되어도 내 배 채울 곡식 없는 그림의 떡과 같은 황금들판 액자틀 같았다고 할 수 있었다. 내 고향이 경상도여서 서울에서 내려갈 때마다 좌우로 산으로 턱턱 막힌 도로만 보다가 난생처음 호남고속도로를 달릴 때 너무나 경이로웠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탁 트인 지역이 있구나 산이 없는 땅이 있구나… 이렇게 광대한 들에서 허리 휘어지게 일하고 수확했는데 모조리 수탈당한다면 동학 농민 봉기뿐 아니라 더한 것도 일어날 만 했겠구나 라고 한방에 이해되던 순간이었다. 그 평야 중에서도 가장 너른 들인 김제·만경 평야는 한반도에서 지평선이 보이는 유일한 땅이라고 교수님께서 해설해주셨다. 차를 타고 늘 스쳐지나갔던 평야 중에서도 가장 너른 들 속으로 들어가 한 점이 된 하루였다. 자료집 구글 어스 사진으로 보아도 실제 내 눈으로 보아도, 넓은 만큼 물도 많이 필요했겠는데 물은 드물어 보였고 그래서 수리시설 보급이 그 어느 곳보다 절실했던 지역이었나 보다. 교수님 설명이 이 지역은 하천의 길이가 짧아서 남쪽 섬진강 수계에게 유역변경방식으로 물을 끌어오기도 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답사 경로는 동진강의 상류인 낙양취수장 낙양취입수문부터 하구쪽으로 내려가면서 동진강 하구언, 정읍천 합류지점인 만석보를 들렀다가, 벽골제 둑길을 따라 수문까지 걷고, 방조제인 하구 갑문까지 가는 코스였고 중간중간 일본인 지주들의 곡식창고와 관리소를 들렀다. 만경현이라는 이곳 지명이 붙여진 것은 신라 경덕왕 때였고 ‘경’이 중국 주나라 때부터의 면적 단위이므로 그 오래전부터도 경지면적이 아주 넓다는 뜻을 담은 지명을 붙인 것이라고 하였다.
삼국시대 아마도 벼농사를 시작했을 시기부터 있었던 벽골제와 고려, 조선 시대의 수리시설 보강 위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점차 근대적 토목공사로 현대화되어왔을 수리시설은 현재 수문이나 농업용수 공급이 과연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게 가는 곳곳 물이 하천 바닥에만 겨우 수맥을 이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래서인지, 풍요로워야 할 이 가장 넓은 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더 빈곤해보였고, 산업화시기를 거치며 농촌은 더 망가졌고, 일제 수탈의 시기나 그 전 전근대 왕조시대 수탈을 생각해보아도 이 광활한 평야의 경작자들이 그 어느 시절 언제 한번 풍요로운 적이 있었을까 싶어서 종일 들판을 걸으면서 이 좋은 가을날씨와 평화로움을 마냥 만끽하기에는 계속해서 처연한 기분이 함께 찾아왔다. 
역사시간에 강조점을 찍으며 배운 만석보는 기대하고 갔으나 터에 기념비 하나 남겨놓은 것 빼고는 흔적도 영역도 안내문도 보이지 않아서 아쉬움이 컸다. 관광자원개발까지는 아니라도 안내문이라도 상세히, 혹은 고부봉기를 자세히 학습할 수 있는 박물관이 세워지면 이곳이 더 의미있게 기억되고 일제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어 사라져간 동학과 민중의 역사에 대해서 길이 기억될텐데. 친일파의 흔적들은 역겹게도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 뒤 등 곳곳의 비석에 남았는데 정작 이름 없이 사라진 중요한 민중들의 역사야말로 우리 손으로 더 영광스럽게 남겨주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 답사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식민지근대화론 반박이었고 교수님은 그들의 허술한 근저를 보여주셨다. 1990년대 초 일본군 ‘위안부’의 대두로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 일본 내의 반성의 목소리에 당황한 일본 극우는 후쇼사의 교과서를 채택시켰고 세력을 강화하여 지금의 아베 정부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런 일본 우파의 목소리를 국내에서 메아리로 화답하던 뉴라이트도 이들과 함께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서 목소리를 높이고 일본보다 10년 늦게 교학사교과서 선정과 국정교과서 제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의 우파 교학사교과서는 전국 채택률 제로 신화를 이룩해냈으며 국정교과서 제작 지시를 내린 자를 축출하는 신화를 만들어낸 주체는 바로 자랑스러운 이 나라 국민들이다.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남은 저들의 마지막 보루가 낙성대경제연구소이며 그 마지막 토사물이 ????반일 종족주의????인 것으로 보인다. 자기 민족인데 자기 민족을 종족이라고 부족 수준으로 폄하하는 이 국적 불명의 연구자 집단이 왜 한국을 터전으로 하여 사는지가 가장 이해 안 되는 지점이다. 터전을 아예 일본으로 옮겨서 활약하면 더 각광받을 텐데.
