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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엇갈린 형제의 길, 심우섭과 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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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엇갈린 형제의 길, 심우섭과 심훈

익명 (미확인) | 목, 2018/02/2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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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자리에서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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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

19살 청년이 서대문감옥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다. 이 청년은 우리가 잘 아는 <상록수>의 저자 심훈(본명 심대섭 沈大燮, 1901~1936)이다.

1919년 3월 1일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심훈은 독립운동 소식에 학교를 뛰쳐나왔다.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문으로 옮겨가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날은 붙잡히지 않았다.

3월 5일 오전 9시, 심훈은 남대문역 앞에서 수만의 학생과 같이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대 시위운동에 청년의 피가 끓었다. 어머님보다 더 큰 어머님,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는 혈기가 넘쳤다. 그날 밤 안국동 별궁 앞에서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편지에서 보듯 만세시위에 나섰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사람은 몇 천, 몇 만이었다.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던 기간은 2개월 남짓이었다. 그해 겨울, 삼한 사온이 무색하게 나날이 춥기만 했다. 심훈은 감옥에 남은 동지들을 걱정했다. 걱정하는 한편으로 나라의 독립을 염원했다.

지금쯤 얼음 속 같은 옥중에 그저 남아 있는 사람들이야 과연 어떠할까? 살을 깎아내는 북풍은 철창에 불고 눈덩이 같은 밥을 먹고 허구한 날 우르르 떨기만 할 때에 그이들의 마음이야 과연 어떠할까.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그저 뜨거울 것이다. 서대문 감옥 높은 담 위에 태극기가 펄펄 날릴 때 굳센 팔다리로 옥문을 깨뜨리고 환호와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열광하여 뛰는 군중… 오- 상제여 그의 원한을 속히 이루어 주소서! (심훈일기, 1920.1.17)

31운동 1주기가 되었다.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온 시가를 꽁꽁 에워쌌다. 신문에는 나지 않았지만 평양에서 야단이 났다고 하고 배재학당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소문도 들었다. 심훈은 홀로 남산에 올랐다. 여러 가지 일로 답답한 가슴이 그를 이끌었다.

남산에 올라갔다. 왜놈들에게 짓밟힌 남산 눈앞에 깔린 서울 시가며 꿈같은 먼 산과 띠 같이 흐르는 한강수까지 다 우리 것이련마는. 아! 슬프고 답답한 마음을 억제키 어렵다. 잠두(蠶頭)에 홀로 걸터앉아 넓은 시가와 산과 들과 강을 향하고 목청을 빼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창가를 높이 불렀다. (심훈일기, 1920.3.27)

감옥에서 풀려난 심훈, 미래를 걱정하는 20살 청년이었다. 온 민족이 들고 일어나 독립만세를 부른지 1년이 지났지만 식민지라는 현실은 변한 게 하나 없다. 만세시위로 옥고를 치르느라 다니던 학교에서는 퇴학당했다. 문학에 뜻을 두었지만 길은 잘 보이지 않았다. 듣는 이 없는 산에 올라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불러보지만 슬프고 답답한 마음은 쉬이 풀릴 리 없다.

그런 그의 눈앞에 자리보전하고 누운 큰형이 보였다. 큰형은 필명 천풍(天風)으로 유명한 심우섭(沈友燮, 1890~1948)이다. 둘 사이엔 작은 형 심명섭과 누이 심원섭이 있다. 그래서 큰형과 막내는 11살 나이 차이가 난다. 어린 막내가 보기에 큰형 심우섭의 처신이 참으로 못마땅하다.

형님의 병환이 그저 낫지 못한데 어제는 오지도 않았다고 보지도 않고 공연한 걱정을 하신다. 아무 아는 것도 없이 혼자 달관을 하고 초관(超觀)을 하고 안하무인으로 자임하여 말만 함부로 하고 다니며 하다가 신문경영에도 대실패를 하고 울화병이 든 것이다. 그러고 주색(酒色)에 몸은 약하여 가지고 온갖 번민을 하며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는 것이라 아무리 친형제 간이라도 동정하는 마음이 생길 수는 없다. 형님의 일은 만사가 다 그 수법이니 누가 환영을 하랴. 이렇다가도 형제간에 마음이나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큰 걱정이다. (심훈 일기, 1920.1.21)

형의 병 수발은 본처가 아닌 첩이 들고 있다. 이미 심우섭은 평양 출신 기생 초월과의 연애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이 무렵에는 또 다른 이를 첩으로 들였던 모양이다. 심훈은 형님 병의 원인을 타락적 쾌활과 불규칙한 생활, 조금도 없는 극기심, 특히 주색을 제1의 악마라고 생각했다. 당시 심우섭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신문에 소설도 발표하고 매일신보 기자로 필명을 날리던 쾌활남아였다. 그런 심우섭이 신문사도 그만두고 자리보전하고 누워 병문안 오지 않는다고 동생 타박이나 하고 있다. 이제 그 형 이야기를 해 보자.

기자 심우섭, 데라우치를 찬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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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섭

1910년 3월 휘문의숙을 졸업한 심우섭이 맞닥뜨린 현실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이었다. 신학문을 배운 지식인으로서 심우섭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 관료가 될 생각도 한 모양이다.

이듬해에는 잠시 사립학교 교사 노릇도 했다. 하지만 5개월 남짓 만에 그만두었다. 심우섭의 선택은 문인이자 언론인의 길이었다. ‘천풍’이란 필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매일신보에 소설 <형제>(兄弟, 1914년 6~7월), <주>(酒, 1914년 9월), <산중화>(山中花, 1917년 4~9월)를 연재했다. 특히 1917년에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본인들의 호랑이사냥에 동행하고 ‘정호기(征虎記)’를 연재했다. 매일신보사에 입사한 것은 1916년이었고 1918년부터는 지방과장이란 직함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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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명을 날리던 20대의 심우섭. 왼쪽부터 진학문 심우섭 이광수 이상협

이광수가 1917년에 발표한 소설 <무정>의 첫 장면에는 신문기자 신우선이 등장한다. “미스터 리, 어디로 가는가” 주인공 이형식을 뒤에서 부르며 나타나는 이.대팻밥모자를 살짝 뒤로 젖혀 쓰고 활개 치며 내려오는 신문기자 신우선이다. 김장로 집 딸 김선형의 영어 과외를 하러 가는 이형식에게 던지는 신우선의 농지거리는 그의 유쾌함과 활달함을 잘 드러낸다. 그렇지만 이형식은 그의 지나친 방탕함을 허물이라 생각하고 있다.

소설 <무정> 속 신우선이 매일신보 기자 심우섭을 모델로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름도 그렇고 <무정>이 매일신보 1면에 연재될 때 심우섭의 <산중화>는 4면에 연재되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1918년, 매일신보 기자 시절에 찍은 이 사진 속 심우섭을 보면 생기 넘치는 젊음과 그에게 꼬리표처럼 항상 붙어 다니는 ‘해학’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게 하는 장난기가 엿보인다.

옆에 선 이는 이광수와 진학문, 이상협이다. 비슷한 연배에 매일신보를 매개로 어울리던 시절이다. 이렇게 매일신보에 소설을 연재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고, 쾌활한 성격으로 음주가무를 즐기며 평양 출신의 유명한 기생과 연애도 하며 풍류남아 심우섭의 20대 청춘이 흘러갔다.

이 무렵 기자 심우섭의 기사 한 대목을 읽어보자. 꽤 긴 글인데, 일부를 발췌해도 역시나 길다.

백작이 조선을 혁신함이 의사가 난치병자에게 수술을 베품과 다를 바 없도다. 아니다.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한층 심한 것이 있다. 즉 의사가 다만 병자의 복부나 다리를 해부하기에 그치지만 백작의 수술방법은 매우 엄혹하고 奇絶하여 옛 머리를 자르고 새 머리를 붙이며 四肢百體에 그 예리한 해부도는 縱橫敏活하여 자르고 쪼개지 않은 곳이 없다. 오호라. 당시 병상에 누웠던 우리 조선인 즉 병자의 고통이야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겠으며, 백작에 대한 분노와 증오도 역시 극에 달하였으리로다. 백작이 전기한 공전절후의 대수술을 단행하고는 다시 환자의 회복에 힘을 다하여 恩威와 寬嚴이 오로지 병자로 하여금 加療靜食에 주의하게 하고 감히 分外의 事爲를 감행하지 못하게 한지 이제 만 6 개년여라. 시술 후 6년여 장기간에 周密한 좌우의 간호를 받으면서 병상에 누워 있다가 지금에 이르러는 크게 全快한지라. 다년 음용하던 미음은 쌀밥으로 변하고 그 착용하던 환자복도 새 옷으로 갈아입고 嚴切한 간호를 해탈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에 의사의 주의방침도 일변하여 완전한 인간으로 대우하며 원래 무병한 자와 같은 행복을 누리게 할 시기가 멀지 않았다. 비로소 천오백만의 조선인민은 滿心歡情으로 백작의 손을 꼭 잡아 백작의 시술의 노고에 감사하고, 백작은 다년 병상의 고통을 위안하여 일반의 의심이 사라지고 和氣가 가득하기에 이른 것은 기약도 기대할만 하거늘. 애석하도다 무정한 寺內백작은 일이 이에 이르기 전에 조선을 떠나갔도다. (<매일신보> 1916.10.15. 밑줄은 인용자)

이 기사에서 찬양해 마지않는 백작은 다름 아닌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이다. 1916년 10월 데라우치는 조선총독을 사임하고 일본에 돌아가 내각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심우섭 기자는 데라우치 백작을 전송하는 글(「寺內伯爵을 送함」, 天風生)을 매일신보에 실었다. 문예기자로서 주로 신소설을 연재하며 간혹 금강산 기행이나 호랑이 사냥 같은데 따라가 답사기를 쓰고, 혹은 문예면에 유쾌한 세태풍자기사를 주로 쓰던 심우섭이다 보니 이런 정치색 짙은 글은 참 의외다.

