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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끌려간 게 사람만이 아니었더라 – 이출우검역소를 거쳐 일본에 끌려간 160여 만 마리의 조선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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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끌려간 게 사람만이 아니었더라 – 이출우검역소를 거쳐 일본에 끌려간 160여 만 마리의 조선 소

익명 (미확인) | 금, 2018/02/23- 10:47

[식민지비망록 33] 일제에 끌려간 게 사람만이 아니었더라 – 이출우검역소를 거쳐 일본에 끌려간 160여 만 마리의 조선 소

이순우 책임연구원

 

반도(半島, 조선)의 소는 논갈기, 밭갈기와 농사짓기에는 물론이고 일반운수용으로 혹은 피혁용, 식용으로도 그 이름이 널리 전동아(全東亞)에 떨쳐서 해마다 내지(內地, 일본)를 비롯하여 만주, 남양 방면으로 대량적으로 수이출되어 축산반도의 명성은 해를 거듭할수록 드높아가고 있다. 이에 반도에서도 전선(全鮮) 2천만 농가에 외쳐서 그동안 축우증식에 철저한 지도 장려를 거듭하여 온 결과 현재에는 175만여 두의 소가 총후농촌에서 씩씩한 식량증산의 일꾼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농촌 노무력이 상당히 긴박한 내지의 농촌을 비롯하여 만주 방면에서는 반도의 소를 더욱 많이 보내어달라고 얼마 전 총독부에 부탁하여 왔으므로 본부 농림국에서는 금년도에는 내지에 7만 마리, 만주에 2만 5천 마리, 합계 9만 5천 마리를 수이출키로 결정하고 각도 축산과와 연락하여 전북을 제외한 12도에 각각 그 수량을 결정
한 다음 근근 일제히 현지로 보내기로 되었다. 이것으로써 반도의 소는 결전하의 식량증산과 수송전선의 씩씩한 일꾼으로 또는 피혁용, 식용으로 더욱 커다란 책무를 완수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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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2년 4월 24일자에 수록된 기사를 보면, 총독부의 공식집계 이전 시기인 1907년
과 1908년에도 이미 각각 19,787마리와 18,060마리의 이출우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것은 <매일신보> 1943년 4월 25일자에 수록된 「조선우(朝鮮牛) 9만 5천 두(頭), 내지와 만주 방면으로 수이출(輸移出)」 제하의 보도내용이다. 이 기사가 나온 때는 일제의 패망이 불과 2년 남짓 남은 시점이었다. 이를테면 식민통치기의 막바지에 이르도록 그들의 침략전쟁을 위해 사람이건 물자건 간에 닥치는 대로 총동원하는 국면이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위의 기사에는 일 잘하고 죽어서까지 가죽과 고기로도 활용할 수 있는 조선소가 일본과 만주 등지로 대량반출되고 있는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소들은 통칭 ‘이출우(移出牛)’라고 하였다.
‘이출’이라는 표현은 한 나라 안에서 다른 지역으로 물자가 옮겨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 말에는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이 일본의 한 지방으로 간주될 뿐이라는 뜻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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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 근거를 둔 일지식료회사(日支食料會社)가 배포한 1920년대 초반 무렵의 조선우 판매광고. 광고문안에 “조선우는 하루에 3반보(反步, 300평)의 밭을 갈고, 200관적(貫積)의 짐수레를 끌고, 쌀 4표(俵, 가마니)를 지고, 비료와 송아지를 생산하며, 최후에는 고기소로 하여 산 가격보다도 아주 비싸게 파는 이익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이출우의 연원이 궁금하여 몇 가지 자료를 뒤져봤더니, 쓰즈미 요시오(鼓義男)가 편찬한 <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朝鮮興業株式會社三十周年記念誌)>(1936), 168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흥업은 부산이출우검역소에 계류된 소들의 우사(牛舍) 및 사양관리(飼養管理)를 담당하는 회사였다.

 

대체로 조선우의 내지(內地) 수출에 관해서는 …… 근대에 있어서는 명치 17년(1883년) 오이타현(大分縣) 사람 사토 이사고로(佐藤伊佐五郞)와 시모노세키(下關)의 미치모리 만지로(道森萬次郞) 양씨가 이, 삼십 두를 부산에서 수입한 것을 효시로 한다. 그 후 청일, 러일 양전역(戰役)의 결과는 군수용 우육 공급상 내지에 있어서 축우의 감소를 가져왔고, 이것의 보충을 계기로 하여 해마다 다수의 축우가 수출되어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진출에 동반하여 당연 문제가 된 것은 우역(牛疫)의 전파와 그 예방이었다. 명치 연간 내지에 있어서 우역의 유행은 전후 11회에 이르고 그 손실은 7만 두에 달하고 있지만 그 병원지(病源地)는 항상 조선에 있었다고 칭해지고 있다. 명치 37년(1904년) 농상무성(農商務省)은 후쿠오카현 수입수역검역소(福岡縣 輸入獸疫檢疫所)를 설치하고 내지 축우의 옹호에 나
섰는데 명치 41년(1908년)에는 또 다시 2부(府) 14현(縣)에 걸쳐 우역의 대유행을 보게 됨에 따라, 마침내 한국정부에 대해 부산진(釜山鎭)에 이출우검역소의 건설을 교섭하였고 이로써 발본색원의 방책을 강구하려고 했다.

