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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엇갈린 형제의 길, 심우섭과 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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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엇갈린 형제의 길, 심우섭과 심훈

익명 (미확인) | 목, 2018/02/2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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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자리에서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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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

19살 청년이 서대문감옥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다. 이 청년은 우리가 잘 아는 <상록수>의 저자 심훈(본명 심대섭 沈大燮, 1901~1936)이다.

1919년 3월 1일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심훈은 독립운동 소식에 학교를 뛰쳐나왔다.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문으로 옮겨가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날은 붙잡히지 않았다.

3월 5일 오전 9시, 심훈은 남대문역 앞에서 수만의 학생과 같이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대 시위운동에 청년의 피가 끓었다. 어머님보다 더 큰 어머님,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는 혈기가 넘쳤다. 그날 밤 안국동 별궁 앞에서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편지에서 보듯 만세시위에 나섰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사람은 몇 천, 몇 만이었다.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던 기간은 2개월 남짓이었다. 그해 겨울, 삼한 사온이 무색하게 나날이 춥기만 했다. 심훈은 감옥에 남은 동지들을 걱정했다. 걱정하는 한편으로 나라의 독립을 염원했다.

지금쯤 얼음 속 같은 옥중에 그저 남아 있는 사람들이야 과연 어떠할까? 살을 깎아내는 북풍은 철창에 불고 눈덩이 같은 밥을 먹고 허구한 날 우르르 떨기만 할 때에 그이들의 마음이야 과연 어떠할까.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그저 뜨거울 것이다. 서대문 감옥 높은 담 위에 태극기가 펄펄 날릴 때 굳센 팔다리로 옥문을 깨뜨리고 환호와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열광하여 뛰는 군중… 오- 상제여 그의 원한을 속히 이루어 주소서! (심훈일기, 1920.1.17)

31운동 1주기가 되었다.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온 시가를 꽁꽁 에워쌌다. 신문에는 나지 않았지만 평양에서 야단이 났다고 하고 배재학당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소문도 들었다. 심훈은 홀로 남산에 올랐다. 여러 가지 일로 답답한 가슴이 그를 이끌었다.

남산에 올라갔다. 왜놈들에게 짓밟힌 남산 눈앞에 깔린 서울 시가며 꿈같은 먼 산과 띠 같이 흐르는 한강수까지 다 우리 것이련마는. 아! 슬프고 답답한 마음을 억제키 어렵다. 잠두(蠶頭)에 홀로 걸터앉아 넓은 시가와 산과 들과 강을 향하고 목청을 빼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창가를 높이 불렀다. (심훈일기, 1920.3.27)

감옥에서 풀려난 심훈, 미래를 걱정하는 20살 청년이었다. 온 민족이 들고 일어나 독립만세를 부른지 1년이 지났지만 식민지라는 현실은 변한 게 하나 없다. 만세시위로 옥고를 치르느라 다니던 학교에서는 퇴학당했다. 문학에 뜻을 두었지만 길은 잘 보이지 않았다. 듣는 이 없는 산에 올라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불러보지만 슬프고 답답한 마음은 쉬이 풀릴 리 없다.

그런 그의 눈앞에 자리보전하고 누운 큰형이 보였다. 큰형은 필명 천풍(天風)으로 유명한 심우섭(沈友燮, 1890~1948)이다. 둘 사이엔 작은 형 심명섭과 누이 심원섭이 있다. 그래서 큰형과 막내는 11살 나이 차이가 난다. 어린 막내가 보기에 큰형 심우섭의 처신이 참으로 못마땅하다.

형님의 병환이 그저 낫지 못한데 어제는 오지도 않았다고 보지도 않고 공연한 걱정을 하신다. 아무 아는 것도 없이 혼자 달관을 하고 초관(超觀)을 하고 안하무인으로 자임하여 말만 함부로 하고 다니며 하다가 신문경영에도 대실패를 하고 울화병이 든 것이다. 그러고 주색(酒色)에 몸은 약하여 가지고 온갖 번민을 하며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는 것이라 아무리 친형제 간이라도 동정하는 마음이 생길 수는 없다. 형님의 일은 만사가 다 그 수법이니 누가 환영을 하랴. 이렇다가도 형제간에 마음이나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큰 걱정이다. (심훈 일기, 1920.1.21)

형의 병 수발은 본처가 아닌 첩이 들고 있다. 이미 심우섭은 평양 출신 기생 초월과의 연애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이 무렵에는 또 다른 이를 첩으로 들였던 모양이다. 심훈은 형님 병의 원인을 타락적 쾌활과 불규칙한 생활, 조금도 없는 극기심, 특히 주색을 제1의 악마라고 생각했다. 당시 심우섭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신문에 소설도 발표하고 매일신보 기자로 필명을 날리던 쾌활남아였다. 그런 심우섭이 신문사도 그만두고 자리보전하고 누워 병문안 오지 않는다고 동생 타박이나 하고 있다. 이제 그 형 이야기를 해 보자.

기자 심우섭, 데라우치를 찬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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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섭

1910년 3월 휘문의숙을 졸업한 심우섭이 맞닥뜨린 현실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이었다. 신학문을 배운 지식인으로서 심우섭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 관료가 될 생각도 한 모양이다.

이듬해에는 잠시 사립학교 교사 노릇도 했다. 하지만 5개월 남짓 만에 그만두었다. 심우섭의 선택은 문인이자 언론인의 길이었다. ‘천풍’이란 필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매일신보에 소설 <형제>(兄弟, 1914년 6~7월), <주>(酒, 1914년 9월), <산중화>(山中花, 1917년 4~9월)를 연재했다. 특히 1917년에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본인들의 호랑이사냥에 동행하고 ‘정호기(征虎記)’를 연재했다. 매일신보사에 입사한 것은 1916년이었고 1918년부터는 지방과장이란 직함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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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명을 날리던 20대의 심우섭. 왼쪽부터 진학문 심우섭 이광수 이상협

이광수가 1917년에 발표한 소설 <무정>의 첫 장면에는 신문기자 신우선이 등장한다. “미스터 리, 어디로 가는가” 주인공 이형식을 뒤에서 부르며 나타나는 이.대팻밥모자를 살짝 뒤로 젖혀 쓰고 활개 치며 내려오는 신문기자 신우선이다. 김장로 집 딸 김선형의 영어 과외를 하러 가는 이형식에게 던지는 신우선의 농지거리는 그의 유쾌함과 활달함을 잘 드러낸다. 그렇지만 이형식은 그의 지나친 방탕함을 허물이라 생각하고 있다.

소설 <무정> 속 신우선이 매일신보 기자 심우섭을 모델로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름도 그렇고 <무정>이 매일신보 1면에 연재될 때 심우섭의 <산중화>는 4면에 연재되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1918년, 매일신보 기자 시절에 찍은 이 사진 속 심우섭을 보면 생기 넘치는 젊음과 그에게 꼬리표처럼 항상 붙어 다니는 ‘해학’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게 하는 장난기가 엿보인다.

옆에 선 이는 이광수와 진학문, 이상협이다. 비슷한 연배에 매일신보를 매개로 어울리던 시절이다. 이렇게 매일신보에 소설을 연재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고, 쾌활한 성격으로 음주가무를 즐기며 평양 출신의 유명한 기생과 연애도 하며 풍류남아 심우섭의 20대 청춘이 흘러갔다.

이 무렵 기자 심우섭의 기사 한 대목을 읽어보자. 꽤 긴 글인데, 일부를 발췌해도 역시나 길다.

