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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끌려간 게 사람만이 아니었더라 – 이출우검역소를 거쳐 일본에 끌려간 160여 만 마리의 조선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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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끌려간 게 사람만이 아니었더라 – 이출우검역소를 거쳐 일본에 끌려간 160여 만 마리의 조선 소

익명 (미확인) | 금, 2018/02/23- 10:47

[식민지비망록 33] 일제에 끌려간 게 사람만이 아니었더라 – 이출우검역소를 거쳐 일본에 끌려간 160여 만 마리의 조선 소

이순우 책임연구원

 

반도(半島, 조선)의 소는 논갈기, 밭갈기와 농사짓기에는 물론이고 일반운수용으로 혹은 피혁용, 식용으로도 그 이름이 널리 전동아(全東亞)에 떨쳐서 해마다 내지(內地, 일본)를 비롯하여 만주, 남양 방면으로 대량적으로 수이출되어 축산반도의 명성은 해를 거듭할수록 드높아가고 있다. 이에 반도에서도 전선(全鮮) 2천만 농가에 외쳐서 그동안 축우증식에 철저한 지도 장려를 거듭하여 온 결과 현재에는 175만여 두의 소가 총후농촌에서 씩씩한 식량증산의 일꾼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농촌 노무력이 상당히 긴박한 내지의 농촌을 비롯하여 만주 방면에서는 반도의 소를 더욱 많이 보내어달라고 얼마 전 총독부에 부탁하여 왔으므로 본부 농림국에서는 금년도에는 내지에 7만 마리, 만주에 2만 5천 마리, 합계 9만 5천 마리를 수이출키로 결정하고 각도 축산과와 연락하여 전북을 제외한 12도에 각각 그 수량을 결정
한 다음 근근 일제히 현지로 보내기로 되었다. 이것으로써 반도의 소는 결전하의 식량증산과 수송전선의 씩씩한 일꾼으로 또는 피혁용, 식용으로 더욱 커다란 책무를 완수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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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2년 4월 24일자에 수록된 기사를 보면, 총독부의 공식집계 이전 시기인 1907년
과 1908년에도 이미 각각 19,787마리와 18,060마리의 이출우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것은 <매일신보> 1943년 4월 25일자에 수록된 「조선우(朝鮮牛) 9만 5천 두(頭), 내지와 만주 방면으로 수이출(輸移出)」 제하의 보도내용이다. 이 기사가 나온 때는 일제의 패망이 불과 2년 남짓 남은 시점이었다. 이를테면 식민통치기의 막바지에 이르도록 그들의 침략전쟁을 위해 사람이건 물자건 간에 닥치는 대로 총동원하는 국면이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위의 기사에는 일 잘하고 죽어서까지 가죽과 고기로도 활용할 수 있는 조선소가 일본과 만주 등지로 대량반출되고 있는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소들은 통칭 ‘이출우(移出牛)’라고 하였다.
‘이출’이라는 표현은 한 나라 안에서 다른 지역으로 물자가 옮겨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 말에는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이 일본의 한 지방으로 간주될 뿐이라는 뜻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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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 근거를 둔 일지식료회사(日支食料會社)가 배포한 1920년대 초반 무렵의 조선우 판매광고. 광고문안에 “조선우는 하루에 3반보(反步, 300평)의 밭을 갈고, 200관적(貫積)의 짐수레를 끌고, 쌀 4표(俵, 가마니)를 지고, 비료와 송아지를 생산하며, 최후에는 고기소로 하여 산 가격보다도 아주 비싸게 파는 이익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이출우의 연원이 궁금하여 몇 가지 자료를 뒤져봤더니, 쓰즈미 요시오(鼓義男)가 편찬한 <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朝鮮興業株式會社三十周年記念誌)>(1936), 168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흥업은 부산이출우검역소에 계류된 소들의 우사(牛舍) 및 사양관리(飼養管理)를 담당하는 회사였다.