 

여길 보면 일본에서 발생한 우역의 근원지를 조선으로 지목하고, 한국정부에 대해 검역소의 설치를 요구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1909년 7월 10일에 법률 제21호 「수출우검역법」과 칙령 제65호 「수출우검역소관제」가 제정 공포되었는데, 이 당시는 아직 대한제국의 실체가 남아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의당 ‘이출’이 아닌 ‘수출’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경상남도 동래부 용주면 우암동(慶尙南道 東萊府 龍珠面 牛巖洞)에 수출우검역소가 처음 설치되어, 이곳에서 우역, 탄저, 유행성아구창(流行性鵝口瘡, 구제역)에 대한 검역을 실시할 목적으로 9일간 계류검사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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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뉴얼리포트(1908~1909)>에 수록된 부산 우암동 소재 ‘수출우검역소(1909년 개설)’의 전경. 이곳은 경술국치 이후 ‘이출우검역소’로 이름만 변경된 채 그대로 사용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는 이출우검역소로 명칭이 변경되는 한편 부산세관(釜山稅關)에 부속된 기구로 변했다가 1912년 3월에 총독부경찰관서관제의 개정에 따라 위생관련업무 일체가 경찰사무로 귀속되면서 이곳은 다시 경무총감부 위생과의 소관 기구로 바뀌기에 이른다. 곧이어 1919년 8월에는 경찰관서관제의 폐지와 더불어 도지사(道知事)의 소관에 속하는 검역기구로 전환되었다.
그 사이에 1915년에 제정된 「수역예방령(獸疫豫防令)」과 「이출우검역규칙」에 따라 이출우에 대한 검역이 점차 강화되어 부산항은 물론이고 마산항, 원산항, 성진항, 행암만(行巖灣, 진해), 청진항, 웅기항 등지로 검역대상항구가 계속 확장되었다. 특히 1925년 8월에는 총독부령으로 「축우(畜牛)의 이출에 관한 건」을 제정하여 “수역예방령 제13조의 규정에 의해 행하는 검역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니면 이를 이출할 수 없다”고 정하는 한편 「이출우검역규칙」도 전면 개정하여 “경기도 인천항, 경상남도 부산항, 평안남도 진남포항, 함경남도 원산항 및 함경북도 성진항에서 의무적으로 이뤄지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부산이출우검역소를 제외한 나머지 네 곳의 항구에는 해당 이출우검역소가 신설된 바 있다. 그 후 1937년 11월에 이르러 경상북도 포항항에도 이출우검역소가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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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 설치되었다가 1943년에 폐쇄된 인천이출우검역소(인천 항동 소재)의 전경. <일본제국가축전염병 예방사>, 1938.

 

