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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자연합회 회장에 취임한 안형준 MBC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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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자연합회 회장에 취임한 안형준 MBC 기자

익명 (미확인) | 월, 2018/03/2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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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방송기자연합회 회장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먼저 방송기자연합회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답 : 지난 1월 30일에 방송기자연합회 10대 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 단체는 공중파 3사가 중심이 되어서 10년 전인 2008년에 만들었습니다. 기존에 있던 한국기자협회가 신문과 인터넷 매체, 활자 매체 위주로 돌아가는 반면에 방송기자연합회는 취재 이후에 제작 부담이 많은 방송기자들의 특수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방송기자는 출입처에서 퇴근해서 다시 방송사에 출근해 오디오를 읽고 영상을 편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KBS, MBC, SBS, YTN, MBN, OBS을 위시해서 케이블 뉴스 전문방송과 지역 공중파와 지역 민방을 포함한 59개의 방송사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종편 3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방송사가 가입해 있습니다. 현재 회원 수는 약 3천 명 정도입니다.

문 : 방송기자연합회는 어떤 일을 하나요?

답 : 방송기자연합회의 역할은 첫 번째가 특종상 시상, 두 번째가 기자 재교육, 세 번째가 방송보도 관련 연구, 네 번째가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 등 대외협력활동입니다.
첫 번째 특종상은 매달 이달의 방송기자상을 수여합니다. 5개 분야, 뉴스, 기획보도, 지역뉴스 등 5개가 있는데 이번에는 영상뉴스와 경제 분야를 추가해서 7개 부분에 대해서 수상자를 선정해서 상금과 상패를 줍니다. 한국방송학회 회장 등 교수님들과 공중파 3사와 YTN 등의 고참 기자들이 엄격하게 심사해서 월말에 시상합니다. 매년 1월에는 그해의 최고상인 ‘올해의 방송기자상’을 시상합니다.
어찌 보면 두 번째 재교육이 가장 중요한 사업입니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형사소송법도 알아야 되고요, 언론중재위에 갔을 경우 어떻게 대응해야 되는지, 또 새로운 트렌드에 맞춰서 빅데이터 마이닝은 어떻게 취재해야 하는지, 팩트체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의 재교육을 국내와 국외에서 진행합니다. 해외 유명한 언론 학자나 기자들을 초빙해서 재교육을 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 연구기능입니다. 2014년 세월호 침몰사고 보도에서처럼 오보가 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도 살펴봐야 했습니다. 또 한국 뉴스의 문제들과 개선책도 마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자들과 교수들이 저널리즘 아카데미팀을 구성해서 여러 연구들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끝으로 대외협력입니다.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는 등 참여합니다. 또 방송기자들이 출입정지등의 불이익을 당했다든가 어떤 특정사가 파업을 하거나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고 하면, 방송기자들의 입장을 정리해서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문 : 지난 9년 동안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권 시기 언론에서 억압적인 관행이 굉장히 크지 않았습니까? 방송기자연합회도 상당한 시련이 있지 않았나 싶은데요.

답 : 좀 전에 말씀드린 방송기자연합회에서는 재교육, 해외 연수를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보도국의 기자들이 보도국에서 쫓겨나는 일이 모 방송사에서는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방송사에서는 방송기자연합회에 더 이상 상근자를 보내지 않겠다, 연합회 회장이 인사를 와도 몇 년 동안 만나주지 않는 그런 여러 가지 비정상적인 일들이 많이 벌어져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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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일종의 성명서 같은 것을 발표하는 일도 많았죠?

답 : 네 그렇습니다. 최근에도 자유한국당이 MBN 기자들을 출입정지 했을 때라거나 YTN 기자들이 또다시 파업에 들어갔을 때에도 저희들이 가장 앞장서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문 : 과거에 방송노조가 파업했을 때 지지성명 같은 것도 내고요.

답 : 지지성명은 일반적으로 내왔습니다. 돕지 못했던 때도 잠시 있었지만 지금 상황이 바뀌었죠.

문 : 달라진 환경이더라도 새롭게 회장에 취임했으니까 특별히 마음에 들고, 이것만 꼭 해보겠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겠다 이런 건 없나요?

답 : 사실 제가 연합회에서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인터뷰를 통해서 제 속내를 좀 드러내자면, 저는 만주에 있는 중국의 동북 3성에서 한국어로 방송하는, 조선말로 방송하는 방송기자들과의 연대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연합회의 이름 앞에 ‘한국’이 붙어있지 않은 것에도 선배들의 큰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 큰 시야를 가지고 회장직을 잘 수행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서 기자생활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답 : 1994년에 YTN 공채 2기로 입사해서 정치부, 사회부, 기획부를 거쳤습니다. 2001년 MBC 경력공채로 입사합니다. YTN와 MBC 양대 방송사와 기자들에 대해 소상히 아는 편이죠.

문 : 방송기자가 된 동기는?