기자 심우섭이 데라우치의 조선통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자. 그는 조선과 조선인을 병상에 누운 환자에, 데라우치와 일본의 식민통치를 의사와 간호사에 비유했다. 의사의 수술방법은 매우 엄혹하고 기이하다. 옛 머리를 잘라내고 새 머리를 붙이는 것 같다. 병자의 온몸을 자르고 쪼개니, 그 고통이 이루 형용할 수조차 없다. 그 고통에 의사에 대한 병자의 분노와 증오는 극에 달했다. 그래도 의사는 대수술을 감행하더니 그 후 환자의 회복에 정성을 다했다. 6년여가 흘렀다. 이제 환자는 완전히 나았다. 환자복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쌀밥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환자는 의심을 거두고 의사의 노고에 감사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찬사를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니, 이런 글솜씨가 아무에게나 있겠는가. 이 기사는 심우섭의 생각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본이 난치병에 걸린 조선과 조선인을 치료해 주고 행복의 길로 이끌고 있으니, 즉 일본의 식민통치를 통해 조선이 근대화되고 있으니 그 은혜에 고마워해야 한다. 매일신보가 총독부 기관지이고, 기자는 신문사의 논조에 구속받을 수밖에 없다고 해도 이 정도의 정성과 글솜씨를 보면 근본 생각이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치운동 잠깐, 그리고 참정권 운동으로

만세시위 열풍이 한풀 꺾인 1919년 7월 심우섭은 일본 도쿄로 향했다. 매일신보 기자는 그만두었던 것 같다. 동생 심훈도 감옥에서 풀려나왔을 무렵이다. 심우섭을 비롯해 함께 도쿄에 건너간 고희준, 채기두, 박승빈, 이기찬, 고원훈, 박병철 등은 조선에 자치제 시행을 위한 운동을 하려 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동상(東上) 7인조’라 불렀다. 일본 정계의 주요 인물들을 만나 ①관리를 공평하게 임용할 것 ② 조선의회를 개설할 것 ③ 언론의 자유를 인정할 것 ④ 소요(3.1운동) 범인을 석방할 것, 4개항을 제시하며 대조선 정책에 채용할 것을 역설했다. 또 하라 다카시(原敬) 수상을 만나 총독정치에 대한 종래의 실정을 비판하고 “조선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거나 조선의회를 만들라”는 의사를 표명했다.

3・1운동의 충격은 일본 식민통치자들로 하여금 조선 통치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했고, 동시에 조선인들의 정치운동 내지 정치적 요구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 흐름 중 하나가 자치론 내지 자치운동이었다. 주로 이광수를 비롯한 동아일보 계열과 최린을 위시한 천도교 신파 쪽에서 1920년대를 거치는 동안 자치운동에 열심이었다.

일제시기 조선정치행위의 논리를 크게 독립운동론, 참정권론, 자치론으로 구분한다. 참정권론과 자치론은 식민 통치에의 ‘참여’ 논리, 독립운동론은 이에 대한 ‘저항’의 논리이다. 기본적으로 ‘참여’란 기존체제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의 행위이다. 따라서 자치론은 본질적으로 독립운동의 유보 내지 포기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일부 논자들은 자치운동을 독립운동의 준비단계로 보기도 한다. 일제의 동화정책에 반대하며 정치적 결사를 통해 조선인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고 단결시켜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게 하자는 주장이 일견 그럴 듯 해 보이긴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조선의 자치운동은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일제에 협력한 운동이었다. 다른 식민지(인도나 아일랜드)의 자치운동은 저항세력이 전개했는데, 조선에서는 일제에 협력적인 세력이 주도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실제 자치운동은 일제 지배 하에서 일정한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심우섭을 비롯한 ‘동상 7인조’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조선에 자치를 허용해줄 것을 제안했다. 이 무렵 심우섭은 3・1운동의 여파로 나타난 일제의 통치방침의 변화란 물결을 타고 정치운동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가 자치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 1922년 7월 무렵이고,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이 발표된 것이 1924년 1월이니 심우섭 등의 자치운동은 아마도 그 시초가 아니었을까. 도쿄에서 돌아온 이들은 그해 11월 새로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이 청원서는 기존의 주장에서 상당히 후퇴하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는데 그치고, 조선의회 설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즉 일본 하라 수상의 내지연장주의에 따른 동화정책과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라는 구도 하에서 조선인의 정치활동을 위한 공간 허용만을 요청했다. 이들의 자치운동은 그 정도 선에서 끝났던 것이다.

심우섭은 매일신보사에 복귀해 논설부장으로 일하는 한편 계명구락부 기관지인 <계명>의 주간을 맡아 보았다. 그러다 1925년 동민회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자치운동과는 노선을 달리하던 참정권 운동에 투신한다. 일본의 동화주의를 적극 지지하는 참정권 운동 단체인 동민회는 ‘철저한 내선융화의 실현을 통한 아시아민족의 결합’을 내세운 단체였다. 당시 자치운동 측과 참정권 운동 측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맹렬히 비판하던 시기였다. 이른바 갈아타기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참정권론이든 자치론이든 기본적으로 일본에 협조하고 일본의 우위와 지배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다. 종국에는 이광수나 최린도 동화론자로 변절해 갔다는 사실을 볼때, 심우섭은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심우섭을 비롯한 동상 7인조가 도쿄에 건너갔을 때 유력 인사들과의 교섭을 부탁한 인물이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였다. 아베 미쓰이에는 정치기자로서 1915~1918년 경성일보 및 매일신보 사장을 지냈고, 1920년대에는 사이토 조선총독의 개인 정치고문 역할을 했다. 조선통치에 관련이 깊은 사람으로 연구자들 사이에선 ‘제국의 브로커’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이다. 심우섭이 자치운동을 위해 도쿄를 찾은 1919년 7월에 아베는 일본 국민신문 부사장을 맡고 있었다. 이때 그는 심우섭 일행에게 일본 정치인들을 비롯한 유력 인사들을 소개하고 자치운동을 위한 조언도 해 주었다.

일찍부터 조선인 ‘신지식층’에 관심이 많았던 아베는 1920년 5월 조선을 방문했다. 경성일보 사장을 그만두고 떠난 지 2년 만이었다. 새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비공식 정치고문 역할을 시작한 것이다. 아베는 사이토의 기밀비를 받고 조선인과 재일유학생의 동향이나 일본 정계의 상황을 사이토에게 보고했다. 아베에게는 정치기자 시절 구축한 정보망과 경성일보・매일신보 사장시절 맺었던 조선인 네트워크가 있었다.

약 2개월 동안 아베는 조선 각지를 돌며 실업가, 지식인, 청년지도자, 3・1운동 지도자 등 조선인 유력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가 경성에 도착하자 예전부터 알고 있던 조선인들이 매일 “천객만래(千客萬來)”해서 환영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차례로 성대한 환영회를 열어 아베를 맞이했다. 아베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며 깊은 교류를 나눴던 젊은 ‘신지식인층’이 ‘문화통치’의 기류 속에 조선어 신문을 창간하던 시기였다. 그들은 아베를 통해 총독부의 자금 원조와 언론통제 완화 등을 요청했다.

아베를 만나려 줄을 선 이들 가운데 심우섭도 있었다. 그들의 인연은 아베가 경성일보・매일신보 사장이던 시절 심우섭이 매일신보 기자였다는 정도인데, 쾌활하고 주색을 즐기는 심우섭의 캐릭터를 고려하면 좀 더 개인적인 친밀함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심우섭은 병석에서 일어난 직후였는데도 동생 심훈을 데리고 아베를 찾아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문사도 그만두고 도쿄에 건너가 시도했던 자치운동이 별 신통찮은 결과를 보인데다가 큰 병을 앓고 난 직후인지라 꽤 침잠해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매일신보에 복귀하는 걸로 봐서 취직자리를 부탁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심우섭과 아베의 친분은 후에도 쭉 이어졌고, 1936년 아베가 사망하자 심우섭은 그의 흉상을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흥미있는 연구가 있다. 사이토가 조선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어떤 조선인을 몇 차례나 만났는지를 그 횟수를 일일이 밝혀놓은 것이다. 그 가운데 1924년부터 1926년 말까지 사이토가 만난 조선인 제1위는 선우순으로 39회였다. 2위는 이진호(37회), 3위는 민영기(33회)였다. 그리고 다음 자리를 차지한 것이 심우섭인데 도합 31회를 만났다. 당시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를 지낸 박중양(20회)이나 신석린(28회)보다, 재계의 거물 한상룡(27회)보다 사이토 총독을 많이 만났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심우섭이 조선총독을 자주 만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 그리고 동민회 활동과도 관련 있으리란 점은 짐작할 수 있다. 또 아베 미쓰이에가 사이토 총독의 정치고문으로 활약하던 시기였으니 아베와 친분이 있던 심우섭이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서로 엇갈린 형제의 길

심우섭이 적극적 친일파의 길로 한걸음씩 내딛는 동안 동생은 식민지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좌절하고 분노했다.

