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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자연합회 회장에 취임한 안형준 MBC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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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자연합회 회장에 취임한 안형준 MBC 기자

익명 (미확인) | 월, 2018/03/2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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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방송기자연합회 회장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방송기자연합회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답 : 지난 1월 30일에 방송기자연합회 10대 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 단체는 공중파 3사가 중심이 되어서 10년 전인 2008년에 만들었습니다. 기존에 있던 한국기자협회가 신문과 인터넷 매체, 활자 매체 위주로 돌아가는 반면에 방송기자연합회는 취재 이후에 제작 부담이 많은 방송기자들의 특수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방송기자는 출입처에서 퇴근해서 다시 방송사에 출근해 오디오를 읽고 영상을 편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KBS, MBC, SBS, YTN, MBN, OBS을 위시해서 케이블 뉴스 전문방송과 지역 공중파와 지역 민방을 포함한 59개의 방송사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종편 3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방송사가 가입해 있습니다. 현재 회원 수는 약 3천 명 정도입니다.

문 : 방송기자연합회는 어떤 일을 하나요?

답 : 방송기자연합회의 역할은 첫 번째가 특종상 시상, 두 번째가 기자 재교육, 세 번째가 방송보도 관련 연구, 네 번째가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 등 대외협력활동입니다.
첫 번째 특종상은 매달 이달의 방송기자상을 수여합니다. 5개 분야, 뉴스, 기획보도, 지역뉴스 등 5개가 있는데 이번에는 영상뉴스와 경제 분야를 추가해서 7개 부분에 대해서 수상자를 선정해서 상금과 상패를 줍니다. 한국방송학회 회장 등 교수님들과 공중파 3사와 YTN 등의 고참 기자들이 엄격하게 심사해서 월말에 시상합니다. 매년 1월에는 그해의 최고상인 ‘올해의 방송기자상’을 시상합니다.
어찌 보면 두 번째 재교육이 가장 중요한 사업입니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형사소송법도 알아야 되고요, 언론중재위에 갔을 경우 어떻게 대응해야 되는지, 또 새로운 트렌드에 맞춰서 빅데이터 마이닝은 어떻게 취재해야 하는지, 팩트체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의 재교육을 국내와 국외에서 진행합니다. 해외 유명한 언론 학자나 기자들을 초빙해서 재교육을 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 연구기능입니다. 2014년 세월호 침몰사고 보도에서처럼 오보가 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도 살펴봐야 했습니다. 또 한국 뉴스의 문제들과 개선책도 마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자들과 교수들이 저널리즘 아카데미팀을 구성해서 여러 연구들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끝으로 대외협력입니다.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는 등 참여합니다. 또 방송기자들이 출입정지등의 불이익을 당했다든가 어떤 특정사가 파업을 하거나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고 하면, 방송기자들의 입장을 정리해서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문 : 지난 9년 동안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권 시기 언론에서 억압적인 관행이 굉장히 크지 않았습니까? 방송기자연합회도 상당한 시련이 있지 않았나 싶은데요.

답 : 좀 전에 말씀드린 방송기자연합회에서는 재교육, 해외 연수를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보도국의 기자들이 보도국에서 쫓겨나는 일이 모 방송사에서는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방송사에서는 방송기자연합회에 더 이상 상근자를 보내지 않겠다, 연합회 회장이 인사를 와도 몇 년 동안 만나주지 않는 그런 여러 가지 비정상적인 일들이 많이 벌어져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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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일종의 성명서 같은 것을 발표하는 일도 많았죠?

답 : 네 그렇습니다. 최근에도 자유한국당이 MBN 기자들을 출입정지 했을 때라거나 YTN 기자들이 또다시 파업에 들어갔을 때에도 저희들이 가장 앞장서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문 : 과거에 방송노조가 파업했을 때 지지성명 같은 것도 내고요.

답 : 지지성명은 일반적으로 내왔습니다. 돕지 못했던 때도 잠시 있었지만 지금 상황이 바뀌었죠.

문 : 달라진 환경이더라도 새롭게 회장에 취임했으니까 특별히 마음에 들고, 이것만 꼭 해보겠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겠다 이런 건 없나요?

답 : 사실 제가 연합회에서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인터뷰를 통해서 제 속내를 좀 드러내자면, 저는 만주에 있는 중국의 동북 3성에서 한국어로 방송하는, 조선말로 방송하는 방송기자들과의 연대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연합회의 이름 앞에 ‘한국’이 붙어있지 않은 것에도 선배들의 큰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 큰 시야를 가지고 회장직을 잘 수행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서 기자생활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답 : 1994년에 YTN 공채 2기로 입사해서 정치부, 사회부, 기획부를 거쳤습니다. 2001년 MBC 경력공채로 입사합니다. YTN와 MBC 양대 방송사와 기자들에 대해 소상히 아는 편이죠.

문 : 방송기자가 된 동기는?

답 : 1987년 6월항쟁 때 서울대 2학년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에 분개해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이 시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현장이 텔레비전 뉴스시간에 중계되었는데 각종 구호소리와 운동가요 등 생생한 현장음과 시민들의 인터뷰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특히 박종철의 고문치사 기사가 일간지에 실리고, 그 후폭풍으로 견고했던 독재 아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TV뉴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방송기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문 : 25년간 수많은 기사를 작성했을 텐데 어떤 기사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고, 또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답 : 앞에서 말했듯이 2001년 경력 기자로 MBC에 입사해 통일외교부로 발령났습니다. 그해 10월경 일본은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켜 테러지역에 일본자위대 병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에 저희 통일외교부는 자위대 해외파병 결정과 관련한 기획기사를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10월 30일부터 11월초까지 테러특별법 통과에 비추어본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야스쿠니신사 참배, 일본군국주의 부활, 한국에 진출한 일본 만화와 게임 등 대중문화에 파고든 군국주의의 모습을 부각시킨 ‘독도는 일본땅’ 그리고 ‘역사연구단체, 친일인명사전 편찬 추진’ 등을 연이어 방송에 내보내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보도가 나간 지 한 달 뒤 국회예결위는 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2억 8,000만 원의 정부예산을 지원하기로 결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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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2001년 11월경 당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데이터 구축사업인 ‘일제식민통치기구•협력단체편람-국내편’의 국고(민간경상보조금) 지원을 요청해놓은 상태였습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필요성을 부각시킨 안 기자님의 취재 덕택에 국회의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돈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마중물이었던 셈입니다. 그 다음 기억에 남은 기사는 어떤 게 있나요?