이출우검역소의 개설 및 폐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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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출우검역소의 제도가 다시 한 번 크게 변경된 때는 1943년 7월이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결전식량증산(決戰食糧增産)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이출우가 격증함에 따라 검역의 철저를 기하는 동시에 여러 항구에 흩어져 있는 각 검역소를 통합 정리하기 위해 종래 도지사 소관이던 부산, 진남포, 원산 등 세 곳은 총독부 직할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나머지 검역소는 일괄 폐지하였다. 또한 종래의 이출우 검역사무에 더하여 황해도 신계군과 장연군에 각각 모리나가제과(森永製菓)와 메이지제과(明治製菓)의 목장을 설치하고 1944년부터 100마리씩의 젖소를 이식함과 동시에 연유, 분유, 버터 등을 생산하는 시설을 갖추는 등 조선에서 낙농사업(酪農事業)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에 따라 일본에서 이입되는 유우(乳牛, 젖소)에 대한 결핵병검사도 이곳에서 수행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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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통해 수송된 이출우들이 부산진역에서 하역되고 있는 모습. <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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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재능력 500두에 달하는 이출우 수송전용선 닛쵸마루(日朝丸)의 모습. 부산에서 시모노세키 후쿠우라(下關 福浦)까지 불과 13시간이면 도착하며, 이곳에 도착한 이출우는 다시 5일간의 검역을 거친
이후 일본 전역으로 팔려나가게 된다. <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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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흥업주식회사 삼십주년기념지> (1936)에 수록된 ‘조선우 집산계통 약도’이다. 여기에는 조선 각지에서 수집된 소들이 각 항구를 통해 일본 또는 만주로 빠져나간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와 함께 「조선가축전염병예방령」의 개정을 통해 우역(牛疫), 탄저(炭疽), 기종저(氣腫疽), 우폐역(牛肺疫), 구제역(口蹄疫), 비저(鼻疽), 양두(羊痘), 돈콜레라(豚コレラ), 돈역(豚疫), 돈단독(豚丹毒), 광견병(狂犬病), 가금콜레라(家禽コレラ) 등 12종이었던 법정가축 전염병의 종류에 우(牛)의 야수역(野獸疫), 가성피저(假性皮疽), 마(馬)의 전염성빈혈(傳染性貧血), 가금페스트(家禽ペスト) 등 4종이
추가되었고, 종래 도지사에게만 속했던 가축전염병예방에 관한 처분권한을 이출우검역소장에게도 부여하는 내용이 신설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출우검역소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소는 과연 어느 정도의 규모였을까? 조선총독부가 해마다 펴낸 <조선가축위생통계>에 따르면 1909년 이후 1942년에 이르는 기간에 무려 147만 여 마리가 이출되었으며, 그 가운데 부산항을 통해 빠져나간 것만 100만 마리에 달할 정도로 이 지역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 수치에서 빠진 1943년 이후에도 해마다 최소 7만 마리 정도가 일본으로 유출되었으므로 이를 추계하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이출우의 총규모는 160만 마리를 상회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수난을 겪은 분야가 어디 한 둘이랴마는 이렇듯 이 땅의 소들에게도 수탈의 손길이 비껴나지 않았음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이들은 대개 뼈 빠지게 일만 하고 결국 한 줌의 고기소가 되어 사라졌을 테지만, 이 대목에서 불현듯 일본 땅 어디에 조선소의 혈통을 이은 후손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그 현황이 자꾸 궁금해진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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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폭파 의거’ 75주년 기념 행사

1945년 7월 24일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중의원까지 지낸 친일거두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주최로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앞세워 태평양전쟁에 조선 젊은이들의 참여를 선동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을 비롯한 일제의 수괴들과 거물급 친일파들이 대거 참석하고 있었다. 대회 소식을 사전에 입수한 ‘대한애국청년당’ 소속 조문기(1927~2008, 민족문제연구소 제2대 이사장 역임), 유만수(1924~1975), 강윤국(1926~2009) 등은 대담하게 대회장에 다이너마이트 2개를 설치, 폭파시켜 대회를 무산시켰다. 이 통쾌한 의거로써 패망 전 최후의 발악을 하던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일본 패망 직전 경성 한복판에서 조선독립의 의지를 널리 알린 일제강점기 의열투쟁의 대미를 장식한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연구소는 매년 의거일에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특히 의거 70주년이었던 2015년 7월 24일에는 의거 현장인 서울특별시의회 본 회의장에서 재연극 ‘정의의 폭탄’을 공연한 후 영상과 교육자료로 제작하여 서울 시내 중·고등학교 210여곳에 배포한 바 있다. 서울특별시의회 역시 3·1운동 100주년이었던 2019년 서울특별시의회 본회의장이 항일투쟁의 현장임을 알리는 홍보 영상과 전시물을 제작해 독립정신 고취에 나서고 있다.
연구소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기 위해 의거 기념식은 생략하고 7월 24일 임헌영 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이항증(임정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선생 후손), 차영조(임정 비서장 동암 차리석 선생 후손),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선생 후손), 김재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기획팀장, 방학진 기획실장 등이 김인호 서울시의회 의장과 함께 의회 내 부민관 의거 전시 시설을 관람하고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서울 왕산로(의병장 허위 선생의 호를 딴 도로로 청량리 시조사 입구에서 신설동역에 이르는 길)에 왕산 허위 의병장 동상 건립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한편 연구소 후원회원이기도 한 김인호 의장은 이날 “우리 민족은 큰 위기를 겪을 때마다 굳은 의지와 기개로 반드시 위기를 극복해낸 경험이 있다.”고 언급하며 “부민관 폭파 의거 75주년을 맞이해 우리의 민족정신을 다시금 되새기고, 지금 처한 위기를 의연하게 대응해나가는 서울시의회가 되겠다.”고 밝혔다