1920년 말 심훈은 중국으로 떠났다. 일본 유학 대신 선택한 길이었다. 북경, 남경, 상해, 항주로 이어진 여정 속에서 걸출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를 쌓았다. 항주에서는 지강대학(之江大學)에 진학했다. 1923년 중국에서 돌아온 심훈은 영화와 문학 창작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다. 급진적 문예조직이던 ‘염군사’,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입한 것으로 봐선 유학시절 사회주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1924년엔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지만 1926년 철필구락부사건으로 해직되었다. 심훈은 시를 쓰고 소설을 썼다. 그 속에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저항을 담았다. 당시 심훈의 격정이 표출된 시가 「박군의 얼굴」이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朴君,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중략)
오냐 朴君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
너와 같이 모든 X를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心臟의 鼓動이 끊길 때까지

심훈은 세 친구, 박열 박순병 박헌영을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 직접적 계기는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출감하는 박헌영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저항적 실천의 자세를 갖춰 나갔다. 심훈의 대표시 「그날이 오면」(1930)은 그의 정치사회적 태도와 문학적 지향을 잘 드러낸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前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鐘路의 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頭蓋骨은 깨어져 散散 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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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오면’ 총독부 검열본. 독립을 향한 염원이 담긴 시라 하여 검열당국에 의해 삭제 조치를 당했다.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침략했다. 심훈의 문학세계에는 일제의 검열이 들이닥쳤다. 시집 「그날이 오면」 출간이 가로막혔다. 우회로를 찾아야했다. 1932년 심훈은 부모님이 계신 충남 당진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소설 <상록수>를 썼다. ‘국가’를 ‘고향’으로 변형시킨 우회전략으로 검열을 넘어 당대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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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경성방송국 방송실에서. 뒷줄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이 심우섭 제2방송과장

 

1936년 심훈이 세상을 떠났다. 심우섭의 삶은, 동생이 죽은 뒤 10년여 더 지속되었다. 일제 군국주의의 총구가 전 세계를 향하던 시기였다. 그 역시 여느 친일 지식인들처럼 일제가 일으킨 전쟁의 광기에 휩쓸려 들어갔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심우섭은 주로 경성방송국과 매일신보에서 일하며 각종 전쟁선전과 동원에 협력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시국순회강연반에 참여해 강연활동에 나섰고, 조선유도연합회와 조선임전보국단에도 가담했다. 결국 동생은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열정을 표출한 문학가로 이름을 남긴 반면, 형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되고 말았다.

<참고자료>
박찬승, 「일제하의 자치운동과 그 성격」(1989)
이나미, 「일제시기 조선 자치운동의 논리-독립운동론, 참정권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2006)
이형식, 「제국의 브로커 아베 미쓰이에와 문화통치」(2017)
박진영 교수 블로그 www.bookgrma.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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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민족문학연구회, <겨레의 큰 별들> 출간

민족문학연구회(회장 맹문재)는 지난해 광복절에 펴낸 독립운동가 기림시선 1집 〈독립운동의 접두사〉에 이어 올 3월에 기림시선 2집 〈겨레의 큰 별들〉을 민연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이 시집에는 민족문학연구회 소속 작가 45인이 쓴 가네코 후미코와 그 남편 박열, 김구, 민영환, 유관 순, 유일한, 이동녕, 장준하, 차리석, 한용운 등 45인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 45편이 실렸다.
‘책을 펴내며’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삶을 바친 그 분들의 삶과 정신을 올곧게 되찾아 바로 세우고 그 정신의 바탕 위에서 우리를 성찰하는 것은 단순히 그 분들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만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며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
림시선의 편찬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책에는 45편의 기림시뿐 아니라 45인의 독립운동가 약력을 수록했고 김성동 작가의 발문 「‘친일파’가 아니라 ‘민족반역자’다」를 실었다. 민족문학연구회는 기림시선을 앞으로도 꾸준히 발간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101년 전 3·1운동의 함성 소리가 귀에 맴도는 요즘,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목, 2020/03/26-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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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항일운동 유적지 취재기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 땅”
해간도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를 가다

이은지 YTN 라디오 PD

 

과거 역사를 더듬어보고 미래로 이어주는 중간지점이 한·러수교 30주년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와 미래를 잇는 데에 연해주 독립운동 유적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러시아가 소련의 많은 레거시(전통)를 부정했는데 현대까지 계속 유지되는 것 중 하나가 ‘꺼지지 않는 불꽃’ 이라는 겁니다. 조국을 위해 싸운 무명용사들을 우리 후손들이 기억하겠다, 그들의 불빛이 꺼지지 않게 하겠다는 거죠. 우리에게도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독립운동에는 좌우가 없습니다. 이념 때문에 잊힌 러시아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우리가 새롭게 발굴하고 체계화하여 지켜나가고, 의미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오성환 총영사 인터뷰에서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다

지난해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서간도를 답사한 후 제작한 라디오 다큐멘터리 〈서간도 독립운동가 무명씨의 꿈〉(연출 : 이은지, 구성 : 홍기희)에 담았던 문장입니다.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데에도 이런 ‘투쟁’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필수적인 과정은 시간을 다툽니다.
기억은 한 세대를 거치면서 그 양과 선명도가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가의 대부라고 불렸던 ‘페치카 최’ 최재형의 손자인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이 지난 2월 14일 별세했습니다.
“이제라도 찾고, 우선 기억하는 것부터 기록해놓아야 한다”던 그의 한마디가 마음에 사무칩니다. 이에 저는 지난해 11월 해간도 항일독립운동 본거지라고 불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일대를 답사하고 온 기억들을 이곳에 기록합니다.
연해주(沿海州)는 해간도(海間島)로 불리며 만주의 북간도, 서간도와 더불어 항일운동의 3대 거점이라고 하죠. 최재형·이범윤·안중근·이위종의 동의회, 안중근의 단지동맹, 헤이그 특사 출발지, 의병부대 ‘13도 의군’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와 1919년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회의’ 등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먼저 일제강점기 한인들과 해간도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이 되었던 신한촌으로 향했습니다.

 

① 한글 주소가 있는 곳,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요람 신한촌

당시 춘원 이광수는 신한촌을 두고 “바윗등에 굴 붙듯이 등성이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나타났다”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서울거리 집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 7번지 일대― 한민학교와 이동휘 선생 집 추정 터

 

구글맵을 켜고 신한촌이 있었다던 산등성이를 올라가봤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춘원이 묘사했던 당시 모습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스탈린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낡은 아파트가 빼곡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독립문이 있었다던 곳은 듬성듬성한 겨울나무로 채워져 있어, 추정만 가능할 뿐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하바로브스크 울리짜 7번지에 살고 있는 김치보와 서울스카야 9번지에 살고 있는 채성하”라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신한촌 일대에 서울 거리가 존재했다는 기록인데, 실제 ‘서울거리 A2’ 주소판이 부착된 집 한 채가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가옥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구글맵을 켜고 영하 10도의 거리를 찾아 헤맸습니다.
오! 폐가들로 둘러싸인 곳, 앞으로는 철로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급경사 언덕에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누군가 살고 있는 듯,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은 없었습니다. 대신 한 러시아인과 인터뷰를 시도해보았습니다.
“이 집을 알고 있나요?”
“네. 한인들이 살고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살았었죠.”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옵니까?”
“한국에서 방문객이 많이들 찾아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죠.”

 

택시를 잡으려고 큰 길로 나와 ‘얀덱스’를 켜보니, 이런!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하바로보스크 22번지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선생이 살던 집이 있었다는 바로 그 주소였습니다. 역시나 이곳도 상점이 세워져있었습니다.

 

② 한인들의 터전 신한촌과 개척리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 26A 신한촌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으로 향했습니다.
묵념을 하고 참배객을 기다리는 사이 30여 분간 한국인 관광객 2팀과 러시아인 부부 한 쌍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시도했습니다.

“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제 어머니는 어릴 적 한인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이 기념비는 한때 이곳에 거주하다가 탄압당한 한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저희는 한인들이 강제이주 당한 것이 매우 유감입니다. 이 기념비가 세워져서 선조들을 기릴 수 있어 기쁩니다”.
– 신한촌 기념비에서 만난 러시아인 부부

“이분들 때문에 우리가 잘 사는 나라가 됐고 이렇게 행복하게 됐는데, 부디 이 얼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들 가슴에 남아서 역사가 사라지지 않도록 다짐을 해봅니다. 굳이 여기를 한번와서 찾아 뵙고 싶더라구요”
– 신한촌 기념비에 참배하러 온 한국인 관광객 모녀

 

허술한 철조망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런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3개의 탑과 주변의 8개 작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기념비를 세운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설명으로는 일제강점기 3개의 임시정부와 강제이주 당한 8개 지역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념비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을까? 같이 갔던 가이드는 당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의 숫자가 너무 많아 다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 아닐까 라고 말했습니다. 기념비는 고려인 자원봉사자 부부가 관리하고 있다는데, 남편 되는 분이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현장에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기념비 아래쪽과 위쪽의 색깔이 다릅니다. 러시아인들이 낙서를 하거나 오물을 버린 흔적이라고 합니다.