답 : 1987년 6월항쟁 때 서울대 2학년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에 분개해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이 시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현장이 텔레비전 뉴스시간에 중계되었는데 각종 구호소리와 운동가요 등 생생한 현장음과 시민들의 인터뷰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특히 박종철의 고문치사 기사가 일간지에 실리고, 그 후폭풍으로 견고했던 독재 아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TV뉴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방송기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문 : 25년간 수많은 기사를 작성했을 텐데 어떤 기사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고, 또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답 : 앞에서 말했듯이 2001년 경력 기자로 MBC에 입사해 통일외교부로 발령났습니다. 그해 10월경 일본은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켜 테러지역에 일본자위대 병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에 저희 통일외교부는 자위대 해외파병 결정과 관련한 기획기사를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10월 30일부터 11월초까지 테러특별법 통과에 비추어본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야스쿠니신사 참배, 일본군국주의 부활, 한국에 진출한 일본 만화와 게임 등 대중문화에 파고든 군국주의의 모습을 부각시킨 ‘독도는 일본땅’ 그리고 ‘역사연구단체, 친일인명사전 편찬 추진’ 등을 연이어 방송에 내보내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보도가 나간 지 한 달 뒤 국회예결위는 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2억 8,000만 원의 정부예산을 지원하기로 결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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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2001년 11월경 당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데이터 구축사업인 ‘일제식민통치기구•협력단체편람-국내편’의 국고(민간경상보조금) 지원을 요청해놓은 상태였습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필요성을 부각시킨 안 기자님의 취재 덕택에 국회의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돈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마중물이었던 셈입니다. 그 다음 기억에 남은 기사는 어떤 게 있나요?

답 : 검찰청 출입기자 때 특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인데 현직 대통령 아들의 금품수수 의혹과 관련한 압수수색 영장을 확보해 단독 보도한 것입니다. 또 휴대폰 통신요금 인하를 촉구하는 리포트를 40여 차례 방송했고, 2001년 9.11 테러 현장 취재와 2003년 이라크전쟁 종군 취재가 기억납니다.
2003년 7월에는 현대가 건넨 150억 원의 비자금을 박지원 씨의 측근인 김영완 씨가 세탁한 과정을 보도하여 정치권에 큰 파문을 일으켰죠. 이 보도로 저를 비롯한 MBC 보도국 기자들이 제154회 이달의 기자상 취재보도부문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문 :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 MBC의 풍토는 어땠나요?

답 : 이명박 정권 3년차인 2009년 11월경 제가 일하던 시사교양프로그램 ‘뉴스후’가 폐지되었습니다. ‘뉴스후’에서는 MB가 다니던 교회를 비판한 ‘세금 내지 않는 사람들’, 4대강 정비사업 등 국정과제 아이템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는데, 이런 뉴스들이 고위 임원들에 의해 커트당하다가 결국 프로그램 자체가 폐지되고 맙니다. 회사측은 주요 뉴스 앵커나 보직(정치・경제부장), 해외연수를 내걸고 기자들을 회유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인사권으로 기자들과 거래하는 거죠.

회사측은 이런 당근 정책뿐 아니라 채찍도 휘두릅니다. 2012년 MBC 170일 파업 때입니다. 강지웅 박성제 박성호 이용마 정영하 최승호 등 파업 주동자들을 해직하고 120여 명의 파업 참여자들을 정직시켰습니다. 특히 정직된 사람들에게는 정직 기간이 끝난 뒤에도 김재철 사장의 지시로 3~9개월 간의 교육명령을 떨어졌어요. 서울 송파구 신천역에 위치한 ‘MBC 아카데미’에서 브런치나 와인 감별 등 기사작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교양교육을 받았던 거죠. 교육생들은 그곳을 ‘신천교육대’ 혹은 ‘김재철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불렀습니다. 이 교육을 마치고 나서도 보도국 사람들은 경인지사나 사업부서 등으로 발령하여 방송보도 제작과 철저히 격리시켰습니다.
저도 신천교육대 과정을 마치고나서 라디오뉴스를 잠시 편집하다가 MBC 경영부서의 하나인 아카이브 사업부로 배치되었습니다. 방송영상 도서관으로 영상과 오디오 자료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녹음테이프에 라벨을 붙이는 것이 주요 업무여서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송보도를 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내가 기자 맞나 하는 자괴감이 몹시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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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방송정상화투쟁에 참여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답 : 2012년 파업 때 7개월 동안 집에다 월급을 주지 못했어요. 회사측이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적용한 거죠. 제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는데 그때 마침 초등학교 6학년 졸업반이었어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는데 경비가 100만원이었어요. 몇 개월째 월급을 받지 못한 터라 끼니나 겨우 해결하는 형편인데… 그런 거금을 마련하기가 까마득했습니다. 어찌어찌 그 돈을 마련해서 수학여행을 보내기는 했습니다만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문 : 오랜 투쟁 기간 좌절에 빠지지 않도록 버티게 해준 선배나 스승이 있다면?

