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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현장 울산 동구 보성학교, 보훈처와 지자체 ‘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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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현장 울산 동구 보성학교, 보훈처와 지자체 ‘방치’

익명 (미확인) | 화, 2018/02/27- 18:32

시민모임 “항일운동터전 보성학교 국가현충시설로 지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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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동구에 있는 보성학교(터)는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현장이지만 1970년대 중반에 학교가 멸실 된 후 설립자 성세빈 선생을 뜻을 기리는 송덕비만 덩그러니 방치돼 있다. ⓒ 시민모임

지난해 울산 동구청이 동구 바닷가(방어진) 일제의 수탈 역사인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적산가옥(해방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은 많은 예산을 들여 개발하려는 반면 인근에 있는 항일운동 본거지 보성학교는 방치해 비난이 일었다. (관련기사 : 항일학교는 방치하고 일본인 골목 복원한다는 울산 동구청)

이에 각계 주민들은 ‘항일운동터전 보성학교 복원을 위한 시민모임(아래 시민모임)’을 결성해 동구청(장)의 이런 행보를 “방어진 친일미화 역사사업”으로 규정하고 중단을 촉구하는 한편 보성학교 복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시민모임은 3.1 독립만세운동 99주년을 맞아 “울산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항일운동터전 보성학교(터)를 국가현충시설로 지정할 것”을 국가보훈처와 울산자치단체에 촉구했다.

이들은 27일 오전 11시 30분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대통령은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잊힌 영웅으로 남겨두지 않겠다고 천명했다”고 상기했다.

또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도 취임사를 통해 변화와 혁신을 언급하며 불합리한 보훈제도의 개선을 약속한 바 있다”면서 “우리는 새 정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보훈정책의 변화를 기대하며 일제강점기 울산의 항일운동 터전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보성학교(터)의 국가현충시설 지정을 요구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울산 동구 방어진 일제강점기 수탈 관문…이에 맞서 보성학교 세워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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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울산 동구 보성학교 학생들 ⓒ 시민모임

울산은 일본과 육지거리가 가까운 곳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주권침탈과 자원수탈의 관문이 됐다. 특히 동구 방어진은 일본인 수천 명이 이주 정착해 조선인의 어장을 침탈하고 막대한 부를 향유한 식민지 거점이었다.

시민모임에 따르면, 이에 울산 동구의 민족 사립학교 보성학교(1922~1945)를 중심으로 일제의 만행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펼친 선조들이 있었다.

보성학교는 수차례 탄압을 겪었고 결국 해방직전 강제 폐교됐지만 모두 515명(남 472, 여 43)의 졸업생을 배출한 울산 유일의 민족사립학교였다. 우리말을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의 요람이며 학교 교사와 졸업생 모두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한 항일운동의 터전이었다.

보성학교 출신들은 늘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보성학교 교사 출신 서진문(1928년 옥사, 건국훈장 애족장), 이효정(2009년 별세, 건국훈장 포장) 선생 두 분은 2006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처럼 보성학교가 독립운동 사적지로서 가지는 의미는 이미 국가보훈처와 독립운동기념관이 발간한 <부산·울산·경남 : 독립운동사적지>(2010)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민모임은 “이 보고서에는 울산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조사해 싣고 있는데 동구는 보성학교와 서진문 집터와 성세빈, 성세륭 집터가 포함돼 있다”면서 “보성학교터와 국가유공자인 학교의 교사, 설립자, 교장의 생가를 소개한 것이지만 보훈처에 지정하고 관리하는 울산의 국가현충시설은 13곳뿐이며 조사발표 후 8년이 지나도록 방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들은 “보훈처울산지청에 조속한 지정 여부를 질의했지만 돌아온 것은 학교를 복원한 뒤에야 검토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답변이었다”면서 “하지만 옛 천도교 중앙총부 터나 조병세 순국지(표훈원 터) 등 현 국가현충시설 중에는 건물이 멸실된 터를 지정한 사례가 쉽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울산 동구 보성학교(터)는 이처럼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현장이지만 1970년대 중반에 학교가 멸실 된 후 설립자 성세빈 선생을 뜻을 기리는 송덕비만 덩그러니 방치돼 있다. 해당 장소를 알리는 표지판도 표지석도 설치되지 않았다.

시민모임은 “그동안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지 않아 오히려 시민들이 직접 나서 공청회를 열고 여러 방안을 제시해 왔다”면서 “동구주민단체와 문화단체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 울산지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은 99주년 3.1절을 맞아 재차 가시적인 변화를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2018-02-2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독립운동현장 울산 동구 보성학교, 보훈처와 지자체 ‘방치’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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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유투브를 통해 프레이저 보고서를 봤는데 너무 충격적이고 몰랏던걸 많이 알게 됏습니다

근데 2는 검색을 해보니 아직 영상이 없는거 같더라구요.

부탁드리겟습니다 (__)

일, 2017/07/23-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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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7/09/07-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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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돈을 가지고 가서

호의호식해놓고…

지금 깐빵에 있는 인간!

죄를 뉘우치고 돈을  갚을 생각은 커녕

파산으로 배째라 하는 인간!

인간으로 할 짓이 아닌 행동을 하는 인간!

그리고 많은 서민들은 눈물과 괴로움으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목, 2017/12/07-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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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회 회원인 박노정 시인이 7월 4일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 시인의 부고기사가 여러 언론에 났지만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에 가장 공감이 간다.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 별세〉.
박 시인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박 시인이 ????진주신문????대표이사 시절 그의 소개로 진주의 어른인 남성(南星) 김장하 선생을 만났으니 아마도 1990년대 후반으로 짐작한다.

▲ 박노정 시인./경남도민일보DB

????진주신문????은1990년진주시민들이모여창간한신문으로지역의수구적인여론에맞서 정론직필 그리고 ‘진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정신을 ‘신분해방운동인 형평, 임진왜란 때 2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이 일체가 돼 보여준 주체, 남명 조식 선생의 호의’ 등 3가지를 꼽았다.
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이사뿐아니라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진주민예총회장,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를 빼놓고 진주의 시민운동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던 2005년 5월, 박 시인은 지역의 후배들과 함께 진주성 촉석루 옆 의기사에 있던 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일명 논개영정)을 뜯어내 박 시인을 포함해 4명이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선고가 부당하다며 모두 노역장 유치를 자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벌금 대납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당시 4명의 벌금은 2,000만원이었지만 나중에 보니 성금이 이보다 더 많은 2,370만원이나 모아졌다. 박 시인 등은 나중에 이 성금 중 일부를 연구소 진주지회 결성(2012년 3월) 자금으로 내놓았다. 실제로 박 시인은 연구소 진주지회의 숨은 설계자였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시절이던1990년대초부터논개영정폐출운동을시작해 2008년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그린 새로운 논개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박 시인은 2006년에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을 만들어 진주 출신 친일가수 남인수의 이름을 딴 ‘남인수 가요제’를 ‘진주 가요제’로 바꾸기도 했고 ‘을사늑약 100년 남북공동사진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친일잔재 지도’ 제작도 추진했다. 이처럼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의 일생은 올바른 ‘진주정신’의 발굴과 계승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18/08/0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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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빈 기부 하려고 해도 링크가 계속 깨져서 나옵니다.

해피빈 링크 쪽에 댓글 달아도 반응도 없고…

 

수, 2018/01/24-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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