백작이 조선을 혁신함이 의사가 난치병자에게 수술을 베품과 다를 바 없도다. 아니다.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한층 심한 것이 있다. 즉 의사가 다만 병자의 복부나 다리를 해부하기에 그치지만 백작의 수술방법은 매우 엄혹하고 奇絶하여 옛 머리를 자르고 새 머리를 붙이며 四肢百體에 그 예리한 해부도는 縱橫敏活하여 자르고 쪼개지 않은 곳이 없다. 오호라. 당시 병상에 누웠던 우리 조선인 즉 병자의 고통이야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겠으며, 백작에 대한 분노와 증오도 역시 극에 달하였으리로다. 백작이 전기한 공전절후의 대수술을 단행하고는 다시 환자의 회복에 힘을 다하여 恩威와 寬嚴이 오로지 병자로 하여금 加療靜食에 주의하게 하고 감히 分外의 事爲를 감행하지 못하게 한지 이제 만 6 개년여라. 시술 후 6년여 장기간에 周密한 좌우의 간호를 받으면서 병상에 누워 있다가 지금에 이르러는 크게 全快한지라. 다년 음용하던 미음은 쌀밥으로 변하고 그 착용하던 환자복도 새 옷으로 갈아입고 嚴切한 간호를 해탈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에 의사의 주의방침도 일변하여 완전한 인간으로 대우하며 원래 무병한 자와 같은 행복을 누리게 할 시기가 멀지 않았다. 비로소 천오백만의 조선인민은 滿心歡情으로 백작의 손을 꼭 잡아 백작의 시술의 노고에 감사하고, 백작은 다년 병상의 고통을 위안하여 일반의 의심이 사라지고 和氣가 가득하기에 이른 것은 기약도 기대할만 하거늘. 애석하도다 무정한 寺內백작은 일이 이에 이르기 전에 조선을 떠나갔도다. (<매일신보> 1916.10.15. 밑줄은 인용자)

이 기사에서 찬양해 마지않는 백작은 다름 아닌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이다. 1916년 10월 데라우치는 조선총독을 사임하고 일본에 돌아가 내각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심우섭 기자는 데라우치 백작을 전송하는 글(「寺內伯爵을 送함」, 天風生)을 매일신보에 실었다. 문예기자로서 주로 신소설을 연재하며 간혹 금강산 기행이나 호랑이 사냥 같은데 따라가 답사기를 쓰고, 혹은 문예면에 유쾌한 세태풍자기사를 주로 쓰던 심우섭이다 보니 이런 정치색 짙은 글은 참 의외다.

기자 심우섭이 데라우치의 조선통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자. 그는 조선과 조선인을 병상에 누운 환자에, 데라우치와 일본의 식민통치를 의사와 간호사에 비유했다. 의사의 수술방법은 매우 엄혹하고 기이하다. 옛 머리를 잘라내고 새 머리를 붙이는 것 같다. 병자의 온몸을 자르고 쪼개니, 그 고통이 이루 형용할 수조차 없다. 그 고통에 의사에 대한 병자의 분노와 증오는 극에 달했다. 그래도 의사는 대수술을 감행하더니 그 후 환자의 회복에 정성을 다했다. 6년여가 흘렀다. 이제 환자는 완전히 나았다. 환자복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쌀밥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환자는 의심을 거두고 의사의 노고에 감사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찬사를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니, 이런 글솜씨가 아무에게나 있겠는가. 이 기사는 심우섭의 생각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본이 난치병에 걸린 조선과 조선인을 치료해 주고 행복의 길로 이끌고 있으니, 즉 일본의 식민통치를 통해 조선이 근대화되고 있으니 그 은혜에 고마워해야 한다. 매일신보가 총독부 기관지이고, 기자는 신문사의 논조에 구속받을 수밖에 없다고 해도 이 정도의 정성과 글솜씨를 보면 근본 생각이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치운동 잠깐, 그리고 참정권 운동으로

만세시위 열풍이 한풀 꺾인 1919년 7월 심우섭은 일본 도쿄로 향했다. 매일신보 기자는 그만두었던 것 같다. 동생 심훈도 감옥에서 풀려나왔을 무렵이다. 심우섭을 비롯해 함께 도쿄에 건너간 고희준, 채기두, 박승빈, 이기찬, 고원훈, 박병철 등은 조선에 자치제 시행을 위한 운동을 하려 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동상(東上) 7인조’라 불렀다. 일본 정계의 주요 인물들을 만나 ①관리를 공평하게 임용할 것 ② 조선의회를 개설할 것 ③ 언론의 자유를 인정할 것 ④ 소요(3.1운동) 범인을 석방할 것, 4개항을 제시하며 대조선 정책에 채용할 것을 역설했다. 또 하라 다카시(原敬) 수상을 만나 총독정치에 대한 종래의 실정을 비판하고 “조선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거나 조선의회를 만들라”는 의사를 표명했다.

3・1운동의 충격은 일본 식민통치자들로 하여금 조선 통치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했고, 동시에 조선인들의 정치운동 내지 정치적 요구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 흐름 중 하나가 자치론 내지 자치운동이었다. 주로 이광수를 비롯한 동아일보 계열과 최린을 위시한 천도교 신파 쪽에서 1920년대를 거치는 동안 자치운동에 열심이었다.

일제시기 조선정치행위의 논리를 크게 독립운동론, 참정권론, 자치론으로 구분한다. 참정권론과 자치론은 식민 통치에의 ‘참여’ 논리, 독립운동론은 이에 대한 ‘저항’의 논리이다. 기본적으로 ‘참여’란 기존체제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의 행위이다. 따라서 자치론은 본질적으로 독립운동의 유보 내지 포기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일부 논자들은 자치운동을 독립운동의 준비단계로 보기도 한다. 일제의 동화정책에 반대하며 정치적 결사를 통해 조선인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고 단결시켜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게 하자는 주장이 일견 그럴 듯 해 보이긴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조선의 자치운동은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일제에 협력한 운동이었다. 다른 식민지(인도나 아일랜드)의 자치운동은 저항세력이 전개했는데, 조선에서는 일제에 협력적인 세력이 주도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실제 자치운동은 일제 지배 하에서 일정한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심우섭을 비롯한 ‘동상 7인조’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조선에 자치를 허용해줄 것을 제안했다. 이 무렵 심우섭은 3・1운동의 여파로 나타난 일제의 통치방침의 변화란 물결을 타고 정치운동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가 자치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 1922년 7월 무렵이고,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이 발표된 것이 1924년 1월이니 심우섭 등의 자치운동은 아마도 그 시초가 아니었을까. 도쿄에서 돌아온 이들은 그해 11월 새로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이 청원서는 기존의 주장에서 상당히 후퇴하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는데 그치고, 조선의회 설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즉 일본 하라 수상의 내지연장주의에 따른 동화정책과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라는 구도 하에서 조선인의 정치활동을 위한 공간 허용만을 요청했다. 이들의 자치운동은 그 정도 선에서 끝났던 것이다.

심우섭은 매일신보사에 복귀해 논설부장으로 일하는 한편 계명구락부 기관지인 <계명>의 주간을 맡아 보았다. 그러다 1925년 동민회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자치운동과는 노선을 달리하던 참정권 운동에 투신한다. 일본의 동화주의를 적극 지지하는 참정권 운동 단체인 동민회는 ‘철저한 내선융화의 실현을 통한 아시아민족의 결합’을 내세운 단체였다. 당시 자치운동 측과 참정권 운동 측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맹렬히 비판하던 시기였다. 이른바 갈아타기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참정권론이든 자치론이든 기본적으로 일본에 협조하고 일본의 우위와 지배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다. 종국에는 이광수나 최린도 동화론자로 변절해 갔다는 사실을 볼때, 심우섭은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심우섭을 비롯한 동상 7인조가 도쿄에 건너갔을 때 유력 인사들과의 교섭을 부탁한 인물이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였다. 아베 미쓰이에는 정치기자로서 1915~1918년 경성일보 및 매일신보 사장을 지냈고, 1920년대에는 사이토 조선총독의 개인 정치고문 역할을 했다. 조선통치에 관련이 깊은 사람으로 연구자들 사이에선 ‘제국의 브로커’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이다. 심우섭이 자치운동을 위해 도쿄를 찾은 1919년 7월에 아베는 일본 국민신문 부사장을 맡고 있었다. 이때 그는 심우섭 일행에게 일본 정치인들을 비롯한 유력 인사들을 소개하고 자치운동을 위한 조언도 해 주었다.

