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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되어 여생 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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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되어 여생 누리다

익명 (미확인) | 수, 2018/02/07- 13:14

3·1운동 가담자 지원하며 독립운동 앞장선 오현주
독립 전망 불투명해지자 친일 전향 해방 후 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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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살 오현주, 1938년. 임경석 제공

오현주(吳玄洲)는 신여성이었다. 서구식 근대 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 그가 태어난 1892년 무렵은 여자가 교육받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오현주가 교육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오인묵이 기독교를 믿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호서·호남 지방의 기독교 선교 기지라는 평판이 있는 전북 군산 구암교회의 첫 조선인 장로였다.

오현주는 13살 때 처음 구암교회의 미국인 목사 부위렴(윌리엄 F. 불l)의 부인에게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교회에 열성으로 다니는 조선인 신도들의 여느 딸들과 함께였다. 친언니 오현관(吳玄觀)도 같이 있었다. 소녀들은 주로 성경과 산수를 배웠다. 기독교 소양과 함께 가감승제의 기본 셈법을 익힌 것이다.

3·1운동이 뒤흔들어놓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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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교회 임원들과 찍은 사진, 1942년. 앞줄 왼쪽 다섯 번째가 오현주다. 임경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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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주의 오빠, 오긍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임경석 제공

오현주 자매가 신교육을 한 계기 가운데는 오빠 덕도 있었을 것이다. 오빠 오긍선(吳兢善)은 오현주보다 14살이나 위였다. 미국인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서울 배재학당을 마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유학 중에 켄터키주 루이빌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 사람이 의학박사 학위를 받기로는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오긍선은 1908년 귀국해 의료선교 활동을 했다. 그는 나중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감·교장직을 21년간이나 했다.

소녀 오현주의 학업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1906년 집안에 초빙된 한문 교사에게서 약 1년간 한문을 배웠다. 근대적 교육기관에 정식으로 발을 디딘 것은 17살 되던 1908년이었다. 서울 연지동에 있는 정신여학교 제2학년에 들어갔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이 학교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기반으로 중등 교육과정 수준의 학교였다. 오현주는 교육과정을 마치고 1910년 6월 졸업했다. 그때 학교 문을 나선 제4회 졸업생은 22명인데 그중에는 오현주 자매를 포함해 김마리아, 유각경, 유영준, 우봉운 등 뒷날 여성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즐비했다.①

교육 기간이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약 6년이었다. 덕분에 오현주는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교육자가 될 수 있었다. 졸업한 그해 가을부터 군산 멜본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4년, 경남 진주 광림여학교에서 1년6개월, 서울 경신소학교에서 1년간 교사로 있었다.②

오현주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각지에서 교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교회 출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삶과 기독교는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었다. 결혼도 교회의 인연에 따랐다. YMCA 지도자이자 신간회 회장을 한 이상재가 중매를 섰다.

상대방은 2살 아래의 강낙원(姜樂遠)이었다. 두 사람은 1915년 11월 결혼식을 올렸다. 오현주가 24살 되던 해였다. 남편은 체육인이었다. 유도와 검도가 전공 분야였다. 결혼 이듬해에 유도 수련을 위해 일본 유도의 총본산인 고도칸에 유학하러 도쿄에 건너갈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강낙원은 이후 서울에 무도관(武道館)이라는 유도 수련장을 세웠다. 1930년에는 동아일보사 창간 10주년 기념 각 방면 공로자 표창식에서 ‘체육계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도 선정됐다.③

3·1운동이 오현주의 삶의 궤적을 뒤흔들어놓았다. 1919년 3월1일 시작된 만세시위운동이 전 조선을 풍미했다. 3월과 4월 두 달 동안은 혁명적 시기였다. 수백만 군중이 일본 식민통치에 맞서 집단행동을 했다. 희생자가 나왔다. 일본 군경의 가혹한 진압으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속출했다. 무차별 검거로 유치장과 감옥이 차고 넘쳤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장 맡아