수, 2020/08/26-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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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개막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이 8월 11일 개막하였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인 3월 5일 또는 4월 1일에 개막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로 연기되었다. 창간일 대신 두 신문이 1940년 일제에 의해 폐간 당한 8월 11일에 맞추어 개막하였다. 이 기획전은 일제가 발행을 허가한 1920년부터 1940년 폐간되기까지 20년간 두 신문의 부일협력 행위를 추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하는 이번 기획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모두 4부로 구성되었는데, 먼저 198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낯 뜨거운 ‘민족지’ 논쟁을 소개하며 “두 신문이 과연 민족지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제1부 「조선의 ‘입’을 열다」에서는 조선‧동아의 창간배경을 파헤쳤다. 3‧1운동 후 일제는 민심 파악과 여론 조작을 위해 민간신문의 설립을 허용했다는 사실과 두 신문의 창간 주도세력의 성격을 통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태생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2부 「황군의 나팔수가 된 조선·동아」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 개전을 계기로 경쟁적으로 침략전쟁 미화에 나선 두 신문의 보도 실태를 조명한다. 그리고 두 신문의 투항이 사실상 이해관계에 따른 자발적 선택이었음을 다양한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총독부의 보도지침이 강제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본국민적 태도’를 보인 전쟁 보도는 조선·동아의 노골적인 부역행위의 결정판이었다.
제3부 「가자, 전선으로! 천황을 위해」는 조선·동아가 1938년 시행된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제도와 전쟁동원을 어떻게 선전·선동했는지를 고발한다. 조선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희생양으로 내몬 행위는 단순한 부역이 아니라 전쟁범죄로 규정해야 할 두 신문의 흑역사이다.

 

제4부 「조선·동아 사주의 진면목」에서는 일제하 조선일보 방응모와 동아일보 김성수의 친일행적을 다룬다. 언론사를 사유화한 두 사주는 전쟁협력을 위한 각종 관변단체의 임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강연·기고 등을 통해 일제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하는 활동을 펼쳤다. 방응모가 고사기관총을 국방헌납하고 김성수가 “탄환으로 만들어 나라를 지켜달라”며 철대문을 뜯어다 바친 반민족범죄도 소개한다. 에필로그에서는 프랑스의 친나치 언론 숙청과 우리의 반복되고 있는 부역언론의 현재를 비교하였다.
고경일 작가의 카툰과 레오다브의 그래피티가 전시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고, 언론개혁 특강 등 부대행사가 전시 폐막 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전시물로는 동아일보가 정간 해제를 목적으로 총독부에 복종을 서약한 경위가 담긴 「동아일보 발행정지 처분의 해제에 이른 경과」와 조선일보 폐간 당시 사주 방응모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밀약을 담은 「언문신문 통제에 관한 건」 등 조선총독부의 극비문서가 있다.
그동안 조선‧동아 1면에 실린 일왕부부의 사진에만 주목했다면 1면에 일왕부부의 사진이 실리게 된 뒷배경을 바로 이 극비문서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입수한 재일 조선인 유학생 단체들의 동아일보 ‘성토문’ 원본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1924년 만들어진 이 성토문 전단은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광수가 쓴 사설 ‘민족적 경륜’의 친일 성향과 패배 의식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조선 민중이 ‘민족지’를 표방한 동아일보에 얼마나 실망과 분노를 토해내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짐에 따라 전시장을 직접 올 수 없는 분들을 위해 VR온라인전시도 추진중이다. 전시 홍보 영상은 유튜브 민족문제연구소 채널에서 보실 수 있으며 기획전 도록도 회원들에게 제공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10월 25일까지 열린다. 언론개혁의 의지를 담아 회원들의 많은 참여와 성원을 바란다.

수, 2020/08/26-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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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 특강 열려

 

기획전 개막과 더불어 언론개혁을 촉구하는 특강도 함께 열렸다. 적폐언론의 대명사가 된 두 신문이 지난과오에 대해 침묵하고 이제는 최소한의 언론윤리마저 저버리고 극우수구세력의 대변지 역할에 앞장서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들의 진면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일제강점기 조선‧동아의 100년을 돌아보고 한국 언론의 문제점과 개혁 방향을 진단해 보는 특강을 마련했다.
과거 유신독재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펼친 원로 언론인 김종철 전 동아투위 위원장부터, 조선‧동아 100년의 역사를 추적해온 역사학자 장신 교수와 적폐언론의 개혁 방향을 제시할 언론학자 박용규‧정준희 교수, 현재 적폐 언론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언론감시 활동가 민주언론시민연합 신미희 사무처장과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을 모시고 한국 언론의 과거와 현재, 언론개혁의 미래를 살펴보았다.
코로나 19로 8월 20일부터 현장참가는 제한하고 모두 온라인으로만 진행하고 있다. 8월 11일부터 8월 27일까지 6회에 걸친 특강은 유튜브 민족문제연구소 채널(https://www.youtube.com/user/MinjokMovie)에서 보실 수 있다.