답사 자료집을 설명해주시면서 교수님은 1910년대 큰 수치로 성장하던 경제성장률을 저들이 우량품종의 보급 덕분이라고 주장하며 1917년 지도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수님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것은 1910년대도 아닌 1921년의 지도였고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던 시기의 성장률은 오히려 둔화되었던 것으로 설명해주셨다. 이 지역은 그들이 얘기하듯 일본 덕에 옥토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수리시설 보강으로 이 시기에 이미 옥토였고, 오히려 수탈에 의해 황폐해진 그 아픈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설명을 들었다. 특히 발굴해서 복원해놓은 내륙 깊숙한 벽골제의 수문 위치를 보니 이영훈이 말하는 대로라면 벽골제가 방조제였고 그래서 이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으므로 일제에 의해 개발되기 전 황량한 갯논이었다는 주장이 말할 필요도 없는 엉터리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저들이 이 들에 단 한번이라도 와봤다면 도저히 꺼낼 수 없는 주장이었다. 이날 답사는 식민지근대화론의 거짓을 눈으로 명확하게 보게 해주었다.
김제군이나 옥구군, 익산군처럼 일본인 소유지 중 면적이 넓은 곳만 하천을 개발하고 있었던 것도 교수님의 자료들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개발은 애초부터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강탈해간 토지로 부와 명예를 누린 것은 일본 상인과 재벌들이었다. 구마모토 리헤이의 여름 별장은 백두산에서 운반해온 낙엽송으로 외벽을 두르고 마루는 일본에서 수입한 삼나무를 깔고 지붕은 자연석 청판석을 덮은 호사스런 건축물로 공사비가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했다고 하였다. 그의 농장에서 수확한 쌀을 보관하는 창고는 지금도 그 자리에 그 규모로 신축되어-지역에서 무슨 용도로 최근에 왜 신축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2층 높이로 우람하게 서있는데 그 높은 건물을 가득 채웠을 쌀이 모두 일본으로 반출되어 나갔다. 이들 일본인 지주들은 그 부를 가지고 또다시 조선의 문화재들까지 수집하고 반출하는데 썼다고 하니 이중으로 울화통이 터질 일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통계는 위험하다. 통계는 특히 과거의 통계는 정확하지도 않을 뿐더러 작성자의 의도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위험한 통계는 해석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한 번 더 왜곡된다. 교수님은 1910~1918년 토지조사사업 완료 전까지는 조선의 토지와 생산량에 대해 정확한 파악이 어려웠고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후에도 과거의 통계를 일제 스스로 두 번이나 전면 수정하는 등 총독부 스스로도 못 믿을 통계이었음을 확인시켜주었다고 했다. 저 친일학자들은 그 엉터리 통계에 기반하여 모래탑을 쌓아올린다. 식민지근대화 논리는 이 위험한 숫자가 아니라 상식으로 풀어야 한다. 일본이 우리 국민 잘 살게 해주려고 개발을 시작했는가? 수치 몇 개로 제국주의 통치를 합리화할 수 없다. 키플링이 백인의 짐이라고 하며 지배했던 아프리카에 영국인들이 과연 흑인을 잘 살게 해주려고 들어갔던가, 그리고 그들은 이후로 실제로 잘 살게 되었는가에 Yes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친일학자의 식민지근대화론도 같은 맥락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총독부는 진정 조선인들을 위해 개발을 시작했는가? 그 개발로 조선인들은 모두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가?
우리의 보물인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과 허수열 교수의 저서 <개발 없는 개발>을 찾아 읽는 것으로 이날의 끝도 없이 넓은 광야 답사를 마무리 짓는다.

