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와 국가공무원노동조합(위원장 안정섭)은 1월 16일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 실에서 ‘역사적폐,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라는 주제의 토론회를 공동 주관했다. 설훈, 박범계, 김한정, 김해영 의원실이 공동 주최로 나선 이번 토론회에서 방학진 기획실장이 ‘표준영정 제도의 문제점과 대안’을,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이 ‘국립묘지 안장 친일파 문제’를 각각 발표했다.
토론자로는 김광진 전 의원, 임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전통문화과 사무관, 장이나 국가보훈처 국립묘지정책과 사무관, 이하나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정책국장이 참여했다.
방학진 실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도입된 표준영정제도의 현황과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우선 친일미술인이 제작한 표준영정은 지정 해제해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표준영정제도 개선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한용 실장은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파들을 강제 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라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현행 국립묘지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한편 2016년 12월 기준으로 전체 표준영정 96점 중에 장우성, 김기창, 김은호 등 친일 미술인이 제작한 것이 이순신, 윤봉길 등 14점에 달한다. 또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중 국립묘지 안장자는 총 76명이다. 앞으로 연구소는 지난해 박정희기념우표 취소를 함께 이끌어 낸 국가공무원노동조합과 협력하여 지속적으로 각 분야별 역사적폐청산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이날 토론회의 사회는 연구소 회원이기도 한 이형철 국가공무원노동조합 대외협력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맡았다.
▲ 동아일보 1923년 10월 4일자. 해태상(해치상)이 원래의 위치인 광화문 앞에서 경복궁 안쪽 구석에 옮겨져 거적때기에 둘러쌓인채 방치되고 있다는 기사다.
“오백년 옛 대궐 경복궁 앞에 말없이 쭈그리고 앉아있는 해태(해치)를 보았으리라… 무슨 죄 있어 다리를 동이고 허리를 매어… 궁궐 한편 모퉁이에 결박 당하고 거적 쓴 채로 참혹하게 드러누웠더라.” 광화문 월대 앞에서 경복궁을 지키고 서있던 해치가 궁궐 한편에 쳐박혀있는 몰골을 전한 동아일보 1923년 10월 4일 기사다.
조선부업품공진회 개막에 발맞춰 개통된 전차와 관람객의 동선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광화문 앞의 해치가 철거·이전된 것이다. 거적때기에 쌓여 궁궐 안쪽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초라한 몰골은 식민지 조선의 딱한 처지를 웅변해주었다.
궁궐의 입출구를 구분짓는 월대 앞에 놓인 해치는 일종의 하마비 역할도 했다. 지금부터 궁궐권역이니 말에서 내리라는 표시였다. “1870년(고종 7년)대궐 문에 해치를 세워 한계로 삼았고…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 말을 탈 수 없다”(<고종실록>)는 기사가 등장한다.
▲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발표한 광화문 앞 공간 복원 계획도. 월대와 해치를 복원한 역사광장과 시민들의 공간인 시민광장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두 공간 사이에 ㄷ 형태의 도로가 예정돼있다.
1924년 10월 조선총독부 정동 분실에서 일어난 불의 원인이 ‘해치상을 치워버린 탓’이라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이것이 찜찜했던지 일제는 쳐박아두었던 해치상을 조선총독부(중앙청) 뜰 앞에 옮겨놓았다. 지금 광화문 담장 밑에 바짝 붙은 채로 서있는 옹색한 해치상은 1968년 12월 광화문 복원 때 재이전한 것이다. 물론 제자리가 아니다. 광화문 해치는 흔히 ‘불(火)의 산인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고 궁문 앞에 세워놓은 흰돌의 물짐승’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규경(1788~?)이 “해치는 화수(火獸), 즉 불을 먹고 사는 짐승”(<오주연문장전산고>)이라 한데서 유래한 속설일 가능성이 크다.
해치는 또 예부터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수(神獸)로 알려져 왔다. 후한의 왕충(27~97?)은 “해치는 옥사를 다스릴 때 죄가 있는 사람을 골라 들이받는 속성이 있다”(<논형>)고 기록했다.
역시 후한의 양부가 지은 <이물지>는 “외뿔 짐승인 해치는 싸움이 일어날 때 부정직한 자를 들이받고, 바르지 않는 자를 깨물었다”면서 “전국시대 초나라 법관들은 해치관을 법복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후 동양에서 법을 담당하는 관리들은 해치관(冠)이나 해치문양의 관복을 의무적으로 입었다.
요즘의 검찰·감사원에 해당되는 조선시대 사헌부 관리들은 마찬가지였다.
“1796년(정조 20년)사헌부 지평(정 5품)이 해치관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직됐다”(<정조실록>)는 기록이 등장할 정도다.
해치를 궁궐 앞에 세워둔 까닭은 자명하다. 출퇴근하는 관리들은 해치의 꼬리를 쓰다듬으면서 마음 속 먼지를 털어내고 공명정대한 정사를 다짐하라는 뜻이었다.
▲ 1906~1907년 사이 촬영된 광화문 앞. 해치상과 월대가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10일 맺은 광화문 역사광장 조성 업무협약의 주요내용이 바로 ‘광화문 앞 월대와 해치상의 제자리 찾기’이다.
물론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의 언급처럼 역사광장(월대·해치)과 시민광장이 ㄷ자형 도로로 양분되는 등의 새로운 문제점도 제기되고 있다.
“광화문 앞 공간을 반드시 광장으로 꾸며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근본적인 질문까지 나온다. 깊이있는 토론과 의견 수렴이 뒷받침되지 않는 정책이라면 시대마다, 정권마다 제각각의 복원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두 일리있는 지적이다.
다만 어떤 경우라도 월대와 해치는 제자리에서 제대로 복원되기를 바란다. 해치의 꼬리를 매만지면서 스스로 마음을 단속하고 시비곡직을 다짐하는 통과의례가 요즘처럼 절실한 때가 또 어디 있는가.<참고자료>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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