일찍부터 조선인 ‘신지식층’에 관심이 많았던 아베는 1920년 5월 조선을 방문했다. 경성일보 사장을 그만두고 떠난 지 2년 만이었다. 새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비공식 정치고문 역할을 시작한 것이다. 아베는 사이토의 기밀비를 받고 조선인과 재일유학생의 동향이나 일본 정계의 상황을 사이토에게 보고했다. 아베에게는 정치기자 시절 구축한 정보망과 경성일보・매일신보 사장시절 맺었던 조선인 네트워크가 있었다.

약 2개월 동안 아베는 조선 각지를 돌며 실업가, 지식인, 청년지도자, 3・1운동 지도자 등 조선인 유력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가 경성에 도착하자 예전부터 알고 있던 조선인들이 매일 “천객만래(千客萬來)”해서 환영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차례로 성대한 환영회를 열어 아베를 맞이했다. 아베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며 깊은 교류를 나눴던 젊은 ‘신지식인층’이 ‘문화통치’의 기류 속에 조선어 신문을 창간하던 시기였다. 그들은 아베를 통해 총독부의 자금 원조와 언론통제 완화 등을 요청했다.

아베를 만나려 줄을 선 이들 가운데 심우섭도 있었다. 그들의 인연은 아베가 경성일보・매일신보 사장이던 시절 심우섭이 매일신보 기자였다는 정도인데, 쾌활하고 주색을 즐기는 심우섭의 캐릭터를 고려하면 좀 더 개인적인 친밀함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심우섭은 병석에서 일어난 직후였는데도 동생 심훈을 데리고 아베를 찾아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문사도 그만두고 도쿄에 건너가 시도했던 자치운동이 별 신통찮은 결과를 보인데다가 큰 병을 앓고 난 직후인지라 꽤 침잠해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매일신보에 복귀하는 걸로 봐서 취직자리를 부탁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심우섭과 아베의 친분은 후에도 쭉 이어졌고, 1936년 아베가 사망하자 심우섭은 그의 흉상을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흥미있는 연구가 있다. 사이토가 조선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어떤 조선인을 몇 차례나 만났는지를 그 횟수를 일일이 밝혀놓은 것이다. 그 가운데 1924년부터 1926년 말까지 사이토가 만난 조선인 제1위는 선우순으로 39회였다. 2위는 이진호(37회), 3위는 민영기(33회)였다. 그리고 다음 자리를 차지한 것이 심우섭인데 도합 31회를 만났다. 당시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를 지낸 박중양(20회)이나 신석린(28회)보다, 재계의 거물 한상룡(27회)보다 사이토 총독을 많이 만났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심우섭이 조선총독을 자주 만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 그리고 동민회 활동과도 관련 있으리란 점은 짐작할 수 있다. 또 아베 미쓰이에가 사이토 총독의 정치고문으로 활약하던 시기였으니 아베와 친분이 있던 심우섭이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서로 엇갈린 형제의 길

심우섭이 적극적 친일파의 길로 한걸음씩 내딛는 동안 동생은 식민지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좌절하고 분노했다.

1920년 말 심훈은 중국으로 떠났다. 일본 유학 대신 선택한 길이었다. 북경, 남경, 상해, 항주로 이어진 여정 속에서 걸출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를 쌓았다. 항주에서는 지강대학(之江大學)에 진학했다. 1923년 중국에서 돌아온 심훈은 영화와 문학 창작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다. 급진적 문예조직이던 ‘염군사’,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입한 것으로 봐선 유학시절 사회주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1924년엔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지만 1926년 철필구락부사건으로 해직되었다. 심훈은 시를 쓰고 소설을 썼다. 그 속에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저항을 담았다. 당시 심훈의 격정이 표출된 시가 「박군의 얼굴」이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朴君,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중략)
오냐 朴君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
너와 같이 모든 X를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心臟의 鼓動이 끊길 때까지

심훈은 세 친구, 박열 박순병 박헌영을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 직접적 계기는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출감하는 박헌영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저항적 실천의 자세를 갖춰 나갔다. 심훈의 대표시 「그날이 오면」(1930)은 그의 정치사회적 태도와 문학적 지향을 잘 드러낸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前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鐘路의 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頭蓋骨은 깨어져 散散 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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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오면’ 총독부 검열본. 독립을 향한 염원이 담긴 시라 하여 검열당국에 의해 삭제 조치를 당했다.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침략했다. 심훈의 문학세계에는 일제의 검열이 들이닥쳤다. 시집 「그날이 오면」 출간이 가로막혔다. 우회로를 찾아야했다. 1932년 심훈은 부모님이 계신 충남 당진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소설 <상록수>를 썼다. ‘국가’를 ‘고향’으로 변형시킨 우회전략으로 검열을 넘어 당대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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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경성방송국 방송실에서. 뒷줄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이 심우섭 제2방송과장

 

1936년 심훈이 세상을 떠났다. 심우섭의 삶은, 동생이 죽은 뒤 10년여 더 지속되었다. 일제 군국주의의 총구가 전 세계를 향하던 시기였다. 그 역시 여느 친일 지식인들처럼 일제가 일으킨 전쟁의 광기에 휩쓸려 들어갔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심우섭은 주로 경성방송국과 매일신보에서 일하며 각종 전쟁선전과 동원에 협력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시국순회강연반에 참여해 강연활동에 나섰고, 조선유도연합회와 조선임전보국단에도 가담했다. 결국 동생은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열정을 표출한 문학가로 이름을 남긴 반면, 형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되고 말았다.

<참고자료>
박찬승, 「일제하의 자치운동과 그 성격」(1989)
이나미, 「일제시기 조선 자치운동의 논리-독립운동론, 참정권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2006)
이형식, 「제국의 브로커 아베 미쓰이에와 문화통치」(2017)
박진영 교수 블로그 www.bookgrma.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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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7/10/23-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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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일시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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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7/10/2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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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발기인에 가담합니다

팩스로 내용을 보내드렸으니

참작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목, 2017/10/2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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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는 제11회 ‘임종국상’ 수상자로 조재곤 서강대 연구교수(왼쪽 사진)와 한상권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상임대표(오른쪽)를 선정했다고 23일 밝혔다.

학술 부문 수상자인 조재곤 교수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대통령 소속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조 교수는 저서 <전쟁과 인간 그리고 ‘평화’-러일전쟁과 한국사회>를 통해 피해자로서 한국인의 관점에서 러일전쟁의 역사상을 재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회 부문 수상자인 한상권 대표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등을 맡았다. 한 대표는 시민단체 대표로 활동하며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보급을 저지하고 국정교과서 도입을 무산시키는 데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종국 선생(1929∼1989)은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된 이후 ‘친일문학론’을 집필하는 등 친일문제 연구와 과거사 청산에 앞장선 인물이다.

기념사업회는 친일청산, 역사정의 실현, 민족사 정립이라는 임종국 선생의 뜻과 실천적 삶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개인과 단체를 학술·문화와 사회·언론 등 두개 부문에서 선정해 임종국상을 수여하고 있다. 2005년부터 매년 수상자를 선정했으나 2008년과 2009년도는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관련한 주관단체의 사정으로 시상이 잠시 중단됐다.

시상식은 11월10일 서울 중구 한국언론회관(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다.

정희완 기자 [email protected]

<2017-10-23> 경향신문

☞기사원문: 조재곤 교수·한상권 대표, 제11회 임종국상 수상자로 선정

※관련기사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제11회 ‘임종국상’ 수상자 선정

한겨레: ‘임종국상’ 조재곤·한상권 교수

☞연합뉴스: 제11회 임종국상 수상자에 조재곤·한상권씨

☞통일뉴스: 임종국기념사업회, 11회 임종국상에 조재곤.한상권 선정

목, 2017/10/2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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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저자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③·끝

2013년부터 <프레시안>에 연재됐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중 박정희 유신 체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단행본 9, 10, 11권이 발간됐다. 이번에 발간된 세 권은 1972년 10월 17일을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유신 쿠데타’와 관련 △유신을 왜 일으켰나(9권) △왜 유신 체제를 막지 못했나(10권) △유신의 뿌리, 일본 군국주의(11권) 등을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는 1945년 해방 후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민주화 흐름을 짚어보는 기획으로 해방과 분단을 다룬 1권,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을 다룬 2권, 이승만 독재와 이에 맞선 조봉암의 비극을 그린 3권, 4월 혁명을 다룬 4권에 이어 5권부터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탄생과 전개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번에 유신 체제를 해부하는 세 권의 단행본에 이어 향후 6월 항쟁에 이르는 과정도 다뤄질 예정이다.