 

대체로 조선우의 내지(內地) 수출에 관해서는 …… 근대에 있어서는 명치 17년(1883년) 오이타현(大分縣) 사람 사토 이사고로(佐藤伊佐五郞)와 시모노세키(下關)의 미치모리 만지로(道森萬次郞) 양씨가 이, 삼십 두를 부산에서 수입한 것을 효시로 한다. 그 후 청일, 러일 양전역(戰役)의 결과는 군수용 우육 공급상 내지에 있어서 축우의 감소를 가져왔고, 이것의 보충을 계기로 하여 해마다 다수의 축우가 수출되어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진출에 동반하여 당연 문제가 된 것은 우역(牛疫)의 전파와 그 예방이었다. 명치 연간 내지에 있어서 우역의 유행은 전후 11회에 이르고 그 손실은 7만 두에 달하고 있지만 그 병원지(病源地)는 항상 조선에 있었다고 칭해지고 있다. 명치 37년(1904년) 농상무성(農商務省)은 후쿠오카현 수입수역검역소(福岡縣 輸入獸疫檢疫所)를 설치하고 내지 축우의 옹호에 나
섰는데 명치 41년(1908년)에는 또 다시 2부(府) 14현(縣)에 걸쳐 우역의 대유행을 보게 됨에 따라, 마침내 한국정부에 대해 부산진(釜山鎭)에 이출우검역소의 건설을 교섭하였고 이로써 발본색원의 방책을 강구하려고 했다.

 

여길 보면 일본에서 발생한 우역의 근원지를 조선으로 지목하고, 한국정부에 대해 검역소의 설치를 요구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1909년 7월 10일에 법률 제21호 「수출우검역법」과 칙령 제65호 「수출우검역소관제」가 제정 공포되었는데, 이 당시는 아직 대한제국의 실체가 남아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의당 ‘이출’이 아닌 ‘수출’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경상남도 동래부 용주면 우암동(慶尙南道 東萊府 龍珠面 牛巖洞)에 수출우검역소가 처음 설치되어, 이곳에서 우역, 탄저, 유행성아구창(流行性鵝口瘡, 구제역)에 대한 검역을 실시할 목적으로 9일간 계류검사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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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뉴얼리포트(1908~1909)>에 수록된 부산 우암동 소재 ‘수출우검역소(1909년 개설)’의 전경. 이곳은 경술국치 이후 ‘이출우검역소’로 이름만 변경된 채 그대로 사용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는 이출우검역소로 명칭이 변경되는 한편 부산세관(釜山稅關)에 부속된 기구로 변했다가 1912년 3월에 총독부경찰관서관제의 개정에 따라 위생관련업무 일체가 경찰사무로 귀속되면서 이곳은 다시 경무총감부 위생과의 소관 기구로 바뀌기에 이른다. 곧이어 1919년 8월에는 경찰관서관제의 폐지와 더불어 도지사(道知事)의 소관에 속하는 검역기구로 전환되었다.
그 사이에 1915년에 제정된 「수역예방령(獸疫豫防令)」과 「이출우검역규칙」에 따라 이출우에 대한 검역이 점차 강화되어 부산항은 물론이고 마산항, 원산항, 성진항, 행암만(行巖灣, 진해), 청진항, 웅기항 등지로 검역대상항구가 계속 확장되었다. 특히 1925년 8월에는 총독부령으로 「축우(畜牛)의 이출에 관한 건」을 제정하여 “수역예방령 제13조의 규정에 의해 행하는 검역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니면 이를 이출할 수 없다”고 정하는 한편 「이출우검역규칙」도 전면 개정하여 “경기도 인천항, 경상남도 부산항, 평안남도 진남포항, 함경남도 원산항 및 함경북도 성진항에서 의무적으로 이뤄지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부산이출우검역소를 제외한 나머지 네 곳의 항구에는 해당 이출우검역소가 신설된 바 있다. 그 후 1937년 11월에 이르러 경상북도 포항항에도 이출우검역소가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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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 설치되었다가 1943년에 폐쇄된 인천이출우검역소(인천 항동 소재)의 전경. <일본제국가축전염병 예방사>, 1938.