답 : 검찰청 출입기자 때 특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인데 현직 대통령 아들의 금품수수 의혹과 관련한 압수수색 영장을 확보해 단독 보도한 것입니다. 또 휴대폰 통신요금 인하를 촉구하는 리포트를 40여 차례 방송했고, 2001년 9.11 테러 현장 취재와 2003년 이라크전쟁 종군 취재가 기억납니다.
2003년 7월에는 현대가 건넨 150억 원의 비자금을 박지원 씨의 측근인 김영완 씨가 세탁한 과정을 보도하여 정치권에 큰 파문을 일으켰죠. 이 보도로 저를 비롯한 MBC 보도국 기자들이 제154회 이달의 기자상 취재보도부문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문 :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 MBC의 풍토는 어땠나요?

답 : 이명박 정권 3년차인 2009년 11월경 제가 일하던 시사교양프로그램 ‘뉴스후’가 폐지되었습니다. ‘뉴스후’에서는 MB가 다니던 교회를 비판한 ‘세금 내지 않는 사람들’, 4대강 정비사업 등 국정과제 아이템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는데, 이런 뉴스들이 고위 임원들에 의해 커트당하다가 결국 프로그램 자체가 폐지되고 맙니다. 회사측은 주요 뉴스 앵커나 보직(정치・경제부장), 해외연수를 내걸고 기자들을 회유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인사권으로 기자들과 거래하는 거죠.

회사측은 이런 당근 정책뿐 아니라 채찍도 휘두릅니다. 2012년 MBC 170일 파업 때입니다. 강지웅 박성제 박성호 이용마 정영하 최승호 등 파업 주동자들을 해직하고 120여 명의 파업 참여자들을 정직시켰습니다. 특히 정직된 사람들에게는 정직 기간이 끝난 뒤에도 김재철 사장의 지시로 3~9개월 간의 교육명령을 떨어졌어요. 서울 송파구 신천역에 위치한 ‘MBC 아카데미’에서 브런치나 와인 감별 등 기사작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교양교육을 받았던 거죠. 교육생들은 그곳을 ‘신천교육대’ 혹은 ‘김재철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불렀습니다. 이 교육을 마치고 나서도 보도국 사람들은 경인지사나 사업부서 등으로 발령하여 방송보도 제작과 철저히 격리시켰습니다.
저도 신천교육대 과정을 마치고나서 라디오뉴스를 잠시 편집하다가 MBC 경영부서의 하나인 아카이브 사업부로 배치되었습니다. 방송영상 도서관으로 영상과 오디오 자료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녹음테이프에 라벨을 붙이는 것이 주요 업무여서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송보도를 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내가 기자 맞나 하는 자괴감이 몹시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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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방송정상화투쟁에 참여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답 : 2012년 파업 때 7개월 동안 집에다 월급을 주지 못했어요. 회사측이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적용한 거죠. 제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는데 그때 마침 초등학교 6학년 졸업반이었어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는데 경비가 100만원이었어요. 몇 개월째 월급을 받지 못한 터라 끼니나 겨우 해결하는 형편인데… 그런 거금을 마련하기가 까마득했습니다. 어찌어찌 그 돈을 마련해서 수학여행을 보내기는 했습니다만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문 : 오랜 투쟁 기간 좌절에 빠지지 않도록 버티게 해준 선배나 스승이 있다면?

답 : 경복고와 서울대 3년 선배인 김세진 열사입니다. 1986년 전방 입소 거부와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며 분신하기 바로 전인 4월 18일, 김 선배를 4.19기념식장에서 만났습니다. 항상 정의롭게 살라며 격려해주었습니다. 제가 힘들고 좌절에 빠질 때마다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저의 사표입니다.

문 : MBC의 앞으로 과제는?

답 : 작년 12월 최승호 PD가 MBC 사장으로 취임하여 해직자의 즉각 복직을 공표한 것에서 보듯이 MBC가 정상화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일단 하드웨어적인 틀은 갖추었으나 소프트웨어적으로 개선이 필요합니다. 최근 들어 시청률도 완만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의 제보가 필수적입니다. 그럼 정상화가 더욱 빨라질 수 있습니다

문 : 방송정상화 투쟁과 관계된 책을 집필중이라 들었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답 : 이제까지 한 인터뷰와 비슷한 내용의 소설입니다. 뉴스후 폐지 사태를 겪고 나서 이것을 소설로 쓰면 되겠다 싶어 시작했습니다. ‘촛불혁명’을 비유한 일종의 팩트소설이죠. 3선 국회의원인 여성정치인이 대권을 노리고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는 가운데, 기자들이 맞서서 그녀의 출산의혹과 해외원정 성매매 의혹을 파헤친다는 내용입니다. 참, 소설에서는 3선 의원 조부의 친일행각도 드러나는데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개정판을 만드는 과정에서 밝혀진다는 구성입니다. 며칠 전에 에필로그를 탈고했습니다. 조만간 서점에서 ‘딥뉴스’라는 제목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문 : 민족문제연구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답 : 2001년 청량리 금은빌딩 3층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관련해 취재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7년이 되었네요. 그때는 10평도 안 되는 허름한 사무실이었는데 용산의 연구소로 와보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연구소 이전을 축하드립니다. 5월에 개관할 식민지 역사박물관 건립 기금으로 제 소설의 인세를 일부 기증하고 싶습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 중 53%가 중국동포(조선족)이라 합니다. 이렇듯 한국에서 중국동포의 역할이 강화되고 우리나라의 외교・통일정책에도 영향을 미치리라 봅니다. 제가 아는 동년배 중국동포는 중국의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공무원으로 있는 분인데 한국의 중국동포 하대 경향에 매우 분개합니다. 연구소에서도 시야를 넓혀 해외동포문제와 통일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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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이설 고유문(鐵道移設 告由文)

임청각을 가로지르는 중앙선 철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인 이항증 선생이 12월 17일 임청각 방음벽 철거행사에 앞서 사당에서 고유제를 지내며 고유문을 낭독하고 있다.