<프레시안>은 촛불 시위 1주년이자 11월 14일 박정희 탄생 100년을 맞아 저자인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를 만나 촛불 시위의 의의를 되새김과 동시에 유신 체제와 한국의 앞날을 조망하는 인터뷰를 마련했다.

촛불 시위가 없었다면 박근혜 정부 하에서 성대한 박정희 탄생 100주년 행사를 지켜봤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서 교수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박정희 신드롬’이 만연해있다며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인터뷰는 지난 12일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프레시안>은 이번 인터뷰를 세 편에 나누어 소개한다. 마지막 편으로 “박정희가 경제는 살렸다”는 주장의 맹점을 짚어봤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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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유신’이라는 명칭은 메이지유신(1868년)에서 따온 것으로 흔히 이해된다. 그러나 1936년 2·26쿠데타를 일으킨 황도파 군인 등 군국주의자들이 쿠데타 등으로 강력히 요구한 쇼와 유신이 그 원형이라고 지적하셨다. (2·26쿠데타는 일본의 청년 장교들이 조선 총독을 지내기도 한 사이토 마코토를 비롯해 주요 인사를 살해하고 강력한 군부 통치를 요구했던 사건이었다. 토론과 협상에 의한 정치를 부정하고 강력한 군부 통치를 추구한 것이다.편집자) 박정희가 대구사범에서는 열등생이었다가 만주 군관학교 이후 우등생이 됐다는 대목도 흥미로웠다. 박정희의 국가 운영 방식이 일본 사관학교의 군대식 교육과 만주국 국가 운영에 그 원형이 있다고 했는데, 결국 일본 식민 시대의 국가 운영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서중석 : 박정희가 메이지 유신을 중시했다는 것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회상을 통해 나온 말이다. 기시는 만주 침략의 핵심 인물이었고 연합국에 의해 A급 전범으로 지목됐는데도 두 번이나 일본 수상을 지내면서 박정희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줬다. 그의 글에는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메이지 유신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게 사실이라면 박정희가 5.16 쿠데타 직후에 쓴 글들, 특히 <우리민족의 나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 등의 책에 메이지 유신 지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한 문장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언급이 전혀 없다. 특히 <국가와 혁명과 나> 에서는 메이지 유신을 한 항목으로 다루고는 있는데도 이런 말이 한마디도 안 나온다. 추측건대 메이지 유신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것은 박정희가 기시에게 외교적으로 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박정희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는 1936년 젊은 군인들이 일으킨 2.26 사건에서 큰 감명과 감동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무엇보다도 쇼와 유신과 박정희 유신 체제가 닮은 점이 많다. 기성 민간 정치인에 대한 불신, 강력한 통치, 군대식의 능률적 사고 등이 그렇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박정희는 쇼와 유신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에 재학중일 때, 일본 육사에 있었을 때, 또 만주군 군인이었을 때 군인 사회를 풍미했던 것이 쇼와 유신이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박정희가 이른바 국가개조 운동으로 재건 국민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는데 그때 <조선일보>에는 재건 국민 운동은 일제 말기 군국주의 일본의 전시 동원 국민 운동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재건 체조는 일제 말기의 라디오 체조를, 신생활복은 국민복을, 국민가요는 말 그대로 일제 말기의 국민가요를 연상시킨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이 쓴 글에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 등 국민 개조 운동, 국민 교육 헌장이 쇼와 유신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 교육 헌장은 메이지 교육칙어, 황국신민서사와 연관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국기에 대한 맹세와 애국조회, 국기 하강식 등 국가주의 맹세의 의례와 교련과 체육의 모의 수류탄 던지기 군사교육, 충효교육, 라디오 체조와 내 집 앞 쓸기 운동, 국민가요 부르기, 퇴폐풍조 일소와 미풍양속 고취, 반상회, 고도 국방 체제를 목표로 한 총력 안보 체제, 국가 통제형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이 일제가 식민지 조선과 만주국에서 실행했던 국가주의를 본 떠 되살린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유신 체제는 일본 극우가 꿈꿨던 쇼와 유신의 한국형 변조라는 지적인데 대체로 적절한 평가라고 본다.

유신 체제는 쇼와 유신의 군국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쇼와 유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만주 인맥이라고 평가되는데,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 중심 인물로 체포됐을 때 살아난 것도 국내 만주 인맥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박정희 정권과 경제적 관계를 포함해서 각별한 관계를 가졌던 자들이 아베의 외조부 기시를 비롯한 만주 인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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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 10, 11권 (서중석 지음, 오월의 봄 펴냄, 2017)

프레시안 : 그런데 대다수 국민은 박정희의 경제 개발 공로는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박정희의 경제 개발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한국인 중 상당수가 1960~70년대의 경제발전을 박정희의 공으로 이해하고 있다. ‘개발 독재’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붙어있던데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특히 유신체제가 경제 발전에 효율적이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그래서 이 점을 특별히 유의해 검토하고 있다.

<현대사 이야기> 8권 전체가 박정희 집권기의 경제 발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담았고, 9권에서 유신 쿠데타를 다룰 때도 이 문제를 포함했다. 앞으로 유신 붕괴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다루려고 하는데, 경제가 유신 붕괴에 얼마나 지대한 역할을 미쳤는가를 살펴볼 예정이다.

일부 진보 세력의 ‘개발 독재’ 주장은 심각한 허점을 안고 있다. 우선 3공화국과 유신체제가 삼척동자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백히 다른 정치체제인데도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박정희 유신 체제의 경제 정책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이 중화학 공업인데, 1970년대에 한국에 중화학 공업 시설들이 많이 세워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거나 간과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유신체제 붕괴에서 경제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대만도 1972년 10대 건설 계획을 세우며 1970년대 내내 중화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우리의 경우 1972년 유신 체제 이전에 중화학 공업은 이미 포항제철이나 비료공장 등 중요한 시설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1972년에서 76년까지 진행된 제3차 경제개발계획도 1971년에 구체적 계획이 다 세워졌다. 즉 이 개발 계획은 유신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중화학 공업화를 1973년 1월에 선언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 평가가 아니다.

박정희는 1971년 7월 1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중화학 공업을 선언한다. 그는 앞으로 중화학 공업 시대의 막을 올리고 한강 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유신과 중화학 공업화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박정희 스스로도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유신 체제 같은 강권 체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개발 독재론자나 중화학 공업 건설과 관련한 글 등에서 보면 1973년 정부의 각종 특혜 정책으로 중화학 공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고 하는데, 이것도 사실과 거리가 있다. 1974~75년 중화학 공업에 대한 투자는 활성화되지 못했다. 이는 두 해 다 경제성장이 둔화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중화학 공업을 시작하려면 엄청난 자본이 투자돼야 하는데 당시까지 우리나라의 재벌들은 그 정도의 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한국 경제에 기적이 출현했다.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74년부터 ‘중동 건설 특수’가 나타났다. 석유 폭등으로 떼돈을 번 산유국들이 대규모 건설공사에 착수한 것이다. 이것은 다 알다시피 박정희와도, 유신체제와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중동특수에 맞춰 한국은 1975년부터 몇 십억 달러씩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현대를 포함해 몸집이 엄청나게 커진 업체들이 있었고, 1975년을 전후로 해서 부동산 투자와 투기가 벌어졌다.

여기서도 건설 업체들이 상당한 부를 가져갈 수 있었다. 즉 중화학 공업화의 발판은 유신 체제가 아니라 중동 건설 특수에 따른 막대한 외화 수입, 그리고 부동산 투자 투기에 따른 대기업의 막대한 이윤 창출이었다.