수감된 투사들을 도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경제 사정이 곤란한 수감자는 사식도 차입받지 못하는 것을 본 여성들이 나섰다. 오현주 자매도 그랬다. 은밀히 돈을 모으고 수감자를 돕는 활동에 나섰다. 정신여학교 졸업생들이 활동의 구심체가 됐다. 4회 졸업생 오현주·오현관·이정숙이 참가했고, 6회 졸업생 장선희·이순길, 3~4회 후배인 이성완·김정숙 등이 가세했다. 전·현직 교사, 간호부 등 전문직 직업의 신여성들이었다. 활동 범위도 확대됐다. 격문과 지하신문를 은밀히 배포하고, 자금을 모아서 외국으로 망명한 혁명가들에게 전달했다. 관련자와 활동 범위가 늘자 책임과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혈성단애국부인회’라는 여성 비밀결사가 탄생했다. 나이가 많은 오현관이 회장을 맡고 재무, 통신원, 지방 파견원 등의 직책을 두었다.

1919년 6월 조직이 확장됐다. 애국부인회라는 이름을 가진 두 비밀결사가 통합됐기 때문이다. 다른 단체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라는, 중국 상하이 망명자들과 긴밀히 연계한 것이었다. 새 통합 단체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회장은 오현주, 언니 오현관은 고문 직책을 맡았다. 단체의 덩치가 커졌고, 지부 조직까지 결성됐다.

그해 6월은 3·1운동의 한 전환점이었다. 6월28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 재편을 논의하던 파리강화회의가 타결됐다.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은 것이다. 조선의 국제적 지위 변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 누구 눈에도 조선의 독립 가능성이 옅어졌음이 명백해졌다. 그뿐인가. 4월 중순 이후 만세시위운동이 잦아들었다. 일본 군경의 가혹한 탄압에 눌린 탓이기도 했지만, 독립의 희망이 스러졌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혜성이 긴 꼬리를 남기듯이 간헐적 시위가 이어졌지만, 다시 혁명적 정세가 되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애국부인회 활동도 점차 위축됐다. 특히 오현주 회장의 활동력이 두드러지게 줄었다. 조직에 위기가 찾아왔다.

새 원동력이 나타났다. 오현주의 정신여학교 졸업 동기인 김마리아가 형무소에서 나온 것이다. 김마리아는 쉼없이 활동을 재개했다. 만세시위운동의 퇴조에 실망한 구성원들을 독려해 조직을 강화했다. 10월19일이었다. 16명의 여성이 은밀히 모여 애국부인회를 재결성했다.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하는 새 집행부가 들어섰다. 전임 회장인 오현주는 망명자들과 대외 연락을 맡는 교제부장 직위에 이름을 남겨두었다.

남편 강낙원이 돌아왔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국외로 나갔다가 9개월 만에 귀국한 것이다. 상하이, 만주, 연해주를 둘러보고서 되돌아왔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국외로 나갔다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비밀 활동 정보 넘기는 조건

강낙원은 비관적인 미래를 토로했다. 독립이 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즉각 비밀결사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언젠가 경찰에게 발각되면 중형을 면치 못할 터였다. 비밀결사의 회장직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형을 면제받을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남편은 한 남성을 집에 들여 며칠 묵게 했다. 유근수(劉根洙)였다. 그는 남편의 유도 사범이자 체육계 선배라고 했다. 또 진퇴양난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줄 권한을 가진 자라고 했다.

앞얘기는 사실이었다. 유근수는 1902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한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이었다.④ 1907년 군대가 해산된 뒤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했다. 대한학회 회원록에 그의 이름이 실렸고, 학교 설립 의연금 모금에도 동참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체육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설도 신문에 기고했다. 체육은 국가의 부강과 개인의 행복을 실현하는 근원이므로, 이를 급무로 생각하고 확장시키자는 주장이었다.⑤ 실제 1909~12년 서울 YMCA회관 내부에 유도·검도부를 운영했다. 유근수와 강낙원은 유도·검도계의 가까운 선후배였다. 강낙원은 유도와 검도를 그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유근수가 경영하다 포기한 YMCA 유도·검도부도 인계해 1921~23년 경영했다.

뒷얘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유근수는 “이런 어려운 시대에 하나도 상치 않고 다 살릴 도리가 있으니 아무 염려 마시고 안심”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럴 권한이 그에게 있을 리 없었다. 오현주의 배신을 유도하려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길로 나아갔다. 일본 경찰 조직에 들어간 것이다. 1919년 현재 그는 대구경찰서 소속 형사였다.