 

오늘은 근 80년 동안 임청각 앞을 가로지르던 철로가 옮겨지는 날입니다. 임청각은 한 가문의 종가인 동시에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곳입니다.
1896년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될 무렵, 당시 임청각의 주인 이상룡 선생은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만들어 외세에 저항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 경학사와 부민단을 조직해 항일투쟁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3,500여 명의 졸업생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비롯해 수많은 항일투쟁 전선에서 활약했습니다.
선생은 서로군정서 독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 등의 중임을 맡아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1932년 만주에서 생을 마치셨습니다.
광복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석주 이상룡, 동구 이준형, 소파 이병화로 이어지는 3대(代) 종손과 형제 숙질 등 11명이 서훈되었고, 임청각은 ‘현충시설’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철길과 방음벽에 가로막힌 임청각은 예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과거사는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고, 국토는 분단되어 민족의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에는 남북(南北)과 여야(與野)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독립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석주의 정신이 오늘날 갈등을 잠재우고 미래를 가리키는 등대가 되길 바랍니다.
아! 드디어 오늘 국가와 국민의 노력으로 철로가 옮겨지고 임청각은 일제 강점기 이전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휘어지며 앞을 막았던 철도가 곧게 펴지며 제자리를 찾음은 철도 본연의 역할인 ‘소통과 이동의 자유 회복’과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철길이 이어져 금강산과 백두산을 연결하고, 대륙을 횡단해 유럽으로 뻗어 나가길 소망합니다. 그 길 위로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이 퍼져나가길 기원합니다.

2020. 12. 17.
석주 선생 주손 창수 삼가 고하나이다.

월, 2021/01/25-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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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1)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기억과 전망???? 43호(2021)에 실린 글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편집자주

 

1. 박정희와 같은 뱀띠의 다른 운명

분단 한국은 별들의 전쟁이래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진짜 별들과 5·16쿠데타를 비판하며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다가 투옥당했던 국립 서대문대학(서대문구 현저동의 서울교도소)을 나온 전과자라는 별들의 전쟁 말이다. 교도소에서는 전과 1범을 별 하나, 둘은 투 스타로 불렀는데 원수급인 5성도 적잖으니 아마 별들의 숫자로 보면 국방부의 별보다는 법무부의별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두 별들의 차이는 엄청나게 많으나 가장 중요한 점은 국방부의 별들은 한 번 달면 평생을 보장받는 신분적인 우대로 성우회란 막강한 단체가 있으나, 법무부의 별들은 천차만별인 데다 분파가 많다는 점이다. 

1974년 3월 2일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법정에 선 이호철ㆍ임헌영ㆍ김우종ㆍ장백일ㆍ정을병 씨의 모습(오른쪽부터)

 

군부독재란 바로 이런 다양한 별들을 과잉 배출하는 별을 찍어내는 공장인지라, 그래서 총총 하늘에는 별들도 많고 국민들 가슴엔 근심만 많은 세월이었다. 박정희와 내가 닮은 건 같은 뱀띠라는 건데, 세속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사주는 정사년(丁巳年) 출생으로 신해월(辛亥月)에다 경신일(庚申日)에 무인시(戊寅時)에 태어난 것으로 소문나있다. 사주에서 흔히 말하듯이 인신사해(寅申巳亥)가 다 들어있는 사맹격(四孟格)으로 고난을 헤치고 야망을 이룰 수 있는 천운이라고들 하는데, 이것까지가 가짜라는 설도 파다하다. 그런데 내 사주에는 그 사맹 중 셋은 갖췄지만 ‘신’이 빠진 채라, 복권 숫자가 앞자리에서는 잘 맞아 돌아가다가 마지막이 틀어져 버린 격이라 천을귀인(天乙貴人)이 2개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형충파해(刑沖破害)를 당한다는 풀이다. 결국 내가 발산하는 빛은 매우 강하나 구름이 끼어 있어 짱짱하게 빛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각종 운명철학이나 점을 나는 별로 믿지 않지만 그냥 심심풀이로 해본 소리니 웃어넘기시기 바란다.
그러기에 믿거나 말거나지만, 별들로 따진다면 박정희나 나나 둘 다 투 스타로 동급이었다는 게 내 소견이다. 그가 5·16 때까지 달았던 별은 투 스타였고 그 뒤에 단 건 말짱 헛것이란 뜻이다. 전두환 역시 12·12반란 때는 투 스타였으나 그 뒤 제 멋대로 별을 더 달았으니 박정희의 판박이다. 세계의 모든 쿠데타는 다 권력욕에 불타는 갱단들의 난장판이라 일단 성공하고 나면 자신의 어깨에다 별들의 숫자를 올렸다. 그렇지 않고 쿠데타를 혁명으로 승화시킨 유일한 사례가 가말 압델 나세르로, 그는 거사 때의 대령 그대로 대통령이 되어 제3세계 국제정치사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20세기 정치인 중 내가 좋아하는 순번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쿠데타 후에 자기 손으로 갖다 붙이기 이전에는 같은 투 스타였기에 감히 투 스타였던 내가 당당히 그들과 맞장 뜰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농 삼아 지껄이지만 정작 그들의 별과 나의 별은 천문학적으로 그 좌표도가 완전히 달라 내 인생은 아무리 말로 수식을 해도 험난하기만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초라한 내 인생살이 전체를 다 털어놓을 수는 없기에 두 별들의 사연 중 첫 번째 별을 달게 된 경위만 간략하게 정리해 보려 한다.

