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방송기자연합회 회장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방송기자연합회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답 : 지난 1월 30일에 방송기자연합회 10대 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 단체는 공중파 3사가 중심이 되어서 10년 전인 2008년에 만들었습니다. 기존에 있던 한국기자협회가 신문과 인터넷 매체, 활자 매체 위주로 돌아가는 반면에 방송기자연합회는 취재 이후에 제작 부담이 많은 방송기자들의 특수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방송기자는 출입처에서 퇴근해서 다시 방송사에 출근해 오디오를 읽고 영상을 편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KBS, MBC, SBS, YTN, MBN, OBS을 위시해서 케이블 뉴스 전문방송과 지역 공중파와 지역 민방을 포함한 59개의 방송사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종편 3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방송사가 가입해 있습니다. 현재 회원 수는 약 3천 명 정도입니다.
문 : 방송기자연합회는 어떤 일을 하나요?
답 : 방송기자연합회의 역할은 첫 번째가 특종상 시상, 두 번째가 기자 재교육, 세 번째가 방송보도 관련 연구, 네 번째가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 등 대외협력활동입니다.
첫 번째 특종상은 매달 이달의 방송기자상을 수여합니다. 5개 분야, 뉴스, 기획보도, 지역뉴스 등 5개가 있는데 이번에는 영상뉴스와 경제 분야를 추가해서 7개 부분에 대해서 수상자를 선정해서 상금과 상패를 줍니다. 한국방송학회 회장 등 교수님들과 공중파 3사와 YTN 등의 고참 기자들이 엄격하게 심사해서 월말에 시상합니다. 매년 1월에는 그해의 최고상인 ‘올해의 방송기자상’을 시상합니다.
어찌 보면 두 번째 재교육이 가장 중요한 사업입니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형사소송법도 알아야 되고요, 언론중재위에 갔을 경우 어떻게 대응해야 되는지, 또 새로운 트렌드에 맞춰서 빅데이터 마이닝은 어떻게 취재해야 하는지, 팩트체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의 재교육을 국내와 국외에서 진행합니다. 해외 유명한 언론 학자나 기자들을 초빙해서 재교육을 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 연구기능입니다. 2014년 세월호 침몰사고 보도에서처럼 오보가 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도 살펴봐야 했습니다. 또 한국 뉴스의 문제들과 개선책도 마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자들과 교수들이 저널리즘 아카데미팀을 구성해서 여러 연구들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끝으로 대외협력입니다.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는 등 참여합니다. 또 방송기자들이 출입정지등의 불이익을 당했다든가 어떤 특정사가 파업을 하거나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고 하면, 방송기자들의 입장을 정리해서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문 : 지난 9년 동안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권 시기 언론에서 억압적인 관행이 굉장히 크지 않았습니까? 방송기자연합회도 상당한 시련이 있지 않았나 싶은데요.
답 : 좀 전에 말씀드린 방송기자연합회에서는 재교육, 해외 연수를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보도국의 기자들이 보도국에서 쫓겨나는 일이 모 방송사에서는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방송사에서는 방송기자연합회에 더 이상 상근자를 보내지 않겠다, 연합회 회장이 인사를 와도 몇 년 동안 만나주지 않는 그런 여러 가지 비정상적인 일들이 많이 벌어져 왔습니다.
문 : 일종의 성명서 같은 것을 발표하는 일도 많았죠?
답 : 네 그렇습니다. 최근에도 자유한국당이 MBN 기자들을 출입정지 했을 때라거나 YTN 기자들이 또다시 파업에 들어갔을 때에도 저희들이 가장 앞장서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문 : 과거에 방송노조가 파업했을 때 지지성명 같은 것도 내고요.
답 : 지지성명은 일반적으로 내왔습니다. 돕지 못했던 때도 잠시 있었지만 지금 상황이 바뀌었죠.
문 : 달라진 환경이더라도 새롭게 회장에 취임했으니까 특별히 마음에 들고, 이것만 꼭 해보겠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겠다 이런 건 없나요?
답 : 사실 제가 연합회에서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인터뷰를 통해서 제 속내를 좀 드러내자면, 저는 만주에 있는 중국의 동북 3성에서 한국어로 방송하는, 조선말로 방송하는 방송기자들과의 연대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연합회의 이름 앞에 ‘한국’이 붙어있지 않은 것에도 선배들의 큰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 큰 시야를 가지고 회장직을 잘 수행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서 기자생활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답 : 1994년에 YTN 공채 2기로 입사해서 정치부, 사회부, 기획부를 거쳤습니다. 2001년 MBC 경력공채로 입사합니다. YTN와 MBC 양대 방송사와 기자들에 대해 소상히 아는 편이죠.
문 : 방송기자가 된 동기는?
답 : 1987년 6월항쟁 때 서울대 2학년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에 분개해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이 시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현장이 텔레비전 뉴스시간에 중계되었는데 각종 구호소리와 운동가요 등 생생한 현장음과 시민들의 인터뷰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특히 박종철의 고문치사 기사가 일간지에 실리고, 그 후폭풍으로 견고했던 독재 아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TV뉴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방송기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문 : 25년간 수많은 기사를 작성했을 텐데 어떤 기사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고, 또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답 : 앞에서 말했듯이 2001년 경력 기자로 MBC에 입사해 통일외교부로 발령났습니다. 그해 10월경 일본은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켜 테러지역에 일본자위대 병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에 저희 통일외교부는 자위대 해외파병 결정과 관련한 기획기사를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10월 30일부터 11월초까지 테러특별법 통과에 비추어본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야스쿠니신사 참배, 일본군국주의 부활, 한국에 진출한 일본 만화와 게임 등 대중문화에 파고든 군국주의의 모습을 부각시킨 ‘독도는 일본땅’ 그리고 ‘역사연구단체, 친일인명사전 편찬 추진’ 등을 연이어 방송에 내보내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보도가 나간 지 한 달 뒤 국회예결위는 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2억 8,000만 원의 정부예산을 지원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문 : 2001년 11월경 당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데이터 구축사업인 ‘일제식민통치기구•협력단체편람-국내편’의 국고(민간경상보조금) 지원을 요청해놓은 상태였습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필요성을 부각시킨 안 기자님의 취재 덕택에 국회의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돈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마중물이었던 셈입니다. 그 다음 기억에 남은 기사는 어떤 게 있나요?
답 : 검찰청 출입기자 때 특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인데 현직 대통령 아들의 금품수수 의혹과 관련한 압수수색 영장을 확보해 단독 보도한 것입니다. 또 휴대폰 통신요금 인하를 촉구하는 리포트를 40여 차례 방송했고, 2001년 9.11 테러 현장 취재와 2003년 이라크전쟁 종군 취재가 기억납니다.
2003년 7월에는 현대가 건넨 150억 원의 비자금을 박지원 씨의 측근인 김영완 씨가 세탁한 과정을 보도하여 정치권에 큰 파문을 일으켰죠. 이 보도로 저를 비롯한 MBC 보도국 기자들이 제154회 이달의 기자상 취재보도부문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문 :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 MBC의 풍토는 어땠나요?
답 : 이명박 정권 3년차인 2009년 11월경 제가 일하던 시사교양프로그램 ‘뉴스후’가 폐지되었습니다. ‘뉴스후’에서는 MB가 다니던 교회를 비판한 ‘세금 내지 않는 사람들’, 4대강 정비사업 등 국정과제 아이템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는데, 이런 뉴스들이 고위 임원들에 의해 커트당하다가 결국 프로그램 자체가 폐지되고 맙니다. 회사측은 주요 뉴스 앵커나 보직(정치・경제부장), 해외연수를 내걸고 기자들을 회유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인사권으로 기자들과 거래하는 거죠.
회사측은 이런 당근 정책뿐 아니라 채찍도 휘두릅니다. 2012년 MBC 170일 파업 때입니다. 강지웅 박성제 박성호 이용마 정영하 최승호 등 파업 주동자들을 해직하고 120여 명의 파업 참여자들을 정직시켰습니다. 특히 정직된 사람들에게는 정직 기간이 끝난 뒤에도 김재철 사장의 지시로 3~9개월 간의 교육명령을 떨어졌어요. 서울 송파구 신천역에 위치한 ‘MBC 아카데미’에서 브런치나 와인 감별 등 기사작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교양교육을 받았던 거죠. 교육생들은 그곳을 ‘신천교육대’ 혹은 ‘김재철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불렀습니다. 이 교육을 마치고 나서도 보도국 사람들은 경인지사나 사업부서 등으로 발령하여 방송보도 제작과 철저히 격리시켰습니다.
저도 신천교육대 과정을 마치고나서 라디오뉴스를 잠시 편집하다가 MBC 경영부서의 하나인 아카이브 사업부로 배치되었습니다. 방송영상 도서관으로 영상과 오디오 자료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녹음테이프에 라벨을 붙이는 것이 주요 업무여서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송보도를 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내가 기자 맞나 하는 자괴감이 몹시 들더군요.