• 김승은 학예실장

수, 2020/08/26-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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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방씨 일가의 ‘그린벨트 훼손 불법 호화 묘지’ 규탄 집회

 

 

연구소 경기북부지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의정부시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준)는 8월 8일 의정부종합운동장 엄복동 동상 앞에서 ‘친일파 조선일보 방씨 일가 불법행위범시민 규탄대회’를 열고 불법 호화묘지에 대한 행정절차에 즉각 돌입할 것을 의정부시에 요구했다.
앞서 고발뉴스는 지난해 1월부터 방씨 일가가 700여 평에 이르는 그린벨트 임야를 훼손해 호화 분묘를 불법 조성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의정부시는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음을 연속 보도했다. 고발뉴스의 보도를 접한 기념사업회는 이날 집회에서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해방 후에는 친독재를 일삼아온 조선일보 사주 방씨 일가가 수십 년 전부터 의정부시 가능동에 불법 조성한 가족묘지에 대해 관계당국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에 상응하는 법적 조치와 원상회복을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또한 ‘의정부 관내 불법 조성된 조선일보 방응모 일가의 가족묘에 대하여 법률에 따라 엄격한 처벌과 원상복구를 위하여 청원드립니다’란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도 올려놓았다. 참가자들은 집회를 마친 후 엄복동 동상부터 가족묘가 시작되는 입구까지 행진했다. 의정부시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준)는 올 가
을에 정식 창립과 동시에 조선일보를 산림법, 장묘법, 개발제한구역특별법 등 위반 혐의로 고발할 예정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20/08/26-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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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61]

벽제관 후면 언덕에 솟아오른 ‘전적기념비’의 정체는?
침략전쟁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랐던 그들만의 기념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제강점기 도시인의 일상생활에 관한 자료를 뒤적이다 보면 곧잘 마주치는 용어의 하나가 ‘하이킹(hiking)’이다. 누군가는 이를 ‘산책여행(散策旅行)’이라고 옮겨놓은 것을 본 적도 있는데, 어쨌거나 도회지 생활에 심신이 지친 사람들이 배낭을 꾸려 반나절이나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교외지역으로 도보여행을 하는 것을 일컫는 표현이다.
이러한 하이킹은 1930년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던 시기에 크게 성행한 적이 있었고, 심지어 전시체제기가 본격화한 이후에도 “걷는 것은 훌륭한 국민운동”이라고 하여 이러한 활동 자체가 크게 장려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경성 근교(京城 近郊)의 하이킹 코스를 소개하는 특집 연재기사들이 잇따라 신문지상에 등장하였고, 여러 단체에서 주선하여 벌어지는 하이킹 행사도 신청자 모집에 어렵잖게 큰 호응을 이끌어 내곤 했다.
이 당시에 무수하게 쏟아졌던 하이킹 관련 안내서적을 통틀어 그 으뜸으로 꼽히는 것은 단연 ‘경전하이킹코스(京電ハイキングコース)’ 시리즈였다. 1937년 10월 15일에 제1집 <북한산(北漢山)>이 처음 선을 보인 이후로 같은 달에 <비봉(碑峰)>(제2집), <풍납리토성(風納里土城)>(제3집), <당인리(唐人里)>(제4집), <양천(陽川)>(제5집) 등이 한꺼번에 배포되었고, 해를 바꿔 1938년 5월에는 <벽제관(碧蹄館)>(제6집)과 <남한산(南漢山)>(제7집)이 추가로 발간되었다. 이 시리즈의 제1집 말미에 수록된 ‘편집후기’를 보면 앞으로 발간할 예정인 전체 30개에 달하는 하이킹코스의 목록이 장황하게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최초의 방대한 계획과는 달리 실제로는 총7편을 펴낸 것을 마지막으로 시리즈의 발간은 중단되고 말았다. 아무튼 이들 자료는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의 전무였던 무샤 렌조(武者鍊三)의 지시에 따라 3년 정도의 기획기간에 걸쳐 편찬한 결과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성전기의 산악부원과 감리실원이 주축이 되어 실지조사를 겸하고 카토 칸카쿠(加藤灌覺), 오카다 코(岡田貢), 이마무라 토모(今村鞆) 등과 같은 준관변학자(準官邊學者)의 도움을 받았으며, 또한 전문적인 사진촬영자가 배치되어 다양한 화보 성격의 사진자료가 첨부되었다. 여기에는 도보여행지로 이동하는 교통편에 관한 정보라든가 각 지점 간의 행로 등이 소상히 서술되어 있고, 각 코스에서 풍치가 빼어난 곳들에 대한 소개는 물론이고 주변 행로에 흩어진 고적(古蹟)에 대한 설명도 비교적 풍부하게 곁들여졌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시리즈로 펴낸 ‘경전하이킹코스’의 제6집 <벽제관(碧蹄館)> (1938년 5월 1일 발행)의 표지 모습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임진왜란 당시 벽제관전투의 현장이 묘사된 지도자료이다. 흔히 벽제관전투라고는 하지만 실제의 전장은 여석현(礪石峴, 숫돌고개)을 중심으로 한 곳이었으며, 더구나 벽제관의 위치도 지금과는 다르게 ‘빈정리’에 자리하고 있었다.(경성전기주식회사, <벽제관>, 1938)