 

킹크랩을 먹겠다고 블라디보스토크 젊음의 거리, 포그라니치나야 거리로 향했습니다. 맛집과 카페들이 밀집해있는 핫플레이스랍니다. 거리의 두 명 중 한 명은 한국인 관광객이었습니다. 사진도 찍고 킹크랩과 독도새우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이 과거에는 ‘개척기’로 불렸던 까리에스키 거리였다고 합니다. 이 거리 344호에 해조신문사가 있었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모의를 했다는 대동공보사도 있었다고 합니다. 두 명 중 한 명이었던 우리 관광객들 중에 이 역사적 사실을 알고 걸었던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③ 블라디보스토크 역

블라디보스토크 역과 시베리아횡단열차

출발점을 가리키고 있는 필자 이은지 PD

 

“어떤 역인지 알고 오셨어요?” “아니요, 여기가 무슨 역이야?”
“블라디보스토크 역이요. 이곳에서 누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탔는지 아세요?”
“잘 모르겠어요.”

“전혀 못 들어봤는데.”

“몰라요.”

“가이드가 설명 안해주던데요.”

2019년 11월 25일 아침. 총길이 9,288킬로미터에 이르는 시베리아횡단열차 종착역이자 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만난 한국인 관광객들과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실었습니다.
이 철길에도 우리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1909년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해 이곳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고 하죠. 헤이그 밀사였던 이준 열사가 출발한 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생각보다 조용히 역사를 들어오던 시베리아횡단열차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역사 안은 아담했습니다. 다만 입출구가 여러 개인데다 각각 거리가 상당하고 드나들 때마다 짐 검사를 받아야 해서, 탑승할 열차와 개찰구를 잘 확인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저도 한번 잘못 들어갔다가 전속력 달리기를 해야 했으니까요.
우수리스크로 향하기 전, 오성환 총영사는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정부와 우리 영사관이 협력해 블라디보스토크 역사탐방 지도를 제작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블라디보스토크에 역사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음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적지를 찾아서 안내판 같은 것을 설치했으면 좋겠다고 러시아 시정부한테 제안해왔습니다. 신한촌, 구한촌… 여러 역사 유적지를 엮어서 하나의 관광지도로 만들면 블라디보스토크가 단순히 킹크랩 먹고 바다 구경하고 사진 찍는 장소가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역사의 목소리를 듣고 갈 수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는 거죠. 한러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영사관이 지도를 제작할 용의가 있다’고 하니까 블라디보스토크 시정부 측에서도 사적지 지도 앱을 만들겠다고 이야기가 됐습니다.”
항일유적지 지도앱을 보면서 답사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④ 고려인 이주의 피눈물이 서린 철길, 라즈돌노예 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 우수리스크. 차로 2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라는데, 전날 내린 눈이 얼어붙어 3시간 30분 가량 걸려 도착했습니다. 처음 정차한 곳은 라즈돌노예 역이었습니다.

 

기차가 아주 가끔 멈췄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그냥 천으로 덮어 기차역 플래폼에 남겼습니다. 역 객차에서 아이가 숨져 창문 밖으로 시신을 창밖으로 내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식량부족과 병에 시달렸고 차량마다 있던 원형난로는 달리는 중에 사용하지 못했고, 옷도 이불도 받지 못해 너무도 추웠어. 변소도 없어 기차가 멈추면 기차 밑에서 급히 볼 일을 보다 깔려죽기도 했어. 특히 위생상태가 불량해 많은 사람들이 앓았는데 병자가 생기면 그 즉시 실어 내갔고 모두 실종자가 되었지. 식량도 물도 받지 못했기에 오는 동안 풀과 뿌리를 모야 으깨어 먹었어. 아이들이 특히 많이 죽었지 – 김 블라지미르 회고록에서 기차역이 이토록 슬프게 보일 수 있을까. 눈 쌓인 철도가 이토록 서럽게 차가울 수 있을까.
눈발이 매섭게 날리던 날 라즈돌노예 역의 전경은 비통하다 못해 아팠습니다.

 

⑤ 강물소리에 묻힌 이상설 유허비

우수리스크 초입 수이푼강 근처에는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비가 서 있었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고종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했던 분입니다. 1914년 이동휘, 이동녕 등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우리나라 최초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허비는 왜 강가에 있을까요?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그의 유언입니다. 이 유언에 따라 수이푼강에 화장해 재를 강물에 뿌렸다고 합니다. 수이푼 강물은 블라디보스토크 아무르만으로 흘러 동해에 다다른다고 하니, 그 위치 선정에도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유허비를 둘러싸고 물길이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현지 가이드 말에 따르면, 2017년 김정숙 여사 방문 시에 자갈길을 깔았으나 그해에 비가 많이 와서 다 쓸려갔고 올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와서 큰 도로까지 물이 찼었다고 합니다. 그 물이 빠지지 않고 남아있다가 겨울이 와 얼어붙었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러시아에서 9년을 살았다는 현지 가이드는 “관리가 정말 안 된다. 한국인들이 관리 안하면 러시아 사람들은 여기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라며 우수리스크 지역 내 독립운동 유적지 관리 문제를 지적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유허비에 쌓인 눈을 손으로 쓸고 묵념을 했습니다.

⑥ 작은 간판 하나, 전로한족중앙총회 개최지

1919년 2월 25일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전로국내조선인회의가 개최됩니다. 그 전신으로 1918년 6월 열렸던 제2회 전로한족중앙총회 자리가 현재 학교 운동장으로 변해 남아있습니다. 주소는 우수리스크시 막심고리끼거리 20번지.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을 맞이해 안내문 하나를 설치해 건물 입구에 달아두었다고 하니, 타 유적지에 비해 다행인 일입니다. 문이 잠겨있어 안쪽까지 들어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 장소였던 학교 건물과 안내문

 

⑦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남아있는 페치카 최재형의 집

조국은 최재형 선생을 잊은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태어날 당시 아버지 없이 태어났고, 어머니는 당시 탄압 대상자였습니다. 탄압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묻는다면 ‘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최재형 선생의 DNA 덕분이 아닌가…….
우리의 가장 큰 역할은 기억하는 일과 역사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선 기록해놓는다면, 어쩌면 우리의 후손들이 그 뒷일을 감당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기록해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최재형 후손 최 발렌틴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

 

모스크바 어느 한식당에서 최재형의 후손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그는 불의의 사고로 지난 14일 별세했습니다. ‘조국은 최재형 선생은 잊은 적이 없다’ 라는데, 그는 사고 후 병원비 5만 유로가 없어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고택은 당시의 집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에 붉은 색과 흰색으로 칠한 벽돌집. 한쪽 창문이 깨진 상태 그대롭니다.

 

최재형의 집

 

우수리스크시 보로다르스카야 38번지라고 적혀있는 이곳이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했던 집입니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러시아 선원생활을 하며 재력을 쌓았고, 그 돈으로 한인들의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동의회, 대동공보, 권업회의 중추 역할을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구요. 안중근 의사의 배후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고택 안에는 최재형과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미디어 교육실에서는 관광객들에게 최재형과 관련된 영상을 상영해주고 있었고, 러시아 현지인으로 보이는 관리인이 2명이나 있었습니다!(다른 유적지의 황량함, 황무지에 내버려둔 듯한 모습과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었습니다) 마당에는 최재형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자료마다 QR코드가 부착돼있었는데, 현지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 QR코드 연결은 힘들었습니다.

최재형 선생이 잡혀갔던 4월참변을 추도하는 기념비는 코마로바거리 1번지에 세워져있습니다. 러시아정부에서 세웠다고 합니다.
올해는 한러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잃어버린 해간도 항일운동 역사를 재조명하기에 딱 좋은 시기입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두만강을 건너간 선조들의 해간도 투쟁 이야기.
1907년 헤이그특사 파견과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 연해주 최초의 항일의병부대 주축이된 이범윤 부대, 그리고 성명회와 최재형과 홍범도의 권업회·권업신문, 통합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던 이동휘, 대한광복군정부 이상설 정통령.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강제이주의 역사까지, 수많은 불꽃들이 꺼지지 않고 타올랐던 곳.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 땅”(성명회)의 역사를 이제는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요. 10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우리가 기록해놓는다면, 100년 후의 후손들에게는 이 기록이 ‘역사’로 기억될 것이니까요.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긴 이야기를 마칩니다.