이런 요소들이 작용하면서 국가가 보증해주는 차관을 가지고 중화학공업에 투자해서 누가 경쟁에서 선두를 달리느냐가 당시 재벌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대재벌로 성장하는데 중화학 공업처럼 좋은 게 없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중화학 공업에 투자했다. 그러다 보니 엄청난 과다 중복 투자 현상이 일어났다.

유신 체제 붕괴에는 경제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1978년 12.12 선거에서 여당이 심각한 패배를 당했는데 당시 공화당과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에게 경제통인 김정렴 비서실장, 남덕우 부총리 등을 포함해 경제 각료를 교체하라고 요구했다. 경제 문제가 심각해져서 선거에 패배했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가 나온 것이다.

대통령은 처음에 말을 안 들었지만, 김정렴 회고록에 따르면 계속 이러한 요구가 나왔고 결국 김정렴은 9년여 만에 비서실장에서 물러났다. 남덕우 등 경제 각료를 다 바꿨다.

1979년 YH 여성 노동자 신민당 농성 사건과 10월 16일 부산대 학생들이 거리에 나오면서 시작된 부마항쟁 역시 유신 체제의 경제 정책이 얼마나 문제가 있었고 이에 따라 유신 체제가 경제 파탄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 유신의 심장을 쏘겠다고 한 것도 부마항쟁 현장에 다녀오면서부터였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 회고록에는 김재규가 경제 문제에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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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정권은 군사 작전을 하듯이 밀어붙여 수출을 늘렸다. 그 밑바탕에는 노동자들을 말 그대로 쥐어짠 병영 같은 공장이 있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은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YH 여성 노동자들. YH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은 유신 체제의 몰락을 앞당겼다. ⓒ연합뉴스

유신체제에서는 특히 재벌 중심의 팽창 정책이 주조를 이뤘는데, 유신 체제를 지키기 위해 성장 경제를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화학 공업 투자가 일어난 이유도 과도한 성장 위주 정책 때문이었다. 결국 박정희가 1979년 1차 조정을 했지만 이어 정권을 차지한 전두환이 두 차례에 걸쳐서 대대적으로 조정을 했어야 할 정도였다. 1979, 80년에는 중화학 공장 가동률이 40~60%에 머물고 있었다.

박정희의 고도성장정책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피부로 느끼게 했고 너무나도 지독한 투기 광풍에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갔다. 1978년 한 해에 지가가 48%가 올랐다. 부마항쟁 때 낮에는 학생들이 시위를 이끌었지만 밤에는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샐러리맨도 있었지만, 가지지 못한 자, 당하고 사는 사람들, 소외된 자, 실업자, 저임금 노동자 등 20대 안팎이 시위 대열에 대거 합류했고, 세금 폭탄으로 불만이 컸던 상인들도 가세했다. 김재규는 이를 민란으로 규정했다.

물론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해에 중동 노동자 송금액이 11억 달러를 넘어서 기록적이었고, 현대의 총 매출액이 36억 달러로, 미국 종합경제지인 <포춘>이 집계하는 기업 총 매출액 순위에서 세계 98위에 올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1978년에는 노풍(통일벼 계열 신품종)벼 피해도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작물 시험장 책임자인 박노풍의 이름을 따서 노풍으로 불린 새 볍씨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새로운 볍씨가 나왔으면 실험 단계를 충분히 거쳐야 하는데 박정희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빨리, 많은 양을 수확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장려했다. 박정희 정권은 12·12선거 나흘전인 12월 8일 이듬해부터는 노풍을 재배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이미 돌아선 농민들의 마음을 붙잡기는 역부족이었다. 농민들은 박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향했다.

1978년 후반기부터 나빠진 경제는 1979년에 한층 악화되었고, 1980년 경제성장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5.6%(전두환 회고록 등), -5.2% 등으로 나온다. 남한이 1953년 휴전협정 이후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일각에서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것은 잘못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박정희가 얼마나 경제를 잘못 운영하고 있었는지가 막 드러나고 있었던 시점이었는데 김재규가 조급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박정희 유신 체제가 경제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지를 미처 깨닫게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한미 동맹과 촛불 민심

프레시안 : <현대사 이야기>에는 유신 선포 하루 전 미국 대사관에 관련 사실을 통보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한국에서 미국이 민주주의 수호자라는 인식은 1980년 광주항쟁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바뀐다. 하지만 1960년 4월 혁명이나 1987년 6월 항쟁 때는 미국이 강경 진압을 막았다는(그리하여 민주화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한미 동맹을 절대시하는 측과 자율성을 늘려야 한다는 측이 대립하고 있다. 촛불 민심을 받들어 자주적 외교를 하라는 요구도 적지 않다. 하지만 북핵 위협이 커지면서 남한 정부의 운신 공간이 좁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내 민주화가 대외 관계의 민주화로 나아갈 길은 없을까

서중석 : 미국은 자신의 국익 범위 내에서 한국의 민주화와 관련한 역할을 했다. 기본적으로는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4월 혁명 때만 해도 미국은 4월 18일까지 3.15 부정선거를 용인하고 이승만-이기붕을 인정하는 가운데 한국 문제를 바라봤다. 그런데 4.19 시위를 보면서 달라졌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한반도에 대한 새로운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때가 됐다고 본다.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한반도 문제와 동북아 문제를 풀어가기가 어렵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한말에도 있었고, 그러면서 중립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한반도의 중요성은 해방후 미·소 점령 아래서, 특히 좌우 합작 세력에 의해 강조됐다. 친미파로 미 군정 입법의원 의장이었던 김규식은 ‘친미 반소’나 ‘반미 친소’는 모두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그건 자주적 입장을 망각하고 미·소 양국의 조선에 대한 진정한 협조를 방해하는 행위라고 질타했다.

미 군정에서 민정장관을 지낸 안재홍도 미국과 소련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중심을 바로잡고 ‘중앙당’으로서의 길을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길만이 통일 독립을 보장하고 국익을 최대화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이 친미파임에도 왜 이런 주장을 했는지, 이들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울리고 있는 때가 지금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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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 대해 새로운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990년을 전후로 전 세계적으로 냉전이 와해되는 가운데.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한반도가 여기서 벗어나려면 전략적 사고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김규식과 안재홍, 여운형 등이 활동할 때만 해도 미·소 두 나라가 가장 중요했다. 그렇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한국은 4강 시대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됐다. 21세기 들어오면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세계 4강으로 부상했는데, 이 4강은 모두 한국을 둘러싸고 있다. 한반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4강시대를 맞게 되었다.

1990년 전후로 냉전이 와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 1992년 중국과 수교한 이후 경제 및 문화 관계가 강화되면서 굉장히 긴밀해졌다. 중국은 어차피 우리와 이웃하면서 여러 측면에서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국가였는데, 이제는 경제적으로 한국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로 부상했다.

한국 경제의 돌파구로서 남북 관계라든지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진출해 유라시아 시대를 여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한반도가 중·러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북핵 해결도 4강과 머리를 맞대야 한다. 전처럼 한쪽에 따라다니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일본은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고, 우경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전쟁국 가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우리는 중국과 협력해 대응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미국은 이러한 일본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일본을 중·러에 대한 대항마로 이용하기 위해서다. 미국은 이런 차원에서 한·일 군사관계도 권고하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는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는 것도 불사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길만이 우리의 살길이며 미국에 대해 할 말을 해야 한다.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찾아온 4강 시대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 4강에 대해 자주성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김규식이나 여운형, 안재홍 등이 친미친소를 중요시했던 것은 두 나라로부터 강력한 지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친미친소만이 두 나라로부터 주체성 자주성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두 나라가 경쟁적으로 한반도를 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이 점은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에서 아주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때를 전후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태도가 싹 달라졌다. 중국은 1992년 한국과 수교 이후 북한과 관계가 아주 심하게 틀어졌는데 이 때 북한에 대한 원조를 강화하고 김정일이 8년 만에 중국을 방문해 최상의 환영을 받고 장쩌민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해 7월 김정일은 평양에서 푸틴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더 놀라운 것은 그해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김정일과 포옹을 하고서는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가능성을 속삭였다는 점이다. 미국 못지 않게 북에 적대적이었던 일본은 그해에 갑자기 북한에 대한 식량 원조를 크게 늘리고 2002년 고이즈미 수상의 평양 방문을 진행했다.