금, 2019/11/29-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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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2]

통칭호(通稱號), 침략군대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암호명
조선주둔 일본군은 어떠한 통칭호를 사용했을까?

이순우 책임연구원

보병 군조 후지모토 쇼조가 중일전쟁 당시에 소지했던 ‘지나사변출동경력’ 표기 일장기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소속부대가 ‘지휘관의 성’을 따서 명명하는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식민지역사박물관의 2층 진열공간에는 구겨지고 빛바랜 한 장의 일장기(日章旗)가 전시유물로 걸려 있다. 가운데 히노마루(日の丸, 붉은 원) 안에는 기(祈)라고 하였고, 호신용 부적과 같은 의미로 네 귀퉁이에 한 글자씩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쓴 이 일장기에는 ‘지나사변출동경력(支那事變出動經歷)’이라고하여 참전일지와 같은 내역이 순서대로 빼곡히 정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이 깃발의 주인인 보병군조(步兵軍曹 : 지금의 중사에 해당하는 계급) 후지모토 쇼조(藤元正三)가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터지자 1937년 8월초에 일본 미야자키현 미야코노죠시(宮崎縣 都城市 : 제23연대 부대주둔지)를 출발하여 부산과 안동현, 산해관, 북평 등지를 거치고 마침내 그해 12월초 남경(南京)을 공략하고 입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죽 나열되어 있다. 그 이후 시기에는 1938년 말에 이르기까지 그가 경비 또는 전투에 참여했던 각종 작전지역에 관한 내역들이 길게 이어진다.
그런데 이 깃발의 가장자리에는 그의 소속이 특이하게도 ‘稻葉部隊(舊谷部隊) 佐野部隊(岡本「鎭」部隊) 松崎隊(河喜多隊) 肥後隊’라 고 표시되어 있다. 알기 쉽게 몇 사단, 몇 연대, 몇 대대 …… 이런 식으로 소속편제의 고유명칭을 직접 표시하지 않고 지휘관의 명자(名字, 성)만 따서 무슨무슨 부대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까닭일까?
이는 전쟁상황에서 적(敵)에게 자신들의 부대에 관한 세부사항이 노출되지 않도록 방첩(防諜) 차원에서 고안된 방편이라고 알려진다. 대개는 성만 따오는 것이 원칙이지만, 동일한 성을 가진 지휘관이 복수로 존재한다면 그 다음의 이름을 더 넣어 이를 구분하기도 한다. 가령 위에서 ‘岡本「鎭」’이라고 한 것은 오카모토 연대장이 두 사람이었던 탓에, 원래의 이름 오카모토 시즈오미(岡本鎭臣)에서 한 글자를 더 취하여 이를 표시한 경우에 해당한다.
아무튼 위의 소속부대를 지휘관의 이름을 통해 판별해보면, ‘이나바 사단장(중장; 전임 타니 사단장) ― 사노 연대장(대좌; 전임 오카모토 연대장) ― 마츠자키 대대장(소좌; 전임 카와키타 대대장) ― 히고 중대장(중위)’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를 다시 일반편제의 순서로 전환하면 후지모토 군조의 소속부대는 ‘보병 제6사단 제23연대 제3대대 제9중대’로 정리된다.
일반적으로 전쟁상황에 돌입하면 부대 이동, 병력규모, 병과(兵科) 및 병종(兵種), 작전내용, 전투결과 등에 대한 세밀한 사항이 드러나지 않도록 이를 ‘모부대(某部隊)’라고 표현하거나, 특히 숫자와 관련된 정보는 〇〇〇과 같이 공란으로 처리하여 공표하는 것은 흔히 있어 왔던 일이다. 예를 들어 만주사변(滿洲事變) 시절의 자료를 찾아보면, ‘나남(羅南) 보병 〇〇연대’라든가 ‘〇〇부대’, 그리고 ‘무로(室) 〇단장(團長) 이하 용산부대’, ‘카무라(嘉村) 〇단장(團長) 이하 용산부대주력(龍山部隊主力)’, ‘제〇〇〇단사령부’, ‘야포(野砲) 〇〇연대’라든가 하는 식의 표기방법이 공공연하게 사용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무로 〇단장’은 무로 켄지(室兼次, 육군중장) 보병 제20사단장(용산 주둔)을, ‘카무라 〇단장’은 카무라 타츠지로(嘉村達次郞, 육군소장) 보병 제39여단장(평양 주둔) 을 가리킨다.

