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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되어 여생 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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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되어 여생 누리다

익명 (미확인) | 수, 2018/02/07- 13:14

3·1운동 가담자 지원하며 독립운동 앞장선 오현주
독립 전망 불투명해지자 친일 전향 해방 후 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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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살 오현주, 1938년. 임경석 제공

오현주(吳玄洲)는 신여성이었다. 서구식 근대 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 그가 태어난 1892년 무렵은 여자가 교육받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오현주가 교육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오인묵이 기독교를 믿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호서·호남 지방의 기독교 선교 기지라는 평판이 있는 전북 군산 구암교회의 첫 조선인 장로였다.

오현주는 13살 때 처음 구암교회의 미국인 목사 부위렴(윌리엄 F. 불l)의 부인에게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교회에 열성으로 다니는 조선인 신도들의 여느 딸들과 함께였다. 친언니 오현관(吳玄觀)도 같이 있었다. 소녀들은 주로 성경과 산수를 배웠다. 기독교 소양과 함께 가감승제의 기본 셈법을 익힌 것이다.

3·1운동이 뒤흔들어놓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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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교회 임원들과 찍은 사진, 1942년. 앞줄 왼쪽 다섯 번째가 오현주다. 임경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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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주의 오빠, 오긍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임경석 제공

오현주 자매가 신교육을 한 계기 가운데는 오빠 덕도 있었을 것이다. 오빠 오긍선(吳兢善)은 오현주보다 14살이나 위였다. 미국인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서울 배재학당을 마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유학 중에 켄터키주 루이빌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 사람이 의학박사 학위를 받기로는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오긍선은 1908년 귀국해 의료선교 활동을 했다. 그는 나중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감·교장직을 21년간이나 했다.

소녀 오현주의 학업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1906년 집안에 초빙된 한문 교사에게서 약 1년간 한문을 배웠다. 근대적 교육기관에 정식으로 발을 디딘 것은 17살 되던 1908년이었다. 서울 연지동에 있는 정신여학교 제2학년에 들어갔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이 학교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기반으로 중등 교육과정 수준의 학교였다. 오현주는 교육과정을 마치고 1910년 6월 졸업했다. 그때 학교 문을 나선 제4회 졸업생은 22명인데 그중에는 오현주 자매를 포함해 김마리아, 유각경, 유영준, 우봉운 등 뒷날 여성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즐비했다.①

교육 기간이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약 6년이었다. 덕분에 오현주는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교육자가 될 수 있었다. 졸업한 그해 가을부터 군산 멜본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4년, 경남 진주 광림여학교에서 1년6개월, 서울 경신소학교에서 1년간 교사로 있었다.②

오현주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각지에서 교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교회 출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삶과 기독교는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었다. 결혼도 교회의 인연에 따랐다. YMCA 지도자이자 신간회 회장을 한 이상재가 중매를 섰다.

상대방은 2살 아래의 강낙원(姜樂遠)이었다. 두 사람은 1915년 11월 결혼식을 올렸다. 오현주가 24살 되던 해였다. 남편은 체육인이었다. 유도와 검도가 전공 분야였다. 결혼 이듬해에 유도 수련을 위해 일본 유도의 총본산인 고도칸에 유학하러 도쿄에 건너갈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강낙원은 이후 서울에 무도관(武道館)이라는 유도 수련장을 세웠다. 1930년에는 동아일보사 창간 10주년 기념 각 방면 공로자 표창식에서 ‘체육계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도 선정됐다.③

3·1운동이 오현주의 삶의 궤적을 뒤흔들어놓았다. 1919년 3월1일 시작된 만세시위운동이 전 조선을 풍미했다. 3월과 4월 두 달 동안은 혁명적 시기였다. 수백만 군중이 일본 식민통치에 맞서 집단행동을 했다. 희생자가 나왔다. 일본 군경의 가혹한 진압으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속출했다. 무차별 검거로 유치장과 감옥이 차고 넘쳤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장 맡아

수감된 투사들을 도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경제 사정이 곤란한 수감자는 사식도 차입받지 못하는 것을 본 여성들이 나섰다. 오현주 자매도 그랬다. 은밀히 돈을 모으고 수감자를 돕는 활동에 나섰다. 정신여학교 졸업생들이 활동의 구심체가 됐다. 4회 졸업생 오현주·오현관·이정숙이 참가했고, 6회 졸업생 장선희·이순길, 3~4회 후배인 이성완·김정숙 등이 가세했다. 전·현직 교사, 간호부 등 전문직 직업의 신여성들이었다. 활동 범위도 확대됐다. 격문과 지하신문를 은밀히 배포하고, 자금을 모아서 외국으로 망명한 혁명가들에게 전달했다. 관련자와 활동 범위가 늘자 책임과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혈성단애국부인회’라는 여성 비밀결사가 탄생했다. 나이가 많은 오현관이 회장을 맡고 재무, 통신원, 지방 파견원 등의 직책을 두었다.

1919년 6월 조직이 확장됐다. 애국부인회라는 이름을 가진 두 비밀결사가 통합됐기 때문이다. 다른 단체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라는, 중국 상하이 망명자들과 긴밀히 연계한 것이었다. 새 통합 단체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회장은 오현주, 언니 오현관은 고문 직책을 맡았다. 단체의 덩치가 커졌고, 지부 조직까지 결성됐다.

