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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친일 군인’ 박정희의 건물에 갇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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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친일 군인’ 박정희의 건물에 갇히다

익명 (미확인) | 화, 2018/02/27- 18:10

문화재청 ‘현충사 박정희 친필 현판 존치’ 판단 유감… 숙종 현판이 ‘복원 원칙’에 걸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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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사 현판 박정희 대통령 친필 현판으로 1967년 걸렸다. ⓒ 구진영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지난 21일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장 이재범 전 경기대 교수)의 검토 결과에 따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아산 현충사 사당 현판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문화재청이 밝힌 존치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현판은 숙종 사액 현판을 철거하고 교체 설치한 것이 아니라 성역화 사업 당시 신 사당을 건립할 때 제작·설치하게 된 것’이며 둘째, ‘충무공파 후손들 간에도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으며’ 셋째, ‘1967년 현충사 성역화사업 당시 만들어진 신 사당에 1932년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구 사당에 걸려있는 숙종 사액 현판을 떼어내 옮겨 설치하는 것은 그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원형 복원 원칙’ 무시한 문화재청의 판단

문화재청이 밝힌 박정희 현판 존치 첫째 이유를 반박하기 위해서 우선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을 살펴보자. 광화문은 임진왜란(1592년)으로 소실됐다가, 고종 4년(1867년)에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신축되면서 1926년 해체돼 경복궁 동편인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정문으로 옮겨지면서 원형이 훼손·변형됐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목조 부분이 불에 타 없어지고 석축만 남게 됐다.

그러다가 박정희의 특별지시로 1968년 12월 원래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과 언론들은 이를 두고 ‘복원’이라고 주장했지만 박정희가 새로 쓴 현판을 빼곤 목조였던 누각마저 모조리 콘크리트로 만들면서 당시 미술평론가는 물론 복원에 참여한 인사조차 ‘콘크리트 모조 건축’ ‘콘크리트 모뉴먼트’라고 말했다.

“광화문을 영원히 욕되게 하고 XX을 만들어 버린다”(<경향신문> 1968.3.20)라는 극단적인 평가에도 박정희는 광화문 완공 당시 자신의 친필 현판이 마음에 들지 않자 얼마 후 현판 글씨를 새로 써서 걸었다. 박정희가 문화재와 문화재 복원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듯 박정희의 콘크리트 광화문은 2006년 12월 4일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선포식’과 더불어 철거될 때까지 38년을 이어오다 2010년 8월 15일 지금의 모습으로 ‘원형 복원’됐다(물론 지금도 광화문이 제대로 원형 복원됐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여전히 존재한다). 원형 복원 원칙에 따라 ‘콘크리트 모조’ 광화문에 걸렸던 박정희 친필 현판은 19세기 말 중건 당시 훈련대장으로 서사관(書寫官)에 임명돼 광화문 편액을 쓴 임태영의 글씨로 교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문화재청은 <경복궁 영건일기>를 발견해 오랫동안 정학교가 광화문 편액을 썼다는 기존 통설을 수정하는 성과도 냈다. 이렇듯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은 문화재청이 20년에 걸쳐 끈기 있게 완성한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의 마지막 단계였으며 그중에서도 광화문 현판 복원은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었다.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에서 원형 복원 원칙을 고수했던 문화재청이 왜 현충사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지 모르겠다. 1968년 박정희가 만든 광화문과 마찬가지로 현충사 신 사당 역시 박정희가 만든 콘크리트일망정 숙종 사액 현판이 있는 만큼 숙종 현판으로 교체해야 그나마 원형 복원 원칙에 가까운데 말이다. 2008년 소실돼 2013년 모습을 드러낸 숭례문 역시 원형 복원 원칙을 따랐음은 당연하다.

박정희가 새운 신 사당의 역사적 의미가 숙종보다 큰 걸까

문화재청은 박정희 현판 존치의 두 번째 이유로 ‘충무공파 후손들 간에도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음’을 들고 있으나 그것이 왜 존치 이유가 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므로 굳이 반박하지 않겠다.