 

<벽제관 (경전하이킹코스 제6집)> (1938)에 수록된 문록교(文祿橋, 분로쿠바시) 쪽에서 바라본 벽제관 일대의 원경사진으로 산중턱에 보이는 하얀 돌기둥이 곧 ‘벽제관전적기념비’이다.

 

여석현(礪石峴, 숫돌고개)의 정상에 설치된 벽제관 고전장 표석의 모습이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설치한 흔적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잔존여부를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벽제관>, 1938)

 

혹여 이러한 행로 도중에 일본인과 관련한 사적지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촘촘하고 상세한 설명이 주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들 가운데 1938년 5월 1일에 발간된 <벽제관(碧蹄館)>(제6집)은 바로 이러한 범주에 속한 대표적인 하이킹 안내서였다.
벽제관이라고 하면 두말할 나위 없이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자기네 선조들의 전승지(戰勝地)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그 어느 곳에 못지않게 세밀한 사료조사와 현지탐방이 뒤따랐던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한 결과를 담은 것이니만큼 비록 소책자일망정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려 제작한 흔적이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역력히 감지되고 있다. 그런데 이 <벽제관>의 75~76쪽에는 벽제관 주변의 탐방행로를 이렇게 그려놓고 있는 대목이 눈에 띈다.

 

…… 현재 그 관리는 당지(當地)의 우편소장(郵便所長) 사에키 토루(佐伯融) 씨 등을 중심으로 하는 벽제관전적보존회(碧蹄館戰蹟保存會)에 맡겨져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거의 동씨(同氏)의 안내로 전적견학(戰蹟見學)의 편의를 얻고 있음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벽제관의 역(役)이 있던 이래로 춘풍추우 340년 소화 8년(1933년) 9월에 이르러 이 전적을 기념하기 위한 일대기념비(一大記念碑)의 건립이 실현되었다. 비(碑)의 모양은 애급(埃及, 이집트) 나일 하반(河畔)의 광야에 흘립한 오벨리스크(Obelisk)를 본뜬 것으로, 경성으로부터 벽제관에 오는 손님들이 명군(明軍)의 진지였던 월천리(越川里)에 이어지는 작은언덕을 지나자마자 곧장 북방 밀수(密樹)의 언덕 위에 그 높고 하얀 자태를 인식하는 일이 가능하다. 비는 양질의 화강암(花崗岩)으로 제작되어 전기(電氣) 연마를 하여 광택이 아름답고 새로 식수한 수십 주의 앵수(櫻樹, 벚나무) 가운데에 서있다. 비의 표면에는 고 중추원촉탁 김돈희(故中樞院囑託 金敦熙) 씨의 글씨로 ‘벽제관전적기념비(碧蹄館戰蹟記念碑)’
라는 여덟 글자를 새겼으며, 이면(裏面) 비의 대석(臺石)에는 당시 경기도지사 마츠모토 마코토(京畿道知事 松本誠)씨의 이름으로 다음의 명(銘)이 새겨져 있는데, 글은 이왕직 촉탁에하라 젠즈치(江原善槌)가 지은 것이다.
비가 있는 언덕 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괘갑수(掛甲樹)라고 전해지는 느티나무 고목이 있다. 언덕 아래에는 벽제관의 건물이 있다. (비명 부분은 인용생략)

 