 

2. 빙고동 호텔

나에게 첫 스타를 달아준 곳은 ‘빙고동 호텔’이었고 때는 1974년 1월 긴급조치가 갓 발동된 하수상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나와 함께 원 스타를 달았던 동기생으로는 작가 이호철, 정을병, 평론가 김우종과 장백일 5인조로, 세칭 ‘문인 간첩단 사건’ ‘공범’들이다. 이 호텔의 호적명은 육군보안사령부로 군부통치 시절에 스타를 많이 배출했던 남산(중앙정보부)과 남영동(치안본부 대공분실)과 함께 3대 유명 재야 사관학교 중 하나였다. 이 트로이카 명문 중 빙고동 호텔은 일단 입교하기만 하면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어딘가에 탈이 난다고 할 정도로 성한 몸으로는 나오지 못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이 호텔의 이력서는 찬연하고 그 명칭 또한 화류계 여성처럼 휘황찬란하다. 미 군정청 국방사령부 산하에 설치됐던 정보과(1945.11)가 남조선국방경비대 정보과(1946.1), 육군본부 정보국 특별조사대(1948.11), 방첩대(1949.10)란 명칭을 거쳐 육군본부 직할 특무부대(特務部隊, CIC, 1950.10)로 신분을 바꿨다. 그동안 이 기구가 이승만 독재체제를 위하여 비판세력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던가는 구태여 여기서 읊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월혁명 후 육군 방첩부대로 개칭(1960.7)됐으나 5·16쿠데타 세력은 육군 보안사령부로 개칭(1968. 9), 이어 육군뿐이 아니라 해공군을 망라하여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 개편(1977.9), 시종 박정희 군사정권의 버팀목으로 중앙정보부와 충성 경쟁을 전개한 쌍두마차였다. 그러니 내가 입교했던 1974년은 아직도 ‘육군보안사령부’ 시절이었다.
남산 3호 터널이나 반포대교가 없던 시절이라 서울역 – 삼각지에서 이태원으로 좌회전해서 언덕길을 오르면 그 이태원 입구(지금의 녹사평역. 당시에는 콜트장군 동상이 서있었다), 그 부근에서 우회전하여 내리막길(지금의 반포대교길, 초라한 도로)을 달리노라면 좌우가 다 미군부대 철조망만 있었다. 길은 좁고 왕래 차는 거의 없었다. 지금의 크라운 호텔을 지나면 이내 반포대교로 이어지는데, 그 직전에 동작대교로 빠지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이내 왼쪽으로 약간 경사진 곳에 삼엄한 검문대가 나타난다. 지금은 민주기행 코스로 공개되어 있지만 그땐 그 장소 자체가 국가기밀이어서 그냥 ‘빙고동 호텔’이라고 불렀다.
1974년은 정초부터 어수선했다. 1월 7일 ‘문인 61인 개헌지지 성명’(유신헌법 철폐)이 발표되자 재빠르게 이튿날 1.8긴급조치가 선포되더니, 10일에는 관할 경찰서에서 우리 집을 다녀갔고 이틀 후 또 방문, 그 뒤 다시 전화로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미 이호철은 연행당했다는 소식이고, 함석헌 천관우 안병무 문동환 김동길 법정 계훈제 제씨를 연행, 심문 중이며, 장준하 백기완은 긴급조치 1호위반으로 구속했다는 흉흉한 때였다. 보안사에서 다녀갔다기에 일단 몇일간 피신했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곤 귀가, 17일 밤에 아주 신사적으로 연행됐다. 그들은 항상 한 30분이면 끝난다고 하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가운데 앉힌 채 양쪽에서 조이면서 검은 지프차는 퇴계로의 모 호텔(현 세종호텔 맞은 편쯤)에 들렸다. 으슥한 방으로 들어가자 마왕이라도 나올 듯한 어두컴컴하고 큰 방 입구에 책상과 걸상이 있는데 앉으라고 강박했다. 잠시 후 내가 태어난 뒤 처음 본 가장 덩치가 큰 중후한, <쿠오바디스>의 우루서스 같은 남성이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미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추남도 아닌 이 거대한 존재 앞에서 나는 왜 그리도 초라하게 느껴졌던 걸까. 아무리 뜯어봐도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혈통 속에서도 저런 골조의 인간이 있었던가를 의심케 하는 모양새다. 나는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냥 얼어붙었다. 반나치 영화에서 레지스탕스들이 잡혀가면 첫 신에서 비슷한 위협적인 장면을 보여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선 덩치에서 아무리 대담한 레지스탕스도 야코가 팍 죽어버린다. 뭐라 한 미디 묻자 마음에 안 들면 마치 기중기가 작은 바위를 들어 팽개치듯이 던져버리는 장면.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나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바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을 치켜뜨고는 꼬나보기에 나는 점점 더 얼어붙었다. 그렇게 아마 한 10분정도 지나자 “데려 가!”라고 딱 한 마디를 천둥처럼 울리게 내뱉었다. 그러자 나를 연행해 왔던 장년 신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 사병들이 “예” 하더니 나를 양쪽에서 옥죄며 방을 나섰다. 그 뒤를 몇이서 따르며 “본대로 간다, 본대로 간다” 하면서 신이 났다. 겁주기의 제1단계였고, 본대란 육군보안사령부 대공처 심문소, 속칭 ‘빙고동 호텔’이었다.

 

재일동포 잡지 한양 1962년 6월호

 