이 나라들이 김정일이 좋아서 그랬을까? 남북 협력시대가 열릴 때 북한에 일정한 관계를 갖는 것이 동아시아 또는 세계 정책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에 부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동북아 정세는 또다시 경색됐다.

2000년대에 사는 우리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안목으로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대처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사드 배치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아무런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급작스럽게 배치를 결정했다. 더군다나 탄핵을 받은 상황에서 이른바 사드 ‘알박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현 문재인 정부가 전쟁 반대를 명확히 선언하고 그에 따르는 노력을 하는 것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과연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비판도 받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4강 시대에 얼마나 자주성,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새로운 관계를 열어가는 데 관건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대해 명료한 인식과 확고한 실천이 요구된다. (끝)

<2017-10-26>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 신화’는 처음부터 없었다

목, 2017/10/2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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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부산 서구가 개청 60주년을 맞아 발간한 홍보 책자에 일본강점기 때 친일행위에 앞장선 인사가 포함돼 광복회가 반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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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서구가 발간한 홍보 책자


서구는 올해 2월 ‘삶과 낭만이 머무는 곳, 내 사랑 서구를 되새기며’라는 제목의 932페이지짜리 홍보 책자 1천 권을 발간해 관공서와 기관, 학교 등지에 배포했다.

서구 개청 60주년을 기념해 만든 홍보 책자 중 ‘서구를 빛낸 인물’ 코너에 이름을 올린 김길창 목사를 광복회가 뒤늦게 발견해 삭제를 요구하고 있다.

1892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김 목사는 서구 부용동 항서교회에서 33년간 근속한 개신교도다.

하지만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2009년 친일·반민족 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명단 등에 친일 종교인으로 등재된 인물이기도 하다.

책자 집필을 맡은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는 김 목사에 대해 친일 행적과 함께 ‘교육 없이는 전도도 없고, 애국도 없으며, 소망도 없다’는 교육 철학, 해방 전후 학교 설립 활동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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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서구 홍보 책자 중 김길창 목사의 친일행위 서술 부분 [빨간색 선]

한국민족문화연구소는 김 목사가 남성초등학교, 남성여고, 대동중학교, 광성공업고등학교(현 경성전자고), 대동고등학교, 훈성여고(현 계성여고), 거제중학교(현 거성중학교), 경성대를 설립하는 등 부산 사립교육의 초석을 다진 공로자였다고 소개했다.

김 목사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신사 참배를 독려하는 등 일제의 황민화·민족말살 정책에 동조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체포됐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는 두 문장으로 언급했다.

김 목사 외에 정치인 김영삼 전 대통령·박기출 씨, 6.25 전쟁 때 고아를 돌본 알로이시오 신부, 이태석 신부, 장기려 박사 등이 서구를 빛낸 인물로 소개됐다.

부산 광복회 관계자는 “일본강점기에 학생과 교인 등을 강제로 일본 신사에 데려가 참배한 대표적인 친일 인사를 서구를 빛낸 인물로 선정한 저의를 이해할 수 없다”며 “서구에 경위와 함께 인물 삭제를 요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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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서구가 발간한 홍보 책자 중 친일파 김길창이 들어간 목차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관계자는 “집필 과정에서 서구가 교육 관련 인사도 포함됐으면 좋겠다고 해 회의 끝에 김 목사를 추가했다”며 “친일행위를 함께 서술하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구 관계자는 “집필진에 김길창 목사를 꼭 포함해달라고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다만 김 목사가 친일 논란이 있지만, 교육 업적도 있어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2017-10-25> 연합뉴스

☞기사원문: 부산 ‘서구 빛낸 인물’에 친일인사 등재…광복회 반발

※관련기사

부산일보: 부산 ‘서구 빛낸 인물’에 친일인사 김길창 목사 등재…광복회 삭제 요구

☞일간리더스경제: 부산 광복회“부산 서구 빛낸 인물에 친일 인사가 왜 있나?”

목, 2017/10/2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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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대결에서 미국의 운명을 보여주는 3가지 장면>

우리는 북한의 막강한 힘에 대하여 다는 모른다. 그러나 북한의 공세로 벌어지는 미국내 혼란상을 통해 북한의 힘이 과거 냉전시기 소련도 능가하겠다는 것을 역추론하게 된다. 이 글에서 북미대결 과정에 미국내에서 벌어지는 주요 현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최악의 미치광이로 평가받으며 좌충우돌의 전형을 보여주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지금 미국의 최고통수권자, 대통령 트럼프는 미국 내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미국 내 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지는가 하면 미국의 어떤 잡지는 트럼프 탄핵의 결정적 증거를 제공하면 거액의 현상금을 주겠다는 광고를 냈다고 한다. 지금 미국 내에서 들려오는 민심의 목소리는 ‘북미대결 국면에서 제일 위험한 것은 트럼프다’ ‘즉흥적인 정치성향을 보이는 트럼프는 망설임없이 북미핵대결의 도화선을 당길 만한 인물로 이런 인물이 대통령으로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위험요인이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위기에 가장 비이성적인 대통령이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는 북한과 햄버거 대화가 가능하다며 그 무슨 대화 시늉을 하였으나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북한의 핵위협이 미국 안보의 제1순위다라며 북한에 대한 흉폭한 발언을 거리낌없이 해제껴 왔다. 특히 북한이 7~8월에 걸쳐 미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실전능력을 화성 12, 14형 시험발사로 확증하자 초강력 대북한 제재, 화염과 분노,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모욕하고 북한 자체를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국제법에도 어긋나는 폭언들을 일삼는 최악의 행보를 보였다. 그런데 그런 트럼프가 바로 몇 주 전과, 최근에도 북한과 대화가 가능하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한마디로 일관성 없는 갈기자 행보의 전형이다. 혹자는 트럼프의 이런 발언들이 즉흥적이라고도 하고 소위 미치광이 행동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고도의 정치 행위라고도 한다.

하지만 미국의 최고통수권자의 행태가 단순한 개인적 특성이나 정치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누가 보아도 위험천만해 보이며 일관성 없는 트럼프의 행동 자체는 미국의 대북한 억제력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 전역을 핵타격할 수 있는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미국이 방어해 낼 수 없다는 것이 현 정국의 객관적 정황이다.

트럼프는 이런 정국에서 소위 미국의 힘의 우위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온갖 폭언과 회유 발언을 내놓고 있다. 미국의 중앙정보국장을 맡았던 자가 트럼프에게 북한에 대한 정보를 보고하려고 매일 백악관에 갔으며 그 때문에 길에서 보낸 시간이 아깝다고 했던 기사로 보건대, 트럼프가 북한의 핵능력, 북미평화협정과 주한미군철수만이 대화와 협상을 보장한다는 것등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현실과 욕망의 괴리, 그것이 소위 냉탕과 온탕을 오고가는 발언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노와 좌절감, 응징의지와 무력감, 최강이라고 생각하는 자만과 북한에게서 받는 공포감, 이러저러한 것들이 뒤죽박죽 되어 뒤죽박죽 그 자체의 행보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미국의 위신을 떨구고 있으며 침몰하는 제국이라는 미국의 실체를 입증해주는 웅변으로 된다.

2. 미국 내 내분의 격화

북미대결이 치열해지면서 미국 내에서 두 가지 신호가 동시에 나오고 있다. 미 군부는 꾸준히 항공모함과 핵잠수함, 전략폭격기 등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를 연속적으로 단행하고 있으며 키리졸브와 항모강습훈련을 비롯한 한미연합훈련의 강도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영국이 한반도 전쟁을 대비하기 위하여 항공모함의 진수를 앞당길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이 중동의 아프간,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에게 정보를 제공해주는 정보전의 첨병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을 상기할 때, 이런 동향은 한반도 전쟁 임박 징후로도 읽힌다.