 

(경천아일록을 보며) 김경천 장군이 일기를 썼을 당시는 하나의 민족으로 살았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남북으로 나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생각해보면 결국 조국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평화를 사랑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라는 그런 메시지를 주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실 빨치산 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영하 20도, 30도 그런 추운 기후에서 활동하셨고, 옷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먹을 것도 없었던 그런 상황 속에서 독립을 위해서 활동했습니다. 어쩌면 그 모두가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일기를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 잊혔거든요. 잊혔지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오랫동안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이 바로 이 일기장에서 후손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 김경천 장군 손녀 일레나와 갈리나

목, 2020/03/26-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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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인사]

삼가 인사드립니다

이이화 선생 마지막 가시는 길에 찾아와 명복을 빌어 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어수선한 시국에 멀리서 마음을 전해 주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는 화창한 봄날 파주집 근처 공원묘지의 양지바른 곳에 편히 잠드셨습니다.

당신의 생전 사진과 때 묻은 수첩의 연락처를 정리하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시고, 또 당신께서 사랑하신 분들이 정말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습니다. 생전에 당신께서 남기신 족적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교류하신 폭과 깊이의 대단함을 느꼈습니다.

성심을 다해 그간의 과정을 준비해주신 장의위원회의 윤경로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어르신들

훈장 수여를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힘써주신 분들
장례식장의 데스크를 지키고 밤늦도록 정리해주신 분들
멋지고 감동적인 추모 영상을 만들고 장시간 촬영과 기록을 해주신 분들
멀리 전주에서 오셔서 사흘 밤낮 상가를 지키며 함께 해주신 선생님
당신의 저서와 부고 기사를 가져와 영전에 올리신 분
평토를 마친 묘 위에 막걸리를 부어 주신 분
그밖에도 고인을 위해 울어 주신 모든 분들께 숙연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감사 올립니다. 당신께서 남기신 일들을 받들어 이어가는 한편, 그간의 위로에 보답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새로운 봄을 맞아 모쪼록 건강하시고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2020.4.1.
고 이이화 선생 유족을 대표하여
상주 이응일 올림

※ 고 이이화 선생님 아드님인 상주 응일 씨가 유족을 대표해서 감사의 글을 보내왔다. 한편 장례가 끝난 후 유족들이 연구소의 노고에 감사의 말을 전했고, 연구소 후원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수, 2020/04/22-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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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31년 역사교사를 마치며

김해규 후원회원(전 평택한광여중 교사・현 평택인문연구소장)

 

31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올해 2월 퇴직한 김해규 후원회원은 2004년 4월부터 연구소를 후원하기 시작한 이후 평택지역 후원회원 모임 조직, 평택지역 내 일제잔재 조사 자문, 신흥무관학교 국외 답사 등 연구소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 19로 제자는 물론 동료선생님들과도 석별의 정을 나누지도 못한 채 교단을 떠나게 되는 아쉬움을 달래며 퇴임의 글을 보내왔다. 퇴임에 즈음하여 김해규 후원회원은 2월 6일 평택지역 인문학과 관련한 다양한 연구활동을 하게 될 평택인문연구소를 창립해 소장에 취임했다. 저서로는 <평택역사산책> <근현대 평택을 걷다> <평택사람들의 길> 등이 있다.- 엮은이

 

역사학이 너무 좋아 역사책이라면 무엇이든 읽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역사박사’라는 기분 좋은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역사과목 잘해봤자 선생밖에 더 돼’ 친구들은 비아냥거렸지만 소년은 ‘역사교사’의 꿈을 꿨습니다. 역사교사만 되면 소원이 없겠다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알았습니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걸 말이죠.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도 겨우 입학한 처지에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사범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친구들은 고등학교 진학준비에 열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아버지 눈치만 살폈습니다. 큰 맘 먹고 ‘아부지 저 고등학교 가요?’라고 물었던 어느 날, 아버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더니 ‘한 번 가봐라’라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허락이 떨어진 뒤에도 눈치만 살폈습니다. 소년은 인문계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원했던 것은 실업계고등학교였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고집을 피우자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저 윗동네 종삼이 봐라, 인문계 졸업하고 놀잖니. 우리 형편에 기술이라도 배워서 돈을 벌어야지’라며 실업계 진학을 종용했습니다.
소년은 공업고등학교, 그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기계과에 진학했습니다. 소년은 기계과에서 무엇을 배우는지도 몰랐습니다. 징그럽게 싫어하던 공학과목이 널려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몰랐습니다. 소년에게 고등학교 3년은 지옥이었습니다. 더구나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큰 병까지 얻어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졸업반 때는 아쉬움을 곱씹으며 대학진학 예비고사
를 치렀지만 그렇다고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겨울방학 무렵 다른 친구들처럼 서울의 작은 공장에 취업했습니다. 설날 고향을 다녀간 뒤로는 평택의 선진기업이라는 책걸상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일당으로 2,500원, 한 달 월급이라야 5만 원도 안 되는 박봉이어서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말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큰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한 것에 무척 만족해 하셨습니다. 먹는 입 하나 덜었고 학비걱정도 덜었다는 생각에 기뻤을 것입니다.
1981년 5월 제가 사고를 쳤습니다. 고등학교 때 하숙을 같이 했던 절친이 제 소식을 듣고는 평택으로 내려왔습니다. 친구는 치의대 진학을 목표로 서울에서 재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친구와 함께 여의도 5.16광장에서 개최되었던 ‘국풍81’에 갔습니다. 무대 앞에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와 상관없는 풍경에 특별한 감정 없이 무대를 응시하고 있
는데 친구가 그랬습니다.
‘부럽지. 너도 대학생이 되면 저들과 함께 놀 수 있어.’
머릿속에서 경주박물관 마당의 에밀레종이 떵~하고 울렸습니다. 내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였습니다. 평택으로 내려와 보따리를 쌌습니다. 공부하러 간다는 말에 동료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부모님께 허락받은 바도 없었습니다.
고향집은 난리가 났습니다. 아버지는 펄쩍 뛰셨습니다.
‘야 이놈아, 너만 생각하냐. 네 동생들은 어떻게 하라고. 대학은 무슨 대학이여’ 아버지 말씀이 백번 지당했지만 퇴직한 마당에 돌아갈 회사도 없었습니다. 건넌방을 걸어 잠그고 무조건 굶었습니다. 눈물도 나지 않았지만 우
는 척도 했습니다. 그렇게 3일을 버티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해보자. 어떻게 해줄까?’ 재수기간 6개월 동안 한 달에 10만 원씩 지원하고 대학은 스스로 벌어서 다니기로 계약이 성사된 것입니다.
재수 5개월 20일 동안은 정말 혹독했습니다.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독서실 구석에서 잠을 자며 쓰레기보다도 못한 밥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실업계 출신이 6개월도 안 되는 기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좋은 성적을 받기란 무리였습니다. 학력고사를 치르고 대학입학 원서를 작성할 때 주저 없이 ‘역사교육과’를 기입했습니다. 다행히 그때까지만 해도 사범대학은 인
기가 없어서 내심 합격을 기대했지만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전기 대학에 떨어지고 나니 마음이 휑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내 손을 잡고 기도해주시던 교회 전도사님이 신학을 공부하면 어떻겠냐고 권했습니다.
‘주의 종’이 되어 헌신하라는 간곡한 권유에도 저는 역사공부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내 의중을 파악한 전도사님은 총신대학에 역사교육과가 신설되었으니 학부는 역사교육을 하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서울 사당동의 총신대학은 3, 4만 평의 작은 캠퍼스에 두세 개 건물밖에 없는 미니대학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거의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경건함이 넘쳤습니다. 저도 모태신앙이고 시골에서는 남다른 신앙으로 칭찬도 많이 받았지만 그곳에 모인 학생들은 차원이 다른 신앙을 갖고 있는 듯했습니다. 교양과목인 구약개요, 신약개요를 가르치
던 교수님과는 이치에도 맞지 않는 신학이론 때문에 논쟁도 많이 했습니다. 아웃사이더로 빙빙 돌다가 학교 내 아웃사이더 선배들과 어울렸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파격적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선배들의 영향으로 제 눈은 제법 삐딱해졌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뒤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지워버렸습니다. 목회자는 내가스스로 정한 진로가 아니라 교회 열심히 다니는 내게 주위에서 지워준 멍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87년 6월항쟁 때 거리를 헤매고, 수많은 선배, 후배들이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한다며 공장으로 농촌으로 내려갈 때도 나는 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그러했지만 제가 갈 학교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교직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반쯤 체념한 상태에서 4학년 2학기 때 제법 규모가 큰 출판사에 취직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일찍 취직한 것을 축하했지만 앞으로 계속 출판 일만 할 생각에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졸업식을 마친 어느 날 지도교수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안성에 고등학교 강사자리가 있는데 가려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재수를 결심할 때처럼 두말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목회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안성이라고 했던 학교는 평택에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제가 재직했던 한광중・고등학교입니다. 1989년 3월, 꿈에 그리던 한광고등학교 강단에 섰습니다. 얼마 뒤에는 정규직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시골에서는 ‘교사’라는 직업을 매우 귀하게 생각합니다. 친구들도 이름보다 ‘김선생’이라고 높여 부릅니다. 교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기뻐한 것은 아버지입니다. 동네 분들도 ‘김선생 댁’이라고 불러야겠다며 부러워했습니다.
한광고등학교에서 2, 3년 근무한 뒤 1991년부터 한광여고로 옮겼습니다. 14년을 근무한 뒤에는 한광중학교로 전근했고, 지난해 한광여중에서 1년을 근무하고 퇴직했습니다. 지난 31년 동안의 교직생활은 꿈만 같습니다.
역사교사로 보낸 31년은 실현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제 꿈이 실현되었던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출근할 때마다 설릣고 교단에서 바라본 맑은 아이들 눈동자가 늘 새로웠습니다. 아내는 저를 보고 ‘당신은 좋겠어, 취미생활하며 월급 받아서’라며 놀렸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때 당신 같은 선생님만 만났다면 내 인생 달라졌을 거야’라는 엄청난 칭찬도 해줬습니다. 대학 때 제 자신과 약속한 것처럼 아이들을 자식처럼 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참교육’이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좌충우돌도 많이 했고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이 했습니다. 전교조 비합법화 시절 후원
금을 냈던 것이 탄로 나서 오랫동안 감시도 받았습니다.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전교조 조합원으로 가입해서 학교민주화투쟁에 동참했다가 20여 년 동안 각종 차별과 감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퇴직할 때도 조금은 당당하게 교문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1991년 한광여고로 전근하서부터 ‘고적답사반’이라는 역사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나의문화유산 답사기’ 열풍에 힘입어 전국 곳곳을 휘저으며 지역답사도 하고 역사기행도 했습니다.
역사교사가 되면 ‘지역연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을 실천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평택’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사료는 무엇이든 구해서 읽고, 아이들과 시골마을에 들어가서 구술조사도 했습니다. 참교육 열풍으로 ‘학급운영’ 관련, ‘수업관련’, ‘상담관련’ 책이 나올 때마다 구해서 읽었습니다. 대학 때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것을 채우려 대학원에도 진학했고, 지역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욕심에 박사과정에서도 공부했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책도 여러 권 냈습니다. 각종 강연과 글쓰기로
배우고 익힌 것들을 나눴습니다. 새로운 것에 목말랐던 시기, ‘참’이라는 가치에 경도되었던 참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입니다. 돌이켜 보면 참 행복했던 순간들이었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문득문득 얼굴 화끈해지는 일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미숙해서 잘못한 것, 알면서도 비겁했던 것, 미처 해결하지 못한 것들. 미숙함을 무기로 무모하게 가르쳤던 제자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그런 것들을 접어두고 이제 퇴직합니다. 교직 30년 계획에 교감, 교장이 없었기에 미련도 없습니다. 교육환경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실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만도 아니고 아이들의 잘못은 더더욱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근대교육이 이제 시효가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학교에서 가르쳤던 전통적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세계, 미래 세계의 가치를 구현할수 없습니다. 변화된 세상에 대응하려면 우리사회의 교육제도도 바뀌어야 하고, 교육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하지만, 교사도 변화발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변화’와 ‘자기혁신’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남다르지 않으면 올라가지 못할 산입니다.
산적한 과제들을 동료교사, 후배교사들에게 맡기고 저는 떠납니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잘해주리라 믿습니다. 저는 지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로, 텃밭을 일구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여러분과 인생의 어느 길에서 만났을 때 잠시라도 쉬어갈수 있는 넉넉한 가슴 준비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2020년 2월 29일)