이 내용에 따르면, 벽제관으로 가는 작은 고갯길을 넘어서자마자 모든 도보여행객들은 누구나 저 벌판 너머로 온통 사쿠라의 동산으로 변신한 언덕 위에 높이 솟아 있는 ‘벽제관전적기념비’의 존재를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구도였다. 여기에 나오는 중추원촉탁 김돈희(1871~1937)는 일제 때 서예가로 크게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그는 선암사 강선루, 낙산사 의상대 등의 편액 글씨를 남겼으며, 특히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제호(題號)도 바로 그의 글씨라고 알려진다.
일찍이 이곳 벽제관 지역에는 1911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명목상 고양군수(高陽郡守)가 회장을 맡고 기타 지역유지가 여기에 참가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의 보존회 설립이 추진되었으며, 그 결과 1915년 4월에 “문록역(文祿役, 임진왜란) 때의 유적인 벽제관, 괘갑수(掛甲樹) 등의 보존 관리 및 이를 널리 사회에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벽제관고적보존회(碧蹄館古蹟保存會)가 설립인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나중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碧蹄館戰蹟紀念碑建設會)라는 것이 꾸려져 기념탑의 건립까지 시도된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3년 10월 12일자에 수록된 「이십여 성상(二十餘 星霜)을 농촌계발(農村啓發)에 전심(專心), 벽제일대(碧蹄一帶)에서는 신(神) 같이 앙모(仰慕), 사에키 토루(佐伯融) 씨의 공적(功績)」이라는 제목의 인물탐방기사를 통해 그 내막을 엿볼 수 있다.

 

…… 당지(當地)에 군청(郡廳)이 있을 시(時)에는 300여 호(戶)의 인가(人家)가 즐비하던 것이 군청이 20여 년 전에 경성(京城)으로 이전한 후로는 폐가파옥(廢家破屋)이 연년(年年)히 증가하여 지방이 쇠퇴하여짐을 우려하고 발전책(發展策)을 연구하였으나 장래 산간촌락(山間村落)으로 아무리 생각하여도 적당한 대책이 없어 고심하였다.
당지의 벽제관은 역사가 깊은 고적이오 또한 문록역 고전쟁지(古戰爭地)이므로 이를 보존에 주력하여 각 지방에 선전(宣傳)하여 10여 성상(星霜)을 두고 당국에 교섭한 결과 재작춘(再昨春)에 기부인가(寄附認可)를 받는 동시에 당국 원조와 동지의 찬조를 얻어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를 조직하고 내선만(內鮮滿) 각지를 통하여 기부금모집에 노력한 결과 9천여 원(圓, 엔)의 거액을 모집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불행히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자 이어서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속출(續出)되어 국내는 전시상태를 이루었으니 계획하였던 사업도 지연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래(以來) 국제관계가 점차로 진압(鎭壓)됨을 따라 금춘(今春)에 공사가 착수하여 이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근만원(近萬圓)의 공비(工費)로 건설된 기념비는 웅장하게도 벽제관 후산상(碧蹄館 後山上)에 돌립(突立)하여 벽제의 면목을 일신케 되었으며 벽제관공원(碧蹄館公園)이라고 부르게까지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일본인 사에키 토루는 1911년 이후 고양우편소장을 거쳐 벽제우편소장으로 장기 재직하면서 벽제관고적보존회의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특히 총독부의 고관 또는 내외귀빈(內外貴賓)을 포함하여 일반 탐방객이 벽제관을 찾을 때마다 이곳의 고적안내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다시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를 꾸려 1931년 이래 모금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9천 원의 기부금에다 당국의 보조금 1천 원을 더하여 1933년 봄에 이르러 마침내 기념비의 제작에 착수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벽제관전적기념비의 건립 제원(諸元)에 대해서는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 제12집 제9호(1933년 9월)에 수록된 「벽제관전적기념비 설계개요(設計槪要)」라는 자료에 잘 요약 정리되어 있다.

벽제관전적기념비건설회에서 제작 발행한 ‘벽제관전적기념비’의 모습이다. 벽제관 후면 언덕 위에 세워진 이 기념비의 전면에 보이는 글씨는 중추원촉탁 김돈희(中樞院囑託 金敦熙)가 썼으며, 그 아래쪽에 ‘조혼(弔魂)’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벽제관 건물과 벽제관전적기념비를 도안(圖案)에 담은 통신일부인(通信日附印)의 모습이다. 1934년 1월 20일부터 벽제우편소를 통해 사용하는 우편물에 적용되는 일종의 기념스탬프이다. (조선총독부 체신국, <조선체신사업연혁사>, 1938)

 

[총고(總高)] 38척(尺) 2촌(寸), 비(碑)의 높이 33척 3촌, 하부(下部) 크기 5척 2촌각(寸角), 상부(上部) 크기 2척 7촌각
[기단(基壇)]은 원형(圓形)으로 높이 2척 9촌, 외경(外徑) 40척, 내경(內徑) 36척, 삼방(三方, 세 방향)에 폭(幅) 8척의 계단(階段)을 두고, 계단 좌우에 길이 7척 폭 4척의 장원형(長圓形)의 수석(袖石, 소맷돌)을 붙임. 탑신(塔身)과 기단(基壇)은 둘 다 전부 화강석으로 만듬.
[탑신(塔身)] 앞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 아래에 조혼(弔魂)이라 새기고, 뒤에는 건설유래기(建設由來記)를 새김.
[기단(基壇)] 상(床)은 콘크리트를 타설하고, 중앙 원형을 따라서 배수구(排水溝)를 두며, 사방(四方)으로 방사선상(放射線狀)의 토관(土管)으로 배수시키도록 사리(砂利, 자갈)를 까는 것으로 함.
[기공(起工)] 소화 8년(1933년) 4월 5일
[준공(竣工)] 소화 8년(1933년) 7월 5일
[제막식(除幕式)] 소화 8년 9월 9일
[공비(工費)] 4,165원(圓)
[양식(樣式)] 근대식(近代式)
[설계(設計)] 조선총독관방 회계과(朝鮮總督官房 會計課)
[시공사(施工者)] 경성미술품제작소(京城美術品製作所)