오현주는 결국 남편과 형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자기 부부와 언니 오현관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애국부인회의 비밀 문건을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최고위급 수준의 보장이 필요했다. 유근수는 수완이 좋았다. 어떻게 공작했는지, 아카이케 아쓰시(당시 41) 경무국장 면담을 성사시켰다.

유근수는 자동차를 대기시켰다. 자동차는 서울 남산 밑 왜성대 깊은 곳에 있는 경무국장 관사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경무국장은 일본 도쿄제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한 일본의 전형적인 고위 관료였다. 그는 세 사람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오현주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후부터 애국부인회의 정신을 버리고 방침을 달리하여 명칭도 개칭하여 사회에 다른 사업을 하겠는가?” 오현주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짧은 회견이었지만 동료들의 비밀 활동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자신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었다.⑥

일제 검거시 유일하게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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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기소 처분을 결정한 검찰관 이의식의 도장, 1949년. 임경석 제공

1919년 11월28일이었다. 애국부인회 구성원의 일제 검거가 개시됐다. 회장 김마리아를 필두로 전국에서 애국부인회 회원 70명이 체포됐다. 정신여학교 교사를 비롯해 관련 여성이 11명이었다. 16%를 차지했다. 피검된 사람의 53%는 세브란스병원이나 동대문부인병원 등의 관계자였다. 그들은 대개 간호부였다.⑦ 그뿐만이 아니었다. 애국부인회와 깊은 관련이 있던 비밀결사 청년외교단 구성원도 10여 명 체포됐다.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서는 유근수가 소속된 경상북도 경찰부였다.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대구경찰서로 압송됐다. 그들은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피의자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중병에 시달렸다. 특히 김마리아 회장이 위중했다. 그는 코와 귀의 화농 증상이 심했고, 고문으로 머리를 심하게 맞아 제정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불에 달군 인두로 여성 생식기에 ‘화침질’을 놓는 야만적인 고문을 겪어야 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결사부장이자 부산지부장인 백신영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심각한 위장 손상을 입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뼈에 가죽만 남은 것처럼 삐쩍 말랐다. 거의 빈사 상태였다. 서울지부장 이정숙은 발에 동상을 입었다. 진물이 흐르고 통증이 심해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애국부인회 사건의 피고인들은 조선총독부 재판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김마리아 회장과 황애시덕 총무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의경 서기, 이정숙 적십자부장, 장선희 재무부장, 김영순 서기는 징역 2년형, 유인경 대구지부장, 이혜경 원산지부장, 신의경 경기도지부장, 백신영 부산지부장은 각각 1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오현주 부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구경찰서로 연행됐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오현주는 단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보낸 뒤 석방됐다. 남편 강낙원도 조사를 받았지만, 일주일 뒤 풀려났다. 처벌받지 않고 풀려나기로는 언니 오현관도 마찬가지였다. 아카이케 경무국장의 약속은 차질 없이 이행됐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혹여 진술이 필요할지 몰랐다. 대구에 5개월간 체류해야만 했다. 하지만 숙식에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대구경찰서 형사 유근수의 가옥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숙박비는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

돈도 받았다. 3천원의 기밀비를 받았다는 소문이 쫘악 돌았다. 신문기자 월급이 40~50원, 일용노동자의 일당이 1원쯤 하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3억원에 해당했다. 오현주 부부는 1922년 가을 이사를 갔다. 연지동 43번지 작은 가옥을 처분하고, 원서동 196번지 크고 넓은 집을 사서 옮겼다. 옛집의 판매대금은 1200원이었고, 새집의 구매대금은 4200원이었다. 새집이 만족스러웠는지 부부는 수십 년간 그 집에서 눌러살았다.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불기소

오현주 부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휘문고보와 연희전문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있으면서 ‘중류’의 생활수준을 뒷받침했고, 아내는 아들딸 낳고서 집안을 잘 건사했다. 기독교 신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안동교회에 적을 두고서 성실한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그 교회 집사, 권사에 차례로 선임됐다. 중등부 여학생반을 지도하고, 교회 창립 50주년 기념위원회 재정부원으로서 소임을 다했다. 대리석 현판도 자비로 제작해 기증했다.⑧