수, 2020/04/22-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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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꿈꾸는 수인(1)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1. 유폐된 황제의 사상

영하 20도라고 한다. 감방은 영락없이 냉동고다. 천장만 덩실하게 높은 이 비좁은 감방에 세 사람이 웅크리고 앉았는데, 입김이 유리창에 서려 하늘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는 하얗게 두툼하게 얼어붙었다. 조금 받아놓은 물도 돌덩이처럼 얼어붙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변기통도 얼어붙었다.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이 따끔따끔하다. 콧속의 털이 얼었다가 녹았다가 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 모든 위세를 총동원해서 만상을 얼어 붙이려고 기를 쓰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기적처럼 얼지 않고 있다.(<소설, 알렉산드리아>, 한길사 판)

 

이병주(왼쪽)가 1963년 12월16일 2년7개월의 수감생활 후 특사를 받아 부산교도소에서 출소할 때 모습. 이권기 경성대 일문과 명예교수 제공

 

나림(那林) 이병주(李炳注 : 1921.3.16.~1992.4.3.)의 인문학기행은 영하 20도 이하의 겨울날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종로 3가나 청량리 588처럼 지번으로만 서울의 우울을 상정했던 이곳은 조선시대에 전옥서(典獄署)였다가 감옥서(監獄署)로 바뀐(1895) 뒤, 일제에 의하여 사실상 법 집행권을 약탈(1906, 조선통감부 설치)당한 후에 경성감옥(京城監獄)이란 명칭 아래 독립운동가들을 수감시킬 목적으로 지어진 곳(1908.10.21. 개소)이다. 민족사적 수난의 상징인 경성감옥은 서대문형무소(1920), 경성형무소(1946), 서울형무소(1950), 서울교도소(1961), 서울구치소(1967)로 화류계 여성 이름 바꾸듯이 변성명하다가 1987년 11월 15일 의왕으로 이전함으로써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지고 지금은 우아하게 서대문형무소역사관(1998.11.5. 개관)이란 명칭으로 몇 동만 남아있다. 이 시설을 원형 그대로 보관했다면 실로 세계적인 명물로 유네스코문화유산 목록에 오르고도 남을 아까운 유적이건만 이를 허물어버린 군부독재나, 그런 야만적인 조치를 막지 못한 민주세력의 역량을 생각하면 마냥 울화통이 치민다. 지금도 그 일대 독립공원엘 갈때마다 입구 보도에다 이 시설을 훼손한 자들의 동팡을 깔아두고 짓밟고 지나가도록 했으면하는 울적한 심정이다. 어째서 이런 세계적인 명물을 서울시도 아닌 일개 구청에다 소속시켜 그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행여 관할 서대문구청이 잘못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예산에 비해서는 너무나 잘 관리 운영하고 있지만, 깜냥도 안 되는 온갖 박물관들에 국민의 혈세가 투자되는 데 비해 너무나 푸대접을 받는다는 민족사에 대한 불공평한 처사가 안타깝다는 뜻이다.
이병주가 이곳에 투옥당했던 1961~1962년(그는 10년형을 언도받고 1962년 부산교도소로 이감, 2년 7개월 만인 1963.12.16. 출감)은 서울교도소 시절이었다.
이런 감옥에서는 “원통형으로 굳어진 사등밥(통상 가다밥 혹은 콩밥으로 호칭)이란 관명(官名)이 붙은 밥”에, “소금 속에 미이라”가 된 새우, “된장의 향기를 살큼” 풍길 뿐 “들여다보면 거울이 될 수” 있을 정도의 멀건 국물이 한끼 식사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오만하게 버티고 앉아 황제다운 품위를 지키며 젓가락질”을 하는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중년 사나이.
그는 이 감방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카파레 안드로메다에서 악사로 있는 동생에게 “유폐된 황제의 사상을 아는가. 그건 이카로스의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하는 사상이다”라고 쓴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가장 야만적인 시설을 갖춘 서울교도소의 감방에 갇힌 나, 이 “고독한 황제는 환각 없인 살아갈 수 없다”, 그는 “유폐된 황제의 사상”으로 무장한 채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는 만해 선사의 불교적 변증법에 도취해서 그 징역살이의 고통을 감내한다.
세상에 억울한 건 그 혼자만이 아니다. 사관 사마천도 그랬지만 천하의 명 제왕학 교재를 썼던 마키아벨리도 그랬다. 피렌체 공화정 시절에 정청 제2사무국장부터 대통령 비서까지 두루 거쳤던 그는, 추방당했던 메디치 가문이 외세(교황과 스페인)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조종, 귀국하여 재집권하자 중뿔난 죄도 없으면서 죄인으로 내몰렸다. 혹독한 날개꺾기 고문을 6회나 당한 뒤 바르젤로 감옥(현 국립미술관)에 투옥, 운좋게 간신히 풀려났으나 벌금에 파직까지 당했다.
도리없이 그는 피렌체 근교 산탄드레아의 농장으로 은둔, 거기서 <군주론>을 비롯한 명저들을 쏟아냈다. 이미 5살 아래 벗 프란체스코 베토리(서신교환 때는 로마주재 피렌체 대사, 나중 프랑스 대사, 피렌체 공화국 대통령)와 2년여에 걸쳐 43통의 왕복서한을 주고받았는데, 그 사연은 실로 사마천이 사형수 임안(任安)에게 보낸 안족서(雁足書)만큼이나 절절하다.
“운명은 나를 견직물업에 밝게 해주지도, 면직물업으로 돈을 벌게 해주지도, 금융업으로 입신할 수 있게 해주지도 않았으므로, 정치를 생각하는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단 말일세”라고 노골적으로 호구지책을 애원하면서도 마키아벨리는 유형이나 진배없는 농막에서의 삶을 시적으로 그려준다.
“나는 시골집에 있네……여기서 나는 해가 뜨면 일어나 숲으로 가네. 그곳에서 나무를 벌채시키고 있기 때문이지.
” 두어 시간 감독 겸 작업지시를 하고는 산림 속 옹달샘물로 가서야 “비로소 나는 내 자신의 시간”을 갖는다고 했는데, 필시 목을 축이고는 나르시스처럼 그 샘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좋은 샘물이라도 그걸로는 갈증을 달랠 수 없어 “한길로 돌아서 선술집으로 가네. 거기서는 나그네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 그러다가 “식사시간이 되면,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이 가난한 산장과 보잘 것 없는 재산이 허용해주는 식사를 들지.
”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식단인가를 암시하는 묘사다. 그래서 영혼의 갈증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허전한 지라 이내 선술집으로 가서 “푸줏간 주인과 밀가루 장수와 두 사람의 벽돌공”과 어울려 “불한당이 되어 보낸다네. 카드와 주사위가 난무하는 동안 무수한 다툼이 벌어지고, 욕설과 폭언이 터져 나오고 생각할 수 있는 별의별 짓궂은 짓이 자행”된다.
이 대목을 읽노라면 그에게 맞춤한 밥벌이 자리라도 마련할 만한 지위에 있었던 베토리가 왜 그런 건 전혀 고려조차 않았는지 궁금해지지만, 이내 그 해답은 자동응답기처럼 튀어나온다.
어느 시대나 출세지향적인 몸보신주의자들은 험지에 빠진 동지나 벗들을 경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덕택에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지난 2016년 가을 이태리 여행 때 험지인데도 하루를 투자하여 나는 산탄드레아의 그 농장을 찾아가봤다. 한촌이라 관광객조차 별로 찾지 않았는데, 5백여 년 전의 그 마을풍경을 상상, 유추해보니 추방자의 처량함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 정황을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기록한다.