답 : 경복고와 서울대 3년 선배인 김세진 열사입니다. 1986년 전방 입소 거부와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며 분신하기 바로 전인 4월 18일, 김 선배를 4.19기념식장에서 만났습니다. 항상 정의롭게 살라며 격려해주었습니다. 제가 힘들고 좌절에 빠질 때마다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저의 사표입니다.

문 : MBC의 앞으로 과제는?

답 : 작년 12월 최승호 PD가 MBC 사장으로 취임하여 해직자의 즉각 복직을 공표한 것에서 보듯이 MBC가 정상화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일단 하드웨어적인 틀은 갖추었으나 소프트웨어적으로 개선이 필요합니다. 최근 들어 시청률도 완만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의 제보가 필수적입니다. 그럼 정상화가 더욱 빨라질 수 있습니다

문 : 방송정상화 투쟁과 관계된 책을 집필중이라 들었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답 : 이제까지 한 인터뷰와 비슷한 내용의 소설입니다. 뉴스후 폐지 사태를 겪고 나서 이것을 소설로 쓰면 되겠다 싶어 시작했습니다. ‘촛불혁명’을 비유한 일종의 팩트소설이죠. 3선 국회의원인 여성정치인이 대권을 노리고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는 가운데, 기자들이 맞서서 그녀의 출산의혹과 해외원정 성매매 의혹을 파헤친다는 내용입니다. 참, 소설에서는 3선 의원 조부의 친일행각도 드러나는데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개정판을 만드는 과정에서 밝혀진다는 구성입니다. 며칠 전에 에필로그를 탈고했습니다. 조만간 서점에서 ‘딥뉴스’라는 제목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문 : 민족문제연구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답 : 2001년 청량리 금은빌딩 3층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관련해 취재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7년이 되었네요. 그때는 10평도 안 되는 허름한 사무실이었는데 용산의 연구소로 와보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연구소 이전을 축하드립니다. 5월에 개관할 식민지 역사박물관 건립 기금으로 제 소설의 인세를 일부 기증하고 싶습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 중 53%가 중국동포(조선족)이라 합니다. 이렇듯 한국에서 중국동포의 역할이 강화되고 우리나라의 외교・통일정책에도 영향을 미치리라 봅니다. 제가 아는 동년배 중국동포는 중국의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공무원으로 있는 분인데 한국의 중국동포 하대 경향에 매우 분개합니다. 연구소에서도 시야를 넓혀 해외동포문제와 통일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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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1907년 4월 20일 고종이 헤이그 특사에게 준 위임장이라고 알려진 문서이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실질적인 주권을 잃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는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으며, 나라의 자주 독립을 호소하며 자결하거나 친일 매국노의 처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고종은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국권회복의 염원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회의 참가를 요청하였다. 또한 프랑스・벨기에 주재공사 민영찬에게 이 문제를 협의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러일전쟁 이후 불어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마르텔을 비밀리에 베이징에 파견하여 베이징 주재 러시아 공사를 만나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네덜란드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대한제국은 12번째 초청국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만국평화회의에 외교권을 상실한 국가가 회의에 참가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한국 참가를 반대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이후에도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어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대한제국을 만국평화회의에 초청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대한제국을 초청하는 것을 포기했다.
한편 1905년 9월 고종의 밀사인 이용익이 러시아로 건너가 국내와 비밀접촉을 하면서 만국평화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상동청년회와 연결되어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김구 등이 이준과 이상설을 특사로 보내기로 의견을 모아 고종에게 특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헤이그 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이때 고종이 특사에게 위임장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미국 뉴욕에서 발행된 <The Independent> 1907년 8월 22일자(주간, 제3064호), 「A Plea for Korea(By Prince Ye We
Chong)」에 이위종이 쓴 호소문과 그가 소지하고 있던 신임장의 사본 및 번역문이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1907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고 적혀 있다. 연구소가 소장한 ‘위임장’은 ????The Independent????에 소개된 것을 해방 이후 복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세 특사는 6월 27일자로 서명된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지니고 활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중재재판을 취급하는 만국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를 찾아가 한국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요청하고,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에게 탄원서를 배포하였으며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한국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은 당시 국제관계를 볼 때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특사의 희망과는 달리 만국평화회의는 한국을 철저히 외면했다.
일본은 헤이그특사 파견을 ‘을사조약’ 위반행위로 몰아 7월 22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준 특사는 현지에서 순국하고 이상설·이위종 두 특사는 망명했다. 그들은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대한제국특파위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위임장

대황제가 칙서를 내리는바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은 세계 여러 나라가 공인한 것으로 짐이 지난번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고자 하여 서로 우방으로서 긴밀함을 갖은즉, 이제 세계 여러 나라가 평화를 위하여 한 자리에 모이기에 응당 참석함이 마땅한 것인데 1905년 11월 18일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국가 간의 법을 어기고 도리에 어긋난 협박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아 우방과의 외교를 단절케 하였다. 또한 일본의 모욕적인 침략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을 뿐더러 그 침략의 의도는 인도자의 도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짐의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가슴 아픔을 느끼는 바이다. 이에 여기 종2품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특파하여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회의에 가서 본국의 모든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외교권을 다시 찾아 여러 우방과의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하도록 바라노라. 짐이 생각건대 특사들의 성품이 충실하고 강직하여 이번 일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임자인 줄 안다.
대한 광무 11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