 

<매일신보> 1932년 4월 19일자에 수록된 만주 출동 관련 기사에는 ‘나남 보병’이라는 표시는 드러나 있지만 나머지 몇 연대라거나 파견병력수에 관한 부분만큼은 〇〇 표시로 공란 처리되어 있다.

 

<매일신보> 1939년 11월 16일자에 수록된 전사자 명단은 소속부대의 고유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부대로만 소개되어 있다. 확인해본즉, 무로야부대(谷部隊)는 보병 제78연대[연대장 무로야 츄이치(室谷忠一)]이고, 키고시부대(木越部隊)는 보병 제79연대[연대장 키고시 지로(木越二郞)]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〇단장’은 이것이 여단장인지 아니면 사단장인지 하는 정도만 알 수 없도록 가리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또한 부대의 소재지에 나남이라든가 용산이라든가 하는것이 그대로 노출된 것을 보면 구태여 감추고자 하는 군사정보의 대상이 제한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기방식이란 것도 신문지상과 같은 언론매체에 수록되는 보도내용에 대한 통제의 결과였을 뿐이지 부대의 고유명칭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부대의 명칭을 인위적으로 감춰 부르는 방식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중일전쟁의 전개과정과 맞물려 있는 1937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이때 일본 육군성(陸軍省)에서는 육밀(陸密) 제1014호 「동원부대 등(動員部隊 等)의 칭호명(稱號名)에 관(關)한 건(件)」을 제정하였는데, “병력 등을 비닉(秘匿)하는 것”을 목적으로 “외지부대(外地部隊)는 부대장의 성(姓)을 붙여 칭호하도록” 정하였던 것이다. 다만, 이 당시에 ‘내지부대(內地部隊; 일본 본토에 주둔하는 부대)’의 경우에는 이 방식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서 보았던 후지모토 쇼조의 일장기에 표시된 소속부대는 바로 이러한 조치에 따랐던 것이고, 1937년이라는 시점도 고스란히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지휘관의 이름으로 부대명칭을 정하는 방식은 그 나름의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지휘관이 전보(轉補)되거나 전사(戰死)하게 되면 그때마다 부대명의 변경을 동반하게 된다는 부분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는 동시에 부대명칭의 비닉성(秘匿性)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새롭게 고안한 것이 ‘통칭호(通稱號)’ 방식이다.
이에 관한 규정은 1940년 9월 10일에 제정된 육밀(陸密) 제1533호 「통칭호 사용에 관한건」을 통해 공식화하였다. 여기에는 “「소화 16년도 육군동원계획령 세칙」으로써 동원관리관(動員管理官)인 군사령관, 사단장(내지, 조선, 대만 및 만주부대) 등에게 병단문자부(兵團文字符)와 통칭번호(通稱番號)를 배당하고, 이를 동원계획된 부대에 통칭번호로 부여하도록 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병단’이라고 하는 것은 통상 사단과 여단에 해당하는 편제단위를 일컫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조선주둔 제19사단은 ‘虎(토라)’, 제20사단은 ‘朝(아사)’라는 문자부호를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가령 제19사단 예하부대인 보병 제75연대(회령)는 ‘虎8505’, 보병 제76연대(나남)는 ‘虎8506’, 그리고 제20사단 예하부대인 보병 제78연대(용산)는 ‘朝2053’, 보병 제79연대(용산)는 ‘朝2054’와 같은 방식으로 통칭호를 표시하였다. 그 후 치열한 전쟁상황이 지속됨에 따라 ‘통칭호’의 사용에 관해 이를 강화하는 기밀명령이 거듭 하달되면서 여러 차례 관련 내용이 개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일제의 패망 직전인 1945
년 4월 20일에는 「육군부대 전시통칭호규정」에 따라 기존의 통칭호 관련 규정이 전면 개편 되었고, 이 당시 조선군사령부를 대체하여 1945년 2월 6일에 창설된 ‘제17방면군사령부’의 경우 ‘築(키즈쿠)’라는 통칭호가 채택되었다.