 

밤이 되면 집에 돌아가서 서재에 들어가는데, 들어가기 전에 흙 같은 것으로 더러워진 평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네.
예절을 갖춘 복장으로 정제한 다음, 옛 사람들이 있는 옛 궁전에 입궐하지. 그곳에서 나는 그들의 친절한 영접을 받고, 그 음식물, 나만을 위한 그것을 위해서 나의 삶을 점지받은 음식물을 먹는다네. 그곳에서 나는 부끄럼없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들어보곤 하지. 그들도 인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대답해 준다네.
그렇게 보내는 네 시간 동안 나는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네. 모든 고뇌를 잊고 가난도 두렵지 않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게 되고 말일세. 그들의 세계에 전신전령(全身全靈)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겠지.(시오노 나나미,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한길사 334~335쪽. 위의 인용문도 다 이 책에서 발췌)

 

이병주는 감방에서 고독한 유폐된 황제의 꿈으로 작가가 되었지만, 마키아벨리는 일개 정신(廷臣)으로 자족하며 인문학자가 되었다.
둘 다 유폐된 상황에서 궁중을 가상무대로 삼은 것은 고난을 돌파하려는 투지의 역설적인 수사법에 불과하다. 전락한 운명을 사사로운 영욕에 억매여 고통을 감내하기보다는 우매와 범죄로 억룩진 역사에 도전하겠다는 결연함을 응고시킨 의지이기도 하다. 누구의 명령에도 굴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사상적인 금자탑을 쌓고야 말겠다는 갈망이 그들로 하여금 누추한 거처를 왕궁으로 날조할 수 있도록 역사의 여신 클리오의 인허를 받은 격이다.
이 두 수인의 꿈은 그 형식이 소설이든 인문학이든 자신들처럼 핍박당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입각하는 게 자연변증적인 전개일 터인데, 이병주도 마키아벨리도 그렇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병주

마키아벨리 시대의 이태리는 르네상스적 휴머니즘의 이상으로 공공적인 선과 자유로운 공민의 공동체를 추구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추방당한 그에게 이런 사조는 공허했을 터였고, 공동체(도시국가)의 위기와 해체가 빈번한 가운데서 사람들은 점점 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표변해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엿다.
그래서 <군주론>은 “군주는 자기 백성을 결속시키고 이들이 충성을 다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잔인하다는 악평 따위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든가, “신의도 저버릴 줄 알아야 하며, 자비심을 버리고 인간미를 잃고 반종교적인 행동도 때때로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 두어야 하겠다”는 등등으로 마키아벨리즘은 석화되었다.

그래서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사람이란 정겹게 품어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짓밟아 깔아 뭉개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작은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 들지만 치명적인 피해에는 그럴 엄두도 못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가 타인에게 손상을 입히려면 복수의 두려움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George Bull trans, The Prince, Penguin Classics, 1966, pp 37~38)

 