문 : 방송정상화투쟁에 참여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답 : 2012년 파업 때 7개월 동안 집에다 월급을 주지 못했어요. 회사측이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적용한 거죠. 제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는데 그때 마침 초등학교 6학년 졸업반이었어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는데 경비가 100만원이었어요. 몇 개월째 월급을 받지 못한 터라 끼니나 겨우 해결하는 형편인데… 그런 거금을 마련하기가 까마득했습니다. 어찌어찌 그 돈을 마련해서 수학여행을 보내기는 했습니다만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문 : 오랜 투쟁 기간 좌절에 빠지지 않도록 버티게 해준 선배나 스승이 있다면?
답 : 경복고와 서울대 3년 선배인 김세진 열사입니다. 1986년 전방 입소 거부와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며 분신하기 바로 전인 4월 18일, 김 선배를 4.19기념식장에서 만났습니다. 항상 정의롭게 살라며 격려해주었습니다. 제가 힘들고 좌절에 빠질 때마다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저의 사표입니다.
문 : MBC의 앞으로 과제는?
답 : 작년 12월 최승호 PD가 MBC 사장으로 취임하여 해직자의 즉각 복직을 공표한 것에서 보듯이 MBC가 정상화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일단 하드웨어적인 틀은 갖추었으나 소프트웨어적으로 개선이 필요합니다. 최근 들어 시청률도 완만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의 제보가 필수적입니다. 그럼 정상화가 더욱 빨라질 수 있습니다
문 : 방송정상화 투쟁과 관계된 책을 집필중이라 들었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답 : 이제까지 한 인터뷰와 비슷한 내용의 소설입니다. 뉴스후 폐지 사태를 겪고 나서 이것을 소설로 쓰면 되겠다 싶어 시작했습니다. ‘촛불혁명’을 비유한 일종의 팩트소설이죠. 3선 국회의원인 여성정치인이 대권을 노리고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는 가운데, 기자들이 맞서서 그녀의 출산의혹과 해외원정 성매매 의혹을 파헤친다는 내용입니다. 참, 소설에서는 3선 의원 조부의 친일행각도 드러나는데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개정판을 만드는 과정에서 밝혀진다는 구성입니다. 며칠 전에 에필로그를 탈고했습니다. 조만간 서점에서 ‘딥뉴스’라는 제목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문 : 민족문제연구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답 : 2001년 청량리 금은빌딩 3층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관련해 취재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7년이 되었네요. 그때는 10평도 안 되는 허름한 사무실이었는데 용산의 연구소로 와보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연구소 이전을 축하드립니다. 5월에 개관할 식민지 역사박물관 건립 기금으로 제 소설의 인세를 일부 기증하고 싶습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 중 53%가 중국동포(조선족)이라 합니다. 이렇듯 한국에서 중국동포의 역할이 강화되고 우리나라의 외교・통일정책에도 영향을 미치리라 봅니다. 제가 아는 동년배 중국동포는 중국의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공무원으로 있는 분인데 한국의 중국동포 하대 경향에 매우 분개합니다. 연구소에서도 시야를 넓혀 해외동포문제와 통일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가 “조선이 독립국”임을 온세계에 분명하게 선포한 조선독립선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 선포한 ‘3·1독립선언서’는 침략자 일본의 잔인무도한 폭압 아래 칠흑 같은 어둠 절망에 빠져있던 이천만 겨레에게 한줄기 광명의 빛, 구원의 복음, 민족자주독립 희망의 등대였습니다.
그 무서운 총칼 앞에 태극기만 들고도 당당히 외쳤습니다.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힘있는 사람 힘없는 사람
부자도 가난뱅이도 귀한 사람 천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주인도 머슴도 집없는 거지도 조선사람이면 조선팔도 어디서나
서울사람 시골사람 산골에서 갯가에서 빠짐없이 전부 모두 함께
목소리도 하나 만세 하나로 삼천리강토가 온통 하나가 되어 만세파도로 덮여버렸어요.
간도 연해주 일본 하와이 타향살이 이민 유민 피난민 정신 번쩍 깨어 벌떼처럼 일어났지요.
만세! 만세! 총칼 앞에서 만세!
질질 끌려가며 조선독립만세!
매맞으며 만세! 감옥이 터져라 만세!
아 ~~~ 목숨까지 던지며 조선독립만세!
맨손으로 나서서 분풀이 안 하고 비폭력으로 맞서 보복은 없었지요.
기미 3·1만세는 유순하고 평화롭고 위대하고 숭고하였더라.
십년 동안 나라없이 살던 겨레가 이천만이 모두 주인되어 민주를 심었지요.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똘똘 뭉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3·1만세로 섰습니다.
‘3·1독립선언서’는 이 나라 민주의 뿌리, 대한민국의 든든한 뿌리입니다.
백년 지난 지금도 삼천리 반도는 강대국이 탐내는 먹잇감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백년 후 그 다음 백년 후에도 우리 겨레의 땅
우리 강토 지켜내려면 자력 자립 자강 자주독립정신만이 생명선입니다.
‘3·1독립선언서’는 이땅 우리 겨레의 영원한 보물 나침판입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강대국 횡포에 시달리는 피압박 약소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줍시다.
3월 12일 오후 5시, 연구소 3층 회의실에서 헤럴드경제 기자인 김수한 후원회원을 인터뷰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2001년부터 20년 가까이 연구소를 후원해 온 김수한 회원이 작년 8월 동국대학교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연구 주제가 이례적으로 김정일·김정은 정권하의 북한 언론 현황에 관련된 것이었다.몇 년 전부터 ‘기레기’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언론 개혁과 기자들의 자질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요즘, 현직 기자로서 여전히 금단의 영역이면서 조심스러운 북한문제, 그것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북한언론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문 : 연구소는 언제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나요?
답 : 제가 95학번(고려대 노어노문학과)인데 2001년 2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앞둔 상태에서 방학진 당시 사무국장 권유로 가입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복학 후에 연구소에서 주최하는 강좌나 소모임에 가끔 나갔었고, 2002년 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친일 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전시회 때 자원봉사도 했었죠. 그 무렵 누군가 고대 인촌(김성수) 동상에 페인트를 뿌린 사건이 발생했는데, 고려대 영자신문사 기자 출신으로서 ‘큰 사건’이라는 직감이 들어 방 국장께 전화해 사건을 알리기도 했었어요. 그때 방 국장이 전화통화 직후 즉시 고대로 와서 함께 현장을 둘러보기도 했었죠.ㅠ
문 : 1997년 창단된 한국축구 국가대표 서포터즈인 ‘붉은악마’로 활동했다고 들었는데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말씀해 주세요.
제가 1997년 8월 고려대 영자신문사 편집국장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어요. 그때가 3학년 1학기를 마친 상태인데, 막상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오니 ‘은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체감이 좀 됐었어요. 신입생이던 1학년 1학기에 신문사 수습기자로 입사해 꼬박 2년 반의 기간을 기자로서 바쁘게 활동하며 학업도 병행한 셈인데 영어로 기사를 쓰랴, 전공 공부하랴 정말 바빴거든요.
근데 막상 ‘퇴임’하고 보니 별로 할 게 없는 거에요. 그동안 신문사 활동하면서 구멍 난 학점을 메꾼다거나, 자격증을 준비한다거나 이런 목표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표현으로 하면 ‘번아웃’(어떤 일에 과도하게 몰두하다가 에너지가 방전된 것처럼 갑자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 왔는지, 아니면 군 입대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암튼 좀 쉬고 싶었어요. 제가 일하던 신문사 편집국은 퇴임 후에도 여전히 집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좀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그 무렵부터 학교 수업이 끝나면 혼자서 축구를 보러 경기장에 다녔어요.
제가 경북 포항 출신인데 당시 K-리그의 포항스틸러스를 응원하러 다닌 거죠. 그때 우리 프로축구계에는 ‘서포터’라는 개념의 유럽식 축구 응원 문화가 서서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그 경기가 열리는 스타디움에서 12번째 선수로서 응원에 참여하는 거죠. 서울과 포항을 오가며 경기를 쫓아다니다보니 포항스틸러스 서포터들끼리 많이 돈독해졌어요. 우연히도 당시 포항스틸러스 서포터 회장이 고등학교 후배이자 이동국 선수(당시 포항스틸러스 소속)의 중학교 동창이었고, 그밖에도 포항공대에 다니던 축구 매니아 형님, 대구에서 포항팀 응원하러 포항 경기 때마다 포항으로 오시던 형님, 포항스틸러스 구단 프론트에서 일하던 박대리님 등과 팀웍이 잘 맞아서 정말 즐겁게 축구를 보러 다녔어요. 그런데 그때까지 지금은 ‘붉은악마’라고 불리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서포터가 만들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당시 각 프로팀 서포터는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같은 PC통신 동호회에서 공지사항과 각종 의견을 주고받았는데요. 그때가 97년 8월 15일이었어요. 그날 나이키 초청 한국 : 브라질 친선경기가 잠실경기장에서 열렸는데, 그 경기를 앞두고 각 프로축구팀의 서포터들이 붉은 색의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맞춰 입고 힘을모아 대표팀을 응원하자는 쪽으로 생각이 모아졌어요. 그리고 그 생각이 정말 실행으로 옮겨져서 각자 유니폼 비용을 계좌이체로 납부하고, 당일 경기장에 가서 물결 무늬의 붉은 색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배부받았어요. 저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K-리그 각 팀 서포터들이 사상 처음으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한 곳에 모여서 응원하는 역사적인 이벤트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때 기분은 그냥 뭐랄까, 정말 뭔가 엄청난 잠재력과 에너지가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요. 암튼 너무 뿌듯했고, 기뻤고, 떨리고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날 경기 내용도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한국이 세계 최강 브라질을 맞아 전반전에 1대0으로 앞서 가다가 후반전에 2골을 먹고 2대1로 지긴 했지만, 정말 잘 싸웠어요.