해방 뒤에도 순탄했다. 남편은 한민당 창당 발기인에 참여한 것을 필두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정치 진영에 깊숙이 가담했다. 1948년에는 전국 규모의 극우 단일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그들에게도 딱 한 번 위기가 있었다.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을 때다. 1949년 3월16일 오현주 부부는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러나 길지 않았다. 오현주는 그해 5월4일 “남편의 요구에 따랐을 뿐이며, 고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1개월20일간의 짧은 구금과 조사를 거친 뒤 석방됐다. 남편은 약간 더 고생했을 뿐이다. 강낙원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기소됐지만, 머잖아 보석 조치로 석방됐다. 마침내 그해 8월11일 공소시효가 만료돼 모든 반민족행위자가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잠들 수 있게 됐다. 오현주는 1989년 병사했다. 향년 98살의 천수를 누렸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① 여교졸업, <황성신문> 1910년 6월19일
②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申亨植, ‘피의자신문조서(오현주)’, 15∼17쪽, 1949년 3월28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③ <동아일보> 1930년 4월2일치
④ ‘劉根洙’, <大韓帝國官員履歷書> 25책, 641쪽, 1972년
⑤ 劉根洙, ‘論體育說’,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5일치
⑥ 특별검찰관 李義植, ‘피의자신문조서(오현주)’, 18∼23쪽, 1949년 4월14일
⑦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3쪽, 2003년
⑧ <안동교회 90년사>, 안동교회 역사편찬위원회, 159쪽, 217쪽, 2001년

<2018-02-05> 한겨레21

☞기사원문: 친일파 되어 여생 누리다

※관련기사

☞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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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조사단 조사 결과… “충실한 이행 촉구” 결정문 홈페이지에 게재

▲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의 강제노역이 행해졌던 군함도. ⓒ 위키백과

유네스코가 일본이 ‘군함도’ 등 근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한 후속조치를 이행하고 있지 않은 데 대해 ‘강한 유감’을 표했다.

일본은 지난 2015년 세계유산 등재 당시 후속조치로 한국인 노동자의 강제노역 등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다.

유네스코는 오는 16일부터 온라인으로 열릴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를 앞두고 한국 시간으로 12일 오후 세계유산센터 홈페이지에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후속조치 이행 점검 결정문을 게재했다.

이 결정문은 지난 6월초 세계유산센터와 세계기념물유적협의회의 추천을 받아 호주, 벨기에, 독일 등의 전문가 3명으로 구성된 공동조사단을 도쿄로 파견, 일본 정부가 만든 도쿄산업유산정보센터를 직접 방문한 뒤 만든 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다.

“이례적 강한 문구… 일본의 약속 불이행 국제사회가 확인”

유네스코는 결정문에서 ▲ 그간 일본의 세계유산위원회 결정 내용과 일본의 약속 미이행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아주 강하게 유감을 표명하는 한편 ▲ 충실한 이행을 촉구했다.

결정문을 자세히 보면, 제5항에서 ‘당사국이 관련 결정을 아직 충실히 이행하지 않은데 대해 강하게 유감 표명(strongly regrets)’이라고 돼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기자들에게 “국제 기구의 결정문 안에 ‘strongly regrets’란 표현이 들어간 것은 아주 이례적인 것”이라며 “그동안 일본이 충실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국제 사회가 명시적으로 확인했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결정문은 또 이어진 제6항에서 ‘당사국이 관련 결정을 이행함에 있어 아래 사항들을 포함하는 공동조사단 보고서의 결론을 충분히 참고할 것을 요청(requests)한다’고 돼있어 일본측이 5개 사안을 충분히 고려해서 약속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5개 사안은 ▲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해석 전략 마련 ▲ 한국인 등의 강제동원을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 ▲ 희생자 기리기 위한 조치 ▲ 국제 모범사례 고려 ▲ 관련 당사자간 대화 지속 등이 포함돼 있다.