물론 이 대목은 극한 상황이나 점령지를 통치하는 경우에 빗대어 거론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독재체제를 두둔하는 한편 그는 외침을 당했을 때의 방어능력에서는 군주국보다는 민주체제가 더 우수하다는 모순된 논리를 편다. 로마에 잔혹하게 점령당한 군주국 카르타고는 식민지화되었으나, 스파르타에 패배한 아테네는 시민들이 경험한 공화정의 자유주의 정신 때문에 결국 참주정치가 좌절되어버렸다고 주장한다.
이 모순된 마키아벨리즘은 이병주의 초기 문학에 강력하게 반영된다.
이병주 문학의 핵심은 정치 이데올로기와 국가권력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에 있다. 여기서 그는 인본주의자로서의 휴머니즘에 입각하면서 교양주의적인 양비론자의 태도를 취한다. 민족사의 비극을 소재로 삼든, 독재권력을 주제로 올리든 작가는 시종 냉소적인 양비론자의 시각으로 초월적 입장을 유지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좌익은 순진하고 우익은 이악스럽다는 식이다.
반쪽 정부를 세운 이승만은 적당주의자, 김일성은 사람을 많이 죽인 민족반역자, 박헌영은 미군정을 연구하지 못한 무식자, 여운형은 이름 팔기를 좋아한 매명주의자, 조봉암은 대인이지만 변절자, 제주 4·3사태 등으로 동포를 많이 살해한 장택상이나 이범석은 아주 나쁜 사람, 이런 식으로 그의 인문학적인 가치관은 판관 포청천처럼 날선 도끼가 역사의 도마 위에서 번득인다. 이런 가운데서도 중반기까지 실록 대하소설로 분류되는 한국현대사를 다룬 일련의 작품들(<지리산> <산하> 등)은 시종 마키아벨리즘적인 가치관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승만에 대하여 가장 호의적이며 이념적인 밀착도를 지닌 작가는 이병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단죄하면서 이렇게 역사의 법정으로 몰아세운다.
“들먹여볼까요? 보도연맹학살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 방위군사건, 중석불사건, 부산에서의 개헌파동, 그리고 (중략) 통일할 능력도 없거니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할 성의도 없고 국민을 사랑할 줄도 위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낙인” 찍힌 것으로 한 등장인물은 말한다.(<산하>) 박헌영으로부터 “수백 년 묵은 여우”(이병주, <남로당>)라는 별명이 붙은 이승만은 왕이 될
태몽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하도 들어서 대통령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것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미군정 안에서도 “파시즘보다도 한 2세기 쯤 먼저 태어났어야 할 인물”이란 평가와 함께 왕조를 지향하는 성향 때문에 “부르봉”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활한 이승만/융통성 없는 김구/포용력 없는 박헌영”이라는 형용구처럼 8·15 직후 정치인 중 이승만만이 마키아벨리즘의 정치술수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고 이병주는 평가한다.
“2차대전 이후 소련 블록으로 들어간 나라는 조만간 공산국가로 될 것이고, 미국 블록으로 들어간 나라는 자본제 국가가 되고 말 것”이라는 현실정치론(<지리산>)은 지금은 상식이 되었지만 8·15 당시에는 좌우익 최고 이론가들도 꼭 집어서 이처럼 단정 짓지 못했던 게 대미 인식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대목은 이병주가 한국전쟁 이후에 역사를 재점검하면서 낸 결과물이지만 8·15 직후에는 그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아, 동편 바다 왼-끝의 대륙에서 오는 벗이여!”라며, “이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는 연합군이야!/ 정의는, 아 정의는 아직도 우리들의 동지로구나”라고 감격하던 「연합군 입성 환영의 노래」(1945.8.20.)를 외쳤던 오장환 시인은 불과 넉 달 뒤인 12월에는 「가거라 벗이여- 흑인 병사 엘 에스 뿌라운에게」에서 “그대 내어친 발길/ 이 길을 똑바른 싸흠의 길로 듸듸라”라며 내친다. GHQ(도쿄 연합군최고사령부의 통칭인 General Headquarters의 약자)는 일본 점령 통치에서 폈던 정치적인 관용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점령 초기부터 반소 친미정권의 수립이란 제국주의적인 의도를 분명히 강압하며 민족독립사상을 탈색시키고 친일친미세력에게 유리하도록 정치기반을 조성했지만 그 마수의 정체를 몰랐거나 알고도 일말의 기대와 화해를 위해 유연했음을 숨길 수 없다.
가장 비판적이어야 할 조선공산당은 ‘8월테제’에서 미국을 진보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했기에 당 기관지 <해방일보>에서 미군정 비판기사가 처음 등장한 게 1946년 4월 2일이었다. 미군과 일본군 헌병의 차이는 키가 더 크다는 것뿐이라는 농담과 미군정이 일제 때보다 못하다는 여론이 팽배할 때였는데도 말이다.
조선정판사사건(1946.5) 이후에야 공산당은 신전술(7월)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미군정과 미소공동위원회(한반도 분할을 위한 국제정치쇼!)에 기대를 걸고 일방적인 구애를 계속했다. 당대의 최고 이론가의 하나였던 이강국은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조선인민보사 후생부. 1946년판을 범우사에서 2013. 재출간)에서 “군정은 모름지기 우리의 완전독립을 후원할 것”이고, 하지 준장은 “실로 조선민족의 은인이며 민주주의의 사도”라고 했다. 백남운은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조선민족의 진로>는 신건사, 1946,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은 민족문화연구소, 1947 출간된 것인데, 범우사에서 합쳐서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으로 2007 재출간)에서 미국의 경제원조를 ‘남조선 단독 조치설’과 결부시켜 경계하는 수준이었다. 박헌영이 대미 강경노선으로 선회한 건 자신에 대한 체포령(1946.9.7.) 이후였고, 그는 여기에 정치적인 대안보다는 감정적인 조처로 많은 희생을 초래했다.
외신 기자들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러 왔다거나 러시아의 한반도 우위권을 막는게 미국의 목적이라는 설까지 흉흉한 가운데, 미 육군성의 해외기지 설치 예산문제까지 구체적으로 보도(1946.6)했는데도 여운형조차도 “풍설일 게고 불가능하도다”라고 논평할 정도로 태연한 척했다.
그러니 6·25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없었을 터였다. 오늘이라고 뭐가 다를까?
미국(과 소련)을 정확하게 비판하며 민족적인 비극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한 논객은 오기영을 비롯한 민족적 양심세력과 젊은 소수 문학인들이었다.
하기야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인정식의 번역으로 출간된 것이 1946년 3월이었는데, 이 명저는 레닌이 1916년 봄 취리히에서 집필한 것으로 원제는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평이한 개설’이다. 미국이 스페인의 식민지인 쿠바와 태평양 일대 및 필리핀을 탈취하려는 노골적인 야욕으로 미서전쟁(1898)과, 영국이 남아프리카 점령을 위해 야기한 남아전쟁(1899~1902)이 제국주의에 대한 연구의 절실성을 제고한데다가, 제1차대전 전후의 제2인터네셔널 내부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쟁 지지냐, 국제평화냐는 치열한 논쟁 등이 집필 배경이었다. 조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독일이 남의 나라 침략전쟁을 지지해도 좋다는 주장과, 어떤 침략전쟁도 반대라는 논쟁을 종식시키고자 레닌은 제국주의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부심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국내의 검열 때문에 주로 독점자본에 의한 경제적 침략에 치중하여 독점은 식민지에서 형성된다는 입장에서 썼기에 이후 지구에서 횡행하고 있는 기상천외의 제국주의의 잔혹성과 교묘한 직간접적인 침략 양상은 피했다.
21세기의 레닌이 등장한다면 오늘의 신출귀몰하는 미 제국주의의 진상을 까발려 줄 수 있으려나?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 적지도 않건만 아직까지 미국의 정체를 알기 쉽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줄 만한 책 한 권 없다는 게 부끄럽다.
지금도 이런 판이니 당시야 어땠겠는가. 이런 갑갑한 정세였던 지라 작가 이병주는 아예 터놓고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끈덕진 나라다. 미국은 지길 싫어하는 나라다. 미국은 언제든 전쟁을 필요로 하는 나라다”(<지리산>)라는 논리의 연장선에서 남한에서의 민족운동 전체를 비관적으로 썼다. 이 작가는 그런 미국에다 줄을 댄 이승만의 선견성을 적극 지지하는데, 그의 집권 이유로는 무엇보다 마키아벨리즘적인 원숙성에서 찾고 있다.
“정세를 이용하는 영리함”의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정세를 만들어 나가는 용기”(<남로당>)를 가진 인물이라는 평가는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승만의 참모습을 드러낸 표현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이병주는 8·15 직후의 많은 암살사건조차도 “이승만 씨가 직접 조종한 것은 아닌” 다만 “과잉충성하는 놈들이 이승만의 의중을 대강 짐작하고 저지른 노릇”으로 관대하게 풀이(<산하>)해주며 그의 피 묻은 추악한 손을 씻어주고자 진력한다. 바로 이병주 소설의 한계다.
이승만의 마키아벨리즘이 집권 중 단연 돋보이게 빛을 낸 장면으로 이병주는 농지개혁을 들었는데, <산하>는 이를 극명하게 묘사해준다. 농지개혁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조병옥 등과는 달리 이승만은 “농지개혁은 이떤 일이 있어도 서둘러야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이유인즉 “공산당에게 농민을 선동하는 미끼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한민당의 세력 기반(지주층)을 없애버리는 좋은 방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인 대업을 위해 초대 농림부장관에 조봉암을 앉혔는데, 그야말로 이 과업에는 적격이었을 터라 “조봉암이 빨갱이의 본색을 드러낼 요량”으로 임무를 멋지게 수행했다. 그것까지도 염두에 둔 이 늙은 여우는 농지개혁으로 인기를 얻을 “조봉암 농림부장관을 치워버려야겠다는 결심도 동시”에 하는 것으로 이병주는 그려준다.
비판하며 지지한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이 무렵 이병주 자신의 역사의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대통령들의 초상-우리의 역사를 위한 변명>(서당, 1991)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전직 대통령을 다루면서, 「이승만 편-카리스마와 마키아벨리즘의 화신」에서는 역사적인 거의 모든 과오를 되도록 비호, 변명해주는 입장이고, 「박정희 편-탓할 것이 있다면 그건 운명이다」에서는 안면몰수하고 사사건건 비판의 칼을 들이대는 자세며, 「전두환 편-왜 그를 시궁창에서 끌어내야 하나」에서는 이병주의 모든 글 중에서 최하급의 졸문으로 전두환을 추켜대는데, 너무나 사리도 논리도 안 맞는 억지춘향이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얼굴이 뜨거워질 지경이다.
1979년 10·26 이후의 과도기 때 이병주는 손세일의 주선으로 가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났고, 김상현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만났다. 그러나 이 둘에게는 인색했던 찬양을 전두환에게 풍성하게 나열하게 된 계기를 잡아준 건 이동화 송지영 윤길중 고정훈 신상초 선우휘 남계희 등 민주사회주의자들이었다고 이병주는 밝힌다. 그러나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이병주의 명성은 전두환 예찬으로 곤두박질 쳤다. 왜 이 작가가 이랬을까? 이병주의 아들 이권기 교수는 박정희를 비판하기 위해서 전두환을 빗댄 것이라고 했지만 그 점만으로는 뭔가 모자란다.
더구나 <전두환 회고록>(전3권, 자작나무숲, 2017)에는 이병주에 대한 언급이 장황하게 나오는데, 그 흑막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미궁이지만 설상가상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이병주를 높이 평가하고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까닭은 박정희 신화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보와 재미있는 기록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동시대의 독립운동가인 김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가장 인색할 지경인데, 이건 필시 학병으로 중국 체험자로서의 감성도 작용했을 것이다. 학병으로 중국 대륙 체험을 한 이병주로서는 상하이 임정의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들었을 터지만, 이승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김구와 비교하면 불리하기 때문에 박헌영과 대비시키기를 즐겼다.
박헌영에 대한 이병주의 입장은 너무나 단호하고 신랄하다. 영웅이기엔 “미학이 방해를 하는 것이다”라는 부정적인 수준을 넘어 냉대의 시각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그의 항일경력에 대해서는 이승만 노선의 지지자인 이병주조차도 “공산당이 일제와 싸운 그 공적은 박당수, 아니 박헌영 선생이 몸소 증명하고 있지 않소”라는 이승만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냉대는 여전하다.
작가는 그 특유의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이승만의 정치적인 노회함과 박헌영의 얕은 술수를 대비시키면서 모스크바 삼상회담 문제를 둘러싸고 만났던 두 사람을 “늙은 교사 앞에 앉은 젊은 학생”으로 비유한다.(<남로당>) 그러면서 “한국 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가장 겁내고” 있던 이승만이 박헌영과 당분간 밀월관계를 가질까도 고려했다가 실망, “불쌍한 인간! 감옥에서 자기 똥을 먹기까지 하며 양광(佯狂:거짓으로 미친 체함)을 부렸다더니 기껏 지능이 그 꼴밖에 되지 못하는군”이라는 쪽으로 판단이 내려졌다고 묘사한다. 이병주가 박헌영을 유일하게 옹호한 대목은 그가 미제의 간첩은 아니라고 한 반북적인 주장뿐이었다.
이병주가 그나마도 호의적으로 그린 인물은 암살당한 이후의 여운형이다. 그는 “언제 있을지 모르지만 남북을 털어놓고 투표로써 하나의 지도자를 선출하게 될 기회가 있기만 하면 여운형이 결정적인 다수표로써 선출될 것이란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남로당>)(다음호에 계속)

수, 2020/04/22-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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