문화재청의 박정희 현판 존치 세 번째 이유는 ‘1967년 현충사 성역화사업 당시 만들어진 신 사당에 1932년 국민성금으로 건립된 구 사당에 걸려있는 숙종 사액 현판을 떼어내 옮겨 설치하는 것은 그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인 1932년 건립된 현충사 구 사당에 걸려 있는 조선시대 임금인 숙종 현판도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을 훼손’하고 있으므로 떼어내야 할까. 숙종 대인 1707년에 처음 세워진, 300년이 넘는 현충사 구 사당의 역사적 의미보다 1968년 박정희가 세운 불과 50년의 신 사당의 역사적 의미가 더욱 크다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박정희의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의지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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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사 현판 1707년 숙종이 사액한 현판의 모습 ⓒ 구진영

300년 역사를 지닌 현충사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숙종 사액 현판은 더욱 값지다. 서울 탑골공원 정문인 삼일문 현판은 서예가인 일중 김충현의 글씨가 걸려 있던 것을 1967년 12월 중수 준공식을 하면서 박정희의 친필 현판으로 교체됐다. 그러다 2003년 독립선언서 서체를 이용한 현재의 현판으로 교체됐다. 삼일문은 박정희가 1967년 중수한 그대로였지만 지금의 현판은 삼일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의 정신을 담아 독립선언서 서체로 새로 만든 것이다. 삼일문의 경우에서 보듯 문화재청의 주장처럼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은 영원불멸의 원칙은 아니다.

문화재청이 제시한 현충사 박정희 현판 존치의 세 가지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현재의 현충사는 박정희가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곳이니 그 어떤 것도 개입할 여지가 없이 온전히 박정희의 역사를 그곳에 남겨야 한다’는 의지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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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 현충사 지도. 2만여 조선 민중이 뜻을 모아 세운 구 현충사(빨간색 동그라미)는 배변감을 느껴 화장실에 갈 때만 볼 수 있는 처지다. 파란색 동그라미 안의 현충사는 박정희가 1967년 성역화작업 당시 세웠다. ⓒ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당대 최고의 명필로 인정받는 숙종이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힘찬 필치의 현충사 현판은 문화재청 관계자들의 눈에는 박정희가 조성해 놓은 현충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숙종 현판이 걸려있는 구 사당은 박정희가 조성한 충무문-홍살문-충의문-현충사(신 사당)로 이어지는 중심축에서 벗어나 화장실 옆에 놓여 있는 처량한 신세다(이기환, ‘현충사, 꼭 박정희 현판이어야 하나’, 이기환의 역사흔적, 2018.2.8, leekihwan.khan.kr).

1932년 경매로 일본인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한 이충무공 묘소의 위토(位土, 제사 등과 관련한 비용 충당을 위해 마련한 토지)를 성금을 모아 지켜내고 현충사(구 사당)를 중건했던 당시 2만여 명의 조선 민중들의 역사는 1968년 박정희의 현충사(신 사당)에 밀려 이제는 배변감을 느껴 화장실에 가야만 비로소 엿보게 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충무문, 충의문 현판 역시 박정희가 썼다. 박정희는 1967년 신축 당시에는 한자로 ‘顯忠祠’ 현판을 걸었다가 1973년 지금의 한글 ‘현충사’ 현판으로 다시 걸었다. 광화문 현판을 두 번이나 다시 써서 걸었던 것처럼 말이다).

현충사에 공 들인 박정희, 그의 속내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충사 신구 사당을 모두 살펴본 사람이라면 현충사가 ‘이순신 사당이 아닌 박정희 사당’으로 느껴진다는 평가에 어느 정도 동의할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는 2만여 명이 운집한 1967년 4월 28일 현충사 성역화사업 준공식 기념사에서 “수구 파쟁 시기 모략 아집 단견 무정견 등 전근대적이고 비생산적인 요소들이 이 나라의 새 역사 창조의 국민대열을 가로막고 있다”라면서 준공식 기념사로는 다소 어색한 발언을 했다.

이날은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 후보로 아산이 고향인 윤보선과 맞선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5일을 앞둔 날이었다. 박정희 공화당 후보는 현충사에서 야당을 공격하는 일종의 선거유세를 했던 것이다. 이미 여러 연구에서 1965년 한일협정 이후 현충사를 비롯해 박정희 정권이 진행한 이른 바 성역화사업은 정권 유지를 위한 정당화 작업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현충사 성역화사업은 박정희가 이순신의 반일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친일 이미지 희석화하고, 이순신의 구국영웅적인 이미지를 통해 군인출신 대통령의 통치를 합리화하며, 이순신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권력을 정당화했다.” –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2000, 책세상 / 이상록, ‘민족의 수호신’ 만들기와 박정희체제의 대중규율화, 2004, 휴머니스트