그날의 흥분과 감동이 오늘날 붉은악마가 태동한 배경이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97년 9월 28일 우리가 흔히 부르는 ‘도쿄대첩’이 터집니다. 붉은악마 50여 명이 당시에 일본 도쿄 요요기 국립경기장으로 가서 응원전을 펼쳤는데, 저도 그 50여명 중 한 명으로 참가했습니다. 일본에게 1대0으로 지고 있다가 후반전 들어 서정원, 이민성이 동점골, 역전골을 넣어서 한국에서는 9시 뉴스에 ‘후지산이 무너졌다’, ‘도쿄대첩’ 등으로 난리가 났었지요.
1998년 새해를 맞아 고민 끝에 1학기를 휴학하기로 했어요. 그때도 고심했지만 지금 지나고나서 되돌아봐도 나름 인생의 큰 결단이었습니다. 1998년 6월에 프랑스 월드컵 본선이 열리는데, 제 어릴 때 꿈이 ‘1998년 월드컵 경기장에 가는 것’이었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죠. 실제로 프랑스에 가든 안 가든 일단 월드컵이 열리니 오롯이 월드컵을 만끽하자,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닌다면 학점이 엉망일 것이고, 등록금을 낭비하게 될 것이고, 복학해서 학점을 올릴 기회도 없어지게 될 테니 나름의 합리적인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월드컵이 열리는 6월이 다가오면서 붉은악마 사무국에서 원정응원 명단을 짜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프랑스에 간다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붉은악마는 예선 3경기를 다 보는 1진(14박 15일), 예선 2경기를 보는 2진(9박 10일), 예선 1경기를 보는 3진(4박 5일) 등 3개의 일정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2진으로 갈려고 했는데 제가 군 미필자에 휴학생이라 해외여행허가가 안 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어요. 게다가 2진 참가자가 내야 하는 경비가 200만원을 상회했는데 유럽 여행용 경비로서는 저렴한 편이었지만, 학생으로서 뾰족한 수도 없었어요.
저는 거의 반포기 상태가 되어 포항집에 내려가 있었어요. 그냥 ‘이제 좋은 추억으로 묻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붉은악마 회장(신인철씨)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너 꼭 갈거냐’고 묻길래 “꼭 가고 싶다”고 했더니 광화문으로 오라는 거에요. 그래서 서울로 다시 갔습니다. 가보니 군 미필자이면서 휴학생인데 프랑스 월드컵 본선 응원을 가겠다는 저 같은 동년배들이 6~7명 있었어요. 이들이 다 함께 모여 당시 광화문에 있던 문화체육관광부로 가서 공문서를 1장 받게 됩니다. 붉은악마 회장이 미리 요청해 장관 결제가 이뤄진 문서였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명의의 이 공문서에는 ‘이들이 프랑스로 월드컵 응원을 가고자하니 병무청장은 이들의 해외여행을 허락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 문서를 받으러 정부청사를 방문한 우리들에게 ‘건강하게 잘 다녀오시라’며 환하게 웃던 공무원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문 : 어떻게 헤럴드경제에 입사했나요?
답 : 포항제철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지 ‘월계수’의 편집부장으로 활동했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고려대 영자신문사 The Granite Tower에서 기자생활을 했어요. 1학년 때 수습기자를 거쳐 2학년 때 기자, 부장을 거쳤고 3학년 때는 편집국장을 했습니다. 고려대 졸업과 동시에 경기도 남양주 광릉수목원 자락에 위치한 경희대 광릉캠퍼스 평화복지대학원에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는데 여기서는 영문 학술지 ‘피스포럼’의 편집장으로 활동했어요. 입학생 중 싱가포르, 벨기에, 필리핀 등 외국인 학생들이 있어 강의와 졸업논문을 영어로 써야 하는 특수한 환경이어서 영어 훈련에 도움이 많이 된 거 같아요.
대학원 졸업을 앞둔 2004년 말 언론사 시험을 보다가 막연히 유학을 준비하면서 영자신문 코리아헤럴드 사설을 매일매일 읽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사설을 프린트하던 중 코리아헤럴드 수습기자 채용 공고를 보고 ‘혹시?’ 하는 생각에 지원을 했습니다. 대학교 영자신문사 기자로 활동했고, 영문 학술지 편집장도 했고, 영문 논문도 쓰고,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필기시험을 통과한 거 같아요. 영자신문 기자로 입사한 지 3년여 뒤에 같은 회사의 국문 경제지인 헤럴드경제로 옮겨왔습니다.
국문 경제지로 옮겨온 이유라면, 일단 영자신문 기자로서 평생 커리어를 쌓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요. 이런 고민을 지금은 작고하신 민영빈 YBM 회장님을 찾아가 털어놨더니 의외로 쉽게 ‘국문 매체로 가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그분의 조언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한 민 회장님은 재학 당시 고려대 영자신문을 창간한 장본인이셨고, 졸업 후 첫 직장이 코리아헤럴드였거든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제가 당시 회장 비서실에 문의하니 의외로 ‘몇날 몇시에 회장실로 오라’고 연락을 주셔서 2시간이 넘게 그분의 인생이야기를 듣고 제 인생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회 초년병의 SOS 요청에 흔쾌히 시간을 내어주신 그분께 항상 빚을 지고 있는 기분입니다. 회장실에 찾아갔더니 당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으시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에게 첫 일성이 “너는 내 학교 후배에, 학교 신문사 후배에, 직장 후배이기도 하니 그냥 편하게 얘기하자”였습니다. 그날 주신 여러 조언에 대해 두고두고 감사하고 또 후배들에게 그분처럼 베풀고자 합니다.
헤럴드경제에서는 사회부, 연예부, 부동산팀 등을 거쳐 현재 정치부 외교안보팀 차장을 맡고 있습니다.
문 : 기자생활을 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때는 언제였나요?
김수한 기자가 싸이월드에 올려놓은 ‘오세훈 불출마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기사를 캡쳐한 것
답 : 독자들로부터 좋은 기사를 썼다는 칭찬과 격려를 들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지금 돌아보니 특히 기억에 남는 기사로는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찬반 논란 관련 기사, 윤봉길의사의 사진 진위 논란 기사, 아파트 실명을 노출해 독자의 항의를 받은 부동산 기사가 떠오릅니다.
2010년 8월께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무상급식안에 대해 오세훈 서울시장이 반발하면서 무상급식 여부를 주민투표에 부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과정에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오 시장은 주민투표 결과에 자신의 시장직 사퇴까지 결부시켰고, 결국 시장직을 사퇴하게 됩니다.
당시 이 사안의 전후 사정을 담담히 써내려 간 ‘오세훈 불출마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제하기사에 독자들의 폭발적인 성원이 답지했습니다. 비록 그 기사는 당시 서울시장 측의 문제 제기로 삭제됐지만, 그때 독자들이 보내주신 댓글은 지금도 잘 간직하고 가끔 읽어보고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사진 진위 논란 기사도 의미 있는 기사입니다. 국가보훈처는 2008년 10월 8일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뒤 체포된 윤봉길 의사가 연행되는 사진에 대해 “진짜”라는 의견을 냅니다. 교과서에도 실린 윤봉길 의사의 연행 장면을 찍은 사진이 진짜라니, ‘그동안 가짜였나?’ 하는 의문이 들어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진위 논란이 일고 있는 윤봉길 의사 체포 당시 사진
그러다가 연구소의 방 국장으로부터 윤봉길 의사 사진 진위 논란을 처음 제기한 강효백 경희대 교수 이야기를 들었고, 강 교수로부터 윤 의사의 연행 사진은 가짜라는 의견을 다시 확인해 ‘사진 속 인물 윤봉길 아니다-강효백 교수 반론’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정부 기관은 ‘진짜’라고 했는데 논란을 제기한 주인공은 ‘가짜’라는 의견을 굽히지 않고 여전히 대립하는 이상한 사안이었습니다.
과거 상해 영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강 교수가 당시 사건 기록과 신문기사 등으로 재구성한 연행 정황은 사진과 많이 달랐습니다. 사진 속 남성은 일본 경찰로부터 신사적으로 연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 윤봉길 의사는 실신할 정도로 심하게 구타를 당해 달구지에 시체처럼 내동댕이쳐져 옮겨졌다고 합니다. 이런 정황이 당시 신문기사 등에 생생히 남아 있었고, 강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기존 연행 사진이 가짜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당시 김학준 ‘윤봉길 기념사업회’ 회장이 호응하고 성형외과 등 전문가 그룹이 윤봉길의사 사진과 연행 장면 사진을 비교해 연행 장면의 남성은 윤봉길 의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명박 정부 출범 얼마 후 국가보훈처가 그 사진에 대해 다시 “진짜”라는 의견을 내 논란이 된 것입니다.