대황제 수결 황제어새

 

∷ 강동민 자료팀장

금, 2017/07/2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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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기념 답사 동행기] 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용산은 오랜 시간 ‘남의 땅’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주둔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일본이 물러간 뒤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그리고 지난 6월, ‘전 주인’이었던 주한미군사령부가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비로소 용산은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주한미군사령부의 이전과 함께 용산의 역사적 가치를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도 일고 있다. 최근 국가보훈처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는 효창공원을 독립기념공원으로 만들자는 방안을 밝혔다. 지난 8월 29일에는 숙명여대를 사이에 두고 효창공원 건너편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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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식민통치의 흔적이 남겨진 용산에 세워진 “식민지역사박물관” ⓒ 김경준

지난 1일,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개관 후 첫 행보로 용산에 얽힌 일제 침략의 역사를 시민들과 함께 짚어보는 ‘특별답사’를 진행했다. 답사에는 30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했다. 뜻 깊은 이번 답사에 기자도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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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기념 특별답사에 참여한 시민들의 모습 ⓒ 김경준

일제에 의해 ‘군사기지’가 된 용산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은 ‘군사기지’였다. 용산의 군사기지화는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일제는 이곳을 군용철도인 경의선의 분기점으로 설정한 뒤, 각종 군용시설물을 설치했다.

용산에는 제20사단 제39여단 보병 제78연대·기병 제28연대·야포병 제26연대·제40여단 보병 제79연대 등 일본군 4개 연대가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 1908년 10월에는 ‘조선주차군사령부’가 설치됐다.

▲ 용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벌이는 일본군대의 모습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이후 상주군 편제로 바뀌면서 1918년 6월부터는 ‘조선군사령부’로 개칭됐다. 조선군 사령관은 한반도 전역에 배치된 일본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조선총독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다. 조선군 사령관 출신으로 조선총독에 부임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2대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9대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 등이 대표적이다.

지금의 용산우체국 옆으로 200미터가량 곧게 뻗은 도로의 끝에 조선군사령부 청사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기지가 조성되면서 자연스레 청사가 멸실됐다고 한다. 청사는 없어졌어도 당시의 흔적을 증명하는 콘크리트 벙커 건물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은 상태라 단단한 출입문으로 막혀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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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에 있던 조선군사령부 청사의 모습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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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조선군사령부 청사가 있었던 자리엔 미군기지가 들어서 있다. 지난 6월, 주한미군사령부가 경기 평택으로 이전했지만 아직 이곳의 출입구는 굳게 닫혀있다. ⓒ 김경준

코앞에 그 흔적이 있지만, 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현장해설을 맡은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실망하는 답사단원들에게 “그래도 과거에는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이 근처도 못 오게 했었다”라면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조선군사령부 건너편에는 조선총독관저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총독 관저하면 남산 왜성대 부근에 있었던 통감 관저나 조선총독부 뒤편 경무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용산에도 또 다른 총독 관저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역대 조선총독 그 누구도 집무 혹은 거주공간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지관리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고, 시내와 멀리 떨어져 업무상 불편이 크다는 게 이유였다. 대신 연회를 위한 공간 혹은 일본 황족 및 서양 귀빈을 위한 숙소로 드문드문 활용됐다고 전해진다. 총독 관저는 한국전쟁 당시 반파되면서 철거됐다. 총독 관저가 있던 터 역시 미군기지 안에 있어 그 흔적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쇼핑객·여행객으로 분주한 용산역 광장… 그 속에 숨은 사연

답사단이 용산역 광장에 도착했을 때, 광장은 주말을 맞아 쇼핑객과 관광객 그리고 먼 길 떠나는 열차 승객들로 북적였다. 지금은 평화롭기 짝이 없는 공간이지만, 이곳 역시 알고 보면 한 많고 사연 많은 공간이다.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장으로 떠나는 일본군 병력들이 모두 이곳에서 출정식을 거행했기 때문이다.

징용·징병으로 끌려간 강제동원 피해자들 역시 이곳에서 그리운 고국 땅, 가족과 눈물의 작별을 해야만 했다. 최소 10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용산역 광장에 모여 열차를 타고 군함도, 사할린, 쿠릴열도, 남양군도로 끌려갔다.

가슴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지난해 8월에는 용산역 광장 한 켠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세워졌다. 답사단 일행이 노동자상을 둘러싸고 광장에 얽힌 구슬픈 사연을 듣는 동안, 지나가는 시민들도 관심 갖고 노동자상 옆의 안내 문구를 읽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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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8월에 용산역 광장에 세워진 “강제징용 노동자상”.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역 광장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전장으로 끌려가기 위해 집결했던 장소였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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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징용 노동자상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단원들의 모습 ⓒ 김경준

철도노동 순직자들을 위한 위령제의 진실

철도 건설과 함께 용산을 철도 행정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던 일제는 용산역을 중심으로 철도관리국, 철도병원, 철도구락부, 철도원양성소 등 철도 관련 시설을 대거 조성했다.