“현충사 성역화사업의 계기는 한일협정이 제공했지만, 그 방향은 결코 반일에 있지 않았다. 즉 현충사 성역화사업의 결과로 만들어진 현충사는 반북이데올로기의 선전장, 반정부세력의 성토장, 그리고 투철한 국가관 확립을 위한 국민정신교육 도장이었던 셈이다.” – 은정태, ‘박정희시대 성역화사업의 추이와 성격’, 2005, 역사문제연구

실제로 1974년 4월부터 현충사 경역 내에 1만 평이 넘는 충무교육원이 개원돼, 학생·교원·일반 사회인사 등을 대상으로 한 정신교육과 훈련활동 프로그램이 마련됐는데 이곳에서는 중고생, 교육공무원·교수·서장·새마을운동 지도자 등을 대상으로 국민교육헌장 이념, 새마을정신교육, 유신이념, 반공・안보 교육으로 가득 채웠다(은정태, 2005). 한마디로 박정희가 충무공 정신을 빙자해 현충사를 정권 홍보의 교육장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박정희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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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현충사의 모습 구 현충사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이때는 박정희 성역화 작업 전으로 건물에 숙종 사액 현판이 걸려있는 게 보인다. ⓒ 국가기록원

<박정희 사상 서설>(정재경, 집문당, 1997)에 의하면 박정희가 직접 쓴 휘호는 1962년 1월 1일 ‘革命完遂'(혁명완수)를 시작으로 사망 당일인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유역 농업개발 기념탑’ 휘호까지 모두 647점에 이른다. “현충사 성역화사업이야말로 공장을 몇십 개 몇백 개 세우는 것보다 더 큰 민족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성역화사업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최대한 활용했던 박정희였던 만큼 그의 글씨들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많은 곳에 현판과 금석문 등으로 남아있다.

현판으로는 <홍지문> <義節祠>(의절사) <忠烈祠>(충렬사) <육신사> <세종전> <훈민문> <文成祠>(문성사) <孤峯祠>(고봉사) 등이 있고, 이외에도 20여개가 더 남아 있다(장학진, ‘역대 대통령의 묵적 연구’,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석사논문, 2016).

현판 외에도 건축물, 다리, 도로, 터널, 기념탑, 호수, 비문 등에 남겨진 박정희 글씨는 차고도 넘친다. 전 국토와 문화재를 자신의 화선지로 여겼던 박정희가 남겨놓은 흔적이 너무도 많기에 이들 모두를 없애자거나 교체하자는 주장은 하지 않겠다.

다만 수많은 문화재와 역사적 경관에 덧칠해져 있는 박정희와 박정희 시대의 정신이 원래 그 문화재와 역사적 경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왜곡하거나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와 충돌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상컨대 이번 문화재청의 존치 결정으로 박정희 현판 교체 여론은 더욱 비등할 것이다. 문화재청은 이번 결정을 재고하고 박정희 현판을 현충사 내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 보관·전시하는 방안 등을 적극 검토하기를 바란다.

끝으로 박정희 현판을 대신해 숙종 사액 현판을 옮겨 설치하면 박정희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물과 현판의 일체성을 훼손한다고 노심초사하는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위원들이 있는 한, 이순신 장군의 정신은 우리 시대와 교감하지 못하고 반세기가 넘도록 친일 군인이 만든 콘크리트 사당과 친일 화가가 그린 표준 영정에 갇혀 질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방학진씨는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입니다. 이 기사는 뉴스퍼블리카에도 중복해서 게재됐습니다.

글: 방학진(vacationji) 편집: 김지현(diediedie)

<2018-02-2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이순신, ‘친일 군인’ 박정희의 건물에 갇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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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으로 두말하는 교육부, 적폐청산의 대상이다