이후 이 논란은 SBS 저녁 8시 뉴스와 SBS 스페셜 다큐멘터리 등으로 다뤄져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2011년 3월 1일 SBS 저녁 8시 뉴스에서는 “윤봉길 의사 아니다..연행사진 조작가능성 커”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이 기사는 “거사 직전 찍은 윤 의사의 사진을 3차원 영상으로 복원해 문제의 사진과 비교한 결과에서도 두 인물은 달랐다는 결론을 얻어냈다”며 “무참히 폭행당한 윤 의사의 모습이 공개될 경우 식민지 한국과 침략 중이던 중국 국민들을 크게 자극할 것을 우려해 일본군이 사진을 조작했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의견을 전했습니다.
또한 같은 날 3·1절 특집다큐 ‘일본이 찍은 체포사진 속 인물, 그는 윤봉길인가’에서 해당의혹이 보다 심도 있게 다뤄졌습니다. 강 교수는 요즘도 가끔 저에게 “윤봉길 의사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종종 전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제가 작성한 아파트 가격 하락 기사입니다. 당시 아파트 가격이 폭락한 상황을 기사화하면서 아파트 실명을 기사에 그대로 썼는데, 이 기사가 포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입니다. 급기야 그날 오후 해당 아파트에 거주한다는 한 독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독자님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실명을 써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며 전화기 너머로 큰 소리로 흐느끼셨습니다. 경험이 적었던 기자 초년병 시절의 한 해프닝이었습니다. 저는 ‘본의 아니게 일부 주민들게 큰 피해를 초래한 게 아닌가’ 하는 반성과 함께 해당 아파트의 실명을 이니셜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주신 독자분께 사과의 말씀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독자분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 기자 생활을 하는 내내 종종 불현듯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그분은 “기자님, 독자의 항의를 받았다고 해서 바로 소신을 꺾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라면서 본인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항상 자녀에게 “‘소신 있게살라’고 조언한다”고 하셨습니다. 언론인으로서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에 대해 보다 진지한 자세에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접근해달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문 : 북한문제에 대해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답 : 제가 대학교에 입학한 1995년은 학생운동이 점차 사그러드는 시기였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막연히 가졌던 대학생활에 대한 환상은 현실과 많이 달랐고, 학생운동은 점차 갈 길을 잃고 있었습니다. 입학 후 내내 머릿속에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화두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영부영 신입생 환영회 등의 통과의례를 모두 치르고, 온갖 술자리에 끼며 미래를 탐색하던 시절, 우연히 학교 신문사 수습기자 채용공고를 보고 신문사 입사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다행히도 합격을 하였고, 대학생 기자로서 학내 문제와 국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이슈와 국제 이슈를 보다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학생운동의 종언은 우리 세대가 맞이한 큰 사회적 흐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일제 강점기의 시대정신이 ‘독립’, 군사독재 시절 시대정신이 ‘민주화’였다면, 90년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온 이른바 X세대들의 시대정신은 ‘통일’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점차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어쩌면 사치스러운 바람이겠지만, 상황이 허락된다면 이 땅의 통일을 위해 인생을 바치고 싶다’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에서 2006년 2월 석사 논문으로 한국과 미국의 탈북자 정책을 비교하는 내용을 주제로 삼았고, 2011년 동국대 북한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19년 마무리한 박사 논문에서는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 로동신문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주제로 했습니다. 석사논문 제목은 「The R.O.K. and U.S. Policies on North Korean Refugees(북한 탈북자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정책 연구)」(영문)이고, 박사논문은 ‘김정은 권력승계시기 로동신문의 변화 연구:편집국 인적 구성과 기사내용 특징을 중심으로’입니다.
문 : 박사학위논문에서 로동신문사의 편집국 인적 구성과 기사내용 특징을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북한 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답 : 자료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연구자들이 정해진 신분인증 절차에 따라 자료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만, 논문을 쓰기 위해 실제로 어려운 건 자료 분석입니다. 로동신문 수년 치 자료를 모아서 이를 다양한 분석 기법을 활용해 여러 면에서 분석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웠습니다. 저는 자료 분석에만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논문을 쓰기 위한 자료분석에 기나긴 시간을 할애하다보니 때로는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 같고, 아무 것도 안하면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박사논문을 쓰기 전에 방법적으로 서툴러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습니다. 박사 논문을 시작하기 전에 로동신문을 주제로 한 소논문을 쓰기 위해 약 3개월치의 로동신문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요.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로동신문을 복사해 자료를 모으다 보니 약 3개월치 신문 자료 확보에 2달여를 허비하기도 했습니다.
문 :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가 김정일 사망부터 김정은의 권력 공고화 시기까지인데 이 기간에 로동신문의 변화 양상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세요.
답 : 제 박사 논문의 결론을 단순화하면 딱 2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김정일 시대에서 김정은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로동신문 편집국의 규모가 축소됩니다. 대략적으로 말씀드리면 김정일 시대 로동신문 편집국에는 278명의 기자가 소속돼 있었는데, 김정은 시대로 접어들면서 기자 수가 189명으로 급감합니다.
둘째 결론은 김정일 시대에서 김정은 시대로 넘어가면서 로동신문의 내용이 크게 달라집니다. 김정일 시대에는 정치나 사상과 같은 주제가 신문의 메인 주제였다면 김정은 시대에 가장 중요시되는 주제는 ‘경제 발전’이나 ‘과학기술 강조’ 등입니다.
이 결론을 내리기 위해 김정일 시대에서 김정은 시대로 이어지는 기간을 중대한 정치적 사건을 기점으로 총 5개 시기로 구분하여 2008년부터 2016년까지 로동신문 기명 기사 1만3252개를 분석 대상으로 하였고, 5개 각각의 시기별로 약 3000여개의 기명 기사를 전부 수작업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이 자료를 기자별 기사 리스트로 재가공해보니 기자별 10~20개의 기사 목록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기자마다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분야의 기사를 꾸준히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기자별 소속 부서를 유추할 수 있었고, 분석 기간 중 로동신문에 이름을 올린 기자의 소속 부서를 모두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결국 5개 시기별 로동신문 편집국 조직도를 추정적으로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5개 시기별 로동신문 편집국 조직도가 도출됨에 따라 5개 시기별 로동신문 기자들의 부서 이동 현황도 추적할 수 있었습니다. 예상 밖으로 로동신문 기자들의 부서 이동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다만, 대남 및 대미 메시지를 내는 조국통일부와 국제부 소속 기자들의 부서 이동은 상당히 제한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시기별 분석의 기간을 얼마만큼으로 잡았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사실 일간지 기자의 면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1주일치 기사만 분석해도 부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언론인 로동신문의 특성을 고려해 처음에는 5개 시기별 1개월치 기명 기사를 전수 분석하였는데, 왜냐하면 일간지 기자로서 1개월동안 기사를 1건도 쓰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구과정에서 공산주의 언론의 특성을 고려하여 이 기간을 처음에는 2개월치로, 3개월치로 계속 늘려보다가 최종적으로 시기별로 6개월치의 기명 기사를 전수 분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1주일치에서 1개월치, 2개월치로 늘렸다가 결국 6개월 동안 1건의 기사도 쓰지 않는 기자까지 잡아낼 수 있도록 연구 범위를 확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편집국 조직도가 구체적으로 파악된 후에는 신문의 내용 변화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서구 신문방송학계에서 사용하는 내용 분석 기법을 차용하여 5개 시기별 로동신문 내용을 분석한 결과 김정일 시대와 김정은 시대 초기까지 로동신문에서 가장 빈도수가 많았던 기사주제는 ‘사회주의 혁명사상 고취’였으나, 김정은의 후계 체제가 공고화된 5번째 시기부터 ‘경제발전’을 주제로 한 기사들이 가장 빈도수가 많은 기사로 올라서는 변화가 포착되었습니다. 또한 1~4 시기에 주로 중하위권에 있었던 ‘과학기술 강조’ 관련 기사가 빈도수 3위로 올라섭니다.
이러한 논문의 결론은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방만한 구조의 로동신문 편집국 구조를 효율화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을 한편에서 제기하며, 또 한편으로 김정은 집권 후 실시된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주장한 비핵화 수용 및 경제 발전 추구 기조가 하루아침에 나타난 정책적 기조가 아니라 김정은 집권 후 서서히 꾸준한 과정을 통해 ‘빌드업’된 기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문 : 북한언론 연구에 있어서 참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내셨네요. 축하드립니다. 끝으로 연구소와 후원회원들한테 당부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지요.