동시에 군사는 외교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는 미국무부의 지속적인 발언, 군사 옵션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사용할 수 있는 군사옵션은 없다는 발언도 나오고 있다. 나아가 키신저는 주한미군철수 카드를 외교협상용으로 꺼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미국의 본심인지 많은 사람들이 혼동을 느끼고 있고 나아가 다양한 해석과 주장을 내놓고 있다. 강온양면 전략이다, 트럼프 행정부 내 실제 갈등을 반영한 것이다는 주장들이 그것이다.

원래 미국은 전통적으로 강온양면 전략을 사용해 왔다. 과거 이라크에서도 전쟁을 준비하면서 한 측에서는 후세인에게 미국이 유화적으로 나올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기도 하였다. 대화 공세를 통해서 상대의 틈을 노리고 틈이 보이면 전격적으로 무력을 동원하는 것이 전통적인 제국주의 군사외교전략이다.

북한에 대해서도 미국은 마찬가지의 행동을 보여 왔다. 대화, 대북전쟁 군사적 준비, 대북제재와 압박등은 양면전략 안에 있는 여러 형태들이다. 문제는 이런 미국의 양면전략이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에 발생한다.

어느 면에서도 상대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미국은 어떤 상황에 부딪히겠는가. 강온전략을 각각 맡고 있는 서로를 향해 불만이 고조되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최근에 트럼프가 틸러슨을 질타하는 발언을 한 것이나, 미국 내에서 트럼프에 대한 탄핵론까지 나오고 있는 것등이 이런 현상이라고 할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대북한정책에 대한 노선이 여러개가 나오는 것에 대해 이것이 강온양면 전략인가, 내분인가 분석들을 하지만, 그것은 결국 북한이 결정한다. 즉 북한이 강하면 트럼프정부의 강온전략은 내분의 길로, 자체 대결의 심화로 가게 된다. 만약 북한이 약하다면 그들의 각기 다른 목소리는 조화로운 협동작전으로 될 것이다.

지금 미국 내 엇갈린 모습들에 대한 세계적 차원의 대체적인 시각은 미국에서 각 정책 담당자, 전문가들 사이에 대립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화 추진파가 주류인가 전쟁 추진파가 주류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이도저도 북한에게 밀리면서 서로 아우성을 지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겠다.

3. 미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는 핵전쟁위기

미국이 대북한압박과 전쟁정책을 지속할 경우, 북미핵전쟁은 필연적이다. 미국도 이를 잘 알고 있고, 특히 미국민들은 이를 절감하고 있다. 미국인들의 60~70%가 북미간에 핵전쟁이 발발할 것을 극히 우려하고 있으며, 미국내에서는 30여년만에 핵공격 대비 대피 훈련이 발동되기 시작하였다.

북한이 직접적인 포위 타격을 공언하였던 괌, 그리고 북한의 핵타격의 일차사정권에 들어가는 하와이에서는 미국민들이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안보 위기를 느끼고 있다. 얼마 전 하와이에 있는 대학생들에게 핵 공격에 대비한 대피요령을 일제히 전파시켰는가 하면 괌에서는 선거권도 없는 주민들이 미국의 핵전쟁 볼모가 되는 것이 억울하다며 독립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미국의 핵공격에 맞서 미 본토에 핵의 불바다를 안겨주겠다는 북한의 의지에 미국민들은 전율하고 있으며, 트럼프의 무능으로 인하여 실제 핵전쟁이 발발한 경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가고 있다.

얼마 전 트럼프는 미 서부에 배치된 지상발사 미사일 방어시스템으로 북한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97%의 확률로 요격할 수 있다면서 무슨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떠벌리고 미국민들 속에서 퍼지고 있는 불안심리를 막아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트럼프의 발언이 나오자마자 미국의 각계 전문가들이 나서서 북한이 수십 개의 핵탄도미사일을 동시 발사하면 이론적인 요격확률이 50%이하로 떨어진다, 트럼프의 발언이 오히려 북한의 강경대응을 불러올 수 있다며 우려하는 발언들은 쏟아냈다.

강대한 미국의 부활, 트럼프의 선거공약이자 미치광이 행보의 기본 바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식견있는 미국인들은 북한의 핵능력 앞에 이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알고 있다. 강대한 미국, 이것은 지금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며 미국민들은 냉전 시대에도 없었던 전대 미문의 핵 위협 앞에 자신들이 내맡겨져 있음에 불안과 공포를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성을 상실한 최고통수권자의 행동과 내부세력들의 실질직인 균열, 그리고 국민들의 불안과 위기의식의 고조, 이것이 지금 북미대결 과정에 미국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다. 고대 로마를 비롯한 제국의 붕괴에서 보여졌던 주요 장면들이 지금 미국 내에서 영화와 같이 재현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였는가. 지금 미국이 보여준 이런 모습들은 진정 몰락의 전조로 읽히지 않을 수가 없다. 끝.

금, 2017/10/27-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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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사진은 중국때놈들하고는 하무 상관도  없따.

그러나, 미국양키들은 상무 하관도 이따.

그러면서도, 일본쪽발들은  창원합포만만  타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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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7/10/2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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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적폐 청산은 친일부터 뿌리 뽑아야!”

이재명 성남 시장이 최근 문재인 정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적폐 청산’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잘하고 있는데, 저항이 매우 클 것”이라면서 “적폐 청산을 온전히 해내기 위해서는 촛불 국민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경각심을 일깨웠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27일 오후 고양시 소재 고양문예회관 공연장에서 ‘식민지 역사박물관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주최로 ‘촛불 1년 다시 부르는 항일의 노래’라는 주제로 열린 토크쇼에 출연해서 이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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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성남시장(좌측부터)과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실장, 노기환 MC가 27일 경기도 고양시 문예회관 공연장에서 토크쇼를 진행하고 있다.

 

이재명 시장은 이날 받은 질문 가운데 세 번째 주제인 ‘우리 시대 적폐 청산의 과제’에 대해 사회자가 “촛불시민이 독일 에버튼 인권상 받았다. 전 세계를 통틀어서 유래가 없는 한 국가의 시민이 이제 인권상을 받은 건데 그만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인권이 크다는 생각이다. 시장님 그동안에 1년을 어떻게 평가하시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재명 시장은 이에 대해 “촛불을 든 우리 전사들은 이제 일상으로 돌아갔고, 또 문재인 정부 민주정부는 수립돼서 정권 교체를 이뤘다. 아마 인류 역사상. 대한민국 역사는 말할 필요 없고,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렇게 깔끔하게 무결의. 아무런 피해도 없는 혁명적 결과를 만들어 낸 건 아마 처음 아닐까 싶다”면서 “저는 우리 촛불 혁명의 이 결과 정권교체를 했지만 이건 하나의 수단이고, 초입이고… 진짜 능력은 적폐세력 청산. 이것도 사실은 초입에 불과하고, 다음 단계 공정한 국가. 미래 희망이 있는 나라 만드는 게 마지막 과제일 것”이라고 시민들이 일구어낸 촛불혁명에 대해 정리했다.

이재명 시장은 이어 “만약 거기까지 우리가 만들어낸다면 프랑스 혁명이 버금갈 만한. 인류 역사에 기록될 엄청난 일이 국민들이 해냈다고 생각한다. 이게 시작인 거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겨우 과거에 잘못된 구조. 이 적폐를 덮고 있던 껍데기 하나를 제거하는 이 적폐를 제거하고 또 새로운 질서. 공정한 나라 만들어 내고. 그 속에서 우리 국민들이 ‘아 내가 진짜 대한민국 국민인 게 자랑스럽다’. ‘애 많이 나야지’. ‘우리 아들 딸들 더 나은 세상에서 더 잘 살 수 있게 만들어야지’. 그런데 그게 만만치 않은 거다”라고 국민들이 원하는 세상을 그려봤다.