용산역 맞은 편에 있는 낡은 건물은 1928년에 지어진 ‘용산 철도병원’이다. 철도공사 도중 다친 노동자들을 치료할 목적으로 지어진 이 병원은 해방 후 중앙대학교에서 위탁 경영하다가 중앙대병원이 흑석동으로 이전하면서 빈 건물로 남게 됐다. 답사에 참여한 한 시민의 입에서 “만날 지나다니면서 도대체 무슨 건물일까 궁금했었는데…” 하는 읊조림이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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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에 세워진 “용산철도병원”. 해방 후 중앙대에서 위탁 경영하다가 현재는 주인 없는 빈 건물로 방치되고 있다. ⓒ 김경준

이순우 연구원은 “이 건물은 2008년에 등록문화재로 등재됐으니 철거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계속 빈 건물로 방치할 수는 없을 테고, 옛 서울역사 건물처럼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정부 당국의 관심을 촉구했다.

용산역에서 이촌역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는 철도선형과 서빙고로 도로가 만들어낸 원뿔 모양의 지형이 나타난다. 과거 이곳엔 ‘용산철도공원’이 있었다. 일제는 1915년 철도공원 안에 철도순직자조혼비(鐵道殉職者弔魂碑)를 세우고 매년 순직한 철도노동자들을 위한 조혼제(위령제)를 지냈다.

현재 이 비석은 존재하지 않지만, 위령제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이 연구원은 “유족들 입장에서야 가족에 대한 위령제를 지내는 게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위령제를 지내는 전통이 일제 때부터 시작돼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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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철도공원이 있었던 자리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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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철도공원이 있던 자리에서 “철도순직자조혼비” 사진을 소개하는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김경준

개성에 있던 비석은 왜 용산으로 왔을까

용산역 뒤편에 있는 철도회관 입구에는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비석이 있다. ‘연복사탑중창비'(演福寺塔重創碑)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공덕으로 건립된 연복사 오층불탑의 건립 내력을 담은 비석이다.

본래 이 비석의 소재지는 경기도 개성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일제에 의해 용산의 철도구락부 구역으로 옮겨졌다. 이후 이 비석은 한동안 학계에서 소재불명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2012년 우연히 길을 가다 이 비석을 발견한 한 시민이 블로그에 포스팅하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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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역사 뒷편 철도회관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연복사탑중창비” ⓒ 김경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던 비석이 긴 세월 동안 소재불명이었다는 사실도 우습지만,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강제로 쫓겨나 엉뚱한 곳에서 방치돼야만 했던 비석의 신세도 처량하기만 했다. 일제에 의한 우리 문화재 수난사의 한 대목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생태공원보다는 역사공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올해 광복절 경축식이 열린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은 과거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연병장으로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광복절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이곳은 114년 만에 국민의 품으로 돌아와 비로소 온전히 우리 땅이 된 서울의 심장부, 용산”이라며 경축식을 용산에서 거행하는 까닭을 밝혔다. 그리고 미군이 떠나간 자리에 “미국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같은 자연생태공원을 조성하겠다”라고 천명했다.

미군기지 자리에 도심 속 생태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구상에 이견을 제시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용산을 식민지 침략의 역사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메시지가 없었던 점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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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 용산지사 뒷편에 위치한 서울교 원불교당. 일제강점기 당시 이 자리엔 용광서(龍光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침략전쟁을 수행하다 죽은 전몰장병의 유골을 안치했던 사찰이었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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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영삼거리 앞에 위치한 구 경룡관(京龍館) 터. 1921년에 세워진 경룡관은 일본인 전용극장이었다. 일제 말기에 성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해방 이후까지도 같은 이름으로 운영되다가 2003년에 폐관했다. ⓒ 김경준

용산은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과도 같은 지역이다. 생태공원 조성에 앞서 용산에 깃든 치욕의 역사를 기념하는 역사공원 조성이 우선돼야 한다. 아픈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다짐하는 뜻에서 미군이 떠나간 바로 그 자리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건 어떨까. 식민통치의 본산이나 다름 없던 용산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세운 이유가 그렇듯이 말이다.

<2018-09-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붐비는 용산역 광장, 그 속에 숨은 한맺힌 사실