답 : 제가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본 연구소는 이미 상당한 성과를 내었고, 앞으로도 계속 큰 성과를 내실 거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역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들 수 있습니다. 연구소가 방대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완료함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친일반민족 인사 여부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자체가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일부 친일 인사들에 대한 논란 자체도 더 이상논의가 무의미할 정도로 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이 ‘논란 종결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12년에 국방부에서 백선엽 장군에 대한 뮤지컬을 만든다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언론 브리핑에서 그 분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분인데 굳이 뮤지컬까지 만들어야 하느냐는 기자의 질의가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 얼마 뒤 뮤지컬 제작 계획 자체가 취소되었습니다. 그 취소의 배경에 친일인명사전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인사를 검증할 때 이런 식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이라는 검증요소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입니다. 그만큼 연구소가 사회에 확고한 기준을 제공하는 기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연구소의 이런 긍정적인 측면도 물론 중요하지만, 일부 정치세력들이 연구소를 특정 정치이념에 편향된 집단으로 매도하고 비판하는 경우 또한 없지 않습니다. 이른바 ‘좌파’ 단체로 규정하고 연구소의 목소리에 색깔론을 씌우고 비판하는 것이죠.
저는 앞으로 연구소가 이러한 편견을 깨고 한 발 더 도약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어떠한 정치이념에 편향됐다는 비판에 휘말리지 않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연구를 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남북이 진심으로 통일에 대해 논의하고,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는 시대가 곧 다가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때에 대비하여 우리 사회에서 향후 우리 사회 안의 친일문제에 대해 보다 더 활발한 논의가 진행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을 앞두고 나라를 한 번 고쳐 세우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이러한 논의를 위한 성숙된 이론적 기반과 자료 연구 및 조사가 밑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남북통일을 더욱 당당히 맞이하기 위해 앞으로 연구소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9년 11월 10일 오오타(大田)민단 주최의 역사탐방 여행으로 시즈오카의 淸見寺를 찾았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 후지산도 멋지게 보였고, 마침 이날이 일본의 새 천황 즉위 퍼레이드가 있는 날이라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여행했다.
올해는 무오독립선, 2·8독립선언, 3·1혁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뜻깊은 해이다. 그야말로 선열님들의 해이다. 선열님들의 뜻을 이어받아 동북아 평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뜻깊은 올해에 불행하게도 한일관계는 최악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그 옛날, 양국은 원한과 불신의 상처를 딛고 조선통신사를 통해 평화와 교류의 역사를 200여 년간 이어왔다. 한일관계의 틈새에 끼어 살고있는 우리 재일동포들이 어찌 그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그리워하고 다시 새겨보고 싶지 않겠는가?(조선통신사와 관련한 여러 유물들이 한일 두 나라의 시민사회의 노력에 의해 2018년 유네스코의‘세계기억유산’에 등록되었다.)
淸見寺에 도착하여 안내 설명을 듣다가 우리 일행 모두가 깜짝 놀랐다. 2019년 7월 7일자 동경신문 기사의 복사본을 배부받았는데, 그 기사 내용에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가을에 일본을 방문하여 淸見寺에서 아베 수상을 만날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다.(2018년은 양국의 문화교류를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수상이 함께 발표한 ‘한일관계 파트너십 선언’ 20주년이 되던 해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이후 강제징용문제, 수출규제 강화문제, 지소미아문제 등으로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동경신문은 이 어려운 한일관계에 국민들의 대립감정을 진정시키고 대화를 통해 길을 찾기 바란다며 꿈으로 끝난 淸見寺에서의 한일 정상의 만남을 다시 꿈꾼다며 글을 맺고 있다.
두 정상의 만남을 가장 간절히 바라는 건 재일동포들이 아닐까? 한일 두 나라가 갈등하면 몇 배가 더 아프고 두 나라가 잘 지내면 평안하게 꽃피는 존재가 바로 재일동포들이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은 일제시대 살길을 찾아 건너온 동포들의 후손으로부터 뉴카마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선통신사가 머문 淸見寺를 찾아가는 날도 이런 다양한 재일동포들과 일본인도 함께 했다.
조선통신사는 처음엔 두 나라의 정치적인 목적이 우선이었다고 한다. 조선측에선 조선포로 귀환, 일본정세 파악 등이었고 일본측에선 도쿠카와 이에야스 막부의 새로운 외교방침, 국내정치적 목적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엔 문화교류로 확대 발전되어 조선의 선진문물이 일본에 많이 전해졌고 일본 문화도 조선에 전해지는 무지개 가교였다. 마침 그날 여행에서 출출할 때 먹으려고 고구마를 삶아 가져갔다. 고구마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작물로 많은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낸 구황작물이 되었다.
한편 조선의 선진문물 중에서 일본에 전해진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허준의 <동의보감> 속의 의술이 일본에 전해져 많은 일본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귀한 역할을 했다. 그 귀한 역할을 이 시대 재일동포에게 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사회를 일본인들과 함께 만들며 공생하는 재일동포들, 그러나 재일동포 문제가 한일협정 때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동포들은 일본사회에서 차별받고 한편 조국의 버림 속에서 살아왔다.
몇 겹의 고통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 동포들이 이제 노령을 맞아 몸의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동의보감’이 이 시대 재일동포들에게 빛과 힘이 되어주기를 희망해본다.(<동의보감>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으로 끝난 한일정상회담이 다시 열려야 한다. 그 정상회담이 열리는 장소는 작년 오오타민단에서 역사탐방을 간 ‘고마진자(高麗神社)’ 쯤이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그곳은 고대 양국간의 풍요로운 교류가 있었음을 증거하는 곳이다.
꽁꽁 묶인 한일관계가 부디 잘 풀리기를 기원하면서 내년의 역사탐방은 좀더 재일의 뿌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 떠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오오타민단 지부에 전한다.
• 이 감상문은 오오타민단 소식지 제85호(2020.3.27.)에 간략히 실렸다.
이 글은 2019년 9월 25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위안부’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 ‘역사부정’을 논박한다> 토론회에서 발표한 토론문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1. <반일 종족주의>에는 역사도 없고 인간에 대한 존중도 없다
이영훈 등이 낸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주류적 역사해석에 대한 도발, 상식의 해체, 단언적 서술 등을 통해 명쾌하고 매력적이라는 인상과 느낌을 주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모양이다.
현재 한국의 정치지형 속에서 일정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 대부분은 그들이 약속한 실증이 아니라 불합리한 추론(non sequitur)과 논리적 비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겉으로는 전문서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학술적 뒷받침이 없는 ‘가짜’ 학문에 불과하다. 결국 대중을 겨냥한 또 하나의 역사를 부정하는 선동에 그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은 강제동원과 전시 성노예로서의 ‘위안부’의 부정에 할애되어 있다. 이들은 피해자의 증언을 모두 거짓말로 등치시키고 예외에 속할 일부 사례를 들어 전체의 것으로 일반화하는 오류 등을 범하고 있다. 또한 구술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물론 피해자의 관점과 그들의 인권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다. 이 책은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범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은폐하고 용인하는 반역사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의 주장은 “선진국”이라는 가치를 설정한 것 말고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부정하는 반윤리적 성격을 가진다. 이는 침략전쟁의 죄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일본정부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책임의 부정은 법과 정의에 기반을 두고 발전하여온 문명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강제동원에 관한 진실을 두고 “조총련계 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태연히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이 낳은 “빨갱이” 망령과 냉전적 사고에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절멸의 대상인 적으로 설정하면서 역사전쟁을 운운하고 있다.
역사란 마치 각자의 진영 속에서 진실이라곤 끼어들 틈이 없는 오직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의 플레이라는 인식과 잘못된 지난날이 반복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들이 구성하는 역사는 한마디로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와 더이상 같이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앞으로 올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는 역사”라고 할 것이다(Specters of Marx(마르크스의 유령들), xviii).
2. <반일 종족주의>는 식민지 범죄에 대한 은폐이자 역사범죄이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의 무리한 주장의 기반이 어딘지도 주목된다. 이들의 주장은 특히 2012년에 나온 강제동원에 관한 대법원 판결을 뒤집으려고 했던 사법적폐 세력의 주장과 판박이다.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2018년 10월 30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하여 일본의 가해기업인 신일본제철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으로서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에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일본정부는 즉각 이 판결에 반발하였고 한일 간의 갈등이 계속 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반일 종족주의>란 책이 나왔고 대법원의 판단과는 동떨어진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대법원 판결이 청구권협정에 위배된 것이라며 판결을 무력화하려는 일본정부의 주장과 닮아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저자들이야말로 “친일 종족주의자”라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이 책은 기득권을 지켜보고자 하는 세력의 매니페스토(manifesto)임과 동시에 피해자들의 삶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슬픈 인생에서 나온 피해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 발언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반일 종족주의>란 책을 학문이나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역사부정 문제에 대하여 전 세계적인 대응노력이 주목된다. 유대인에게 자행된 홀로코스트나 나치범죄는 물론이고 아르메니아 학살과 같은 제노사이드나 반인도적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온갖 시도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형사입법과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다. 식민지배 시기 동안 있었던 학살, 수탈 등 식민지범죄에 대한 관심과 탈식민주의 요구는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오히려 커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각종 과거사정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한계도 많이 보이고 있다.
대일 과거사문제 역시 단박에 청산되거나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인권침해에 대하여 국제법상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가 적용되어 단죄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중대한 범죄자가 처벌되지 않는 이른바 불처벌(impunity) 문제에 대한 고민과 불처벌의 현실 속에서 확산되는 역사부정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 방안도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3. <반일 종족주의>에는 민족이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국사회의 이른바 주류적 역사서술과 피해자운동을 “반일 종족주의”라고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반일 종족주의”가 무슨 말인지 정의조차 하지 않는다. 이들에 따르면 이 말은 물질주의와 거짓말을 토템으로 하는 샤머니즘에 사로잡힌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20-21쪽). 이 샤머니즘의 집단이 바로 종족이며 이웃을 악의 종족으로 감각한다고 한다.