그해 6월은 3·1운동의 한 전환점이었다. 6월28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 재편을 논의하던 파리강화회의가 타결됐다.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은 것이다. 조선의 국제적 지위 변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 누구 눈에도 조선의 독립 가능성이 옅어졌음이 명백해졌다. 그뿐인가. 4월 중순 이후 만세시위운동이 잦아들었다. 일본 군경의 가혹한 탄압에 눌린 탓이기도 했지만, 독립의 희망이 스러졌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혜성이 긴 꼬리를 남기듯이 간헐적 시위가 이어졌지만, 다시 혁명적 정세가 되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애국부인회 활동도 점차 위축됐다. 특히 오현주 회장의 활동력이 두드러지게 줄었다. 조직에 위기가 찾아왔다.

새 원동력이 나타났다. 오현주의 정신여학교 졸업 동기인 김마리아가 형무소에서 나온 것이다. 김마리아는 쉼없이 활동을 재개했다. 만세시위운동의 퇴조에 실망한 구성원들을 독려해 조직을 강화했다. 10월19일이었다. 16명의 여성이 은밀히 모여 애국부인회를 재결성했다.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하는 새 집행부가 들어섰다. 전임 회장인 오현주는 망명자들과 대외 연락을 맡는 교제부장 직위에 이름을 남겨두었다.

남편 강낙원이 돌아왔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국외로 나갔다가 9개월 만에 귀국한 것이다. 상하이, 만주, 연해주를 둘러보고서 되돌아왔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국외로 나갔다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비밀 활동 정보 넘기는 조건

강낙원은 비관적인 미래를 토로했다. 독립이 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즉각 비밀결사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언젠가 경찰에게 발각되면 중형을 면치 못할 터였다. 비밀결사의 회장직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형을 면제받을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남편은 한 남성을 집에 들여 며칠 묵게 했다. 유근수(劉根洙)였다. 그는 남편의 유도 사범이자 체육계 선배라고 했다. 또 진퇴양난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줄 권한을 가진 자라고 했다.

앞얘기는 사실이었다. 유근수는 1902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한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이었다.④ 1907년 군대가 해산된 뒤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했다. 대한학회 회원록에 그의 이름이 실렸고, 학교 설립 의연금 모금에도 동참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체육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설도 신문에 기고했다. 체육은 국가의 부강과 개인의 행복을 실현하는 근원이므로, 이를 급무로 생각하고 확장시키자는 주장이었다.⑤ 실제 1909~12년 서울 YMCA회관 내부에 유도·검도부를 운영했다. 유근수와 강낙원은 유도·검도계의 가까운 선후배였다. 강낙원은 유도와 검도를 그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유근수가 경영하다 포기한 YMCA 유도·검도부도 인계해 1921~23년 경영했다.

뒷얘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유근수는 “이런 어려운 시대에 하나도 상치 않고 다 살릴 도리가 있으니 아무 염려 마시고 안심”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럴 권한이 그에게 있을 리 없었다. 오현주의 배신을 유도하려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길로 나아갔다. 일본 경찰 조직에 들어간 것이다. 1919년 현재 그는 대구경찰서 소속 형사였다.

오현주는 결국 남편과 형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자기 부부와 언니 오현관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애국부인회의 비밀 문건을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최고위급 수준의 보장이 필요했다. 유근수는 수완이 좋았다. 어떻게 공작했는지, 아카이케 아쓰시(당시 41) 경무국장 면담을 성사시켰다.

유근수는 자동차를 대기시켰다. 자동차는 서울 남산 밑 왜성대 깊은 곳에 있는 경무국장 관사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경무국장은 일본 도쿄제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한 일본의 전형적인 고위 관료였다. 그는 세 사람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오현주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후부터 애국부인회의 정신을 버리고 방침을 달리하여 명칭도 개칭하여 사회에 다른 사업을 하겠는가?” 오현주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짧은 회견이었지만 동료들의 비밀 활동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자신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었다.⑥

일제 검거시 유일하게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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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기소 처분을 결정한 검찰관 이의식의 도장, 1949년. 임경석 제공