당국자는 이 가운데 “특히 두 번째 수많은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서 가혹한 조건하에 강제노역했다는 사실과 세 번째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치 표현은 2015년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될 당시 일본 대표가 발언한 내용”이라며 “이 내용이 결정문 각주로는 들어간 적이 있어도 본문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결정문의 내용 자체가 과거와는 달리 공동조사단의 객관적인 심사 결과를 인용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데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국제모범 사례에 대해서는 “독일의 탄광, 제철소 등 2차대전 때 강제노역 시설에는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설명하고 피해자를 기리는 기념비 등이 설치돼있다”며 “일본측에서도 유사한 조치를 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작년 2월 도쿄의 정보센터가 객관적으로 잘 건립될 수 있도록 개관 전 일본측에 공동조사단을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일본측의 거부로 이뤄지지 못하는 등 이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양국간 대화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세계유산의 본질적인 특수성이 완전히 훼손됐을 경우에 한해 지정이 취소될 수 있으나 유네스코는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며 “이번에 강한 결정문이 나온만큼 일본측이 결정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제노동 희생자 추모는커녕 사실 부정하는 자료만 전시

세계유산위원회는 지난 2015년 7월 군함도 등 일본의 23개 근대산업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는데, 당시 위원회는 각 시설에 전체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전략을 마련하라고 일본에 권고한 바 있다.

이에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일본 대표는 ▲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동원되고 가혹한 조건 하에서 강제노역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 ▲ 인포메이션 센터와 같이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치를 해석전략에 포함시키겠다 등 2가지 조치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은 당시 약속했던 조치를 전혀 이행하지 않았고, 급기야 일본의 근대산업 유산을 소개하기 위해 지난해 6월 도쿄에 문을 연 도쿄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강제노역을 부정하거나 희석시키는 증언 또는 자료들이 전시됐다.

이에 외교부 2차관이 즉각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해 강력한 유감을 표시하고, 장관 명의로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발송해서 약속이 이행될 수 있도록 조치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김경년(sadragon)

<2021-07-12>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유네스코, 일본에 “군함도 강제노동 부정 강한 유감”

※관련기사

☞뉴시스: 유네스코 “日, 군함도 강제노역 알려야…불이행 강한 유감”(종합)

☞한겨레: 유네스코, 일 군함도 등에 강제동원 기록 미이행 “강하게 유감”

화, 2021/07/13-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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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3편 : 추도가 _ 원형재(원심창 선생 아들)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목, 2021/07/15-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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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세계유산위, ‘일본에 유감 표명’ 결정문 채택해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탄광(군함도),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제련소 등으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공개했다. 하시마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고(故) 서정우씨 등의 영상은 최초로 공개됐다. 2021.7.16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송은경 기자 = “‘왜 여기에 와서 이런 일을 당하는가’ 혼잣말을 하면서 매일 죽을 생각만 했습니다. 바다를 내려다보면 너무 무서워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군함도(하시마·端島) 강제동원 피해자 서정우 씨)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 산업시설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최근 국제사회에서 제기된 가운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육성 증언을 다루는 자리가 마련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공동 주최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전시회를 11월 7일까지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연다고 16일 밝혔다.

전시 영상들은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담고 있다. 열네 살에 하시마 탄광에 동원됐다가 이후 나가사키에서 원폭 피해를 겪은 고(故) 서정우(1928∼2001) 씨의 영상이 국내에서 공개되는 건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사복형사에게 연행돼 다카시마 탄광으로 끌려갔던 손용암(78)씨, 후쿠오카 미이케 탄광·제련소로 강제동원된 류기동(79)·손성춘(76)·이영주(77)씨 영상은 올봄 촬영돼 이번에 최초로 공개된다.

징용 경험을 감추고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은 자신만의 언어로 과거를 이야기한다. 군수시설에서 탈출하려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잇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모습에선 그들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가 가늠될 정도다.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은 “보통 강제동원을 떠올리면 ‘배고프다’ ‘아프다’ ‘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처럼 단편적으로만 안다”며 “이번 전시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과정으로 가게 됐는지, 현장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느낌은 어땠는지, 언어 소통은 어떻게 했는지 등을 느낄 수 있게 증언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시민단체가 제공한 영상도 이번 전시에 포함됐다.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 진상을 조사하는 모임’이 제공한 중국인 포로, POW연구회가 제공한 연합군 포로의 증언 영상을 함께 전시해 강제노동이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오른쪽 두 번째)이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 관련 브리핑을 마친 뒤 연구소 관계자들과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탄광(군함도),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제련소 등으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공개했다. 2021.7.16 [email protected]