‘종족’(tribe 또는 ethnic group)이란 말을 현재와 “지난 60년간의 정신사”에 대한 설명을 위해 쓰고 있는 모양이지만 하나의 분석개념으로서 갖추어야할 기초적인 엄밀함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름붙이기를 통하여 분석 단위로서 ‘민족’이란 개념을 비하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이러한 호명의 근거로 들고 있는 것 역시 민족이란 집단 현상을 도외시한 원자론적 서사와 감상의 나열이 그치고 있다.
이렇게 민족주의와 종족주의의 차이를 말하지도 못하는 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은 일제 강점이전의 조선이 갖는 국가성과 근대지향을 부정하려는 기획을 드러낸다. 국가 또는 민족이라는 양가적 의미를 가지는 ‘네이션(nation)’으로서 조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과 현대 한국의 네이션을 종족으로 대체하는 반역사적 태도를 통해 그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주류적 역사인식을 뒤틀고 있다. 하지만 이 땅에도 서구에서 만들어진 보편적인 범주로서 네이션은 현실로서 있었고 이 개념은 오늘날까지도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며 부단하게 펼쳐지고 있으며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실증의 근거로 제시하는 문서나 수치들은 바로 식민지배의 정당화라는 틀 속에서 작성된 것이라는 사료비판도 없다. 결국 이들은 문서작성자의 세계관에 동조한 나머지 일제의 식민지배는 나쁘지는 않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곧 일제의 통치를 미화하려했던 식민사관의 후예라고 할 만하다.
4. <반일 종족주의>에는 일제의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대한 비판도 없다
이 책은 또한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비판이 없이 마치 강제동원과 ‘위안부’의 역사를 신화인양 부정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이라는 책에서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를 비판하며 인종주의와 결부된 “종족적 민족주의”를 말한 바 있다. 이들이 한국사회를 비판하며 제시한 종족주의라는 말은 오히려 제국주의 일본의 민족주의 비판에 걸맞다. 반일 종족주의를 말하기에 앞서 일제의 파시즘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책은 일제에 의한 “주권강탈”(42쪽)을 말하긴 한다. 그러나 식민지 통치시스템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일제는 조선을 ‘병합’하여 일본의 일부, 즉 자기나라로 만들었지만 식민지로 통치하였다는 모순은 해명되지 않는다. 일제의 통치가 잘된 일이었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에 바쁘다. 명색은 한일병합이라고 떠들었지만 현실은 식민지배를 상징하는 총독에 의한 통치였다는 점, 조선총독은
역사란 마치 각자의 진영 속에서 진실이라곤 끼어들 틈이 없는 오직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의 플레이
라는 인식과 잘못된 지난날이 반복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섬칫하기까지 하
다. 이들이 구성하는 역사는 한마디로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와 더 이상 같이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앞
으로 올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는 역사”라고 할 것이다
천황 이외에 어떠한 법적 통제를 받지 않았고 군대에 의해서만 지배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 식민지 조선에 실시한 법이라는 것은 천황제 아래 삼권을 가진 총독의 의사에 좌우되는 전제적인 것이었고, 그 마저도 일본 내지의 법과 별개의 이원적 체계로서 관료체제를 통제하지도 못했으며 오로지 식민통치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주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채 종주국의 이익에 철저하게 봉사하는 법이었다는 점, 일제의 식민지배에 법이 어떤 역할을 했다고 하기보다는 법은 통치술의 하나에 불과했다는 점, 이러한 법 현실은 언제나 정의의 공백을 낳았고 오늘날까지 정의를 갈구하는 피해자들의 외침으로 현재화되고 있다는 점, 병합은 결국 영토의 통합 즉 일제의 영토 확장이었지 국민간의 통합이나 EU식 지역통합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조직적인 민족차별을 낳고 끝내 죽음의 강제동원으로 주민들을 내몰았다는 점, 병합과 식민통치 방식 사이의 모순은 결국 민족자결의 요구로 분출할 수밖에 없다는 점 등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해방’이라는 것은 민족과는 무관한 일이 되고 ‘독립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국권회복을 말할 여지가 없이 1948년에 건국했다는 스토리와 연결된다. 이는 바로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보여주고 지금도 일본의 우익이 견지하고 있는 역사관, 즉 일제의 패전으로 한국이 분리독립하게 되었다는 역사서술의 한국판이다.
5. 청구권문제와 강제동원문제는 끝난 게 아니다
한일 청구권문제와 관련하여 주익종은 특히 “애당초 한국 측이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와 “한일협정으로 일체의 청구권이 완전히 정리되었”다를 “팩트”라고 주장한다(115쪽). 그가 얘기하는 팩트라는 것이 사실 또는 진실의 의미라고 한다면 이 주장들은 다 사실이 아니다. 먼저 “별로” 없었는지 있었는지는 어떤 판단 기준이 없이는 말할 수 없는 명제이다. 별로였는지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사실 여부 또는 진위문제가 아닌 판단과 의견의 문제이다. 진실은 청구할 것이 여러 가지 있었다는 것, 별로 없었는지 여부에 대해 정확한 산정을 거친 끝에 3억불 해당의 무상공여가 된 것도 아니라는 점, 그 가운데 ‘위안부’문제는 한일회담에서 거론조차 안 되었고 따라서 “별로”인지 알 수도 없다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완전히” 끝난 것인지 여부 문제는 협정의 해석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는 규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끝났다’는 것도 팩트만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완전히 끝났는지에 대하여 여전히 한일 정부가 입장 대립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립이 어떻게 풀려갈지 지켜봐야 아는 문제이다. 현재진행형의 얘기를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인지 잘 따져볼 문제다.
현재 판결을 받긴 하였지만 위자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관련한 이들의 입장도 주목된다. 청구권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또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이 언급하고 있는 ‘대일청구요강 8개 항목’에서 “피징용자의 미수금과 보상금”이 언급되긴 하였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보상금에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금이 포함되는지 여부 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정해진 바가 없이 두 나라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따라서 피해자들은 협정이 맺어진 이후에도 자신들의 권리를 계속 주장해야하는 처지가 되었고 이들의 노력은 2018년의 대법원 판결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강제동원문제에 관한 주요한 사실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히 끝났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의 협정 규정에 대한 해석이고 규범적 주장이지 단순한 팩트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해석에 상대방도 동의하거나 양쪽이 따라야하는 유권적인 해석이 나와야 정리될 문제인 것이다. ‘끝났다’는 논리는 피해자들에게 윽박지르며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이 문제가 끝난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한다는 주익종(또는 아베 식의)의 강박관념은 그로 하여금 “징용 노무자의 정신적 피해는 당초부터 청구하지 않기로 한 것”(126쪽)이라는 주장으로 이끈다.
그가 무엇으로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지는 책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만의 하나 그의 주장대로 청구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하여도 법적으로는 그러한 사실에서 권리의 포기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권리를 포기한다면 명확하게 포기한다는 의사표시가 있어야 한다. 국제법에는 외국에 대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다. 이는 국가의 권리로서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징용노무자의 피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는 당시 정부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따름이고 나중의 정부가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일본이 가해책임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피해자 개인을 떠나 어떤 국가와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모두에게 달려있다.
6. 식민배상문제도 남아있다
주익종은 또 “국제법, 국제관계에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 같은 건 없었습니다. 한국이 배상 받으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126쪽)라고 주장한다. 바꿔 말해 식민배상은 없었다, 즉 사실에 관한 서술을 하며 현실론을 전개하고 있다. 쉽게 쓰려다 보니 배상의 선례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선례가 없었다고 하여 그에 관한 “국제법”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법이 있냐, 없냐의 문제는 사실문제 같아 보이지만 규범적 판단을 내포한 문제이기도 하다. 선례가 없었다고 법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해야 할 일은 선례를 만들어 법을 확인하는 일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이러한 맥락에서 규범 차원에서 해야 하는 일을 실천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필자들이 일제하에서 재산권이 보장되었음의 근거로 드는 것이 조선민사령이다. 이는 일본의 민법을 총독의 명령에 의해 조선에 빌려 썼던 것인데 여기에서도 현재 한국의 민법처럼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하였음이 팩트이다. 이러한 손해배상문제를 다루는 것이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을 하는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상문제를 다룰 법적 여지는 식민체제하에서도 있었던 것이지만 실현될 수 없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일본의 패전이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건 1965년 한일협정에서건 식민지배하에서의 배상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없었”으니 지금도 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서는 것은 아니다.2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은 거꾸로 식민배상문제가 처리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청구권협정이 재산문제를 해결한 “최선의 합의”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일본과의 과거사가 청산되었고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127쪽). 그러나 오늘날 세계적인 조류는 오히려 식민지배와 식민지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 말고도 이탈리아와 리비아, 영국과 케냐 및 인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독일과 나미비아, 프랑스와 알제리, 스페인과 멕시코, 카리브해 국가들과 구 종주국들 사이에 식민 지배 아래 발생한 각종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요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부 성과도 나오고 있다. 특히 2019년 3월 26일에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유럽의회는 “유럽의 식민주의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자행된, 과거는 물론 지금도 계속되는 부정의와 인도에 반한 범죄의 역사를 유럽연합 기관들과 회원국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기념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를 통과 시키기도 했다. 청구권협정의 진실은 협정으로 전쟁배상도 식민배상도 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있다.