 

이에 따라 1933년 9월 9일에는 벽제관전적기념비의 제막식이 거행되었으며, 당시의 조선총독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가 몸소 이 행사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사를 남겼다.

 

…… 방금(方今) 내외(內外)의 정세(情勢)는 더욱 난국(難局)에 향(嚮)하여 동아(東亞)는 드디어 다사(多事)코자 하여 국민(國民)의 왕성(旺盛)한 사기(士氣)와 열렬(熱烈)한 건투갱진(健鬪更進)하여 아세아민족(亞細亞民族)의 각성(覺醒)을 요(要)함이 익공(益功)한 추(秋)에 당(當)하여 여사(如斯)히 왕사(往事)를 추회(追懷)하여 미래(未來)에 선처(善處)한 도표(道標)가 될 만한 의의(意義) 있는 시설(施設)의 실현(實現)은 정신(精神)의 작흥(作興), 극동민족(極東民族)의 융합(融合)에 선보(禪補)됨이 자못 대(大)할 줄로 신(信)한다.

 

요약하자면 바야흐로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가 진행되는 이때에 옛 벽제관 전투를 기리는 시설물의 등장은 그 자체가 미래의 길잡이가 될 만한 것이라는 언급인 셈이다. 또한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다시 극동민족의 융합을 이끌어내는 승전의 주체가 되리라는 것을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벽제관 일대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여긴 탓인지 일본군대의 사기를 앙양하고 전의를 새롭게 다지는 공간으로 종종 사용된 흔적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1933년 10월에는 때를 맞춘 듯이 용산주둔 일본군 보병 제78연대가 벽제관 일대에서 추계대훈련을 실시한 적이 있었고, 좀 더 나중의 일이지만 1938년 12월에는 육군병지원자훈련소(陸軍兵志願者訓練所) 생도 200명이 벽제관 마을에서 견학차 하룻밤을 머물렀던 사실도 드러난다.
그리고 일제패망기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1943년 10월에는 벽제관전투 350년이 되는 해라고하여 당시 전몰자에 대한 추조제(追弔祭)가 이곳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벽제관전적기념비가 해방 이후 어느 시기에 철거되어 사라진 것인지는 분명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동아일보> 1950년 1월 22일자에 게재된 김진구(金振九)의 연재기고문 「국치비존폐(國恥碑存廢)의 시비(是非) 하(下)」를 보면, “…… 구랍 29일 회견할 때에 구 경기도지사(具 京畿道知事)는 희망적으로 표명하였다. 일인 소행인 벽제관(碧蹄館)의 전적비(戰蹟碑)와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장난인 인왕산맥(仁旺山脈)의 암석각자(岩石刻字)만은 제거하고 싶다고 ……” 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것으로 보면 1950년을 넘어가는 시점까지도 벽제관 전적기념비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매일신보> 1940년 6월 28일자에 수록된 벽제관 사방공사 관련 ‘치산치수비’의 제막식 기사이다. 이 기사에는 분명 벽제관 앞에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은 그 행방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대개 벽제관이라고 하면 이 전적기념비의 존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것 말고도 별스러운 기념물이 하나 더 있었다. 1940년 6월 24일에 제막된 ‘치산치수지비(治山治水之碑)’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은 1930년부터 1936년까지 6년 계속사업으로 고양리(高陽里) 주변 3개리에 걸쳐 사방사업(砂防事業)을 실시한 결과 산림녹화를 이룩한 것을 기리고자 일제가 이에 대한 기념물로 조성한 것이었다.
<매일신보> 1940년 6월 24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 따르면 분명히 벽제관 앞에다 이것을 설치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이 역시 해방 이후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혹여 이 근처에 매몰 처리된 것이라면 언젠가는 홀연히 그 존재가 다시 드러나서 이것의 정체가 뭔지를 재확인하기 위해 달갑지 않게 일제강점기의 해묵은 기록을 다시 뒤져봐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수, 2020/08/26-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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