1919년 11월28일이었다. 애국부인회 구성원의 일제 검거가 개시됐다. 회장 김마리아를 필두로 전국에서 애국부인회 회원 70명이 체포됐다. 정신여학교 교사를 비롯해 관련 여성이 11명이었다. 16%를 차지했다. 피검된 사람의 53%는 세브란스병원이나 동대문부인병원 등의 관계자였다. 그들은 대개 간호부였다.⑦ 그뿐만이 아니었다. 애국부인회와 깊은 관련이 있던 비밀결사 청년외교단 구성원도 10여 명 체포됐다.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서는 유근수가 소속된 경상북도 경찰부였다.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대구경찰서로 압송됐다. 그들은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피의자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중병에 시달렸다. 특히 김마리아 회장이 위중했다. 그는 코와 귀의 화농 증상이 심했고, 고문으로 머리를 심하게 맞아 제정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불에 달군 인두로 여성 생식기에 ‘화침질’을 놓는 야만적인 고문을 겪어야 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결사부장이자 부산지부장인 백신영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심각한 위장 손상을 입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뼈에 가죽만 남은 것처럼 삐쩍 말랐다. 거의 빈사 상태였다. 서울지부장 이정숙은 발에 동상을 입었다. 진물이 흐르고 통증이 심해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애국부인회 사건의 피고인들은 조선총독부 재판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김마리아 회장과 황애시덕 총무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의경 서기, 이정숙 적십자부장, 장선희 재무부장, 김영순 서기는 징역 2년형, 유인경 대구지부장, 이혜경 원산지부장, 신의경 경기도지부장, 백신영 부산지부장은 각각 1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오현주 부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구경찰서로 연행됐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오현주는 단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보낸 뒤 석방됐다. 남편 강낙원도 조사를 받았지만, 일주일 뒤 풀려났다. 처벌받지 않고 풀려나기로는 언니 오현관도 마찬가지였다. 아카이케 경무국장의 약속은 차질 없이 이행됐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혹여 진술이 필요할지 몰랐다. 대구에 5개월간 체류해야만 했다. 하지만 숙식에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대구경찰서 형사 유근수의 가옥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숙박비는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

돈도 받았다. 3천원의 기밀비를 받았다는 소문이 쫘악 돌았다. 신문기자 월급이 40~50원, 일용노동자의 일당이 1원쯤 하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3억원에 해당했다. 오현주 부부는 1922년 가을 이사를 갔다. 연지동 43번지 작은 가옥을 처분하고, 원서동 196번지 크고 넓은 집을 사서 옮겼다. 옛집의 판매대금은 1200원이었고, 새집의 구매대금은 4200원이었다. 새집이 만족스러웠는지 부부는 수십 년간 그 집에서 눌러살았다.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불기소

오현주 부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휘문고보와 연희전문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있으면서 ‘중류’의 생활수준을 뒷받침했고, 아내는 아들딸 낳고서 집안을 잘 건사했다. 기독교 신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안동교회에 적을 두고서 성실한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그 교회 집사, 권사에 차례로 선임됐다. 중등부 여학생반을 지도하고, 교회 창립 50주년 기념위원회 재정부원으로서 소임을 다했다. 대리석 현판도 자비로 제작해 기증했다.⑧

해방 뒤에도 순탄했다. 남편은 한민당 창당 발기인에 참여한 것을 필두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정치 진영에 깊숙이 가담했다. 1948년에는 전국 규모의 극우 단일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그들에게도 딱 한 번 위기가 있었다.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을 때다. 1949년 3월16일 오현주 부부는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러나 길지 않았다. 오현주는 그해 5월4일 “남편의 요구에 따랐을 뿐이며, 고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1개월20일간의 짧은 구금과 조사를 거친 뒤 석방됐다. 남편은 약간 더 고생했을 뿐이다. 강낙원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기소됐지만, 머잖아 보석 조치로 석방됐다. 마침내 그해 8월11일 공소시효가 만료돼 모든 반민족행위자가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잠들 수 있게 됐다. 오현주는 1989년 병사했다. 향년 98살의 천수를 누렸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① 여교졸업, <황성신문> 1910년 6월19일
②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申亨植, ‘피의자신문조서(오현주)’, 15∼17쪽, 1949년 3월28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③ <동아일보> 1930년 4월2일치
④ ‘劉根洙’, <大韓帝國官員履歷書> 25책, 641쪽, 1972년
⑤ 劉根洙, ‘論體育說’,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5일치
⑥ 특별검찰관 李義植, ‘피의자신문조서(오현주)’, 18∼23쪽, 1949년 4월14일
⑦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3쪽, 2003년
⑧ <안동교회 90년사>, 안동교회 역사편찬위원회, 159쪽, 217쪽, 2001년

<2018-02-05> 한겨레21

☞기사원문: 친일파 되어 여생 누리다

※관련기사

☞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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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독립군·광복군 정신 계승, 국군 역사에 편입 검토” 학술대회 개최 이례적

육군사관학교가 “독립군·광복군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취지로 특별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관련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군의 기원을 독립군·광복군에서 찾는 내용의 세미나 등을 개최했으나, 육사가 직접 이 같은 토론의 장을 마련한 것은 처음이다.

육사가 그간 독립군·광복군 역사 계승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기까지 하다.

육사는 11일 서울 노원구 학교에서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주제로 특별 학술대회를 연다고 7일 밝혔다. 김완태 육사 교장(중장)은 학술대회를 알리는 포스터에 게재된 초대 말씀에서 “현재 군이 일제강점기에 독립군과 광복군이 수행한 독립전쟁을 국군의 역사와 연계 및 편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육사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독립군과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하려 한다”고 말했다. 육군의 뿌리를 독립군·광복군에서 찾는 움직임을 이번 학술대회 개최를 계기로 공론화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신흥무관학교와 무장독립투쟁’ ‘독립군·광복군과 육군의 기원’ ‘육사의 효시에 대한 연구’ 등 3가지 소주제에 대한 발표와 토론 형식으로 진행된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한시준 단국대 교수, 독립기념관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등 다수의 독립운동 관련 전문가들이 토론과 발제에 참여한다.