 

이출우검역소의 개설 및 폐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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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출우검역소의 제도가 다시 한 번 크게 변경된 때는 1943년 7월이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결전식량증산(決戰食糧增産)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이출우가 격증함에 따라 검역의 철저를 기하는 동시에 여러 항구에 흩어져 있는 각 검역소를 통합 정리하기 위해 종래 도지사 소관이던 부산, 진남포, 원산 등 세 곳은 총독부 직할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나머지 검역소는 일괄 폐지하였다. 또한 종래의 이출우 검역사무에 더하여 황해도 신계군과 장연군에 각각 모리나가제과(森永製菓)와 메이지제과(明治製菓)의 목장을 설치하고 1944년부터 100마리씩의 젖소를 이식함과 동시에 연유, 분유, 버터 등을 생산하는 시설을 갖추는 등 조선에서 낙농사업(酪農事業)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에 따라 일본에서 이입되는 유우(乳牛, 젖소)에 대한 결핵병검사도 이곳에서 수행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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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통해 수송된 이출우들이 부산진역에서 하역되고 있는 모습. <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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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재능력 500두에 달하는 이출우 수송전용선 닛쵸마루(日朝丸)의 모습. 부산에서 시모노세키 후쿠우라(下關 福浦)까지 불과 13시간이면 도착하며, 이곳에 도착한 이출우는 다시 5일간의 검역을 거친
이후 일본 전역으로 팔려나가게 된다. <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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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 (1936)에 수록된 ‘조선우 집산계통 약도’이다. 여기에는 조선 각지에서 수집된 소들이 각 항구를 통해 일본 또는 만주로 빠져나간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와 함께 「조선가축전염병예방령」의 개정을 통해 우역(牛疫), 탄저(炭疽), 기종저(氣腫疽), 우폐역(牛肺疫), 구제역(口蹄疫), 비저(鼻疽), 양두(羊痘), 돈콜레라(豚コレラ), 돈역(豚疫), 돈단독(豚丹毒), 광견병(狂犬病), 가금콜레라(家禽コレラ) 등 12종이었던 법정가축 전염병의 종류에 우(牛)의 야수역(野獸疫), 가성피저(假性皮疽), 마(馬)의 전염성빈혈(傳染性貧血), 가금페스트(家禽ペスト) 등 4종이
추가되었고, 종래 도지사에게만 속했던 가축전염병예방에 관한 처분권한을 이출우검역소장에게도 부여하는 내용이 신설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출우검역소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소는 과연 어느 정도의 규모였을까? 조선총독부가 해마다 펴낸 <조선가축위생통계>에 따르면 1909년 이후 1942년에 이르는 기간에 무려 147만 여 마리가 이출되었으며, 그 가운데 부산항을 통해 빠져나간 것만 100만 마리에 달할 정도로 이 지역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 수치에서 빠진 1943년 이후에도 해마다 최소 7만 마리 정도가 일본으로 유출되었으므로 이를 추계하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이출우의 총규모는 160만 마리를 상회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수난을 겪은 분야가 어디 한 둘이랴마는 이렇듯 이 땅의 소들에게도 수탈의 손길이 비껴나지 않았음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이들은 대개 뼈 빠지게 일만 하고 결국 한 줌의 고기소가 되어 사라졌을 테지만, 이 대목에서 불현듯 일본 땅 어디에 조선소의 혈통을 이은 후손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그 현황이 자꾸 궁금해진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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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기획 제작 등: PD 김세호,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방은희 교육팀장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2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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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 이순우, 김영환, 강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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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23년 10월 4일자. 해태상(해치상)이 원래의 위치인 광화문 앞에서 경복궁 안쪽 구석에 옮겨져 거적때기에 둘러쌓인채 방치되고 있다는 기사다.

“오백년 옛 대궐 경복궁 앞에 말없이 쭈그리고 앉아있는 해태(해치)를 보았으리라… 무슨 죄 있어 다리를 동이고 허리를 매어… 궁궐 한편 모퉁이에 결박 당하고 거적 쓴 채로 참혹하게 드러누웠더라.” 광화문 월대 앞에서 경복궁을 지키고 서있던 해치가 궁궐 한편에 쳐박혀있는 몰골을 전한 동아일보 1923년 10월 4일 기사다.

조선부업품공진회 개막에 발맞춰 개통된 전차와 관람객의 동선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광화문 앞의 해치가 철거·이전된 것이다. 거적때기에 쌓여 궁궐 안쪽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초라한 몰골은 식민지 조선의 딱한 처지를 웅변해주었다.