화, 2018/09/04-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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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훈 민예총 이사장 권한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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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독재와 억압, 불의와 부정의 토대인 친일을 청산하자. 그리하여 이 땅에 70년 넘게 채워진 질곡의 사슬을 풀고 민주와 정의, 화합과 평등이 넘치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을 만들자.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친미독재, 박정희와 전두환의 무자비한 군사독재, 그리고 이들의 반민족, 반민주 독재권력을 이어받고자 했던 이명박과 박근혜의 국민분열, 친일반역, 국정농단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해방 이후 친일세력들의 비열한 통치와 압제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체제가 반복되어 온 것은 일제 식민지 지배세력들의 인적, 제도적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와 친일, 그 뿌리 깊은 잔재는 오늘날 정치, 사회, 학문, 자본, 언론, 예술 등 모든 곳곳, 요소요소에 악의 고리로 남아있다.
1919년 3·1독립운동뿐만이 아니라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은 모두 ‘친일세력의 근원을 타도하기 위한 민중들의 항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 최후의 정점에 이승만을 몰아낸 민주혁명의 힘이 박근혜를 권력에서 끌어내린 촛불혁명으로 타올랐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일제보다 일제에 빌붙어 수족행위를 하고 나팔수 노릇을 한 친일파가 더욱 악랄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친일파들은 민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재산을 탈취하고, 항일투사들을 잡아들이고 살해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한 학도병, 강제징병, 강제징용, 위안부 모집의 선동대가 되는 온갖 악행을 도맡아 저질렀다.
1948년,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특위가 만들어졌다. 반민특위는 구체적인 죄목으로 친일파들에 대한 단죄에 나섰다. 한일합방에 적극 협력하거나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항에 조인하거나 모의한 자,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살상 박해하거나 지휘한 자,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 의원이 된 자, 습작(襲爵)한 자, 중추원 간부, 칙임관 이상 관리, 밀정, 독립운동 방해단체 간부, 군경찰 간부, 군수공업 경영자, 관리 중 악질적 죄질이 현저한 자, 도(道)나 부(府)의 자문기관 또는 의결기관 의원 중 현저한 반민족 행위자, 종교 사회 문화 경제 등 각 부문에서 반민족적 행위자,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 위해(危害)를 가한 자, 고등관 3등급 이상, 훈 5등급 이상 관공리, 헌병, 경찰, 헌병보, 고등경찰 등이 처벌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방해로 인하여 반민특위는 해산되고 친일파는 단 한 명도 단죄되지 않았다.
이렇게 버젓이 살아남은 친일파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더욱 승승장구하였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치하에서도 그들은 기득권을 계속 유지했다. 나라의 권력은 오로지 친일파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후광을 입은 그들의 후손들도 역시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등 모든 분야에서 현재까지 권력을 누리고 있다.
문단을 예로 들어보자. ????친일인명사전????(2009)에 오른 친일문인은 곽종원, 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사영, 김성민, 김억, 김영일,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방인근, 백철, 서정주, 오용순, 유진오, 윤두헌, 윤해영,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원수, 이윤기, 이찬, 임학수, 장덕조,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조우식,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 등 무려 40인에 이른다.
이 중에서도 미당 서정주는 가장 대표적인 친일, 친독재 문인이다. 서정주야말로 친일에서부터 친독재까지 철저한 권력의 시녀였고, 죽을 때까지 단 한 마디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문단의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은’ 그는 대학강단에서, 문단에서, 관계에서, 수없이 많은 제자들을 키우고 또 그 제자들은 그를 스승으로 우러러 받들었다. 시인으로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였던 서정주는 죽어서도 그 권력을 문단의 후학들에게 그대로 넘겼다.
반민족적, 반문학적 친일의 과오가 명백한 그를 기리는 미당문학상이 만들어지고, 바로 그 문학상이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현상이 그것을 증거한다. 이런 기이함은 미당 서정주를 ‘국민시인’, ‘민족시인’으로 칭송한다. 심지어는 올해 여름에 발간한 미당전집 편집위원 중의 한 사람은 미당을 ‘민중시인’이라고까지 말했다. 북한의 3대 세습 정권에서도 있을 수 없는 망언이었다.
미당은 1942년 7월 ‘다츠시로 시즈오’라는 창씨 개명한 이름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를 ????매일신보????에 발표하면서 친일문학 작품을 썼다. 이미 여러 경로로 밝혀진 바와 같이 친일어용문학지인 ????국민시가????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작품들을 양산했다. 이를 통해 태평양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고 징병의 신성화와 정당화는 물론 학병지원을 권유했으며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에 적극 동조했다.