1층 어느 방, 카펫이 안 깔린 맨바닥에다 벽은 머리를 쳐다 박아도 상처 나지 않도록 특수장치를 했으며, 간이침대만한 쪽에 있고, 화장실은 복도 밖에 있었다. 허리띠부터 소지품 전부를 압수, 의학박사가 간단한 건강진단(얼마나 때려도 괜찮은지를 검토) 등등을 마치고는 인정심문이 끝나면 바로 고문이 시작된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는 식이다. 무조건 털어놓으라면서 매질이다. 뭘 털어 놓으라는지도 모른 채 비명 지르기에 혼비백산할 즈음에야 의자에 앉으라더니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다 쓰라는 명령이다. 바로 라이프 스토리다. A4 용지로 한 10매 정도로 얽어서 건네주면 그걸 대충 읽고는 엉터리라며 확 찢어버리고는 더 자세히 쓰라면서 그제서야 큰 인심이라도 쓰듯이 일본 여행 간 적 없느냐, 그걸 자세히 써 넣으라고 일러준다. 그 힌트를 받고나자 아, 바로 재일동포들이 내는 월간 종합 교양지 <한양(漢陽)>을 트집 잡으려는구나 하고 뜬구름을 잡고는 얼핏 통박을 굴려보니 그거라면 자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유신통치 독재체제라 한들 죄가 될 것 같지 않았다.
1962년에 창간한 이 잡지는 재일동포들이 주축으로 내는 것으로 그동안 한국 내 유명 문사들(박종화 백낙준 백철 이해랑 모윤숙 김동리 조연현 정비석 조경희 유주현 등)이 거의 망라된 필진이 참여했던 데다 한국 보급 총책으로 박정희와 개인적으로 아주 친숙한 구상 시인이 맡았던 터라 어떤 명분으로도 나 같은 피라미가 얽혀들 것 같지는 않았다. 국회도서관에도 비치될 정도로 전혀 불법이 아니었다. 내 라이프 스토리는 무려 20매로 늘어났으나 그들은 짜증을 내며 찢어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이 새끼 안 되겠구먼. 군복으로 갈아 입혀!” 하더니 진짜 그런다. 매질의 예고편이었다. 가끔은 “이 새끼 엘리베이터 태워야 하나”라고도 해서 뭔 뜻인지 몰랐는데, 친절하게 설명도 해준다. 나중 들은 바로는 엘리베이터에 태워서 땅 밑 몇 백 미터로 하강시켜 죽여 시신도 없애버린다는 위협이었다. 실제로 죽이진 않고 그냥 속임수로 땅 밑으로 깊이깊이 내려가는 것처럼 느끼게 해서 어느 지점에서는 문이 열리면서 갑자기 고문 담당자들이 몰려들어 매타작을 하고는 다시 집어넣어 내려가다 보면 또 문이 열려 다른 식의 고문을 행하는 것으로 빙고동 호텔에서 가장 끔찍한 고문으로 자랑하는 메뉴였다. 실은 몇 백 미터를 내려가는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의 조작으로 그런착각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건 총책을 맡은 ‘강 전무’(한 사건 때마다 그 성과 직함이 바뀐다. 5공 때 민정당 국회의원 이상재)는 이 방 저 방 다니며 고문을 독려했다. 여러 고통 중 바닥에 꿇어앉힌 채 날카로운 구둣발을 옆 날로 세워 바로 무릎 위를 세차게 걷어차는 것인데, 이미 숙달된 그 발길질은 치명적이라 차라리 매를 맞는 게 훨씬 낫다고 할 정도로 며칠간 절뚝거렸다. 젊었을 땐 몰랐는데 늙어가면서 그 부분은 지금도 흐리거나 비가 내리면 시큰거린다. 뺨 때리기는 예사고 몸통 뻗기, 꿇어앉히기, 팬츠 차림 등등은 그들에게 오락이었다. 고약한 자는 아예 발가벗겨 세워두곤 나체를 감상하는데 내 풀죽은 남성 심볼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심문할 땐 어디선가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도록 ‘아아아아’ 하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당신도 저럴 수 있다’는 음향 효과를 배경에 깔고 심문을 진행하는 기법이었다. 오륙 명이 한 조가 되어 그 중 한 명은 내 맞은편 의자에 앉고, 나머지는 나를 병풍처럼 둘러싼 채 심문자의 말을 큰소리로 반복하거나 윽박지르고 나머지는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군!”이라든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추임새를 수시로 넣어서 단 한 순간도 내가 말할 틈새를 주지 않고 “….했지!?”라고 다그치면 “예”란 대답만 나오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매타작을 하고는 지금까지 말했던 그대로 적으라며 백지와 볼펜을 주고는 사라진 자리에 대학생 징집자들로 이뤄진 사병들이 감시하는 가운데서 나는 손목이 시릴 정도로 ‘대하소설’(내 자서전) 집필을 몇 번이고 고쳐 썼다. 심문과 고문이 거듭될수록 점점 길어져 100매 전후를 넘나들었다.

 

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

 

요지는 ‘북괴의 간첩’들이 내는 잡지인 <한양>지에 글을 써서 원고료를 받았고, 일본 여행 중 그 잡지의 발행인이나 편집인으로부터 대접과 선물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국가기밀(원고료가 너무 싸다, 잡지마다 고료 액수가 다르다, 한국 문인들의 근황 등등)을 누설했으니 우리도 ‘간첩’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들이 북한 공작원이라는 가정 아래서 엮어낸 데다 그들이 간첩임을 우리가 알고서도 그런 행위를 저질렀다는 논리였다. 세상에! ‘나 간첩이요’라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으며, 그런말을 않는데도 그들이 간첩임을 무슨 재주로 우리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보니 개헌서명을 한 이호철과 나는 간첩이고 나머지 셋은 그냥 반공법 위반으로 휘몰아갔다. 징집당해온 근무병들은 옆에서 거의 지켜봤기에 요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망해라!”라고 소리 지르며 노골적으로 나를 동정하면서 필요한 것 있으면 연락해 줄 터니 부탁하라고 동정어린 표정을 지었다. 고마운 한편 이 젊은 것들도 앞잡이가 되었나 하는 의구심이 솟아 뜨악했는데, 며칠 간 지내면서 보니 그게 진심이었다. 어느 수사관은 지나다가 들러 천장의 텔레비전과 녹음장치를 가리키며 조심하란 몸짓과 함께 종이에다 “반공법, 문제가 많다”고 써서 보여주곤 잘게 종이를 찢어 휴지통에 버리곤 했다. 나중 그는 자기 아내에게 안동사범학교 출신 친구가 있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고 살갑게 대해 줬다. 이쯤 되니 곧 풀려나겠구나 낙관했는데 며칠 사이에 슬그머니 분위기가 얼어붙더니 그간 정들었던 사법경찰관이 바뀌었다.