2 116쪽의 표에서는 대일 강화조약 제14조의 내용을 (a) 일본인 재산몰수와 연합국의 추가배상 협상에 관한 권리와 (b) 연합국과 그 국민의 청구권 포기로 요약하고 있는데 제14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즉 제14조는 첫머리에 “일본이 연합국에게 전쟁 중에 일본에 의해 야기된 손해와 고통에 대하여 배상금(reparations)을 지불하여야 한다는 것을 승인한다”고 하여 명확하게 일본의 전쟁배상 책임원칙을 확인하고 있다. 청구권협정에는 이와 유사한 어떤 표현도 쓰여 있지 않고 따라서 배상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없다.
식민지하의 범죄와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로 초점이된 강제동원문제는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해결되어야할 것이다.
국제법에는 외국에 대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다. 이는 국가의 권리로서 이
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징용노무자의 피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는 당시 정부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따름이고 나중의 정부가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일본이 가해책임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피해자 개인을 떠나 어떤 국가와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모두에게 달려있다.
7. 맺으며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강제동원과 ‘위안부’문제와 같이 오늘의 행동을 결정짓는 데에 있어서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안에 대하여 무엇이 팩트인가로 이슈를 단순화하면서 사실과 법의 문제를 뒤섞어놓고 그릇된 의견과 행동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주 현실참여적인 책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들은 한국의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또 다른 최종심급 역할을 자임한다. 판례에 대한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단정적이고 교조적인 주장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법원리가 들어가 있으므로 그러한 법이해가 올바른지 검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과거사와 법 또는 정의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지 묻게 된다. 법의 문제는 법이 어느 사건이나 시기에 작용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배제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팩트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법도 역사속에서 같이 흐르며 힘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느 행위를 합법이라거나 불법으로 생각했다는 것도 팩트이다. 과거에 어떤 판단을 했다면 그것은 법적 의미를 가지는 팩트이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필요에 따른 법적 판단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의 말을 다시 빌리면 언제나 이미 현재화될 가능성을 가진 법 또는 정의라는 유령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배회하고 있다. 과거의 법을 화석처럼 현재의 법과 단절된것으로 사유하지 않는 가운데 한일회담에서 그리고 청구권협정의 문구에서 배제된 이들의 희망을 쓰는 역사 서술을 기대해본다. (<월간 순국> 2020년 3월호)
친일파 인사 35명이 요리집 식도원(食道園)에 급히 모인 까닭은? 표석 하나로 남은 이봉창 의사의 효창동 집터
이순우 책임연구원
『매일신보』 1936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조선식 요리점 식도원(食道園)의 근하신년광고이다.
청계천의 광통교(廣通橋)를 남쪽으로 건너자마자 곧장 나타나는 한성은행(漢城銀行, 나중의 조흥은행)
을 끼고 두 번째 가게 옆으로 감아돌면 남대문로 쪽으로 출입구를 낸 식도원(食道園, 남대문로 1가 16번지 및 삼각동 78번지 일대)이라는 유명한 조선식 요리점이 그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기생요리집의 대명사인 명월관(明月館)의 주인이던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이 1920년 11월에 식도상회(食道商會)와 더불어 설립하였으며, 궁중식(宮中式) 조선요리와 함께 일본식 및 서양식 요리를 곁들여 제공하는 한편 신식교육을 받은 젊은 신랑신부의 결혼식도 곧잘 벌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른바 ‘불경사건’의 범인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경악한 친일파 인사 35명이 식도원 요리점에 급히 모 여 충성 결의를 하고 있는 장면이 수록된 『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자의 보도내용이다.
그런데 1932년 정초가 되어 9일째가 되던 날에 이곳 식도원에 35명이나 되는 서울 장안의 난다 긴다 하는 친일파 인사들이 근심 어린 낯빛으로 줄줄이 모여들었다. 참석자 가운데 도지사 출신의 신석린(申錫麟)을 좌장으로 삼아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림이 잠시 이어지더니 이들은 다음과 같은 회합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하나, 총리대신, 척무대신, 궁내대신 및 동상중(東上中)의 총독(總督)에게 봉위(奉慰)의 전보(電報)를 타전(打電)함. 하나, 7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총독부, 군사령부를 방문, 봉위의 뜻을 표함. 하나, 3일간은 일체 도락적 연회(道樂的 宴會)에 출석치 않음. 하나, 재성(在城) 신문잡지에 근신(謹愼)의 뜻을 표하고 동포(同胞)에게 근신의 지(旨)를 종용(慫慂)함. 하나, 전보 발신명은 좌(左)의 7명으로 함. 위원(委員) 한상룡(韓相龍), 박영철(朴榮喆), 신석린(申錫麟), 조성근(趙性根), 김명준(金明濬), 민대식(閔大植), 박승직(朴承稷).
곧이어 이들은 이러한 결의에 따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봉위전문(奉慰電文)을 즉각 타전하였다.
작일(昨日) 돌발(突發)한 불경사건(不敬事件)에 대하여는 오직 공구불이(恐懼不已)이오며 충성(忠誠)으로써 근신(謹愼)의 의(意)를 표(表)하옵나이다. 경성조선인유지(京城朝鮮人有志).
이들이 이러한 위문전문을 서둘러 발송한 것은 바로 전날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사쿠라다몬사건(櫻田門事件)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내무성(內務省)의 발표에 따르면, 해마다 신년행사로 벌어지는 육군시관병식(陸軍始觀兵式)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일본 천황의 노부(鹵簿, 의장행렬)가 경시청(警視廳) 앞을 닿으려 할 찰나에 누군가 이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고, 그 범인으로 조선 경성 출신의 이봉창(李奉昌, 1901~1932)이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어 취조중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안절부절 못한 것은 이러한 ‘불경사건’의 범인이 바로 조선인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중추원 참의이자 조선생명보험 사장이던 한상룡(韓相龍)과 같은 이는 이소식을 듣자마자 지체 없이 이러한 소감을 피력한 바 있었다.
불경사건은 공구(恐懼)의 염(念)을 금치 못하는 바요, 특히 범인(犯人)이 조선 사람이라 함을 들을 시에 더욱 황공무지(惶恐無地)외다. 따라서 우리 조선 사람으로는 일층 더 근신(謹愼)하여야 하겠다는 외에는 무어라 말씀하여야 좋을지를 모르는 바외다.
이러한 장면은 마치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숨졌을 때 얼빠진 친일단체와 몇몇 친일인사들이 사죄단(謝罪團)을 꾸려 일본까지 건너갔듯이 그 일을 고스란히 빼다 박아놓은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꼴불견에 가까운 이러한 광경은 비단 식민지 조선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마루야마 회장이 이끄는 상애회(相愛會) 회원 400명이 도쿄황거 이중교 앞에서 늘어서서 궁성요배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충성 맹세를 하는 광경이 수록된 『경성일보』 1932년 1월12일자의 보도내용이다.
<경성일보> 1932년 1월 12일자를 살펴보면, 황거(皇居) 앞 이중교(二重橋)를 배경으로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 포착된 보도사진 한 장이 수록되어 있다. 알고 보니 이들의 정체는 도쿄 지역에 거주하는 상애회원(相愛會員) 4백 명이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상애회는 1921년 12월에 도쿄 지역 조선인 노동자의 상호부조단체인 노동상구회(勞動相救會)를 개편하면서 탄생하였고, 친일주구로 악명이 높은 이기동(李起東, 1885~1952)과 박춘금(朴春琴, 1891~1973) 같은 이가 이 조직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이후 1928년 4월에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출신(1922.6.17~1924.9.12 재임)의 마루야마 츠루키치(丸山鶴吉, 1883~1956)가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특히 박춘금은 그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1932년 3월 조선인으로 최초이자 유일하게 대의사(代議士,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진에 붙어 있는 설명문에는 “눈물을 흘리며 충성을 맹세하다”는 구절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대불경사건이 조선인의 손에 의해 행해졌다는 사실이 그저 송구스러워 사건 바로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궁전 앞에 모여 요배(遙拜)를 하고 ‘천황폐하만세’를 삼창(三唱)하면서 절절한 충성 맹세의 장면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행렬 앞에 나선 마루야마 회장은 “금후에는 국가를 위해 내선융화(內鮮融和)에 노력할 것을 맹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훈시를 덧붙였다.
전날의 거사를 벌인 이봉창 의사는 본적(本籍)을 ‘경성부 금정(錦町, 지금의 효창동) 118번지’에 두었으나 원래 출생지는 통칭 ‘당현(堂峴, 당고개)’으로 불렀던 ‘경성부 원정(元町, 지금의 원효로) 2정목(지번은 미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버지 이진구(李鎭球)와 어머니 밀양손씨(密陽孫氏)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위로 이범태(李範泰)와 아래로 이점동(李点童) 외에 이복동생인 이봉준(李奉俊), 이봉운(李奉雲), 이종태(李鍾台), 이덕희(李德熙, 누이)가 있었다.