미당이 남긴 작품들이 정말 문학적으로 긍정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작품인지 그 평가는 차치하고, 그는 민족의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그를 문학상 등으로 기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가 지어낸 천여 편의 시들도 ‘겨레의 말’이 아니라 일종의 기가 막힌 언어도단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인류의 도덕적 보편성과 정의를 따르고자 하는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가치관이 있다. 그런데 미당은,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그러한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마저 결여되어 있다. 한 마디로 인간 본연의 품성이 그릇된 자였다. 그릇됨을 덮고 가치관마저 전도시키는 그의 문학은 우리 모두를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원숭이가 손목이 잘려도 바나나를 놓지 않듯, 권력도 움켜쥔 힘을 쉽사리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반성과 성찰을 바라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사회권력과 관료권력, 종교권력과 문화권력 등이 그러하듯이 문학권력도 예외는 아니다. 권력은 물러났어도 추종하는 세력들에게 승계되고 이어가고 있다. 지배권력은 다른 피지배세력이 그들의 권력을 쟁취하기 전까지 유구한 것이다.
미당이 생전에 지닌 문단권력은 현재 그의 추종세력들에게 전이되었다. 추종자들에게는 미당의 매국적인 친일문학 행위도, 군부독재를 찬양한 행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점을 가리고 숨기기 위해 미당문학상으로 미화하고 있다. 미당 서정주, 그의 행적을 문인이 아니고 정치인에 대입시켜보면 참으로 소름끼치는 존재다. 그럼에도 미당을 추종하고 옹호하는 무리들이 미당을 기리는 것은 미당이 건재해야만 자신들도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미당문학상에 대한 비판 또는 폐지의 주장은 고사하고 그 상을 심사하고 수상하는 사람들이 우선 자기 검열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사고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그들에게도 있을 터이다.
동서고금의 예술을 살펴보면, 정치권력과 결합한 예술은 차후에 거의 모든 평가가 허구였음이 드러난다. 대다수 예술에 대한 평가는 당대가 아니라 후대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정치와 사회, 문화예술 등은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지 반세기를 넘겨 한 세기를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도 친일세력들의 영향력과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가 일제로부터 주권을 되찾는 독립은 했으나 아직도 정신적 독립은 온전하게 하지 못한 결과다.
완전한 독립, 그리고 온전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친일파와 그들의 후손들이 득실거리는 시대, 누군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불의의 역사를 모른 체 하면 대대손손 청사에 물려줄 정의의 역사는 사라진다.

편집자주 시인 정세훈은 1955년 충남 홍성 출생으로 1989년 ????노동해방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작품에는 시집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부평 4공단 여공〉 〈몸의 중심〉과 장편동화집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송사리 큰눈이〉 등이 있고 현재 리얼리스트100 상임위원, 한국작가회의 이사, 한국민예총 이사장 권한대행을 맡고 있다.

목, 2017/11/1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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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길게 줄을 선 사람들.


대통령이 일하는 곳, 청와대를 보러 온 관람객들입니다.


<인터뷰> 홍영수(경기도 고양시) : “주말에는 6개월 치가 다 예약이 마감돼 있었고,(이것도 방학이라서) 평일 날은 좀 어려웠어요. 간신히 했어요.”


1시간 반가량 청와대 곳곳을 둘러보는 관람 코스.


제한된 장소에선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 후원엔 관람객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문화재가 한 점 있습니다.


바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입니다.


<인터뷰> 신상빈(경기도 용인시) : “못 봤어요. 아예 못 봤어요. 코스에 없나 본데.”


<인터뷰> 홍순(인천시 서구) : “저희는 가족들이 놀러 다니면서 이런 불상도 많이 보는데 여기서는 못 본 것 같아요. 확실히.”


이 불상은 최근 한 시민단체가 원래 위치로 되돌려 달라는 진성서를 청와대에 내면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인터뷰> 혜문(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 “(불상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겁니까?) 아닙니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통일신라 불상이 왜, 언제부터, 청와대 안에 있게 된 걸까?


청와대 직원들조차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보안구역에 있다는 불상.


직접 본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더더욱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는데요.


청와대 불상에 얽힌 길고도 복잡한 사연을 들여다봤습니다.


청와대 후원 숲 속, 보호각 아래 다소곳이 앉아 있는 석조 불상.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만들어진 석조여래좌상입니다.


불상의 높이는 1.16m.


석굴암 본존상의 축소판으로 불릴 정도로 빼어난 예술성을 보여주는 보물급 문화재로 꼽힙니다.


<인터뷰> 박임관(경주학연구원 원장) : “양어깨가 딱 벌어지고 가슴이 볼륨이 있고 그다음 무르팍이 아주 크게 웅장하게 되어 있어서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불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빼어난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불상은 관람이 쉽지 않습니다.


대통령 관저에서 가까워 일반인의 접근이 철저하게 금지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 화면 역시 지난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찍은 것으로,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촬영 허가가 난 적이 없습니다.


취재진이 청와대에 불상을 직접 찍을 수 있는지 물었지만 보안 문제 때문에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최근에 불상을 직접 본 사람은 없을까?


수소문 끝에 취재진은 문화유산 답사 모임을 운영하고 있는 강대철 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강 씨가 청와대에서 불상을 직접 본 때는 2015년 11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청와대 불상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사진도 찍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불상의 옆 모습과 뒷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


1000년이 넘는 세월에도 보존 상태가 좋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 강대철(옛문화답사회 대표) : “딱 보니까 석굴암의 본존불 생각이 딱 나더라고요. 당당한 자세라든가 또는 조각기법, 그다음에 전체적인 느낌 같은 것이 상당히 가치 있는 문화재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이렇게 좋은 작품이 좀 더 대중들한테 보여졌으면 좋겠는데 외롭게 여기 계신가 하는 생각이 좀 많이 들었죠.”


통일신라 불상이 청와대에 있게 된 이유는 뭘까?


불상 앞에 놓인 돌에는 경주 남산 절터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옮겨온 거라고 적혀 있습니다.