궁궐의 입출구를 구분짓는 월대 앞에 놓인 해치는 일종의 하마비 역할도 했다. 지금부터 궁궐권역이니 말에서 내리라는 표시였다. “1870년(고종 7년)대궐 문에 해치를 세워 한계로 삼았고…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 말을 탈 수 없다”(<고종실록>)는 기사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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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발표한 광화문 앞 공간 복원 계획도. 월대와 해치를 복원한 역사광장과 시민들의 공간인 시민광장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두 공간 사이에 ㄷ 형태의 도로가 예정돼있다.

1924년 10월 조선총독부 정동 분실에서 일어난 불의 원인이 ‘해치상을 치워버린 탓’이라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이것이 찜찜했던지 일제는 쳐박아두었던 해치상을 조선총독부(중앙청) 뜰 앞에 옮겨놓았다. 지금 광화문 담장 밑에 바짝 붙은 채로 서있는 옹색한 해치상은 1968년 12월 광화문 복원 때 재이전한 것이다. 물론 제자리가 아니다. 광화문 해치는 흔히 ‘불(火)의 산인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고 궁문 앞에 세워놓은 흰돌의 물짐승’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규경(1788~?)이 “해치는 화수(火獸), 즉 불을 먹고 사는 짐승”(<오주연문장전산고>)이라 한데서 유래한 속설일 가능성이 크다.

해치는 또 예부터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수(神獸)로 알려져 왔다. 후한의 왕충(27~97?)은 “해치는 옥사를 다스릴 때 죄가 있는 사람을 골라 들이받는 속성이 있다”(<논형>)고 기록했다.

역시 후한의 양부가 지은 <이물지>는 “외뿔 짐승인 해치는 싸움이 일어날 때 부정직한 자를 들이받고, 바르지 않는 자를 깨물었다”면서 “전국시대 초나라 법관들은 해치관을 법복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후 동양에서 법을 담당하는 관리들은 해치관(冠)이나 해치문양의 관복을 의무적으로 입었다.

요즘의 검찰·감사원에 해당되는 조선시대 사헌부 관리들은 마찬가지였다.

“1796년(정조 20년)사헌부 지평(정 5품)이 해치관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직됐다”(<정조실록>)는 기록이 등장할 정도다.

해치를 궁궐 앞에 세워둔 까닭은 자명하다. 출퇴근하는 관리들은 해치의 꼬리를 쓰다듬으면서 마음 속 먼지를 털어내고 공명정대한 정사를 다짐하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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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1907년 사이 촬영된 광화문 앞. 해치상과 월대가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10일 맺은 광화문 역사광장 조성 업무협약의 주요내용이 바로 ‘광화문 앞 월대와 해치상의 제자리 찾기’이다.

물론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의 언급처럼 역사광장(월대·해치)과 시민광장이 ㄷ자형 도로로 양분되는 등의 새로운 문제점도 제기되고 있다.

“광화문 앞 공간을 반드시 광장으로 꾸며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근본적인 질문까지 나온다. 깊이있는 토론과 의견 수렴이 뒷받침되지 않는 정책이라면 시대마다, 정권마다 제각각의 복원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두 일리있는 지적이다.

다만 어떤 경우라도 월대와 해치는 제자리에서 제대로 복원되기를 바란다. 해치의 꼬리를 매만지면서 스스로 마음을 단속하고 시비곡직을 다짐하는 통과의례가 요즘처럼 절실한 때가 또 어디 있는가.<참고자료>

이순우, <광화문 육조 앞길-근대서울의 역사문화공간>, 하늘재, 2012
<테라우치, 조선의 꽃이 되다>, 하늘재, 2004
김언종, ‘해태고’, <한국한문학연구> 제42권 42호, 한국한문학회, 2008
이성준, ‘경복궁 근정전 월대 난간석주상 연구’, <미술사학연구> 272호, 한국미술사학회, 2011

<2018-04-12> 경향신문

☞기사원문: [여적]광화문 해치의 제자리찾기

목, 2018/04/12-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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