『황성신문』 1905년 10월 3일자에는 ‘용산 당현(堂峴, 당고개)에 사는 이진구(李鎭球)’가 낸 문권분실광고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이봉창 의사의 부친이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재력 덕분에 풍요한 생활을 하였으나 이내 가세가 기울어 생계가 어려운 처지를 겪었다고 전해진다.(왼쪽) 『매일신보』 1932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이봉창 의거에 관한 일본 내무성 발표 내용이다.(오른쪽)
1932년 9월 30일에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한 사실과 이봉창 의사의 인물사진을 함께 수록한 『부산일보』 1932년 10월 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사건 당시 총독부 경무국에서 조사 발표한 인적사항 관련항목에 “부모는 일찍 사망하고 ……운운”하는 대목이 있으나 이는 정확한 설명은 아닌 듯하다. 이봉창 의사 본인이 진술한 ‘제5회 신문조서(1932년 2월 9일 작성)’에는 부친은 1930년에, 모친은 1927년에 각각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 나온 여러 신문의 탐방기사에 이봉창 의사의 어머지 주씨[朱氏, 본명은 주간란(朱干蘭)]라는 분이 생존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 사람은 아버지 이진규의 첫째 소실(小室)이고 정봉희(鄭鳳姬)라는 이름의 다른 소실이 한 명 더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봉창 의사에 대한 예심판사 의견서(1932년 6월 30일 작성)와 판결문(대심원, 1932년 9월30일) 등에 기술된 내용에 따르면, “용산(龍山)의 자산가(資産家) 이진구의 차남으로 태어나 유년시절에는 편안한 생활을 보냈으나 …… 아버지의 병세와 사업차질로 인하여 이내 가세가 기울고 마침내 생계조차 어려워지기에 이르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에 따라 소년 시절 이봉창은 사립문창학교(私立文昌學校)를 나오자마자 일본인 가게에서 고용살이를 하였고 1919년 8월에는 용산역(龍山驛)의 시용부(試庸夫)로 들어가 역부(驛夫)와 전철수(轉轍手)를 거쳐 연결수(連結手)로 일하였으나 빈곤상태를 떨쳐버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924년 4월에 이르러 조선인 차별대우에 대한 싫증과 신병(身病)을 이유로 용산역에서 근무하는 일을 그만 두기에 이른다. 그 이후 철도에 종사하던 후지하타(藤幡)라는 일본인이 내지(內地, 일본)로 돌아가던 차에 조선인 식모를 데려가고 싶다는 얘기가 있어서 이를 계기로 자신의 조카 이은임(李銀任, 형 이범태의 딸)과 함께 1925년 11월에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이때 이봉창 의사는 우선 오사카 지역에서 직장을 구하였고 키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차별대우에 대한 반발과 건강상의 이유로 몇 차례 취직과 사직을 반복하였고, 특히 1928년 11월에 교토에서 거행된 천황 즉위식을 참관하러 갔다가 한글로 표기된 편지를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검속에 걸려 부당하게 경찰서 유치장에서 9일간이나 구류되는 경험을 하였는데, 이때 반일감정이 더욱 고조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탓인지는 몰라도 심지어 1929년 2월 이후 2년가량은 아예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비누상회, 해산물 도매상점, 가방상점 등에 일자리를 전전한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1년 쯤 도쿄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거쳐 다시 오사카로 돌아오자마자 이내 1930년 12월에 취업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이곳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던 와중에 ‘백정선(白貞善)’으로 통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김구(金九)와 만나 여러 차례 접촉과 교유를 하던 끝에 천황폭살에 관한 결심 피력과 거사 모의가 성사되었고, 1931년 12월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고 수류탄을 전달 받아 코베항을 통해 다시 일본으로 잠입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32년 1월 8일의 거사가 결행되었고, 폭탄의 위력이 약해 뜻을 이루지 못한 이봉창 의사는 사건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9월 30일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이 선고되자마자 10일 후에 이치가야형무소(市ケ谷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이로부터 14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광복 이듬해에 이르러 김구 선생의 뜻에 따라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등 삼의사(三義士)의 유해봉환이 추진되면서 마침내 1946년 6월 15일에 각각 최석봉(崔錫鳳, 한독당 경남지부장), 윤남의(尹南儀, 윤봉길 의사 동생), 이강훈(李康勳, 상하이 육삼정 의거 동지) 등 세 사람의 가슴에 안겨 이들 유해는 특급열차 조선해방자호(朝鮮解放者號)를 통해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내 수송동에 있는 태고사(太古寺, 지금의 조계사)로 운구되어 그곳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20여 일이 지난 그해 7월 6일에는 삼의사의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어 이들 유해는 옛 효창원 묘터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7일자에 수록된 「조국 광복에 바친 세 혈제(血祭)! 조기(弔旗) 아래 전시민이 애도」 제하의 기사에는 삼의사 장의행렬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묘사되어 있듯이 이봉창 의사가 살던 집(1917년에서 1925년 사이에 거주)이 바로 장의행렬과는 불과 100여 미터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았던 ‘금정(錦町, 효창동) 118번지’였으므로 그 누구보다도 남다른 감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 (1929)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봉창 집터인 ‘금정(錦町, 효창동) 118번지’의 위치이다. 왼쪽 위에 보이는 199번지 구역은 옛 만리창 지역이고, 오른쪽 옆에 보이는 126번지 구역은 지금의 금양초등학교 자리이다.
이날의 장례를 조사하고자 맑게 개인 아침부터 수만 시민이 시내 태고사(太古寺)에 운집하였고 국민장의행렬은 상오 10시 3열사 봉장위원회의 지도를 받아 엄숙한 주악리에 효창원으로 향하였다. …… 이리하여 행렬은 수만 시민의 봉배와 눈물어린 감회 속에 안국정 사거리를 종로로 남대문 앞을 지나 경성역을 거쳐 연병정으로 행하였다. 더욱이 동지의 유골을 받들은 김구(金九) 총리의 얼굴에는 새로운 감회가 깊이 우러나오는 듯 용산서 앞을 지나금정(錦町)에 이르니 이곳이 곧 고 이봉창(李奉昌) 의사의 출생지다. 연고 깊은 이곳 장지인 효창원에 도착한 것은 하오 0시 40분이었다.
『동아일보』 1932년 9월 11일자에 이봉창 의사가 살던 집이라고 소개된 ‘금정 128번지’ 및 ‘금정 118번지’의 모습이다. 전체 가옥의 구조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나마 이렇게라도 이봉창 의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사진자료인 셈이다.
옛 집터가 있던 구역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새로 들어선 ‘효창파크 KCC스위첸 아파트’ 안에 설치된 ‘이봉창 집터’의 표석(2018년 7월 제작) 모습이다.
효창공원 백범 김구기념관 초입에 설치되어 있는 이봉창 의사 동상(1995년 11월 6일 제막)의 모습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옛 집터 자리는 그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효창 제4구역 재개발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지금은 ‘효창파크 KCC스위첸’(2018년 9월 입주 개시) 102동 후면의 지하주차장 입구 옆쪽에 서울시에서 새로 설치한 표석 하나가 간신히 남아 있는 상태이다. 듣자 하니 이 자리와 가까운 지점에 ‘이봉창 기념관’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나, 무심하게도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이봉창 의사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훑어보다 보니,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던 것이 기억나서 여기에 마지막으로 그 내용을 덧붙여 보려고 한다. 거사 이후 취조과정에서 작성된 ‘제5회 신문조서(1932년 2월 9일 작성)’를 보면, 이봉창 의사가 용산역을 그만 둔 뒤 “용산 금정에 있는 관제묘(關帝廟)의 보존을 위해 봉사하거나 청년회를 조직하여 하수 청소와 야경에 종사하는 등 약간의 공공사업에 봉사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확인해 본즉 실제로 <매일신보> 1924년 4월 24일자에 수록된 「관성묘(關聖廟) 철폐에 대하여 부근 주민 분개」 제하의 기사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부내 관수동(觀水洞)에 있는 불교화광교원(佛敎和光敎園)에서는 대정 11년(1922년) 8월에 용산 금정에 있는 관성제묘(關聖帝廟)의 대지 70여 평의 불하를 얻어가지고 그곳에 학교를 짓고자 요사이에 와서 묘당을 헐려고 한즉 그 부근 일대의 주민이 백여 명은 떼를 지어 일어나서 묘당을 헐지 못하게 하고 지난 23일에는 용산경찰서 고등계에 모두 모여서 진정을 하였다더라.
그러니까 이봉창 의사 역시 본인 스스로의 진술대로 관우 사당의 철폐를 반대하는 행렬에 함께 서 있었던 것이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동네 주민들의 희망과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인지 여기에 거론된 관성묘의 흔적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혹여 이 관성묘가 지금껏 잘 보존이 되었더라면 이봉창 의사의 흔적을 되새길 수 있는 참으로 마침맞은 공간이 되었을 테지만, 그러한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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