불상이 처음 있었던 자리를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 시내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논밭을 지나 마을 뒷산 쪽으로 걸어 올라가자, 산 아래 탁 트인 지형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신라시대에 ‘이거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입니다.


1,0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에 무너져 내린 석탑만 황량한 절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청와대 불상의 고향을 이곳으로 보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

는 1939년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문서.


당시 일본인이 남긴 경주 출장 보고서를 보면, 이 불상은 본래 경주군 내동면 ‘도지리’의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거라고 돼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이곳에선 도지마을, 도지동이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또 다른 근거는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조를 보면, 737년에 왕이 돌아가시자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인터뷰> 박임관(경주학연구원 원장) : “성덕왕릉의 북쪽에 이거사가 있다는 건데 북쪽에 절터는 이곳이 거의 유일한 절 터이기 때문에 이거사가 정확한 걸로 보고, 이곳에서 청와대에 있는 미남 불상을 옮겨갔다, 이렇게 보고 있죠.”


이 불상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은 한일병합 늑약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2년 말 경주를 방문한 데라우치는 한 일본인의 집 정원에서 잘생긴 불상 한 점을 만납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조선총독부 문서를 보면, 데라우치 총독이 불상을 거듭 되돌아보며 유심히 살피자, 집 주인이 총독의 의중을 눈치채고 불상을 즉시 경성(서울)의 총독관저로 보냈다고 기록했습니다.


총독 진상품 신세가 된 불상이 경주를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서울 남산의 총독 관저.


남산 북쪽 길을 따라 남산공원 방향으로 오르다가, 지난해 새롭게 조성된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안으로 발을 들여 놓으면, 치욕의 역사를 보여주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통감 관저, 훗날 총독 관저가 있던 자리입니다.


이 터 옆을 자세히 보면 절벽 아래 깎아지른 바위가 있습니다.


바로 이곳이 불상이 옮겨졌던 장소입니다.


1913년 2월 데라우치는 자신의 일기에, 불상을 절벽 바위 아래 안치하고, 개안식을 열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취재 과정에서 입수한 한 장의 사진.


일본 관리들 사이에 불상의 얼굴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 이순우(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그 기록이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고 그래서 그 당시 위치는 사진 자료도 있습니다만 일단 총독관저 이웃한 절벽 아래쪽에 있다고 그랬거든요. 큰 나무면서 절벽 아래니까 저기 바로 보이는 저 위치라고 보실 수가 있는 거죠.”


이후 1927년 총독 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새로 지어지면서 불상도 함께 옮겨진 겁니다.


그 뒤 1934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불상에 관한 기사가 실립니다.


불상을 ‘미남석불’이라 부르고, “오래전 자취를 감췄던 경주의 보물”이라며 상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 뒤 8.15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까맣게 잊혔던 불상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기자인 이구열 소장.


1973년에 초판을 펴낸 <한국문화재 수난사>란 책에 통일신라 불상의 기구한 사연을 상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인터뷰> 이구열(미술사학자) : “우리로선 문화재 수난의 참 하나의 사례죠.근데 어쨌든 그렇게 됐던 건데 그게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고 경주에 있다가 서울에 와서 지금 청와대에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에요. 그때 많은 것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도 많거든.”


다시 세월이 흘러 청와대 불상이 세간의 이목을 끈 때는 지난 1994년.


구포역 열차 전복부터,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 서해 훼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충주호 유람선 화재까지…


갖가지 대형참사가 잇달아 터지며 민심이 흉흉해지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 불상을 치워버린 게 화근이 됐다는 등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습니다.


급기야 청와대가 출입기자단에 불상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집니다.


해방 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식민지 시대의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청와대 통일신라 불상.


그동안 제자리로 되돌려달라는 숱한 요구가 있었지만, 아직 달라진 건 없습니다.


<인터뷰> 이순우(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불상이 청와대에 있어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전혀 없죠, 당연히. 그것은 뭐냐면 불상 자체는 워낙에 우리가 잘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죠. 그런데 우리 한국을 강제 병합했던 바로 그 당사자인 데라우치 총독의 손을 거쳐서 그 불상이 지금 총독관저에 옮겨지게 됐고, 바로 그다음에 총독관저 옮겨지는 거에 따라서 청와대에 들어갔지 않습니까? 그거는 전형적인 일제잔재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광복 72주년을 맞은 올해 시민단체가 또다시 문제 제기에 나섰습니다.


청와대에 있는 불상을 원래 자리인 경주로 돌려보내 달라는 진정서를 청와대에 낸 겁니다.


<인터뷰> 혜문(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 “과거사에 대한 청산, 과거 권위주의적인 시대 청와대의 모습에서 탈피하고 적폐청산을 강조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새 정부 출범과 더불어서 청와대 불상이 원래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과거 시대와 다른 새로운 시대의 청와대의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고 굳게 닫혀 있던 청와대 문을 활짝 열겠다고 약속한 새 정부.


여기에 맞춰 청와대 불상도 과연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김석기자 ([email protected])


<2017-08-20> KBS

☞기사원문: ‘청와대 불상’ 경주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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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7/08/2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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