신민회 창립을 주도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축사를 할 예정이다.

육사의 이런 움직임은 과거와 뚜렷이 대조된다. 육사는 이명박 정권 시절이던 2011년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100주년 기념식을 육사에서 열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를 거절하는 등 독립군 역사 계승에 소극적이었다. 육사 홈페이지에 나오는 주요 연혁을 봐도 육사는 1946년 5월 개교한 국방경비대사관학교를 모체로 삼고 있다.

육사의 이런 태도 변화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방향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지난 8월 문재인 대통령은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 전통도 육사 교과 과정에 포함하고 광복군을 군 역사에 편입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김 교장은 지난 9월26일 단행된 군 인사를 통해 임명됐다.

정희완 기자 [email protected]

<2017-12-07> 경향신문

☞기사원문: 정권 바뀌니 달라진 육사…‘임시정부’서 뿌리 찾는다

※관련자료

육사학술회의 –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歷史”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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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17/12/0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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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IDS 만 2천명의 피해자중 한명입니다.

2016년 9월 IDS 김성훈대표가 긴급구속이 되고

그 이후 모집책이 김성훈대표가 100%변제를 해줄것이라며

지난 1년이상 민사 형사 소송을 지연시켜왔습니다.

 

저의 상황을 너무 잘 알고 그동안 너무 신뢰했었던 사람이기에

이 일에 대해 모든것이 사기라는 것을 알게되고

모집책 또한 같은 사기공범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이제 조금 정신을 차려

이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해결하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밤잠을 설쳐가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마음을 다스려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전액은 아니더라도 단돈 얼마라도 제발 변제를 해주었으면…

피해자들의 돈으로 법무법인 태평양을 선임하여 변호를 받고

구치소 동기인 한재혁과 공모하여 또다른 사기변제안을 만들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한 씨는 김성훈 ‘구치소 동기’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792

 

 

그 대위변제자는 피해자들의 피같은 돈으로

경찰 인사 청탁을 하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경찰 인사 청탁 정황 드러나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452

 

양파껍질같이 하나하나 들어날때마다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파산이라는 또 다른 커다란 시련이 피해자들의 앞을 가로막아

추운겨울 한파가 뼈속을 파고들고

흘린 눈물이 얼어붙는것같습니다.

 

 

제발… 제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올바른 역사행동을 하는 곳이고

이런 훌륭한 곳의 고문변호사를 맡고 계시는 분이니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일, 2017/12/10-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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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자료 보는 참석자들 (서울=연합뉴스) 박동주 기자 = 11일 오후 서울시청 신청사에서 열린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관리사업 성과보고회’에서 참석자들이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email protected]

서울시, 서울대인권센터와 승선명부·신문 기사 등 비교·검토
대구 거주 ‘하토가와 후쿠준’, 故 이복순 할머니로 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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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럭 섬의 한국인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 함대 기지가 있던 남태평양 ‘트럭섬'(Chuuk Islands)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의 명부와 사진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서울시는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과 함께 미군 전투일지, 호위함 ‘이키노’호의 승선명부, 사진 자료, 1946년 3월 뉴욕타임스 기사 등의 자료를 비교·검토한 끝에 이들 위안부 26명의 존재를 밝혀냈다고 11일 밝혔다.

시는 “그동안 증언으로만 있었던 트럭섬의 조선인 위안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한 것”이라고 이번 연구의 의의를 설명했다.

트럭섬, 공식 명칭 ‘축(Chuuk) 제도’는 미크로네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4개 주(州) 가운데 하나인 섬으로 태평양 남서쪽에 있다. 일본식 발음인 ‘토라크’를 접한 한국인들은 이곳을 ‘트럭섬’이라고 불러 왔다고 한다.

이번 연구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자료를 발굴해 조사·분석해 이뤄졌다.

미군 전투일지에 따르면 당시 트럭섬에서 귀환한 1만4천298명 가운데 조선인은 3천483명이었다. 이 중 군인이 190명, 해군 노무자가 3천49명, 민간인이 244명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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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럭섬 점령군 전투일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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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럭섬 점령군 전투일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조선인들은 트럭섬 환초 ‘드블론’이라는 곳에서 1946년 1월 17일 호위함 ‘이키노’호를 타고 일본을 거쳐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이 배에는 조선인 위안부 26명과 아이 3명이 타고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1946년 3월 2일 자 ‘트럭의 일본인들은 포로가 아니다’라는 제하의 뉴욕타임스 기사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기사는 “트럭섬 사령관인 해병 준장 로버트 블레이크에 의해 조선인과 27명의 조선인 위안부(Comfort Girls)들이 보내졌다”며 “블레이크 장군에 따르면 이 여성들은 남아서 미국인을 위해 일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다른 조선인들이 일본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바다에 빠뜨릴 것이라고 두려워했는데, 하지만 블레이크 장군은 그러한 일을 듣지 못했다”고 묘사했다.

연구팀은 이 기사가 위안부를 27명이라고 적은 것은 아이 3명 가운데 1명을 위안부로 분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키노호 승선명부를 보면 승객 368명 가운데 조선인 249명, 여성과 아이 29명이 확인된다. 여성 26명과 아이 3명의 이름·직업·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여성은 ‘노동자’, 아이는 ‘무직’으로 돼 있다.