 

3. 분단 한국과 서독, 그리고 타이완

“젊은 사람이 매로 다스렸으면 이제 늙은이가 슬슬 엮어서 징역을 보내야지”라며 본격적인 서류작성에 들어갔다. 그런데 뭔가 뜻대로 안되자 사법경찰관이 또 바뀌어 무척 경직된 분위기로 표변하기에 아하, 기어이 징역을 보낼 작정이구나 싶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각료회의에서 문공부장관(윤주영, 당시의 명칭)이 자신에게 사전 통보도 없이 군 관련 기관에서 문인들을 연행해 간 사실을 문제시하여 풀릴 듯 했지만 보안사는 이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확실한 범죄로 몰아갔으며, 여기에다 예술단체 모 간부(시인)가 은근히 이를 지지해 줬고, 정치권 역시 민주화운동을 억압코자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터라 3박자가 잘 맞아 떨어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대단히 유명한 모 여류문인이 육영수에게 은근히 이 사건의 부당성을 진언하자 도리어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반론만 강조하더라는 뒷이야기도 있다. 보안사는 이 심문 및 재판 기간 중 가족들의 대사회적인 구원활동을 막고자 계속 다방에 다섯 구속자의 아내를 불러모아 발을 묶어두곤 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이제 고문자들이나 심문자들과도 말문이 터져서 온갖 이야기도 나눌 처지가 되었다. 필시 그들 자신도 이 간첩 조작이 무리임을 알았기 때문에 나사를 느슨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문관 중 한 무표정한 분은 월남한 진짜 간첩 출신으로 눈빛이 매섭고 과묵하면서도 어딘가 공포가 느껴졌는데, 한쪽 손 무지가 뭉그러져 있었다. 나중 알게 된 바로는 체포당해 고문을 받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 했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는 왠지 연민의 정이 갔다. 어느 눈이 쌓인 날, 한 호의적인 심문관이 나에게 답답하니 잠시 시원한 바람이나 쏘이라며 사병에게 건물 옆 뜰로 산책을 시켜주게 했다. 마침 거기에 바로 그 월남 간첩이 우두망찰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연기를 하염없이 허공으로 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허망함!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그의 착잡한 심경과 뇌리의 흐름에는 어떤 회한이 서려 있을까. 북녘의 고향과 부모와 어렸을 적의 동무들, 남녘에 와서 얻게 된 처자식들, 자신이 믿었던 ‘인민공화국의 이상’과 남녘의 풍요로운 ‘미제의 식민지로서의 미끼인 달콤한 물질적인 유혹의 삶’의 괴리가 주는 번민, 민족, 역사, 진리, 정의, 그리고 국가, 대체 그런 게 뭐란 말인가. 그는 나에게 가끔씩 “이 사람이!”라는 협박성 말을 내뱉으며 눈을 부라렸지만 눈 덮인 땅에 쪼그
리고 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그 순간을 보고서 나보다 더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나 나나 다 강대국에 빌붙어 자기 국민을 괴롭히는 독재세력들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한 게 아닌가 하는 동병상련 같은 것이었다. 이런 나의 속셈을 그도 읽었는지 그 뒤부터 나를 보는 그의 시선도 약간 달라진 듯 했다. 기계론적으로 적용하는 잣대인 전향자 운운이나, 왜 살아남아 그런 반동적인 행위를 저지르면서까지 치욕스럽게 지내느냐, 어서 자살이라도 해라, 라는 식의 당위론적인 테제만이 정당할까. 물론 이런 내 생각은 나중 두 번째 별을 달고 징역을 살았던 대구교도소의 비전향 장기수들의 고통 앞에서는 여지없이 허물어졌지만 적어도 빙고동 호텔의 눈 덮인 뜰에서만은 잠시 보살처럼 내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홀연히 엔도 슈사쿠의 가톨릭 순교를 다룬 20세기 최고의 걸작 <침묵>(1966)이 떠올랐다. 원제는 <양지의 향기(日向の匂い)>였으나 편집자의 제안으로 <침묵>이 되었다. 일본에서 기독교 탄압에 대한 잔혹성은 가히 세계 최악이었다. 우리나라가 기독교도에게 자행했던 고문의 야만성은 일본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야마 하이리 고문(山入拷問)은 화산인 운젠(雲仙) 온천에 데려가 뜨거운 물 퍼붓기, 뜨거운 바위 위에 세워두기, 입 막고 열탕에 처박기 등이었고, 아나츠리(穴吊り)는 볏짚으로 몸을 꽁꽁 묶어 거꾸로 매달아 머리를 땅구덩이에다 넣어 귀에다 바늘구멍만한 상처를 내어 출혈하도록 해서 며칠 동안 그 고통을 느끼도록 했다. 피가 똑똑 덜어지는 소릴 들으며 서서히 죽도록 하는 것이다. 파도가 들이치는 해변의 기둥에 매달아 그대로 숨이 멎을 때까지 두기도 했다. 그 고통을 못 이겨 배교하겠다면 말로만 되는 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상을 새긴 동판을 더러운 발로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후미에(踏絵)를 시켰다. 일본 농부들은 그런 고통의 고문 중에 죽어갔고 살아남자면 후미에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감행해야만 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이런 고문은 이겨낼 수 있었으나 자신을 따랐던 신자 농부들을 바로 눈앞에서 살해하는 걸 차마 견딜 수 없었다. 버젓이 후미에를 했건만 하나씩 죽이기에 항의하자 관리들은 이 농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선교사인 당신이 직접 후미에를 하는 것밖에 없다고 윽박질렀다. 차라리 자신을 얼른 죽여 달라고 했으나 그럴 수 없다, 반드시 후미에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었다. 자신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신도들의 생명을 구하자면 결국 배교할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런 고뇌의 순간에 하나님은 침묵만 하고 있다. 바로 그 순간,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자문 앞에서 그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밟아도 좋다. 너 앞의 그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 아픔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
에 태어나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踏むがよい。お前のその足の痛(いた)みを、私がいちばん
よく知っている。その痛みを分かつために私はこの世に生まれ、十字架を背(せお)ったの
だから, Trample! Trample! It is to be trampled on by you that I am here.)