이재명 시장은 이어 “현재나 과거의 이 불합리한 구조로 부당하게 작은 노력을 하고 큰 이익을 챙기는 집단들이 있다. 이제 소수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걸 바꾸려면 그들이 저항하지 않겠나? 뺏겨야 되니까. 그거를 뺏지 않고는 뺏어서 공정하게 만들지 않고는 사실 비전이 없는 건데. 희망이 없는 건데. 엄청난 저항이 기다릴 거다”라고 진단해 사실상 적폐 청산의 길은 거대한 저항과 진통이 있음을 예고했다.

이재명 시장은 그러면서도 “적폐 청산은 오히려 쉽다. 성역 없이 조사하고 책임을 물으면 되는 건데 기존의 기득권 구조를 바꿔서 공정한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정말 엄청난 저항이 있을 거다. 그거는 의지와 국민의 힘으로 합리적으로 권력을 통해 할 수밖에 없는데 그거는 보장돼 있지 않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촛불을 들고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이 권력을 이용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에 더 신경 써야 된다고 생각한다”면서 “대개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측면이 많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불안하고 안타깝다”고 촛불 혁명 이후의 세상을 우려했다.

이재명 시장은 이날 함께 출연한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실장에게 “적폐청산에 무엇보다 시민들의 힘이 중요할 텐데… 실장님 평상시에 역사강의 하면서 시민들 많이 만나시잖는가? 만나시는 시민들 생각이 좀 어떠하더냐?”고 물었다.

박한용 실장은 “저는 그래도 희망을 좀 가지고 있다. 갖고 있는 게 과거에는 우리가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그런게 있었다. 이번에는 시민들이 나와 주셔서 흩어지지 않고 있는 분들도 많다. 실제로 그분들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간단하게 한마디 한다.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겠다. 죽 써서 개주지 말자는 거다. 이 촛불을. 다시 깨어있는 시민들이 조직된 힘으로 남아야 되겠다. 419혁명을 516으로 박정희가 가져가고 518민주항쟁 했더니 전두환이가 탱크로 가져가고 민주항쟁 했더니 노태우가 619 선언을 통해 가져갔더라. 저는 한국에서 일반적인 민주주의 과제들은 더 이상 후퇴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아까 우리 이재명 시장님 말씀처럼 혁명은 파괴가 아니고 건설이다. 미래에 대한 비전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이 전망이 서 있지 않아서 답답한 부분이 있다”고 박한용 실장이 파악한 촛불민심을 전했다.

이재명 시장은 이에 대해 “대개 끝났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끝났다고 생각하면 느슨해지고 자기중심적으로 바뀌고 그렇게 된다. 지금은 정말로 문재인 정부가 적폐 청산하고 지금 현재 할 수 있는 공정한 나라 만드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고, 국민들로부터 성공했다고 평가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과거로 되돌아간다. 이번에 과거로 되돌아가면 다시는 성공하기 어려울 거다. 그래서 반드시 성공해야 되고 거기에 모두가 힘을 합해야 되고, 작은 차이들은 이겨내야 된다”면서 “그리고 민주정부 개혁정부가 이어지고 그렇게 되면 체제가 좀 안정될 수 있겠다. 지금도 여전히 매우 엄혹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 된다”고 경각심을 일깨웠다.

이날 사회를 맡은 노기환 MC는 다시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적폐들이 있겠지만 또 현직 시장님이시니까 지방자치 부문에서는 적폐들이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재명 시장은 이에 대해 “적폐 때문에 오늘도 제가 발목 잡히고 있는 중인데 모든 영역에 있다.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경제 영역에도 있고, 지방에도 있고 많다. 적폐라고 하는 게 별 거겠는가? 예를 들면 국민을 배재하는 사람들이 국민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그 대리권을 남용하는 형태. 대표적인 적폐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을 기본적으로 부인하는 거다”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한, 권력의 원래 귀속이 어디냐? 그 생각을 하면 국민들의 뜻에 반하는 또는 시민들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없을 텐데. 과감하게 내 권력이니까 내 마음대로 이렇게 하는 것도 엄청난 적폐 중에 하나다”라고 설명했다.

이재명 시장은 특히 “중앙정권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 아닌? 이번 국정감사 과정에서도 뭘 한 게 있다고 ‘신적폐’ 운운하고. 또 예를 들면 과거에 적폐청산에 대해서 잘못하면 처벌하자는 게 당연한 거지. 그걸 가지고 ‘정치보복 아니냐’고 얘기하는데 도둑놈 잡는 게 보복인가? 도둑놈은 때려잡아야지. 그것도 도둑놈 때려잡는 걸 ‘야 이거 보복’이라고 얘기하니까 일부가 동의하는 게 있다. 동네 스피커로 떠들고. 이런 것도 역시 남아 있는 적폐들이다. 상식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작금에 일부 야당에서 제기하는 ‘정치보복론’을 합창하는 세력에 대해서도 ‘적폐’로 규정했다.

이재명 시장은 이어 “답답한 게 도둑이 이건 보복이다. 얘기하는데 그걸 실제로 믿는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잖은가?”라는 질문엔 “대개 도둑들이 공범들이다. 오해를 한 건 있다. 친인척. 전폐청산 특히 역사문제 적폐청산은 우리 민족문제연구소가 가장 앞장서고 있지 않나? 역사 부분 적폐에 대해서 실장님이 조금 집어 주시라”고 마이크를 박한용 실장에게 넘겼다.

박한용 실장은 이에 대해 “상징적일 수 있다. 우리가 미 군정 시기에 대한민국 국군을 만들 때 군사영어 학교를 먼저 세웠다. 이때 110명이 배출되니까 108명이 일본군 또는 만주족 장교 출신이더라. 광복군은 딱 두 명밖에 없다. 대한민국 군번 1번이 친일파다. 경찰은 경위 이상이 82%가 친일 순사 출신이다. 저는 이미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고 본다. 그들이 이승만 앉혀 놓고 이 대한민국을 호작질 한 거다. 함께 해 먹으면 한 통속 공범들이다.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최순실 사건이다.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일제시대 경찰이었다. 박근혜 아버지 박정희는 일제 때 만주군 장교였다. 이게 적폐의 뿌리가 계속 왔다고 본다. 이들은 도덕성도 없고 후안무치하고. KBS는 ‘김구 선생을 독립운동에서도 하등의 공로가 없다’. 김부석 아버지가 친일파. 사실 저희가 다 공개할 수 없지만. 그래서 친일세력은 반공을 주장한다. 분단을 악용하고. 한국 사회를 색깔로 마비시키는 주범. 자기 방을 지킬 개들을 해 놓은 거다”라고 분기 탱천한 마음을 거침 없이 쏟아냈다.

박한용 실장은 이어 “검찰에는 검경. 경찰에는 경경이 있잖은가? 그래서 적폐혁신은 이거다. 이 57년 동안 한 통속이 됐던 사람들이 고리를 놓았지만 적폐 청산한다고 할 때 57년 동안 밥 준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민주세력)를 물어뜯으려고. 이런 역사들이 역사 적폐라고 추가해서 봐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적폐 청산의 시작은은 친일 세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데 공감했다.

한편, 이날 이재명 시장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운동’에 공감하고, 박한용 실장이 권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금 후원에 범국민적 동참을 호소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기금은 ‘52억 안팎의 자금이 소요되는 사업’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미 30억원의 재원을 마련했으나 나머지 20억원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오는 11월말로 건립부지 잔금을 치러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아울러 이재명 시장의 다음 강연 행선지는 경기도 가평이다. 더불어민주당 가평지역위원회가 주관하는 이재명 시장 초청 강연은 11월 1일 수요일 19시 가평군청 대회의실에서 있을 예정으로 이날 이재명 시장은 ‘시대정신과 시민주권’이란 주제로 ‘성남시 사례를 통해 보는 시민주권시대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이라는 내용으로 경기도 동부지역 주민들과 만날 예정이다. 이날 강연회에 참가 자격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제한이 없다.

[한인협 = 박귀성 기자] [email protected]

<2017-10-28> 한국인터넷언론조합

☞기사원문: 이재명 시장 “적폐 청산? 정신 바짝 차려야!”

월, 2017/10/30-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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