 

‘조선 제23부대’라는 표기가 또렷이 새겨져 있는 <지나사변기념사진첩>(1940년 11월 발행)의 표지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중국으로 출정하는 ‘조선 제23부대’ 병력이 군기(욱일기)를 앞세우고 용산병영을 떠나는 모습이  <지나사변기념사진첩>에 수록되어 있다. 정문 기둥에 걸린 부대 간판은 ‘검열관계’로 글자가 뭉개져 있으나, 사진엽서 또는 다른 사진첩에 포착된 장면을 통해 이곳이 ‘보병 제79연대’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조선 제23부대라는 주소지 표기가 들어 있는 나카노요시타케(中野義雄)의 개인엽서이다. ‘18(1943).6.5’ 일부인 아래 ‘점검제(點檢濟)’라는 검열확인도장이 함께찍혀 있다.

 

일본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타의 소장자료인 <(소화 20년 7월 10일 현재) 제17방면군 조선군관구 제부대 통칭호 소재지 일람표>의 표지이다.

 

조선군관구(朝鮮軍管區) 주요 부대의 소재지 및 통칭호 일람 (1945년 7월 10일 현재)

그런데 1940년 9월 10일자에 하달된 「통칭호 사용에 관한 건」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매일신보> 1940년 8월 13일자를 보면 “전몰용사 유족에게 금치훈장 수여식을 ‘용산 제23부대’에서 거행한다”는 소식이 수록된 것이 눈에 띈다. 이러한 점에 비춰보면 조선지역에 주둔하던 일본군대에 대해 ‘숫자부대명칭’을 사용하는 별도의 ‘통칭호’ 관련 규정이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구체적인 근거규정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확인되질 않는다.
그리고 1940년 11월 14일에 하달된 육만기밀(陸滿機密) 제13호 「재만 제부대(在滿 諸部隊) 통칭호 규정」에 따라 만주 주둔 부대의 경우 ‘병단문자부’를 일괄 ‘만주(滿洲)’로 표기하도록 변경한 바 있다. 잔혹한 생체실험으로 악명이 높은 ‘관동군방역급수부본부(關東軍防疫給水部本部)’를 일컬어 흔히 ‘만주 제731부대’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표현인 셈이다.
해를 넘겨 1941년 7월 25일 육군대신 도죠 히데키(陸軍大臣 東條英機)의 명의로 제정된 육지밀(陸支密) 제2249호 「만주, 조선에 있어서 동원(임시편성)된 부대의 통칭호에 관한 건달(件達)」에 따라 “조선에서 동원(임시편성)된 부대의 통칭호는 ‘병단문자부’를 ‘조선(朝鮮)’으로 한다”고 정하였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조선 제몇부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자료들이 있으므로 이 부분 역시 세밀한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러한 조치의 결과로 1940년을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경성사단(京城師團), 나남사단(羅南師團), 평양사단(平壤師團, 추을사단) 등의 표기는 계속 허용되었으나, 가령 ‘보병 제78연대’와 같은 고유명칭방식은 말할 것도 없고 ‘용산보병연대’라는 정도의 표현조차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매일신보> 1940년 9월 25일자에 수록된 「과거 무훈을 찬양, 74부대 개대 기념식(開隊記念式) 성대」 제하의 기사에는 부대명칭을 ‘통칭호’로 감추고 소재지도 공란으로 처리한 실제 사례가 남아 있다.