시는 “다른 문서와 비교를 통해 이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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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 피해자 이복순 할머니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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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이름이 적힌 이키노호 승선 명부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 [그래픽] ‘트럭섬’으로 끌려간 위안부 이복순 할머니 이동 경로

이 위안부 피해자 26명은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으로 적혀 있어서 신원을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연구팀은 이 가운데 ‘하토가와 후쿠준’이라는 인물이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돼 있는 고(故) 이복순 할머니라는 점을 판명해냈다.

이복순 할머니는 생전 구술자료를 남기지 않고, 1993년 12월 정부에 피해를 신고했을 때에도 간략한 피해 내용만 남겨 삶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연구팀이 생전 이복순 할머니와 가깝게 지낸 대구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이인순 관장에게 트럭섬 위안부 사진을 보여주자, 할머니를 단번에 알아봤다고 한다. 며칠 뒤 할머니의 아들도 이 사진이 자신의 어머니가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한발 더 나아가 서울, 경북 안동, 대구의 공무원들이 자료를 뒤진 결과 하토가와 후쿠준이 할머니의 창씨명이 맞고, 주소지도 예전에 그가 살던 곳과 일치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시는 “할머니의 남편 호적이 있는 경북 안동시 길안면사무소 계장은 한자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온종일 제적등본을 뒤져 해당 자료를 찾아줬다”고 관계자의 노고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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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순 할머니 이동 경로 [서울시 제공=연합뉴스]

이 같은 자료를 종합해보면 이복순 할머니는 1943년 트럭섬에 끌려가 위안부가 됐다. 일본 패전 후 그를 포함한 위안부 피해자 26명은 1946년 1월 17일 호위함 이키노호를 타고 일본 가나가와 현 요코스카시 우라가 항으로 갔다.

이 할머니는 이후 도쿄로 갔다가 규슈 후쿠오카 현 하카타 항에서 부산행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드러난 일본군 위안부 26명 가운데 이복순 할머니를 뺀 나머지 25명의 구체적인 신원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시 관계자는 “나머지 할머니들의 신원도 추후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는 이 같은 연구 결과를 이날 오후 1시 30분 서울시청 신청사 3층 소회의실에서 열리는 ‘서울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관리사업 성과보고회’에서 발표한다.

또 지난해부터 2년간 발굴·축적한 일본군 위안부 사료를 바탕으로 내년 1월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1·2권을 출간한다. 내년 2월에는 ‘일본군 위안부 자료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한국·중국·일본의 전문가와 단체를 초청해 성과를 공유할 계획이다.

[email protected]

<2017-12-11> 연합뉴스

☞기사원문: 남태평양 ‘트럭섬’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 첫 확인

※관련기사

☞뉴스1: 일본군 위안부 남태평양 ‘트럭섬’까지 끌려갔다…서울시 첫 확인(종합)

☞민중의소리: 남태평양 트럭섬으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6명 첫 확인

☞한국NGO신문: 남태평양 트럭섬 조선인 ‘위안부’ 26명 명부, 사진 … 서울시 첫 확인

☞KBS: 남태평양 ‘트럭섬’ 조선인 위안부 첫 확인

※뉴스영상

☞MBC: 남태평양 ‘트럭섬’ 조선인 위안부 26명 첫 확인


화, 2017/12/1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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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7/12/12-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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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유산에 어두운 역사도 담겨야…강제동원 상처 아물지 않았다”
日강제동원네트워크, 민족문제연구소와 ‘강제노동’ 가이드북 출간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게 하시마는 쇠창살 없는 감옥이자 공포의 노동 현장이었다.”

일본 정부가 재작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킨 나가사키(長崎)현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등 메이지 산업시설의 강제동원 역사 은폐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일본 시민단체가 진상 알리기에 발벗고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 등재시 약속한 강제동원 실상을 알리는 정보센터를 하시마에서 1천㎞를 훌쩍 뛰어넘는 도쿄에 설치하기로 하는 등 각종 꼼수를 동원해 은폐에 급급한 상태다.

이런 일본 정부에 맞서는 일본 시민단체는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다.

이 단체는 최근 우리나라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동원’이라는 책자를 내고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2차대전 당시 일본의 만행을 속속들이 고발했다.

한국과 일본의 양심있는 사람들이 함께 참가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책을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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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시민단체가 공동발간한 강제동원실상 소개 책자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한국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출간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 책자. 양측은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으로서 이 책자를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로 각각 만들었다. 2017.12.12 [email protected]

우선 하시마에 대해 가이드북은 “군함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도로 불린다”며 “하시마 전체가 탄광으로, 바다 곳곳으로 갱도가 펼쳐져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1939년부터 하시마와 바로 옆 섬에 있는 다카시마탄광에는 4천명 정도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게 하시마는 쇠창살 없는 감옥이자 공포의 노동 현장이었다”며 “탈출은 어려웠고 끌려간 이들에게 그곳은 지옥섬이었다”고 가혹했던 실태를 전했다.