1. 지난 7월 27일(목) 교육부가 ‘국정 역사교과서 폐지 후속 조치 발표’라는 제목의 <보도 자료>를 통해, ‘역사과 교육과정 집필기준을 개정하고 검정 역사교과서를 2020년부터 적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우리는 이번 조치가, 과거 교육부가 국민여론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추진한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인해 왜곡된 역사교육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보도자료> 어디에도 교육부가 과거 박근혜정부에서 저질렀던 잘못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이 없다는 데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2. 교육부는 이번 조치가 “다양성이 보장되고 질이 높은 역사교과서를 학교에 보급하여 교육의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국민의 뜻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는 과거 교육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기도 하다. 2015년 10월 12일, 교육부는 “검정제의 가장 큰 취지인 다양성을 살리지 못하기 때문”에 “균형성, 전문성,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교과서 발행체제를 국정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그리고는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고 헌법적 가치에 충실한 균형 잡힌 올바른 역사관 확립을 위한 교과서”(약칭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학계의 전문성을 인정받는 우수한 전문가로 집필진을 구성하여 균형 있고 질 높은 교과서를 개발”하겠다고 하였다. 그랬던 교육부가 이번에는 “학계, 현장 등 의견 수렴”운운하며, 검정교과서야말로 ‘다양성이 보장되고 질이 높은 역사교과서’라며 한 입으로 두 말하니, 교육부의 놀라운 변신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3. 우리는 교육부가 지난 2년 내내 “이념적 편향성”이라는 색깔론을 들이밀며 역사학계와 역사교사를 공격하였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교육부는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의 일관된 국정교과서 반대 입장을 묵살하고는 마치 군사작전을 펴듯이 비밀리에 오직 대통령 한 사람의 입맛에 맞는 국정교과서를 개발하는 데만 매달려 왔던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런 교육부가 새 정부 들어 ‘검정 역사교과서 적용시한을 2020년으로 늦추는 것’으로 과거의 잘못을 면책 받으려 하고 있다. 참으로 가당치 않은 바람이다. 교육부는 국민 대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국정교과서 정책 입안자는 누구인지, 홍보비와 집필료 등 예비비 지출내역은 얼마인지 등을 국민들에게 낱낱이 밝히고, 국정화 추진 과정에서 저지른 각종 편법과 불법에 대해 책임을 지는 등 자기성찰과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4. 국정교과서는 촛불민심이 선정한 “박근혜 체제가 낳은 6대 적폐” 가운데 하나이다. 촛불 동력으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사흘 만에 교육 분야 첫 번째 업무 지시로 국정교과서 폐지를 지시하였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주권의 촛불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을 약속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정부 각 부처마다 ‘적폐청산 TF’를 꾸려 지난날의 폐단을 일소함으로써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새 정부 출범 직전까지 온갖 꼼수와 편법으로 국정역사교과서를 밀어붙이던 교육부는 아직까지 적폐청산을 위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참으로 후안무치하다 하겠다. 촛불시민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정부가 국민주권시대에 맞도록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 국정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부 마피아’에 대한 인적청산부터 해야 한다.

5.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박근혜 정권의 적폐 중의 적폐이다. 역사학계·역사교육계는 대선 기간 중에 문재인 대통령 후보와 ‘국정 역사교과서 완전 폐기와 역사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을 위한 협약을 체결하였다. 역사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자주성 전문성 보장을 위해, 학계와 정치권이 합의한 내용은 △초등 교과서를 포함하여 국정 역사교과서 제도 완전 폐지 △현재 졸속으로 진행 중인 검정교과서 작업 전면 중단 △친일-독재-냉전의 정당화에 바탕을 둔 <2015교육과정> 전면 개정 △바람직한 미래 역사교육을 논의하는 기구(전담 위원회 등) 신설 등이다. 이제 촛불민심을 동력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이상 문재인 정부는 역사교육의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약속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뜻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이는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한 출발이기도 하다.


2017년 8월 1일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화, 2017/08/0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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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기 [텀블벅 펀딩]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사라져가는 기억을 위해 집을 지어주려 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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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쪽, 나가사키 항에서 약 1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하시마(군함도)는 야구장 두 개 정도 크기의 작은 섬입니다. 1916년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져 근대화의 상징으로 불렸던 이 섬은 좁은 섬에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서는 모습이 마치 군함처럼 보여 그때부터 ‘군함도’라고 불렸습니다. 과거의 영화를 그대로 간직한 그 섬에서 과연 누가 살았을까요?