 

[〇〇] 74부대의 빛나는 개대(開隊)기념일을 당하여 부대에서는 〇〇〇〇〇 원두에서 23일 오전 9시부터 개대기념식을 엄숙하고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날 만추(晩秋)의 청공은 74부대를 축복하는 듯 맑게 개었다.
식장에는 가토(加藤) 부대장을 비롯하여 나카노(中野) 부대 본부장, 사이토(齋藤) 44부대장, 이구로(伊黑) 병사부장, 기쿠치(菊池) 헌병대장, 오가타(緖方) 해군중좌, 기타 〇〇있는 각부대장 이하 관민 다수가 참석하여 금번 지나사변을 물론 ‘노몬한’ 사건, 장고봉(張鼓峰) 사건 등에 있어 빛나는 무훈을 날린 74부대의 위훈을 찬양, 식은 가토(加藤) 부대장의 식사와 옥관봉전(玉串奉奠)이 있은 후 최후로 사토(佐藤) 부윤으로부터 부민을 대표하는 옥관봉전이 있은 후 식을 마치고 계속하여 운동경기회로 들어갔는데 경기 번외로 서문고녀(西門高女)의 기원 2600년 창가가 일반의 인기를 끌고 부민대망의 황취(荒鷲, 아라와시. 전투기를 뜻함) 격추의 대모의전이 전개되어 10여 문의 거포가 일제히 불꽃을 올리어
당일 〇〇〇 일대는 마치 실전장(實戰場)과 같은 장관을 이루고 오후 5시경에 산회하였다.

 

이 기사에는 74부대의 소재지에 대해 모두 공란으로 처리하고 있으나, ‘서문고녀(西門高女)’라든가 ‘사토 부윤(佐藤 府尹)’이라든가 하는 구절로써 이곳이 평양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비행기 격추를 위한 10여 문의 거포 운운”하는 부분은 이곳이 고사포부대(高射砲部隊)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단서를 취합하면 여기에서 언급된 제 74부대는 바로 평양 평천리(平川里)에 자리한 고사포 제6연대(1935년 창설)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당시 고사포 제6연대는 가토 타카미네(加藤隆峰) 연대장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이를 ‘가토부대’라고 지칭한 것이며, 축하내빈으로 참석한 ‘사이토 44부대장’의 정체는 확인 결과 사이토 마사히코(齋藤正彦) 보병 제77연대장(평양 주둔)인 것으로 드러난다.

 

<매일신보> 1941년 4월 14일자에 소개된 조선 제26부대(야포병 제26연대)의 제22회 창립기념식 광경이다. 이날 함께 제막된 ‘충혼비’에 새겨진 ‘忠魂’이라는 글씨는 1938년 6월에서 1939년 9월 사이에 제20사단장(용산)을 지낸 우시지마 미츠네(牛島實常) 육군중장이 쓴 것으로 확인된다.

 

<매일신보> 1941년 4월 27일자에 수록된 조선 제27부대(공병 제20연대)의 창립기념식 모습이다. 이 부대는 원래 공병 제20대대로 출범하였으나 1936년 5월에 치중병대대와 함께 일괄 연대 편제로 승격된 바 있다.

 

이러한 통칭호 부대명칭에 대해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료가 거의 눈에 띄질 않는데, 아쉬운 대로 <매일신보>와 같은 보도내용 등에 드러난 단서들을 하나씩 취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일람표 형식의 재구성이 가능하다.