네트워크의 조사에 따르면 군함도에는 1939년부터 1945년에 걸쳐 1천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장(火葬) 관련 문서로 확인된 사망자는 50명 가량이다. 사망자 가운데 절반 이상은 사고로 변을 당했다. 탄광 매몰에 의한 질식사, 압사, 외상에 따른 사망, 여기에 탈출 과정에서 숨진 것으로 보이는 익사도 있었다.

책자에는 “너무 힘들어 섬을 나가려고 신체 절단까지 생각했다”는 생존자의 증언도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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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강제동원 실상 담긴 책자
(도쿄=연합뉴스) 최이락 특파원 =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한국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출간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 책자에서 군함도의 실상을 설명한 부분. 양측은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으로서 이 책자를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로 각각 만들었다. 2017.12.12 [email protected]

실제 1943년 전북 김제군에서 군함도로 끌려온 윤춘기 할아버지는 “임금의 3분의 1은 강제 저금되었고, 3분의 1은 고향에 송금한다고 했지만, 귀국해 보니 송금이 전혀 안됐다”고 일본측을 고발했다.

그는 “식사는 외국 쌀로 지은 밥과 국뿐이었다”며 “밥에 주먹 정도 크기의 감자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밥은 겨우 세 숟가락 분량밖에 되지 않았다”고 당시 열악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최장섭 할아버지의 경우 14세이던 1943년 전북 익산에서 군함도로 강제동원됐다.

책자에는 “도주해서 잡히면 고무 튜브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맞고 고문을 당했다.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1945년) 원폭 투하 후 8월 18일쯤에 청소를 하러 나가사키 시내에 갔을 때 ‘인간 지옥이 여기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그의 증언도 소개됐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관계자는 12일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설명 속에, 불편하지만 외면해서는 안되는 강제노동 등 어두운 역사도 담겨야 한다”며 “이는 2차대전이 끝난 지 70여년이 지났어도 아직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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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함도 강제동원 실상 담긴 책자

[email protected]

<2017-12-12> 연합뉴스

☞기사원문: “군함도는 지옥”…日시민단체, 진상은폐 日정부 ‘꼼수’에 맞선다

※관련기사

☞한국일보: “군함도는 지옥이었다” 日시민단체, 일제 강제동원 만행 고발책자 출간

세계일보: ‘군함도 진상 규명’ 책 출간한 日 시민단체

☞인사이트: ‘군함도’ 사실 은폐하려는 아베에 맞서 싸우는 일본 시민들

※참고자료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전체 역사를 알게 하라‘는 이렇게! –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함께 만든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가이드북 공개

※ [다운로드] 2017 유네스코 가이드북 [한글] [영문] [일문]

화, 2017/12/1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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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일 연구소 역사전문 팟캐스트 ‘내일을여는역사_역적’시즌 2 방영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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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2월 18일 민족문제연구소 역사전문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_‘역적’시즌 2 >가 시작됩니다.
지난 5월~9월까지 방송한 ‘내일을여는역사’ 시즌1 ‘역적’은 애플에서 2017년 새로 출시된 팟캐스트 중 최다 다운로드 15위(한국지역 순위)에 오를 만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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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18일부터 시작되는 시즌 2는 연구소가 국민TV와 손잡고 오디오뿐 아니라 영상으로도 함께 방영합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 출연진 : 박한용, 노기환, 방학진, 김광진 등

목, 2017/12/1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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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내린 대한민국의 자존심

이게 다 친중사대주의에 빠진 민족문제연구소때문에 생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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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17/12/16-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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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대한민국은 미군정의 하사물이 아니다”

미국이 건국일은 1776년 7월 4일이다. 정조 임금이 즉위한 그해 4월 27일(음력 3월 10일)로부터 68일 뒤다. 그날 미국인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식민지배를 거부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선출되고 정부가 구성된 해는 1789년이다. 4월 30일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 정부가 모습을 갖췄다. 건국된 날, 그러니까 독립을 선언한 날로부터 23년 만이었다. 미국 헌법 제7조는 1789년이 아니라 1776년을 독립 원년, 미국 1년으로 계산한다. 미국 땅을 실효적으로 지배할 정부가 갖춰지지 않았어도 독립을 선언한 해에 미국이 건국됐다고 보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서문)에서도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3·1운동이 있은 1919년을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미국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제가 되는 것은, 보수세력이 1919년이 아닌 1948년을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헌법 전문을 무시하고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보고 있다.

보수세력이 그렇게 하는 데는 숨은 동기가 있다. 지난 7일 서울특별시와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이 태화복지재단 강당에서 주최한 ‘민주공화정 100년 심포지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보수세력이 1919년을 외면하고 기피하는 동기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태화복지재단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이 있었던 곳이다. 위 심포지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3·1운동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됐는지 규명하고자 열린 학술대회다.

왜 보수세력은 ‘1948년 8월 15일 건국절’을 미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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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지엄 패널들 ⓒ 인디엔피 제공

심포지엄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것은 헌법 제1조 제1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부분이다. 제1조 제1항은 1948년에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의 머리에서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었다. 3·1운동으로 표출된 민족적 의지를 집대성한 임시정부 헌법을 계승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이란 명의의 임시헌법 제1조 제1항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선언했다.