 

이런 환청도 들렸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다. / 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누가 말했던가(私は沈黙していたのではない。お前たちと共に苦しんでいたのだ. ” “弱いものが強いものよりも苦しまなかったと、誰が言えるのか?)” 이래서 주인공 로드리고는 후미에를 해서 농부들을 살려냈고 자신도 생명을 부지했다. 그러나 섬나라 관료들의 잔혹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로드리고로 하여금 순교로 죽은 한 농민의 아내에게 장가를 들게 하여, 일본을 위해 서양문물을 번역, 소개하도록 강박했다. 그의 사생활 일체는 감시 하에서 십자가를 상징하는 어떤 것도 가까이에 두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다가 후배 선교사들이 오면 그들을 배교시키도록 설득작전에 나섰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 내가 이 소설을 중시한 것은 인간의 신념과 현실적인 괴리를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병립시킬 수 있을까 라는 인간존재의 근본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이런 잔혹성을 바탕 삼아 제국주의로 중무장하여 우리나라를 침탈했다. 식민지시기에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했던 잔혹성의 뿌리는 섬나라의 편협한 ‘부시도(武士道)’이며, 그 연장선이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이었고, 그 유산이 점령지에 내린 탄압이었음을 나는 느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에게 가했던 그들의 악랄한 전향 강요는 이 기독교 배교시키기와 너무나 닮았다. 이걸 그대로 전수받은 게 8·15 이후 친일세력들이 지배했던 권력의 대행자였던 정보기관이었음을 연상하는 데는 통박을 그리 많이 굴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향자의 운명은 아마 두꺼운 책으로도 모자랄 지경일 만큼 한국 근현대사의 비화로 흥미진진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70년대에 민주화운동권에 투신했던 왕년의 열렬한 투사 출신들 중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인사들의 행적만 추적해도 어디 소설 <침묵>에 그칠손가.
북에서 월남해 오면 반드시 북한 비난 대중강연에 동원하여 반공캠페인을 벌리기 일쑤다. 꼭 그 길밖에 없을까? 아니다. 동독의 작가 우베 욘존은 작품 출간이 불가능한 데다 직장도 보장 못 받자 서독으로 갔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끝내 ‘망명‘이란 단어를 피하고 “10년 동안만 사용했던 국적을 반환하고 서베를린 당해지 관리의 허가를 얻어 이사”했다고 주장했다.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는 장편 <여수(旅愁)>(1961)에서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의 피난민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자상하게 소개해준다. 위생검사 후 심문 내용은 성명과 연령 및 가족, 탈출하게 된 동기, 동독에서의 직업과 생활상태, 희망하는 직업과 살고 싶은 지역 등으로 5~10분이면 끝난다는 것이었다. 바로 수용소로 보내져 비행기 등 교통사정과 직장 알선 때문에 7~8일간만 기다리면 이주절차가 완료된다. 스파이가 많을 텐데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서독은 이미 동독의 문제인물 리스트를 장악하고 있기에 문제없으며, 설사 놓치더라도 언제나 적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첩이나 국가변란죄의 최고형은 5년이라며 서독 검사는 주인공 춘우에게 반문했다.

 

“귀국에서는 얼맙니까.”
“사형입니다.”
이번에는 검찰간부가 깜짝 놀랐다.
“왜 사형합니까.”
“국가를 전복시키는 건데 그에서 더 큰 죄가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은 당신네 나라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러한 죄수를 감옥에서 그냥 가두어 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6년간 사랑으로서 감화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박계주, <여수>)

 

중국도 마찬가지다. 타이완 출신 여류작가 천뤄시(陳若曦)는 미국 유학 중 캐나다로 이주했다가 베이징으로 가서(1966) 잘 살다가 다시 타이완(1973)으로 돌아왔다. 관계당국은 그녀의 ‘망명’을 환영했으나 이 작가는 끝내 그 단어를 피하며, 자신은 ‘반공 의거’가 아닌 ‘중국인의 증언자’라고 주장했다.
차이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1970년대 이전까지 일본은 여행을 다녀오기에 제일 위험한 지역이었고, 특히 유학생에게는 더욱 위태로웠다. 조총련이 워낙 센 지역이라 미처 알지도 못 한 채 걸려들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학금제도가 조총련계에 많아서 함부로 받으면 바로 ‘간첩’으로 일생을 망치기도 했다. 그런데 타이완은 한국과 달랐다. 그들은 중국계 장학금을 받으면 관계기관이 소환하여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더 이상 말려들지만 말고 열심히 학업에 전념하도록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빙고동 호텔에 대해서는 김병진의 <보안사>(소나무, 1988)가 실감나게 그 전모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재일동포 유학생으로 보안사에 연행, 고문 유경험자로 거기서 2년간 근무 후 사직하고 이 책을 통해 그 사실을 폭로했다. 이곳이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 간첩 사건을 주로 다룬 곳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서승-서준식 형제들이다. (다음 호에 계속)

화, 2021/03/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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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빛나는 삶

김원근 전 교사

 

숨죽여 그늘을 걸을지라도
누군가에게 흙탕물 튕기지 않았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쓰린 이별 뒤 어딘가 둥지 틀고 살지라도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으로 긴긴 겨울밤 뒤척이고 있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울고 싶어 어딘가를 홀로 떠돌지라도
부모님의 소소한 안부를 잊지 않고 이따금씩 떠올린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보잘 것 없고 든든한 배경이 없을지라도
누군가의 작은 햇살 한 줌으로 미소에 젖어 있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누군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또는 이따금 비스듬히 떠받치기도 하며
저마다의 초저녁 어스름 길을 가고 있는 거 아닌가

화, 2021/03/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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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경기도 후원, 지역사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 발행
교사용 학습 부교재 『우리 지역 친일잔재를 찾아라』