한편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공동조사단은 일본 도쿄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한 결과 센터가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지난 12일 공개했다. 지난해 6월 개관한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군함도 등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조사단은 일본이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을 일본의 관점뿐 아니라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 등 피해자의 시각까지 균형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번 조사를 토대로 일본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는 내용의 결정문을 이르면 이달 21일 열리는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공식 채택할 예정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강제노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우리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세계유산위원회가 공개한 권고를 지지하며 환영의 뜻을 표한다”면서 “세계유산위원회가 이 권고를 채택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2021-07-16> 연합뉴스

☞ 기사원문: 피해자 육성 담은 ‘일제 강제동원’ 전시회 서울서 개막

※관련기사

☞뉴스토마토: 민족문제연구소, 군함도 등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19인 증언 공개

☞이투데이: ‘군함도 강제노동의 역사’,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19인의 증언

금, 2021/07/16-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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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 하시마(군함도) 전경. 김영민 기자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가 일본이 ‘군함도’(하시마·端島) 등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담긴 결정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일본 정부를 향해 ‘강한 유감(strongly regret)’ 등의 강도높은 표현이 담긴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고 22일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세계유산위원회는 결의문에서 군함도에 관해 설명하는 도쿄의 산업유산정보센터를 개선하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인 등이 강제노역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조치 역시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는 2015년 군함도 등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이 다수 포함된 일련의 근대 산업시설을 세계 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한국 등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징용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다. 하지만 군함도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도쿄에 설치한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물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나 인권침해가 없었던 것과 같은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다.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운영하는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는 인권 침해의 역사를 부정하는 내용의 옛 군함도 주민 동영상 등을 홈페이지에 게시하기도 하는 등 역사 왜곡에 앞장서고 있다. 한국 정부와 뜻있는 한일 시민단체는 일본 정부에 징용 등 강제 노역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도록 전시관을 개선할 것을 거듭 촉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약속한 조치를 성실하게 이행해 왔다”며 주장해왔다.

앞서 일본은 유네스코의 지적에 반발해왔다. 지난 12일 결정문이 최초 공개되자 일본 정부 대변인인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이튿날인 13일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의·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국 정부가 약속한 조치를 포함해 성실히 이행해왔다”고 주장했다. 교도통신도 지난 17일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반론을 펼치기로 방침을 세우고, 일본은 (산업유산정보센터 관련 설명을) 성실하게 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하지만 결정문은 토의 없이 채택됐으며, 일본 측도 이에 대해 추가 발언을 신청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2021-07-22> 경향신문

☞기사원문: 유네스코, ‘일본 군함도 왜곡’ 결정문 만장일치 채택

※관련기사

☞연합뉴스: 유네스코, ‘日군함도 역사왜곡’ 비판결의…”징용설명 부족”

☞한국일보: 유네스코, 군함도 역사왜곡 비판결의 채택… “강한 유감”

☞아시아경제: 유네스코, 日군함도 역사왜곡 비판 결의문 채택

☞뉴시스: 유네스코, 日 군함도 역사왜곡 비판 결정문 채택…”강한 유감”

☞MBC: 유네스코, ‘日 군함도 역사왜곡 비판’ 결의 채택

☞SBS: 유네스코, 군함도 역사 왜곡 비판결의 채택…”개선하라” 요구

금, 2021/07/23-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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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지진 희생 조선인 추도 비문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당시 일본인의 폭동으로 희생된 조선인 6천여 명을 추도하는 도쿄도 위령당 내의 비문.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정성조 기자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등 시민사회 원로들은 26일 성명을 내고 1923년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상규명과 추모사업 진행을 촉구했다.

이들은 “2023년은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가 되는 해로 이제라도 일본 정부는 진상을 공개하고 공식 사과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와 국회도 나서 자료 보존과 공개를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9월 1일을 국가 추모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명에는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박만규 흥사단 이사장, 송인동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이만열 시민모임 독립 이사장, 이종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장, 지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 원로 17명이 참여했다.

<2021-07-26> 연합뉴스

☞기사원문: 시민사회 원로들 “日간토학살 진상규명·추모사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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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최소 6600여명의 학살… 일본 의원도 나섰는데 우리 의원은 왜 말이 없나

☞오마이뉴스: “일본을 벌하라, 나는 죄가 없다” 예순 두군데나 찔린 조선인이 남긴 유언

화, 2021/07/27-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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