이를 두고, 기조발언을 맡은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헌법 문서에서 ‘민주공화국’을 명기한 것은 임시헌장이 세계 최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면서 “서구에서도 우리보다 늦은 1920년에야 비로소 체코와 오스트리아가 민주공화국을 헌법에 명기했다”라고 설명했다.

임시헌장 속의 ‘민주공화제’는 단순히 국민이 주인 되는 체체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민주’뿐 아니라 공화(共和)에도 방점이 찍혀 있었다. 공화는 공존과 상생을 전제로 한다. 그 속에는 임시헌장을 기초한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담겨 있었다.

강정인 교수는 “조소앙은 삼균주의의 핵심이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한 생활’이라고 선언했다”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는 ‘정치 균등화, 경제 균등화, 교육 균등화’로 … 주장했다”라고 말한 뒤 “삼균주의가 공화주의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공화’는 한마디로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갑질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런 이념이 조소앙을 비롯해 1919년에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의식을 지배했으며 그 의식이 1948년 대한민국 헌법에 투영된 것이다. 삼균주의가 담긴 공화 이념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라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으로도 표현됐다.

‘민주공화정’의 역사, 유구하다

3·1운동 참가자들이 “대한독립 만세”나 “일본 물러가라”나 외쳤지, 사회적 균등까지 요구했다고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다. 2016~2017년 촛불집회에서도 참가자 대부분은 ‘박근혜 하야’나 ‘박근혜 탄핵’ 같은 단순한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그게 촛불집회의 이념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치의 근본적인 부조리를 배척하고 새로운 나라를 열자는 게 촛불집회를 지배한 이념이었다.

3·1운동 때도 마찬가지다. 외형상의 구호는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식민통치와 불공평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또 백성이 주인되고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란 규정이 임시헌장 제1조 제1항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민주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투쟁이 1919년부터 본격화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헌법이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출발점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1919년 당시, 우리 민족은 일본 왕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로부터 9년 전까지는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민주공화정과 상반된 환경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우리 민족이 민주공화정을 의식적으로 지향했다는 게 얼른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심포지엄 맨 마지막에 발언한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서해성 총감독은 “우리 민주공화정의 역사는 대체 언제 시작된 것일까?”라고 질문한 뒤 “여기서 또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건, 민주공화정이란 게 3·1운동이 일어나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일 수 없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민주공화정을 향한 투쟁이 예전부터 있었기에, 3·1운동 때 그것이 민족적 이념으로 표출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기조발언에 이어 첫 번째 발제를 맡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한국 민주공화제의 기원과 사력(史歷)’이란 발표에서 이런 말을 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역사학 교수 프리만은 ‘로마는 그 이전 역사의 모든 흐름이 유입되어 그곳에서 대문명을 이루었고, 그 이후 역사의 모든 흐름이 그곳을 발원하여 다시 흘러가는 거대한 호수다’라고 의미 있는 발언을 하였다. 이 말을 우리나라의 3·1혁명과 민주공화주의 발전 과정에 대입하면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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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웅 전 관장 ⓒ 인디엔피 제공

민주공화정에 대한 꿈이 3·1운동 때 갑자기 표현된 게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표현됐다는 것이다. 김삼웅 전 관장은 민주공화정에 대한 대중의 자각이 1894년 동학혁명을 계기로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동학혁명이 민주공화정이란 정치체제를 지향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 중심의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동학 정신이 민주공화정의 취지와 연결된다는 의미다.

김 전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래에서 ‘시천주’는 ‘내 안에 한울님을 모신다’는 의미이고, ‘인시천’은 인내천과 동의어다.

“조선 후기 일반 백성들에게 근대적 주권의식을 일깨운 것은 최재우가 창도한 동학이었다. 동학은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인시천(人是天)의 교리를 내세우며 사람 중심, 만인평등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는 동학혁명을 계기로 촉발된 사람 중심 세상에 대한 열망이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같은 혁신운동을 통해 민주공화정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하고, 이것이 3·1운동과 임시정부로 응집된 뒤 1948년 헌법을 향해 흘러갔다고 강조했다.

수만 명이 18일간 시위, 무려 1898년 이야기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최형익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동학혁명 직후의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가 민주공화정 운동에 기여한 역할을 보다 높게 평가했다.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가 추구한 게 의회 설립 운동이었다면서 “수만의 서울 시민들이 (1898년) 12월 6일부터 23일까지 18일 동안 철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사실의 역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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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형익 교수 ⓒ 인디엔피 제공

1898년에 한양 시내에서 수만 명이 18일간 시위했다면, 2016~2017년 촛불집회를 연상시키는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런 집회에서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면, 민주공화국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열망이 그 당시에도 상당히 성숙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토양이 있었기에 1919년 임시헌장에 민주공화제가 규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3·1운동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19년 이래로 민주공화국을 열렬히 지항하면서 독립운동을 했기에 1948년 헌법에 그 이념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3·1운동과 임시정부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무책임과 좌우의 분열로 제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배태한 1919년 당시의 우리 민족은 민주공화국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 열망까지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열망이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진 것이건만, 보수세력은 1919년과 1948년의 연관성을 어떻게든 부정하려 하는 것이다.