김찬수 수원동원고 교사

“선생님, 친일파가 뭐예요?”
“경기도에는 친일인물이 누가 있어요?”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는 무엇인가요?”
“우리 학교 교목(校木)과 교가(校歌)는 왜 일제잔재인가요?”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의 당연한 이 질문에 쉽게 답하기에는 범위가 넓고 다양하여 학생들의 궁금증을 다 풀어주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사실은 교육을 맡은 선생님들이 더 답답하다.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는 벅찬 감격에 이어 2012년에는 모바일 친일인명사전까지 출시되었지만, 일반인들이나 성장하는 학생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교육자들을 위한 ‘친일교육자료’는 많이 부족하였다. 인물별, 기관별로 여러 가지 노력이 있기도 했지만, 비교적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지역의 친일파 관련 자료집은 많지 않았다. 그동안 선생님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기댈 뿐이었다. 그런데 올해 초에 선생님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아주 적절한 친일 관련 역사교육 자료집이 나왔다. 이 자료집은 역사교육을 맡고 있는 선생님들이 사용하기에 아주 유용하도록 편집되어 1권의 첫 장을 펼치면서부터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진다. 사료편(PDF로 제공)을 포함하여 총 5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경기도를 4개 권역 즉 1편 경기도, 2편 경기동부지역, 3편 경기남부지역, 4편 경기서부·북부지역으로 나누어 집필되어 있다. 선생님 책상 위의 책꽂이에 꽂혀져 언제든지 찾아서 활용하기에 최적이다. 이제 경기도교육청의 선생님들은 근무지가 바뀌어 어디에서 근무하든 근무지역의 식민지 시대 친일인물과 그 흔적을 쉬게 찾아서 가르칠수 있게 되었다. 1권에서는 일제잔재의 개념과 유형별로 분류하고, 친일인물 중에 경기도 내 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인물과 일제강점기 신사(神社)를 정리해서 설명하였고, 학교생활 속의 일제잔재와 그 청산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선생님들도 한 번쯤 궁금했고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일제잔재 용어 사용 문제, 일제잔재 유형, 일제잔재 대상 시기, 일제잔재 청산 관련 사료집이나 관련법 그리고 매국행위 친일인물부터 통치기구 협력자, 군인, 경찰, 친일단체, 문화계 친 일인물을 표로 만들어서 잘 정리하였고, 경기도 곳곳에 있었던 ‘신사(神社)’ 그리고 학교 속의 일제잔재로서 교가와 교표가 왜 일제잔재인지 설명하고 있다.

‘반장’, ‘부반장’, ‘간담회’, ‘결석계’ 심지어 ‘차렷 경례’, ‘수학여행’도 일제잔재라는 것에 지금까지의 교육활동 모든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더욱 의미있는 것은 가평 대성초등학교, 김포 대명초등학교, 동두천 양주 삼숭초등학교, 이천 이헌고등학교, 수원 삼일학원, 화성 정남초등학교의 교표를 바꾸는 노력을 친일잔재 청산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이어 2-4권은 권역별 친일인물, 친일 관련기념물, 교수-학습과정안을 담았다. 지역 출신 친일인물을 분류하여 그들의 행위들을 정리하고 각종 일제강점기 건축물, 기념비, 송덕비, 기념물을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조금만이라도 식민지 역사에 대해 궁금해하고 고민한 분들이라면 이러한 자료의 발간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안다. 우리는 책이 나오기까지 고생하신 분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한다. 경기도의 후원으로 지역사연구소 중심이신 신대광 선생(원일중학교)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김승은 학예실장이 기획하고, 김진호 선생(원곡고등학교), 이을 선생(원곡고등학교), 이철환 선생(안산디자인문화고등학교), 최도현 선생(단원고등학교)이 함께 집필하였다. 이제 이 역작의 활용방안은 각종 교사연수, 토론회, 발표대회, 다양한 교육활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좋은 자료집은 아쉬움도 있게 마련이다. 우선 경기도 지역에 한정되어 아쉽다. 서울과 경기, 인천은 별개 지역이 아니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는 지역 구분이 없었다. 현재의 행정구역 경계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많이 아쉽다. 이 자료집으로 서울과 인천이 자극을 받아 이 같은 집필 작업이 이어질 것을 기대해 본다. 아울러 시·군 단위 기초자치단체의 세부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각 기초자치단체의 문화
원과 이 작업을 함께하면 더 좋을 것이다. 초중고 학생용 친일잔재 관련 교육자료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학생 수준별 서술의 전문성이 필요할 수도 있다. 쉽게 쓰여지고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유산답사 해설사나 관련 업무 종사자 분들을 위한 자료제공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최대한 찾으려 노력했겠지만 사진 자료도 적고 편집과 인쇄가 흑백이어서 조금 아쉽다. 더불어, 경기도교육청 차원에서 이 자료집을 모든 역사 선생님들에게 모두 배부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다.
자료집이기에 실제 수업을 위한 선생님들의 또 다른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많은 선생님들과 네트워크를 맺어 함께하면 어깨가 좀 더 가볍지 않을까? 교사 연수 때 연수 교육과정으로 담을 경기도교육청의 의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을사늑약 이래로 40년 동안의 치욕의 역사를 찾아 기록하고 교육하는 작업은 40년 이상 걸릴 것이다. 아니 시기적으로 늦어져서 역사의 흔적이 많이 사라진 까닭에 더 오래 걸릴 것이다. 해방 이후 세대가 여러 번 바뀌면서 몇 단계로 성장한 친일파 청산 작업들이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독재정치를 경험한 우리 세대에는 친일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갈증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들은 지난날의 세대만큼 역사문제에 절실하지 않다. 그래서 지금 세대의 역사교육을 책임져야 할 우리의 책임이 막중하다. “제2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화, 2021/03/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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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김순흥 광주지부장(전 광주대학교 교수)

당신들이 군사독재 밑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압니다.
당신들이 겪고있는 군부의 폭력과 학살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들이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낼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내일 아침에 갑자기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다음 주나 다음 달이나 내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승리는 여러분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자유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꿈과, 여러분의 바람은
반드시 여러분 앞에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바람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갑니다.
손에 손을 잡고 모두 함께 갑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여러분을 지지합니다.
세계만방의 모든 인민들이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결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자유를 위해 나아갑시다.
민주주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갑시다.
힘내세요 미얀마. 힘내세요 미얀마. 힘내세요 미얀마.

미얀마 만세 !!!
민주주의 만세 !!!

※ 위 시는 김순흥 광주지부장이 4월 10일 광주광역시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매주 토요일 열리는 ‘미얀마 민주주의를 응원하는 광주시민’ 6차 딴봉띠 집회에서 직접 영어로 전달한 메시지다.

목, 2021/04/2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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