 

조선주둔 일본군의 주요 부대 통칭호 일람표

해방 후에 간행된 강제동원 관련 여러 증언 자료집들을 살펴보면, 여기에도 이러한 부대명칭이 무시로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른바 ‘육군지원병’이건 ‘학도지원병(학병)’ 이건 ‘징집병’이건 간에 강제동원을 통해 전쟁터에 끌려간 이들에게는 입영부대 또는 배속부대였던 22부대니, 24부대니, 30부대니, 42부대니, 44부대니 하는 이런 명칭들이 그 시절의 고통을 기억하는 연결고리로서 어김없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으로 확산되는 침략전쟁의 와중에 일본군 전투부대가 자신들의 정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한편 조금이라도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교묘한 전략기법의 하나로 짜낸 것이 바로 ‘통칭호’의 개념이다. 지금도 여느 군부대 앞의 정문 기둥 마다 걸려 있는 ‘육군 제XXXX부대’라는 식으로 표기한 간판이란 것도 본연의 군사보안 목적이 있어서 사용하는 것이긴 할 테지만, 구태여 그 뿌리를 따지고 든다면 일본군대가 저지른 침략전쟁의 산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워버리기는 어려울 듯하다.

금, 2019/11/2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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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반역을 중단하라
서정주 문학제 철폐 촉구

 

동학농민 민중해방혁명 125년
기미3·1독립혁명 100년
8·15민족해방 광복 74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못난 짓 하고 잘난 체하던 배신자를
찬양하고 기리는 나라
이것은 시대의 반역이다
부끄럽다!
강도에게 강탈당한 나라
나라잃은 백성 자유를 빼앗기고
미래를 뺏겼으니 희망도 빼앗기고
강제로 끌려가 목숨까지 빼앗겼다
힘없어 못 끌려간 노약자들
뼛골 빠지게 지은 농사
소출은 빼앗기고 주리를 틀렸다
2천만 민중은 죄다 노예되고

3천리 강토는 통째로 감옥통
아-아! 어찌 잊으랴 압박과 설움
피울음 우는 동포 냉정하게 외면하고
개처럼 기어가며 일신은 영달했다
인도를 배신했던 이기의 달인 서정주
광복은 됐지만 일제부역 사죄않고
양심도 없었는지 반성도 없었다
침략자 앞잡이 반민족 대역죄인
처벌은 못할망정 찬양이 웬말이냐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반역 중단하라
서정주 문학제 지금 당장 철폐하라

2019.11.2.
여럿이 함께 손잡고 ‘평화의 길’ 김판수

토, 2019/12/21-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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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시민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여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이란 주제로 하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강좌는 2019년 11월 16일부터 12월 8일까지 매주 토, 일 오전 10시에 진행되었고, 강북구와 민족문제연구소의 적극적인 홍보로 강의마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일제 강점기에 나운규와 카프는 어떻게 영화로 저항했는가?’를 시작으로 친일영화, 해방의 혼란기 영화인들, 현대 한국영화의 모습까지 다양한 주제로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강성률(광운대학교 교수), 정영권(동국대학교 강사), 변재란(순천향대학교 교수) 등 전문성을 갖춘 강사들이 시민들에게 친숙한 영화를 주제로 강의하였다. 이번 강좌(총 8회)에서도 출석률이 높은 11명의 수강생들에게 수료증과 기념품(도서)을 전달하였다.
강좌 종료 후 강사와 수강생들이 함께 식사를 하며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강의 전반과 현재 영화에 대한 의견들을 교환하는 시간도 가졌다.


근현대사기념관은 2020년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계획하여 강북구민들과 역사와 문화에 관심 있는 일반시민에게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근현대사기념관 홍정희 학예연구원