앞에서, 보수세력이 3·1운동과 대한민국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숨은 동기를 심포지엄 학술 토론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고 했다. 심포지엄에서는 동학혁명 및 만민공동회에서 표출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3·1운동으로 집약되고 이것이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이어졌다는 발표들이 있었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열망 밟은 보수세력

동학혁명과 만민공동회의 본질은 촛불혁명과 다르지 않다. 동학혁명·만민공동회는 낡은 세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운동들은 보수파의 탄압으로 좌절됐다. 동학운동은 일본군뿐 아니라 보수파에 의해서도 진압됐다. 보수파는 민병대를 만들어 동학 진압에 기여했다. 만민공동회 역시 보수파에 의해 진압됐다.

동학과 만민공동회를 진압한 보수파는 1910년 국권 침탈 때도 살아남았다. 일본이 조선 백성들을 손쉽게 지배할 목적으로 그들과 손잡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1919년 3·1운동 때도 끄떡하지 않았다. 대중이 식민지배에 항거할 때 그들은 시위군중을 무지몽매한 자들로 폄하했다. 신문을 통해 경고문을 발표한 이완용의 글에서도 그런 인식이 드러났다. 이완용을 비롯한 보수파의 태도는, 촛불혁명에 맞서 태극기집회를 벌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수파의 후예들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할 때도 살아남았다. 한국 사정을 모르는 미군정이 그들을 파트너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 후예들은 1960년 4·19 혁명 때도 살아남았다. 이듬해 발생한 박정희 쿠데타가 미국의 승인을 받으면서 진보적 사회개혁이 차단된 덕분이었다. 그 후예들은 1987년 6월항쟁 때도 살아남았다. 이때 상당한 타격을 입긴 했지만, 아직 숨을 유지하고 있다. 2016~2017년 촛불혁명으로 한 방 더 맞았지만, 아직은 숨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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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포지엄 청중들 ⓒ 인디엔피 제공

1919년 건국,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동학혁명 때부터 3·1운동 때까지 그리고 1948년 정부수립 때까지도 물론이고, 그 후로도 한국 보수파는 계속 명맥을 유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동학혁명 이래의 이념을 집약한 3·1운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대한민국 출발점을 3·1운동에 두는 헌법 전문이 불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의 관계를 부정하는 태도는 미군정을 대한민국의 은인으로 보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물론 미군정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미군정 때문에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된 것은 아니다. 민주공화국이 된 것은 위에서 소개한 역사 덕분이다.

심포지엄에서 서해성 총감독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건 적어도 대한민국이 미군정 체제의 하사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최형익 교수도 유사한 말을 했다. “민주공화정으로서의 대한민국이 1945년 미군정에 의해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민중적 각성과 내적 발전의 결과였음을 (…) 드러내고자 한다.”

미국 정부는 1789년에 세워졌는데도 미국인들과 미국 헌법은 미국이 1776년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됐다고 하는 것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따라서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김삼웅 전 관장이 발표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의 말에서 ‘살피게 한다’를 문맥에 맞춰 ‘알 수 있다’로, ‘관학자들’을 ‘관변 학자들’로 대체했다.

“이명박·박근혜 중심의 수구세력과 보수언론인, 관변 학자들이 1948년 8·15 정부수립일을 광복절 대신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반헌법적인가를 알 수 있다.”

<2017-12-1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보수세력이 ‘1919년 건국’을 부정하는 까닭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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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민주 이어 공화 정신 살려야”…3.1운동 100년 준비하며 다시 짚어보는 민주공화정

토, 2017/12/1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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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와 국민TV가 함께 만드는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2!

프롤로그

수, 2017/12/2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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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으로 보는 강제동원 이야기 포스터 ©근현대기념관

서울 강북구(구청장 박겸수)와 근현대사기념관은 22~23일 오후 2시 ‘영상으로 보는 강제동원 이야기’ 강좌를 개최한다.

이번 강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한다. 올해 극장가에서 주목 받은 영화를 보며 일제 강제동원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22일은 ‘근현대사에 매료된 한국영화, 화제작 ‘군함도’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23일에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 국제사회로 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들여다본다.

강의는 무료이며 근현대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진행된다. 참여 대상은 역사에 관심 있는 시민으로 매 강좌 25명 내외를 선착순으로 모집한다.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mhmh.or.kr) 또는 전화(02-903-7580)로 신청하면 된다.

15~16일에는 다큐멘터리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저항’과 ‘아버지와 나: 시베리아, 1945년’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다.

2016년 5월 개관한 근현대사기념관은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찾을 수 있도록 매주 월요일과 설․추석 연휴를 제외한 화~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선열들의 묘역을 따라 그 뜻을 새기며 걸을 수 있는 북한산둘레길 2구간 ‘순례길’ 아래에 위치한 근현대사기념관은 개관 1년간 약 2만 명이 방문했다. 인근 국립4·19민주묘지와 함께 근현대사 탐방 코스로 자리매김했다.

<2017-12-20> 뉴스1

☞기사원문: 영화 ‘군함도’ ‘아이캔스피크’ 보며 역사 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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