지상에서 일하는 일본인과 달리 강제동원 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지하에서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그 지하는 숨 쉬기조차 어렵고 몸을 펼 수 없을 만큼 좁았으며, 식량과 식수조차 주어지지 않는 말 그대로의 지옥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석탄 채굴을 위해 강제동원 되었지만, 그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때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가 족히 10개는 넘게 들어 있다는 납골당과 공양탑은 지금은 파괴되어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근대화의 상징’, ‘자랑스러운 세계유산’으로 포장하려는 군함도(하시마)는 일본의 근대화가 강제징용 된 조선인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습니다. 0712-3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많은 나라들이 과거를 돌이켜보며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역사적으로 평가를 내리고 정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떨까요? 우리는 아직도 친일문제가 분명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한일 과거사를 청산하고,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반민특위 정신을 이어받고,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되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일 과거사 문제뿐만 아니라 박정희기념관 건립 저지, 친일파기념사업 저지와 같은 다양한 활동과 전시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과거사 청산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이제 행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민족문제연구소가 꾸준히 모아온 자료를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며 우리의 과거를 제대로 바라보고 기억하기 위해 2018년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려 합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부지를 정했지만,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박물관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많은 것들이 부족합니다. 0712-4 Print

일본은 한일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근거 없음’이라고 주장합니다. 과거에 동아시아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동아시아 안보를 지키는 파수꾼이라 자처합니다. 게다가 일본은 일제 침략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의 상황을 토대로 경제부흥을 이끌었지만, 전후 보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는 발언을 그치지 않습니다. 한국정부는 그렇다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했을까요? 한국정부 역시 일본정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한국정부는 국민적 합의 없이 한일협정을 진행해 그 청구금을 경제발전의 재원으로 사용한 바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 역시 당사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진행하여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 번 눈물을 쏟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곁에는 과거를 부정하는 세력들에 저항하며 물러서지 않고 목소리를 내온 역사의 산 증인들이 살아 계십니다. 그러나 역사의 산 증인이신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며 과거를 증명하는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조금씩 사라지고 흩어져가는 기억들을 이제 한 곳에 모아 모든 이들이 함께 기억하고, 세대를 넘어 기억을 전달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지어주려 합니다. 이 기억들이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시민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시민들이 함께 모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여 제대로 된 역사 인식과 함께 역사를 통해 성찰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합니다.

역사의 참혹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민의 귀에 닿도록 만든 것은 피해자의 용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가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곁에서 도운 것은 한국에서 조직된 시민들의 힘이었습니다. 역사는 시민의 것입니다. 강한 자들이 제멋대로 헝클어놓은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 위해,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이제 역사 위에서 성찰하기 위해 시민의 힘이 필요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통해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기 위한 큰 길을 내고 싶습니다. 함께 동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 2017/07/1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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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은 서울시와 강북구,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회 후원으로 12월 18일 서울 강북문화예술회관에서 ‘항일음악회-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를 열었다. 좌석(670석)보다 더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어 부득이 계단까지 좌석을 마련하여 800여 명이 관람했다. 이번 음악회에는 장사익・노브레인 등 출연진 자신의 히트곡 외에 ‘광복군 아리랑’ ‘안중근 옥중가’ ‘압록강행진곡’ ‘앞으로 행진곡’ ‘목동가’ 등 항일음악 11곡이 연주됐다. ‘망국의 한’ ‘독립의 꿈’ ‘아이들은 자라고’ ‘해방의 노래’ 등 국권 피탈부터 독립까지 한국근현대사의 흐름에 따라 구성된 항일음악회는 지난 8월 연구소가 기획하고 노동은 중앙대 명예교수가 집필한 ????항일음악 330곡집????에 담긴 곡에 대한 해설도 프로그램북에 충실히 담아 교육적인 효과를 높이고자 했다. 장사익과 오단해, 인디밴드 노브레인, 국립전통예술고교 두레소리 합창단, ‘기쁨의 아리랑’ 뮤지컬 공연단, 강북구립여성합창단 등이 출연했으며 특별히 지난해 광복절 경축식에 ‘올드 랭 사인’ 곡조의 애국가를 불러 화제가 된 여성광복군 오희옥 여사(92)가 무대에 올라 ‘안중근 옥중가’ 가사를 낭독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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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악회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을 맞아 2011년 11월 개최한 항일음악회(총감독 노동은)에 이어 연구소가 주최한 두 번째 항일음악회다. 앞으로 연구소는 항일음악을 학교와 군대에 보급해 널리 불릴 수 있도록 힘쓸 예정이다. 이 음악회에는 고 노동은 교수의 큰아들인 노관우 씨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했고 연구소 팟캐스트 ‘역적’ 노기환 MC와 김초롱 MBC 아나운서가 사회를 담당했으며, 송복남・황동욱 회원이 영상 제작, 장이근 회원이 사진 촬영, 손재호 회원이 오희옥 여사의 차량이동을 맡아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8/01/2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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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IDS 만 2천명의 피해자중 한명입니다.