금, 2019/12/2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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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원지인 광주일고는 11월 19일 오전 교내 강당에서 친일작곡가 이흥렬이 만든 교가(1953년 제작)를 대신할 새 교가 발표회를 열었다. 경과보고에 이어 교내 합창단과 동문 관현악단의 연주로 열리는 발표회에는 동창회 임원과 학생, 학부모, 교직원 등이 참석했다.
새 교가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한 김종률 씨와 교내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재학생 4명이 공동으로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 김종률 씨는 이 학교 졸업생이다. 이승오 교장은 인사말에서 “우리 학생들이 주옥같고 의미심장한 가사를 빚어냈고, 김종률 작곡가가 힘찬 기백과 진취성을 담아 새 교가를 창작하였다. 새 교가를 부르며 새로운 100년 광주일고의 비상을 기약하자.
”고 말했다. 광주서중일고총동창회 김상곤 회장은 축사에서 “우리 후배들은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현대사의 불행을 단호히 배격하고, 새 교가를 만드는 모든 과정에 혼연일체가 되어, 마침내 흠결 없고 자랑스러운 교가를 부르게 되었다. 일고 공동체 99년 역사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고 치하했다.
인천에서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난 곳으로도 알려진 창영초등학교는 11월 25일 학교 체육관에서 ‘친일 잔재 청산 새로운 교가 선포식’을 진행했다. 창영초등학교가 주최하고 창영초등학교 전교어린이회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교직원·학생·학부모·동문회 등 240여 명이 참석했다.
창영초교는 지난 3월 교가를 개정하기 위해 교사·학부모·동문회·육군사관학교·학생대표 등 9명으로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했다. 이후 4월부터 설문조사 등으로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했으며, 10월 31일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교가의 작곡만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창영초교는 ‘그리운 금강산’을 만든 33회 졸업생 최영섭 작곡가를 섭외해 새로운 교가 작곡을 의뢰했으며, 25일 ‘친일 잔재 청산, 새로운 교가 선포식’을 진행했다. 새로운 교가는 창영초교 합창부 학생들이 직접 음원을 녹음했다. 임용렬 창영초교 교장은 선포식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열심히 활동한 창영초교 선배님들이 있지만, 그동안 우리가 부른 교가는 부끄럽게도 친일파(임동혁)가 작곡한 교가였다”며 “현재 일본에 경제적인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이제라도 새로운 교가를 만든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금, 2019/12/20-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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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방송에 내린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는 위법, 대법원 판결

2019년 11월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역사다큐 <백년전쟁>을 방영한 시민방송(RTV)에 대해 방송통신위원회가 내린 제재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시민방송(RTV)은 2013년 1~3월 <백년전쟁>을 방송하여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관계자 징계 및 경고, 이 사실에 대한 고지방송’의 제재를 받았다. 이유는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사자 명예존중에 관한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백년전쟁>이 공개된 후 벌어진 박근혜 정권에 의한 일련의 정치 공세의 유탄을 맞은 것이다. 시민방송은 방통위의 제재에 불복, 행정소송을 시작했다.
2014년 1심, 2015년 2심에서 시민방송은 패소했다. 행정소송을 다루는 판사가 다큐 내용의 명예훼손 여부까지 판단했고, 게다가 공식 문서인 판결문에 5.16 군사쿠데타를 ‘5.16 혁명’이라고 적기까지 했다. 판사의 정치적 입장, 역사의식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점이 재판에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했다. 시민방송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오래 걸렸다. 몇 해를 그냥 넘기다가 2019년 1월에야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하겠다고 나서더니 이번에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은 원심 판결이 잘못이라고 결정했다.
대법원은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 매체, 채널, 프로그램별 특성을 고려하여 심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민방송을 KBS나 MBC와 같은 대형 미디어와 같은 기준으로 심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시민방송은 퍼블릭액세스(Public Access) 채널이다. 시민이 만든 프로그램을 방송하여, 시민이 수동적인 미디어 소비자가 아닌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주체로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대법원은 시청자가 제작한 방송프로그램의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을 심사할 때는 대형 미디어가 제작한 프로그램에 비해 심사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점차 독점화하고 상업화해 가는 매스미디어 환경에서 퍼블릭액세스 채널이 가진 지향점,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내린 판단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대법원은 <백년전쟁>이 명확한 자료에 근거해 제작했으며, 전체 다큐영화의 내용이 객관적 사실과 어긋나지 않다고 보았다. 따라서 시민방송의 <백년전쟁> 방송이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 유지 의무와 사자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앞서 이승만 사자명예훼손 소송에서 나온 ‘무죄’ 결정과 같은 결과였다.
대법원이 ‘파기환송’ 했으므로 다시 고등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을 존중하여 상식에 부합한 결정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 권시용 선임연구원

금, 2019/12/20-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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