2016년 9월 IDS 김성훈대표가 긴급구속이 되고

그 이후 모집책이 김성훈대표가 100%변제를 해줄것이라며

지난 1년이상 민사 형사 소송을 지연시켜왔습니다.

 

저의 상황을 너무 잘 알고 그동안 너무 신뢰했었던 사람이기에

이 일에 대해 모든것이 사기라는 것을 알게되고

모집책 또한 같은 사기공범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이제 조금 정신을 차려

이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해결하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밤잠을 설쳐가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마음을 다스려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전액은 아니더라도 단돈 얼마라도 제발 변제를 해주었으면…

피해자들의 돈으로 법무법인 태평양을 선임하여 변호를 받고

구치소 동기인 한재혁과 공모하여 또다른 사기변제안을 만들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한 씨는 김성훈 ‘구치소 동기’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792

 

 

그 대위변제자는 피해자들의 피같은 돈으로

경찰 인사 청탁을 하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경찰 인사 청탁 정황 드러나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452

 

양파껍질같이 하나하나 들어날때마다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파산이라는 또 다른 커다란 시련이 피해자들의 앞을 가로막아

추운겨울 한파가 뼈속을 파고들고

흘린 눈물이 얼어붙는것같습니다.

 

 

제발… 제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올바른 역사행동을 하는 곳이고

이런 훌륭한 곳의 고문변호사를 맡고 계시는 분이니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수, 2017/12/0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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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민주연구원 국립현충원 이장 추진
“친일인사와 함께 모실 수 없다” 반대 거세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25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독립운동열사 7위선열의 사당인 의열사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문재인 캠프 제공)2017.3.25/뉴스1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복무하며 독립투사 소탕에 앞장섰던 김창룡(1902~1956)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다. 바로 맞은편 묘역에는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모친 곽낙원 여사(1858~1939)와 장남 김인(1917~1945)이 잠들어 있다. 친일논란 대상인데다 백범 암살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을 받는 인물과 독립투사의 유족이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민주당이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김구 선생의 묘소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한다는 구상을 밝히면서 비슷한 우려가 나온다. 민주당 민주연구원의 김민석 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효창공원에 안장된 김구 선생과 윤봉길·이봉창·안중근 열사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년 8월15일 광복절에 효창공원을 직접 찾아 참배해 임정 법통을 강조한 바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친일인사는 서울에 37명, 대전에 26명이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된 인물 중에는 서울에 7명, 대전에 4명이 묻혔다. 이 때문에 친일인사의 이장을 위해 국립묘지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여당이 임시정부 주석을 예우하기 위해 고민한다는 건 일리가 있다”면서도 “김창룡을 비롯해 친일인사들이 국립현충원에 남아있는데 그곳에 백범을 모시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반문했다.

박 실장은 “역사적폐 청산 차원에서도 친일독재를 반대한 민족인사를 반민족인사와 함께 모신다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이장 반대의사를 밝혔다.

김구 선생은 생전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효창공원 독립운동 동지들 곁에 묻어달라는 유훈을 남겼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김구 선생 외에도 항일투쟁 중 순국한 윤봉길(1908~1932), 이봉창(1901~1932), 백정기(1896~1934) 3의사의 묘소와 유해를 찾지못한 안중근 의사(1879~1910)의 가묘도 설치됐다. 이동녕(1869~1940), 조성환(1875~1948), 차이석(1881~1945)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의 묘소도 있다. 이는 모두 김구 선생이 해방 후 직접 조성해 의미가 크다.

이장보다는 현재 효창공원을 성역화하는 게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합당한 예우라는 지적도 있다. 친일인사가 섞여있는 현충원보다 독립투사들만으로 조성된 효창공원이 역사적 성지로서 더욱 상징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출입이 제한되고 일부 부지가 훼손되는 등 굴곡진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 효창공원은 국립묘지가 아닌 사적과 근린공원의 법적 지위로 용산구가 관리 중이다.

친일문제 전문가 정운현씨는 “효창공원은 역사성이 있고 백범기념관도 함께 운영 중이라는 가치도 있다. 백범도 땅속에서 이장을 원치않을 것”이라며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승격해 중앙정부 차원에서 예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nevermind@

<2018-03-01> 뉴스1

☞기사원문: “백범도 친일파와 묻히기 원치 않아”…효창공원 묘소이장 논란

토, 2018/03/03-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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